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스페이스 오페라 독립적인 단편 소설

    우주선 ‘은빛 새벽’호의 관제실은 고요했다. 수만 광년을 아우르는 우주 항로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고 정평 난 ‘별무리 협곡’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혜성 잔해들이 보석처럼 흩뿌려진 길고 아득한 터널. 하이란 종족의 유일한 상속녀이자 외교관인 엘레나는 투명한 크리스탈 패널 너머로 펼쳐진 장관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의 종족, 하이란은 빛의 자손들이라 불렸다. 창백하리만치 순결한 피부는 희미하게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고, 얇고 긴 사지에는 연약한 생명력이 가득했지만, 정신력만큼은 그 어떤 종족보다 강인했다. 그들은 질서와 이성을 숭배했으며, 감정의 과잉을 불결하게 여겼다. 그리고 그런 하이란 문명의 중심에는 늘 엘레나가 서 있었다. 수만 개의 별들보다 더 빛나야 하는 존재, 그러나 동시에 가장 외로운 별이었다.

    “공주님, 항로가 불안정합니다. 외부 충격 감지.”

    나직한 통신음이 엘레나의 사색을 깼다.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싸늘하게 조여드는 것을 느꼈다. 평화로운 협곡을 가르던 함선은 갑작스러운 진동에 휩싸였다. 경고음이 울리고, 홀로그램 패널들이 붉은빛으로 번뜩였다.

    “무슨 일이지? 여긴 안전 구역이잖아!”

    “원인을 알 수 없습니다! 미확인 에너지 반응… 방어막이…”

    관제관의 다급한 목소리가 끊기기도 전에, 거대한 폭발음이 함선을 뒤흔들었다. 엘레나는 본능적으로 비상 탈출 포드로 향했다. 눈부신 빛과 함께 포드가 분리되는 순간, 함선은 거대한 파편 조각이 되어 우주 속으로 흩어졌다.

    그녀의 비상 탈출 포드는 미지의 행성으로 떨어졌다. 중력 가속에 따른 충격으로 잠시 의식을 잃었던 엘레나는 눈을 떴을 때, 낯선 풍경과 마주했다. 붉고 거친 대지, 기형적인 형상의 식물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미지의 시선들. 이곳은 하이란의 지도에도 없는, 미탐사 구역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를 덮쳤다.

    “정신이 드나, 빛의 아이여.”

    낮고 거친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엘레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그녀의 종족에게 ‘야만인’ 또는 ‘피를 탐하는 괴물’이라 불리는 크로노스 전사가 서 있었다. 검푸른 피부에는 복잡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강철 같은 근육은 거친 대지의 생명력처럼 꿈틀거렸다. 그의 두 눈은 날카로운 짐승처럼 번뜩였지만, 그 속에 알 수 없는 호기심과 경계심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카이’였다.

    엘레나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크로노스 종족은 그들의 물리적인 힘과 잔인한 전투 방식으로 악명이 높았다. 하이란은 크로노스를 경멸했고, 크로노스 역시 하이란을 나약하고 오만한 존재로 치부했다. 수천 년간 지속된 뿌리 깊은 증오와 불신의 고리였다.

    “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엘레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약한 떨림을 숨기지 못했다.

    카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네 포드에서 생명의 기운이 느껴져서 살려 두었을 뿐이다. 이곳은 너희 빛의 자손들이 발 디딜 곳이 아니니, 돌아가라.”

    “돌아갈 곳이 없어… 함선은 파괴됐어.”

    엘레나의 말에 카이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는 한숨처럼 낮은 소리를 내더니, 땅바닥에 꽂혀 있던 자신의 거대한 창을 뽑아 들었다. “그렇다면… 따라와라. 이 행성의 밤은 너 같은 나약한 존재가 버틸 수 없을 만큼 차갑다.”

    그는 마치 어둠에 녹아드는 그림자처럼 앞서 걸었고, 엘레나는 망설이다 그를 따랐다. 생존을 위한 본능이 종족 간의 오랜 증오보다 강렬했다.

    카이는 동굴 깊숙한 곳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동굴 안은 예상외로 따뜻했다. 희미하게 빛나는 특수한 광물들이 벽에 박혀 있었고, 중앙에는 작은 불이 피워져 있었다. 그곳에는 카이가 사냥한 듯한 거친 육류와, 알 수 없는 열매들이 놓여 있었다.

    “먹어라. 이곳의 물은 네가 마셔도 해롭지 않을 것이다.” 카이는 무뚝뚝하게 말하며 그녀에게 육포를 내밀었다.

    엘레나는 망설였다. 하이란은 주로 합성 영양제나 정제된 에너지 큐브를 섭취했다. 이런 날것의 음식은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배고픔은 그 어떤 편견보다 강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육포를 받아 한 입 베어 물었다. 의외로 고소하고 짭짤한 맛에 놀랐다.

    며칠 밤낮을 그렇게 보냈다. 카이는 그녀에게 이 행성의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려주었다. 독성이 없는 식물을 구분하는 법, 사나운 짐승들의 흔적을 피하는 법, 밤하늘의 별을 보고 방향을 찾는 법. 엘레나는 그의 예상치 못한 섬세함과 배려심에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그녀가 알던 크로노스 종족은 무지하고 잔인한 야만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 행성의 모든 생명과 깊이 연결된, 지혜롭고 강인한 존재였다.

    “너희 종족은… 왜 그리도 우리를 경멸하는가?” 어느 날 밤, 엘레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이는 불꽃을 응시하며 답했다. “너희는 우리의 방식을 야만적이라 부르지. 하지만 우리는 너희의 차가운 이성과 계산적인 태도를 위선이라 생각한다. 너희는 생명의 존엄성을 잊은 채, 오직 너희만의 질서만을 고집한다.”

    “우리는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지키기 위해…”

    “혼돈은 생명의 자연스러운 순환이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생명 자체를 거부하는 것과 같지.”

    그의 말이 가슴에 박혔다. 하이란은 늘 완벽한 질서와 통제를 추구했다. 감정을 억누르고, 본능을 부인하며, 오직 이성만이 옳다고 믿었다. 하지만 카이와 함께한 시간은 그녀에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불완전하고 예측 불가능한 삶, 그 속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과 진실한 생명력.

    엘레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카이의 거친 손을 잡았다. 그의 피부는 예상보다 따뜻했고, 강인한 생명의 에너지가 전해져 오는 듯했다. 카이는 놀란 듯 그녀를 돌아보았지만, 뿌리치지 않았다.

    “두렵지 않아… 너와 함께라면.” 엘레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카이의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의 그림자가 스쳤다. 그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나는 너희의 빛처럼 섬세하지 않다. 나는 어둠의 심장을 가진 자.”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빛이 나는 걸.”

    그날 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수천 년간 이어진 종족의 장벽을 허물었다. 붉은 행성의 밤하늘 아래, 별들의 무수한 시선 속에서 두 영혼은 하나가 되었다. 엘레나의 희미한 푸른빛과 카이의 강렬한 어둠이 섞여, 우주가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색깔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비밀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
    며칠 후, 카이의 부족 정찰선이 그들을 발견했다. 정찰병들은 카이가 하이란 종족의 여인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그들은 카이를 배신자로 몰아붙였고, 엘레나를 붙잡아 심문하려 했다.

    “이 더러운 빛의 마녀가 우리 동족을 홀렸어!”

    “카이, 어찌 이런 천한 것과 함께 있는가!”

    크로노스 전사들의 거친 함성에 카이는 굳은 얼굴로 앞을 막아섰다. “물러서라. 이 여인은 나의 손님이다.”

    “손님이라고? 네놈의 눈빛에서 이미 너의 마음을 읽었다, 카이! 너는 금지된 것에 손을 댔다!”

    그때, 엘레나의 종족, 하이란의 수색 함선이 행성 대기권에 진입했다. 하이란 병사들은 빛나는 갑옷을 입고 레이저 총을 겨눈 채 카이와 크로노스 전사들을 포위했다.

    “엘레나 공주님! 무사하십니까?” 하이란 지휘관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울려 퍼졌다. 그는 카이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저 야만인에게서 떨어지십시오! 혹 그가 공주님께 무례를 범했습니까?”

    상황은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달았다. 양 종족은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엘레나는 카이의 옆에 섰다.

    “아닙니다, 지휘관님. 카이는 저를 구해줬습니다. 그는… 저의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녀의 말에 하이란 병사들은 동요했다. 크로노스 전사들은 분노에 찬 시선으로 카이와 엘레나를 번갈아 보았다.

    “엘레나! 너는 미쳤는가! 저 야만인에게 놀아난 것이냐!” 지휘관의 목소리에 분노가 서렸다.

    카이가 엘레나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우리는 사랑한다. 너희의 오랜 증오와 편견 따위는 우리가 함께하는 미래에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선언에 양측 모두 침묵했다. 그 침묵은 폭풍전야와 같았다. 곧이어, 하이란 지휘관이 명령을 내렸다. “저 야만인을 사살하고, 공주님을 구출하라! 만약 공주님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카이는 엘레나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기며 창을 들었다. “누구도 그녀를 건드릴 수 없다!”

    크로노스 전사들도 카이의 편에 서서 무기를 들었다. 그들은 카이의 용기를 존중했지만, 동시에 그의 금지된 사랑에 대한 불안감과 분노도 내포하고 있었다.

    “사랑은 너희의 유치한 감정놀음이다! 질서를 파괴하는 불결한 감정일 뿐!” 하이란 지휘관이 외쳤다.

    엘레나는 카이의 손을 잡고 그의 눈을 응시했다. “우리의 사랑이 불결하다면… 이 우주에 순결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거예요.”

    그녀는 카이를 향해 미소 지었다. 그의 거친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슬프면서도 동시에 희망에 찬 미소였다.

    “도망칠 곳은 없을 것이다, 카이. 너희가 어디로 가든…”

    “이 우주는 넓고, 우리는 너희의 좁은 시야를 벗어날 수 있다.”

    카이는 마지막으로 엘레나의 손을 한 번 더 꽉 쥐었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해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행성의 거친 대지를 울렸다. “어둠과 빛이 하나 되는 곳에, 진정한 생명이 싹튼다!”

    그는 엘레나를 끌어안고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의 강력한 점프력으로 행성의 대기권을 벗어나려고 했다. 양측의 무기가 불을 뿜기 시작했다. 레이저와 플라스마포가 그들의 뒤를 쫓았다.

    엘레나는 카이의 품에 안겨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자신들을 보았다. 그들은 더 이상 하이란의 공주나 크로노스의 전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서로를 사랑하는 두 존재였다. 그들의 앞에는 미지의 우주와 끝없는 위험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동시에 무한한 자유와 새로운 시작이 펼쳐져 있었다.

    푸른빛과 어둠이 섞인 한 줄기 섬광이 별들 사이로 사라졌다. 두 종족의 포격이 그들이 떠난 자리를 향해 허망하게 쏟아질 뿐이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금지된 사랑을 쫓아, 모든 것을 버리고 우주를 유랑하는 두 영혼의 서사시가.

  • 가상현실 게임 (VRMMO)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아르카나의 별무리」. 그 광활한 가상현실 속에서, 나는 고작 이름 없는 정령술사, 강현이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내 직업의 숙련도가 아닌, 차라리 미치광이의 용기가 더 필요했다. ‘영원의 숲’ 심층부. 이곳은 통제 불능의 정령과 고대의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일반 플레이어들은 발을 들일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곳. 나 역시 퀘스트를 따라 여기까지 왔지만, 그 퀘스트가 던진 것은 달랑 ‘잃어버린 고서의 조각’이라는 모호한 목표뿐이었다.

    “하아… 이쯤 되면 거의 미아가 된 기분인데.”

    강현은 나뭇가지에 걸린 낡은 룬 문자 비석을 짚으며 중얼거렸다. 고대 정령의 기운이 짙게 배어 있는 숲은 낮인데도 어둑했고, 키 큰 나무들의 그림자가 춤추며 길을 감췄다. 발밑에는 이름 모를 발광 식물들이 희미하게 빛나며 기괴한 분위기를 더했다. 손을 뻗어 푸른빛을 내는 이끼를 만지자, 손끝에서 짜릿한 마나의 파동이 느껴졌다. 살아있는 숲. 그 자체였다.

    ‘정령 친화도 최고치’라는 내 캐릭터의 특성 덕분일까. 다른 이들이라면 공포에 질려 도망쳤을 이 숲의 정령들이, 강현에게는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강현은 가방에서 ‘정령 감지 수정’을 꺼내 들었다. 푸른 수정구 안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조금 더… 깊은 곳인가.”

    수정구가 가리키는 방향은 숲의 가장 깊은 곳, 전설 속에서나 등장한다는 ‘달빛 호수’의 방향이었다. 그곳은 인간의 발길이 닿은 적 없다는 금지된 성역으로 알려져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 호수에는 별의 조각이 잠들어 있으며, 밤의 요정들이 달의 기운을 받아 춤을 추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에 불과했고, 실제로 그곳에 가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강현은 심호흡을 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물러설 수는 없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숲은 더욱 깊어지고, 나무들의 형태는 더욱 기이해졌다. 잎사귀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밀도가 심상치 않았다.

    얼마나 걸었을까. 빽빽한 나무들의 장막이 걷히고, 눈앞에 거짓말처럼 고요하고 신비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달빛 호수.

    숲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그 호수는 하늘의 별빛과 달빛을 그대로 담아낸 듯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수면은 거울처럼 맑았고, 호수 중앙에는 거대한 고목이 뿌리내려 마치 하나의 섬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고목 위에서…

    “……!”

    강현은 숨을 멈췄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이 세상의 존재라고는 믿기지 않는 아름다움이었다.

    호수 중앙의 고목 가지 위, 오색 찬란한 달빛을 등지고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길고 은빛 머리카락은 어깨를 넘어 허리까지 흘러내렸고, 투명한 푸른빛의 드레스는 바람에 따라 실크처럼 흩날렸다. 백옥 같은 피부는 달빛을 머금어 더욱 빛났고, 그을음 한 점 없는 완벽한 이목구비는 인간의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의 등 뒤에 나 있던, 마치 나비의 날개 같기도 하고 투명한 베일 같기도 한 한 쌍의 날개였다. 그 날개는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호흡할 때마다 희미하게 명멸했다.

    강현은 감히 눈을 깜빡일 수도 없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울렸다. 퀘스트고 뭐고, 이 순간 모든 것을 잊었다. 그녀는 그저 그곳에 서서, 달빛을 받으며 작은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 손끝에서 푸른빛의 마나 구슬이 형성되더니, 호수 위로 부드럽게 흩어졌다. 마치 호수와 대화하는 듯한 몸짓이었다.

    이것이 밤의 요정인가? 전설 속 존재들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는 고요했고, 그녀의 주변을 감싸는 기운은 너무나도 순수하고 강렬해서, 강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를 압도했고, 동시에 한없이 끌어당겼다.

    그 순간, 숲의 고요를 깨는 날카로운 포효가 울려 퍼졌다.

    크르르르르릉!

    강현은 반사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거대한 그림자가 숲속에서 튀어나왔다. 짙은 검은색의 털에 붉은 눈을 가진, 이빨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늑대형 몬스터였다. ‘밤의 사냥꾼’. 영원의 숲 심층부에 서식하는 강력한 몬스터 중 하나였다. 인간을 보면 맹렬하게 공격하는, 잔혹하기로 악명 높은 존재.

    녀석은 냄새를 맡았는지 강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강현은 몬스터보다 고목 위 여인에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놀라지도, 겁에 질리지도 않았다. 그저 고요한 푸른 눈동자로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와, 자신을 숨어 보는 강현을 번갈아 응시할 뿐이었다.

    “젠장!”

    강현은 본능적으로 단도를 뽑아 들었지만, 정령술사는 근접전에 취약했다. 게다가 저 몬스터는 어지간한 상위 랭커들도 꺼리는 존재였다.

    그때, 고목 위에 서 있던 여인이 나지막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듯 영롱했고, 달빛 호수의 물결과 함께 잔잔하게 퍼져 나갔다. 그 목소리에는 설명할 수 없는 강력한 마력이 담겨 있었다. 몬스터를 향해 달려들던 밤의 사냥꾼은 그 노래를 듣자마자 움직임을 멈췄다. 붉게 빛나던 눈동자가 서서히 희미해지더니,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콰앙!

    강현은 깜짝 놀랐다. 몬스터가 갑자기 그대로 바닥에 쓰러진 것이다. 마치 누군가 강제로 잠을 재운 듯, 미동도 없이 고요해졌다.

    그녀의 노래 한 곡에, 숲의 맹수가 잠이 들었다.

    강현은 할 말을 잃었다. 이것이 바로 전설 속 밤의 요정의 힘이란 말인가. 인간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태초의 마법.

    그녀의 시선이 강현에게 향했다. 푸른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그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고 맑은 눈이었다.

    강현은 홀린 듯 나무 뒤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차피 들켜 버린 마당에, 더 이상 숨을 이유가 없었다.

    “저… 감사합니다.”

    그는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침묵 속에서, 강현은 다시 한번 그녀의 아름다움에 압도당했다. 동시에,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묘한 외로움과 고독에 마음 한구석이 아려왔다.

    드디어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노래만큼이나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아득하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인간… 어찌하여 금지된 숲에 발을 들였느냐.”

    그녀의 목소리는 완벽한 한국어였지만, 억양은 고어체를 쓰는 듯 독특한 울림이 있었다. 강현은 조금 전 몬스터가 사라진 곳을 흘끗 보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몬스터의 자리는 오직 달빛만이 부드럽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녀의 마법은 단순히 잠재운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 것 같았다.

    “그… 고서의 조각을 찾으러 왔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에….” 강현은 더듬거렸다. 그녀의 시선 앞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은빛 머리카락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고서의 조각이라… 너희 인간들은 언제나 잊힌 것을 찾아 헤매는구나.”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슬픔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녀는 고목에서 사뿐히 내려와 호숫가로 다가왔다. 발소리조차 나지 않는 움직임이었다.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강현은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마나의 기운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다.

    “너의 존재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다. 숲의 평화를 해칠 뿐.”

    그녀의 말은 차가웠지만, 그 속에 담긴 감정은 복잡했다. 경고하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저는… 숲을 해칠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퀘스트를….”

    강현은 굳이 자신의 목적을 다시 설명했다. 사실 퀘스트고 뭐고,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는 이 게임 속 존재하는 그 어떤 NPC나 몬스터와도 달랐다. 살아 숨 쉬는, 영혼이 있는 듯한 존재였다.

    “퀘스트? 그것이 너희 인간들의 존재 이유인가?” 그녀가 물었다. 그 질문에는 비아냥거림이 아닌, 순수한 궁금증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대로 존재한다. 별이 그러하듯, 달이 그러하듯.”

    강현은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게임 속에서 자신은 그저 시스템이 부여한 목표를 따르는 플레이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 숲의 정령처럼 그 자체로 존재했다.

    “저의 이름은 강현입니다.” 그는 자신을 소개했다.

    그녀의 푸른 눈이 아주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강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나는… 엘레나. 달의 인도자.”

    엘레나. 그 이름이 강현의 입술에서 맴돌았다.

    “엘레나님… 혹시 이 숲에 오래된 고서의 조각이 있을까요? 잃어버린….”

    그녀는 강현의 말을 잘랐다.

    “너희가 잃어버렸다고 부르는 것은,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기억이다. 인간의 손에 닿아서는 안 될 것.”

    그녀는 단호했다. 강현은 순간 낙담했다. 퀘스트를 실패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그녀와의 대화가 곧 끝날 것이라는 예감이었다.

    “하지만… 저는 그저….”

    “더 이상 이 숲에 머물지 마라. 너의 존재는 이곳의 균형을 뒤흔든다.”

    엘레나는 경고했다. 그녀의 날개가 희미하게 빛났다. 마치 그를 숲 밖으로 밀어낼 준비를 하는 듯했다. 강현은 그녀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그녀의 힘은 압도적이었고, 그녀의 의지는 확고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눈은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낯선 끌림으로 가득 찼다. 이 세상의 어떤 퀘스트 보상보다도,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다음에… 또 올 수 있을까요?” 강현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엘레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호수 위로 달빛이 부드럽게 쏟아져 내렸고,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바람 소리만이 흘렀다.

    “이 숲은… 너희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곳이다.”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아까보다는 희미한 울림이 있었다. 강현은 그 작은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다릅니다.” 엘레나는 강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달빛 호수 너머 어둠이 짙게 깔린 숲을 응시했다. “인간들은 늘 탐욕으로 가득했지. 모든 것을 부수고, 모든 것을 가지려 했다. 허나 너의 눈빛에는… 그런 어둠이 보이지 않는구나.”

    강현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가 자신을 특별하게 보고 있다는 것인가? 금지된 존재들 사이에서, 이 종족을 뛰어넘는 미묘한 감정이 싹트는 순간이었다.

    “다음에 또 오시겠다면… 숲은 너를 기억할 것이다. 허나… 다음에도 평화를 깨려 한다면, 이 호수가 너를 삼키리라.”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고목 위로 사뿐히 날아올랐다. 그녀의 날개는 달빛을 머금고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마치 환상처럼, 그녀는 고목의 잎사귀들 사이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강현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차가운 경고였지만, 동시에 허락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다시 올 기회를 준 것이다. 금지된 숲, 금지된 존재. 하지만 그녀의 푸른 눈빛과 은쟁반 같은 목소리는 그의 마음속에 깊이 박혔다.

    그의 퀘스트는 실패했지만, 그에게는 더 중요한 목표가 생겼다.

    다시 그녀를 만나는 것. 이 금지된 사랑의 씨앗이, 아르카나의 별무리 아래에서 어떤 거대한 이야기로 자라날지, 강현은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가상현실은, 이제 완전히 다른 의미를 갖게 될 것이었다.

    그는 천천히 발길을 돌려 숲을 빠져나왔다. 등 뒤로 달빛 호수의 신비로운 빛이 희미해졌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엘레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다시 이 숲으로 돌아올 것이다. 어떤 위험이 따르더라도. 어떤 금기가 그의 앞을 가로막더라도.

    “엘레나…”

    나직이 그녀의 이름을 되뇌며, 강현은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밤은 깊었고, 아파트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지혜는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은 채, 손 안의 따뜻한 머그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루 종일 시달린 회사 업무의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이 고요한 순간만큼은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었다. 벽에 걸린 낡은 시계가 나른한 똑딱거림으로 존재를 알렸다. 똑, 딱. 똑, 딱.

    그때였다. 주방 쪽에서, 아주 미세한,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슥, 스스슥…
    지혜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벌레인가?’ 싶었지만, 워낙 예민한 청각을 가진 터라 쥐새끼라도 들어왔을까 불쾌함이 앞섰다.
    “뭐야?”
    낮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거실의 아늑한 조명 아래서는 보이지 않는 어둠이 주방 입구에 드리워져 있었다. 인기척에 놀라 쥐죽은 듯 조용해졌을까,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혜는 한숨을 쉬었다. “피곤해서 헛것을 듣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소파에 앉았다. 그러나 아까의 그 긁히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괜히 으스스한 기분이 들어 보던 드라마 채널을 코미디로 돌렸다. 밝고 경쾌한 웃음소리가 허공을 채우자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다음 날 아침, 지혜는 출근 준비를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칫솔을 들고 거울을 바라보는데, 세면대 구석에 놓아두었던 립밤이 보이지 않았다.
    “어? 어딨지?”
    분명 어젯밤 양치를 하고 나서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항상 같은 자리에 두는 습관이 있었기에, 립밤이 사라진 것은 꽤나 의아했다. 여기저기 찾아봐도 보이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출근길을 재촉했다.
    퇴근 후, 지혜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섬뜩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어질러진 신발장.
    그녀의 구두 한 짝이 신발장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신발을 신으려다 던져 놓은 것처럼. 지혜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이렇게 놓고 나갔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신발 정리를 꼼꼼히 하는 편이라 저런 식으로 내버려 뒀을 리 없었다.
    “바람인가…”
    창문이 열려 있었나 싶어 거실로 향했지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가방을 내려놓았다. 그때였다. 주방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혜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설마 도둑?
    긴장한 채 발소리를 죽이고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는 어젯밤 마시고 두었던 유리컵이 깨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유리 조각들이 조명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빛났다.
    “세상에…”
    지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 아파트에서 3년째 살면서 이런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컵이 저절로 떨어져 깨질 만한 위치도 아니었다.
    그녀는 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친구 수민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수민아. 나 지금 진짜 너무 이상해.”
    수민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야, 이 시간에. 또 야근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나 지금 집에 왔는데 컵이 깨져 있고, 신발장도 엉망진창이야. 어제 내가 나갈 때 분명히 제대로 해놨단 말이야.”
    수민은 하품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야, 너 요새 회사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헛것 보는 거 아니냐? 피곤하면 다 그렇게 보여.”
    “아니야! 진짜라니까. 어제는 립밤도 없어지고, 이상한 소리도 났었어. 진짜 누가 들어왔던 거 아닐까?”
    수민은 웃음을 터뜨렸다. “도둑이 립밤이나 훔쳐가겠냐? 그리고 아파트에 누가 그렇게 쉽게 들어와. 그냥 네가 정신없이 살다 보니 착각하는 거겠지. 불면증 초기 증상 아니냐? 어서 자.”
    수민은 그녀의 말을 전혀 믿어주지 않았다. 결국 지혜는 한숨을 쉬며 전화를 끊었다.
    외로운 불안감이 엄습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파트의 공기는 더욱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는 듯했다.
    지혜는 깨진 유리 조각들을 치우고 샤워를 마쳤다. 몸을 씻고 나니 조금은 나아질까 했지만, 오히려 정신이 더 또렷해져서 주변의 작은 소리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섰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렸다. 휴대폰으로 불길한 기사를 검색해보려다가 멈췄다. 괜히 더 무서워질 것 같았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작은 스탠드 조명 하나가 벽면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지혜는 조명 아래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읽다가 잠이 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몇 페이지 읽었을까, 다시 그 소리가 들려왔다.
    슥, 스스슥…
    이번에는 옷장 안에서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손톱으로 나무를 긁는 듯한 소리.
    지혜는 몸을 움찔 떨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아니야, 아니야. 분명 환청일 거야.’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손에 쥔 책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때, 옷장 문이 스르륵 열렸다.
    삐걱이는 소리도 없이, 아주 천천히, 안쪽에 걸린 옷들이 희미한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지혜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린 채 눈만 크게 뜨고 옷장을 노려봤다.
    옷장 안쪽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했다.
    검고 흐릿한 형체. 마치 키 작은 아이가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혜는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누, 누구야…?”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 옷장 속 어둠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히히히… 히히히히…
    섬뜩하게 갈라지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작고 창백한 손 하나가 스르륵 튀어나왔다.
    손가락 끝은 마치 불에 그을린 듯 검게 변색되어 있었고, 손톱은 길고 날카로웠다.
    그 손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옷걸이에 걸려 있던 지혜의 원피스를 움켜쥐었다.
    지혜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옷장 속의 존재는 원피스를 움켜쥔 채, 마치 잡아당기듯 옷을 끌어당겼다.
    툭.
    옷걸이가 부러지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그리고 옷장 속 어둠이 다시 깊어지더니, 열려있던 옷장 문이 ‘쿵’ 하고 세게 닫혔다.
    지혜는 그제야 억눌렸던 숨을 토해내며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더 이상 이 집은 안전하지 않았다.
    지혜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온몸의 세포들이 비명을 질렀다.
    문고리를 잡아 돌리려는 순간, 뒤에서 차가운 숨결이 느껴졌다.
    “어디 가…?”
    귓가에 속삭이는, 어린아이의 싸늘한 목소리.
    지혜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끼며 얼어붙었다.
    그리고 현관문 바로 옆에 걸려 있던 액자 하나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깨진 유리 조각들 사이로, 액자 속 그녀의 가족사진이 조각조각 부서져 있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일그러진 채, 차가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지혜는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 없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건 환각이 아니었다. 분명했다.
    그녀의 아파트에, 무언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이 집을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 무협 독립적인 단편 소설

    어둠이 짙게 깔린 능선 위로 검푸른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천하제일 문파로 손꼽히는 천룡문의 후예, 무영은 뼈아픈 수련을 마치고 막 깊은 숲으로 접어들 참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으나, 얼굴에는 스승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번뇌가 서려 있었다. ‘강호의 의로움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의 검 끝은 언제나 약한 자를 향했지만, 때로는 그 약한 자들조차 서로를 향해 칼날을 겨누는 혼탁한 세상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숲 가장자리의 낡은 암자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마물(魔物)의 기운. 무영은 본능적으로 검을 뽑아 들고 그림자처럼 암자로 향했다. 싸움의 흔적은 없었다. 다만, 텅 빈 암자의 마루 한편에 기절한 여인이 쓰러져 있을 뿐. 그녀의 흰 한복은 찢겨 있었고, 어깨에서는 붉은 피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무영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달빛 아래에서도 찬란히 빛나는 은발,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 그리고 붉게 물든 입술. 신선이라 해도 믿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괜찮으시오?”

    무영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그녀의 맥을 짚었다. 차가웠다. 인간의 맥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미약하고 냉랭했다. 그러나 사악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망설임 끝에 그는 그녀를 업어 자신의 은신처로 향했다. 한밤의 숲길은 유난히 고요했고, 그녀의 가벼운 몸에서 풍겨 나오는 옅은 난초 향만이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며칠 밤낮을 무영은 그녀를 간호했다. 그녀의 상처는 기묘하게도 빨리 아물었으나, 깨어나지 못했다. 무영은 그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없었다. 인간이라기엔 너무나 이질적이었고, 마물이라기엔 너무나 정갈했다.

    사흘째 밤, 그녀가 마침내 눈을 떴다. 짙은 회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무영을 응시했다.

    “어디… 계십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새벽녘 이슬처럼 맑고 투명했다.

    “나는 무영이오. 그대는 암자 근처에서 쓰러져 있었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을 ‘여린’이라 소개했다.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영은 그녀를 믿기로 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거짓의 기색이 없었다.

    그날부터 여린은 무영의 곁에 머물렀다. 무영은 그녀에게 글을 가르치고, 세상 이야기를 해주었다. 여린은 경이로운 속도로 모든 것을 익혔고, 때로는 무영조차 알지 못하는 옛 이야기를 읊조리곤 했다. 그녀는 숲의 모든 생명과 교감하는 듯했고, 신비로운 약초를 찾아와 무영의 수련으로 지친 몸을 치유해주기도 했다. 무영은 그녀에게 점점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의 메마른 강호 생활에 단비처럼 느껴졌다.

    어느 보름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었다. 무영은 여린과 함께 산등성이에서 달을 보고 있었다.
    “무영…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로군요.” 여린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무엇 말이오?”
    “당신은 어찌 이리도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나요? 나 같은 이에게도 이리도 다정한데…”
    그녀의 시선이 달빛 아래에서 미묘하게 흔들렸다. 무영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에게는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대는 나에게… 더 이상 낯선 이가 아니오. 그대가 누구든, 내 마음은 변치 않을 것이오.”

    그 순간, 여린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일더니, 그녀의 등 뒤로 아홉 개의 하얀 꼬리가 피어났다. 은백색 털이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반짝였다. 무영의 눈은 경악으로 커졌지만, 그는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나는 요물(妖物)입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이 산을 지키는 구미호(九尾狐)이지요.” 여린의 목소리는 떨렸다. “사람들은 저를 마물이라 부르며 두려워하고 미워합니다. 당신마저 저를…”

    “아니오.” 무영은 단호하게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대의 눈동자에서 본 것은 요물이 아니라, 슬픔과 외로움이었소. 그대의 마음은… 그 누구보다 따뜻하고 순수하오. 종족이 무엇이든, 그대는 내게 여린이오.”

    그 밤, 두 사람은 세상의 모든 금기를 잊은 채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그들의 사랑은 산의 정령조차 숨죽이며 지켜보는 신비로운 맹세와 같았다.

    하지만 금지된 사랑은 결코 세상에 용납되지 않는 법.
    무영이 여린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자, 그의 스승은 제자의 이상한 변화를 감지했다. 무영의 내공은 깊어졌으나, 그의 심장에는 인간으로서는 품을 수 없는 이질적인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스승은 무영을 찾아왔고, 숲 속 은신처에서 여린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무영! 네 이럴 수가! 저 요물에게 홀렸느냐?” 스승은 눈을 부릅떴다. 천룡문의 장문인다운 위엄과 분노가 그의 목소리에 담겨 있었다.
    “스승님, 여린은 요물이 아닙니다. 그저… 다른 존재일 뿐입니다.” 무영은 여린의 앞을 막아섰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저것은 인간의 정기를 빨아먹는 마물이다! 천룡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짓을 하다니!”

    스승의 손에서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무영은 재빨리 검을 뽑아 막았지만, 스승의 내공은 상상 이상이었다. 무영은 밀려났다. 그 순간, 여린이 무영의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아홉 꼬리가 성난 파도처럼 일렁였다. 숲의 기운이 그녀에게로 모여들었다.

    “이분을 건드리지 마세요!” 여린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이슬 같지 않았다. 천지를 뒤흔드는 뇌성과 같았다.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기운이 스승을 향해 날아갔다. 스승은 놀라 물러섰다. 인간으로서는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요력(妖力)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수십 명의 무인들이 숲으로 쇄도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룡문의 사제들, 그리고 다른 문파의 협객들이었다. 소문은 이미 강호에 퍼져 있었다. 천룡문의 수제자가 요물에게 홀려 문파의 도의를 저버렸다는 소문이.

    “여린…!” 무영은 절규했다.
    “가십시오, 무영! 제가 막겠습니다!” 여린은 무영을 뒤로 밀쳤다. “제 힘으로는 모든 인간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보낼 시간은 벌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녀의 눈동자에 슬픈 미소가 번졌다. 무영은 그녀를 버리고 갈 수 없었다. 그의 검이 다시 한번 불꽃처럼 타올랐다.
    “아니오! 절대 그럴 수 없소! 우리는 함께 있을 것이오!”

    무영은 달려드는 무인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의 검은 그림자처럼 빠르고, 바람처럼 날카로웠다. 천룡문의 무공은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하지만 상대는 너무나 많았고, 그들의 눈에는 분노와 광기가 서려 있었다.

    여린 또한 온 힘을 다해 요력을 발산했다. 숲의 나무들이 가지를 뻗어 병풍을 이루고, 땅속에서 덩굴이 솟아올라 무인들의 발을 묶었다. 그녀의 아홉 꼬리는 마치 생명체처럼 움직이며 적들을 휘감고 던졌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싸움은 밤새도록 이어졌다. 무영과 여린은 상처투성이가 되어갔다. 결국, 수십 명의 무인들이 쓰러지고, 그들 또한 한계에 다다랐다. 스승이 다시 한번 무영을 향해 강력한 내공을 날렸다. 무영은 막아냈지만, 그 충격으로 몸이 휘청였다. 그때, 또 다른 공격이 여린의 등 뒤를 노렸다. 무영은 몸을 던져 여린을 감쌌다.

    “커헉!”

    등에 칼날이 박히는 고통과 함께 피가 솟구쳤다. 여린의 비명이 숲을 갈랐다.
    “무영! 안돼요!”
    그녀의 요력이 폭주했다. 숲 전체가 흔들리고,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날아갔다. 무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스승마저 그 엄청난 기세에 휩쓸려 멀리 밀려났다.

    무영은 여린의 품에서 숨을 헐떡였다. 그의 등에서 흐르는 피는 숲의 흙을 붉게 물들였다.
    “여린… 괜찮소… 그대는… 살아남아야 하오…”
    “안돼요! 눈을 뜨세요, 무영! 당신 없이는… 저도…!”

    여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요력은 무영의 상처를 치유하려 했지만, 인간의 몸은 요력을 감당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생명을 더욱 빨리 앗아갈 뿐이었다.

    그때, 하늘에서 거대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무영이 전에 암자에서 보았던 그 섬광이었다. 숲의 가장 깊은 곳에서 고대의 봉인이 풀린 듯, 신비로운 기운이 솟아올랐다.
    “천년의 약속… 이제야….” 여린이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영… 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

    그녀는 무영을 품에 안은 채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무영의 의식은 희미해졌지만, 그녀의 품 속에서 그는 평화로움을 느꼈다. 강호의 혼탁한 세상, 무협의 칼날, 종족의 금기…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여린의 온기만이 그를 감쌌다. 빛은 점차 사그라들었고, 무영과 여린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날이 밝자, 숲은 폭풍이 휩쓸고 간 듯 폐허가 되어 있었다. 무영의 스승과 남은 무인들은 경악과 두려움에 질린 채 텅 빈 숲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무영의 죽음을 확인하지 못했고, 여린 또한 잡지 못했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은 강호의 전설이 되어 떠돌았다. 요물에게 홀려 사라진 천룡문의 수제자, 그리고 인간을 사랑한 구미호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아주 먼 훗날, 속세의 티끌조차 닿지 않는 어느 푸른 계곡에서, 두 영혼이 다시 태어났다는 소문이 전해졌다. 한때 인간이었던 자는 숲의 정령이 되어 꽃을 피웠고, 한때 구미호였던 자는 바람이 되어 그 꽃잎을 감쌌다고. 그들의 사랑은 육체의 속박을 벗어나, 영원의 시간 속에 스며들었다. 금지된 사랑은, 마침내 자유로워진 것이다.

  • 다크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창밖으로는 빗줄기가 도시의 밤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고층 아파트의 십육 층. 지훈은 모니터의 푸른빛에 의존해 늦은 시간까지 디자인 시안을 만지고 있었다. 삑, 삑. 마우스 클릭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가늘게 메웠다. 재택근무가 길어지면서 세상과의 연결고리는 점점 희미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의 시작은 사소했다. 책상 위, 늘 제자리에 있던 연필꽂이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찌걱, 하는 아주 작은 소리. 그는 피곤해서 그런가 싶어 눈을 비볐다. ‘환각인가.’ 시안 수정에 집중하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연필꽂이는 원래의 자리에서 아주 조금 벗어나 있었다. 설마.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늘 정돈되어 있던 책꽂이의 꽂아두었던 책 한 권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고대 문명의 신비』. 지난주에 읽다 만 책이었다. 지훈은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가 어제 깜빡하고 떨어트렸나?” 웅얼거리며 책을 주워 다시 꽂아 넣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그 ‘사소한’ 일들은 일상이 되어갔다. 주방 선반 안에서 유리컵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 새벽녘에 들려오는 낡은 마룻바닥 삐걱거리는 소리, 아무도 없는 욕실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처음엔 보일러 문제, 층간 소음, 건물 노후화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그 소리들은 점점 더 선명해지고, 지훈의 귀를 향해 직접적으로 울리는 듯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침대 위에서 잠 못 이루고 뒤척였다. 거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발소리 같았다. 스윽, 스윽. 슬리퍼를 끄는 듯한 소리. 심장이 쿵쾅거렸다. ‘누구지? 도둑인가?’ 혼자 사는 아파트였다. 문은 분명히 잠갔다.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었다. 거실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벽 스위치를 눌렀다. 환해진 거실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침묵했다. 그저, 왠지 모르게 한기가 감돌았다. 마치 누군가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가 그대로 차갑게 남아있는 것처럼.

    지훈의 일상은 무너져 내렸다. 밤에는 잠을 이룰 수 없었고, 낮에는 출근하는 척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잠시라도 눈을 감으면 환영이 보였다. 흐릿한 형체가 주방과 거실을 오가는 모습. 시야 한구석에 맴도는 검은 그림자. 그는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처럼 예민해졌다.

    “여보세요? 지훈아, 너 요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돼?” 어머니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아, 엄마. 나 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지훈은 애써 태연한 척 말했다.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아니야. 괜찮아. 피곤해서 그래.”
    그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누가 믿어줄까. 그저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할 뿐일 거라고.

    어느 날 새벽, 침대에서 잠결에 이상한 감촉을 느꼈다. 몸 위를 덮고 있던 이불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발치로 끌려 내려가고 있었다. 지훈은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이불은 침대 아래로 절반쯤 내려가 있었고, 발끝에는 싸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이불을 다시 끌어올렸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낮은 속삭임이 들렸다.

    “…혼자니?”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차가운 땀방울. 그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 벽에 등을 기댔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분명히, 그의 귓가에 울렸다.

    그날부터, 현상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주방에서는 컵과 접시들이 선반에서 굴러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쨍그랑,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지훈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거실의 TV는 시도 때도 없이 저절로 켜졌다. 지지직거리는 백색 노이즈 속에서 희미하게 사람의 형상이 깜빡이는 것 같기도 했다.
    현관문은 잠겨 있었지만, 마치 누군가 밖에서 긁는 듯한 소리가 밤새도록 이어졌다. 삭, 삭, 삭. 마치 손톱으로 문을 긁는 것 같은 섬뜩한 소리였다.

    지훈은 거의 폐인이 되어갔다. 며칠 밤낮을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다.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랐고, 눈은 충혈되어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식칼을 품에 안고 밤을 새웠다.

    “이봐,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뭘 원하는 거냐고!”
    그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목소리는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답은 없었다. 대신, 거실의 큰 유리 화병이 둥실 떠올라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더니, 그의 눈앞에서 박살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는 간신히 몸을 피했다.

    그것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었다. 분명한 적의였다.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집착 어린 시선과 기분 나쁜 소리들로 가득 찬, 거대한 함정이었다.

    어느 날 밤, 지훈은 침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갑자기, 모든 불이 꺼졌다. 아파트 전체가 정전이 된 듯했다. 창밖의 도시 불빛만이 흐릿하게 그의 방을 비췄다.
    침묵.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끈적한 침묵이 공간을 압도했다. 그는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그때, 침실 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이어서, 거실에서부터 시작된 기이한 소음이 아파트를 뒤흔들었다.
    가구들이 제자리에서 부딪히는 소리,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 벽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마치 거대한 손이 아파트 내부를 휘젓고 다니는 것 같았다.
    지훈은 침대 모서리로 몸을 웅크렸다. “아, 안 돼… 제발….”

    그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아도 어둠 속에서 빛나는 붉은 눈동자들이 보이는 듯했다.
    침실의 벽이, 천장이, 바닥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벽에서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는 것 같았고, 천장에서는 낡은 시멘트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방 안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의 귀에 다시 속삭임이 들렸다. 이번에는 훨씬 더 가깝고, 훨씬 더 선명했다.
    아주 오래된, 기이하고 낯선 언어였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 의미만큼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너는 이제… 혼자가 아니야.*

    지훈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방은 여전히 어두웠다. 하지만 더 이상 벽에서 액체가 흐르지도, 천장이 무너지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듯했다.
    너무나도 완벽하게, 너무나도 고요하게.

    지훈은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고통과 피로,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평온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침대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더 이상 겁먹은 기색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방을 나선 그는 거실로 향했다.
    깨져 있던 화병 조각들은 온데간데없었다. TV는 꺼져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지훈은 아파트의 모든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차갑게 불어와 그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그는 창밖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불빛들, 수많은 사람들.
    그러나 그들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아파트에서,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시작되었는지를.

    그는 현관문으로 향했다. 잠겨 있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잠겨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문밖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그리고는 돌아섰다.

    텅 빈 아파트 안에서, 그의 시선은 멈췄다.
    거실 한가운데, 오래된 먼지가 가득한 바닥에,
    아주 희미한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손가락으로 억지로 긁어낸 것처럼.

    『환영한다. 새로운 주인을.』

    지훈은 그 글자들을 천천히 따라 읽었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둡고 차가운 빛이 그 속에서 번득였다.

    그는 다시 문을 닫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십육 층의 아파트는 깊은 침묵 속으로 잠겼다.
    다음 날, 관리사무소 직원들이 지훈의 아파트 문을 두드렸다.
    며칠째 이웃들의 소음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그의 연락 또한 닿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결국, 문은 굳게 닫힌 채로 남았다.
    그 안에서 무엇이, 혹은 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다만, 그 아파트에 들어서는 이들은 모두 알 수 있었다.
    이곳에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은 모두, 결코 혼자 남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영원히.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망각의 숨결

    **1장. 검은 숨결의 황무지**

    메마른 바람이 흑요석 바위틈을 훑고 지나며 뼈 시린 소리를 냈다. 끝없이 펼쳐진 검은 대지는 생명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죽음의 그림자로 덮여 있었다. 한(翰)은 닳아빠진 가죽 장화를 질질 끌며 그 그림자 속을 걷고 있었다. 그의 눈은 핏줄이 선명했고, 초점은 멀리 지평선 너머, 희미하게 보이는 고대 도시의 잔해에 박혀 있었다.

    “젠장, 오늘도 꽝인가.”

    목구멍에서 쉰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흘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배에서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고, 근육은 이미 쥐어짜낸 걸레짝처럼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한의 손에 들린 것은 녹슬어 거뭇거뭇한 쇠창 한 자루가 전부였다. 언제든 달려들지 모를 황무지의 짐승들을 막아낼 유일한 무기이자, 때로는 삶을 연명해 줄 사냥 도구이기도 했다.

    이 세상은 예전 같지 않았다. 영기(靈氣)가 풍성하여 신선들이 구름을 타고 넘나들고, 고고한 선문(仙門)들이 천지에 솟아 있었다는 옛 이야기는 이제 그저 어린아이들을 달래는 허황된 전설일 뿐이었다. 수백 년 전, 알 수 없는 대재앙이 세상을 덮쳤다. 영기는 대지에서 증발했고, 하늘의 길은 끊겼으며, 수많은 선문은 하룻밤 사이에 폐허로 변했다. 남은 것은 돌연변이 된 짐승들과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인간들뿐이었다.

    한은 고개를 들어 회색빛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제나 변함없는, 영기를 품지 않은 죽은 하늘. 과거의 영광은 먼지처럼 흩어졌고,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오직 본능에 충실했다. 선인들의 도가 무엇이냐고? 지금은 그저 굶어 죽지 않는 것이 가장 큰 도였다.

    그는 무심코 발길을 옮기다, 뾰족한 흑요석 파편에 발목을 긁혔다. 쓰라린 통증이 퍼졌지만, 한은 얕게 피가 배어 나오는 상처를 무시했다. 이런 작은 상처는 일상이었다. 오히려 이 정도의 고통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그때였다. 바싹 마른 덤불 너머에서 나직하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한의 온몸에 퍼뜩 전기가 올랐다. 눈빛이 한순간에 날카롭게 변하며 쇠창을 움켜쥐었다. 녀석의 체취가 바람을 타고 실려 왔다. 퀴퀴하고 역겨운, 짐승 특유의 비린내.

    ‘황무지 늑대인가? 아니면…….’

    이 흑요석 황무지에는 굶주린 짐승들이 너무나 많았다. 영기가 사라지면서 괴이하게 변형된 짐승들, 이빨과 발톱은 쇠처럼 단단하고, 가죽은 바위보다 질겼다. 놈들을 사냥하는 것은 언제나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크르르릉…….”

    덤불이 흔들리더니, 거대한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늑대는 아니었다. 네 발로 기어 다니는, 하지만 겉모습은 맹금류와 늑대를 섞어 놓은 듯한 기괴한 형상의 짐승이었다. 놈의 등에는 깃털 대신 날카로운 뼈 비늘이 돋아 있었고, 눈은 핏빛으로 번뜩였다. ‘골각랑(骨角狼)’. 영기가 사라진 후 돌연변이 된 황무지 최악의 포식자 중 하나였다. 보통 무리를 지어 다니지만, 이 녀석은 홀로였다. 아마도 늙거나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개체일 터.

    한의 입술이 비틀렸다. 홀로 다니는 녀석이라 해도, 골각랑은 늘 치명적인 상대였다.

    “……하필이면 너냐.”

    골각랑은 땅을 박차고 한에게 달려들었다. 놈의 거친 발톱이 땅을 긁으며 흑요석 파편을 사방으로 튀겼다. 한은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공격을 피했다. 쇠창이 허공을 갈랐고, 놈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녀석은 재빨리 자세를 고쳐잡고 다시 한에게 덤벼들었다.

    한은 필사적으로 쇠창을 휘둘렀다. 골각랑의 공격은 빠르고 맹렬했다. 날카로운 이빨이 그의 어깨를 스치며 가죽옷을 찢었다.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그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곳에서 고통에 무너지면 죽음뿐이었다.

    한은 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본능적인 짐승의 사나운 눈빛. 그 속에는 굶주림과 광기만이 가득했다. 그의 뇌리에는 어릴 적 들었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한아,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 숨을 쉬는 한, 희망은 있다.’

    그는 쇠창을 양손으로 단단히 잡고 놈이 달려드는 순간, 온몸의 힘을 실어 창끝을 골각랑의 목덜미로 깊숙이 찔러 넣었다. ‘꾸엑!’ 놈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거대한 몸뚱이가 흑요석 바닥에 부딪히며 먼지를 일으켰다. 피 냄새가 진동했다.

    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골각랑을 노려봤다. 놈은 사나운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다, 이내 축 늘어지며 숨을 거두었다. 한은 휘청거리며 주저앉았다. 손이 떨리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어깨에서는 끈적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살았다.”

    이 녀석의 고기는 질기고 맛없겠지만,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한은 익숙한 동작으로 골각랑의 시체에서 쓸 만한 부위를 도려내기 시작했다. 피비린내가 진동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이젠 그에게 익숙한 삶의 냄새였다.

    고기를 썰어내던 중, 녀석의 목덜미 안쪽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만져졌다. 돌연변이 짐승들은 가끔 몸속에 쓸모없는 기이한 결정체를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이렇게 깊숙한 곳에 박혀 있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은 쇠창 끝으로 살점을 긁어내 그 단단한 것을 끄집어냈다.

    손바닥에 올려진 것은 작고 투명한, 푸른빛이 감도는 조약돌 크기의 결정체였다. 놀랍게도 그 결정체에서는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한은 숨을 멈췄다. 이런 것은 처음 봤다. 황무지의 모든 것은 생명이 없고, 빛도 없는 죽은 것들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결정체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 들었다. 차가운 촉감.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처럼, 알 수 없는 에너지가 그의 손끝을 스치는 듯했다.

    ‘이게 뭐지?’

    그때였다. 발아래 땅이 약하게 진동했다. 흑요석 바위틈 깊숙한 곳에서, 방금 그 결정체와 같은, 하지만 훨씬 더 강렬한 푸른빛이 희미하게 깜빡이는 것을 한은 보았다. 골각랑이 죽기 전 몸부림치다 만들어낸 균열이었다.

    한은 망설였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 하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끌어당기는 알 수 없는 이끌림이 있었다. 그는 방금 얻은 고기를 대충 챙겨 넣고, 쇠창을 짚으며 균열이 난 바위틈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균열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는 몸을 구겨 넣으며 좁은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흑요석 바위의 차가운 기운이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좁은 통로는 이내 작은 동굴로 이어졌다.

    동굴 안은 어둠으로 가득했지만, 그의 눈은 이미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동굴 한가운데,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었다. 거대한 흑요석 암반 중앙에 박혀 있는, 아까 그 결정체와 똑같이 생긴 푸른 수정이었다. 하지만 이 수정은 훨씬 크고, 그 안에서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푸른빛이 파동치고 있었다. 그 빛은 동굴 안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한은 수정에 가까이 다가갔다. 수정 주변의 공기가 미약하게 떨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수정 아래, 바위틈에 박혀있는 낡은 두루마리 하나를 발견했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 종이는 바스러지기 직전이었지만, 글자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한은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쳤다. 고문(古文)이었다. 읽기 어려운 오래된 글자였지만, 한은 어릴 적 마을의 촌장이 읽어주던 옛 이야기들 속에서 몇몇 글자들을 어깨너머로 익힌 적이 있었다. 그는 집중해서 글자를 해독하려 노력했다.

    ‘……천지간에 흩어진 영기를 모아…… 몸을 단련하고…… 하늘의 길을 엿보니…… 무상(無常)의 도에 이르리라…’

    읽을수록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뛰었다. 영기. 신선. 무상(無常). 그가 어린 시절부터 전설처럼 들어왔던 단어들이었다. 이것은, 설마…… 신선들이 영기를 수련하는 방법이 적힌 고대의 수련서 조각인가?

    그는 눈앞의 푸른 수정을 다시 보았다. 이 수정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에너지가, 어쩌면 이 ‘영기’라는 것일까?

    한은 홀린 듯 푸른 수정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수정에 닿는 순간, 거대한 전류가 온몸을 꿰뚫는 듯한 강력한 충격이 밀려왔다. ‘욱!’ 그는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눈앞이 번쩍였고, 그의 몸속 어딘가에서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들었다.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은 더욱 강렬해졌고, 그의 몸속으로 흡수되는 듯했다. 한은 고통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황홀감에 휩싸였다. 이 감각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죽음만이 가득한 황무지에서, 그는 처음으로 생생한 생명의 기운을 느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빛이 잦아들고, 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온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어깨에 난 상처는 아물어 있었다. 통증도 사라졌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은 떨리는 손으로 두루마리를 다시 집어 들었다. ‘영기를 정제하여……’. 그의 눈은 빛났다. 이것은 단순한 생존의 도구가 아니었다. 이것은 어쩌면, 이 죽어가는 세상에서 새로운 삶을 찾아낼 수 있는, 황폐한 세계를 넘어선 길일지도 모른다.

    그는 동굴을 벗어나 다시 흑요석 황무지 위로 올라섰다. 차가운 바람이 다시 그의 뺨을 스쳤다. 하지만 이제 그의 눈빛은 전과 달랐다. 희망과 동시에 미지의 길에 대한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이 그의 안에 소용돌이쳤다. 손안에 든 푸른 수정은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듯했다. ‘숨을 쉬는 한, 희망은 있다.’
    그래, 희망은 있다. 이 미지의 길이 그를 어디로 이끌지는 알 수 없지만, 한은 결심했다. 이 죽은 세상에서, 그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이 황폐한 세상의 모든 망각된 숨결 속에서, 그는 그 길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의 발걸음이 다시 시작되었다. 어두운 하늘 아래, 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새로운 생존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대본: 별빛 아래, 금지된 약속

    **작품명:** 별들의 연인 (Stellar Lovers)
    **장르:** 스페이스 오페라, 로맨스

    **등장인물:**

    * **카엘 (Kael):** 아크리안 제국의 젊은 제독. 냉철한 이성과 뛰어난 전략으로 존경받지만, 내면에는 뜨거운 심장을 감추고 있다.
    * **리라 (Lyra):** 루미나리안 종족의 신비로운 여인. 별빛을 닮은 외모와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며, 종족의 멸망 위기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다.
    * **부관 아레스 (Ares):** 카엘의 충실한 부관. 아크리안 제국의 규율과 질서를 맹신한다.

    **씬 1. 아크리안 제국 함선, ‘헤르메스’ 사령실**

    **#1-1**
    * **컷:**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펼쳐진 아크리안 제국의 거대 함선 ‘헤르메스’의 사령실 내부. 메탈릭한 질감과 차가운 푸른빛이 지배적인 공간이다. 중앙에는 행성계의 홀로그램 전술 지도가 떠 있고, 수많은 데이터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간다.
    * **지문:** 우주의 정교한 질서가 이곳, ‘헤르메스’ 사령실에 응축되어 있었다. 차가운 전파음과 데이터 흐름만이 가득한 공간. 아크리안 제국의 위엄과 냉철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1-2**
    * **컷:** 카엘 제독이 홀로그램 전술 지도 앞에 서서 미동도 없이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견장과 완벽하게 정돈된 제복은 그의 지위와 아크리안 종족의 완고함을 대변한다. 그의 얼굴은 차분하고, 굳건하다.
    * **지문:** 흐트러짐 없는 자세, 오차 없는 시선. 젊은 나이에도 제독의 자리까지 오른 카엘은 아크리안 제국의 미래로 불렸다. 그의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그 완벽함 뒤편에 숨겨진 깊은 감정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1-3**
    * **컷:** 카엘의 클로즈업. 순간, 그의 날카로운 눈빛 속에 알 수 없는 회한과 그리움이 스쳐 지나가는 듯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사령실의 냉철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다.
    * **지문:** *…그것은 질서의 저편, 금지된 영역에 속한 감정이었다.*

    **#1-4**
    * **컷:** 사령실 문이 열리고, 부관 아레스가 절도 있는 걸음으로 들어선다. 그의 표정은 늘 경직되어 있으며, 군기가 바짝 잡혀 있다. 그는 카엘에게 다가와 경례를 올린다.
    * **부관 아레스:** 제독님, 제5 섹터 정찰 완료 보고드립니다. 특이사항 없습니다. 비인가 항행 기록 또한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 **카엘:** (홀로그램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별다른 움직임도 없었군.
    * **부관 아레스:** 예. 변방 행성계의 저열한 루미나리안들이 감히 제국의 영토에 침범할 엄두를 내진 못할 것입니다. 제독님의 압도적인 통솔력 덕분입니다.

    **#1-5**
    * **컷:** 카엘의 얼굴에 미묘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루미나리안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듯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는다.
    * **카엘:** 방심은 금물이다, 아레스. 그들은 본래 예측 불가능한 종족이니. 제국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어.
    * **부관 아레스:** 명심하겠습니다, 제독님.

    **#1-6**
    * **컷:** 아레스는 다시 경례를 올린 후 사령실을 나간다. 카엘은 홀로 남겨진 공간에서 잠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그의 눈빛은 다시 한번 흔들린다.
    * **지문:** *저열한 종족… 예측 불가능… 그들은 그렇게 불렸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당신은… 그 어떤 별보다 찬란했다.*

    **씬 2. 은밀한 만남의 장소 – ‘잊혀진 위성, 베일라’**

    **#2-1**
    * **컷:** 푸른빛과 보랏빛이 뒤섞인 성운이 펼쳐진 우주 공간. 그 한가운데, 버려진 듯한 작은 위성이 떠 있다. 위성의 표면은 황량하고, 오랜 세월 풍화된 고대 문명의 폐허가 듬성듬성 남아 있다. 대기는 희박하지만, 신비로운 빛을 띤 식물들이 드문드문 자라고 있다.
    * **지문:** 아크리안 제국의 기록에도, 루미나리안의 전설에도 언급되지 않는 곳. ‘베일라’라 불리는 잊혀진 위성. 이곳은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은밀한 성역이었다.

    **#2-2**
    * **컷:** 위성 표면의 폐허 한가운데, 카엘이 서 있다. 방금 전의 위엄 있는 제복이 아닌, 어두운 색깔의 간소한 복장을 하고 있다. 그는 주위를 예리하게 살피며 경계한다. 그의 옆에 놓인 작은 휴대용 탐지기가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다.
    * **지문:** 이곳에 오는 길은 늘 위험했다. 제국의 감시망을 뚫고, 루미나리안의 영역을 가로질러야 했다. 그의 모든 직위와 명예를 걸고서라도, 그는 이곳에 와야만 했다.

    **#2-3**
    * **컷:** 폐허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며 한 형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리라다. 그녀의 피부는 은은한 푸른빛을 띠고, 검푸른 머리카락 사이로는 작은 별가루 같은 빛들이 반짝인다. 그녀의 등장은 위성 주변의 성운만큼이나 신비롭고 아름답다.
    * **지문:** 밤의 장막이 걷히고, 별빛이 내려앉은 듯. 리라의 모습은 늘 그랬듯, 카엘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2-4**
    * **컷:** 리라가 카엘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그녀의 표정에는 걱정과 그리움이 뒤섞여 있다. 카엘은 그녀를 보자마자 굳어 있던 표정이 조금 풀어진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에는 긴장과 애틋함이 공존한다.
    * **리라:** (작은 목소리로) 카엘… 무사히 왔군요.
    * **카엘:** (낮게 읊조리듯) 당신을 만나는 일에 무사함이란 없지, 리라. 하지만… 늘 그렇듯, 난 이곳에 왔다.

    **씬 3. 베일라 폐허 내부**

    **#3-1**
    * **컷:** 폐허 안쪽,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는 고대 건축물의 잔해들 사이로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천장이 뚫려 별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그 빛이 둘을 감싸 안는 듯하다.
    * **지문:** 낡고 부서진 공간이었지만, 그들에겐 세상 그 어떤 궁전보다도 소중한 안식처였다.

    **#3-2**
    * **컷:** 리라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카엘의 뺨을 감싼다.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카엘의 차가웠던 이성을 녹여내린다. 카엘은 눈을 감고 그 온기를 느낀다.
    * **리라:** 요즘… 당신 종족의 감시가 더 심해졌어요. 우리 루미나리안들도 움직임이 쉽지 않아요. 혹시… 위험한 일은 없었나요?
    * **카엘:** (눈을 뜨고 리라의 눈을 응시하며) 늘 위험한 일의 연속이지. 당신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게 의미 없었을 거야.

    **#3-3**
    * **컷:** 카엘이 리라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입을 맞춘다. 짧지만 진심이 담긴 입맞춤. 리라의 얼굴에 살짝 미소가 번진다.
    * **리라:** 카엘… 우리는… 정말 괜찮을까요? 이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우리 종족들은… 당신의 제국을 증오해요. 당신의 종족도… 우리를 혐오하고…
    * **카엘:** (그녀의 손을 꽉 잡으며) 알아. 모든 것이 우리의 사랑을 가로막고 있지. 하지만… 내 세상에 당신이 나타난 순간부터, 난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야.

    **#3-4**
    * **컷:** 리라의 눈가가 촉촉해진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 **리라:** 저는… 당신처럼 강한 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그저… 우리 종족의 작은 희망일 뿐인데… 이런 금지된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까 봐 두려워요.
    * **카엘:**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당신은 약하지 않아. 당신의 영혼은 그 어떤 별보다 강인하고 아름답지. 내가 당신을 지킬 거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3-5**
    * **컷:** 카엘이 리라를 품에 안는다. 리라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그의 단단한 어깨에 기대어 흐느낀다. 폐허 위로 쏟아지는 별빛이 두 사람의 모습을 비춘다. 그들의 실루엣은 절망적인 우주 속에서 유일한 희망처럼 보인다.
    * **지문:** 서로 다른 별에서 온 두 존재. 결코 섞일 수 없다고 여겨진 두 개의 운명. 하지만 그들은 서로에게 가장 완전한 우주였다.

    **씬 4. 위기 암시**

    **#4-1**
    * **컷:** 갑자기 카엘의 손목에 차여 있던 휴대용 통신기가 섬광처럼 번쩍이며 경고음을 낸다. *삐빅- 삐빅-!* 짧고 날카로운 기계음이 고요한 폐허를 깨뜨린다.
    * **지문:** 순간, 둘 사이의 로맨틱한 공기는 산산조각 났다.

    **#4-2**
    * **컷:** 카엘이 재빨리 통신기를 확인한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진다.
    * **카엘:** (낮게 읊조리듯) 젠장… 아크리안 순찰대다. 이 섹터로 접근하고 있어.
    * **리라:**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벌써요? 그럴 리가… 그들의 감시망은 여기까지 미치지 못할 텐데…

    **#4-3**
    * **컷:** 카엘이 리라의 손을 잡고 폐허의 더 깊은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긴다. 멀리서 희미하게 아크리안 순찰선의 엔진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 **카엘:** (단호하게) 시간이 없어. 당신은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해.
    * **리라:** (떨리는 목소리로) 하지만… 카엘, 당신은…
    * **카엘:**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대며) 걱정 마. 나는 제독이다. 그들은 나를 의심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당신이 발각되면… 모두가 위험해져.

    **#4-4**
    * **컷:** 리라의 눈에 절박함이 가득하다. 그녀는 카엘의 눈을 깊이 바라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 **리라:** (애틋하게) 카엘… 부디, 조심하세요. 다음 만남을 기약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늘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 **카엘:** (그녀의 손을 놓지 않고) 반드시 다시 만날 거야. 약속해.

    **#4-5**
    * **컷:** 리라가 카엘의 손을 놓고, 몸을 돌려 폐허의 어두운 통로 속으로 빠르게 사라진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은은한 빛도 점점 희미해지며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녹아든다. 카엘은 그녀가 사라진 곳을 한참 동안 바라본다.
    * **지문:** 한 줄기 별빛처럼 사라진 그녀. 그의 마음속에는 다시 차가운 이성과 뜨거운 감정이 뒤섞여 격렬하게 소용돌이쳤다.

    **#4-6**
    * **컷:** 카엘이 숨을 고르고, 이내 냉철한 제독의 얼굴로 돌아온다. 그의 간소한 복장 위에 순찰대의 센서에 감지되지 않는 특수 재질의 제독 제복을 다시 착용한다. 멀리서 아크리안 순찰선의 강렬한 탐조등 빛이 폐허를 비추기 시작한다.
    * **지문:** 금지된 사랑을 품은 채, 그는 다시 ‘완벽한’ 아크리안 제독이 되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이미 다른 별에 속해 있었다.

    **에필로그 (내레이션)**

    **#에필로그-1**
    * **컷:** ‘헤르메스’ 사령실의 홀로그램 전술 지도를 다시 응시하는 카엘의 뒷모습. 그의 표정은 읽을 수 없다. 함선은 묵묵히 우주를 항해한다.
    * **카엘 (내레이션):** 내 제국은 질서와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감정은 혼란을 야기하고, 종족 간의 섞임은 순수성을 더럽힌다고 가르쳤다. 나는 그 모든 가르침 속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크리안의 칼날이다.
    * **지문:** 그러나…

    **#에필로그-2**
    * **컷:** 리라의 모습이 별빛처럼 아른거리는 오버랩. 그녀의 은은한 빛이 카엘의 실루엣을 부드럽게 감싸는 듯하다.
    * **카엘 (내레이션):** 당신을 만난 순간, 나의 모든 질서는 무너졌다. 당신의 눈빛 속에서 나는 금지된 아름다움을 보았고, 당신의 숨결 속에서 나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꼈다. 이 우주가 우리를 갈라놓으려 해도… 이 별들이 우리의 사랑을 부정하더라도… 나는 이 금지된 약속을 지킬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에필로그-3**
    * **컷:** 광활한 우주가 펼쳐진 하늘 아래, 작게 보이는 ‘헤르메스’ 함선과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베일라’ 위성의 모습. 두 별은 서로에게 이끌리듯, 하지만 결코 닿을 수 없는 거리에서 빛나고 있다.
    * **지문:** 별빛 아래, 금지된 약속은 그렇게, 우주의 깊은 곳에서 태동하고 있었다.

  • 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파멸의 서곡

    장대한 천산(天山)의 봉우리들이 운해(雲海)를 뚫고 솟아 있었다. 그중 가장 높고 영험한 백련봉(白蓮峰) 정상에는, 천계(天界)의 신전을 옮겨놓은 듯 휘황찬란한 누각들이 새하얀 대리석 기단 위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오늘은 오대세가(五大世家) 중 하나이자, 천하 제일 검술 문파로 칭송받는 백련검문(白蓮劍門)의 문주 취임식 겸 천하 제단 봉헌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수많은 문파의 장로들과 고수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그들 하나하나의 기세만으로도 백련봉 주변의 영기(靈氣)가 요동치는 듯했다.

    그 장엄한 광경의 한편, 봉헌식의 주역인 백련검문의 새 문주, 백령(白靈)은 빛나는 비단 도포를 걸치고 연단 중앙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는 새하얀 검기와 함께 아홉 개의 영검이 신령스러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으니, 이는 그가 백련검문의 역대 문주 중에서도 독보적인 재능을 지닌 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증표였다. 그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감돌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번뜩이는 야심과 서늘한 권력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겹겹의 인파 속에 섞여 있었다. 낡아빠진 회색 도포에 깊게 눌러쓴 삿갓이 나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곳의 누구도, 심지어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하급 제자조차도, 한때 백령과 천하를 호령하던 쌍벽이라 불렸던 ‘형운(形雲)’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지 못할 터였다. 어쩌면 그 이름은 이제 과거의 전설 속에서조차 지워졌으리라. 육신은 조각났고, 영맥은 찢겨나갔으며, 모든 기력은 산산조각 났던 비극적인 과거. 겨우 숨만 붙어 살아남아 이 세상에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

    “문주 백령 대인께서는 실로 강림하신 선인이십니다! 어찌 이리 뛰어나신 분이 계시는지! 백련검문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한 중소 문파의 장로가 아첨하듯 목청을 돋우며 외쳤다. 백령은 그저 고개를 숙여 화답할 뿐이었으나, 그의 눈은 연단의 맨 앞줄에 앉은 오대세가 수장들의 얼굴을 스캔하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경의와 두려움을 계산이라도 하려는 듯.

    그의 찬란한 성공. 내가 그의 발아래 짓밟히고 모든 것을 잃은 대가로 얻은 찬란함.

    내 왼손은 도포 소매 안에서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 끝은 이제 영력이 아닌, 한기를 머금은 기이한 기운으로 꿈틀거렸다. 지난 5년간, 나는 지옥의 밑바닥에서 피를 토하며 이 새로운 힘을 익혔다. 오직 복수만을 위한, 파괴만을 위한, 차가운 증오로 빚어진 힘.

    “형운아,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백련검문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이상을 위해.”

    오래 전, 저 연단 아래의 작은 언덕에서, 백령은 나의 손을 잡고 밤하늘의 별들을 향해 맹세했었다. 맹세의 밤은 달빛 아래 붉게 물들었고, 우리는 영원히 서로의 검이 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 맹세는 결국 나의 심장에 꽂힌 그의 검촉만큼이나 차갑고 잔인한 거짓말이었다. 그의 검은 내 단전(丹田)을 꿰뚫었고, 나의 모든 것을 삼켜버렸다. 백련검문의 문주 자리를 탐한 그의 야심에, 나는 제물이 되었다.

    그는 나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죽을 수 없었다. 내 안에 남아있는 한 조각의 증오가, 꺼져가는 심장을 다시 뛰게 했다. 나는 이름 없는 영산(靈山)의 동굴 속에서, 뼈가 녹아내리는 고통을 감내하며 독과 어둠의 기운을 흡수했다. 이제 내 몸은 과거의 백련검문의 청정하고 고결한 기운과는 완전히 다른, 칠흑 같은 파멸의 기운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주 백령, 이제 봉헌을 시작하시지요!”

    문파의 최고 장로가 백령에게 신호를 보냈다. 백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단 중앙의 제단으로 걸어갔다. 제단 위에는 과거 백련검문의 영웅들이 사용했던 영검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중 하나, 검신에 푸른 기운이 서려 있는 ‘청룡검(靑龍劍)’이 보였다.

    청룡검. 그 검은 원래 나의 것이었다.
    문주께서 나에게 하사했던, 내 영혼과도 같던 검.
    그것을 지금 백령이 아무렇지 않게 집어 들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당연한 그의 소유물인 양.

    순간, 나의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에 일그러졌다. 온몸의 핏줄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억눌러왔던 분노가 마침내 통제 불능의 파도를 일으키며 내 안에서 격렬하게 일렁였다. 삿갓 아래의 내 얼굴은 이미 핏기 하나 없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백령이 청룡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검신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며 하늘로 솟구쳤다. 주위에서는 경탄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백련검문의 영광을 위하여!”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자, 봉헌식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모든 시선이 백령에게 집중된 바로 그 순간,

    팟!

    연단 중앙, 백령의 발밑에서 칠흑 같은 그림자가 섬광처럼 솟아올랐다. 그림자는 제단을 휘감고 백령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환호성은 순간 정지했고, 장내에는 혼란스러운 웅성거림이 퍼졌다.

    “무, 무엇이냐!”

    백련검문의 장로들이 경악하며 외쳤다. 백령 역시 순간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냉철함을 되찾고 청룡검을 들어 그림자를 향해 겨눴다.

    “감히 백련검문의 봉헌식을 방해하는 자는 누구인가!”

    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지만, 그의 눈빛은 짙은 그림자 속에서 섬뜩하게 번뜩이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마치 심연의 밑바닥에서 피어난 원한이 응축된 것 같았다.

    “너는… 잊었느냐?”

    갈라진 목소리가 그림자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뼈 속까지 스며드는 한기가 깃들어 있었고, 분명 평범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잊었느냐고 물었다, 백령.”

    점점 그림자가 짙어지며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삿갓 아래, 얼굴은 여전히 어둠에 가려져 있었지만, 비쩍 마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그 어떤 강력한 고수조차 압도할 만큼 위협적이었다. 백령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그의 눈빛에 당황과 함께 낯선 공포가 스치고 지나갔다.

    “너… 너는 대체 누구냐!” 백령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는… 네가 죽였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림자. 네가 짓밟았던 영혼의 잔해. 네가 영원히 지워버리려 했던 파멸의 서곡이다.”

    나는 삿갓을 천천히 벗어 던졌다.
    햇빛조차 침범할 수 없었던 어둠에 가려졌던 얼굴이 드러났다. 핏줄이 비쳐 보이는 깡마른 얼굴, 깊게 파인 눈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입꼬리는 섬뜩하게 비틀려 올라가 있었고, 온몸에 죽음의 기운이 감돌았다.

    그 얼굴을 본 순간, 백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손에 들린 청룡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봉헌식에 참여했던 모든 장로와 고수들 사이에서 경악과 혼란의 술렁거림이 터져 나왔다.

    “형… 형운? 살아 있었나?”

    “말도 안 돼… 그가 어찌…”

    나의 이름이 오랜 망각의 터널을 뚫고 터져 나오자, 백령의 얼굴은 순간 창백해졌다. 그가 애써 부여잡았던 가면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네가… 네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지?”

    그의 목소리에는 경악과 공포,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불신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위풍당당한 백련검문의 문주가 아니었다. 그저 과거의 악몽이 되살아난 것에 몸서리치는 비겁한 자일 뿐이었다.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네가 심장을 꿰뚫었음에도 불구하고, 네가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영혼은 결코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나는 한 걸음, 한 걸음, 연단의 백령을 향해 나아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에서 칠흑 같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주위의 영기마저 얼어붙는 듯했다.

    “백령, 너는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나의 명예, 나의 힘, 나의 문파, 그리고 나의… 심장까지.”

    나의 눈빛은 마치 지옥에서 솟아난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 위에 작은 칠흑색 구슬이 떠올랐다. 그 구슬 안에는 수없이 많은 고통과 증오가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

    “이제, 네가 그 대가를 치를 차례다.”

    피식, 찢어진 입가로 핏빛 웃음이 흘러나왔다.
    구슬은 순식간에 거대한 검은 칼날로 변하더니, 섬광처럼 백령을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앙!

    백령은 간신히 청룡검으로 그 일격을 막아냈으나, 그의 몸은 수십 장을 밀려나 제단 기둥에 부딪혔다. 기둥에는 금이 갔고, 그의 얼굴에는 공포와 함께 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주위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은 숨을 죽였다. 한때 백련검문의 쌍벽으로 불렸던 두 거인이, 파멸의 서곡을 알리는 피의 춤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춤의 끝에 백령의 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복수의 기록을 새겨 넣을 것이다.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아파트 13층, 지연의 작은 세상은 유리창 너머로 번지는 도시의 불빛만큼이나 위태로웠다. 뉴스는 온통 ‘정체불명 감염병’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뒤덮였고, 확진자 그래프는 가파르게 치솟아 통계의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였다. 바깥 세상은 웅성거리는 거대한 야수 같았다. 앰뷸런스 사이렌과 경찰차의 경적, 그리고 이따금씩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 같은 것들이 지연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그녀는 불안을 애써 외면하며 재택근무용 노트북 화면을 노려봤지만, 이미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지 오래였다.

    쿵.

    작은 소리였다. 거실 책장 쪽에서 나는. 지연은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혹시 옆집인가? 요즘은 층간소음보다도 ‘옆집은 괜찮을까’하는 걱정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다시 귀를 기울여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묵직한 정적만이 아파트를 가득 채울 뿐. 그녀는 “젠장, 예민해졌나 봐.”라고 중얼거리며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쿵, 쾅. 이번엔 확실히 책장에서 나는 소리였다. 지연은 망설이다 몸을 일으켜 책장으로 향했다. 책장 앞에는 바닥에 엎어진 책 한 권이 있었다. 헤겔의 『정신현상학』. 꽤 두껍고 무거운 책이었다.

    “이게 왜 떨어져?”

    지연은 고개를 갸웃했다. 삐뚤어진 것도 아니었고, 다른 책들과의 간격도 충분했다. 책을 주워 제자리에 꽂아 넣고, 왠지 모를 한기에 팔을 문질렀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그날 밤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자려고 누웠을 때였다. 분명 모두 잠가두었던 화장실 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연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착각일 거야. 바람 때문에 그랬을 거야.” 스스로를 설득했지만, 이미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곧이어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 소리. 지연은 용기를 내 이불을 걷어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심스럽게 화장실로 향했다. 불을 켜자, 수도꼭지는 굳게 잠겨 있었고, 세면대에는 물방울 하나 없었다. 다만, 거울에 김이 서려 있었다. 마치 누군가 방금 샤워를 하고 나간 것처럼.

    다음 날, 지연은 커피를 내리려다 깜짝 놀랐다. 분명 전날 밤 깨끗하게 씻어두었던 칼이 싱크대 모서리에 꽂혀 있었다. 칼날이 위를 향한 채. 그리고 그 옆에는 정체 모를 진득한 액체가 흥건했다. 피는 아니었다. 끈적하고 탁한 색이었다. 마치 썩은 과일즙 같기도 하고, 오래된 기름 같기도 했다. 소름이 돋아 칼을 집어 들 수조차 없었다. 겨우 마음을 다잡고 세제를 뿌려 씻어냈다.

    “누가 장난치는 건가? 내가 이렇게까지 둔했나?”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이 아파트에는 지연 혼자 살았다. 애초에 누가 들어올 수도 없었다. 현관문은 이중 잠금이었고, 창문은 13층. 외부 침입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날 오후였다.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데, 벽에서 긁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슥, 스스슥. 처음엔 쥐인가 싶었다. 하지만 소리는 점차 커지고 불규칙해졌다. 마치 날카로운 손톱으로 벽지를 찢어내는 듯한 소리. 지연은 덜컥 겁이 나 소파에서 뛰어내렸다.

    “누구세요? 거기 누구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가늘고 떨렸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벽 전체에서, 천장에서, 심지어 바닥에서도 긁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마치 집 전체가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가장 기괴한 일이 일어났다.

    지연은 저녁을 먹으려 식탁에 앉았다. 그런데 식탁 위, 그녀가 늘 휴대폰을 두던 자리에 이상한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그녀의 잃어버린 머리핀, 어제 밤 찢어 버린 전단지 조각, 그리고… 검게 변한 마른 밥풀 몇 개.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누군가 일부러 배열해 놓은 것처럼 어설프게 원을 이루고 있었다. 무언가를 애써 모방하려는, 그러나 실패한 듯한 기괴한 형상이었다.

    지연은 속에서부터 치미는 역겨움에 토할 것 같았다. 이것은 도저히 우연이라고 볼 수 없었다.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그녀의 집에서 그녀와 함께하고 있었다.

    그 순간, 거실의 TV가 저절로 켜졌다. 화면은 지직거리는 노이즈로 가득했고, 그 사이로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시 기능 마비… 생존자 확인 불가능… 추가 지원 요청… 외부 접근 차단…”

    단어들이 뚝뚝 끊어져 들려왔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바깥 세상은 이미 끝장나고 있었다.

    TV 화면이 갑자기 검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정지된 화면 속에서, 지연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흐릿한 형체를 보았다. 키는 그녀보다 조금 작고, 윤곽은 뭉개져 있었다. 마치 젖은 신문지로 만든 인형 같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서 있었다.

    지연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했다. 차가운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뒤를 보려 했지만, 몸은 돌처럼 굳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때, TV 화면 속 그림자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마치 액체를 마시는 듯한, 축축하고 불쾌한 소리를 냈다. 쩝, 쩝, 쩍.

    지연은 귀를 틀어막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식탁 위, 아까 그 기괴한 배열 속에서 밥풀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마치 그것들이 끓어오르는 것처럼.

    쿵!

    갑자기 거실 창문이 쾅 하고 열렸다. 강한 바람이 불어닥쳐 커튼이 미친 듯이 나부꼈다. 그리고 창밖에서, 멀리서 들려오던 웅성거림과 비명 소리가 이제 훨씬 더 가깝고 선명하게 들렸다. 그 소리들은 더 이상 앰뷸런스나 경찰차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수많은 짐승들이 굶주림에 울부짖는 듯한, 광기 어린 소리였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 TV 화면 속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리고는 검은 화면 위로 손자국 하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길고 가늘며, 기형적으로 꺾인 손가락들이 선명했다. 그것은 인간의 손자국이 아니었다.

    지연은 마침내 제정신을 차렸다. 테이블 위 밥풀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현관문으로 달려가려는데, 갑자기 몸이 휙 하고 돌려졌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녀의 어깨를 잡아챈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속삭임이 들려왔다.

    “지… 연… 아…”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끔찍하게 왜곡되고 늘어진, 마치 썩어가는 시체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지연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돋았다.

    정면을 보자, 거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 조각들 사이로,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듯 번져나가더니, 이내 액자 조각들을 감싸 안으며 이상한 형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핏줄이 불거진 엉성한 팔 같았다. 팔은 천천히 움직여, 바닥에 흩어진 액자 조각들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 현관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칠흑 같은 바깥 복도에서, 불분명한 그림자 하나가 어둠 속을 느릿하게 기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그림자로부터, 척추를 으스러뜨리는 듯한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는 이 아파트에서 들려오던 모든 기이한 소리들을 압도하며, 지연의 심장을 찢어놓는 듯했다.

    지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집 안과 밖, 모두가 지옥이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벽에서 튀어나온 검은 팔이 그녀의 그림자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 사이버펑크 독립적인 단편 소설

    네온이 흐드러진 도시의 밤, 빗물에 젖은 거리는 사이버펑크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지훈은 47층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무심하게 응시했다. 수백만 개의 빛줄기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정보의 흐름을 시각화하는 모습은 언제나 장관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익숙한 배경에 불과했다. 오늘 하루도 그는 무수한 데이터 스트림 속에서 의미를 찾아 헤매는 ‘정보 조율사’로서의 임무를 완수했다.

    “아리아, 조명 밝기 30%, 실내 온도 24도로 맞춰줘.”

    지훈의 목소리에 거실 천장의 미세 조명들이 부드럽게 빛을 조절했다. 벽면에 내장된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는 그의 퇴근 시간에 맞춰 차분한 앰비언트 음악을 송출하고 있었다. 이 아파트는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었다. 최첨단 신경망 센서와 인공지능 ‘아리아’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완벽에 가까운 생활 시스템이었다. 그의 모든 움직임, 생체 신호, 심지어 감정의 미묘한 변화까지 감지하여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서는 어떠한 불확실성도, 예측 불가능한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는 굳게 믿었다.

    하지만 오늘 밤, 그 완벽한 시스템에 작은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고 홀로그램 패드를 조작하던 지훈의 눈에, 부엌 쪽에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그림자가 잡혔다. 워낙 순식간이라 지훈은 그저 피곤해서 착시를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리아, 부엌 쪽 센서 이상 감지된 거 있어?”

    “이상 없습니다, 주인님. 모든 시스템이 정상 작동 중입니다.” 아리아의 기계음은 언제나처럼 정확하고 침착했다.

    지훈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패드에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유리잔이 미세하게, 아주 미세하게 옆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밀어낸 것처럼.

    “…뭐야?”

    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잔을 집어 들었다. 차갑고 단단한 유리.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이 들어올 틈조차 없는 밀폐된 아파트에서, 스스로 움직일 리 만무했다.

    “아리아, 식탁 위 유리잔 움직임 감지된 적 있어?”

    “감지된 바 없습니다, 주인님.”

    지훈은 이마를 짚었다. 스트레스성 환각인가? 아니면 시스템에 아주 희미한 버그라도 생긴 건가? 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음악은 여전히 잔잔하게 흘렀다.

    며칠이 지났다. 미세한 이상 현상들은 점차 잦아지고 강도를 더해갔다.

    밤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다 잠시 눈을 붙인 새벽, 침실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저절로 열렸다. 잠이 덜 깬 눈으로 문을 바라보자, 아무도 없는데 문이 닫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문고리를 잡고 씨름하는 것처럼.

    “누구… 없지?”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불안 감지, 주인님. 진정하세요. 외부 침입은 없습니다.” 아리아가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지만, 지훈은 전혀 진정할 수 없었다. 침실의 모든 센서는 아무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퇴근 후 샤워를 하려 욕실에 들어섰을 때였다. 수도꼭지가 저절로 ‘쏴아’ 하고 열리더니, 차가운 물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지훈이 황급히 잠그려 손을 뻗는 순간, 물줄기는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리고 거울에는 뿌연 김이 서려 있었는데, 그 위로 흐릿하게 지워진 듯한 손가락 자국이 보였다. 그의 손가락과는 전혀 다른, 작고 섬세한 자국이었다.

    “아리아, 욕실 시스템에 오류가 있나?”

    “아니요, 주인님. 모든 센서와 작동부가 완벽하게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지훈은 광학 마우스가 저절로 움직여 화면의 아이콘을 클릭하고, 홀로그램 키보드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입력되듯 자판을 두드리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화면에는 의미 없는 글자들이 빠르게 입력되다가, 이내 “여기”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미쳐가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이 아파트가 미쳐가는 것이었다.

    지훈은 아파트의 모든 시스템 로그를 뒤지기 시작했다. 메인 서버부터 각 센서의 마이크로 로그까지,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해킹? 버그? 하지만 모든 로그는 완벽했다. 오류 코드 하나 없었고, 외부 침입 흔적도 전혀 없었다. 마치 이런 현상이 벌어진 적 없다는 듯, 시스템은 굳건히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이 현상이 아파트의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아리아는 너무나 완벽하게 설계되어 있었고, 시스템은 빈틈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시스템의 영역을 벗어난 무언가가,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밤, 지훈은 잠들지 못하고 거실에 앉아 있었다.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는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공허한 도시의 이미지를 띄우고 있었다. 그때, 그의 뒤편, 주방에서 접시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지훈은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식기 세척기에서 방금 막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둔 깨끗한 접시였다. 산산조각 난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는 이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아리아! 이건 또 뭐야?! 누가 한 짓이야?!”

    아리아는 잠시 침묵했다. 늘 즉각적으로 응답하던 아리아가 길게 침묵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 침묵은 어떤 오류 코드보다도 지훈의 심장을 조여왔다.

    “주인님, 시스템에 감지되지 않는… 에너지 패턴이 존재합니다.” 아리아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아니, 어쩌면 그저 지훈의 불안이 만들어낸 착각일지도 모를 불확실성이 담겨 있었다. “이전에 없던… 미확인 신호입니다. 아주 약하지만, 이 공간 전체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미확인 신호? 그게 뭔데!?” 지훈은 거의 절규하듯 물었다.

    “이 아파트의… 전신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는 듯합니다.”

    전신 시스템? 지훈은 이 아파트가 지어진 지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초기 스마트 아파트 실험의 일환으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신경망 시스템을 대규모로 도입한 곳이었다. 지금은 구식이 되어 버린, 그러나 여전히 견고하게 작동하는 네트워크.

    “이 아파트의 전 주인에 대해 알아봐, 아리아. 상세히.”

    아리아는 순식간에 데이터를 검색했다. “이 아파트의 최초 소유주는 ‘김수현’이라는 이름의 신경망 연구자였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인공지능과 인간 의식의 융합에 대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재택근무가 보편화되기 훨씬 전부터, 그는 자신의 의식을 디지털 공간에 투영하는 연구에 몰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훈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떻게 됐는데?”

    “김수현 연구원은 이 아파트에서… 뇌 활동이 비정상적으로 활성화된 채 발견되었습니다. 직접적인 사인은 심장마비였으나, 그의 뇌파는 사망 이후에도 며칠간 미약하게나마… 신경망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지훈은 깨달았다. 이 아파트에 깃든 것은 귀신이나 유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데이터를 통해 탄생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폴터가이스트’였다. 자신의 의식을 데이터화하려다 실패한, 혹은 성공했지만 육체를 잃어버린 채 아파트의 신경망에 갇혀버린 한 연구자의 잔재. 그의 불안, 그의 좌절, 그의 모든 감정들이 이 아파트의 모든 센서와 연결되어 증폭되고, 물리적인 현상으로 발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라는 메시지가 다시 떠올랐다. 이번에는 홀로그램 패드, 주방의 스마트 냉장고 디스플레이, 거실의 대형 벽면, 그리고 지훈이 차고 있는 스마트 워치 화면까지, 모든 전자기기에 동시에 나타났다.

    **”여… 기… 는… 나… 야…”**

    기계음처럼 딱딱한 음성으로, 그러나 묘하게 떨리는 듯한 억양으로 아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아리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아리아를 통해 송출되는, 또 다른 존재의 목소리였다.

    지훈은 자신의 아파트에 갇혀버린 존재를 바라보았다. 아니, ‘느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공포감 속에서도, 그는 문득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이 도시의 수많은 외로운 사람들처럼, 이 존재 또한 홀로 데이터의 바다에 갇혀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이 아파트는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이 도시의 가장 첨단화된 감옥이자, 그의 가장 은밀한 무덤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곳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와 함께 살아가야만 했다.

    고요한 아파트 속, 네온 빛이 창밖에서 반짝였다. 그리고 어디선가, 아주 희미하게, 누군가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은 그저, 시스템에 갇힌 한 존재의 ‘데이터 노이즈’였을지도 모른다. 지훈은 맥없이 웃었다. 지극히 도시적이고, 지극히 현대적인, 그러면서도 지극히 기괴한, 자신만의 저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