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나리스의 뒷골목은 언제나 역한 땀 냄새와 덜 익은 과일 썩는 냄새, 그리고 흑룡 제국 경비병들의 짜증 섞인 고함 소리로 가득했다. 햇볕 한 줌 제대로 들지 않는 좁은 골목은 언제나 활기로 넘쳤지만, 그 활기는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에 가까웠다.
“새빨간 사과! 아침에 갓 딴 싱싱한 사과! 이걸 먹으면 미녀도 반하고 장수한다네!”
아린은 붉은 사과를 높이 들고 목청껏 외쳤다. 제나리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쨍한 색감의 과일이었다. 그녀의 말간 얼굴에도 사과처럼 발그레한 홍조가 피어올라, 땀에 젖은 머리카락과 대비되어 더욱 생기 있게 보였다. 행인들은 잠시 그녀에게 시선을 주다가도, 곧 자신의 바쁜 걸음으로 돌아갔다. 사치는커녕, 한 끼 식사도 버거운 이들에게 과일은 먼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아린은 굴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골목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은 몇 안 되었다. 대부분은 그저 상인들의 목소리를 듣고, 사람들의 열기로 춥고 배고픈 속을 달래는 이들이었다. 아린이 이토록 필사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오늘도 못 팔면… 숙모님 약값을 어떻게 해!’
아린의 사과 바구니 아래에는 꾀죄죄한 천으로 덮인 또 다른 보따리가 있었다. 그녀의 유일한 자랑거리이자 희망, 그리고 생계 수단인 ‘황금빛 설탕절임’. 달콤하고 쫀득한 설탕절임은 제국 상층부의 귀부인들이나 가끔 찾는 귀한 디저트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귀부인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이, 거기. 사과 파는 아가씨.”
등 뒤에서 들려온 능글맞은 목소리에 아린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 골목에서 이토록 여유롭게 사람을 부르는 자는 딱 두 부류였다. 한 부류는 술에 취한 양반가 도련님들, 다른 한 부류는…
“제국 소유의 과일을 불법 유통하는 건 중죄라는 걸 모르나?”
딱 제국 경비병들이었다. 삐까번쩍한 갑옷 대신 낡은 가죽 조끼를 걸친 두 명의 경비병이 아린의 좌판 앞에 섰다. 그들의 허리에는 녹슨 칼이 매달려 있었고, 얼굴에는 며칠 씻지 않은 듯한 기름기가 번들거렸다.
“이게 왜 불법 유통입니까? 제가 직접 키운 사과를 제가 직접 따서 파는 건데요!”
아린은 억울함에 목소리가 커졌다. 그녀의 사과는 제국 어느 고위 관료의 텃밭에서 훔쳐 온 것이 아니라, 그녀의 고향 마을에서 피땀 흘려 재배한 것이었다.
“흐음? 직접 키웠다고? 누가 보면 네놈이 제국 농민의 영웅인 줄 알겠네. 서류는 있나? 황제 폐하의 인장이 찍힌 재배 허가서라도?”
경비병 중 한 명이 비죽 웃으며 물었다. 그들의 눈은 아린의 사과 바구니보다 그 아래 깔린 보따리를 향해 있었다. 달콤한 설탕 냄새는 숨길 수 없는 법이었다.
“허가서라니요!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원래 평민들은 그런 거 안 받습니다!”
아린은 얼굴이 벌개졌다. 허가서 같은 걸 받으려면 어마어마한 돈과 인맥이 필요했다. 평생 손에 흙 묻히고 사는 이들에겐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호오? 안 받아? 그럼 불법이군. 이 모든 과일 압수, 그리고 벌금까지 내야겠는데?”
경비병 하나가 손을 뻗어 사과를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아린은 경비병의 팔을 찰싹 때렸다.
“만지지 마세요! 내 사과, 귀한 사과라고요!”
경비병은 아린의 당돌함에 눈을 부릅떴다. 이런 뒷골목에서 감히 경비병의 손을 치다니, 웬만한 용기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계집애가! 감히 제국 소속 경비병에게 손을 대? 이거 역모죄로 쳐 넣을 수도 있어!”
그때였다. 왁자지껄한 시장통을 가르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이야, 경비병 나리들! 이렇게 작은 아가씨에게 으름장을 놓으시니, 제국의 위엄이 하늘을 찌르는군요!”
아린과 경비병들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의 근원지를 향했다. 저 멀리 노점상들 사이에서 한 청년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넉살 좋은 미소를 머금은 그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허름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태도는 묘하게 오만했고, 어깨에 둘러멘 낡은 기타는 그를 떠돌이 악사처럼 보이게 했다.
“너는 또 뭐야? 빨리 꺼져!” 경비병 하나가 소리쳤다.
“아이고, 저요? 저는 그저 지나가던 나그네일 뿐입니다. 그런데 저 귀한 사과를 불법 유통이라니… 제법 흥미로운데요.”
청년은 한 발짝 다가섰다. 그의 시선은 아린에게 향해 있었고, 그 눈빛에는 놀림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흥미롭다고? 이놈도 한패인가? 둘 다 끌고 가!”
경비병은 아린의 손목을 잡으려 했다. 아린은 몸을 움츠렸다.
“아이고, 잠깐만요!”
청년이 갑자기 두 경비병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그의 손에는 붉은 사과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린의 좌판에서 슬쩍한 것이 분명했다.
“이 사과가 문제입니까? 제국법에 따르면, 길에 떨어진 과일은 주운 자의 것이라고 하던데.”
그는 능청스러운 얼굴로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아삭하는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길에 떨어져? 그게 언제 떨어졌다고!” 아린이 소리쳤다.
“아까 경비병 나리가 만지려다 떨어뜨린 것 같은데요?” 청년은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경비병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서로를 쳐다봤다.
“이놈이 지금 말을 돌리나?”
“아니, 돌리는 게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만약 이 사과가 제국 소유의 불법 과일이라면…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난 이 사과를 과연 누가 가져갈까요? 증거 인멸인가요?”
청년은 사과를 반쯤 먹은 채 경비병들에게 내밀었다.
경비병들은 순간 움찔했다. 이런 사소한 시비로 골치 아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빨 자국이 난 사과를 압수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테니까.
“…됐어! 저 계집애 좌판이나 엎어!”
결국 경비병은 사과를 포기하고 아린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러나 청년은 이미 준비라도 한 듯, 재빨리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며 발을 쑥 내밀었다.
“으악!”
앞서 달려들던 경비병이 청년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옆에 있던 경비병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 위로 함께 겹쳐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아이고! 조심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이리 좁은 골목에서 뛰다니, 역시 제국 경비병 나리들은 용감무쌍하시네요!”
청년은 전혀 미안한 기색 없이 능글맞게 웃었다. 아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 황당한 광경을 지켜봤다.
“이, 이놈이! 일부러 그런 거지!”
흙투성이가 된 경비병이 겨우 몸을 일으키며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일부러라니요? 오해입니다! 저는 그저 제국 경비병 나리들이 흙먼지를 털어내고 일어나실 때까지 옆에서 응원하고 있었을 뿐인걸요!”
청년은 여유롭게 경비병들의 주위를 맴돌며 약 올렸다. 아린은 그 틈을 타 재빨리 사과 바구니와 설탕절임 보따리를 챙겼다. 이대로 있다간 정말 모두 빼앗길 것 같았다.
“이봐, 사과 아가씨! 도망가려면 빨리 도망가야지! 이렇게 느려서야 어디 잡혀가지 않겠어?”
청년이 경비병들을 피해 휙 돌아서며 아린에게 소리쳤다. 아린은 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이놈, 같이 죽자고!” 경비병 하나가 청년의 팔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청년은 번개처럼 몸을 돌려 경비병의 팔을 잡아끌었고, 그 힘을 이용해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이내 그는 낡은 지붕 위로 가볍게 착지했다.
“어? 뭐야!”
경비병들은 허둥지둥 그를 올려다봤다. 청년은 지붕 위에서 유유히 아린을 향해 손짓했다.
“아가씨, 이리로! 어서!”
아린은 망설였다. 지붕이라니! 그녀의 고소공포증은 꽤 심각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도망가지 않으면 경비병들에게 붙잡힐 것이 뻔했다.
“저, 저 못 올라가요!” 아린이 울상으로 말했다.
“뭐라고? 지금 경비병들에게 잡혀가느니 지붕 위에서 떨어지는 게 낫겠다!”
청년은 투덜거리면서도 재빨리 지붕 아래로 내려와 아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손 잡아, 아가씨. 내가 끌어줄 테니!”
그의 손은 의외로 크고 단단했다. 아린은 주저하다가 마침내 그의 손을 잡았다. 청년은 거침없이 그녀를 끌어올렸다. 아린은 비명조차 지를 새 없이 지붕 위로 끌려 올라갔다.
“흐읍! 흐읍! 죽는 줄 알았잖아!”
아린은 지붕 위에 털썩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사과 바구니와 보따리는 옆에 놓여 있었다.
청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겁이 많아서야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까. 그건 그렇고, 경비병 나리들! 다음에 뵙죠!”
그는 경비병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는 아린을 끌고 지붕 위를 펄쩍펄쩍 뛰어넘기 시작했다.
아린은 억지로 청년의 손을 붙잡고 그의 뒤를 따랐다. 발아래로 보이는 아득한 골목길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야! 이 미친놈아! 좀 살살 가! 나 떨어지면 어쩔 거야!”
“그럼 안 떨어지게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자, 여기야!”
청년은 낡은 창고 지붕 위에서 갑자기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아린은 그의 손에 이끌려 거의 던져지듯 아래로 떨어졌다. 다행히 풀이 무성한 폐가 마당이었다.
“으음!” 아린은 엉덩방아를 찧으며 신음했다.
청년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다치진 않았지? 아가씨 몸값이 꽤 나갈 텐데.”
“야!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내 몸값은 왜 따지는데! 그리고 너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
아린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청년에게 소리쳤다. 사과 바구니는 엎어져서 몇몇 사과는 흙투성이가 되었고, 귀한 설탕절임 보따리도 흙투성이가 된 채 굴러다녔다.
“어이구,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경비병 나리들이 다시 찾아오실 텐데?”
청년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태연하게 흙 묻은 사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보다, 이 사과, 꽤 맛있던데. 한 개에 얼마야?”
“이 상황에 사과 값을 물어? 야! 너 정체가 뭐야! 왜 나를 구해주는 척하면서 골탕 먹이는 건데!”
아린은 거의 울먹이며 소리쳤다. 오늘 장사를 망친 것도 모자라 죽을 뻔했고, 이제는 정체 모를 이 놈팡이에게 시달려야 했다.
“정체라… 음, 글쎄. 그냥 지나가던 정의로운 시민? 아니면… 이 골목의 숨겨진 영웅?”
청년은 씨익 웃으며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웃기지 마! 너 때문에 내 사과가 다 망가졌잖아! 설탕절임도 흙 묻었고!”
아린은 바닥에 굴러떨어진 설탕절임 보따리를 들어 보였다.
“어이구, 그랬나? 이 몸이 워낙에 귀한 분이라, 그 값을 치르려면 꽤 힘들 텐데… 뭐, 좋아. 내가 오늘 아가씨를 구한 값이랑, 아가씨가 이 사과를 훔친 값… 아니, 내가 먹은 사과 값까지 다 쳐서… 나중에 후불로 받도록 하지.”
청년은 남은 사과를 한입에 털어 넣으며 말했다.
“후불? 뭘 후불로 받아! 그리고 내가 언제 사과를 훔쳤다고! 네가 훔쳐 간 거잖아!”
아린은 기가 막혔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었다.
“아, 오해하지 마. 이 사과 값은 네가 나에게 갚아야 할 목숨 값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그럼 이만.”
청년은 손을 흔들며 낡은 창고 문을 열고 유유히 사라졌다.
“야! 거기 서! 너 이름이 뭐야! 어디로 가는 건데! 목숨 값이라니! 이봐!”
아린은 청년이 사라진 문을 향해 소리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아린은 흙 묻은 사과들을 바라보며 주먹으로 땅을 쳤다. 오늘 숙모님 약값은 어떻게 하지? 게다가 그 능글맞은 놈팡이에게 빚까지 지게 생겼다.
그녀는 겨우 몸을 일으켜 흙 묻은 사과와 설탕절임 보따리를 주섬주섬 챙겼다. 그때, 흙 묻은 설탕절임 보따리 옆에서 무언가가 번뜩였다. 주워보니 작은 은빛 조각이었다. 마치 낡은 옷핀처럼 생겼는데, 한쪽 끝에는 뾰족한 칼날 모양이, 다른 한쪽에는 붉은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칼날 모양은 흡사 붉게 타오르는 잎사귀처럼 보였다.
‘저 놈팡이 것이겠지? 이걸 가지고 어떻게 찾아가지?’
아린은 콧방귀를 뀌며 옷핀을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다시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흙투성이 된 몸을 이끌고 폐가 마당을 나설 때였다. 폐가 담벼락에 꽂힌 낡은 쪽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흑룡 제국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붙어 있을 리 없는 쪽지였다.
쪽지에는 엉성한 그림과 함께 단 두 글자가 쓰여 있었다.
**[붉 은 잎]**
그리고 그 아래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제국의 뿌리가 썩어 문드러지고 있다. 새로운 잎을 틔울 자, 밤 열두 시, 골목 끝 낡은 빵집 지하실로.]**
아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붉은 잎? 그녀는 최근 뒷골목에서 은밀하게 들려오던 소문들을 떠올렸다. 제국의 부패에 맞서 싸우는 비밀 조직이 있다는 소문. 불온한 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때, 저 멀리서 다시 경비병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이 근처다! 이놈들을 놓치지 마라!”
아린은 화들짝 놀라 쪽지를 찢어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낡은 골목 깊숙이 몸을 숨겼다.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오늘 만난 능글맞은 청년, 그리고 이 붉은 잎의 쪽지. 과연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어둠이 내린 골목 끝, 낡은 빵집 지하실은 희미한 달빛 아래 더욱 깊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아린의 손에 쥔, 흙 묻은 붉은 사과는 아직도 경비병에게 뺏기지 않았다는 듯 쨍한 색을 잃지 않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작고도 강인한 의지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