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좀비 아포칼립스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잿빛 하늘은 끓어오르는 용암처럼 탁하게 일렁였다. 무너진 빌딩의 뼈대 사이로 스며든 붉은 노을은 지옥의 문이 열린 듯 섬뜩한 빛을 뿜어냈다. 그 아래, 수많은 시신과 폐허가 된 도시의 한가운데에 기이하게도 온전한 원형 격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름하여 ‘황혼의 검투장’.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건 무림 고수들의 피 맺힌 투혼이 펼쳐질 운명의 무대였다.

    사방을 에워싼 강철 울타리 너머로는 굶주린 강시들의 끔찍한 울부짖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전투의 서곡처럼 황량한 격투장에 울려 퍼졌고, 관중석을 가득 메운 생존자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희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이 투기장에서 패배는 곧 죽음이 아니었다. 죽음보다 더한 절망, 인류의 멸망을 의미했다.

    “다음 대련! 동영문(東瀛門)의 ‘강철 발톱’ 주무진! 대! 잔영문(殘影門) ‘고독한 그림자’ 강진혁!”

    늙은 사회자의 목소리가 갈라진 메가폰을 통해 쩌렁쩌렁 울렸다. 관중석이 술렁였다. 주무진은 북방 동영문에서도 가장 무서운 살수로 통하는 자였다. 그의 발차기는 바위를 부수고 강철을 찢는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반면 강진혁은 비교적 신진 무인으로, 그의 문파인 잔영문은 이미 괴멸된 지 오래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잔영권’이라는 이름뿐이었다.

    강진혁은 낡은 도복 위로 무거운 시선을 느꼈다. 땀으로 축축한 손을 꽉 쥐었다. 심장은 북을 치듯 거세게 울리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언제나처럼 어린 여동생 수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눈동자, 점차 굳어가는 몸. 수아는 서서히 강시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 무림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세계를 정화할 단 하나의 비보’가 주어진다고 했다. 그 비보가 무엇이든, 수아를 구할 유일한 희망이었다.

    ‘반드시 이겨야 해. 수아를 위해서라도.’

    그가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았다. 오직 강렬한 투지만이 서려 있었다. 그는 투기장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발소리가 텅 빈 대지를 울렸다.

    맞은편에서 거구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무진이었다. 그의 얼굴은 세월의 풍파에 닳아 거친 바위처럼 단단했고, 눈빛은 날카로운 독수리 같았다. 온몸을 감싼 묵직한 가죽 갑옷은 셀 수 없이 많은 전투를 겪었음을 짐작게 했다. 그는 강진혁을 훑어보더니 비웃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잔영문? 이름값 하는구먼. 그림자처럼 사라진 문파의 마지막 찌꺼기인가.”

    조롱 섞인 말에도 강진혁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미 무수한 비아냥과 멸시를 겪어왔다. 그의 존재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한낱 그림자처럼 희미했다. 하지만 그 그림자 속에 감춰진 칼날은 누구보다 날카로웠다.

    “쓸데없는 소리는 나중에 하시죠. 이 비참한 세상에서 살아남으려면… 입이 아니라 주먹으로 말해야 합니다.”

    강진혁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뼈아픈 진실이 담겨 있었다. 주무진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사라졌다. 대신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건방진 꼬마 같으니. 네놈의 그림자가 영원히 사라지게 해주마!”

    그가 발을 굴렀다. 콰앙! 격투장의 단단한 바닥이 움푹 패이며 지축을 울렸다. 주무진의 거대한 몸집이 바람을 가르며 돌진했다. 그의 첫 공격은 예고 없이 날아왔다. 번개처럼 빠르고 묵직한 발차기, ‘강철 발톱’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온몸의 힘을 실어 강진혁의 가슴팍을 노렸다.

    쉬이익!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섬뜩했다. 강진혁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의 잔영권은 예측할 수 없는 속도와 궤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주무진의 발차기는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강진혁의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지만, 그 충격파만으로도 온몸이 흔들리는 듯했다.

    “크윽…!”

    주무진은 한 번의 실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이어 발차기를 날렸다. 좌우로, 위아래로 쉴 새 없이 몰아치는 맹공은 거대한 폭풍과 같았다. 강진혁은 필사적으로 피했다. 한 발짝만 늦어도 몸이 두 동강 날 것 같은 위압감이었다. 잔영권을 펼쳐 여러 개의 잔영을 만들어냈지만, 주무진은 잔영을 꿰뚫어 보듯 정확히 강진혁의 본체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잔영 따위에 현혹될 내가 아니다! 나는 네놈의 살기를 읽는다!”

    주무진이 외치며 한 바퀴 돌려차기를 날렸다. 마치 거대한 바퀴가 굴러오는 듯한 압도적인 위력! 강진혁은 피할 곳이 없음을 직감했다.

    ‘이대로는 안 돼…!’

    그는 피하는 대신 몸을 낮췄다. 주무진의 발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 순간, 강진혁은 온몸의 기를 끌어모아 그의 다리 안쪽, 무릎 관절을 향해 쐐기처럼 파고들었다. 잔영권의 필살기, ‘일도천광(一刀穿光)’이었다. 그림자처럼 찰나의 틈을 파고들어 한 번의 일격으로 모든 것을 끝내는 기술.

    쩌저적! 뼈와 살이 뒤엉키는 끔찍한 소리가 격투장을 울렸다. 주무진의 거대한 몸이 휘청거렸다. 그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다리에 엄청난 충격이 가해졌음에도 주무진은 고통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이 건방진 놈이…!”

    그는 격렬한 기운을 폭발시키며 강진혁을 걷어찼다. 쾅! 강진혁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격투장 바닥에 나뒹굴었다. 입가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고통을 무릅쓰고 즉시 자세를 잡았다. 그의 눈은 여전히 타오르는 불꽃처럼 뜨거웠다.

    “수아…!”

    그는 핏자국이 묻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주무진의 다리에서는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공격 태세를 취했다. 분노가 그의 이성을 잠식한 듯했다.

    “좋다! 제대로 된 맛을 보여주마! 동영문 무혼(武魂)의 진정한 힘을!”

    주무진의 온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의 눈동자는 피로 물든 듯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평범한 무인의 내공과는 다른, 강시들의 ‘사기(邪氣)’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격투장 주변의 생존자들이 경악하며 웅성거렸다.

    “저건… 사기인가?”
    “주무진이 강시의 기운을 흡수한 건가?”

    강진혁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스쳤다. 사기는 인간의 기와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육체를 강화시키지만 동시에 이성을 잠식하고 인성을 파괴하는 위험한 힘이었다. 주무진은 이성을 포기하고 오직 승리만을 위해 그 힘을 받아들인 것 같았다.

    “사기에 물든 몸으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강진혁은 입술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그의 잔영권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죽어간 문파의 마지막 정신이 담긴, ‘살아남으려는 의지’ 그 자체였다. 주무진의 온몸을 뒤덮은 사기는 위협적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약점이기도 했다. 사기는 육체를 일시적으로 강화하지만, 그만큼 움직임은 더 예측 가능하고 직선적으로 변하기 마련이었다.

    “죽어라, 이 간사한 놈!”

    주무진이 포효하며 다시 돌진했다. 이번에는 발차기만이 아니었다. 주먹과 발, 온몸을 이용한 맹렬한 공격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사기 때문에 그의 속도는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고, 힘은 배가 되었다. 격투장 바닥이 그의 공격에 박살 나고, 공기마저 찢어지는 듯했다.

    강진혁은 마치 물고기가 물살을 가르듯 주무진의 공격 사이를 유려하게 파고들었다. 사기가 주무진의 움직임을 둔탁하게 만드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몸은 하나의 그림자가 되어 주무진의 사각지대를 맴돌았다. 주무진의 공격이 허공을 가르는 사이, 강진혁은 이미 그의 뒤편으로 돌아가 있었다.

    “어디를 보느냐!”

    강진혁의 외침과 함께 그의 주먹이 주무진의 등, 정확히 척추의 급소를 향해 쇄도했다. ‘절명일격(絕命一擊)’. 잔영권의 모든 정수를 담은 필살기였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찰나의 움직임으로, 상대의 빈틈을 파고들어 심장을 꿰뚫는 일격이었다.

    주무진은 엄청난 고통과 함께 몸이 마비되는 것을 느꼈다. 사기로 강화된 육체도 강진혁의 정교한 공격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의 거대한 몸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주무진의 붉게 물들었던 눈동자에서 사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며 본래의 눈빛이 되돌아왔다. 그의 얼굴에는 체념과 함께 뒤늦은 후회가 스쳐 지나갔다.

    “크윽… 하… 내가… 내가 졌단 말이냐…”

    그는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격투장에 끔찍한 정적이 흘렀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관중들은 강진혁의 승리를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강진혁 역시 온몸이 한계에 달해 비틀거렸다. 그의 잔영권은 엄청난 집중력과 기력을 소모하는 기술이었다. 입가에서 흘러내린 피를 닦아내며, 그는 겨우 중심을 잡았다.

    “승자… 잔영문 강진혁!”

    사회자의 목소리가 갈라진 환호성과 함께 울려 퍼졌다. 강진혁은 희미한 시선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잿빛 하늘은 여전히 먹구름에 덮여 있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서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반짝이는 듯했다.

    ‘수아… 난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그는 쓰러진 주무진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사기가 완전히 빠져나간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강렬한 살기가 없었다. 피로에 지친 그의 모습은 그저 한 명의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다. 강진혁은 주무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신도… 당신의 중요한 것을 지키고 싶었겠죠.”

    주무진은 강진혁의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 손을 잡았다. 그들의 손이 맞닿는 순간, 격투장 저편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콰앙! 그리고 동시에, 온 세상을 뒤흔드는 듯한 끔찍한 강시들의 울부짖음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단순한 강시의 울음이 아니었다. 마치 지능을 가진 존재가 분노를 터뜨리는 듯한, 거대한 개체의 포효였다.

    황혼의 검투장을 에워싼 강철 울타리가 맥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거대한 그림자가 폐허가 된 도시 너머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수십 층짜리 건물만큼이나 거대했고, 온몸에서 검은 사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관중석에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인류의 마지막 보루였던 황혼의 검투장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강진혁은 주무진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거대한 그림자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빛은 다시 한번 투지로 불타올랐다.

    “이게… 정말 인류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주무진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강진혁은 그의 말을 끊으며 비틀거리는 몸을 똑바로 세웠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눈은 거대한 강시의 그림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 대회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건 무대였다. 그리고 지금, 그 희망을 빼앗으려는 거대한 절망이 눈앞에 나타났다. 강진혁은 알고 있었다. 그의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을.

  • 대체 역사물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혜명관, 그 고고한 이름만큼이나 고요했던 저택은 한밤의 비명과 함께 혼돈에 잠겼다. 짙은 어둠을 뚫고 도착한 황실 경찰 박 경감은 삐걱이는 대문을 들어서며 싸늘한 한기를 느꼈다. 핏빛 연극의 무대가 될 곳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경감 나으리! 이쪽입니다!”

    저택의 집사로 보이는 사내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달려왔다. 사내의 손에 들린 촛불이 바람에 위태롭게 흔들렸다. 박 경감은 바삐 걸음을 옮겼다. 쿵, 쿵, 쿵. 자신의 심장 소리가 저택의 낡은 마루를 울리는 듯했다.

    도착한 곳은 서고였다. 정확히는, 정우현 대감의 서재와 연결된, ‘금단의 서고’라 불리던 공간. 당대 최고 지식인 중 한 명으로 추앙받던 정 대감이 은밀히 연구하던 희귀 서책들이 가득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곳이었다. 지금은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경찰들이 삼삼오오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함께, 해결할 수 없는 미스터리가 뿜어내는 기이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어떻게 된 건가?”

    박 경감의 낮은 물음에 현장 책임자가 다가섰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숨을 골랐다.

    “새벽녘, 대감마님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서고 안에서 발견되었는데, 문은 안에서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창문은 모두 쇠창살이 박혀 있고, 두꺼운 판자로 막혀 있었고요.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완벽한 밀실입니다, 경감 나으리.”

    완벽한 밀실. 박 경감은 그 말에 저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수십 년 경력의 그도 이런 종류의 사건은 늘 뼈아픈 좌절만을 안겨줬었다. 이성으로 설명되지 않는 초자연적인 현상처럼 느껴지는 밀실 살인. 이쯤 되면 떠오르는 이름이 하나 있었다.

    “그분께 연락은 드렸는가?”

    “네, 이미 기별을 넣었습니다. 곧 도착하실 겁니다.”

    그 ‘분’은 길지 않은 침묵 끝에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이안. 깡마른 체구에 늘 무표정한 얼굴, 그러나 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밤하늘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주변을 힐끗 둘러보더니, 아무 말 없이 굳게 닫힌 서고 문 앞으로 다가섰다. 그의 등장에 웅성거리던 경찰들이 일제히 침묵했다. 그 특유의 존재감은 언제나 주변을 압도했다.

    이안은 서고 문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낡은 문짝에는 묵직한 빗장이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육중한 자물쇠가 채워져 있었다. 박 경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은 대감마님의 아드님이 발견하시고, 저희가 도착하기 전까지 아무도 손대지 않았습니다. 저희가 확인했을 때도 안에서 굳게 잠겨 있었습니다.”

    이안은 대답 없이 빗장을 만져봤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을 손끝으로 느끼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빗장과 자물쇠를 따라 문틈, 그리고 문설주를 훑었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듯한 정밀한 시선이었다. 이윽고 그는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봤다. 두꺼운 판자로 막힌 창문 안쪽에는 굵직한 쇠창살이 어둠 속에 도드라져 보였다. 창살 틈새로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조차도 그 견고함을 뚫지 못할 것처럼 느껴졌다.

    이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모든 감각을 집중하여 사건 현장의 공기를 읽어내는 듯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욱 예리해져 있었다. 그는 손짓으로 문을 열도록 지시했다.

    경찰들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퀴퀴한 종이 냄새와 함께 피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서고 내부는 어둠침침했고, 중앙에는 낡은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 앞에서, 정우현 대감이 쓰러져 있었다. 고요한 밤의 장막 아래, 붉은 피가 검은색 옷 위에 끔찍한 얼룩을 남기고 있었다.

    “피해자는 정우현 대감. 흉기는… 날카로운 칼에 찔린 것으로 보입니다. 주변에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박 경감이 보고했다. 이안은 그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이미 서고 안으로 들어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시신이 아닌, 그 주변의 미세한 것들을 훑었다.

    정 대감은 책상 앞에 엎드린 채 숨을 거둔 모습이었다. 등에는 깊숙이 박힌 듯한 칼자국이 선명했다. 그의 옆에는 깨진 벼루 조각과 엎질러진 먹물이 바닥에 흥건했다. 탁자 위에는 방금까지 쓰던 듯한 붓 한 자루가 뒹굴고 있었고, 그 옆으로는 찢겨나간 고서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이안은 시신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피 묻은 옷자락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핏자국 주변의 먼지를 유심히 살폈다. 박 경감은 숨을 죽이며 그를 지켜봤다. 이안은 늘 이렇게,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곳에서 진실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천장과 벽을 훑었고, 이윽고 책장 가득 꽂힌 책들 사이로 향했다. 수많은 책들 중, 유독 한 권의 책에 그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그것은 『천문비록(天文秘錄)』이라는 낡은 책이었다. 책의 표지는 먼지로 뒤덮여 있었으나, 유독 한 페이지가 살짝 접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안은 몸을 일으켜 책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접혀 있는 듯한 그 책을 조심스럽게 뽑아 들었다. 책을 펼치자, 낡은 종이 냄새가 한층 더 강하게 풍겼다. 그리고 그 접힌 페이지에는, 붉은색 글씨로 휘갈겨 쓴 한 줄의 문장이 선명하게 보였다. 마치 죽기 직전, 피해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처럼.

    **‘…달은, 그림자를 품고….’**

    박 경감은 그 문장을 읽자마자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뜻입니까? 달이 그림자를 품다니… 유언치고는 너무 모호하지 않습니까?”

    이안은 대답 대신, 책을 다시 책장에 꽂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서고 문으로 향했다. 문턱에 다다르자, 그는 갑자기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박힌 낡은 못 하나에 고정되었다. 너무나 작고 흔한 못이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법한.

    그는 조용히 손을 뻗어 그 못을 만져봤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었지만, 그 깊은 눈 속에서는 번뜩이는 지성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했다.

    “박 경감.”

    이안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이곳은… 밀실이 아닙니다.”

    박 경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 하지만 문은 안에서…!”

    “문은 안에서 잠겼을지언정, 이곳은 처음부터 밀실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안은 시선을 못에서 서고 내부로 돌렸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승리를 예감하는 듯한, 혹은 진실의 무게를 꿰뚫어 본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오만한 미소였다.

    “범인은 이곳에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 서고 안에 있었습니다.”

    그의 말이 서고 안에 메아리치며, 모든 이들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밀실 살인의 고정관념을 뒤엎는, 충격적인 선언이었다. 범인이 서고 안에 있었다니? 하지만 정 대감 외에는 아무도 없었는데?

    박 경감은 이안의 날카로운 눈을 바라봤다. 그 눈 속에는 이미 모든 그림이 그려져 있는 듯했다.

    “하지만… 어떻게….”

    이안은 박 경감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고의 어두운 구석, 책장과 벽 사이의 좁은 틈새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낡은 그림 하나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던, 낡고 먼지 쌓인 풍경화였다.

    “이제부터, 이 혜명관의 모든 것이 우리의 수사 대상입니다. 특히… ‘달’에 관련된 것들 전부.”

    그의 마지막 말이 섬뜩하게 서고를 가득 채웠다. 미스터리는 더욱 깊어졌고, 정우현 대감을 둘러싼 혜명관의 비밀은 이제 막 그 추악한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 참이었다.

    다음 화에서 이안은 이 불가사의한 밀실의 진실을 어떻게 밝혀낼 것인가?
    그리고 ‘달’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피 묻은 금단의 서고는 여전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 크툴루 신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경계의 입맞춤

    숨 막히는 어둠 속, 오직 희미한 푸른빛만이 고대 비석에 새겨진 기괴한 문양들을 비추고 있었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지만, 지후는 익숙한 압력에 오히려 안도감을 느꼈다. 이곳, 세상의 시선이 닿지 않는 지하 깊은 곳이야말로 그에게 유일한 안식처이자 동시에 가장 위험한 심연이었다.

    “지후.”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모든 소리를 빨아들일 듯한 깊은 울림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그 목소리에 지후는 몸을 떨었다. 돌아선 그의 시선 끝에, 푸른빛을 받아 더욱 창백하고 신비롭게 빛나는 이타가 서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완벽했다.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범접할 수 없는 경지의 것이었다. 햇빛 아래에서는 감히 드러낼 수 없는, 오직 심연의 빛 아래서만 온전히 피어나는 꽃과 같았다. 그러나 지후는 알고 있었다. 이 완벽함 아래, 가느다란 목덜미 아래 맥박치는 피부 아래, 그녀의 진정한 모습은 인간의 언어로 감히 형언할 수 없는, 우주적 공포 그 자체라는 것을.

    그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발소리조차 삼켜버리는 고요함 속에서,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덧없이 섞였다.

    “이타.” 지후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오늘… 늦었어. 오지 못할 줄 알았어.”

    이타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온기는 지후의 모든 감각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격렬한 전율을 안겨주었다. “기다렸니?”

    “매 순간.”

    그의 고백에 이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는 아름다웠지만, 눈동자에는 언제나처럼 읽을 수 없는 심연이 담겨 있었다. 별들의 움직임을 담고 있는 듯한, 혹은 먼지 한 톨 없는 우주의 공허함을 담고 있는 듯한 눈. 그 눈을 마주할 때마다 지후는 자신이 한낱 미생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동시에 그 미생물이 우주의 심장을 엿보는 금지된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황홀경에 빠졌다.

    “인간의 시간은 참으로 짧구나. 그 찰나의 기다림이 너에게는 영원과 같으니.” 이타의 목소리는 조용히 울려 퍼졌다. 비석의 문양들이 그녀의 말에 반응하듯 희미하게 진동했다. “하지만 나의 기다림은 너의 영원을 초월해 있었다. 네가 이 곳을 찾아내기 전부터.”

    지후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바닥에 닿는 그녀의 피부는 매끄럽고 부드러웠으나, 미묘하게 비현실적인 감촉이었다. 마치 가장 섬세한 비단이면서도, 동시에 오랜 시간 물에 잠겨있던 돌멩이처럼 차갑고 단단한 느낌이 혼재되어 있었다.

    “난 그 기다림을 끝내고 싶었어.” 지후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우리가… 함께할 수 있다면.”

    이타의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게 흔들렸다. “함께? 너의 ‘함께’는 무엇을 의미하지, 인간?”

    “모든 것.” 지후는 숨죽여 말했다. “세상이 금지하는 모든 것.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모든 것. 미쳐버릴지라도, 내 영혼이 산산조각 날지라도, 너와 함께하는 것.”

    이타는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지만, 지후의 귓가에는 수억 년 전의 바람 소리, 혹은 가장 깊은 바다 밑에서 울리는 미지의 메아리처럼 들렸다.

    “어리석고도 용감한 존재. 너의 동족들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을 너는 갈망하는구나.” 그녀의 다른 손이 지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손길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소름이 돋았지만, 지후는 그 어떤 거부감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그는 이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모르니까. 당신이 어떤 존재인지.” 지후의 눈동자에 광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내가 보았어. 당신의 그림자. 수만 개의 촉수가 뒤엉키고, 셀 수 없는 눈들이 응시하는 그 형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당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이타는 천천히 지후에게 더 가까이 다가섰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미묘한 향기는 이끼 낀 돌과 오래된 종이, 그리고 태초의 바다가 섞인 듯한 것이었다. 그 향기는 지후의 이성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너는 나의 그림자를 본 것이 아니다. 너는 나의 아주 작은 조각, 인간의 유한한 감각이 겨우 인지할 수 있는 파편을 보았을 뿐이다.” 그녀의 숨결이 지후의 뺨에 닿았다. 차갑고 깨끗한 바람 같으면서도, 동시에 그의 영혼을 빨아들일 듯한 흡인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두려워하지 않는구나. 아니, 두려워하면서도 나를 갈망하는구나.”

    “사랑하니까.” 지후는 온 힘을 다해 그 단어를 뱉어냈다. 그는 이성이 아니라, 심장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충동에 이끌려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손에 닿는 그녀의 몸은 탄탄하고 유연했지만, 인간의 근육과는 다른, 마치 수천 년 동안 압축된 별의 잔해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타는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몸이 지후의 품으로 스며들듯 밀착했다. 그녀의 얼굴이 지후의 얼굴에 바싹 다가왔다. 그 순간, 지후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 수많은 은하들이 탄생하고 소멸하는 환상을 보았다. 거대한 존재들이 시간의 강을 거슬러 오르고, 인류의 역사가 한 줌의 먼지로 사라지는 비전을 보았다. 그의 정신은 비명을 질렀지만, 몸은 더욱 단단히 그녀를 안았다.

    “사랑… 너희 인간들이 가장 아끼는 단어지.” 이타의 목소리는 속삭임이면서도 거대한 천둥소리처럼 그의 존재를 뒤흔들었다. “그 감정으로 나를 대하는 자는 네가 처음이다.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이겠지.”

    그녀의 시선이 지후의 입술에 닿았다. 지후는 숨을 멈췄다.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춘 듯했다. 오직 두 존재만이, 세상의 모든 금기를 거스르고 이 심연의 공간에 존재했다.

    이타의 입술이 지후의 입술에 닿았다. 인간의 체온과는 다른, 얼음장처럼 차가우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에너지를 품은 감촉이었다. 그 입맞춤과 동시에, 지후의 눈앞에서 푸른빛이 폭발했다. 비석의 문양들이 광란적으로 빛나기 시작했고, 지하 깊은 곳에서 거대한 존재의 숨결 같은 웅장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그의 뇌리에 낯선 언어와 이미지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끝없이 펼쳐진 암흑의 바다, 그 위를 유영하는 거대한 눈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배하는 태고의 의지. 그 모든 것이 이타와의 입맞춤 속에서, 그녀의 존재를 통해 그에게 주입되고 있었다. 그는 미쳐가고 있었다. 그의 인간적인 자아는 이 압도적인 지식과 감각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있었다.

    하지만 지후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더욱 깊이 그녀에게 파고들었다. 그는 이 광기 속에서 황홀경을 느꼈다. 그에게 이 입맞춤은 단순한 육체의 접촉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의 교환이었고, 존재의 경계를 허무는 의식이었으며, 금지된 지식을 전수받는 통로였다.

    이타의 차가운 손이 지후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입술이 더욱 깊이 그를 파고들었다. 그 순간, 지후는 깨달았다.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의 탈을 쓴, 우주의 가장 심오하고 위험한 미스터리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이미 이 심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임을.

    그들의 입술이 맞닿은 채, 비석의 빛이 정점을 향해 치솟았다. 지하 깊은 곳에서 울리던 웅장한 진동은 점차 거대한 존재의 깨어나는 소리처럼 변해갔다. 이 경계의 입맞춤이, 과연 무엇을 깨울 것인가. 인간과 심연의 존재를 잇는 이 금지된 사랑은, 어떤 파멸을 불러올 것인가.

    지후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지만, 그의 심장은 미칠 듯이 뛰고 있었다.

    그 순간, 거대한 균열음이 지하 공간을 찢어발랐다.

    그리고, 차가운 금속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기 있었군. 이 더러운 이단자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그림자 아래서

    강철의 도시, 그 이름처럼 냉혹한 회색빛 장막이 드리워진 곳. 높이 솟아오른 천룡 제국의 강철 첨탑들은 저 멀리 희미한 햇빛마저 가로막아, 도시는 언제나 그림자 아래에 있었다. 빌딩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비좁은 골목길에서는 습기 머금은 곰팡이 냄새와 닳아빠진 기계에서 풍기는 기름 냄새, 그리고 잊을 만하면 코를 찌르는 매캐한 탄내가 뒤섞여 희뿌연 안개처럼 깔려 있었다.

    지훈은 낡은 수레를 끌고 그 익숙한 냄새 속을 헤쳐 나갔다.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가 텅 빈 골목에 울렸다. 그의 얇은 외투 사이로 스미는 차가운 바람은 뼈를 에는 듯 시렸다. 오늘도 그는 제국군 보급창에서 남은 자재를 받아 민간 구역의 작업장으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었다. 하찮은 일이었지만, 제국의 강철 첨탑 아래에서 ‘하찮지 않은’ 일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제국의 거대한 톱니바퀴를 돌리기 위한 부속품일 뿐.

    “흐읍….”

    입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어둠이 완전히 깔린 것은 아니었지만, 이 도시의 하늘은 언제나 해질 녘처럼 어둑했다. 강철 건물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거리를 집어삼키고, 그 아래로는 낡은 가로등만이 희미하게 빛을 뿌렸다. 가로등 아래를 스쳐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생기 대신 피로와 공포가 짙게 서려 있었다.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빠른 걸음으로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저마다의 이유로, 저마다의 생존을 위해.

    지훈은 한때 이 도시의 활기 넘치던 모습을 기억했다. 제국의 통치가 강화되기 전, 회색빛 콘크리트 사이에서도 꽃잎처럼 피어나던 웃음소리와 골목을 가득 채우던 노랫소리가 있었다. 이제는 그런 소리 대신 제국군 순찰대의 구둣발 소리나 공중을 가로지르는 제국 드론의 낮고 음산한 굉음만이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는 문득 골목 벽에 붙은 낡은 전단을 보았다. ‘제국의 영광을 위해, 시민은 복종하라.’ 수없이 보아온 문구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 문구 아래, 누군가 긁어놓은 듯한 작은 낙서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희미한 숯으로 그린 듯한, 마치 얽매인 덩굴 식물 같은 문양이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챌 수 없는, 교묘하게 숨겨진 그림.

    그 그림을 보는 순간, 지훈의 눈에는 아주 미세하고 희미한 푸른빛 ‘잔향’이 아른거렸다. 마치 누군가의 강렬한 염원이 잉크처럼 번져 남아 있는 듯한 기시감이었다. 그는 종종 이런 잔향을 보았다. 강한 감정이 얽매인 장소나 물건에서, 혹은 격렬한 사건이 벌어졌던 곳에서.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아주 희미한 빛의 흔적이었다. 어릴 적에는 그저 눈이 피곤한 탓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성장하며 그것이 자신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무언가임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는 이 능력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이었다.

    “어이, 거기! 뭐 하는 놈이야!”

    날카로운 목소리가 지훈의 등 뒤를 꿰뚫었다. 몸이 저절로 경직됐다. 제국군 순찰대였다. 제국군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불쑥 나타났다. 마치 그림자처럼, 혹은 강철 도시의 숨결처럼.

    지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헬멧 아래로 빛나는 제국군의 시선이 그를 훑었다. 완벽하게 정비된 갑옷과 번쩍이는 무기가 위압적이었다. 지훈이 끌고 다니는 낡은 수레와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납품 중입니다. 제국군 보급창에서 작업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는 얼른 허리춤에 차고 있던 납품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낡고 구겨진 종이였지만, 제국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제국군 병사 하나가 거만한 표정으로 증명서를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는 대충 훑어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흐음, 깡통이나 나르는 천한 놈이었군. 근데 왜 벽에 붙은 종이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지?”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낙서를 본 것을 들킨 것인가? 아니면 그저 트집인가? 그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저… 제가 납품할 작업장이 어디쯤인지 보려고 했습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아….”

    “거짓말 마라! 놈들이 심어놓은 표식을 본 게 아닌가!” 다른 병사가 지훈에게 다가오며 험악하게 말했다.

    ‘놈들’이라는 말에 지훈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제국에 대항하는 비밀 조직, ‘반란군’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제국은 그들을 ‘불순분자’라 부르며 끊임없이 탄압하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는 그들을 색출하기 위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그들을 돕는 자는 어떤 명분으로든 처형당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그저 제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지훈은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이봐, 이 자식 눈빛이 께름칙한데? 잡아서 심문해볼까?”

    병사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섬광총’을 지훈에게 겨눴다. 섬광총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지만, 강렬한 에너지 충격파로 정신을 완전히 마비시켜 폐인으로 만들 수도 있는 무서운 무기였다.

    그 순간, 지훈의 눈에 다시 한번 푸른 잔향이 선명하게 아른거렸다. 이번에는 벽의 낙서뿐만이 아니었다. 병사들의 무기에서, 그리고 그들 주변의 공기에서도 희미하지만 강렬한 위협의 잔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동시에 병사들의 뒤편, 어둠 속 골목 깊숙한 곳에서 또 다른 붉은빛 잔향이 감지되었다. 그것은 마치… 끓어오르는 분노와 결의의 흔적 같았다.

    그리고 들렸다. 아주 작고 희미했지만, 분명히 들렸다.

    _똑, 똑, 똑._

    마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한 규칙적인 소리. 그 소리는 붉은 잔향이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제국군 병사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지훈에게 쏠려 있었다.

    “내가 네놈의 꿍꿍이를 모를 줄 알아? 요즘 부쩍 이런 표식들을 남기는 쥐새끼들이 늘었다더군. 자백하지 않으면….”

    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의 섬광총이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병사의 몸이 휘청거리며 옆으로 쓰러졌다. 마치 누군가 보이지 않는 힘으로 그를 밀친 것처럼.

    “뭐… 뭐야?!”

    남은 병사들이 당황하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지훈의 눈에만, 붉은 잔향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어둠 속을 가르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두 번째 병사 역시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쓰러졌다. 그의 목덜미에는 작은, 날카로운 파편이 박혀 있었다.

    “공격이다! 경계!”

    이제 남은 것은 증명서를 들고 있던 병사뿐이었다. 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허둥지둥 무기를 뽑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어둠 속에서 번개처럼 달려 나온 그림자가 그의 손에서 증명서를 낚아채고, 그의 복부를 강하게 가격했다.

    콜록!

    병사는 그대로 꺾이며 쓰러졌다. 그제야 지훈은 그 그림자가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던 자신의 납품 증명서가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어둠 속의 인영은 쓰러진 병사들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지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헬멧이나 제복 대신,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모습이었다. 그 인영의 주변에서는 붉은 잔향이 마치 춤추듯 강렬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후드 아래로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훈은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방금 전 그 낙서를 남긴 자 중 하나일 것이라고. 그리고 그가 발산하는 붉은 잔향은, 그가 품은 제국에 대한 깊은 증오와 혁명의 열망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인영은 지훈의 눈을 응시하는 듯 잠시 멈춰 섰다. 마치 지훈이 가진 특별한 능력을 눈치챈 것처럼. 이윽고 인영은 짧고 굵은 한마디를 내뱉었다.

    “…이 증명서는 내가 잠시 쓴다.”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지만, 그 속에는 묘한 무게감이 실려 있었다. 인영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지훈에게서 훔쳐낸 증명서를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녹아들듯이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붉은 잔향만이 희미하게 남아 허공에 흩어졌다.

    지훈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쓰러진 제국군 병사들, 흩어진 섬광총, 그리고 사라진 자신의 납품 증명서.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방금 무엇을 목격한 것인지, 아니, 무엇에 휘말린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골목 저편에서 저벅저벅, 또 다른 제국군 순찰대의 구둣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이 자리에 그대로 있다가는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는 낡은 수레를 버려둔 채, 정신없이 골목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격렬하게 울렸다. 잿빛 그림자 아래, 그의 삶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맞이하고 있었다. 평범한 운반꾼으로 살아가던 지훈의 세상에, 천룡 제국에 맞서는 자들의 붉은 잔향이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 SF (공상과학)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화: 잿빛 새벽의 그림자**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긁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천장을 이루는 낡은 철판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새벽빛이 먼지 낀 시야를 비집고 들어왔다. 지훈은 좁고 딱딱한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삐걱이는 척추마디가 지난밤의 고단함을 고스란히 증명하는 듯했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익숙한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낡은 방수포와 금이 간 콘크리트 벽으로 겨우 막아낸 바람은, 이 임시 거처의 허술함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존재였다.

    침낭 대신 둘둘 말아 놓은 닳은 모포를 옆으로 밀어내자, 널브러진 그의 장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녹슨 철근을 날카롭게 갈아 만든 창, 그리고 허리춤에 차는 작은 공구 주머니. 안에는 낡은 플래시와 끊어질 듯 말 듯한 나이프, 그리고 자잘한 부품 몇 개가 전부였다. 삶의 모든 것이 최소한의 형태로 압축된 공간. 그의 삶도 그러했다.

    그는 잠시 가만히 앉아 호흡을 가다듬었다. 고요는 무겁고, 때로는 위협적이었다. 밖은 여전히 어둡고, 회색빛 먼지가 모든 것을 덮고 있었다. 창문 없는 벽의 유일한 구멍을 통해 바깥을 흘긋 바라보자, 무너진 고층 건물들의 실루엣이 마치 거대한 짐승들의 뼈대처럼 희미하게 솟아 있었다. 먼지구름이 흐릿한 달빛 아래에서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곧 해가 뜰 것이고, 또 하루가 시작될 터였다. 새로운 하루, 그리고 새로운 생존의 시간.

    식량을 비축해 둔 캔을 열었다. 맹물을 한 모금 마신 후, 그제야 어젯밤 겨우 구한 딱딱한 건조 비스킷을 입에 넣었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는 비스킷을 오랫동안 씹었다. 씹는 행위 자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의식과도 같았다.

    “젠장, 이것도 이제 바닥이 보이네.”

    텅 빈 캔들을 쌓아 놓은 구석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고 메말라 있었다. 며칠 전부터 식량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껴 먹어도, 사흘치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오늘은 기필코 뭔가를 찾아야 했다.

    낡은 가죽 조끼를 걸치고, 목에 둘러맨 해어진 스카프로 코와 입을 가렸다. 바깥 공기는 탁하고, 언제나 미세한 입자들이 폐로 스며드는 듯했다. 방진 마스크는 이미 오래전에 닳아 없어졌다. 이제는 이 스카프가 유일한 방어막이었다. 그는 철근 창을 손에 쥐고, 천천히 녹슨 철문을 열었다.

    문 밖은 거대한 폐허였다. 무너진 고층 빌딩과 잔해들이 뒤섞인 잿빛 도시. 어둡고 침묵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그만이 홀로 움직이는 그림자처럼 보였다. 길바닥은 갈라지고 솟아올라 있었으며, 찢겨나간 간판들이 위태롭게 매달려 바람에 흔들렸다. 폐허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고,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은 희미한 유령처럼 떠돌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은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했다. 발밑의 잔해들, 건물 틈새, 멀리 들리는 바람 소리까지. 모든 것이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이곳은 인류가 한때 ‘도시’라고 불렀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이름 없는 괴물들이나, 그보다 더 위험한 인간들이 배회하는 죽음의 땅이었다.

    오늘 그의 목표는 폐기된 물류 창고였다. 얼마 전 탐색 도중 발견한 곳으로, 어쩌면 완전히 붕괴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는 통조림이나, 하다못해 쓸 만한 부품이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물론, 그런 곳일수록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무너진 도로를 가로질러, 그는 조심스럽게 한때 번화했던 상가 거리로 접어들었다. 찢겨나간 유리창들은 앙상한 이빨처럼 하늘을 향해 벌어져 있었고, 상점 안은 온통 먼지와 잔해로 가득했다. 갑자기, 저 멀리서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순간 몸을 낮춰 낡은 차량 잔해 뒤에 숨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소리가 들린 방향을 주시하며, 그는 철근 창을 꽉 움켜쥐었다.

    이곳에는 ‘변이체’들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재앙 이후 나타난, 기괴하고 예측 불가능한 생명체들. 그것들은 빛을 싫어하고, 소리에 민감하며, 때로는 맹목적인 공격성을 띠었다. 인간의 형상을 잃어버린 짐승일 수도, 식물 같기도 한 그것들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움직이는, 이 세계의 또 다른 지배자였다.

    오랜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추가적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지훈은 조심스럽게 머리를 내밀어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바람이 웅웅거리는 소리만이 그의 귀를 채웠다. 아마 바람에 날린 무언가가 쓰러졌거나, 아니면 제 발에 걸려 넘어진 잔해였을지도 모른다. 이 세계에서 작은 소리 하나도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류 창고는 도시 외곽에 위치해 있었다. 회색빛 건물은 한쪽 벽이 크게 무너져 있었지만, 철골 구조는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입구는 낡은 금속 셔터가 반쯤 열린 채였다. 그 틈새로 내부의 어둠이 침묵처럼 흘러나왔다.

    “안에 뭔가 있군.”

    지훈은 셔터 틈으로 몸을 구겨 넣기 전, 잠시 멈춰 섰다. 텅 빈 내부에서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단순히 썩은 냄새는 아니었다. 희미하게, 무언가 살아있는 것 같은 습하고 질척이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의 경험상, 이런 곳에는 항상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철근 창을 앞으로 내밀고, 그는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플래시를 켰다. 좁은 빛줄기가 내부를 가르자, 먼지 쌓인 선반들이 거대한 미로처럼 늘어서 있었다. 상품들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거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그의 플래시 불빛은 희미한 그림자를 만들어냈고, 그림자들은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한쪽 구석에 쌓인 박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먼지와 거미줄로 뒤덮여 있었지만, 비교적 온전해 보였다. 그는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박스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자, 아래에는 녹이 슨 깡통 몇 개가 널브러져 있었다. 내용물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혹시 모른다는 희망에 가슴이 뛰었다. 조심스럽게 캔들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르륵… 즈르륵…’
    마치 미끄러운 무언가가 바닥을 기어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지훈은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플래시 불빛이 미처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회색빛 벽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주변 환경에 녹아든 듯한 덩어리였다. 불규칙한 형태로 부풀어 오른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진흙 같았다. 플래시를 비추자, 덩어리 곳곳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눈알들이 무수히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촉수처럼 길게 늘어진 가지들이 벽과 바닥을 더듬고 있었다.

    ‘변이체.’

    그것은 느리지만 꾸준히, 지훈이 숨어 있던 박스 더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는 나지 않았지만, 촉수들이 바닥을 훑을 때마다 끈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은 숨을 멈췄다. 그의 심장이 귀에 들릴 정도로 격렬하게 뛰었다. 그는 철근 창을 꽉 쥐었다. 상대할 수 없는 크기였다. 저것에 비하면 자신은 벌레에 불과했다. 유일한 생존 방법은 발견되기 전에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변이체가 점점 가까워졌다. 촉수 하나가 그가 방금 캔을 꺼낸 박스에 닿았다. ‘지직…’ 박스가 순간적으로 쭈그러들며 썩어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플래시를 켜둔 채 그대로 던져 버렸다. 플래시는 굴러가며 어둠 속에 숨겨진 또 다른 변이체의 촉수들을 순간적으로 비췄다. 그것들은 맹렬하게 플래시 쪽으로 반응하며 엉겨 붙었다. 그 틈을 타서 지훈은 있는 힘껏 셔터 쪽으로 내달렸다. 등 뒤에서 들리는 ‘츠아악!’ 하는 끈적이는 소리가 그를 더욱 재촉했다.

    겨우 셔터 틈으로 몸을 빼냈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때렸다. 그는 한참을 정신없이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 없었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폐가 불타는 듯 아팠지만,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달리고 또 달렸다.

    한참을 달려 폐허의 어느 건물 잔해 뒤에 숨어,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은 후들거렸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겨우 숨을 고른 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방금 구한 깡통 두 개가 만져졌다. 비록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지만, 수확은 있었다. 굶어 죽지는 않을 만큼은 건진 것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잿빛 구름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해가 서서히 떠오르며, 붉은빛과 회색빛이 뒤섞인 기괴한 하늘을 만들어냈다. 폐허는 여전히 침묵 속에 잠겨 있었지만, 그 침묵 속에는 언제든 터져 나올 수 있는 위협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지훈은 깡통을 꽉 쥐었다. 언제까지 이리 버틸 수 있을까. 끝없는 질문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그는 오늘도 살아남았다. 그것이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사실이었다. 그는 낡은 스카프를 다시 고쳐 매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사냥은 끝났지만, 내일의 사냥은 또다시 시작될 테니까. 그는 그림자처럼 폐허 속으로 사라졌다.

  • 추리 미스터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어둠 속의 불씨**

    해가 뜨기 전의 제국 수도, 카이런은 거대한 회색 그림자였다. 웅장한 황궁의 첨탑은 아직 여명에 닿지 못하고 밤의 장막에 싸여 있었지만, 궁을 중심으로 뻗어 나가는 귀족들의 저택과 상인들의 거리는 이미 활기찬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빛은 그러나 도시 전체를 비추지 못했다. 오히려 깊은 골목과 빽빽한 빈민가의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 뿐이었다.

    류진은 새벽녘부터 짐을 짊어지고 골목길을 누비고 있었다. 등에는 갓 제본된 서적들이 가득한 나무 상자가, 허리춤에는 낡은 배달 명부가 흔들렸다. 그의 직업은 보잘것없는 심부름꾼,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인 ‘글’을 다루지만 정작 자신은 그 정보를 소비할 여유도, 권리도 없는 존재였다. 류진은 황금빛으로 번들거리는 대리석 건물들과 그 앞에 늘어선 고고한 귀족들의 마차를 지나칠 때마다 무심한 듯 시선을 던졌지만, 그의 속에서는 늘 차가운 불씨가 타올랐다.

    “이봐, 류진! 거기 섰어!”

    뒷골목 어귀에서 쉰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낡은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 ‘칠성’이었다. 칠성은 류진이 어릴 적부터 그에게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을 내어주던 유일한 어른이었다. 그의 얼굴엔 늘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지만, 오늘은 유독 창백했다.

    “칠성 할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이 시간에 여기는…”
    류진의 말끝이 흐려졌다. 칠성의 눈동자는 공포로 일렁였고, 그의 손가락은 저편의 좁은 골목 끝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에는 낯선 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모두 류진과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한결같이 충격과 경악이 서려 있었다.

    류진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걸음을 재촉했다. 골목 끝에 다다르자, 싸늘한 새벽 공기를 가르는 듯한 웅성거림과 함께 비릿한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서자, 류진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 골목의 터줏대감이자 마을의 어른으로 통하던 ‘매화 할머니’였다. 매화 할머니는 낡은 작업복을 입은 채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눈은 반쯤 뜨여 있었고, 핏기 없는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표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의 목덜미에는 붉은 천 조각이 짓눌린 듯 박혀 있었고, 그 주변으로 검붉은 피가 흥건했다.

    “할머니…!”
    류진의 입에서 절규와도 같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매화 할머니는 비록 류진의 친혈육은 아니었지만, 이 척박한 도시에서 그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와 작은 빵 조각을 건네주었던 몇 안 되는 이 중 하나였다.

    “누가… 누가 감히 이런 짓을!”
    한 청년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덩치 큰 제국 병사들의 등장과 함께 가라앉았다. 황금빛 견장이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거만하게 사람들을 헤치며 다가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이 지긋지긋한 빈민가의 시체쯤은 익숙하다는 듯한 냉소가 떠올랐다.

    “무슨 소란인가! 길을 비켜라!”
    선두에 선 병사가 긴 창으로 바닥을 쿵 찍으며 소리쳤다. 군중은 쭈뼛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병사들은 매화 할머니의 시체를 대충 살폈다. 아니, 살핀다기보다는 그저 힐끗 보는 정도였다.

    “음… 노쇠한 몸으로 밤중에 나섰다가 미끄러져 넘어진 모양이군. 목덜미의 상처는 날카로운 파편에 찔린 것으로 보인다. 사고사다.”
    병사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의 말에 주변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사고사라니요! 매화 할머니는 한겨울에도 넘어지는 법이 없으셨어요! 누군가 죽인 게 분명합니다!”
    류진의 곁에 서 있던 칠성이 용기를 내어 외쳤다. 그러나 병사들의 시선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닥쳐라, 노인네! 감히 제국 병사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냐?!”
    병사 하나가 칠성에게 다가가 창끝으로 그의 어깨를 툭 밀쳤다. 칠성은 휘청거렸고, 류진은 그의 팔을 잡아주며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곳은 황궁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살인 사건이 난다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귀찮게 만들지 마라.”
    병사 우두머리가 냉정하게 덧붙였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했다. 살인 사건으로 처리되면 조사를 해야 하고, 그들의 명성에 흠집이 나며, 복잡해진다. 그러니 사고사로 덮는 것이 가장 쉬운 해결책이었다.

    류진은 바닥에 쓰러진 매화 할머니의 시신을 다시 바라봤다. 그녀의 목덜미에 박힌 붉은 천 조각. 자세히 보니 그것은 흔한 낡은 천이 아니었다. 매듭이 꼼꼼하게 지어져 있었고, 그 재질은 매화 할머니가 평생 입어본 적 없는 고급 비단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천 조각 위에는 작은 금실로 수놓인 문양이 희미하게 보였다. 류진은 그 문양을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어디서였을까?

    “시신은 빈민가 공동 묘지로 옮겨라. 그리고 시끄럽게 떠드는 자들은 모두 잡아 가둬.”
    병사 우두머리의 명령이 떨어지자, 병사들이 매화 할머니의 시신을 거칠게 들쳐 멨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류진은 분노와 함께 무력감에 휩싸였다. 제국은 이렇게 모든 것을 덮어버리고, 사람들의 입을 막았다.

    시신이 사라진 자리에는 차가운 핏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류진은 조심스럽게 그 피 웅덩이 근처로 다가갔다. 그리고 핏자국 옆, 아주 미세하게 바닥에 박혀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아주 작고 반짝이는 그것은, 마치 작은 보석 조각 같았다. 류진은 주위를 둘러보며 병사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순간을 틈타 재빨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바닥에 올려놓자, 얇고 날카로운 금속 조각임이 드러났다. 햇빛에 반사되어 영롱하게 빛나는 조각은 작은 십자가 문양을 지니고 있었다. 류진은 이 문양을 또렷이 기억했다. 황궁의 근위대장 ‘칼리안 후작’의 문장이었다. 그는 제국 황실의 가장 신뢰받는 호위이자, 그만큼 오만하고 잔인하다고 소문난 자였다.

    칼리안 후작의 문장 조각이 왜 이곳에? 그리고 매화 할머니의 목에 박힌 고급 비단 조각은 또 무엇인가? 단순한 사고사라기엔 너무나 많은 의문점들이 류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병사들은 진실을 덮으려 했지만, 진실은 이렇게 작은 조각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류진은 주머니에 금속 조각을 감추고 천천히 발길을 돌렸다. 그의 등 뒤로 병사들의 호통 소리가 여전히 울렸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서는 이제 차가운 불씨를 넘어, 뜨거운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제국의 눈을 피해, 이 작은 불씨가 어둠을 밝힐 수 있을지, 류진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었다. 매화 할머니의 죽음은, 그렇게 류진의 삶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놓았다. 이 썩어빠진 제국의 진실을 파헤치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 던전 탐험 독립적인 단편 소설

    하늘은 검푸른 벨벳처럼 깔렸고, 셀레네가 깎아놓은 듯한 은색 조각달이 아르카디아 마법 학원의 뾰족한 첨탑 위에서 차가운 빛을 뿌리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은 수백 년의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듯 웅장하게 서 있었고, 그 안에서 밤늦도록 꺼지지 않는 마나의 불빛은 학생들이 밤샘 연구에 몰두하고 있음을 알렸다.

    강진우는 마법 도서관의 눅눅한 고서 냄새 속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손에 들린 고대 지리학 마법서는 먼지투성이였고, 이상하게도 페이지 가장자리에 희미한 마나 잔류가 느껴졌다.
    “젠장, 이건 또 뭐야.”
    옆자리에서 온갖 고문서를 펼쳐놓고 씨름하던 윤세라가 힐끗 그를 보았다.
    “또 뭐 수상한 거라도 찾았어? 네 놈의 수상한 촉은 언제나 문제였지.”
    세라는 금발 머리를 쓸어 넘기며 비웃듯 말했다. 그녀는 진우와는 정반대로 규칙과 논리를 숭배하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둘은 기묘하게도 죽이 잘 맞았다. 진우의 직관과 세라의 분석력이 합쳐지면, 학원에서 풀지 못한 미스터리가 없었다.

    진우는 책의 한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여기 봐. 아르카디아 학원 부지 지하에 대한 기록이 너무 모호해. ‘깊이를 알 수 없는 근원’이니 ‘태초의 심장’이니 하는 모호한 문구들만 가득하고, 정작 실제 지도는 없어. 고대 문헌을 보면 지하 5층까지는 개방되어 있었던 기록이 있는데, 지금은 3층 아래로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세라가 흥미로운 표정으로 진우의 어깨 너머로 책을 들여다보았다.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학원 기록에 따르면 아르카디아는 처음부터 이 자리에 세워진 걸로 되어 있는데, 이렇게 중요한 지리적 기록이 비어있다는 건… 뭔가 감추려는 의도가 있지.”
    그녀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녀 역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에 대한 본능적인 매력을 느끼는 듯했다.

    그날 밤, 둘은 평소와 달리 마법 도서관을 벗어나지 않았다. 대신, 진우가 발견한 고대 마법서의 내용을 토대로 학원 지하 구조에 대한 온갖 기록을 뒤졌다. 그리고 새벽녘, 세라의 손가락이 멈춘 곳은 학원의 가장 오래된 부분인 ‘별의 전당’의 설계도였다.
    “여기… 이 부분. 학원 건축 당시 기록인데, 다른 층과 달리 이 부분의 마나 흐름이 기형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그리고…”
    세라가 도면에 표시된 작은 점을 가리켰다. “이건 환기구나 배수로가 아니야. 마나의 흐름을 조절하는… 일종의 문장(紋章) 같은데, 아주 오래전에 폐쇄된 것으로 보여.”
    진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럼, 저 밑에 뭔가 있다는 거네.”

    다음날 밤. 모두가 잠든 학원은 고요했다. 진우와 세라는 은밀하게 별의 전당으로 향했다. 거대한 석조 돔 아래, 별자리 문양이 새겨진 대리석 바닥은 차가웠다. 세라가 찾아낸 설계도에 따르면, 마나 흐름이 기형적으로 기록된 지점은 전당의 중앙 제단 아래였다.
    “확실해, 세라? 잘못 건드렸다간 교수님들께 걸려.”
    진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별의 전당은 학원에서도 손꼽히는 신성한 장소였다.
    “네 직감이 여기까지 데려왔잖아. 이제 와서 발 빼지 마.”
    세라가 피식 웃으며 마법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녀의 지팡이 끝에서 푸른 마나의 빛이 섬세하게 뿜어져 나오며 제단 주위를 탐색했다.

    **쉬이이익…**
    공기 중에 미세한 마나의 파동이 일었다. 세라의 눈빛이 흔들렸다.
    “여기야. 확실해. 제단 아래 마나의 흐름이… 다른 곳과는 완전히 달라. 마치 거대한 블랙홀처럼 모든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어.”
    그녀는 제단 위에 손을 얹고 중얼거리듯 고대 문자를 읊기 시작했다. 진우는 긴장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혹시라도 발각될까 봐 심장이 조여 왔다.

    **쿠우웅… 즈즈즈증…**
    별의 전당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제단 중앙의 대리석이 갈라지며 서서히 옆으로 밀려났다. 그 아래는 예상대로 깊은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계단처럼 보이기도 했고, 마치 거대한 생물의 입 같기도 했다.
    진우는 망설임 없이 손에서 작은 마나 구슬을 만들어 어둠 속으로 던졌다.
    **쏴아아아…**
    마나 구슬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더니, 이내 아무런 빛도 반사하지 못하고 소멸했다.
    “젠장, 이건… 마나를 흡수하는 어둠이야.”
    진우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래도 가야지.”
    세라는 이미 마나로 밝힌 탐사용 램프를 들고 있었다. 그녀는 진우에게도 하나 건네주었다.
    “자, 네 놈의 직감은 여기까지지만, 내 논리는 저 밑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싶어 미치겠거든.”

    계단은 끝없이 이어지는 듯했다. 내려갈수록 공기는 무거워지고, 습하며, 희미하게 비릿한 냄새가 났다. 마치 동물의 내장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었다. 탐사용 램프의 빛조차 제대로 퍼지지 못하고 어둠에 먹히는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몇 층이야? 학원 지하 3층보다 훨씬 더 깊이 내려온 것 같은데.”
    진우가 투덜거렸다.
    “아르카디아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공간. 어쩌면 학원이 세워지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일 수도 있어.” 세라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흥분과 함께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계단은 끊어지고, 거대한 석실로 이어졌다. 석실은 고대 이교도의 신전처럼 기괴한 문양들로 뒤덮여 있었다. 문양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 희미하게 꿈틀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석실 중앙에는…
    “이건… 거대한 마나의 웅덩이잖아?”
    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곳에는 액체처럼 일렁이는 투명한 마나가 웅덩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웅덩이 속에는 수많은 마법 장치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장치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촉수처럼 웅덩이 속으로 뻗어 들어가 있었다.

    세라가 웅덩이에 가까이 다가가 마나 탐지 스크롤을 펼쳤다. 스크롤이 강렬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숫자를 표시했다.
    “측정 불가… 이런 마나 밀도는 처음 봐. 아니, 그보다… 마나의 성질이 뭔가 이상해. 순수하지 않아. 여러 가지 감정의 잔류가 뒤섞여 있어. 마치…”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의… 영혼에서 추출한 마나 같아.”

    진우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석실의 가장 안쪽 벽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둘은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낡은 고문서와 함께 오래된 마법 거울이 놓여 있었다. 거울은 마치 안개 낀 물결처럼 일렁였다.

    “이건… 마나를 보여주는 거울인가?” 진우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자, 거울 속에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영상 속에는 아르카디아 학원의 풍경이 펼쳐졌다. 수많은 학생들이 마법 수업을 받고, 훈련장에서 마법을 수련했다. 그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가 학원 건물 전체에 흐르다가, 이내 보이지 않는 통로를 통해 지하 깊숙한 곳으로 흘러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마나는 지금 자신들이 보고 있는 거대한 마나 웅덩이로 모여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그럼 저 마나는… 학원 학생들의 마나라는 거야?!” 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세라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더 심각해. 마나뿐만이 아니야. 저건… 학생들의 미묘한 감정의 파동까지 빨아들이고 있어. 기쁨, 슬픔, 분노, 좌절… 특히 ‘성장’과 ‘열망’의 감정이 강하게 느껴져. 학원에서 마법을 배우고 성장하는 학생들의 에너지를… 이 웅덩이가 흡수하고 있다는 뜻이야.”

    그때, 거울 속 영상이 바뀌었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웅덩이 밑바닥에 잠들어 있는 거대한 존재의 실루엣이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기괴하고 끔찍했다. 거대한 촉수들이 웅덩이 속에서 꿈틀거렸고, 그 촉수들은 마나를 빨아들이는 장치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우우웅… 꾸우우욱…**
    알 수 없는 소리가 석실 전체를 울렸다. 그것은 마치 잠자는 거인이 들이쉬는 숨소리 같기도 했고, 굶주린 괴물이 내는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이게… 학원의 진짜 근원이라고?” 진우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이 끔찍한 존재가… 아르카디아 마법 학원의 마나를 공급하는 심장이었다고?”

    바로 그때였다.
    **철컥.**
    석실의 입구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진우와 세라는 몸을 굳혔다.
    어둠 속에서 걸어 들어오는 그림자. 그 그림자가 램프 빛을 받아 모습을 드러내자, 진우와 세라는 경악했다.
    “최… 최현우 교수님?!”
    최현우 교수는 평소의 엄격하고 냉철한 표정 그대로였다. 그는 들고 있던 지팡이로 석실 입구를 봉쇄하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지만, 그 속에는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예상보다 빨리 이곳에 도달했군. 강진우, 윤세라.”
    교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듣는 이를 얼어붙게 만드는 권위가 실려 있었다.
    “교수님… 이게 대체 뭡니까?” 세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최현우 교수는 거대한 마나 웅덩이와 그 밑에 잠든 존재를 차분히 응시했다.
    “저것이 아르카디아 마법 학원의 심장이다. 동시에, 우리가 수백 년간 지켜온 가장 끔찍한 금기이기도 하지.”
    그는 한숨을 쉬었다. “태초의 존재… 세계의 근원적인 마나와 연결된 존재.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무한한 탐욕을 지닌 심연이었다. 아르카디아의 선대 학장들은 이 존재의 힘을 빌려 학원을 세웠지. 이 학원이 존재하고, 위대한 마법사들을 배출하며, 마나로 가득한 이 세계를 지탱하기 위해서… 우리는 저 존재에게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대가라니요… 학생들의 마나와 감정입니까?!” 진우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순수한 열정과 성장의 마나. 어린 마법사들의 꿈과 열망이 저 존재를 만족시킨다. 그것이 이 학원이 번성하고, 세상에 위대한 마법을 선보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최 교수의 얼굴에는 고뇌의 흔적이 역력했다.
    “학원의 모든 학생들은… 저 괴물에게 먹히고 있었다는 말입니까?!” 세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울부짖었다.
    “아니. 먹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존이다. 저 존재는 과도한 마나를 흡수하지만, 생명을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힘으로 학원 전체의 마나 순환을 돕고, 학생들이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일종의… 상생 관계지.”
    그는 비통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 진실을 알게 된 자들은 모두 저 존재의 노예가 되거나, 미쳐버리거나, 혹은 침묵을 강요당했지. 너희들은 이제 이 진실을 알게 되었다. 아르카디아 마법 학원의 위대한 명성은, 이 어둠 속의 금기 위에서 피어난 가시 돋친 꽃이었다는 것을.”

    정적만이 감돌았다. 진우와 세라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최현우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앞에는, 수백 년간 자신들이 존경해 마지않았던 학원의 추악한 진실이 적나라하게 펼쳐져 있었다.
    최현우 교수는 마침내 결심한 듯 나직이 말했다.
    “이제 너희에게 선택지가 있다. 이 진실을 폭로하고, 아르카디아를 무너뜨릴 것인가. 아니면… 침묵하고, 이 학원의 명예를 지키며 살아갈 것인가.”
    그의 눈빛은 마치 심연처럼 깊고 어두웠다.
    “어떤 선택을 하든, 너희의 삶은 이제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진우와 세라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충격과 두려움, 그리고 거대한 진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혼란이 가득했다.
    아르카디아의 심연은 그렇게, 그들의 영혼 깊숙이 뿌리내렸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균열의 시작

    도시의 밤은 언제나 그랬듯 고요와 소음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강변북로의 불빛은 희미한 주황색 띠를 이루며 바쁘게 움직였지만, 30층 높이의 이 아파트에서는 그 모든 것이 먼 풍경화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밤 11시, 이서준은 작업실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댄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감은 이틀 뒤. 진도는 반도 나가지 못했다.

    “젠장, 진짜 안 그려지네.”

    그는 낮게 중얼거리며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미처 치우지 못한 라면 그릇과 몇 권의 스케치북이 어지럽게 놓인 책상 위에는 아이패드와 디지털 펜만이 깔끔하게 정렬되어 있었다. 서준은 웹툰 작가였다. 엄밀히 말하면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에 가까웠지만, 사람들은 그를 늘 ‘작가님’이라고 불렀다. 스케치도, 선화도, 채색도 어느 것 하나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었다.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고, 심장은 왠지 모르게 불안하게 뛰었다.

    결국 그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몸을 움직여야 굳은 생각이 풀릴 것 같았다. 물이라도 한 잔 마실까 싶어 주방으로 향했다. 발끝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충전 케이블을 툭 밀어냈다.

    타닥.

    거실 불빛이 한순간 깜빡였다. 서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또 이러네.” 이 아파트로 이사 온 지 반년. 가끔 전기가 불안정한지 거실 조명이 깜빡이곤 했다. 그럴 때마다 관리실에 연락했지만, 기사님은 올 때마다 “전압은 정상인데요.” 라는 말만 반복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시원한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시자 목구멍이 확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딸깍.

    현관문 쪽에서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서준은 들고 있던 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현관문은 분명 잠겨 있었다. 그는 문 쪽으로 몇 걸음 다가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착각이었을까? 밤이 깊어지면 이런저런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법이었다. 아니면 윗집이나 아랫집에서 들린 소리가 울려서 들린 것일 수도 있었다.

    “별거 아니겠지.”

    서준은 다시 작업실로 돌아왔다. 창문 너머의 도시 불빛을 보며 생각을 정리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집중은 깨진 뒤였다.

    자정을 넘긴 시간. 서준은 겨우 작업에 다시 몰두하고 있었다. 펜촉이 액정 위를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드디어 몰입이 시작되려는 찰나, 또다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거실 쪽이었다.

    슥, 삭.

    무언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였다. 서준은 펜을 든 채 고개를 쳐들었다. 그는 거실 바닥에 러그를 깔아두었다. 그 위를 발로 질질 끄는 듯한 소리였다.

    “이 시간에 누구지?”

    윗집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나 쿵쿵거리는 소리는 익숙했지만, 이런 소리는 처음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거실로 향했다. 불이 꺼진 거실은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 때문에 완전히 어둡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러그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파도 제자리에 있었고, 작은 협탁 위의 물건들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현관 쪽으로 다시 가보았다. 문은 여전히 굳게 잠겨 있었다.

    “내가 너무 예민한가.”

    밤늦게까지 혼자 작업하는 날이 많아지면서 부쩍 외로움을 타고, 작은 소리에도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서준은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다시 작업실로 돌아섰다.

    그리고 그 순간, 등 뒤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아악!”

    놀란 서준은 몸을 홱 돌렸다. 소리는 주방 쪽이었다. 심장이 발끝까지 쿵 하고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거의 발소리를 내지 않으며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 불을 켜자 하얀 타일 바닥 위로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것은 냉장고 자석이었다.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자석. 그가 이사 오면서 제일 처음 붙여둔 것이었다. 작은 자석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을 뿐인데, 왜 이리 심장이 요동치는 걸까. 그는 자석을 주워 다시 냉장고에 붙였다. 꽤 단단하게 붙어 있었다. ‘떨어질 리가 없는데.’ 그는 의아했지만, 어쩌면 제대로 붙이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점점 더 잠 못 이루는 밤이 이어졌다. 밤마다 잦아지는 이상한 현상들 때문이었다.
    작업실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돌아보면 문은 굳게 닫혀 있거나,
    거실 TV가 저절로 켜져 지직거리는 화면을 보여줄 때도 있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거울에 습기가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위에 작고 흐릿한 손자국이 찍혀 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저 ‘피곤해서’, ‘전기 문제겠지’, ‘이사 오면서 먼지가 많아서’, ‘환기를 시키지 않아서’ 같은 이유를 찾아내며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며칠 후, 새벽 3시.
    서준은 잠결에 이상한 한기를 느꼈다. 덮고 있던 이불이 발끝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는 이불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손끝이 닿는 순간,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느껴졌다. 마치 얼음덩어리를 만지는 듯한 차가움이었다. 깜짝 놀라 손을 떼자, 차가웠던 부분은 이내 온기를 되찾았다.

    “뭐지?”

    그는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어두운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뒤, 침대 발치 쪽에서 무언가 톡, 하고 이불을 건드리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작은 아이의 손가락 같은. 서준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몸을 일으켜 앉으려는데, 이번에는 베개 밑에서 희미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마치 오래된 종이가 바스락거리는 듯한 소리.

    ‘내 상상일 거야. 피곤해서 그래.’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바스락, 바스락.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의 머리맡에서.
    결국 서준은 공포에 질린 채 두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때, 정체 모를 옅은 빛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그의 베개 옆, 침대 헤드보드 위에 얹혀진 작은 사진 액자에서 나는 빛이었다. 그가 어머니가 사주셨던 오래된 필름 카메라로 찍었던 유년 시절의 사진이었다. 조명이 꺼진 방 안에서 사진이 미세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서준은 공포에 질려 사진 액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액자에 닿는 순간, 사진 속 풍경이 기묘하게 일렁였다. 흑백 사진이었던 그의 어린 시절 모습이,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선명한 색감으로 번뜩였다. 그리고 그의 방은, 그 찰나에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높은 천장과 깔끔한 벽 대신, 낡은 나무 서까래와 얼룩진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침대는 사라지고, 대신 낡고 거친 천이 덮인 온돌방의 이부자리가 깔려 있었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야경 대신, 어둑한 시골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게… 뭐야?”

    서준은 자신이 방금까지 누워있던 침대를 더듬었다. 푹신했던 매트리스 대신 딱딱한 바닥이 느껴졌다. 손끝에 닿는 이불은 얇고 거친 면이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아니다. 지금 자신이 본 것은 환각일 뿐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피로에 지친 뇌가 만들어낸 착각.

    서준은 다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하나, 둘, 셋.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방은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익숙한 벽지, 모던한 가구, 창밖의 도시 야경.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 하지만 심장은 여전히 광란하듯 뛰고 있었고, 온몸은 식은땀으로 끈적거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사진 액자를 집어 들었다. 다시 평범한 흑백 사진이었다.
    그러나 액자 뒷면을 만지는 순간, 손끝에 차가운 금속 감촉이 느껴졌다. 액자를 뒤집자, 사진 뒤에 웬 낯선 물건이 테이프로 단단히 붙어 있었다.

    작고 낡은 놋쇠로 된 열쇠였다. 빛바랜 천이 열쇠 고리처럼 감겨 있었고, 그 천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분명 이런 것을 준 적이 없었다. 그는 이 열쇠를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그의 아파트에 어울리지 않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물건이었다.
    서준은 열쇠를 든 손을 덜덜 떨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분명 아니었다.
    그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들은, 단순한 착각이나 전기 문제가 아니었다.
    이 작은 열쇠가, 이 모든 기이함의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그는 혼란과 공포 속에서 열쇠를 꽉 쥐었다. 열쇠에서는 묘하게도 차가운 금속의 감촉 외에, 아주 희미한, 하지만 분명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의 손에 오래도록 쥐여져 있었던 것처럼.
    밤은 그렇게, 섬뜩한 정적 속에서 깊어졌다.

  • 크툴루 신화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대본: 그림자 제국의 새벽

    **장르:** 크툴루 신화, 다크 판타지

    **제목:** 에피소드 1: 굶주린 심연의 메아리

    **로그라인:** 부패한 제국의 폭정 아래 신음하던 백성들은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히자, 금지된 옛 존재들의 그림자를 더듬어 절규의 반격을 시작한다.

    ### **장면 1**

    **[배경]**
    밤. 메마른 대지 위, 허물어져 가는 흙벽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요한 들’ 마을. 하늘에는 섬뜩하리만큼 거대한 핏빛 달이 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얼굴은 그림자처럼 야위고 생기 없다. 간간이 들려오는 기침 소리, 신음 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깨뜨린다.

    **[지문]**
    메마른 들판을 가로지르는 찬 바람이 후줄근한 옷가지를 파고든다. 멀리 제국 수도 ‘아르카디아’의 첨탑들이 달빛 아래 검은 이빨처럼 솟아 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은 이 작고 가난한 마을의 어둠을 더욱 깊게 만든다. 마을 중심의 유일한 우물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다. 사람들의 눈동자에는 포기만이 가득하다.

    **[캐릭터]**
    * **강산 (20대 중반, 남):** 억센 몸과 날카로운 눈빛을 지닌 청년. 마을에서 몇 안 되는 건장한 사내.
    * **할머니 옥례 (70대, 여):** 깊은 주름만큼이나 오래된 지혜를 가진 노파. 늘 낡은 목걸이를 만지작거린다.
    * **동진 (7세, 남):** 뼈만 앙상한 어린 소년. 강산의 조카.

    **[대사]**

    **강산:** (작게 읊조리듯) …또 아무것도 없네.

    **[지문]**
    강산이 우물 바닥을 내려다본다. 갈라진 진흙만이 그의 실망감을 대변한다.

    **할머니 옥례:** (기침하며, 강산의 곁으로 다가온다) 너무 기대하지 말거라, 강산아. 이 땅은 이미… 썩어버렸으니.

    **강산:** (옥례를 부축하며) 할머니, 이렇게 나오시면 안 됩니다. 밤공기가 차가워요. 동진이는요?

    **할머니 옥례:** (쓸쓸한 미소) 아직 잠 못 들고 칭얼거리는구나.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을…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이 늙은이만 죄스럽다.

    **[지문]**
    강산의 시선이 동진이 누워있는 움막으로 향한다. 가느다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온다. 강산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진다.

    **강산:** (이글거리는 눈빛) 제국 놈들… 우리의 피를 빨아먹고 저들만 배불리 살고 있습니다. 매번 공물이라는 이름으로 곡식을 털어가고, 젊은이들은 강제로 징집해 어디론가 끌고 가 버리니…

    **할머니 옥례:** (강산의 손을 잡으며) 분노는 독이 될 뿐이다. 그들의 힘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거대하단다. 저 아르카디아의 흑색 첨탑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니.

    **강산:** (의아한 듯)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할머니 옥례:** (하늘의 핏빛 달을 올려다보며) 아주 먼 옛날… 이 땅에 인간의 시대가 오기 전부터 존재하던… 잠들지 않는 어둠이 있단다. 제국은 그 어둠에 기대어, 혹은 그 어둠을 이용해 이 모든 권세를 누리고 있지. 저들의 부와 권력은… 깨끗한 것이 아니야.

    **[지문]**
    옥례의 목소리에서 기이한 서늘함이 묻어난다. 강산은 그런 할머니의 말이 터무니없게 들리면서도,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컷 전환]**

    ### **장면 2**

    **[배경]**
    새벽녘. 고요한 들 마을 어귀. 흙먼지를 일으키며 제국 군사들의 마차가 들이닥친다. 마차는 낡고 삐걱거리지만, 그 뒤를 따르는 병사들의 모습은 으스스하게 위압적이다. 그들은 검은 갑옷을 입고, 늑대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있다. 선두에는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제국 장교, ‘레온’이 서 있다.

    **[지문]**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움츠러든다.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고, 어른들은 고개를 숙인다. 강산은 분노를 삭이며 맨 앞에 선다. 옥례는 강산의 옆에서 낡은 목걸이를 움켜쥔다.

    **[대사]**

    **레온:** (말에서 내리며, 오만한 미소) 여봐라, 고요한 들 백성들이여! 제국의 은혜로운 섭리 아래 안녕한가!

    **[지문]**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정적만이 흐른다. 레온의 미소가 굳어진다.

    **레온:** (날카로운 목소리) 감히 제국의 은총에 답하지 않느냐! 총독부에서 명하신 공물 수거의 날이다. 작년보다 두 배의 곡물과, 건장한 젊은이 열 명을 차출해 아르카디아로 보낼 것이다! 어서 내놓아라!

    **마을 사람 1:** (떨리는 목소리) 장교님… 저희에게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습니다. 우물은 마르고, 밭은 황폐해졌습니다. 곡물은커녕, 내일 먹을 양식도 없습니다…!

    **레온:** (비웃음) 허튼소리! 제국은 너희의 게으름까지 책임지지 않는다. 당장 내놓지 않으면…

    **[지문]**
    레온이 손짓하자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을 에워싼다. 공포에 질린 비명이 터져 나온다.

    **강산:** (앞으로 나서며) 이보시오, 장교! 이건 너무한 처사요! 살아갈 최소한의 희망마저 빼앗는다면, 우리는…!

    **레온:** (강산을 노려보며) 네놈이 감히 황명을 거역하려는 것이냐! 말해두지만, 제국의 자비는 한계가 있다. 우리에게 반항하는 자는…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지문]**
    레온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뜩인다. 그의 흉터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 병사들이 강산을 붙잡으려 달려든다.

    **강산:** (몸을 피하며 소리친다) 감히 제국이 백성을 이렇게 몰아붙일 수 있단 말인가!

    **레온:** (비웃음) 제국은 할 수 있다. 이 모든 대지는 황제 폐하의 것이고, 너희의 목숨 또한 폐하의 것이다. 자, 어서 곡식을 찾아내고, 젊은이들을 끌어내라!

    **[지문]**
    병사들이 마을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절망적인 외침과 울음소리가 들린다. 한 병사가 동진의 움막으로 들어간다.

    **할머니 옥례:** (비명처럼) 안 돼! 거기에는… 어린아이밖에 없단다!

    **[지문]**
    병사가 동진을 끌어내려 한다. 동진은 영양실조로 비틀거리며 힘없이 쓰러진다. 그 옆에 작은 자루 하나가 놓여 있다. 병사는 그 자루를 발견하고는 흡족한 듯 미소 짓는다. 그 자루 안에는 마지막 남은, 곰팡이 핀 감자 몇 알이 들어있다.

    **병사:** 쳇, 겨우 이런 것뿐인가. 이젠 아이들 몫까지 숨겨두는군!

    **강산:** (눈이 뒤집힌 듯 달려든다) 그건 안 돼! 동진이의… 동진이의 마지막 양식이다!

    **[지문]**
    강산이 병사를 밀쳐내고 감자 자루를 지키려 한다. 레온이 이를 보고 냉소를 짓는다.

    **레온:** (손짓하며) 저 건방진 놈을 끌어내라! 그리고 저 자루도 압수해. 제국에 반항한 대가로, 그 아이는 오늘부터 굶어 죽을 것이다!

    **[지문]**
    병사들이 강산을 무자비하게 제압한다. 강산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감자 자루는 빼앗긴다. 동진은 기침하며 아픔에 몸부림치고, 옥례는 절규한다.

    **강산:** (피를 토하며) 제국… 이 빌어먹을 제국 같으니!

    **[지문]**
    강산의 시야가 흐려진다. 그때, 옥례가 강산의 눈앞으로 손을 뻗는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낡은 목걸이의 가운데 박힌 어두운 색의 돌이 섬뜩하게 빛을 뿜는 것 같다. 강산의 의식 속으로, 오래된 속삭임들이 파고든다.

    ### **장면 3**

    **[배경]**
    밤. 마을 외곽, 오래된 신단처럼 보이는 돌무덤 주위. 몇몇 마을 사람들이 강산 주위에 모여 있다. 모두 침통하고 결의에 찬 얼굴이다. 달은 더욱 붉게 물들어 있다.

    **[지문]**
    강산은 멍한 표정으로 옥례가 건넨 낡은 목걸이를 쥐고 있다. 목걸이의 돌에서 미약하게 어둠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환영이 보인다. 동진의 굶주린 모습, 마을 사람들의 절규, 레온의 비웃음이 강산의 머릿속을 맴돈다.

    **[대사]**

    **강산:** (낮고 떨리는 목소리) …우리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 더 이상 빼앗길 것도 없어.

    **마을 사람 2 (여):**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강산님? 저들은 하늘을 찌르는 철벽을 가지고 있고, 우리는…

    **마을 사람 3 (남):** 그래요. 칼 한 자루 제대로 쥘 힘도 없는 노인과 아이들뿐인데…

    **[지문]**
    강산이 고개를 든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절망에 물들어 있지 않다. 대신, 섬뜩한 결의가 이글거린다.

    **강산:** (강한 어조로) 우리가 싸울 수 있는 것은… 그들의 힘이 아닌, 그들이 잊고 있던 힘이다.

    **[지문]**
    강산은 옥례가 건넨 목걸이를 꽉 움켜쥔다. 목걸이의 돌에서 희미하게 검은 기운이 피어나는 듯하다.

    **강산:** (할머니 옥례를 바라본다) 할머니, 그 오래된 이야기가… 진실이라면. 제국의 힘이 ‘검은 심연’에서 왔다면… 우리는 그 심연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할머니 옥례:** (고요한 눈빛으로 강산을 바라보며) 너의 안에… 그 어둠의 그림자를 보았느냐? 조심하거라, 강산아. 그 그림자는 양날의 검이니. 자칫하면 너 자신마저 집어삼킬 것이다.

    **[지문]**
    옥례의 목소리에는 경고와 함께 깊은 슬픔이 섞여 있다.

    **강산:** (비장하게) 이미 우리 모두는 집어삼켜지고 있습니다. 산 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차라리… 저들의 어둠을 깨워, 우리 스스로를 태울지언정… 이대로는 죽을 수 없습니다!

    **[지문]**
    강산이 돌무덤 위에 손을 얹는다. 돌무덤 틈새로 기이한 형상의 문자들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것 같다. 그것은 오래된 비문, 잊혀진 존재들의 언어이다.

    **강산:**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며) 여러분, 제국은 우리가 무지하고 나약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고통은 저들의 탐욕보다 깊고, 우리의 분노는 저들의 오만보다 뜨겁습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없지만, 잃을 것 또한 없습니다! 이제 더 이상 짓밟히지 않을 것입니다.

    **[지문]**
    강산의 말에 마을 사람들의 눈동자에도 서서히 불꽃이 피어오른다. 두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처음으로 희망의 불씨를 본다.

    **마을 사람 2:** (작게) 그럼…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강산:** (결연한 표정으로) 우리가 잊었던 옛 지혜를 더듬어, 저들의 발톱 밑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들이 이용하던 어둠을… 이제 우리가 움켜쥘 차례다. 심연의 끝에서… 우리는 해답을 찾을 것이다!

    **[지문]**
    강산이 든 목걸이의 돌에서 검은 빛이 더욱 강렬하게 뿜어져 나온다. 그 빛은 마을 사람들의 지친 얼굴을 비추며, 그들의 그림자를 거대하게 드리운다. 마치 잠든 거대한 존재가 서서히 눈을 뜨는 듯한 기운이 마을 전체를 감싼다.

    **[효과음]**
    콰아아아앙-! (먼 곳에서 들리는,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둔탁한 소리)
    쉬이이이익… (어둠 속에서 바람이 속삭이는 소리)

    **[지문]**
    하늘의 핏빛 달이 더욱 짙은 붉은색으로 타오르고, 그 빛이 강산과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섬뜩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강산:** (이를 악물고) 심연이 우리를 부른다…!

    **[엔딩 크레딧]**

  • 크툴루 신화 독립적인 단편 소설

    무너진 세계의 한 조각, 폐허가 된 도시의 그림자 속에 지훈은 몸을 숨기고 있었다. 콘크리트 잔해와 녹슨 철근이 뼈대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건물들 사이로 스며드는 노을은 기이하게도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하늘은 탁한 회색과 진홍빛이 뒤섞여 마치 거대한 상처처럼 보였고, 그 아래의 세상은 먼지와 정적만이 지배하는 죽은 무덤이었다.

    “젠장… 오늘은 뭘 찾아야 하나.”

    지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며칠째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했고, 식량은 바닥난 지 오래였다. 손에 들린 몽둥이는 무기라기보다는 지팡이에 가까웠고,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등에 멘 낡은 배낭 속에는 빈 통조림 캔 몇 개와 녹슨 나이프, 그리고 정체 모를 고문서 조각이 전부였다. 그 고문서 조각은 그가 이 세계의 심연을 처음 엿본 곳에서 주운 것이었다. 알 수 없는 문자와 불쾌한 도형들이 가득한 그것을, 그는 왜 버리지 못하는 걸까. 어쩌면 그 안에 이 모든 비극의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 때문이었으리라.

    지훈은 한때 거대한 쇼핑몰이었을 법한 건물의 입구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유리문은 산산조각 나 있었고, 내부에서는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습기가 풍겨 나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아무것도 없겠지. 늘 그랬듯이.”

    그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기대는 사치였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저 절망 속에서 다음 절망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불과했다. 복도를 따라 걸어 들어가자, 희미한 잔광이 비추는 텅 빈 상점들이 늘어섰다. 마네킹들은 기괴하게 부서진 채 비틀려 있었고, 핏자국처럼 번진 곰팡이가 벽을 뒤덮고 있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복도 끝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지훈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본능적으로 몽둥이를 고쳐 쥐고 벽에 바싹 몸을 붙였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는… 마치 뼈가 비틀리는 듯한 불쾌한 마찰음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더 끔찍했다. 거대한 벌레가 딱딱한 껍질을 비비는 소리 같기도 했고, 죽어가는 육체가 바닥을 기어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숨을 죽이고 어둠을 응시했다. 빛이 닿지 않는 저 너머에서, 검고 거대한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짐승이라기보다… 어떤 육체가 뒤틀리고 뭉쳐서 만들어진 덩어리에 가까웠다. 척추가 불가능한 각도로 꺾여 있었고, 다리는 제멋대로 자라나 있었다. 가장 끔찍한 것은, 그 검은 덩어리 위로 수많은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들은 별자리를 이룬 것처럼 불규칙하게 박혀 있었고, 멍하니 주변을 훑어보고 있었다.

    지훈은 식은땀을 흘리며 뒷걸음질 쳤다. 저것은… ‘놈들’이었다. 재앙이 세상을 뒤덮은 이후, 밤의 그림자 속에서, 혹은 폐허의 심연에서 나타나는 기괴한 존재들. 그것들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형태를 하고 있었고,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붕괴될 것 같은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것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덩어리 중앙에 박힌 수많은 눈동자 중 하나가, 정확히 지훈이 숨어 있는 방향을 향해 돌아선 것이다. 그리고 그 검은 덩어리에서, 마치 수많은 목구멍이 동시에 벌어지는 듯한 기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것은 비명에 가까웠지만, 비명이 아니었다.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도 불쾌하고 고통스러운 음파였다. 그 소리는 지훈의 고막을 찢고 뇌 속으로 파고들어, 그의 이성을 잠식하려 들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머릿속에서 온갖 환각이 스쳐 지나갔다. 녹슨 철근이 꿈틀거리는 뱀처럼 보였고, 벽의 곰팡이가 피와 살덩이로 변하는 듯했다.

    지훈은 이성을 붙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다. “안 돼… 미치면 안 돼…!” 그는 자신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이미 그의 정신은 거대한 균열을 얻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공포가 그를 짓눌렀다. 저것은 그저 형태만 기괴한 괴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 자체로 현실을 왜곡하고, 보는 이의 정신을 붕괴시키는 ‘무언가’였다.

    그 검은 덩어리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지훈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다리들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았다. 지훈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살아야 했다.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이 끔찍한 세상 속에서 숨 쉬고 싶었다.

    그는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되돌아 달리고, 복도 끝의 비상구 문을 향해 내달렸다. 몽둥이가 바닥에 부딪히며 일으키는 소음조차 공포에 묻혀버렸다.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비상구 문을 박차고 나갔다. 어두컴컴한 계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는 한 칸 한 칸 발을 헛디딜까 공포에 떨면서도 필사적으로 아래로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갈 때마다 쇼핑몰 안에서 들리던 끔찍한 소리가 조금씩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마치 그 소리가 그의 뇌리에 영원히 각인된 것처럼,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듯했다.

    결국, 그는 1층의 비상구 문을 통해 밖으로 뛰쳐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폐허의 잔해가 가득한 거리로 나온 지훈은 숨을 헐떡였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놈이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그대로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시야는 여전히 흐릿했고, 온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근처의 버려진 버스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녹슨 철제 의자 사이에 몸을 웅크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은 그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들었다. 밤하늘은 여전히 붉은색과 회색이 뒤섞인 기이한 색을 띠고 있었고, 저 멀리 도시의 가장 높은 건물에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균열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우주의 끝자락에서 온 존재가 이 세계의 심장을 움켜쥔 듯한 모습이었다.

    지훈은 배낭을 끌어당겨 고문서 조각을 꺼냈다. 손가락으로 알 수 없는 문자를 더듬었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이 이 문서, 혹은 이 문서가 가리키는 어떤 존재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 존재들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곳에 있었고, 인간은 그저 그 거대한 존재들의 그림자 아래에서 비참하게 살아남으려는 발버둥일 뿐이었다.

    “오늘도… 살아남았군.”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곧 울음이 되었다. 공포와 피로, 그리고 절망이 뒤섞인 비통한 울음이었다.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매일 밤 지옥 같은 꿈에서 깨어나 다음 날의 지옥을 마주하는 것을 의미했다. 미쳐버리지 않고 이성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버스의 차가운 철판에 등을 기댄 채, 지훈은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검은 덩어리의 불가능한 형태와 수많은 눈동자, 그리고 그 끔찍한 비명이 맴돌았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다. 내일 아침, 태양이 뜬다면(설령 그것이 더 이상 태양이 아닐지라도), 그는 다시 배낭을 메고 일어나야 할 것이다. 이 황폐해진 세계 속에서, 다음 식량을 찾고, 다음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단 하루라도 더. 이 모든 것이 끝나는 날이 오거나, 자신이 완전히 미쳐버리는 날이 오기 전까지.

    그것이, 지훈의 유일한 존재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