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오래된 황동 회중시계의 톱니바퀴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클로즈업. 그중 한 톱니바퀴 끝에 작고 붉은 핏방울 하나가 맺혀 있다. 배경은 뿌연 증기로 가득 찬 도시의 실루엣.)
**[타이틀]**
증기 도시의 밀실: 톱니바퀴의 그림자
—
**[장면 1]**
**[배경]** ‘강철 심장’이라 불리는 증기 도시, 아르카디아의 밤. 낡은 가스등이 띄엄띄엄 켜진 좁고 습한 골목길. 머리 위로는 거대한 증기 파이프가 미로처럼 얽혀 있고, 멀리 하늘에는 거대한 비공정의 불빛이 유유히 떠다닌다. 류진과 강인호 경위가 웅웅거리는 증기 기관 소리를 배경 삼아 급히 발걸음을 옮긴다.
**[강인호 경위]** (땀을 닦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류진 씨, 제발 좀 빨리! 이런 식으로 느긋하게 걷다가 범인이 하늘로 날아가 버리겠어요!
**[류진]** (낡은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삐딱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하늘로 날아가려면 비공정을 타야 할 텐데, 그 비공정이 이리도 서두르는 당신의 마음을 알 리 있겠습니까. 사건은 언제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범인도 마찬가지고요.
**[강인호 경위]** (답답하다는 듯 이마를 짚는)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이번엔 정말 골치 아픈 사건입니다! 알폰스 경이 살해당했습니다!
**[류진]**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는)
알폰스 경? 그 강철 심장의 대가 말입니까? 흥미롭군요. 누가 감히 그분의 톱니바퀴를 멈추게 했을까.
**[강인호 경위]** (류진의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고 재촉하는)
그것도… 밀실에서 말입니다! 자, 어서요!
**[장면 2]**
**[배경]** 알폰스 경의 저택 외관.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웅장하고 오래된 빅토리안 양식의 건물로, 곳곳에 황동 장식과 거대한 증기 파이프가 노출되어 있다. 대문 안쪽 마당에는 여러 대의 증기 자동차와 경찰 병력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저택 내부는 어둡고 묵직한 오크 나무와 낡은 태피스트리로 꾸며져 있다. 서재 앞 복도에는 폴리스 라인이 쳐져 있고, 몇몇 경관들이 웅성거리고 있다.
**[경관 1]** (작은 목소리로)
세상에, 알폰스 경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경관 2]**
그것도 밀실이라지? 문은 잠겨 있고, 창문은 쇠창살에…
**[강인호 경위]** (경관들을 향해 손짓하며)
모두 조용! 류진 씨가 오셨으니 쓸데없는 소리는 집어치우고!
**[류진]** (고개를 끄덕이며 폴리스 라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상황은 제가 파악하겠습니다.
**[장면 3]**
**[배경]** 알폰스 경의 서재. 공기가 무겁고 차갑다. 방 안은 온통 복잡한 기계 부품, 정교한 설계도면, 낡은 공구들로 어지럽다. 책상 위에는 수많은 톱니바퀴와 스프링이 흩어져 있고, 그 한가운데에 알폰스 경이 얼굴을 박고 엎드린 채 미동도 없다. 그의 등에는 작업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교한 세공용 칼이 깊숙이 박혀 있다. 방 한쪽에는 거대한 증기 오르간이 위압적으로 서 있고, 그 옆으로 난 벽난로는 차갑게 식어 있다. 창문은 두터운 쇠창살로 막혀 있고, 안쪽에서는 묵직한 잠금장치로 고정되어 있다. 육중한 오크 나무 문은 안에서 굵은 빗장이 걸려 있었으며, 문고리 바로 아래 바닥에는 열쇠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강인호 경위]** (조심스럽게 류진에게 다가가며)
발견자는 저택의 가정부, 엘리자베스 부인입니다. 아침에 알폰스 경이 나오지 않자 걱정되어 찾아왔다가 문이 잠겨 있어 비상용 열쇠로 열려 했는데,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뒷마당에서 사다리를 가져와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다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고 비명을 질렀다고요.
**[류진]** (시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하게)
창문은?
**[강인호 경위]**
보시는 바와 같이, 밖에서 쇠창살로 막혀 있고 안쪽에서 잠금장치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성인 남자가 드나들 공간은 없습니다. 연통도 마찬가지고요. 완벽한 밀실입니다.
**[류진]** (턱을 만지작거리며)
흠… 완벽. 이 세상에 완벽이란 없습니다. 오직 착각만이 완벽할 뿐이지요.
**[장면 4]**
**[배경]** 서재. 류진은 마치 고고학자가 유적을 발굴하듯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방 안을 살핀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은 책상 위 복잡한 부품들, 벽에 걸린 낡은 태엽 시계들, 그리고 거대한 증기 오르간 위를 스쳐 지나간다. 그는 먼저 시체 주변을 맴돌며 시선의 끝으로 시체의 자세, 칼의 종류, 바닥에 떨어진 열쇠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어서 문으로 다가가 굵은 빗장을 천천히 살핀다. 그의 손가락이 빗장 옆, 문틈의 미세한 틈새를 스치듯 쓸어본다.
**[류진]**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흐음.
**[강인호 경위]**
무언가 찾으셨습니까?
**[류진]** (작게 고개를 젓는)
아직은요. 이 방의 모든 톱니바퀴들이 저에게는 아직 제각각입니다. 이 방에는 온통 알폰스 경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군요. 벽에 걸린 시계들, 탁자 위 미완성 모형, 심지어… (증기 오르간으로 다가가 과열된 연통을 만져보는) 이 증기 오르간까지. 발견 당시 연통이 과열되어 있었다고 했죠?
**[강인호 경위]**
네. 오르간 자체는 고장 난 곳이 없었는데, 연통만 유독 뜨거웠습니다. 아마 알폰스 경이 죽기 직전까지 오르간을 만졌던 모양입니다.
**[류진]** (연통에 손가락을 대고 옅은 미소를 짓는)
흐음… 과연 그럴까요. (그는 다시 문으로 돌아가 무릎을 꿇고 문턱 아래쪽, 바닥의 작은 얼룩을 들여다본다. 마치 기름때처럼 보이는, 그러나 평범하지 않은 작은 흔적이었다.) 여기… 이 흔적은…
**[장면 5]**
**[배경]** 알폰스 경 저택의 응접실. 불꽃이 약하게 타오르는 벽난로 앞에는 세 명의 용의자, 알폰스 경의 젊은 조수 세드릭, 먼 친척이자 가정부인 엘리자베스, 그리고 사업 경쟁자 오토가 초조하게 앉아 있다. 류진과 강인호 경위가 그들 각자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류진]** (세드릭을 똑바로 응시하며)
세드릭 씨. 알폰스 경의 유일한 조수라고 들었습니다. 스승님과는 사이가 좋았습니까?
**[세드릭]**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비비며)
네, 물론입니다! 저는 알폰스 경을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가끔… 경께서 너무 비밀이 많으셔서… 신형 비공정 동력 장치 개발 건 때문에 의견 충돌이 있긴 했지만요…
**[강인호 경위]**
어젯밤엔 어디에 있었습니까?
**[세드릭]**
저는… 제 작업실에서 밤늦도록 도면을 수정했습니다. 혼자였습니다.
**[류진]** (다음으로 엘리자베스에게 시선을 돌리는)
엘리자베스 부인. 알폰스 경의 재산을 관리하고 계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엘리자베스]** (침착하지만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얼굴로)
네. 경께서 저에게 그 일을 맡기셨습니다. (잠시 망설이다가) 하지만… 최근 경께서 모든 재산을 한 자선 단체에 기부할 생각을 하고 계셔서… 제가 말렸습니다만…
**[류진]**
어젯밤 알리바이는요?
**[엘리자베스]**
저는 제 방에 있었습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요.
**[류진]** (마지막으로 오토에게 시선을 고정하는)
오토 씨. 당신의 회사와 알폰스 경의 회사는 수년째 경쟁 관계였습니다.
**[오토]**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맞는 말입니다. 그 노인은 언제나 저보다 한 발 앞서 나갔지. 불쾌했소. 하지만 살인이라니, 그건 너무 비약이 아니오? 난 어젯밤 사업 파트너와 만찬을 즐겼소. 내 알리바이는 확실합니다.
**[장면 6]**
**[배경]** 다시 서재. 용의자들의 증언을 들은 류진이 찾은 단서들을 조합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의 눈은 벽에 걸린 알폰스 경의 초상화, 정교하게 만들어진 톱니바퀴 모형, 그리고 탁자 위 펼쳐진 복잡한 설계도면 위를 맴돈다. 그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소리 없는 연출이 이어진다.
**[류진]** (강인호 경위에게 나직이)
강 경위님. 알폰스 경은 무엇에 관심이 많았습니까? 특히 작은 기계 장치들 말입니다.
**[강인호 경위]** (기록을 뒤적이며)
음… 경은 평소에도 소형 증기 동력 장치나 원격 조작이 가능한 자동 장치 개발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손가락만 한 로봇 팔 같은 것도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전부 미완성으로 남아있다고…
**[류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미완성… 그러나 살인에 쓰일 만큼은 충분히 완성되었을지도 모르죠. (그는 문틈의 작은 흠집과 바닥의 흔적, 그리고 증기 오르간의 연통을 번갈아 바라본다.) 톱니바퀴, 증기, 그리고… 그 작은 조작. 이제야 이 톱니바퀴들이 제자리를 찾는 것 같군요.
**[장면 7]**
**[배경]** 저택의 넓은 응접실. 모든 용의자와 경찰들이 류진을 중심으로 모여 있다. 류진은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사건의 진실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는 마치 마술사가 트릭을 설명하듯 서재의 구조와 발견된 단서들을 하나씩 짚어 나간다.
**[류진]** (모두를 둘러보며)
이 사건은 완벽한 밀실 살인으로 보였습니다. 문은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고, 열쇠는 시체 옆에 떨어져 있었죠. 창문은 쇠창살과 잠금장치로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밀실’이라는 착각을 위한 완벽한 장치였습니다.
**[류진]**
범인은 알폰스 경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 이 방을 밀실로 위장해야 했죠. 어떻게 했을까요? 문틈의 미세한 흠집,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정체불명의 기름때 같은 흔적. 이것은 범인이 문이 닫힌 상태에서 어떤 도구를 사용했다는 증거입니다.
**[류진]**
그 도구는 바로… 알폰스 경이 생전에 개발하던 소형 증기 동력 조작 장치였습니다. (류진의 설명과 함께, 서재 문틈으로 가늘고 정교한 황동 로봇 팔이 미끄러져 들어가 빗장을 조작하는 모습이 재현된다. 동시에 열쇠를 집어 시체 옆에 떨어뜨리는 모습도 함께.) 범인은 이 작은 장치를 문틈으로 넣어 안쪽의 빗장을 조작하고, 열쇠를 시체 옆으로 떨어뜨렸습니다.
**[엘리자베스]** (경악하며)
말도 안 돼! 그런 게 가능하다고?
**[류진]**
알폰스 경이라면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기술을 가장 잘 이해하고, 심지어 재료까지 확보할 수 있었던 자라면… 그분의 ‘미완성’을 ‘완성’시켜 살인에 사용할 수 있었겠죠.
**[류진]**
그리고 이 모든 작업에 필요한 동력은 어디서 얻었을까요? 바로 과열된 증기 오르간입니다. (다시 서재로 장면이 전환되며, 증기 오르간의 연통이 과열되며 소형 장치가 작동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범인은 알폰스 경의 서재에 연결된 증기 오르간의 압력을 이용해 장치를 작동시켰습니다. 그것이 연통이 과열된 이유입니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던 거죠.
**[오토]** (침을 꿀꺽 삼키며)
그럼… 누가 그런 짓을…
**[장면 8]**
**[배경]** 응접실. 류진의 시선은 망설임 없이 한 사람에게 향한다. 세드릭은 이미 식은땀을 흘리며 두려움에 떨고 있다.
**[류진]**
범인은 알폰스 경의 유일한 조수이자 그의 기술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입니다. 스승의 작업실에 자유롭게 드나들며 그분의 미완성 발명품들을 접할 수 있었고, 살해 도구 또한 스승의 작업실에서 구할 수 있었던 자. (류진의 손가락이 세드릭을 가리킨다.) 바로, 당신입니다, 세드릭 씨.
**[세드릭]** (눈을 크게 뜨고 온몸을 떨며)
아, 아니야! 난… 난 결백해!
**[류진]**
당신은 알폰스 경의 신형 비공정 동력 장치 설계도를 탐냈습니다. 스승님이 당신에게 모든 걸 가르쳐주지 않고 비밀로 부치자, 당신은 탐욕에 눈이 멀어 그분을 살해하고 그분의 유산을 독차지하려 했죠. 그 미완성 동력 장치를 완성시켜 이름을 날리고 싶었을 겁니다. 밀실은 그 모든 것을 감추기 위한 완벽한 위장이었고요.
**[세드릭]** (점점 얼굴이 일그러지며, 결국 주저앉아 절규하는)
젠장… 젠장! 나는… 나는 그저 스승님을 뛰어넘고 싶었을 뿐이야! 그 노인은 끝까지 나에게 핵심 기술을 알려주지 않았어!
**[강인호 경위]** (결정적인 증거와 자백에 만족하며 세드릭에게 다가가 수갑을 채우는)
세드릭, 당신을 살인 및 시체 유기 혐의로 체포한다!
**[장면 9]**
**[배경]** 아르카디아의 새벽. 밤새 뿜어져 나온 증기가 도시 위로 피어오르고, 멀리 동이 터오르는 하늘을 비공정 하나가 유유히 가로지른다. 류진과 강인호 경위가 저택을 나선다.
**[강인호 경위]** (감탄을 금치 못하며)
류진 씨, 정말 대단하십니다! 그 밀실의 트릭을 이렇게나 완벽하게 깨부수다니!
**[류진]** (다시 낡은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세상에 완벽한 범죄는 없습니다. 다만 완벽하게 속아 넘어가는 인간의 눈이 있을 뿐이죠. 모든 톱니바퀴는 저마다의 움직임을 가지고 있고, 그 움직임이 어긋날 때 그림자가 생기는 법입니다.
**[강인호 경위]**
(류진의 뒷모습을 보며 혼잣말처럼)
강철 심장의 도시, 아르카디아의 톱니바퀴 사냥꾼답군요.
**[류진]** (고요한 새벽 공기 속으로 사라지며)
…이 도시는 언제나 증기를 뿜어내듯 새로운 그림자를 만들어낼 테니… 저의 톱니바퀴는 계속 돌아갈 겁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