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대체 역사물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천하제일 무도회: 운명의 결전]**

    **[에피소드 1: 흉성의 그림자]**

    **[장면 1]**

    **[배경]**
    황성 외곽, 거대한 원형 경기장 ‘천무각(天武閣)’. 수십만 명의 군중이 빼곡히 들어차, 웅장한 경기장을 압도한다. 하늘에는 붉은 노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고, 그 너머로 어딘가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흉성(凶星)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경기장 중앙의 결투장은 신성한 기운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을 내뿜는다. 대진표를 알리는 거대한 비석에는 아직 두 개의 이름만이 붉게 빛나며 운명을 기다리고 있다.

    **[연출/지문]**
    * **컷 1**: 천무각의 웅장한 전경. 석양의 붉은빛과 하늘 저편의 희미한 흉성이 극명하게 대비된다. 웅성거리는 군중들의 소리가 먹먹하게 들려온다.
    * **내레이션**: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불길한 예언… 흉성이 천하를 비추는 해에는, 혼돈의 그림자가 대륙을 덮칠 것이라 했다.”
    * **내레이션**: “그리고 그 혼돈을 잠재우고, 천하의 운명을 바로잡을 단 한 명의 무인이 나타나, ‘천하궁(天下弓)’의 수호자가 될 것이라고.”
    * **컷 2**: 경기장 중앙의 붉은 대진표 비석 클로즈업. 한자 ‘靑雲(청운)’과 ‘黑風(흑풍)’이 선명하게 새겨져, 섬뜩한 광채를 내뿜는다.
    * **내레이션**: “지금, 그 예언의 마지막 장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 **컷 3**: 황실 관람석. 위엄 있는 황금 의자에 황제(皇帝)가 앉아있다. 그의 옆에는 백발이 성성한 무림맹주(武林盟主)가 함께 앉아있다. 황제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고, 초조함이 역력하다.
    * **황제**: (나지막하게 한숨 쉬며) “예언의 때가… 기어이… 정말로 온 것인가.”
    * **무림맹주**: (굳건하고 단호한 목소리)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황제 폐하. 천하궁의 수호자는 반드시 이 대회를 통해 가려져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흔들리는 천하의 기운을 다잡을 수 있습니다.”

    * **컷 4**: 관중석. 열광과 긴장감이 뒤섞인 군중들의 얼굴. 한 노인이 젊은이의 어깨를 붙잡고 속삭인다.
    * **노인 A**: “저 흑풍이란 자는 대체… 어디서 나타난 걸까?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파죽지세로 여기까지 올라왔어.”
    * **젊은이 B**: “소문에 의하면, 그 어떤 문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은둔 고수라고 합니다. 어제의 준결승, 보셨습니까? 맹주의 수제자마저 단 한 합에 무너뜨렸다고 하더이다…”

    * **컷 5**: 경기장 한쪽 대기실. 청운(靑雲)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고 있다. 그의 검은 허리춤에 단단히 매여 있지만, 아직 뽑히지 않은 채 조용히 빛을 머금고 있다. 땀방울이 그의 턱선을 타고 흘러내린다.
    * **청운 (독백)**: ‘아버지… 약속하겠습니다. 반드시…’

    * **컷 6**: 청운의 회상 (몽타주).
    * **[장면 전환: 과거]**
    * **컷 6-1**: 어릴 적 청운이 숲속에서 아버지와 함께 검술을 수련하는 모습.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내린다.
    * **어린 청운**: “아버지,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더 강해지고 싶어요!”
    * **아버지**: (온화한 미소) “청운아… 힘이 강해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단다. 맹세를 잊지 마라. 약한 자들을 외면하지 않는, 진정한 무인의 길을… 그리고 이 천하궁의 비밀을… 잊지 마라…” (말을 잇지 못하고 거친 기침을 한다. 그의 얼굴은 병색이 완연하다.)
    * **[장면 전환: 현재]**

    * **컷 7**: 다시 현재. 청운의 눈이 번쩍 뜨인다. 흔들림 없는 결의에 찬 눈빛.
    * **청운 (독백)**: ‘이 대회의 승리만이… 병들어가는 세상을 구할 유일한 길이다. 아버지가 지키려 했던… 그 힘을… 내가 완성해야만 한다.’

    * **컷 8**: 경기장 다른 쪽 입구. 흑풍(黑風)이 모습을 드러낸다. 핏빛 도포 자락이 바람도 없는 곳에서 기이하게 휘날린다. 그의 얼굴은 깊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지만, 뿜어져 나오는 싸늘한 살기는 경기장 전체를 일순간 얼어붙게 한다. 관중들의 웅성거림이 점차 잦아들고, 고요에 가까운 침묵이 흐른다.
    * **흑풍**: (나직하게, 하지만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지는 듯한 목소리) “…시간 낭비군. 결론은 이미 정해졌다.”

    * **컷 9**: 사회자 단상.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진다.
    * **사회자**: (확성기처럼 울려 퍼지는 목소리) “자아! 긴장되는 순간! 다음! 천하제일 무도회의 마지막 관문! 영광스러운 결승전! 검산(劍山)의 고수! 청운!”
    * **컷 10**: 청운이 경기장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온다. 그의 등장에 억눌렸던 관중석에서 다시 뜨거운 환호성이 터진다. 그는 고개를 들어 경기장 중앙에서 기다리고 있는 흑풍을 정면으로 마주 본다.

    * **컷 11**: 사회자.
    * **사회자**: “그리고! 미지의 무인! 무림의 모든 전설을 압도한 절대 강자! 흑풍!”
    * **컷 12**: 청운과 흑풍이 경기장 중앙에서 서로를 노려본다. 흑풍의 그림자진 얼굴에서 싸늘한 비웃음 같은 것이 스치는 듯하다.
    * **흑풍**: (낮고 묵직한 목소리) “왔구나, 애송이. 네놈의 어설픈 정의감이 여기까지 끌고 온 모양이군. 가엾게도.”
    * **청운**: (정면으로 응시하며) “…세상을 병들게 하는 자는, 결코 천하궁의 수호자가 될 수 없습니다.”

    * **컷 13**: 흑풍이 헛웃음을 터뜨린다. 그 웃음은 차갑게 경기장을 맴돈다.
    * **흑풍**: “하! 순진한 소리. 이 세상은 원래부터 병들어 있었다. 나는… 그 병을 낫게 할 자가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세울 자다.”
    * **연출**: 흑풍의 주변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땅의 돌조각들이 미세하게 떨리며, 먼지가 솟구친다.

    * **컷 14**: 청운이 허리춤에 있던 검을 서서히 뽑아든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경기장의 침묵을 찢어내며 날카롭게 울려 퍼진다.
    * **청운**: “그 질서가 혼돈이라면… 막아서겠습니다. 목숨을 걸고.”

    * **컷 15**: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바람마저 숨을 죽인 듯, 일순간 정적이 흐른다.
    * **사회자**: (목소리에 힘을 주며, 침을 꿀꺽 삼킨 후) “자! 천하제일 무도회! 결승전! 시이작한다!”

    * **컷 16**: **파앗-!** (효과음) 흑풍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잔상이 남을 정도의 믿을 수 없는 속도.
    * **청운**: (눈을 크게 뜨며 독백) ‘빠르다…! 눈으로 쫓을 수 없어…!’

    * **컷 17**: 청운의 뒤에서 섬뜩한 기운이 느껴지고, 흑풍의 주먹이 번개처럼 날아든다.
    * **연출**: 주먹에서 검은 기운이 휘감겨 폭발적으로 뻗어 나온다. 땅의 흙먼지가 격렬하게 솟구친다.
    * **컷 18**: **콰앙-!** (효과음) 청운이 겨우 검으로 막아내지만, 엄청난 충격에 발이 땅에 깊숙이 박힌 채 수 미터 밀려난다. 경기장 바닥에 길고 깊은 긁힘 자국이 생긴다.

    * **컷 19**: 청운이 비틀거리며 자세를 잡는다. 검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놀라움이 뒤섞여 있다.
    * **청운 (독백)**: ‘이것이… 흑풍의 힘인가…! 초식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아…! 단순한 힘이 아니야!’

    * **컷 20**: 흑풍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없이 서 있다. 그의 그림자가 청운을 덮는다.
    * **흑풍**: “겨우 그 정도인가. 시시하군. 이것으로 천하궁의 수호자가 되겠다고? 어림없지.”

    * **컷 21**: 청운의 눈빛이 더욱 강렬해진다. 그의 검 끝에서 희미하지만 굳건한 푸른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 **청운**: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 **컷 22**: 청운이 땅을 박차고 솟아오르며 검을 휘두른다. 검 끝에서 푸른 기운이 거대한 검풍(劍風)을 형성하며 흑풍을 향해 쇄도한다. 마치 푸른 용이 포효하는 듯하다.
    * **휘이이잉-! 크아아앙-!** (효과음)

    * **컷 23**: 흑풍이 비웃듯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그의 앞에 검은 장벽이 마치 그림자처럼 형성되어 검풍을 막아낸다. 검풍은 장벽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지며 푸른 빛을 잃는다.
    * **파스스스…** (효과음)

    * **컷 24**: 청운이 허공에서 다시 몸을 틀어, 연속적인 검격을 날린다. 수십 개의 검광(劍光)이 번개처럼 쏟아지며 흑풍을 향해 날아간다.
    * **컷 25**: 흑풍은 여유로운 몸놀림으로 검광을 피하거나, 손바닥으로 가볍게 쳐내며 청운에게 접근한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그림자 같다. 그의 발밑에 닿는 모든 것들이 미세하게 갈라진다.

    * **컷 26**: 흑풍이 순식간에 청운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의 옆구리를 향해 손바닥을 내지른다. 검은 기운이 섬뜩하게 깃든 장력(掌力)이다.
    * **컷 27**: 청운이 간발의 차이로 몸을 비틀어 피하지만, 장력의 여파에 휩쓸려 옆으로 크게 날아간다. 그의 얼굴에 고통이 스친다.
    * **크아악!** (청운의 고통스러운 비명)

    * **컷 28**: 청운이 경기장 벽에 강하게 부딪힌 후, 바닥에 쓰러진다. 벽에 금이 가고, 그의 입가에 핏물이 흐른다.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내며 몸을 지탱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그의 검은 멀리 떨어져 나가 땅에 박혀 있다.

    * **컷 29**: 흑풍이 느릿하게 청운에게 다가간다. 그의 그림자가 고통받는 청운을 완전히 덮는다.
    * **흑풍**: “재미없는 싸움은 끝내주마. 천하궁의 힘은… 네놈 같은 어설픈 자에게 허락될 리 없다. 무지한 자여.”

    * **컷 30**: 흑풍이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는 듯, 손바닥에 검은 기운을 엄청나게 모은다. 그 기운은 주변의 공기마저 압축시키는 듯하다. 관중석은 침묵에 잠긴 채,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 **컷 31**: 청운이 쓰러진 채, 간신히 눈을 들어 흑풍을 노려본다. 그의 눈동자에서 희미한 푸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의 검은 땅에 박혀 있지만, 여전히 푸른 빛을 발하고 있다.
    * **청운 (독백)**: ‘포기할 수 없어…! 아버지… 천하궁…! 이대로… 끝낼 순…!’

    * **컷 32**: **파앗-! 우우웅-!** (효과음) 청운의 몸에서 폭발적인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그를 감싸고 있던 먼지들을 격렬하게 날려 버린다. 경기장 바닥에 박혀 있던 그의 검이, 마치 스스로 움직이는 듯, 강렬한 푸른 빛을 내뿜으며 그의 손으로 솟아오른다.

    * **컷 33**: 흑풍이 놀란 듯 잠시 멈칫한다. 그의 그림자진 얼굴에서 당혹감이 스친다.
    * **흑풍**: “…무슨 수작이지? 이런 기운은…!”

    * **컷 34**: 청운이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의 눈빛은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마치 다른 존재가 강림한 듯, 형형하게 빛난다. 그의 주변을 감도는 푸른 기운은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격렬하게 휘몰아친다. 그의 상처가 푸른 기운에 감싸여 희미하게 아물기 시작한다.
    * **청운**: (고통 속에서도 단호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 “이것이… 제가 지켜야 할… 전부입니다…! 천하궁의 맹세…!”

    * **컷 35**: 청운이 검을 치켜든다. 푸른 기운이 검을 따라 하늘로 솟구치며, 경기장 지붕을 뚫고 올라가는 듯한 거대한 검의 형상을 만들어낸다. 흉성의 불길한 그림자마저 잠식하려는 듯, 푸른 검광이 하늘을 가른다.

    * **컷 36**: 경악한 표정의 흑풍. 그리고 숨죽인 채 이 광경을 지켜보는 관중들과 황제, 무림맹주. 황제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 **무림맹주**: (떨리는 목소리, 입을 가리며) “저것은…! 천하궁의 진정한 힘…?! 설마…! 예언 속의 그 모습이…!”
    * **컷 37**: 청운의 입가에 여전히 피가 흐르지만, 그의 표정은 비장하다. 푸른 검기가 정점에 달하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타오른다.

    * **컷 38**: (에피소드 끝)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 먼지가 춤추는 폐허 속에서 썩어가는 시체 냄새가 진동했다. 차가운 바람이 부패한 살점을 스치고 지나가며, 역겨운 비린내를 코끝으로 실어 날랐다. 현우는 한쪽 팔을 부여잡고 신음했다. 찢겨진 살점 사이로 흰 뼈가 섬뜩하게 드러나 있었다. 온몸의 피가 바닥에 흥건히 고여 끈적거리는 감각이 오소소 소름 돋게 했다. 망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준호! 이 개자식아!”

    목이 터져라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었다. 무너진 건물들 사이로 사라진 그림자. 현우는 그 그림자가 자신에게 총구를 겨누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했다. 차가운 총열의 감촉, 준호의 눈에 스치던 찰나의 망설임, 그리고 주저 없이 방아쇠를 당기던 악마 같은 얼굴.

    그날, 우리는 ‘구원자의 은신처’라는 소문만 무성한 지하 벙커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놈들이 퍼뜨린 바이러스로 세상이 지옥으로 변한 지 어언 5년. 둘이서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버텨온 시간이었다. 식량을 나눠 먹고, 서로의 등을 지켜주며, 언젠가 인간다운 삶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 굳건한 믿음의 한가운데, 언제나 준호가 있었다. 내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은신처’ 입구에 다다랐을 때, 상황은 달라졌다. 좁은 통로,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천장, 그리고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사람들의 목소리.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바로 그 순간, 준호는 현우를 밀쳤다. 정확히 말하면, 무너지는 잔해 쪽으로 힘껏 밀쳤다.

    콰아앙!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현우의 팔을 강타했다.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 살점이 찢기는 끔찍한 고통. 눈앞이 하얘졌다. 그리고 준호가 총을 꺼내는 것을 보았다. 녀석의 눈동자에 번지던 이기심, 그리고 결심.

    “현우야, 미안하다. 여긴… 한 사람만 갈 수 있을 것 같아.”

    헛소리!
    “준호야, 우리가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너까지 갈 수 있어! 우리 둘 다!”

    하지만 준호는 들은 척도 안 했다. 오히려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총을 겨눴다. 그 차가운 총구가 내 이마를 겨냥했다.
    “살아남아라, 현우. 아니, 죽어라. 내가 너의 몫까지 살게.”
    탕! 총성이 울리고, 균형을 잃은 현우는 잔해가 만든 거대한 틈새 아래로 떨어졌다. 뼈와 살이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의 눈은 준호를 쫓았다. 멀어지는 친구의 등. 그는 그 순간 깨달았다. 친구는 없었다. 오직 배신자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

    그날 이후 현우는 죽음의 문턱에서 기어 나왔다. 부러진 팔은 제대로 붙지 않았지만, 통증은 그의 감각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부러진 뼈가 어긋나 굳어진 팔은 쓸모 없었지만, 그 고통은 현우를 살아있게 하는 지독한 주문이었다. 폐허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짐승이 되었다. 굶주림은 인간의 존엄을 갉아먹었고, 추위와 질병은 생존을 위협했다. 하지만 현우를 살게 한 것은 오직 하나, 복수심이었다.

    ‘준호, 반드시 찾아내서 죽여 버릴 거야.’

    그는 이를 악물었다. 한 손으로는 무너진 건물들을 오르내리며 식량을 구하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낡은 총을 닦고 또 닦았다. 총을 쥐지 못하는 왼쪽 팔은 칼날처럼 날카로운 단검을 휘두르는 데 익숙해졌다. 물에 젖은 탄약들을 일일이 말리고, 고장 난 부품들을 주워 맞춰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었다. 그는 더 이상 약한 현우가 아니었다. 핏빛 증오로 뒤덮인 생존자였다.

    몇 달, 아니 몇 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계절이 바뀌고, 폐허 위로 기괴한 풀들이 자라났다.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도시는 거대한 녹색의 무덤이 되어갔다. 현우는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약탈자 무리들을 피하고, 변이된 괴물들을 사냥했다. 가끔씩 만나는 생존자들에게서 준호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구원자의 은신처’에 들어간 남자, 그곳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야기. 소문은 점차 구체적으로 변해갔다. ‘총괄 책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 ‘지하 도시의 지배자’라는 소문까지.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 준호는 살아 있었다. 그것도 잘 살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현우를 버리고. 역겨웠다.

    ***

    준호의 발자취를 쫓는 여정은 험난했다. ‘구원자의 은신처’는 단순한 벙커가 아니었다. 수십 개의 지하 통로와 방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지하 도시였다. 입구마다 삼엄한 경비가 있었고, 내부 구조는 미로처럼 복잡했다. 마치 이곳은 세상의 마지막 낙원인 양, 단단하게 봉쇄되어 있었다.

    하지만 현우는 포기하지 않았다. 폐허 속에서 갈고닦은 생존 본능과 그림자처럼 숨어드는 기술로 그는 경비망을 뚫었다. 좁은 환풍구를 기어가고, 악취 나는 버려진 하수구를 헤치며 지하 도시 깊숙이 침투했다. 며칠 밤낮을 그림자처럼 숨어 이동하며, 마침내, 현우는 준호를 찾았다.

    ‘은신처’의 가장 크고 화려한 식당. 테이블에는 육즙 가득한 고기와 신선한 과일, 맑은 물이 담긴 잔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치 바이러스가 창궐하기 전의 세상처럼 풍요롭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그 중심에 준호가 있었다. 말끔한 옷차림, 여유로운 미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현우는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그의 손에는 직접 개조한 낡은 소총이 들려 있었다. 녹슨 총신이지만, 내부 부품은 현우의 집념으로 새것처럼 관리되어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표를 꿰뚫을 것이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분노, 증오, 그리고 약간의 허탈감. 저놈이, 내가 그토록 증오하던 준호란 말인가. 너무나도 편안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저 모습이.

    현우는 그림자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발걸음은 소리 없이, 하지만 묵직하게 바닥을 울렸다.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현우에게 꽂혔다. 폐허에서 막 기어 나온 듯한 넝마 같은 옷, 피로 얼룩진 얼굴, 그리고 살아있는 지옥을 겪어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잔혹한 눈빛.

    준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현우를 향하는 순간, 그 안에 담겨 있던 여유가 서서히, 처참하게 사라졌다. 경악, 공포, 그리고 부정. 그 모든 감정이 준호의 얼굴에 폭풍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현우…?”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손에 든 와인잔이 와들와들 흔들렸다.

    “오랜만이네, 준호.” 현우는 싸늘하게 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칼날처럼 식당의 공기를 갈랐다. “내가 살아있어서 많이 놀랐나 보지?”

    준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뒤에 있던 경비들이 총을 겨누려 했다. 하지만 현우의 총구는 이미 준호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었다. 단 한 발, 그 한 발이면 이 모든 지긋지긋한 복수극이 끝날 터였다.

    “다들 멈춰! 가만히 있어!” 준호가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여유롭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비명에 가까웠다. “현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가? 개소리 하지 마. 넌 날 버리고 혼자 도망쳤잖아. 천장이 무너지는 곳으로 날 밀치고, 총까지 쐈지. 내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래서 이렇게 좋은 곳에서 편하게 살고 있었나?” 현우의 목소리는 칼날 같았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준호의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그건… 그땐 어쩔 수 없었어! 상황이 너무 급박했다고! 살아남으려면…!” 준호가 변명하려 했다. 그의 얼굴에는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살아남아? 그래, 너는 살아남았지.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기어 나왔어. 썩어가는 시체 더미 속에서, 피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널 찾아내기 위해서. 이 모든 지옥 속에서 내가 버틴 유일한 이유가 너의 숨통을 끊는 거였어.”

    “현우야, 제발… 우리가 친구였잖아!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어! 내가 너한테 다 나눠줄게, 이 은신처의 모든 것을!” 준호가 애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과거의 정이 아닌, 현재의 비굴함과 목숨을 구걸하는 추악함만 묻어났다.

    “친구? 하… 웃기지도 않네. 너는 내 가장 친한 친구였어. 그래서 너에게 배신당했을 때, 세상이 두 번 무너지는 기분이었지. 근데 이제 와서 친구? 늦었어, 준호.”

    현우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댔다. 준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뒤로 주춤거리며 테이블 위로 놓인 음식들을 엎었다. 와인잔이 깨지며 붉은 액체가 바닥에 쏟아졌다.

    “안 돼! 쏘지 마! 현우!”

    탕!

    총성이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준호의 몸이 굳어졌다. 그의 가슴팍에 붉은 꽃이 피어났다. 눈을 크게 뜬 채, 준호는 현우를 응시했다. 그 눈동자 속에서 희미하게 후회, 그리고 체념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털썩. 준호의 몸이 쓰러졌다. 그의 피가 화려한 식탁보 위로 번져 나갔다. 사람들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에 질려 현우와 피 흘리는 준호의 시체를 번갈아 보았다.

    현우는 쓰러진 준호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복수심은 사라졌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돌덩이가 사라진 것처럼 허전했다. 텅 빈 공허함. 그가 이토록 간절히 원했던 순간인데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단지, 시원한 바람이 지나간 자리처럼 마음속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그는 총을 내리고 식당을 나섰다. 경비들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현우는 어두운 통로를 따라 걸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그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폐허,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신의 모습만이 보였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바깥 세상은 여전히 지옥이었다. 하지만 이제 현우는 혼자였다. 진정으로 혼자였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완벽한 밀실의 얼룩

    “최 순경, 아직도 보고서를 붙잡고 있나? 세상의 모든 사건이 네가 퇴근해야 발생한다더냐?”

    시계는 새벽 두 시를 훌쩍 넘긴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텅 빈 사무실, 탁상 스탠드의 외로운 불빛 아래 최윤서 순경은 눈을 비비며 컴퓨터 화면을 노려봤다. 일주일째 미제인 자전거 도난 사건 보고서는 대체 왜 이리도 골치가 아픈지. 키보드 위를 헤매던 손가락이 멈칫, 저 멀리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 시간에 울리는 전화는, 십중팔구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최 순경, 급하게 출동할 곳이 생겼다. 지체 말고 준비해.”

    수화기 너머 김 팀장님의 목소리에는 피곤함과 함께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윤서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이런 새벽 호출은 딱 두 가지 의미였다. 엄청난 일이 터졌거나, 아니면…

    “…혹시 그분도… 같이 가야 합니까?”

    윤서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김 팀장님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 시간에 그 친구 말고 누가 또 이런 사건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망할, 대체 밀실 살인이라니…”

    윤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역시나.

    ***

    고요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순찰차가 익숙한 듯 낡은 주택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으슥한 담벼락 너머로 드문드문 불을 밝힌 집들이 보였다. 윤서는 운전대를 잡은 채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힐끗 바라봤다.

    한지우. 20대 후반, 탐정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평범한 차림새의 남자. 후드 티셔츠에 편안한 면바지 차림. 차창 밖으로 스치는 풍경들을 마치 그림을 감상하듯 느릿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맑은 눈빛은 새벽의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별처럼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원룸 책상에 앉아 돋보기로 오래된 우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말에 윤서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잠도 안 주무셨어요?”

    윤서의 물음에 지우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 대신 묘한 호기심이 감돌았다.

    “음, 우표는 과거의 한 조각을 품고 있죠. 그 안에서 사라진 시간의 조각들을 찾는 건 흥미로운 일이에요. 하지만 지금은…”

    그가 시선을 돌려 윤서를 마주 봤다. 햇살처럼 따뜻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번졌다.

    “…더 거대한 퍼즐이 저를 기다리고 있겠죠?”

    윤서는 괜히 목덜미를 문질렀다. 거대한 퍼즐이라니. 남의 죽음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지우밖에 없을 것이다. 그에게 사건은 언제나 풀기 위한 흥미로운 수수께끼였고, 자신은 그 수수께끼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조수이자 보호자였다. 비공식적인.

    ***

    사건 현장은 한적한 주택가 가장자리에 위치한 허름한 단독주택이었다. 낡은 대문 앞에는 이미 노란 폴리스라인이 쳐져 있었고, 몇몇 경찰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사이렌 소리도 없이 조용히 도착한 순찰차에서 내리자마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옷깃을 파고들었다.

    “최 순경! 그리고… 한 씨.”

    김 팀장님이 한달음에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더 선명하게 파여 있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팀장님. 좋은 일은 아니시겠죠.” 지우가 여전히 평온한 미소를 띠며 인사했다.

    김 팀장님은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좋은 일은커녕, 최악의 시나리오야. 따라와 봐.”

    그들은 현관을 지나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을 밟았다. 오래된 나무의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습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집 안은 겉모습처럼 낡고 어두웠다. 좁은 복도를 지나자 이내 복잡한 장비와 함께 몇몇 수사관들이 서성이는 방이 나타났다.

    “피해자는 고(故) 박정호 씨. 70대 남성. 은퇴한 역사학자로, 몇 년 전부터 이 집에서 홀로 지냈다고 합니다. 외부와의 접촉이 거의 없었고, 최근까지도 연구에 몰두했다고 해요.”

    김 팀장님의 설명에 윤서는 방 안을 둘러봤다. 서재였다. 벽면 가득 빼곡히 꽂힌 책들과 고풍스러운 가구들, 그리고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커다란 원목 책상. 그 책상 위에, 쓰러져 있는 남자가 보였다.

    “사인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흉기에 의한 살해로 추정됩니다.” 김 팀장님은 침대 옆 바닥에 놓인 작은 은장도를 가리켰다. “가장 큰 문제는… 이 방이 완벽한 밀실이라는 거야.”

    윤서는 주변을 살폈다. 묵직한 원목 방문은 안쪽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고, 열쇠는 책상 옆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창문은 두 겹으로 되어 있었는데, 바깥쪽 창문은 쇠창살로 막혀 있었고 안쪽 창문은 역시 안에서 걸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유리창은 물론 벽 어디에도 외부 침입의 흔적은 없었다.

    “시체는 오늘 아침, 정기적으로 식사를 가져다주던 요양 보호사가 발견했습니다. 여러 차례 인기척이 없어 이상하게 여겨, 열쇠공을 불러 문을 따고 들어왔다고 해요. 문이 열리자마자 요양 보호사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를 듣고 옆집 주민이 신고했고요.”

    김 팀장님의 설명에 윤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완벽한 밀실. 과연 이 밀실을 어떻게 깨뜨릴 수 있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와중에도, 그녀는 문득 옆에 선 지우를 바라봤다.

    지우는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그는 방 한가운데 서서 시체를 보는 대신, 천천히 방의 구석구석을 훑어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책장 위를 쓸고, 낡은 커튼을 응시하고, 먼지 하나 없는 듯 보이는 마룻바닥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표정은 진지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평온했다. 마치 잔잔한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 하나가 만들어낼 파문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한 씨, 어떻습니까? 뭔가 보이는 게 있습니까?” 김 팀장님이 초조하게 물었다.

    지우는 고개를 살짝 젓더니, 책상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쓰러진 시체 옆 바닥에 놓인 열쇠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그것이 이 모든 수수께끼의 핵심이라도 되는 양.

    “음…”

    그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윤서는 숨을 죽였다. 지우의 이런 작은 반응 하나하나가 언제나 큰 발견으로 이어지곤 했으니까.

    “열쇠는 바닥에 떨어져 있군요.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지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외부 침입 흔적은 없고, 창문도 굳게 잠겨 있었고요.”

    “그렇습니다. 그게 문제죠.” 김 팀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어떻게 살인범이 들어와서 살인을 저지르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우는 시체 옆에 떨어진 은장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짧고 날카로운 칼날에 희미한 핏자국이 묻어 있었다. 그는 칼을 직접 만지지 않고,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그리고는 다시 열쇠, 그리고 방문을 차례로 바라봤다.

    “이 방은… 정말 완벽하게 잠겨 있었을까요?”

    지우의 의문 가득한 목소리가 적막한 서재에 낮게 울려 퍼졌다. 윤서는 그 말이 마치 방 안의 모든 공기를 진동시키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완벽한 밀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었던 그 공간에서, 지우는 이미 자신들만 모르는 작은 틈을 발견한 듯 보였다.

    그의 시선이 문득 책상 위, 쓰러진 박정호 씨의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곳에 놓인 낡은 펜 하나에 머물렀다. 그 펜은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다른 물건들과 달리, 책상의 가장자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사용하다가 놓친 것처럼.

    윤서는 다시 펜을 봤다. 평범한 잉크 펜. 하지만 지우의 눈은 그 평범함 속에서 뭔가 비범한 것을 읽어내는 듯했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슬픔이나 분노가 아닌, 순수한 지적 유희에서 오는 즐거움의 미소였다.

    “이건 좀 재미있네요.” 지우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퍼즐의 조각이 하나씩 맞춰지는 기분이에요.”

    윤서는 혼란스러웠다. 재미있다니. 하지만 동시에 그녀의 심장은 묘한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지우는 또 어떤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이 완벽한 밀실의 트릭을 깨부술까. 그녀는 이미 그의 등 뒤에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해답이 도출되리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지우의 존재는 마치 한 줄기 따스한 햇살처럼 느껴졌다. 어둡고 복잡한 사건 현장을, 그는 언제나 명료하고 아름다운 하나의 이야기로 바꿔놓곤 했다. 이 잔혹한 밀실 살인 사건 또한 그의 손에서, 결국엔 납득할 수 있는 한 편의 드라마로 재탄생할 터였다.

    그의 눈은 이미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있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회색빛 석양의 마지막 조각이 가상현실 게임, <아르카나의 꿈>의 대도시 ‘에테르나’를 뒤덮을 무렵이었다. 도시 중앙에 우뚝 솟은 연금술사 협회의 탑, 그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삼엄하게 경비되는 ‘아이단 경의 마나 공방’에서 끔찍한 비극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에테르나 전역을 뒤흔들었다.

    류신은 늘 그랬듯이 침착했다. 광장에 모여든 흥분한 시민들의 웅성거림도, 쉿쉿거리는 마나 증기 기관 소리도 그의 귀에는 그저 배경음악일 뿐이었다. 그는 푸른색 연금술사 로브를 입은 리엘, 아이단 경의 수석 제자가 공방 입구에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모습을 지나쳤다. 옆에서는 연금술사 협회 경비대장 그라함이 거대한 강철 건틀릿을 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류신 님, 오셨군요.” 그라함은 류신을 보자마자 안도감과 동시에 절망감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이건… 이건 밀실 살인입니다. 완벽한 밀실이에요.”

    류신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들었습니다. 아이단 경의 공방은 외부인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라함이 공방 문을 가리켰다. “보십시오. 이 문은 저희가 특수 마나 잠금 해제 기술로 겨우 열었습니다.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마법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그 어떤 외부 침입의 흔적도 없어요. 심지어 공방 외벽에 설치된 감지 마법진조차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리엘이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흐느꼈다. “아이단 경은… 그는 제게 아버지와 같은 분이셨어요.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새로운 마나 증폭 장치 개발에 몰두해 계셨죠. 아침에 찾아왔을 땐 아무런 대답도 없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경비대장님께 연락드렸는데….”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류신은 리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뒤, 공방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묵직한 마나의 잔향이 공기 중에 가득했다. 원형의 공방 내부에는 복잡한 연금술 장비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중앙에는 마나 코어가 박힌 실험대가 있었고, 그 옆에 아이단 경이 쓰러져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가슴팍에는 작은 얼음 조각이 박혀 있었다. 날카롭고 정교하게, 마치 레이저로 꿰뚫은 듯한 상처였다.

    “사인은 명확합니다.” 그라함이 따라 들어오며 말했다. “순수한 마나 얼음으로 만들어진 단검 같은 것에 찔린 상처입니다. 하지만 범행 도구는 어디에도 없어요. 그리고… 이 방은 절대적인 밀실입니다.”

    류신은 시신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시신 주변의 바닥에는 어떤 저항의 흔적도 없었다. 주변의 연금술 장비들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아이단 경의 손가락을 살폈다. 그의 손에는 마나 증폭 장치의 설계도가 쥐어져 있었다. 익숙한 설계도였다. 아이단 경이 몇 달째 공을 들이던 프로젝트였다.

    “마지막까지 연구를 하고 계셨군요.” 류신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는 천천히 일어나 방 전체를 훑었다. 둥근 벽면을 따라 빼곡히 늘어선 마나 증류탑, 증폭 장치, 냉각기와 시약 병들. 모두 정돈된 모습이었다. 외부와 통하는 창문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구조였다.

    “범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라함이 답답한 듯 벽을 쳤다. “마법사들은 순간이동으로 침입할 수 없도록 이 공방 전체에 고위 마법 방어막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탐지 마법진도 반응이 없었고, 침입자의 마나 잔향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외부와 통하는 유일한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우리는 부수다시피 해서 들어왔죠. 이건… 불가능합니다.”

    류신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공방의 천장은 돔 형태로 되어 있었다. 류신의 시선이 어느 한 지점에 멈췄다. 돔의 가장 높은 곳, 마나 코어가 박힌 실험대 바로 위쪽이었다. 아주 희미하게, 마치 서리가 내렸다 녹은 듯한, 육안으로는 거의 식별하기 어려운 얼룩이 보였다.

    “아이단 경은 최근 어떤 실험에 몰두하고 계셨습니까?” 류신이 리엘에게 물었다.

    리엘은 흐느끼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나 증폭 장치요… 공간 마나 압축 순환 장치라고, 기존의 마나 흐름을 압축해서 강력한 힘을 만들어내는 장치였어요. 아직 시험 단계였지만, 정말 대단한 발명이라고 흥분하셨어요.”

    “공간 마나 압축 순환 장치….” 류신은 그 이름을 되뇌었다. “그 장치는 이 공방의 마나 순환 시스템과 직접 연결되어 있었나요?”

    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치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공방의 핵심 마나 정제 시스템과 연결해서 사용하셨어요. 초기에는 마나 압축 과정에서 에너지가 불안정해져서… 과부하를 막기 위한 비상 배출구가 필요하다고 하셨죠.”

    류신은 다시 천장의 얼룩을 응시했다. “비상 배출구 말입니까? 그것은 어디에 있었죠?”

    리엘은 잠시 생각하더니 천장을 가리켰다. “저… 저기 돔의 가장 높은 부분에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외부 마법으로 완벽하게 봉인되어 있어서 보이지 않아요. 하지만 장치가 과부하될 것 같으면… 자동으로 잠시 열렸다가 닫히도록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류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이단 경이 죽기 직전, 그 장치는 과부하 상태였습니까?”

    그라함이 자료 패드를 열어 마나 흐름 기록을 확인했다. “마나 흐름 기록에 따르면… 아이단 경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각, 정확히 3분 17초 동안 이 공방의 마나 시스템에서 순간적인 압력 상승과 함께 미미한 에너지 유출이 감지되었습니다. 저희는 그것을 아이단 경의 실험 과정 중 흔히 발생하는 현상으로 보고 간과했습니다.”

    “간과했군요.” 류신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이 바로 범인이 공방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아이단 경을 살해할 수 있었던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류신에게 집중되었다. 리엘은 눈물 어린 눈으로, 그라함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 방은 완벽한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류신은 천장의 희미한 얼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적어도, 아이단 경이 사망하던 그 순간만은 말이죠. 아이단 경은 새로운 마나 증폭 장치 실험 중이셨고, 그 과정에서 ‘공간 마나 압축 순환 장치’의 과부하가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천장에 있던 비상 배출구가 3분 17초 동안 열렸습니다.”

    그라함이 숨을 들이켰다. “설마… 그 작은 틈으로?”

    “네.” 류신은 단호하게 말했다. “범인은 아이단 경의 실험 패턴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비상 배출구가 열리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외부에서 정교하게 조준된 마나 얼음 투사체를 발사한 겁니다. 시신에 박힌 얼음 조각은 단순한 단검이 아니라, 강력하게 압축된 마나 얼음 송곳이었을 겁니다. 먼 거리에서도 정확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설계된 마법 무기였겠죠. 그리고 그 마나 송곳이 아이단 경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습니다.”

    류신은 천장의 얼룩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저 희미한 얼룩은 마나 얼음 송곳이 통과하며 남긴 미세한 마나 반응입니다. 비상 배출구가 열렸을 때, 주변의 냉각 마법이 일시적으로 교란되며 생긴 흔적이죠. 이 방에는 침입자의 발자국도, 저항의 흔적도, 심지어 범행 도구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범인은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고, 범행 도구는 다시 회수되었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돼…” 리엘이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그 비상 배출구는 손가락 하나 들어갈까 말까 한 작은 틈이었는데…”

    “충분했습니다.” 류신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히려 완벽한 범행을 위한 필수 조건이었죠. 고밀도로 압축된 마나 투사체는 아주 작은 틈만 있다면 충분히 발사될 수 있습니다. 범인은 이 공방의 구조와 아이단 경의 실험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는 자일 겁니다. 외부 마법 방어막을 의식해 직접 침입하는 대신,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허점을 이용한 것이죠.”

    그라함은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이 탑 주변에 대기하고 있었으며, 아이단 경의 실험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었단 말인가?”

    류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단 경의 실험은 종종 강력한 마나 파동을 일으켰을 겁니다. 외부에서도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을지도 모르죠. 혹은….”

    류신은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리엘을 지나, 공방 한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는 또 다른 인물에게 향했다. 그는 연금술사 협회의 고위 연구원인 ‘카인’이었다. 아이단 경과는 오랜 라이벌 관계에 있었다. 카인의 얼굴에는 경악과 함께 미묘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혹은, 아이단 경의 실험에 대한 내부 정보를 알고 있었던 자였을 수도 있습니다.” 류신은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밀실은 완벽하게 깨졌다. 그러나 그 뒤에 숨겨진 그림자는 아직 걷히지 않았다. 류신의 눈빛은 이미 다음 퍼즐 조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 던전 탐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심연의 그림자**

    축축한 공기, 폐허에서 풍기는 곰팡이 냄새, 그리고 발아래 부스러지는 돌가루 소리만이 세 명의 발걸음을 알렸다. 진우는 등불이 비추는 좁은 통로를 가늘게 뜨고 응시했다. 벽면에 새겨진 오래된 문양들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어 있었지만, 그 속에 담긴 절망과 공포만큼은 여전히 섬뜩하게 남아있었다.

    “젠장, 여기가 맞긴 한 거야? 벌써 엿새째야, 진우.”

    준의 묵직한 목소리가 뒤에서 울렸다. 커다란 양손검을 짊어진 그의 어깨는 지쳐 있었지만, 불평 뒤에는 언제나 그랬듯 굳건한 신뢰가 묻어났다. 진우는 고개를 젓는 대신 등불을 더 높이 들었다.

    “그래, 맞아.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비밀의 나락’ 가장 깊은 곳에 있다고 했어. 제국 놈들이 가장 눈독 들이는, 그래서 가장 철저하게 감추려 했던 것.”

    “눈독 들이다 못해 아예 묻어버리려 했겠지.”

    혜진의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녀는 날렵한 활을 든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날카로운 시선은 희미한 그림자 하나 놓치지 않는 듯했다. 제국 병사들의 수탈로 가족 농장을 잃은 혜진에게 ‘제국’이란 단어는 언제나 독을 품고 있었다. 진우도 마찬가지였다. 광산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다 결국 목숨을 잃은 그의 부모님, 그리고 숱하게 착취당한 고향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찾는 것은 단순한 보물이 아니었다. 제국의 황금 마차를 훔쳐도, 황궁의 보물 창고를 털어도 근본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제국의 심장을 꿰뚫을 수 있는 무언가였다. 전설처럼 전해지던 ‘고대 왕가의 인장’. 제국이 그들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지워버린 역사의 진실이 담겨 있다는 물건이었다.

    “진우! 발밑 조심해!”

    혜진의 다급한 외침에 진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그 순간,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간 것은 거대한 바위 파편이었다. 쩌저적, 하는 소리와 함께 천장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충격음과 함께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이런 빌어먹을!”

    준이 양손검을 뽑아 들었다. 묵직한 검신이 희미한 등불 빛을 반사했다. 먼지 너머에서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단순한 낙석이 아니었다.

    “제국 골렘이야! 저 덩치 좀 봐!” 혜진이 활시위를 당기며 외쳤다.

    먼지가 걷히자 드러난 것은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두 기의 골렘이었다. 제국 마법사들이 던전의 암석에 마법을 부여해 만들어낸 수호병. 이토록 깊은 곳에까지 제국의 손길이 닿아있다는 사실에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밀을 감추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시켰던가.

    쿠웅!

    골렘 하나가 거대한 팔을 휘둘러 통로를 막아섰다. 흙먼지가 다시 피어오르고, 진우 일행의 퇴로는 순식간에 차단되었다.

    “포위당했군! 준, 정면을 막아! 혜진, 약점을 찾아!” 진우가 빠르게 지시했다. 그의 손에는 이미 낡았지만 날카로운 쌍단도가 쥐어져 있었다.

    준이 우렁찬 기합과 함께 골렘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양손검이 골렘의 단단한 어깨를 강타했지만, 묵직한 충격음만 울릴 뿐 이렇다 할 상처를 주지는 못했다. 골렘의 움직임은 느렸지만, 그 위력은 가공할 만했다.

    “젠장, 너무 단단해! 놈들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아!”

    그때, 혜진의 화살이 맹렬하게 날아갔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첫 번째 화살은 골렘의 목덜미를 스쳤고, 두 번째 화살은 다리 관절 부분을 정확히 노렸다. 그러나 그마저도 골렘의 표면에 작은 흠집만을 남길 뿐이었다.

    “진우, 놈들의 핵심은 핵이야! 제국 마법사들은 마력 핵을 이용해 골렘을 움직여! 대개 눈이나 가슴팍이지!” 혜진이 급박하게 외쳤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몸놀림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골렘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육중한 팔이 휘둘러지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마치 거대한 바위 덩어리 사이를 오가는 작은 바람 같았다. 그의 목표는 골렘의 눈이었다. 제국 놈들이 억지로 박아 넣었을 마력 핵.

    “여기다, 이 빌어먹을 돌덩어리!”

    진우의 쌍단도가 번개처럼 번쩍였다. 한쪽 단도가 골렘의 움직임을 유도하는 미끼가 되는 동시에, 다른 한쪽 단도가 골렘의 눈에 박힌 붉은 수정 핵을 정확히 노렸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수정 핵에 금이 가고, 골렘의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렸다.

    “하나 처리했다!” 혜진이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이번에는 다른 골렘의 심장 부분을 노렸다.

    준은 두 번째 골렘의 공격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묵직한 충격이 그의 전신을 흔들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서둘러, 혜진! 이 자식 힘이 장난이 아니야!”

    혜진의 활이 쉬지 않고 날아갔다. 그녀의 화살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골렘의 약점을 찾아 파고들었다. 진우 역시 첫 번째 골렘이 쓰러지자마자, 날카로운 몸놀림으로 두 번째 골렘의 뒤를 잡았다. 그의 단도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하며 골렘의 마력 핵을 노렸다.

    두 기의 골렘이 연이어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암석 덩어리들이 굉음을 내며 바닥에 박혔고, 사방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세 사람은 숨을 헐떡이며 잠시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겨우… 살았다.” 준이 양손검을 지팡이 삼아 겨우 몸을 지탱했다.

    “더 가면 더한 놈들이 나올 거야. 각오 단단히 해.” 혜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진우는 쓰러진 골렘들이 막고 있던 통로 너머를 응시했다. 무너진 바위 더미 뒤로 희미하게 빛나는 공간이 보였다. 마치 이곳에 숨겨진 비밀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봤어? 저 빛.”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예상치 못한 풍경이었다. 통로 끝에는 고대 신전처럼 보이는 웅장한 공간이 있었다. 벽과 천장은 정교한 조각들로 가득했고, 그 중앙에는 낡고 거대한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마치 주변의 어둠을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 기운을 뿜어내는 조그마한 물체가 놓여 있었다.

    “저게… 설마.”

    진우는 조심스럽게 제단으로 다가갔다. 검은 물체는 마치 검은 옥으로 만들어진 듯,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인장이었다. 닳고 닳아 문양은 희미했지만, 그 속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범상치 않았다. 그것은 분명, 전설로만 전해지던 고대 왕가의 인장이었다.

    진우가 떨리는 손으로 인장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촉감과 동시에, 그의 눈앞에 섬광이 터졌다. 귓가에는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고대 왕가의 울부짖음과 제국의 잔혹한 찬탈이 파편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거짓말 위에 세워진 제국의 실체가, 그리고 인장이 가진 진정한 의미가 진우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인장이 아니었다. 진실을 담은 기록이자, 잃어버린 왕가의 유일한 계승권을 증명하는 상징. 그리고 이 진실을 만천하에 드러낼 열쇠였다. 제국의 모든 권위가 거짓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백성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는 이 빌어먹을 폭정은 끝날 수도 있었다.

    그 순간, 인장이 진우의 손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제단 아래에서 웅장한 지각 변동이 시작되었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제단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붉은 마력이 균열 사이로 뿜어져 나오며 공간을 뒤흔들었다.

    “진우! 무슨 일이야!” 혜진이 급하게 외쳤다.

    균열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그들이 상대했던 제국 골렘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금속과 마력이 뒤섞인 고대의 수호자. 인장이 가진 진실을 지키기 위해, 혹은 진실을 파헤치는 자들을 영원히 침묵시키기 위해, 이 깊은 심연에 잠들어 있던 존재.

    “이런… 놈을 깨워버렸나!”

    거대한 그림자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붉게 빛나는 눈빛이 진우 일행을 노려보았다. 제국의 거짓된 평화를 지키는 최후의 수호자가 드디어 눈을 뜬 것이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우주선 ‘별무리 호’는 칠흑 같은 심연을 가르고 나아갔다. 수십 개의 성계를 가로지르고, 알려진 문명의 마지막 등대마저 뒤로한 지 벌써 3년. 함장 한유진은 메인 브리지의 홀로그램 스크린에 펼쳐진 성도(星圖)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끝없이 이어지는 미지의 영역. 그곳에 자신들의 탐사선이 점 하나로 찍혀 있었다. 이 광활한 어둠 속에서, 인류는 언제나 작은 점에 불과했지만, 바로 그 점들이 모여 우주의 지도를 그려나가고 있었다.

    “함장님, 서브 시스템 안정화 완료되었습니다. 수면 모드에서 완전 가동까지 10초.” 부함장이자 항해사 박세아가 보고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약한 졸음 기운을 띠고 있었지만, 눈빛은 빛나는 별처럼 생기 넘쳤다. 오랜 항해는 모두를 지치게 했지만, 젊은 그녀에게는 이 모든 것이 거대한 모험의 서사시였다. 그녀는 조종간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다음 지시를 기다렸다.

    “수고했어, 박세아 항해사. 이젠 우리가 깨어날 시간인가.” 한유진 함장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설렘이 섞여 있었다. 동면에서 깨어난 승무원들이 하나둘 브리지로 모여들었다. 미약한 중력 안정 장치 덕분에 몸은 무거웠지만, 각자의 자리로 향하는 발걸음은 일사불란했다. 수석 과학자 류민준은 두툼한 안경을 고쳐 쓰며 벌써부터 콘솔 앞에서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항상 툴박스를 들고 다니는 엔지니어 이준호가 하품을 쩍 벌리며 서 있었다. 이준호는 아직 동면의 여파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 눈을 비볐다.

    “함장님, 류 박사님은 깨어나자마자 우주 미아라도 찾을 기세시네요. 잠은 좀 주무시지.” 이준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들의 임무는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미지의 성계를 탐사하는 것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평범한 직장인과 다를 바 없었다.

    류민준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말했다. 그의 시선은 오직 데이터 스트림에 고정되어 있었다. “데이터는 거짓말하지 않아. 동면 중에도 꾸준히 유입된 미약한 시그널들이 있었단 말이야. 너무 희미해서 노이즈로 분류되었지만, 지금이라면…”

    “지금이라면 뭐?” 박세아가 궁금증을 못 이겨 물었다. 그녀는 조종석에 앉아 브리지 중앙의 홀로그램 스크린을 주시하고 있었다. 새로운 발견의 기미는 언제나 그녀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지금이라면 뭔가 포착될지도 모른다는 거지.” 류민준은 스크린에 복잡한 수식과 그래프를 띄웠다. 파동의 패턴은 불규칙해 보였지만, 그의 예리한 눈에는 숨겨진 질서가 보였다. “수 주 전부터, 이 항로 주변에서 감지된 이상 에너지파가 있어. 우리 표준 탐지기로는 노이즈로 분류될 만큼 미약했지만, 고급 분석 시스템으로 재조합해보니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어. 마치… 누군가 보내는 메시지처럼 말이야.”

    한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함장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신중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럼 ‘노이즈’의 근원을 찾아보지. 탐사 경로를 살짝 이탈해도 좋아. 단, 연료 효율은 최대로 유지해. 아직 우리는 미지의 영역에 너무 깊이 들어와 있어.”

    “알겠습니다, 함장님!” 박세아가 활기차게 답하고 조종간에 손을 올렸다. ‘별무리 호’는 거대한 함체를 살짝 틀며 미지의 신호를 향해 나아갔다. 수천, 수만 개의 별들이 창밖으로 스쳐 지나갔다. 빛의 잔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장관 속에서, 그들은 미지의 존재를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수십 시간의 항해 후, 류민준의 분석이 드디어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피로와 흥분으로 그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함장님, 포착했습니다! 에너지원은 우리 예상보다 훨씬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건,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류민준의 목소리는 흥분과 경외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떨리는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분명 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메인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는 모두를 경악시켰다.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별들의 빛마저 삼킬 듯이 어둠 속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행성도, 소행성도 아니었다. 육각형의 거대한 판들이 불규칙하게 얽히고설켜, 마치 거대한 거미줄처럼 우주 공간에 부유하고 있었다. 크기는 대략 중소형 행성 하나를 뒤덮을 만한 규모였다. 그 거대한 구조물은 어떤 흔들림도 없이, 완벽한 침묵 속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이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경악에 찬 얼굴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공학적인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규모와 형태였다.

    “생성된 구조물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현상도 아니에요.” 류민준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그의 뇌는 이 현상을 분석하기 위해 전례 없는 속도로 회전하고 있었다. “인위적인 구조물입니다. 하지만 이런 규모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에너지 분석 결과, 이건 단순한 물질이 아닙니다. 이 주변의 시공간 구조가 미묘하게 뒤틀려 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거대한 생명체가 숨 쉬는 것 같은 미약한 파동이 감지됩니다.”

    한유진은 망원경 모드를 활성화했다. 스크린이 확대되자, 육각형 판들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미세한 문양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것은 점처럼 보였고, 어떤 것은 알 수 없는 기호의 나열이었다. 이 모든 것이 정교하게, 그리고 거대하게 조립되어 있었다. 수십억 년의 세월을 견딘 듯, 그 표면은 닳아 있었지만 여전히 견고해 보였다.

    “접근 속도를 줄여. 스캔, 모든 스캔을 가동해. 하지만 함선은 안전 거리를 유지한다.” 한유진의 지시가 떨어졌다. 그의 심장도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인류가 이만큼 깊은 우주에서, 이런 규모의 인공 구조물을 발견하리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이것은 문명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대 문명의 유산일 터였다. 인류의 역사가 한순간에 너무나도 왜소해지는 기분이었다.

    ‘별무리 호’는 조심스럽게 거대한 구조물 주위를 선회하기 시작했다. 함선이 다가갈수록 그 압도적인 크기가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스캐너들이 쉴 새 없이 작동하며 데이터를 쏟아냈다. 그러나 류민준은 점점 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얼굴은 푸르게 질려갔다.

    “함장님, 스캔 결과가… 이상합니다. 아니, 아무것도 포착되지 않습니다. 외부 재질은 측정 불가, 내부 구조 역시 감지 불가입니다. 우리 함선의 모든 스캔 주파수가 먹통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마치… 모든 데이터를 흡수해버리는 것처럼.” 류민준은 거의 절규하듯 외쳤다. 그의 과학적 상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뭐라고?” 이준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의 평소 장난기 어린 표정은 사라지고 공포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최신 심층 스캐너가? 농담하지 마, 류 박사.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어.”

    “농담이 아니야! 이건 우리가 아는 어떤 물질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아. 그리고… 방금, 아주 미약한 파동이 감지됐어.” 류민준이 손가락으로 스크린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의 목소리에는 떨림과 함께 묘한 확신이 섞여 있었다. “이 구조물의 가장 중앙부에서. 아주 짧고, 미세하지만, 분명히 의도적인 파동이었어.”

    모두의 시선이 스크린의 중심부로 향했다. 거대한 육각형 구조물의 한가운데, 마치 거대한 눈처럼 움푹 패인 부분이 있었다. 그곳에서, 찰나의 순간, 푸른빛이 희미하게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깊은 심연의 눈이 막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그 빛은 짧았지만, 너무나도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함장님… 혹시, 이 유물이… 우리를 보고 있는 걸까요?” 박세아가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손은 어느새 조종간을 꽉 쥐고 있었다.

    한유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푸른빛이 깜빡였던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인류가 이제 막 심연의 문을 두드린 것일까. 아니면, 심연이 먼저 인류에게 눈을 뜬 것일까. 알 수 없는 압도적인 미지의 존재 앞에서, ‘별무리 호’의 승무원들은 숨을 죽였다. 이 고요한 우주에서, 그들은 가장 거대한 질문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외계 유물은 무엇이며,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그들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든 스캐너는 여전히 침묵했고, 오직 그 푸른빛만이, 보이지 않는 눈빛으로 ‘별무리 호’를 응시하는 듯했다. 미지의 부름이,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추리 미스터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둠이 짙게 깔린 방 안, 공기마저 얼어붙을 듯 차가웠다. 책상 위 모니터에서는 현란한 조명 아래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남자의 모습이 비쳤다. 강현우. 전 세계가 주목하는 혁신적인 기업의 젊은 CEO. 그의 얼굴에는 성공과 자신감이 넘실댔다. 환하게 웃는 그를 지켜보는 시선은, 그러나, 조금의 온기조차 담고 있지 않았다.

    지훈은 턱을 괸 채 미동도 없이 화면을 응시했다. 화면 속 현우는 마치 다른 세상의 사람 같았다. 화려한 슈트, 완벽하게 세팅된 헤어스타일, 능숙하게 청중을 휘어잡는 목소리. 모든 것이 그와 어울렸다. 한때 이 모든 영광이 자신의 것이 될 뻔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수많은 이들이 그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에 열광했다.

    “‘미래를 위한 혁신’. 정말이지 그럴듯한 이름이야.”

    지훈의 입술 사이로 조용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 음성은 메마르고 거칠었다. 과거의 자신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음색이었다.

    모니터 속 현우는 강단에서 내려와 사람들의 환호 속에 걸어 나갔다. 그를 둘러싼 경호원들의 모습이 더욱 두드러져 보였다. 지훈은 시선을 움직여 모니터 옆에 놓인 낡은 사진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십 년도 더 된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두 청년이 나란히 어깨동무를 하고 활짝 웃고 있었다. 한 명은 지훈, 다른 한 명은 현우였다. 꿈을 이야기하며 밤새 술잔을 기울이던 시절의 현우는, 지금의 현우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순수하고 열정적이며, 지훈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 우정은 마치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것도 가장 밑바닥부터,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강현우. 넌 그날 밤 내가 느꼈던 절망의 깊이를 평생 이해하지 못할 거야.”

    지훈은 사진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손끝에서부터 다시금 그때의 분노가 차오르는 듯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핏줄이 터질 듯이 욱신거렸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때 자신은 겨우 스물여섯이었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던 젊은 천재 개발자. 밤낮없이 매달려 완성한 인공지능 알고리즘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혁신적인 데이터 분석 능력, 예측 불가능한 패턴 인식, 기존의 모든 시스템을 능가하는 속도. 그는 확신했다. 이것이 미래를 바꿀 열쇠가 될 것이라고.

    그리고 현우는 그 열쇠를 훔쳐 달아났다.

    그때의 기억은 지훈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새겨져 있었다. 마지막 발표를 며칠 앞둔 밤이었다. 함께 밤샘 작업을 하던 현우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지훈은 샤워를 하러 갔다. 돌아왔을 때, 현우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흔적도 없이. 그리고 그의 노트북도, 모든 데이터도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다음 날, 현우는 지훈의 알고리즘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완벽하게 위조된 코드와 서류, 그리고 오랜 기간 철저히 준비된 듯한 시나리오가 지훈을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지훈은 표절범으로 몰렸고, 데이터 도둑으로 낙인찍혔다. 그의 모든 주장과 증거는 현우가 미리 파놓은 함정에 의해 힘을 잃었다. 모든 사람들이 지훈을 비난했고, 그가 몸담았던 연구소마저 등을 돌렸다. 세상은 그를 버렸다.

    그로부터 7년. 지훈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았다. 지옥 같은 시간을 견뎌내며, 그는 오직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나아갔다. 복수. 강현우가 자신에게 행한 모든 것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것. 아니, 그보다 더 처절하게.

    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걷었다. 창밖으로 강현우의 이름이 새겨진 거대한 빌딩의 불빛이 번쩍였다. 저 빛이 영원할 것 같지? 착각하지 마.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은 결국 모래성일 뿐이야.

    그는 서랍을 열어 작고 정교한 장치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였다. 금속성 재질의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듯한 미세한 센서가 박혀 있었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오랜 시간 동안 지훈이 설계하고, 만들고, 또다시 수정했던 거대한 계획의 아주 작은 첫 조각이었다.

    밤새 잠 못 이루는 것은 여전했다. 하지만 더 이상 절망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복수에 대한 집념이었다.

    “그래, 강현우.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까지, 난 널 지켜볼 거야.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

    그는 장치를 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섰다. 복도의 희미한 불빛 아래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는 마치 사냥감을 쫓는 맹수처럼 거대하고 위협적인 형상으로 일렁였다.

    ***

    다음 날 아침, 강현우는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한 모습으로 자신의 초고층 빌딩 최상층에 위치한 집을 나섰다. 최신형 자율주행 차가 부드럽게 대기하고 있었다. 그는 차에 오르며 비서에게 지시했다.

    “오늘 오전 회의 자료, 다시 한번 확인해 둬. 아주 작은 오류도 용납할 수 없어.”

    “네, 사장님. 완벽하게 준비했습니다.”

    비서의 목소리는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현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주변은 항상 이렇게 완벽하게 돌아가야 했다. 그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손 안에 있었다.

    차는 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여유롭게 아침 뉴스를 확인하던 현우는 문득, 자신의 휴대전화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진동이 아닌, 아주 작은 전기적 충격 같은 느낌이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휴대전화를 들어 올렸다. 이상은 없었다.

    ‘기분 탓인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뉴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하는 새, 그의 차 바닥, 좌석 밑 아주 은밀한 곳에는 지훈이 밤새 몰래 설치해둔 작은 장치가 완벽하게 위장되어 박혀 있었다. 장치의 미세한 센서는 현우의 모든 움직임, 그의 차가 지나치는 모든 위치 정보를 조용히 수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어딘가로 전송되고 있었다.

    ***

    한 시간 뒤, 지훈은 차가운 금속 의자에 앉아 여러 개의 모니터를 응시했다. 화면 한가운데에는 현우의 자율주행 차가 도시를 가로지르는 경로가 실시간으로 표시되고 있었다. 초록색 점은 현우의 차, 붉은색 점은 그가 방문할 다음 장소를 의미했다.

    옆 모니터에는 현우의 일정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그 모든 정보는 지훈이 지난 몇 달간 현우의 주변 인물들을 통해, 혹은 그의 공개된 일정을 역추적하여 얻어낸 것들이었다. 현우는 철저하게 자신을 보호했지만, 지훈은 그보다 더 집요했다.

    “오전 회의는 10시 30분, ‘미래 혁신 센터’에서.”

    지훈은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미세한 섬광이 스쳤다. 그는 태블릿을 집어 들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몇 번 두드렸다. 복잡한 코드들이 순식간에 펼쳐졌다.

    “이제 슬슬 시작해볼까.”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결의만이 깃들어 있을 뿐이었다.

    몇 분 후, 현우의 차가 막 빌딩 지하 주차장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차 안의 모든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정지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부 조명이 미세하게 깜빡거렸고, 에어컨 바람이 멈췄다가 다시 시작했다. 계기판의 숫자들도 잠시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이게… 무슨 일이지?”

    현우는 당황하여 비서를 돌아보았다. 비서 역시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사장님. 이런 적은 처음인데….”

    차가 완전히 멈춰서고 문이 열렸다. 현우는 찜찜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며 차에서 내렸다.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방금 전 찰나의 순간, 지훈이 심어둔 아주 작은 오류가 그의 차 내부 시스템에 침투하여 미세한 데이터 흔적을 남겼다는 것을. 그 흔적은 마치 작은 바이러스처럼, 현우의 디지털 세상에 첫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현우가 경호원들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는 모습을 모니터로 확인한 지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기분은 어때, 현우? 아직은 미풍에 불과할 거야. 하지만 그 미풍이 점차 거대한 폭풍이 되어 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날이 올 거다. 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야.”

    지훈은 손에 들린 태블릿 화면을 껐다. 방 안은 다시 깊은 어둠에 잠겼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지훈의 눈빛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길고 긴 밤의 시작이었다. 아니, 강현우에게는 악몽의 서막이었다.

  • 좀비 아포칼립스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회색빛 하늘이 잿더미처럼 내려앉은 도시는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다. 삐걱이는 고층 빌딩들은 흉측한 기념비처럼 서 있었고, 그 사이를 비집고 솟아난 이름 모를 풀들은 문명의 마지막 흔적마저 집어삼키고 있었다. 강민준은 낡은 배낭을 고쳐 메며 폐허가 된 상점가 입구에 섰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썩어가는 잔해들이 뒤섞인 공기 속에서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젠장, 또.”

    낮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는 먼지 가득한 거리에 이내 흡수되어버렸다. 건물 잔해 아래 엎드려 있던 그림자 하나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피부는 온통 잿빛으로 변색되어 너덜거렸고, 텅 빈 눈은 알 수 없는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가 들고 있던 낡은 쇠파이프를 꽉 쥐었다. 식량이나 물을 찾는 여정은 늘 이런 식이었다. 생존은 끊임없는 투쟁이자, 예측 불가능한 도박이었다.

    그림자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움직임은 기괴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웠지만, 그 속에는 끈질긴 집착이 서려 있었다. 민준은 주변을 살폈다. 이 그림자 하나만 있는 게 아닐 터. 잠시 후, 인근 골목에서 서너 개의 그림자가 더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찢어진 옷자락과 엉망이 된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민준은 재빨리 판단했다. 정면 돌파는 무리다. 그는 몸을 숙여 폐점된 카페의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뛰어들었다. 유리 파편이 흩어지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지만, 그림자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둔탁한 발소리가 뒤따랐다. 깨진 유리 사이로 비치는 밖은 아수라장이었다. 그들이 카페 안으로 밀려들어 오기 직전, 민준은 기지를 발휘해 뒤편 창고 문을 부수고 건물 뒤편으로 달아났다.

    숨을 헐떡이며 낡은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4층 높이의 건물 옥상에 도착했을 때, 도시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무너진 다리, 불에 탄 고층 빌딩, 그리고 그 사이를 뱀처럼 기어가는 검은 그림자들. 절망적인 풍경이었다. 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그래도 빈손으로 갈 순 없지.”

    민준은 다시 발길을 돌려 건물 내부를 살폈다. 상점가는 위험했지만, 이런 인적이 드문 건물은 오히려 안전할 때가 많았다. 폐쇄된 사무실, 버려진 아파트, 혹은 도서관 같은 곳은 미처 가져가지 못한 귀중품이나 자료를 숨겨놓은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의 눈은 버려진 시청 건물로 향했다. 어둡고 웅장한 외관은 마치 거대한 유령선처럼 느껴졌다. 저곳이라면 뭔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시간 가량을 더 조심스럽게 움직인 끝에, 민준은 시청 건물의 후미진 지하 입구를 발견했다. 빗물과 흙으로 뒤덮인 비상 계단이 아래로 깊숙이 이어져 있었다.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계단은 왠지 모를 불안감을 주었지만, 그는 빛을 잃은 휴대폰 손전등을 켜고 천천히 발을 옮겼다.

    지하 깊숙이 내려가자, 퀴퀴한 흙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버려진 서류 더미와 뒤집힌 의자들이 널려 있는 창고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부서진 컴퓨터와 오래된 문서들이 흩어져 있었다. 민준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며 주변을 살폈다. 그림자의 흔적은 없었다.

    그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쌓여 있는 낡은 책 더미에 닿았다. 먼지를 털어내자, 닳아 해진 가죽 표지의 책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하나가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다른 책들과는 달리 얇고 낡은 일기장처럼 보였다. 겉표지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묘하게 손길을 끄는 오래된 금속 장식이 박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펼쳤다. 안은 이미 곰팡이와 습기에 찌들어 글씨가 번져 있었다. 하지만 몇몇 페이지는 놀라울 정도로 잘 보존되어 있었다. 삐뚤빼뚤한 필체는 마치 비밀을 속삭이는 듯했다.

    『…1998년, 나는 이 오래된 지하 유적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시 정부의 지하 시설이 아닌,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미지의 공간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 땅 아래 잠들어 있는 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다. 고대인들이 숭배했던, 어쩌면 저주받았던, 어떤 힘의 원천이 그곳에 봉인되어 있다고 한다…』

    민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대 지하 유적? 이 도시 밑에? 그는 역사학과를 다니던 시절, 고고학에 심취했었다. 비록 졸업은커녕 세상이 망해버렸지만, 여전히 이런 미스터리는 그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많은 이들이 미신이라 치부했지만, 나는 확신한다. 최근 도심에서 보고되는 기이한 현상들. 설명할 수 없는 전파 방해, 동물들의 이상 행동, 그리고… 기이한 환청. 이 모든 것이 그 유적과 연관되어 있을지 모른다. 나는 더 깊이 파고들기로 했다. 몇몇 동료들은 나를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쫓을 뿐이다. 그곳은 분명 이 도시의 기원과 인류의 감춰진 역사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지도는… 내가 가진 모든 자료를 모아… 시청 지하의 오래된 지하실에 숨겨두었다. 비밀 번호는… 나의 생일…』

    일기장의 뒷부분은 거의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청 지하의 오래된 지하실’이라는 문구는 민준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리고 ‘비밀 번호는 나의 생일’이라는 부분까지. 대체 이 일기장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그가 발견한 것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었을까? ‘기이한 환청’이나 ‘동물들의 이상 행동’ 같은 문구는 종말 이전에 이미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혹시, 이 모든 재앙의 씨앗이 그 ‘고대 지하 유적’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민준은 일기장을 조심스럽게 챙겼다. 그의 폐허가 된 삶에, 이제 새로운 목표가 생긴 기분이었다.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어떤 의미 있는 목적이. 그는 손전등을 이리저리 비추며 주변을 탐색했다. 낡은 창고 한구석에, 녹슨 철문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문들과는 달리 굳게 잠겨 있었고, 옆에는 숫자를 입력하는 방식의 낡은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민준은 심호흡을 했다. ‘나의 생일.’ 일기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일기장의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희미하게 적혀 있는 이름. “이강수”. 그리고 가장자리에 작게 적혀 있는 날짜. ‘1973년 5월 12일’. 그는 숫자를 자물쇠에 입력했다. 0512.

    ‘딸깍.’

    녹슨 철문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문을 천천히 열었다. 안에서는 흙먼지와 함께 곰팡이 냄새가 더욱 강하게 풍겨 나왔다. 손전등 빛이 닿는 곳은 또 다른 복도였다. 이전보다 훨씬 오래되어 보이는 돌벽과 천장. 마치 지하 무덤으로 향하는 입구 같았다.

    복도 끝에는 역시 굳게 닫힌 거대한 문이 있었다. 철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묵직하고 단단해 보이는, 고대의 문이었다. 문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문양들 사이로, 희미한 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붉은빛이었다. 마치 그 문 너머에서, 잠자고 있던 어떤 존재가 깨어나는 듯한 섬뜩한 빛이었다.

    민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두려움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호기심이 그를 사로잡았다. 일기장에서 언급된 ‘고대 지하 유적’. 그곳이 드디어 그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과연 이 문 너머에는 무엇이 잠들어 있을까? 이 종말의 시대에 감춰진 비밀이, 그곳에서 드러날 것인가? 혹은, 더 큰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는 문에 새겨진 기이한 문양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붉은빛이 점점 더 강렬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문 너머에서, 어떤 거대한 존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속삭이는 것처럼.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이 문을 열어야만 했다. 어쩌면, 이 지옥 같은 세상에 던져진 인류가 살아남을 마지막 희망이, 바로 이 잊혀진 고대 유적의 심연 속에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붉은빛이 깜빡이는 고대의 문 앞에서,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 그리고 문득, 아주 작은 진동이 땅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속삭임. 그것은 고대의 유적이 깨어나,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소리 같았다. 이 지독한 세상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 대체 역사물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대정국 기담: 닫힌 문, 붉은 실 (1화)

    **장면 1: 새벽의 비명**

    [어두컴컴한 새벽, 안개 자욱한 대정국의 수도 한양. 고층 빌딩과 기와집이 묘하게 어우러진 풍경. 거대한 벽돌 담장 너머로 고색창연한 기와지붕이 늘어선 대저택, ‘청명재(淸明齋)’가 보인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전기 등불만이 희미하게 길을 밝히고 있다.]

    **내레이션:** 대정 37년, 동방의 패권을 쥔 대정국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팽창하고 있었다. 옛것과 새것이 공존하는 수도 한양은 찬란한 문명의 빛과 음습한 그림자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또 하나의 비극이 싹트고 있었다.

    [청명재 내부, 한밤중의 적막을 깨고 날카로운 여인의 비명이 울려 퍼진다. 비명은 저택의 가장 깊숙한 곳, 서재에서 터져 나왔다.]

    **하녀 (비명):** 꺄아악!

    [장면 전환. 저택 안, 고급스러운 비단 이불을 걷어차고 잠에서 깬 사람들이 허둥지둥 서재 쪽으로 달려온다. 나이든 집사와 젊은 부인, 몇몇 하인들이 공포에 질린 얼굴로 서재 문 앞에 모여든다.]

    **하인 1:** 무슨 일입니까!
    **집사 김 노인:** (숨을 헐떡이며) 서, 서재에서… 아가씨의 비명 소리가…

    [서재 문은 육중한 흑단으로 만들어져 있고, 손잡이에는 놋쇠 자물쇠가 단단히 채워져 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미약한 빛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젊은 부인 (겁에 질린 목소리):** 여보? 이안 대감? 안에 계세요? 제발, 문 좀 열어보세요!

    [문을 두드리고 손잡이를 흔들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집사 김 노인:** (다른 하인들에게) 빨리, 문을 부숴라! 쇠망치를 가져와!

    [하인들이 다급하게 쇠망치를 들고 와 육중한 서재 문을 내리찍기 시작한다. 쿵, 쿵, 쿵. 굉음이 저택을 울리고, 마침내 문고리가 부서지며 빗장이 떨어진다.]

    [문을 활짝 열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모두가 숨을 삼킨다. 화려한 서재 한가운데, 거대한 책상 앞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다. 고가의 비단 도포는 피로 축축하게 젖어 붉은색을 띠고, 목에는 날카로운 비수(匕首)가 깊이 박혀 있었다. 피는 바닥의 페르시아 양탄자를 적셔 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하녀 (비명을 지른):** (벽에 기대어 주저앉으며) 흐읍… 흐읍…

    **젊은 부인:**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아 오열한다) 여보! 여보오오!

    **집사 김 노인:** (몸을 부들부들 떨며 남자를 확인한다) 이안… 이안 대감님… 흑…

    [화면은 남자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대정국 최고의 거상(巨商)이자 정계의 실세였던 ‘강이안(姜吏安)’ 대감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고, 눈은 공포에 질린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레이션:** 강이안 대감은 대정국의 경제를 주무르던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정국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파문의 시작이었다. 더욱이, 이 모든 비극은 완벽하게 ‘닫힌 방’ 안에서 벌어졌다.

    **장면 2: 강철 경위의 분노**

    [시간이 흘러 날이 밝았다. 청명재 앞마당에는 대정국 경무국(警務局)의 순찰차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수많은 순경들이 오가며 현장을 통제하고 있다.]

    [서재 안. 덩치 큰 체구의 중년 남자, 강철(姜鐵) 경위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그의 주변에는 감식반 요원들이 분주하게 증거를 수집 중이다.]

    **강철 경위:** (이를 악물고) 망할… 완벽한 밀실이야.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창문은 놋쇠 창살로 막혀있는데다가 너무 높아. 발코니도 없어. 침입 흔적은 전무!

    **감식반 요원 1:** (장갑 낀 손으로 문고리를 만지작거리며) 네, 경위님. 문고리는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부수지 않고서는 열 수 없었을 겁니다. 열쇠도… 안에서 발견되었구요.

    **강철 경위:** (피 묻은 비수를 노려본다) 이 비수는?

    **감식반 요원 2:** 대감님 서재의 장식품 중 하나였습니다. 원래 대감님 책상 위 연필꽂이에 꽂혀 있었죠. 지문은… 대감님 것 외에는 아직 특별한 것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강철 경위:** (한숨을 푹 쉬며) 하아… 그럼 자살이라는 거냐? 천만에. 대감의 목에 저렇게 깊이 박힐 정도로 힘을 주려면 굉장한 결심이 필요해. 게다가… 자살할 사람이 저런 비수로 찌른 뒤에 왜 굳이 열쇠를 던져놓고 숨을 거두는 시늉이라도 했겠나?

    [강철 경위는 서재 곳곳을 살핀다. 벽난로, 책장, 천장, 바닥. 아무리 봐도 수상한 점은 없다. 단단히 잠긴 문, 외부 침입 흔적 없음, 내부에서 발견된 열쇠, 그리고 사망자의 손에는 흉기가 쥐어져 있지 않다.]

    **강철 경위:** (벽을 주먹으로 치며) 누가 감히 대감님을… 그것도 이런 식으로! 대체 누가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용의자는 저 방 안에 있었던 누군가여야 해. 하지만 아무도 없었잖아!

    **순경:** (조심스럽게 다가와) 경위님, 유족들의 진술을 받았습니다. 어제 저녁 식사 후, 대감님은 평소처럼 서재로 가셨습니다. 밤새 서재에서 나오시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합니다. 새벽에 하녀가 우연히 불 꺼진 서재 틈새로 빛이 새는 것을 보고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없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른 식솔들을 불러 모았다고 합니다.

    **강철 경위:**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럼 이 놈의 살인자가 공중으로 사라지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그때, 서재 문 앞에서 순경 하나가 경례를 하며 누군가를 안내한다. 강철 경위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본다. 앳된 얼굴에 약간은 해이해 보이는 차림새, 하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는 청년이 들어선다.]

    **순경:** 경위님, 설담(薛潭) 나으리가 도착하셨습니다.

    **강철 경위:** (한숨을 다시 쉬며) 왔나, 설 나으리. 이 미치광이 같은 사건에 당신 같은 별종 말고는 답이 없을 것 같아서 불렀네.

    [청년, 설담은 강철 경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현장을 차분히 둘러본다. 그의 눈은 주변의 혼란이나 강철 경위의 불만에 동요하지 않는다. 마치 모든 것을 스캔하는 기계처럼, 그의 시선은 서재의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

    **장면 3: 설담의 시선**

    [설담은 아무 말 없이 강이안 대감의 시신으로 다가간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도포나 비수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오히려 대감의 손에 남아있는 미약한 핏자국, 그리고 굳게 감긴 눈꺼풀, 어딘가 허공을 응시하는 듯한 시선을 오래도록 관찰한다.]

    **강철 경위:** 자네도 알겠지만, 설 나으리. 밀실이야. 완벽한 밀실. 자네라면 뭔가 다른 게 보이나?

    **설담:** (나지막이)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닐 때, 보이지 않는 것이 진실인 법이지요.

    [설담은 대감의 시신에서 한 발짝 물러나 서재 전체를 다시 훑어본다. 고급스러운 책들, 정교한 조각이 새겨진 가구, 창문 위의 놋쇠 창살, 벽난로, 심지어는 천장의 전등갓까지. 그의 시선은 모든 것을 놓치지 않는다.]

    **설담:** (바닥을 유심히 보다가 무언가 발견한 듯 멈춰 선다) 경위님, 대감님의 신발은 어디에 있습니까?

    **강철 경위:** (당황한 얼굴로) 신발이라니? 그게 뭐 중요한가? 시신은 양말 차림으로 쓰러져 있었네. 아마 서재에서 편히 쉬고 계셨던 모양이지.

    **설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편히 쉬고 계셨다…

    [설담은 책상 아래 바닥을 짚어본다. 피 묻은 양탄자 너머, 희미하게 빛나는 마룻바닥에 아주 작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자국이 있다.]

    **설담:** 경위님, 저 자국을 보십시오.

    [강철 경위가 자세를 낮춰 설담이 가리킨 곳을 본다. 손톱만큼도 안 되는 작은 검은색 점이 마룻바닥에 희미하게 박혀 있었다. 너무 작아서 감식반도 미처 발견하지 못한 흔적이었다.]

    **강철 경위:** 저게 뭔가? 흙먼지인가?

    **설담:** (고개를 젓는다) 흙먼지는 아닙니다. 너무 단단하게 박혀 있죠. 마치… 무언가가 강하게 눌렸다가 떨어진 흔적처럼.

    [설담은 다시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창살은 단단히 박혀 있었고, 창문 역시 안에서 닫힌 채 잠겨 있었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창틀을 손으로 쓸어본다. 그리고는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올린다. 손가락 끝에는 아주 미세한 흰색 가루가 묻어 있었다.]

    **강철 경위:** 그건 또 뭔가? 벽에서 떨어진 회반죽 가루인가? 오래된 저택이니 그럴 수도 있지.

    **설담:** (코끝에 가루를 대고 냄새를 맡는다) 음… 회반죽은 아닙니다. 훨씬 곱고, 약간의 끈적임이 있군요. 마치… 무언가를 빻아서 만든 가루 같습니다. 그리고 이 가루는 창틀의 틈새에만 집중적으로 묻어 있습니다.

    [설담은 서재 한쪽 구석에 놓인 거대한 지구본을 찬찬히 살펴본다. 지구본은 놋쇠 받침대 위에 놓여 있었고, 그 표면은 먼지 한 점 없이 깨끗하게 닦여 있었다. 하지만 설담의 눈은 지구본 받침대의 가장자리, 잘 보이지 않는 틈새에 맺힌 미세한 물방울 자국을 포착한다.]

    **설담:** 경위님, 이 지구본은 언제 마지막으로 닦았습니까?

    **강철 경위:** (기억을 더듬으며) 음… 어제 아침이었다고 하녀가 진술했네. 대감님은 워낙 깔끔하신 분이라 매일 서재를 정리했다고 하더군.

    **설담:** 그렇다면 이상하군요. 물방울 자국이 있습니다. 꽤 오래된 듯 보이지 않습니까? 마르면서 생긴 흰 얼룩도 보이는군요. 마치… 젖은 손으로 만졌다가 생긴 자국 같습니다.

    [설담은 다시 시신으로 돌아가 대감의 옷을 살펴본다. 붉은 피에 젖은 옷깃을 조심스럽게 들춰 올리자, 옷깃 안쪽에 꽤 선명한 손톱 자국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누군가가 목을 잡았던 흔적처럼.]

    **설담:** 대감님은 평소에 목까지 깃을 세우고 다니셨습니까?

    **강철 경위:** 아니. 대감님은 격식 있는 자리에서도 깃을 크게 세우는 법이 없었네. 답답하다고 싫어했지.

    **설담:** (의미심장하게 미소 짓는다) 흥미롭군요. 그렇다면 이 목덜미의 자국은… 분명 누군가가 대감님의 목을 붙잡고 몸을 지탱했던 흔적입니다. 하지만 왜 굳이 깃 안쪽에 남아 있을까요?

    [설담은 다시 서재의 문을 노려본다. 그리고는 문턱을 넘어 서재 안쪽에서 문을 향해 걸어 나간다. 그는 문 바로 앞, 바닥의 틈새에 시선을 고정한다. 그리고는 갑자기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천천히, 서재 한가운데를 가리킨다.]

    **설담:** 경위님. 이 서재는 밀실이 아닙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살인자가 밖으로 나갈 때만 ‘밀실’이었죠.

    **강철 경위:** (깜짝 놀라) 무슨 소린가! 나갈 때만 밀실이라니? 그럼 살인자는 어떻게 나갔다는 말인가?

    **설담:** (차분하게,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강이안 대감은 자살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살인자는 이 방 안에 숨어있지도 않았죠. 살인자는… 스스로 문을 잠그고 이 방을 나갔습니다. **”닫힌 방의 트릭”은, 살인자가 밖으로 도망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트릭이었죠.**

    [강철 경위와 주변의 순경들은 설담의 말에 경악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강철 경위는 설담의 말뜻을 이해하려는 듯 미간을 찌푸리지만,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는다.]

    **강철 경위:** (더듬거리며)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트릭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인가?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열쇠도 안에서 발견됐는데…

    **설담:** (피 묻은 양탄자에 살짝 묻은 먼지 한 조각을 집어 들고 손바닥에 올려놓으며) 이 서재의 모든 것이 살인자의 계획이었습니다. 대감님의 사망 시각, 흉기, 그리고 이 모든 ‘밀실’이라는 완벽한 상황까지. 모든 것은 계산된 것이었죠. **범인은 대감님을 죽이기 위해, 이 밀실을 설계한 것이 아닙니다. 대감님을 죽이고 난 후, 자신이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을 숨기기 위해, 그리고 동시에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이 모든 장치를 만들었습니다.**

    [설담은 의미심장하게 웃는다. 그의 눈은 확신으로 빛나고 있었다.]

    **설담:** 이제 제가 이 ‘닫힌 방’의 진정한 열쇠를 찾아내야 할 차례군요.

    **장면 4: 사라진 흔적**

    [설담은 서재 바닥의 책상 아래, 아까 그 작은 검은 점이 박혀 있던 곳을 다시 살핀다. 손가락으로 긁자, 딱딱하게 굳은 점이 떨어져 나간다. 설담은 그것을 조심스럽게 손바닥에 올려놓고 확대경으로 관찰한다.]

    **설담:** (중얼거리듯) 얇은 나무 조각… 끝은 무언가에 긁힌 듯 거칠고, 한쪽 면에는 연한 녹색 페인트 자국이…

    [그는 서재의 가구들을 하나씩 둘러본다. 고가의 마호가니 책상, 흑단 책장, 그리고 거대한 지구본. 그는 지구본의 놋쇠 받침대를 한참이나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갑자기 무릎을 꿇고 지구본 아래 받침대의 틈새를 손가락으로 더듬는다. 손가락 끝에 무언가 잡히는 느낌.]

    **설담:** 찾았다.

    [그가 손가락으로 빼낸 것은 아주 가는 낚싯줄 같은 것이었다. 투명한 색이어서 잘 보이지 않았고, 지구본 받침대와 바닥의 틈새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었다. 그는 그 줄을 조심스럽게 당겨본다.]

    **강철 경위:**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저건 또 뭔가?! 실인가?

    [줄은 서재 한쪽 구석의 장식장 뒤편으로 이어져 있었다. 설담은 장식장을 옮겨 줄의 끝을 찾아낸다. 줄의 끝에는 작은 놋쇠 고리가 달려 있었다. 고리에는 방금 그가 발견한 작은 나무 조각과 같은 재질의, 또 다른 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설담:** (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경위님, 보십시오. 이것이 ‘밀실 살인’의 진짜 열쇠입니다.

    [설담은 줄을 쭉 잡아당긴다. 줄은 지구본 받침대를 지나, 서재 문 아래쪽 틈새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줄의 다른 끝은 문 바깥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철 경위:** (믿을 수 없다는 듯) 설마… 설마 그 놈이 저런 실을 이용해서 문을 잠그고 나갔다는 말인가? 하지만 안에서 잠겼잖아! 열쇠도 안에서 발견됐고!

    **설담:** (그를 바라보며) 생각해보십시오. 범인이 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잠그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무엇일까요? 열쇠를 사용하고, 열쇠를 다시 안으로 던져 넣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대로 던져 넣으면 열쇠가 너무 잘 보이겠죠. **그래서 범인은 열쇠에 이 줄을 매달아 놓았던 겁니다.**

    [설담은 줄의 끝에 매달려 있던 작은 나무 조각을 보여준다.]

    **설담:** 이 나무 조각은 열쇠에 연결되어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줄은 문틈으로 나와 이 지구본 받침대 아래 숨겨져 있었겠죠. 범인은 대감님을 죽이고, 서재를 나가면서 문을 안에서 잠급니다. 그리고 문밖으로 이 줄을 빼내어 조용히 문틈으로 열쇠를 던져 넣습니다. 열쇠는 이 나무 조각 덕분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고, 문 바로 아래 바닥에 떨어지게 됩니다.

    **강철 경위:** (멍한 얼굴로) 그러면… 그러면 그 놈은 밖에서 줄을 당겨서… 열쇠가 어디에 떨어질지 조절했다는 말인가?

    **설담:**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 작은 나무 조각은… 열쇠와 줄이 분리되게 해주는 장치였을 겁니다. 아마도 열쇠에 매달린 조각이 줄에서 떨어지도록, 어떤 미세한 조작을 가했던 것이겠죠. 그리고는 줄을 당겨 이 흔적까지 없애려 했지만, 이 작은 파편이 바닥에 떨어지면서 남았던 것입니다. 지구본 받침대 아래의 물방울 자국은… 아마도 범인이 범행 후 손을 씻었거나, 아니면 이 장치를 설치할 때 땀이라도 흘렸던 흔적일 테고요.

    [설담은 창틀의 흰 가루를 다시 손가락으로 문질러본다.]

    **설담:** 이 흰 가루는… 찹쌀풀입니다. 아니면 비슷한 점성이 있는 어떤 가루겠죠. 창틀 틈새에 이걸 발라 놓으면, 작은 줄이라도 그 사이로 빠져나가기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범인은 이 가루를 이용해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 했을 겁니다. 아마도 줄을 창밖으로 빼내어 무언가를 끌어올리거나 내릴 때 사용했겠지요.

    [강철 경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설담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서서히 그의 말이 이해되기 시작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강철 경위:** 그럼 이 모든 건… 대감님을 죽이고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한 장치였다는 말인가? 밀실 트릭은… 살인자가 자신을 숨기기 위한 눈속임이었고?

    **설담:** (피 묻은 비수를 가리키며) 이 흉기를 보십시오. 날카롭긴 하지만, 사람이 목을 스스로 찌르기엔 망설임이 생길 법한 모양입니다. 또한, 시신 주변에 흉기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밀실’의 완벽성을 높이기 위한 범인의 의도였겠죠. 그리고 결정적으로, 대감님의 신발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감님은 평소 습관대로 서재에서 신발을 벗고 쉬고 계셨을 겁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들이닥쳐 대감님을 죽였다면…

    [설담은 잠시 말을 끊고 서재의 가장자리를 응시한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다시 말을 잇는다.]

    **설담:** 범인은 이 살인극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습니다. 심지어 대감님의 죽음마저도요. 하지만 한 가지 놓친 것이 있습니다. 살인 현장을 완벽하게 정리하려 했으나, 완벽하게 정리하지 못한 하나의 흔적.

    **강철 경위:** 그게 뭔가?

    **설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대감님의 옷깃 안쪽에 남아있던 그 자국. 누군가가 대감님의 목을 강하게 틀어쥐었던 흔적.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목을 잡은 흔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대감님을 공포에 질리게 한 흔적입니다.** 범인은 대감님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죽기 직전까지 어떤 것을 보여주며 압박했을 겁니다.

    [설담은 시신으로 다가가 강이안 대감의 굳은 눈을 다시 응시한다.]

    **설담:** 죽은 자의 눈은 살아남은 자에게 진실을 말합니다. 대감님은 죽기 직전, 무엇을 보셨을까요? 그리고 그것이 왜 범인으로 하여금, 저렇게까지 완벽한 ‘밀실’을 꾸미게 만들었을까요?

    [강철 경위는 설담의 날카로운 추리에 압도당한다. 이제 그는 단순한 밀실 살인이 아님을 직감한다. 설담의 눈은 강철 경위의 등 뒤에 있는 거대한 책장을 향한다. 빽빽하게 꽂힌 책들 사이, 유독 한 권의 책이 제 위치에서 살짝 비틀어져 있었다. 마치 급하게 집어넣은 것처럼.]

    **설담:** (책장을 가리키며) 경위님. 저 책을 한번 꺼내보십시오. 아마 그 안에, 이 모든 사건의 진짜 ‘붉은 실’이 감춰져 있을 겁니다.

    [강철 경위는 설담이 가리킨 책으로 다가간다. 그의 심장이 쿵쾅거린다. 단순한 살인이 아니었다. 이것은 치밀하게 계획된, 대정국 전체를 뒤흔들 거대한 음모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음모의 시작은, 이 ‘닫힌 방’에서부터 열리고 있었다.]

    **내레이션:** 밀실은 깨졌다. 그러나 밀실의 진정한 의미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강이안 대감의 죽음 뒤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인가? 천재 탐정 설담은 과연 이 복잡하게 얽힌 사건의 붉은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을 것인가?

    [장면은 붉은 피가 스며든 양탄자, 그리고 그 위로 드리워진 설담의 그림자로 마무리된다.]

    **다음 화에 계속…**

  • 대체 역사물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둠이 벨록 제국의 거대한 그림자처럼 세상을 뒤덮었다. 멀리 떨어진 황도, 오만한 ‘불멸의 궁전’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빛마저 이곳, 제국의 최전선 보급 기지에는 닿지 못했다. 오직 칼날처럼 날카로운 달빛만이 녹슨 철조망과 견고한 강철 구조물 위로 차갑게 쏟아지고 있었다.

    “확실해?”

    설아의 목소리는 귓속말처럼 낮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차가운 칼날 같았다. 그녀는 흙먼지 연대의 핵심 정예 요원 다섯 명과 함께 허리까지 오는 덤불 속에 몸을 숨긴 채 거대한 보급창고를 응시했다. 밤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흙냄새와 함께 저 멀리서 풍겨오는 기계 기름 냄새, 그리고 희미한 피 냄새가 그녀의 코를 찔렀다. 착각일까.

    “네, 대장님. 첩보원들의 마지막 보고서가 맞다면, 저곳입니다. ‘강철의 심장부’. 제국의 서부 전선에서 사용될 모든 신형 병기들이 집결하는 곳이죠.”

    지혁이 작은 망원경을 내리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의 얼굴에는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스무 살 초반의 그는 아직 이런 규모의 작전에 익숙지 않았다. 거대한 철골 구조물들이 밤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메우는 수십 대의 중장비들이 거대한 괴물처럼 침묵하고 있었다. 보급창고 곳곳에 설치된 감시탑에서는 번쩍이는 탐조등이 미로처럼 복잡한 기지 내부를 훑고 지나갔다.

    설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 작전은 실패할 수 없었다. 흙먼지 연대는 이제 더 이상 작은 반란군이 아니었다. 제국의 횡포에 지친 수많은 이들이 그들의 깃발 아래 모여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제국의 압박 또한 거세졌다. 무기 부족은 언제나 그들의 발목을 잡는 문제였다. 이곳의 무기고를 파괴하는 것은 단순히 제국에 타격을 주는 것을 넘어, 그들에게 한 줄기 희망을 안겨줄 터였다.

    “좋아. 계획대로, 하수도망을 이용한다. 지혁, 너와 현수(Hyun-su)는 외곽 경비대 동선을 파악하면서 우리 후방을 지원해. 남은 셋은 나와 함께 진입한다.”

    “넷, 대장님!”

    지혁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설아와 함께 진입하고 싶어 했다.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설아는 그의 마음을 모르는 척했다. 지혁의 무모함은 때론 독이 될 수 있었다.

    “불복종은 용납하지 않아. 각자 맡은 임무에 집중해.”

    설아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지혁은 작게 한숨을 쉬었지만,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다. 그는 설아의 지시에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그것이 그들의 관계였다.

    팀원들은 덤불 속을 조용히 기어 지하 배수로 입구로 향했다. 낡고 녹슨 철제 뚜껑이 어둠 속에 겨우 윤곽을 드러냈다. 현수가 조심스럽게 뚜껑을 들어 올리자, 퀴퀴한 곰팡이와 눅눅한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끝없는 계단. 그들의 목적지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제가 먼저 내려가겠습니다.”

    가장 몸집이 작은 ‘은아(Eun-a)’가 자원했다. 그녀는 연대에서 가장 뛰어난 잠입 전문가였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설아는 그녀를 등 뒤에서 조용히 밀어 넣었다. 철제 계단을 밟는 소리조차 나지 않게, 은아는 유령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어서 ‘민준(Min-jun)’이, 그리고 설아가 뒤를 따랐다.

    습한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좁고 구불구불한 하수도 터널은 인내심을 시험하는 공간이었다. 곳곳에서 쥐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는 마치 거대한 시계의 초침 소리처럼 울렸다. 설아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오직 성공만이 있었다. 수많은 동지들의 목숨이 이 작전에 달려 있었다.

    터널은 예상보다 길었다. 제국의 보급창고가 얼마나 거대한지, 이 지하 구조물이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한 시간가량 터널을 기어간 끝에, 은아가 멈춰 섰다. 그녀의 손짓에 설아와 민준도 멈췄다.

    “대장님, 저기… 막다른 길 같습니다.”

    은아가 손전등으로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얼핏 보면 견고하게 막힌 벽이었지만, 설아의 눈은 미세한 틈새를 놓치지 않았다. 벽돌과 벽돌 사이에 보이는 희미한 간격. 그리고 그 안에서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

    “여기가 보급창고 내부로 연결되는 통로야. 제국 놈들이 땜질해놓은 거지.”

    민준이 낮게 읊조렸다. 그는 연대에서 가장 오래된 베테랑 중 한 명으로, 제국의 구조물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그는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소형 폭약을 꺼냈다. 극히 낮은 소음을 내도록 특별히 제작된 것이었다.

    “소량만 사용해. 붕괴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설아의 지시에 민준은 능숙하게 폭약을 벽의 틈새에 설치했다. 작고 정교한 장치들이 벽면에 착 달라붙었다. 잠시 후,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아는 벽에서 멀리 떨어져 팀원들에게 엎드릴 것을 지시했다.

    *쉬이이이이익…*

    폭약이 터지는 소리는 예상보다 훨씬 작았다. 마치 거친 바람이 잠시 불어닥치는 듯한 소리였다. 하지만 진동은 강렬했다. 콘크리트 벽이 무너지면서 자욱한 흙먼지가 사방으로 퍼졌다. 이내 그 앞에는 겨우 한 사람이 기어들어갈 만한 좁은 통로가 드러났다.

    설아는 먼저 통로 안을 들여다봤다. 거대한 보급창고의 내부가 눈앞에 펼쳐졌다. 예상대로였다. 끝없이 이어진 철골 기둥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빼곡하게 들어선 거대한 수송 컨테이너들. 거대한 기계들이 웅장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서 있었다.

    “진입한다. 소리 내지 마.”

    설아의 명령에 따라 은아가 먼저 좁은 통로를 통해 기어들어갔다. 이어서 민준, 그리고 설아도 몸을 밀어 넣었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마치 거대한 짐승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작은 기생충 같았다.

    내부는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습한 공기 대신 기계와 금속의 차가운 냄새가 진동했다. 거대한 컨테이너들이 수십 겹으로 쌓여 있었고, 그 사이로 자율형 운반 로봇들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바쁘게 움직였다. 이 모든 것이 제국의 무자비한 힘을 상징하고 있었다.

    “저기, 대장님. 저쪽입니다.”

    은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보급창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유독 거대한 컨테이너들이 모여 있는 구역이었다. 첩보원들의 정보에 따르면, 그곳에 제국이 새로 개발한 ‘강철 거미’라 불리는 최신형 다족 보행 병기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이 병기는 단 한 대로도 작은 마을 하나를 초토화시킬 수 있는 위력을 지녔다고 전해졌다.

    그들은 그림자처럼 컨테이너 사이를 움직였다. 자율형 로봇들의 움직임은 예측 가능했지만, 가끔씩 순찰하는 제국 병사들의 발소리는 심장을 죄어오게 만들었다. 한 번은 병사 한 명이 바로 그들이 숨어 있는 컨테이너 옆을 지나쳤다. 설아는 숨조차 쉬지 않고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병사의 군화 소리가 멀어지는 순간까지, 온몸의 감각이 곤두섰다.

    마침내, 그들은 목표 지점에 도달했다. 거대한 검은색 컨테이너들이 거대한 벽처럼 서 있었다. 그 위에는 제국의 상징인 붉은 독수리 문양이 섬뜩하게 그려져 있었다. 설아는 컨테이너의 잠금장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복잡한 전자식 잠금장치였다.

    “은아, 해제할 수 있겠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제국 최신형이네요.”

    은아가 작은 공구들을 꺼내 들고 잠금장치에 달라붙었다. 그녀의 섬세한 손놀림은 마치 예술가의 붓질 같았다. 틱, 틱, 하는 미세한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설아는 주위를 경계하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했다.

    그때였다.

    “대장님! 저, 저기 좀 보세요!”

    민준의 목소리에 설아는 고개를 돌렸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강철 거미 컨테이너들 뒤편,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작고 낡은 컨테이너였다. 주황색으로 녹슨 외벽에는 아무런 제국 문양도 없었다. 마치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이물질처럼 보였다.

    “저건… 뭔지 모르겠습니다. 첩보 보고에는 없던 겁니다.”

    설아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본능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은아에게 잠금장치를 잠시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민준, 저 컨테이너를 열어봐.”

    민준은 주저했지만, 설아의 단호한 눈빛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공구로 낡은 컨테이너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끽 소리를 내며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빛 너머로, 충격적인 광경이 설아의 눈앞에 펼쳐졌다.

    컨테이너 안에는 ‘강철 거미’가 아닌, 수십 명의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얼굴은 피폐하고, 손목과 발목은 족쇄에 묶인 채였다. 그들은 놀란 눈으로 설아 일행을 바라봤다. 그중에는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흙먼지로 뒤덮인 옷차림, 굶주림에 지친 눈빛… 그들은 분명 제국에 의해 끌려온 평범한 마을 사람들이었다.

    “이게… 대체….”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설아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제국은 무고한 사람들을 잡아와 무엇을 하려 했을까? 이 보급창고에? 설마, 인간을 연료로 삼는다는 소문이 사실이었을까? 아니면, 신형 병기의 실험체로?

    그녀의 머릿속에서 혼란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임무는 ‘강철 거미’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제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마비시키는 것. 하지만 눈앞의 이들은… 그들은 분명 살아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을 외면하고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까?

    그때였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순찰 로봇의 기계음이 아니었다. 규칙적이고 묵직한, 수십 명의 발소리가 컨테이너들이 쌓인 미로 속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젠장! 제국 병사들이다! 수가 많아!”

    지혁의 다급한 무전이 설아의 귀를 찢었다. 외부에서 순찰대를 놓쳤거나, 예상치 못한 지원 병력이 도착한 것이 틀림없었다.

    시간이 없었다.

    설아는 족쇄에 묶인 사람들과, 거대한 ‘강철 거미’ 컨테이너, 그리고 다가오는 제국 병사들의 발소리 사이에서 얼어붙었다. 그녀는 선택해야만 했다. 이들을 버리고 임무를 완수할 것인가. 아니면…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순간, 한 어린아이가 그녀를 올려다봤다. 아이의 눈에는 두려움과 함께 희미한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이들의 눈빛을 외면하고,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을까?

    설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선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이 많은 사람을 구하면서, 동시에 임무를 완수할 방법이 있을까?

    그녀의 손이 허리춤에 찬 폭약 꾸러미로 향했다. 다가오는 발소리는 이제 숨소리마저 집어삼킬 듯 가까워져 있었다.

    “은아! 민준! 문 닫아! 그리고 이들을…. 풀어!”

    설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혼돈 속으로, 그녀는 한 발짝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