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심장은 오래전에 멈췄지만, 고층 아파트 단지는 여전히 굳건히 서 있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유리창들은 텅 빈 눈동자처럼 세상을 응시했다. 기준은 창가에 서서 익숙한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낡고 부서진 차들이 도로 위에 흉물처럼 박혀 있고, 간간이 보이는 회색빛 건물 잔해들이 인류의 마지막 흔적처럼 처연하게 서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찢어진 현수막 조각들이 펄럭이는 소리만이 망자들이 사는 도시에 미약한 활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기준은 스무 평 남짓한 자신의 아파트, 804호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믿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물과 식량은 간신히 버틸 만큼 남아있었고, 몇 차례의 탐색을 통해 얻은 태양광 충전기로 라디오와 손전등을 운용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 해가 뜨면 그는 먼저 물통을 확인하고, 낡은 캔을 따서 차가운 식사를 했다. 온기는 사치였다. 그는 살아있었고, 그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오늘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캔에 든 콩조림을 한 숟가락 입에 넣으려는 순간, 씽크대 쪽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기준은 고개를 돌렸다. 낡은 수전에서 물 한 방울이 떨어지며 스테인리스 씽크대를 때리는 소리였다. 물이 아까워 수도꼭지를 단단히 잠갔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덜 잠갔나? 그는 식사를 마저 하고 씽크대로 가 수도꼭지를 힘주어 돌렸다. 더 이상 물방울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래된 건물이라 파이프 소리가 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오후 내내 그는 거실 바닥에 앉아 닳아빠진 사전 한 권을 읽었다. 알파벳 순서대로 단어들을 훑으며 의미를 되새겼다. 세상이 멸망해도 언어는 남아있었다. 무의미한 일이었지만, 무언가에 집중하는 행위는 불안을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되었다. 책장을 넘기다 문득, 그의 시선이 맞은편 벽에 걸린 낡은 액자에 닿았다. 먼지가 앉아 희미했지만, 그가 직접 그린 풍경화였다. 멸망 전의 푸른 숲을 담은 그림. 그는 기억을 더듬어 그림을 그렸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액자가 미묘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어제 분명 똑바로 걸어두었다. 설마, 지진? 미세한 진동이라도 있었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액자를 다시 똑바로 맞추었다. 그의 손이 그림에 닿자마자, 어딘가에서 ‘툭’ 하고 작은 돌멩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발치였다. 놀라 발을 들자, 아무것도 없었다. 환청인가.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기준은 고개를 젓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도시를 집어삼키자, 아파트 안은 더욱 깊은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다. 기준은 태양광 충전기로 불을 밝힌 작은 램프 아래 앉아 라디오 주파수를 맞췄다. 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가끔 멀리 떨어진 생존자들의 메시지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주파수처럼 그의 마음도 공허했다.
그때였다. 침실 문이 ‘끼이익’ 하고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램프를 들고 천천히 침실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문이 절반쯤 열려 있었다. 분명 닫아두었을 텐데. 기준은 긴장한 채 문을 닫고 안쪽 걸쇠까지 잠갔다. 그리고 다시 거실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혹시 누군가 침입한 걸까? 건물 자체가 낡아서 그런가? 그는 애써 침착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갑자기,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던 낡은 나무 탁자가 ‘드드득’ 하고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며 몇 센티미터 움직였다. 기준은 숨을 헙 들이켰다. 환영이 아니었다. 분명히 움직였다. 그는 벌떡 일어나 손전등을 들고 탁자 주위를 비추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 바람이 불어 들어올 틈조차 없는데?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었다. 그는 자신이 미쳐가는 건 아닌지 의심했다. 이 고립된 공간에서 홀로 너무 오래 있었던 탓일까? 하지만 방금 그 소리와 움직임은 너무나 선명했다.
“누구야?” 기준은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을 애써 누르며 소리쳤다. “거기 누구 있어?!”
침묵. 도시의 침묵보다 더 깊고 음산한 침묵이 아파트 안에 감돌았다. 손전등 불빛이 공허한 벽을 더듬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주방 쪽에서 ‘와장창!’ 하고 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준은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그는 손전등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주방으로 향했다.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심장이 발끝으로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주방 바닥에는 그가 아껴 마시던 유리병에 담긴 정제수가 깨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물은 바닥에 흥건했고, 유리 파편들이 램프의 희미한 빛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그 파편들 사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가…”
기준은 얼어붙었다. 그의 심장이 끔찍하게 수축했다. 그의 눈앞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 목소리는 너무나 선명하고 차가웠다. 그는 이곳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아니, 이미 오래전부터 안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등골을 타고 오싹한 냉기가 흘러내렸다. 이 텅 빈 도시의 아파트에,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