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SF (공상과학)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강철 심장에 균열

    차갑고 습한 공기가 폐부를 찢는 듯했다. 세라는 고개를 숙이고 방호복의 후드를 더욱 깊게 눌러썼다. 두꺼운 필터 마스크 너머로 불규칙하게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저 아래, 지평선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실루엣이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제국의 동력원이자, 동시에 수많은 평민의 생명을 갉아먹는 독배. 에테르 추출 플랜트, ‘황혼의 심장’이었다.

    “목표까지 오백 미터.”

    낮게 깔린 리안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탔다. 잡음 섞인 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특유의 침착함이 묻어 있었다. 리안은 팀의 눈이자 귀였다. 그의 손가락은 홀로그램 지도를 빠르게 쓸어넘기며 제국의 감시망을 교란하고 있었다.

    세라는 손목의 통신기를 톡톡 두드려 대답했다. “계속 진행해. 경계 강화.”

    그녀의 옆에 바위처럼 서 있던 칼이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거대한 어깨 위에는 특수 제작된 전자기 충격기가 짊어져 있었다. 보통의 반란군이라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화력. 하지만 칼에게는 그것이 마치 장난감 총처럼 가벼워 보였다.

    세 사람은 비좁은 폐기물 수송관을 기어갔다. 부식된 금속 내벽에서 악취가 진동했다. 이곳은 과거 평민들이 일했던 작업장이었지만, 이제는 제국이 버린 쓰레기들만이 썩어가는 죽음의 통로였다. 빛 한 줄기 없는 어둠 속에서 오직 리안의 손목에 달린 전술등만이 희미하게 길을 비췄다.

    “젠장, 쥐새끼들이 너무 많군.” 칼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신발 밑창에 무언가 밟히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들렸다. 이곳의 쥐는 보통의 쥐가 아니었다. 에테르 추출 과정에서 발생하는 독성 물질로 인해 기형적으로 변이된 거대 쥐들이었다.

    “조용히 해, 칼. 제국의 경비병만큼이나 귀 밝은 놈들이니까.” 세라가 경고했다. 그녀는 허리춤에 찬 에너지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날카로운 칼날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뿜었다.

    수송관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금속 마찰음과 기계음이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웅웅거리는 거대한 공장의 숨소리였다. 리안이 손을 들어 정지 신호를 보냈다.

    “앞에 열감지 센서. 패턴 분석 중. 곧 우회로를 찾을 수 있을 거야.”

    세라는 그의 말에 따라 멈춰 섰다. 그녀의 시선은 좁은 수송관 너머의 풍경에 고정되었다. 육중한 강철문이 보였고, 그 옆으로는 제국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이 섬뜩하게 새겨져 있었다.

    “센서 교란 시작.” 리안의 손가락이 공중을 빠르게 유영했다. 홀로그램 키보드가 그의 손끝에서 번개처럼 움직였다. 잠시 후, 통신망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어. 10초간 시야 확보. 빨리 움직여야 해.”

    세라는 고개를 끄덕이고 칼을 돌아보았다. “칼, 문 개방. 소리 없이.”

    칼은 말없이 몸을 낮춰 문 앞에 섰다. 그의 팔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육중한 강철문이 그의 어깨에 짓눌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쉬이이익-! 공기가 새는 소리와 함께 문이 아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열렸다. 그는 문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간 뒤, 내부의 잠금장치를 풀어 세라와 리안이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이 모든 과정이 불과 몇 초 만에 이루어졌다.

    내부는 거대한 통로였다. 머리 위로는 수많은 파이프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벽에는 거대한 냉각팬이 둔탁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붉은 경고등이 번쩍였고, 어둠 속에 거대한 그림자들을 만들어냈다.

    “경비 순찰 패턴 확인. 3분마다 한 번씩. 두 명씩 한 조. 전자기 라이플로 무장.” 리안이 속삭였다. “다음 순찰까지 45초.”

    “45초면 충분해.” 세라가 대답했다. 그녀는 이미 다음 움직임을 계산하고 있었다. “칼, 저기 중앙 감시탑. 저격병이 있을 수 있어.”

    “문제없습니다.” 칼은 말없이 전자기 충격기를 어깨에서 내렸다. 거대한 총열이 그의 손에서 안정적으로 고정되었다.

    세 사람은 그림자 속을 빠르게 이동했다.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제국의 시스템에 길들여진 병사들의 움직임은 예측하기 쉬웠다. 다음 순찰 조가 오기 전에 통로를 벗어나야 했다.

    “좌측 통로에 추가 센서. 열영상.” 리안이 경고했다. “전력 증폭이 필요해.”

    “젠장.” 세라가 낮게 중얼거렸다. “칼, 준비해. 문이 열리는 즉시 돌파한다.”

    칼은 이미 자세를 낮추고 있었다. 그의 눈은 굳게 닫힌 강철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리안의 손가락이 다시 허공을 스쳤다.

    삐빅!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했다는 경고음이 작게 울렸지만, 곧 사라졌다.

    “됐어! 5초!” 리안이 외쳤다.

    콰아앙! 칼이 강철문을 들이받았다. 그의 어깨에 실린 충격은 평범한 강철문이라면 단번에 찌그러뜨릴 위력이었다. 문이 거친 굉음과 함께 안쪽으로 열렸다. 동시에,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제국 병사 두 명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칼의 전자기 충격기가 불을 뿜었다. 팟! 팟!

    두 명의 병사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세라와 리안은 칼 뒤를 따라 재빨리 내부로 진입했다. 통로가 열리자마자 경고등이 요란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붉은 불빛이 내부를 비추며 긴장감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젠장, 예상보다 빨랐군.” 세라가 중얼거렸다. “리안, 경보 시스템 초기화 시도해.”

    “시도 중입니다. 하지만 완전 초기화는 힘들 것 같아요. 백업 시스템이 너무 강력합니다!” 리안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럼 부분적으로라도 좋으니, 가능한 한 시선을 돌려!” 세라가 외쳤다.

    탕! 탕! 탕!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추가 병력들이 나타났다. 전자기 라이플에서 발사된 녹색 섬광이 어둠을 가르고 날아왔다. 세라는 재빨리 몸을 날려 엄폐물 뒤로 숨었다. 칼은 이미 거대한 냉각관 뒤에 몸을 숨긴 채 전자기 충격기를 다시 조준하고 있었다.

    “젠장, 놈들이 몰려옵니다!” 리안이 외쳤다. 그는 작은 휴대용 장비를 꺼내 바닥에 설치했다. 장비에서 푸른색 섬광이 뿜어져 나오며 허공에 거대한 홀로그램 환영을 만들어냈다. 여러 명의 반란군이 무질서하게 달리는 모습이었다.

    “일시적인 눈가림이야! 빨리 이동해야 해!” 세라가 소리쳤다. 그녀는 에너지 단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의 눈은 오직 앞으로 나아갈 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수많은 평민들의 고통과 염원이 그녀의 어깨에 짊어져 있었다. 이 제국의 심장을 한 번이라도 흔들어 놓아야 했다. 그래야만 어둠 속에 가려진 희망의 불씨가 다시 타오를 수 있을 테니까.

    “중앙 코어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세라가 외쳤다. “리안, 길을 열어! 칼, 엄호해!”

    그녀는 에너지 단검을 움켜쥐고 홀로그램으로 혼란에 빠진 제국 병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강철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곳은 황혼의 심장이었다. 그리고 세라는 그 심장에 균열을 내기 위해 찾아온 검은 불꽃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첫 번째 장: 고요의 숲에서 속삭이는 빛

    햇살은 늘 똑같은 시간에 창문을 두드렸다. 스물네 살, 한아름의 아침은 지극히 평범했다. 낡았지만 깨끗한 원룸, 눅진한 커피 한 잔, 그리고 출근 전 잠깐의 망설임. 작은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고 대출을 돕는 일이 그녀의 일상이었다. 특별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시간들. 아름은 가끔 자신이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흐름에 조용히 동참하지만,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존재.

    하지만 딱 한 곳, 그녀가 투명인간이 아님을 확인받는 장소가 있었다. 동네 끝자락에 자리한 ‘별내음 식물원’. 이름처럼 별 냄새가 날 리는 없었지만, 이곳의 낡고 울창한 숲은 아름에게 언제나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어 주었다. 특히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식물원 가장 깊숙한 곳,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따라 들어가면 나타나는 작은 공터였다. 오래된 느티나무 두 그루가 하늘을 가리고 서 있고, 그 아래에는 온갖 야생화와 이끼 낀 돌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곳.

    오늘도 아름은 퇴근 후 그곳을 찾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기운이 없는 날이었다. 왜인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기분. 그녀는 작은 스케치북과 연필을 챙겨 느티나무 뿌리에 기댔다. 여름 끝자락의 오후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지만, 숲속은 늘 시원하고 고요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 조각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마치 살아있는 그림 같았다. 아름은 그 빛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후우…”

    작은 한숨이 나뭇잎 사이로 흩어졌다. 딱히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마음이 무거웠다. 그럴 때마다 아름은 스케치북에 손 가는 대로 그림을 그렸다. 오늘은 숲의 풀잎들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싶었다. 그녀의 시선은 느티나무 아래, 땅을 가득 메운 초록빛 이끼 낀 돌들로 향했다.

    그 순간이었다.

    돌들 틈새, 유독 움푹 파인 곳에서 아주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아름은 보았다. 꼭 누군가 작은 조약돌을 깜빡이는 손전등처럼 흔드는 것 같았다. 빛은 너무나 미약해서, 만약 아름이 평소처럼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면 절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유난히 예민했다.

    “저게 뭐지…?”

    아름은 스케치북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몸을 숙였다. 풀과 이끼를 헤치고 손을 뻗자, 그 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작지만 은은하게 빛나는 무언가.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것이 방금 깨어난 것처럼, 맥박처럼 미세하게 깜빡였다. 아름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이끼를 걷어냈다.

    그 아래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매끄러운 돌이 박혀 있었다. 돌은 둥글지도, 네모나지도 않은 기묘한 형태였다. 회색빛을 띠고 있었지만, 그 표면에는 아주 미세하고 복잡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을 따라 흐르는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 같았다. 아름은 숨을 멈추고 그것을 응시했다. 이런 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자연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정교했다.

    “신기하다…”

    아름은 홀린 듯 손가락을 뻗어 돌의 표면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돌에서는 묘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오랫동안 품고 있던 작은 알처럼 따뜻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가락이 돌의 빛나는 문양에 닿는 순간, 돌은 갑자기 환한 빛을 뿜어냈다.

    쉬이잉-!

    귀를 울리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동시에 눈앞이 온통 푸른빛으로 가득 찼다. 아름은 놀라서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쿵쾅거렸지만, 왠지 모를 평화로움이 그녀를 감쌌다. 두려움보다는 경이로움이 더 컸다. 푸른빛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다시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하지만 이전과 똑같지는 않았다.

    돌은 여전히 그녀의 손 아래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주변의 풍경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나뭇잎은 더욱 선명한 초록빛을 띠고, 이끼는 더 생생하게 빛났다. 그리고 무엇보다, 숲 전체에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바람 소리도, 새소리도 아닌, 숲 자체가 내는 낮은 속삭임 같은 소리. 마치 숲의 모든 생명체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아름은 방금 전까지 무거웠던 마음이 마치 거짓말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텅 비어있던 공간이 알 수 없는 따뜻함으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돌을 완전히 들어 올렸다. 매끄럽고 따뜻한 감촉. 돌은 그녀의 손안에서 부드럽게 빛나며 맥동하고 있었다. 아름은 돌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 작은 돌멩이가, 이 숲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이 기묘한 빛이, 그녀의 일상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라는 예감에 휩싸였다.

    아름은 무의식적으로 돌을 품에 안았다. 마치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소중한 친구를 다시 만난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숲의 속삭임은 더욱 또렷해졌다.

    “환영합니다…”

    아니, 어쩌면 그건 그저 그녀의 기분 탓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름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투명했던 일상에 이제 막, 선명한 색깔이 덧입혀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이 돌이, 이 숲이, 그녀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는 아직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녀는 더 이상 투명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세상은 그녀에게 다르게 보일 터였다.

  • 다크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챕터 1: 보이지 않는 손님

    차가운 새벽 공기가 뺨을 스쳤다. 민준은 침대 위에서 부스스 눈을 떴다. 창밖은 아직 푸른 기운을 머금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이미 도시는 웅성거리는 듯한 희미한 소음을 내뿜고 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 습관적으로 시계를 찾았다. 그러나 어쩐지 오늘은 모든 게 제자리를 벗어나 있는 기분이었다.

    협탁 위에는 며칠 전 읽다 만 소설책이 뒤집혀 놓여 있었다. 분명 어젯밤에는 표지가 위를 향하고 있었는데. 민준은 대수롭지 않게 책을 바로 놓으며 몸을 일으켰다. 잠결에 자신이 그랬겠거니 생각했다. 피곤한 주말이었다.

    거실로 나온 그는 멈칫했다. 어제 밤 분명히 소파 위에 깔끔하게 정리해 두었던 담요가 바닥에 축 늘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잠시 앉았다가 황급히 일어난 것처럼.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은 착각이겠지.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젠장,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중얼거리며 담요를 주워 올렸다.

    주방으로 향하는 길에 식탁을 스쳤다. 어젯밤 저녁 식사 후 씻어두었던 머그잔이 식탁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물기가 채 마르지 않은 채. 그는 분명 식기 건조대에 걸어두었는데. 다시 한번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어쩌면 어두운 밤중에 자신이 착각했을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잠이 덜 깼을 뿐이야.

    냉장고 문을 열어 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침실로 돌아와 간단히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줄기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자, 어딘가 모르게 들떴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방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흐읍!”
    민준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이 꽂힌 곳은 침대 옆 서랍장이었다. 그 위에는 그가 아끼는,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온 작은 나무 조각상이 놓여 있었다. 분명 어젯밤에는 서랍장 중앙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마치 누군가 잡아 던진 것처럼 바닥에 떨어져 조각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의 침대 밑에.

    차가운 공기가 방안을 가득 채운 듯했다. 털이 곤두서는 소름이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그의 눈은 침대 밑, 조각상의 잔해를 향했다. 침대 아래는 늘 먼지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짙은 어둠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게… 뭐야?”

    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허리를 숙여 조각상의 잔해를 주웠다. 나무가 갈라진 단면은 날카로웠다. 망가진 조각을 손에 쥔 채, 그는 방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달라 보이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민준은 느낄 수 있었다. 분명 무언가가, 그의 시야 밖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벽에 걸린 액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본 것은 그때였다.
    딸깍.
    갑자기 방안의 스탠드 등이 스스로 켜졌다. 민준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스탠드 등은 깜빡이더니 이내 다시 꺼졌다. 그리고 다시 켜졌다. 마치 누군가 장난을 치듯 반복되는 동작.

    “누구… 누구야!” 민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거기 누구 있어? 장난치지 마!”

    대답은 없었다. 다만, 거실 쪽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르륵.
    마치 맨발이 바닥을 끄는 듯한 소리였다. 아주 느리고, 끈적이는 듯한 소음. 민준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착각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이 아파트에, 지금 그와 함께 무언가가 존재했다.

    스르륵.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민준은 침실 문을 바라봤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소리는 마치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것처럼 선명했다. 그의 눈이 문고리를 향했다. 문고리가, 아주 천천히, 아래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달칵.

    문이 열렸다. 하지만 그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복도, 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이 보였다. 그러나 민준은 거실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형체가 없는, 검은 그림자 같은 존재가 그를 응시하는 듯한 섬뜩한 감각.

    그는 뒷걸음질 쳤다. 침대 헤드에 몸이 부딪혔다.

    “나가… 나가라고!” 민준은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의 외침에 답하듯, 거실의 커튼이 맹렬한 기세로 휘날렸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는데도, 마치 폭풍이라도 몰아친 듯이. 그리고 그와 동시에,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던 작은 화병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꽃잎들이 허공에서 흩어졌다.

    화병은 민준의 눈앞에서 잠시 멈춰 서 있었다. 마치 무언가 그를 비웃는 것처럼.
    콰앙!
    그리고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벽으로 날아가 박살 났다. 날카로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민준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현실이 아니었다. 꿈이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꿈이기를.

    “이제… 시작이야.”

    귓가에 들려온 것은 섬뜩하고 건조한 속삭임이었다. 너무나도 가깝게, 마치 그의 혀가 자신의 귀에 닿아 있는 것처럼. 그 목소리는 분명 여자아이의 것인데, 어딘가 모르게 삐뚤어지고 낡은, 오래된 철문이 삐걱이는 듯한 불쾌한 음색을 띠고 있었다.

    민준은 눈을 번쩍 떴다.
    복도 끝, 어둠 속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파트에 혼자 살아온 지 3년.
    그는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손님은, 결코 환영받지 못할 존재였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새벽

    낡은 캡슐의 삐걱이는 문이 닫히고, 희미한 푸른빛이 시야를 감쌌다. 기계음이 낮게 울리다 멎고, 곧 정교하게 조작된 인공 감각이 내 신경을 잠식했다. 가상현실 게임, ‘낙원’—사람들은 그렇게 불렀지만, 내가 발을 딛는 곳은 결코 낙원이 아니었다. 이곳은 폐허의 연대기, 생존을 위한 지옥 같은 투쟁의 장이었다.

    눈을 떴을 때, 탁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실제 같았다. 꿉꿉하고 메마른 먼지 냄새, 곰팡이와 부패한 쇠 냄새가 뒤섞인 역겨운 악취. 머리 위로는 잿빛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고, 그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것은 무너진 도시의 잔해뿐이었다.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거나, 아예 주저앉아 흙먼지에 파묻혀 있었다. 도로 위에는 녹슨 차들이 흉측한 형상으로 버려져 있었고, 깨진 유리 파편들이 햇빛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였다.

    “젠장, 시작부터 이렇다고?”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낮은 신음과도 같았다. 튜토리얼 같은 건 없었다. 친절한 시스템 메시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덩그러니, 낡은 버스 정류장 잔해 옆에 던져진 기분이었다. HUD(헤드업 디스플레이)는 최소한으로만 정보를 표시했다. 우측 상단에 작게 표시된 [HP: 100/100], [스태미나: 100/100]. 그리고 그 아래, [장비: 없음]. [인벤토리: 빈칸].

    진정한 생존 게임이었다. 어떤 ‘퀘스트’나 ‘목표’ 따위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살아남아라. 그게 유일한 규칙인 듯했다.

    나는 심호흡을 했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먼지 가득한 공기가 나를 더 각성시켰다. 현실에서 나는 벼랑 끝에 몰린 남자였다. 병든 어머니, 밀린 생활비, 끝없는 빚. 이 게임이 주는 ‘현실 보상’이 아니었다면, 아마 벌써 모든 것을 포기했을 것이다. 죽지 않고 게임 속에서 버티기만 해도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소문에 사람들은 미친 듯이 이 폐허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움직여야 했다. 맨몸으로 이곳에 서 있는 건 죽음을 자처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서든 시작해야 했다. 무너진 건물, 부서진 상점, 텅 빈 주유소. 그 모든 곳이 잠재적인 탐색 대상이자, 동시에 위험을 품고 있는 장소였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그나마 온전해 보이는 슈퍼마켓 건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깔린 자갈과 유리 파편들이 밟힐 때마다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딛는 걸음마다 먼지가 피어올랐다. 주변은 소름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살아있는 것이라면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고요함이 주는 위화감은 오히려 나를 더 긴장시켰다.

    슈퍼마켓의 입구는 이미 산산조각 나 있었다. 뼈대만 남은 자동문 잔해를 헤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시원할 리 없는 냉기가 폐허의 습한 공기와 섞여 나를 맞았다. 내부는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진열대는 쓰러져 있고, 상품들은 바닥에 나뒹굴며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천장은 곳곳이 뚫려 빛이 새어 들어왔고, 그 빛줄기 속에는 먼지 입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음식… 물…”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유통기한 따위는 오래전에 의미를 잃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 폐허 속에서는 무엇이든 생존의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썩지 않는 통조림, 오염되지 않은 생수, 혹은 쓸만한 도구라도.

    한참을 뒤적였다. 텅 빈 선반, 부서진 냉장고, 그리고 쥐똥으로 가득한 바닥. 절망이 점차 나를 짓눌러 왔다. 이런 곳에서 과연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그때, 내 발끝에 딱딱한 것이 걸렸다. 쓰러진 진열대 아래, 먼지에 반쯤 파묻혀 있는 낡은 금속 조각이었다. 나는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녹이 슬고 날카로운 모서리는 무뎌져 있었지만, 한때는 파이프였을 법한 그 쇳덩이는 한 손에 쥐기 적당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녹슨 쇠 파이프 (내구도: 30/50)]라는 정보가 HUD에 희미하게 떴다.

    최초의 무기였다. 비록 보잘것없었지만, 맨손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때였다. 내 뒤편에서 ‘크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심장이 발끝까지 곤두박질쳤다. 몸을 돌리는 순간,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으나, 이미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키는 나보다 작았지만,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진 팔다리와 앙상한 몸은 공포 그 자체였다. 피부는 시체처럼 푸르죽죽했고,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갈비뼈가 끔찍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눈동자는 없었다. 그저 텅 비고 탁한 구멍이 나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입은 기형적으로 찢어져 있었고, 날카로운 이빨이 불규칙하게 돋아나 있었다.

    *스캐빈저*. 이 폐허를 떠도는 괴물들 중 하나였다.

    녀석은 나를 발견하자마자 느릿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몸을 흔들며 다가왔다. ‘크르륵, 크르륵’ 하는 짐승 같은 소리가 좁은 슈퍼마켓 안에 울려 퍼졌다.

    도망칠까? 아니. 도망쳐 봐야 어디로 도망치겠는가. 이제 막 무기를 얻었고, 이 게임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이런 것들과 싸워야만 했다. 나는 쇠 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지만, 이를 악물고 눈앞의 괴물을 노려봤다.

    스캐빈저가 거리를 좁혔다. 녀석의 긴 팔이 기괴하게 휘두르는 것을 보고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었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손톱이 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다행히 직접 맞지는 않았다.

    나는 반격했다. 온몸의 힘을 실어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쇠 파이프가 녀석의 어깨를 강타했다. 스캐빈저의 몸이 휘청였지만, 곧바로 비명을 지르며 다시 내게 달려들었다. 이 게임의 괴물들은 고통을 모르는 것 같았다.

    녀석의 공격이 이어졌다. 빠르진 않았지만, 예측하기 힘든 움직임이었다. 한 번, 두 번. 나는 간신히 몸을 피하거나 팔로 막았다. 스캐빈저의 손톱이 내 팔을 스쳐 지나갔다. [HP: 95/100] 짧은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대미지였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초보 주제에 이런 괴물에게 죽는다면, 과연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여기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현실의 삶도 버텨왔는데, 고작 게임 속 괴물 따위에 질 순 없었다.

    “꺼져!”

    나는 소리쳤다. 절박함이 섞인 목소리였다. 녀석이 다시 팔을 뻗어오자, 나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몸을 숙여 녀석의 다리를 향해 파이프를 휘둘렀다. ‘우드득!’ 녀석의 다리에서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스캐빈저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틈이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쓰러진 녀석의 머리를 향해 쇠 파이프를 연이어 내리쳤다. ‘퍽! 퍽! 퍽!’ 역겨운 둔탁음이 슈퍼마켓을 가득 채웠다. 마지막 일격과 함께 녀석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흙먼지처럼 바닥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스캐빈저 처치!]
    [경험치 획득: 10]
    [아이템 획득: 너덜너덜한 천 조각 (2), 썩은 고기 (1)]

    나는 숨을 헐떡이며 쇠 파이프에 몸을 기댔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팔다리는 후들거렸고, 심장은 광란하듯 뛰었다. 간신히 첫 싸움에서 이겼지만, 얻은 것은 보잘것없는 잡템과 지독한 피로뿐이었다.

    ‘썩은 고기’는 어차피 먹지도 못할 것이었다. ‘너덜너덜한 천 조각’은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나는 허름한 천 조각을 주워들고 인벤토리에 넣었다.

    슈퍼마켓 안은 이제 더욱 고요했다. 스캐빈저와의 사투가 내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이곳은 자비 없는 곳이었다. 어떤 ‘성장’이나 ‘발전’을 논하기 전에, 당장 살아남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나는 다시 주변을 살폈다.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이젠 단순히 ‘무엇을 찾을까’가 아니었다. ‘무엇이 나를 살게 할까’, ‘무엇이 위협이 될까’.

    눈을 들어 부서진 천장 너머, 잿빛 하늘을 응시했다. 저 멀리, 이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 중 하나가 보였다. 끝이 부서져 불규칙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지만, 주변의 다른 건물들에 비하면 훨씬 더 견고해 보였다. 어쩌면 그곳에는… 아직 남아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곳이 바로 나의 다음 목표가 되었다. 살아남기 위한, 폐허에서의 첫 걸음이었다. 어떠한 미련도, 동정도 허락되지 않는, 오직 생존만이 지배하는 황폐한 세상에서.

  • 에픽 하이 판타지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에피소드 1: 잿빛 수렁골의 불씨

    **[장면 1: 천상의 도시와 수렁골]**

    **1.1. (와이드 샷)**
    멀리,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황금빛 첨탑들이 태양 빛을 반사하며 눈부시게 빛난다. ‘천상의 도시, 아스트라’—제국의 심장이자 번영의 상징이다. 거대한 황금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깃발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그 위용을 자랑한다.
    **내레이션 (리안의 목소리):** “천상의 도시, 아스트라. 그곳은 제국의 심장이자, 끝없는 탐욕의 발원지였다. 황금빛 성벽 아래, 우리 같은 평민들의 삶은 언제나 그림자 속이었다.”

    **1.2. (수직 구도 대비 샷)**
    아스트라의 화려한 성벽 바로 아래, 흙먼지가 풀풀 날리고 낡고 허름한 판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수렁골’이 보인다. 희뿌연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미세먼지 속에서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온다. 썩어가는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듯한 공기가 느껴진다.

    **1.3. (수렁골 전경)**
    수렁골의 비좁은 골목길. 앙상하게 마른 아이들이 먼지투성이 바닥에서 기운 없이 앉아있고, 지친 얼굴의 어른들이 힘없이 오가고 있다. 그들 모두의 눈에는 희망보다 체념이 더 깊게 드리워져 있다.

    **[장면 2: 황실 징세와 척결대]**

    **2.1. (수렁골 시장통)**
    수렁골의 낡은 시장통. 텅 비다시피 한 좌판과 몇 안 되는 상인들의 초점 없는 눈빛이 보인다. 그때, 둔중한 발소리와 함께 황실 징세관들과 척결대 병사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번쩍이는 갑옷과 서슬 퍼런 창으로 무장하고, 시장통을 가득 메운다.
    **징세관 (목소리만):** “길을 비켜라! 황실의 명이다! 핏빛 세금을 징수하러 왔다!”

    **2.2. (척결대의 위압감)**
    붉은색 투구의 깃털이 인상적인 척결대 대장이 앞장서서 걸어온다. 그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의 모습은 마치 거대한 그림자처럼 수렁골 주민들을 짓누른다. 주민들은 잔뜩 움츠러들며 길가로 비켜선다.

    **2.3. (흑밀 창고 앞)**
    마을 사람들이 어렵게 지은 흑밀을 보관하는 낡은 창고 앞. 병사들이 거친 손길로 삭막한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가, 마지막 남은 흑밀 자루들을 끌어내고 있다. 먼지가 풀풀 날리고, 자루들이 바닥에 뒹굴며 내용물이 흘러나온다.

    **2.4. (노파의 애원)**
    한 쭈글쭈글한 노파가 흑밀 자루 하나를 붙잡고 간절히 애원한다. 그녀의 손은 뼈마디가 굵고 거칠다.
    **노파:** “안 돼요! 이건… 이건 우리 아이들의 마지막 양식이에요! 제발 이것만은… 가져가지 마세요!”
    **병사 (냉정하게):** “닥쳐라, 늙은 것! 황실의 칙령은 절대적이다! 제국의 영광을 위해 네놈들 따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느냐!”

    **2.5. (노파의 절규)**
    병사가 노파를 거칠게 밀쳐낸다. 노파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앙상한 팔이 드러난다. 그녀의 눈에 공포와 절망이 뒤섞인다. 옆에 있던 어린아이(노파의 손주로 보인다)가 놀라 울음을 터뜨린다.
    **어린아이:** “할머니!”
    **노파:** “흐윽… 흐으으…”

    **2.6. (짓밟힌 흑밀)**
    노파의 손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병사의 군화 아래 짓밟힌 흑밀 몇 알갱이가 보인다. 그 알갱이들은 마치 수렁골 사람들의 희망처럼 부서져 버린 듯하다.
    **주민 1 (작게 속삭이듯):** “이러다 정말 다 죽겠어…”
    **주민 2 (탄식):** “황제는 우리가 굶어 죽든 말든 신경도 안 쓰겠지…”

    **[장면 3: 그림자 속의 분노]**

    **3.1. (카인과 리안)**
    척결대 병사들의 뒤편, 낡은 건물 그림자 속에 서 있는 두 사람. 한 명은 ‘카인’, 다른 한 명은 ‘리안’이다. 카인은 굳게 다문 입술, 이글거리는 눈으로 병사들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거대한 체구와 굳건한 팔뚝은 언제든 터져 나올 듯한 분노로 떨리고 있다.
    **내레이션 (리안의 목소리):** “그의 이름은 카인. 불의를 참지 못하고, 동료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지는 자. 수렁골의 잃어버린 심장이었다.”

    **3.2. (리안의 제지)**
    리안은 낡았지만 단정한 옷차림이다. 그녀의 눈은 침착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생각과 걱정이 담겨 있다. 그녀가 카인의 팔을 잡는다.
    **리안:** “참아요, 카인. 지금은 때가 아니에요. 저들은 우리가 폭력적으로 반응하길 원할 뿐이에요.”
    **카인 (이를 갈며, 낮은 목소리로):** “때가 아니라고? 더 이상 뭘 더 기다려야 해, 리안? 저들이 우리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을 때까지 기다리라고? 노인들도, 아이들도 굶어 죽어가고 있어! 저게 우리가 매년 바치는 핏빛 세금의 결과야!”

    **3.3. (수호석 파괴)**
    척결대 병사들이 이제 마을의 우물을 향한다. 그곳에는 마을 사람들의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온, 작은 소망과 안녕을 기원하는 ‘수호석’이 세워져 있다. 한 병사가 조롱하듯 수호석을 발로 찬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수호석은 산산조각 나 바닥에 흩어진다.
    **주민 3 (비명):** “안 돼! 수호석을 건드리지 마! 그건 우리 마을의 혼이라고!”
    **척결대 대장 (비웃음):** “하찮은 미신 따위! 황실의 보급로 확장을 위해 이 우물은 접수한다! 역병이라도 돌면 제국에 피해가 갈 테니, 당분간 사용 금지다! 어겨봐라, 네놈들 목을 날려줄 테니!”

    **3.4. (우물 오염)**
    병사들이 우물물을 바닥에 쏟아버리고, 흙과 돌덩이를 던져 우물을 막아버린다. 맑은 물이 순식간에 진흙탕이 되고,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는 절망감이 가득 찬다.
    **내레이션 (리안의 목소리):** “식량, 물, 그리고 우리를 지켜주던 작은 믿음마저 빼앗겼다. 더 이상 가진 것이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는 뜻이 되었다.”

    **[장면 4: 분노의 불꽃]**

    **4.1. (카인의 클로즈업)**
    카인의 눈. 격렬한 분노가 폭발하듯 번뜩인다. 그의 주먹은 이제 떨림 없이 단단하게 쥐어져 있다. 그의 얼굴에 비장한 결의가 떠오른다.
    **카인 (낮고 굵은 목소리로):** “더는… 못 참아.”

    **4.2. (리안의 만류와 카인의 결심)**
    리안이 다시 카인의 팔을 잡지만, 카인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뿌리친다. 그의 발걸음이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리안:** “카인! 제발! 이건 자살행위예요! 대항할 준비도 없이…”
    **카인:** “준비? 리안, 우리에게 더 이상 준비할 시간은 없어. 우리가 여기서 죽는다면, 적어도 서서 죽을 것이다!”

    **4.3. (카인의 등장)**
    카인이 척결대 병사들 앞에 우뚝 선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위압적인 병사들을 덮친다. 흙먼지 속에서 그의 실루엣은 마치 거대한 바위처럼 굳건해 보인다.
    **척결대 대장 (비웃음):** “오호라, 쥐새끼 한 마리가 감히 덤비려 하는가? 네놈도 제국의 노예로 끌려가고 싶으냐!”

    **4.4. (카인의 선언)**
    카인은 대장의 말을 무시하고, 떨리는 목소리지만 단호하게 외친다.
    **카인:**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다! 더 이상 너희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4.5. (철제 지지대)**
    카인이 허리춤에서 낡았지만 튼튼한 ‘철제 지지대’를 뽑아든다. 그것은 원래 곡식을 나를 때 쓰던 도구였지만, 그의 손에서는 위협적인 무기처럼 느껴진다.

    **4.6. (첫 번째 충돌)**
    척결대 병사 하나가 카인에게 달려들지만, 카인은 벼락같은 속도로 철제 지지대를 휘둘러 병사의 칼을 쳐낸다. ‘쨍강!’ 하는 소리와 함께 칼이 부러져 나간다. 병사는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진다.

    **4.7. (카인의 위용)**
    (와이드 샷) 카인이 홀로 수십 명의 병사들을 상대로 서 있다. 그의 뒤로 마을 사람들이 놀라움과 함께 새로운 희망의 빛을 발견한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리안은 충격 속에서도 카인의 결의를 읽으며,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킨다.

    **4.8. (대장의 명령)**
    척결대 대장이 당황하여 얼굴을 찌푸린다.
    **척결대 대장:** “이 건방진 놈! 모두 공격해라! 즉시 저놈을 제압하고 본보기로 삼아라!”

    **4.9. (카인의 포효)**
    (클로즈업) 카인의 얼굴. 땀방울이 흐르지만, 그의 눈은 전혀 흔들림이 없다. 오히려 굳건한 의지로 번뜩인다.
    **카인 (포효):** “일어서라, 수렁골의 형제들이여! 빼앗긴 것을 되찾을 때다!”

    **4.10. (반격의 시작)**
    (역동적인 샷) 카인이 병사들과 격렬하게 싸우기 시작한다. 그의 움직임은 거칠지만 강력하다. 몇몇 병사들이 그의 압도적인 힘에 밀려 휘청거린다.

    **4.11. (마을 사람들의 각성)**
    놀라움에서 벗어난 마을 사람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노인들도, 젊은이들도, 저마다 손에 괭이나 몽둥이, 혹은 낡은 도끼 같은 것을 든다.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 대신 결의가 피어난다.

    **4.12. (리안의 결심)**
    리안은 땅에 떨어진 수호석 조각을 주워든다. 그녀의 눈빛은 이전보다 더 단단해졌다.
    **리안:** “그래… 맞아요.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어요.”

    **4.13. (수렁골의 반란)**
    (마을 사람들의 역동적인 단체샷) 카인의 외침에 용기를 얻은 마을 사람들이 “더는 못 참아!”, “우리 것을 돌려줘!”, “자유를!” 같은 구호를 외치며 병사들에게 달려든다. 그들의 수는 적지만, 분노와 절박함으로 가득 찬 기세는 거세다.

    **4.14. (척결대의 퇴각)**
    척결대 대장이 당황한 표정으로 후퇴를 지시한다.
    **척결대 대장:** “이런 미개한 것들이! 후퇴! 후퇴하라! 본부에 지원 요청을 보내라! 이 반역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병사들이 혼란 속에서 황급히 물러난다.

    **[장면 5: 새로운 시작]**

    **5.1. (반란의 여운)**
    척결대가 퇴각한 후, 엉망이 된 수렁골 광장에 카인이 서 있다. 그의 어깨는 무겁지만, 등은 굽히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둘러싸고, 두려움과 함께 새로운 희망의 빛을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본다.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고, 어떤 이는 조용히 그의 이름을 부른다.

    **5.2. (카인과 리안의 시선)**
    리안이 카인의 옆에 선다. 그녀의 눈빛은 이전보다 더 단단해졌다. 그녀는 카인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리안:** “이제 돌이킬 수 없게 되었어요. 제국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예요.”
    **카인 (먼 곳, 아스트라를 바라보며):** “알아.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어. 저들이 우리를 죽이지 않는 한, 우리는 싸울 것이다.”

    **5.3. (희망의 불씨)**
    (황금빛 아스트라와 잿빛 수렁골을 동시에 보여주는 와이드 샷) 카인의 손에 들린 낡은 철제 지지대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난다. 그의 등 뒤로,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새로운 미래를 기대하는 듯하다. 수렁골 위로 붉은 노을이 번진다.
    **내레이션 (리안의 목소리):** “그날, 잿빛 수렁골에서 작은 불씨 하나가 피어올랐다. 거대한 제국의 심장을 향해… 그 불씨는 언젠가 모든 것을 태울 거대한 불꽃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우리는 알았다. 이제 돌아갈 길은 없다는 것을.”

    **5.4. (클로즈업)**
    카인의 강인한 눈빛. 그 안에 거대한 제국에 맞설 결의가 이글거린다.
    **내레이션:** “그리고 그 불꽃은, 비로소 시작되었다.”

    **[에피소드 끝]**

  • 스페이스 오페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광활한 우주가 캔버스처럼 펼쳐진 ‘오로라 호’의 최상층 스위트, 닥터 베일론의 개인 천문관측실은 싸늘한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은하수의 황홀경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거대한 파노라마 창밖으로는 이름 모를 성운들이 춤을 추고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방 안의 비극적 침묵 앞에서 무색했다.

    보안 책임자 칼 경위는 땀으로 축축한 손수건으로 이마를 닦아냈다.
    “전면 봉쇄입니다. 문은 삼중 바이오인식 잠금과 고에너지 포스 필드로 막혀 있었고, 창문은 우주선 외벽과 일체형이라 열릴 수 없습니다. 내부 센서도 침입자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말 그대로 ‘밀실’입니다.”

    시신은 천문관측용 망원경 앞에 쓰러져 있었다. 가슴팍에는 정교한 레이저 무기로 지져진 듯한, 깨끗하지만 치명적인 구멍이 뚫려 있었다. 주변에는 어떤 무기도, 범인의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방 안의 기압, 온도, 습도, 심지어 공기 중의 미립자 농도까지 완벽하게 정상이었다.

    칼 경위의 뒤로 한 남자가 조용히 들어섰다. 잿빛 머리카락은 언제나 미묘하게 헝클어져 있었고, 흐릿한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차가웠다. 그의 이름은 키안. 아스트라 제국 최고의 ‘사건 해체사’였다. 그의 옆에는 언제나처럼, 눈빛이 형형한 젊은 보조관 시온이 따랐다.

    “보고는 들었습니다, 경위님. ‘오로라 호’는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선박 중 하나였죠.” 키안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감정이라곤 실려 있지 않은 듯했다.

    “그렇습니다! 모든 프로토콜은 완벽하게 지켜졌습니다. 하지만… 박사님은 돌아가셨습니다. 대체 누가, 어떻게…?” 칼 경위는 절망감에 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키안은 대답 없이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그의 시선은 바닥의 미세한 먼지 입자, 벽에 드리워진 그림자, 심지어 천문관측장비의 반짝이는 금속 표면까지 놓치지 않았다. 시온은 익숙한 듯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내부 보안 카메라 기록은 어떻죠?” 키안이 물었다.

    “사망 추정 시각 직전, 약 3분간 원인 불명의 시스템 오류로 녹화가 중단되었습니다. 이후 다시 정상 작동했고, 박사님의 시신을 포착했습니다.” 칼 경위의 설명에 키안의 눈썹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3분이라…” 키안은 중얼거렸다. 그의 손가락이 천문관측실의 거대한 파노라마 창 옆 벽면에 설치된 패널 위를 스쳤다. 일반적인 공기 순환기 제어 패널처럼 보였지만, 키안은 그 위에서 아주 미미한,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형태의 미세한 이물질을 발견했다. 마치 무언가 강한 에너지에 의해 순간적으로 증발했다가 다시 응고된 듯한 흔적이었다.

    “시온.” 키안이 나지막이 불렀다.
    “네, 키안 님.”
    “이 방의 모든 설계도를 가져와. 특히 이 패널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그리고 대기 구성 변화 로그도 확인해봐.”

    시온은 재빠르게 태블릿을 꺼내들고 정보 검색에 들어갔다. 칼 경위는 의아한 표정으로 키안을 바라봤다. “키안 님, 그건 단순한 공조 시스템 제어 패널입니다. 박사님의 방은 완벽하게 외부와 차단되어 있는데요.”

    키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패널에 고정되어 있었다. 패널 표면의 아주 미세한 변형,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아주 작은 흠집 하나가 그의 머릿속에서 복잡한 회로를 만들고 있었다.

    잠시 후, 시온의 태블릿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키안 님, 이 패널은 일반 공조 시스템과는 약간 다릅니다. 이 방은 특수 목적으로 심우주 미립자를 분석하는 기능도 갖추고 있어서, 외부 우주 환경과 연결되는 초미세 나노필터링 콘duit가 하나 더 존재합니다. 평소에는 봉쇄되어 있지만, 특정 연구 목적으로 아주 미세한 대기 샘플을 채취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 콘duit가 연결된 외부 과학 분석 유닛의 전력 사용량 로그를 확인해봐.” 키안의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시온은 몇 번의 터치로 데이터를 불러왔다.
    “사망 추정 시각, 정확히 3분간 외부 과학 분석 유닛에서 순간적인 고에너지 출력 로그가 감지됩니다. 일반적인 샘플링 과정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수준입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콘duit의 개폐 기록도 있습니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열렸다가 다시 닫혔습니다.”

    키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조각이 맞춰지는 순간이었다.
    “3분.” 그가 다시 중얼거렸다. “카메라가 꺼진 3분 동안, 그들은 물리적으로 방에 침입하지 않았어. 하지만, 무언가는 들어왔고, 임무를 완수했지.”

    키안은 칼 경위와 시온, 그리고 옆에 서 있던 선장에게로 몸을 돌렸다.
    “밀실은 깨졌습니다. 아주 영리하고, 기술적으로 완벽한 방법으로 말이죠.”

    그는 다시 콘duit 패널을 가리켰다.
    “닥터 베일론은 이 천문관측실을 이용해 심우주의 미립자를 분석했습니다. 이 나노필터링 콘duit는 그를 위한 특수 장치였죠. 문제는, 이 장치가 외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 연결을 살인에 이용할 수 있다는 발상입니다.”

    칼 경위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콘duit는 너무 작습니다. 사람 몸은커녕, 무기 하나도 통과할 수 없습니다.”

    “맞습니다. 일반적인 무기는 불가능하죠.” 키안이 차분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일반적이지 않은’ 무기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고도로 정밀하게 조작된, 집중형 에너지 빔 발사 장치 말입니다. 살인자는 이 콘duit가 외부 과학 분석 유닛과 연결된 사실을 알고 있었고, 원격으로 콘duit를 개방했습니다.”

    그는 파노라마 창밖으로 펼쳐진 우주를 가리켰다.
    “그리고 외부 과학 분석 유닛에 고정된, 소형 고에너지 빔 무기를 이용해, 이 콘duit를 통해 닥터 베일론을 직접 조준했습니다. 3분간의 카메라 오작동은 빔 무기의 강력한 에너지 방출이 선박의 내부 시스템에 일시적인 교란을 일으킨 결과였을 겁니다.”

    시온이 경악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그럼… 살인자는 이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심지어 배 안에 없을 수도 있었다는 말입니까? 외부에서 원격으로 조종을…?”

    “정확합니다. 빔은 대기를 통과하며 닥터 베일론의 심장을 관통했고, 어떤 물리적 흔적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콘duit는 살인 직후 다시 봉쇄되었고, 외부 빔 무기는 에너지 방출 후 자폭했거나, 혹은 다른 우주선에 탑재되어 이미 이탈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키안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동요도 없었다.

    그는 패널 위의 미세한 이물질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다.
    “이 흔적은 빔이 콘duit를 통과하며 발생한 미세한 열에너지 잔류물입니다. 극도로 정밀하게 조작되었지만, 완벽할 수는 없었던 거죠.”

    모두의 얼굴에는 경악과 함께 깊은 깨달음이 스쳤다. 밀실은 물리적 봉쇄가 아닌, 원격 조작과 첨단 기술의 맹점을 이용한 완벽한 착시였다. 범인은 방 안에 들어올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선장은 숨을 들이켰다. “그렇다면… 범인은 이 오로라 호의 설계와 닥터 베일론의 연구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이겠군요.”

    키안은 다시 망원경 앞에 쓰러진 닥터 베일론의 시신을 바라봤다.
    “살인자의 트릭은 깨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빔의 궤적을 추적하고, 누가 그 빔을 발사했는지 찾아내는 일뿐입니다.”

    그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사건은 이제 시작이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난관, 즉 ‘불가능한 밀실’의 환상은 그의 손에 의해 이미 산산조각 나 있었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밤의 장막이 서울의 잿빛 하늘을 드리울 때, 도시의 불빛은 더욱 간절하게 반짝였다. 고층 빌딩의 숲 사이, 퇴근길 인파에 밀려 걷던 현우는 낡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몸을 맡긴 채, 오늘 하루도 무사히 흘러갔음에 안도하고 있었다. 지루한 일상이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출근과 퇴근, 모니터 앞에서 숫자와 씨름하는 시간들. 가끔은 이 모든 것이 거대한 톱니바퀴의 일부처럼 느껴져 숨이 막힐 때도 있었다.

    익숙한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으슥한 담벼락 너머로, 재개발을 기다리는 허름한 주택들이 그림자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곳이 있었다. 오래된 절터였는지, 아니면 그저 낡은 사당이었는지 알 수 없는 폐허. 붉게 녹슨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틈새로 기이한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한 착각에 현우는 발걸음을 멈췄다.

    착각일 리 없었다.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푸른색과 금색이 뒤섞인 오묘한 섬광이 폐허의 내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마치 낡은 시계태엽이 돌아가는 소리처럼, 웅웅거리는 진동이 현우의 발밑을 흔들었다. 호기심이 공포를 집어삼켰다. 현우는 홀린 듯 철문으로 다가갔다. 녹슨 틈새로 눈을 비집고 넣자, 안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어야 할 공간에서 빛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빛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이게… 뭐야?”

    현우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철문에 닿는 순간, 빛은 폭발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분해되었다가 재조립되는 듯한 끔찍한 감각. 눈앞의 풍경은 녹아내리는 캔버스처럼 일그러졌고, 귀청을 찢는 굉음이 모든 소리를 집어삼켰다. 현우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정지했다.

    축축한 흙냄새, 풀벌레 소리, 나뭇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눈을 떴을 때, 현우는 등 뒤로 굵은 나무의 껍질이 느껴지는 울창한 숲 속에 엎어져 있었다. 머릿속이 욱신거렸고, 귓속에서는 여전히 웅웅거리는 이명이 울렸다.

    “젠장… 꿈인가?”

    현우는 신음하며 몸을 일으켰다. 푸른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았고,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그의 눈을 아프게 했다. 어제의 도시 풍경은 온데간데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은 낡은 기와지붕과 흙벽으로 이루어진 마을의 모습뿐.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은 새까맣게 죽어 있었고, 아무리 전원 버튼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어제 분명 충전했는데?

    “여기가 어디지… 설마, 납치?”

    현우는 온몸을 훑어봤지만, 겉옷 하나 없이 평범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인적 없는 숲의 고요함만이 그를 에워쌌다.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지금 이 상황이 현실임을 깨닫자 공포가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갈증이 밀려들었다. 숲을 헤치고 나아가자, 이내 작은 냇가가 나타났다. 투명한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여전히 땀에 젖어 헝클어진 현대인의 모습이었다. 손바닥으로 물을 떠 마시려는 순간,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현우는 행동을 멈췄다.

    “이번 대회의 향방은 실로 천하의 운명을 가를 것이니, 제군들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오!”

    “그렇습니다! 만약 마교의 놈들이 기어이 ‘태초의 균열’을 손에 넣는다면, 무림은 물론이요, 세상 전체가 혼돈에 휩싸일 것입니다!”

    목소리는 냇가 상류 쪽에서 들려왔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현대 도시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어투와 내용이었다. 마교? 태초의 균열? 이건 마치… 무협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조심스럽게 덤불을 헤치고 다가가자, 작은 공터에 몇 명의 사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익숙지 않은 비단 도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허리춤에는 번쩍이는 검을 차고 있었다. 한 명은 풍채가 좋은 중년이었고, 다른 두 명은 그보다 젊어 보였다.

    “이미 대회는 시작되었소. 각 문파의 고수들이 속속 태화산으로 집결하고 있다 들었소. 문제는 그들의 목적이 단순히 천하제일이 아닐지 모른다는 것이오.” 중년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빛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사부님, 설마 천룡검문(天龍劍門)의 장로들마저 마교와 손을 잡았단 말입니까?” 젊은 사내 중 한 명이 놀란 듯 물었다.

    “알 수 없지… 이번 ‘운명지회(運命之會)’는 그 어떤 대회보다도 기이하고, 그 어떤 징조보다도 불길하오. ‘태초의 균열’이 열리는 시기에 맞추어 대회가 열리는 것 또한 심상치 않지.”

    현우는 숨을 꾹 참았다. ‘운명지회’. 천하의 운명을 건 무림 고수들의 무술 대회. 그리고 ‘태초의 균열’이라는 알 수 없는 존재. 이 모든 것이 그가 읽었던 무협 소설의 한 장면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믿을 수 없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는 정말로 시간여행을 한 것일까? 그것도 고작 밤늦은 폐허에서 손을 뻗었을 뿐인데?

    그 순간, 나뭇가지 하나가 현우의 발밑에서 ‘투둑’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세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시선이 칼날처럼 현우가 숨어 있는 덤불을 꿰뚫었다.

    “누구냐!”

    중년 사내의 손이 번개처럼 허리춤의 검자루를 잡았다. 현우는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을 숨길 틈도 없이, 덤불 속에서 튀어나올 수밖에 없었다.

    “저… 저기요. 오해입니다! 저는 그냥 길을 잃어서…”

    현우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그의 현대적인 옷차림과 어리벙벙한 표정은 세 사내의 눈에 기이하게 비쳤을 것이다.

    “이자는 무엇이냐? 삿된 옷을 입고, 머리도 기이하게 잘랐구나. 혹 마교의 척후병인가?” 젊은 사내 중 한 명이 검을 반쯤 빼 들며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현우를 노려봤다.

    “아닙니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저는 그냥…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입니다!”

    현우의 절규는 그들의 귀에는 그저 미치광이의 횡설수설로 들릴 뿐이었다. 중년 사내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현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검을 다시 검집에 넣었다.

    “다른 세상에서 왔다라… 허언증 환자인가, 아니면 귀신의 농간인가. 하나 확실한 것은, 네놈의 복장은 이 무림에서는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저는 정말…” 현우는 목구멍까지 차오른 변명을 겨우 삼켰다. 지금 이들에게 자신이 미래에서 왔다고 설명해봐야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더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너는 누구이며, 어째서 태화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숨어 있었는가? 솔직히 고하라.” 중년 사내가 차분하지만 위압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는 지금, 생전 처음 겪는 무림의 한복판에 떨어져 있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거대한 대회가 시작되었고, 그는 그 한복판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이었다.

    “저는… 저는 그저… 길을 잃은 나그네일 뿐입니다. 태화산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운명지회’라는 것도 방금 처음 들었습니다.”

    현우의 눈빛은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의 진심이 조금은 통했는지, 중년 사내의 미간이 살짝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경계심은 거두지 않았다.

    “흠… 어찌 되었건, 이 길은 태화산으로 통하는 길. 이곳에서 더 이상 얼쩡거렸다가는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운명지회’에 참가하는 문파들은 모두 예민해져 있으니.”

    중년 사내는 현우에게 눈짓으로 길을 비키라는 듯이 말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뒷걸음질 쳤다. 그들이 떠나고 난 후에도 한참 동안 숲 속에 서 있었다.

    태화산, 운명지회, 마교, 태초의 균열…
    현우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은 듯한 기분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정말로 다른 세상에 와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세상은 지금, 거대한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그의 앞에는 낯선 무림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고, 그는 그 속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어쩌면,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서라도.

    울창한 숲 너머로, 웅장한 태화산의 봉우리들이 구름을 뚫고 솟아 있었다. 그곳에서,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대회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현우는, 그 모든 것의 시작점에 서 있었다.

  • 스팀펑크 독립적인 단편 소설

    거대한 황동과 강철로 이루어진 선체가 짙푸른 심연을 가르고 나아갔다.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쉼 없이 맞물려 돌아가며, 웅장한 증기 기관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인 진동을 선체 전체에 퍼뜨렸다. ‘천공의 기어’호는 우주를 유영하는 거대한 시계태엽 장치이자, 인간의 집념이 빚어낸 경이로운 공업 예술품이었다.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무한한 어둠 속에서 별들은 가스등처럼 아득하게 빛나고 있었다.

    함교는 복잡한 구리 파이프와 증기 압력 게이지, 빛바랜 항해 지도들로 가득했다. 은은한 오일 램프의 불빛 아래, 함장 아멜리아는 낡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망원경을 만지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망원경의 다중 렌즈를 통해 저 멀리 펼쳐진 별들의 강을 응시했다. 수없이 많은 항해를 거치며 생긴 주름이 깊게 팬 얼굴은 고단함보다는 굳건한 결의로 가득했다.

    “함장님, 서브-이더리얼 파동에 미세한 이상 징후가 감지되었습니다.”

    항해사 카엘의 목소리가 정숙한 함교에 울렸다.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듯한 그는 앳된 얼굴에도 불구하고 능숙하게 복잡한 아스트롤라베와 수많은 계측기들을 다루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나침반 바늘처럼 정교하게 움직이는 황동 레버들을 조정하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망원경에서 눈을 떼고 카엘을 돌아봤다. “이상 징후라고? 구체적으로 어떤?”

    “현재 주시 중인 항성계 바깥, 이전 탐사에서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던 ‘공허의 틈새’ 영역에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파동 패턴은… 저희가 알고 있는 어떤 자연 현상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인공적인 패턴에 가까운데, 너무나 희미해서 확신할 수 없습니다.” 카엘은 다소 상기된 얼굴로 데이터를 가리켰다. 수많은 톱니바퀴와 스프링으로 이루어진 증기식 디스플레이에는 미약한 파동 그래프가 불규칙하게 춤추고 있었다.

    아멜리아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공허의 틈새… 그곳은 광물이든 가스든, 심지어 유성조차도 없는 완전한 진공 지대였을 텐데. 빅터, 기관실에 준비 지시 내려. 최대 출력 유지할 수 있도록.”

    함교 중앙에 서 있던 거구의 기관장 빅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평생 증기 기관의 열기와 그을음에 절여져 온 듯 검게 그을려 있었고, 굵은 손은 만성적인 기름때로 번들거렸다. “접근하시려는 겁니까, 함장님? 그곳은 오싹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야, 빅터. 우리는 탐험선이지 미신에 굴복하는 겁쟁이들이 아니잖나. 미지의 것은 늘 우리를 유혹해왔지.” 아멜리아는 망원경을 다시 집어 들었다. “레나, 탐사관 레나에게 연락해. 외부 탐사 준비하라고 전해.”

    “네, 함장님.” 카엘이 증기식 통신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통신기의 피스톤이 ‘칙칙’ 소리를 내며 메시지를 전송했다.

    천공의 기어호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서서히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황동 제트 분사구에서 뜨거운 증기가 우주 공간으로 뿜어져 나오며 선체를 밀어냈다. 수십 개의 대형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함교 바닥을 통해 진동으로 전해졌다.

    수 시간이 흘러, 카엘의 데이터는 점점 더 선명한 파동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희미했던 신호는 이제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반복되는 패턴으로 나타났다.

    “함장님, 파동이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주파수 분석 결과… 저희가 아는 어떤 문명에서도 사용하지 않는 주파수입니다.” 카엘의 목소리에 흥분과 약간의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아멜리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주시경을 통해 바깥을 응시했다. 멀리 어둠 속에 점처럼 보이던 무언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별빛을 거의 흡수하는 듯 검은색을 띠고 있었지만, 그 형태는 분명 자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속도를 줄여, 카엘.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레나, 준비는 완료되었나?”

    통신음과 함께 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완료되었습니다, 함장님. 언제든 나갈 수 있습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동력 장치는 최고 출력으로 설정했습니다.”

    아멜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전 함선은 비상 상황에 대비하라. 빅터, 모든 증기 압력 밸브를 확인해. 조금이라도 이상 징후가 있으면 즉시 보고해.”

    “알겠습니다.” 빅터가 대답하며 기관실로 향하는 육중한 강철 문을 열었다. 문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열기와 굉음이 잠시 함교로 밀려들어왔다.

    천공의 기어호는 기어이 그 미지의 존재 앞에 멈춰 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모두의 숨을 멎게 할 만큼 기괴하고 아름다웠다.

    그것은 거대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유물이었다. 육면체도 구형도 아닌, 어떤 기하학적인 형태도 아닌 복잡한 구조물이었다. 칠흑 같은 외벽은 빛을 집어삼키는 듯 보였지만, 그 표면을 따라 흐르는 미세한 홈들에서는 희미한 푸른빛이 맥박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시계태엽 장치 같았다. 수억 개의 톱니바퀴와 레버들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며,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너무나 거대해서 천공의 기어호조차도 그 옆에서는 난파된 잔해처럼 초라해 보였다.

    “이게… 대체 뭡니까, 함장님?” 카엘의 목소리는 경외감과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망원경을 내려놓고 침묵했다. 그녀의 눈은 유물의 표면을 훑었다. 어떤 문양도, 문자도 없었지만, 그 복잡한 구조 자체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듯했다.

    “레나, 외벽 근접 탐사 시작해. 접촉은 절대 금지다. 오직 시각적인 정보와 비접촉 스캔만 허용한다.” 아멜리아가 차분하게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탐사용 스팀 슈트가 천공의 기어호 측면에서 분리되어 유물을 향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슈트의 발사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가 우주 공간에 하얀 선을 그렸다.

    레나가 유물에 가까워질수록, 푸른빛의 맥동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 빛은 우주 공간에서 어떤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은 채 유물의 복잡한 표면을 따라 흐르며 움직였다.

    “함장님, 유물의 표면 온도는 절대 영도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미세한 에너지 파동이 감지됩니다. 이 금속은… 저희가 아는 어떤 원소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순수한 검은색 결정체와 같습니다.” 레나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깃들어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유물에서 낮고 일정한 웅웅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진동을 타고 천공의 기어호의 선체에까지 전달되었다. 함교의 모든 톱니바퀴들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함장님, 이상합니다! 모든 게이지들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서브-이더리얼 압력이 급증하고 있어요!” 카엘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손은 무수히 많은 레버들을 잡고 진정시키려 애썼지만, 계기판의 바늘들은 걷잡을 수 없이 요동쳤다.

    “빅터! 기관실 상황은?” 아멜리아가 소리쳤다.

    “망할! 증기 압력이 통제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밸브가 버티지 못할 것 같습니다!” 빅터의 거친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터져 나왔다. “유물의 진동이 기관실 전체를 흔들고 있습니다! 동력 코어가 과열되고 있어요!”

    “레나! 즉시 귀환해! 위험하다!” 아멜리아가 명령했다.

    “함장님, 잠깐만요! 유물에서… 유물에서 뭔가 나오고 있습니다!” 레나의 목소리는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매혹에 잠긴 듯했다.

    유물의 칠흑 같은 표면의 한 부분에서, 마치 시계의 뚜껑이 열리듯, 미세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틈새에서 순수한 푸른빛이 터져 나왔고, 그 빛은 마치 액체처럼 흘러내리며 우주 공간에 신비로운 빛의 물결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또 다른 형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더욱 작았지만, 그 복잡함은 거대한 유물 본체에 버금갔다. 수천 개의 미세한 톱니바퀴와 보석들이 박힌, 살아있는 듯한 장치였다.

    레나는 홀린 듯 그것에 손을 뻗었다.

    “레나! 멈춰!” 아멜리아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레나의 장갑 낀 손이 빛나는 장치에 닿는 순간, 유물 전체에서 거대한 빛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천공의 기어호는 그 충격으로 크게 휘청거렸고, 함교의 램프들이 깜빡이며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했다. 계기판의 바늘들은 극한까지 치솟았다가 부서지듯 꺾여버렸다.

    “함장님, 시야 확보가 어렵습니다! 유물에서 방출되는 에너지가 너무 강합니다!” 카엘이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가린 채 외쳤다.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을 때, 모두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경악스러운 광경이었다.

    유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표면의 복잡한 톱니바퀴들은 멈춰 있었다. 푸른빛의 맥동도 사라졌다. 그리고 레나… 레나는 유물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녀의 스팀 슈트는 멀쩡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멍한 표정이었다.

    “레나! 괜찮은가?” 아멜리아가 통신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때, 유물의 정지했던 톱니바퀴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이전에 없던 속도로, 더욱 빠르고 격렬하게 돌아갔다. 그리고 유물의 중앙에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빛이 다시 한번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단순히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수천 년의 역사, 수억 개의 별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환상적인 광경이었다. 빛의 물결 속에서, 거대한 황동 도시들의 모습이 잠시 스쳐 지나갔고, 증기로 가득 찬 하늘을 나는 거대한 기계 새들이 보였다. 이어 알 수 없는 문자들과 기묘한 존재들의 형상이 번개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마치 유물이 그 안에 담긴 모든 정보를, 자신들의 존재를, 이 ‘천공의 기어’호의 승무원들에게 강제로 주입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함교 안의 모든 승무원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 거대한 정보의 파도에 정신이 붕괴될 것 같은 고통에 시달렸다. 아멜리아는 이를 악물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뇌리 속에서 알 수 없는 기계음과 외계 언어의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모든 소리와 빛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침묵이 다시 함교를 지배했다.

    모두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유물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고, 멈춰 있던 톱니바퀴들은 다시 천천히, 조용히 돌아가고 있었다. 푸른빛의 맥동도 돌아왔다.

    그리고 레나. 레나는 여전히 유물 앞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눈이 이전과는 달랐다.
    그녀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녀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걸렸다.

    “레나?” 아멜리아가 힘겹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레나의 시선이 천천히 아멜리아를 향했다.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함장님… 우리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였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의 레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분하고, 그러나 압도적인 어떤 지혜가 깃들어 있었다.
    “이 유물은… 단순한 장치가 아닙니다. 우주의 모든 시간을 기록한… 살아있는 도서관이자, 문명의 마지막 증언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시간이 왔습니다.”

    아멜리아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레나는 유물에 손을 댄 이후로 분명 달라졌다. 그녀의 눈빛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시간이라니… 무슨 뜻인가?” 아멜리아가 간신히 물었다.

    레나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시선은 함교 너머,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는 별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천공의 기어호의 모든 계기판들이 다시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격렬한 요동이 아니었다. 마치 새로운 생명을 얻은 듯, 이전보다 더욱 정교하고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함장님… 엔진이… 엔진이 저절로 안정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전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가동되고 있습니다!” 빅터의 떨리는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들려왔다. 그는 경악과 혼란에 빠져 있었다.

    카엘 역시 증기식 디스플레이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이더리얼 압력이 최적화되었습니다… 그리고 항로 시스템이… 새로운 항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가 알지 못했던, 별들의 지도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길입니다!”

    아멜리아는 레나를 다시 바라봤다. 레나의 얼굴에는 더 이상 멍한 표정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서서, 미지의 존재가 된 듯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천공의 기어호는 유물 앞에서 조용히 떠 있었다. 거대한 시계태엽 장치인 유물은 다시 고요히 맥동하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손에 쥐고 있던 망원경을 꽉 쥐었다. 이 미지의 유물과의 접촉은 그들의 탐험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레나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제… 진정한 항해가 시작될 겁니다, 함장님.”

    천공의 기어호는 유물의 옆에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물이 제시한, 미지의 별들을 향하는 새로운 항로를 따라서. 우주의 심연 속으로, 인간의 문명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문턱을 넘어서.
    이 거대한 시계태엽 배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탐험선이 아니었다.
    새로운 존재의,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증기선이 되었다.
    그들의 항해는 끝없이 이어질 터였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Chapter 1: 심연의 메아리**

    창천호의 함교는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광활한 심우주를 유영하는 푸른빛 점 같은 존재. 저 너머엔 인류가 아직 발조차 딛지 못한 미지의 영역들이 펼쳐져 있었고, 우리는 그 가장자리를 조심스레 긁어가고 있었다. 함장 서준은 주 함교 의자에 기대어 전방의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을 응시했다. 은하수 외곽의 희미한 성운과 먼지띠들이 몽환적으로 일렁였다.

    “함장님, 장거리 스캔에 특이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나른한 고요를 깬 건 통신 및 항법 담당 하은의 목소리였다. 언제나 차분하고 정확한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약하지만 감지할 수 있는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 서준은 몸을 바로 세웠다.

    “특이 신호? 자세히 보고해.”

    “네. 예상 진로에서 약 3.2천만 킬로미터 지점입니다. 자연적인 천체 패턴과는 전혀 다른… 인위적인 구조물로 추정됩니다.”

    ‘인위적?’ 서준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이토록 깊은 우주에서 인류의 흔적일 리는 만무했다. 외계 문명?

    “영상 데이터 올려.”

    하은의 손가락이 가볍게 패널을 스쳤고, 주 스크린의 은하 배경이 빠르게 확대되었다. 흐릿한 영상이었지만, 이내 스크린 중앙에 검고 거대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울퉁불퉁한 소행성 같기도, 거대한 우주선 잔해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불규칙한 표면 사이로 기하학적인 배열이 언뜻 비쳤다.

    “탐사선 출격 준비. 1번 과학 담당 민지, 2번 기술 담당 진우, 함교에 대기하라.”

    서준의 지시에 함교는 일순 활기를 띠었다. 잠시 후, 과학 담당 민지와 기술 담당 진우가 함교에 들어섰다. 민지는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으로 스크린을 응시했고, 진우는 어깨에 메고 있던 다용도 공구 가방을 고쳐 맸다.

    “함장님, 정말 인공 구조물입니까? 이 좌표에서요?” 민지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역력했다.

    “아직 추정일 뿐이다, 민지. 하지만 내 예감은… 썩 좋지 않아.” 서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진우, 탐사선 동력 계통 다시 확인해. 불확실한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언제든 나갈 준비 완료입니다.” 진우가 묵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창천호는 조심스럽게 그 미지의 구조물에 접근했다. 스크린 속 형체는 점차 선명해졌고, 그 거대한 규모가 드러날수록 승무원들의 입에서는 낮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검은색 육각형 패널들이 불규칙하게 얽혀 거대한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표면 곳곳에는 어떤 문명의 흔적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수억 년 동안 우주를 떠다닌 거대한 바다거북 등껍질 같았다.

    “이건… 최소 수백만 년은 된 것 같군요.” 민지가 숨을 들이켰다. “재질 분석 결과, 이전에 발견된 어떤 행성 물질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가공된 물질입니다.”

    “저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 말이야. 일정한 패턴을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하은이 화면을 확대하며 중얼거렸다.

    서준은 침묵 속에서 스크린을 노려봤다. 너무나 완벽한 침묵이었다. 마치 저 거대한 구조물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접근 각도 3-알파, 속도 0.05광속 이하로 유지. 스캔 범위 최대로 확장해.” 서준이 지시했다.

    창천호는 숨죽이며 미지의 유물에 다가섰다. 수백 미터, 수십 미터… 거리가 좁혀질수록 유물의 거대함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익-!

    갑작스러운 경고음이 함교를 뒤흔들었다. 모든 모니터에서 비상등이 번쩍였다.

    “무슨 일이야?!” 서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함장님! 미지의 에너지 파동이 감지되었습니다! 유물에서… 유물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하은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주 스크린 속 거대한 유물의 표면에서, 이전에 보이지 않던 푸른빛 선들이 마치 혈관처럼 서서히 빛나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시작된 빛은 점점 강렬해지더니, 이내 유물 전체를 휘감는 거대한 에너지가 되었다.

    “에너지 수치 급격히 상승합니다! 창천호 방어막에 부하가 걸리고 있습니다!” 진우가 외쳤다.

    쿠웅-!

    창천호가 크게 흔들렸다. 천장에서 작은 부품들이 떨어져 내렸다. 승무원들의 얼굴에 공포가 스쳤다.

    “함장님! 분석 결과… 이 에너지 파동, 단순한 신호가 아닙니다. 어떤 정보를 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민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마치… 우리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아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함교 내부의 모든 전자기기가 일순 정지했다. 스크린은 검은색으로 변했고, 경고음마저 멎었다. 암흑 속에서 오직 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만이 창밖을 비췄다.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쉬이이이잉-

    승무원들의 뇌리를 직접 관통하는 듯한, 낮고 긴 울림이 들려왔다.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거대한 존재가 기지개를 켜는 듯한, 혹은 수억 개의 별들이 한꺼번에 속삭이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서준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탁자를 짚었다. 그의 눈앞에, 어둠 속에서 마치 유령처럼 흐릿한 영상이 나타났다. 수없이 많은 별들이 혼돈스럽게 춤추고, 거대한 은하들이 서로를 집어삼키는 광경. 그리고 그 모든 혼돈의 중심에, 방금 그 유물과 똑같은 형상이 거대하게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 그 자체와 동화되어 살아 숨 쉬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건… 대체…” 서준의 입에서 힘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민지, 진우, 하은의 얼굴에도 경악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 모두가 같은 환영을 보고 있음을 직감했다. 유물이 그들 모두의 의식에 직접 접속하고 있었다.

    유물의 푸른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창천호의 모든 것이 그 빛에 잠식당하는 듯했다. 함교 전체가 거대한 블루 스크린으로 변한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빛의 한가운데서, 목소리라고 할 수 없는 목소리, 언어라고 할 수 없는 언어가 그들의 정신에 직접 새겨져 들어왔다.

    —*오랜 침묵 끝에… 너희를 맞이한다, 작은 별의 생명체여.*—

    그것은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아득하고도 압도적인 존재의 메시지였다. 혼란과 공포, 그리고 알 수 없는 경외심이 승무원들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들의 의식은 빛과 소용돌이치는 별들의 이미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 심리 스릴러 독립적인 단편 소설

    강준혁은 잿더미가 된 자기 인생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박선우가 남긴 잿더미였다. 한때 그의 눈에 우주 전체였던 그 모든 것이, 지금은 한 줌 재가 되어 손가락 사이로 허무하게 부스러져 내렸다. 빌어먹을, 박선우. 내 친구, 내 형제, 내 모든 것이었던 그 이름이 이제는 시궁창보다 역겨운 저주의 대명사가 되어 그의 심장을 갉아먹었다.

    사건은 2년 전, 그들의 꿈이 산산조각 나던 날 시작되었다. 강준혁과 박선우는 대학 시절부터 모든 것을 함께한 친구였다. 둘은 ‘신세계’라는 이름으로 스타트업을 창업했다. 준혁의 천재적인 기술력과 선우의 탁월한 사업 수완이 만나, 그들의 앱은 출시와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미래는 탄탄대로인 듯했다. 그때까지는.

    어느 날, 회사의 핵심 기술 유출과 거액의 공금 횡령이라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경찰과 검찰이 들이닥쳤고, 모든 증거는 강준혁을 지목했다. 장부를 조작하고, 데이터 기록을 변조하고, 심지어는 준혁의 서명이 위조된 계약서까지. 완벽하게 짜인 함정이었다. 준혁은 아무것도 모른 채 회사에서 쫓겨났고, 모든 비난과 책임은 그의 몫이 되었다. 선우는 기자회견장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준혁의 배신을 규탄했다. “믿었던 친구에게 발등 찍혔지만, 신세계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위선적인 목소리가 준혁의 귀청을 찢는 비수가 되어 박혔다.

    “준혁아, 이건 오해야. 내가 꼭 밝혀낼게.”
    속삭이던 선우의 목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준혁이 감옥에서 출소했을 때, 선우는 ‘신세계’를 ‘미래랩’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코스닥 상장을 눈앞에 둔 촉망받는 젊은 CEO가 되어 있었다. 그의 얼굴은 TV 화면 속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준혁의 이름은 사기꾼, 배신자, 비리 경영자라는 딱지와 함께 더러운 오물처럼 버려졌다.

    길고 긴 밤이었다. 준혁은 그 잿더미 속에서 차갑게 식어버린 복수의 불씨를 발견했다. 그것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의 속삭임처럼 달콤하고 강렬했다. 살인? 너무 쉬웠다. 박선우는 준혁이 겪었던 것보다 더 처참한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다. 살아있는 채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세상의 조롱거리로 전락해야 했다.

    그날부터 준혁은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자신의 흔적을 지웠고, 얼굴을 바꾸었으며, 목소리까지 변조하는 연습을 했다. 감옥에서 익힌 해킹 기술은 더욱 정교해졌고, 사람의 심리를 파고드는 법을 배웠다. 그의 몸은 복수를 위한 정교한 기계로 변해갔다.

    ***

    2년 후, 박선우의 ‘미래랩’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의 사무실은 도심의 최고층 빌딩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았다. 통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에는, 그림자처럼 숨어든 준혁이 있었다. 그는 선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그의 모든 관계를 파고들었다.

    첫 번째 복수는 선우의 명예였다. 선우는 자선사업가이자 혁신적인 기업가로 포장되어 있었다. 준혁은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미래랩 내부 고발’이라는 제목으로 익명의 글을 올렸다.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미래랩’이 개발 중이라는 차세대 인공지능 기술의 핵심 알고리즘이 사실은 5년 전 이미 폐기된 타사의 표절이며, 심지어 그 기술이 개인 정보 유출의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었다. 준혁은 증거로 그가 오랫동안 모아둔 데이터 조작 파일들과 위조된 기술 보고서를 첨부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선우는 분노에 차서 테이블을 내리쳤다. “말도 안 돼! 누가 이런 헛소리를 퍼뜨린 거야?”
    미래랩의 주가는 폭락하기 시작했고, 언론은 의혹을 제기하기 바빴다. 선우는 기자회견을 열고 “악의적인 음해”라며 강경 대응을 예고했지만, 이미 의심의 씨앗은 뿌려졌다. 사람들은 과거 준혁에게 씌워졌던 ‘비리 경영자’의 그림자를 선우에게서 보기 시작했다.

    두 번째 복수는 선우의 돈이었다. 선우는 수많은 투자자를 끌어들여 몸집을 불렸다. 준혁은 그 투자자들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익명의 제보자로 위장하여, 특정 투자자들의 내부 정보를 경쟁사에 흘리고, 이들의 약점을 캐내 금융 감독원에 고발했다. 이 모든 것은 선우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마치 선우가 자기 이득을 위해 투자자들을 이용하는 것처럼.

    “박 대표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저희 회사 기밀이 유출됐다는데, 왜 박 대표님 이름이 거론되는 거죠?”
    “이건 또 무슨 음모야? 내가 왜 당신 회사 기밀을 빼돌려?”
    선우는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주변에는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가 한때 강준혁에게 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이제 박선우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잠들면 준혁의 텅 빈 눈동자가 그를 노려봤다.

    준혁은 선우의 심리를 서서히 조여왔다. 그는 선우가 가장 아끼는 비서에게 접근하여 그녀의 과거사를 파헤치고, 그녀의 약점을 이용해 선우의 가장 은밀한 사생활까지 꿰뚫어 보았다. 준혁은 그녀의 휴대전화를 해킹하여 선우와의 대화를 조작하고, 그녀가 선우를 배신하는 것처럼 꾸몄다. 결국 비서는 선우의 중요한 사업 계약 정보를 경쟁사에 넘겨주었고, 선우는 수십억 대의 손해를 보게 되었다.

    “감히 네까짓 게 나를 배신해?!”
    선우는 비서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비서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지만, 선우의 눈에는 이미 모든 것이 배신으로 보였다. “내가 뭘 어떻게 했다는 거예요, 대표님? 전… 아무것도…”
    “닥쳐! 네가 아니면 누가 내 정보를 빼돌려? 강준혁 그 자식의 잔당이라도 되는 거냐?!”
    선우의 분노는 비합리적으로 변해갔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배신하려 한다고 믿기 시작했다.

    복수의 마지막 단계는 선우의 고립이었다. 준혁은 선우의 가장 친한 친구, 그의 약혼녀에게까지 접근했다. 선우의 약혼녀에게는 선우가 과거에 저질렀던 추악한 일들과 그녀의 가족을 이용하려는 계획에 대한 가짜 증거를 보냈다. 그 증거들은 너무나도 완벽했고, 선우의 성격과 맞아떨어졌다.

    “오빠, 이게 정말이야? 오빠가 우리 아빠 회사를 이용하려고 했다고?”
    약혼녀의 눈동자는 공포와 배신감으로 흔들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누가 또 이따위 헛소문을…”
    선우는 이제 자신의 말을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는 고립되었다. 투자자들은 등을 돌렸고, 직원들은 동요했으며, 심지어 그의 가족마저도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미래랩은 침몰하는 배와 같았다.

    마침내, 선우는 나락의 끝에 다다랐다. 그의 회사 가치는 바닥을 쳤고, 투자자들은 그를 고소했다. 그는 횡령과 배임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를 지지하던 모든 언론은 이제 그를 비난하고 조롱했다. 2년 전, 준혁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선우는 자신의 텅 빈 사무실에 앉아 비틀거렸다. 모든 것이 무너졌다. 그때, 그의 휴대전화에 알 수 없는 번호로 영상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열었다. 화면에는 오래된 사무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그러나 잊고 싶었던 풍경이었다. 그리고 화면 한쪽에는, 2년 전 자신을 떠났던 강준혁의 젊은 모습이 찍힌 사진이 놓여 있었다.

    잠시 후, 화면 속에서 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변조된 목소리였지만, 선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어때, 선우야? 이 풍경, 낯설지 않지?”
    화면 속에서 준혁의 손이 사진을 어루만졌다.
    “내가 너한테 남긴 잿더미가 어땠는지, 이제 좀 알겠어?”
    선우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강… 강준혁? 설마, 네가?”
    “네가 나에게 모든 걸 빼앗았을 때, 난 생각했지. 복수는 차갑고 느리게, 그리고 완벽해야 한다고.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난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하나씩 빼앗아갔어. 네 명예, 네 재산, 네 주변 사람들… 그리고 네 자신.”

    화면 속 준혁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한마디 한마디는 칼날처럼 선우의 심장을 꿰뚫었다.
    “이제, 네가 그 잿더미 위에서 혼자 남겨지는 기분을 느껴볼 시간이야.”
    영상은 거기서 끝났다. 화면은 다시 검게 변했고, 선우는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한 사무실에 울렸다. 그는 마치 영혼을 잃은 사람처럼 몸을 떨었다. 준혁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이제 모든 것을 잃었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났다.

    그때, 경찰차가 그의 빌딩 아래로 들이닥치는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선우는 창밖을 내다봤다. 그 아래,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한 그림자가 희미하게 사라지는 것을 본 듯했다. 그것은 준혁이었다. 그의 복수는 완성되었다. 하지만 준혁의 얼굴에는 승리감 대신 텅 빈 허무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강준혁이 아니었다. 복수의 칼날은 결국 자신마저 베어버리는 법이었다. 그는 그림자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고 그날 밤, 박선우는 체포되었다. 그는 자신이 겪은 모든 비극이, 바로 그가 뿌린 씨앗에서 비롯된 것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린 깨달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