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무협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제1장: 붉은 모래 바람 속 그림자

    붉은 모래 평원의 바람은 언제나 사나웠다. 모래는 칼날처럼 피부를 스쳤고, 끝없이 펼쳐진 황야는 망각의 장막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했다. 그런 황량함 속에서도 한 사내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닳고 닳은 가죽 옷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으나, 그의 눈빛만은 맑고 흔들림이 없었다. 등에는 검은 천으로 감싼 기다란 것이 비스듬히 메어져 있었다.

    그의 이름은 무진(無辰).

    어느 누구도 그의 과거를 알지 못했고,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한번 목표를 정하면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다는 것과, 그의 검술이 예사롭지 않다는 소문만이 간간이 무림에 떠돌 뿐이었다.

    수평선에 해가 기울자, 거대한 바위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무진은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낮 동안 작열하던 태양의 열기가 사라지고, 밤의 한기가 서서히 대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위산 아래 움푹 파인 동굴 어귀에 다다랐다. 이곳은 붉은 모래 평원 중앙에 위치한 유일한 오아시스, ‘고요의 샘’이라 불리는 작은 쉼터였다. 작고 허름한 주루(酒樓)가 고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주루 안은 붉은 모흙 벽난로의 불꽃만이 유일한 온기였다. 고작 서너 명의 늙은 상인들과 짐꾼들이 웅성이고 있을 뿐이었다. 무진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탁자 위에 놓인 투박한 나무잔에 든 맹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은 창밖의 어둠이 아닌, 벽난로 옆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백발의 노인에게 닿았다. 노인의 눈빛은 흐릿했지만, 간혹 번뜩이는 섬광이 예사롭지 않음을 암시했다.

    잠시 후, 노인은 빈 술병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놈의 술도 예전 같지가 않아. 혀끝에서 맴도는 씁쓸함이 꼭 이놈의 인생 같구나.”

    무진은 조용히 일어나 노인의 탁자로 다가갔다.
    “어르신, 혼자 드시기에 외로우실 듯하여.”

    노인은 고개를 들어 무진을 힐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
    “젊은 것이 웬 오지랖이냐. 허나, 그 눈빛이 제법 날카롭군. 어디, 술이나 한잔 따라 보아라.”

    무진은 노인의 술잔에 맑은 증류주를 채웠다. 노인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껄껄 웃었다.
    “이만하면 되었느냐?”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무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허허, 역시. 사내들이 이유 없이 술잔을 권하는 법은 없지. 무엇이 궁금하냐?” 노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사흘 길을 가면, ‘잊혀진 지하 유적’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노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주루 안의 모든 소란이 순간 멈춘 듯했다.
    “그것을 어찌 알았느냐?” 노인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스쳤다.
    “떠도는 소문일 뿐입니다. 그곳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노인은 술잔을 내려놓더니, 벽난로의 불꽃을 응시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젊은이, 가지 마라. 그곳은 인간의 발길이 닿아서는 아니 될 곳이다.”
    “이유가 있습니까?”
    “수백 년 전, 아니 어쩌면 수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이 붉은 모래 평원 아래, 거대한 지하 도시가 잠들어 있다는 소문. 그곳은 고대의 강력한 문명이 사라지며 남긴 유산이자, 동시에 저주받은 장소라고들 하지.”
    “저주라니요?”
    “그곳에 들어간 자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거나, 돌아오더라도 미치광이가 되어 헛소리만 지껄였다. 혹은 몸이 돌처럼 굳어져버리거나,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갔지. 사람들은 그곳을 ‘검은 심연’이라 불렀다.” 노인의 목소리에는 깊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저는 그 심연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합니다.” 무진의 눈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고집불통이로군. 허나, 나도 젊은 시절엔 그랬지. 좋다. 굳이 가겠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몇 가지는 알아두어야 할 거다.”
    노인은 탁자를 짚고 일어섰다. 벽난로의 불빛에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하다. ‘바람의 회랑’을 지나 ‘망자의 숲’을 거쳐야만 한다. 무엇보다, 입구를 찾는 것이 가장 어려울 터. 평원 북쪽 끝, ‘거인의 절벽’이라 불리는 곳에 숨겨진 문이 있다 전해진다. 하지만 단순한 바위산이 아닐 게다. 낡은 고문서에 이르기를, 밤이 되면 하늘의 별자리가 문을 가리킨다 했지. 북쪽 하늘에 떠오르는 ‘용의 눈물’ 별자리가 가장 밝게 빛날 때, 문이 드러날 것이다.”
    “용의 눈물이라…” 무진은 나직이 읊조렸다.
    “명심해라, 젊은이. 그 안에는 단순한 보물이 아니라, 세상을 뒤흔들 힘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힘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발길을 돌리는 것이 현명할 게다.”

    다음 날 새벽, 무진은 붉은 모래 평원 북쪽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섰다. 노인의 경고는 그의 마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모래 바람은 여전히 거칠었지만, 그의 걸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사흘 밤낮을 걸어, 마침내 무진은 노인이 말했던 ‘거인의 절벽’에 다다랐다. 거대한 바위산이 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었다. 절벽 아래는 거센 모래폭풍이 휘몰아쳐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무진은 경공(輕功)을 펼쳐 바람을 가르며 절벽 중턱에 위태롭게 섰다. 날카로운 눈으로 절벽 곳곳을 살폈으나, 노인이 말한 ‘숨겨진 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밤이 되자, 하늘에는 은하수가 찬란하게 펼쳐졌다. 노인이 말한 ‘용의 눈물’ 별자리를 찾기 위해 무진은 깊은 내공(內功)으로 시력을 끌어올렸다.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 유독 밝게 빛나는 일곱 개의 별이 용의 눈물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용의 눈물’ 별자리의 빛이 절벽의 한 지점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마치 거대한 빛의 손가락이 어둠 속의 비밀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무진은 그 빛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절벽의 암반 한가운데, 미세하게 빛나는 균열이 보였다. 얼핏 보면 그저 바위의 결처럼 보였지만, 무진의 예리한 감각은 그것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다가갔다. 균열은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지만, 안쪽에서 희미한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낡고 오래된 기운, 그러나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는 듯한 기운.

    무진은 오른손을 들어 균열에 대었다. 손바닥에서 뜨거운 내공이 흘러나갔다. 그의 내공이 닿자, 균열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이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바위가 천천히 양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문이 드러났다. 오랜 세월 동안 붉은 모래와 바람에 깎이고 퇴색되었지만, 고대 문명의 흔적이 역력한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문 뒤에서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쿰쿰한 흙냄새, 그리고 오랫동안 갇혀있던 비밀의 냄새가 밀려 나왔다.

    무진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는 허리에 찬 작은 등불을 꺼내 불을 붙였다. 등불의 희미한 불빛이 어둠을 가르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심장을 움켜쥐는 듯했다.

    수백 개의 계단이 끝없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 양쪽으로는 거대한 석상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형상들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기괴한 조각상들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무진을 노려보는 듯했다. 계단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고, 그 문자들 사이사이에는 잊혀진 문명의 상징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아래에서는 알 수 없는 웅장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나 냄새가 아니었다. 마치 수천 년의 세월이 응축된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무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내공이 조용히 순환하기 시작했다. 그는 검은 천으로 감싸두었던 등 뒤의 것을 천천히 풀어냈다. 단단한 검집에 든 검, ‘흑영(黑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검기가 등불의 빛을 받아 희미하게 번뜩였다.

    “이곳이로군… 검은 심연.”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첫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미지의 지하 유적이, 그에게 숨겨왔던 수천 년의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던전 탐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 137화: 검은 심장부의 그림자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낡은 철제 복도를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심장박동처럼 울렸다. 강하준은 숨을 죽인 채 손목에 찬 조악한 야광석 나침반을 응시했다. 제국력 503년, 수도 아델라를 중심으로 번성하던 대제국 ‘아스타르’는 이제 끝없는 탐욕과 부패로 곪아 터진 거대한 시체나 다름없었다. 평민들의 고혈을 빨아 지은 황궁의 금빛 지붕 아래, 수많은 이들이 굶주리고 죽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시체의 심장부로 걸어 들어가는 중이었다.

    “하준님, 이쪽입니다.”

    앞서가던 이설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그녀의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불과 스무 살 남짓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설아는 붉은 새벽의 가장 유능한 척후병이었다. 타고난 은신술과 예리한 감각은 우리가 이 지옥 같은 곳을 헤쳐 나가는 유일한 길잡이였다.

    우리가 들어선 곳은 제국이 수십 년 전 봉인했던 고대 유적, ‘검은 심장부’라 불리는 던전의 최하층이었다. 겉으로는 단순한 폐광처럼 보였지만, 이곳은 한때 제국의 잔혹한 실험과 기밀 병기 개발이 이루어지던 비밀 연구 시설이었다. 반란군 ‘붉은 새벽’이 이곳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 제국의 숨겨진 치명적인 약점, 혹은 그들의 기반을 뒤흔들 만한 기밀 문서가 이곳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기 때문이다.

    “복도 끝에 감지 장치 잔해가 보입니다. 작동하진 않는 것 같지만…… 조심하는 게 좋겠습니다.”

    설아의 말에 뒤따르던 박웅철이 묵직한 거한의 몸을 낮췄다. 한때 제국군의 강철 방패로 불렸던 그는, 자신의 상관이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는 제국에 등을 돌렸다. 그 후 붉은 새벽의 가장 강력한 창이자 방패가 되어주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양날 도끼는 녹슬었지만, 여전히 위압적인 기운을 풍겼다.

    “젠장, 여기 공기는 여전히 지독하군. 쇠 냄새에… 뭔가 타는 듯한 냄새까지.”

    웅철이 낮게 투덜거렸다. 그 냄새는 단순히 녹슨 철의 냄새가 아니었다. 낡은 전선이 타는 듯한 고약한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피 냄새가 섞여 있었다. 과거 이곳에서 희생된 수많은 생명들의 잔재일까.

    하준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손에는 낡은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제국의 최신 병기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구식 무기였지만, 수많은 전투를 겪으며 그의 손에 완벽하게 길들여진 친구였다.

    “발소리 조심해. 아무리 폐쇄된 곳이라지만, 제국 놈들이 이곳을 완전히 포기했을 리 없어. 분명히 뭔가 남겨두었을 거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앞서가던 설아가 멈칫하며 손을 들어 올렸다.
    ‘끼이익…… 철컹.’
    어둠 속에서 희미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소리 같았다.

    “어… 움직입니다. 복도 저편에서.” 설아의 목소리에 미약한 떨림이 섞였다.

    하준은 재빨리 몸을 벽에 붙였다. 웅철 역시 그의 거대한 도끼를 앞으로 내세우며 자세를 잡았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다가오는 그림자. 점차 형태를 갖춰가는 그것은 제국의 자동 방어 병기인 ‘철혈 감시병’이었다. 녹슬고 낡았지만, 여전히 두 개의 붉은 센서 눈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철혈 감시병.’ 과거 제국이 반란군 토벌에 사용했던 무인 기동 병기다. 단단한 강철 장갑과 팔에 달린 기관총은 웬만한 보병 분대를 단숨에 갈아버릴 수 있었다. 이곳에 이렇게 낡은 구형 병기가 아직 남아있을 줄이야.

    “망할, 작동 정지된 줄 알았는데!” 웅철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감시병의 붉은 눈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우리 쪽으로 고정되었다. 이내 경고음이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삐이이- 위협 감지. 제거 프로토콜 가동.’
    기계적인 목소리가 음산하게 복도를 울렸다.

    “젠장! 설아, 후퇴 준비!” 하준이 외쳤다. “웅철, 시선 끌어! 내가 약점 노린다!”

    웅철은 이미 망설임 없이 앞으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거대한 도끼를 휘두르며 철혈 감시병의 주의를 끌었다.
    “이 망할 깡통! 죽은 지 수십 년은 되었어야지!”
    웅철의 도끼가 감시병의 강철 장갑에 부딪히며 ‘꽝!’ 하는 둔탁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감시병은 미동도 없이 팔을 들어 올렸다. ‘드르륵륵!’ 기관총 포구가 회전하며 불을 뿜으려는 찰나였다.

    그 순간, 하준의 권총이 불을 뿜었다. ‘탕! 탕!’ 연속된 총성이 복도를 가로질렀다. 하준이 노린 곳은 철혈 감시병의 붉은 센서 눈이었다. 두 발의 총알이 정확히 센서 눈을 꿰뚫었다.

    ‘지이잉- 에러 발생. 시야 손실.’

    감시병의 움직임이 순간 멈칫했다. 붉은 눈이 사라진 자리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하지만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었다. 시야를 잃은 감시병은 마치 짐승처럼 무작위로 팔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기관총이 웅철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웅철이 간발의 차이로 몸을 숙였다.

    “하준님, 이쪽입니다! 비상 통로!”

    설아가 복도 벽에 숨겨져 있던 낡은 철문 하나를 찾아냈다. 녹슬었지만, 제국군 비상 탈출 표식이 희미하게 보였다.
    하준은 남은 총알 두 발을 감시병의 동체 중앙, 낡은 전원 코어로 보이는 부분에 박아 넣었다. ‘팟!’ 하는 짧은 폭발음과 함께 감시병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스으으….’ 하며 연기가 피어올랐다.

    “빨리! 시간 없어!”

    셋은 재빨리 비상 통로로 몸을 피했다. 철문이 ‘쾅!’ 하고 닫히자, 바깥의 소음이 아득해졌다. 복도 안은 훨씬 좁고, 더욱 깊은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공기는 여전히 축축하고 답답했다. 이곳은 비상 통로라기보다는 단순한 환기구에 가까웠다.

    “휴…… 망할. 이런 낡은 것까지 작동하고 있을 줄이야.” 웅철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벽에 기댔다.

    “제국은 망해가도, 그들이 만든 살상 병기는 끈질기게 살아남는군요.” 설아가 씁쓸하게 말했다.

    하준은 권총의 탄창을 교체하며 주위를 살폈다. 이 비상 통로는 완만한 경사를 따라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전에 우리가 파악했던 지도에는 없는 길이었다.
    “이쪽이 더 깊은 곳으로 가는 길인 것 같습니다. 설아, 탐지.”

    설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바닥에 웅크려 앉아 작은 광물을 내려놓았다. 광물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며 주변의 공간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고대 유물을 분석해 만든 탐지석으로, 미약한 마력이나 에너지 흐름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래쪽에서 강한 에너지 반응이 감지됩니다. 이전에 감지된 반응과는 다른 종류의 에너지입니다.” 설아가 눈을 감고 탐지석의 파동에 집중하며 말했다. “지… 지상에서 감지된 제국의 마력로는 아닙니다. 훨씬 오래되고, 강력한… 하지만 어딘가 뒤틀린.”

    하준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전에 이곳에 잠들어 있다고 알려진 것은 ‘문서’였다. 하지만 설아가 감지한 것은 ‘에너지’. 게다가 ‘뒤틀렸다’는 표현은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뒤틀렸다니? 위험한 건가?” 웅철이 물었다.

    설아가 눈을 떴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명백한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확실하진 않지만, 생명체와 기계의 혼합체 같은 느낌입니다. 이전에 제국이 생체 실험을 했다는 보고가 있었죠… 혹시 이 아래에.”

    “제국은 늘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것을 탐했지.” 하준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평민들을 쥐어짜 실험 대상으로 삼고, 금지된 지식에 손을 댔어. 어쩌면 우리가 찾던 것이 단순한 문서가 아닐지도 모르겠군.”

    그들의 시선은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비상 통로의 끝을 향했다. 미지의 위협, 그리고 반란의 희망이 공존하는 그곳.
    우리는 과연 이 검은 심장부에서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그리고 그 발견은, 과연 붉은 새벽에 승리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
    하준은 권총을 단단히 고쳐 쥐었다. 심장은 뛰고 있었지만, 망설일 틈은 없었다.

    “가자.”

    나직이 내뱉은 그의 말에, 셋은 다시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들의 발목을 잡았지만, 그들에게는 물러설 곳이 없었다. 제국의 심장을 파헤쳐, 세상을 뒤바꿀 그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들의 어깨에는 굶주린 백성들의 절규와 피 묻은 희망이 짊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그것은 제국의 마지막 비밀이자, 동시에 그들의 가장 잔혹한 함정일 수도 있었다.
    통로 끝에서, 섬뜩한 붉은빛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피 묻은 제국의 눈동자처럼,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 무협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제1장: 붉은 모래 바람 속 그림자

    붉은 모래 평원의 바람은 언제나 사나웠다. 모래는 칼날처럼 피부를 스쳤고, 끝없이 펼쳐진 황야는 망각의 장막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했다. 그런 황량함 속에서도 한 사내가 묵묵히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닳고 닳은 가죽 옷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으나, 그의 눈빛만은 맑고 흔들림이 없었다. 등에는 검은 천으로 감싼 기다란 것이 비스듬히 메어져 있었다.

    그의 이름은 무진(無辰).

    어느 누구도 그의 과거를 알지 못했고,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가 한번 목표를 정하면 결코 물러서는 법이 없다는 것과, 그의 검술이 예사롭지 않다는 소문만이 간간이 무림에 떠돌 뿐이었다.

    수평선에 해가 기울자, 거대한 바위산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무진은 그림자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낮 동안 작열하던 태양의 열기가 사라지고, 밤의 한기가 서서히 대지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바위산 아래 움푹 파인 동굴 어귀에 다다랐다. 이곳은 붉은 모래 평원 중앙에 위치한 유일한 오아시스, ‘고요의 샘’이라 불리는 작은 쉼터였다. 작고 허름한 주루(酒樓)가 고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주루 안은 붉은 모흙 벽난로의 불꽃만이 유일한 온기였다. 고작 서너 명의 늙은 상인들과 짐꾼들이 웅성이고 있을 뿐이었다. 무진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탁자 위에 놓인 투박한 나무잔에 든 맹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은 창밖의 어둠이 아닌, 벽난로 옆에서 홀로 술잔을 기울이는 백발의 노인에게 닿았다. 노인의 눈빛은 흐릿했지만, 간혹 번뜩이는 섬광이 예사롭지 않음을 암시했다.

    잠시 후, 노인은 빈 술병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놈의 술도 예전 같지가 않아. 혀끝에서 맴도는 씁쓸함이 꼭 이놈의 인생 같구나.”

    무진은 조용히 일어나 노인의 탁자로 다가갔다.
    “어르신, 혼자 드시기에 외로우실 듯하여.”

    노인은 고개를 들어 무진을 힐끗 보더니, 피식 웃었다.
    “젊은 것이 웬 오지랖이냐. 허나, 그 눈빛이 제법 날카롭군. 어디, 술이나 한잔 따라 보아라.”

    무진은 노인의 술잔에 맑은 증류주를 채웠다. 노인은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는 껄껄 웃었다.
    “이만하면 되었느냐?”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무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허허, 역시. 사내들이 이유 없이 술잔을 권하는 법은 없지. 무엇이 궁금하냐?” 노인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사흘 길을 가면, ‘잊혀진 지하 유적’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노인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주루 안의 모든 소란이 순간 멈춘 듯했다.
    “그것을 어찌 알았느냐?” 노인의 목소리에 경계심이 스쳤다.
    “떠도는 소문일 뿐입니다. 그곳에 대해 아는 것이 있으십니까?”
    노인은 술잔을 내려놓더니, 벽난로의 불꽃을 응시했다. 긴 침묵이 흘렀다.
    “젊은이, 가지 마라. 그곳은 인간의 발길이 닿아서는 아니 될 곳이다.”
    “이유가 있습니까?”
    “수백 년 전, 아니 어쩌면 수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다. 이 붉은 모래 평원 아래, 거대한 지하 도시가 잠들어 있다는 소문. 그곳은 고대의 강력한 문명이 사라지며 남긴 유산이자, 동시에 저주받은 장소라고들 하지.”
    “저주라니요?”
    “그곳에 들어간 자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거나, 돌아오더라도 미치광이가 되어 헛소리만 지껄였다. 혹은 몸이 돌처럼 굳어져버리거나,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어갔지. 사람들은 그곳을 ‘검은 심연’이라 불렀다.” 노인의 목소리에는 깊은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저는 그 심연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합니다.” 무진의 눈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고집불통이로군. 허나, 나도 젊은 시절엔 그랬지. 좋다. 굳이 가겠다면 말리진 않겠다만, 몇 가지는 알아두어야 할 거다.”
    노인은 탁자를 짚고 일어섰다. 벽난로의 불빛에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하다. ‘바람의 회랑’을 지나 ‘망자의 숲’을 거쳐야만 한다. 무엇보다, 입구를 찾는 것이 가장 어려울 터. 평원 북쪽 끝, ‘거인의 절벽’이라 불리는 곳에 숨겨진 문이 있다 전해진다. 하지만 단순한 바위산이 아닐 게다. 낡은 고문서에 이르기를, 밤이 되면 하늘의 별자리가 문을 가리킨다 했지. 북쪽 하늘에 떠오르는 ‘용의 눈물’ 별자리가 가장 밝게 빛날 때, 문이 드러날 것이다.”
    “용의 눈물이라…” 무진은 나직이 읊조렸다.
    “명심해라, 젊은이. 그 안에는 단순한 보물이 아니라, 세상을 뒤흔들 힘이 잠들어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힘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법이다. 그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발길을 돌리는 것이 현명할 게다.”

    다음 날 새벽, 무진은 붉은 모래 평원 북쪽을 향해 다시 길을 나섰다. 노인의 경고는 그의 마음을 더욱 굳건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모래 바람은 여전히 거칠었지만, 그의 걸음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사흘 밤낮을 걸어, 마침내 무진은 노인이 말했던 ‘거인의 절벽’에 다다랐다. 거대한 바위산이 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었다. 절벽 아래는 거센 모래폭풍이 휘몰아쳐 접근조차 쉽지 않았다. 무진은 경공(輕功)을 펼쳐 바람을 가르며 절벽 중턱에 위태롭게 섰다. 날카로운 눈으로 절벽 곳곳을 살폈으나, 노인이 말한 ‘숨겨진 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밤이 되자, 하늘에는 은하수가 찬란하게 펼쳐졌다. 노인이 말한 ‘용의 눈물’ 별자리를 찾기 위해 무진은 깊은 내공(內功)으로 시력을 끌어올렸다.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 유독 밝게 빛나는 일곱 개의 별이 용의 눈물처럼 이어져 있었다.

    그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용의 눈물’ 별자리의 빛이 절벽의 한 지점을 향해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마치 거대한 빛의 손가락이 어둠 속의 비밀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무진은 그 빛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절벽의 암반 한가운데, 미세하게 빛나는 균열이 보였다. 얼핏 보면 그저 바위의 결처럼 보였지만, 무진의 예리한 감각은 그것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다가갔다. 균열은 손가락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지만, 안쪽에서 희미한 기운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낡고 오래된 기운, 그러나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힘이 담겨 있는 듯한 기운.

    무진은 오른손을 들어 균열에 대었다. 손바닥에서 뜨거운 내공이 흘러나갔다. 그의 내공이 닿자, 균열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이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바위가 천천히 양옆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문이 드러났다. 오랜 세월 동안 붉은 모래와 바람에 깎이고 퇴색되었지만, 고대 문명의 흔적이 역력한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문 뒤에서는 차가운 공기와 함께 쿰쿰한 흙냄새, 그리고 오랫동안 갇혀있던 비밀의 냄새가 밀려 나왔다.

    무진은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문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그는 허리에 찬 작은 등불을 꺼내 불을 붙였다. 등불의 희미한 불빛이 어둠을 가르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심장을 움켜쥐는 듯했다.

    수백 개의 계단이 끝없이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계단 양쪽으로는 거대한 석상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형상들은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짐승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가진 기괴한 조각상들이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무진을 노려보는 듯했다. 계단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고, 그 문자들 사이사이에는 잊혀진 문명의 상징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아래에서는 알 수 없는 웅장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어둠이나 냄새가 아니었다. 마치 수천 년의 세월이 응축된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무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내공이 조용히 순환하기 시작했다. 그는 검은 천으로 감싸두었던 등 뒤의 것을 천천히 풀어냈다. 단단한 검집에 든 검, ‘흑영(黑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검기가 등불의 빛을 받아 희미하게 번뜩였다.

    “이곳이로군… 검은 심연.”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첫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미지의 지하 유적이, 그에게 숨겨왔던 수천 년의 비밀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 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폐허 속, 나는 낡은 철검을 움켜쥔 채 발소리마저 죽이며 나아갔다. 수십 년 전, 천지의 대변동 이후 영광을 잃고 잊혀진 청운문의 약원(藥園) 터였다. 한때 희귀한 영초(靈草)들이 풍성하게 자라던 곳은 이제 뒤틀린 괴식물들의 늪지대가 되어 있었다. 공기는 썩은 흙냄새와 역겨운 단내, 그리고 알 수 없는 독기의 혼합물로 가득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풀 한 포기, 흙 한 줌조차도 평범하지 않은 이 땅은 살아남기 위해선 단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부서진 돌멩이와 꺾인 나무뿌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내 심장을 죄는 불협화음 같았다. 이 거대한 죽음의 숲에서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단 하나, 절망적인 삶을 연명시켜 줄 한 줄기 희망이었다.

    “젠장… 이래선 한 시간도 버티기 힘들겠군.”

    내 영력(靈力)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며칠 밤낮을 영석(靈石) 한 조각 없이 움직인 탓에, 온몸의 기혈(氣血)이 메마른 가지처럼 시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몸으로 약원에 깊숙이 들어오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며칠 전, 썩은 독수(毒水)에 상처 입은 동료, 소윤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녀를 살릴 영약(靈藥)은 오직 이곳, 폐허가 된 약원 깊숙한 곳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변이된 괴식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녹슨 검 끝으로 넝쿨을 헤치자, 진득한 액체가 묻어 나왔다. 섬뜩한 핏빛이었다. 이곳의 식물들은 더 이상 햇빛과 물을 통해 양분을 얻지 않았다. 부패한 영기(靈氣)와, 가끔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불운한 영수(靈獸)들의 피를 흡수하며 자라났다.

    그때였다. 내 시야 저 너머, 뒤틀린 나무뿌리가 얽힌 틈새에서 섬광처럼 붉게 빛나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저것은… 분명 ‘혈선삼(血線蔘)’이었다! 희귀하기로는 최고로 꼽히는 영약 중 하나. 부패한 영기에 오염되지 않고 저리도 선명한 핏빛을 띠고 있다는 것은, 아직 그 효능이 온전히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소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

    하지만 희망은 언제나 절망과 함께 찾아오는 법. 혈선삼 주변에는 거대한 덩굴들이 마치 살아있는 팔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뿌리줄기 하나하나가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다. 무엇보다 섬뜩했던 것은, 그 덩굴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수많은 동물의 뼈들이었다. 짐승의 것인 줄 알았던 핏빛 액체가 내 발에 묻었던 것은, 바로 이 덩굴에 걸려 희생된 영수들의 피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덩굴들이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약원의 독기와 부패한 영기를 흡수하며 수십 년간 변이된 괴물, ‘혈독화(血毒花)’였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식충식물 같았다. 중앙에는 붉은색 꽃봉오리가 기분 나쁘게 펄럭이며 독특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향기는 마비성 독을 품고 있어, 멀리서 맡아도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하아… 하필이면 이런 곳에…”

    혈독화는 숙주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다는 전설 속 식물이었다. 이 거대한 괴물은 아마 청운문이 멸망하던 날, 모든 영약과 영수들의 피를 흡수하며 탄생한 것일 터였다. 나는 검을 고쳐 쥐었다. 무모한 싸움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소윤을 살려야 했다.

    나는 폐부를 쥐어짜듯 마지막 남은 영력을 끌어모았다. 전신에 미약하게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비영보(飛影步)’. 내가 익힌 보법 중 가장 빠르지만, 영력 소모가 극심한 기술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혈독화의 덩굴들 사이로 돌진했다.

    쉬이이익!

    내가 움직이자마자, 혈독화의 거대한 덩굴들이 뱀처럼 솟아올랐다. 마치 나의 움직임을 예측이라도 한 듯, 빈틈없이 사방에서 조여들어 왔다. 덩굴 끝에 달린 날카로운 가시들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가시들을 피하며 혈선삼이 있는 중앙을 향해 몸을 던졌다.

    영력의 흐름이 불안정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발소리가 거칠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덩굴 하나가 내 왼쪽 어깨를 스쳤다. 날카로운 가시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깊은 상처가 남았다. 욱신거리는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더욱 속도를 냈다.

    타겟은 혈독화의 가장 거대한 꽃봉오리. 그곳이 바로 이 괴물의 핵이자 가장 약한 부위라고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크아아악!”

    검에 모든 남은 영력을 집중했다. 검날이 푸른빛으로 섬광처럼 빛났다. 혈독화의 덩굴들이 나를 덮치기 직전,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검을 휘둘렀다. ‘천뢰검결(天雷劍訣)’의 첫 번째 초식, ‘뇌광참(雷光斬)’. 비록 제대로 된 영력 없이 휘두른 허접한 흉내에 불과했지만, 나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콰앙!

    검 끝이 꽃봉오리에 닿자마자, 응축된 영력이 폭발했다. 붉은 꽃잎이 산산조각 났다. 진득한 핏빛 액체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혈독화는 거대한 몸뚱이를 떨며 서서히 축 늘어졌다. 덩굴들의 움직임이 멈추고, 독한 향기도 옅어졌다.

    털썩.

    모든 힘이 풀린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검을 쥔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 떨리고 있었다. 왼쪽 어깨의 상처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극심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혈선삼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기어가는 듯 움직여 혈선삼 앞으로 다가갔다. 뽑아낸 혈선삼은 생각보다 작고 붉은 기운이 약했다. 변이된 약원 속에서 버티느라 상당 부분 영기를 잃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소윤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살았다. 소윤이…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약원 전체를 울리는 둔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땅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혈독화와의 격전이 다른 것을 불러들인 것이 분명했다. 피와 독기, 영력의 잔해. 이 모든 것이 거대한 포식자를 끌어들이는 미끼가 되었을 터였다.

    나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약원의 입구 쪽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눈. 폐허가 된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 중 하나, ‘만독귀수(萬毒鬼獸)’였다. 온몸이 독기에 절어 검붉은 비늘로 뒤덮인, 이빨 하나하나에 맹독이 흐르는 거대한 괴물.

    만독귀수는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그 거대한 덩치가 좁은 약원 입구를 가득 메웠다. 놈은 쩍 벌어진 입에서 녹색 독액을 뚝뚝 흘리며 나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남은 영력은 단 한 줌도 없었고, 몸은 만신창이였다. 눈앞의 만독귀수는 내가 죽음을 맞이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절망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소윤을 살릴 희망은 손에 쥐었지만, 그것을 전해줄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인가.

    만독귀수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몸짓에 약원의 썩은 넝쿨들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는 간신히 핏빛 약초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절대로.

    폐허의 밤이,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밤에 맞서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다음 화에 계속.**

  • 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둑어둑한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폐허 속, 나는 낡은 철검을 움켜쥔 채 발소리마저 죽이며 나아갔다. 수십 년 전, 천지의 대변동 이후 영광을 잃고 잊혀진 청운문의 약원(藥園) 터였다. 한때 희귀한 영초(靈草)들이 풍성하게 자라던 곳은 이제 뒤틀린 괴식물들의 늪지대가 되어 있었다. 공기는 썩은 흙냄새와 역겨운 단내, 그리고 알 수 없는 독기의 혼합물로 가득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을 디뎠다. 풀 한 포기, 흙 한 줌조차도 평범하지 않은 이 땅은 살아남기 위해선 단 한순간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았다.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부서진 돌멩이와 꺾인 나무뿌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것은 내 심장을 죄는 불협화음 같았다. 이 거대한 죽음의 숲에서 내가 찾아야 할 것은 단 하나, 절망적인 삶을 연명시켜 줄 한 줄기 희망이었다.

    “젠장… 이래선 한 시간도 버티기 힘들겠군.”

    내 영력(靈力)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며칠 밤낮을 영석(靈石) 한 조각 없이 움직인 탓에, 온몸의 기혈(氣血)이 메마른 가지처럼 시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몸으로 약원에 깊숙이 들어오는 것은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며칠 전, 썩은 독수(毒水)에 상처 입은 동료, 소윤의 열기는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녀를 살릴 영약(靈藥)은 오직 이곳, 폐허가 된 약원 깊숙한 곳에서만 구할 수 있었다. 그마저도 변이된 괴식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아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녹슨 검 끝으로 넝쿨을 헤치자, 진득한 액체가 묻어 나왔다. 섬뜩한 핏빛이었다. 이곳의 식물들은 더 이상 햇빛과 물을 통해 양분을 얻지 않았다. 부패한 영기(靈氣)와, 가끔 이곳을 스쳐 지나가는 불운한 영수(靈獸)들의 피를 흡수하며 자라났다.

    그때였다. 내 시야 저 너머, 뒤틀린 나무뿌리가 얽힌 틈새에서 섬광처럼 붉게 빛나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저것은… 분명 ‘혈선삼(血線蔘)’이었다! 희귀하기로는 최고로 꼽히는 영약 중 하나. 부패한 영기에 오염되지 않고 저리도 선명한 핏빛을 띠고 있다는 것은, 아직 그 효능이 온전히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소윤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

    하지만 희망은 언제나 절망과 함께 찾아오는 법. 혈선삼 주변에는 거대한 덩굴들이 마치 살아있는 팔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뿌리줄기 하나하나가 강철처럼 단단해 보였다. 무엇보다 섬뜩했던 것은, 그 덩굴 사이사이에 박혀 있는 수많은 동물의 뼈들이었다. 짐승의 것인 줄 알았던 핏빛 액체가 내 발에 묻었던 것은, 바로 이 덩굴에 걸려 희생된 영수들의 피였던 모양이었다.

    나는 숨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덩굴들이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약원의 독기와 부패한 영기를 흡수하며 수십 년간 변이된 괴물, ‘혈독화(血毒花)’였다.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식충식물 같았다. 중앙에는 붉은색 꽃봉오리가 기분 나쁘게 펄럭이며 독특한 향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향기는 마비성 독을 품고 있어, 멀리서 맡아도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하아… 하필이면 이런 곳에…”

    혈독화는 숙주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다는 전설 속 식물이었다. 이 거대한 괴물은 아마 청운문이 멸망하던 날, 모든 영약과 영수들의 피를 흡수하며 탄생한 것일 터였다. 나는 검을 고쳐 쥐었다. 무모한 싸움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소윤을 살려야 했다.

    나는 폐부를 쥐어짜듯 마지막 남은 영력을 끌어모았다. 전신에 미약하게 푸른 기운이 감돌았다. ‘비영보(飛影步)’. 내가 익힌 보법 중 가장 빠르지만, 영력 소모가 극심한 기술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혈독화의 덩굴들 사이로 돌진했다.

    쉬이이익!

    내가 움직이자마자, 혈독화의 거대한 덩굴들이 뱀처럼 솟아올랐다. 마치 나의 움직임을 예측이라도 한 듯, 빈틈없이 사방에서 조여들어 왔다. 덩굴 끝에 달린 날카로운 가시들은 스치기만 해도 치명상이었다. 나는 아슬아슬하게 가시들을 피하며 혈선삼이 있는 중앙을 향해 몸을 던졌다.

    영력의 흐름이 불안정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발소리가 거칠어지고, 호흡이 가빠졌다. 덩굴 하나가 내 왼쪽 어깨를 스쳤다. 날카로운 가시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깊은 상처가 남았다. 욱신거리는 고통이 전신을 휩쓸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더욱 속도를 냈다.

    타겟은 혈독화의 가장 거대한 꽃봉오리. 그곳이 바로 이 괴물의 핵이자 가장 약한 부위라고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크아아악!”

    검에 모든 남은 영력을 집중했다. 검날이 푸른빛으로 섬광처럼 빛났다. 혈독화의 덩굴들이 나를 덮치기 직전,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검을 휘둘렀다. ‘천뢰검결(天雷劍訣)’의 첫 번째 초식, ‘뇌광참(雷光斬)’. 비록 제대로 된 영력 없이 휘두른 허접한 흉내에 불과했지만, 나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콰앙!

    검 끝이 꽃봉오리에 닿자마자, 응축된 영력이 폭발했다. 붉은 꽃잎이 산산조각 났다. 진득한 핏빛 액체가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혈독화는 거대한 몸뚱이를 떨며 서서히 축 늘어졌다. 덩굴들의 움직임이 멈추고, 독한 향기도 옅어졌다.

    털썩.

    모든 힘이 풀린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검을 쥔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 떨리고 있었다. 왼쪽 어깨의 상처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극심한 고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혈선삼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기어가는 듯 움직여 혈선삼 앞으로 다가갔다. 뽑아낸 혈선삼은 생각보다 작고 붉은 기운이 약했다. 변이된 약원 속에서 버티느라 상당 부분 영기를 잃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소윤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희미한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살았다. 소윤이… 살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약원 전체를 울리는 둔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땅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혈독화와의 격전이 다른 것을 불러들인 것이 분명했다. 피와 독기, 영력의 잔해. 이 모든 것이 거대한 포식자를 끌어들이는 미끼가 되었을 터였다.

    나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약원의 입구 쪽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붉은 눈. 폐허가 된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 중 하나, ‘만독귀수(萬毒鬼獸)’였다. 온몸이 독기에 절어 검붉은 비늘로 뒤덮인, 이빨 하나하나에 맹독이 흐르는 거대한 괴물.

    만독귀수는 피 냄새를 맡고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그 거대한 덩치가 좁은 약원 입구를 가득 메웠다. 놈은 쩍 벌어진 입에서 녹색 독액을 뚝뚝 흘리며 나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남은 영력은 단 한 줌도 없었고, 몸은 만신창이였다. 눈앞의 만독귀수는 내가 죽음을 맞이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절망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소윤을 살릴 희망은 손에 쥐었지만, 그것을 전해줄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인가.

    만독귀수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내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거대한 몸짓에 약원의 썩은 넝쿨들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나는 간신히 핏빛 약초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절대로.

    폐허의 밤이,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밤에 맞서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다음 화에 계속.**

  • 메카 액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42화. 붉은 노을 아래, 금지된 맹세

    강철 발굽이 행성 ‘에트리아’의 붉은 흙을 짓밟았다. 천둥매의 거대한 동체가 지축을 흔들며 전장을 가로질렀다. 시야에 가득 찬 섬광과 폭음 속에서도 강휘의 시선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전투는 격렬했다. 놈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좌익 사수, 산개하라! 제3방어선 돌파 시도 중이다!”

    통신망을 타고 사령관 한태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찢어질 듯 울려 퍼졌다. 강휘는 그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응답하며 왼손 조작간을 틀었다. 천둥매의 오른팔에 장착된 펄스 캐논이 굉음을 토하며 푸른 에너지를 뿜어냈다. 목표는 정확했다. 전방 300미터 지점, 놈들의 주력 메카인 ‘미명(未明)’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시야를 스쳐 지나가는 잔상에 강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반적인 미명과는 확연히 다른, 날렵하면서도 유려한 은빛 기체. 놈들의 지휘형 메카, ‘오리진(Origin)’. 그리고 그 기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하게도 익숙한 푸른 섬광.

    _안 돼…_

    강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저 오리진의 조종석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아니, 정확히는 누가 타고 *있을 수도* 있는지.

    “강휘 소령, 뭘 망설이나! 전방 목표물 조준!” 한태준 사령관의 불호령이 다시 귓전을 때렸다.

    강휘는 이를 악물었다.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이곳은 전장이다. 인간 연합과 Xylos 종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한복판. 개인적인 감정은 사치였다. 하지만…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과거의 한 조각을 떠올렸다.

    에트리아의 붉은 노을이 두 존재를 감싸 안았다. 인간의 체온과 이질적인 Xylos 종족의 차가운 피부가 닿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엘리아는 투명한 눈동자로 강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피부에 흐르는 미묘한 푸른 발광은 마치 별빛처럼 아름다웠다.

    “강휘… 이것은… 금지된 일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Xylos 종족 특유의 공명음이 섞여 있었지만, 수십 번의 노력 끝에 인간의 언어를 익힌 그녀의 말투는 이제 완벽에 가까웠다.

    강휘는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손가락 끝에 닿는 그녀의 피부는 차갑지만, 그 안에서 뛰는 미약한 맥동은 생명으로 가득했다.

    “알아. 하지만… 멈출 수가 없어.”

    어째서였을까.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포로 수용소의 차가운 철창 너머에서 마주했던 그 순간부터, 강휘의 심장은 다른 방식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Xylos 종족의 유전학자이자, 동시에 그들의 평화 협상단 대표였다. 하지만 휴전 협정은 결렬되었고, 그녀는 다시 인간의 포로가 되었다. 강휘는 그녀의 감시병이었고…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종족의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대가를 치르는 일이었다. 인간 사회에서는 ‘이종족과의 유대’는 반역에 가까운 행위로 취급되었다. Xylos 종족 또한 외부 종족과의 접촉, 특히 감정적인 교류를 엄격히 금지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태생부터 금지되었고, 들키는 순간 모든 것을 잃을 터였다. 목숨까지도.

    엘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떨렸다. “우리는 너무 달라. 심장의 박동부터, 숨 쉬는 공기까지…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반대하는 이유야.”

    “상관 없어.” 강휘는 그녀를 더욱 끌어안았다. “다르다는 건, 서로를 더 많이 알아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심장의 박동이 달라도… 서로에게 울릴 수 있다면, 그게 사랑 아니겠어?”

    그의 말에 엘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붉은 노을빛이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에 부딪혀 오묘한 빛을 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만약… 우리가 함께 한다면, 이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거야. 우리는… 모두에게 배척당할 거야.”

    “알아. 하지만… 후회하진 않을 거야. 널 사랑한 것을.”

    그 순간, 멀리서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인간 연합 순찰대의 접근이었다. 둘은 황급히 몸을 숨겼고, 강휘는 다시 차가운 감시병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들의 금지된 맹세는 붉은 노을 아래, 비밀스럽게 심장 깊숙이 각인되었다.

    “강휘! 집중해!”

    한태준 사령관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강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놈들의 오리진 기체는 놀라운 기동성으로 아군 전선을 유린하고 있었다. 그 기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섬광은, 마치 엘리아의 피부에서 발산되던 빛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오리진이 아군 후방으로 빠르게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목표는 명확했다. 사령부 지휘관. 한태준 사령관의 주력 메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오리진의 캐논이 불을 뿜었다.

    _안 돼!_

    강휘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천둥매의 강력한 부스터가 굉음을 내며 전장을 가로질렀다. 그는 아군 지휘관을 지키기 위해 오리진의 예상 경로에 자신의 기체를 밀어 넣었다. 거대한 충격이 천둥매의 동체를 강타했다. 방어막이 번쩍이며 겨우 공격을 막아냈다.

    “강휘 소령! 무모한 짓이다!” 한태준 사령관의 목소리에 분노와 당황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강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오리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리진은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 한번 캐논을 천둥매에게 겨냥했다. 그 순간, 강휘의 망막에 오리진의 통신 암호가 잡혔다.

    익숙한 암호. 엘리아만이 사용하는 고유의 암호.

    _엘리아… 네가 정말 거기에 있는 건가._

    오리진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려던 찰나, 강휘는 천둥매의 비상 통신 채널을 열었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메시지를 짧게 송신했다.

    “…코드: 붉은 노을.”

    전장 전체가 일순 정지한 듯했다. 인간 연합군과 Xylos 종족 모두 강휘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혼란스러워했다. Xylos의 오리진 기체는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리진의 통신 시스템에서 강휘의 개인 채널로 답신이 날아왔다.

    익숙한,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도 낯선 음색. 엘리아의 목소리였다.

    “강휘… 정말 당신이었군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슬픔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네요.”

    “엘리아… 왜 여기 있는 거야?” 강휘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녀가 전장의 최전선에, 그것도 지휘형 메카를 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난… 내 종족을 위해 싸울 뿐이에요. 당신처럼.”

    “하지만… 너무 위험해.”

    “이 전쟁터에서 위험하지 않은 자가 있나요? 당신을 향해 무기를 겨눠야 하는 이 상황이… 나에겐 더 큰 고통이에요.”

    그녀의 말에 강휘의 심장이 저며 들었다. 그때, 한태준 사령관의 고함이 다시 터져 나왔다.

    “강휘 소령! 즉시 그 통신을 끊어! 반역이다! 적과 내통이라니!”

    강휘는 사령관의 명령을 무시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오리진, 그리고 그 안에 있을 엘리아만 보였다. 그는 자신의 메카 제어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위험한 버튼을 향해 움직였다.

    _이것은… 우리 둘 중 하나가 죽는 싸움이 될 거야._

    그러나 그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붉은 노을 아래 나눴던 맹세였다. 서로에게 울렸던 심장의 박동.

    “엘리아.” 강휘는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널 잃을 수 없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천둥매의 모든 무장 시스템이 재활성화되었다. 그러나 그가 조준한 것은 적군 진영의 가장 약한 방어선이었다. 그것은 Xylos 종족을 향한 공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엘리아를 구하기 위한 길을 여는 행위였다.**

    강휘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정했다. 이 전쟁에서, 그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다른 길을 택할 것이다.

    “코드: 해방.”

    천둥매의 주포가 맹렬한 섬광을 내뿜었다. 그것은 명령 불복종이자, 모든 것을 건 도박의 시작이었다. 전장의 붉은 흙 위에서, 금지된 사랑을 위한 거대한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강휘의 심장만이, 미친 듯이 격렬하게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 메카 액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42화. 붉은 노을 아래, 금지된 맹세

    강철 발굽이 행성 ‘에트리아’의 붉은 흙을 짓밟았다. 천둥매의 거대한 동체가 지축을 흔들며 전장을 가로질렀다. 시야에 가득 찬 섬광과 폭음 속에서도 강휘의 시선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전투는 격렬했다. 놈들은 물러서지 않았고, 우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좌익 사수, 산개하라! 제3방어선 돌파 시도 중이다!”

    통신망을 타고 사령관 한태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찢어질 듯 울려 퍼졌다. 강휘는 그의 명령에 기계적으로 응답하며 왼손 조작간을 틀었다. 천둥매의 오른팔에 장착된 펄스 캐논이 굉음을 토하며 푸른 에너지를 뿜어냈다. 목표는 정확했다. 전방 300미터 지점, 놈들의 주력 메카인 ‘미명(未明)’이 서서히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시야를 스쳐 지나가는 잔상에 강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반적인 미명과는 확연히 다른, 날렵하면서도 유려한 은빛 기체. 놈들의 지휘형 메카, ‘오리진(Origin)’. 그리고 그 기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하게도 익숙한 푸른 섬광.

    _안 돼…_

    강휘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저 오리진의 조종석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아니, 정확히는 누가 타고 *있을 수도* 있는지.

    “강휘 소령, 뭘 망설이나! 전방 목표물 조준!” 한태준 사령관의 불호령이 다시 귓전을 때렸다.

    강휘는 이를 악물었다.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이곳은 전장이다. 인간 연합과 Xylos 종족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 한복판. 개인적인 감정은 사치였다. 하지만…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과거의 한 조각을 떠올렸다.

    에트리아의 붉은 노을이 두 존재를 감싸 안았다. 인간의 체온과 이질적인 Xylos 종족의 차가운 피부가 닿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엘리아는 투명한 눈동자로 강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피부에 흐르는 미묘한 푸른 발광은 마치 별빛처럼 아름다웠다.

    “강휘… 이것은… 금지된 일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Xylos 종족 특유의 공명음이 섞여 있었지만, 수십 번의 노력 끝에 인간의 언어를 익힌 그녀의 말투는 이제 완벽에 가까웠다.

    강휘는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손가락 끝에 닿는 그녀의 피부는 차갑지만, 그 안에서 뛰는 미약한 맥동은 생명으로 가득했다.

    “알아. 하지만… 멈출 수가 없어.”

    어째서였을까.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 포로 수용소의 차가운 철창 너머에서 마주했던 그 순간부터, 강휘의 심장은 다른 방식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Xylos 종족의 유전학자이자, 동시에 그들의 평화 협상단 대표였다. 하지만 휴전 협정은 결렬되었고, 그녀는 다시 인간의 포로가 되었다. 강휘는 그녀의 감시병이었고… 그리고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종족의 경계를 넘는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대가를 치르는 일이었다. 인간 사회에서는 ‘이종족과의 유대’는 반역에 가까운 행위로 취급되었다. Xylos 종족 또한 외부 종족과의 접촉, 특히 감정적인 교류를 엄격히 금지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태생부터 금지되었고, 들키는 순간 모든 것을 잃을 터였다. 목숨까지도.

    엘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떨렸다. “우리는 너무 달라. 심장의 박동부터, 숨 쉬는 공기까지… 이 모든 것이 우리를 반대하는 이유야.”

    “상관 없어.” 강휘는 그녀를 더욱 끌어안았다. “다르다는 건, 서로를 더 많이 알아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해. 심장의 박동이 달라도… 서로에게 울릴 수 있다면, 그게 사랑 아니겠어?”

    그의 말에 엘리아는 고개를 숙였다. 붉은 노을빛이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에 부딪혀 오묘한 빛을 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만약… 우리가 함께 한다면, 이 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을 거야. 우리는… 모두에게 배척당할 거야.”

    “알아. 하지만… 후회하진 않을 거야. 널 사랑한 것을.”

    그 순간, 멀리서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인간 연합 순찰대의 접근이었다. 둘은 황급히 몸을 숨겼고, 강휘는 다시 차가운 감시병의 얼굴로 돌아갔다. 그들의 금지된 맹세는 붉은 노을 아래, 비밀스럽게 심장 깊숙이 각인되었다.

    “강휘! 집중해!”

    한태준 사령관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강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전장은 아비규환이었다. 놈들의 오리진 기체는 놀라운 기동성으로 아군 전선을 유린하고 있었다. 그 기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섬광은, 마치 엘리아의 피부에서 발산되던 빛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오리진이 아군 후방으로 빠르게 파고드는 것이 보였다. 목표는 명확했다. 사령부 지휘관. 한태준 사령관의 주력 메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오리진의 캐논이 불을 뿜었다.

    _안 돼!_

    강휘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천둥매의 강력한 부스터가 굉음을 내며 전장을 가로질렀다. 그는 아군 지휘관을 지키기 위해 오리진의 예상 경로에 자신의 기체를 밀어 넣었다. 거대한 충격이 천둥매의 동체를 강타했다. 방어막이 번쩍이며 겨우 공격을 막아냈다.

    “강휘 소령! 무모한 짓이다!” 한태준 사령관의 목소리에 분노와 당황스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강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오리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오리진은 잠시 주춤하더니, 다시 한번 캐논을 천둥매에게 겨냥했다. 그 순간, 강휘의 망막에 오리진의 통신 암호가 잡혔다.

    익숙한 암호. 엘리아만이 사용하는 고유의 암호.

    _엘리아… 네가 정말 거기에 있는 건가._

    오리진이 다시 공격을 시작하려던 찰나, 강휘는 천둥매의 비상 통신 채널을 열었다. 그리고 누구도 예상치 못한 메시지를 짧게 송신했다.

    “…코드: 붉은 노을.”

    전장 전체가 일순 정지한 듯했다. 인간 연합군과 Xylos 종족 모두 강휘의 예상치 못한 행동에 혼란스러워했다. Xylos의 오리진 기체는 멈칫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리진의 통신 시스템에서 강휘의 개인 채널로 답신이 날아왔다.

    익숙한, 그러나 이제는 너무나도 낯선 음색. 엘리아의 목소리였다.

    “강휘… 정말 당신이었군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슬픔과 체념이 섞여 있었다. “우리는… 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네요.”

    “엘리아… 왜 여기 있는 거야?” 강휘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녀가 전장의 최전선에, 그것도 지휘형 메카를 타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난… 내 종족을 위해 싸울 뿐이에요. 당신처럼.”

    “하지만… 너무 위험해.”

    “이 전쟁터에서 위험하지 않은 자가 있나요? 당신을 향해 무기를 겨눠야 하는 이 상황이… 나에겐 더 큰 고통이에요.”

    그녀의 말에 강휘의 심장이 저며 들었다. 그때, 한태준 사령관의 고함이 다시 터져 나왔다.

    “강휘 소령! 즉시 그 통신을 끊어! 반역이다! 적과 내통이라니!”

    강휘는 사령관의 명령을 무시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오리진, 그리고 그 안에 있을 엘리아만 보였다. 그는 자신의 메카 제어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위험한 버튼을 향해 움직였다.

    _이것은… 우리 둘 중 하나가 죽는 싸움이 될 거야._

    그러나 그의 뇌리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붉은 노을 아래 나눴던 맹세였다. 서로에게 울렸던 심장의 박동.

    “엘리아.” 강휘는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널 잃을 수 없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천둥매의 모든 무장 시스템이 재활성화되었다. 그러나 그가 조준한 것은 적군 진영의 가장 약한 방어선이었다. 그것은 Xylos 종족을 향한 공격이 아니었다.

    오히려, **엘리아를 구하기 위한 길을 여는 행위였다.**

    강휘의 눈이 이글거렸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기로 결정했다. 이 전쟁에서, 그는 자신의 사랑을 위해 다른 길을 택할 것이다.

    “코드: 해방.”

    천둥매의 주포가 맹렬한 섬광을 내뿜었다. 그것은 명령 불복종이자, 모든 것을 건 도박의 시작이었다. 전장의 붉은 흙 위에서, 금지된 사랑을 위한 거대한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강휘의 심장만이, 미친 듯이 격렬하게 울리고 있을 뿐이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어둠이 깊어진 도시의 심장부, 낡았지만 번듯한 오피스텔 숲속에 박힌 내 보금자리는 고요했다. 민준, 스물아홉. 디지털 세상에서 홀로 생존하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유령. 노트북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시한 온라인 뉴스를 훑어보는 손가락은 피곤했지만,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밤이 주는 특유의 침묵은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날 밤의 시작은 사소했다.

    탁, 탁.
    주방 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별다른 의미 없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정리했던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건조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보일러를 약하게 틀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서늘한 기운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환기를 안 해서 그러나.’

    창문을 열까 잠시 고민했지만, 밖은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도시의 밤은 늘 그랬듯 웅성거렸지만, 왠지 모르게 오늘 밤은 그 소리마저 멀게 느껴졌다. 마치 이 아파트만이 거대한 유리벽 안에 갇힌 듯한 고립감.

    그때였다. 거실 천장에 달린 주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짧은 순간, 어둠이 찾아왔다 사라졌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젠장, 또야?”
    이 오피스텔은 지은 지 꽤 되었으니 전기가 불안정한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몇 달 전부터 간헐적으로 겪던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깜빡임이 멈추지 않았다. 규칙 없이 불이 들어왔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장난스럽게 건드리는 것처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불빛은 이제 거의 디스코텍처럼 빠르게 점멸하고 있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이봐, 장난치지 마.”
    공허한 거실에 내 목소리가 울렸다. 물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벽 스위치를 눌렀다. 틱, 틱. 스위치는 반응했지만, 불빛의 점멸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더 빠르고 거칠게.

    순간,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그리고 어둠. 완벽한 어둠이 나를 집어삼켰다. 익숙한 내 집 안에서 이렇게 깊은 어둠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손을 뻗으니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젠장, 정전인가?”
    휴대폰을 더듬어 찾아 플래시를 켰다. 좁은 빛줄기가 거실을 비추자, 방금 전까지 눈에 익었던 가구들이 낯선 그림자를 드리웠다. 빛이 닿지 않는 구석은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때, 내 뒤편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굳었다. 휴대폰 불빛을 서둘러 돌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부엌. 그곳에 놓여있던 냄비가 식탁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쨍그랑, 하고 깨진 것은 없었지만, 그 소리는 어둠 속에서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다.

    “누구…야?”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도 없는 집에, 냄비가 저절로 떨어질 리는 없었다. 바람? 창문은 닫혀있었다. 고양이? 나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았다.

    공포가 심장 박동을 가속시켰다. 나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차가운 기운이 이제는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거실장 위에 놓여있던 리모컨이 스르륵, 움직였다.
    천천히, 정말 천천히. 마치 투명한 손가락이 미는 것처럼. 리모컨은 모서리까지 이동하더니,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읍!”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건 환각이 아니었다. 분명 내 눈으로 본 현상이었다. 이성을 부여잡으려 애썼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심장은 이성이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이젠 공포를 넘어서 분노가 치밀었다.
    “누구냐고! 나와!”
    나는 소리쳤다. 내 목소리는 떨렸지만, 공포에 눌려있기만을 거부했다.
    그 순간, 거실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삐걱거리며 기울더니,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콰앙!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플래시 불빛이 파편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반짝였다.

    나는 더 이상 이 상황을 버틸 수 없었다.
    출입문으로 달아나야 했다.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현관을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차가운 손이 내 발목을 쥐는 것 같았다.
    “으악!”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발목을 잡았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환영인가? 아니, 그 차가운 감각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마치 얼음장 같은 손이 내 피부를 움켜쥐는 듯한 착각이었다.

    거실 끝, 창문 밖은 여전히 도시의 불빛으로 가득했지만, 이곳은 완전히 격리된 지옥이었다.
    창문 쪽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짙은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것은 키가 크고, 희미하고, 형태가 없는 검은 덩어리 같았다.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숨이 막혔다.
    “뭐, 뭐야…”
    그림자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주변 공기가 더욱 차가워지고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그림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흐릿한 사람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손을 뻗는 것 같았다.
    느릿하게,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 손가락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길고 앙상한.
    나는 필사적으로 기어서 뒤로 물러났다. 현관문은 코앞이었지만, 마치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내 등 뒤, 바로 현관문에서 철컥, 하고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콰앙!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밖은 도시의 불빛과 희미한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그 문턱을 넘어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열린 현관문 틈으로, 차가운 밤공기가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나는 희미한 속삭임을 들었다.

    *이젠…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어…*

    그 목소리는 내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지만, 동시에 내 머릿속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집 안의 모든 불빛이 다시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열린 현관문 너머의 도시가, 내 집 안의 기괴한 현상과 겹쳐지면서 일그러지는 듯했다.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 집 안은 지옥이 되었고, 저 문 밖의 세상도 더 이상 내가 알던 곳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 휴대폰 화면이 켜지며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자 불명. 내용은 단 한 문장.

    [생존을 시작해야 합니다.]

    집 안의 모든 불빛이 꺼지고, 완벽한 어둠 속에 나는 홀로 남겨졌다.
    더 이상 나의 안전한 보금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 기괴한 현상들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는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세상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어둠이 깊어진 도시의 심장부, 낡았지만 번듯한 오피스텔 숲속에 박힌 내 보금자리는 고요했다. 민준, 스물아홉. 디지털 세상에서 홀로 생존하는 이 시대의 전형적인 유령. 노트북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내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시시한 온라인 뉴스를 훑어보는 손가락은 피곤했지만, 잠은 쉬이 오지 않았다. 밤이 주는 특유의 침묵은 나를 더 예민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날 밤의 시작은 사소했다.

    탁, 탁.
    주방 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별다른 의미 없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마지막으로 정리했던 그릇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건조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보일러를 약하게 틀었지만, 이상하리만치 서늘한 기운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환기를 안 해서 그러나.’

    창문을 열까 잠시 고민했지만, 밖은 이미 자정을 넘긴 시간이었다. 도시의 밤은 늘 그랬듯 웅성거렸지만, 왠지 모르게 오늘 밤은 그 소리마저 멀게 느껴졌다. 마치 이 아파트만이 거대한 유리벽 안에 갇힌 듯한 고립감.

    그때였다. 거실 천장에 달린 주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번, 두 번. 짧은 순간, 어둠이 찾아왔다 사라졌다. 나는 눈을 찌푸렸다.
    “젠장, 또야?”
    이 오피스텔은 지은 지 꽤 되었으니 전기가 불안정한가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몇 달 전부터 간헐적으로 겪던 현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깜빡임이 멈추지 않았다. 규칙 없이 불이 들어왔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장난스럽게 건드리는 것처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불빛은 이제 거의 디스코텍처럼 빠르게 점멸하고 있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두근거렸다.

    “이봐, 장난치지 마.”
    공허한 거실에 내 목소리가 울렸다. 물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뻗어 벽 스위치를 눌렀다. 틱, 틱. 스위치는 반응했지만, 불빛의 점멸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더 빠르고 거칠게.

    순간,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그리고 어둠. 완벽한 어둠이 나를 집어삼켰다. 익숙한 내 집 안에서 이렇게 깊은 어둠을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손을 뻗으니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젠장, 정전인가?”
    휴대폰을 더듬어 찾아 플래시를 켰다. 좁은 빛줄기가 거실을 비추자, 방금 전까지 눈에 익었던 가구들이 낯선 그림자를 드리웠다. 빛이 닿지 않는 구석은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때, 내 뒤편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몸이 굳었다. 휴대폰 불빛을 서둘러 돌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부엌. 그곳에 놓여있던 냄비가 식탁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쨍그랑, 하고 깨진 것은 없었지만, 그 소리는 어둠 속에서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다.

    “누구…야?”
    목소리가 떨렸다. 아무도 없는 집에, 냄비가 저절로 떨어질 리는 없었다. 바람? 창문은 닫혀있었다. 고양이? 나는 반려동물을 키우지 않았다.

    공포가 심장 박동을 가속시켰다. 나는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차가운 기운이 이제는 온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거실장 위에 놓여있던 리모컨이 스르륵, 움직였다.
    천천히, 정말 천천히. 마치 투명한 손가락이 미는 것처럼. 리모컨은 모서리까지 이동하더니,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읍!”
    나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건 환각이 아니었다. 분명 내 눈으로 본 현상이었다. 이성을 부여잡으려 애썼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심장은 이성이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이젠 공포를 넘어서 분노가 치밀었다.
    “누구냐고! 나와!”
    나는 소리쳤다. 내 목소리는 떨렸지만, 공포에 눌려있기만을 거부했다.
    그 순간, 거실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삐걱거리며 기울더니, 순식간에 바닥으로 추락했다. 콰앙!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플래시 불빛이 파편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반짝였다.

    나는 더 이상 이 상황을 버틸 수 없었다.
    출입문으로 달아나야 했다.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현관을 향해 발을 내딛는 순간, 차가운 손이 내 발목을 쥐는 것 같았다.
    “으악!”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나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발목을 잡았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환영인가? 아니, 그 차가운 감각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마치 얼음장 같은 손이 내 피부를 움켜쥐는 듯한 착각이었다.

    거실 끝, 창문 밖은 여전히 도시의 불빛으로 가득했지만, 이곳은 완전히 격리된 지옥이었다.
    창문 쪽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짙은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것은 키가 크고, 희미하고, 형태가 없는 검은 덩어리 같았다.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숨이 막혔다.
    “뭐, 뭐야…”
    그림자가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주변 공기가 더욱 차가워지고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그림자가 흔들리더니, 이내 흐릿한 사람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손을 뻗는 것 같았다.
    느릿하게,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 손가락들이 희미하게 보였다. 길고 앙상한.
    나는 필사적으로 기어서 뒤로 물러났다. 현관문은 코앞이었지만, 마치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내 등 뒤, 바로 현관문에서 철컥, 하고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났다.
    설마.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콰앙!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밖은 도시의 불빛과 희미한 소음으로 가득했지만, 그 문턱을 넘어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열린 현관문 틈으로, 차가운 밤공기가 스며들어왔다. 그리고 그 바람 속에서, 나는 희미한 속삭임을 들었다.

    *이젠…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어…*

    그 목소리는 내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지만, 동시에 내 머릿속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집 안의 모든 불빛이 다시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열린 현관문 너머의 도시가, 내 집 안의 기괴한 현상과 겹쳐지면서 일그러지는 듯했다.

    나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어디로 가야 할까? 이 집 안은 지옥이 되었고, 저 문 밖의 세상도 더 이상 내가 알던 곳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내 휴대폰 화면이 켜지며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자 불명. 내용은 단 한 문장.

    [생존을 시작해야 합니다.]

    집 안의 모든 불빛이 꺼지고, 완벽한 어둠 속에 나는 홀로 남겨졌다.
    더 이상 나의 안전한 보금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이 기괴한 현상들은, 단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는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세상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 무협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찬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뺨을 스쳤다. 단우는 거친 바위 능선을 기어오르며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숨은 이미 목 끝까지 차올라 허파가 터질 것 같았다. 아래로는 아찔한 절벽과 끝없이 펼쳐진 설원. 발아래 자잘한 돌들이 미끄러지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잃을 뻔했다.

    “젠장…!”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보잘것없는 하급 무사인 자신에게 이 설산은 죽음이나 다름없었다. 몇 년 전, 문파의 사형들과 함께 영약 채집에 나섰다가 불의의 사고로 홀로 낙오된 뒤, 단우는 이 거대한 설산 속에서 한낱 미물에 불과했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언제 덮쳐올지 모르는 맹수들의 위협 속에서 살아남은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오늘은 그 기적조차 희미해지는 날이었다. 며칠 전부터 그의 뒤를 쫓던 그림자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설호(雪虎), 무려 한 장이 넘는 몸길이에 푸른 빛이 감도는 눈을 가진 맹수였다. 녀석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심장을 얼어붙게 할 만큼 차갑고 강력했다.

    “크으읍…!”

    몸을 일으키려던 순간, 발밑의 바위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단우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수십 길 아래의 심연 속으로 추락했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강타했지만,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추락은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고, 이대로 온몸이 찢겨 죽는 것인가 하는 절망감이 밀려왔다.

    콰아앙!

    얼음이 깨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단우는 차가운 물속으로 처박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온몸의 감각이 마비될 정도로 차가웠지만, 동시에 어딘가에 부딪혀 죽는 것만은 면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간신히 수면 위로 떠올라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곳은 거대한 얼음 동굴이었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감도는 동굴 안은 묘한 신비로움을 풍겼다. 천장과 벽에는 온통 낯선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듯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바닥에는 얼음 결정이 반짝이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여, 여기가 어디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호에게 쫓겨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지만, 이곳은 분명 평범한 동굴이 아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얼음 바닥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울렸다. 동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푸른빛은 더욱 선명해졌고, 공기 중에는 어떤 강력한 기운이 떠다니는 듯했다. 무림인으로서 미약하나마 내공을 익혔던 단우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심상치 않은 힘임을 직감했다.

    동굴의 가장 안쪽, 거대한 얼음 기둥으로 둘러싸인 작은 공간에 이르자 그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그곳에는 기이한 형태의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대 문자들이 새겨진 검은색 암석으로 만들어진 제단 위에는,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희미하게 박동하는 수정 구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구슬은 짙푸른색을 띠고 있었고, 그 안에는 마치 은하수가 갇혀 있는 듯 수많은 별들이 반짝였다. 동시에 차가운 얼음 동굴과는 상반되는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단우는 홀린 듯 구슬에 다가갔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는 듯했다.

    “이게… 뭐지…?”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구슬을 만졌다. 차가운 얼음 같으면서도 뜨거운 불꽃 같았고, 단단한 바위 같으면서도 부드러운 물결 같았다. 형언할 수 없는 감촉이었다. 구슬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단우의 몸을 꿰뚫는 듯했다. 그의 어설픈 내공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하고 원초적인 힘이었다.

    그 순간, 구슬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갑자기 폭발하듯 강렬해졌다.

    쉬이이이이익!

    눈을 멀게 할 듯한 빛과 함께 구슬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녹아내린 푸른빛은 단우의 오른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뜨거웠다. 너무나 뜨거워서 손 전체가 불타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하지만 그는 손을 뗄 수 없었다. 마치 손이 구슬에 달라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아악! 으아아악!”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몸속으로 흘러들어오는 푸른빛은 그의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세포 하나하나가 찢겨 나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단우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신이 변화하고 있음을 느꼈다. 내공의 흐름이 뒤틀리고, 뼛속 깊이 스며드는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존재 자체를 재구성하는 듯했다.

    푸른빛은 단우의 오른손바닥에 하나의 문양을 새겨 넣었다. 마치 하늘을 나는 용의 비늘 같기도 하고, 번개가 치는 듯한 형상이기도 한 복잡하고 아름다운 문양이었다. 문양이 완성되자마자 고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전신에 넘쳐흐르는 압도적인 힘과 맑아진 정신, 그리고…

    수많은 이미지와 정보들이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오래전 잊혔던 고대의 지식, 이 세상의 근원과도 같은 힘에 대한 이해, 그리고… 마법.

    마법? 단우는 혼란스러웠다. 무림에서 마법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내공과 심법, 검법과 권법이 있을 뿐.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지식은 분명 ‘마법’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손바닥의 문양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 순간, 동굴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얼음 기둥들이 우르릉거리며 균열이 생겼고, 천장에서 거대한 얼음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제단이 서 있던 바닥에서 거대한 균열이 갈라지며 짙은 어둠이 뿜어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아!

    심장을 찢는 듯한 포효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것은 설호의 울음소리보다 훨씬 거대하고, 고대의 흉포함이 느껴지는 짐승의 소리였다. 동굴의 벽에 새겨져 있던 문양들이 섬광처럼 빛나더니,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단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자신이 방금 깨운 힘이, 이 동굴에 잠들어 있던 무언가를 깨웠다는 것을. 그리고 그 깨어난 존재는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오른손바닥의 푸른 문양이 뜨겁게 타올랐다. 그는 이제 겨우 살아남았을 뿐인데, 고대의 힘은 새로운 시작이자 동시에 더 큰 재앙의 서막처럼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