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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리 스릴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심연의 메아리: 제 1화 – 검푸른 침묵

    차가운 금속 복도를 따라, 묵직한 침묵이 흘렀다. 22도의 완벽한 실내 온도와 45%의 습도가 유지되는 “아르고” 호의 중앙 통로였지만, 승무원들의 등줄기에는 습한 냉기가 서려 있었다. 그들 사이를 흐르는 건 명백한 불안감이었다. 심우주 탐사선 아르고는 미지의 영역인 엘리시움 성운을 탐사 중이었고, 사흘 전, 그곳에서 ‘그것’을 발견했다.

    중앙 분석실. 투명 강화 폴리카보네이트로 된 육중한 격리 벽 너머, 검푸른 물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지름 1미터 남짓의 구체. 완벽한 구형이면서도, 그 표면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의 피부처럼 미묘하게 꿈틀거리는 착시를 일으켰다. 빛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듯한 검푸른 색은 심연의 공포를 직접 가져온 것만 같았다. 그들은 ‘심연의 심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여전히 어떤 종류의 에너지도 감지되지 않습니까?” 선장 강태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은 피로했지만, 흔들림 없는 결단력이 엿보였다. 선실 내부의 어둠은 그의 얼굴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네, 선장님.” 부선장 서지혜가 대답했다. 그녀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지혜는 늘 냉철하고 분석적이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무언가에 짓눌린 듯했다. “모든 스캐너가 먹통입니다. 감마선, X선, 전자기파… 심지어 중력장 분석까지 시도했지만,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요.”

    “존재하지 않는데 눈앞에 있다는 건가?” 박준형 항해사가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는 늘 냉소적이었지만, 지금은 그의 목소리에서도 명백한 초조함이 묻어났다. “젠장, 이 괴상한 돌덩이 때문에 벌써 사흘째 잠을 제대로 못 잤습니다. 귓가에서 자꾸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그의 말을 듣던 의무관 이수아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준형 씨뿐만이 아닙니다. 선장님. 지난 24시간 동안, 승무원 70% 이상이 두통, 이명, 불면증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우주 스트레스와는 양상이 다릅니다. 신경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신경계에 영향을 준다고요? 대체 어떻게….” 지혜가 말을 잇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위협이 더 공포스러웠다.

    그때, 과학자 최현우 박사가 격리 벽에 거의 얼굴을 대다시피 한 채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심연의 심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듯, 눈빛에는 섬뜩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이건 단순한 물질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건… 언어입니다. 침묵하는 외침. 이 심연의 심장은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어요.”

    “최 박사, 정신 차리세요!” 강 선장이 날카롭게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느끼지 못하십니까? 이 고요함 속에서 울려 퍼지는 거대한 의지를요.” 현우는 고개를 들어 강 선장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맑았지만, 그 안에 깃든 열정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이건 우리에게 존재 방식을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겁니다. 자신을 해독하라고….”

    “해독이요? 박사님, 지금 이 물체는 어떤 스캔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저희의 모든 분석 장비가 무용지물이라고요!” 지혜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바로 문제예요, 부선장님.” 현우는 다시 심연의 심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우리가 기존의 방식으로 접근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감각을 통해 소통하는 방식일 겁니다. 직관적인 이해….”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한참 동안 구체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흡수될 듯 깊어졌다. 이수아가 그의 생체 데이터를 슬쩍 확인했다. 심박수와 뇌파가 비정상적으로 높게 치솟고 있었다.

    “박사님, 좀 떨어지세요.” 이수아가 불안한 듯 말했다. “지금 박사님의 바이오 리듬이 매우 불안정합니다. 과도한 흥분 상태입니다.”

    하지만 현우는 듣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강화 폴리카보네이트 벽에 댔다. 그의 손가락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 순간, 격리된 심연의 심장에서 기묘한 파장이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승무원의 뇌리를 강타하는 듯한, 강력한 정신적 충격이었다. 마치 심연의 밑바닥에서 거대한 존재가 깨어나 내는 첫 숨소리 같았다.

    “크윽!” 준형이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또 시작이야! 머릿속이 찢어지는 것 같아!”

    강 선장도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익숙한 통증에 몸을 떨었다. 하지만 최 박사는 달랐다. 그는 격리 벽에 손을 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이 아닌, 황홀경에 가까운 표정이 떠올랐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중얼거림이 새어 나왔다.

    “보인다… 보여… 거대한 흐름… 빛과 어둠의 춤… 시간의 강… 영원의 노래….”

    “최 박사!” 지혜가 소리쳤다. “무슨 소리예요? 정신 차려요!”

    그때, 갑자기 아르고 호 전체가 쿵, 하는 굉음과 함께 흔들렸다. 메인 전력이 순간적으로 깜빡였다. 비상등이 깜박이며 붉은빛을 뿜어냈다.

    “무슨 일이야!” 강 선장이 다급하게 외쳤다.

    “선장님! 주 전력 공급이 10% 이상 저하됐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 준형이 패널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에너지 소모율이 비정상적으로 치솟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모든 시스템이 정지할 겁니다!”

    모두의 시선이 격리 벽 너머의 심연의 심장으로 향했다. 검푸른 구체는 여전히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진동은 단순한 착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이 격렬하게 박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박동은 아르고 호의 모든 에너지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입처럼 보였다.

    “최 박사! 당장 벽에서 떨어져요!” 강 선장이 최 박사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은 확신에 차 있었지만, 그 뒤를 따라오는 붉은 비상등의 깜박임은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지만 최 박사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은 피로에 절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맹렬한 광기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이건… 이건 단순한 에너지가 아니야… 기억… 고통… 존재의 파편들… 흐름… 나에게 말하고 있어… 어둠 속의 진실을….”

    그 순간, 최 박사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격리 벽의 폴리카보네이트에 닿아있던 손이 서서히 녹아내리는 듯한 섬뜩한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아니, 착시가 아니었다. 투명한 폴리카보네이트 벽에 그의 손자국이 희미하게 남는 듯했다. 마치 벽 자체가 그의 손에서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최 박사, 뭐 하는 거야!” 지혜가 비명을 질렀다.

    강 선장이 그의 어깨를 잡으려 했을 때였다. 최 박사는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검푸른 심연의 심장처럼, 그의 눈은 깊고 어두운, 이해할 수 없는 공허로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술에서, 방금 전의 중얼거림과는 다른, 낮고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치 여러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겹쳐진 듯한, 섬뜩한 울림이었다.

    “…어서 와라… 동반자여… 오랜 기다림이… 끝났다….”

    최 박사의 손이 격리 벽을 뚫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마치 검푸른 구체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폴리카보네이트가 액체처럼 녹아내리며 그의 손목을 감쌌다. 아르고 호는 격렬하게 요동쳤다. 경보음이 귀청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안 돼! 최 박사!” 강 선장이 절규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최 박사의 몸이 심연의 심장 쪽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발이 바닥에서 떨어지고,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그의 등 뒤에서, 섬뜩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비명은 최 박사의 것이 아니었다. 아르고 호 내부의 모든 스피커에서, 동시에 터져 나온 수십, 수백 명의 목소리가 겹쳐진 절규였다.

    “멈춰! 멈추라고!” 준형이 소리쳤다.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그 비명은 곧 처절한 울음으로, 그리고 다시 속삭임으로 바뀌었다. 그 속삭임은 모든 승무원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함께하자… 우리를 봐… 우리가 너다… 너는 우리다….*

    최 박사의 몸이 격리 벽 안쪽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순간, 검푸른 심연의 심장은 한순간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 빛은 아르고 호의 중앙 분석실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차가운 폴리카보네이트 벽에 깊게 새겨진 최 박사의 손자국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편, 심연의 심장이 있던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침묵. 완벽한, 숨 막히는 침묵이 아르고 호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강태영 선장의 귓가에는 섬뜩한 속삭임이 메아리쳤다.

    *…네가… 다음이다….*

    그의 눈앞에는, 방금 전 최 박사가 사라졌던 빈 공간이 어둠 속에서 거대한 입처럼 벌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입 속에서,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무언가가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아르고 호는 이제, 심연의 심장을 잃은 채, 그 심장의 메아리만을 안고 광활한 우주에 홀로 떠 있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진정한 공포의.

  • 로맨틱 코미디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1장: 내 집이, 내 집이 아니야!

    “하아… 드디어 금요일이다!”

    이서아는 등 뒤로 아파트 현관문을 닫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칙칙한 회색빛 빌딩 숲에서 온종일 시달리다 돌아온 그녀에게, 이 10평 남짓한 오피스텔은 유일한 안식처였다. 폭신한 소파에 몸을 던지려는데, 찌릿한 섬광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라, 리모컨 어디 갔지?”

    분명 아침에 소파 위, 저 무늬 없는 쿠션 옆에 두었었는데. 서아는 머리를 긁적이며 소파 주변을 더듬었다. 없다. 테이블 위도, 바닥도, 심지어 TV 선반 위까지 확인했지만 감쪽같이 사라졌다.

    “뭐야, 아침엔 분명 여기 있었는데… 설마 내가 착각했나?”

    서아는 허탈하게 피식 웃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중요한 서류는 엉뚱한 곳에서 나오고, 립밤은 냉장고 깊숙한 곳에서 발견되고. 본인이 워낙 건망증이 심하다 보니 이젠 그러려니 했다. 한참을 찾아 헤맨 끝에 리모컨은 의외의 장소에서 발견되었다. 다름 아닌, 화장실 변기 옆 작은 선반 위. 누가 봐도 이상한 위치였다.

    “아니, 리모컨이 왜 여기서 나와? 내가 꿈에서 화장실에 들고 왔다가 놓고 갔나?”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리모컨을 챙겨 나온 서아는 허리에 손을 얹고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 작은 공간에 숨을 곳이라곤 벽장과 화장실이 전부였다. ‘내가 분명 어딘가에 잘못 뒀을 거야…’ 합리적인 척 스스로를 설득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날 밤, 서아는 냉동 피자로 간단히 저녁을 때우고 TV를 보며 밀린 드라마를 몰아보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 늘 그렇듯 양치를 하고 세수를 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칫솔이 놓여있던 컵의 위치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았다. 어깨를 으쓱하며 칫솔을 제자리에 놓으려는 순간, 컵이 갑자기 *툭* 하고 기울며 칫솔이 세면대 위로 떨어졌다.

    “악! 깜짝이야!”

    놀란 서아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컵은 마치 누가 일부러 건드린 것처럼 서아의 손이 닿기도 전에 기울어진 뒤였다. 투명한 아크릴 컵이라 무게 중심이 불안정했나? 아니면… 본인이 너무 피곤해서 손이 미끄러진 건가?

    “아니야, 아니야. 피곤해서 그래. 잠이나 자자.”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칫솔을 주워 컵에 다시 꽂은 서아는 후다닥 침실로 향했다. 그러나 침대에 눕고도 한참 동안, 칫솔 컵이 혼자 기울었던 그 순간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설마, 설마 귀신 같은 건 아니겠지? 도시 한복판, 고층 아파트에 무슨 귀신이…. 그녀는 오들오들 떨면서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렸다.

    ***

    다음 날 아침. 서아는 시끄러운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으음… 벌써 아침이야?”
    화면을 확인한 서아는 눈을 비비며 다시 시계를 보았다. 오전 5시 30분.

    “뭐? 5시 반?! 아니, 내 알람은 7시인데?”

    아니나 다를까, 어제 설정해둔 알람 시각은 분명 7시였다. 서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알람 설정 창을 눌렀다. 어젯밤 분명 7시로 맞춰두었던 알람이 5시 30분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그것도 매일 아침으로.

    “미쳤나 봐, 내가 잠결에 뭘 누른 거지?”

    이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상황이란 말인가. 평소 같으면 알람이 울려도 몇 번이나 껐다 켰다 했을 텐데, 오늘은 이상하게도 한 번에 깨어버렸다. 잠이 확 달아난 서아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괜스레 억울한 마음에 잠이 오지도 않았다.

    강제로 일찍 일어난 김에 일찍 출근할 준비나 해야겠다 싶어 주방으로 향했다. 토스트를 굽고 커피를 내릴 생각이었다. 토스터에 식빵을 두 조각 넣고 ‘약’으로 맞춰두었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구수한 빵 냄새가 나겠지, 하고 기대했는데.

    *피융!*

    갑자기 토스터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틱!* 하고 꺼져버렸다. 깜짝 놀라 뚜껑을 열자, 시커멓게 타버린 식빵 두 조각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악! 내 빵!”

    분명 ‘약’으로 맞춰두었는데. 설마 토스터가 고장 난 건가?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서아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이 작은 오피스텔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옷을 갈아입고, 화장까지 마치고, 현관을 나설 준비를 했다. 가방을 챙겨들고, 언제나처럼 현관 옆 작은 선반 위에 두었던 차 키를 집으려는데.

    “어, 내 차 키… 어디 갔지?”

    분명 어제 퇴근하고 돌아와서 여기에 두었는데. 서아는 가방 안을 뒤지고, 코트 주머니를 뒤지고, 급기야 어지럽게 놓여있는 책상 위까지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차 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말도 안 돼…! 나 오늘 진짜 중요한 미팅인데!”

    서아는 머리가 아파왔다. 어제부터 뭔가 묘하게 어긋나고 있었다. 사소한 실수라고 하기엔 뭔가 찜찜한 기분. 초조하게 집안을 뒤적이다, 문득 냉장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번쩍.*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높이 2m는 족히 되는 냉장고 꼭대기, 먼지 쌓인 곳에, 서아의 은색 차 키가 놓여 있었다.

    “……?”

    서아는 벙찐 얼굴로 냉장고를 올려다봤다. 본인의 키로는 냉장고 꼭대기에 물건을 올릴 수도 없었다. 사다리나 의자 없이는 불가능한 높이였다. 게다가 냉장고 위는 늘 먼지가 쌓여 있어, 보통은 물건을 두지 않는 곳이었다. 대체 누가, 왜, 언제, 차 키를 저기에 올려둔 거지?

    “이건 진짜 내가 한 게 아니야…”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집에 몰래 들어왔다가 장난을 치고 간 건가? 하지만 현관문 잠금장치는 멀쩡했고, 창문도 닫혀 있었다. 외부 침입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세상에, 설마… 설마 진짜 폴터가이스트 현상 같은 거야?”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제 칫솔 컵 사건부터, 리모컨, 알람, 토스트, 그리고 이 차 키까지. 사소하지만, 분명히 비정상적인 일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었다.

    그 순간, 현관문 너머 복도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서아 씨? 혹시 괜찮으세요? 아침부터 집이 좀 시끄러운 것 같아서요.”

    이웃집 남자, 강지호 씨의 목소리였다. 언제나 차분하고, 늘 깔끔한 차림에, 이웃치고는 너무 잘생겨서 가끔 부담스러울 정도인 남자. 서아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겨우 목소리를 냈다.

    “아, 네! 강지호 씨? 네, 괜찮아요! 그… 그냥 제가 좀 정신이 없어서요!”

    차마 냉장고 위 차 키를 발견하고 소름 돋아 미쳐버릴 것 같다는 말은 할 수 없었다. 현관문을 열면 저 차분한 남자가 자신을 이상한 여자로 볼 게 뻔했다. 겨우 식탁 의자를 끌어와 발판 삼아 차 키를 회수한 서아는 후다닥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예상대로 멀끔한 차림의 강지호가 서 있었다. 아침에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일찍 나가시는군요.”

    “네, 오늘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요. 하하… 죄송해요, 아침부터 소란스럽게…”

    서아는 어색하게 웃었다. 지호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아의 집 안쪽을 흘끗 보았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서아 씨, 얼굴이 좀 하얗네요.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고요?”

    걱정스러운 그의 말에 서아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삐죽 내밀 뻔했다. 편찮은 게 아니라, 지금 이 집에서 귀신 들린 것 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아니요, 괜찮아요. 그냥… 잠을 좀 설쳐서요.”

    “아, 그러세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아, 혹시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라도…”

    지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실 안쪽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서아의 눈은 저절로 거실 한구석에 놓인 작은 화분으로 향했다. 몬스테라 잎이 축 늘어진, 오래된 화분이었다. 그 화분이 마치 진동이라도 하는 양 *덜컹, 덜컹* 떨리고 있었다.

    “어…? 저거…”

    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화분을 가리켰다. 지호의 시선도 자연스레 화분으로 향했다. 순간, 화분 속 흙이 한 움큼 튀어 오르더니, 몬스테라 잎이 *툭* 하고 통째로 떨어져 버렸다. 화분은 여전히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적.

    서아와 지호는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서아의 눈은 ‘이것 봐요! 내가 미친 게 아니라고요!’라고 말하는 듯했고, 지호의 눈은 ‘…세상에, 저 화분이 혼자 움직였다고요?’라고 묻는 듯했다.

    “서아 씨… 저게… 혼자 움직인 겁니까?”

    지호의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함께 미묘한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서아를 이상한 여자로 보지 않았다. 대신, 뭔가 아주 흥미로운 사건의 한가운데 서 있는 사람처럼 보았다.

    “네! 봤죠! 저 어제부터 계속 이런다니까요! 냉장고 위에서 차 키가 나오고, 토스터가 혼자 타버리고, 알람도 멋대로 울리고, 심지어 칫솔 컵도 혼자 기울고… 이 집, 뭔가 이상해요!”

    서아는 그동안 쌓아왔던 답답함을 일시에 토해냈다. 얼굴은 울상이 되어 있었지만, 지호는 그녀의 말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는 서아를 향한 걱정보다, 설명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한 탐구심 같은 것이 더 강하게 깃들어 있었다.

    그때였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작은 유리 테이블 위에서, 서아의 립밤이 굴러떨어지더니 바닥에 *또르르* 소리를 내며 멈췄다. 립밤은 테이블 위에서 저절로 굴러 내려온 것처럼 보였다.

    “…이런 식으로?”

    지호는 립밤을 내려다보더니, 픽 웃음을 터뜨렸다. 황당한 상황이었지만, 그의 웃음소리에는 기묘한 매력이 있었다.

    “푸핫. 서아 씨, 집에서 제법 스펙터클한 삶을 사시는군요.”

    “웃지 마요! 지금 웃을 때가 아니라고요! 저 무서워 죽겠다고요!”

    서아는 울먹였다. 그러나 지호는 여전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보아하니 해코지할 생각은 없는 것 같고… 그냥 심심한가 보네요.”

    그의 무심한 한 마디에 서아는 더욱 기가 막혔다. 심심하다니! 자신의 집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존재가 심심하다니!

    “심심하면 딴 데 가서 놀라고 해요! 왜 남의 집에서 이러냐고요!”

    서아는 결국 소리쳤다. 마치 눈앞에 유령이라도 있는 것처럼. 강지호는 그런 서아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문득 한발짝 서아의 집 안으로 들어섰다.

    “글쎄요. 어쩌면… 서아 씨가 마음에 든 걸 수도 있죠.”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거실 창문 밖에서 갑자기 *삐걱!* 하는 소리와 함께 방충망이 저절로 위로 스르륵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창문은 닫혀 있었지만, 방충망만 기이하게 움직였다. 서아와 지호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 미친 세상에서,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이 기이한 현상 속에서, 서아는 강지호의 말과, 그의 미소와, 그리고 방금 움직인 방충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 남자는 대체 왜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태연한 걸까? 그리고 이놈의 폴터가이스트는 또 뭘 원하는 걸까?

    오늘도 출근은 글렀다. 서아는 확신했다. 그녀의 눈에 비친 강지호의 얼굴에는, 이제 막 시작될 로맨틱 코미디의 서막을 알리는 듯한, 묘한 기대감이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아는, 그 기대감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조금은 설렜나? 아니,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흔들었다.

    *덜컹.*

    그때, 거실 한구석에 놓여있던 작은 액자가 스스로 바닥으로 떨어지며, 액자 속 인물의 얼굴이 바닥을 향해 엎어졌다. 서아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으악!”

    그리고 그녀의 비명과 동시에, 강지호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이봐요, 서아 씨. 아무래도 이 친구, 질투하는 것 같은데요?”
    그의 시선은 액자가 떨어진 바닥, 그리고 액자 속의 인물을 향해 있었다. 서아는 그의 장난스러운 시선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폴터가이스트 현상, 대체 어디까지 가는 걸까? 그리고, 이 옆집 남자는 왜 이 상황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그녀의 아파트에서, 진짜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쨍한 햇볕이 작열하는 오후 세 시, 한지아는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에어컨은 고장 났고, 커피 머신은 맹물만 뱉어냈다. 심지어 오늘 아침엔 출근길에 새똥까지 맞았다. 지아의 29년 인생은 늘 이런 식이었다. ‘나는 왜 항상 주인공이 아니라 옆집 불운한 조연일까?’ 스스로에게 늘 던지는 질문이었다.

    “한지아 씨, 오늘까지 이거 마무리해야 하는 거 아시죠?”

    박 대리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지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감 기한은 늘 지아의 목을 죄어왔다.

    퇴근길, 지아는 터덜터덜 낡은 골목길을 걷고 있었다. 익숙한 길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발길이 닿는 곳은 늘 똑같았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은 낡고 허름한 간판이 걸린 오래된 가게였다. ‘세월의 흔적’이라고 대충 써놓은 듯한 글씨가 더 운치 있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테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이끌렸다. 지아는 반쯤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 계세요?”

    “어이쿠, 손님! 어서 와요!”

    곱슬머리에 동그란 안경을 쓴 할아버지가 먼지 쌓인 선반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가게 안은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깨진 도자기 조각, 빛바랜 액자, 알 수 없는 글자가 새겨진 돌멩이들. 마치 시간 여행이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다.

    지아는 가게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러다 한쪽 구석, 빛바랜 나무 상자 안에 놓인 낡은 비녀 하나에 시선이 꽂혔다. 투박하게 깎인 나무 비녀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비녀에서 은은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이 비녀는… 얼마예요?”

    지아는 조심스럽게 비녀를 가리켰다. 할아버지는 비녀를 흘긋 보더니 빙긋 웃었다.

    “그건 우리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물건이지. 뭐, 큰 가치는 없지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는 게 물건을 만나는 법이니… 처녀한테는 오천 원에 줄게.”

    오천 원. 지아는 지갑에서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할아버지에게 건넸다. 왠지 모르게, 이 비녀가 그녀의 불운한 하루를 조금이라도 바꿔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비녀를 받아 든 순간, 손끝에서 따뜻한 진동이 미세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착각이겠지.

    집으로 돌아온 지아는 비녀를 머리에 꽂아봤다. 낡은 비녀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 속에서 생각보다 잘 어울렸다.

    “하아… 오늘 하루도 끝이구나.”

    맥주 한 캔을 따서 들이키려는데, 갑자기 현관문에서 ‘딩동’ 하고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이 시간에 누가? 지아는 의아해하며 문을 열었다.

    “저… 옆집인데, 혹시…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옆집 총각이 어색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평소라면 마주쳐도 고개만 까딱하던 사람이었다.

    “네? 딱히… 없는데요.”

    “아니,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집에서 막… 행복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아서요.”

    지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행복한 기운이라니. 내가? 옆집 총각은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한 듯 돌아섰다. 지아는 문을 닫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그때였다. 거실 한쪽에 놓인 시들시들한 화분에, 갑자기 푸른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보았다. 눈을 비볐다. 분명 방금까지 죽어있던 화초였다.

    다음 날 아침, 지아는 출근 준비를 하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올렸다. 옆집 총각의 이상한 말, 그리고 화분의 새싹. 혹시 비녀 때문일까? 설마.

    회사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박 대리가 서류를 던지듯 탁상에 놓았다.

    “한지아 씨, 이 보고서 다시 해요. 내용이 너무… 딱딱하잖아. 재미있게 좀 써봐요!”

    지아는 한숨을 쉬었다. 이 딱딱한 내용을 어떻게 재미있게 쓰라는 말인가. 막막한 기분에 비녀가 꽂힌 머리를 긁적였다. 그때였다. 박 대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다.

    “음… 그래도 한지아 씨는 항상 열심히 하니까, 괜찮아요! 다시 한 번 해봐요.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박 대리의 격려에 지아는 고개를 들었다. 늘 독설만 퍼붓던 박 대리였다. 지금 뭐라는 거지? 박 대리는 마치 자신의 말이 이상하다는 듯,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게… 그러니까… 열심히 하란 말이지!”

    지아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그녀는 무심코 머리에 꽂힌 비녀를 만져봤다. 비녀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온기. 설마, 이 비녀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걸까?

    그날 오후, 지아는 급히 전달할 서류를 들고 뛰어다니다가 그만 복도에서 누군가와 세게 부딪혔다.

    “아얏!”

    “괜찮으세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깔끔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서 있었다. 잘생겼다. 너무 잘생겨서 비현실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는 지아의 손에 쥐여 있던 서류들을 주워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제가 부주의했습니다.”

    지아는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의 손에서 왠지 모르게 기분 좋은 에너지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지아의 손을 살짝 잡아주다가, 문득 지아의 머리에 꽂힌 비녀를 발견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비녀… 혹시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지아는 조금 놀랐다. 이렇게 낡은 비녀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니.

    “아, 어제 골목길에 있는 낡은 골동품 가게에서요.”

    남자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그 가게… ‘세월의 흔적’이라는 곳 말입니까?”

    “네, 맞아요.”

    “저는 강현우라고 합니다. 혹시 잠시 시간 괜찮으실까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의 진지한 태도에 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우는 지아를 회사 근처 조용한 카페로 데려갔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 비녀는 평범한 물건이 아닙니다.”

    강현우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저희 집안은 대대로 고대의 유물과 힘에 대해 연구해왔습니다. 그 비녀는 고대 시대에 존재했던 특정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정확히 말하면, 착용자의 감정과 주변의 자연 에너지를 연결해주는 매개체죠.”

    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대의 유물? 마법의 힘? 마치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제 주변에서 일어났던 이상한 일들이… 다 그 비녀 때문이었다는 말인가요?”

    강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 비녀는 착용자의 긍정적인 감정을 증폭시켜 주변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겁니다. 사람의 기분을 좋게 하거나, 식물을 자라게 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면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질 수도 있고요.”

    “말도 안 돼… 그럼 제가 지금 마법을 부리고 있다는 거예요?”

    지아는 혼란스러웠다. 불운했던 지아의 인생에 갑자기 마법이 끼어들다니.

    “마법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죠. 저는 이 힘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비녀는… 제가 찾던 물건 중 하나입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지아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이 비녀가 자신에게서 떠나가면, 다시 불운한 조연의 삶으로 돌아갈 것 같았다.

    “그럼… 이 비녀를 다시 가져가실 건가요?”

    지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강현우는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럴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직접 찾아오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힘을 제대로 이해하고 다룰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의 제안은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는 지아에게 내민 손길 같았다.

    그날 이후, 지아의 일상은 180도 달라졌다. 강현우는 매일 저녁 지아를 찾아와 비녀에 담긴 힘과 그것을 통제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감정에 따라 힘의 크기가 달라집니다. 너무 흥분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제어하기 어려워질 거예요.”

    어느 날, 지아는 회사에서 또다시 박 대리에게 심한 잔소리를 들었다. 울컥하는 마음에 비녀를 꽉 쥐었다. 그 순간, 박 대리 머리 위로 화분에 있던 물이 ‘철푸덕’ 쏟아졌다. 박 대리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빨개졌고, 지아는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어이쿠, 제가 물을 너무 많이 줬나 보네요.”

    다음 날, 강현우는 지아에게 연습을 시켰다.

    “자, 이번에는 저기 시든 꽃에 생기를 불어넣어 보세요. 마음속으로 아름다운 정원을 상상하는 겁니다.”

    지아는 눈을 감고 활짝 핀 장미와 푸른 잎사귀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시들었던 꽃봉오리가 천천히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작은 꽃잎들이 섬세하게 열리며 달콤한 향기를 풍겼다.

    “성공했네요, 한지아 씨.”

    강현우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지아는 환하게 웃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지아는 강현우의 숨겨진 면모를 발견했다. 차가워 보였던 그는 사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고대의 유물에 대한 깊은 지식은 물론, 지아의 어리숙한 질문에도 언제나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도 비녀의 힘이 더 안정적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그의 존재 자체가 지아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어느 날 저녁, 지아는 강현우와 함께 강변을 걷고 있었다. 강현우는 늘 그랬듯, 비녀의 힘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이 힘은 당신의 일부가 될 겁니다. 잘만 사용하면,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줄 수도 있어요.”

    지아는 그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달빛이 그의 이목구비를 더욱 뚜렷하게 비추고 있었다.

    “현우 씨는… 왜 저를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거예요?”

    강현우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지아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치는 듯했다.

    “저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당신은 이 힘을 가장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인 것 같아서요.”

    그때, 갑자기 강변에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지아의 머리에 꽂힌 비녀가 미세하게 떨렸다.

    “어, 바람이…”

    갑작스러운 바람에 지아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순간, 지아가 꽂고 있던 비녀가 ‘딸깍’ 소리를 내며 풀렸다. 비녀는 바람에 실려 강물 속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안 돼!”

    지아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뻗었다.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비녀를 향해 닿으려 했다. 그때였다. 강물 위에 떨어지던 비녀가 갑자기 공중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묶인 것처럼 다시 지아의 손안으로 돌아왔다.

    강현우는 놀란 눈으로 지아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 당황스러움과 함께 묘한 감탄이 스쳐 지나갔다.

    “지아 씨… 당신은 이미 비녀의 힘을 뛰어넘은 것 같아요. 이제 비녀는 당신을 돕는 보조 도구일 뿐입니다. 당신 자체가 그 힘을 품고 있어요.”

    지아는 손안의 비녀를 내려다봤다. 비녀는 여전히 은은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비녀 없이도 자신의 감정으로 주변의 기운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요…?”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자신의 안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힘, 그리고 그 힘을 함께 지켜봐 주는 강현우의 존재가 너무나 소중하게 느껴졌다.

    강현우는 한 발짝 더 지아에게 다가섰다. 달빛 아래,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불운한 조연이 아닙니다. 이 힘이 당신의 삶을 특별하게 만들었죠. 그리고… 저도 당신이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그의 말에 지아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비녀를 날려버릴 위협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부드럽게 감싸 안는 듯했다.

    지아는 미소 지으며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러게요. 현우 씨를 만나고, 제 인생이 정말 특별해졌어요.”

    강현우는 빙긋 웃으며 지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주었다. 그의 손끝이 비녀가 꽂혀 있던 자리, 이제는 비녀 없이도 특별한 빛을 내뿜는 듯한 지아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앞으로 당신의 특별한 삶을, 제가 계속 함께 지켜봐도 될까요?”

    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 불운한 옆집 조연이라 생각했던 그녀의 삶은, 이제 강현우와 함께하는 아름다운 로맨틱 코미디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낡은 골동품 가게에서 우연히 발견한 낡은 비녀, 고대의 숨겨진 마법의 힘 덕분이었다. 그녀의 손안에서 비녀는 계속해서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제 그 빛은 지아의 빛이자, 그들의 사랑의 빛이었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붉은 각인

    밤은 깊고, 숲은 침묵했다. 고요는 짙은 안개처럼 땅을 기었고, 차가운 습기가 지우의 뺨을 스쳤다. 숨소리마저 죄가 될 것 같은 적막 속에서, 지우는 이경의 품에 파묻혀 떨리는 숨을 삭였다. 며칠째 이어지는 도피 생활. 쫓기는 자의 비명은 들리지 않고, 쫓는 자의 그림자만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괜찮아, 지우야.”

    이경의 목소리는 귓가에 닿는 속삭임이었지만, 그 속에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같은 불안이 서려 있었다. 그의 손이 지우의 어깨를 감싸 안았고, 단단한 근육 아래로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이 격렬했다. 그 역시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토록 강한 존재마저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 앞에서 몸서리치는 것을 지우는 똑똑히 느꼈다.

    그들의 사랑은 태어날 때부터 금기였다. 인간과 신수(神獸). 그것은 강물이 바다와 섞이듯 자연스러울 수 없는 이치였다. 하지만 지우는 기꺼이 그 이치를 거부했다. 천 년의 시간을 거슬러와 만난 이 남자, 아니 이 신수를, 그녀는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었다.

    숲의 저편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날카로운 그 소리는 얼어붙은 밤공기를 찢는 칼날 같았다. 이경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그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푸른 빛이 스치듯 지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깊은 밤하늘처럼 검게 물들었다.

    “왔어….”

    나지막이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더 이상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본능적인 경고가 담긴 음성이었다. 지우는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몸 안의 모든 피가 역류하는 듯한 현기증이 찾아왔다.

    “이경….”

    그녀의 손이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놓치면 영원히 사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경은 지우를 품에서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의 손이 지우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무서워하지 마. 내가 너를 지킬 거야.”

    그의 눈빛은 비장했다. 지우는 그 눈빛 속에서 용의 기개를 보았다. 아직은 미완의 존재, 이무기. 하지만 그 안에 잠재된 용의 힘은 이미 세상의 어떤 존재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그리고 지우는 알고 있었다. 그가 용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은 바로 ‘자신’ 때문이라는 것을. 인간과의 연정은 신수의 승천을 방해하는 가장 치명적인 독이었다.

    “어디 숨어봤자 소용없다! 이무기, 천명(天命)을 거스른 죄를 달게 받아라!”

    숲의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메아리쳐 들려오는 그 소리들은 밤의 장막을 뚫고 지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천명회(天命會)’. 신수들의 질서를 수호하고, 인간계와의 간섭을 엄격히 금하는 비밀스러운 조직. 그들의 추격은 집요했고, 잔인했다.

    어둠 속에서 형체가 불분명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넷, 아니 다섯. 모두 검은 도포를 두르고 얼굴을 깊이 감춘 채였다. 그들의 손에는 영적인 기운이 서린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칼, 창, 그리고 알 수 없는 빛을 내뿜는 옥패.

    “지우야, 내 뒤에 있어.” 이경은 지우를 등 뒤로 감추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기운이 솟아오르는 것을 지우는 느꼈다. 숲의 모든 생명이 순간 숨을 멈추는 듯한 압도적인 기세였다.

    “인간 여인을 탐한 죄는 네 승천의 길을 영원히 막을 것이다. 어리석은 이무기여, 네가 용이 되기를 포기했단 말인가!” 천명회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목소리에는 비웃음과 경멸이 담겨 있었다.

    이경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고, 그의 온몸에서는 푸른 비늘이 번뜩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의 손톱은 날카롭게 변했고, 피부 아래로 꿈틀거리는 강력한 힘이 느껴졌다.

    “이것은 너의 선택이다! 인간의 정을 쫓다 천명을 저버린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그들의 말을 듣자 지우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이경의 선택이 자신의 존재 때문이라는 사실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가 용이 되지 못한다면, 이 세상의 균형이 깨진다면, 모든 것이 자신 때문이었다.

    “아니야!” 지우는 이경의 등 뒤에서 뛰쳐나오려 했다. “이경, 괜찮아! 나는… 나는 괜찮아….”

    “닥쳐!” 이경의 목소리가 숲을 흔들었다. “내가 괜찮다.”

    그의 말은 지우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짐하는 듯했다. 그는 지우를 다시 한 번 뒤로 밀어냈다. 이 순간, 이경은 오직 지우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승천의 길도, 천명도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이 여인만을 살려야 한다는 원초적인 본능만이 들끓었다.

    천명회의 일원들이 동시에 이경에게 달려들었다. 칼날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이경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그의 움직임은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것이었다. 마치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적들의 공격을 흘려보냈다.

    하지만 상대는 넷. 그들의 협공은 빈틈이 없었다. 한 명이 이경의 앞을 가로막는 사이, 다른 한 명이 그의 옆구리를 노렸다. 이경은 거대한 팔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냈다. ‘콰아앙!’ 굉음과 함께 숲의 나무들이 뿌리째 흔들렸다.

    지우는 숨을 헐떡이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인간의 눈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초월적인 싸움이었다. 이경은 싸우고 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의 모든 것을 걸고.

    그때, 천명회 우두머리가 손에 든 옥패를 하늘로 던졌다. 옥패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순식간에 숲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결계를 형성했다. 푸른빛이 번쩍이는 결계 속에서 이경의 움직임이 현저히 느려졌다.

    “용의 기운을 봉하는 결계다! 네 미약한 힘으로는 어림없을 것이다, 이무기!” 우두머리의 목소리에 승리의 확신이 서렸다.

    이경은 결계의 압박에 신음했다. 그의 어깨와 팔에서 푸른 비늘이 더욱 선명하게 돋아났고, 그의 얼굴마저도 점점 인간의 모습을 잃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만은 여전히 지우를 향해 있었다.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는 맹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이경…!” 지우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고통이 고스란히 그녀에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

    천명회 일원들이 결계 속에서 움직임이 둔해진 이경에게 다시 한 번 달려들었다. 칼날이 번뜩이며 그의 몸을 향했다. 이경은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쉬이익!’ 그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칼날이 그의 살을 베었다. 검은 피가 튀어 올랐다.

    그 피는 단순한 피가 아니었다. 숲의 모든 풀들이 순간적으로 시들고, 땅이 메마르는 듯한 끔찍한 기운을 내뿜었다. 지우는 눈앞의 광경에 얼어붙었다.

    이경은 고통으로 신음했지만, 그의 눈은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감히… 나의 여인 앞에서… 피를 흘리게 한 죄….”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깊은 심연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듯한, 거대한 포효였다. 이경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결계가 흔들렸다. 마치 유리잔에 금이 가듯, 푸른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천명회 일원들이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 이럴 수가! 결계가…!”

    이경의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그의 어깨와 팔은 이미 푸른 비늘로 뒤덮였고, 얼굴은 용의 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의 손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변해 있었다. 거대한 꼬리가 숲의 바닥을 쓸자, 늙은 나무들이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났다.

    그는 용이었다. 비록 아직은 온전한 용이 아니었지만, 그 안에 잠재된 용의 힘은 이미 압도적이었다.

    “나는… 이무기, 아니, 나는 용이다…!” 이경의 외침이 숲 전체를 흔들었다. “나의 길은 내가 정한다! 그 어떤 천명도, 운명도, 나의 여인을 건드릴 수 없다!”

    그의 분노는 숲을 태울 듯했다. 그의 눈동자는 황금빛으로 타올랐고, 그 눈은 오직 지우만을 향해 있었다.

    지우는 눈물을 흘렸다. 이경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그녀를 지키려 하고 있었다. 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랑 앞에서, 지우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그녀는 결심했다. 그가 어떤 존재가 되든, 어떤 운명을 맞든, 자신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이경!” 지우는 그를 향해 달려갔다. 결계의 틈을 비집고 나아가려 했다.

    천명회 우두머리가 이경의 뒤를 노리고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이경의 심장을 향했다. “어리석은 놈!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인간과의 연정은 죄악이다!”

    그 순간, 지우의 눈앞에 이경의 뒷모습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몸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안 돼!” 이경의 절규가 숲을 갈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지우는 이경의 등 뒤로 몸을 던졌다. 날카로운 기운이 그녀의 심장을 향해 꽂혔다.

    “크흑…!”

    고통스러운 신음이 지우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의 눈은 이경을 향해 있었다.

    “지우…!” 이경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토록 지키려 했던 그의 여인이, 자신 때문에…!

    푸른 비늘로 뒤덮인 그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진 지우의 몸을 조심스럽게 받쳐 안았다. 핏빛이 그의 손을 적셨다. 뜨거운 피가 그의 차가운 비늘 위로 스며들었다.

    붉은 피가 그의 팔 위로 흐르는 것을 보며, 이경의 눈동자가 완전히 검은 심연으로 변했다. 그의 이성이 끊어지는 소리가 숲 전체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나의… 나의 여인에게… 감히….”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슬픔이 아닌, 순수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천명회 일원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제 그들은 알았다. 그들의 칼날이 베었던 것은 단순히 인간의 살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용의 심장에 새겨진 붉은 각인이었다.

    이경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결계를 산산조각 냈다. 숲의 모든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땅이 갈라지고, 거대한 폭풍이 일었다.

    사랑하는 여인의 피를 뒤집어쓴 채, 용은 광분했다.

    이 지독한 금기를 깨부순 대가는 이제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우의 의식이 흐릿해지는 마지막 순간, 그녀는 이경의 눈에서 섬광처럼 타오르는 비극적인 아름다움을 보았다.

    그것은 용의 눈물이었다.

  • 무협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고요한 심우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수억 개의 별들이 보석처럼 박혀 반짝였다. 그 가운데, 고고한 학처럼 유영하는 거대한 함선이 있었다. 인류가 미지의 영역을 탐험하기 위해 띄운 가장 진보된 과학의 결정체, ‘천궁호’였다.

    함교는 적막했다. 오직 희미한 패널 불빛과 시스템이 돌아가는 낮은 웅얼거림만이 존재를 알렸다. 함장석에 기댄 류진은 짙푸른 성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으로 깊어진 주름에도 불구하고, 굳건한 바위처럼 흔들림 없는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아득한 심우주의 심연처럼 깊이를 알 수 없었으나, 그 안에는 만물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함이 숨어 있었다.

    “함장님, 37구역에 진입했습니다. 예정보다 10분 앞당겨 도착입니다.”
    조용한 정적을 깬 것은 항해사 박선우의 나긋한 목소리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우주의 미묘한 흐름을 읽어내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흔히들 그의 능력을 ‘천기 감지’라 불렀다.

    류진은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수고했다, 선우. 특이사항은 없는가?”

    “네, 함장님. 모든 것이 평소와 같습니다. 다만…” 박선우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섞였다. “아주 미약하지만, 평소와는 다른 에너지 파동이 감지됩니다. 기존 데이터에는 없는 패턴입니다.”

    류진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다른 패턴?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봐라.”

    “네. 보통의 천체 활동과는 다릅니다. 기계적인 신호도 아니고, 생체 활동의 흔적도 아닙니다. 마치… 고요한 수면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진 듯한 잔잔한 파문 같습니다.” 박선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분명히 거기 있는데, 잡히지 않는 그림자 같다고 할까요? 저의 ‘천기 감지’가 아니었으면 아마 그냥 지나쳤을 겁니다.”

    류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뇌리에는 수많은 우주 탐사 경험과 무수한 기이한 현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박선우가 말하는 ‘잔잔한 파문’은 그 어떤 기록에도 없었다.

    “이소영 부함장.” 류진이 불렀다.
    함교 한편에서 자료를 검토하던 이소영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녀는 날카로운 지성과 냉철한 판단력, 그리고 필요할 때 언제든 검을 뽑아 휘두를 준비가 된 유수권의 고수였다. “네, 함장님.”

    “선우의 감지 신호를 면밀히 분석하고, 필요하다면 추가 탐사정을 보내도록. 단, 접근은 엄격히 제한하고 일체의 충돌은 피한다.” 류진은 지시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이미 미지의 존재에 대한 경계심이 스며들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소영은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패널에 손을 얹자 홀로그램 화면이 떠올랐고, 그녀의 손놀림에 따라 천궁호의 센서들이 일제히 특정 구역으로 향했다.

    몇 분 후, 엔지니어 김도현이 땀을 닦으며 함교로 들어섰다. 그는 육중한 체격과 강철 같은 팔다리를 가졌으며, 천궁호의 모든 시스템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싸움에는 직접 나서지 않지만, 그의 기술적 능력은 천궁호의 ‘금강불괴’ 그 자체였다. “함장님, 부함장님. 동력 계통 이상 무. 전방 압축 필드도 완벽합니다.”

    이소영은 김도현에게 박선우가 감지한 파동에 대한 데이터를 넘겼다. 김도현은 데이터를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흐음… 정말 이상하군요. 감지되기는 하는데, 정량적인 수치로는 잡히지 않습니다. 마치… 시스템의 오류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저희 센서의 한계를 벗어나는 존재인 것 같기도 합니다.”

    류진은 팔짱을 끼고 모니터를 주시했다. “오류라면 이렇게 지속될 리가 없다. 선우, 네 감지에 의존하겠다. 그 파동의 근원지를 추적할 수 있겠는가?”

    박선우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그의 얼굴에는 온 신경을 집중하는 듯한 긴장감이 역력했다. 이윽고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번개처럼 눈을 떴다. “함장님! 서남쪽 32도 방향! 거리가 짧아졌습니다.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함교의 분위기가 일순간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미지의 존재가 스스로 다가오는 것인가, 아니면 천궁호가 그 존재에게 이끌리고 있는 것인가.

    “속도를 최저로 낮추고, 모든 외부 활동은 중단시킨다. 전술 스크린에 해당 구역을 최대로 확대하라.” 류진의 명령이 떨어졌다.

    천궁호는 거대한 몸체를 조심스럽게 돌려 박선우가 지목한 방향으로 나아갔다. 수천 킬로미터, 수백 킬로미터, 그리고 수십 킬로미터… 거리가 좁혀질수록 박선우의 ‘천기 감지’는 더욱 선명해졌다.

    “함장님! 보입니다! 육안으로 확인 가능합니다!” 박선우의 목소리에 흥분과 경외감이 뒤섞여 있었다.

    전술 스크린이 일제히 해당 지점으로 확대되었다. 칠흑 같은 우주 한가운데,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형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완벽한 정육면체도, 구형도 아니었다. 어떤 기하학적인 형태로도 정의할 수 없는, 불규칙하면서도 조화로운 구조물이었다. 마치 수억 개의 수정 조각이 무작위로 합쳐졌지만, 그 결과물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조형미를 뽐내는 듯했다.

    그것은 회색빛이었다. 어떤 별빛도 반사하지 않았지만, 스스로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은 차갑고도 따스했으며, 고요하면서도 맹렬했다. 구조물 내부에서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것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진동하는 듯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게… 대체 뭡니까?” 김도현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그의 눈에는 기술자로서의 호기심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스쳐 지나갔다.

    이소영은 숨을 들이켰다. “어떤 에너지 방출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물질 구성 분석도 불가능합니다.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입니다.”

    류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오직 그 기이한 구조물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호기심이나 경계심이 아니었다. 마치 수만 년 전 잃어버렸던 기억의 조각을 마주한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아련함과 끓어오르는 열정 같은 것이었다.

    “이건…” 류진의 낮은 목소리가 함교에 울려 퍼졌다. “평범한 유물이 아니다. 마치… 아득한 옛날, 우리 선조들의 무협지에서나 나올 법한 ‘천외비보(天外秘寶)’로군.”

    모두의 시선이 류진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함장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기운을 느꼈다. 평온했던 그의 기운이, 마치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거대한 바위처럼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홀로그램으로 확대된 구조물에서 미세한 균열이 발생했다. 균열 사이로 흘러나오는 빛은 이전보다 훨씬 강렬하고 선명했다. 그 빛은 단순히 시각적인 것이 아니었다. 천궁호의 선체 전체를 감싸는 듯한, 압도적인 ‘기(氣)’의 흐름이었다.

    “함장님! 에너지 파동이 갑자기 증폭됩니다! 전례 없는 수치입니다!” 박선우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의 ‘천기 감지’가 미친 듯이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김도현은 다급하게 패널을 조작했지만, 시스템은 이미 과부하 상태였다. “아무것도 제어할 수 없습니다! 함장님, 전 시스템 오류입니다!”

    이소영은 손에 자신도 모르게 검자루를 잡는 시늉을 했다. 그녀의 유수권 기운이 본능적으로 솟아올랐다.

    강렬한 빛이 천궁호를 덮쳤다. 그것은 단순히 밝은 빛이 아니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관통하는 듯한,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기운’이었다. 승무원들은 고통과 환희가 뒤섞인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몸속에 잠자고 있던 어떤 근원적인 힘이, 강제로 깨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류진은 눈을 감았다. 그의 온몸에 흐르는 기혈이 역류하는 듯한 고통과 함께, 잊고 있던 과거의 무공 심법이 저절로 뇌리에서 떠올랐다. 그의 단전(丹田)이 뜨겁게 타올랐다.

    빛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구조물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 기운은 천궁호를 뚫고 들어와 승무원들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크아악!”
    “이게 뭐야!”

    승무원들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들의 몸에서는 알 수 없는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그들의 신체가 거대한 기운의 그릇이 되어 버린 듯했다.

    류진은 이를 악물었다. 고통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몸속에서 변화하는 기운을 감지했다. 그의 경맥이 확장되고, 흐르지 않던 기운이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의 눈앞에는 수많은 우주와 별들, 그리고 그 너머의 심연이 펼쳐지는 환상이 스쳐 지나갔다.

    이소영의 손에서 푸른빛이 감돌았다. 그녀의 유수권 기운이 한층 더 강력해지는 것을 느꼈다.
    박선우의 몸에서는 은은한 황금빛이 발산되었다. 그의 ‘천기 감지’ 능력은 이제 우주의 모든 진동을 읽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김도현의 육중한 몸은 붉은 기운으로 감싸였다. 그의 피부는 마치 단단한 금속처럼 변해가는 듯했다.

    그리고 류진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아득한 별빛이 박혀 있었다. 온몸의 고통이 사그라들고, 거대한 힘이 그의 안에 가득 차는 것을 느꼈다.

    구조물의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승무원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몸에서는 아직도 잔잔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함장님… 저희 몸이…” 이소영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손에서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경악했다.

    류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푸른빛 기운이 피어올랐다. 그는 그것이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자신의 ‘검기’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우주의 심연을 담고 있는 듯한 강력한 기운이었다.

    “모두 괜찮은가?” 류진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억누를 수 없는 흥분이 담겨 있었다.

    박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해진 것 같습니다. 우주의 모든 것이 제게 말을 거는 것 같습니다…”

    김도현은 자신의 팔을 주무르며 말했다. “제 몸이… 바위처럼 단단해졌습니다. 금강불괴가 실제로 구현된 것 같습니다…”

    류진은 다시 구조물을 바라보았다. 빛은 완전히 사라지고, 그것은 다시 회색빛의 고요한 존재로 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잠재된, 그리고 지금은 그들의 몸속에 스며든 힘은 명확했다.

    “이건 분명히…” 류진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인류가 상상하지 못했던, 우주 어딘가에 존재했던 무림의 정수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 될지도 모를…”

    그의 말은 칠흑 같은 우주에 메아리치며, 새로운 미지의 장을 열었다. 천궁호의 승무원들은 이제 단순한 탐사대가 아니었다. 그들은 우주의 기운을 품은, 새로운 시대의 ‘무인(武人)’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들의 앞에는 어떤 시련과 영광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그들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만이 분명했다.

  • 심리 스릴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심연의 유물: 제1화 – 침묵하는 조우

    우주선 ‘아레스’의 함교는 칠흑 같은 심우주 한가운데 떠 있었다. 수백억 광년 떨어진 고향 행성의 희미한 빛조차 닿지 않는 곳. 오직 인공적인 함교의 불빛만이 대원들의 지친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김민준 함장은 팔짱을 낀 채 주 모니터 너머로 펼쳐진 무한한 어둠을 응시했다. 그는 이런 종류의 고독에 익숙했다. 임무는 단조롭고, 가끔 예기치 않은 소행성이나 미세 운석 무리를 만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화롭지만, 동시에 답답한 평화.

    “함장님, 오늘 스캔 데이터입니다. 특이 사항 없습니다.”

    부함장 박준호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는 능숙하게 태블릿을 조작하며 보고를 올렸다. 굵고 짧은 스포츠 머리, 꾸밈없는 표정. 박준호는 아레스의 모든 기계 장치를 손금 보듯 꿰뚫는 베테랑 기관사였고, 동시에 함장의 오른팔이었다.

    “그래. 수고했네, 박 부함장.”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들 식사하고 교대 시간까지 휴식하도록.”

    “예, 함장님.”

    박준호가 퇴장하자, 민준은 다시 혼자 남았다. 윙- 하는 낮은 기계음만이 함교를 채웠다. 그는 커피 잔을 들어 식어버린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이대로라면 예정된 기간 내에 탐사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할 수 있을 터였다. 별문제 없이. 늘 그랬던 것처럼.

    바로 그때, 주 모니터가 섬광을 터뜨리며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였다.

    삐- 삐- 삐-!

    날카로운 알람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민준은 커피 잔을 내려놓는 동시에 제어판 앞으로 달려갔다. “무슨 일인가?!”

    모니터에는 광범위한 에너지 패턴이 감지되었다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에너지 패턴이 아니었다. 전례 없는, 분류할 수 없는 신호였다.

    “박 부함장! 이지영 박사! 당장 함교로!” 민준은 다급하게 내부 통신을 연결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이지영 박사가 연구원 특유의 산발적인 머리칼을 휘날리며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이 탐사선의 유일한 외계생물학 및 우주고고학 박사였다. 호기심 많고, 이론적으로는 냉철하지만 때로는 감정적인 기질을 숨기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박준호 역시 곧바로 뒤따라왔다. 그의 표정은 이미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함장님, 무슨 일입니까? 선체에 이상은 없었습니다만…” 준호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시선은 이미 주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거… 이건 또 뭡니까?” 지영은 모니터를 향해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녀의 눈은 놀라움과 흥분으로 빛났다. “에너지 패턴이… 비정형적이에요. 기존 데이터베이스와 일치하는 게 전혀 없습니다. 자연적인 현상도 아니고, 인공적인 신호도… 아니에요.”

    “인공적인 게 아니면 뭡니까? 설마 외계 지적 생명체의 흔적이라도?” 준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런 추측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적 생명체라면 통신 신호나 동력원의 흔적이 있어야죠.” 민준이 냉정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건 단순히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치 우주 공간에 박혀있는 하나의 덩어리처럼.”

    “스캔 범위 내에 위치는 파악됩니까?” 지영이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민준은 제어판을 조작했다. 곧 모니터에 희미한 형체가 나타났다. 마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유령처럼, 간신히 윤곽만 식별할 수 있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어림잡아… 행성 하나만 할 수도 있겠습니다.” 민준의 목소리에 미묘한 경외감이 섞였다.

    “말도 안 돼…! 저런 게 왜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지?!” 지영이 거의 비명을 질렀다.

    “중력 렌즈 효과나, 아니면… 특수한 물질로 이루어져서 빛을 흡수하거나 반사하지 않는 걸 수도 있습니다.” 준호가 차분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민준은 잠시 고민했다. 이 이상한 현상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탐사선의 함장이자, 인류의 최전선에서 미지를 밝혀내야 하는 의무를 지닌 사람이었다.

    “항로를 수정한다.” 민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저 물체로 향한다. 거리는… 얼마나 되지?”

    “현재 위치에서 워프 드라이브로 30분 거리입니다.” 준호가 빠르게 계산했다.

    “좋아. 워프 준비. 지영 박사는 계속 스캔 데이터 분석하고, 준호 부함장은 선체 상태 확인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알겠습니다!”

    “이런 발견은…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을 겁니다!” 지영은 이미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들뜬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민준의 마음속에는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저 미지의 존재가 발산하는 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너무나 압도적인 미지의 규모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들은 지금, 인류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발을 들이고 있다는 것.

    ***

    워프 드라이브의 엔진음이 잦아들자, 아레스는 새로운 공간에 멈춰 섰다. 함교의 대형 창문 너머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거대한 형체가 눈앞에 펼쳐졌다.

    “젠장…!” 준호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건… 행성이 아니에요.” 지영의 목소리는 경외감으로 가득했다. 그녀의 눈은 창밖의 광경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검은색 다면체였다. 매끄럽고 어둡지만, 마치 빛을 삼키는 듯한 기이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기하학적으로 완벽해 보였지만, 동시에 어떤 규칙성도 없는 듯 불규칙하게 뻗어나가는 면들이 기괴한 조화를 이루었다. 표면은 우주 공간의 별빛조차 흡수하는 듯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아주 가끔씩, 그 면과 면이 만나는 모서리에서 알아볼 수 없는 푸른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이 형체를 지닌 것처럼 보였다.

    “이건… 인공물입니다.” 민준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연적으로 이런 형태가 만들어질 리 없어.”

    “크기는 약 1천 킬로미터… 소행성대 하나를 통째로 합쳐 놓은 것보다 크겠군요.” 준호가 보고했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과 함께 두려움이 스치고 있었다.

    “생체 반응 없음, 에너지 반응 없음, 통신 신호 없음…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영이 분석 결과를 읊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아니,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존재하고 있잖아.” 민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들은 아무도 말을 잇지 못했다. 수백 년에 걸친 인류의 우주 탐사 역사상, 이토록 압도적이면서도 설명 불가능한 존재와 마주친 적은 없었다. 거대한 다면체는 어둠 속에서 침묵하며, 그들을 빤히 응시하는 듯했다.

    “근접 스캔을 시작해라.” 민준이 명령했다.

    아레스는 거대한 물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 기괴한 존재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희미하게 깜빡이던 푸른빛이 조금 더 자주, 조금 더 밝게 빛나는 듯했다.

    “함장님! 스캐너가 이상합니다!” 준호가 다급하게 외쳤다.

    “무슨 일이지?”

    “스캔 파장이 자꾸 굴절됩니다! 마치… 이 물체가 빛뿐만 아니라, 우리의 스캔 파장까지도 왜곡시키고 있는 것 같아요!”

    지영은 이미 그녀의 개인 터미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화면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알 수 없는 데이터를 쫓았다.

    “이건 말도 안 돼요. 물리 법칙을 거스르고 있어요. 이 재질은… 우리가 아는 어떤 물질과도 달라요.” 지영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흥분과 함께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아니, 이건 재질의 문제가 아니에요. 마치… 물체 자체가 시공간을 왜곡시키고 있는 것 같아요!”

    그때, 함교 내부에서 미세한 떨림이 시작되었다. 윙- 하는 낮은 울림이 선체의 골격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선체에 이상 없습니다!” 준호가 재빨리 보고했지만, 그의 표정은 이미 겁에 질려 있었다.

    “이건… 소리인가?” 지영이 귀를 기울였다. “이 소리… 함장님도 들리세요?”

    민준은 귀를 쫑긋 세웠다. 처음에는 기계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점점 다른 형태의 소리로 변하고 있었다. 마치 수억 년 된 거대한 돌이 지쳐서 내는 신음소리 같기도 했고, 아니면 심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고래의 울음 같기도 했다. 낮은 주파수의, 심장을 직접 울리는 듯한 소리였다.

    “제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습니다.” 준호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혼란스러웠다.

    민준은 지영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마치 멀리 떨어진 존재와 교감하는 듯, 공허하게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민준의 귓속에도 낮은 울림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뇌 안에서 직접 울리는 듯한, 섬뜩한 소리였다.

    “함장님… 박사님…” 준호는 둘의 변화를 감지했는지, 뒷걸음질 쳤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듣고 계신 겁니까?”

    지영은 준호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천천히, 마치 홀린 듯이 대형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눈은 거대한 다면체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들려요… 그들의 목소리가… 느껴져요…” 지영이 몽환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를 부르고 있어요…”

    민준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소리는 더욱 커져, 이제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고통스럽고, 동시에 묘한 매혹적인 소리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지영에게서 시선을 돌려 창밖의 다면체를 응시했다.

    그 순간, 다면체의 한 면에서 푸른빛이 강력하게 섬광을 터뜨렸다. 그 빛은 한순간 민준의 시야를 잠식했다. 이어서, 그의 뇌리에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끝없이 펼쳐진 암흑 속에서 솟아나는 거대한 구조물들, 셀 수 없는 별들이 한순간에 소멸하는 장관,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존재들이 그 암흑 속에서 꿈틀거리는 모습들.

    “으아악!”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그의 눈은 알 수 없는 공포로 가득했고, 머릿속은 혼란스러운 이미지와 찢어질 듯한 소리로 가득 찼다.

    “함장님! 괜찮으십니까?!” 준호가 달려왔지만, 민준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창밖의 다면체를 향해 있었다. 이제 다면체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았다. 그 거대한 존재는 온몸으로 푸른빛을 토해내며, 아레스 호와 그 안의 모든 대원들을 향해 알 수 없는 속삭임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삭임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파괴적인 것이었다.

    지영은 창문에 완전히 붙어서서, 푸른빛으로 물든 자신의 얼굴에 기이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닌 듯했다.

    “왔어요… 그들이… 우리에게 왔어요…”

    그 순간, 아레스의 모든 시스템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경고등이 미친 듯이 깜빡이고, 모니터에는 알 수 없는 오류 메시지들이 폭주했다. 선체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준호는 경악한 채 시스템 패널을 바라보았다. “함장님! 엔진 출력이 불안정합니다! 중력 제어장치도… 망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민준은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창밖의 미소를 짓고 있는 지영과, 그 뒤편에서 모든 이성을 파괴하는 푸른빛을 뿜어내는 거대한 다면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레스는 거대한 유물의 품속으로,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심장 속에는, 이미 미지의 존재가 심어놓은 섬뜩한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 스팀펑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제127화: 강철 심장과 증기의 춤**

    거대한 황동 경기장은 비명처럼 울리는 증기기관의 압력 배출음과 수만 관중의 열기로 가득했다. 천하제일기계무투회, 그 대장정의 준결승, 두 영웅의 맞대결이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중앙 전광판에는 격렬하게 부딪히는 두 인영의 잔상이 홀로그램으로 번쩍였다. 한쪽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선 순수한 무(武)의 정수를 보여주는 ‘철권’ 강호. 다른 한쪽은 증기와 기어의 조화로 새로운 무를 창조한 ‘기계화신’ 류진.

    경기장 바닥은 거대한 톱니바퀴 문양이 새겨진 강화 강철판으로 되어 있었고, 곳곳에서 가느다란 증기 파이프가 솟아나 독특한 장관을 연출했다. 류진은 경량화된 합금 갑주를 입고 있었다. 그의 팔과 다리에는 시계태엽처럼 정교하게 움직이는 보조 장치들이 달려 있었고, 등 뒤에서는 소형 증기 추진기가 낮은 굉음을 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강철 나비처럼 가볍고 빨랐다.

    “크윽…!”

    강호의 거대한 철권이 허공을 가르며 류진이 방금 서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강철 바닥이 푹 파이며 거친 굉음이 울렸지만, 류진은 이미 수 미터 뒤로 물러나 있었다. 그의 손목에 달린 작은 증기 분사기가 푸쉬익 소리를 내며 연막을 토해냈다. 흰 증기가 순식간에 경기장 일부분을 뒤덮었다.

    “흐흐… 늙은 호랑이여, 눈이 침침해진 모양이군.” 류진의 조롱 섞인 목소리가 증기 너머에서 울렸다.

    강호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눈앞의 증기막은 시야를 완전히 가렸지만, 그의 귀는 증기 속에서 미묘하게 움직이는 금속음과, 바닥을 긁는 류진의 발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오랜 세월 단련된 그의 몸은 이미 단순한 감각기관을 넘어선 존재였다. 그는 마치 안개 속의 등대처럼, 고요한 기운을 발산하며 다음 움직임을 기다렸다.

    갑자기, 증기 속에서 수십 개의 작은 금속 조각들이 튀어나왔다. 류진의 손목과 무릎에 장착된 소형 발사장치에서 뿜어져 나온 것들이었다. 작은 톱니바퀴 모양의 조각들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강호를 향해 돌진했다.

    “쳇, 잔재주가 많군!”

    강호는 크게 호통치며 오른손을 휘둘렀다. 단순한 주먹질이었지만, 그 속에는 천근을 누르는 듯한 무게와, 모든 것을 꿰뚫는 강렬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철산고(鐵山靠)’! 그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압력파가 공기를 왜곡시키며 금속 조각들을 산산조각 냈다. 파편들이 비처럼 흩뿌려지자, 증기막 너머에서 류진의 모습이 다시 드러났다.

    류진은 당황한 기색 없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등 뒤 소형 증기 추진기가 최고 출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는 어림없지, 노인장! 이것이 바로 진정한 미래의 무(武)다!”

    그의 몸이 갑자기 지면에서 솟아올랐다. 증기 추진기가 내뿜는 뜨거운 공기가 바닥을 그을리며 검게 만들었다. 류진은 공중에서 회전하며 수십 발의 증기탄을 발사했다. 증기탄은 강호의 머리 위에서 폭발하며 거대한 증기 구름을 만들어냈고, 그 안에서 날카로운 금속 파편들이 비 오듯 쏟아졌다. 파편 하나하나가 사람의 손톱만 한 크기였지만, 강철판도 뚫을 정도의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강호는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오직 한곳에 집중했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강호가 수십 년간 수련해 온 ‘청강기(靑鋼氣)’였다. 무형의 기운이 그의 몸을 감싸자, 금속 파편들이 피부에 닿는 순간 튕겨져 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방어막을 두른 듯했다.

    류진은 상공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제법이군… 하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그는 재빨리 착지하며 손목의 장치를 조작했다. 손목 장치에서 ‘치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강철 날개가 솟아났다. ‘회전강검(回轉鋼劍)’! 증기압력으로 회전하는 강철 날개는 마치 소형 톱날처럼 무시무시한 속도로 회전했다. 류진은 그 회전강검을 들고 강호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더욱 빠르고 예측 불가능해졌다.

    “이야압!”

    류진은 강호의 옆구리를 노려 날카로운 회전강검을 휘둘렀다. 강호는 몸을 살짝 비틀어 공격을 피했지만, 칼날은 그의 허리춤을 스치며 한 줌의 옷자락을 잘라냈다. 그 순간, 강호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겨우 이 정도인가!”

    강호는 주춤하는 류진을 향해 왼손을 뻗었다. 손바닥 안에서 미세한 기운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탈기천풍(奪氣穿風)’! 마치 진공 상태를 만들어낸 듯, 류진의 몸이 한순간 앞으로 끌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류진은 당황하여 증기 추진기를 역분사했지만, 강호의 기운은 그보다 빨랐다.

    류진의 눈이 커졌다. 강호의 거대한 오른 주먹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류진은 본능적으로 양팔을 교차시켜 막았다.

    **콰앙!**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경기장이 흔들렸다. 류진의 몸이 수 미터 뒤로 튕겨나가며 강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의 팔을 보호하던 합금 갑주가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류진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이전의 여유만만함 대신, 냉혹한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늙은이가… 감히…!”

    류진은 이를 악물고 손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그의 팔뚝 전체를 감싸는 증기 엔진이 ‘쉬이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최고출력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푸른색 증기가 그의 팔 전체를 감쌌고, 팔뚝에 박힌 거대한 황동 너클에서 붉은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강철 심장을 품은 듯한 팔이었다.

    “좋다… 나 역시 모든 것을 걸겠다!”

    강호 역시 자세를 낮췄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청강기가 더욱 짙어졌다. 주변의 공기가 그의 기운에 압도되어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류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수만 관중의 숨소리마저 멎은 순간, 두 영웅의 마지막 격돌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경기장 중앙에 거대한 에너지의 폭풍이 휘몰아칠 것만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다음 순간, 승패는 결정될 터였다.

  • 던전 탐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잊혀진 심연의 옥좌

    차디찬 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수천 년의 먼지가 켜켜이 쌓인 돌바닥은 우리의 발소리를 눅눅하게 삼켰고, 이따금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길게 늘어선 석상은 기묘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모습을 닮았지만, 어딘가 비틀리고 과장된 팔다리는 거대한 짐승의 뼈대를 연상케 했다. 그들의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진우 씨, 이 문양… 아무리 봐도 해석이 안 됩니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대 문명과는 확연히 다른 형태예요.”

    김 교수의 목소리는 흥분과 당혹감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는 낡은 안경을 고쳐 쓰고, 손에 든 마력 램프를 거대한 석벽에 비추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수백 미터 지하에 잠들어 있던, 베일에 싸인 유적의 심장부였다. 오로지 전설로만 전해지던 ‘심연의 옥좌’로 향하는 통로라고 추정되는 곳.

    나는 김 교수 옆으로 다가섰다. 차가운 벽면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거친 돌의 질감 아래로 희미한 마력의 잔향이 느껴졌다. 내 능력은 이 고대 마력의 흔적을 읽어내는 것. 마치 오래된 책 속의 글자를 해독하듯이.

    “단순한 언어 체계가 아닙니다. 교수님. 이건… 마력 그 자체로 새겨진 문양이에요. 문자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동시에 마력 회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내 설명에 김 교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력 회로라니… 그렇다면 이 벽 전체가 거대한 장치라는 말입니까?”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이 문양의 배열은 특정 마력 주파수를 요구하는 것 같아요. 마치 열쇠 구멍처럼요.”

    그때, 등 뒤에서 칼날이 부딪히는 듯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한아가 허리에 찬 쌍검 중 하나를 뽑아들고 자세를 잡았다.

    “진우 씨, 김 교수님. 움직임이 감지돼요. 저기, 그림자 속에서 뭔가 기어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한아의 말과 동시에 어둠 속에서 스르륵,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했던 유적지에 섬뜩한 생명감이 드리워졌다. 김 교수는 황급히 뒷걸음질 쳤고, 나는 본능적으로 한아의 옆에 섰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거미를 닮은 기계 병기들이었다. 빛바랜 금속 몸체는 오랜 세월을 견딘 듯 녹슬어 있었지만, 붉게 빛나는 여덟 개의 눈은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다닥다닥 기어 나오는 소리가 불길하게 울렸다.

    “젠장, 또 저놈들인가! 고대 유적 방어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 중이군.” 한아는 혀를 차며 빠르게 첫 공격을 날렸다. 그녀의 검은 섬광처럼 번쩍이며 가장 가까이 다가온 기계 거미의 다리를 정확히 잘라냈다. 끼이익! 하는 금속 마찰음과 함께 거미는 휘청거렸다.

    나는 한아의 뒤를 지키며 마력 램프의 밝기를 최대로 올렸다. 빛에 노출된 기계 거미들은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광기 어린 속도로 돌진해왔다. 그들의 몸체에서는 시퍼런 전류가 흘렀고, 날카로운 다리 끝은 독액이 묻어 있는 듯 섬뜩하게 빛났다.

    “한아 씨, 주의하세요! 저 독액은 접촉하면 마비 증세를 일으킵니다!” 내가 소리쳤다.

    “알고 있어요!” 한아는 재빠르게 몸을 굴려 세 마리의 거미 공격을 피했다. 그녀의 검은 춤추듯이 움직이며 거미들의 관절부를 노렸다. 챙! 챙! 챙!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난무하고, 불꽃이 튀었다. 그녀의 움직임은 유려하면서도 치명적이었다.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힘은 언제 봐도 경이로웠다.

    하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계속해서 어둠 속에서 기어 나오는 기계 거미들은 마치 끝이 없는 듯했다. 김 교수는 한쪽에 쭈그려 앉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의 주 임무는 유적의 분석이지, 전투가 아니었다.

    “이대로는 안 돼! 진우 씨, 저 방어 시스템의 중추를 찾아야 해요!” 한아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녀의 왼쪽 팔목에 스치는 섬뜩한 다리 끝. 간발의 차이로 피했지만, 소름 끼치는 독액이 벽에 튀어 희미한 연기를 피웠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시간을 벌어주세요!”
    나는 다시 석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력의 흐름을 따라갔다. 석벽에 새겨진 문양들은 단순히 장식이 아니라, 이 유적 전체에 흐르는 거대한 마력 회로의 일부였다. 이 방어 시스템 또한 그 회로의 하위 시스템일 터.

    내 눈은 문양 사이를 빠르게 훑었다. 일반적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마력의 맥박을 읽어냈다. 어딘가에 이 회로의 ‘중앙 허브’가 있을 것이다. 마치 컴퓨터의 메인보드처럼.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다른 문양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희미한 빛을 내는 한 점. 손가락으로 그 부분을 만지자, 차가운 돌 속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마치 잠들어 있던 신경이 깨어나는 듯했다.

    “찾았습니다!” 나는 외쳤다. “한아 씨, 저기로 유인해 주세요!”

    내가 가리킨 곳은 석벽 한가운데, 거대한 문양의 중앙이었다. 한아는 내 말을 듣고 능수능란하게 기계 거미들을 유인하며 그곳으로 접근했다. 그녀가 칼날로 거미 한 마리를 튕겨내자, 거미는 비틀거리며 내가 가리킨 지점으로 날아갔다.

    챙! 하고 거미의 몸체가 벽에 부딪히는 순간, 내가 손을 얹었던 문양이 푸른빛을 내며 밝아졌다. 그리고 그 빛은 거대한 회로를 따라 벽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치 잠들어 있던 고대 유적이 깨어나는 듯한 장관이었다.

    끼이익, 찌지직! 푸른빛이 닿는 곳마다 기계 거미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붉게 빛나던 눈은 꺼지고, 몸체에서는 스파크가 튀었다. 그들은 돌처럼 굳어버린 채 바닥에 떨어졌다.

    “대단해, 진우 씨!” 한아의 목소리에는 감탄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거미 한 마리가 굳어버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김 교수도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다가왔다. “정말 놀랍군! 이 장치를 해제한 건가요?”

    “아뇨. 해제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멈춘 겁니다. 이 유적 전체에 흐르는 마력 흐름을 제가 읽어내서, 방어 시스템을 재설정하는 데 성공한 거죠. 일종의 ‘잠시 멈춤’ 명령을 내린 겁니다.” 나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이 정도 마력 조작은 내게도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때, 우리가 서 있던 바닥 전체가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하는 묵직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전신으로 전해졌다. 석벽에 새겨진 푸른빛 문양들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뭐, 뭐지? 또 다른 함정인가요?” 김 교수는 겁에 질려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이건… 함정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이 열리고 있어요.”

    진동은 점점 거세졌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던 거대한 석벽이 서서히, 하지만 웅장하게 양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묵직한 돌이 움직이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크르르르릉!

    벽이 완전히 열리자,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마력과 함께 눈부신 빛이 우리를 덮쳤다. 거친 먼지 속에서 드러난 것은 거대한 지하 공간이었다. 그 중심에는 엄청난 규모의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옥좌였다. 검푸른 광석으로 이루어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교하게 깎인 거대한 옥좌. 그 위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지만, 옥좌 자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아우라는 마치 고대의 존재가 그곳에 좌정해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옥좌 뒤편으로는 수십 개의 굵은 마력 파이프가 거미줄처럼 뻗어 나와 벽면 깊숙이 박혀 있었다. 그 파이프들은 옥좌를 중심으로 이 유적 전체에 마력을 공급하고 있는 듯했다. 옥좌가 바로 이 심연 유적의 심장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옥좌의 등받이에는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의 중앙에는 검은 구체가 박혀 있었다. 그것은 빛을 흡수하는 듯,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심연의 색을 띠고 있었다.

    그 검은 구체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은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강대해서, 내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지금까지 내가 읽어냈던 어떤 마력의 흔적과도 달랐다. 생명의 기운을 느끼기 힘든, 차갑고도 거대한 힘이었다.

    “이, 이건…” 김 교수는 말문이 막혔다. 그의 눈은 경외감과 함께 공포로 흔들리고 있었다.

    한아는 검을 꽉 쥐었다. 그녀의 표정은 잔뜩 경계심으로 물들어 있었다. “저게… 심연의 옥좌인가요? 그런데… 저 검은 구체는 대체 뭐죠?”

    나는 천천히 옥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듯했다. 내 안의 마력 감지 능력이 최고조로 치솟으며 경고를 보냈다. ‘위험하다. 너무나도 거대한 힘이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이 유적의 진짜 비밀은 저 옥좌에, 그리고 저 검은 구체에 잠들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옥좌에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언어가 아닌, 순수한 정보의 파동. 고통과 절규, 그리고 알 수 없는 메시지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들려왔다.

    나는 옥좌 바로 앞까지 다다랐다. 검은 구체는 내 존재를 인식하는 듯, 더욱 강렬하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섬뜩한 감각.

    그때, 구체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 같은 것이 내 손목을 휘감았다. 차가우면서도 끈적한 감촉. 동시에 뇌리를 강타하는 엄청난 양의 정보.

    **[…침묵하는 시간의 심연 속에서… 봉인된 존재… 깨어나라…]**

    알 수 없는 고대어가 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었다. 마치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존재가 내 정신에 직접 말을 거는 듯했다.

    내 눈은 검은 구체에 고정되었다. 구체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태동하는 심장처럼, 어둠 속에서 강력한 생명체가 막 깨어나려는 것처럼.

    “진우 씨!” 한아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지만, 나는 이미 다른 세계에 있었다.
    내 몸에서 희미한 마력의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구체가 내 마력을 흡수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구체의 마력에 동화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이 잊혀진 지하 유적의 심연 속에, 우리는 이제 막 감춰진 진실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진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고, 어쩌면 파멸적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내 영혼을 뒤덮었다.

    모든 것은, 이제 시작이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우주선 ‘아르테미스 호’의 함교는 얼어붙은 듯 고요했다. 광활한 넥서스 성운의 심연을 가로지르던 탐사선은 예측 불가능한 미지의 심해에서 길을 잃은 작은 배와 같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박힌 무수한 별빛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선장님, 에너지 신호가 잡힙니다.”

    정적을 깬 건 기관장 최민준의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은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의 푸른빛 아래서 더욱 상기되어 보였다.

    강선우 선장은 낡은 함장석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며칠 밤낮으로 이어진 미지의 성운 탐사는 모두를 지치게 만들었다.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굳게 다문 입술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신호지, 민준?”

    “지금까지 데이터베이스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패턴입니다. 아주 미약하지만… 비정상적입니다. 자연적으로 발생한 신호는 아닌 것 같아요.”

    수석 연구원 이수진이 민준의 옆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좌표를 이쪽으로 넘겨. 내가 직접 분석해볼게.”

    수진은 전면에 떠오른 홀로그램 인터페이스를 능숙하게 조작했다. 데이터가 쏟아져 들어왔고, 그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건… 말이 안 돼요. 선장님.”
    그녀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섞였다.

    “무슨 문제라도?” 강선우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거리가… 너무 멀어요. 이 정도 신호 강도라면 적어도 수십 억 킬로미터는 떨어져 있어야 하는데… 불과 몇 천 킬로미터 앞입니다. 게다가… 신호의 주파수가 계속 변동해요. 마치… 의도적으로 탐지를 회피하려는 것처럼.”

    전술 및 보안 책임자인 박진우가 비상 패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표정은 이미 굳어 있었다.
    “탐지를 회피한다고요? 설마….”

    “이 성운은 미개척 지역이다. 알려진 문명은 물론, 생명체 신호조차 없었어.” 강선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가능성은 항상 염두에 둬야겠군. 민준, 속도를 낮추고 해당 좌표로 접근한다. 진우, 모든 센서와 무장 시스템을 활성화시켜. 수진은 계속해서 데이터 분석에 집중해.”

    “알겠습니다, 선장님!”
    “네, 선장님!”
    “수신 완료!”

    아르테미스 호는 거대한 심해를 헤치듯 천천히 미지의 신호를 향해 나아갔다. 함교를 가득 채운 긴장감은 마치 진공 상태처럼 숨 막히게 조여 왔다.

    수십 분이 흘렀을까.
    함교를 뒤덮은 메인 스크린에 희미한 형체가 포착됐다. 처음에는 광활한 어둠 속의 점처럼 보였던 그것은, 아르테미스 호가 가까워질수록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저게… 뭐야?” 박진우의 목소리에 경외심과 함께 공포가 서려 있었다.

    메인 스크린 가득 펼쳐진 것은, 상식을 초월한 구조물이었다. 거대한 검은색 다면체. 표면은 빛을 흡수하는 듯 칠흑 같았지만, 동시에 미세하게 깜빡이는 보라색 광선을 뿜어내고 있었다. 일반적인 금속이나 암석이 아닌, 알 수 없는 재질로 이루어진 듯했다. 그 크기는 소행성 하나를 통째로 깎아놓은 듯 어마어마했다.

    “스캔 데이터가… 계속 충돌해요.” 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재질은 판별 불가능, 내부 구조는 감지 불가… 에너지 반응은 측정 불가능합니다. 마치… 이 구조물이 존재하는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때, 함선 전체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웅하는 낮은 진동음이 함선 내부를 울렸다.
    “선장님! 함선 내부 시스템에 이상이 감지됩니다! 전력 주파수가 불안정해요!” 민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젠장, 저것 때문인가?!” 박진우가 옆에 놓인 무장 시스템 패널을 주시했다. “메인 터렛이 응답하지 않습니다!”

    “선장님!” 수진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은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 구조물에서… 미지의 에너지파가 방출되고 있어요! 저희 함선의 모든 전자 시스템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선우는 창백해진 얼굴로 거대한 검은 다면체를 노려봤다.
    “멈춰! 아르테미스 호 정지! 안전거리 유지!”

    민준이 황급히 레버를 조작했지만, 아르테미스 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미세하게 진동하며, 그 알 수 없는 구조물을 향해 천천히 끌려가고 있었다.

    “멈추지 않습니다! 선장님! 추진기가 말을 듣지 않아요!” 민준의 얼굴에 공포가 스쳤다.

    “이건… 자기장이 아니에요!” 수진이 소리쳤다. “정신 자기장…! 뇌파에 직접 영향을 주는… 감각을 교란시키는 신호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선우의 머릿속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눈앞의 스크린이 일렁이는 듯했고, 오래전에 죽은 동료들의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크윽…!” 선우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박진우는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려다 멈칫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게… 뭐야… 내… 내 머릿속에…”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 이건 함정이다!” 선우가 간신히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조차 흐릿하게 들렸다.

    검은 다면체는 거대한 포식자처럼 아르테미스 호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듯했다. 그 틈새에서 보라색 광선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아르테미스 호의 외벽을 긁어내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잉- 찌직-!

    메인 스크린이 지직거리며 일순간 암전됐다. 그리고 다시 빛이 들어왔을 때, 검은 다면체의 표면에서 미세한 균열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 균열 사이로, 무언가가… 안에서부터 움직이는 듯한 어렴풋한 형태가 비쳤다.

    선우는 본능적으로 그 형체가, 그 균열 너머의 공간이, 아르테미스 호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탈출 시스템 가동! 모두 함선을 버려! 지금 당장!”

    그의 절규가 채 끝나기도 전에, 거대한 다면체의 균열이 찢어지듯 벌어졌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빛도, 소리도 아닌… 순수한 공포 그 자체였다. 함교의 모든 승무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풀리며, 마치 영혼이라도 빨려 들어가는 듯 허공을 응시했다.

    아르테미스 호는 거대한 이빨 사이로 빨려 들어가는 작은 먹이처럼, 그 거대한 검은 문명 속으로 사라져갔다.

    **[경고: 정신 오염 수치 급증!]**
    **[경고: 시스템 안정성 한계 초과!]**
    **[경고: 생체 신호 불안정!]**

    눈앞의 인터페이스가 비명을 지르듯 붉은 경고창을 토해냈다. 하지만 이미 누구도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암전됐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 스팀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부우우우웅—!”

    묵직한 쇳소리와 함께 거대한 증기 배관에서 뿌연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강철 외골격을 두른 ‘떠돌이 기어’는 낡아빠진 엔진의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토해내며 잿빛 황무지를 가로질렀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끝없이 펼쳐진 회색빛 폐허였다. 한때 하늘을 찌르던 도시의 마천루들은 뼈대만 앙상히 남은 채 묵묵히 서 있었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모래폭풍이 쉴 새 없이 창문에 부딪혔다.

    조종석에 앉은 카인은 익숙한 손길로 수십 개의 압력 게이지와 온도계를 확인했다. 증기압은 불안정했고, 연료 효율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젠장, 이 정도로는 이틀도 못 버티겠는데.” 그의 마른 입술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낡은 고글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지만, 끈질긴 생명력이 감돌았다.

    옆자리에 앉아 망원경으로 바깥 풍경을 살피던 세라가 무심한 듯 툭 던졌다. “엔진이 곧 멈추면, 그때는 이 낡은 고철 덩어리도 버려야겠네.”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어딘가 냉랭한 기운이 맴돌았다. 검게 그을린 가죽 코트와 단단한 팔뚝에 감긴 쇠줄, 허리에 찬 여러 개의 공구 주머니가 그녀가 겪어온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다.

    카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아직 ‘강철 심장 공장’은 멀지 않아.”

    세라가 망원경을 접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폐허에서 뭔가 대단한 게 나올 거라고 믿는 건가? 거긴 십 년 전에 이미 샅샅이 뒤졌던 곳이야, 카인. 남은 건 고작 녹슨 쇳덩어리들뿐일걸.”

    “고철이라도 괜찮아. 우리 ‘떠돌이 기어’의 주 엔진 증기 압력 조절기가 필요해. 아무리 낡았어도 강철 심장 공장이라면… 그 거대한 엔진의 심장이었던 곳이라면 하나쯤은 남아있을 거야.” 카인의 말에는 희망보다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이 낡은 이동 요새는 그들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삶의 전부였다. 이게 멈춘다면, 황무지 한가운데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몇 시간의 고통스러운 여정 끝에, 떠돌이 기어는 거대한 그림자 앞에 멈춰 섰다. 강철 심장 공장이었다.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굴뚝들은 마치 거인의 뼈대처럼 잿빛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고, 그 밑으로 펼쳐진 공장 건물들은 톱니바퀴와 증기 파이프가 얽힌 채 거대한 미궁을 이루고 있었다. 부식된 금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릿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왔다.

    “생각보다 훨씬 거대하네.” 세라의 목소리에 미묘한 긴장감이 실렸다.

    “여긴 이 황무지에서 가장 거대한 생산 기지였어. 전쟁 전에 온 세상의 동력을 여기서 만들었다고 했지.” 카인은 조종석에서 일어나 허리에 찬 공구 주머니를 고쳐 맸다. 그의 손에는 낡았지만 잘 관리된 랜턴이 들려 있었다. “엔진은 내가 직접 손볼게. 넌 입구를 지켜줘.”

    두 사람은 방진 마스크를 착용하고 떠돌이 기어의 강철 문을 열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금속 부식 냄새가 섞인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공장 내부는 외부보다 더 황량했다. 거대한 기계 설비들이 부서진 채 나뒹굴고 있었고, 천장에 매달린 낡은 크레인은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채 위태롭게 서 있었다.

    “조심해, 카인. 오래된 공장들은 가끔… 손님을 좋아하지 않거든.” 세라가 뒤에서 묵묵히 낡은 레버액션 소총을 고쳐 쥐며 말했다. 그녀의 예리한 시선은 어둠 속에 숨겨진 모든 그림자를 훑고 있었다.

    카인은 랜턴을 들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철제 발판을 밟을 때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공장 내부의 적막을 찢었다. 그는 한때 거대한 엔진이 돌아가던 중앙 제어실로 향했다. 그곳에 고성능 증기 압력 조절기가 있을 확률이 가장 높았다.

    수십 개의 낡은 파이프와 밸브를 지나 미로 같은 통로를 헤쳐나갈 때였다.
    “크르르르… 켁, 켁….”
    어둠 속에서 기계음이 들려왔다. 마치 녹슨 톱니바퀴가 억지로 돌아가는 듯한 소리였다.

    카인이 랜턴을 비추자,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거미처럼 수많은 기계 팔을 가진 고철 덩어리였다. 낡은 증기 엔진이 몸통에 박혀 있었고, 붉게 빛나는 광학 센서가 섬뜩하게 깜빡였다. 버려진 공장의 보안 시스템, ‘감시자’였다.

    “젠장, 이런 게 아직도 작동한다고?” 카인은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세라! 감시자야!”

    세라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들려왔다. “알아! 내가 시간을 벌게! 넌 조절기를 찾아!”

    감시자는 느릿하지만 꾸준히 카인을 향해 다가왔다. 녹슨 기계 팔들이 바닥을 긁으며 찢어지는 쇳소리를 냈다. 카인은 벽에 붙어 있던 낡은 철제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압력 조절기가 필요했다.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크르르르… 침입자… 제거….” 감시자의 기계음이 더욱 거칠어졌다.

    그때였다. “탕! 탕!”
    섬광과 함께 두 발의 총성이 감시자의 몸통에 박혔다. 그러나 낡은 소총의 총알로는 그 두꺼운 강철 장갑을 뚫기 역부족이었다. 총알은 튕겨져 나갔고, 감시자의 광학 센서는 더욱 붉게 빛났다.

    “빌어먹을! 이 녀석, 생각보다 단단하잖아!” 세라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어 그녀가 쏘아댄 몇 발의 총알이 감시자의 다리를 노렸지만 큰 효과는 없었다.

    카인은 이를 악물었다. 감시자가 기계 팔을 뻗어 그를 향해 휘둘렀다. 낡은 파이프를 든 카인은 간발의 차이로 공격을 피했다. ‘저 녀석의 약점은 어디지? 압력 조절기? 아니면 동력원?’ 그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했다. 감시자의 몸통에서 뿌옇게 새어 나오는 증기가 그의 눈에 띄었다. 저기였다. 핵심 증기 파이프!

    “세라! 동력원 파이프를 노려! 몸통에 있는 큰 파이프!” 카인이 외쳤다.

    “알았어!” 세라는 위험한 위치로 이동하며 감시자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끌었다. 그녀가 총을 난사하는 동안, 카인은 감시자의 뒤를 잡으려 했다. 그는 파이프를 휘둘러 감시자의 기계 팔 하나를 강타했다. ‘끼이이이익!’ 하는 비명 같은 쇳소리와 함께 팔 하나가 부러져 나갔다.

    하지만 감시자는 멈추지 않았다. 나머지 팔들로 카인을 덮치려 했고, 그 순간 세라의 총성이 다시 한번 울렸다. 이번에는 정확히 감시자의 몸통 중앙에 박힌, 가장 굵은 증기 파이프를 노렸다.

    “펑!”
    낡은 파이프가 터지며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감시자의 광학 센서가 깜빡이더니 이내 꺼졌다. 거대한 기계 덩어리는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카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감시자를 바라봤다. “해냈어….”

    “시간 없어, 카인! 뭔가 더 오고 있어!” 세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공장 바깥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기계음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카인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재빨리 중앙 제어실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방은 예상보다 깔끔했다. 거대한 제어반과 복잡한 파이프들이 얽혀 있었고, 그 중심에 그들이 찾던 물건이 있었다. 녹슬었지만 온전히 보존된 거대한 증기 압력 조절기였다.

    “찾았다…!” 카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조절기를 분해하기 위해 공구들을 꺼냈다. 작업은 능숙했지만, 시간은 부족했다. 공장 외부의 기계음은 이제 확연히 들릴 정도였다. 세라가 경계를 서는 동안, 카인은 식은땀을 흘리며 조절기의 볼트 하나하나를 풀어냈다.

    “거의 다 됐어…!” 마지막 볼트가 풀리자, 거대한 증기 압력 조절기가 통째로 분리되었다. 그의 어깨에 짊어진 조절기는 생각보다 훨씬 무거웠다.

    “카인! 빨리 나와! 최소한 다섯 대 이상이야!” 세라의 목소리가 절규에 가까웠다.

    카인은 조절기를 짊어진 채 힘겹게 달리기 시작했다. ‘떠돌이 기어’로 돌아가는 길은 멀고, 이미 다른 감시자들이 그들의 길을 막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 무거운 조절기를 가지고 저것들을 뚫고 나갈 수 있을까?
    공장 외부에서는 이미 다른 감시자들이 떠돌이 기어를 에워싸고 있었다. 철컹거리는 쇳소리가 황무지를 뒤덮었다. 그들은 사냥꾼이 아니라, 이제 사냥감이 된 것이다.
    탈출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