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37화: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영혼의 불꽃
끝없이 펼쳐진 잿빛 황야. 한때는 무수히 많은 생명과 찬란한 문명이 꽃피웠을 대지 위에는 이제 부서진 돌무더기들과 녹슨 금속 조각들만이 망각된 시간의 흔적처럼 박혀 있었다. 영기는 희미해져 숨쉬기조차 버거운 이곳에서, 류한은 먼지투성이의 낡은 도포를 뒤집어쓴 채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영초 하나 발견하지 못했다. 영기가 메마른 대지에서 영초는 사치에 가까웠고, 그마저도 맹독을 품은 변이체나 정체불명의 괴물들이 지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의 등 뒤에 짊어진 거대한 검은 빛을 띠는 태고의 검은 침묵했고, 류한의 눈빛은 거친 모래바람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젠장… 이대로라면 영력 고갈은 시간 문제다.”
메마른 입술 사이로 낮게 읊조린 말이 찢어질 듯한 바람 소리에 묻혔다. 그는 이미 며칠 전부터 영석 한 조각조차 흡수하지 못했다. 겨우 버티고 있는 것은 그가 수십 년간 갈고닦은 심법 ‘나한불괴체(羅漢不壞體)’의 힘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언제까지 버텨줄지는 미지수였다.
류한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희미하게 저 멀리, 거대한 석벽의 잔해가 보였다. 과거의 신선들이 살았다는 ‘천공성’의 외곽 성벽 일부일 터였다. 천공성은 영겁의 재앙 이후 완벽히 파괴되었지만, 운이 좋으면 작은 영지(靈地)나 과거의 유물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희박한 가능성이었지만, 절망적인 상황에선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발걸음을 재촉해 석벽에 가까워질수록, 류한의 미간은 더욱 깊게 찌푸려졌다. 고요해야 할 폐허 속에서 미약하지만 분명한 기운이 느껴졌다. 살아있는 것의 기운,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강하다… 이 정도 영기를 지닌 놈들이라면, 일반적인 변이체는 아닐 텐데.’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류한은 허리춤에 찬 작은 영기 주머니를 꽉 쥐었다. 비상용으로 아껴둔 최하급 영석 한 개가 전부였다. 그것으로 긴급한 순간을 넘기는 건 가능하겠지만, 이런 상황에선 턱없이 부족했다.
석벽의 틈새로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자, 류한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했다. 과거 천공성의 아름다움을 상징했던 정원은 이제 뒤틀린 검은 덩굴과 기괴한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중심에는 과거 영력을 공급하던 거대한 ‘영천(靈泉)’이 있었을 법한데, 지금은 시커먼 진흙 웅덩이만이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웅덩이 주변에는, 굶주린 그림자처럼 생긴 괴물들이 우글거렸다. 놈들은 몸 전체가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듯했고, 길고 날카로운 손톱과 송곳니를 번뜩였다. 그들의 영기는 혼란스럽고 악취를 풍겼지만, 분명 무시할 수 없는 강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영혼의 포식자… 망각된 영혼들의 잔해가 뭉쳐서 만들어진 변이체인가.’
류한은 그들의 정체를 직감했다. 이 괴물들은 평범한 육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었다. 영력을 직접 흡수하여 자신을 강화하는, 지극히 위험한 상대였다. 보통 영력이 고갈된 폐허에서는 보기 드문 존재였다.
그런데 왜 이곳에… 류한의 시선이 검은 웅덩이의 중앙으로 향했다. 웅덩이 깊은 곳에서 미약하지만 특이한 영기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 파동은 마치 꺼져가는 심장처럼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지만, 주변의 영혼의 포식자들을 끌어모으는 중심축처럼 보였다.
‘저것은… 영혼의 핵인가? 아니, 저런 곳에서 영혼의 핵이 생성될 리가 없어. 그렇다면…’
뇌리를 스치는 섬뜩한 가설에 류한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영겁의 재앙 이후, 세계의 영기는 불균형하게 왜곡되었다. 어떤 곳은 완전히 메마르고, 어떤 곳은 기괴하게 뒤틀린 영기가 뭉쳐 변이체를 만들거나, 혹은 과거의 유물을 더욱 강하고 위험하게 만들기도 했다. 저 웅덩이 안에 있는 것이 그 기괴하게 뒤틀린 영기의 정수라면, 그것은 엄청난 위험인 동시에… 생존의 실마리가 될 수도 있었다.
순간, 류한의 눈에 포식자들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웅덩이 가장자리에 겨우 몇 송이 피어 있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꽃이었다. 꽃잎은 검푸른 빛을 띠고 있었고, 그 속에서 아주 희미한 영기가 뿜어져 나왔다.
‘환영 영초(幻影靈草)!’
류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환영 영초는 극심하게 영기가 메마른 땅에서 기적처럼 피어나는 영초였다. 겉으로는 보잘것없지만, 한 송이만으로도 며칠간의 영력 소모를 보충해 줄 수 있는 귀한 영약이었다. 게다가 주변의 영혼 포식자들은 그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포식자들은 오직 웅덩이 속 깊은 곳의 기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류한의 머릿속에서 수많은 계산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환영 영초를 얻어야 했다. 그것만이 지금 당장 그의 생존을 연장시킬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저 포식자들을 뚫어야 했다. 게다가 웅덩이 속의 미지의 존재는 더욱 위험해 보였다.
류한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손에 든 영기 주머니를 슬쩍 열어보았다. 마지막 영석의 희미한 빛이 그의 결심을 굳건히 만들었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혀야지.”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몸을 숨기고 있던 석벽에서 그림자처럼 미끄러져 나왔다. 그의 발소리는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았고, 그의 존재는 바람 속에 완전히 녹아든 듯했다. ‘은혼보(隱魂步)’ – 영혼조차 감추는 보법이었다.
가장자리에 있는 포식자 한 마리의 뒤편으로 접근했다. 검은 안개로 이루어진 몸은 촉수처럼 흔들리고 있었고, 그 놈은 웅덩이를 향해 몸을 기울인 채 미동도 없었다. 류한은 오른손을 뻗어 한 줄기 영력을 끌어모았다. 그 영력은 푸른 빛을 띠며 회오리처럼 뭉쳐졌다.
콰앙!
섬광과 함께 류한의 주먹이 포식자의 검은 몸통을 강타했다. 영혼으로 이루어진 육체는 한순간 충격으로 인해 흩어졌고, 놈의 기괴한 비명이 폐허 속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완전한 파괴는 아니었다. 놈의 몸은 다시 검은 안개로 뭉쳐지며 빠르게 재생하려 들었다.
‘역시… 물리적인 공격만으로는 어렵다.’
류한은 당황하지 않고 재빨리 다음 동작을 취했다. 왼손을 뻗어 공중에 부적을 그려냈다. 피로 그린 듯 붉은 빛을 띠는 영혼 봉인 부적이었다. 부적은 포식자의 머리 위에서 빛을 발하며 떨어졌고, 놈의 재생을 억누르기 시작했다. 봉인된 포식자는 기괴한 신음소리를 내며 몸부림쳤지만, 이미 늦었다.
하지만 이 짧은 순간의 소란은 다른 포식자들의 주의를 끄는 데 충분했다.
쉬이이익!
사방에서 검은 안개 그림자들이 류한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날카로운 송곳니와 촉수 같은 손톱이 그의 심장을 겨냥했다. 류한은 침착하게 몸을 돌려 피했다. 그의 발걸음은 빠르고 정확했다. ‘은혼보’는 단순한 보법이 아니었다. 적의 영기 흐름을 예측하여 가장 효율적인 회피 경로를 찾아내는 심법이었다.
“귀찮게 하는군!”
류한은 등에 짊어진 태고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은 빛을 띠는 거대한 검은 주변의 희미한 영기마저 빨아들이는 듯했다. 검신에 박힌 알 수 없는 문양들이 희미하게 빛났다. 이 검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었다. 영겁의 재앙 이후 깨어난, 그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거대한 비밀을 품고 있는 존재였다.
크고 무거워 보였지만, 류한의 손에서 검은 마치 깃털처럼 가볍게 휘둘러졌다. 그의 검이 한번 휘둘러질 때마다 검은 기운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포식자들은 그 기운에 닿자마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산산조각 났다. 일반적인 영혼 흡수 능력으로는 태고의 검이 내뿜는 강력한 어둠의 영기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포식자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았다. 끊임없이 재생하며 달려드는 그들의 물결에 류한은 점차 지쳐갔다. 그의 영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호흡은 점차 거칠어졌다.
‘서둘러야 한다… 이대로는 끝이 없다!’
류한은 환영 영초가 피어있는 웅덩이 가장자리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제 몇 걸음 남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영력을 끌어모아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검은 기운이 회오리처럼 몰아치며 주변의 포식자들을 잠시 밀어냈다. 그 틈을 타 류한은 웅덩이 가장자리로 도약했다.
손을 뻗어 환영 영초를 뽑아 들려는 순간, 웅덩이 속에서 강렬한 영기의 파동이 솟구쳤다.
쿠구궁!
검은 웅덩이의 진흙이 격렬하게 끓어오르더니, 그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영혼의 포식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수십 길에 달하는 거대한 몸집, 온몸을 휘감은 시커먼 기운, 그리고 웅덩이 깊은 곳의 영혼의 핵에서 비롯된 듯한 불길한 영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마치 고대 악마가 깨어난 듯한 기운에 주변의 포식자들마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거대한 그림자의 심장부에서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거대한 눈동자 두 개가 류한을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지독한 증오와 굶주림이 담겨 있었다.
“젠장… 이건 예상 못 했는데.”
류한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환영 영초를 손에 쥐었지만, 그의 눈은 이미 거대한 괴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저것은 단순한 변이체가 아니었다. 영겁의 재앙으로 뒤틀린 영기가 만들어낸, 재앙의 핵 그 자체였다. 저 놈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환영 영초는 아무 소용이 없을 터였다.
괴물은 거대한 촉수를 들어 올리더니 류한을 향해 내리쳤다. 폐허 전체가 진동하는 충격이 대지를 강타했다. 류한은 겨우 몸을 피했지만, 그가 서 있던 자리는 깊게 패여 버렸다.
“크윽!”
몸이 휘청거렸지만, 류한은 이빨을 악물었다. 그의 손에 든 태고의 검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그의 영력이 바닥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타올랐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 이곳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류한의 영혼은 더욱 선명한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는 살아남아야 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거대한 괴물이 또다시 촉수를 들어 올리는 순간, 류한은 눈앞의 거대한 위협을 꿰뚫어 보았다. 저 괴물의 약점은 분명 저 심장부의 영혼 핵일 터. 하지만 어떻게 저 거대한 영기 방어를 뚫고 핵에 도달할 수 있을까?
그 순간, 류한의 뇌리 속에 과거의 기억, 스승의 가르침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_“영겁의 재앙이 세상의 질서를 파괴했을지라도, 영혼의 불꽃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 너의 진정한 힘을 찾으라, 류한!”_
그래… 진정한 힘.
류한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환영 영초를 입안에 털어 넣었다. 동시에 왼손으로 등에 짊어진 검은 태고의 검을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환영 영초의 희미한 영기가 그의 몸속으로 스며들자, 바닥났던 영력이 한순간 폭발적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태고의 검에서 흘러나오는 어둠의 기운이 그 영력과 섞이며, 류한의 몸을 감쌌다.
그의 몸에서 검푸른 영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영겁의 재앙을 뚫고 피어난 듯한, 강렬하면서도 음산한 빛이었다.
“간다!”
류한은 낮게 포효하며, 괴물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심장에서 영혼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그는 더 이상 영력의 잔량이나 육체의 한계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직 살겠다는 일념, 그 순수한 영혼의 의지만이 그를 이끌었다.
거대한 촉수가 다시 한번 류한을 덮쳐왔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류한은 검을 세차게 휘둘러 촉수를 가르고, 그 틈새로 마치 검은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괴물의 심장부에서 꿈틀거리는 영혼 핵이 선명하게 비쳤다.
이제, 최후의 일격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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