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달빛이 청운산의 영봉(靈峰)을 희미하게 비추던 밤, 천우는 무영과 함께 절벽 끝에 서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는 전설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천심령초(天心靈草)’가 푸른 기운을 뿜으며 피어 있었다. 이 영초는 백 년에 한 번 피어나는 신물로, 기봉(氣峯) 단계의 고수도 한순간에 현성(玄聖)의 경지에 오를 수 있게 하는 기연이었다.
“천우야, 우리가 드디어 해냈어! 스승님도 해내지 못했던 일을 우리가 해냈다!” 무영은 흥분에 겨워 천우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순수한 기쁨과 경외심이 교차했다.
천우 역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 무영아. 네가 아니었다면 이 봉인된 결계를 뚫을 생각조차 못했을 거야. 우리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구나.”
그들은 청운문에서 형제처럼 자랐다. 천우는 압도적인 무공 재능을 타고났지만, 무영은 기민한 두뇌와 기발한 술법 지식으로 이를 보완했다. 둘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완벽한 짝이었다. 문파의 모든 이들이 그들을 ‘청운 쌍벽’이라 칭하며 미래를 기대했다.
천심령초를 취하기 위해 결계에 손을 뻗으려는 순간, 무영이 천우의 팔을 세게 붙잡았다.
“천우야, 잠깐.” 무영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게 깔렸다.
천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래?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했느냐?”
무영의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달빛에 길게 늘어졌다. 그의 눈빛은 순간, 천우가 알지 못하는 차가운 빛으로 번뜩였다.
“아니, 그저… 네가 먼저 취하는 게 좋겠다 싶어서.”
“무슨 소리냐? 이 영초는 우리 둘의 노력이 담긴 것. 반으로 나누어 각자 취하면 되는 것을.” 천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무영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기쁨이 아닌, 섬뜩한 비웃음이었다.
“반으로 나눈다? 어리석은 소리! 천심령초의 효능은 하나를 온전히 취해야만 극대화되는 법. 둘이 나누면 그저 평범한 영약에 불과할 뿐이다.”
천우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게 무슨…”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무영의 손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번개처럼 빠르게 천우의 가슴을 꿰뚫은 것은 무영의 비수였다. 비수는 단순한 흉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천우의 단전(丹田)을 향해 똑바로 박혀들었다.
“크아악!”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천우는 자신의 가슴에 박힌 비수를, 그리고 그 비수를 쥔 무영의 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내려다보았다.
“무영… 이게 무슨 짓이냐?”
무영의 얼굴에는 더 이상 순수함이나 기쁨 따위는 없었다. 오직 탐욕과 냉혹함만이 가득했다.
“무슨 짓이냐고? 네놈의 재능은 너무나 눈부셨어. 너와 함께라면 나는 영원히 네 그림자에 가려질 뿐! 나는 주연이 되고 싶다! 네놈을 딛고 영웅이 될 것이다!”
비수가 깊숙이 파고들자 천우의 단전에서 맹렬한 기운이 뽑혀 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수십 년간 쌓아 올린 그의 내공이 마치 봇물 터지듯 무영의 비수를 통해 흘러 들어갔다.
“이건… 흡성대법(吸星大法)!” 천우는 경악했다. 그것은 문파의 금기된 술법으로, 타인의 내공을 강탈하는 사악한 술수였다.
“크하하하! 이제야 눈치챘나? 이 술법은 내가 오랜 시간 몰래 익혀온 것이다. 네놈의 타고난 천재성이, 나의 기나긴 노력을 완성시켜 줄 것이니! 나의 발판이 되어라, 천우!”
천우는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의 온몸에서 기력이 빠져나가며 육신이 차갑게 식어갔다. 눈앞의 무영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천심령초의 푸른 빛이 무영의 얼굴을 탐욕스러운 녹색으로 물들였다.
“잘 가라, 나의 벗이여. 아니, 나의 발판이여.”
무영은 쓰러진 천우를 향해 냉정하게 말했다. 그리고는 천심령초를 망설임 없이 취했다. 푸른 빛이 무영의 몸을 감싸자 그의 기세가 폭발적으로 치솟았다.
천우의 몸은 절벽 아래 깊은 계곡으로 굴러 떨어졌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보다 더 큰 것은,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다는 지독한 허탈감이었다. 온몸의 내공을 빼앗기고 죽음의 문턱에 선 그는, 자신의 삶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그의 의식 속에서, 무영의 비웃음과 탐욕스러운 얼굴이 마지막 잔상으로 떠올랐다.
***
그로부터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청운문은 무영의 주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는 ‘천심령초’의 힘으로 현성(玄聖)의 경지에 올랐고, 몇 년 전 문파의 장문인(掌門人) 자리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천하에 널리 퍼져, ‘청운신룡(靑雲神龍)’이라 불리며 모든 이의 존경을 받았다. 누구도 그가 과거에 저지른 죄를 알지 못했다.
천우는 죽지 않았다.
뼈만 남은 시신으로 계곡 바닥에 쓰러졌던 그를 우연히 지나가던 한 노승이 발견했다. 노승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오직 수련에만 매진하던 은둔 고수였다. 그는 천우의 내공이 모두 뽑혀 나간 빈껍데기 같은 몸을 보며 알 수 없는 비애를 느꼈고, 그에게서 강렬한 복수심의 기운을 감지했다.
“살고자 하는가? 복수하고자 하는가?” 노승의 물음에 천우는 고개를 끄덕일 힘조차 없었지만, 그의 눈빛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 같았다.
노승은 천우의 기갈이 든 몸에 자신의 내공을 불어넣고, 단전이 훼손된 자만이 익힐 수 있는 역천비법(逆天秘法)을 전수했다. 그것은 정통 무공의 길이 아닌, 육체의 극한을 단련하고 영혼의 힘을 끌어올리는 사도(邪道)의 경지에 가까운 금기된 술법이었다. 고통은 지옥과 같았다. 내공이 없는 상태에서 신체를 개조하고 영혼을 갈아 넣는 수련은 매일 죽음을 맛보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천우는 무영의 얼굴을 떠올릴 때마다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모든 세포는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십 년의 세월 동안, 천우는 과거의 자신을 완전히 지워냈다. 그의 얼굴은 예전의 온화함을 찾아볼 수 없었고, 깊은 상처와 흉터로 뒤덮여 있었다.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검은 옷을 입은 그의 모습은 마치 저승에서 온 사신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청운 쌍벽’의 천우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흑뢰검존(黑雷劍尊)’이라 불리는 그림자 속의 존재였다.
어느 날, 청운문에 천하의 무림 고수들이 운집했다. 무영 장문인의 오십 세 탄신연이었다. 축하의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연회장, 화려한 연등 아래 웃음꽃이 피어났다. 무영은 중앙의 용상에 앉아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였다.
연회장의 문이 강렬한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문틈 사이로 한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검은 옷, 얼굴을 반쯤 가린 가면, 그리고 섬뜩하게 번뜩이는 눈빛. 그의 등장에 연회장의 모든 소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감히, 청운문의 경계를 뚫고 들어오다니! 네놈은 누구냐!” 한 호법이 분노하며 외쳤다.
흑뢰검존, 천우는 아무 말 없이 그 호법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기운이 호법의 몸을 휘감았고, 비명조차 지를 틈도 없이 그의 몸은 그대로 재가 되어 사라졌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고수들의 얼굴에 경악과 공포가 서렸다.
무영의 얼굴에서도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무례한 자! 네놈의 무공은… 전에 본 적이 없다. 누구에게 원한이라도 졌는가?” 무영은 일어서며 물었다. 그의 몸에서는 현성(玄聖)의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천우는 그 기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영을 똑바로 응시했다. 가면 아래로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오랜만이군, 무영.”
무영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 목소리가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했다.
“내 이름을 아는 것을 보니, 정녕 예사로운 자는 아니구나. 허나, 감히 이 청운문에서 난동을 부리다니 용서치 않겠다!”
무영은 주저 없이 손을 들어 천우를 향해 강력한 기공파를 날렸다. 현성 고수의 일격은 산도 가를 수 있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천우는 그 기공파를 가볍게 손으로 쳐냈다. 기공파는 허공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모든 이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현성 고수의 일격을 이렇게 쉽게 막아내다니!
“네놈은 대체… 누구냐!” 무영의 목소리에 더 이상 여유가 없었다.
천우는 천천히 가면을 벗었다.
그의 얼굴은 오랜 고통과 수련의 흔적으로 가득했지만, 무영은 그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옛 친구의 모습을 보았다.
“네놈… 설마… 천우?” 무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래, 나다. 네가 죽었다고 믿었던, 천우.” 천우의 목소리는 한 점 감정 없이 차갑게 울렸다.
“말도 안 돼! 네놈은 분명 내 손에 죽었거늘! 내공을 모두 빼앗긴 채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어떻게 살아 돌아왔단 말인가!” 무영은 공포에 질려 뒤로 물러섰다.
“지옥에서 기어 올라왔다. 네놈에게 복수하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자에게, 그보다 더한 고통을 돌려주기 위해.”
천우는 허리춤에서 흑색의 검을 뽑아 들었다. 검에서는 뇌전(雷電)의 기운이 꿈틀거렸다.
“천우야, 오해야! 나는 그때…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천심령초의 유혹에 내가 잠시 눈이 멀었던 것뿐이다!” 무영은 다급하게 변명했다.
“변명은 필요 없다. 십 년간 나의 온몸을 좀먹은 고통, 나의 영혼을 갈가리 찢었던 배신감… 네놈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천우는 무영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발걸음마다 바닥이 흔들렸다.
“네놈은 나에게서 명예를 빼앗고, 친구를 죽였다.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강탈했다. 이제, 내가 네놈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주마. 네가 쌓아 올린 모든 허울, 네가 누리는 모든 영광… 그리고 네놈의 목숨까지.”
무영은 공포에 질린 채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의 모든 무공이 천우를 향해 쏟아졌다. 하지만 십 년간 지옥 같은 수련을 거친 천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흑뢰검은 번개처럼 번뜩였고, 무영의 방어막은 허무하게 찢겨 나갔다.
“크아악!” 무영의 팔다리에 검상이 새겨졌다. 그의 비명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이것은 네가 나에게 비수를 꽂았을 때의 고통이다.” 천우는 차갑게 속삭였다.
이내 천우의 검이 무영의 단전 부근에 정확히 박혔다. 십 년 전 무영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흑뢰검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무영의 단전을 맹렬히 흡수하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내… 내공이…! 멈춰라, 천우! 멈춰!” 무영은 피를 토하며 절규했다. 그의 얼굴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해졌다.
수많은 무림 고수들이 공포에 질려 숨죽이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의 눈앞에서, 천하의 영웅이라 칭송받던 무영 장문인의 내공이 송두리째 뽑혀 나가는 잔혹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천우의 눈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네놈이 내게서 빼앗은 내공을, 이제 네놈이 빼앗기는 기분을 느껴봐라. 그리고 내가 겪었던 절망 속에서 몸부림쳐라.”
무영의 육체는 급격히 노쇠해졌고,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였다. 현성의 경지에 올랐던 고수는 단전이 파괴된 채, 한순간에 늙고 병든 노인으로 변해 버렸다. 그의 기세는 먼지처럼 사라졌다.
천우는 힘없이 쓰러진 무영을 내려다보았다.
“네놈은 죽지 않을 것이다. 허나, 네놈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잃은 채, 과거의 영광을 되새기며 평생을 후회 속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네놈에게 내리는 나의 처벌이다.”
천우는 검은 기운이 감도는 흑뢰검을 거두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서진 문을 통해 유유히 걸어 나갔다. 그의 뒤로 무영의 절규와 함께, 십 년간 맺혔던 천우의 복수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청운산의 달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천우의 마음속에서는 이제 더 이상 복수심의 불꽃이 아닌, 새로운 시작의 고요한 여명이 떠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