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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팀펑크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표지]**
    (오래된 황동 회중시계의 톱니바퀴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클로즈업. 그중 한 톱니바퀴 끝에 작고 붉은 핏방울 하나가 맺혀 있다. 배경은 뿌연 증기로 가득 찬 도시의 실루엣.)

    **[타이틀]**
    증기 도시의 밀실: 톱니바퀴의 그림자

    **[장면 1]**
    **[배경]** ‘강철 심장’이라 불리는 증기 도시, 아르카디아의 밤. 낡은 가스등이 띄엄띄엄 켜진 좁고 습한 골목길. 머리 위로는 거대한 증기 파이프가 미로처럼 얽혀 있고, 멀리 하늘에는 거대한 비공정의 불빛이 유유히 떠다닌다. 류진과 강인호 경위가 웅웅거리는 증기 기관 소리를 배경 삼아 급히 발걸음을 옮긴다.

    **[강인호 경위]** (땀을 닦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류진 씨, 제발 좀 빨리! 이런 식으로 느긋하게 걷다가 범인이 하늘로 날아가 버리겠어요!

    **[류진]** (낡은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삐딱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늘로 날아가려면 비공정을 타야 할 텐데, 그 비공정이 이리도 서두르는 당신의 마음을 알 리 있겠습니까. 사건은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범인도 마찬가지고요.

    **[강인호 경위]**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짚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번엔 정말 골치 아픈 사건입니다! 알폰스 경이 살해당했습니다!

    **[류진]**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는)
    알폰스 경? 그 강철 심장의 대가 말입니까? 흥미롭군요. 누가 감히 그분의 톱니바퀴를 멈추게 했을까.

    **[강인호 경위]** (류진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고 재촉하는)
    그것도… 밀실에서 말입니다! 자, 어서요!

    **[장면 2]**
    **[배경]** 알폰스 경의 저택 외관.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웅장하고 오래된 빅토리안 양식의 건물로, 곳곳에 황동 장식과 거대한 증기 파이프가 노출되어 있다. 대문 안쪽 마당에는 여러 대의 증기 자동차와 경찰 병력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저택 내부는 어둡고 묵직한 오크 나무와 낡은 태피스트리로 꾸며져 있다. 서재 앞 복도에는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고, 몇몇 경관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경관 1]** (작은 목소리로)
    세상에, 알폰스 경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경관 2]**
    그것도 밀실이라지? 문은 잠겨 있고, 창문은 쇠창살에…

    **[강인호 경위]** (경관들을 향해 손짓하며)
    모두 조용! 류진 씨가 오셨으니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류진]** (고개를 끄덕이며 폴리스 라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상황은 제가 파악하겠습니다.

    **[장면 3]**
    **[배경]** 알폰스 경의 서재. 공기가 무겁고 차갑다. 방 안은 온통 복잡한 기계 부품, 정교한 설계도면, 낡은 공구들로 어지럽다. 책상 위에는 수많은 톱니바퀴와 스프링이 흩어져 있고, 그 한가운데에 알폰스 경이 얼굴을 박고 엎드린 채 미동도 없다. 그의 등에는 작업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교한 세공용 칼이 깊숙이 박혀 있다. 방 한쪽에는 거대한 증기 오르간이 위압적으로 서 있고, 그 옆으로 난 벽난로는 차갑게 식어 있다. 창문은 두터운 쇠창살로 막혀 있고, 안쪽에서는 묵직한 잠금장치로 고정되어 있다. 육중한 오크 나무 문은 안에서 굵은 빗장이 걸려 있었으며, 문고리 바로 아래 바닥에는 열쇠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강인호 경위]** (조심스럽게 류진에게 다가가며)
    발견자는 저택의 가정부, 엘리자베스 부인입니다. 아침에 알폰스 경이 나오지 않자 걱정되어 찾아왔다가 문이 잠겨 있어 비상용 열쇠로 열려 했는데,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뒷마당에서 사다리를 가져와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다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비명을 질렀다고요.

    **[류진]** (시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하게)
    창문은?

    **[강인호 경위]**
    보시는 바와 같이, 밖에서 쇠창살로 막혀 있고 안쪽에서 잠금장치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성인 남자가 드나들 공간은 없습니다. 연통도 마찬가지고요. 완벽한 밀실입니다.

    **[류진]** (턱을 만지작거리며)
    흠… 완벽. 이 세상에 완벽이란 없습니다. 오직 착각만이 완벽할 뿐이지요.

    **[장면 4]**
    **[배경]** 서재. 류진은 마치 고고학자가 유적을 발굴하듯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방 안을 살핀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책상 위 복잡한 부품들, 벽에 걸린 낡은 태엽 시계들, 그리고 거대한 증기 오르간 위를 스쳐 지나간다. 그는 먼저 시체 주변을 맴돌며 시선의 끝으로 시체의 자세, 칼의 종류, 바닥에 떨어진 열쇠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어서 문으로 다가가 굵은 빗장을 천천히 살핀다. 그의 손가락이 빗장 옆, 문틈의 미세한 틈새를 스치듯 쓸어본다.

    **[류진]**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흐음.

    **[강인호 경위]**
    무언가 찾으셨습니까?

    **[류진]** (작게 고개를 젓는)
    아직은요. 이 방의 모든 톱니바퀴들이 저에게는 아직 제각각입니다. 이 방에는 온통 알폰스 경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군요. 벽에 걸린 시계들, 탁자 위 미완성 모형, 심지어… (증기 오르간으로 다가가 과열된 연통을 만져보는) 이 증기 오르간까지. 발견 당시 연통이 과열되어 있었다고 했죠?

    **[강인호 경위]**
    네. 오르간 자체는 고장 난 곳이 없었는데, 연통만 유독 뜨거웠습니다. 아마 알폰스 경이 죽기 직전까지 오르간을 만졌던 모양입니다.

    **[류진]** (연통에 손가락을 대고 옅은 미소를 짓는)
    흐음… 과연 그럴까요. (그는 다시 문으로 돌아가 무릎을 꿇고 문턱 아래쪽, 바닥의 작은 얼룩을 들여다본다. 마치 기름때처럼 보이는,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작은 흔적이었다.) 여기… 이 흔적은…

    **[장면 5]**
    **[배경]** 알폰스 경 저택의 응접실. 불꽃이 약하게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는 세 명의 용의자, 알폰스 경의 젊은 조수 세드릭, 먼 친척이자 가정부인 엘리자베스, 그리고 사업 경쟁자 오토가 초조하게 앉아 있다. 류진과 강인호 경위가 그들 각자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류진]** (세드릭을 똑바로 응시하며)
    세드릭 씨. 알폰스 경의 유일한 조수라고 들었습니다. 스승님과는 사이가 좋았습니까?

    **[세드릭]**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비비며)
    네, 물론입니다! 저는 알폰스 경을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가끔… 경께서 너무 비밀이 많으셔서… 신형 비공정 동력 장치 개발 건 때문에 의견 충돌이 있긴 했지만요…

    **[강인호 경위]**
    어젯밤엔 어디에 있었습니까?

    **[세드릭]**
    저는… 제 작업실에서 밤늦도록 도면을 수정했습니다. 혼자였습니다.

    **[류진]** (다음으로 엘리자베스에게 시선을 돌리는)
    엘리자베스 부인. 알폰스 경의 재산을 관리하고 계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엘리자베스]** (침착하지만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얼굴로)
    네. 경께서 저에게 그 일을 맡기셨습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하지만… 최근 경께서 모든 재산을 한 자선 단체에 기부할 생각을 하고 계셔서… 제가 말렸습니다만…

    **[류진]**
    어젯밤 알리바이는요?

    **[엘리자베스]**
    저는 제 방에 있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요.

    **[류진]** (마지막으로 오토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오토 씨. 당신의 회사와 알폰스 경의 회사는 수년째 경쟁 관계였습니다.

    **[오토]**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 노인은 언제나 저보다 한 발 앞서 나갔지. 불쾌했소. 하지만 살인이라니, 그건 너무 비약이 아니오? 난 어젯밤 사업 파트너와 만찬을 즐겼소. 내 알리바이는 확실합니다.

    **[장면 6]**
    **[배경]** 다시 서재. 용의자들의 증언을 들은 류진이 찾은 단서들을 조합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의 눈은 벽에 걸린 알폰스 경의 초상화, 정교하게 만들어진 톱니바퀴 모형, 그리고 탁자 위 펼쳐진 복잡한 설계도면 위를 맴돈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소리 없는 연출이 이어진다.

    **[류진]** (강인호 경위에게 나직이)
    강 경위님. 알폰스 경은 무엇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특히 작은 기계 장치들 말입니다.

    **[강인호 경위]** (기록을 뒤적이며)
    음… 경은 평소에도 소형 증기 동력 장치나 원격 조작이 가능한 자동 장치 개발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손가락만 한 로봇 팔 같은 것도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전부 미완성으로 남아있다고…

    **[류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미완성… 그러나 살인에 쓰일 만큼은 충분히 완성되었을지도 모르죠. (그는 문틈의 작은 흠집과 바닥의 흔적, 그리고 증기 오르간의 연통을 번갈아 바라본다.) 톱니바퀴, 증기, 그리고… 그 작은 조작. 이제야 이 톱니바퀴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 같군요.

    **[장면 7]**
    **[배경]** 저택의 넓은 응접실. 모든 용의자와 경찰들이 류진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류진은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사건의 진실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는 마치 마술사가 트릭을 설명하듯 서재의 구조와 발견된 단서들을 하나씩 짚어 나간다.

    **[류진]** (모두를 둘러보며)
    이 사건은 완벽한 밀실 살인으로 보였습니다. 문은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고, 열쇠는 시체 옆에 떨어져 있었죠. 창문은 쇠창살과 잠금장치로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밀실’이라는 착각을 위한 완벽한 장치였습니다.

    **[류진]**
    범인은 알폰스 경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이 방을 밀실로 위장해야 했죠. 어떻게 했을까요? 문틈의 미세한 흠집,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정체불명의 기름때 같은 흔적. 이것은 범인이 문이 닫힌 상태에서 어떤 도구를 사용했다는 증거입니다.

    **[류진]**
    그 도구는 바로… 알폰스 경이 생전에 개발하던 소형 증기 동력 조작 장치였습니다. (류진의 설명과 함께, 서재 문틈으로 가늘고 정교한 황동 로봇 팔이 미끄러져 들어가 빗장을 조작하는 모습이 재현된다. 동시에 열쇠를 집어 시체 옆에 떨어뜨리는 모습도 함께.) 범인은 이 작은 장치를 문틈으로 넣어 안쪽의 빗장을 조작하고, 열쇠를 시체 옆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엘리자베스]** (경악하며)
    말도 안 돼! 그런 게 가능하다고?

    **[류진]**
    알폰스 경이라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기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심지어 재료까지 확보할 수 있었던 자라면… 그분의 ‘미완성’을 ‘완성’시켜 살인에 사용할 수 있었겠죠.

    **[류진]**
    그리고 이 모든 작업에 필요한 동력은 어디서 얻었을까요? 바로 과열된 증기 오르간입니다. (다시 서재로 장면이 전환되며, 증기 오르간의 연통이 과열되며 소형 장치가 작동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범인은 알폰스 경의 서재에 연결된 증기 오르간의 압력을 이용해 장치를 작동시켰습니다. 그것이 연통이 과열된 이유입니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던 거죠.

    **[오토]** (침을 꿀꺽 삼키며)
    그럼… 누가 그런 짓을…

    **[장면 8]**
    **[배경]** 응접실. 류진의 시선은 망설임 없이 한 사람에게 향한다. 세드릭은 이미 식은땀을 흘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류진]**
    범인은 알폰스 경의 유일한 조수이자 그의 기술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입니다. 스승의 작업실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그분의 미완성 발명품들을 접할 수 있었고, 살해 도구 또한 스승의 작업실에서 구할 수 있었던 자. (류진의 손가락이 세드릭을 가리킨다.) 바로, 당신입니다, 세드릭 씨.

    **[세드릭]**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을 떨며)
    아, 아니야! 난… 난 결백해!

    **[류진]**
    당신은 알폰스 경의 신형 비공정 동력 장치 설계도를 탐냈습니다. 스승님이 당신에게 모든 걸 가르쳐주지 않고 비밀로 부치자, 당신은 탐욕에 눈이 멀어 그분을 살해하고 그분의 유산을 독차지하려 했죠. 그 미완성 동력 장치를 완성시켜 이름을 날리고 싶었을 겁니다. 밀실은 그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한 완벽한 위장이었고요.

    **[세드릭]** (점점 얼굴이 일그러지며, 결국 주저앉아 절규하는)
    젠장… 젠장! 나는… 나는 그저 스승님을 뛰어넘고 싶었을 뿐이야! 그 노인은 끝까지 나에게 핵심 기술을 알려주지 않았어!

    **[강인호 경위]** (결정적인 증거와 자백에 만족하며 세드릭에게 다가가 수갑을 채우는)
    세드릭, 당신을 살인 및 시체 유기 혐의로 체포한다!

    **[장면 9]**
    **[배경]** 아르카디아의 새벽. 밤새 뿜어져 나온 증기가 도시 위로 피어오르고, 멀리 동이 터오르는 하늘을 비공정 하나가 유유히 가로지른다. 류진과 강인호 경위가 저택을 나선다.

    **[강인호 경위]** (감탄을 금치 못하며)
    류진 씨,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밀실의 트릭을 이렇게나 완벽하게 깨부수다니!

    **[류진]** (다시 낡은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세상에 완벽한 범죄는 없습니다. 다만 완벽하게 속아 넘어가는 인간의 눈이 있을 뿐이죠. 모든 톱니바퀴는 저마다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고, 그 움직임이 어긋날 때 그림자가 생기는 법입니다.

    **[강인호 경위]**
    (류진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처럼)
    강철 심장의 도시, 아르카디아의 톱니바퀴 사냥꾼답군요.

    **[류진]** (고요한 새벽 공기 속으로 사라지며)
    …이 도시는 언제나 증기를 뿜어내듯 새로운 그림자를 만들어낼 테니… 저의 톱니바퀴는 계속 돌아갈 겁니다.

    **[끝]**

  • 다크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어둠은 익숙한 벗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은신처였다. 케일은 낡은 토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불꽃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불꽃은 겨우 그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릴 뿐, 앞길을 환히 밝히지는 못했다. 심장 소리마저 삼켜버릴 듯한 정적이 이 고대 유적의 깊은 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망자의 미궁’. 이 이름은 그저 전설 속 이야기나 주정뱅이들의 안주거리로 치부되었던 곳이었다. 적어도 케일이 그 입구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젠장, 여기서 대체 뭘 찾으라는 거야.”

    케일은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습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맥없이 흩어졌다. 손에 든 탐사일지에는 낡은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조악하기 짝이 없는 그림들은 복잡한 통로와 함정을 얼기설기 표현하고 있었다. 이 지도를 그렸을 고대의 탐험가는 아마도 이 미궁의 첫 번째 희생자였을 것이다. 아니면… 어쩌면 살아남아서 이 끔찍한 기록을 남겼을지도.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석실이 펼쳐져 있었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기둥들은 오랜 세월의 풍파 속에서 기형적으로 휘어져 있었다. 벽면에는 희미하게 지워진 벽화들이 보였다. 손에 든 토치를 벽에 가까이 가져가자, 끔찍한 형상들이 드러났다. 피와 어둠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그들을 굽어보는 거대한 눈동자.

    “재미있군.” 케일의 입술 끝이 비틀어졌다. “환영 인사치고는 좀 과하잖아.”

    그는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의 돌 부스러기가 미세한 소음을 만들었다. 이 석실은 마치 거대한 제단처럼 보였다. 중앙에는 칠흑 같은 암석으로 만들어진 제단이 놓여 있었는데, 표면에는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따라 훑자, 싸늘한 냉기가 손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이건… 고통의 기록인가.”

    케일은 오랫동안 고대 문자를 연구해왔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언어들은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스승이었다. 제단에 새겨진 문자는 그가 지금까지 본 어떤 것과도 달랐다. 생명의 기운을 흡수하는 듯한 어둡고 뒤틀린 형상들. 마치 글자 자체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그때였다.
    콰앙!
    갑작스러운 진동이 석실을 뒤흔들었다. 천장에서 먼지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케일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거대한 균열이 벽면을 따라 길게 뻗어나갔다.

    “젠장, 무너지는 건가?”

    진동은 이내 잦아들었지만, 케일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는 주변을 경계하며 토치를 높이 들었다. 균열이 생긴 벽면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단순한 균열이 아니었다. 안쪽으로 통하는 새로운 통로였다.

    케일은 망설였다. 이런 불확실한 통로는 언제나 죽음으로 이어지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그의 탐험가 본능이 멈출 수 없도록 만들었다. 알려지지 않은 것을 향한 갈망, 그리고 그 갈망 뒤에 숨겨진 또 다른 갈증. 그는 터져버린 벽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통로는 좁고 음산했다. 돌 벽은 이끼와 곰팡이로 뒤덮여 축축했다. 발밑에서는 기분 나쁜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마치 수백 마리의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듯한 소리였다. 케일은 이를 악물고 나아갔다. 그의 유일한 동반자는 심장 소리와 낡은 토치의 불꽃뿐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는 갑자기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그곳은 거대한 지하 동굴이었다. 하지만 동굴 전체가 기이한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천장과 벽면에는 수많은 결정들이 박혀 있었는데, 그것들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동시에 끔찍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썩은 고기와 피, 그리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역겨운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이건 또 무슨 광경이야.”

    케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동굴 중앙에는 거대한 바위들이 불규칙하게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바위들 사이사이에, 거대한 그림자들이 희미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림자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팔다리는 길고 기형적이었다. 피부는 회색빛으로 바싹 말라 있었고, 눈에서는 푸른빛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동굴의 일부인 양, 바위 틈새에서 잠들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케일의 발소리에, 몇몇 그림자들이 고개를 돌렸다. 텅 빈 눈동자가 케일을 향했다.

    “이런.”

    케일은 재빨리 단검을 뽑아 들었다. 고대 유적에서 만나는 생명체들은 언제나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림자들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움직임은 섬뜩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웠다. 관절이 뒤틀리고, 뼈마디가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푸른빛 속에서 선명하게 들려왔다.

    쉬익-!
    하나의 그림자가 케일에게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케일은 가까스로 몸을 피했다. 그림자의 손톱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찢어진 옷 사이로 차가운 냉기가 스며들었다. 이들은 단순한 시체가 아니었다. 무언가에 의해 조종당하는, 또는 무언가가 빙의된 존재들이었다.

    케일은 발로 바닥을 차고 그림자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단검이 그림자의 옆구리를 깊숙이 찔렀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림자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대신, 푸른빛의 에너지 파편들이 튀어 올랐다. 그리고 그림자는 잠시 움찔하더니, 다시 케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젠장, 죽지도 않는 건가!”

    그림자들은 숫자가 너무 많았다. 세 마리, 네 마리, 그리고 계속해서 바위 틈새에서 기어 나오고 있었다. 케일은 싸움을 포기하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미궁의 비밀을 파헤치러 왔지, 이름 없는 괴물들과 싸우다 죽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가장 넓어 보이는 통로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그림자들은 끈질기게 그를 쫓아왔다. 푸른 눈동자들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케일은 달리고 또 달렸다. 폐가 찢어질 듯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대로 잡히면, 분명 끔찍한 운명을 맞이할 터였다.

    오랜 도주 끝에, 케일은 또 다른 거대한 석실에 도착했다. 이곳은 앞선 석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푸른빛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완전한 어둠만이 존재했다. 케일은 토치를 높이 들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의 눈에, 석실 중앙의 거대한 구조물이 들어왔다. 그것은 제단도, 조각상도 아니었다. 거대한 검은 알이었다. 사람의 키를 몇 배는 넘는 크기였다. 알 표면에는 섬세하고도 기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문양들 사이로는 희미한 맥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케일은 조심스럽게 알에 다가갔다. 표면에 손을 대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오한이 느껴졌다. 알에서는 심장 박동 같은 소리가 아주 미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투두웅… 투두웅…

    “이건…”

    그는 알에 새겨진 문양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가 아는 모든 고대 언어가 혼합되어 있는 듯했다. 오랫동안 집중하던 케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양은 하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아주 먼 옛날, 이 땅에 존재했던 고대 문명은 불사의 존재를 갈망했다. 그들은 생명의 본질을 파괴하고 재구성하는 금단의 마법을 연구했고, 결국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를 창조하려 했다. 그 존재는 완벽한 불멸을 얻을 것이었으나, 동시에 모든 생명을 집어삼키는 공허가 될 것이었다.

    “맙소사…”

    고대 문명은 자신들의 오만함이 만들어낸 존재가 얼마나 끔찍한지 깨닫고는, 그것이 태어나기 전에 봉인하려 했다. 이 거대한 알이 바로 그 봉인된 ‘공허’의 심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만났던 그림자들은, 어쩌면 이 봉인을 지키는 수호자들이거나, 아니면 이 알의 존재가 만들어낸 뒤틀린 생명체들일지도 몰랐다.

    문양의 마지막 부분에는 경고가 쓰여 있었다.
    *이것이 깨어나면, 세상의 모든 빛은 삼켜지고, 모든 생명은 영원한 어둠 속으로 가라앉으리라.*

    바로 그때였다.
    투두웅!!!
    알의 맥동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석실 전체가 쿵, 쿵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의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 껍질을 깨고 나오려는 듯했다.

    “안 돼! 지금 깨어나면 안 돼!”

    케일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이 알이 깨어나면, 단순히 몇몇 생명체가 위험한 정도가 아니었다. 세상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봉인을 강화할 방법이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그의 시선이 알을 둘러싼 여덟 개의 석주에 닿았다. 석주들의 꼭대기에는 낡은 수정들이 박혀 있었다. 수정들은 맥동에 맞춰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알이 깨어나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 했다. 그는 가장 가까운 석주로 달려가 수정에 손을 댔다. 차가운 에너지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문양을 해석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기운이었다.

    케일은 자신의 모든 고대 지식을 동원하여 수정을 이해하려 했다. 이 수정들은 봉인의 핵심 장치였다. 이것들을 재활성화하면 알의 맥동을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여덟 개의 수정 모두를 동시에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럴 시간은 없었다. 알의 균열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어리석은 인간.”

    케일은 몸을 홱 돌렸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는 앞서 만났던 존재들과는 격이 달랐다. 키는 두 배 이상이었고, 몸에서는 푸른빛의 에너지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눈은 타오르는 푸른 불꽃 같았다.

    “너는 대체…!”

    “나는 ‘심연의 파수꾼’. 이 존재가 깨어나기를 수천 년간 기다려온 자다.” 그림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너는 감히 이 위대한 탄생을 막으려 하는가?”

    케일은 단검을 굳게 쥐었다. “세상이 파괴되는 걸 두고 볼 순 없지.”

    “하! 세상 따위. 이 존재가 진정한 세상을 창조할 것이다. 모든 생명이 영원히 안식할 새로운 세계를!” 파수꾼의 팔이 길게 늘어나며 케일을 향해 뻗어왔다. 손톱은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케일은 재빨리 피하며 석주 뒤로 몸을 숨겼다. 파수꾼은 너무나도 강력했다. 정면으로 맞설 생각은 없었다. 그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봉인을 재활성화할 시간을.

    “안 돼! 이 석주들은 봉인을 유지하는 핵심이다. 건드리지 마라!” 파수꾼이 격분하여 소리쳤다.

    케일은 파수꾼의 말을 듣자마자 아이디어를 얻었다. 봉인을 유지하는 핵심이라면, 역으로 봉인을 더욱 강화할 수도 있을 터였다. 그는 다시 첫 번째 석주로 달려갔다. 그는 자신의 손에 피를 내고, 그 피를 수정에 발랐다. 고대 봉인 마법 중에는 생명력을 제물로 바쳐 마법을 강화하는 것이 있었다.

    흐으읍!
    수정에서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터져 나왔다. 케일의 손끝에서부터 생명력이 빨려 나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알의 균열은 이미 그의 머리 위까지 뻗어 있었다.

    “이런 미친 짓을!” 파수꾼이 분노하며 달려들었다.

    케일은 겨우 몸을 돌려 피했다. 파수꾼의 공격은 석주에 정통으로 박혔다. 석주는 미세한 균열을 일으켰지만, 봉인의 힘 때문인지 부서지지는 않았다. 그 틈을 타 케일은 다음 석주로 달렸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케일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여섯 개의 석주에 자신의 피를 발랐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고, 시야가 흐려졌다. 알은 격렬하게 맥동하며 깨어나려 발버둥 쳤다.

    “두 개… 두 개만 더!”

    파수꾼은 미친 듯이 케일을 공격했다. 그의 몸 곳곳이 찢기고 베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오직 봉인에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마지막 석주에 이르렀다. 그의 손에는 피가 아닌, 거의 생명의 마지막 흔적만이 남아 있는 듯했다.

    “끝났다! 네놈은 이제 봉인될 것이다!”

    케일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피를 수정에 묻혔다.
    콰아아아앙!!!
    여덟 개의 석주에서 푸른빛의 광선이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광선들은 알을 향해 집중되었고, 거대한 에너지가 알을 감싸기 시작했다. 알의 균열은 더 이상 커지지 않았다. 오히려 천천히 다시 메워지는 듯했다. 맥동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안 돼! 안 돼애애애!” 파수꾼이 절규하며 알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봉인의 힘에 직접 부딪쳤다. 푸른빛의 에너지가 파수꾼의 몸을 찢어발겼다. 비명 소리가 석실에 울려 퍼졌지만, 곧 봉인의 빛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케일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아직 빛나고 있었다. 알은 완전히 봉인되었다. 표면의 균열은 사라졌고, 맥동도 멈췄다. 거대한 검은 알은 다시 잠잠한, 고대의 봉인체로 돌아왔다.

    “하아… 하아…”

    케일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세상을 구원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파멸을 한동안 막아낸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너무나도 지쳐 있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케일은 축축한 냉기에 정신을 차렸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생명력이 조금씩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석실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알은 그 자리에서 굳건히 침묵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찢어진 옷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알지 못할 이 비밀을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것도.

    케일은 토치를 다시 들었다. 불꽃은 여전히 나약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뒤돌아보지 않고 석실을 나섰다. 미궁의 깊은 곳은 여전히 어둠과 비밀로 가득했지만, 적어도 한동안은 더 이상 공허가 깨어날 일은 없을 것이다.

    미궁의 바깥세상은 아직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그리고 외롭게 통로를 따라 늘어졌다.
    망자의 미궁은 그렇게 다시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다.
    그리고 케일은, 또 다른 잊혀진 비밀을 찾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여정은, 결코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 이세계 전생 (Isekai)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챕터 1: 눈 뜨니, 검과 피의 전장이었다**

    어둠이었다.
    짙고, 끈적하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절대적인 어둠.
    그리고… 차가웠다. 온몸이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가 심장까지 파고들어 숨통을 조였다. 이대로 죽는 건가. 아니, 이미 죽은 건가? 어렴풋한 기억 속, 퇴근길 횡단보도에서 나를 향해 돌진하던 트럭의 헤드라이트가 마지막 이미지였다. 통증조차 느낄 새 없이 모든 것이 끝나버린, 허무하고도 비참한 죽음.

    ‘하아… 기껏 살아온 인생이 고작 이렇단 말이야?’

    억울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서른두 해를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보람 한번 느껴보지 못하고 이렇게 끝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 애인도 없이 홀로 떠나는 길. 외로움이 뼛속까지 시렸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빛이라기보다는… 어렴풋한 형태였다. 흔들리는 나뭇가지, 흙먼지가 흩날리는 땅,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마치 먹으로 그린 듯한 산봉우리들.

    ‘이게 대체… 뭐지?’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아까보다 훨씬 선명했다. 차가웠던 몸은 이젠 온기에 젖어 있었다. 끈적한 어둠은 사라지고, 시원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숨을 쉬었다. 가슴 가득 폐가 부풀어 오르는 감각. 살아있다. 나는 살아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내 몸이 아니었다.
    손을 들어 올렸다. 매끄럽고 하얀, 잔 근육이 선명한 손이었다. 나는 분명 스무 살 이후로는 꾸준히 운동과 거리가 멀었던 전형적인 사무직 직장인이었다. 이런 손은 내 손일 리가 없었다. 더듬더듬 팔을 만져보았다. 탄탄한 근육이 느껴졌다.

    ‘설마… 전생?’

    흔히 읽던 판타지 웹소설에서나 보던 설정이 머리를 스쳤다. 그런데 내가 전생이라니? 그것도 이런 몸으로? 혼란스러움 속에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낡고 해진 옷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다. 주위는 숲속 깊은 곳인 듯, 키 큰 나무들이 빽빽했고 풀과 덤불이 우거져 있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오른쪽 옆구리에서 섬뜩한 통증이 덮쳐왔다.

    “크윽!”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이를 악물었다. 옆구리를 더듬자, 축축하고 끈적한 액체가 손에 묻어났다. 피였다. 붉고 뜨거운 피. 핏덩이가 응고된 채 굳어가는 느낌이 생생했다. 누가 나를 공격한 건가?

    그때였다.
    “일어나거라, 어리석은 놈!”

    머리 위에서 들려온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 들 수가 없었다. 누군가 내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억지로 고개를 젖힌 시야에 거대한 그림자가 들어왔다. 새까만 무복을 입은, 험악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거대한 철검이 들려 있었다.

    “네놈의 무공은 고작 이 정도냐? 천신문(天神門)의 이름에 먹칠도 유분수지. 쯧쯧.”

    사내는 혀를 찼다. 나는 그의 손에 매달린 채 바들바들 떨었다. 옆구리의 통증이 다시금 미친 듯이 솟구쳤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자는 나를 해치려 하고 있다. 아니, 이미 해친 상태다!

    “죽음이 목전에 닥쳐도 깨닫지 못하는가. 네놈은 애초에 그릇이 아니었다. 고작 약관의 나이에 겨우 삼류 초식이나 익힌 주제에… 감히 천하제일 쟁탈 무림 대회에 참가하겠다고 나섰으니.”

    천하제일 쟁탈 무림 대회? 무림?
    사내의 말에 혼란스러움은 극에 달했다. 이세계! 무협 세계! 나는 지금 무협지에 나오는 세상에 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죽기 직전의 몸으로!

    “허나 괘념치 마라. 네놈이 죽는다고 해도, 어차피 대회의 흐름에는 아무런 영향도 없을 것이니. 어차피 천신문에서는 그저 빈 자리 하나 채우는 용도였을 뿐.”

    사내는 비웃으며 말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잔혹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나는 살아야 한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다시 한번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어!
    몸부림쳤다. 그러나 사내의 완력은 압도적이었다. 내 빈약한 몸뚱이는 마치 실오라기처럼 그의 손에 흔들릴 뿐이었다.

    “흥, 발버둥 쳐 보았자 소용없다. 약자는 죽어야 마땅한 법. 그것이 무림의 진리이자 순리다!”

    철검이 번쩍였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살기가 뼈를 파고들었다. 나는 직감했다. 이번 공격은 피할 수 없다. 그대로 당하면 내 목은 몸통에서 분리될 것이다.

    ‘젠장! 겨우 다시 살아났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라고?’

    생존 본능이 마지막 발악을 했다. 눈앞이 번쩍이면서, 뇌리 속에서 뭔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수십 년간 수련한 무인의 움직임처럼 보였다. 칼날을 피하는 법, 상대의 빈틈을 파고드는 법, 역공을 가하는 법…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무공도 익힌 적이 없었다. 어릴 때 태권도 도장을 다니다 말고, 스무 살 이후로는 헬스장 회원권만 끊어놓고 잠만 잔 게 전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생각보다 먼저 움직였다.
    사내의 손목을 잡고 휘두르던 손에 마치 스프링이라도 달린 것처럼 튕겨져 나갔다. 엉망진창인 자세였지만, 죽음의 칼날을 간발의 차이로 피할 수 있었다. 철검은 허공을 갈랐고, 그 충격에 내 머리채를 잡았던 사내의 손아귀가 살짝 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옆구리에서 격렬한 고통이 덮쳐왔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머릿속은 백지장 같았지만, 몸은 그 순간에도 뭔가를 기억하려는 듯 미세하게 움직였다.

    “흥, 겨우 그것이 네놈의 비장의 수인가? 쓸데없는 발버둥이다!”

    사내는 비웃음을 흘리며 다시 철검을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더욱 빠르고 사납게, 마치 거대한 뱀이 먹이를 덮치듯 아래로 내리꽂았다. 피할 틈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는 안 돼…!’

    내 눈은 사내의 움직임을, 그의 철검이 그리는 궤적을 쫓았다. 찰나의 순간, 나는 그가 검을 휘두르기 위해 무게 중심을 옮기는 아주 미세한 동작을 포착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그의 팔과 어깨에 잠시나마 빈틈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마치 내가 원래부터 그 이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것은 착각인가, 아니면 이 몸의 기억인가?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내 몸은 반응했다. 죽을힘을 다해 옆으로 몸을 날렸다.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내 발은 비틀거리면서도 땅을 박차고 사내의 옆구리를 향해 움직였다.

    “뭐… 뭐냐?!”

    사내는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가 휘두른 철검은 내 옆구리를 스치며 흙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나는 그 짧은 순간, 온몸의 힘을 모아 그의 옆구리에 어설프게나마 발을 내질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옆구리에 충격이 가해졌다. 물론 그에게는 솜털처럼 가벼운 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검이 비껴가는 그 찰나의 순간에 가해진 예상치 못한 반격이었다. 사내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건방진 놈! 감히 약해빠진 주제에…!”

    사내는 격분하여 눈을 부릅떴다. 그에게는 치명타가 아니었지만, 이 몸의 주인이었던 ‘나’의 실력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반격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시선에서 당혹감과 함께 끓어오르는 살의가 느껴졌다.

    ‘젠장, 긁어 부스럼 만들었잖아!’

    내 어설픈 반격은 사내의 분노만 키웠을 뿐이었다. 그는 한 발자국 내딛으며 다시 철검을 치켜들었다. 이번에는 망설임조차 없었다. 일격에 나를 끝장내려는 기세였다.

    “크아아악!”

    절규에 가까운 기합성과 함께 철검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이번에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몸이 한계에 다다른 듯 움직이지 않았다. 끔찍한 죽음의 순간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그때였다.
    파아앙!

    어디선가 날아온 기척이 사내의 철검을 강타했다. 쇠가 부딪히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검이 허공에서 멈췄다. 푸른색 검기가 번개처럼 솟아올라 철검을 튕겨냈다.

    “무례하구나. 정정당당한 겨루기라 생각했거늘, 비열하게 이미 쓰러진 이를 습격하다니.”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목소리.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걸어 나왔다.
    하얀 도포를 걸치고, 허리에는 푸른 검을 찬 남자였다. 그의 얼굴은 차분하고 고요했지만, 눈빛만은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날카로웠다. 그가 한 발짝 내딛을 때마다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사내는 순간 굳어버렸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가 아닌, 경악과 함께 두려움이 스쳤다.
    “용… 용검존(龍劍尊)!”

    용검존?
    그의 이름에 사내는 뒷걸음질 쳤다. 마치 거대한 맹수 앞에 선 작은 짐승처럼.
    나는 그 광경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지? 저 사나운 철검을 한순간에 막아낸 그는… 이 무림에서 어떤 존재인 걸까?

    용검존은 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다시 사내에게 시선을 돌렸다.
    “천신문에서는 무림 대회를 앞두고 벌써부터 이런 비열한 수작을 부리는가? 약자를 상대로 무위를 뽐내고, 그것도 모자라 암습이라니.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나?”

    “그… 그게 아니라… 놈이 먼저 도발을…” 사내가 변명하려 했지만, 용검존의 차가운 시선에 말끝을 흐렸다.

    “변명은 필요 없다. 어서 물러나거라. 다음번에는 이런 장난을 용서치 않을 것이다.”

    용검존의 말에 사내는 감히 반항할 생각도 못 하는 듯, 부들부들 떨며 급히 철검을 거두고 도망치듯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너는… 괜찮으냐?”

    용검존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 살았습니다.”

    그가 내 옆구리의 상처를 잠시 살피더니 말했다.
    “상처가 깊군. 이대로 두면 피를 너무 많이 흘릴 것이다. 움직이지 마라.”

    그리고는 주저 없이 품에서 작은 백색의 약병을 꺼냈다. 약병의 뚜껑을 열자, 시원하면서도 향긋한 약초 향이 코를 찔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약초 가루를 내 상처에 뿌려주었다.

    화끈거리는 고통과 함께 차가운 기운이 상처 부위로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피가 멎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단순한 약이 아니었다. 분명 무림의 영약 같은 것이리라.

    “고맙습니다…”

    “천만에. 약자를 외면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지.”

    그는 빙긋 웃었다. 그의 미소는 차가운 외모와는 달리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보다, 너는 천신문의 제자인가?”

    천신문. 아까 그 사내가 나에게 말했던 문파의 이름이다.
    “아… 그게…” 나는 말을 더듬었다. 나는 그저 전생한 일반인일 뿐. 천신문의 제자라는 것도, 이 몸의 주인이었던 원래 ‘나’에 대한 정보도 전혀 알지 못했다.

    용검존은 내 반응을 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모양이군. 큰 충격을 받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 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신문의 제자라면, 어째서 이런 깊은 숲 속에서 혼자 쓰러져 있었는가? 곧 천하제일 쟁탈 무림 대회가 시작될 터인데.”

    천하제일 쟁탈 무림 대회!
    다시 그 이름이 나왔다. 천하의 운명을 건 무림 고수들의 무술 대회. 그리고 나는 그 대회의 참가자였고, 약해빠진 실력 때문에 같은 문파 동료에게조차 살해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곳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죽음이 일상처럼 여겨지는 냉혹한 무림.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이 몸에 빙의해버린 불운한 전생자였다.
    무림 대회를 앞두고 쓰러진 천신문의 이름 모를 제자.
    내 앞에는 과연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이미 피와 검이 난무하는 무림의 거대한 흐름 속에 던져져 버린 것이다.
    용검존은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일어나거라. 대회가 열리는 벽하곡(碧霞谷)까지는 아직 멀었다. 이대로 지체하다가는 너의 차례가 오기 전에 기권해야 할지도 모른다.”

    벽하곡? 그곳이 대회가 열리는 장소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숲의 장막, 그리고 그 너머에 펼쳐질 피비린내 나는 승부의 전장이었다.
    나는 살아야 했다. 그리고, 이 끔찍한 무림에서 살아남아 원래의 나를 죽이려 했던 자에게 복수해야 했다.
    무림의 거대한 서막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

  • 선협 (신선)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선협】 아파트의 울음소리

    **작품 제목:** 도시의 선인 (暫定)
    **에피소드 제목:** 아파트의 울음소리

    **캐릭터:**
    * **박지아 (20대 후반):** 평범한 직장인, 홀로 고층 아파트에 거주.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성격.

    **[장면 1] 고층 아파트, 박지아의 거실 – 저녁**

    **#1.1 (컷):**
    [해 질 녘 노을이 길게 드리워진 고층 아파트 거실. 창밖으로는 빼곡한 빌딩 숲과 강물이 어우러진 현대적인 도시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깔끔하게 정돈된 인테리어, 모던한 가구들. 그 안에 소파에 기대어 태블릿을 보고 있는 지아의 뒷모습. 화면 가득 평화롭고 안온한 일상의 모습.]

    **지아 (내레이션):**
    하루의 고단함을 털어내는 시간. 퇴근 후, 나만의 작은 요새. 이 아파트에서 보이는 야경이 그렇게 좋았다. 삭막한 도시 속에서 찾은 한 줄기 안식처랄까.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었다.

    **#1.2 (컷):**
    [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기대어 태블릿 화면을 보며 피식 웃는다. 화면 속 웹툰 캐릭터가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텀블러와 과일이 담긴 접시가 놓여 있다.]

    **지아:**
    (중얼)
    오늘 팀장님 드립은 진짜… 이 만화 보는 게 훨씬 재밌네.

    **#1.3 (컷):**
    [지아의 시선이 잠시 멈춘다. 거실 한쪽 벽에 걸린, 무심하게 시각을 알리는 쿼츠 시계. 정확히 저녁 8시 15분.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한 순간.]

    **SFX:**
    (아주 작게, 틱- 하는 소리. 시계 초침 소리 같기도, 아니면 무언가 아주 미세하게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하다. 신경을 긁는 듯한 낮은 마찰음.)

    **지아:**
    (생각)
    …뭐지?

    **#1.4 (컷):**
    [지아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텀블러로 향한다. 텀블러가 아주 미세하게, 정말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움직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스치고 지나간 것처럼.]

    **SFX:**
    (스으윽- 아주 미세하게 마찰되는 소리.)

    **지아:**
    (생각)
    내가 졸았나? 착각인가?

    **#1.5 (컷):**
    [지아가 눈을 비비며 다시 태블릿에 집중한다. 어쩌면 오늘따라 유난히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일지도 모른다. 애써 아무것도 아니라고 치부하려는 듯.]

    **지아 (내레이션):**
    요즘 야근이 잦아서 몸이 성한 날이 없었다. 컨디션이 바닥을 치니 별게 다 신경 쓰이는군. 이 피로감은 만병의 근원이다, 정말.

    **#1.6 (컷):**
    [시간이 흘러 밤이 깊어진 창밖 풍경. 아파트 단지 위로 커다란 달이 떴다. 지아는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한다. 거실 불을 끄기 위해 스위치로 향하는 지아의 손. 스위치가 눌리는 순간, 거실 형광등이 불안하게 깜빡인다.]

    **SFX:**
    (찌이이잉- 지직- 퍽! 하는 짧고 날카로운 파열음.)

    **지아:**
    …어?

    **#1.7 (컷):**
    [지아가 당황한 얼굴로 형광등을 올려다본다. 형광등은 이내 정상으로 돌아오지만, 순간의 섬뜩함이 지아의 등골을 스친다. 전기가 나간 것도 아닌데.]

    **지아 (내레이션):**
    정전될 리 없는데… 설마 고장인가? 관리실에 전화해봐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었는데…

    **[장면 2] 한밤중, 지아의 침실**

    **#2.1 (컷):**
    [새까만 밤. 침실 창문 틈으로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어 온다. 지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깊은 잠에 빠져 있다.]

    **SFX:**
    (뚜욱- 뚜욱- 천장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불규칙하고 신경을 긁는 듯한 소리. 마치 아주 고요한 밤에 작은 물웅덩이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처럼, 점점 선명해진다.)

    **#2.2 (컷):**
    [잠결에 지아가 미간을 찌푸린다.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더 가까이 들리는 듯하다. 꿈에서조차 벗어날 수 없는 소음.]

    **지아:**
    (흐음…)

    **#2.3 (컷):**
    [지아가 잠결에 눈을 뜬다. 주변은 어둡고, 소리는 더욱 선명해진다. 눈을 부릅뜨고 천장을 올려다보는 지아의 시선. 어둠 속에 희미한 불길함이 서려 있다.]

    **SFX:**
    (뚜욱… 뚜욱… 뚜욱… 간격이 점차 짧아지고, 이제는 천장을 두드리는 듯한 울림이 느껴지는 물방울 소리.)

    **지아:**
    (생각)
    윗집에서… 물이 새나? 이 시간에?

    **#2.4 (컷):**
    [지아가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난다. 맨발로 바닥에 발을 디디는 순간, 바닥에서 올라오는 차가운 기운에 몸서리친다. 불안한 듯 주변을 살피는 그녀의 눈동자.]

    **#2.5 (컷):**
    [천장에 바짝 다가선 지아. 손을 뻗어 만져보지만, 천장은 아무런 얼룩도, 물방울도 보이지 않는다. 깨끗하다. 그리고 소리도 멈췄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지아:**
    (생각)
    …이상하다. 분명 들었는데.

    **SFX:**
    (쨍그랑! – 거실 쪽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 크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밤의 정적을 찢어발긴다. 유리 깨지는 소리.)

    **#2.6 (컷):**
    [지아가 흠칫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다. 눈이 휘둥그레진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고막을 울리는 것 같다. 소리가 들린 거실 쪽을 향해 얼어붙은 몸을 돌린다.]

    **지아:**
    (중얼거리듯, 떨리는 목소리)
    누구… 없어? 설마…

    **#2.7 (컷):**
    [지아가 침실 문고리를 잡고 조심스럽게 문을 연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어둠 속 거실의 모습. 공포가 지아를 덮쳐온다. 그녀의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쿵, 쿵, 쿵 울린다.]

    **[장면 3] 어둠 속의 거실**

    **#3.1 (컷):**
    [지아가 거실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는다.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지만, 비상등의 희미한 빛이 거실을 섬뜩하게 비춘다. 그 빛 아래, 테이블 위에서 깨져 산산조각 난 유리 접시 조각들이 보인다.]

    **SFX:**
    (사그락… 지아가 조심스럽게 걷는 맨발 소리.)

    **지아:**
    (생각)
    이건… 어제 내가 과일을 담아 먹었던 접시인데. 분명 설거지통에 넣어뒀는데…

    **#3.2 (컷):**
    [깨진 유리 조각들을 클로즈업. 파편들 주변에 희미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아른거리는 듯하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가 방금 사라진 듯한 잔상.]

    **지아:**
    (공포에 질린 목소리)
    설마… 도둑? 하지만 소리는 이쪽인데…

    **#3.3 (컷):**
    [지아가 주위를 둘러본다.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고, 잠금장치도 그대로다. 모든 창문 역시 잠겨 있다. 침입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완벽히 밀폐된 공간.]

    **지아 (내레이션):**
    아무도 들어온 흔적이 없는데. 그럼 이 접시는 왜 깨진 거지? 도대체…

    **#3.4 (컷):**
    [지아의 눈앞에서, 소파 위 쿠션이 저절로 튀어 오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집어 던진 것처럼,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SFX:**
    (퍽-! 쿠션이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

    **지아:**
    (비명 직전의 소리)
    흐읍!

    **#3.5 (컷):**
    [지아가 뒷걸음질 친다. 숨이 가빠진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그녀의 눈에 공포가 가득하다. 이성이 무너지는 순간.]

    **지아 (내레이션):**
    말도 안 돼.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착각이라고? 이런 일이… 이런 일이 나한테 벌어질 리가 없어!

    **#3.6 (컷):**
    [거실 중앙의 커다란 장식장. 그 위에 놓여 있던 고풍스러운 도자기가 공중으로 떠오른다. 섬뜩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지아를 향해 무섭도록 빠르게 날아온다.]

    **SFX:**
    (위이이이잉- 도자기가 공중에서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소리. 슈우우욱- 빠르게 날아오는 살벌한 소리.)

    **지아:**
    (비명)
    꺄아아악!

    **#3.7 (컷):**
    [지아가 가까스로 몸을 피한다. 도자기는 그녀의 머리맡을 스쳐 지나, 바로 뒤쪽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난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섬뜩한 순간. 날카로운 파편들이 지아의 뺨을 스쳐 피가 맺힌다.]

    **SFX:**
    (와장창-! 도자기가 깨지는 굉음! 그리고 이어서 들리는 날카로운 진동음과 함께, 방 전체에 퍼지는 오한.)

    **지아 (내레이션):**
    이건… 장난이 아니야. 누가 날… 죽이려고 해!

    **#3.8 (컷):**
    [도자기가 깨진 벽면에, 짙은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마치 벽 속에서 연기가 배어 나오는 것처럼. 그 기운은 이내 꿈틀거리더니, 뱀처럼 길게 늘어져 작은 손아귀 형상을 띤다.]

    **지아:**
    (경악에 찬 표정)
    저… 저게 뭐야…?

    **#3.9 (컷):**
    [벽에서 피어난 검은 기운의 손아귀가 지아를 향해 뻗어 나온다. 거대한 뱀이 먹잇감을 노리듯, 지아의 목을 조르려는 듯 빠르게 다가온다. 주변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진다.]

    **SFX:**
    (스으으으읍… – 기운이 확장되며 주변의 온도를 집어삼키는 소리. 차가운 바람이 지아를 휘감는 듯한 소리.)

    **지아 (내레이션):**
    차가워… 너무나 차갑고, 사악한 기운. 단순한 유령이 아니야. 이건… 살아있는 악의다. 이 도시에… 이런 것이 존재한다고?

    **[장면 4] 알 수 없는 기운**

    **#4.1 (컷):**
    [검은 손아귀가 지아의 목 바로 앞까지 다가온다. 지아는 숨도 쉬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 얼어붙어 있다. 눈을 질끈 감으려는 찰나, 그녀의 시선이 문득 바닥에 닿는다. 깨진 도자기 파편들 사이.]

    **#4.2 (컷):**
    [바닥, 깨진 도자기 파편들 사이에 아주 작은 금이 간다. 그리고 그 금 사이로 미세하게 빛나는, 흡사 핏줄 같은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솟아오른다. 검은 기운과는 확연히 다른, 따뜻하고 이질적인 기운.]

    **SFX:**
    (치이이익… – 붉은 기운이 피어나는 소리. 마치 아주 뜨거운 물방울이 차가운 표면에 닿아 증발하는 소리처럼.)

    **#4.3 (컷):**
    [붉은 기운은 미약하지만, 그 존재감은 확연하다. 검은 기운의 손아귀가 붉은 기운을 감지한 듯 움찔한다. 멈칫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마치 뜨거운 불꽃을 피하려는 듯.]

    **지아:**
    (생각)
    …붉은 빛?

    **#4.4 (컷):**
    [검은 손아귀가 붉은 기운에서 벗어나려는 듯 뒤로 물러선다. 벽에서 피어난 검은 연기도 빠르게 벽 속으로 다시 스며든다. 그 존재가 사라지는 속도는 경이로울 정도로 빨랐다.]

    **SFX:**
    (스으으으읍- 검은 기운이 사라지는 소리. 동시에 차가웠던 공기가 조금씩 원래 온도를 되찾아가는 듯하다.)

    **#4.5 (컷):**
    [거실은 다시 고요해진다. 깨진 유리 파편과 도자기 파편만이 지옥 같았던 순간을 증명한다. 지아는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쉰다.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린다.]

    **지아 (내레이션):**
    사라졌다… 방금 그건… 대체… 꿈인가? 아니… 이건 현실이야. 뺨에 맺힌 피가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4.6 (컷):**
    [지아의 시선이 다시 바닥, 붉은 기운이 솟아올랐던 파편 쪽으로 향한다. 붉은 기운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닥의 금은 아까보다 더욱 선명해져 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가 땅을 뚫고 솟아나오려는 흔적처럼, 생생한 맥박이 느껴지는 듯한 금.]

    **지아:**
    (떨리는 목소리)
    이 아파트… 이 집…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4.7 (컷):**
    [지아의 얼굴 클로즈업. 공포와 혼란, 그리고 미약한 호기심이 뒤섞인 표정. 그녀는 무심코 바닥에 손을 짚고, 손끝에 차가운 기운이 스민다. 이 아파트가, 이 도시가 숨기고 있는 더 큰 무언가의 시작을 알리듯이.]

    **지아 (내레이션):**
    이건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야. 어둠이 틈을 찾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 틈을… 무언가 다른 것이 막아냈어. 이 지루한 일상 속에, 내가 알지 못했던 세계가 숨 쉬고 있었다니… 나는… 나는 이 현상을 마주할 수 있을까?

    **#4.8 (컷):**
    [지아가 앉아있는 거실 전체 컷. 아파트는 다시 평온을 찾은 듯 보이지만, 깨진 파편들과 불안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그리고 아파트의 외벽을 타고 위로, 알 수 없는 푸른 빛이 아주 희미하게 번지는 모습. 마치 거대한 용의 비늘처럼 아파트를 감싸는 듯하다.]

    **SFX:**
    (미세하게, 아파트 전체에서 울리는 듯한… 낮은 진동음. 거대한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울림. 끝.)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도시의 폐허는 언제나 습하고 끈적한 죽음의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썩어 문드러진 잔해들 사이를 헤치며 나아가는 강민의 눈은 이미 그 익숙한 풍경에 무감해진 지 오래였다. 그의 등에는 낡고 녹슨 소총이 메어져 있었고, 허리춤에는 온갖 폐기물에서 뜯어낸 조각들로 조악하게 만든 칼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뒤를 따르는 은아와 찬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은 먼지와 피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살아 움직였다.

    “젠장, 오늘은 영 시원찮네.” 찬이 낡은 철문을 발로 차 열며 투덜거렸다. 안쪽은 이미 감염자들이 휩쓸고 간 흔적만 역력했다. 뜯겨 나간 살점, 흥건한 핏자국, 그리고 텅 빈 선반들. “여기도 끝이군. 제국 놈들은 도대체 뭘 찾아간 거지? 우리 같은 밑바닥들이 먹을 것도 없는데.”

    강민은 대꾸 없이 폐허의 한쪽 벽에 기대섰다. 그의 시선은 아득히 멀리 보이는, 빛나는 철벽으로 둘러싸인 제국의 심장부를 향했다. 그곳은 오염되지 않은 대기와 풍요로운 식량, 그리고 안락한 잠자리가 보장된 곳이었다. 평민들의 피와 땀, 그리고 죽음 위에서 쌓아 올려진 탐욕의 성.

    “뭘 그렇게 쳐다봐요, 강민 오빠.” 은아가 찬의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녀는 한 손에 들고 있던 깨진 유리 조각으로 희미하게 빛을 반사하며 주변을 살폈다. “어차피 우린 저 철벽 안으로는 못 들어가. 설령 저 감염자들을 다 죽인다 해도, 제국 놈들이 우리를 굶겨 죽이거나 총으로 쏴 죽이겠지.”

    강민은 은아의 말에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은 오래전, 이 세계를 덮친 대재앙 이후 잔존한 인류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거대한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들이 수호한 것은 오직 자신들의 기득권과 안락뿐이었다. 바깥 세상은 감염자들의 피와 살로 오염되었고, 살아남은 평민들은 제국의 착취와 무관심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감염자보다 제국을 더 두려워했다.

    그날 저녁, 세 사람은 허름한 은신처로 돌아왔다. 낡은 상자들이 쌓여 만들어진 임시 바리케이드 안은 언제나 스며드는 한기와 불안으로 가득했다. 다른 생존자 몇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지치고 메마른 얼굴들이었다.

    “오늘은 뭘 건졌어?” 나이 든 영감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찬은 들고 있던 작은 배낭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녹슨 통조림 몇 개와 깨진 라디오 부품 따위가 전부였다. “젠장, 이젠 쥐새끼 한 마리도 찾아보기 힘들어. 제국 놈들이 지난주에 보급선 지킨다고 주변을 다 태워버려서.”

    “보급선이라니.” 강민이 비소를 흘렸다. “그놈들의 보급선은 언제나 제국 병사들의 배를 채울 뿐이었지. 우리에게 온 건 잔반도 안 됐어.”

    그때, 바리케이드 너머에서 희미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스쳤다. 엔진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쿵, 쿵 하는 둔탁한 진동과 함께 육중한 장갑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위에는 제국의 깃발이 펄럭였고, 무장한 병사들이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저 빌어먹을 놈들! 또 뭘 빼앗으러 온 거야?” 찬이 주먹을 꽉 쥐었다.

    장갑차는 평민들이 모여 사는 구역의 한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던 작은 식량 창고 앞에 멈춰 섰다. 곧이어 병사들이 창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더니, 얼마 되지 않는 곡식 자루들을 밖으로 실어 나르기 시작했다. 평민들이 웅성거리며 다가갔지만, 병사들은 무자비하게 총을 겨누며 위협했다.

    “안 돼! 그건 우리 식량이야! 제발… 제발 그러지 마세요!” 한 여인이 아이를 안은 채 절규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계속해서 식량을 약탈했다.

    강민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과거 제국 병사였던 시절, 그는 명령에 따라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억압했다. 그러나 그 어떤 순간에도 이토록 노골적이고 무자비한 약탈은 겪어본 적이 없었다. 감염자보다 더한 약탈자들.

    “이봐, 강민 오빠! 저렇게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 찬이 분을 참지 못하고 강민을 흔들었다.

    은아가 찬의 팔을 잡았다. “지금은 안 돼, 찬. 저들을 당해낼 수 없어. 괜히 나섰다가 다 죽을 거야.”

    강민은 아무 말 없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발걸음은 느렸지만, 단호했다. 장갑차 위에 서 있던 제국 장교, 카이로스 제독은 강민의 등장에 콧웃음을 쳤다. 그는 과거 강민의 지휘관이었지만, 강민이 평민 편에 서기로 한 뒤로는 그를 벌레 보듯 무시했다.

    “오랜만이군, 반역자 강민. 아직도 이런 구더기 같은 곳에서 살아남아 있었나?” 카이로스 제독이 비웃었다. “어쩌겠나. 제국도 먹고 살아야지. 너희 같은 하찮은 자들이 뭘 안다고 감히 우리를 방해하는가?”

    강민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먹고 산다? 당신들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어. 우리가 먹을 것이 없으면, 감염자들에게 먹히거나, 아니면 당신들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둘 중 하나야.”

    “그게 너희의 운명이다, 하등한 것들.” 카이로스 제독이 총을 뽑아 강민의 머리에 겨눴다. “이 한심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건 오직 강한 자들뿐. 제국만이 희망이다. 너희는 그저 제국을 위한 소모품에 불과해.”

    그 순간, 강민의 눈에 결의가 번뜩였다. 그는 카이로스의 총구를 피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소모품? 우리는 당신들의 노리개가 아니다. 이제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야.”

    강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편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가 날아와 카이로스 제독의 머리를 스쳤다. 날아든 것은 다름 아닌 찬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다른 평민들도 돌멩이를 줍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감히! 이 벌레 같은 놈들이!” 카이로스 제독이 격분하여 총을 발사하려 했지만, 강민은 이미 몸을 날려 그의 팔을 붙잡았다. 육탄전이 시작되었다. 강민은 전직 제국 병사였다. 비록 고된 삶으로 몸이 예전 같지 않았지만, 그의 전투 기술은 녹슬지 않았다.

    “은아! 찬! 모두 도망쳐! 그리고 소리쳐! 더 이상 당하고만 있지 않을 거라고!” 강민이 외쳤다.

    은아와 찬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강민의 의지를 이해했다. 그들은 다른 평민들을 이끌고 폐허 속으로 사라졌다. 강민은 카이로스 제독과 몸싸움을 벌이며 시간을 벌었다. 병사들이 강민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는 마치 짐승처럼 날카롭게 움직이며 그들을 제압했다. 한때 그가 몸담았던 제국의 병사들을 상대로, 그는 처음으로 진정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몇 분 후, 강민은 쓰러진 병사들 사이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몸에는 상처가 늘어났지만, 눈빛만은 살아 있었다. 카이로스 제독은 이미 도망치듯 장갑차에 올라타 자리를 피한 뒤였다. 제독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좋다! 감히 제국에 맞서려 들다니! 이 지역을 불태워 버릴 것이다! 모두 죽여라!”

    장갑차의 기관총이 불을 뿜으며 주변을 향해 난사하기 시작했다. 강민은 간신히 몸을 피해 폐허 속으로 숨어들었다. 총알은 그가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를 파괴했다.

    그러나 그의 귀에는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폐허 곳곳에서 들려오는 평민들의 함성 소리. “더 이상 당하지 않는다! 제국에 맞서 싸운다!”

    강민은 피 묻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억압받던 자들의 분노가 마침내 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폐허 속을 달렸다. 감염자들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지만, 지금은 제국의 총탄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다.

    ‘그래, 시작이다.’

    강민은 어둠 속에서 은아와 찬을 다시 만났다. 그들은 낡은 표지판 아래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은아의 손에는 그녀가 애지중지하던 라디오 부품이 들려 있었고, 찬의 얼굴은 흙투성이였지만 눈빛만은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젠장, 저놈들 미쳤어! 모든 걸 태우고 있어!” 찬이 씩씩거렸다.

    “하지만 저 소리 들려? 오빠 말대로 사람들이 소리치고 있어!” 은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허 곳곳에서 작은 반항의 불꽃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돌멩이가 날아가고, 낡은 몽둥이가 휘둘러지고, 감히 제국에 맞서는 함성이 울려 퍼졌다.

    “이젠 숨는 것도 지겹다.” 강민은 말했다. “저놈들은 우리를 소모품으로 여겼지만, 우리는 이제 하나의 불꽃이 될 거야. 제국의 차가운 심장을 태워버릴 불꽃.”

    그의 시선은 다시 한번 멀리 빛나는 제국의 철벽을 향했다. 그 빛은 더 이상 희망이 아니었다. 그것은 평민들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 탐욕의 상징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불이야.” 은아가 손에 든 라디오 부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흩어져 있던 이 작은 불꽃들을 하나로 모을 불씨.”

    찬은 강민과 은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래서, 뭘 할 건데? 저 제국의 철벽을 맨몸으로 부술 거야?”

    강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찬. 우리는 철벽을 부수는 대신, 그 안에 있는 탐욕을 불태울 거야. 저놈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빼앗아야 해.”

    그의 뇌리에는 제국의 심장부에 있는 거대한 식량 저장고와 무기 공장, 그리고 그들을 움직이는 에너지원이 떠올랐다. 그것들이야말로 제국의 근간이었다. 그것을 건드리면 제국은 흔들릴 것이다.

    “정보가 필요해. 제국 내부의 정보.” 은아가 말했다. “어떻게 감염자를 뚫고, 제국 병사들의 눈을 피해서 정보를 얻어올 거지?”

    강민은 미소를 지었다. 피와 먼지로 얼룩진 얼굴이었지만, 그 미소에는 어떠한 두려움도 없었다. “나는 저 안에 있었던 사람이야. 아직 기억하는 것이 많아.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어둠 속에서, 폐허의 작은 불꽃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굶주림과 분노, 그리고 자유를 향한 갈망으로 타오르는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의 빛나는 철벽 아래, 억압받던 평민들의 반란이 그렇게, 작은 속삭임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감염자들의 울음소리가 자장가처럼 멀리서 들려왔지만, 그들의 심장 속에는 새로운 시대의 웅장한 서곡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소모품이 아니었다. 그들은 혁명의 시작이었다.

  • 메카 액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아르카디아 마법 학원의 밤은 늘 고요했다. 수정처럼 맑은 달빛이 뾰족한 첨탑과 고색창연한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비추고, 수천 년 묵은 마법의 기운이 공기 중에 옅게 흘러 다녔다. 하지만 강하준에게는 그 고요함이 때때로 뼈를 에는 듯한 정적, 뭔가 감추어진 듯한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오늘 밤도 마찬가지였다. 대도서관의 낡은 마법 서적들 사이에서 겨우 집중력을 유지하려 애쓰던 하준은, 진동을 느꼈다. 웅. 웅.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소리가 발밑에서부터 올라와 책상 위 펜 끝을 미세하게 흔들었다. 옆자리에서 두꺼운 마법진 해석학 책을 뒤적이던 동급생 유진은 미간을 찌푸렸을 뿐, 아무 말 없이 다시 책에 코를 박았다.

    “또 시작이네, 지하 보일러실 문제인가?” 하준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유진이 고개를 들었다. “지하 보일러실? 하준, 학원 지하에 그런 게 있었어? 우리 학원은 중앙 마력로로 모든 에너지를 공급받는다고.”

    하준은 순간 말을 잃었다. 유진의 말대로였다. 이 학원의 모든 마법적 시설은 지하 깊숙이 잠든 고대 마력로의 힘으로 움직였다. 그 사실은 기초 마법학 개론 첫 시간에 배우는 상식이었다. 보일러실이라니, 시대착오적인 발상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가끔씩 이런 진동과 함께 아주 희미한 기계음 같은 것을 들었다. 아주 어릴 때, 고향 마을 공장에서 듣던 그런 소음.

    “아, 그래. 그랬지.” 하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든 연필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헛들었나 봐.”

    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준은 그녀의 시선이 떠나자마자 자신의 책상 아래로 몸을 기울였다. 진동은 여전했다. 아니, 조금 더 강해진 것 같았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둔중하고 일정한 울림.

    이런 현상은 그가 학원에 전학 온 지 두 달째 되던 날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학원 건축물이 워낙 오래되어서겠거니 했다. 하지만 진동은 규칙적이지 않았고, 가끔은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지하 어딘가에서 살아있는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리고 며칠 전, 그는 진동과 함께 희미한 섬광을 보았다. 잠시 끊겼던 학원 내부의 마법등이 다시 켜지는 순간, 지하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는 것을 본 것 같았다. 그의 착각이었을까?

    밤 열한 시, 대도서관 폐관 시간이 되자 학생들은 하나둘 짐을 챙겨 나섰다. 하준은 마지막까지 자리에 앉아있다가, 유진마저 나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책을 꽂는 척하며 도서관의 구석진 곳, 일반에 개방되지 않은 마법 기록 보관소로 이어지는 철제 문을 슬쩍 보았다.

    그 문은 늘 잠겨 있었다. 학원에서도 손꼽히는 원로 교수들만이 출입이 허용되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하준은 그 문 너머에서 진동이 가장 크게 느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은밀히, 그러나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에는 마법등의 희미한 빛만이 흐릿하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무도 없었다. 하준은 늘 가지고 다니던 작은 마력 탐지 수정구를 꺼냈다. 수정구는 철제 문에 가까워질수록 붉은빛을 띠며 미세하게 떨렸다. 평범한 마력 흐름과는 다른, 뭔지 모를 억눌린 힘이 느껴지는 듯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지만, 하준은 열쇠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손을 뻗어 문에 손바닥을 짚었다. 차가운 금속 너머로 쿵, 쿵, 쿵. 진동이 선명하게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그리고 진동과 함께, 아주 희미하게, 낮게 깔린 윙-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흡사 거대한 톱니바퀴가 천천히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같았다.

    하준은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마법 학교 지하에 웬 기계음? 게다가 저토록 거대한 진동을 일으킬 만한 장치라면, 학원 전체가 그 존재를 알고 있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를 제외하고는 신경 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결심했다.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날 밤, 그는 학원 지도를 펼쳐 들고 지하 통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수업이 끝난 늦은 밤, 그는 자신의 방 창문을 통해 몰래 학원 밖으로 나섰다. 학교 주변의 숲을 우회하여, 그는 학원 지하 깊숙한 곳으로 통한다고 알려진, 하지만 아무도 발길을 들이지 않는 폐쇄된 수리 통로 입구를 찾아냈다.

    오랜 시간 방치된 통로는 습하고 어두웠다. 눅눅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금속의 비릿한 향이 섞여 있었다. 손에 든 마법등이 겨우 시야를 확보해 주었지만, 빛은 이내 어둠에 먹혀들었다. 하준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점점 더 깊이 내려갈수록 통로는 인공적인 느낌으로 변해갔다. 흙벽은 단단한 석재와 녹슨 철근으로 바뀌었고, 이따금씩 거대한 강철 문이 길을 가로막았다. 다행히 대부분은 낡아서 잠금장치가 무용지물인 상태였다. 하준은 자신이 단순한 폐쇄 통로가 아니라, 뭔가 다른 용도로 사용되다 버려진 곳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하 가장 깊은 곳.

    하준은 좁은 통로의 끝에 다다랐다. 그의 마법등 불빛이 미치는 곳 너머로 거대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곳은 자연적인 동굴도, 마법적인 성소도 아니었다. 거대한 강철 기둥들이 천장을 지탱하고, 알 수 없는 배관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거대한 기계 기름 냄새와 함께 묵직한 오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존재가 공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것은 거대했다. 학원의 가장 높은 첨탑만큼이나 육중하고 웅장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생명체는 아니었다. 매끈하게 다듬어진 검은색 금속 외장 위로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마치 수십 개의 눈처럼 보이는 붉은색 수정 렌즈들이 온몸에 박혀 있었다.

    거대한 강철의 골렘, 아니, 차라리 고대의 거신병에 가까운 형태였다. 그것은 팔짱을 낀 채 고요히 서 있었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공간을 압도하는 듯했다. 마치 잠들어 있는 거대한 맹수 같았다.

    하준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마법으로 가득 찬 아르카디아 학원 지하에 숨겨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이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순수한 기계, 철과 강철로 만들어진 거대한 병기였다.

    그의 마력 탐지 수정구는 미친 듯이 붉게 번뜩이며 거의 폭발 직전처럼 뜨거워졌다. 거신병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마력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그리고 어딘가 섬뜩한 종류의 힘이었다.

    “이게… 대체….”

    그 순간, 거대한 정적을 깨고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강하준.”

    하준의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그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림자 속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학원장 ‘엘도라 드 아르카디아’였다. 그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눈빛은 심연처럼 깊었다. 그녀의 손에는 거대한 거신병을 향해 희미하게 빛나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학원장님… 이게… 뭡니까?” 하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학원장은 아무 말 없이 거신병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오랜 친구를 보듯, 애증이 담긴 시선으로 거신병의 심장부에 박힌 붉은 수정 렌즈를 응시했다.

    “이것이 바로… 아르카디아 마법 학원의 진정한 심장이자, 가장 깊은 곳에 묻힌 금기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신병의 온몸에 박힌 붉은 수정 렌즈들이 일제히 섬뜩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체에서 낮고 웅장한 진동이 다시 시작되었고, 그 진동은 하준이 여태껏 느껴본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온 세계를 집어삼킬 듯한 압도적인 힘이었다.

    그리고 거신병의 복부 중앙에서, 거대한 강철 패널이 스르륵 열리며 안쪽의 어둠을 드러냈다. 그 안에서, 핏빛 섬광과 함께,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계와 생명체의 경계가 모호한, 섬뜩하도록 완벽한 형태로 다듬어진 거대한 조종석이었다.

    그 순간, 하준의 머릿속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오래된 학원 괴담이 있었다.
    *지하 가장 깊은 곳에는 ‘별들의 영혼’을 먹고 사는 거대한 괴물이 잠들어 있다.*
    *그 괴물의 심장이 뛸 때마다, 학원의 위대한 마법이 흔들린다.*

    “금기…라고요?” 하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학원장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래. 이 금기는 학원의 모든 마법을 초월한다. 그리고 너는, 그것을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콰아앙!

    거신병의 어깨 장갑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자, 안에서 거대한 마력 포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게 빛나는 수정 렌즈들이 하준을 향해 돌아섰다. 학원장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내면에는 알 수 없는 광기와 결의가 번뜩이고 있었다.

    하준은 본능적으로 죽음의 위협을 느꼈다. 이 거신병은, 단순한 수호자가 아니었다. 이 학원 자체가 숨기고 있는 거대한 비밀, 그리고 그 비밀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가 된 광기가 여기 지하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거신병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나며 하준을 응시했다. 그는 자신이 발을 들인 곳이, 되돌릴 수 없는 지옥의 입구임을 깨달았다.

  • 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304호의 그림자

    현우는 어깨에 멘 가방을 대충 벗어던지고는 거실 한복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계는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고된 하루였다. 매일 반복되는 업무의 굴레 속에서 그는 자신이 조금씩 마모되어 가는 기분이었다. 겨우 서른, 아직 청춘이라 불릴 나이였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한참을 닳아버린 낡은 기계 같았다.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현우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적막했다. 이 넓은 도심 속에서 그의 1304호 아파트는 마치 거대한 유리병 속의 작은 섬처럼 고립되어 있었다. 창밖으로는 수많은 불빛들이 반짝였지만, 그 빛들은 그에게 어떤 온기도 전해주지 못했다.

    “젠장, 피곤해 죽겠네.”

    중얼거림과 함께 눈을 떴을 때, 그의 시선은 부엌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머그컵에 닿았다. 분명 아침에 커피를 마시고 설거지통에 넣어뒀던 컵이었다. 어제 퇴근하고 돌아와서 씻어놓은 기억도 없는데. 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깜빡했나? 아니면 아침에 설거지통에 넣은 줄 알았는데 그냥 식탁에 뒀던 건가. 요즘 워낙 정신이 없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나니 조금 살 것 같았다. 물컵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다시 한번 식탁 위를 쳐다봤다. 아까 그 머그컵. 조금 전 분명 식탁의 오른편에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왼편, 그것도 중앙으로 살짝 이동해 있었다.

    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분 탓인가. 아니면 내가 아까 본 위치를 잘못 기억한 건가? 피곤하면 별 이상한 착각을 다 한다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소파에 앉았다. 이따 샤워하고 바로 자야겠다.

    그때였다. 쿵, 하고 아랫집에서 들려오는 듯한 둔탁한 소리. 이어서 드르륵, 하고 무언가 긁히는 소리가 짧게 이어졌다. 현우는 귀를 기울였다. 이 시간에? 늦은 시간이라곤 해도 아래층에 사람이 사는 건 분명했다. 층간 소음인가. 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그러나 잠시 후, 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쿵, 드르륵. 쿵, 드르륵. 마치 무거운 가구를 질질 끄는 듯한 소리가 불규칙하게 반복되었다. 현우는 조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보통 같으면 그냥 참고 넘어가겠지만, 오늘따라 유독 신경이 날카로웠다.

    “이 시간에 대체 뭘 하는 거야.”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혹시 아랫집에서 인테리어 공사 같은 걸 하는 건 아닐까? 밤에 공사를 하는 건 불법일 텐데.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관리사무소에 전화하는 대신 일단 직접 가서 말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을 지나 현관으로 향하는 짧은 복도를 걷고 있는데, 문득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쿵, 드르륵 하는 소리가… 더 이상 아랫집에서 들려오는 것 같지 않았다.

    소리는 그의 뒤, 바로 주방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스르륵.

    마치 날카로운 무언가가 유리 표면을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였다. 현우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둠이 드리워진 부엌 안, 냉장고의 은빛 문이 어렴풋이 보였다. 소리는 분명 그 냉장고 쪽에서 나는 것 같았다.

    쿵.

    이번엔 둔탁한 충격음이었다. 냉장고 문이 닫히는 소리 같았다. 현우는 눈을 비볐다. 분명 아까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마신 뒤, 닫는 것을 깜빡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항상 모든 문을 꼼꼼히 닫는 습관이 있었다.

    그는 부엌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한 걸음, 한 걸음.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두운 부엌 안에서, 냉장고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마치 낡은 경첩에서 나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 냉장고 안의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며 어두운 부엌을 창백하게 비췄다.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분명 문은 닫혀 있었는데, 누가 연 것도 아닌데, 스스로 열리고 있었다.

    그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다.

    열린 냉장고 문 안쪽, 냉동실과 냉장실 사이의 플라스틱 칸막이가 조금씩 들썩거렸다. 마치 안에서 무언가가 툭툭 건드리는 것처럼. 이윽고, 칸막이가 툭 하고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부딪히며 나는 플라스틱 소리가 이 적막한 공간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뭐… 뭐야.”

    현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 그가 아는 한, 이 아파트에는 그 혼자 살고 있었다.

    그때, 냉장고 안에서 작은 얼음 조각 하나가 튀어나왔다.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굴러가더니, 현우의 발치에서 멈췄다. 작은 얼음 조각이지만, 그의 눈에는 마치 어떤 신호를 보내는 듯한 기이한 인상으로 박혔다.

    그는 몸을 뒤로 물렸다. 차가운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단순한 피곤함 때문에 보는 환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 냉장고 문이 다시 한번 천천히, 그리고 완전히 열렸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이제 그의 얼굴을 직접 비췄다. 차갑고 푸른빛이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였다.

    그 안에서, 무언가… 검고, 형체가 없는 그림자가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마치 냉장고 안의 어둠이 스스로 생명을 얻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어둠 그 자체였지만, 동시에 어둠이 아닌, 어떤 존재의 윤곽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현우는 얼어붙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는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극도의 공포로 마비된 것 같았다.

    그 그림자는 냉장고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형체가 없는 존재는 냉장고 밖으로 기어나오려는 듯, 문틈 사이로 미끄러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액체처럼 형태를 바꾸며, 주방 바닥으로 흘러내리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차갑고 끈적이는 공포가 현우의 폐부를 파고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검은 그림자 덩어리 위로, 냉장고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마치 그 안에 있던 ‘무언가’를 가두려는 듯이.
    혹은 그 ‘무언가’가 밖으로 나왔음을 알리는 듯이.

    현우는 숨을 헐떡였다. 차갑게 땀으로 젖은 몸은 이제 완전히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어둠 속, 냉장고 앞에 떨어진 작은 얼음 조각은 아직 녹지 않고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 차가운 얼음 조각 위로,
    아주 희미하게,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그 조그만 얼음 위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현우는 온몸이 얼어붙은 채로, 거실에서 풍겨오는 알 수 없는 악취에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그것은 썩은 물고기 냄새 같기도, 오래된 흙먼지 냄새 같기도 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역겨운 냄새였다.

    1304호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SF (공상과학)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만화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제목**: 셀레스티아의 유령 살인

    **[SCENE 1]**

    **[장소]**: 거대 우주 정거장 ‘셀레스티아’ – 최고급 VIP 구역 복도

    **[시간]**: 밤 11시 30분, 정거장 표준시

    **(어둡고 미래적인 복도. 은은한 푸른색 조명이 바닥을 미끄러지듯 흐른다. 벽은 고도로 정제된 금속과 투명한 특수 아크릴로 이루어져 있어, 밖으로는 끝없이 펼쳐진 별들이 수놓인 우주가 고요히 빛난다. 복도 한가운데, 고급스러운 목재와 금속이 조화를 이룬 육중한 문 앞에 세 명의 경비 요원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다. 그들의 제복은 셀레스티아의 로고와 첨단 기능들이 탑재된 듯,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난다.)**

    **[SFX]**: (삐이익- 삐비빅-) 경보음이 조용히 울리다 멈추는 소리, 공기의 미세한 진동

    **이안 (CELESTIA 보안팀장)**: (무전기를 귀에 대고 잔뜩 신경이 곤두선 목소리) “다시 확인해. ‘생체-공간 안정화 장치’의 잔류 에너지 시그널이 정말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고?”

    **[SFX]**: (지직-) 무전기 너머 들리는 잡음, 불안정한 전파

    **무전기 (CELESTIA 보안요원)**: “네, 팀장님. 내부 센서 데이터와 외부 관측 데이터 모두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강태혁 박사의 개인 연구실은 19시 05분 이후로 완전히 밀폐되었고, 현재까지 어떤 외부 침입 시도도 없었습니다. 박사의 개인 보안 시스템은 물론, 셀레스티아의 최상위 보안망까지 완벽하게 작동 중입니다.”

    **이안**: (이마를 짚으며) “그럼 이 경고음은 뭐였는데? 박사의 생체 신호가 갑자기 멈춘 건 또 뭐고? 안에 박사 말고 아무도 없다는 건 확실해?”

    **무전기 (CELESTIA 보안요원)**: “네. 내부 열 감지 센서, 생체 반응 센서 모두 강태혁 박사 한 명만을 감지했습니다. 박사의 ‘생체-공간 안정화 장치’가 돌연 이상 작동을 일으키면서 잠시 경보가 울렸다가, 곧바로 박사의 심박 정지 신호가 확인되었습니다.”

    **(이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이 상황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에 다가갔다. 문의 잠금 장치는 육안으로 봐도 복잡하고 견고했다. 그 위에는 셀레스티아의 최신 보안 시스템 ‘오메가 락’이 번쩍이며 활성화되어 있었다.)**

    **이안**: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개인 연구실을 완벽하게 밀폐해놓고,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만든 장치 때문에 죽었다고? 말도 안 돼…”

    **(그는 옆에 선 경비 요원들에게 손짓했다.)**

    **이안**: “규칙대로, 강제 개방 절차 시작한다. 모든 기록은 실시간으로 저장될 거야. 만에 하나라도 불필요한 흔적이 남으면 안 돼. 2중, 3중으로 스캔하며 들어가.”

    **[SFX]**: (웅- 위이잉- 찰칵! 슈우욱-) 문의 잠금 해제 시스템이 작동하는 묵직한 소리. 이중, 삼중의 잠금 장치가 해제되고, 특수 공압 시스템이 기압을 조절하며 문이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운다.

    **(문이 천천히, 그리고 묵직하게 안쪽으로 열린다. 문이 열리자마자 내부의 서늘한 공기가 복도로 흘러나온다. 강태혁 박사의 개인 연구실은 깔끔하고 미래적인 분위기였다. 벽면은 데이터가 흐르는 투명 디스플레이로 가득했고, 중앙에는 복잡한 장비들이 놓인 작업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작업대 위에, 강태혁 박사가 엎드려 있었다. 그의 한쪽 팔에는 주사 바늘 자국으로 보이는 작은 붉은 점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생명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이안**: (연구실 내부를 둘러보며, 경악과 혼란이 뒤섞인 목소리로) “세상에… 정말 혼자였어. 문은 완벽하게 잠겨 있었고… 대체 누가, 어떻게?”

    **(연구실 바닥에는 그 어떤 흔적도, 외부인의 침입을 알릴 만한 파손된 물건도 없었다. 완벽하게 밀폐된 공간에서 일어난 밀실 살인. 그것도 인류 역사상 가장 안전하다고 자부하는 우주 정거장 ‘셀레스티아’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SFX]**: (침묵…) 공허한 적막

    **[SCENE 2]**

    **[장소]**: 셀레스티아 – 강태혁 박사 연구실

    **[시간]**: 다음 날 아침 9시

    **(연구실은 이미 과학 수사팀 요원들로 북적였다. 그들은 홀로그램 스캐너를 들고 바닥과 벽면, 천장까지 꼼꼼히 조사하고 있었다. 섬세한 센서들이 실시간으로 데이터를 분석하며, 벽면의 나노 단위 균열까지 찾아내려 애쓰는 중이었다. 이안 팀장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보고서를 검토 중이었다.)**

    **이안**: (수사관에게) “특별한 건 없어? 미세한 균열이나 에너지 방출 흔적이라도? 공기 중의 외부 DNA 흔적이라도?”

    **수사관 A**: (고개를 저으며) “모든 스캔 결과는 동일합니다, 팀장님. 이 방은 강태혁 박사가 사망할 때까지 완벽하게 밀폐되어 있었습니다. 외부 침입은 물리적으로나 에너지적으로나, 심지어는 미립자 단위로도 불가능했습니다. 공기 중의 이물질도 검출되지 않았습니다. 주사기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 외에는요.”

    **이안**: (머리를 쓸어넘기며) “주사기가 사라졌다는 게 제일 문제야. 스스로 주사했을 리는 없어. 그가 연구하던 생체-공간 안정화 장치가 오작동해서 경보가 울렸고, 그 직후 박사가 죽었다… 분명 뭔가 관련이 있을 텐데.”

    **(그때, 연구실 입구에서 한 남자가 들어섰다. 슬림한 검은색 수트에 흐트러짐 없는 짧은 머리, 그리고 날카로우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 그의 이름은 류지한이었다. 셀레스티아의 고위층이 이런 ‘불가능한’ 사건에 대비해 비밀리에 고용한 외부인. 그는 공기의 흐름마저 읽어낼 듯한 예리한 시선으로 방안을 훑었다.)**

    **류지한**: (나지막하고 차분한 목소리) “강태혁 박사의 유일한 오점은, 자신이 만든 기술을 맹신했다는 점이죠. 완벽하다고 믿는 시스템은 언제나 그 맹점을 파고들 여지를 남겨둡니다. 맹점은 항상 가장 완벽해 보이는 곳에 숨어있으니까요.”

    **(이안은 류지한을 흘긋 보았다. 류지한은 이미 방안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 듯, 시선을 휙휙 움직이며 세부적인 것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이안**: (살짝 경계하며) “류지한 씨. 오셨군요. 사건 개요는 들으셨겠지만, 저희 수사팀은 현재까지 이 사건을 ‘밀실 살인’이 아닌 ‘미스터리’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외부 침입의 증거가 전혀 없으니까요. 저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습니다만…”

    **류지한**: (냉정하게) “증거가 없다는 것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찾을 수 없는 증거라는 뜻이죠. 모든 ‘밀실’은 반드시 ‘출입구’가 존재합니다. 보이지 않을 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류지한은 강태혁 박사의 시신이 발견되었던 작업대 앞에 섰다. 그는 손대지 않고, 그저 시선으로만 주변을 탐색했다. 특히 박사가 사망 당시 몸을 기댔을 것으로 추정되는 벽면을 응시했다.)**

    **류지한**: “박사가 마지막 순간까지 작업하고 있었다는 이 ‘생체-공간 안정화 장치’… 이 장치는 외부 에너지 간섭으로부터 연구실을 보호하고, 내부의 미세한 공간 왜곡까지 잡아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죠?”

    **이안**: “네, 그렇습니다. 외부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침투하는 것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박사가 직접 설계한 겁니다. 특히 그의 연구 내용이 위험한 물질과 관련되어 있어서, 보안에 극도로 민감했습니다. 미세먼지 한 톨도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요.”

    **류지한**: (천천히 작업대 옆 벽면으로 다가가며) “그렇다면 이 장치가 경보를 울린 시점에, 박사가 사망했다는 건 의미심장합니다. 과연 오작동이었을까요? 아니면… 누군가 의도한 작동이었을까요?”

    **(류지한은 손가락으로 벽면을 아주 살짝 쓸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도 느껴지지 않는 미세한 표면. 그러나 그의 ‘시공간 감각’은 뭔가 미묘한 것을 포착한 듯했다. 마치 오랜 시간 조용히 울리던 미세한 파장의 잔향을 느끼는 것처럼.)**

    **류지한**: “이 벽면… 셀레스티아의 모든 내부 구조는 고강도 합금으로 이루어져 있고, 강태혁 박사의 연구실은 특히 더 견고하게 설계되었죠. 이 벽면의 밀도와 진동수가 미세하게 틀어져 있습니다. 아주 잠깐 동안, 어떤 외부 에너지 간섭이 있었던 흔적입니다. 저희 팀의 스캐너에는 잡히지 않았던 아주 미세한 변형인데…”

    **수사관 A**: “변형이라뇨? 저희는 수십 차례 스캔했지만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박사의 장치도 정상 작동으로 보고되었습니다. 그저 경보음만 울렸을 뿐, 어떠한 물리적 충격이나 에너지 변화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류지한**: (차가운 눈빛으로 수사관 A를 바라보며) “당신들의 스캐너는 ‘존재하는 것’을 찾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때로 ‘사라진 것’ 혹은 ‘잠시 존재했다 사라진 것’에 숨어 있죠. 강태혁 박사가 개발한 ‘생체-공간 안정화 장치’는 이 방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렇다면 ‘내부’로부터의 간섭에는 어땠을까요? 박사 자신의 손에서 나온 간섭은요?”

    **(류지한은 벽면에 거의 코를 박을 듯이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벽면의 아주 작은, 거의 보이지 않는 부분에 고정되었다. 그곳에는 미세한 광학 패턴의 흐트러짐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공기 중에서 물결이 일었던 것처럼, 아주 잠시 비정상적인 간섭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흔적이었다. 그것은 어떤 빛이 반사된 잔상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한순간 요동쳤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은 듯한 미세한 잔상이었다.)**

    **류지한**: “이 장치는 외부 간섭을 막지만, 그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공간 자체를 안정화’ 시키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특정 주파수와 결합되면, 오히려 일시적인 ‘미세 차원 왜곡’을 일으킬 수 있죠. 박사가 여기에 실험적인 ‘에너지 증폭 장치’를 연결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또는 연구를 위해서. 이 모든 상황이 박사의 의도대로 흘러갔다고 믿고 있었을 겁니다.”

    **이안**: “미세 차원 왜곡이요? 그게 박사의 죽음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 기술이 정말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밀실 살인과 연결된다는 겁니까?”

    **류지한**: (고개를 들어 이안을 응시하며) “누군가 박사가 실험하던 ‘생체-공간 안정화 장치’의 잠재적 약점을 알고, 그것을 이용했습니다. 이 장치가 불안정해지면서, 아주 짧은 순간 동안 이 벽면에 지름 10센티미터 정도의 ‘일시적인 공간 균열’을 만들었을 겁니다. 박사의 생체 신호가 불안정해진 순간, 장치에 과부하가 걸리고, 그 틈이 벌어진 것이죠.”

    **[SFX]**: (주위의 웅성거림이 점차 잦아든다. 모두 류지한의 말에 집중하며 경악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을 짓는다.)

    **[SCENE 3]**

    **[장소]**: 셀레스티아 – 강태혁 박사 연구실

    **[시간]**: 다음 날 아침 (계속)

    **류지한**: “범인은 방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들어올 필요가 없었죠. 그들은 박사가 무의식적으로 만들어낸 ‘틈’을 노렸습니다. 스스로의 손으로 만든 빈틈을.”

    **(류지한은 강태혁 박사의 시신이 발견된 작업대 위를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그리고 작업대 한쪽 구석에 놓여있던, 박사가 평소 애용했을 법한 작은 홀로그램 프로젝터를 들어 올렸다. 평범해 보이는 그 프로젝터는 연구실의 다른 첨단 장비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띄지 않게 놓여 있었다.)**

    **류지한**: “이 프로젝터, 평소에는 연구 자료나 3D 모델링을 투사하는 데 사용됐겠죠. 하지만 범인은 이걸 ‘매개체’로 삼았습니다. 박사도, 심지어 이 방의 최첨단 센서들도 눈치채지 못할 방식으로요.”

    **(이안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류지한을 바라봤다.)**

    **이안**: “매개체라뇨? 프로젝터로 살인을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어떻게 그런 일이…”

    **류지한**: “네, 간접적으로는요. 박사의 ‘생체-공간 안정화 장치’는 외부 간섭을 막기 위해 모든 전자기파를 차단합니다. 하지만 만약, 내부에 있는 장치가 자체적으로 특정한 주파수를 발산한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장치 자체가 가진 고유의 취약점을 건드리는 주파수 말입니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그 장치의 ‘설계상 허점’을 이용한 겁니다.”

    **(류지한은 홀로그램 프로젝터를 켜고, 일반적인 사용 모드가 아닌 숨겨진 ‘정비 모드’를 활성화했다. 그러자 프로젝터에서 아주 미세한, 눈에 보이지 않는 특정 파장의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평범한 눈에는 단순한 전자기파처럼 보였지만, 류지한의 눈에는 뭔가 미묘한 파동을 띠고 있었다.)**

    **류지한**: “이 빛은 평소에는 절대 외부로 나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박사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생체-공간 안정화 장치’를 활성화했을 때, 이 프로젝터의 특정 정비 주파수가 장치와 공명하여 일시적인 공간 균열을 유도한 겁니다. 박사는 자신의 안전을 지키려다, 오히려 스스로에게 틈을 만든 셈이죠. 치밀하게 계산된 유도였을 겁니다.”

    **(그는 다시 박사가 사망했던 벽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류지한**: “경보음이 울렸던 순간, 이 벽면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지름 10센티미터 정도의 ‘미세 차원 왜곡 구멍’이 열렸습니다. 그 시간은 단 0.3초. 일반적인 센서로는 감지조차 불가능한 찰나의 순간입니다. 범인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미 그들은 박사의 연구 패턴과 장치의 매뉴얼을 꿰뚫고 있었으니까요.”

    **이안**: (숨을 들이쉬며) “그럼, 주사기는… 그 0.3초 동안?”

    **류지한**: “범인은 고도로 정밀하게 조준된 ‘나노 주사 드론’을 이용했습니다. 0.3초의 틈을 통해 드론이 침입하여 박사에게 약물을 주입하고, 곧바로 회수된 것이죠. 드론은 워낙 작고 빨라서, 박사가 눈치채기도 전에 모든 작업이 완료되었을 겁니다. 그 짧은 순간에 흔적을 남기지 않고, 마치 유령처럼 사라진 겁니다.”

    **(류지한은 주머니에서 작은 휴대용 스캐너를 꺼내들었다. 그리고 그 스캐너를 아까 자신이 미세한 흔적을 발견했던 벽면에 가져다 댔다. 스캐너 화면에는 일반 센서로는 감지되지 않던, 지극히 미세한 잔류 에너지 패턴과 함께, 아주 작고 흐릿한 원형의 이미지 데이터가 깜빡였다. 그것은 어떤 물질이 공간을 강제로 통과할 때 발생하는 특유의 마찰 에너지 흔적이었다.)**

    **류지한**: “이것은 ‘나노 주사 드론’이 공간을 통과하면서, 아주 미세하게 발생시킨 ‘차원 마찰열’의 흔적입니다. 이 스캐너는 특수하게 개조된 것으로, 극미세한 시공간적 변동까지 감지할 수 있습니다. 박사의 피부에 남은 주사 자국은, 바로 그 드론의 침투 흔적이죠. 주사 드론의 표면에 극도로 미세한 차원 필드를 적용시켜 마찰열을 최소화했지만, 완벽하게 감출 수는 없었죠.”

    **(이안과 수사관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증거를 보고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완벽한 밀실, 완벽한 보안, 그리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범인. 그러나 류지한은 보이지 않는 진실을 꿰뚫어 보았다.)**

    **류지한**: “범인은 강태혁 박사의 연구 동향과 장치의 취약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취약점을 이용해, ‘외부’ 침입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고 ‘내부’의 틈을 이용한 것이죠. 이건 단순한 살인이 아닙니다. 박사의 기술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동반된, 완벽하게 계산된 ‘기술 살인’입니다. 고도로 지능적이고, 오만할 정도로 대담한 범행이죠.”

    **(류지한은 차분하게 스캐너를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눈빛은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가 있었다. 누가 강태혁 박사의 기술을 그렇게 잘 알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 ‘기술 살인’의 진짜 목적은 무엇일까.)**

    **류지한**: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입니다. 박사의 기술에 대해 이렇게 깊이 알고, 이 프로젝터의 숨겨진 정비 주파수까지 파악하고 있던 자는 대체 누구일까요? 아마도 박사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 혹은 가장 치명적인 경쟁자였을 겁니다. 이 살인은 단순히 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박사의 연구 자체를 장악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연구실 안에는 류지한의 마지막 말이 길게 울려 퍼졌다. 셀레스티아의 완벽한 밀실 살인은, 이제 새로운 차원의 미스터리로 접어들었다.)**

    **[FADE OUT]**

  • 대체 역사물 독립적인 단편 소설

    대동국(大東國)의 심장부, 천궁산(天宮山) 자락에 자리한 기계공방 ‘나선루(螺旋樓)’. 갓 스무 살을 넘긴 두 청년의 열기로 언제나 뜨거웠다. 그들의 이름은 하준(河俊)과 강태(姜泰). 하나는 기발한 착상과 섬세한 손길을 지닌 천재 장인, 다른 하나는 웅대한 비전과 탁월한 설득력을 겸비한 책략가였다. 둘은 ‘천공 기관(天空機關)’이라는 거대한 꿈을 공유했다. 하늘을 나는 기계, 대동국을 새로운 시대로 이끌어갈 동력원을 만드는 것이 그들의 염원이었다.

    “하준아, 이대로라면 한 달 안에 시운전이 가능할 걸세! 그때가 되면 이 나라의 모든 비행선이 우리의 기관으로 날아오를 게야. 상상해보게, 서해의 고래잡이 어선부터 북방의 파수대까지, 우리의 기계가 대동국의 핏줄이 되는 날을!” 강태의 목소리는 언제나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그의 눈빛에는 단순한 공학도를 넘어선 무언가, 거대한 야망이 번뜩였다.

    하준은 강태의 비전을 묵묵히 들으며 톱니바퀴 하나하나를 매만졌다. 그의 손끝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처럼 정교했다. “기관은 살아있는 심장과 같네. 겉모습만 화려해서는 안 되지. 단 하나의 톱니가 어긋나도 모든 것이 멈출 수 있어. 우리는 완벽을 추구해야 해, 강태.” 하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강태 못지않은 뜨거운 열정이 숨어 있었다. 그에게 천공 기관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척박한 땅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의 삶을 바꿀 희망이자, 하늘을 향한 인류의 오랜 꿈을 현실로 만드는 도전이었다.

    두 사람은 밤낮없이 나선루에서 기계를 조립하고, 설계도를 수정하며 꿈을 키웠다. 어느 날, 마침내 천공 기관의 시제품이 완성되었다. 웅장한 강철과 황동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심장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묵직하게 움직였다. 증기가 뿜어져 나오고, 기묘한 에테르 동력이 내부의 수정구를 밝히자 기관은 낮은 굉음을 내며 전율했다.

    “완성이다! 하준아, 우리가 해냈어!” 강태는 하준을 끌어안으며 기쁨에 겨워 소리쳤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그 어떤 질투나 배신도 끼어들 틈이 없어 보였다.

    며칠 후, 왕궁에서 천공 기관의 시연회가 열렸다. 왕과 대신들,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강태는 유려한 말솜씨로 천공 기관의 원리와 미래를 설명했다. 하준은 그 뒤편에서 묵묵히 기관을 조작하며 강태의 발표를 도왔다. 그들의 협력은 완벽했다. 시연회는 대성공이었고, 왕은 감격하여 두 젊은 공학도를 칭송했다.

    밤늦게, 나선루로 돌아온 하준은 강태와 술잔을 기울였다. “내일이면 우리는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 될 걸세, 친구. 대동국은 우리의 손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게야.” 강태는 잔을 부딪치며 환하게 웃었다. 그의 눈빛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하준은 어쩐지 그 미소 뒤에 드리워진 묘한 그림자를 읽어낼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왕의 조칙이 떨어졌다. 조칙에는 강태가 천공 기관의 개발 공로를 인정받아 정1품 봉상시(奉常寺) 제조(提調)로 임명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하준에게는 역적의 누명이 씌워졌다.

    “하준은 천공 기관의 핵심 설계도를 이웃 나라 왜국(倭國)에 팔아넘기려 한 대역죄인이다. 즉시 의금부로 압송하여 국문을 시행하라!”

    왕의 조칙은 천둥처럼 나선루를 때렸다. 믿을 수 없는 말에 하준은 멍하니 강태를 바라보았다. 강태는 싸늘한 얼굴로 하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강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우리가 함께 만든 기관 아닌가?” 하준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흥, 함께? 너의 그 어설픈 설계로는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천공 기관은 처음부터 내 것이었어. 너는 그저 나를 돕는 도구에 불과했지. 게다가, 너는 내 아이디어를 도용하려 했고, 그 사실을 왜국에 알리려 했던 위험한 인물이다.” 강태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연민도 없었다. 그의 눈빛은 뱀처럼 차가웠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하준. 네 이름은 대동국의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질 것이다.”

    강태가 내민 증거는 너무나도 완벽했다. 하준의 필적으로 위조된 서신, 왜국 상인과의 밀거래 증거, 그리고 천공 기관의 초기 결함을 과장하여 국가 기밀을 유출하려 했다는 혐의까지. 모든 것이 치밀하게 조작되어 있었다. 하준은 변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의금부 지하 감옥으로 끌려갔다.

    차가운 돌바닥에 몸을 뉘인 하준은 믿었던 친구의 배신에 몸서리쳤다. 그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자신을 영웅으로 추켜세우던 강태의 미소, 함께 꿈을 나누던 밤들의 기억이 칼날이 되어 심장을 꿰뚫었다.

    ***

    하준은 지옥 같은 감옥에서 매일매일 고통받았다. 끊임없는 고문과 죽음보다 더한 모멸감 속에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정신은 부서져 내렸다. 하지만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 하나가 타올랐다. 복수심이었다.

    ‘강태… 네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듯이, 나 또한 너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갈 것이다.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탈출은 기적처럼 찾아왔다. 감옥의 한 공학도 출신 간수는 하준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에게 탈출 계획을 알려주었다. 하준은 그 공학도의 도움으로 독방의 낡은 환풍구를 뜯어내고, 지하 수로를 통해 밤의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세상은 변해 있었다. 하준이 감옥에 갇힌 지 5년 만에, 강태는 대동국의 실세가 되어 있었다. 그의 지휘 아래, 천공 기관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대동국 전역에 보급되었다. 비행선은 하늘을 가로질렀고, 기관의 동력으로 움직이는 자동 인형들이 거리를 활보했다. 사람들은 강태를 ‘기계술의 성인(聖人)’이라 칭송했고, 그의 초상화는 모든 관청에 걸려 있었다.

    하준은 강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은 가장 후미진 곳으로 숨어들었다. 이름도, 얼굴도 바꾸고, ‘그림자 공학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암흑가의 기계 상인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팔았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순진한 공학도가 아니었다. 그의 손끝은 더욱 정교해졌고, 그의 머리는 더욱 냉철해졌으며, 그의 심장에는 오직 복수만이 가득했다.

    그는 강태의 모든 움직임을 주시했다. 강태가 ‘천공 기관’의 설계도를 자신의 이름으로 등록하고, 백성들에게 선심을 베풀며 명성을 쌓는 동안, 하준은 강태가 숨기고 있는 치명적인 약점들을 찾아냈다. 강태는 하준의 초기 설계에서 비용 절감과 빠른 생산을 위해 중요한 안전장치들을 제거했었다. 이는 언젠가 대규모 참사를 불러올 수 있는 위험한 변경이었다. 하준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태가 주도하는 대동국의 핵심 동력원인 ‘하늘 궁전(天空宮殿)’의 심장이 되는 거대한 천공 기관. 하준은 그 기관의 심장부를 겨냥했다. 그는 암암리에 ‘강태의 기계’에 작은 오작동들을 심기 시작했다. 거대한 비행선이 항해 중 갑작스러운 동력 저하를 일으키거나, 자동 인형들이 예상치 못한 오류를 내뿜는 일들이 잦아졌다. 사람들은 단순한 기계적 결함으로 치부했지만, 강태는 미스터리한 방해에 점차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누가 감히 나의 업적에 흠집을 내는가! 모든 기계의 유지보수 기록을 가져와라! 단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다!” 강태는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신하들을 다그쳤다.

    하준은 그의 반응을 즐겼다. 마치 거대한 거미줄에 걸린 먹이를 가지고 노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서서히 덫을 조일 때가 되었다.

    ***

    대동국 건국 100주년 기념일, 강태는 ‘하늘 궁전’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궁전은 화려한 비행선단을 이끌고 하늘을 유영했고, 그 아래에는 수많은 백성이 모여들었다. 강태는 백성들에게 자신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자랑스럽게 설파하려 했다. 그는 이제 대동국의 살아있는 전설이었다.

    연회의 절정, 강태가 연단에 올라 화려한 연설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궁전 내 모든 기계 장치들이 일제히 굉음을 내며 멈춰 섰다.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수정등은 빛을 잃었고, 자동 인형 악사들은 연주를 멈췄다. 궁전 내부는 삽시간에 혼란과 어둠에 휩싸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당장 복구하지 못할까!” 강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연단 위로 조용히 걸어 나왔다. 검은 장포를 두르고, 얼굴은 깊은 후드로 가려져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낡고 해진 한 뭉치의 설계도가 들려 있었다.

    “강태. 오랜만이다. 나의 친구.”

    그림자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강태의 귓가에는 천둥처럼 울렸다. 강태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보고 온몸이 경직되었다.

    “하… 하준… 네가 어떻게…!” 강태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하준은 후드를 벗었다. 그의 얼굴은 예전의 순진하고 꿈 많던 청년의 모습이 아니었다. 깊게 팬 주름과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은 그가 겪었던 고통의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강태, 네가 나에게 씌웠던 누명, 네가 훔쳐갔던 나의 꿈… 그 모든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되돌려줄 것이다.” 하준은 손에 든 설계도를 펼쳐 보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천공 기관’의 최초 설계도와 그 이후 강태가 임의로 변경했던 수많은 수정안들이었다.

    “이것은 천공 기관의 진정한 설계도다. 그리고 이것은 강태 네가 비용 절감을 위해 제거한 안전장치들의 기록이다. 이대로라면 ‘하늘 궁전’은 머지않아 폭주하여 추락할 것이다! 모든 대동국 백성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하준의 목소리는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강태는 필사적으로 부인했다. “무슨 헛소리냐! 저 자는 역적 하준이다! 그의 말은 모두 거짓이다!”

    하지만 하준은 냉정했다. “거짓인지 아닌지는 곧 밝혀질 것이다. 강태, 네가 내 이름을 지우려 했던 것처럼, 나 또한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하준은 미리 준비해 둔 소형 기계 장치를 작동시켰다. 연회장 벽면에 설치된 거대한 영사 장치가 빛을 내며 강태가 저질렀던 모든 부패와 비리, 그리고 하준에게 누명을 씌웠던 과정들을 시각적으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강태의 교활한 속삭임, 조작된 증거, 그리고 자신의 업적을 찬탈하는 강태의 오만한 표정까지. 모든 것이 생생하게 펼쳐졌다.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강태에게 환호하던 백성들과 귀족들은 경악하며 술렁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영웅이 얼마나 거대한 거짓 위에 서 있었는지 깨달았다. 강태는 비명을 지르며 하준에게 달려들었지만, 하준은 강태의 팔을 붙잡고 냉정하게 말했다.

    “네가 내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을 때, 나는 결심했다. 너에게는 단순한 죽음조차 과분하다고. 네가 가장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 것, 바로 네 이름과 네가 쌓아 올린 모든 업적이 네 앞에서 산산조각 나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하늘 궁전’의 거대한 심장, 천공 기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하준이 설치해 둔 소형 장치가 안전장치 없이 불안정하게 작동하던 기관의 결함을 증폭시켰고, 궁전 전체가 흔들렸다. 경고등이 붉게 번쩍였고, ‘하늘 궁전’은 서서히 고도를 잃기 시작했다.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질렀다. 강태는 자신이 만든 기계가 자신을 파멸시키는 광경을 보며 절규했다. 하준은 침착하게 다른 장치를 꺼내 들었다. “이것은 내가 너 몰래 심어둔 최후의 안전장치다. 이대로 궁전이 추락한다면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다칠 터. 나는 너처럼 무고한 피를 흘리고 싶지 않다. 다만… 너의 업적이, 네 이름이 영원히 추락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하준이 버튼을 누르자, ‘하늘 궁전’은 추락 직전 가까스로 멈춰 섰다. 하지만 기관의 핵심부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궁전은 더 이상 하늘을 날 수 없게 되었다. 강태는 자신의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재가 되는 것을 보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왕과 대신들은 분노하며 강태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모든 것이 끝난 후, 하준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강태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모든 관직을 박탈당한 채 평생을 감옥에서 썩게 되었다. 그가 쌓아 올린 명성과 업적은 한순간에 무너졌고, 그의 이름은 배신과 탐욕의 상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대동국은 ‘하늘 궁전’의 파괴와 함께 강태의 거짓된 번영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진실을 알게 되었고, 하준의 희생과 강태의 배신은 두고두고 회자되는 이야기가 되었다.

    하지만 하준의 마음속에는 복수의 달콤함 대신 씁쓸한 공허함만이 남았다. 그는 강태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지만, 동시에 자신 또한 모든 것을 잃었다. 꿈 많던 청년의 순수함, 친구와의 우정, 그리고 세상에 대한 믿음까지도. 그는 더 이상 과거의 하준이 아니었다. 그림자 공학자로서,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복수는 끝났지만, 그의 영혼은 여전히 배신의 상처 위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하준은 덧없이 흘러가는 구름 속에서 한때 함께 꾸었던 ‘천공 기관’의 비전을 떠올렸다. 그것은 빛났지만, 이제는 차가운 그림자만 드리워진 허상일 뿐이었다.

  • 크툴루 신화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작품 제목:** [검은 심연 아래 피어난 무림]

    **에피소드 제목:** 1화: 피어나는 어둠, 고수들의 서막

    **[장면 1]**

    **#1. 광활한 하늘 아래 웅장하게 펼쳐진 거대한 경기장 전경.**
    수많은 인파가 빽빽하게 들어찬 관중석. 경기장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무대가 자리하고 있다. 오색찬란한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고대의 문양들이 새겨진 육중한 돌기둥들이 경기장을 에워싸고 있다. 햇살이 강렬하게 내리쬐지만, 어딘가 모르게 기묘한 불안감이 감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의 눈이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 분위기.

    **나레이션 (청운):**
    수백 년을 이어온 천하제일무도회.
    무림 고수들의 숙명과도 같은 대회.
    그저 힘을 겨루는 단순한 장이 아니었다.
    이 땅의 운명을 짊어진 자를 가려내는,
    오랜 약속이자 동시에… 거대한 제물 의식과도 같은.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번 대회는, 무언가… 달랐다.

    **[장면 2]**

    **#2. 관중석의 열기가 폭발하는 가운데, 무대 위 심판이 힘찬 목소리로 외친다.**
    심판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지만, 그 목소리에는 천둥 같은 기세가 실려 있다. 그는 고대 문양이 정교하게 수놓아진 화려한 의복을 입고 있다.

    **심판:**
    “천하제일무도회! 그 대망의 서막이 올랐다!”
    “이곳에 모인 강호의 영웅들이여! 그대들의 땀과 피, 그리고 혼을 바쳐! 천하에 지존의 이름을 떨쳐라!”

    **SFX:** 와아아아아!!!! (관중들의 함성, 지축을 흔드는 듯한) 쿵-! 쿵-! (우렁찬 북소리가 경기장을 뒤흔든다)

    **[장면 3]**

    **#3. 무대 한쪽, 수많은 참가자들 틈에서 청운이 고개를 들어 무대를 올려다본다.**
    그는 아직 앳된 얼굴이지만, 눈빛만큼은 깊고 강인하다. 허리에는 오랜 세월 그의 손을 거쳤음에도 윤기 나는 검집과 낡았지만 잘 관리된 검이 차여있다. 그의 옆으로는 화려한 복장을 한 강호의 문파 소속 무사들이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그를 훑어본다. 마치 맹수들이 서로를 탐색하듯.

    **청운 (독백):**
    이상하다…
    온몸의 기운이 곤두서는 기분이야.
    이토록 성대한 잔치에, 왜 이렇게…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까.
    수많은 생명의 기운이 용솟음치는데도, 그 밑바닥에 깔린 이 싸늘한 한기.

    **[장면 4]**

    **#4. 청운의 시선이 문득 관중석 가장 높은 곳, 귀빈석으로 향한다.**
    그곳에는 대회 주최자인 듯 보이는 몇몇 노인들이 앉아 있다. 그들 중 한 명, 검은 도포를 두르고 깊은 갓을 쓴 노인 ‘묵염’이 유독 그의 시선을 잡아끈다. 묵염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청운은 순간적으로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을 느낀다. 마치 차가운 뱀이 그의 심장을 스쳐 지나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

    **청운 (독백):**
    저 노인은… 누구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아. 그의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비틀리는 것만 같다.

    **[장면 5]**

    **#5. 묵염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가는 듯한 섬뜩한 클로즈업.**
    그의 눈동자 속에서 찰나의 순간, 검붉은 기운이 일렁이는 환영이 스쳐 지나간다. 마치 깊은 심연에서 솟아오른 불길한 기운처럼.

    **묵염 (속삭이듯, 내레이션 톤으로):**
    시작되는군…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무구한 영혼들이 바쳐질 시간.

    **[장면 6]**

    **#6. 무대 위에서 첫 번째 대련이 시작된다.**
    두 명의 무사가 격렬하게 부딪히며 검과 권을 섞는다. 강호의 고수들답게 한 수 한 수가 치명적이다. 관중들은 열광하고, 경쾌한 타격음이 경기장을 가득 채운다. 무대 바닥의 견고한 돌들이 무사들의 발차기와 권압에 조금씩 금이 간다.

    **SFX:** 챙강! (칼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 콰앙! (강력한 권풍이 격돌하는 소리) 쉬이이익-! (빠르게 움직이는 잔상)

    **[장면 7]**

    **#7. 청운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다.**
    주변의 소음과 열기가 멀어진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흐르는 기운을 느낀다. 그러나 동시에, 알 수 없는 탁하고 끈적이는 기운이 외부에서 스며들어오는 것을 감지한다. 마치 진흙탕처럼 그의 정신을 흐리고, 그의 본능적인 감각을 짓누르는 기운.

    **청운 (독백):**
    이건… 내 기운이 아니야.
    대회장의 열기 속에서 이질적인 무언가가 뒤섞여 있어.
    마치… 수억의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듯한 끔찍한 감각.
    혹은 죽은 자들의 비명소리 같은.

    **[장면 8]**

    **#8. 그의 눈이 번쩍 뜨인다.**
    그는 무대 위 대련을 바라본다. 방금까지 호쾌하게 검을 휘두르며 상대를 몰아붙이던 한 무사가 갑자기 휘청거리며 비틀거린다. 그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핏기 없이 창백해지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듯 흐려진다. 마치 그의 생명력이 갑자기 뽑혀 나간 것처럼.

    **무사 1:**
    크윽… 으으… 머리가… 깨질 것 같군…

    **[장면 9]**

    **#9. 상대 무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력한 일격을 날린다.**
    쓰러진 무사는 그대로 무대 밖으로 날아가 떨어진다. 그의 몸은 힘없이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고꾸라진다.

    **심판:**
    “승자, 강하!”

    **[장면 10]**

    **#10. 승리한 무사, ‘강하’가 싸늘한 표정으로 쓰러진 상대를 내려다본다.**
    그는 건장한 체격에 무표정한 얼굴, 짧게 자른 머리가 인상적이다. 그의 어깨에 새겨진 문양은 명문 ‘강림문’ 소속임을 알린다. 그의 눈빛에는 승리의 만족감보다, 알 수 없는 회의감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간다.

    **강하 (냉담하게):**
    정신을 잃은 자에게는 자비란 없다.
    겨우 그 정도 기운으로 이 무대에 설 자격은 없어.

    **[장면 11]**

    **#11. 청운은 강하가 쓰러뜨린 무사를 응시한다.**
    주변 사람들은 그저 대련 중 지쳐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는 듯하지만, 청운의 예민한 눈에는 그 무사의 육체에서 검붉은 기운이 미미하게 새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 마치 그의 생명력이 흡수된 것처럼, 육신만 남은 껍데기처럼 보인다.

    **청운 (독백):**
    착각이 아니었어.
    저 사람… 기운이 빨려 나간 것 같아.
    대체 무슨 일이… 이 대회에 무슨 저주가 걸린 거지?

    **[장면 12]**

    **#12. 강하가 고개를 돌려 청운을 똑바로 응시한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친다. 강하의 눈빛에는 날카로운 경계심과 함께, 무언가를 꿰뚫어 보려는 듯한 예리함이 담겨 있다. 마치 청운이 자신과 같은 불길한 감각을 공유하는 것을 아는 것처럼.

    **강하 (낮게 읊조리듯):**
    …이 아이는. (불안정한 시선을 던지며)

    **[장면 13]**

    **#13. 심판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진다.**

    **심판:**
    “다음 대련! 남궁 청운 대 화산파의 독고찬!”

    **[장면 14]**

    **#14. 청운이 천천히 무대로 걸어 나간다.**
    그의 발걸음은 굳건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알 수 없는 공포와 함께, 이 거대한 그림자의 정체를 파헤치려는 강한 의지가 타오른다. 무대 중앙에 서자,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끈적하게 달라붙는 느낌이 더욱 강해진다. 머릿속으로 기분 나쁜 속삭임이 울리는 듯하다.

    **청운 (독백):**
    이 대회의 진짜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기이한 기운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답은… 이 무대 위에서 찾아야만 한다. 내 모든 것을 걸고.

    **[장면 15]**

    **#15. 청운과 독고찬이 서로를 마주 보고 선다.**
    독고찬은 거친 인상의 사내로, 등에는 거대한 도끼를 메고 있다. 그의 눈에는 이미 광기 어린 열정이 가득하다. 마치 맹수처럼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온다.

    **독고찬:**
    “흥! 풋내기 주제에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운도 좋군!”
    “하지만 여기까-!”

    **[장면 16]**

    **#16. 독고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눈동자가 갑자기 뒤집히며 검은 실핏줄이 도드라진다.**
    그의 주변에서 검붉은 오라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그의 표정은 일그러지고, 입꼬리가 기괴하게 찢어진다. 마치 다른 존재에게 잠식된 것처럼, 그의 얼굴에 이질적인 미소가 걸린다. 피부 밑으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

    **SFX:** 즈으으으읍… (불길한 기운이 피어나는 소리) 크르르릉… (목구멍에서 짐승 같은 소리가 새어 나온다)

    **청운 (놀란 표정):**
    …?!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하고 한 발 물러선다)

    **독고찬 (목소리가 깊고 탁하게, 그리고 여러 겹으로 변하며):**
    “크하하… 흐흐흐… 그래, 죽여라… 모두를… 죽여야 해… 저들을… 그분께 바쳐야 해…!”

    **[장면 17]**

    **#17. 독고찬이 광기 어린 비명을 지르며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청운에게 달려든다.**
    도끼 끝에서 검붉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다. 그 기운은 평범한 무공의 기운이 아니다. 뼈를 저미는 듯한 냉기와 섬뜩한 위압감이 청운을 덮친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어둠 그 자체 같았다.

    **SFX:** 콰아아앙! (도끼가 바닥을 찍으며 거대한 충격파를 일으키는 소리) 쩌저적-! (땅이 갈라지며 심연이 드러나는 듯한 소리)

    **청운 (독백):**
    이건… 무공이 아니야!
    이 기운은… 내가 감지했던 그 불길한 그림자 그 자체!
    이건…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괴물의 힘이다!

    **[장면 18]**

    **#18. 청운이 도끼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몸을 날린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함께 결연한 의지가 스친다. 물러설 수 없다. 이 공포의 정체를 밝혀내야만 한다.

    **청운:**
    “이 대회의 진짜 모습을… 내가 파헤쳐야 한다!”
    “이 알 수 없는 그림자에… 맞서 싸워야만 해!”

    **[장면 19]**

    **#19. 무대 위에서 광기에 사로잡힌 독고찬과 필사적으로 피하며 반격의 기회를 엿보는 청운.**
    그들 위로, 경기장 가장 높은 귀빈석에서 묵염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이 모든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의 그림자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들이 일렁이는 듯한 환영이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간다. 그것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의 어둠에서 튀어나온 듯한 눈동자들이었다.

    **나레이션 (묵염):**
    아직은 작은 불씨에 불과하지만…
    이 불씨들이 타오를 때,
    오랜 잠에서 깨어날 것이다.
    그분께서… 이 피와 혼이 바쳐진 무대 위로.
    강대한 혼들이여… 그대들의 모든 것을 바쳐라.
    어둠이 피어나리라.

    **[장면 20]**

    **#20. 검은 심연이 드리운 하늘 아래, 광기로 물들어가는 무대.**
    청운의 결연한 눈빛과, 그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독고찬의 기괴한 미소, 그리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듯 높이 선 묵염의 모습이 대비되며, 고요하지만 끔찍한 공포가 휘몰아친다. 무림의 축제는, 이제 거대한 악몽의 서막을 열었을 뿐이다.

    **[에피소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