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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F (공상과학)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둠은 짙고, 숨소리는 더욱 깊었다. 지상 수백 미터 아래, 제국의 강철 도시 ‘네오-블랙웰’의 심장부와도 같은 곳에서 이토록 숨통을 조이는 정적이 흐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기적이었다. 낡고 녹슨 배관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천장 아래, 땀과 금속 냄새가 뒤섞인 공기를 가르며 세라의 시선이 홀로그램 지도 위를 맴돌았다.

    “제국군 제7섹터 데이터 중추. 보안 등급 알파-제로. 최신형 ‘오메가’ 방어 시스템 가동 중.”
    세라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허공을 가르자, 지도의 특정 구역이 붉은색으로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녀의 얼굴은 홀로그램의 푸른빛에 의해 음영이 져 있었지만, 또렷한 눈빛만은 흔들림이 없었다.

    “우리가 얻어야 할 정보는 단 하나야. 행성 간 보급선 이동 주기와 제국 신형 무기 ‘페르세포네’의 배치 현황.”
    그녀의 말이 끝나자, 테이블 주위를 둘러싼 그림자 속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친 짓이야, 세라. 제7섹터는 제국 보안국 요새나 다름없어. 침투조는커녕, 통신 신호 하나 뚫기도 버거울 거라고.”
    카인이었다. 거친 인상과 굳건한 체격의 그는 늘 최전선에 서는 전사였다. 그의 말에는 걱정보다는 현실적인 어려움에 대한 냉정한 분석이 담겨 있었다.

    세라는 카인의 얼굴을 마주했다.
    “알아.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어. 최근 두 달 동안 제국군의 감시망이 예상보다 훨씬 강화됐어. 외부 식량 반입은 막히고, 내부 자원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지. 이대로는 우리 모두 질식해 죽을 뿐이야. ‘페르세포네’가 실전 배치된다면, 우리 반란은 시작도 전에 끝날 거야.”
    그녀의 시선이 방 안의 모든 이들을 스쳤다. 모두의 얼굴에 피로와 절망의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희미한 불꽃 같은 의지가 타오르고 있음을 세라는 알고 있었다.

    “그럼 뭘 기다리지? 죽을 바엔 싸우다 죽는 게 낫지.”
    노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흰 수염이 길게 자란 그의 얼굴에는 오랜 투쟁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 지하 공동체를 지탱해 온 정신적 지주였다.
    “네 의견은 항상 옳았지, 노아.”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우리는 단순한 희생을 치를 순 없어. 승리해야만 해.”
    그녀는 다시 홀로그램 지도 위에 손을 뻗었다.
    “침투 경로는 확보했다. 수십 년 전, 제7섹터 하층부에 버려진 구식 환기 통로를 통해 접근한다. 제국은 그곳이 폐쇄된 지 너무 오래되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겠지만… 우리는 모든 것을 기억해.”
    세라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반란군이 가진 유일한 무기는 바로 제국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깊은 이해였다. 제국이 무시하고 잊으려 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은 그들의 약점이 되고 있었다.

    “환기 통로라… 벌레들만 오가는 곳 아니었나?” 카인이 혀를 찼다. “거기까지 가는 것도 일이겠군.”
    “그래서 네가 필요해, 카인. 그리고… 아키라.”
    세라의 시선이 카인 옆에 서 있던 한 젊은 여성에게 향했다. 아키라는 짧게 깎은 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해킹 전문가였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감 있는 눈빛을 보냈다.
    “제국 보안 시스템은 내 먹잇감이나 마찬가지죠. 걱정 마세요, 리더.”

    세라는 침통한 표정으로 다시 홀로그램 지도를 응시했다.
    “이번 임무는 ‘고요한 폭풍’ 작전이다. 침투조는 카인과 아키라, 그리고 내가 직접 이끈다. 지원팀은 노아가 맡아 외부 통신을 담당한다. 나머지 대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대기한다. 만에 하나, 우리가 실패하더라도 본거지는 사수해야 한다.”
    그녀의 말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모두의 얼굴에 결연한 의지가 드리워졌다.

    몇 시간 뒤.
    네오-블랙웰의 가장 깊고 음침한 곳, 오래된 폐기물 처리장의 한구석.
    세라와 카인, 아키라는 낡은 공기 정화 설비 아래로 난 철제 해치를 열었다. 안에서는 퀘퀘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썩은 기름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헤드랜턴을 켜자, 거대한 환기 통로의 좁은 입구가 드러났다. 먼지와 거미줄이 잔뜩 쌓여 있어, 수십 년간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았음을 짐작게 했다.

    “경고해도 소용없겠지만… 이곳은… 정말 최악이야.” 카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최악인 곳은 제국의 도시 전체야. 이곳은 그중에서도 아주 작은 부분일 뿐.” 세라는 피식 웃으며 먼저 통로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녀의 등 뒤로 아키라와 카인이 차례로 들어섰다.
    “통신 확인. 노아, 들려?” 세라가 무전기에 대고 속삭였다.
    **「흐릿하지만 들린다. 목표 지점까지 무사히 가라. 우리는 여기서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노아의 목소리가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들려왔다.

    환기 통로는 생각보다 길고 복잡했다. 마치 거대한 기계 괴물의 뱃속을 기어가는 기분이었다. 낡은 금속이 삐걱거리는 소리, 그리고 정체 모를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만이 정적을 갈랐다.
    “제7섹터 보안망에 접속 시도 중… 예상보다 암호화가 강력하네요.” 아키라의 목소리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그녀는 손목에 찬 휴대용 데이터 패드를 조작하며 끊임없이 정보를 해킹하려 시도했다.
    “서둘러야 해. 제국은 이런 통로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겠지만, 만에 하나… 정비 드론이라도 마주치면 골치 아파진다.” 카인이 뒤에서 경계하며 말했다. 그의 어깨에는 소형 에너지 소총이 매달려 있었다.

    그때였다.
    **쉬이이이잉-**
    어두운 통로 저편에서 기계적인 소음이 들려왔다. 점차 소음은 커졌고, 이내 통로를 따라 희미한 붉은빛이 깜빡였다.
    “제국 정비 드론!” 아키라가 낮은 비명을 질렀다.
    “젠장, 이런 곳까지 올 줄이야!” 카인이 소총을 들었다.
    “안 돼! 총소리는 경보를 울릴 거야!” 세라가 다급히 외쳤다. “저쪽으로! 구식 배관 사이로 숨어!”
    그들은 통로 벽면에 늘어선 굵은 배관들 사이의 좁은 틈새로 몸을 구겨 넣었다. 몸을 웅크리자, 찌르는 듯한 금속의 냉기가 온몸을 감쌌다.
    드론은 거대한 날개를 회전시키며 그들이 숨은 곳을 지나쳐갔다. 붉은 감지 센서가 그들의 은신처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갔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드론이 멀어지는 소리가 사라지고 나서야 세라는 겨우 숨을 몰아쉬었다.

    “휴… 아슬아슬했다.” 카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아키라, 보안망은?” 세라가 물었다.
    “잠시 주춤했지만… 뚫었습니다! 이쪽입니다, 리더!” 아키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들은 다시 움직였다. 이제 그들의 발밑은 더 이상 녹슨 철제 통로가 아니었다. 깨끗하게 정돈된 강화 유리 바닥과 벽면이 나타났다. 제국 제7섹터의 중심부였다.

    경계 드론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순찰하고 있었고, 홀로그램 감시 카메라들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세라가 아키라에게 손짓하자, 아키라는 손목 패드를 이용해 보안 시스템을 해킹했다.
    “3분 동안 이 구역의 감시 시스템을 정지시켰습니다. 서둘러야 해요!”
    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장 가까운 데이터 중추 터미널로 향했다. 금속으로 된 견고한 문에는 제국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아키라가 다시 패드를 조작하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내부는 차가운 기계음으로 가득했다. 수백 대의 서버 랙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고, 푸른빛의 데이터 플로우가 벽면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세라는 중앙의 가장 큰 터미널 앞에 섰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집중되어 있었다.
    “카인, 아키라. 주변 경계해.”
    세라는 준비해 온 소형 데이터 리트리버를 터미널 포트에 연결했다. 화면에 수많은 코드가 빠르게 지나갔다. 그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제국의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뚫고 들어가 목표 정보를 찾아내는 작업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했다.

    **「보급선 이동 주기… 확보. 신형 무기 ‘페르세포네’… 정보 검색 중…」**
    세라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제국의 핵심 데이터는 쉽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눈이 화면의 한 구석에 박혔다.
    “이건… 뭐야?”
    그녀의 시선은 ‘페르세포네’ 정보를 검색하던 도중, 예상치 못한 파일에 걸렸다. 파일명은 난해한 암호로 되어 있었지만, 옆에 찍힌 날짜는 불과 며칠 전이었다. ‘프로젝트 키메라’ (Project Chimera).
    호기심과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혀, 세라는 빠르게 파일을 열었다. 화면에 나타난 내용은 그녀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것은 단순한 무기 배치 현황이 아니었다. 제국이 수십 년간 비밀리에 진행해 온,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생체 실험 기록과… 도시 전체를 마비시킬 수 있는 신종 바이러스 관련 연구 자료였다.
    특히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평민 거주 구역에 대한 정밀한 감시망 구축 계획과 함께, 반란군 핵심 거점을 특정하여 바이러스를 살포할 수 있는 ‘운반체’에 대한 설계도였다.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세라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세라, 무슨 일이야? 시간 없어!” 카인이 재촉했다.
    “제국은… 우리를 단순히 진압하려는 게 아니었어.” 세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 모두를… 제거하려 하고 있어. 흔적도 없이.”
    아키라가 화면을 들여다보자 그녀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맙소사… 이런 끔찍한 짓을…?”

    **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익-**
    갑자기 터미널에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천장의 붉은 경광등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젠장! 보안 시스템이 다시 가동됐어! 우리가 발각됐어!” 카인이 소리쳤다.
    “빨리 데이터를 다운로드해! 남은 정보도 전부!” 아키라가 다급하게 외쳤다.
    세라는 빠르게 키보드를 조작했다. 그녀의 손은 떨렸지만, 머리는 냉정하게 움직였다.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최소한 ‘키메라’ 프로젝트에 대한 핵심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데이터 전송 완료.」**
    터미널이 메시지를 띄웠다. 세라는 데이터 리트리버를 뽑아들었다.

    **콰아앙!**
    강철 문이 박살 나듯 열리며, 무장한 제국군 병사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에너지 소총 끝에서 푸른 섬광이 번뜩였다.
    “도망쳐!” 카인이 소리치며 병사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에너지가 벽에 부딪히며 스파크가 튀었다.
    아키라는 이미 뒤편의 비상 탈출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세라는 카인을 돌아보았다.
    “가자, 카인!”
    그들은 쏟아지는 제국군의 포화를 뚫고 비상 탈출구로 몸을 던졌다. 좁은 통로를 따라 필사적으로 달리는 그들의 등 뒤에서, 제국의 외침과 에너지 발사음이 굉음처럼 울려 퍼졌다.

    숨 가쁜 질주 끝에, 그들은 겨우 지하 본거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피곤에 지친 몸을 이끌고 노아의 앞에 선 세라의 얼굴은 창백했다.
    “임무는… 성공했습니다.” 그녀는 겨우 숨을 고르며 말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세라가 확보한 데이터를 노아에게 건넸다. 노아는 잠시 침묵하며 자료를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점차 굳어갔다.
    “키메라… 프로젝트라고?”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카인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은 우리를 개미 죽이듯이 죽이려 하고 있습니다. 바이러스로…!”
    노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깊은 고뇌가 서려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반란 진압 작전이 아니었어… 제국은 ‘정화’를 꿈꾸고 있었던 거야. 자신들의 오점을 모두 지우려 했어.”
    그의 시선이 세라에게 향했다.
    “수고했다, 세라. 네가 이 정보를 얻지 못했다면… 우리는 모두 이 거대한 악몽 속에서 잠들어 버렸을 것이다.”
    세라는 고개를 숙였다. 성공했지만, 승리의 기쁨보다는 더욱 깊은 절망감이 밀려왔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키라가 조용히 물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도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노아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니, 그가 올려다본 것은 수백 미터 위, 제국의 빛으로 뒤덮인 지상이었다.
    “이제… 진짜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그의 눈빛이 섬광처럼 빛났다. “우리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 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우리 스스로 불꽃이 되어 터져야만 한다.”
    세라는 노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 속에서, 방금까지의 절망감이 서서히 불타오르는 결의로 변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독립적인 단편 소설

    게임 속에서 나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그날,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아니, 정확히는 모든 것을 빼앗겼다. 가장 믿었던 친구, 이현우에게.

    우리는 열 살 때부터 함께였다. 학교, PC방, 심지어 같은 대학까지. 게임 속에서 우리는 ‘새벽의 별’이라는 길드를 창설했고, ‘아르카나 온라인’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길드로 키워냈다. 나는 전략과 지휘를, 현우는 전투의 선봉에서 날카로운 칼날을 담당했다. 우리는 완벽한 조합이었다.

    “태산아, 우리가 해냈어. 진짜 여기까지 온 거야.”

    현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앞에는 거대한 레이드 보스, ‘심연의 왕좌’에 자리한 대악마가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었다. 녀석의 체력은 이제 한 자릿수. 길드원들의 함성이 귀청을 때렸다. 우리는 길드 창설 이래 최대의 업적, 서버 최초로 최종 레이드를 클리어하기 직전이었다. 이 보스를 쓰러뜨리면, 전설로만 내려오던 ‘창조주의 심장’이라는 아티팩트를 얻을 수 있었다. 그건 단순히 아이템이 아니었다. 길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우리 모두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절대적인 힘이었다.

    피어나는 승리의 환호 속에서, 나는 문득 현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기쁨보다는 묘한 불안감, 그리고 욕망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깨달았을 땐 이미 늦었다.

    대악마의 마지막 포효가 공기를 갈랐다. 그 순간, 현우의 캐릭터가 섬광처럼 움직였다.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길드원들이 혼란에 빠진 사이, 현우는 대악마가 쓰러지며 남긴 희미한 빛의 잔해 속으로 달려들어 ‘창조주의 심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

    “이현우! 지금 뭐 하는 거야?!”

    나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싸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내가 알던 현우의 것이 아니었다.

    “미안하다, 태산아. 이건… 내 거야.”

    그리고 그는 곧장 길드 탈퇴 버튼을 눌렀다. 길드 채널에 현우의 탈퇴 메시지가 떠오르자, 모든 길드원들이 경악했다. 혼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길드 시스템에 등록된 관리자 권한이 갑자기 내게서 박탈되고, 알 수 없는 에러 메시지가 떴다. 현우가 나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었다. 그가 미리 심어둔 바이러스인지, 아니면 시스템의 취약점을 이용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결국 나는 길드 관리자 권한을 잃고, 나아가 길드원들에게 길드원을 위기에 빠트리고 아이템을 가로챈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현우는 사전에 치밀하게 작업해둔 증거들을 내세우며 나를 매장시켰다.

    나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길드는 와해되었고, 나를 믿던 길드원들은 현우의 거짓말에 속아 나를 비난했다. 게임 속 나의 모든 명성, 아이템, 심지어 오랜 시간 공들여 키웠던 캐릭터마저도 ‘길드 파괴자’, ‘배신자’라는 오명과 함께 잊혀졌다. 현실의 나도 마찬가지였다. 게임 개발자로의 꿈, 현우와 함께 만들고자 했던 미래가 산산조각 났다.

    그날 이후, 나는 게임에 접속하지 않았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마음속에는 절망 대신 차가운 분노가 자리 잡았다. 나는 현우가 ‘창조주의 심장’을 이용해 ‘여명의 기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길드를 창설하고, 빠르게 서버 최고 길드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내가 이루고 싶었던 모든 것을, 나의 꿈을 훔쳐서 자신의 영광으로 포장했다.

    나는 다시 ‘아르카나 온라인’에 접속했다. 하지만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나의 캐릭터명은 ‘밤그림자’. 나는 철저히 혼자가 되어, 오로지 현우에게 복수하기 위한 새로운 길을 걸었다. 그는 전사의 길을 택해 최전선에서 빛나는 영웅이 되었지만, 나는 어둠 속에 숨어 그림자를 휘두르는 암살자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약점과 허점을 파고드는 그림자.

    나는 현우의 ‘여명의 기사단’을 지켜보며 그들의 습성과 동선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수개월에 걸친 집요한 정보 수집, 약점 분석, 그리고 철저한 실력 연마. 나의 칼날은 더욱 날카로워졌고, 나의 그림자는 더욱 깊어졌다. 나는 그가 쌓아 올린 찬란한 성을 바닥부터 허물어뜨릴 계획을 세웠다.

    첫 번째 복수는 은밀했다. 나는 ‘여명의 기사단’의 핵심 자원 보급을 담당하는 길드원들을 하나씩 습격했다. 그들이 공들여 채취한 희귀 자원을 훔치고, 중요 아이템 운반을 방해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왜 계속 손해를 보는지, 누가 자신들을 노리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재수 없는 우연이라고 치부할 뿐. 하지만 그 작은 손실들이 쌓여 ‘여명의 기사단’의 운영에 균열을 만들기 시작했다. 길드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고, 현우의 리더십은 흔들렸다.

    두 번째 복수는 좀 더 공개적이었다. 나는 ‘여명의 기사단’이 주최하는 중요 필드 레이드나 PvP 이벤트에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현우가 지휘하는 길드원들이 고전을 면치 못할 때, 나는 핵심 지휘관들을 정확히 노려 암살하고 사라졌다. 현우의 뛰어난 전투력에도 불구하고, 나의 방해 공작은 길드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그의 지휘력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누구야! 대체 저 밤그림자라는 녀석은! 우리 길드만 골라서 노리는 것 같잖아!”
    “현우 님, 저희 길드에 스파이가 있는 거 아닙니까?”

    길드 채널에서 터져 나오는 불평과 의심은 현우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나의 존재를 알아채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분했다. 모든 인력을 동원해 나를 추적했지만, 나는 그림자였다. 아무도 나를 붙잡을 수 없었다.

    마지막 복수는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이루어질 터였다. ‘아르카나 대륙 통합전’. 매년 한 번, 서버 전체 길드들이 참여하여 대륙의 패권을 두고 겨루는 거대한 전쟁이었다. ‘여명의 기사단’은 ‘창조주의 심장’의 힘을 빌려 다른 길드들을 압도하며 최종 거점인 ‘왕국의 심장’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현우는 승리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만한 미소가 가득했다.

    “모두 집중해! ‘왕국의 심장’은 우리 여명의 기사단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바로 그때, 나는 ‘왕국의 심장’ 성벽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나의 검은 망토가 바람에 휘날렸고, 섬뜩한 가면 아래로 나의 눈빛이 번뜩였다.

    “이현우.”

    나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전장의 모든 소리를 집어삼킬 듯 강렬했다. 현우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의 얼굴에서 오만이 사라지고, 경악과 함께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너… 너는… 설마 강태산?!”

    현우의 입에서 나의 본래 이름이 흘러나오자, 주변 길드원들이 술렁였다. 강태산은 배신자, 길드 파괴자로 알려진 이름이었다.

    “그래, 나다. 네가 버리고 짓밟았던 강태산.”

    나는 가면을 벗었다. 현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랜 시간의 고통과 분노가 새겨진 나의 얼굴을 본 그는 비틀거렸다.

    “다들 들었나! 저 이현우는 ‘새벽의 별’ 길드를 배신하고, ‘창조주의 심장’을 훔쳤다! 그 모든 죄를 나, 강태산에게 뒤집어씌우고 새로운 영웅 행세를 한 파렴치한이다!”

    나의 고백은 전장 전체에 충격파를 던졌다. 길드원들은 혼란에 빠졌고, 다른 길드의 플레이어들도 경악했다. ‘창조주의 심장’을 둘러싼 배신극은 이미 소문으로만 돌던 일이었다.

    “거짓말하지 마! 이 배신자 녀석이 어디서 수작을 부려!”

    현우는 나의 말을 부정하며 칼을 뽑아 들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수작? 그래, 내가 보여주지. 네가 훔쳐서 얻은 힘이 얼마나 하찮은지.”

    나는 현우를 향해 돌진했다. 나의 움직임은 그림자처럼 빠르고 예측 불가능했다. 현우는 ‘창조주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힘을 빌려 공격했지만, 나는 그 모든 공격을 유연하게 흘려내고 그의 방어의 틈새를 파고들었다.

    우리의 결투는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과거의 동지였던 두 남자가 서로에게 칼날을 겨누는 모습에, 수많은 플레이어들은 숨을 죽였다. 나의 칼끝은 현우의 약점을 정확히 노렸다. 그의 자만심, 오만함, 그리고 내가 가르쳐주었던 모든 전투 기술을 역이용했다. 현우는 내가 알던 그 이상으로 성장했지만, 나는 그보다 더 깊은 나락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복수자였다.

    마지막 일격. 나는 현우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의 캐릭터가 산산이 부서지며 차가운 시스템 메시지가 전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여명의 기사단’의 길드장 ‘이현우’ 님이 ‘밤그림자’ 님에게 처치되었습니다.]

    현우의 죽음과 함께,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창조주의 심장’이 땅에 떨어졌다. 영롱하게 빛나는 아티팩트는 이제 누구의 소유도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그 아이템을 집어 들었다. 나의 손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은,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복수의 증거였다.

    “이현우, 네가 훔쳤던 것은… 결국 너를 파멸시켰다.”

    나는 텅 빈 허공에 대고 속삭였다. 전장은 침묵으로 가득했다. ‘여명의 기사단’ 길드원들은 망연자실했고, 다른 길드들은 이 놀라운 반전에 경악했다. 나의 복수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현우는 모든 것을 잃었다. 명성, 길드, 그리고 그의 존재 가치마저도. 내가 잃었던 것처럼.

    나는 ‘창조주의 심장’을 든 채 조용히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복수는 끝났지만, 나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될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새벽의 별’의 지휘관 강태산이 아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다시 태어난 ‘밤그림자’였다. 그리고 이 아르카나 대륙에는, 나처럼 배신당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그림자처럼 싸울 새로운 존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복수는 끝났지만, 나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은 또 다른 새벽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 좀비 아포칼립스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둠이 우주를 집어삼키는 심연의 가장자리. 인류의 탐사선 ‘아레스-7호’는 그 검푸른 미지의 바다를 가르고 있었다. 빛조차 길을 잃는 곳에서, 시간은 의미를 잃고, 존재는 고독의 무게에 짓눌리는 듯했다.

    함장 권지혁 대위는 함교의 주 스크린에 펼쳐진 성간 먼지 구름을 응시했다. 수백 년 전 지구가 버려진 이후, 인류는 무수한 별들을 찾아 헤맸지만, 언제나 답은 같았다. 공허. 이따금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문명의 잔해를 발견하곤 했지만, 생명체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레스-7호의 임무 역시 그 끝없는 허무함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에 불과했다.

    “함장님, 통신 부서입니다. 장거리 스캔에서 특이 시그널이 감지되었습니다.”

    김민준 병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권 대위는 몸을 돌려 그의 자리로 향했다.
    “특이 시그널? 어떤 종류지?”
    “판독 불능입니다. 인공물 같기도 한데, 이전에 기록된 어떤 에너지 패턴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자연 현상일 가능성은 0.01% 미만입니다.”

    그의 보고에 함교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술렁였다. 인공물. 그것도 이 심연 한가운데서.
    “이 박사에게 연락해. 즉시 함교로 올라오라고 해.”

    잠시 후, 헝클어진 머리에 잠이 덜 깬 듯한 이수현 박사가 함교에 들어섰다. 그녀는 과학부 수석 연구원으로, 아레스-7호의 유일한 ‘비상식적인 현상’ 전문가였다.
    “함장님, 무슨 일입니까? 제 연구를 방해한다면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권 대위는 스크린을 가리켰다. 점멸하는 붉은 점 하나가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판독 불능의 인공물. 이 지역에선 처음이야.”

    이 박사의 잠이 순식간에 달아났다. 그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에너지 패턴은? 크기는? 형상은?”
    김 병장이 데이터를 띄웠다. “크기는… 대략 직경 30미터 정도입니다. 형상은 아직 불분명합니다. 주변의 암흑 물질 때문에 정확한 관측이 어렵습니다.”
    “진로 변경, 접근. 최대한 안전 거리를 유지하면서 스캔해.” 권 대위가 명령했다.

    수 시간이 흘러, 아레스-7호는 미지의 인공물 앞에 멈춰 섰다. 주 스크린에 그 실체가 드러나자, 함교에는 침묵이 흘렀다.
    완벽했다. 너무나 완벽해서 비현실적이었다. 지름 30미터의 검고 매끄러운 구(球). 마치 거대한 흑요석을 깎아 만든 듯, 어떠한 문양도, 연결 부위도, 이음새도 없었다. 표면은 빛을 완전히 흡수하여, 마치 그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젠장… 이런 건 처음 봐.”
    박진우 중사, 수석 엔지니어의 낮은 탄성이었다.
    이 박사의 눈은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의 입술 사이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완벽한 구형… 자연적으로는 불가능해. 인공물, 틀림없어. 하지만 어떤 문명도 이런 기술은… 이건 차원이 달라.”

    권 대위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에너지 시그널은 여전히 없나?”
    “네, 함장님. 완전히 비활성화 상태입니다. 어떤 형태의 에너지 방출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김 병장이 보고했다.
    “내부에 물질 반응은?”
    “불확실합니다. 스캔 파동이 표면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마치 모든 것을 흡수하는 듯합니다.”
    이 박사가 스크린 앞으로 바싹 다가섰다. “함장님, 저걸 회수해야 합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위험할 수도 있어, 이 박사. 저게 뭔지 알 수 없잖나.” 권 대위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위험이 없다면 발전도 없습니다. 저건… 단순한 유물이 아닙니다. 어쩌면 답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찾아 헤매던!”

    결국 이 박사의 끈질긴 설득과 인류의 탐험 정신이라는 미명 아래, 권 대위는 회수를 허락했다. 물론, 최고 수준의 안전 수칙과 격리 절차를 전제로.

    거대한 로봇 팔이 어둠 속으로 뻗어나갔다. 조심스럽게 미지의 구를 붙잡고, 아레스-7호의 거대한 카고 베이 안으로 끌어들였다. 격리실은 두꺼운 특수 합금과 에너지 필드로 둘러싸여 있었다. 구가 함선 내부로 들어오는 순간, 미세한 진동과 함께 함선 전체에 정전기가 흐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심장이 한 번 멎었다가 다시 뛰는 것 같았다.

    격리실 안, 검은 구는 모든 빛을 삼키며 압도적인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박사는 연신 스캔 데이터를 확인했지만, 결과는 언제나 ‘판독 불능’이었다. 박 중사는 구의 표면에 온갖 장비를 갖다 대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레이저도, 드릴도, 심지어 극저온 분쇄기도 소용없었다. 구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이었다.
    “이건… 정말 미친 겁니다.” 박 중사가 중얼거렸다. “어떤 물질도 저렇게 완벽하게 저항할 수는 없어요.”

    수일이 지났다. 이 박사는 밤낮으로 유물에 매달렸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해졌고, 눈 밑은 거뭇했다. 하지만 피로는커녕, 그 어느 때보다 활기 넘쳐 보였다. 단지, 그녀의 눈빛이… 어딘가 섬뜩할 정도로 광기 어리게 변해가고 있었다.
    “박사님, 좀 쉬셔야 합니다. 며칠째 식사도 제대로 안 하셨잖습니까.” 김 병장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이 박사는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쉴 수 없어… 저건… 저건 단순한 물질이 아니야. 무언가… 부르고 있어.”
    김 병장은 오싹함을 느꼈다. 그 ‘무언가’라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날 밤, 김 병장은 정기 순찰을 돌고 있었다. 카고 베이 근처를 지날 때였다.
    갑자기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귓속에서는 윙윙거리는 이명이 울렸다. 그리고… 환청.
    “…들어라… 나의 목소리를…”
    낮고 웅웅거리는 목소리. 마치 수천 개의 영혼이 한꺼번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였다. 김 병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피로와 스트레스 때문일 거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다음 날부터 함선 내부에 이상 징후가 보고되기 시작했다.
    일부 승무원들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악몽에 시달리거나, 밤새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사소한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서로에게 날을 세우는 일도 늘었다. 박 중사는 함선 시스템의 미세한 오류를 발견했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함장님, 동력 효율이 0.05% 감소했습니다. 아주 미미한 수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전력 누출도 없고요.”
    “유물이 들어온 이후부터 이런 문제가 발생한 건가?” 권 대위가 물었다.
    “정확히 일치합니다. 마치… 함선이 무언가에 에너지를 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김 병장은 날마다 더 선명해지는 환청에 시달렸다. 이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다가와라… 우리를 맞이하라…”
    그는 점점 더 불안해졌다.
    다시 순찰 중, 카고 베이의 격리실을 지나던 그는 멈춰 섰다.
    이 박사가 격리실 안에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그녀는 투명한 보호벽 너머로 검은 구에 손을 얹고 있었다. 분명 금지된 행위였다.
    “박사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김 병장이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격리실 내부로 전달되지 않았다.

    이 박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더 이상 이수현 박사의 눈이 아니었다. 동공은 풀려 있었고, 핏발이 곤두서 있었다. 입꼬리는 기묘하게 위로 뒤틀려 있었고, 마치 기괴한 가면을 쓴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이 김 병장에게 닿는 순간, 김 병장의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리고… 끔찍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인간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찢어지는 듯한 비명. 그러나 단순한 고통의 비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굶주린 짐승의 울부짖음 같기도 했다.

    경고음이 울렸다.
    <생명 유지 장치 이상! 격리실 산소 농도 급변!>
    김 병장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다, 간신히 비상 버튼을 눌렀다.
    격리실 문이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닫혔다. 내부의 압력이 급격히 변동하는 듯, 두꺼운 강화 유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본 것은, 유리를 긁는 이 박사의 손이었다. 그녀의 손톱은 섬뜩할 정도로 길게 자라나 있었고, 유리를 긁는 소리는 뇌를 찢는 듯했다.
    그리고, 검은 유물에서 희미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그 빛이 이 박사의 일그러진 얼굴을 비췄다.
    그녀의 눈은 이제 완전히 피로 물들어 있었다. 입에서는 거품이 터져 나왔고, 목에서는 뼈가 뒤틀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때, 함선 전체에 진동이 울렸다. 격리실의 강화 유리가 결국 ‘파창’ 하고 완전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함선 내부의 모든 비상등이 붉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김 병장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뒤에서는 이 박사의 끔찍한 울부짖음과 함께, 무언가 질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레스-7호는 이제 더 이상 외로운 탐사선이 아니었다.
    심연의 불청객을 맞아들인, 지옥의 함선이 될 참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 무협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2화: 벽을 뚫는 기운

    강현우는 오늘도 어김없이 해질녘의 고요를 맞이하고 있었다. 도심의 한복판, 낡은 아파트 707호. 거실 창밖으로는 희뿌연 노을이 마천루의 숲에 잠기고 있었다. 그는 반쯤 닳은 명상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온몸의 감각을 곤두세운 채,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일정한 리듬에만 집중했다. 수십 년간 갈고닦은 내공심법(內功心法)은 이제 그의 몸과 마음을 고요한 호수처럼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 고요는 자꾸만 깨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낡은 건물의 소음이려니 했다. 벽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위층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진동, 옆집 아이의 투정 섞인 울음소리.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소음들은 기이한 박자를 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밤중에 방문이 삐걱거리고, 닫힌 창문이 덜컥거렸다. 주방 선반에 가지런히 놓아둔 컵이 홀로 미끄러져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처음 한두 번은 우연이겠거니 했지만, 반복되는 현상은 현우의 본능적인 경각심을 일깨웠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심법이 깊은 경지에 들려는 찰나, 서재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고 건조한 소리. 마치 책 한 권이 책장에서 떨어지는 듯한. 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미 서재의 모든 책들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몇 차례나 확인했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 호수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처럼, 그의 내면의 평화가 살짝 일렁였다.
    “…또 시작인가.”
    낮게 중얼거린 현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발이 닿는 마루바닥은 싸늘했다. 보일러를 돌리지 않았음에도 언제나 온기가 돌던 그의 집이었건만, 최근에는 이상하리만치 한기가 감돌았다.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피부를 파고드는 듯한, 불쾌한 종류의 차가움.

    서재 문을 열자,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코끝을 스치는 곰팡내와 함께 섬뜩한 냉기였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실내 공기는 정체된 듯 무거웠다. 그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가장 아끼던 무협 고서 한 권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도 펼쳐진 채로.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책상 위, 늘 정돈되어 있던 붓통의 붓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고, 먹물이 담겨 있던 벼루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곳을 휘젓고 지나간 것처럼.

    현우는 천천히 다가갔다.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의 흐름이 보였다. 혼탁하고 불안정한 기운. 마치 상처 입은 짐승이 발버둥 치듯, 제멋대로 날뛰는 기운이었다. 그것은 서재의 한쪽 구석, 벽을 뚫고 들어오는 듯한 양상으로 뭉쳐 있었다.
    “무어냐, 네놈의 정체는.”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러자 흩어졌던 붓들이 일제히 ‘탁’ 소리를 내며 책상 위를 굴렀다. 벼루 안의 먹물이 요동치며 가장자리로 넘쳐 흘렀다. 그리고 현우의 등 뒤에서, 닫혀 있던 서재 문이 ‘쾅’ 하고 닫혔다. 동시에 방 안의 전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현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벽 한구석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기운의 중심을 꿰뚫어 보려는 듯. 그는 알고 있었다. 이 현상은 단순히 영적인 장난이 아니었다. 분명 물리적인 힘을 동반한, 그리고 명확한 의지를 가진 무언가였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 허공을 향해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오랜 세월 쌓아온 내공이 기화(氣化)되어 외부로 표출되는 순간이었다. 공기 중의 혼탁한 기운들이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맑고 강인한 내공에 반응하며 물러서는 듯했다.
    “더 이상 이 집을 어지럽히지 마라.”
    현우의 목소리에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천지를 호령하는 듯한, 단단한 기운이 실려 있었다.

    그러자, 현우의 손바닥에서 뻗어 나가는 기운과 마주친 벽 한구석의 혼탁한 기운이 갑자기 맹렬하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서재의 모든 사물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고, 책꽂이가 흔들렸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 액자가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쿠르르릉!’
    갑자기 서재의 벽에서 깊은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땅속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듯한, 거대한 굉음이었다. 벽지가 찢어지고, 그 아래 시멘트 벽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균열은 빠르게 번져나갔다.

    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단순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아니었다. 이 기운은 벽 그 자체를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균열 너머에서, 무언가 시뻘건 섬광이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핏빛 눈동자가 그를 노려보는 듯한.

    그 순간, 현우의 귓가에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라기보다는, 수십 마리의 짐승이 동시에 비명을 지르는 듯한, 혹은 찢어지는 쇳소리 같았다. 비명과 함께, 서재 전체의 기온이 급격히 영하로 떨어졌다. 숨을 들이쉬는 것조차 폐가 얼어붙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이것은…!”
    현우의 얼굴에 처음으로 경악의 그림자가 스쳤다. 단순한 원혼이 아니었다. 아니, 원혼을 넘어선, 이 세계의 질서 자체를 위협하는 불순한 기운이었다. 그것은 그가 수십 년간 강호(江湖)를 떠돌며 겪었던 어떤 괴이한 존재보다도 더 깊고 어두운, 심연의 힘을 품고 있었다.

    시뻘건 섬광이 번뜩이는 벽의 균열 사이로, 거대한 어둠의 형체가 비집고 나오려는 듯 꿈틀거렸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강철 거인처럼, 혹은 검은 바위 산맥처럼 육중하고 위압적인 형상이었다.

    현우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감히 내 거처를 침범하느냐!”
    그의 입에서 폭풍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내공이 서재 전체를 뒤흔들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고서들이 공중으로 떠올랐고, 찢어진 벽지는 갈기갈기 찢겨져 허공을 맴돌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기운은 이제 방대한 푸른빛의 장막이 되어 균열 너머의 어둠을 밀어붙였다.
    두 개의 거대한 힘이 아파트 707호의 작은 서재 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건물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현우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상대의 힘이 생각보다 훨씬 강했다. 이대로라면 아파트 전체가 무사하지 못할 터.
    그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의 온몸의 내공이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푸른 장막이 더욱 거대해지고, 마치 파도처럼 균열을 향해 밀려갔다.
    그러나 균열 너머의 어둠 또한 만만치 않았다.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 핏빛 안광(眼光)이 그의 푸른 장막을 뚫고 들어오려 했다.

    이 아파트, 707호.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었다.
    이 오래된 벽 속에 숨겨진, 미지의 심연이 깨어나고 있었다.
    현우는 알 수 있었다. 이 싸움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다음 화에 계속)

  • 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크로노스의 그림자: 밀실의 초상

    ### 1장. 차가운 미소

    따스한 햇살이 눈꺼풀 위로 쏟아지는 감각에 류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하지만 이 햇살은 진짜가 아니었다. 현실의 칙칙한 방 안, 누워있는 자신의 몸 위로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을 터. 이 찬란한 빛은 가상현실 게임, ‘크로노스의 그림자’가 선사하는 완벽한 몰입감의 증거였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푸른 하늘이 눈부시게 펼쳐졌다. 창가에 놓인 화분에서는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싱그럽게 피어나 바람에 살랑였다. 귓가에는 아침을 알리는 새들의 노랫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가 어우러져 평화로운 교향곡을 연주했다.

    “젠장, 매번 감탄하게 만드는군.”

    류진은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아바타는 옅은 회색의 캐주얼한 정장 차림이었다. 특별한 직업이나 소속을 드러내지 않는, 그저 평범한 여행자 같은 모습. 그는 그저 이 세계를 유랑하며 흥미로운 사건들을 찾아다니는 것을 즐길 뿐이었다. ‘탐정’이라는 직업 시스템이 있기는 했지만, 류진은 굳이 그런 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시스템이 정해주는 틀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선호하지 않았다. 진짜 재미는 예측 불가능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법이니까.

    오늘 그가 도착한 곳은 드넓은 호수를 끼고 있는 아름다운 휴양 도시, ‘아쿠아베르데’였다. 이곳에서는 지금, 이 세계의 유력한 재력가이자 희귀한 고미술품 수집가로 알려진 ‘시메온 백작’의 주최로 성대한 가면 무도회가 열리고 있었다. 류진은 초대받은 손님은 아니었지만, 한 지인의 추천으로 VIP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의 진짜 목적은 가면 무도회 같은 따분한 행사가 아니었다. 소문에 따르면 시메온 백작의 저택은 단순한 저택이 아니라, 백작이 수집한 온갖 희귀한 퍼즐과 트릭으로 가득한 거대한 미궁이라고 했다.

    “퍼즐이라면, 나도 좀 끼어볼까.”

    그는 빙긋 웃으며 방을 나섰다. 복도에는 이미 가면을 쓴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깃털 장식의 화려한 드레스, 턱시도와 가면 뒤에 숨겨진 신비로운 눈빛들. 모두들 흥분과 기대감에 들떠 보였다. 류진은 그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와 웅장한 대연회장으로 향했다.

    홀은 황금빛 샹들리에와 화려한 장식으로 눈이 부셨다. 중앙에서는 왈츠가 흐르고 있었고,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의 즐거운 대화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류진은 벽에 기대어 서서 이 광경을 묵묵히 지켜봤다. 평범한 눈에는 화려하고 즐거운 풍경이었지만, 류진의 눈에는 이 모든 것이 정교하게 짜인 무대 장치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늘, 무대 뒤편의 진실을 엿보는 것을 즐겼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창 무도회가 무르익어가던 그때였다.

    *쿵!*

    갑작스러운 굉음이 연회장을 뒤흔들었다. 동시에 화려한 샹들리에의 불빛이 일제히 꺼지며 암흑이 들이닥쳤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와 당황한 외침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이야!”
    “정전인가?”
    “가만히 계십시오! 위험합니다!”

    몇몇 경비 NPC들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류진은 어둠 속에서도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굉음은 분명 위층에서 들려온 것 같았다. 그의 예리한 감각은 단순한 정전 이상의 무언가를 감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상등이 켜지며 희미한 빛이 연회장을 비췄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작님! 백작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백작의 집사였다. 그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계단 아래로 뛰어내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향했다.

    “방금, 백작님의 서재에서 큰 소리가 났습니다. 제가 문을 열어보려고 했지만… 잠겨있었습니다. 안에서 아무런 대답도 없습니다!”

    웅성거림이 더욱 커졌다. 백작의 서재는 저택의 가장 높은 층, 사방이 두꺼운 석벽으로 둘러싸인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은 외부와의 단절을 위해 창문도 최소한으로 줄인, 완벽한 밀실 구조였다. 백작은 종종 그곳에 틀어박혀 희귀한 서적이나 골동품을 감상하곤 했다.

    “서재 문은 안에서만 잠글 수 있도록 특수 제작되었습니다. 백작님께서 직접 잠그지 않으셨다면 열릴 리가 없습니다.” 집사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드리워졌다.

    류진은 한숨을 쉬었다. “결국 터졌군.”

    그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그저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백작의 서재를 향했다.

    서재 앞 복도는 이미 몇몇 경비병들과 백작의 측근들로 북적였다. 그들은 잠긴 문을 향해 애타게 소리치거나, 부술 방법을 찾고 있었다.

    “백작님! 안에 계십니까?”
    “문이 워낙 견고해서 쉽게 부수기 어렵습니다!”

    그때, 한 경비병이 다급하게 외쳤다. “이런! 문틈으로 피가… 피가 흐릅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류진은 문틈으로 흐르는 붉은 액체를 무심한 듯 내려다봤다. 이미 백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는 상황이었다. 밀실에서, 오직 백작 혼자 있던 방 안에서 피가 흐른다? 누가 보아도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살인 사건이었다. 그것도, 범인이 감쪽같이 사라진 밀실 살인.

    “잠시 비켜주십시오.”

    류진의 차분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기에 그의 표정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짙은 호기심과 냉철함으로 빛나고 있었다.

    한 경비병이 거칠게 말했다. “누구냐! 지금은 모두 비상 상황이다!”

    “백작님을 구하고 싶다면, 이 문을 부수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는 게 빠를 겁니다.” 류진은 경비병의 말을 무시하고 문을 자세히 살펴봤다.

    문은 두꺼운 오크나무로 만들어져 있었고, 강철 빗장이 안쪽에서 걸려 있는 것이 육안으로도 확인되었다. 문틈으로 흐르는 피는 이미 서재 안쪽에서 상당한 양이 흘렀음을 암시했다.

    “부서진다면 좋겠지만, 이 문은… 밖에서 부수는 것보다 안에서 잠금을 해제하는 것이 훨씬 쉽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백작님의 서재는 단순한 방이 아니라, 백작님만의 은밀한 도피처였으니까요. 아마 외부의 침입을 막는 동시에, 언제든 내부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하는 안전장치가 있었을 겁니다.”

    백작의 집사가 놀란 표정으로 류진을 바라봤다. “그것을 어떻게…?”

    “추측입니다.” 류진은 대답 대신 문 옆의 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가락은 벽돌 사이의 미세한 틈새, 문고리 주변의 장식들을 스치듯 지나갔다. 그러다 한 지점에서 그의 손이 멈췄다. 벽에 조각된 화려한 문양 중, 유독 한 부분이 미묘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육안으로는 거의 식별 불가능한 차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 부분을 눌렀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 위쪽의 벽에서 작은 패널이 열리며, 열쇠 구멍이 드러났다.

    “역시.” 류진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집사는 경악에 찬 표정으로 류진을 바라봤다. “저런 비밀 장치는… 백작님과 저, 그리고 저택의 일부 건축가 외에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모를 리가 없죠.” 류진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백작의 서재는 저택에서 가장 안전해야 할 곳. 하지만 동시에 가장 취약한 곳이기도 합니다. 완벽한 보안은 종종 완벽한 허점을 감추기 위한 위장막이 될 때가 있거든요.”

    누군가가 가져온 만능열쇠로 비밀 구멍에 열쇠를 넣고 돌리자, 안쪽에서 걸려 있던 빗장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육중한 문이 안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문이 열리자마자 끔찍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서재 중앙, 앤티크한 서재 책상 앞에 시메온 백작이 쓰러져 있었다. 그의 등에는 크고 날카로운 칼이 깊숙이 박혀 있었고, 바닥은 이미 흥건한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고, 얼굴에는 마지막 순간의 고통과 경악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분명히 사망이었다.

    “백작님!” 집사가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류진은 그를 막았다.

    “섣불리 움직이지 마십시오. 범인은 아직 이 방 안에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방 안을 훑었다. 그러나 방 안에는 백작의 시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은 안쪽에서 쇠창살이 내려져 단단히 잠겨 있었고, 천장과 바닥은 완벽하게 밀폐되어 있었다. 환풍구 같은 것도 성인 남성이 드나들기에는 턱없이 작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된 거지?”
    “범인이 사라졌어!”

    혼란과 공포가 다시 한번 사람들을 덮쳤다. 류진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피로 물든 백작의 시신을, 그리고 완벽하게 밀폐된 서재를 천천히 눈으로 훑었다.

    그의 눈은 벽에 걸린 그림, 책장에 꽂힌 책, 탁자 위 흩어진 서류, 심지어 바닥의 미세한 먼지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단서였다.

    “범인이 이 안에서 백작을 찔렀고, 그리고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정말 불가능한 일처럼 보이는군요.”

    류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입가에는 알 수 없는,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모두가 공포에 질려 ‘불가능하다’고 외치는 상황에서도, 그의 심장은 오히려 뜨겁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 불가능에 가까운 퍼즐이야말로 그가 ‘크로노스의 그림자’에서 찾던 진정한 유희였다.

    그의 시선이 백작의 손에 들린, 꽉 쥐어진 종이 조각에 닿았다. 백작은 죽는 순간까지도 그것을 놓지 않으려는 듯 힘주어 잡고 있었다. 류진은 조심스럽게 그 종이 조각을 집어 들었다.

    낡고 해진 종이에는 흐릿한 잉크로 알 수 없는 기호와 함께, 단 하나의 단어가 적혀 있었다.

    **”허상.”**

    류진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이 밀실 살인 사건은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막을 올린 것이 분명했다. 이제, 게임은 시작되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독립적인 단편 소설

    「에이테르노스」. 세상의 모든 모험가들이 꿈꾸는 그 이름 아래, 지훈은 매일매일 로그인했다. 하지만 그에게 거대한 용을 쓰러뜨리거나 전설의 유물을 찾아 나서는 영웅담 따위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는 그저 이 광활한 가상세계의 한 귀퉁이, ‘잊혀진 계곡’이라는 이름만큼이나 한적하고 저레벨 유저들조차 발길을 끊은 곳에서 약초를 캐거나 낡은 광물을 채집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그야말로 ‘생계형’ 모험가에 불과했다.

    오늘도 지훈은 퀘스트 목록에도 없는, 아무도 찾지 않는 이름 모를 덩굴 숲 깊숙한 곳을 헤매고 있었다. 혹시라도 희귀한 약초 한 뿌리라도 발견할까 싶어 잔뜩 기대를 품고 있었지만, 며칠째 수확은 영 시원치 않았다. 투박한 곡괭이를 휘둘러 너덜너덜한 바위를 부수던 중이었다. 쨍그랑!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그의 곡괭이가 엉뚱하게도 흙으로 덮인 덩굴 더미를 때렸다.

    그 순간, 지면이 미세하게 진동하더니 빽빽한 덩굴 아래에서 거대한 바위가 뒤틀리며 틈새가 벌어졌다. 퀴퀴한 흙냄새와 함께 어둡고 습한 동굴의 입구가 드러났다.

    “어… 여기 길이 있었네?”

    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에이테르노스의 모든 지도를 꿰뚫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이런 곳에 동굴 입구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혹시 모른다. 여기에는 아무도 모르는 보물 상자라도 있을지. 조심스럽게 어두운 동굴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굴 안은 좁고 축축했다. 발밑에서는 물방울이 고인 흙탕물이 질척거렸고, 천장에서는 간헐적으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동굴의 끝에는 작은 광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낡고 거대한 제단이 서 있었다. 이끼와 흙먼지로 뒤덮인 제단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제단의 네 귀퉁이에는 희미하게 빛을 내는 정체불명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될 것 같았지만, 지훈은 무언가에 홀린 듯 손을 뻗어 그 문양 중 하나를 가볍게 쓸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돌의 감촉은 예상보다 부드러웠다.

    그 순간, 지훈의 시야가 번개처럼 번쩍였다. 제단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이 동굴 전체를 감쌌고, 문양들이 생명을 얻은 듯 격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이내, 차가운 돌 제단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
    [알 수 없는 고대의 기운이 당신의 육체와 정신에 공명합니다.]
    [‘세계의 근원’과 연결을 시도합니다.]
    [잠재된 재능이 개화됩니다.]
    “`

    낯선 시스템 메시지가 지훈의 눈앞을 가득 채웠다. 그는 멍하니 그 메시지를 바라보다가,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마나와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전율 같은 것이자,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었다.

    빛이 잦아들자, 지훈의 눈에 들어온 것은 완전히 달라진 세상이었다. 동굴 벽의 바위 틈새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줄기들, 바닥의 흙더미에서 가늘게 피어오르는 푸른 기운, 심지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미세한 먼지조차도 각기 다른 색깔의 에너지 파동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서로 얽히고설켜 세상을 구성하고 있었다.

    “이게… 뭐지?”

    지훈은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이 신비로운 에너지 줄기들은, 마치 에이테르노스 세계의 숨겨진 혈관 같았다. 그는 무심코 손을 뻗어 가장 가까운 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 줄기를 만졌다. 손끝에서 스며들어오는 차가운 기운. 지훈은 본능적으로 그 기운을 자신의 몸 안으로 끌어당겨보았다.

    “`
    [‘대지의 맥동’ 에너지를 흡수합니다.]
    [‘미지의 힘: 근원 조작’ 스킬이 활성화됩니다.]
    “`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그의 캐릭터 정보창에 ‘미지의 힘: 근원 조작 (Lv.1)’이라는 스킬이 생성되었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스킬 설명을 펼쳐보았다.

    `[미지의 힘: 근원 조작 (Lv.1)]`
    `설명: 에이테르노스 세계를 이루는 근원적인 에너지(대지의 맥동, 바람의 숨결, 물의 흐름 등)를 인지하고 흡수하며, 이를 조작하여 다양한 형태로 발현할 수 있습니다.`
    `효과: 주변 환경의 근원 에너지를 감지하고 소량 흡수할 수 있습니다. (초급)`
    `패널티: 과도한 에너지 흡수는 육체와 정신에 큰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지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세계의 진정한 모습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껍데기만을 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바로 그때, 동굴 입구 쪽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를 뒤집어쓴 흙골렘 한 마리가 굴러 들어왔다. 저레벨 몬스터였지만, 지훈의 장비로는 한참을 때려야 겨우 잡을 수 있는 상대였다.

    흙골렘이 쿵, 쿵 발을 내딛으며 지훈에게 다가왔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하려다, 문득 방금 얻은 새로운 스킬을 떠올렸다. ‘근원 조작’. 주변 환경의 근원 에너지를 조작한다…

    지훈은 재빨리 흙골렘의 발밑을 보았다.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빛의 ‘대지의 맥동’이 바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는 집중했다. 자신의 온몸을 휘감고 있는 새로운 감각을 따라, 바닥에 흐르는 에너지를 향해 의식을 집중했다.

    스르륵.

    지훈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손끝에서 푸른빛의 물결이 번개처럼 뻗어나가 흙골렘의 발밑 대지의 맥동과 연결되었다. 그 순간, 흙골렘의 움직임이 현저하게 느려졌다. 마치 발이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굼떠졌다.

    “`
    [‘대지의 맥동’을 조작하여 대상의 움직임을 방해했습니다.]
    [‘근원 조작’ 스킬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성공했어?”

    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존의 마법이나 스킬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마나를 소모하는 대신, 주변의 에너지를 끌어다 쓰는 방식. 이 정도라면…!

    흙골렘이 느릿하게 팔을 들어 지훈을 향해 휘둘렀다. 지훈은 피하지 않고 다시 한번 대지의 맥동에 의식을 집중했다. 이번에는 더 강력하게! 흙골렘의 몸을 이루는 흙과 바위, 그 안의 대지 에너지를 향해 자신의 의지를 쏟아부었다.

    콰드득!

    흙골렘의 몸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거대한 몸체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더니, 이내 온몸의 흙과 바위가 제멋대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거대한 덩치가 마치 모래성처럼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이내 흙더미로 변해버린 흙골렘의 잔해 위로 아이템 몇 개가 툭 떨어졌다.

    지훈은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법사가 아니었던 그는, 평소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었다. 이것은 고작 ‘근원 조작’ 1레벨 스킬의 결과였다.

    “이건… 내가 알던 에이테르노스가 아니야.”

    그는 다시 한번 동굴 내부를 둘러보았다.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빛. 그리고 눈앞에 선명하게 아른거리는 세상의 모든 에너지 줄기들. 그동안 이 거대한 세계가 감춰왔던 진정한 비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고대의 숨겨진 마법의 힘이 그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지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더 이상 그는 잊혀진 계곡에서 약초나 캐는 생계형 모험가가 아니었다. 이 미지의 힘을 통해, 에이테르노스라는 거대한 세계의 새로운 진실을 파헤치고,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걸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의 심장이 전율했다. 비로소, 그의 진짜 모험이 시작된 것이다.

  • 좀비 아포칼립스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흐린 시야 너머, 썩어 문드러진 도시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회색 먼지와 핏물, 그리고 역겨운 썩은 내. 내가 살아가는 세상의 전부였다. 손에 든 낡은 나이프는 언제나 내 심장의 박동과 함께 울렸다. 이제는 칼날의 차가운 금속이 제 살처럼 익숙하다.

    민혁. 그 세 글자가 내 뇌리를 스칠 때마다, 뱃속에서부터 뜨거운 용암이 끓어올랐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가 다시 차갑게 식어 내려앉는 듯한 고통. 그 고통이야말로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끼이익… 꺽꺽…

    건물 그림자 사이에서 기어 나오던 좀비 한 마리가 나를 향해 느릿하게 팔을 뻗었다. 축 늘어진 피부, 텅 빈 눈동자, 그리고 핏자국으로 얼룩진 너덜너덜한 옷. 하지만 그 움직임은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벌써 수천 번도 더 봤을 광경. 그들은 이제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내 길을 막는 장애물일 뿐.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하고, 나이프를 든 손목을 비틀어 정수리에 박아 넣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피와 살점이 튀었다. 역겨운 냄새가 한층 더 진해졌지만, 이젠 익숙한 비린내였다. 쓰러진 좀비의 경련이 멈출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이프를 뽑았다. 끈적이는 피가 칼날을 타고 흘러내렸다.

    쓰러진 좀비의 옷깃에 걸린 낡은 인식표가 눈에 띄었다. 녹이 슬어 글자는 희미했지만, 익숙한 문양이 박혀 있었다. 사자 문양. 민혁이 이끄는 무리의 상징이었다. 여전히 그들이 이 근처를 맴돌고 있다는 증거. 내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피가 한 방울, 두 방울 맺혔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순간, 모든 감각이 정지했다.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는 그날의 악몽이 덧없이 재생되었다.

    수백 마리의 좀비가 우글거리는 지하 주차장. 우리는 겨우 입구를 막아서고 있었다. 절망은 그늘처럼 우리를 덮었고, 식량도, 탄약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한 절망. 탈출구는 하나뿐이었고, 겨우 한두 사람만이 지나갈 수 있는 좁은 통로였다. 먼저 도망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지옥 같은 상황이었다.

    그때 민혁이 내 어깨를 잡았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려 떨리고 있었지만, 입가는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서준아, 미안하다. 이건… 어쩔 수 없어.”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떨려서, 바람 소리에 묻힐 듯 희미했다. 하지만 그 말의 무게는 천근만근이었다.

    내 등에 느껴지던 거친 힘.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곤두박질치는 몸. 눈앞에 펼쳐지던 좀비들의 아귀. 그들의 시뻘건 눈동자와 썩어 문드러진 손톱이 순식간에 내게로 뻗어왔다. 귀를 찢는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비명이 내 것이었는지, 아니면 나를 덮치던 좀비들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저 멀리, 빛 속으로 사라지던 민혁의 뒷모습. 일말의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던 그 차가운 등짝.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나를 좀비들의 먹이로 던져주고, 자신은 살기 위해 달아났다. 민혁이 내 이름과 함께 울부짖었던 ‘서준아!’ 하는 절규가 지하 주차장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건 진심 어린 외침이 아니었다. 자기합리화였다. 너를 버리고 간 나를 용서해 달라는, 비겁한 변명이었다.

    그 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기어 올라왔고, 심장 대신 복수의 칼날을 품게 되었다. 나는 살아남았다. 오직 민혁, 네게 갚아주기 위해서.

    인식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한때 번화가였던 구시가지였다. 폐허가 된 건물 숲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 밟히는 유리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삭막한 고요함 속에 내 발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몇 블록을 더 지나자,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는 불빛이 보였다. 그리고 사람들의 목소리. 마치 폐허 속에서 피어난 환영처럼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듯했다. 이곳이 분명했다. 민혁, 네가 숨어있는 곳.

    나는 숨을 죽이고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무너진 버스 잔해 뒤에 웅크려 앉아 그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낡은 상점 건물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은 어둠 속에서 등대처럼 빛났다.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대화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대장님 지시대로 보급품은 다 모아놨습니다. 이제 이동만 하면 됩니다.”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그 옆의 다른 목소리가 덧붙였다.
    “민혁 대장님은 지금 안쪽에 계십니다. 곧 회의가 시작될 겁니다.”

    회의. 그들이 또 무슨 꿍꿍이를 꾸미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민혁이 저 안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드디어. 내 발밑에 깔린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심장이 발악하듯 뛰었다. 분노와 증오가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서준이 아니었다. 죽음의 아귀에서 기어 올라온, 살아있는 복수 그 자체였다.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차가운 금속이 내 체온을 흡수하는 듯했다. 내 칼날은 이미 민혁의 피를 갈망하고 있었다.

    민혁. 네가 나를 버린 그날부터, 나는 너를 위해 다시 태어났다.
    이제… 널 만나러 간다. 네가 나를 외면했던 그 방식 그대로, 나는 네 숨통을 끊어놓을 것이다. 네가 내게 안겨준 절망을 그대로 돌려줄 차례였다. 지옥에서 온 내가, 이제 네 지옥이 되어줄 것이다.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화: 피 묻은 곡물, 솟아나는 불씨

    희뿌연 새벽 안개가 발목을 휘감았다. 돌개울 마을의 지붕들은 축축한 이끼와 낡은 짚으로 뒤덮여 있었고, 굴뚝마다 피어나는 연기는 희망이라기보다는 겨우 명맥을 잇는 삶의 한숨처럼 보였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간 그래왔을 삶. 천해 제국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서, 이 땅의 평민들은 땅을 일구고, 하늘을 보며, 그저 오늘 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었다.

    강철은 아직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논두렁에 서 있었다. 그의 등에는 땀과 흙이 뒤섞여 있었고, 거친 손바닥은 삽자루를 쥔 채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열아홉의 젊은 나이였지만, 그의 어깨는 이미 마을 어른들의 그것처럼 굳건했다. 늙은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 계시고, 어린 여동생 미리는 아직 한창 뛰어놀 나이. 강철은 무거운 가장의 짐을 묵묵히 짊어지고 있었다.

    “형님, 새벽부터 나와 계셨어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에 강철이 고개를 돌렸다. 열두 살 난 여동생 미리였다. 낡은 삼베옷을 입고 있지만, 생기 넘치는 눈빛만은 총총한 별처럼 빛났다. 미리는 작은 손에 갓 지은 보리밥이 담긴 주먹밥을 들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구나. 아직 춥다, 돌아가 있어.” 강철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눈빛에는 그늘이 깃들어 있었다.

    미리는 오빠의 옆에 다가와 앉으며 주먹밥을 내밀었다. “아버지께서 형님 힘들까 봐 제가 들고 왔어요. 따뜻할 때 드세요.”

    강철은 주먹밥을 받아 한 입 베어 물었다. 혀끝에 느껴지는 푸석한 보리밥의 맛. 이마저도 귀한 것이었다. 올해는 특히나 흉년이었다. 그런데도 제국에서 내려오는 세금은 한 톨도 줄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늘어났다. 천해 제국의 황궁은 금과 비단으로 휘황찬란하다는데, 그 모든 부귀영화는 이 땅의 평민들의 피와 땀으로 지어진 것이었다.

    “요 며칠, 관아 사람들이 마을을 기웃거린다고 아버지께서 걱정이 많으세요.” 미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강철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어제, 뒷산에서 나무를 하다 내려오던 길에 보았다. 제국 병사 몇 명이 마을 어귀를 어슬렁거리는 것을. 그들의 갑옷은 햇빛을 받아 번쩍였고, 허리춤에는 늘어지지 않은 검이 위압적으로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곡식을 걷어가기 위해 온 것이었다. 매년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흉년이라는 소문이 파다한데도 그들의 눈빛은 더욱 탐욕스럽게 번뜩였다.

    “걱정 마라. 내가 있잖니.” 강철은 미리에게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차가운 돌덩이가 얹힌 듯 무거웠다. 그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맨몸뚱이의 평민이 제국의 창칼을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날 오후, 강철의 불길한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쩌렁쩌렁 울리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붉은 갑옷을 입은 제국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수는 스무 명이 족히 넘었고, 선두에는 유달리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자가 말을 타고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빛나는 칼집의 검이, 그리고 손에는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금빛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보자마자 두려움에 떨었다. 선관(仙官)이었다. 제국에 복속된 낮은 계급의 수련자들이었다. 그들은 대개 무예가 뛰어나거나, 미약하지만 신비한 술법을 부릴 줄 알았다.

    “돌개울 마을의 곡물 수확량이 보고와 다르다 들었다! 불경한 자들! 숨겨둔 양식이 있느냐? 어서 내놓지 못할까!” 선관의 목소리는 벼락처럼 마을을 강타했다. 그의 지팡이 끝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땅바닥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위압적인 기운이 마을 전체를 짓눌렀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몇몇 노인들은 바닥에 엎드려 울부짖었다. “선관님, 제발 자비를 베푸소서! 올해는 흉년이라, 숨길 곡식조차 없나이다!”

    하지만 선관은 그들의 비명을 무시했다. “시끄럽다! 어서 곳간을 열어라! 아니면 이 자리에서 경을 쳐 죽일 것이다!”

    제국 병사들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집집이 들이닥쳐 곳간을 뒤지기 시작했다. 얼마 되지 않는 곡식들이 자루에 담겨 밖으로 끌려 나왔다. 얼마 전 겨우 거둬들인 햇곡식이었다. 한 자루, 두 자루… 마을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절망이 서렸다. 이것마저 빼앗기면, 겨울은 고사하고 당장 다음 끼니도 기약할 수 없었다.

    강철은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주먹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억누르던 분노가 심장 속에서 거대한 불덩이처럼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쓰러진 노파였다. 자신의 마지막 곡식 자루를 붙잡고 놓지 않으려 저항하다가, 병사의 몽둥이에 맞아 쓰러진 것이었다. 노파의 머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려 흙바닥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미리가 겁에 질린 채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이 더러운 놈들! 이럴 순 없어!”

    강철은 이성을 잃고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의 등 뒤에서 마을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강철아! 안 돼!”

    맨몸으로 달려드는 강철의 눈빛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병사 하나가 몽둥이를 휘둘렀지만, 강철은 피하지 않고 어깨로 받아냈다. 으득, 하는 소리와 함께 뼈가 울렸지만, 그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병사의 목을 붙잡고 내던졌다. 두려움에 질린 병사들이 잠시 주춤했다.

    “어리석은 것! 감히 제국에 맞서려 드느냐!”

    선관이 말을 타고 강철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빛에는 경멸과 짜증이 서려 있었다. 선관은 금빛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본래 이런 하찮은 벌레 따위에게 힘을 쓸 필요는 없으나, 네놈의 불경함은 용서할 수 없구나!”

    지팡이 끝에서 푸른빛이 다시 한번 번쩍이더니, 거대한 바람의 칼날이 강철을 향해 날아왔다. 강철은 본능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칼날은 그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그의 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선관의 힘은 강철이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강철 형님!” 미리의 비명이 찢어지는 듯 울렸다.

    선관은 비웃으며 말했다. “네놈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제국의 권능 앞에서는 그저 한낱 먼지일 뿐이다. 명심해라, 평민은 평민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

    병사들이 다시 달려들어 강철을 붙잡아 끌고 가려 했다. 강철은 아픔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의 눈은 선관과, 그의 뒤에서 잔뜩 쌓여가는 곡식 자루들을 향했다. 그 자루들 속에는 겨울을 나야 할 마을 사람들의 목숨이 담겨 있었다.

    선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저 자는 본보기로 죽여라. 다른 자들은 곡식 수탈을 계속하고.”

    그때였다. 늙은 아버지가 비틀거리며 집 밖으로 나왔다. 그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했지만, 그의 눈은 강철의 눈과 똑같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 이 짐승만도 못한 놈들! 내 아들을 죽이면, 내 아들을 죽이면…!”

    병사들이 아버지를 막으려 달려들었다. 강철은 미친 듯이 몸부림쳤다. 그의 목에서 찢어지는 듯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아버지! 안 돼!”

    아버지는 결국 병사들의 손에 붙잡혔다. 선관은 귀찮다는 듯 손을 휘둘렀다. “저 늙은이도 함께 처리해라. 반항하는 자는 누구든 용서치 않는다.”

    그 순간, 강철의 눈동자 속에서 무언가가 터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피와 땀, 절망과 분노, 그리고 지독한 무력감… 이 모든 감정들이 한데 뒤섞여 그의 심장을 휘감았다. 그의 팔에서 흘러내린 피는 흙바닥에 스며들어, 마치 검붉은 맹세처럼 번져나갔다.

    ‘더 이상… 더 이상 당하고만 살 수는 없다.’

    억압된 분노는 이제 차가운 결의로 바뀌고 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버티는 삶이 아니라, 무언가를 위해 싸워야 할 때가 왔음을 그는 깨달았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그것은 차가운 강철처럼 단단하고, 불길처럼 뜨거웠다.

    마을 사람들의 곡식이 모두 실려가고, 선관과 병사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그들이 남긴 것은 피 흘리는 노파와 쓰러진 아버지, 그리고 폐허가 된 마을이었다. 강철은 풀려난 몸으로 아버지와 노파에게 달려갔다. 그의 손은 피로 물들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제 꺼지지 않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날 밤, 강철은 작은 오두막에서 피 묻은 손으로 아버지의 상처를 치료했다. 미리는 오빠의 곁에 앉아 말없이 흐느꼈다. 창밖으로는 차가운 밤바람이 불어왔고, 저 멀리 제국의 수도 방향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궁전의 불빛이 보였다. 평민들의 피와 눈물로 쌓아 올려진 빛이었다.

    강철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흩뿌려져 있었지만, 그의 눈에는 오직 하나의 별만이 선명하게 보였다. 붉은 빛을 띠는 그 별은, 마치 그의 심장 속에서 막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을 닮아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반드시…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그의 주먹이 서늘한 밤공기 속에서 단단히 쥐어졌다. 그것은 한낱 평민의 주먹이 아니었다. 거대한 제국의 심장을 겨눌, 새로운 반란의 불씨였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무너진 도시의 잔해 속에서 삶은 간신히 숨을 쉬고 있었다. 녹슨 철근이 하늘을 찔렀고, 유리 조각이 햇빛에 반사되어 스산한 무지개를 만들었다. 이한울은 그런 세상의 한 조각에서 홀로 살아남았다. 그녀의 주된 목표는 살아남는 것, 그리고 가능하다면 오늘 밤만큼은 고독이 그녀를 완전히 삼키지 못하도록 버티는 것이었다.

    그녀의 손은 투박한 칼자루에 익숙하게 감겨 있었다. 낡은 지도를 펼쳐 들었지만, 지도는 더 이상 어떤 길도 안내하지 않았다. 도시는 미로가 되었고, 길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저 잿빛 폐허와 예측 불가능한 위험만이 그녀의 동행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버려진 병원 건물의 잔해 속에서 식량을 찾던 중이었다. 썩은 냄새와 먼지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그녀는 기이한 시선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칼을 뽑아 들고 벽 뒤에 몸을 숨겼다. 희미한 달빛이 부서진 창문을 통해 스며들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거대한 그림자였다. 처음에는 짐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의 움직임은 너무나 유려하고 절제되어 있었다. 길고 검은 털은 밤의 어둠과 하나가 되어 있었고, 등에서는 날카로운 뼈 돌기가 솟아 있었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 거대한 짐승의 두 눈이었다. 인간처럼 깊고, 총명하며, 슬픔마저 담고 있는 듯한 황금빛 눈동자.

    한울은 숨을 멈췄다. 짐승은 그녀를 발견한 듯 했다. 천천히, 위협적이지 않은 몸짓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공포가 그녀의 심장을 짓눌렀지만, 동시에 묘한 이끌림이 있었다. 저 눈동자는… 무엇을 말하려는 걸까?

    짐승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그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는 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그것은 웅크린 채 그녀를 응시했다. 무언의 질문이었다. 한울은 칼을 내려놓지 않은 채, 하지만 경계심을 조금 늦춘 채 그를 마주 보았다.

    “너… 뭐야?”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짐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순간 한울의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가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밤, 달, 그리고 이름 모를 외로움.

    “너, 내 말을 알아들어?” 한울은 거의 속삭이듯 물었다.
    짐승은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앞발을 들어 보였다. 그 발톱은 날카로웠지만, 그녀에게 다가오는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이내 그 발이 그녀의 그림자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한울은 그 짐승과 함께했다. 그녀는 그에게 ‘카엘’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숲의 그림자’라는 뜻의, 오래된 신화에서 따온 이름이었다. 카엘은 놀라운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말은 할 수 없었지만, 한울의 머릿속에 이미지와 감정을 직접 전달할 수 있었다. 그 능력은 처음에는 혼란스러웠지만, 곧 그들의 유일한 소통 방식이 되었다.

    카엘은 한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켰다. 그는 폐허 속에서 그녀를 위협하는 괴물들과 짐승들로부터 그녀를 보호했고, 그녀가 찾지 못하는 식량을 찾아주기도 했다. 그의 존재는 한울의 지독한 외로움에 처음으로 온기를 불어넣었다. 그녀는 카엘의 거친 털에 기대어 밤을 보내곤 했다. 그의 심장 박동은 거대했지만, 그 온기는 인간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넌 어디서 온 거야?”
    어느 날 밤, 모닥불 앞에서 한울이 물었다. 카엘은 그녀의 질문을 이해한 듯, 그의 머릿속에 황폐한 실험실, 고통스러운 비명, 그리고 푸른 섬광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혼란스럽고 슬픈 기억들이었다. 한울은 그가 이 세계의 재앙 속에서 태어난, 혹은 변형된 존재임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괜찮아. 이제 괜찮을 거야.” 한울은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카엘은 그녀의 손길에 몸을 기댔다. 그 거대한 머리가 그녀의 어깨에 닿았을 때, 한울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두려움이 아니었다. 보호받는 듯한 안정감,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애틋함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관계는 깊어졌다. 낮에는 함께 폐허를 탐색하고, 밤에는 작은 모닥불 옆에 앉아 침묵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나누었다. 카엘의 눈빛은 그녀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와 애정으로 가득 찼다. 한울 또한 그의 존재 없이는 더 이상 하루도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거친 털에 얼굴을 묻고, 그녀는 안도감을 느꼈다. 그의 숨결은 따뜻했고, 그의 존재는 그녀의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 금기였다. 인간과 짐승.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한울은 종종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미쳐버린 걸까? 이 세계가 나를 이렇게 만든 걸까?’ 그러나 카엘의 눈을 보면, 그녀는 답을 얻었다. 그의 눈에는 인간보다 더 깊은 감정이, 인간보다 더 순수한 영혼이 담겨 있었다.

    어느 날, 그들은 또 다른 생존자 무리와 마주쳤다. 낡은 트럭에 몸을 싣고 총을 든 사내들이었다. 그들은 한울을 발견하고 안도했지만, 곧이어 그녀의 곁에 선 카엘을 보고 경악했다.

    “저게 뭐야! 괴물이다!”
    사내 중 하나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공포와 혐오가 뒤섞여 있었다.
    “괴물이 아니에요! 그는…” 한울이 카엘의 앞에 나서며 외쳤다.
    “비켜! 저런 걸 옆에 두고 다니면 위험하다고! 저건 죽여야 해!”
    사내들은 총구를 카엘에게 겨눴다. 카엘은 한울의 뒤에 숨으려는 듯 몸을 낮췄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한울을 보호하려는 듯 번뜩였다.

    “안 돼! 쏘지 마세요!” 한울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러나 사내들은 그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카엘은 그저 위협적인 괴물일 뿐이었다. 총성 한 발이 공기를 갈랐다. 카엘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는 신음하며 뒤로 휘청거렸다.

    그 순간, 한울의 내면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의 세상은 카엘의 존재로 인해 다시 의미를 찾았는데, 그들은 그것을 빼앗으려 했다.

    “내버려 둬요! 그는 나를 해치지 않아!”
    한울은 절규하며 사내들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총구는 여전히 카엘을 향하고 있었다.
    카엘은 고통 속에서도 한울에게 다가와 그녀의 몸을 가렸다. 그의 거대한 몸이 총알을 막아낼 방패가 되려는 듯했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는 슬픔과 함께,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깊은 체념이 담겨 있었다.

    사내들이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 카엘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검은 그림자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눈은 더욱 강렬한 황금빛으로 빛났고, 그의 몸집은 더욱 거대해지는 듯했다. 그는 더 이상 쓰러진 짐승이 아니었다. 이 세계의 황폐함 속에서 태어난, 경이롭고도 두려운 존재 그 자체였다. 사내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총구가 흔들렸다.

    “가요! 카엘!” 한울은 그에게 소리쳤다.
    카엘은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한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자신의 등 위로 올렸다. 그 거대한 몸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였다. 사내들의 총알은 그들의 그림자조차 쫓지 못했다.

    폐허 속을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렸다. 한울은 카엘의 거친 털을 부여잡았다. 그의 몸에서 흐르는 피가 그녀의 손에 묻었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직 그와 함께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밤하늘 아래, 그들은 마침내 멈췄다. 숨 막히는 고요만이 그들을 감쌌다. 카엘은 지친 듯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놓았다. 그의 어깨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한울은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눌렀다. “괜찮아…? 내가 미안해…”

    카엘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거대한 혀로 핥았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 다시 한번 섬광처럼 이미지가 떠올랐다. ‘너는 나의 세상이야. 네가 있다면, 어디든 괜찮아.’

    한울은 카엘의 눈을 바라봤다. 그 깊은 황금빛 눈동자 속에서, 그녀는 세상의 모든 편견과 두려움을 초월한 사랑을 발견했다. 그들의 사랑은 금기였지만, 동시에 이 무너진 세계에서 유일하게 피어난 희망이었다.

    “그래, 어디든 괜찮아. 너와 함께라면…”

    그녀는 카엘의 품에 기대어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많은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 반짝였다. 그 별들은 그들의 존재를, 그들의 금지된 사랑을 비추는 유일한 증인처럼 보였다. 새로운 아침이 오면, 또 다른 위험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함께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폐허가 된 세상 속에서, 두 개의 다른 종족이 서로에게 가장 깊은 안식처가 되어주는,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될 뿐이었다.

  • 오컬트 호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아르카나 학원. 태곳적 마법사들의 지혜가 잠들어 있다는 이 유서 깊은 상아탑은, 그 어떤 이에게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외심을 품게 했다. 첨탑은 구름을 뚫고 하늘로 솟아올랐고, 고색창연한 돌벽에는 고대 마법 문양이 아로새겨져 밤이면 은은한 빛을 발했다. 밤의 장막 아래, 학원 전체를 감싸는 마력의 아우라는 은하수처럼 반짝이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했다. 그러나 그 화려함과 장엄함 뒤편에는, 왠지 모를 서늘함과 엄격함이 늘 따라붙었다.

    한결은 아르카나 학원의 2학년 학생이었다.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이 발을 들일 수 있다는 이 마법의 전당에서, 그는 이방인과 같은 기분으로 지내곤 했다. 타고난 마력의 재능은 부족하지 않았지만, 학원의 주류를 이루는 화려한 원소 마법이나 정령술보다는 고서 속의 잊힌 주문이나 금지된 마법 이론에 더 끌리는 타입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아르카나 학원은 단순한 배움의 터전이 아니었다. 거대한 유기체처럼 숨 쉬며, 그 심연 어딘가에 거대한 비밀을 감추고 있는 듯한 기이한 존재였다.

    특히 요즘 들어 그런 느낌이 강해졌다. 늦은 밤,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학원의 중앙 도서관 구석에 틀어박혀 고서를 탐독하던 한결은 며칠 전부터 미세한 진동을 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학원 지하 깊은 곳에 있는 마력 증폭 장치나 에너지 저장소에서 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동은 단순한 기계음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처럼, 불규칙적이고 둔탁하게 울렸다.

    “젠장, 또 시작이군.”

    한결은 귓가를 울리는 낮은 저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도서관 사서에게 물어봐도, 다른 학생들에게 이야기를 꺼내봐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피곤해서 환청이 들리는 거다,” “마력 증폭 장치는 원래 그렇게 울린다.”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결은 알고 있었다. 이 진동은 전에 없던 것이며, 학원의 가장 깊은 곳, 지하의 심연에서부터 기어 올라오는 소리라는 것을.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학원의 오래된 서관 쪽으로 향했다. 서관은 평소 학생들이 거의 찾지 않는 곳이었다. 고대 언어로 쓰인 먼지 쌓인 주술서나, 폐기된 이론을 다룬 금서들이 잠들어 있는 곳. 학원 측에서 공식적으로는 폐쇄했지만, 사실상 경비가 허술한 탓에 호기심 많은 학생들이 가끔 숨어 들어가 구경하곤 했다. 한결은 그곳에서 학원의 지하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서관의 문을 열자 퀴퀴한 종이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한꺼번에 훅 끼쳐왔다. 낡은 복도를 따라 깊숙이 들어가자, 마치 이 공간 자체가 시간을 잊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복도 끝, 가장 어두운 구석에는 낡은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원래는 벽에 걸린 평범한 장식품이었겠지만, 그 천 조각 아래로 희미하게 틈새가 보이는 것을 한결은 눈치챘다. 마치 무엇인가를 감추기 위한 위장막 같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어쩌면 자신이 찾던 곳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강하게 스쳐 지나갔다. 조심스럽게 태피스트리를 걷어내자, 굳게 잠긴 철문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녹슬어 헤진 철문에는 먼지 쌓인 낡은 자물쇠가 걸려 있었고, 그 옆 벽에는 고대 마법 문자로 ‘지하 출입 금지’라는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이 경고문은 일반적인 학원 규칙이 아니었다. 단순한 벌칙을 넘어선, 원초적인 공포를 담고 있는 듯한 기이한 기운이 문자를 감싸고 있었다.

    한결은 손끝으로 철문을 더듬었다. 차갑고 거친 감촉이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졌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진동은 이제 희미한 웅웅거림을 넘어, 낮은 울음소리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섬뜩했다. 그는 가방에서 마법 해제 도구를 꺼냈다. 간단한 마법 자물쇠였지만, 오랜 세월 탓인지 해제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리자, 한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안쪽은 완벽한 암흑이었다. 심연과도 같은 어둠 속에서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학원의 마력 아우라가 희석된 자리에, 다른 종류의, 불길하고 끈적거리는 기운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마법으로 작은 광구를 만들어 어둠 속으로 띄웠다. 광구가 비춘 것은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낡은 돌계단이었다. 계단의 벽면에는 이끼가 가득했고, 축축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대체… 뭐가 있는 거지?”

    그때였다. 계단 아래쪽에서 뭔가가 ‘스윽’ 하고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뱀이 몸을 비트는 듯한 소리였다.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겨운 비린내와 흙냄새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광구의 빛이 잠시 흔들렸다. 계단 아래쪽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섬광처럼 번뜩였다가 사라졌다. 인간의 눈이 아니었다. 짐승의 눈, 혹은 그보다 더 오래되고 끔찍한 무언가의 눈동자였다.

    한결의 등골이 오싹하게 얼어붙었다. 심장이 멈출 듯 격렬하게 뛰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본능이 경고했다.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이미 늦은 걸까. 붉은 눈이 사라진 그 어둠 속에서, 이제는 훨씬 더 가깝고 선명하게, 그 둔탁한 심장박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마치 그 존재가 깨어나 한결을 향해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젠… 장.”

    그는 철문을 쾅 닫고 자물쇠를 다시 걸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공포에 질려, 태피스트리를 다시 제자리에 늘어뜨렸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관을 빠져나왔지만, 귓가에는 여전히 그 심장 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아르카나 학원 지하에는, 단순히 금지된 마법이나 고서가 아닌, 살아있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한결은 그 끔찍한 금기의 문을, 이제 막 살짝 열어버린 참이었다. 그는 이제 알았다. 이 학원의 가장 깊은 곳, 가장 어두운 심연에 잠들어 있는 것은, 단순한 비밀이 아닌, 학원 전체를 집어삼킬지도 모를 거대한 재앙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