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검은 용의 그림자 아래
메마른 바람이 황량한 대지를 스쳐 지나갔다. 흙먼지가 회색빛 하늘을 뒤덮고, 그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논밭은 갈라진 거북 등껍질처럼 보였다. 수확을 마친 지 오래건만, 들판에는 여전히 수탈의 흔적만이 가득했다. 흑룡제국의 수도, 창룡성에서 몇 날 밤낮을 달려야 겨우 닿을 수 있는 변방의 작은 마을, 흙내가 바로 그곳이었다.
“이봐, 이무진! 그렇게 멀뚱히 서 있을 때가 아니야! 저 병사들이 오기 전에 남은 곡식이라도 창고에 넣어야지!”
늙은 촌장 영감이 앙상한 팔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뼈아픈 현실에 대한 체념과, 작은 저항의 불씨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무진은 촌장의 말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스무 살 초반의 그는 또래보다 훨씬 다부진 체격에, 거친 노동으로 단련된 손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다. 타고난 힘과 빠른 몸놀림은 그가 흙내 마을에서 가장 유능한 사냥꾼이자, 농부임을 증명했다. 그러나 지금, 그 모든 능력이 무색하게 그는 무기력한 현실 앞에 서 있었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검은 연기 기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늘 불길한 징조였다. 흑룡군의 순찰대가 마을에 당도한다는 신호였으니까. 병사들이 오면, 흙내 마을의 소박한 평화는 산산조각 났다.
“빌어먹을 놈들! 대체 얼마나 가져가야 만족할 셈이야!”
무진의 옆에서 함께 볏단을 나르던 동생뻘인 소년, 민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함께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힘든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민수야, 말조심해라. 벽에도 귀가 달렸다.”
무진이 나지막이 경고했지만, 그의 눈빛 또한 민수와 다르지 않았다. 흑룡제국이 건국된 이래, 백성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태수와 감찰관들의 등쌀에 허리가 휘고, 기근과 역병은 제국의 횡포만큼이나 끈질겼다. 흑룡군은 제국을 수호하는 방패가 아니라, 제국이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기 위해 내세운 굶주린 늑대떼와 다를 바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발굽 소리가 천지를 울리며 마을 어귀에 들이닥쳤다. 번쩍이는 갑옷과 검은 깃발을 앞세운 흑룡군의 병사들이 사나운 기세로 마을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 선두에는 번뜩이는 칼날 같은 눈을 가진 대장, ‘호위대장 철광’이 말을 타고 있었다. 그의 명패는 이미 흙내 마을 사람들에게 공포의 상징이었다.
“촌장 영감, 살아 있었군. 어서 나와 내게 공물을 바쳐라!”
철광의 목소리는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촌장 영감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철광 앞에 섰다. 무진은 다른 마을 사람들과 함께 몸을 낮춰 숨죽여 지켜보고 있었다.
“호위대장님, 이번에는 정말… 더 이상 낼 곡식이 없습니다. 지난번엔 씨앗으로 쓸 것까지 모두 가져가셔서…”
촌장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철광은 콧방귀를 뀌며 말에서 내렸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촌장의 작은 몸을 집어삼켰다.
“흥! 거짓말도 정도껏 해야지. 이 늙은 여우가 어딜 감히 나를 속이려 드는가! 내 눈에 모래 한 톨 안 들어가는 줄 알아?”
철광은 손을 쳐들었다. 그의 신호에 병사 몇 명이 촌장 집으로 달려들었다. 이내 촌장 집에서 항아리 깨지는 소리, 아낙네들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병사들은 빈자루 몇 개를 들고 나왔다. 그들이 가져간 것은 겨우 몇 되지 않는 낡은 옷가지와 닳아빠진 숟가락뿐이었다. 촌장 집에는 정말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게 다냐? 이 쥐새끼만도 못한 늙은이가 감히 나를 농락하는가!”
철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촌장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촌장의 노쇠한 몸이 허공에서 이리저리 휘둘렸다.
“정말… 정말입니다… 호위대장님… 제발…!”
촌장이 울먹이며 빌었다. 그 모습에 무진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그의 눈빛은 이글거리는 불꽃으로 변하고 있었다.
“닥쳐라, 이 늙은이야! 네놈들의 고통은 곧 제국의 번영을 위한 거름이 될 것이다! 그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할 것을, 감히 불평을 늘어놓아?”
철광은 촌장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촌장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마을 사람들의 탄식이 터져 나왔지만,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작은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진의 어린 조카, 유진이었다. 유진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었지만, 병사들의 난폭한 행동에 놀라 울음을 터뜨린 모양이었다. 철광의 시선이 유진에게 향했다.
“시끄럽다! 저 애새끼를 당장 조용히 시켜라! 내 귀가 시끄럽구나!”
한 병사가 유진의 어머니에게 다가가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다. 유진의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아이를 감쌌다.
“안 돼! 우리 아기에게 손대지 마!”
병사는 유진의 어머니를 거칠게 밀쳤다. 유진이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며 돌바닥에 머리를 부딪혔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찢어지는 비명으로 변했다. 그리고 곧, 피가 흘러나왔다.
그 순간, 무진의 눈이 뒤집혔다. 그의 이성은 끊어지고, 오직 분노만이 심장을 집어삼켰다.
“이 빌어먹을 개자식들!”
우레 같은 고함과 함께 무진이 그림자처럼 튀어나왔다. 그를 막아서는 병사는 보이지 않았다. 오직 철광과, 유진에게 손을 댄 병사만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의 몸은 활처럼 휘었고, 억눌려 있던 야수의 힘이 폭발했다.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병사의 복부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엄청난 충격에 병사는 숨을 헐떡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무진은 그대로 다음 병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유진에게 손을 댄 병사였다. 병사가 검을 뽑으려는 찰나, 무진의 발길질이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병사는 멀리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이무진!”
민수가 놀라 소리쳤다. 마을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경악과 함께,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감히! 평민 주제에!”
철광이 소리쳤다. 그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은 번개처럼 빠르게 무진의 목을 노렸다. 흑룡군의 호위대장은 단순한 병사가 아니었다. 그는 무술을 수련한 고수였다.
하지만 무진은 이미 본능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다. 그의 눈에는 철광의 검이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무진은 몸을 비틀어 칼날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칼날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며 따끔한 통증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더 맹렬하게 철광에게 달려들었다.
무진은 정식으로 무술을 배운 적 없었다. 하지만 험한 산을 넘나들며 짐승을 사냥하고, 맨몸으로 바위와 씨름하며 단련된 그의 육체는 이미 강철과 같았다. 그리고 지금, 소중한 것을 빼앗으려는 자에 대한 순수한 분노가 그에게 상상 이상의 힘을 부여하고 있었다.
철광의 검이 다시 한번 휘둘러졌다. 무진은 허리를 낮춰 검을 피한 뒤, 그대로 철광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의 주먹이 번개처럼 철광의 턱을 향해 뻗어 나갔다.
철광은 놀랐다. 일개 평민에게서 이런 기술과 힘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는 간신히 고개를 틀어 주먹을 피했다. 하지만 무진의 주먹은 그의 턱을 스치고 지나가며 강력한 충격을 남겼다. 철광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고,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무진은 철광의 몸을 잡아채 힘껏 내던졌다. 거대한 철광의 몸이 바닥에 나동그라지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대장님!”
병사들이 일제히 무진에게 달려들었다. 무진은 쓰러진 철광을 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주먹은 피투성이였고, 몸 곳곳에는 스친 상처들이 아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너희 모두… 이 흙내 마을을 떠나라. 아니면… 너희 모두 여기서 죽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의 뒤로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 촌장과, 울고 있는 유진과, 겁에 질린 채 그를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있었다.
이무진은 더 이상 무기력한 평민이 아니었다. 그는 거대한 제국의 검은 그림자에 맞서, 기꺼이 자신을 던져 넣은 작은 불꽃이었다. 그리고 그 불꽃은, 주변의 마른풀을 태워 거대한 들불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흑룡군의 병사들은 잠시 주춤했다. 일개 평민에게 대장이 쓰러지고, 그 평민에게서 풍겨 나오는 맹렬한 기세에 압도당한 것이다. 하지만 그 주춤거림은 잠시뿐이었다. 곧 병사들은 정신을 차리고 무진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저놈을 잡아라! 감히 제국에 항거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
철광이 고통에 신음하며 소리쳤다. 무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열 배는 넘어 보이는 병사들이 사방에서 자신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그는 유진의 어머니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두려움과 함께 감사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무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병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지금은 도망쳐야 할 때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새로운 길이 열리고 있었다. 더 이상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이 작고 가녀린 마을의 불씨가, 언젠가는 제국의 심장을 태워버릴 거대한 불길이 될 것임을, 이무진은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흑룡제국… 네놈들이 언젠가 무릎 꿇는 날이 올 것이다.”
무진은 으르렁거리듯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병사들의 포위망을 향해 힘껏 뛰어들었다. 그의 육체가 일으키는 바람이 마을을 흔들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흙내 마을의 이무진이 아니었다. 그는 억압받는 백성들의 분노를 대변하는, 새로운 희망의 검은 그림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