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회색빛 폐허 속에서 세상은 숨 쉬기를 잊은 듯했다. 무너진 고층 빌딩의 앙상한 뼈대가 하늘을 긁었고, 찢겨나간 아스팔트 틈새로 독기 품은 잡초들이 기괴하게 자라났다. 인간이라는 이름이 더 이상 위엄이 아닌,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는 나약한 종족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였다.

    이설은 녹슨 철근이 삐져나온 잔해 더미를 조심스럽게 타고 넘었다. 낡은 배낭 속에는 오늘 겨우 찾은 딱딱한 건빵 부스러기와 한쪽만 멀쩡한 통조림 캔이 전부였다. 이런 황량한 세상에서 인간의 삶은 매일매일이 서바이벌 드라마의 한 장면이었다. 그 드라마는 언제나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자, 차가운 공기가 폐허를 감쌌다. 이설은 낡은 방수포를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날것의 공포가 언제나 그녀의 곁을 맴돌았다. 인간들의 약탈자 무리도 두려웠지만, 밤의 장막 아래에서만 활동하는 ‘그들’은 더 그랬다.

    ‘숲의 아이들.’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숲이, 아니, 오염된 폐허의 그림자 속에서 태어난 변이종들. 인간과 비슷한 형체를 지녔지만, 밤에 빛나는 눈과 짐승처럼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놀라운 속도를 가진 존재들. 그들은 인간을 먹이로 사냥했다. 적어도, 이설은 그렇게 배워왔다.

    그러나 오늘 밤, 모든 것이 달라질 참이었다.

    이설은 잠시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눈을 떴을 때, 그림자 같은 형체가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 대신 마른 공기만 터져 나왔다. 그 그림자의 눈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은은한 녹색으로 빛났다.

    “……!”

    그는, 아니 ‘그’는 이설이 알던 숲의 아이들과는 달랐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나무껍질처럼 단단해 보였지만, 사냥개처럼 드러난 송곳니는 의외로 뾰족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눈에는, 굶주린 짐승의 광기 대신 낯설고 깊은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설은 움찔했지만, 이상하게도 도망칠 수 없었다. 얼어붙은 몸은 감히 그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다. 그의 손이 이설의 뺨에 닿았다. 차갑고 거칠었지만, 그 어떤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다.

    “……숲, 아이…….” 이설이 겨우 말을 잇자,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크르르… 아니.” 그의 목울대에서 낮은 소리가 울렸지만, 다음 말은 뜻밖에도 인간의 언어였다. 서툴고 거칠었지만, 분명히 “카이… 나.”

    카이.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한 것이었다. 이설은 그제야 긴장이 풀리며 온몸이 떨려왔다. 죽을 고비를 넘긴 듯한 안도감이었다.

    “이설… 나는 이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의 녹색 눈이 한참 동안 그녀의 얼굴을 탐색했다. 그리고는 한 발짝 물러나 앉았다. 그들의 첫 만남은 그렇게, 공포와 호기심, 그리고 어색한 침묵 속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로 카이는 밤마다 이설을 찾아왔다. 처음에는 멀찍이서 그녀를 지켜보기만 했다. 이설은 익숙지 않은 시선에 불안했지만, 그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점차 경계를 풀었다. 카이는 먹을 것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썩지 않은 과일이나, 막 잡은 작은 짐승들. 이설은 그걸 보며 역겹다고 생각했지만, 굶주린 배는 이성의 목소리보다 훨씬 절실했다.

    어느 날 밤, 이설은 폐허 속에서 발견한 낡은 책을 읽고 있었다. 바람이 차가웠고, 책장은 너덜거렸다. 카이가 나타나자, 이설은 그에게 책을 내밀었다.

    “이게 뭔지 알아?”
    카이는 갸우뚱거리며 책을 만져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종이 위를 스쳤다.
    “그림… 글자?”
    “응. 이건 옛날이야기야. 사람들이 살았던 세상에 대한 이야기.”

    이설은 서툰 카이에게 글자를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카이는 놀랍도록 빠르게 글자를 익혔다. 그의 지성은 인간의 선입견을 산산조각 냈다. 그들은 밤마다 폐허의 어두운 구석에서 몰래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글자를 배우고, 서로의 세상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이설은 그의 세상에 대해 물었다. 숲의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카이는 그들의 언어로 대답했지만, 이설은 그 목소리에 담긴 감정만으로도 그들의 삶이 인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 역시 생존을 위해 싸우고, 가족을 지키며, 미래를 꿈꾸는 존재들이었다.

    “인간… 미워해?” 카이가 어느 날 밤,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설은 잠시 망설였다. “아니… 미워하지 않아. 그저 두려워할 뿐이야.”
    “나… 너… 안 미워.” 카이의 녹색 눈동자가 흔들렸다. “너… 따뜻해.”

    그날 밤, 카이는 이설에게 자신의 날카로운 발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죽인 짐승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이거… 내 힘. 하지만 너… 안 다쳐.” 그의 눈빛은 간절했다. 자신은 괴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했다. 이설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발톱은 거칠었지만, 그 온기는 따뜻했다. 그때부터 이설은 카이를 단순히 ‘숲의 아이’가 아닌, ‘카이’ 그 자체로 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관계는 점차 깊어졌다. 낮에는 각자의 세상에서 생존을 위해 싸웠고, 밤에는 폐허의 숨겨진 장소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위안을 얻었다.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었고, 서로의 외로움을 채워주었다. 세상이 그들을 어떻게 보든, 그들만의 작은 우주에서는 서로가 유일한 빛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금지된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설의 거처가 인간 약탈자들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식량을 훔치고, 이설을 끌고 가려 했다. 절체절명의 순간, 카이가 나타났다. 그는 그림자처럼 빠르게 움직여 약탈자들을 제압했다. 그의 발톱은 날카로웠고, 그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약탈자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카이의 등에 꽂힌 낡은 화살. 그리고 약탈자들이 도망치며 남긴 흔적을 쫓아온 인간 정찰대. 정찰대원들은 피투성이가 된 카이와 그를 부축하는 이설을 발견했다.

    “저 여자… 숲의 아이들과 한패였어!”
    “감히 인간을 배신하고 괴물과 어울려?!”

    인간들의 비난과 함께 활시위가 당겨졌다. 이설은 카이를 감싸 안았다.
    “안 돼! 그는… 그는 나를 구해줬어!”
    카이는 신음하며 이설을 밀어냈다. “도망쳐… 이설…!”

    하지만 이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단호했다. “혼자서는 안 가. 같이 가거나… 같이 죽어.”
    그때였다. 숲의 아이들 무리가 폐허 저편에서 나타났다. 카이의 동족들이었다. 그들은 인간 정찰대를 향해 포효했고, 카이의 부상과 이설의 존재를 확인하자 분노에 휩싸였다.

    양측은 대치했다. 인간들은 활을 겨누었고, 숲의 아이들은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냈다. 카이는 이설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녹색 눈은 고통과 혼란으로 가득했다. 그의 동족은 그가 인간을 돕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인간들은 그가 숲의 아이라는 사실만으로 그를 죽이려 했다.

    “카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 이설의 목소리가 떨렸다.

    카이는 이설의 손을 잡았다. 그의 차가운 손끝이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양쪽 무리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대신, 이설의 손을 이끌고 폐허의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는… 우리 길 간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양쪽 무리는 그들의 행동에 잠시 당황했다. 인간들은 배신자라며 비난했고, 숲의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카이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모든 시선은 이설에게, 그리고 그들의 어두운 미래를 향해 있었다.

    총성과 포효가 뒤섞이는 혼돈 속에서, 이설과 카이는 달렸다. 그들은 더 이상 어느 종족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만의 종족이 되었다. 금지된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세상의 모든 규칙과 편견을 등진 채, 두 개의 다른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는 것을 느끼며.

    그들의 앞날은 알 수 없었다. 언제 다시 위험에 처할지, 어디에서 안전을 찾을 수 있을지. 하지만 폐허의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나아갔다. 서로의 존재만이 유일한 희망인, 그들만의 작은 종말 이후의 세계를 향해.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생존일지도 모른다고, 이설은 생각했다. 모든 것을 잃은 세상에서, 사랑만큼은 결코 잃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그들의 마지막이자 유일한 선택이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챕터 1: 현실 속의 잔상

    차갑게 식은 손가락이 마우스 위에 얹혔다.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지훈의 멍한 눈동자에 맺혔다. 헤드셋을 벗어던진 지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방금 전까지 그를 옥죄던 전율은 여전히 신경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젠장, 이게 뭐라고….”

    그가 플레이하던 가상현실 게임, 『아르카나: 에테르의 그림자』는 명성에 걸맞은 몰입감을 자랑했다. 아니, 몰입감이라는 단어로는 부족했다. 그곳은 또 하나의 ‘현실’이었다. 고작 30분 전만 해도 지훈은 수백 년 된 고목의 뿌리가 뒤엉킨 어둠침침한 던전, ‘속삭이는 골짜기’의 가장 깊은 곳에서 거대한 고대 정령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컨트롤과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보스의 패턴은 그를 완전히 잊게 만들었다. 자신이 지금, 고작 몇 평 남짓한 자취방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다는 사실을.

    보스를 쓰러뜨리고 전설 등급의 아이템을 획득하는 순간의 희열은, 현실로 돌아온 지금도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지훈은 벌떡 일어나 의자에 걸쳐둔 후드티를 아무렇게나 집어 들었다. 이제 슬슬 배가 고파질 시간이었다. 새벽 1시, 도시의 고층 아파트 단지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창밖으로는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들만이 깨어있는 생명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냉장고를 열어 텅 빈 속을 확인한 지훈은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게임하기 전에 미리 뭐라도 사다 놓을 걸. 결국 그의 손은 선반 위 인스턴트 라면 봉지로 향했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파란 불꽃이 솟아올랐다.

    그때였다. 쨍그랑!

    놀란 지훈은 움찔 몸을 떨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유리컵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어? 내가 뭘 떨어뜨렸나?”

    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컵은 식탁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는데. 혹시 고양이를 키웠던가? 아니, 그는 혼자 살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훈은 이내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거나, 지진이라도 난 건가? 하지만 그의 휴대폰은 어떤 긴급 알림도 울리지 않았다. 아마도 피로가 극에 달해서 잠시 착각했을 것이다. 대충 파편을 쓸어 담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라면 물이 끓기 시작했다. 꼬들꼬들한 면발과 얼큰한 국물을 상상하며 지훈은 침을 꿀꺽 삼켰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라면을 냄비째 들고 식탁으로 향했다. 플라스틱 받침대 위에 냄비를 내려놓고 젓가락을 들었을 때였다.

    철컥.

    주방 싱크대 상부장 문이, 닫혀 있었던 그 문이 스스로 스르륵 열렸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열린 문은 다시 스르륵 닫혔다.

    “……?”

    지훈은 젓가락을 든 채 굳어버렸다. 이번엔 명백했다.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서? 뻥 뚫린 환기구를 통해 들어오는 바람이 상부장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을까? 그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오래된 아파트라 문이 삐걱거리고 헐거워진 탓일 거라고 억지로 합리화하며 애써 불안감을 지웠다.

    그는 라면을 후루룩 먹기 시작했다. 피곤해서 예민해진 것일 뿐이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뜨겁고 얼큰한 국물이 속을 데우자 조금은 안정을 되찾는 듯했다. 접시에 덜어 놓은 김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한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채웠다.

    그때, 거실 쪽에서 나지막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그림자…….”

    지훈의 몸이 다시 경직됐다. 젓가락이 접시에 떨어지며 쨍, 하는 소리를 냈다. 잘못 들은 걸까? 환청? 뇌가 과부하 걸린 건가? 그는 숨을 죽였다. 라면 국물에 고개를 파묻은 채, 거실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냉장고의 웅웅거리는 소리와 창밖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만이 전부였다.

    ‘잠이 부족해서 그래. 게임을 너무 오래했어.’

    지훈은 애써 침착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울리고 있었다. 쿵, 쿵, 쿵. 마치 갓 보스를 쓰러뜨리고 심장이 진정되지 않은 것처럼.

    라면을 서둘러 먹고 설거지를 마쳤다. 이제는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침실로 향하는 복도를 지날 때였다. 거실에 놓인 대형 TV 화면이 갑자기 ‘탁’ 하고 켜졌다. 지직거리는 노이즈 화면이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뿌려댔다.

    “이게 또 뭐야!”

    지훈은 화들짝 놀라 TV 쪽으로 몸을 돌렸다. 리모컨은 소파 팔걸이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노이즈 화면이 사라지자 어둠이 다시 거실을 집어삼켰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듯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 지훈은 본능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건 단순한 착각이나 피로 누적이 아니었다.

    그는 천천히 침실 문을 열었다. 침실은 어두웠지만, 희미한 달빛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와 가구들의 윤곽을 드러냈다. 어째서인지 침실 공기가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피부에 닿는 한기에 소름이 돋았다.

    침대에 막 앉으려는 순간, 그의 시선이 책상 위로 향했다. 그가 벗어던진 VR 헤드셋이 놓여 있었다. 방금 전까지는 분명히 앞을 보고 있었는데.

    헤드셋의 센서 부분이, 그러니까 헤드셋의 ‘눈’ 부분이 지훈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흡사, 누군가 헤드셋을 쓰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지훈은 얼어붙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섬뜩한 기운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헛것이 아니다. 분명히 헤드셋은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 헤드셋의 작은 LED 램프가 깜빡이더니, 스피커에서 희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지직거리는 노이즈음이었다. 마치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그리고 그 노이즈 너머로, 방금 전 『아르카나: 에테르의 그림자』 던전에서 들었던 보스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흐흐흐… 어둠은… 깊고… 그림자는… 널… 따라갈 것이다…

    음산한 목소리는 마치 지훈의 귓가에 직접 속삭이는 듯 생생했다. 게임 속 보스가 죽기 직전 내뱉었던 그 대사 그대로였다.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헤드셋은 여전히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노이즈음과 보스의 웃음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합리화할 수 없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현실 속에, 게임의 잔상이 스며들어 있었다.

    지훈은 뒷걸음질 쳤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가 VR 헤드셋을 벗어던진 순간부터, 무엇인가가 게임에서 그의 현실로 따라왔다는 소름 끼치는 사실이 뇌리를 스쳤다.

    콰아앙!

    갑자기 침실 문이 굉음을 내며 활짝 열렸다. 복도에서부터 거실까지, 집 안의 모든 불이 동시에 꺼졌다. 완전한 어둠이 지훈을 집어삼켰다. 창문 너머의 도시 불빛마저 흐릿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또다시 그 목소리를 들었다.

    “— 이제… 시작이다….”

    그것은 게임 속 보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지훈 자신의 목소리였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충격에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손끝발끝이 마비되는 듯한 극도의 공포 속에서, 지훈은 자신의 집이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혼자가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천천히 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 SF (공상과학)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철의 숨결: 잿빛 도시의 생존자

    **1화: 찢어진 하늘 아래**

    회색 먼지가 끝없이 흩날리는 지평선 너머로, 찢어진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앙상한 이빨처럼 솟아 있었다. 한때 번영을 자랑했던 도시의 잔해들은 이제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지훈은 낡은 방진 마스크를 고쳐 썼다. 렌즈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언제나 그랬듯 뿌옇고, 절망적이었다.

    “젠장, 오늘도 아무것도 없네.”

    그의 중얼거림은 마스크 속으로 희미하게 흩어졌다. 찢어진 배낭을 움켜쥔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며칠째 수확이 없었다. 물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고, 비상식량은 어제부로 완전히 동났다. 발밑에 밟히는 자갈들이 자박거리는 소리만이 끈질기게 그의 귀를 따라왔다.

    회색 도시의 구역 7은 언제나 위험했다. 다른 생존자들이 거의 발을 들이지 않는 곳. 그만큼 먹을 것이나 쓸 만한 물건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곳을 제 영역으로 삼은 ‘그것들’의 활동 범위이기도 했다. 지훈은 허리춤에 찬 낡은 금속 파이프를 무의식적으로 만져보았다. 녹이 슬고 닳았지만, 그의 목숨을 여러 번 구해준 유일한 친구였다.

    오랜 주거용 건물들의 잔해가 빽빽하게 늘어선 골목을 굽이굽이 지났다. 한때는 화려했을 로비,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을 놀이터, 누군가의 꿈이 피어났을 작은 서점… 모든 것이 잿더미 속에 파묻혀 있었다. 벽에는 낙서처럼 긁힌 “살아남아라”라는 글귀가 먼지 속에 희미하게 보였다. 허망한 구호였다.

    한참을 헤매던 지훈의 시선이 한 건물에 멈췄다. 다른 건물들보다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채 서 있는 10층 남짓의 상업 지구 건물이었다. ‘알파 연구소’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연구소 건물이라면, 어쩌면… 에너지 셀이나 하다못해 쓸 만한 의료품이라도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그의 가슴을 스쳤다. 이런 희망은 언제나 허무하게 부서지기 마련이었지만, 이젠 그마저도 없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건물의 출입구는 이미 파괴되어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바깥의 흙먼지 섞인 바람과는 달리, 안쪽은 썩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답답한 공기가 가득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듯했지만, 건물 천장의 깨진 틈으로 몇 가닥의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춤을 추고 있었다.

    지훈은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희미한 불빛이 주변을 비추자, 먼지가 수북이 쌓인 연구 장비들과 알 수 없는 액체가 말라붙은 바닥이 드러났다.

    “빌어먹을, 이건 또 뭐야.”

    한때 깨끗했을 것으로 보이는 유리 파편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무언가에 의해 잔인하게 파괴된 흔적이었다. 지훈은 발소리를 죽이며 천천히 복도를 따라 걸었다. 복도 끝, 가장 깊숙한 곳에 ‘전력 제어실’이라고 적힌 팻말이 보였다. 그의 심장이 갑자기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전력 제어실이라면, 예비 에너지 셀이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문을 여는 순간,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정적을 갈랐다. 안은 복도보다 훨씬 어두웠다. 지훈은 손전등을 들어 내부를 훑었다. 낡은 제어반과 텅 비어 있는 거대한 배터리 칸들이 보였다.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역시나….”

    그때였다.
    지훈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금속이 긁히는 듯한 소리가 벽 너머에서 들려왔다. 마치 날카로운 발톱이 콘크리트 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마스크 너머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젠장, 여기까지 따라온 건가?’

    그것들이었다. 잿빛 도시의 가장 밑바닥에서 기생하는, 변형된 생명체들. 사람들은 그들을 ‘그림자 사냥꾼’이라고 불렀다. 빛을 싫어하고, 소리에 민감하며, 집단으로 사냥하는 잔인한 포식자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지훈은 재빨리 제어실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철제 캐비닛 뒤에 웅크려 앉아 숨을 죽였다. 이 방 안에 혹시라도 아직 살아있는 에너지 셀이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 했다. 아니, 그전에 살아남아야 했다.

    철컥, 철컥.
    기괴한 발소리가 문턱을 넘는 소리가 들렸다. 손전등 불빛을 껐다. 완전히 암흑 속으로 파묻힌 공간에서, 그의 귀는 모든 소리에 집중했다. 두 마리… 아니, 세 마리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크기는 작지만, 빠른 움직임과 날카로운 이빨, 발톱을 가진 녀석들이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방 안을 휘젓고 다니는 것이 느껴졌다. 지훈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억누르며, 벽에 기대어 몸을 더욱 움츠렸다.
    한 마리가 그의 은신처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 끈적한 체액 냄새가 코를 찔렀다. 지훈은 파이프를 꽉 움켜쥐었다. 망설이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날 터였다.

    쿵!
    갑자기 발소리가 멈추는가 싶더니, 캐비닛 위로 날카로운 발톱이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녀석이 그의 존재를 알아챈 것이 분명했다.

    “크르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지훈은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

    그는 격렬한 기합과 함께 캐비닛 뒤에서 뛰쳐나왔다. 손에 든 파이프를 휘둘러 가장 가까이 있던 그림자 사냥꾼의 머리를 강타했다. 쨍그랑! 녀석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하지만 곧바로 다른 두 마리가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지훈은 능숙하게 파이프를 휘둘러 공격을 막아냈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살갗이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럴 여유는 없었다. 그는 몸을 숙여 한 마리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후, 무자비하게 파이프를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이 경련했다.

    남은 한 마리는 더욱 광포하게 달려들었다. 지훈은 필사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손전등 불빛이 켜진 채 바닥에 떨어져 불안정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 불빛이 순간적으로 방 한쪽 구석을 비췄다.
    낡은 제어반 옆, 바닥에 뒹굴고 있는 작은 상자.
    그 안에 분명했다. 붉은색 비상용 스티커가 붙어 있는 에너지 셀 여러 개가!

    지훈은 순간적인 기회를 노렸다. 달려드는 그림자 사냥꾼의 공격을 가까스로 피하며, 전력 제어반을 발로 걷어찼다. 쾅! 낡은 제어반이 무너지며 스파크가 튀었다. 그 순간, 그림자 사냥꾼이 잠시 주춤했다. 지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자 쪽으로 몸을 던졌다.

    “잡았다!”

    그는 상자를 움켜쥐었다. 그림자 사냥꾼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달려들었다. 지훈은 상자를 배낭에 쑤셔 넣으며 황급히 문 쪽으로 달렸다. 뒤에서 끈질기게 추격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젠장, 젠장!”

    필사적으로 뛰었다. 낡은 건물 잔해가 무너질 듯 진동했다. 지훈은 건물 밖으로 뛰쳐나왔다. 뿌연 먼지 속에 몸을 던져 최대한 멀리 달렸다. 뒤에서 들리던 그림자 사냥꾼의 울음소리는 점점 희미해져 갔다.

    간신히 그의 임시 은신처, 버려진 지하철 역 플랫폼으로 돌아왔을 때, 지훈은 바닥에 그대로 쓰러졌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마스크를 벗어 던지자 차가운 지하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그의 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배낭을 열고 상자 안의 에너지 셀을 꺼냈다. 투명한 케이스 안에 담긴 푸른빛의 코어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겨우 살아남았다. 겨우… 이걸로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지훈은 흐느적거리는 몸을 이끌고 작은 간이 침대에 기어올랐다. 흐릿한 정신으로 에너지 셀을 충전기에 꽂았다. 윙-하는 낮은 소리와 함께 그의 작은 은신처에 약하지만 따스한 빛이 퍼졌다.

    그때였다.
    지하철 터널 저편, 어둠 속에서 무언가 기괴하게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잔해 붕괴 소리가 아니었다. 불규칙적이고, 둔탁하며,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였다.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몸을 일으켜 세워 터널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희미한 불빛조차 닿지 않는 저 너머에서,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이것은… 그림자 사냥꾼과는 다른 종류의 소리였다.

    그는 문득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구역 7은… 단순히 그림자 사냥꾼만의 영역이 아니었다.

    지훈의 얼굴에 공포가 스쳤다. 그는 겨우 찾은 에너지 셀을 든 채,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터널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 오컬트 호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흐음….”

    유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강태한 특유의 콧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낡았지만 장엄한 대저택의 거실. 한때는 부유함과 품격의 상징이었을 공간은, 지금은 불길한 침묵과 함께 냉기마저 감도는 듯했다. 창밖으로는 해 질 녘의 붉은 노을이 음산하게 스며들고 있었지만, 집 안의 공기는 이미 깊은 밤처럼 차가웠다.

    “선배, 뭐 감 잡았어요?” 유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품 안의 작은 수첩과 펜을 꽉 쥐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언제나 익숙지 않았다. 아니,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잡았지.” 태한은 대답하면서도 시선을 천장의 샹들리에에서 떼지 않았다. 수십 개의 크리스털 조각들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희미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이 집, 원래 이렇게 음기가 강했나?”

    유이는 미간을 찌푸렸다. “음기라니요. 그냥 오래된 집이라 싸늘한 거지, 설마 유령이라도 나온답니까?”

    태한은 드디어 고개를 돌려 유이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무심했지만, 그 속에는 유이가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이 담겨 있었다. “유령이라… 글쎄. 하지만 이 집의 터가 좋지 않은 건 분명해. 마치 모든 불행을 빨아들이려고 입을 벌린 거대한 아귀 같군.”

    그는 마치 이 건물이 살아있는 존재인 양 이야기했다. 유이는 그런 태한의 말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과학적인 사고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 그녀는 경찰에서 보내온 브리핑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피해자는 정기준 씨. 70대 초반의 은둔형 미술품 수집가. 지병 없이 건강했으며, 최근까지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던 예술가들을 후원해왔다고 했다. 발견 당시, 그는 자신의 개인 서재에서 사망한 상태였다. 문제는, 서재가 완벽한 밀실이었다는 점이었다.

    “일단 서재로 가시죠.” 유이가 안내했다.

    경찰 통제선 안으로 들어서자, 복도에 서 있던 담당 형사, 박 형사가 그들을 맞았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짙은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강 탐정님, 유이 씨.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박 형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사건, 정말 골치 아픕니다. 역대급 밀실이에요. 부디 강 탐정님의 기괴한… 아니, 특별한 통찰력으로 해결해주시길 바랍니다.”

    태한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이미 서재의 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육중한 오크나무 문에는 고급스러운 황동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서재 문은 안에서 걸쇠까지 잠겨 있었습니다. 창문도 마찬가지였고요. 모든 통로가 완벽하게 폐쇄되어 있었죠.” 박 형사가 설명했다. “침입 흔적은 전혀 없고, 외부에서 들어올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피해자는… 죽어 있었죠.”

    그들이 서재 안으로 들어서자, 싸늘한 공기가 유이의 뺨을 스쳤다. 공포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으스스한 한기였다. 서재는 생각보다 넓었고, 벽면 가득 오래된 책들과 기묘한 조각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원목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에 엎어져 있는 정기준 씨의 시신.

    “정기준 씨는 심장마비로 추정됩니다.” 박 형사가 말했다. “정확한 사인은 부검을 해봐야 알겠지만, 외상은 전혀 없었습니다. 주변에는 독극물 흔적도 없고요. 그냥… 잠자듯이, 아니, 앉아서 책을 읽다가 갑자기 픽 쓰러진 것 같아요.”

    하지만 유이의 눈에는 ‘그냥’이라는 말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정기준 씨의 오른손은 책상 위에 펼쳐진 두꺼운 고서적을 움켜쥐고 있었는데, 그 책은 낡고 바랜 양피지로 만들어진 듯했다. 그리고 더 기묘한 것은, 그의 왼손이었다. 왼손은 마치 무언가를 향해 뻗으려다 굳어버린 듯, 손바닥을 위로 한 채 허공에 멈춰 있었다. 손바닥 중앙에는 작은 조약돌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매끄럽고 검은, 흔치 않은 돌이었다.

    “강 탐정님?” 박 형사가 태한을 불렀다.

    태한은 이미 방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가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책상 위의 고서와 돌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손은 시신에 닿지 않았지만, 그의 시선은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그 모든 것을 탐색하는 듯했다.

    “이 책…” 태한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흔한 물건이 아니로군. 오래된 주술서인가.”

    유이는 놀랐다. “주술서요? 설마요, 선배. 그냥 오래된 책이겠죠.”

    “아니.” 태한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 책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아. 마치… 누군가의 절규가 활자 속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이군.”

    그는 조심스럽게 고서에 손을 댔다. 그의 손끝이 닿는 순간, 고서의 양피지 표면에서 희미한 검은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을 유이는 똑똑히 보았다. 마치 책이 숨을 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게… 뭐죠?” 유이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태한은 고서에서 손을 떼고는, 이번에는 정기준 씨의 왼손에 놓인 검은 조약돌을 응시했다. “이 돌… 보통 돌이 아니군. 마치 이 공간의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아. 저울의 추처럼 말이지.”

    그는 서재의 사방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완벽하게 닫힌 창문, 내부에서 걸쇠가 걸린 문, 그리고 빼곡한 책장들. 다른 형사들이 이미 모든 틈새를 조사했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밀실… 확실히 밀실이군.” 태한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 밀실은 물리적인 조건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야.”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박 형사가 다급하게 물었다.

    태한은 천천히 몸을 돌려 박 형사와 유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의 눈빛은 평소보다 훨씬 깊고, 묘한 확신에 차 있었다.

    “피해자는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 맞겠지. 하지만 그 심장마비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야.” 태한이 말했다. “이 밀실은 외부의 침입을 막는 동시에, 이 안에 있는 어떤 것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었어.”

    그는 한 손을 들어 올려 허공을 짚었다. 그의 손이 가리키는 곳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었다. 하지만 유이는 태한의 손끝에서 희미한 푸른색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는 것을 느꼈다. 소름이 돋았다.

    “이 밀실은… 이 방 안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완벽하게 가두기 위한 장치였다.” 태한의 목소리가 서재의 싸늘한 공기를 갈랐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피해자의 심장을 멎게 할 만큼 강력한 존재였다.”

    유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성을 놓지 않으려 애썼지만, 태한의 말은 언제나처럼 기괴하면서도 납득할 만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다.

    “선배, 그럼… 범인은 없다는 거예요? 유령이 죽였다는 말이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태한은 픽 웃었다. 그 웃음은 차가웠다. “물론 범인은 있지. 하지만 그 범인은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어. 적어도 육신은.”

    그는 시선을 다시 고서와 검은 조약돌로 옮겼다. “피해자는 이 책을 읽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이 돌은… 일종의 매개체였겠지.”

    “매개체라니요?” 박 형사가 물었다.

    태한은 한 발짝 더 책상에 다가섰다.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이 책은 망자를 소환하는 주술서였다. 정확히는, 망자의 *악의*를 소환하는 주술서였지.”

    유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악의를… 소환해요?”

    “그래. 피해자는 이 책을 통해, 아마도… 죽은 누군가의 원한을 불러들이려 했던 것 같아.” 태한은 검은 조약돌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렸다. 조약돌에서 순간적으로 차가운 기운이 확 퍼져 나왔다. “하지만 그 원한은 너무나 강했고, 피해자는 그것을 감당하지 못했지.”

    “그럼 밀실은요? 밀실 트릭은 대체 뭐죠?” 박 형사가 다급하게 물었다.

    태한은 서재의 중앙에 서서, 마치 모든 벽과 천장, 그리고 바닥을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밀실 트릭은… 이 공간 자체가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태한의 목소리가 낮게 속삭였다. “혹은, 이 공간을 장악한 *무언가*가 외부의 시선을 완벽하게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낸 보호막이었지.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에너지의 벽 말이야.”

    유이와 박 형사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태한의 설명은 비현실적이었지만, 이 비현실적인 밀실 살인 사건에는 오히려 가장 현실적인 설명으로 들렸다.

    “범인은 이 집 안에 있었다.” 태한이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피해자가 이 주술을 행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 기회를 이용해 망자의 악의가 피해자의 심장을 멎게 할 것이라 확신한 자. 그리고… 그 주술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 밀실에 마지막 매개체를 놓아둔 자.”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재의 문을 응시했다. 문밖, 복도 저편에 서 있는 세 명의 용의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피해자의 조카, 집사, 그리고 사업 파트너.

    “진범은 이 방에 들어오지 않고도, 피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어.” 태한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정확히는… 밀실을 유지하는 동시에, 피해자를 죽일 수 있는, 또 다른 ‘문’을 열어젖혔지.”

    그의 말이 끝나자, 서재 안을 감싸고 있던 기묘한 냉기가 더욱 짙어지는 듯했다. 유이는 품에 쥐고 있던 수첩을 더욱 꽉 움켜쥐었다. 밀실의 비밀은 풀렸지만, 그 이면에 도사린 진실은 오히려 더욱 오싹한 공포를 선사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보이지 않는 문을 열어젖힌 자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자는, 분명 이 어둠 속에서 자신을 숨기고 있을 터였다.

  • 좀비 아포칼립스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지훈은 마른 침을 삼키며 반쯤 무너진 상점가의 입구를 응시했다. 해 질 녘, 붉게 물든 하늘은 지옥의 문처럼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벌써 며칠째 식량은 바닥이었고, 기침을 달고 사는 민준의 해골 같은 얼굴은 지훈의 심장을 죄어왔다.

    “들어간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낡은 샷건은 언제나처럼 든든했지만, 그 무게만큼이나 어깨를 짓누르는 불안감은 숨길 수 없었다. 뒤따르던 김 반장은 뻑뻑한 무릎을 잡고 한숨을 쉬었다.

    “여기, 그래도 한때는 번화가였는데… 젠장, 다 옛말이지.”

    그의 말처럼, 대형 슈퍼마켓의 유리창은 산산조각 나 있었고, 녹슨 간판은 바람에 삐걱이며 귀를 찢는 소리를 냈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파편과 썩어가는 음식물, 그리고 이름 모를 잡동사니들이 뒤엉켜 악취를 풍겼다.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그들을 따라다녔다.

    지훈은 손전등을 켜 주위를 비췄다. 삐익, 하는 소리와 함께 희미한 빛이 먼지 쌓인 통로를 가로질렀다. 시체 썩는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역겨웠다.

    “민준, 너무 떨어지지 마.”

    서연이 민준에게 주의를 주자, 민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저 끄덕일 뿐이었다. 그의 얼굴은 열병 때문인지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계산대를 지나 통로로 진입했다. 냉장 코너는 이미 전기가 끊긴 지 오래라 문이 열려 있었고, 썩은 음식물들이 흘러나와 끈적한 바닥을 만들고 있었다. 온통 습기로 가득 찬 곳이었다.

    “일단 식료품 코너부터… 통조림이라도 건져야 해.”

    김 반장의 말에 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발걸음을 조심했다. 바닥에 밟히는 과자 봉지 부스러기조차 크게 느껴졌다. 캔이나 병이 진열된 선반은 대부분 텅 비어 있거나, 바닥에 떨어져 깨져 있었다.

    “이런… 여긴 이미 털린 것 같군.”

    서연이 혀를 찼다.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희망을 찾으러 온 곳에서 더 큰 절망만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아니, 아직 희망이 있어.”

    지훈은 구석진 곳, 다른 선반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는 창고 문을 발견했다. 먼지가 잔뜩 쌓인 철제 문은 녹이 슬어 있었지만, 잠겨 있지는 않은 듯했다.

    “저 안에는 뭐가 있을지도 몰라.”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시큼한 냄새와 함께 어두컴컴한 공간이 드러났다. 창고 안은 비교적 깨끗했다. 선반에는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아직 뜯지 않은 통조림 박스들이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심지어 한쪽 구석에는 의약품 상자들도 보였다.

    “대박… 지훈 씨, 대박이에요!”

    민준이 신음을 섞어 작게 외쳤다.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생기가 돌았다.

    “서두르지 마. 이런 곳일수록 조심해야 해.”

    김 반장이 경고했지만, 민준은 이미 통조림 상자 쪽으로 몸을 숙이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슈퍼마켓 입구 쪽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이어서 뭔가 끌리는 듯한 긁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지훈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젠장, 설마….”

    서연이 샷건을 고쳐 쥐었다. 그 소리는 분명히 하나가 아니었다.

    “창고 안으로 들어가. 문 잠가!”

    지훈은 급하게 외치며 민준을 밀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슈퍼마켓 내부에서 우르르쾅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들이 뛰어다니는 것 같았다.

    “크아아악!”

    소름 끼치는 괴성이 창고 문 틈새로 비집고 들어왔다. 일반적인 좀비의 신음과는 달랐다. 훨씬 더 빠르고, 맹렬하며, 지능적인 느낌이었다.

    지훈은 김 반장과 함께 창고 문을 걸어 잠갔다. 철제 문은 낡았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버텨줄 수 있을 터였다. 안에서 쿵, 쿵, 쿵, 하고 문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이런, 놈들이 늘었어… 이건 보통 좀비가 아니야.”

    김 반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창고 내부를 향했다. 폐쇄된 공간. 빠져나갈 곳은 없었다.

    “창고 뒤편에 비상문이라도 찾아봐!”

    서연이 외치며 창고 구석을 뒤졌다. 하지만 온통 선반과 벽뿐이었다.

    “젠장, 막다른 길이야…!”

    그때,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철제 문이 안으로 푹 꺼졌다. 나무 판자와 못으로 겨우 버티고 있던 잠금장치가 부서진 것이다.

    “물러서!”

    지훈이 외치며 서연을 뒤로 끌어당겼다. 부서진 틈새로 손전등 빛이 새어 들어갔다. 그 순간, 괴물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붉은 피를 뒤집어쓴 채, 비정상적으로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놈. 온몸의 근육은 터질 듯 부풀어 있었고, 눈은 핏발이 서서 이글거렸다. 놈은 일반적인 좀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였다. 마치 굶주린 맹수 같았다.

    “젠장… ‘추격자’잖아!”

    김 반장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이른바 ‘추격자’는 기존 좀비들보다 훨씬 빠르고, 후각과 청각이 예민하며, 심지어 뛰어오를 수도 있는 변종이었다. 그들은 건물 안에서 마주치면 거의 살아서 도망칠 수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추격자가 부서진 문을 완전히 박살 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놈은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더니, 가장 약해 보이는 민준을 향해 몸을 날렸다.

    “민준아, 피해!”

    지훈이 소리쳤지만 늦었다. 민준은 놀라서 주저앉았고, 추격자의 거대한 몸이 그에게 덮쳐들었다. 콰직, 하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민준의 어깨에서 피가 솟구쳤다.

    “크악!”

    민준의 비명에 지훈의 눈이 뒤집혔다.

    “이 개자식…!”

    서연이 망설임 없이 샷건을 발사했다. 굉음과 함께 납탄이 추격자의 옆구리를 강타했지만, 놈은 잠시 휘청거릴 뿐, 오히려 더 맹렬하게 민준을 물어뜯으려 했다.

    “안 돼!”

    지훈은 선반에 있던 쇠파이프를 집어 들고 추격자의 머리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머리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추격자는 꿈쩍도 하지 않고 민준의 목덜미를 노렸다.

    “망할, 놈의 가죽은 갑옷인가!”

    김 반장이 권총을 뽑아들었지만, 좁은 창고 안에서 발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자칫하면 민준에게 오발탄이 날아갈 수도 있었다.

    민준은 공포에 질려 발버둥 쳤지만, 추격자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서연아, 내가 유인할게! 민준이 데리고 뒤로 빠져!”

    지훈이 쇠파이프를 다시 휘두르며 소리쳤다. 추격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놈은 민준을 잠시 놓아주고 지훈에게 달려들었다.

    “지훈 씨!”

    서연의 외침과 함께 샷건이 다시 불을 뿜었다. 이번에는 추격자의 등짝이었다. 놈은 짧은 고통의 신음과 함께 비틀거렸다. 그 틈을 타 서연은 민준의 팔을 붙잡고 창고 안쪽으로 끌고 갔다. 민준의 어깨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지훈은 쇠파이프를 방패 삼아 추격자의 공격을 막아냈다. 놈의 손톱이 쇠파이프를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막다른 곳에 몰린 짐승처럼, 지훈의 눈에도 광기가 서렸다.

    “여기서 끝낼 순 없어… 절대!”

    그는 이를 악물고, 선반 위에 놓여있던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붉은 소화기는 마치 한 줄기 희망처럼 보였다. 놈이 달려드는 순간, 지훈은 소화기의 안전핀을 뽑고 놈의 얼굴에 하얀 분말을 분사했다.

    치이익-!

    매캐한 분말이 뿜어져 나오자, 추격자는 잠시 눈을 가리며 멈칫했다. 놈은 맹렬히 울부짖으며 앞발로 얼굴을 긁어댔다.

    “지금이야!”

    지훈은 소리쳤고, 김 반장은 재빨리 민준의 상처를 확인했다. 깊게 베인 상처였지만, 다행히 목은 아니었다.

    “뒤쪽 문 찾았어, 지훈 씨!”

    서연이 창고 가장 안쪽 벽을 가리켰다. 벽 한쪽에 숨겨져 있던 작은 철문이 보였다. 마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비상 탈출구였다.

    하지만 그 사이, 소화기 연기 속에서 추격자의 형체가 다시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놈은 여전히 지훈을 향해 달려들 태세였다.

    “먼저 나가! 내가 시간을 벌게!”

    지훈은 소리치며 다시 쇠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추격자는 시야를 방해받았는지 머리를 흔들었지만, 지훈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서연이 망설이자, 김 반장이 그녀의 어깨를 밀었다.

    “빨리! 민준이 살려야 해!”

    김 반장은 민준의 팔을 붙잡고 비상문으로 향했다. 서연은 지훈에게 마지막 눈빛을 던진 후, 민준과 김 반장을 따라 나섰다.

    지훈은 혼자 남겨졌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놈은 분말 연기 속에서 다시 지훈을 향해 돌진했다. 지훈은 이를 악물고 쇠파이프를 휘둘렀다.

    쾅! 쾅! 쾅!

    비상문이 닫히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지훈은 혼자 남겨진 창고에서, 괴물과 마지막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이 생존의 지옥에서, 다음 날의 해를 볼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의 눈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 대체 역사물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낡은 서고, 비색의 균열

    한양의 북촌 어귀, 낡은 기와들이 내려앉을 듯 위태롭게 이어진 작은 행랑채. 그 안쪽 깊숙한 곳에 고요히 자리한 이는 이형우였다.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햇볕 한번 제대로 쬐지 못한 서생特有의 창백함과, 오랜 고민의 흔적처럼 깊게 패인 미간 주름이 선명했다.

    세간은 그를 ‘고루한 학문에 매달리는 괴짜’라 불렀다. 과거 시험은 늘 낙방이었고, 벼슬길은 요원했다. 허나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권세도, 명예도 그의 관심 밖이었다. 오직 망각 속으로 사라진 지식, 사장된 진리만이 그의 심장을 뛰게 했다. 지금도 그는 먼지로 뒤덮인 서고 구석, 곰팡이 냄새 가득한 공간에서 고서(古書) 하나를 펼쳐든 채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사군도(四君圖)의 기법이 이토록 단순하다니. 이건 아무리 봐도 후대에 덧그린 흔적이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마저 책 속 활자처럼 건조했다. 그는 지난 삼 년간, 선조들의 기록을 다시 쓰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허나 그 기록이란 것이, 세월의 풍파 속에서 얼마나 많은 왜곡과 누락을 겪었는지. 그의 작업은 마치 안개 속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고된 여정과 같았다.

    묵직한 책장을 넘기다, 손끝에 차가운 감촉이 닿았다. 익숙한 종이의 질감이 아니었다. 이형우는 고개를 들어 손이 닿은 곳을 응시했다. 책장 깊숙이 박힌 닳아빠진 나무판, 그 틈새로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간격이 비어 있었다. 그저 오래되어 뒤틀린 나무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묘한 끌림에 홀린 듯 손가락을 그 틈새에 넣어보았다. 안쪽은 생각보다 깊었다. 손끝이 닿는 곳마다 미세한 마찰음이 일었다.

    *슥, 스윽.*

    그가 힘을 주어 밀자, 낡은 나무판이 마치 빗장이라도 풀린 듯 안쪽으로 스르륵 밀려 들어갔다. 그 순간, 쾨쾨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갑고 습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숨겨진 공간이었다. 어둠 속, 시야에 들어온 것은 돌로 된 작은 선반이었다. 그 위에 놓인 것은 무엇일까.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고동쳤다. 이런 곳에, 무엇이 숨겨져 있을 리 있나. 단순한 장난이거나, 아니면 한낱 먼지 쌓인 잡동사니일 뿐이리라.

    하지만 그의 본능은 다르게 속삭였다. 이형우는 침을 꿀꺽 삼키며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생각보다 매끄러운 질감이었다. 조심스럽게 꺼내어 보니,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 석판이었다. 여느 돌과는 달리 오묘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완전히 검다기보다는, 깊은 밤하늘처럼 은은한 푸른빛과 검은빛이 뒤섞인 듯한, 신비로운 색이었다.

    “이게… 대체……”

    석판의 표면에는 난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일정한 규칙을 가진 듯했지만, 어떤 문자 체계와도 닮지 않았다. 뱀처럼 구불거리는 선들, 날개 달린 새처럼 보이는 형상,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무늬들이 뒤엉켜 있었다. 그는 평생을 고문헌과 씨름해온 학자였다. 수많은 고대의 문자들을 익히고 해석했으나, 이런 형태의 문양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다른 세상의 것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형우는 조심스럽게 석판을 손에 쥐었다. 그 순간,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미지근한 온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자신의 체온 탓이라 생각했으나, 온기는 점점 강해져 마치 작은 불씨라도 쥔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놀란 그가 석판을 놓치려 했으나, 왠지 모르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형우의 눈앞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석판에 새겨진 문양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검은 석판 위에서 푸른빛과 검은빛이 일렁이더니, 이내 문양의 선들을 따라 붉은색 섬광이 흐르기 시작했다. 핏빛처럼 진득하고, 비단처럼 매끄러운 비색(緋色)의 빛이었다.

    *쉬이이익……*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던 서고 안에, 무언가 공기를 가르는 듯한 기묘한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석판의 비색 균열은 점차 커져, 그의 시야를 완전히 뒤덮을 듯 강렬하게 번쩍였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웅웅거렸다.

    *“……잊힌… 기억…… 깨어나라…… 힘이여……”*

    환청인가? 아니면 환상인가? 이형우는 자신의 두 눈을 비볐다. 그러나 비색의 빛은 더욱 선명해질 뿐 사라지지 않았다. 석판은 그의 손 안에서 맥동하듯 진동했다. 뜨거운 에너지가 손바닥을 타고 팔을 지나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그 빛이 절정에 달했을 때, 석판의 중심에서 작은 균열 하나가 생겨났다. 금이 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마치 거대한 유리가 깨지는 듯한 시각적 충격이 그의 눈을 강타했다. 균열 사이로 비어져 나온 것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강렬한 빛의 파동이었다.

    빛은 서고의 낡은 벽과 천장을 뚫고 나갈 듯,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좁디좁은 서고 안은 일순간 태초의 어둠이 물러난 듯 밝아졌다. 이형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석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허공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은 석판에 새겨져 있던 난해한 문양들이었다. 거대한 벽화를 보는 듯, 신비로운 상징들이 서고의 벽을 가득 채웠다. 그 그림자 속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형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은 전사들이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 거대한 용이 하늘을 가르는 환영, 알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외는 주술사의 모습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마치 수천 년 전의 역사가 그의 눈앞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이형우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심장이 터져 나갈 듯 격렬하게 뛰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인가? 아니, 그의 손에 쥐어진 석판의 뜨거운 온기가, 그의 눈을 아프게 하는 빛의 강렬함이, 이 모든 것이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평생을 고서에 파묻혀 살았다. 세상의 모든 이치가 글 속에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그 어떤 기록에도 존재하지 않는, 살아있는 역사이자, 감춰진 진실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이것은……. 고대의 힘이었다.
    그리고 그 힘이, 지금 그의 손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서고는 빛과 그림자로 가득 찼고, 이형우는 그 한가운데에 선 채, 거대한 미지의 문이 열리는 것을 직감했다. 그의 평범했던 삶은, 이 작은 석판 하나로 인해, 송두리째 뒤바뀔 것이었다.

  • SF (공상과학)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심연의 유산: 고대 문명의 서곡

    **1화: 먼지 속의 속삭임**

    지하 3천 미터. 지구의 핵을 향해 뻗어 나가는 거대한 굴착기가 굉음을 토해냈다. 그 소리는 흡사 태고의 심장이 고동치는 듯했다. 이곳은 인류가 잊었던 과거를 파헤치는, 이른바 ‘심층 고대 유적 발굴 연구소’의 최전선이었다. 나는 김민준, 이 거대하고 위험천만한 프로젝트의 3팀 현장 지휘관이자 고대 에너지원 분석가다. 2342년의 서울은 지상에도, 지하에도 숨 쉴 틈 없는 콘크리트 미로였지만, 이곳 발굴지는 시간을 초월한 고요와 압력 속에 잠겨 있었다.

    “민준 팀장님, E-13 구역에서 미세한 에너지 시그널 변화 감지됐습니다. 전파 패턴이… 좀 특이합니다.”

    귀에 꽂힌 통신 장치 너머로 막내 연구원 유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는 늘 상기된 표정으로 모니터에 코를 박고 사는 천재적인 데이터 분석가였다. 특이하다는 말은 평범한 탐사팀에서라면 그저 ‘오류’로 치부될 만한 뉘앙스를 담고 있었지만, 이곳 심층 연구소에선 달랐다. 특이하다는 건 곧 ‘미지의 것’을 의미했고, 미지의 것은 언제나 ‘기회’와 ‘위험’을 동시에 품고 있었다.

    “특이하다니? 자세히 보고해 봐, 유리. 무슨 패턴인데?”

    나는 들고 있던 고대 문명 데이터 기록판을 잠시 옆구리에 끼고 주변 환경 스캐너를 조작했다. 육중한 굴착 로봇 ‘맘모스 07’이 뿜어내는 열기와 진동이 피부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기존에 발견된 어떤 고대 에너지 패턴과도 다릅니다. 이온화된 입자의 움직임 같기도 한데, 동시에 파동의 간섭 효과를 보입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주파수가 관측되는 느낌이랄까요?” 유리의 목소리에 미묘한 흥분이 섞였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신호예요. 공간의 왜곡을 동반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공간 왜곡?”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장난치지 마. 그건 미확인 비행물체(UFO)나 시간 여행 이론에나 나오는 이야기잖아.”

    “농담이 아니에요, 팀장님! 저도 처음엔 센서 오류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계속 반복돼요. 그것도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요.”

    규칙적이라는 말에 나는 무심코 내 왼쪽 가슴을 눌러봤다. 심장 박동. 이 기계와 흙먼지뿐인 지하에서, 생명의 리듬 같은 신호가 감지되었다는 건 분명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지난 5년간 이 지점에서 수많은 고대 유물을 발견해왔지만, 이런 종류의 ‘살아있는’ 신호는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좌표 전송해. 맘모스 07, 그쪽으로 이동시켜.”

    나는 통신을 끊고 맘모스 07의 제어 패널에 손을 댔다. 거대한 로봇은 마치 나의 의지를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방향을 틀었다. 굴착 로봇의 헤드라이트가 어둠 속을 헤집고 나아가자, 수천 년 묵은 흙먼지가 마치 살아있는 안개처럼 흩날렸다.

    수십 분의 이동 끝에, 맘모스 07은 E-13 구역의 가장 깊은 곳, 센서가 이상 신호를 보낸 지점에 멈춰 섰다. 주변의 흙과 암석은 다른 곳과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내 육감은 이곳이 뭔가 다르다는 것을 외치고 있었다. 공기가 더 무겁고, 알 수 없는 정전기 같은 것이 피부에 와닿는 느낌.

    “유리, 신호 강도는?”

    “최대치입니다! 팀장님, 신호가… 더 거세졌어요. 마치 우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린 것처럼!”

    유리의 외침과 동시에 맘모스 07의 전면 스캐너가 붉은색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즉시 굴착을 중단하고 로봇 팔에 달린 정밀 스캐너를 작동시켰다. 흙과 암석으로 가득 찬 벽면을 뚫고 들어가자, 스캐너 화면에 알 수 없는 형태의 공간이 나타났다. 직사각형도, 원형도 아닌, 마치 손으로 빚어낸 듯 불규칙하면서도 완벽하게 봉인된 공간이었다.

    “벽면 두께는?”

    “약 3미터… 그런데 재질이 이상합니다. 일반 암석이 아니에요. 밀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습니다. 그리고… 팀장님, 화면 보이세요?”

    유리의 말대로 스캐너 화면에는 붉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불규칙한 에너지 파동이 명멸하고 있었다. 벽면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신호였다.

    “맘모스 07, 정밀 파쇄 모드. 벽면에 최소한의 충격으로 구멍을 낸다. 팀원들, 안전거리 확보!”

    나는 망설임 없이 명령했다. 이 지층은 고대 인류가 지구의 핵으로 향하던 중 버려진 지하 도시의 잔해 위쪽에 위치해 있었다. 어쩌면 그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의도적으로 숨겨놓은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살아있는’ 신호를 발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육중한 로봇 팔이 정교하게 회전하며 벽면을 긁어냈다. 일반적인 굴착 방식과는 달리, 압축 공기와 초음파 진동을 이용해 암석을 미세하게 분쇄하는 방식이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고, 이내 벽면에 조그만 구멍이 뚫렸다.

    그 순간, 모든 것이 정지했다.
    맘모스 07의 굴착음도, 유리의 다급한 통신도, 내 심장 박동마저도.

    구멍 너머에서 흘러나온 것은 빛이었다.
    단순한 발광체의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듯, 호흡하는 듯한 영롱한 푸른빛이었다. 빛은 점멸하며 구멍을 통해 조금씩 새어 나왔고, 그 빛이 닿는 곳마다 주변의 흙먼지가 부유하며 미세한 입자들로 흩어졌다.

    “팀장님! 에너지 레벨이… 미쳤어요! 센서가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이 빛은… 이온화된 플라즈마도 아니고, 어떤 알려진 파장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유리의 목소리는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맘모스 07의 조종석에서 뛰쳐나왔다.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SF 영화의 한 장면보다도 비현실적이었다. 굴착으로 뚫린 조그만 구멍 너머로 보이는 공간은 거대한 동굴 형태였다. 그리고 그 동굴의 중심에는…

    거대한 수정이 있었다.

    푸른빛을 내뿜는, 마치 다이아몬드 같으면서도 내부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듯한, 신비로운 형태의 수정. 그 빛은 동굴 전체를 감싸 안으며,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주파수로 심장을 울리는 듯했다.

    나는 홀린 듯 수정에 가까이 다가갔다. 동굴 내부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마치 따뜻한 온기처럼 나를 감쌌다. 수정은 육각형 기둥 형태였고,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기하학적이지만 동시에 생명체처럼 유려한 곡선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유리는 통신으로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내 손끝이 수정의 표면에 닿는 순간, 거대한 에너지가 내 몸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콰아앙!

    어둠이 걷히고, 내 정신 속으로 알 수 없는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하늘을 가르는 빛의 도시들, 거대한 비행선들, 그리고…
    손짓 한 번으로 바다를 가르고, 별을 움직이는 듯한 인간의 형상들.
    그들의 눈동자에는 수정과 똑같은 푸른빛이 일렁였다.

    “이건… 마법이야?”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헛웃음 같기도, 경악 같기도 했다.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현상.
    내 손은 여전히 수정에 닿아 있었고, 푸른빛 에너지는 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듯했다.
    나의 뇌 속에서는 수만 년 전의 기억들이 동시에 재생되는 것 같았다.
    잊혀진 고대 문명의 속삭임이, 심연의 바닥에서 깨어나 나를 부르고 있었다.

    갑자기, 수정의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동굴 전체가 푸른빛으로 뒤덮이고, 빛은 마치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나를 향해 뻗어 나왔다.
    그리고, 내 눈앞의 현실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팀장님!! 위험합니다! 당장 떨어지세요! 주변 공간이… 왜곡되고 있어요!”

    유리의 비명과 함께, 동굴의 천장에서 미세한 균열이 발생했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발견한 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이것은 잠들어 있던 힘, 수만 년 동안 숨겨져 있던 ‘진정한 마법’이었다.
    그리고 그 마법은, 나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푸른 섬광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내 의식은 마치 폭풍 속의 나뭇잎처럼 휘청거렸다.
    이 고대의 마법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
    나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온몸의 세포가 새로운 힘에 반응하며 전율하고 있다는 것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다.

  • 무협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제1장: 핏빛 맹세**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검게 얼어붙은 나뭇가지들이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바람에 흔들렸고, 그 아래 쓰러진 시신에서는 끈적한 피비린내가 피어올랐다. 윤무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흑풍도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연민도, 승리의 쾌감도 없었다. 오직 심연과도 같은 공허함만이 가득할 뿐.

    “백천.”

    낮게 읊조린 이름이 겨울밤의 정적을 갈랐다. 입술 새로 새어 나온 그 이름은 칼날처럼 날카롭고, 지옥불처럼 뜨거웠다. 흑풍도는 백천이 강호에 뿌려 놓은 수많은 촉수 중 하나에 불과했다. 이 비루한 도적 두목을 처단하는 것은, 그저 거대한 복수극의 지극히 작은 서막일 뿐이었다.

    윤무는 허리춤에 찬 검의 손잡이를 매만졌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 그의 손아귀에 익숙하게 파고들었다. 이 검은 더 이상 청풍문의 고결한 기운을 품고 있지 않았다. 백천에게 모든 것을 잃은 그날, 윤무는 이미 과거의 자신과 이별했다.

    * * *

    회색빛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천둥과 번개가 몰아치고, 폭우가 대지를 때리는 날이었다. 청풍문은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붉은 피가 빗물에 섞여 대지를 적시고, 선량했던 문도들의 비명이 귓가를 찢었다.

    “백천! 대체 이게 무슨 짓이냐!”

    윤무는 절규했다. 온몸이 피투성이였고, 다리는 이미 칼에 깊이 베여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평생을 형제처럼 믿고 따랐던 백천이 서 있었다. 늘 온화하고 정의로웠던 그의 얼굴은 기이하게 뒤틀린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백천의 손에는 청풍문의 보검, ‘청풍검’이 들려 있었다. 윤무의 아버지, 청풍문주만이 다룰 수 있는 검이었다.

    “무슨 짓이냐고? 어리석은 윤무! 나는 이제껏 이 순간을 기다려 왔다!” 백천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청풍신공은 네 아비 같은 고리타분한 자들이 다룰 만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강자는 나! 백천만이 될 수 있다!”

    윤무는 믿을 수 없었다. 몇 달 전까지도, 백천은 자신과 함께 청풍문의 번영을 꿈꿨고, 강호의 불의에 맞서 싸우자고 맹세했던 벗이었다. 그를 향한 믿음은 굳건한 바위와 같았다. 하지만 그 바위는 지금, 백천의 칼날 아래 산산조각 나 부서지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어째서라니? 네 아비는 청풍신공의 진의를 감추고, 나 같은 인재에게조차 비기(秘技)의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결국 네 아비는 그저 과거에 갇힌 노인일 뿐! 이 강호의 주인은 나, 백천이다!”

    그때, 저 멀리서 청풍문주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윤무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피를 토하며 쓰러진 아버지의 가슴에 박힌 것은, 다름 아닌 백천의 손에 있던 청풍검이었다.

    “아버지!”

    윤무는 비틀거리며 달려가려 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백천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청풍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검기가 윤무의 다리를 다시 한 번 후려쳤다. 극심한 고통과 함께 윤무는 쓰러졌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과, 싸늘하게 식어가는 어머니의 시신이었다. 그 뒤편에는 이미 불길이 치솟아 청풍문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백천은 잔인하게 웃으며 청풍검을 거두었다.

    “이곳에서 죽어라, 윤무. 네 아비의 어리석은 정의와 함께.”

    그리고 백천은 차가운 빗속으로 사라졌다. 윤무의 의식은 점차 멀어지고, 몸은 감각을 잃어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불타는 절망과 함께 타오르는 끔찍한 증오였다. 그날, 윤무는 죽었다. 하지만 동시에, 복수를 위해 다시 태어났다.

    * * *

    윤무는 정신을 차렸다. 흑풍도의 시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싸늘한 밤공기가 그의 몸을 감쌌다. 잃어버린 과거의 상처가 생생하게 되살아나 심장을 짓눌렀다. 하지만 윤무는 더 이상 절규하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는 오직 얼음장 같은 냉정과 불꽃 같은 증오만이 공존할 뿐이었다.

    “청풍신공은 사라졌다. 백천, 네가 그리도 갈망하던 그 힘은 이제 너만의 것이 되었으니… 부디 만끽하거라.”

    윤무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나는 새로운 길을 찾았다. 네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둠의 길을.”

    그의 눈빛이 깊은 밤하늘보다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윤무는 허리춤의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빛을 머금은 검날은 달빛 아래 차갑게 빛났다. 그 검의 이름은 ‘혈마비검(血魔秘劍)’. 청풍문의 검이 아니라, 나락의 끝에서 건져 올린 복수의 검이었다.

    윤무는 쓰러진 흑풍도의 시신을 발로 툭 차 뒤집었다. 그의 품에서 찢어진 서신 한 장이 떨어졌다. 백천의 인장이 찍힌 것이 분명했다.

    *흑풍도, 서북 방면의 물류를 완전히 장악하라. 그 어떤 방해도 용납하지 마라.*

    서신을 읽던 윤무의 눈이 가늘어졌다. 백천은 여전히 강호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었다. 그가 청풍문을 멸문시키고 얻어낸 청풍신공으로, 백천은 이제 무림의 정점에 서 있었다. 하지만 윤무는 알고 있었다. 그 정점은 모래성처럼 허약하다는 것을.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내가 하나하나 무너뜨려 주마.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처절하게 추락하는 것이 너의 운명이 될 것이다, 백천.”

    윤무는 서신을 갈기갈기 찢어 겨울바람에 날려 보냈다. 찢어진 종잇조각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모습은 마치 백천의 명예가 조각나는 미래를 예견하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그림자는 밤의 어둠과 완벽하게 섞여들었다. 흑풍도의 시신과 피비린내는 그 뒤에 남겨진 채, 조용히 잊혀져 갔다. 복수의 칼날은 이제 막 첫 번째 희생자를 거둔 참이었다. 윤무의 마음속에는 오직 백천의 심장을 꿰뚫을 그날만을 기다리는 핏빛 맹세만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밤은 깊어지고, 복수의 서곡은 막 시작되었다. 강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과거의 망령이 얼마나 잔혹한 칼날이 되어 돌아왔는지. 윤무는 다시 한번, 거대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백천, 그 이름을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그 어떤 방해도 용서치 않으리라.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심연의 노래

    지하 깊은 곳,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엉겨 붙은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손전등을 들어 올렸다. 좁고 기울어진 통로를 겨우 빠져나온 그들의 눈앞에는, 방금 지나온 길과는 차원이 다른 거대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젠장… 여기가 진짜였어.” 지혜가 현우 옆에서 흐릿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고대 탐사용 랜턴은 이제 겨우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공간은 마치 깎아내린 듯 정교했지만, 그 규모는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거대한 원형 홀의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사방의 벽은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기이한 문양들로 뒤덮여 있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에서, 그 문양들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하며 기괴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어때? 뭔가 느껴져?” 지혜가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현우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파동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이곳은 그가 여태껏 발을 디뎠던 그 어떤 유적보다도 강력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마치 억겁의 세월 동안 잠들어 있던 고대의 심장이 지금 막 다시 뛰기 시작한 것처럼.

    “…아주 오래된, 그리고 거대한 에너지야.” 현우는 낮게 읊조렸다. “땅의 뿌리에서부터 솟아나는 힘. 우리가 찾던 게 맞아.”

    홀의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색 오벨리스크가 솟아 있었다. 표면은 닳아 없어지다시피 한 기호들로 뒤덮여 있었고,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원형의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다. 제단은 수많은 균열로 갈라져 있었지만, 그 틈새에서는 묘하게 푸른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저게 핵심인 모양이네.” 지혜는 조심스럽게 제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눈은 고대 문자 해독에 대한 오랜 경험으로 날카롭게 번득이고 있었다. “이 기호들… 분명 우리가 외부에서 발견했던 것들과 같은 양식이지만, 훨씬 더 복잡해.”

    현우는 오벨리스크에 가까이 다가섰다. 손을 뻗어 차가운 표면에 대자, 손끝에서부터 전율이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졌다. 단순한 차가움이 아니었다. 무언가 엄청난 힘이 억눌려 있는 듯한 감각. 마치 잠자는 거인을 건드린 듯한 불안감이었다.

    그때, 오벨리스크 표면의 기호들이 갑자기 더 강렬한 푸른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시작된 빛은 순식간에 제단을 감싸고, 이내 홀 전체를 푸른색으로 물들였다.

    “무슨 일이야?!” 지혜가 놀라 외쳤다.

    현우는 오벨리스크에서 손을 떼려 했지만, 그의 손은 마치 자석에 이끌린 듯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오벨리스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그의 몸속으로 직접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도시, 별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묶는 알 수 없는 실타래. 혼돈과 질서가 뒤섞인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콰아아앙!

    홀 전체가 굉음과 함께 격렬하게 흔들렸다. 천장에서 먼지와 작은 돌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바닥의 균열은 더욱 벌어지고, 그 틈새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현우! 위험해! 떨어져!” 지혜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지만, 현우의 의식은 이미 오벨리스크의 힘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홀의 벽면에 새겨져 있던 문양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더니, 벽에서 떨어져 나와 허공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대의 언어, 잊혀진 문자들이 공중에서 춤을 추듯 유영했다. 그것들은 마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듯, 현우의 의식 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 *그들은 기억했다. 세상의 시작을.*
    — *세상의 끝을 알았고, 그 너머를 보았다.*
    — *결속의 끈, 존재의 근원.*
    — *영원한 망각 속에서… 다시 피어날지니.*

    현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것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인류의 역사를 훨씬 뛰어넘는, 세계의 진정한 비밀을 간직한 장소였다. 오벨리스크는 그 비밀의 문을 여는 열쇠였고, 그는 지금 그 문이 열리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푸른빛이 최고조에 달하자, 홀 중앙의 오벨리스크가 마치 거대한 심장처럼 강력하게 한 번 뛰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오벨리스크 표면에 박혀 있던 기호들 사이로 검은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단순한 균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시공간을 찢는 듯한, 아득한 어둠을 품은 구멍이었다.

    그 구멍에서 섬뜩한 냉기가 뿜어져 나오자, 홀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졌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무언가 기어 나오는 듯한, 사악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억압되어 있던 존재들이 깨어나는 듯한 울부짖음이었다.

    현우는 손이 오벨리스크에 묶인 채, 점점 더 벌어지는 검은 균열 속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심연만이 존재했다. 하지만 그의 감각은 그 너머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명확히 인지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 잊혀지고 봉인되어야 할 것.

    콰아아앙! 다시 한번 홀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고, 이번에는 오벨리스크에서 그의 손이 강제로 떨어져 나갔다. 현우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검은 균열에 고정되어 있었다.

    검은 구멍은 점점 커지고 있었고,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와 비명 소리는 더욱 격렬해졌다. 지혜는 권총을 뽑아 들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젠장… 저게 뭐야? 대체… 저 안에 뭐가 있는 거야?!”

    그리고 현우는 보았다. 검은 균열의 가장자리에서, 어둠과 혼돈 그 자체로 이루어진 듯한,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을. 그 그림자의 일부가 균열 밖으로 나오려는 듯 꿈틀거렸다. 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이 고대 유적은 단순한 비밀을 간직한 곳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차원으로 향하는 문이었고, 그 문이 지금, 활짝 열리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 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천재적인 한국인 작가의 손에서, 긴장감 넘치는 에픽 하이 판타지 웹소설이 펼쳐집니다.

    **아리아드 제국의 그림자: 제37화. 그림자 속의 결단**

    습하고 축축한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희미한 등불만이 거친 벽에 그림자를 어른거렸다. 낡은 수로 밑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공간. 이곳에 모인 이들의 표정은 굳건했지만, 그 안에 드리워진 불안은 숨길 수 없었다. 아리아드 제국의 철권 통치 아래 신음하는 평민들의 유일한 희망, ‘새벽의 불씨’라 불리는 반란군 지도부의 비상 회의였다.

    한가운데, 돌탁자를 짚고 선 카이론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스무 살 초반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빛에는 수천 년 제국의 압제에 맞서는 백성들의 절규와 희망이 모두 담겨 있었다. 닳아빠진 가죽 갑옷 위로 그의 어깨에 얹힌 짐의 무게가 느껴지는 듯했다.

    “세라, 다시 한번 보고해.” 카이론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의지가 실려 있었다.

    방 한쪽 구석, 벽에 기댄 채 숨을 고르던 어린 정찰대원 세라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급박했던 상황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폐하의 적월 기사단이 외곽 지구 순찰을 강화했습니다. 특히 식량 보급로를 중심으로 삼엄해졌습니다. 평소의 세 배에 달하는 병력이 투입되었고… 저희 동료, 릴리아가 위험에 처했습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 안의 공기는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릴리아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외곽 지구 주민들에게 몰래 식량을 분배하고, 제국의 만행을 기록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녀가 붙잡힌다면, 수많은 평민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뿐만 아니라, ‘새벽의 불씨’의 존재마저 위태로워질 터였다.

    “놈들이 드디어 움직이는군.” 엘리아스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반백의 노인인 엘리아스는 ‘새벽의 불씨’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전략가였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깊은 사색의 흔적이 엿보였다. “이것은 명백한 함정일세. 릴리아를 미끼 삼아 우리를 끌어내려는 속셈이지. 식량 보급로를 봉쇄하여 민심을 자극하고, 우리가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고도의 술책이야.”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젊은 전사 리안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의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릴리아는 우리 동료입니다! 수천의 평민들이 굶주림에 죽어가고 있는데, 제국의 놈들은 식량 창고를 쌓아놓고 우리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정면으로 맞설 때입니다!”

    “무모한 짓이다, 리안.” 엘리아스가 고개를 저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정면 대결이 불가능해. 놈들은 막강한 병력과 훈련된 기사단을 가지고 있어. 우리가 조금이라도 섣불리 움직인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걸세. 이 상황에서는 은신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현명해.”

    팽팽한 긴장감 속에 카이론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놓인 낡은 지도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도의 한 지점, 외곽 지구의 식량 보급로가 붉은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불과 몇 리 떨어진 곳에 릴리아의 비밀 은신처가 표시되어 있었다.

    “때를 기다리라고요? 엘리아스님.” 카이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제국의 개들은 우리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고 있어요. 그들의 식량 창고에는 썩어가는 곡물이 넘쳐나지만, 우리의 형제자매들은 길거리에서 굶어 죽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숨어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의 말에 리안의 눈빛이 더욱 빛났다. 엘리아스는 침묵했지만, 그의 눈에도 깊은 고뇌가 스쳐 지나갔다.

    카이론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릴리아는 반드시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로챈 식량은 반드시 되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말이오? 카이론.” 엘리아스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곳은 지금 적월 기사단의 삼엄한 경계 아래에 놓여있어. 우리가 아무리 정예라 한들… 무모한 희생만을 낳을 뿐이야.”

    “무모하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카이론은 지도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적월 기사단은 지금 식량 보급로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시선이 그곳에 고정되어 있는 틈을 타서, 릴리아가 있는 곳으로 접근하는 겁니다.”

    “그럼 식량은 어떻게? 릴리아를 구하는 것과 식량을 탈취하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는 없습니다. 병력이 너무 분산됩니다.” 엘리아스가 반박했다.

    카이론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어딘가 위험하면서도, 묘한 확신에 차 있었다. “두 가지를 동시에 할 겁니다. 적월 기사단은 우리가 식량 탈취만을 노릴 것이라 생각할 겁니다. 그들의 허를 찌르는 거죠. 보급로에서 소란을 일으켜 그들의 주의를 끌고, 그 틈을 타서 릴리아를 구출하는 팀이 움직이는 겁니다.”

    리안의 얼굴에 놀라움과 함께 기대감이 피어올랐다. “그럼 누가 보급로를 흔들죠? 적은 너무 많습니다.”

    카이론의 시선이 리안에게 향했다. “내가 갈 겁니다. 리안, 자네는 릴리아 구출 팀을 이끌어. 세라, 자네는 내가 보급로를 교란하는 동안, 릴리아의 위치와 적의 동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해 전달해 줘야 해.”

    엘리아스는 경악했다. “카이론! 그건 자살 행위야! 네가 직접 나서면… 우리 ‘새벽의 불씨’의 기둥이 무너지는 것과 마찬가지일세!”

    “기둥이 흔들리지 않으면, 아무것도 부술 수 없습니다, 엘리아스님.” 카이론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듯 단호했다. “우리는 더 이상 약탈당하고 굶주리는 삶을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제국의 심장에 상처를 내는 날이 될 겁니다. 이 싸움은, 이제 시작입니다.”

    방 안의 공기는 다시 한번 얼어붙었다. 이번에는 불안이 아닌, 결연한 의지로 가득 찬 침묵이었다. 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세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미 다음 임무를 준비하는 듯했다. 엘리아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더 이상 카이론을 만류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결정을 존중했고, 그 믿음이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할지 알고 있었다.

    “오늘 밤, 달이 가장 높이 떴을 때 움직인다.” 카이론은 돌탁자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그림자가 등불 빛에 길게 드리워졌다. “모두 준비하라. 오늘은 아리아드 제국의 밤이 가장 길어질 것이다.”

    그의 마지막 말과 함께, 어둠 속에 숨겨진 ‘새벽의 불씨’들은 각자의 무기를 점검하고, 감춰두었던 비장한 결의를 다시 한번 다졌다. 이 밤, 제국의 심장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수많은 평민들의 염원을 짊어진 채,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거대한 제국에 맞서는 작은 불씨들의 위험천만한 여정이, 이제 막 시작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