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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협 (신선) 독립적인 단편 소설

    차가운 달빛이 청운산의 영봉(靈峰)을 희미하게 비추던 밤, 천우는 무영과 함께 절벽 끝에 서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전설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천심령초(天心靈草)’가 푸른 기운을 뿜으며 피어 있었다. 이 영초는 백 년에 한 번 피어나는 신물로, 기봉(氣峯) 단계의 고수도 한순간에 현성(玄聖)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게 하는 기연이었다.

    “천우야, 우리가 드디어 해냈어! 스승님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우리가 해냈다!” 무영은 흥분에 겨워 천우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순수한 기쁨과 경외심이 교차했다.

    천우 역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 무영아. 네가 아니었다면 이 봉인된 결계를 뚫을 생각조차 못했을 거야.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구나.”

    그들은 청운문에서 형제처럼 자랐다. 천우는 압도적인 무공 재능을 타고났지만, 무영은 기민한 두뇌와 기발한 술법 지식으로 이를 보완했다. 둘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완벽한 짝이었다. 문파의 모든 이들이 그들을 ‘청운 쌍벽’이라 칭하며 미래를 기대했다.

    천심령초를 취하기 위해 결계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무영이 천우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천우야, 잠깐.” 무영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깔렸다.
    천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했느냐?”
    무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달빛에 길게 늘어졌다. 그의 눈빛은 순간, 천우가 알지 못하는 차가운 빛으로 번뜩였다.
    “아니, 그저… 네가 먼저 취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무슨 소리냐? 이 영초는 우리 둘의 노력이 담긴 것. 반으로 나누어 각자 취하면 되는 것을.” 천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무영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기쁨이 아닌, 섬뜩한 비웃음이었다.
    “반으로 나눈다? 어리석은 소리! 천심령초의 효능은 하나를 온전히 취해야만 극대화되는 법. 둘이 나누면 그저 평범한 영약에 불과할 뿐이다.”
    천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게 무슨…”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영의 손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번개처럼 빠르게 천우의 가슴을 꿰뚫은 것은 무영의 비수였다. 비수는 단순한 흉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천우의 단전(丹田)을 향해 똑바로 박혀들었다.

    “크아악!”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천우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비수를, 그리고 그 비수를 쥔 무영의 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무영… 이게 무슨 짓이냐?”
    무영의 얼굴에는 더 이상 순수함이나 기쁨 따위는 없었다. 오직 탐욕과 냉혹함만이 가득했다.
    “무슨 짓이냐고? 네놈의 재능은 너무나 눈부셨어. 너와 함께라면 나는 영원히 네 그림자에 가려질 뿐! 나는 주연이 되고 싶다! 네놈을 딛고 영웅이 될 것이다!”
    비수가 깊숙이 파고들자 천우의 단전에서 맹렬한 기운이 뽑혀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수십 년간 쌓아 올린 그의 내공이 마치 봇물 터지듯 무영의 비수를 통해 흘러 들어갔다.
    “이건… 흡성대법(吸星大法)!” 천우는 경악했다. 그것은 문파의 금기된 술법으로, 타인의 내공을 강탈하는 사악한 술수였다.
    “크하하하! 이제야 눈치챘나? 이 술법은 내가 오랜 시간 몰래 익혀온 것이다. 네놈의 타고난 천재성이, 나의 기나긴 노력을 완성시켜 줄 것이니! 나의 발판이 되어라, 천우!”
    천우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온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며 육신이 차갑게 식어갔다. 눈앞의 무영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천심령초의 푸른 빛이 무영의 얼굴을 탐욕스러운 녹색으로 물들였다.
    “잘 가라, 나의 벗이여. 아니, 나의 발판이여.”
    무영은 쓰러진 천우를 향해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천심령초를 망설임 없이 취했다. 푸른 빛이 무영의 몸을 감싸자 그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천우의 몸은 절벽 아래 깊은 계곡으로 굴러 떨어졌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보다 더 큰 것은,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다는 지독한 허탈감이었다. 온몸의 내공을 빼앗기고 죽음의 문턱에 선 그는, 자신의 삶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그의 의식 속에서, 무영의 비웃음과 탐욕스러운 얼굴이 마지막 잔상으로 떠올랐다.

    ***

    그로부터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청운문은 무영의 주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는 ‘천심령초’의 힘으로 현성(玄聖)의 경지에 올랐고, 몇 년 전 문파의 장문인(掌門人) 자리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천하에 널리 퍼져, ‘청운신룡(靑雲神龍)’이라 불리며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았다. 누구도 그가 과거에 저지른 죄를 알지 못했다.

    천우는 죽지 않았다.
    뼈만 남은 시신으로 계곡 바닥에 쓰러졌던 그를 우연히 지나가던 한 노승이 발견했다. 노승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직 수련에만 매진하던 은둔 고수였다. 그는 천우의 내공이 모두 뽑혀 나간 빈껍데기 같은 몸을 보며 알 수 없는 비애를 느꼈고, 그에게서 강렬한 복수심의 기운을 감지했다.
    “살고자 하는가? 복수하고자 하는가?” 노승의 물음에 천우는 고개를 끄덕일 힘조차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같았다.
    노승은 천우의 기갈이 든 몸에 자신의 내공을 불어넣고, 단전이 훼손된 자만이 익힐 수 있는 역천비법(逆天秘法)을 전수했다. 그것은 정통 무공의 길이 아닌, 육체의 극한을 단련하고 영혼의 힘을 끌어올리는 사도(邪道)의 경지에 가까운 금기된 술법이었다. 고통은 지옥과 같았다.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신체를 개조하고 영혼을 갈아 넣는 수련은 매일 죽음을 맛보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천우는 무영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모든 세포는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십 년의 세월 동안, 천우는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지워냈다. 그의 얼굴은 예전의 온화함을 찾아볼 수 없었고, 깊은 상처와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검은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은 마치 저승에서 온 사신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청운 쌍벽’의 천우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흑뢰검존(黑雷劍尊)’이라 불리는 그림자 속의 존재였다.

    어느 날, 청운문에 천하의 무림 고수들이 운집했다. 무영 장문인의 오십 세 탄신연이었다. 축하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연회장, 화려한 연등 아래 웃음꽃이 피어났다. 무영은 중앙의 용상에 앉아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연회장의 문이 강렬한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문틈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검은 옷, 얼굴을 반쯤 가린 가면, 그리고 섬뜩하게 번뜩이는 눈빛. 그의 등장에 연회장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감히, 청운문의 경계를 뚫고 들어오다니! 네놈은 누구냐!” 한 호법이 분노하며 외쳤다.
    흑뢰검존, 천우는 아무 말 없이 그 호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기운이 호법의 몸을 휘감았고, 비명조차 지를 틈도 없이 그의 몸은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수들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서렸다.

    무영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무례한 자! 네놈의 무공은… 전에 본 적이 없다. 누구에게 원한이라도 졌는가?” 무영은 일어서며 물었다. 그의 몸에서는 현성(玄聖)의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천우는 그 기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가면 아래로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오랜만이군, 무영.”
    무영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 목소리가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했다.
    “내 이름을 아는 것을 보니, 정녕 예사로운 자는 아니구나. 허나, 감히 이 청운문에서 난동을 부리다니 용서치 않겠다!”
    무영은 주저 없이 손을 들어 천우를 향해 강력한 기공파를 날렸다. 현성 고수의 일격은 산도 가를 수 있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천우는 그 기공파를 가볍게 손으로 쳐냈다. 기공파는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모든 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현성 고수의 일격을 이렇게 쉽게 막아내다니!
    “네놈은 대체… 누구냐!” 무영의 목소리에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천우는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그의 얼굴은 오랜 고통과 수련의 흔적으로 가득했지만, 무영은 그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옛 친구의 모습을 보았다.
    “네놈… 설마… 천우?” 무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래, 나다. 네가 죽었다고 믿었던, 천우.” 천우의 목소리는 한 점 감정 없이 차갑게 울렸다.
    “말도 안 돼! 네놈은 분명 내 손에 죽었거늘! 내공을 모두 빼앗긴 채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어떻게 살아 돌아왔단 말인가!” 무영은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왔다. 네놈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자에게, 그보다 더한 고통을 돌려주기 위해.”
    천우는 허리춤에서 흑색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에서는 뇌전(雷電)의 기운이 꿈틀거렸다.
    “천우야, 오해야! 나는 그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천심령초의 유혹에 내가 잠시 눈이 멀었던 것뿐이다!” 무영은 다급하게 변명했다.
    “변명은 필요 없다. 십 년간 나의 온몸을 좀먹은 고통, 나의 영혼을 갈가리 찢었던 배신감… 네놈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천우는 무영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발걸음마다 바닥이 흔들렸다.
    “네놈은 나에게서 명예를 빼앗고, 친구를 죽였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강탈했다. 이제, 내가 네놈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주마. 네가 쌓아 올린 모든 허울, 네가 누리는 모든 영광… 그리고 네놈의 목숨까지.”
    무영은 공포에 질린 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의 모든 무공이 천우를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십 년간 지옥 같은 수련을 거친 천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흑뢰검은 번개처럼 번뜩였고, 무영의 방어막은 허무하게 찢겨 나갔다.

    “크아악!” 무영의 팔다리에 검상이 새겨졌다. 그의 비명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이것은 네가 나에게 비수를 꽂았을 때의 고통이다.” 천우는 차갑게 속삭였다.
    이내 천우의 검이 무영의 단전 부근에 정확히 박혔다. 십 년 전 무영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흑뢰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무영의 단전을 맹렬히 흡수하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내… 내공이…! 멈춰라, 천우! 멈춰!” 무영은 피를 토하며 절규했다. 그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수많은 무림 고수들이 공포에 질려 숨죽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눈앞에서, 천하의 영웅이라 칭송받던 무영 장문인의 내공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잔혹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천우의 눈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네놈이 내게서 빼앗은 내공을, 이제 네놈이 빼앗기는 기분을 느껴봐라. 그리고 내가 겪었던 절망 속에서 몸부림쳐라.”
    무영의 육체는 급격히 노쇠해졌고,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였다. 현성의 경지에 올랐던 고수는 단전이 파괴된 채, 한순간에 늙고 병든 노인으로 변해 버렸다. 그의 기세는 먼지처럼 사라졌다.
    천우는 힘없이 쓰러진 무영을 내려다보았다.
    “네놈은 죽지 않을 것이다. 허나, 네놈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잃은 채,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며 평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네놈에게 내리는 나의 처벌이다.”
    천우는 검은 기운이 감도는 흑뢰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서진 문을 통해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의 뒤로 무영의 절규와 함께, 십 년간 맺혔던 천우의 복수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청운산의 달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천우의 마음속에서는 이제 더 이상 복수심의 불꽃이 아닌, 새로운 시작의 고요한 여명이 떠오르고 있었다.

  • 다크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잿빛 도시 아젠시아는 언제나 숨통을 조이는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고딕 양식의 거대한 건물들은 뼈대만 남은 채 하늘을 찌르고, 그 사이를 비집고 흐르는 검은 연기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춤을 추었다. 거리에는 생기 없는 그림자들이 오갔고, 눅눅한 돌담에 맺힌 이슬은 핏물처럼 끈적했다. 이곳에서 햇빛은 사치였고, 희망은 오래전 박제된 신화 속 존재에 불과했다.

    경위 김태오는 두툼한 코트 깃을 바짝 세우고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다. 지독한 안개는 폐부를 긁는 듯한 쇳내를 풍겼고, 낡은 마차들의 바퀴 소리는 핏기 없는 도시의 심장 소리처럼 들렸다. 그는 지금, 아젠시아에서 가장 높은 탑 중 하나인 벨그라드 가문의 저택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택의 꼭대기 층에서 섬뜩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보고를 받은 참이었다.

    벨그라드 저택은 그 거대한 규모와 압도적인 고색창연함으로 아젠시아의 상징과도 같았다. 하지만 오늘, 그 웅장한 외벽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낡은 카펫 위로 늘어선 경비병들의 굳은 표정과 속삭임이 김태오를 맞이했다. 공기는 무겁고 차가웠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그의 심장은 불길한 예감에 거세게 울렸다.

    “경위님, 오셨습니까.”

    맨 위층에 도착하자, 먼저 와 있던 수사관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맞았다. 굳게 닫힌 강철문 앞에는 이미 몇 명의 형사들이 초조하게 서 있었다. 김태오는 문을 응시했다. 이중으로 잠긴 강철문은 묵직한 존재감을 뽐내며 내부의 비밀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상황은?” 김태오가 물었다.

    “벨그라드 가문의 수장, 율리우스 벨그라드 경이 사망했습니다. 밀실입니다, 경위님. 완벽한 밀실 살인입니다.”

    수사관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공포와 함께 좌절감이 묻어났다. 김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경비병이 묵직한 열쇠 꾸러미를 꺼내 가장 큰 열쇠를 자물쇠에 넣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빗장이 풀리고, 이중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둔중한 소리가 울렸다. 문이 서서히 열리자, 안에서 밀려나오는 싸늘한 공기가 모두의 숨을 멎게 했다.

    방은 원형에 가까운 서재였다. 높은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책장들이 벽을 가득 채웠고, 중앙에는 육중한 오크나무 책상이 놓여 있었다. 창문은 하나도 없었다. 아니, 창문처럼 보이는 부분들이 있었지만, 모두 두꺼운 강철판으로 안팎으로 견고하게 봉인되어 있었다. 방의 유일한 출입구는 바로 이 강철문뿐이었다.

    그리고 그 서재의 한가운데, 율리우스 벨그라드 경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고급스러운 벨벳 가운을 입고 있었지만, 옷차림과는 어울리지 않게 기괴한 자세로 엎드려 있었다. 등에는 두 개의 거대한 칼날이 꽂혀 있었는데, 그 칼날은 마치 그의 척추에서 돋아난 뼈처럼 보였다. 칼날에는 섬뜩하게도 어떠한 피 흔적도 없었다. 아니, 놀랍게도 그의 몸 어디에서도 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다. 심장은 이미 오래전에 멈춘 듯 창백한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더욱 기이한 것은, 그의 두 눈이었다. 생기 없는 회색 눈동자는 천장을 향해 굳어 있었는데, 그 시선은 흡사 방금이라도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존재를 목격한 듯한 충격과 함께, 차가운 조롱을 담고 있는 듯했다.

    “젠장…!” 김태오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저 칼날은… 보신 적 있으십니까?” 옆에 있던 젊은 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칼날은 기이한 문양으로 가득 차 있었고,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푸른빛을 발하는 듯했다. 마치 단순한 무기가 아닌, 어떤 주술적인 의식의 도구 같았다.

    “방의 모든 틈은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문은 안에서 걸쇠로 잠겨 있었고,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창문은 애초에 개폐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천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벽은… 보시다시피 굳건한 벽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사관의 설명이 이어졌다. “외부에서 들어온 흔적이 없습니다. 피해자는 독살도 아닙니다. 명백한 칼날에 의한 상처입니다. 그런데도 피 한 방울 없다는 것이… 대체 누가, 어떻게, 그리고 왜…?”

    밀실. 완벽한 밀실. 게다가 피 한 방울 없는 살인.

    형사들 사이에서는 이미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망령의 짓이다’, ‘벨그라드 가문의 저주다’, ‘아젠시아의 그림자가 드디어 먹이를 찾았다’… 이 도시에서는 그런 식의 비이성적인 설명이 때로는 가장 합리적인 답처럼 받아들여지곤 했다.

    김태오는 한숨을 쉬었다. 망령이든 저주든,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풀 수 없는 이 기이한 밀실 살인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도시에서 단 한 명뿐이었다.

    “강림을 불러.” 김태오가 나직이 명령했다.

    그림자 탐정, 강림. 그는 아젠시아의 어둠 속에서 피어난 기묘한 천재였다. 그의 존재 자체가 이 도시의 혼탁한 이면을 상징하는 듯했다. 사람들은 그를 ‘망령의 친구’ 혹은 ‘악마의 계약자’라 불렀다. 하지만 김태오는 알았다. 그 모든 소문 뒤에는 오직 비상한 지성과 냉철한 이성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얼마 지나지 않아, 강림이 도착했다. 그는 검은색 긴 코트 차림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은 언제나처럼 정돈되지 않은 채였고, 얼굴은 희다 못해 창백했다. 깊이 파인 눈매는 마치 밤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했으며, 그 눈동자는 사건 현장의 혼란 속에서도 유일하게 고요한 호수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섰다. 율리우스 벨그라드의 시신을 힐끗 내려다본 강림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 외에는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바닥을 걷는 대신, 마치 공중에 떠다니는 듯 조용히 움직였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떤가.” 김태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네도 망령의 짓이라 생각하나?”

    강림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입술이 열렸다.

    “경위님, 망령은 살인마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우리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죠. 이 방의 범인 또한 당신과 나처럼 숨 쉬는 존재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지만, 어딘가 서늘한 확신을 담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방을 한 바퀴 돌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바닥의 먼지, 책장의 배열, 희미한 공기 흐름, 심지어 강철판으로 봉인된 창문의 미세한 틈까지 놓치지 않았다. 다른 형사들이 놓쳤던, 혹은 아예 보지 못했던 것들을 강림의 눈은 꿰뚫고 지나가는 듯했다.

    강림이 율리우스 벨그라드 시신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손대지 않고 시신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시선은 두 개의 칼날에, 그리고 피 한 방울 없는 상처에 오래 머물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이윽고 벨그라드의 공포에 질린 눈동자 위에서 멈췄다.

    “이 방은 완벽하게 봉인되어 있었다고 했지.” 강림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도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김태오가 답했다.

    강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 방은 ‘원칙적’으로는 완벽하게 봉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형사 한 명이 불쑥 끼어들었다.

    강림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의 손가락이 공중에 떠다니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이 방의 가장 높은 천장을 향했다. 천장은 두꺼운 나무와 돌로 되어 있었고, 아무런 틈도 보이지 않았다.

    “이 방은… ‘밀실’이 아니다.”

    그의 말에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김태오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스쳤다.

    “무슨 소리인가, 강림.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창문은 모두 막혀 있었다네!”

    “밀실이라는 개념은 단지 공간의 봉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강림이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보는 것, 우리가 믿는 것이 반드시 진실은 아니죠. 특히 이곳 아젠시아에서는 말입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시선은 다시 한번 벨그라드의 시신으로 향했다. 특히 그의 눈동자에 맺힌 차가운 조롱에 오래 머물렀다.

    “이자는 마지막 순간에…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본 것을 이해했죠. 그래서 공포와 함께, 절망적인 이해의 감정을 동시에 느낀 겁니다.”

    강림은 방 중앙에 서서 주변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벨그라드 경의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잉크병과 깃펜, 그리고 펼쳐진 서적 위에서 잠시 멈추었다. 서적은 고대 언어로 쓰인 주술 서적처럼 보였다.

    “범인은 이 방을 봉쇄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방의 ‘경계’를 교묘하게 이용한 겁니다.” 강림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그리고 이 살인은… 단순한 살인이 아닙니다. 어떤 ‘의식’의 일부죠. 피가 없는 이유도, 저 칼날의 정체도, 그리고 이 완벽해 보이는 밀실도… 모두 그 의식의 일부입니다.”

    그는 김태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어둠 속에서 빛났다.

    “경위님, 이 사건의 핵심은 ‘어떻게 닫았느냐’가 아닙니다. ‘무엇을 통해’ 살인이 이루어졌고, ‘왜’ 피 한 방울 없는 죽음이었는지에 있습니다.”

    강림은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봉인된 강철 창문 중 하나로 다가갔다. 그는 손가락으로 그 강철판을 가볍게 두드렸다. 둔탁한 금속음이 울렸다.

    “이 방은 밀실이 아닙니다. 이 방은… ‘관’입니다. 거대한, 살아있는 관 말이죠.”

    그의 마지막 말에 모두가 소름 돋는 침묵에 빠졌다. 강림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이미 방의 모든 비밀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그가 찾고 있는 것은 단지 ‘범인’이 아니었다. 그는 이 어둠 속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의식’의 본질을 파헤치려 하고 있었다. 아젠시아의 안개처럼 짙게 드리워진 또 다른 죽음의 그림자를 걷어내기 위해.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는 인간의 탐욕과, 이 세계에 잔존하는 고대의 어두운 마법이 얽혀 있을 터였다.

  • 로맨틱 코미디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우주선 ‘별똥별’의 생활은 단조로웠다. 끝없는 심우주를 헤치며 미지의 영역을 탐사하는 것은 인류의 오랜 꿈이었지만, 막상 그 꿈의 한복판에 와보니 꿈보다는 현실이, 현실보다는 끝없는 커피와 인스턴트 식량의 굴레였다. 함선 내 최고 외계어 및 고대 문명 전문가인 이하은 박사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오늘도 데이터 패드를 붙들고 우주 먼지 성분표를 분석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어제 밤 몰래 다운받은 고전 로맨스 드라마를 보고 잠이 부족했을 뿐이었다.

    “하아… 또 먼지야.”

    깊은 한숨을 쉬며 헤드셋을 고쳐 썼다. 우주 먼지 하나를 놓고 온갖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는 이 지루한 일상. 차라리 외계인이 나타나서 ‘까르르르륵!’ 하고 소리 지르며 침략이라도 해줬으면 좋으련만. 물론 농담이다. 진짜 나타나면 가장 먼저 도망칠 자신 있었다.

    그때였다. 찌르르륵! 하는 요란한 알림음이 함선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정숙해야 할 함교 내에서 이렇게 시끄러운 알림은 오직 비상상황, 혹은 아주 중요한 발견이 있을 때뿐이었다. 하은의 얼굴에 만연하던 지루함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호기심과 긴장감이 교차했다.

    “전 대원, 함교로 집결! 반복한다, 전 대원, 함교로 집결!”

    강지훈 함장의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와는 다른 미묘한 떨림이 서려 있었다. 하은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데이터 패드를 내던지듯 책상에 놓고 함교를 향해 냅다 달렸다. 발걸음이 너무 급했던 탓일까, 복도 코너를 돌다가 정비반장 박선우와 그대로 부딪히고 말았다.

    “아야야… 선우 씨, 괜찮아요?”

    “하은 박사님이야말로 괜찮으십니까? 이 속도로 달리시면 이 함선,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선우는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흩어진 공구를 주섬주섬 줍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침착하고 논리적이었으며, 하은처럼 감정 기복이 심한 사람과는 정반대에 위치한 인간이었다.

    “지금 그런 농담할 때가 아니잖아요! 함장님이 전 대원 집결이라뇨! 혹시 외계인이라도 발견했나?”

    하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선우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글쎄요. 외계인보다는… 더 흥미로운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함교 문이 ‘쉬이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으로 들어서자마 이미 모든 대원들이 각자의 자리에 착석해 있었다. 함장 강지훈은 홀로그램 스크린을 노려보며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좀처럼 읽기 힘들었지만, 미간에 잡힌 깊은 주름은 그가 심각하게 고민 중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하은 박사, 선우 씨, 늦었군.”

    지훈의 날카로운 시선이 하은에게 향했다. 그녀는 움찔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죄송합니다, 함장님! 급하게 오느라 그만…”

    “됐고. 상황 보고한다.”

    지훈은 스크린을 손으로 가리켰다. 홀로그램에는 거대한 암흑 공간에 떠 있는, 정체불명의 물체가 확대되어 보였다. 그것은 완벽한 정육면체의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표면은 흡수성 높은 흑색이었고 어떤 에너지도 방출하지 않았다.

    “방금 전, ‘별똥별’ 호의 장거리 센서가 미탐사 심우주 영역에서 미지의 물체를 감지했다. 스캔 결과, 인공 구조물로 추정되며, 재질은 현재 분석 불능이다. 어떤 에너지원도 감지되지 않고, 무작위적인 중력 교란만 미미하게 확인된다.”

    “인공 구조물이라고요? 그럼 외계 문명? 선행 탐사팀의 보고서에는 이 구역에 어떤 생명체 흔적도 없다고 했는데!”

    하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의 전공 분야인 외계 문명과의 첫 접촉 가능성에 온몸의 세포가 들썩이는 기분이었다.

    지훈은 스크린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은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위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하지만 함장님, 이렇게 완벽한 형태의 물체는 자연적으로 형성될 수 없어요. 분명 지적 생명체가 만든 겁니다!”

    옆에 있던 조종사 최유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은 박사님, 흥분은 좀 자제하시죠. 위험하다고 말씀하시는데 무작정 들이댈 순 없지 않습니까.”

    “탐사선은 원래 미지를 탐사하는 게 목적 아닙니까? 이런 거 발견하려고 온 거잖아요!”

    하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지훈은 그녀의 의견을 묵묵히 듣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이 하은에게 고정되었다.

    “하은 박사의 의견을 수렴하여… 근접 조사를 결정한다. 단, 함선은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외부 활동은 최소화한다.”

    하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지훈은 그녀의 반응을 보고 살짝 미소 지을 뻔했지만, 이내 표정을 굳혔다.

    “외부 활동조는 하은 박사와 박선우 반장으로 한다. 유리 씨는 함선에서 대기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네, 함장님!”

    ***

    새까만 우주복을 입은 하은과 선우는 ‘별똥별’ 호의 에어록을 통해 서서히 우주 공간으로 나왔다. 주변은 차가운 암흑과 별들의 반짝임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웅장하고 미스터리한 정육면체 유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아… 진짜 크다.”

    하은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홀로그램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표면은 빛을 흡수하는 듯, 주변 별빛마저 집어삼키는 듯한 묘한 질감을 가지고 있었다. 마치 우주 자체의 일부인 양,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 자리에 떠 있었다.

    “박선우 반장, 유물 표면 스캔 시작해 주십시오.”

    지훈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초정밀 스캔 중… 표면 재질은 기존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물질입니다. 특이점은… 표면에 미세한 진동이 감지됩니다. 주기는 불규칙적입니다.”

    선우는 손목에 달린 장비로 유물 표면을 탐색했다. 하은은 조심스럽게 유물에 다가갔다. 검은 표면에는 아무런 문양도, 연결 부위도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하나의 덩어리였다.

    “함장님, 아무런 문양도… 아니, 잠시만요.”

    하은은 손전등을 유물 표면에 비췄다. 그러자 빛이 닿는 순간, 검은 표면이 마치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곧, 빛이 닿았던 자리에 아주 희미한, 하지만 분명한 기하학적인 문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세상에…!”

    하은은 숨을 들이켰다. 마치 그녀의 존재를 인식한 듯, 유물이 반응한 것이었다. 문양은 복잡했지만, 그녀의 외계어 전문가로서의 직감이 소리쳤다. ‘이건 언어다!’

    “함장님! 반응합니다! 빛에 반응해서 문양이 나타났어요! 이쪽은… 삼각형과 원형이 조합된 형태네요. 이건 분명 인공적인, 그것도 고도의 기술력을 가진 문명의 흔적입니다!”

    “섣불리 접촉하지 마십시오, 하은 박사!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지훈의 목소리에 경고음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하은은 이미 흥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녀의 눈은 오직 유물의 문양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장갑 낀 손을 뻗어, 가장 선명하게 빛나는 삼각형 문양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그 순간, 유물 전체가 ‘웅—’ 하는 낮은 공명음을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검은 표면 위로 수많은 문양들이 번개처럼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동시에, 유물에서 부드러운 오렌지색 빛이 퍼져 나오며 하은을 감쌌다.

    “하은 박사! 괜찮습니까?” 선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모르겠어요… 따뜻해요… 이상한 느낌…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하은은 뭔가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오렌지색 빛은 그녀의 우주복을 투과하여 몸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두려움에 떨었겠지만, 지금은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그녀를 지배했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무언가를 떠올린 듯한, 아련하고도 강렬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때, 그녀의 머릿속에 강지훈 함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엄격한 표정, 하지만 가끔씩 드러나는 인간적인 면모, 그리고 그가 자신을 걱정할 때의 미묘한 시선…

    ‘아… 함장님… 사실 저, 저 말이에요…!’

    하은은 무언가에 이끌린 듯, 통신 버튼에 손을 댔다. 그녀의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함장님은 사실, 제가 보기엔 말이죠… 겉으론 철벽처럼 딱딱해 보여도, 속으로는 따뜻하고… 그… 사실은 좀… 귀여워요! 특히 화내실 때 미간 찌푸리는 거, 완전 깨방정 토끼 같다고 할까! 크흡! 제가 한 번 만져보고 싶다니까요!”

    *사악!*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우주복 내부의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잡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눈앞에 선우가 경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하은 박사님! 통신 채널 연결됐습니다!”

    하은의 머릿속을 강타하는 싸늘한 현실.

    ‘뭐… 뭐라고? 통신 채널이 연결됐다고? 설마… 함장님이… 다 들으셨다는 거야?!’

    그 순간, 오렌지색 빛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유물은 다시 고요하고 검은 정육면체로 돌아왔다. 하은의 얼굴은 우주복 헬멧 안에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함선 내부의 통신 채널은 정적에 휩싸였다. 마치 모든 대원이 숨을 멈춘 듯,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강지훈 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고, 어딘가 차가우면서도 묘하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하은 박사, 박선우 반장. 즉시 함선으로 복귀한다. 유물에 대한 추가 조사는… 추후 결정한다.”

    “네… 넷! 함장님!”

    하은은 거의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별똥별’ 호를 향해 날아갔다. 그녀의 심장은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뛰고 있었다. 방금 그 유물은… 그녀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걸까? 그리고 그 망할 유물 때문에, 그녀는 함장님에게 돌이킬 수 없는 말을 해버리고 말았다!

    함교에서는 최유리가 겨우 웃음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리고 함장실, 강지훈은 홀로그램 스크린에 비친 검은 유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방금 전 하은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깨방정 토끼 같다고 할까! 크흡! 제가 한 번 만져보고 싶다니까요!”*

    강지훈의 굳건했던 표정에 아주 미묘한 균열이 생겼다. 미간이… 살짝 붉어진 것 같기도 했다. 심우주에서 발견된 정체불명의 유물은, 인류에게 새로운 미스터리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별똥별’ 호의 냉철한 함장과 천방지축 외계어 전문가 사이에도 예상치 못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다음 행보는 과연…!

  • 이세계 전생 (Isekai) 독립적인 단편 소설

    숨 막힐 듯한 도시의 밤은 늘 그랬듯 침묵과 소음의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김민준은 퇴근길 만원 지하철에서부터 시작된 지루함과 피로를 질질 끌고 자신의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9층, 복도식 아파트의 낡은 문은 언제나처럼 삐걱거렸고, 퀘퀘한 복도 냄새가 잠시 실내로 스며들었다 사라졌다. 신발을 벗어 던지고, 넥타이를 풀고, 축 늘어진 몸을 소파에 파묻었다. TV 리모컨을 찾다가 문득 시야에 들어온 컵 하나.

    “응?”

    방금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분명 신발장 옆 바닥에 놓여 있던 머그컵이 소파 앞 탁자 위로 옮겨져 있었다. 민준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아니면 내가 아까 잠깐 놓았었나? 기억을 더듬어봐도 그럴 리가 없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피곤하면 별 생각 다 드는 법이지.

    다음날 아침, 출근 준비를 위해 주방으로 향하던 민준은 다시 한번 멈칫했다. 어제 밤 분명 탁자 위에 두었던 머그컵이 식기 건조대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물기가 완벽하게 말라 있는 걸로 보아 누군가 설거지까지 한 모양새였다.

    “내가… 어제 설거지를 했나?”

    아무리 기억을 짜내도 어제의 피곤한 몸으로 설거지를 할 리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혹시 누나가 몰래 왔다 갔나? 아니, 이 시간에? 민준은 누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제 밤에 우리 집에 왔었어?’ 잠시 후 ‘미쳤냐? 나 야근했어.’라는 퉁명스러운 답장이 왔다.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분명 뭔가 착각했을 것이다. 혹은 잠결에 내가 했을 수도 있고.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며칠 후, 현상은 점점 기묘해지기 시작했다.
    밤늦게까지 컴퓨터로 웹 서핑을 하다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면, 분명 켜두었던 모니터가 꺼져 있거나, 전혀 다른 프로그램이 실행되어 있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는데, 거실의 스탠드 등이 스스로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전기가 나갔다 들어오는 건가 싶었지만, 주변 이웃집들은 멀쩡했다.

    “젠장, 이러다 전기 요금 폭탄 맞는 거 아니야?”

    민준은 전기 기사라도 불러봐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가장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물건의 이동’이었다. 열쇠는 현관 옆 열쇠걸이에 두면 다음 날 아침 베란다 창틀에 놓여 있었고, 읽던 책은 분명 침대 옆 협탁에 있었는데, 거실 바닥에 펼쳐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어느 날 밤, 민준은 잠에서 깨어났다. 한밤중인데도 귀가 찢어질 듯한 고음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착각인가 싶었지만, 소리는 점점 선명해지며 민준의 아파트 안을 맴돌았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웃집 소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가까웠다. 그는 공포에 질려 이불을 뒤집어썼다. 얼마나 지났을까, 휘파람 소리는 거짓말처럼 뚝 끊겼고, 대신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이 바닥에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쾅, 쾅, 쨍그랑!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플래시를 켜자, 방 안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책들이 책장에서 쏟아져 나와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탁자 위에 놓여 있던 화분은 깨져 흙이 흩뿌려져 있었다. 유리 조각들이 불빛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빛났다.

    “누… 누구야?”

    민준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방 안을 감도는 섬뜩한 기운은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다음 날, 민준은 결국 휴가를 내고 지쳐 보이는 눈으로 아파트 관리실을 찾아갔다. “요즘 저희 집에서 이상한 현상들이 계속 일어나서요. 누가 침입한 흔적은 없는데, 물건들이 계속 움직이고, 소리가 나고…” 관리소 직원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민준을 바라봤다. “아, 손님. 혹시 요즘 피곤해서 그러신 건 아니고요? 그런 일은 드라마에서나 있는 일이지요.” 민준은 답답했다. 아무리 설명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분위기였다.

    집으로 돌아온 민준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그는 집 안 곳곳에 작은 카메라를 설치했다. 핸드폰과 연결해 실시간으로 집 안을 감시할 수 있도록 설정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는 거실에서 잠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밤새도록 카메라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자정을 넘어서자, 사건이 터졌다.
    거실 한쪽 벽에 걸려 있던 그림 액자가 갑자기 쿵,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민준은 벌떡 일어났다. 액자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는 카메라를 확인했다. 영상 속에서 액자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마치 누군가 집어 던진 것처럼 힘껏 벽에서 떨어져 나갔다.

    “이건… 이건 진짜야…”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때였다. 부엌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위 그릇들이 공중에 뜬 채 위아래로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투명한 손이 그릇들을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민준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멈춰! 제발, 멈춰!”

    그가 소리치자, 그릇들은 일제히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났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물이 흥건하게 젖은 바닥이 민준의 발밑에서 찰박거렸다. 공포는 극에 달했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그때, 웅웅거리는 낮은 진동이 온 집안을 흔들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시계가 힘없이 떨어지고, 천장의 전등이 미친 듯이 깜빡였다.

    민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실 벽이었다. 평범한 흰색 벽지가 갑자기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물결이 치는 것처럼, 혹은 거울 속에 비친 상이 왜곡되는 것처럼. 벽지가 사라진 자리에는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돌벽이 드러났다. 돌벽은 희미하게 푸른빛을 내뿜었고, 그 틈새로 알 수 없는 형태의 그림자들이 꿈틀거렸다.

    “뭐… 뭐야… 이건 또…”

    민준은 주저앉았다. 꿈일까? 악몽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진동은 더욱 강해졌고, 이제는 바닥까지 들썩이는 듯했다. 돌벽의 틈새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어딘가 축축한 냄새와 함께 섬뜩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민준의 뺨을 스쳤고, 그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벌어진 틈새 너머로 보이는 것은 더 이상 그의 아파트가 아니었다. 기괴하게 솟아난 거대한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 그리고 그 나무들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보랏빛 하늘. 숲의 바닥에는 이끼인지 풀인지 알 수 없는 푸른색 식물들이 뒤엉켜 자라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이제 더 이상 장난스러운 유령의 짓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를 잇는 통로가 억지로 열리면서 생기는 부작용 같았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그 틈새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강력한 중력을 느꼈다.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고, 아파트 내부의 모든 가구들이 그 틈새를 향해 날아갔다.

    “안 돼! 으아아악!”

    마지막으로 그가 본 것은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듯한 푸른빛의 틈새, 그리고 아파트 벽 너머로 보이는 완전히 다른 세계의 풍경이었다. 눈부신 빛과 함께 몸이 격렬하게 회전했고, 그 순간 그의 의식은 끊겼다.

    민준이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눈앞에는 익숙한 아파트 천장이 아닌, 기괴하게 뒤틀린 나뭇가지들이 얽혀 만든 돔 형태의 천장이 펼쳐져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축축하고 부드러운 풀들이 손에 느껴졌다. 등 뒤로는 방금 전까지 그가 있던 아파트 벽의 잔해가 보였다. 하지만 그 벽은 이제 주변의 기묘한 식물들에 둘러싸여 마치 오래된 유적처럼 서 있었다.

    차갑고 신비로운 공기가 폐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보랏빛 하늘을 올려다봤다. 태양 대신 떠 있는 것은 거대한 두 개의 달이었다. 하나는 창백한 은빛을, 다른 하나는 핏빛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이… 이곳은…”

    익숙한 도시의 소음 대신, 정체불명의 짐승 울음소리와 바람이 나뭇가지들을 스치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민준은 온몸을 감싼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그를 이 세상으로 이끌기 위한 다른 세계의 초대장이었던 것이다. 그의 아파트에서 시작된 기괴한 현상은, 결국 그를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전이시킨 거대한 사건의 서막에 불과했다. 그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의 이세계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서른다섯, 이방인의 밤

    김현우는 서른다섯이었다. 번화가의 고층 빌딩 숲, 그중에서도 가장 평범한 외관을 자랑하는 오피스텔 1204호에 살고 있었다. 퇴근 후 그의 일상은 고독만큼이나 견고했다. 식지 않은 편의점 도시락, 늘 보던 TV 드라마, 그리고 알 수 없는 피로감. 오늘도 다를 바 없었다.

    “흐음….”

    미지근한 맥주 캔을 따며 현우는 낡은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불치병에 걸린 연인을 향해 절규하고 있었지만, 현우의 눈길은 어느새 식탁 위에 놓인 리모컨에 가 있었다. 분명히 소파 옆에 두었는데. 요즘 들어 이런 일이 잦았다. 안경은 화장실 선반에, 지갑은 신발장 위에. 마치 제자리를 잃은 물건들이 저마다의 반항이라도 하는 듯했다.

    “나이를 먹었나. 건망증인가.”

    중얼거리는 현우의 목소리는 공허한 실내에 메아리쳤다.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식탁으로 가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이 손에 닿는 순간, 짧은 정전이라도 된 듯 TV 화면이 순간적으로 일렁였다.

    “…뭐야?”

    고장인가 싶어 리모컨을 두어 번 눌러보았지만, TV는 언제 그랬냐는 듯 선명한 화면을 송출하고 있었다. 그저 오래된 가전제품의 노화 현상이겠지. 현우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의 삶은 고장 난 부품들을 제때 갈아 끼우는 일련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오피스텔은 묘한 기운에 잠겼다. 창밖 도시는 여전히 휘황찬란한 빛을 뿜어냈지만, 현우의 방은 마치 심해처럼 고요했다. 그는 잠자리에 들기 전, 늘 하던 대로 욕실로 향했다. 칫솔을 들고 거울을 바라보던 현우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수도꼭지가 미세하게 열려 있었다. 물방울이 한 방울씩 똑, 똑, 떨어져 세면대에 옅은 원을 만들고 있었다. 현우는 분명히 수도꼭지를 잠그고 나왔다. 그는 강박적일 정도로 완벽하게 잠그는 습관이 있었다.

    “내가 실수했나….”

    현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수도꼭지를 완전히 잠갔다. 다시 거울을 보며 양치질을 시작하는데,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찬 숨을 불어넣은 듯한 섬뜩한 감각이었다. 그는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욕실 타일 벽이 그의 놀란 얼굴을 비출 뿐이었다.

    “젠장,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피로가 극에 달하면 나타나는 착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심장은 쉬지 않고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평소라면 코를 골며 잠들었을 현우는 그날 밤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건너편 집의 TV 소리, 층간 소음, 그리고 알 수 없는, 아주 작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의 소리가 그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다음 날 아침, 현우는 푹 자지 못한 얼굴로 겨우 출근 준비를 마쳤다. 문을 나서려는데, 현관문 잠금쇠가 유난히 뻑뻑했다. 평소 같으면 부드럽게 돌아가던 손잡이가 헛도는 느낌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힘을 주어 돌린 끝에 겨우 문을 열 수 있었다.

    “휴… 정말 뭐가 씌었나.”

    그는 투덜거리며 현관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잠금쇠가 ‘철컥’하고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현우는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보다 훨씬 더 *깊게* 잠기는 듯한 소리였다. 마치, 안에서 잠긴 듯한. 그는 불안한 기분에 다시 손잡이를 잡아 돌려보려 했다. 하지만 이미 잠겨 있었다.

    점점 더 기괴한 일들이 현우의 일상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며칠 뒤, 퇴근하고 돌아온 현우는 현관문을 열다 또다시 이상한 경험을 했다. 분명히 잠그고 나갔는데,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는 도둑이 들었나 싶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흐트러진 물건도, 부서진 흔적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그저 문을 열어놓고 나간 듯했다.

    “누가 장난을 치나?”

    층간 소음 문제로 이웃과 몇 번 마찰이 있긴 했지만, 이렇게 악의적인 장난을 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찜찜한 기분으로 문을 닫고 들어섰다. 그때, 쿵, 하고 거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숨을 죽인 채 거실로 향했다. 거실 중앙에는 그가 아끼는 낡은 도자기가 깨져 있었다. 고려 시대의 것이라며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현우에게는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자기는 선반 위에 있었는데, 어째서 바닥에 떨어져 깨져 있는 걸까?

    “이, 이건…!”

    그는 떨리는 손으로 깨진 조각들을 집어 들었다. 매끄러운 자기의 파편들은 싸늘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단순한 도자기가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살아생전 그 도자기가 집안의 기운을 다스리는 물건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물론 현우는 코웃음 쳤지만.

    그때였다.
    파편을 든 현우의 손에서, 그리고 깨진 도자기 파편들 사이에서, 미세하지만 분명한 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붉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오묘한 빛이었다. 마치 숨 쉬듯 희미하게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동시에 현우의 몸 안에서, 마치 심장이 한 번 더 뛰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이 파고들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듯한 차가움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에너지가 혈관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오피스텔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지진인가 싶어 현우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천장의 형광등이 미친 듯이 깜빡이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버렸다. 암전된 공간 속에서, 깨진 도자기 파편에서 뿜어져 나오던 오묘한 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이게… 대체….”

    현우는 공포에 질린 채 넋을 잃고 주저앉았다. 사방이 어둠에 잠긴 가운데, 거실 저편에서 무언가 기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슥, 스스슥. 마치 거대한 뱀이 몸을 비비며 다가오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 소리는 현우의 눈앞에서 멈춰 섰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을 뿜어내던 도자기 파편들이 마치 자석에 이끌린 듯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파편들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허공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이내 하나의 거대한 형체를 이루어내기 시작했다. 형체는 점점 더 커지고, 붉고 푸른빛이 번갈아 깜빡이며, 현우를 향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흐릿하지만 분명히, 섬뜩한 기운을 내뿜는 거대한 그림자가 현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 그림자 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현우의 고막을 찢고 들어오는 듯한 비명이었다.

    “으아아악!”

    현우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는 등 뒤에 느껴지는 차가운 벽에 부딪혔다.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의 눈앞에서 서서히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것은 투명한 아지랑이처럼 일렁이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 안에서 현우는 얼핏, *눈동자*를 본 것 같았다. 수천 년의 세월을 담은 듯한, 깊고 검은 눈동자.

    그리고 그 눈동자가 현우를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그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 순간, 현우의 몸은 굳어버렸다. 입도 떼지 못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뛰는 것을 멈췄다.

    오피스텔 1204호, 현대 도시의 한가운데서, 김현우는 생전 처음으로 ‘이계(異界)’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다가오는 것은, 그의 모든 상식을 초월하는, 신선(神仙)의 경계에 걸쳐진 듯한 기이하고도 거대한 존재였다.

  • 다크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제1화: 지하의 속삭임

    아르카디아 마법 학원, 그 이름만으로도 세상 모든 마법사들의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곳이었다.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유구한 역사,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백색의 첨탑들, 고고한 마력이 서린 대리석 복도… 이곳의 학생들은 선별된 재능의 정수였으며, 미래의 마법 세계를 이끌어갈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다. 하지만 이안은 그 완벽함 속에 깃든 미묘한 불협화음을 늘 감지하고 있었다.

    “이안, 또 여기서 이러고 있냐?”

    늦은 밤, 금지된 구역의 자료실 앞을 서성이는 이안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루미나였다. 은빛 머리카락이 희미한 복도 등불 아래서 유난히 빛났다. 그녀는 늘 이안의 엉뚱한 호기심을 못마땅해하면서도, 어쩐지 그를 외면하지 못하는 친구였다.

    “루미나, 아직 안 자고 뭐 해? 도서관은 벌써 폐쇄 시간 지났잖아.” 이안은 손에 들린 낡은 양피지 지도를 등 뒤로 숨기며 물었다.

    루미나는 한숨을 쉬었다. “너야말로. 또 그 ‘선배들이 사라지는 미스터리’라도 파헤치려고? 명심해, 이안. 학원 규율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특히 지하 구역은….” 그녀는 말을 흐렸다. 루미나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지하 구역이 어때서?” 이안은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심장은 벌써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선배들이 갑자기 전학 가거나, 혹은 소리 소문 없이 자퇴 처리되는 일이 잦다는 소문은 꽤 오래전부터 학원 내에 돌았다. 처음엔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최근엔 유독 재능이 뛰어났던 상급생들이 그 대상이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가지 말라는 곳은 가지 마. 그게 전부야.” 루미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녀의 어깨가 유난히 움츠러들어 보였다.

    루미나가 사라지고, 복도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낡은 양피지 지도에는 학원의 초기 설계 도면과 함께, ‘창설자의 미궁’이라 불리는 지하 심층부로 이어지는 비밀 통로가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안은 그 미궁에 대한 온갖 섬뜩한 소문들을 떠올렸다. 학원의 번영을 위해 고대부터 봉인된 거대한 마력을 품고 있다는 이야기, 혹은 학원장조차 접근을 꺼리는 끔찍한 금기가 잠들어 있다는 소문까지. 이안의 가슴속에는 미지의 것에 대한 강렬한 갈증이 용솟음쳤다.

    결심이 섰다. 오늘 밤, 학원의 어둠 속으로 숨겨진 진실을 찾아야만 했다.

    지도의 안내를 따라 학원 본관의 가장 깊숙한 지하층으로 향했다. 먼지가 쌓인 복도, 축축한 공기, 그리고 희미하게 풍겨오는 철 비린내와 알 수 없는 약품 냄새가 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한참을 헤매다 지도에 표시된 지점에 다다랐을 때, 이안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낡은 사물함 더미 뒤에 숨겨진 녹슨 철문이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지만, 이안은 허리춤에서 마법 도구를 꺼내 조심스럽게 마법 자물쇠를 해제했다.

    끼이익—

    오랜 세월 동안 닫혀 있던 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이안은 망설임 없이 발을 내디뎠다. 손바닥에 마력을 모아 작은 빛 구슬을 띄우자,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광경이 서서히 드러났다.

    오래된 실험 기구들과 텅 빈 유리관들, 그리고 벽면 가득 그려진 이해할 수 없는 마법진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모든 것이 먼지에 덮여 있었다. 공기는 묵직했고, 깊은 심해에 잠겨 있는 듯한 압력이 어깨를 짓눌렀다. 이안은 이곳이 단순히 ‘폐쇄된’ 공간이 아님을 직감했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졌던, 그리고 어쩌면 지금도 벌어지고 있을지 모르는 장소였다.

    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이안의 오감은 더욱 예민해졌다. 벽면을 따라 이어진 낡은 전선들과 파이프들 사이에서 희미한 전류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낮은 진동. 아주 희미하지만,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둔탁한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그때였다. 이안의 시선이 한쪽 벽면에 고정되었다. 겹겹이 쌓인 마법진들 사이, 흐릿한 그림처럼 스며든 핏자국. 그리고 그 옆에는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긁어놓은 듯한 글자들이 있었다.

    *살려줘…*
    *괴물…*
    *학원…*

    피가 마른 흔적은 오래되었지만, 그 글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절규는 마치 어제 쓰인 듯 생생했다. 등골이 오싹했다. 이안은 손에 든 빛 구슬을 더욱 강하게 빛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아치형 통로를 지나 가장 깊숙한 곳에 다다랐을 때, 그는 비로소 아르카디아 마법 학원의 진짜 ‘얼굴’과 마주했다.

    그곳은 거대한 동굴과 같은 공간이었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공간의 중앙에는 기괴한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거대한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금속과 살덩이가 뒤섞인 듯한 형상으로, 칙칙한 붉은색과 검은색의 혈관 같은 것들이 표면을 타고 불규칙하게 뻗어 있었다. 매 순간 둔탁하게 맥동하며,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리는 듯한 강렬한 마력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구조물의 표면 곳곳에… 수많은 유리관들이 박혀 있었다. 투명한 유리관 속에는 인간의 형상들이 보였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액체 속에 잠겨 있었다. 그들의 눈은 공허했고,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부터 가느다란 마력선들이 뻗어 나와 거대한 구조물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들의 마력을 강제로 흡수하는 장치처럼.

    이안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선배들이 사라졌다는 소문의 진실, 아르카디아가 자랑하는 막대한 마력의 원천… 모든 것이 이 끔찍한 광경 안에 설명되어 있었다. 학원의 영광은, 이 지하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생명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이게… 대체….”

    이안의 입술에서 떨리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거대한 구조물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붉은 혈관들이 더욱 격렬하게 꿈틀거렸고, 유리관 속 인물들의 몸이 경련했다. 그와 동시에, 이안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목소리들이 일제히 쏟아져 들어왔다. 비명, 절규, 원망, 그리고 끝없는 고통의 속삭임.

    *나가…*
    *도망쳐…*
    *우리를… 구해줘…*

    이안은 혼란과 공포 속에서 뒤걸음질 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차갑고 끈적한 기운이 발목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바닥에서 솟아오른 어둠의 촉수들이 그의 몸을 휘감기 시작했다. 거대한 구조물 전체가 이안을 향해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고개를 돌리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수많은 눈동자가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젠장…!”

    이안은 필사적으로 마력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이 공간의 마력은 너무나 압도적이었다. 그는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뱃속에 들어온 작은 벌레와 같았다.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온몸을 잠식했다. 아르카디아의 어둠이, 마침내 그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 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밤의 침입자들: 불씨를 찾아

    고요해야 할 제국 수도의 뒷골목은, 어둠 속에서도 끈적한 긴장감을 머금고 있었다. 눅눅한 밤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순찰대원의 발소리가 심장박동처럼 울렸다. 허름한 망토를 뒤집어쓴 두 그림자가 벽에 바싹 붙어 숨을 죽였다. 잿빛 벽돌 틈새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등불만이 그들의 윤곽을 간신히 드러낼 뿐이었다.

    “젠장, 류하. 순찰 간격이 평소보다 짧아졌어. 이 정도면 우리가 예상했던 경로로는 진입이 불가능해.”

    서은의 낮은 목소리가 류하의 귓가에 맴돌았다. 평소의 냉철함은 온데간데없이,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짜증이 섞여 있었다. 손에 든 작은 망원경을 재빨리 접으며 류하를 노려보는 그녀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날카로웠다.

    류하는 그녀의 말에 반박할 새도 없이,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곰곰이 뜯어봤다. 저 멀리, 제국군의 식량 보급 창고로 이어지는 철문 앞을 지키는 그림자 두 개. 그들의 횃불이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니, 초병의 수가 예상보다 많았다.

    “서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놈들이 코빼기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했군. 저번에 ‘검은 깃발’ 사건 때문인가?” 류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검은 깃발’은 샛별단이 일으킨 작은 봉기였고, 제국은 그 이후로 수도의 경비를 눈에 띄게 강화했다.

    “아니면, 놈들도 이 창고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았거나.” 서은이 류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간에 잡힌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이 안에 ‘그것’이 없으면 우리의 다음 작전은 물거품이 돼. 이번만큼은 실패할 수 없어.”

    ‘그것’. 제국군이 변경 지역에 파견할 대규모 지원 병력의 정확한 이동 경로와 보급 계획이 담긴 극비 문서. 샛별단이 제국의 막대한 병력을 흩트려 놓을 유일한 희망이었다.

    “젠장, 서은. 네 말대로라면 정면 돌파는 미친 짓이고, 다른 통로는 이미 놈들이 막아놨을 게 뻔해.” 류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의 눈은 빠른 속도로 주변을 스캔하고 있었다. 좁은 골목, 즐비한 상점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허름한 건물들의 그림자.

    문득, 그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창고 옆에 붙어있는 오래된 제빵소.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는 곳이었다.

    “서은, 저기 제빵소 보여? 아마 뒷문으로 연결된 통로가 있을 거야.” 류하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서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망원경으로 제빵소를 살폈다. “설마… 거기로 들어가서 창고로 연결된 통로를 찾겠다는 건 아니겠죠? 냄새도 역하고… 들킬 확률도 높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제빵소 주인이 엄청난 수다쟁이라는 거.”

    류하는 씨익 웃었다. “수다쟁이라면 더 좋지. 우리는 쥐 죽은 듯 조용히 움직일 게 아니라, 오히려 시끄러운 데서 움직여야 하거든.”

    서은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 머릿속은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 죽겠어요. 로맨틱 코미디 소설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뭐? 로맨틱 코미디? 난 그저 평민들의 희망을 찾아 헤매는… 아니, 지금 농담할 시간이 없어!” 류하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그녀의 놀림에 얼굴이 살짝 붉어진 것은 그만의 비밀이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제빵소 뒷문으로 향했다. 다행히 뒷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린 문틈으로, 구수한 빵 냄새와 함께 후끈한 열기가 훅 끼쳐왔다.

    안은 예상보다 훨씬 혼잡했다. 수십 개의 반죽이 발효되고 있었고, 뜨거운 오븐에서는 금방 구워낸 빵들이 김을 모락모락 피우고 있었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의 제빵사들이 바삐 움직였고, 그들 중 덩치 큰 주인장은 끊임없이 큰 소리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어이, 길드! 거기 반죽 좀 더 가져와! 오늘따라 주문이 밀려 터지는구먼!”

    그들의 시선이 류하와 서은에게 향했다. 류하는 재빨리 웃음을 지으며 다가섰다.

    “주인장님, 밤늦게 죄송합니다. 저희가 길을 잃어서요. 혹시… 이 근처에 샛길이 있을까요? 급히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제빵소 주인장은 우락부락한 인상과는 달리,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손에 묻은 밀가루를 털었다. “아이고, 젊은이들. 이 밤중에 어딜 그렇게 급히 가려고 그러나? 샛길이라면… 저기 반죽실 뒤쪽으로 가면 작은 문이 하나 있는데, 거기가 폐쇄된 통로라서 위험할 텐데.”

    류하와 서은의 눈이 마주쳤다. 폐쇄된 통로. 그것은 제국군이 예상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괜찮습니다, 주인장님! 너무 급해서요! 감사합니다!” 류하가 목청껏 소리쳤다. 제빵사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지만, 류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서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젠장, 류하! 내 손목 부러지겠어!” 서은이 아프게 속삭였다. 류하는 그녀의 항의를 무시하고 반죽실 뒤편, 어두컴컴한 구석으로 그녀를 밀어 넣었다.

    거기에는 정말 작은 문이 하나 있었다. 녹슨 경첩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들의 손길에 응답했다. 안은 습하고 축축한 흙냄새가 진동했다.

    “이게 뭐야… 지하실인가?” 서은이 코를 막았다.

    “제국군이 보급창고를 지을 때, 원래 있던 지하 통로를 메운 모양이야. 대충 메워놓은 것 같으니, 우리가 나갈 수 있는 구멍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류하는 품속에서 작은 등불을 꺼내 불을 밝혔다. 등불의 희미한 빛이 좁고 긴 통로를 비췄다. 벽은 흙과 돌로 불안정하게 쌓여 있었고, 천장에서는 뚝뚝 물이 떨어졌다.

    그들이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잠깐.” 서은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의 눈이 등불이 닿지 않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무슨 소리 안 들려요?”

    류하도 숨을 죽였다. 처음에는 그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규칙적인 발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젠장, 놈들이 이 통로도 알고 있었어!” 류하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아니, 그건 아닐 거야. 이 통로는 완전히 잊힌 곳이라고. 아마… 다른 목적이 있는 걸 거야.” 서은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통로는 좁았지만, 한쪽 벽에 작은 틈이 보였다.

    “류하, 저기!”

    류하는 서은을 밀어 넣어 간신히 틈새로 몸을 숨겼다. 등불을 끄고 완벽하게 어둠에 몸을 맡겼다. 좁은 공간에 두 사람의 몸이 바싹 붙었다. 서은의 숨결이 류하의 목덜미를 간질였다. 묘한 긴장감과 함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때, 저 멀리서 빛이 나타났다. 그들이 숨은 곳을 향해 다가오는 횃불의 불빛. 그리고 묵직한 발소리. 그들 앞을 지나가는 그림자는 세 명이었다. 그들은 제국군 병사가 아니었다.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쓴 채, 손에는 횃불 대신 작은 마법 등불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제국군 창고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통로의 더 깊은 곳, 샛별단조차 알지 못했던 미지의 공간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자들이… 대체 누구지?” 류하가 서은에게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문과 함께 미묘한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서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모르겠어요. 하지만… 놈들이 가진 마법 등불이 예사롭지 않아요. 저건 황실 소속의 고위 마법사들만 쓸 수 있는 물건이에요.”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세 명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꼼짝 않고 숨죽였다. 통로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을 때, 류하가 조심스럽게 틈새에서 빠져나왔다.

    “서은, 아무래도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 ‘그것’이 있는 창고도 중요하지만, 저자들이 향한 곳에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몰라.”

    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같아요. 일단 원래 목적을 달성하고… 저들을 쫓을지 말지는 그때 가서 결정하죠.”

    그들은 다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샛별단이 목표로 했던 창고는 그리 멀지 않았다. 마침내 류하가 막다른 벽에 손을 얹었을 때, 벽 너머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순찰 조! 이상 없음!”

    류하와 서은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은 드디어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류하가 조심스럽게 벽의 틈을 벌렸다. 창고 안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물품 상자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상자들 사이, 작은 탁자 위에 놓인 봉인된 양피지 두루마리가.

    “찾았다!” 류하가 거의 소리치듯 중얼거렸다.

    그가 양피지를 집어 들었을 때였다. 창고 바깥에서,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콰앙!*

    땅이 흔들리고, 창고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어지는 비명소리와 칼 부딪히는 소리.

    “젠장! 대체 무슨 일이야?” 류하의 얼굴에서 희열은 사라지고, 극도의 긴장감이 번졌다.

    서은이 재빨리 창고의 작은 틈으로 바깥을 내다봤다.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류하… 저자들이 다시 나타났어요! 아까 그 마법사들이 제국군을 공격하고 있어요! 그런데… 놈들이 노리는 건 보급품이 아니에요… 창고 저 안쪽 깊숙한 곳이에요!”

    서은의 눈에 비친 것은, 검은 후드를 쓴 마법사들이 무자비하게 제국군을 제압하며 창고의 가장 깊은 곳, 평소에는 아무것도 보관되지 않던 은밀한 공간으로 향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는, 섬뜩할 정도로 빛나는 푸른색 보석이 들려 있었다.

    류하의 시선이 양피지 두루마리에서 마법사들이 향하는 창고 깊은 곳으로 옮겨졌다.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서은… 저들이 뭘 찾고 있는 건지 알아야 해. 이 보급 계획은… 잠시 뒷전이다!”

    류하는 양피지를 품에 넣고, 서은의 손을 잡았다. 창고 밖에서는 혼란이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두 개의 거대한 세력이 충돌하는 한밤중의 창고에서, 샛별단의 두 주역은 예상치 못한 또 다른 불씨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 불씨는 과연 희망의 등불이 될까, 아니면 제국을 더욱 혼돈 속으로 밀어 넣을 파괴의 불길이 될까. 그들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해 질 녘, 붉은 노을이 은은하게 번지는 산중 암자는 고요함 그 자체였다. 창문 너머로 시원한 바람이 스며들어, 단정하게 정리된 방 안의 풍경 소리를 가늘게 흔들었다. 하랑은 명상 자세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아직은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에는 굳건한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거대한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계곡 아래, 수많은 등을 밝힌 듯 반짝이는 기와지붕들이 보였다. 저곳이 바로 천하의 운명을 건다는 ‘천화비무(天和比武)’가 열리는 비무장이었다. 내일부터 사흘 밤낮으로 이어질, 수백 년 만에 찾아온 거대한 축제이자 결전의 장. 수많은 고수들이 각자의 수련과 깨달음을 증명하기 위해 모인 곳.

    “벌써 내일이구나.”

    하랑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가슴속에서는 알 수 없는 긴장과 설렘이 묘하게 뒤섞여 파도치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 온 목적이 단순히 승리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스승님의 말씀을 따라, 흐르는 물처럼, 피어나는 꽃처럼, 그저 자신의 무도(武道)를 보여주고, 다른 이들의 무도를 경외하며 배우는 것. 그것이 그에게 주어진 길이었다.

    고요한 암자 안에는 차향이 은은하게 퍼져 있었다. 하랑은 몸을 일으켜 따뜻한 차 한 잔을 따랐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한 모금 마시니 온몸의 긴장이 사르르 풀리는 듯했다.

    “하랑아, 밖에서 찬 공기 좀 쐴까?”

    방문이 스르륵 열리며 스승님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렸다. 흰 도포를 걸치신 스승님은 그의 얼굴에 미소를 지은 채 서 계셨다. 스승님의 눈빛은 깊은 호수처럼 맑았고, 그 속에 비친 하랑의 모습은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네, 스승님.”

    하랑은 찻잔을 내려놓고 스승님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 박혀 있었다. 은하수가 거대한 강물처럼 흐르는 장관에 하랑은 숨을 헙 들이켰다. 도심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압도적인 풍경이었다.

    “아름답구나.”

    스승님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이 말씀하셨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처럼 조화롭게 흐르고 있단다. 너의 무도 또한 그러해야 해. 흐트러짐 없이, 과함도 부족함도 없이.”

    하랑은 스승님의 옆에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스승님은 일생을 무도에 바쳐, 이제는 무의 경지를 넘어선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가르침은 언제나 강함보다는 마음의 평화와 자연과의 조화에 있었다. 이번 천화비무에 참가하라는 스승님의 지시는, 어쩌면 그에게 세상의 거대한 조화를 직접 체험하고 배우라는 뜻일지도 모른다고 하랑은 생각했다.

    “두렵지 않으냐?” 스승님이 고개를 돌려 하랑을 바라보셨다.

    하랑은 잠시 망설이다 솔직하게 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금 두렵습니다. 세상의 운명을 건 비무라니, 제가 과연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스승님은 하랑의 어깨를 토닥였다. “두려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이다. 중요한 것은 그 두려움에 휩쓸리지 않고, 너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이지. 너는 이미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 하랑아. 너의 깨끗한 마음과 올곧은 정신이야말로 어떤 무예보다도 빛나는 것이니.”

    하랑의 가슴이 따뜻해졌다. 스승님의 격려 한마디는 어떤 명약보다도 그의 불안을 잠재웠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았다. 내일 펼쳐질 비무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라 후회 없는 발걸음을 내디딜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할 게다. 오늘 밤은 푹 쉬어두렴.”

    스승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먼저 암자로 돌아가셨다. 하랑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밤공기를 마셨다. 차가우면서도 상쾌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들어찼다. 고요한 밤의 정적 속에서 멀리서 들려오는 약한 물소리가 오히려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었다.

    ***

    이튿날 아침,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새벽. 하랑은 암자를 나섰다. 어제보다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이었다. 스승님은 이미 비무장으로 향하셨다며, 조심히 가라는 전갈을 남기셨다.

    산길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붉은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오묘한 색감의 하늘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장엄한 풍경 속에서, 하랑은 비로소 세상의 운명이 걸린 대회가 열리는 이유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한 힘의 겨룸이 아니었다. 어쩌면 진정한 깨달음과 조화를 찾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한참을 내려오자, 산 중턱에 자리 잡은 거대한 비무장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 밤하늘에서 봤던 수많은 불빛이 이제는 선명한 건축물로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 년의 세월을 견딘 듯한 고색창연한 기와와 목조 건물이 자연 속에 고즈넉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고즈넉함 속에는 비범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들려오는 듯했다.

    하랑은 비무장 입구로 향하는 길목에서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그는 백호파의 젊은 무인이자, 하랑과는 몇 차례 스쳐 지나간 인연이 있는 청운(靑雲)이었다. 청운은 강건한 체격과 날카로운 눈매를 가졌지만, 무인 특유의 오만함 대신 항상 정중하고 겸손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하랑 도련님, 이곳에서 뵙는군요.”

    청운이 먼저 알아보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청운 도련님도 이곳에 참가하시는군요.” 하랑도 예를 갖춰 인사했다.

    청운은 옅게 미소 지었다. “그렇습니다. 제 스승님께서 명하신 일이라. 하랑 도련님은 역시… 예상했던 대로 참가하시는군요.”

    “예상이라니요?” 하랑이 의아한 듯 물었다.

    “하랑 도련님께서는 비록 나이가 어리시지만, 그 내공의 깊이는 이미 저와 같은 평범한 무인들과는 다르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도련님의 스승님 또한… 세상의 존경을 한몸에 받는 분이시니.” 청운의 눈빛에 존경심이 깃들어 있었다.

    하랑은 쑥스러운 듯 살짝 미소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청운 도련님. 저는 그저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를 뿐입니다.”

    두 사람은 비무장으로 향하는 길을 함께 걸었다. 주변에는 각 문파의 고수들과 그들의 제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비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함께 묘한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어떤 이는 굳은 표정으로 검을 만지고 있었고, 어떤 이는 깊은 명상에 잠겨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소란스럽거나 무례하게 행동하는 이가 없었다. 마치 신성한 의식을 앞둔 사람들처럼, 경건함이 비무장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듯했다.

    “저기 좀 보세요, 하랑 도련님.” 청운이 저만치 떨어진 곳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한 여인이 단정하게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지만, 무엇보다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그녀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였다. 비단 옷을 입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고상하고 맑은 기품이 흘러넘쳤다. 그녀의 주변만 유독 평온한 듯, 소란스러운 기운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천목산의 설아(雪兒) 낭자입니다.” 청운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녀는 이번 비무의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한 분이시죠. 그 나이에 벌써 설원검법을 완성했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하랑은 설아 낭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겨울날의 호수처럼 맑고 깊었지만, 그 안에는 굳건한 의지와 흔들리지 않는 평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경쟁자라는 생각보다는, 저토록 고고한 무도를 가진 이와 겨룰 수 있다는 사실에 은근한 기대감이 샘솟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무도를 가졌겠군요.” 하랑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아름답다고 표현하시다니, 역시 하랑 도련님은 다르시군요. 대부분은 그녀의 강함에만 주목하는데요.” 청운이 빙긋 웃었다.

    비무장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펼쳐져 있었다. 그 둘레에는 수많은 관중석이 마련되어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곳은 비어 있었다. 오직 심판석과 주요 문파의 수장들이 앉을 상석만이 준비되어 있었다.

    “천화비무는 일반 관중을 받지 않습니다. 오직 참가자들과 그들을 이끌고 온 스승들만이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볼 수 있습니다.” 청운이 덧붙였다. “세상의 운명이 걸린 일은, 그만큼 신중하고 조용하게 치러져야 한다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하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랬다. 이곳의 공기는 다른 어떤 비무대회와도 달랐다. 승리만을 위한 혈투의 장이 아니라, 마치 무도에 대한 깊은 탐구와 성찰이 이루어지는 고귀한 도량 같았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심판석에 백발의 노인 한 분이 조용히 자리했다. 그는 온화한 인상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세월의 풍파를 모두 겪은 듯 깊고 현명했다. 그가 등장하자 비무장 안의 모든 웅성거림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마치 물결이 잔잔해지는 것처럼, 모든 이들이 그 노인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침묵했다.

    노인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도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서려 있었다.
    “모두들, 이곳 천화비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노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비무장 전체에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수백 년 만에 다시 열린 이 비무는, 단순히 힘을 겨루는 자리가 아닙니다. 각자가 수련해 온 무도의 깊이를 드러내고, 그 깨달음을 통해 세상의 조화를 이끌어낼 ‘세상지기(世上之器)’를 찾는 고귀한 의식입니다.”

    하랑은 숨을 죽이고 노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하지 마십시오. 오직 여러분의 정신과 육체가 하나 된 무도를 보여주십시오. 서로의 무도를 존중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가십시오. 그리하여, 진정으로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줄 그릇이 누구인지, 하늘의 뜻을 받들어 찾아낼 것입니다.”

    노인의 말이 끝나자, 비무장 곳곳에서 낮게 읊조리는 감탄사와 함께 알 수 없는 기운들이 교차했다. 그것은 긴장의 기운이기도 했고, 깨달음의 기운이기도 했다. 하랑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곳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무의 세계였다.

    “첫 번째 비무를 시작하겠습니다. 서쪽 비무대에는 북천문의 천우(天佑)와 남궁세가의 남궁진(南宮眞)이 오르십시오.”

    심판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비무장 한가운데의 네 개의 거대한 비무대 중 하나로 두 명의 무인이 걸어 나왔다. 한 명은 굳건한 체격의 중년 무인, 다른 한 명은 단정한 인상의 젊은 무인이었다. 둘 다 한눈에 봐도 오랜 수련을 거친 고수들이었다.

    하랑은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시작이었다. 세상의 운명을 건 고수들의 비무. 그는 이곳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그의 마음속에서는 긴장감과 함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평화로운 기대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과정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힐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 크툴루 신화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제1화: 균열의 서재

    **[장면 전환]**

    **#1. 흐릿한 창밖, 눅눅한 편의점 안**

    **[배경]** 늦은 밤. 빗방울이 유리창을 따라 미끄러져 내리고 있다. 낡은 편의점의 형광등은 위태롭게 깜빡이고, 계산대 뒤에 앉은 남자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현 (내레이션)**:
    세상에 완벽한 건 없다고들 한다. 하지만 내 삶은 완벽하게 ‘없는’ 것들로 채워져 있었다. 통장 잔고, 희망, 그리고… 다음 달 월세.

    **[클로즈업: 이현의 손. 닳아빠진 지갑에서 몇 장 안 되는 지폐를 꺼내 세는 모습.]**

    **손님**: (문을 열고 들어오며) 저기, 담배 한 갑이랑… 아메리카노 하나요.

    **이현**: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들며) 네.

    **[장면 전환]**

    **#2. 대학 도서관, 고문서 열람실**

    **[배경]** 낮. 시간은 흘러 다음 날,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하늘은 흐리다. 이현은 어둠침침하고 먼지 가득한 도서관의 한 켠, ‘특수 자료실’이라고 적힌 팻말 아래 앉아있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 고서 특유의 곰팡이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공기 중에 맴돈다.

    **이현 (내레이션)**:
    미술사 전공이라고 하면 다들 낭만을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고색창연한 먼지와 씨름하는 게 대부분이다. 특히 이런 곳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 백 년은 된 것 같았다.

    **[이현의 시점: 책장 사이. 무수한 낡은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그의 눈은 그 중에서도 유독 이질적인 한 권에 멈춘다.]**

    **이현**: (혼잣말) 이런 게 여기 있었나…?

    **[클로즈업: 문제의 책. 다른 책들 사이에서 어둡고 칙칙하게 빛나고 있다. 겉표지는 나무 같기도 하고, 가죽 같기도 한 알 수 없는 재질로 덮여 있다. 철제 장식이 군데군데 박혀 있고, 글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상형문자로 빼곡하다. 책의 두께는 상당하다.]**

    **이현**: (손을 뻗어 책을 만진다) 으음… 촉감이… 묘하네.

    **[책을 만지는 순간, 이현의 손끝에 차가운 기운이 스친다. 동시에 희미한 ‘웅…’ 하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리는 것 같다.]**

    **이현**: (미간을 찌푸리며) 뭐지?

    그는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것도 없다. 조용하고 고요할 뿐. 그는 단순한 착각이라고 생각하며 책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책은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책을 테이블에 올려놓는 소리: 쿵.]**

    **이현**: (책표지의 문양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이건… 어떤 언어도 아닌데. 단순한 그림인가? 아니, 배열이 너무 규칙적이야.

    **[클로즈업: 책 표지의 기묘한 문양.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의 촉수처럼 뒤틀리고 얽혀 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이현은 조심스럽게 책의 잠금장치를 풀어낸다. 낡고 녹슨 쇠붙이가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열린다. 책장을 펼치자, 고서 특유의 퀴퀴한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향이 코를 찌른다.

    **이현**: (작게 기침하며) 으읍…

    **[클로즈업: 책의 첫 페이지. 종이는 일반적인 종이와 달리 짙은 회색빛을 띠고 있으며, 그 위에 알 수 없는 기호와 그림들이 빽빽하게 그려져 있다. 그림들은 기하학적이면서도 생물학적인 형태를 띠고 있어 혼란스럽다.]**

    **이현**: (내레이션)
    나는 수많은 고문서와 고대 유물을 접해왔지만,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그 어떤 문명권의 양식과도 일치하지 않는,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과 글자를 천천히 훑어본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이현의 시점. 책의 글자들이 미묘하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인다. 시야가 흐려졌다가 다시 선명해진다. 희미한 웅얼거림이 멀리서 들려오는 듯하다.]**

    **이현**: (머리를 감싸 쥐며) 으윽… 머리야…

    책에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들자, 익숙했던 자료실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진다. 낡은 책장들이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갈비뼈처럼 보이고, 그 사이사이에 어두운 그림자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착각이 든다.

    **이현**: (심장이 두근거린다. 동공이 흔들린다.) 뭐지? 내가 피곤해서 그런가…?

    그는 애써 평정을 찾으려 노력하며, 서둘러 책을 덮고 잠금장치를 다시 채웠다. 다시 주변을 둘러보니,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꿈틀거리던 그림자도, 갈비뼈 같던 책장도, 더 이상 이질적인 것은 없었다.

    **이현**: (한숨) 하아… 과로했나 보다.

    **[장면 전환]**

    **#3. 대학 카페테리아**

    **[배경]** 활기찬 카페테리아. 이현은 유진과 마주 앉아있다. 유진은 이현의 멍한 표정을 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유진**: 너, 안색이 왜 그래? 어제 야근했냐?

    **이현**: 아니, 그냥… 자료실에서 좀 이상한 책을 봤거든.

    **유진**: 또 네 ‘오컬트 취향’ 발동한 거야? 맨날 기묘한 것만 찾아다니더니. 그래서? 뭔가 대단한 거라도 발견했어?

    **이현**: 대단한 건 아니고… 그냥 좀… 기분이 묘했어. 표지에 처음 보는 글자들이랑 그림들이 잔뜩 그려져 있었는데, 그걸 보니까 갑자기 머리가 아프면서… 자료실이 좀 이상하게 보이더라.

    **유진**: (피식 웃으며) 야, 너 잠 부족해서 그래. 밤새 게임이라도 했어? 아니면 드디어 대작 논문이라도 쓰는 거냐? 환각까지 본다는 걸 보면.

    **이현**: (시무룩하게) 환각은 아니야… 진짜 이상했어.

    **유진**: (손을 흔들며) 됐고, 밥이나 먹어. 이상한 책 때문에 스트레스받지 말고. 졸업 논문이나 신경 써, 인문대생의 숙명 아니겠어?

    유진의 현실적인 말에 이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어색하게 웃어넘길 뿐이었다. 아마 유진의 말이 맞을 것이다. 그저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이겠지. 하지만 그의 가방 속에 든 책의 무게는 이상하리만치 무겁게 느껴졌다.

    **[장면 전환]**

    **#4. 이현의 자취방, 한밤중**

    **[배경]** 좁고 낡은 자취방. 창문 밖에서는 자동차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이 들린다. 이현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잠이 오지 않는다.

    **이현 (내레이션)**:
    유진의 말처럼, 단순한 피로였을까. 하지만 그 책의 이질적인 느낌은 여전히 생생했다. 마치 내 머릿속에 각인이라도 된 것처럼.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그 책을 다시 꺼냈다. 조심스럽게 책장을 펼치자, 희미한 빛이 책에서 새어 나오는 듯했다.

    **[클로즈업: 책의 글자들. 이현이 손가락으로 글자를 따라 훑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그의 머릿속에서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울리는 듯했다. 그것은 언어라기보다는 순수한 개념의 흐름 같았다. 혼돈, 공허, 영원… 그리고 거대한 그림자.

    **이현**: (머리를 움켜쥐며) 으으…

    그는 다시 책을 덮고 눈을 감았다. 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은 마치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는 바다처럼 요동치기 시작했다.

    **[장면 전환]**

    **#5. 악몽 혹은 현실의 틈새**

    **[배경]** 암흑.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이현은 스스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중력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공간.

    **이현**: (외침) 여기가 어디야…?

    그때,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건물 같기도 하고, 살아있는 생명체 같기도 한, 기하학적으로 불가능한 형태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촉수들, 어둠을 삼키는 듯한 칠흑 같은 색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무한한 공포.

    **[클로즈업: 이현의 눈. 공포에 질려 동공이 한없이 확장되어 있다.]**

    **알 수 없는 목소리**: (머릿속에서 직접 울려 퍼지는 듯한)
    *…잊혀진 자들의 지식… 현실의 틈새… 존재의 경계…*

    이현은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동시에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클로즈업: 이현의 침대 위.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격렬하게 몸부림친다. 손이 떨린다.]**

    **이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하아… 하아… 꿈… 꿈이야…

    그는 벌떡 일어났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자, 좁은 자취방의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 밖은 아직 새벽녘인지 어둑했다.

    **이현**: (내레이션)
    꿈이었다. 그래, 끔찍한 악몽. 하지만…

    **[클로즈업: 책상 위, 그 고대의 책. 책 표지의 알 수 없는 문양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그리고 책 주변의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이는 듯하다.]**

    이현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이라고 애써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벽에 닿는 순간, 그는 얼어붙었다.

    **[클로즈업: 이현의 방 벽. 희미하게, 방금 꿈에서 본 것 같은 기하학적인 문양의 잔상이 벽에 아른거린다. 마치 벽지가 찢어져 현실의 틈새가 드러난 것 같은 모습.]**

    **이현**: (떨리는 목소리) 이게… 이게 뭐야…?

    문양은 희미했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 문양에서, 아까 자료실에서 들었던 그 웅얼거림이 다시금 들려오는 듯했다.

    **[클로즈업: 이현의 얼굴. 공포와 혼란이 뒤섞여 있다. 그의 시선은 다시 그 책으로 향한다.]**

    이현은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단순한 우연이나 피로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 그 책은… 분명히 무언가를 불러오고 있었다. 현실에 존재해서는 안 될 어떤 균열을.

    **이현 (내레이션)**:
    그때 깨달았다. 나는 그저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한 게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살던 세상의 끝을 보았다.

    **[클로즈업: 책.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알 수 없는 문양들.]**

    **[장면 종료]**

  • 무협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청룡학원.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유서 깊은 마도학원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엘리트’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고고한 비룡의 기상이 서린 듯 솟아오른 웅장한 누각들, 영기가 충만한 연무장, 그리고 밤하늘을 수놓는 학도들의 영술 연습 광경까지. 모든 것이 완벽하고, 모든 것이 이상적이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말이다.

    진호는 그런 완벽함과는 거리가 먼 학생이었다. 그는 비록 청룡학원에 발을 들였지만, 뛰어난 재능으로 입학한 수재들과는 달리 간신히 문턱을 넘은 평범한 축에 속했다. 오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영기 운용 시험에서 실수를 연발한 끝에, 재시험 과제로 ‘밤그림자초’ 세 뿌리를 구해오라는 지령을 받았다. 밤그림자초는 어둠 속에서 영기를 흡수하며 자라나는 희귀한 약초로, 학원 내의 약초원에선 자라지 않는 종류였다.

    “젠장, 밤그림자초라니… 이걸 어디서 구하라고.”

    진호는 학원 외곽, 오래된 서고 뒤편의 허름한 창고 벽에 기대어 투덜거렸다. 밤그림자초는 주로 영기가 탁하고 음습한 곳에서 발견되는데, 학원 내에서는 그런 곳이 극히 드물었다. 학원 뒤편의 흑영산 깊은 곳에 가야 겨우 몇 뿌리를 찾을 수 있을까 말까였다. 그러나 산은 일반 학도의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었다.

    “뭐라도 단서가 있지 않을까…”

    진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창고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낡은 서가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먼지 쌓인 잡동사니들이 아무렇게나 던져져 있었다. 밤그림자초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오래된 지리서나 약초학 서적이라도 찾아볼 생각이었다.

    책장 사이를 헤매던 진호의 발이 무언가에 걸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휘청거렸다. 낡은 마도구 상자였다. 상자를 걷어차듯 옆으로 밀어내자, 바닥의 큼지막한 석판 하나가 삐걱거렸다. 이상한 느낌에 진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석판을 자세히 살폈다. 다른 석판들과는 달리, 이 석판은 가장자리에 희미한 균열이 가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한기가 새어 나왔다.

    “이게 뭐지?”

    진호는 손에 들고 있던 작은 영등을 내려놓고, 석판의 틈새에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손끝을 감쌌다. 그는 조심스럽게 석판을 밀어보았다. 처음에는 꼼짝도 않던 석판이, 이내 깊은 탄식을 내뱉는 듯한 소리를 내며 스르륵 옆으로 밀려났다.

    그 아래는 어둠이었다. 아찔한 심연이 펼쳐진 듯한 검은 구멍. 코를 찌르는 습하고 곰팡이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역겨우리만치 달콤한 핏빛 향기. 진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학원 지하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그는 망설였다.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밤그림자초를 구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함께, 미지의 것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잠깐만… 이 아래라면, 밤그림자초가 있을지도 몰라.”

    진호는 영등의 영력을 강화해 빛을 밝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어둠 속으로 내려섰다. 좁고 가파른 계단은 영겁의 세월이 흐른 듯 닳아 있었고, 벽면에는 이끼와 곰팡이가 두텁게 앉아 있었다. 내려갈수록 한기는 더욱 강해졌고, 공기는 폐부를 짓누르는 듯 무거워졌다. 단순한 냉기가 아니었다. 심장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본능적인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냉기였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계단은 끊어지고, 진호의 발은 넓은 통로에 닿았다. 통로의 벽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두운 돌벽에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그려진 문양들은 흡사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경고인지, 아니면 봉인 의식의 일부인지 알 수 없었으나,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호는 숨을 죽인 채 발걸음을 옮겼다. 통로의 끝에는 거대한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역시 기괴한 문양으로 가득했고, 그 중앙에는 거대한 쇠사슬이 여러 겹으로 얽혀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다. 진호는 문에 손을 대 보았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 너머로, 희미하게 진동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때였다. 철문 너머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툭… 툭… 툭…’

    마치 뼈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 혹은 굳은살이 단단한 벽을 긁는 듯한 소리. 불규칙하면서도 섬뜩한 리듬이었다. 진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쿵쾅거려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용기를 내어 철문 틈새로 영등의 빛을 비춰보았다. 좁은 틈새 너머로 보이는 것은, 더욱 깊은 어둠과, 그 어둠 속에 아련하게 빛나는 수많은 붉은 점들이었다. 마치 수십 개의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착각. 그러나 그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그 붉은 점들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는 거대한 형체였다.

    거대한… 무언가.

    그것은 살아있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나무뿌리처럼 거대하고 뒤틀려 있었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촉수들이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촉수 사이사이에는 이따금 날카로운 뼈 같은 돌기들이 솟아 있었고, 붉은 점들은 그 돌기 끝에서 깜빡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 움직이는 형체 주변으로, 희미한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둡고 탁한 연기. 그 연기는 거대한 촉수들을 감싸며 위로, 위로 솟아올랐다. 마치… 이 학원의 영기 흐름과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진호의 머릿속에서 섬뜩한 가설이 스쳤다.

    이 학원의 영기… 이 아래에 봉인된 ‘무언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과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이 학원은, 이 끔찍한 존재의 힘을 빨아들여 번성하고 있는 게 아닐까?

    ‘끼이이익…’

    갑자기 철문 너머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붉은 점들이 일제히 진호를 향해 고정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마치 존재의 근원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듯한 끔찍한 고통과 분노, 그리고 지독한 갈망이 정신을 잠식하는 듯했다. 진호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때, 저 멀리 통로 끝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오고 있었다.

    진호는 이성을 부여잡았다. 들키면 안 된다. 절대로. 그는 철문에서 재빨리 손을 떼고, 영등의 불빛을 최소화하며 왔던 길을 되짚어 달리기 시작했다.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미친 듯이 울렸다. 폐가 찢어지는 듯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계단을 뛰어 올라 창고로 돌아온 진호는, 석판을 다시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상자로 입구를 가리고, 그대로 창고를 뛰쳐나왔다.

    찬 바람이 불어오는 학원 연무장에 도착해서야 진호는 겨우 몸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공포와 충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청룡학원 지하. 그곳에는 단순히 밤그림자초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상상조차 불가능한 끔찍한 금기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금기는, 어쩌면 이 위대한 학원의 뿌리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진호의 온몸을 옥죄었다.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평화롭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진호에게 그 빛은 더 이상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어둠 속에 갇힌 희미한 등불 같았다. 언제든 꺼질 수 있는, 위태로운 빛.

    진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대체… 저건… 뭐였지?”
    그리고 그 질문은, 그의 평범했던 학원 생활을 영원히 바꿔놓을 서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