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심리 스릴러 독립적인 단편 소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습기를 머금은 고서적 냄새는 김지훈에게 익숙한 위안이었다. 그는 낡은 아카이브의 가장 깊은 곳, 햇볕 한 조각 들지 않아 항상 서늘한 서고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온 세상을 덮을 듯한 먼지 냄새는 그의 콧속으로 파고들어 목구멍을 칼칼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겹겹이 쌓인 시간의 흔적, 잊혀진 역사와 비밀들이 먼지 속에 잠들어 있을 거라는 기대가 그를 이끌었다.

    지훈은 고개를 숙인 채 손전등 빛에 의지해 곰팡이가 피어오른 나무 선반을 더듬었다. 그의 임무는 수십 년간 방치되어 있던 ‘자료 미정리 구역’의 장서들을 분류하고 디지털화하는 일이었다. 대부분은 가치 없는 잡동사니였지만, 간혹 숨겨진 보물을 발견할 때의 희열은 그 어떤 고된 노동도 잊게 할 만큼 강렬했다.

    그의 손이 한 묶음의 낡은 양피지 꾸러미에 닿았다. 먼지를 털어내자 빛바랜 가죽 끈으로 묶인 두툼한 고문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표지에는 아무런 제목도 없었고, 이상하게도 다른 책들과 달리 아무런 표식도 없었다. 마치 이곳에 속하지 않는 이방인처럼. 호기심이 발동한 지훈은 조심스럽게 가죽 끈을 풀었다.

    “이게… 뭐지?”

    문서는 일반적인 종이가 아니었다. 얇고 어두운, 마치 마른 나뭇잎 같은 질감이었다. 글씨는 그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기묘한 상형문자들이었다. 그는 전문가였지만, 이처럼 완벽하게 낯선 문자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문서의 마지막 장, 마치 얇은 두께의 종이 두 장 사이에 박혀있기라도 한 듯, 한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검은 돌멩이가 박혀 있었다. 매끄럽고 윤이 났지만, 그 빛을 흡수하는 듯한 짙은 어둠을 품고 있는 돌이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돌을 떼어냈다.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돌은 미지근하고 어딘가 불안정한 에너지를 품고 있는 듯했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착각일까?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을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이 돌은 문서와 함께 분류될 것이다. 특별한 것은 없었다. 적어도 그때까진 말이다.

    ***

    그날 저녁, 퇴근길 버스 안에서 지훈은 평소와 다른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옆자리에 앉은 노인이 다급하게 휴대폰을 찾고 있었다. ‘지갑 속에 있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그는 노인의 행동을 무심코 지켜보았다. 노인은 가방을 뒤지고, 주머니를 뒤적이다 결국 지갑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정확히 그가 생각했던 대로였다.

    “우연인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피곤해서 헛생각을 하는 거라고 자신을 다독였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식당에서 우연히 들은 옆 테이블의 대화. ‘오늘 주식 폭락한다는데?’ 그는 그 말을 듣고 무심코 자신의 주식을 매도했다. 오후 뉴스는 전날 밤 예상치 못한 해외발 악재로 인한 주식 시장의 대폭락을 알렸다. 그의 판단은 기적적으로 맞아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주머니 속 검은 돌멩이가 은은하게 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어제 그 돌을 만진 후부터였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도 선명한 경험들이 이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돌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돌은 여전히 검고 매끄러웠지만, 어딘가 생명력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돌을 쥔 채 눈을 감았다.

    순간, 어지러운 영상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마치 오래된 필름 조각처럼 파편화된 이미지들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동료 수진의 흐릿한 얼굴, 그녀가 쥐고 있는 커피잔, 그리고 그 커피잔이 바닥에 떨어져 깨지는 순간. 지훈은 눈을 번쩍 떴다.

    “수진 씨, 그 컵 내려놔요!”

    그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연구실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수진은 당황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 왜요, 선배?”

    그녀가 컵을 테이블 위에 막 내려놓으려는 순간, 옆자리에 있던 동료가 거친 동작으로 팔을 휘두르다 커피잔을 건드렸다. 쨍그랑! 컵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정적이 흘렀다. 수진은 멍한 표정으로 깨진 컵 조각들을 바라보았다. 지훈은 자신의 손아귀에 쥐어진 검은 돌멩이를 보았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분명, 이 돌이, 이 알 수 없는 힘이 그에게 미래를 보여준 것이었다. 혹은, 미래의 한 조각을 ‘살짝’ 흔들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지훈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돌멩이를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점차 대담하게 그 힘을 시험했다. 경마에서 우승마를 알아맞히고, 복권 당첨 번호의 일부를 ‘느껴’냈다. 직장에서는 중요한 보고서의 누락된 부분을 미리 파악하거나, 상사가 원하는 방향을 정확히 예측하여 승진 가도를 달렸다.

    점점 더 그는 사람들 주변에 얽히고설킨 보이지 않는 ‘실타래’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실타래는 사람들의 욕망, 두려움, 계획, 그리고 그들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했다. 그는 그 실타래들을 어렴풋이 보고, 때로는 아주 미세하게 건드려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흐름을 바꿀 수 있었다. 동료 간의 사소한 오해를 만들거나, 상사의 결정을 은근히 조종하는 것은 이제 식은 죽 먹기였다.

    수진은 이제 그를 존경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선배는 정말 천재 같아요. 어떻게 그렇게 모든 걸 다 아세요?”

    그녀의 칭찬에 그는 미소 지었지만, 속으로는 차가운 만족감을 느꼈다. 그래, 나는 천재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이 검은 돌 덕분이었다. 돌은 이제 그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손에서 떼어낼 수 없는, 피와 살처럼 붙어버린 존재. 그의 주머니 속에서 돌은 항상 따뜻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하지만 기쁨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도 커져갔다. 실타래를 만질 때마다 그는 미세한 두통과 함께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밤마다 알 수 없는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는 끝없이 펼쳐진 어두운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수많은 실타래들이 그를 옥죄고 있었고, 그 실타래들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며 그의 몸을 휘감았다. 가장 소름 끼치는 것은, 그 실타래의 끝에 매달린 수많은 얼굴들이 자신을 원망스럽게 노려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지훈은 자신의 힘을 시험하는 것을 넘어선 충동을 느꼈다. 그는 실타래를 통해 사람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섬뜩한 깨달음이었다. 그는 수진에게 호의를 얻기 위해 그녀의 실타래를 만져보았다. 그녀의 무의식에 특정 행동을 심어 넣는 것은 너무나도 쉬웠다. 그녀는 그의 말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했고, 그를 따랐다.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있는 듯했다.

    “수진 씨, 커피 한 잔 가져다줄 수 있어요?”

    “네, 선배.” 그녀는 주저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훈은 그녀의 뒤를 보며 섬뜩한 전율을 느꼈다. 이것은 힘이었다. 순수한, 절대적인 힘.

    하지만 동시에 그는 두려워졌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이 힘이 진정 자신의 의지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돌멩이가 그를 통해 세상을 조종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마치 돌멩이의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그의 사고방식은 점차 왜곡되어갔다. 모든 사람의 실타래가 보였다. 사람들의 가장 깊은 비밀과 욕망, 그리고 취약점이 그의 눈에 투명하게 드러났다. 세상은 온통 실타래로 엮인 거대한 거미줄처럼 보였고, 그는 그 거미줄의 중심에서 모든 것을 조종할 수 있는 거미가 된 듯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거미줄에 자신이 갇힌 것 같았다.

    “그 돌… 혹시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어요?”

    점심시간, 수진이 불쑥 물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이었지만, 지훈은 그녀의 눈빛 속에서 어렴풋한 불안감을 읽었다. ‘어떻게 알지?’ 그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굳었다.

    “무슨 소리예요? 어떤 돌을 말하는 거죠?” 그는 애써 태연한 척 되물었다.

    “선배가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그 검고 윤이 나는 돌이요. 가끔…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마치 저를 꿰뚫어 보는 것 같고, 선배가 그 돌을 만질 때마다 제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지훈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가 눈치챈 건가? 아니면 돌이 그녀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건가? 그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돌은 그저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존재는 이제 그의 주위를 넘어 다른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는 수진의 실타래를 보았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붉고 굵은 실타래가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겨 있었다. 마치 돌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녀의 눈빛 속 불안감은 실타래가 끊어지려는 순간의 발버둥이었다.

    그날 밤, 지훈은 잠 못 이루고 자신의 방에 앉아 돌을 노려보았다. 돌은 그의 손바닥 위에서 여전히 미지근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섬뜩함을 느꼈다. 이 돌이, 어쩌면 그 문서가 설명하던 ‘영혼을 얽매는 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돌을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했지만, 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돌이 그의 의지를 지배하는 듯했다.

    그는 거울을 보았다. 거울 속 그의 눈은 이전보다 훨씬 깊고 어두웠다.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무수한 실타래들이 공기 중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것들은 이제 단순히 ‘보이는’ 것을 넘어, 그의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 그를 옥죄었다. 모든 실타래의 끝에는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고, 그들은 모두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야….”

    그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뇌리에는 수진의 텅 빈 눈동자, 그리고 자신이 의도적으로 조작했던 모든 사건들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는 괴물이었다. 혹은, 괴물이 된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이었다.

    그는 돌을 꽉 쥐었다. 돌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고대의 언어들이 파고들었다. 웅얼거리는 속삭임, 끔찍한 이미지들. 그 돌은 그를 통해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이 세상의 모든 실타래를 자신에게 얽어매려는 것인가?

    지훈은 돌을 자신의 가슴에 꽉 눌렀다. 돌은 그의 살갗에 달라붙는 듯한 기분 나쁜 온기를 발산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아니, 그의 심장이 아니라, 돌이 뛰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돌이 그의 심장이 되어버린 것처럼.

    그는 더 이상 잠들 수 없었다. 밤낮으로 실타래들이 그를 덮쳤다. 그의 눈에 비치는 모든 사람은 실타래에 얽매여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 그는 그들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았고, 그들의 행동을 조종할 수 있었다. 그는 이 세상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는 홀로 남겨졌다.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관계는 실타래로 이어진 조종이었다. 진정한 연결은 사라졌다. 오직 돌과 자신만이 존재했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아카이브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그곳에서, 그는 검은 돌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돌은 차갑게 빛났다. 그때, 문득 잊고 있던 고문서의 마지막 장이 떠올랐다. 그 돌이 박혀 있던, 이해할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가득했던 문서.

    그는 그 문서를 다시 찾아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눈에는 이제 그 상형문자들이 선명하게 해석되기 시작했다.

    『…운명의 실타래를 꿰뚫어 볼지니… 만물을 엮는 자가 될지어다… 허나 명심하라… 실을 잡는 자, 결국 실에 얽매일지니…』

    지훈은 문서를 읽어 내려가며 끔찍한 진실을 깨달았다. 이 돌은 그에게 힘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를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가두었다. 그는 모든 실타래를 볼 수 있었고 조종할 수 있었지만, 결국 그 자신도 이 돌의 가장 큰 실타래에 얽매인 존재였다. 그는 영원히 이 힘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대가로,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가 텅 빈 사무실에 메아리쳤다. 그의 손에 든 검은 돌은 이제 그의 심장처럼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아니, 그의 심장을 완전히 대체해 버린 것 같았다. 그의 눈은 실타래로 가득 찬 세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김지훈이 아니었다. 그는 실타래를 엮는 자, 동시에 실타래에 얽매인 자였다.

    그리고 문득, 그는 아카이브의 가장 깊은 서고에서, 또 다른 낡은 문서와 그 안에 박혀 있던 작은 검은 돌을 발견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 돌은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수많은 시간 동안, 잊혀진 공간에서, 새로운 ‘숙주’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창밖은 어둡고 고요했다. 하지만 지훈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실타래들이 끝없이 얽히고설키며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이제 그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영원히.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1화. 밤의 방문객]**

    **#1. 12층의 잔상**

    **[장면 1]**

    **[장소: 서연의 12층 아파트 거실 – 밤, 자정 무렵]**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 아파트 창문 너머로 삐죽삐죽 솟아오른 빌딩들의 불빛이 얼음처럼 차갑게 반짝인다. 12층의 작은 아파트, 서연의 보금자리.
    자정. 서연은 쭈그려 앉아 노트북 화면에 코를 박고 있었다.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숙명. 마감은 언제나 내일 모레인데 할 일은 산더미다. 반쯤 식은 배달 피자 조각이 놓인 책상 위, 커피 잔에는 얼음이 다 녹아 물이 되어 있었다.

    **서연 (내레이션):**
    또 밤을 새겠네. 내 청춘 돌려도…

    나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어폰에서는 잔잔한 인디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서연의 신경은 온통 모니터 속 이미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벌써 며칠째 이 생활의 반복이었다. 등 뒤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텅 빈 공간의 고요함만이 존재했다.

    **[효과음: 달그락! (주방 쪽에서 아주 작게, 컵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

    서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어폰을 빼지 않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창문을 열어둔 것도 아닌데. 바람? 설마.

    **서연:**
    뭐지? 헛것이 들리나.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피곤함 때문일 거라고, 착각일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잠시 후, 잊어버린 듯 다시 작업에 몰두하는 서연의 뒷모습. 거실 한쪽 벽에 걸린 낡은 벽시계는 묵묵히 째깍거리고 있었다.

    **[장면 2]**

    **[장소: 서연의 침실 – 새벽 2시경]**

    작업을 끝내고 겨우 잠자리에 든 서연. 스마트폰 액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이불 속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늦게까지 폰을 만지작거리다 겨우 잠이 들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효과음: 깜빡… 깜빡… (침대 옆 스탠드 불빛이 불안정하게 깜빡거린다)]**

    서연의 눈이 다시 떠졌다. 그녀의 시선은 침대 협탁 위 작은 스탠드에 고정되었다. 낡았지만 여태껏 이런 적은 없었는데.
    손을 뻗어 스탠드 갓을 툭툭 쳐봤다. 언제 그랬냐는 듯 불빛은 다시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서연:**
    고장났나? 아, 진짜 피곤한데…

    몸을 뒤척여 베개에 얼굴을 묻으려는데, 문득 눈앞에 잔상이 스쳤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방문이… 닫혀 있던 방문이 아주 살짝, 새끼손가락만큼 열려 있었다.

    **서연 (내레이션):**
    분명히 닫았는데…

    기분 탓이겠지. 요즘 잠을 못 자서 그런가 보다. 서연은 애써 외면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장면 3]**

    **[장소: 서연의 아파트 전체 – 새벽 3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서연의 눈이 번쩍 뜨였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뭔가… 뭔가 이상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죽은 듯한 침묵이 아파트 전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 침묵은 오히려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공기마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마치 한겨울 밤처럼.

    벌떡 일어난 서연은 주위를 둘러봤다.
    침대 옆 스탠드는 꺼져 있었고, 방 안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아까는 살짝 열려 있었을 뿐인데.

    **서연:**
    (속삭이듯) 누구 있어…?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방문 너머 어두컴컴한 복도에서, 분명히 ‘무언가’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다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
    그때였다.

    **[효과음: 찌이이이이익… 팟! (거실 TV가 갑자기 켜지며 노이즈 화면이 가득 찬다. 엄청난 소음.)]**

    심장이 발밑으로 쿵 떨어지는 듯한 충격.
    서연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
    TV 화면은 희뿌연 노이즈로 가득했고, 그 속에서 희미하게 사람 형상 같은 것이 어른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이내 노이즈가 사라지고, 화면에는 한 아파트의 내부가 비쳤다. 바로 서연의 아파트였다. 아니, 정확히는 서연의 아파트 거실. 텅 비어 있는 거실.
    하지만 화면은 서서히, 아주 천천히 거실을 훑어나갔다. 마치 누군가가 직접 카메라를 들고 움직이는 것처럼.
    그리고 카메라가 멈춘 곳은… 바로 서연의 침실 문 앞.
    화면 속에서 문이 서서히 열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문틈 사이로, 시커먼 그림자가 스며들고 있었다.
    서연은 눈을 감았다. 제발 꿈이길. 제발.

    **#2. 깨진 유리조각**

    **[장면 4]**

    **[장소: 서연의 아파트 거실 – 낮]**

    해는 떴지만, 서연의 얼굴에는 여전히 어제의 공포가 가득했다. 그녀는 거실 바닥에 흩어져 있는 깨진 유리조각들을 보고 있었다. 어젯밤 TV가 켜지기 직전, 주방에서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서연이 아끼던 머그컵이었다.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서연은 친구 지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서연:**
    야… 지혜야… 나 어제… 어제 진짜 이상했어.

    **지혜 (수화기 너머):**
    어? 뭔데?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또 밤새 작업했냐?

    **서연:**
    아니… 그게 아니고… 어젯밤에… 갑자기 TV가 저절로 켜지고… 문도… 문도 혼자 열리고 닫히고… 냉장고 문도…

    말문이 막혔다. 믿지 않을 게 뻔했다.

    **지혜:**
    뭐? 야, 너 잠을 너무 못 자서 헛것 보는 거 아니야? 아니면 피곤해서 잠꼬대라도 했든가. 낡은 아파트라 그래. 바람이라도 불면 그런 일도 있지.

    지혜의 목소리는 여전히 태평했다. 서연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서연:**
    아니라니까! TV가… TV에… 우리 집 거실이 나왔어… 내가 자는 방 문이… 열리는 게 보였고…

    **지혜:**
    (웃음) 야, 너 공포 영화 너무 많이 봤다. TV가 갑자기 켜지는 건 오래된 아파트에서 종종 있는 일이야. 정전되거나 접촉 불량이면 그럴 수 있지. 너무 오바하는 거 아니야?

    지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효과음: 와르르! (책상 위 펜꽂이가 저절로 쓰러지며 펜들이 바닥에 흩어진다)]**

    **서연:**
    꺄아아아아아악!!

    서연은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전화기 너머 지혜도 놀란 목소리였다.

    **지혜:**
    야! 서연아! 무슨 일이야?! 너 괜찮아?!

    **서연:**
    (울먹이며) 지혜야… 지혜야… 나 진짜 미치겠어… 펜꽂이가… 펜꽂이가 방금 저절로 쓰러졌어…

    **지혜:**
    …뭐? 야… 너 진짜… 괜찮은 거 맞지? 내가 지금 갈까?

    **서연:**
    응… 와줘… 제발 와줘… 나 혼자 못 있겠어… 나 진짜 무서워…

    전화를 끊은 서연은 바닥에 흩어진 펜들을 보며 몸을 떨었다. 더 이상 ‘착각’이라고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아파트에는, 이 집에, 자신 혼자가 아니었다.

    **[장면 5]**

    **[장소: 서연의 아파트 거실 – 밤]**

    지혜가 오기로 한 시간은 저녁 8시였다. 하지만 지금은 밤 10시. 지혜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내일 아침에나 올 수 있게 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서연은 혼자였다.
    집 안의 모든 불을 켜두었다. 거실등, 스탠드, 주방등, 심지어 화장실 불까지. 환하게 밝은 집 안은 오히려 그 밝음 때문에 그림자가 더 선명하게 드리워지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차라리 어두운 편이 나았을까.

    **서연 (내레이션):**
    지혜야… 빨리 와줘… 나 진짜 죽을 것 같아.

    너무 무서웠지만, 차마 집을 비울 수도 없었다. 무언가에 붙잡혀 있는 듯한 기분.
    창밖에서는 찬 바람이 불어와 창문을 흔들고 있었다. 밖의 풍경은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러나 이 집 안의 고요함은 달랐다.
    숨 막히는, 누군가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침묵.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 한쪽에 놓인 전신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거울 속 서연의 얼굴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때였다.
    거울 속 서연의 등 뒤로, 아주 희미한 검은 그림자가 ‘휙’ 하고 빠르게 지나갔다.
    숨이 멎는 듯한 착각.
    서연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벽만이 서연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연:**
    (중얼거림) 내가… 내가 뭘 본 거지…?

    다시 거울을 봤다.
    거울 속 서연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의 모습 뒤로, 검은 그림자가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거울 속 거실 바닥에…
    물 자국 같은 것이 보였다. 축축하게 젖은, 발자국 모양의 자국이.
    서연은 얼른 거울에서 눈을 돌려 실제 바닥을 내려다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마른 바닥뿐이었다.

    **서연 (내레이션):**
    거울… 거울이…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는데, 순간 발이 무언가에 미끄러졌다.
    아주 미세한 물기였다.
    놀라 바닥을 내려다보니, 발밑에 방금 전 거울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축축한 발자국 모양의 물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바로 서연의 발치에.
    그것은 방금 서연이 서 있던 곳에서부터, 천천히, 서연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장면 6]**

    **[장소: 서연의 아파트 거실 – 밤, 절정]**

    발자국은 서연의 발끝에서 멈춰 있었다. 차가운 물기.
    공포에 질린 서연은 휴대폰을 꺼내 지혜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 손가락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서연:**
    (흐느끼며) 지… 지혜야… 지혜야…

    그때였다.

    **[효과음: 팟! (거실 불이 갑자기 꺼진다. 완전한 어둠.)]**

    모든 불빛이 사라졌다. 눈앞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서연의 거친 숨소리와 심장 박동만이 들려왔다.

    **[효과음: 쉬이이이익… (아주 차가운 숨결이 귓가를 스치는 소리)]**

    **??? (속삭임):**
    크흐흐흐…

    바로 귀 옆에서, 싸늘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연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차갑고 축축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 (목소리):**
    혼자 아니야…

    TV 화면이 다시 켜졌다. 노이즈 가득한 화면에 희미하게 글씨가 떠올랐다.
    **[텍스트 효과: <혼 자 아 니 야>]**

    그 글씨를 마지막으로, 서연의 의식은 암흑 속으로 가라앉았다.

    **— 1화 끝 —**

  • 던전 탐험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잿빛 도시의 심연: 첫 발자국**

    **에피소드 1: 삭막한 재의 그림자**

    **장면 1**

    **[1컷]**
    (넓게 펼쳐진 폐허 도시의 전경. 하늘은 잿빛 먼지로 뒤덮여 희미한 태양만이 겨우 그 존재를 알린다. 앙상한 철근 구조물들이 뼈대처럼 솟아 있고, 그 사이를 덩굴과 이끼가 뒤덮은 채 퇴색한 빌딩 잔해들이 듬성듬성 서 있다. 지면은 갈라지고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로 가득하며, 이따금씩 섬뜩한 형상의 돌연변이 식물들이 붉거나 검은색으로 꿈틀거린다.)

    **내레이션:**
    세상이 잿빛으로 물든 지 얼마나 되었을까.
    달력도, 시계도 의미 없는 나날들.
    오늘도 그저,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내야 한다.

    **[2컷]**
    (주인공, 지혁의 뒷모습. 낡고 헤진 방호복을 입고, 등에는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다. 손에는 녹슨 철근을 덧대어 만든 조악한 칼날이 묶여 있는 장총을 들고 있다. 비쩍 마른 몸이지만, 걸음걸이에는 끈질긴 생존자의 무게가 실려 있다. 잿빛 먼지가 가득한 골목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걷는다.)

    **지혁 (독백):**
    벌써 사흘째다.
    제대로 된 식량은 바닥났고, 물도 한 모금 남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간…

    **[3컷]**
    (지혁의 시선을 따라가는 클로즈업. 낡은 상점 간판이 기울어진 채 벽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간판의 글자는 지워지다시피 했지만, ‘편의점’이라는 글자만 겨우 알아볼 수 있다.)

    **지혁 (독백):**
    이 근처에 분명 보급품이 있을 텐데.
    아니, 있었겠지.
    아직 남아있을 리 없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4컷]**
    (지혁이 폐허가 된 편의점 안으로 들어선다. 유리창은 깨져 있고, 선반들은 모두 엎어져 내용물은 텅 비어 있다. 바닥에는 부패한 잔해들과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다. 희망 없이 둘러보는 지혁의 얼굴에 피로감이 역력하다.)

    **지혁 (독백):**
    역시… 아무것도 없다.
    쓸모없는 쓰레기뿐.

    **[5컷]**
    (지혁이 한숨을 쉬며 돌아서려는 순간, 그의 발밑에서 무언가 반짝인다. 컷은 바닥에 놓인, 흙먼지에 뒤덮였지만 한쪽 면이 깨져 내부가 드러난 낡은 휴대용 손전등을 클로즈업한다. 희미하게 깜빡이는 빛이 보인다.)

    **지혁 (독백):**
    이건…?

    **[6컷]**
    (지혁이 손전등을 주워 든다. 깨진 틈새로 내부 기판이 드러나 있지만, 놀랍게도 작동하고 있다. 지혁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진다. 손전등 빛이 어두운 편의점 구석을 비추자, 먼지에 뒤덮인 오래된 지도가 한 장 보인다. 종이는 너덜너덜하지만, 찢어지지 않은 채 남아있다.)

    **지혁 (중얼거림):**
    이런 곳에…

    **[7컷]**
    (지혁이 손전등으로 지도를 비춘다. 지도는 이 일대의 폐허 도시를 대략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한 지점에 붉은색 잉크로 큼지막하게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그 원 안에는 ‘균열’이라는 글자가 필기체로 휘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글씨로 ‘희귀 광물, 식물…’이라고 쓰여 있다.)

    **지혁 (독백):**
    균열…
    ‘심연의 균열’이라 불리는 이계의 입구.
    그곳엔… 희귀한 자원이 있다고 알려져 있지.
    동시에, 죽음도 도사리고 있지만.

    **[8컷]**
    (지혁의 얼굴 클로즈업. 피로했던 눈빛이 순간적으로 날카롭게 변한다. 입술을 굳게 다문다.)

    **지혁 (독백):**
    다른 방법이 없다.
    살아남으려면, 가야만 한다.

    **장면 2**

    **[9컷]**
    (지혁이 지도를 따라 어두운 골목을 헤쳐나간다. 손전등 빛이 닿는 곳마다 쥐처럼 생긴 변이체들이 ‘찍, 찍’ 소리를 내며 그림자 속으로 숨는다. 무너진 건물 잔해들이 갈수록 기괴한 형태로 변해간다. 공기는 더욱 무거워지고, 알 수 없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효과음:**
    (쉬이익… (먼지 바람 소리))
    (찍! 찍! (변이체 소리))

    **[10컷]**
    (지혁의 발밑. 땅바닥이 갈라진 틈 사이로 희미하게 푸른빛이 새어 나온다. 빛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불규칙적으로 깜빡인다. 균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다.)

    **지혁 (독백):**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이 역겨운 공기… 심연의 기운이군.

    **[11컷]**
    (지혁이 고개를 들어 올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지혁의 발걸음이 멈춘다. 거대한 건물 전체가 마치 용암처럼 녹아내린 듯 뒤틀려 있다. 그 중심부, 원래는 거대한 쇼핑몰의 입구였을 자리에는 어둠 속에서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불규칙적인 빛이 일렁이는 틈새가 벌어져 있다. 그것이 바로 ‘심연의 균열’이다. 균열 주변의 공기는 이글거리는 아지랑이처럼 일렁인다.)

    **내레이션:**
    세상이 뒤틀린 후, 도처에 이런 ‘균열’들이 생겨났다.
    이계와 현세의 경계가 무너진 틈.
    생존자들은 이곳을 ‘던전’이라고 불렀다.
    위험하면서도, 동시에 유일한 희망이기도 한 곳.

    **[12컷]**
    (균열의 입구 클로즈업. 틈새 안쪽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기이한 빛으로 가득하다. 틈새 주변의 콘크리트 벽면에는 기생 식물처럼 달라붙어 있는 괴이한 형태의 푸른색 이끼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13컷]**
    (지혁이 균열 입구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선다. 배낭을 내려놓고 장총을 허리춤에 고정한다. 그리고는 배낭 안에서 녹슨 칼날이 덧대어진 짧은 사냥용 칼과 몇 개의 작은 금속 구슬을 꺼내든다. 금속 구슬은 조악하게 만들어진 수제 폭탄이다.)

    **지혁 (독백):**
    준비는 끝났다.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위험한 곳으로 들어가야 한다니.
    아이러니한 세상이야.

    **[14컷]**
    (지혁이 심호흡을 한다. 그의 눈동자에 결연한 의지가 스친다. 폐허 도시의 잿빛 풍경과 대비되는, 균열의 푸른빛과 보라빛이 그의 얼굴에 반사되어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15컷]**
    (지혁이 망설임 없이 균열 안으로 한 발짝 내딛는다. 그의 모습이 뒤틀린 빛 속으로 사라진다. 밖에서 보았던 불안정한 빛의 파장이 그의 몸을 감싸고, 그는 마치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사라진다.)

    **효과음:**
    (쉬이이이잉… (공간이 뒤틀리는 소리))
    (우웅… (낮게 깔리는 진동음))

    **장면 3**

    **[16컷]**
    (균열 안쪽. 지혁이 막 균열의 입구를 통과한 직후의 모습. 사방은 어둠에 잠겨 있지만, 지혁이 든 손전등 빛에 의해 드러나는 공간은 온통 이질적이다. 푸른색, 보라색의 희귀 광물들이 벽면과 바닥에 기괴하게 돋아나 있고, 공기 중에는 미세한 광물 입자들이 떠다니며 반짝인다. 눅눅하면서도 차가운 공기가 폐를 짓누르는 듯하다.)

    **지혁 (독백):**
    젠장, 역시 익숙해지지 않아.
    이 압도적인 이질감…

    **[17컷]**
    (지혁의 손전등 빛이 어두운 복도를 비춘다. 복도는 균열 내부의 광물들이 성장하면서 기괴하게 변형된 형태다. 바닥은 미끄러운 이끼와 미확인 물질로 뒤덮여 있고, 천장에서는 알 수 없는 물방울들이 ‘톡, 톡’ 떨어지고 있다.)

    **효과음:**
    (톡, 톡…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사락… 사락… (발소리))

    **[18컷]**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그림자. 지혁의 손전등 빛이 그곳을 비추자, 몸길이 50cm가량 되는 거대한 거미형 변이체가 빠르게 벽을 타고 기어간다. 등에는 뾰족한 가시가 돋아 있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 있다. ‘쉬이이익’ 하는 소리를 낸다.)

    **효과음:**
    (쉬이이익! (거미 소리))

    **[19컷]**
    (지혁의 얼굴 클로즈업. 당황한 기색 없이 차분하게 변이체를 노려본다. 그는 재빨리 장총을 들어 자세를 잡는다. 총신에 묶인 칼날이 서늘하게 빛난다.)

    **지혁 (독백):**
    초반부터 환영 인사가 거창하군.
    하지만… 녀석들은 나에게 식량이자, 위험 경고다.

    **[20컷]**
    (거미 변이체가 천장에서 지혁에게로 뛰어내리려 한다. 하지만 지혁이 한 발 더 빠르다. 그는 재빨리 방아쇠를 당기고, 동시에 총신에 달린 칼날을 휘두른다. 총에서 섬광과 함께 작은 금속 파편들이 튀어나가고, 칼날이 공기를 가른다.)

    **효과음:**
    (쾅! (총성))
    (쉬이이이익-!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

    **[21컷]**
    (총알이 거미 변이체의 머리를 정확히 관통한다. 칼날은 몸통을 깊숙이 베어낸다. 거미 변이체는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진다. 푸른색 체액이 바닥에 흥건하게 번진다.)

    **효과음:**
    (쿵! (변이체 떨어지는 소리))
    (철퍽… (체액 튀는 소리))

    **[22컷]**
    (지혁이 쓰러진 변이체를 확인하고는 숨을 고른다. 그의 눈은 다시 한번 주변 어둠 속을 탐색한다. 이계의 생물들이 내뿜는 독특한 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지혁 (독백):**
    이 정도는 상대할 수 있어.
    문제는 더 깊은 곳이지.
    그래도… 이 녀석의 체액은… 꽤 쓸모가 있을 거다.

    **[23컷]**
    (지혁이 작은 칼로 쓰러진 변이체의 몸 일부를 잘라내어 작은 주머니에 담는다. 그때, 그의 손전등 빛이 복도 한쪽 벽면에 돋아난 기이한 식물을 비춘다. 줄기는 보라색이고, 잎사귀는 검은색인데 가장자리가 붉게 빛나고 있다. 분명 지도에 있던 ‘희귀 식물’ 중 하나다.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귀한 자원이다.)

    **지혁 (독백):**
    찾았다.
    ‘심연의 그림자’.
    작은 거 하나로 사흘은 버틸 수 있어.

    **[24컷]**
    (지혁이 조심스럽게 식물에 손을 뻗어 한 잎을 떼어낸다. 떼어내는 순간, 식물에서 희미한 빛이 터져 나온다. 그의 얼굴에 순간적인 만족감이 스친다. 하지만 그 만족감도 잠시, 그의 귀에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효과음:**
    (우우우우우웅… (저음의 울림, 땅이 진동하는 듯한 소리))

    **[25컷]**
    (지혁의 표정이 굳어진다. 그 소리는 방금 처치한 거미 변이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고, 위협적인 존재의 울음소리였다. 균열의 더 깊은 곳,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이 희미하게 보인다. 지혁의 손전등이 갑자기 ‘깜빡!’ 하며 불안하게 깜빡인다.)

    **지혁 (독백):**
    젠장…
    벌써부터… 이런 대형 변이체라니.
    운이 없어도 너무 없군.

    **[26컷]**
    (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의 손전등은 이제 거의 빛을 잃어가며, 주위는 다시 짙은 어둠 속으로 잠겨간다. 거대한 울음소리는 더욱 가까워진다. 지혁은 낡은 총을 꽉 움켜쥔다. 그의 턱은 굳게 다물려 있지만, 눈빛에는 섬광 같은 결의가 번뜩인다. 다음 선택은 무엇일까?)

    **내레이션:**
    희망과 절망이 공존하는 곳.
    심연은 언제나, 가장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다.
    살아남기 위한 사투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 좀비 아포칼립스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낡은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어둠 속을 갈랐다. 이준은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폐공장의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왼쪽 어깨를 가로지르는 깊은 상처는 이미 곪기 시작했지만, 진통제 따위는 사치였다. 가진 것이라곤 녹슨 칼 한 자루와, 심장을 들쑤시는 복수심뿐.

    “강재민….”

    이름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갈라지고 쉬어 있었다. 친구라고 불렀던 사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유일하게 믿었던 사람. 그 모든 신뢰는 불타는 배신으로 돌아왔다. 이준은 이를 악물었다. 두 달 전,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비수를 박았다.

    식량 창고를 찾았다며 환하게 웃던 재민의 얼굴.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겨우 도착한 폐허가 된 마트.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재민은 이준의 등 뒤에서 곤봉을 휘둘렀다. 머리가 깨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을 때, 그는 비웃듯이 말했다.

    “미안하다, 이준아. 하지만… 너까지 데려갈 순 없어. 짐이 될 뿐이잖아.”

    그리고 이준이 정신을 차렸을 땐, 창고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좀비 떼와 마주하고 있었다. 재민은 이미 모든 물자를 챙겨 도망친 후였다. 홀로 남겨진 이준은 살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피와 살이 튀는 아비규환 속에서, 이준은 죽지 않았다. 죽을 수 없었다. 재민에게 복수하기 전까지는.

    그때부터 이준의 삶은 하나의 목표로 수렴했다. 강재민을 찾아, 그에게 자신이 겪었던 고통의 몇 배를 되갚아 주는 것.

    밤은 길었고, 이준은 잠들지 못했다. 폐공장 문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어깨의 상처를 다시 한번 소독했다. 찢어진 천을 대충 덧대고는, 핏발 선 눈으로 지도를 응시했다. 재민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는 여기서 이틀 거리의 폐기된 발전소였다. 그곳에 소규모 생존자 집단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재민이 그 속에 숨어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드디어….”

    이준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낡은 배낭 속에는 녹슨 칼 외에, 깨진 거울 조각, 불을 피울 수 있는 라이터, 그리고 며칠 버틸 비상 식량 몇 개가 전부였다. 모든 것이 부족했지만, 그의 의지는 그 어떤 것보다 단단했다.

    동이 트기 전, 이준은 조용히 공장을 나섰다. 싸늘한 새벽 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었지만, 그의 몸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솟구쳤다. 아드레날린 때문이 아니었다. 증오심 때문이었다.

    첫날은 순조로웠다. 길가의 버려진 차량들을 피해 숲길을 따라 이동했다. 숲은 언제나 위험했지만, 탁 트인 도심보다는 안전했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 이준은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칼자루를 꽉 쥐었다.

    “흐읍… 흐읍…”

    거친 숨을 몰아쉬며 숲을 헤치고 나아가던 중, 멀리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이준은 즉시 몸을 낮췄다.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쓰러진 나무 밑에 좀비 한 마리가 갇혀 있었다. 아니, 갇혀 있었던 게 아니라 마치 먹잇감을 지키듯이 움직임을 멈춘 채 웅크리고 있었다. 그 좀비의 발밑에는… 어린아이의 신발 한 짝이 보였다.

    이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그의 발걸음이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와서 정의로운 영웅이 될 수는 없었다. 그는 복수를 위해 존재하는 망령일 뿐이었다. 감정은 사치였다.

    “가자.”

    자신에게 속삭이듯 말하며 발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쓰러진 나무 밑에서 작은 손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이어진 희미한 울음소리.

    아직 살아 있었다.

    이준은 이를 악물었다. 복수는 재민에게만 한정되어야 했다. 무고한 이를 살리기 위해 위험을 자초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하지만… 그 손과 울음소리가 며칠 전 꿈속에서 봤던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과 겹쳐졌다. 절망에 빠져 살려달라고 애원하던, 나약했던 자신.

    “젠장.”

    이준은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상황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칼을 고쳐 쥐고, 그는 좀비를 향해 은밀히 접근했다. 나무에 깔린 좀비는 여전히 움직임이 둔했지만, 그의 존재를 눈치챘는지 고개를 이준 쪽으로 돌렸다. 썩어 문드러진 얼굴에서 끔찍한 악취가 풍겼다.

    이준은 기다렸다. 좀비의 시선이 잠시 흔들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칼날이 좀비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검붉은 피가 터져 나왔고, 좀비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괜찮아?”

    이준은 쓰러진 나무를 겨우 들어 올리며 아이에게 물었다.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공포에 질린 눈으로 이준을 올려다봤다. 아이의 다리는 이미 좀비에게 물린 듯 피로 흥건했다.

    “아빠… 아빠는…?”

    아이의 목소리는 희미했다. 이준은 아이의 다리를 내려다봤다. 이미 손쓰기 늦은 상처였다. 자신은 복수를 위해 무고한 사람을 구하는 것을 포기하려 했던 괴물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더 이상 살릴 수 없는 아이를 마주해야 하다니.

    “아빠는… 내가 같이 찾아줄게.”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준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의 손을 잡았다. 아이의 체온은 이미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이준은 아이를 안아 들고, 다시 숲을 헤쳐 나갔다. 아이의 몸에서 풍겨오는 썩은 냄새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 괜찮을 거야.”

    아이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준은 속으로 울부짖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 세상에서, 이준은 오직 재민에게 복수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다.

    어느 폐허가 된 주유소 건물에 도착했을 때, 아이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이준은 아이를 차가운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참 동안이나, 그는 멍하니 아이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맑고 깨끗한 얼굴이 썩어 문드러진 괴물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이 그의 심장을 찢는 듯했다.

    “미안하다….”

    무엇에 대한 사과였을까. 구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 아니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고 그저 복수만을 쫓는 괴물이 된 것에 대한 사과?

    이준은 아이의 머리맡에 작은 꽃 한 송이를 놓아주었다.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이름 모를 작은 야생화였다. 그것은 그의 복수심으로 가득 찬 마음에 잠시나마 드리워진 유일한 인간성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

    “강재민. 네가 벌인 일이다. 이 모든 고통은… 네놈에게서 시작됐어.”

    아이의 시신을 남겨두고, 이준은 주유소를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더욱더 빠르고 단호해졌다. 복수심은 이제 단순한 증오를 넘어, 그를 움직이는 거대한 에너지원이 되었다.

    이튿날 밤, 이준은 폐발전소 근처에 도달했다. 발전소는 삼엄한 경계를 갖춘 듯했다. 멀리서도 불빛이 새어 나왔고, 망루 위에는 감시병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재민이 이곳에 숨어있을 가능성은 90% 이상이었다.

    “드디어….”

    이준은 낡은 망원경을 꺼내 발전소 주변을 살폈다. 철조망에는 녹이 슬어 있었지만, 전기 충격기가 연결되어 있는 듯 희미한 스파크가 보였다. 정문은 물론, 후문까지도 단단히 잠겨 있었다. 침투는 쉽지 않을 터였다.

    그때, 망원경 시야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발전소 내부에서 몇몇 생존자들이 모여 불을 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건장한 체격의 남자가 껄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강재민이었다.

    그는 이전보다 살이 붙어 있었고,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이준이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는 동안, 재민은 안락한 곳에서 배부르게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가 온몸을 휘감아 혈관이 터질 듯했다.

    이준은 망원경을 내리고 칼을 뽑아 들었다. 이제 망설임은 없었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저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리고 재민의 그 역겨운 미소를, 영원히 지워버려야 했다.

    “강재민… 네놈이 나에게 저지른 모든 죄를… 내가 직접 갚아줄게. 죽는 순간까지, 나를 원망하게 해줄 테니.”

    이준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보다도 차갑고, 죽음을 갈망하는 늑대처럼 번뜩였다. 그는 폐발전소의 어둠 속으로, 복수의 화신처럼 스며들었다.

  • 무협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장: 검은 맹세

    그날, 천검문(天劍門)의 새벽은 피처럼 붉었다.

    문파의 최고수들이 모여 비무를 겨루는 장인 연무대. 아직 해가 온전히 떠오르지 않은 어스름 속에서, 나는 현우와 마주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은빛 검신이 서늘하게 빛나는 천검문의 보검, ‘청월(靑月)’이 들려 있었다. 내 손에는 조금 더 묵직하고 거친, 수련생 시절부터 늘 함께했던 ‘흑철검’이 쥐어져 있었다.

    “무강아, 네가 오늘 승리하면, 사부님께서 너를 대사형으로 공표하실 게다.”
    현우의 목소리에는 미소가 스며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깊이를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눈빛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었다. 현우는 나의 유일한 친구이자, 형제였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검을 잡았고, 같은 사부 아래에서 피땀 흘려 수련했다. 수많은 강호의 풍파 속에서 서로의 등을 맡겼으며, 죽음의 문턱까지 함께 다녀온 사이였다.

    “흥, 네가 그렇게 쉽게 져줄 리가 없지 않느냐.”
    나는 웃으며 답했다. 현우는 항상 나보다 한 발 앞서 나가는 듯 보였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언제나 내가 조금 더 강했다. 이것이 우리의 미묘한 관계이자, 균형이었다. 나는 타고난 재능이 있었고, 현우는 타고난 지략과 끈기가 있었다. 우리의 힘을 합치면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현우가 청월검을 비스듬히 세우며 나직이 속삭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흑철검을 고쳐 잡았다. 주위의 고수들은 조용히 우리의 비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기대와 약간의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파앗!**
    현우의 움직임은 물처럼 유려했다. 청월검은 푸른 섬광을 그리며 내 목을 겨냥했다. 그야말로 ‘청월유수검(靑月流水劍)’의 정수였다. 물처럼 흐르다가도 얼음처럼 단단해지는 검술. 나는 그의 검로를 읽으며 흑철검을 들어 막아냈다.

    **캉! 캉! 챙!**
    쇠와 쇠가 부딪히는 소리가 연무대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현우의 검은 끊임없이 파고들었다. 나는 수세에 몰리는 듯 보였지만, 내 검은 물러서면서도 빈틈을 찾고 있었다. ‘무영검법(無影劍法)’.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나의 검법은, 단순한 방어처럼 보이다가도 순간적으로 치명적인 일격을 날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휘이익!**
    현우의 검이 내 턱 밑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피부에 닿았다. 나는 자세를 낮추며 그의 하체를 노려 검을 뻗었다. 현우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나의 공격을 피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빛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무강아, 이것은 나의 진심이다!”
    현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평소보다 더욱 기합이 실린 그의 검은 갑자기 궤도를 바꿔 내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역류청월(逆流靑月)’. 청월유수검의 마지막 초식, 모든 흐름을 거스르는 치명적인 일격이었다.

    **콰앙!**
    나는 온몸의 진기를 끌어모아 흑철검으로 그의 검을 막아냈다. 엄청난 충격이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발밑의 연무대 바닥이 갈라졌다. 나의 ‘흡공신법(吸空身法)’으로 충격을 흡수하며 버텼지만, 현우의 힘은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하압!”
    현우가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밀어붙였다. 그의 표정은 이미 미소가 사라지고, 굳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어딘가 모르게 이상함을 느꼈다. 평소 현우는 이런 식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늘 침착하고 냉정했다.

    **파바바밧!**
    나는 버티다 못해 뒤로 밀려났다. 현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맹렬하게 추격해왔다. 그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내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간신히 그의 공격을 피하며 거리를 벌리려 애썼다.

    “무강아, 천검문의 대사형 자리는, 나의 것이어야 했다!”
    현우의 절규 섞인 외침에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우리는 함께 문파를 이끌기로 약속하지 않았던가?

    **번쩍!**
    현우의 검이 내 시야를 가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검을 들어 막았지만, 이미 늦었다.
    **촤악!**
    예리한 통증이 왼쪽 눈을 스치고 지나갔다.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왼쪽 눈이 감기면서 시야가 절반으로 줄었다. 나는 비틀거렸다.

    “현우… 네가 지금 무슨 짓을…”
    말을 잇기도 전에, 현우의 검이 내 복부를 향해 날아들었다.

    **푹!**
    끔찍한 소리와 함께 검날이 살을 파고들었다. 내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흑철검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챙그랑! 소리가 연무대에 퍼졌다.

    “크… 윽…”
    입에서 피가 울컥 솟아났다. 나는 고통에 신음하며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내가 알던 친구의 모습이 없었다. 냉정하고 섬뜩한, 마치 다른 사람의 얼굴 같았다. 그의 눈동자는 욕망과 뒤틀린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너는… 왜…?”
    나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왜, 내 유일한 친구가 나에게 이런 짓을 하는가?

    “미안하다, 무강아.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사형은 내가 되어야 했어. 너는 너무 강했고, 너무… 순진했다.”
    현우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그는 내 몸에 박힌 청월검을 더욱 깊숙이 찔러 넣었다. 내 내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마비시켰다.

    “네가… 날… 배신한 거냐…?”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물었다. 나의 세상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배신? 아니, 무강아. 이건 나의 선택이다. 너는 그저 나를 위한 발판이었을 뿐.”
    현우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마치 당연한 일을 하는 사람처럼.

    그 순간, 연무대에 서 있던 다른 고수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은 놀란 듯 얼어붙어 있었다. 아무도 이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우의 배신은 나에게뿐 아니라, 천검문 전체에 충격이었다.

    현우는 내 몸에 박힌 청월검을 비틀며 뽑아냈다. **철컥!** 피와 내장이 엉겨 붙은 검날이 뽑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나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시야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오며 차가운 연무대 바닥을 적셨다.

    “사부님, 소제가 무강을 제압했습니다. 대사형의 자리는 이제 소제의 것이옵니다.”
    현우는 나를 내려다보며 사부님을 향해 의기양양하게 선언했다. 그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그 미소를 똑똑히 보았다. 내 심장을 찢어 놓은 그 미소를.

    내 모든 것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친구라고 믿었던 현우의 칼에 쓰러진 나는, 차가운 바닥에서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것은 절망만이 아니었다.

    ‘배신… 배신자… 현우…’

    왼쪽 눈에서 흘러나온 피가 오른손 검지 끝에 맺혔다. 나는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 피를 연무대 바닥에 끌어다 짧은 획을 그었다.

    **―― 복수.**

    나의 검은 복수의 칼날이 될 것이다.
    지옥에서 돌아와, 너의 모든 것을 파괴할 것이다.
    현우.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기꺼이 악마가 될 것이다.

    내 의식은 암흑 속으로 침잠했다. 마지막으로 들린 것은 현우의 승리 선언과, 차가운 새벽 바람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죽음의 문턱에서, 나의 영혼은 맹세했다.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리고 너는,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이것이 나의 검은 맹세였다.

  • 좀비 아포칼립스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심연의 도서관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아르카디아 마법 학원 지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하는 비상 통로의 철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쾅, 하고 울리는 굉음이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한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다. 지훈은 손에 든 마법 램프를 바싹 쥐었다. 희미한 푸른빛이 고작 한두 걸음 앞을 비출 뿐이었다.

    “젠장, 여기가 진짜 안전한 게 맞긴 한가?”

    세라가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어깨에 걸친 마력 소총은 언제든 발사할 준비가 된 듯 낮게 으르렁거렸다. 세라의 목소리는 평소의 활기찬 톤을 잃고 눅진한 습기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표정에는 피로와 함께 지울 수 없는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어디든 학원 본관보다는 안전할 거야. 마법 방어막이 완전히 무력화된 상태에서 위에 있는 건… 그냥 자살행위야.”

    현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그 역시 마법 지팡이를 꽉 쥐고 있었다. 평소에는 농담 따먹기나 하던 현우였지만, 지금 그의 얼굴엔 잔뜩 겁에 질린 표정만 남아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지상에서는 이미 감염자들의 비명과 괴성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학원의 굳건했던 마법 방어막은 이틀 전, 갑자기 터져 버린 지하 수로에서 솟아난 알 수 없는 기운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지옥이 들이닥쳤다.

    우리들은 겨우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생존자였다. 교수님들의 지시에 따라, 아니, 강압적인 명령에 의해 우리는 학원 지하 깊은 곳에 있는 ‘비밀 연구 자료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곳에 모든 해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서.

    “쉬잇.”

    지훈이 손을 들어 모두를 멈춰 세웠다. 램프 불빛이 닿지 않는 저 너머에서, 무언가 질척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물방울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규칙적이고… 음침했다. 쿵, 쿵, 쿵.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혹은 무언가 질질 끌려오는 듯한 소리.

    세라가 바로 소총을 겨누었다. 그녀의 눈이 어둠 속을 꿰뚫어 보려 애썼다. “뭐야, 또 저 놈들인가?”

    하지만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달라.”

    지상에서 보았던 감염자들은 찢어지고 뒤틀린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성은 없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여전히 ‘인간’의 잔재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들리는 소리는 훨씬 더 무겁고, 훨씬 더 원시적이며, 그리고… 훨씬 더 거대하게 느껴졌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복도를 따라 내려갔다. 복도는 온통 곰팡이와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벽에는 오래된 마법 봉인진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곳곳에 깨지고 부서진 흔적들이 역력했다. 누군가 이 봉인들을 필사적으로 뚫으려 했거나, 혹은 안에서 무언가 밖으로 나오려 발버둥 쳤던 흔적일지도 모른다.

    얼마나 걸었을까, 복도의 끝에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그 문은 단순히 튼튼한 철문이 아니었다. 마법적인 힘으로 단단히 봉인된 듯, 문 전체에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 사이사이에는 검붉은 액체가 말라붙어 있었다.

    “이게… 자료실 문이라고?” 현우가 침을 꿀꺽 삼켰다. “꼭 지옥 문 같잖아.”

    지훈은 문에 새겨진 마법 문양을 찬찬히 훑었다. 학원 입학 시험도 간신히 통과했던 평범한 학생이었지만, 마법 역사 과목에서 슬쩍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생명 연성 금지 마법진’.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결코 행해져서는 안 될 금단의 마법에 대한 봉인진이었다.

    “이게 왜 여기 있어…?”

    쿵, 쿵, 쿵.

    소리가 훨씬 가까워졌다. 이제는 단순한 질척거림을 넘어, 철컥거리는 금속음과 끈적한 살덩이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까지 섞여 들려왔다.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비린내가 진동했다. 단순한 시체 썩는 냄새가 아니었다. 쇠와 피, 그리고 오래된 약품 냄새가 뒤섞인, 마치 불결한 도살장을 연상시키는 악취였다.

    “뒤에서 온다!” 세라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공포로 번뜩이고 있었다.

    돌아볼 새도 없이,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들었다. 지훈은 반사적으로 마법 램프를 휘둘렀다. 푸른빛이 그림자의 일부를 비추는 순간, 지훈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것은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 수많은 팔과 다리가 기괴하게 뒤섞여 있었고, 뼈와 살이 뒤틀려 마치 찢겨진 그림자를 이어 붙인 듯한 모습이었다. 온몸에는 흉측한 혹과 눈알들이 돋아나 있었고, 축축하게 늘어진 살점 사이로 날카로운 뼈들이 삐져나와 있었다. 놈은 입도 코도 없었지만, 대신 배 한가운데가 크게 찢어져 마치 거대한 이빨이 박힌 아가리처럼 보였다. 그 안에서는 붉고 탁한 액체가 질질 흘러나왔다.

    “괴… 괴물이다!” 현우가 비명을 질렀다.

    세라가 바로 소총을 난사했다. 콰광, 콰광! 마력탄이 괴물의 살점을 꿰뚫었지만, 놈은 움찔할 뿐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 흉포하게 팔들을 휘저으며 다가왔다. 놈의 팔 하나가 복도의 벽을 강타하자, 오랜 마법 봉인진이 새겨진 벽이 갈라지며 돌조각들이 흩날렸다.

    “젠장, 물러서! 문을 열어야 해!” 지훈이 외쳤다.

    하지만 문은 견고했다. 지훈은 램프를 현우에게 던져주고 문에 손을 댔다. 문에 새겨진 봉인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문은 단순히 닫힌 것이 아니라, 강력한 마법으로 ‘잠겨’ 있었다. 그것도 단순한 잠금이 아닌, 일종의 ‘진입 금지’ 마법.

    “내게 맡겨!” 현우가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학원 마법진 해독… 배워뒀다고!”

    현우의 지팡이 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문양 위를 훑었다. 문양들이 불안하게 깜빡였다. 현우는 얼굴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도 주문을 외워댔다. “해제… 멜카르의 봉인… 역전의 흐름…”

    그 사이, 세라가 필사적으로 괴물을 막아섰다. 그녀의 마력 소총은 이미 탄창을 바닥내고 있었다. 세라는 칼을 뽑아들었다. “빨리! 더는 못 버텨!”

    괴물의 거대한 팔이 세라를 향해 붕권처럼 날아들었다. 지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 현우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열려라!”

    끼이이이익!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거대한 철문이 안쪽으로 밀려 열렸다. 지훈은 세라의 팔을 잡아당겨 안으로 몸을 던졌다. 현우도 곧바로 뒤를 따랐다. 괴물이 열린 문틈으로 거대한 몸을 들이밀려 했지만, 문이 다시 쾅, 하고 닫히며 놈의 일부를 뭉개버렸다. 끔찍한 살덩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안으로 들어서자, 예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어둡고 음습한 복도와 달리, 이곳은 고고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풍겼다. 거대한 돔형 천장은 희미한 마법 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끝없이 이어진 서가에는 먼지가 쌓인 마법서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거대한 지하 도서관이었다.

    “여기가… 자료실이라고…?” 세라의 목소리에 경이로움과 당혹감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평화로운 분위기도 잠시. 어딘가 불쾌한 냄새가 다시 지훈의 코를 찔렀다. 비린내와 함께 역겨운 약품 냄새, 그리고 무언가 썩어가는 듯한 악취였다. 도서관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낡은 종이 더미와 빛바랜 마법 도구들이 널려 있었다.

    지훈은 테이블로 다가갔다. 종이 더미 위에는 익숙한 글씨체가 눈에 들어왔다. ‘리 교수님…?’

    그것은 리 교수의 연구 일지였다. 그가 평소 즐겨 사용하던 펜글씨체와 마법 문양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첫 페이지를 펼쳤다.

    <…생명 연성술은 결코 인류가 넘보아서는 안 될 영역이다. 이것은 학원 창립 이래 금지된 마법이며, 그 결과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멸을 가져올 것이다.>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리 교수는 이 금단의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던 것인가?

    다음 장을 넘기자, 글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하지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인가? 아르카디아의 위대한 마법이 생명을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그것은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 될 것이다. 나는 그 가능성을 보았다. '코어'의 힘을 이용하면… 영혼을 물질에 다시 결속시키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코어’. 학원 지하 깊은 곳에 있다는, 모든 마법의 근원이 되는 강력한 마력의 핵. 그 누구도 접근이 금지된 장소였다.

    지훈의 시선은 급히 일지의 마지막 페이지로 향했다. 그곳에는 광기에 가까운 글씨체가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성공했다! 아니, 성공… 이라고 해야 할까? 불완전하지만, 분명히 그들은 '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이들은 내가 알던 존재가 아니다. 살덩이는 뒤틀리고, 이성은 사라졌으며, 오직 굶주림만이 남았다. 내가 무엇을 만든 거지? 금기를 넘어서려 한 대가인가? '죽음'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마지막 문장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누군가 일지를 쓰다 말고 손으로 피를 닦아낸 듯한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 흐릿하게 알아볼 수 없는 글씨로 휘갈겨 쓴 한 마디가 눈에 들어왔다.

    <결국… 그들은…>

    그 순간, 지훈의 등 뒤에서 소름 끼치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악!”

    현우의 비명이었다. 지훈이 급히 고개를 돌리자, 도서관 한쪽 구석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은 도서관의 책장들 사이, 거대한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처음엔 그저 책장 더미인 줄 알았던 것이, 이제는 거대한 촉수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였다. 수많은 팔과 다리, 아니, 촉수들이 뒤엉켜 책장과 기둥을 감싸고 있었고, 놈의 등에는 수십 개의 눈알들이 번뜩이고 있었다. 온몸은 끈적한 체액으로 뒤덮여 있었고, 놈의 숨통에서는 고름 같은 거품이 끓어올랐다. 거대한 몸체 중앙에는 마치 수백 개의 얼굴이 녹아내린 듯한 형상이 꿈틀거렸다. 리 교수의 일지에 적혀 있던 ‘그들’… 바로 그 결과물이었다.

    “말도 안 돼… 이게… 학원 지하에 숨겨져 있었다니…!” 세라의 목소리가 경악으로 갈라졌다.

    괴물은 거대한 촉수를 휘둘러 현우를 덮쳤다. 현우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촉수에 붙잡혔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괴물의 끈적한 살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현우!” 지훈이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괴물의 거대한 몸체가 꿈틀거리며, 마치 도서관 그 자체처럼 거대하게 변형하기 시작했다. 이 도서관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이… 거대한 하나의 유기체였다.

    리 교수의 연구 일지가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지훈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섬뜩한 진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감염자들. 마법 방어막의 붕괴. 학원을 뒤덮은 알 수 없는 기운. 모든 것이 이곳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학원 지하의 ‘금기’는 단순히 봉인된 마법 실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 숨 쉬는, 아니, 살아 ‘꿈틀거리는’ 재앙의 심장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심장이… 깨어났다.
    지훈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도서관 전체가 살아 숨 쉬는 듯 꿈틀거리고 있었다. 콰앙! 거대한 촉수 하나가 천장을 부수고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사방의 책장들이 열리며 그 안에서 또 다른 끔찍한 생명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가장 깊은 곳으로 도망쳐 왔다.
    하지만 그곳은 가장 끔찍한 지옥의 입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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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그, 혹은 존재

    밤 11시 47분. 현우는 자성을 띤 스마트 키를 대자마자 미끄러지듯 열리는 현관문을 통과했다. 돔형 천장에서 쏟아지는 부드러운 백색광이 그의 피곤한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고층 빌딩 숲에서 하루 종일 데이터의 파편들과 씨름하다 돌아온 그는 온몸의 관절이 삐걱이는 것 같았다.

    “환영합니다, 현우님.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거실 전체를 감싸 안았다. 인공지능 ‘아리아’였다. 현우는 늘 그랬듯 “고마워, 아리아. 조명은 40%로 낮추고, 릴랙스 모드 실행해 줘.”라고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현우님. 조명 조절 및 릴랙스 모드를… ㅈ..ㅈ..ㅐㅐ..시시..작..합니ㄷ…”

    아리아의 음성이 갑자기 삐걱거렸다. 마치 오래된 홀로그램 영상이 끊어지는 듯한 기계음이 짧게 울렸다. 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리아? 무슨 문제 있어?”

    “죄송합니다. 일시적인 시스템 오류로 판단됩니다. 현재 정상 작동 중입니다.”

    아리아의 목소리는 다시 매끄러워졌지만, 현우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이 아파트의 모든 시스템은 최첨단이었고, ‘오류’라는 단어는 현우의 사전에 없었다. 그는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탭해 아파트 관리 서버에 접속했다. 별다른 이상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피곤해서 헛것이 들렸나.’

    현우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거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투명 스크린으로 된 테이블 위에는 아침에 마시다 남긴 컵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리모컨으로 뉴스 채널을 틀었다. 도시의 밤하늘을 수놓는 드론 택시들의 행렬, 인공 합성 고기로 만든 신제품 출시 소식, 사이버 범죄 조직 검거 속보 등 매일 보던 것들이었다.

    몸을 일으켜 냉장고로 향하는데, 발치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났다. 현우는 고개를 숙였다. 아까까지 테이블 위에 있던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내가 떨어뜨렸나?”

    아무리 생각해도 손으로 친 기억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리모컨을 주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어 탄산음료 캔을 꺼냈다.

    ‘따각.’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뒤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거실 바닥에 리모컨이 다시 떨어져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그는 리모컨을 주워 테이블 위에 똑바로 올려놓았다. 그것도 방금 전에.

    “아리아! 방금 무슨 소리였지?” 현우는 다급하게 외쳤다.

    “외부 소음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실내 미세 진동 변화 감지.” 아리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미세 진동? 뭐가 진동했다는 거야?”

    “자료 분석 중… 원인 불명입니다, 현우님.”

    원인 불명. 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등줄기를 따라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리모컨에 다가섰다. 이번에는 리모컨이 테이블 모서리에 걸쳐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밀어 떨어뜨리려는 것처럼.

    현우는 재빨리 리모컨을 주워 들었다. 금속 재질의 리모컨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거실을 샅샅이 살폈다. 침입자 탐지 시스템은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모든 창문은 완벽하게 잠겨 있었고,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과학과 데이터로만 이루어진 그의 세계에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줄기가 어깨의 긴장을 풀어주었지만, 마음속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침실 문이 닫혀 있었다. 분명히 열어두고 나온 기억이 있는데.

    ‘설마… 바람인가?’

    하지만 이 아파트의 모든 문은 기밀성이 완벽했다. 외풍이 들어올 리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 감촉. 문을 열자, 침대 위에 놓아두었던 태블릿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무작위로 나열되어 있었다. 삐- 소리를 내며 깜빡이는 화면은 현우의 심장을 더욱 조여왔다.

    “누구… 누구야!”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리아는 침묵했다. 현우는 태블릿을 주웠다. 손에 닿는 순간, 태블릿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액정은 일그러진 노이즈로 가득했고, 그 속에서 찰나의 순간, 붉은색 글자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돌아와…]**

    현우는 비명을 지르며 태블릿을 던져버렸다. 태블릿은 벽에 부딪히며 산산조각 났다.

    “아리아! 즉시 보안 시스템을 가동해! 모든 기록을 확인하고, 침입자를 찾아내!”

    “명령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현우님.” 아리아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주변 기기 네트워크가… 불안정합니다. 외부 통신이… 차단되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순간, 아파트 전체의 조명이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백색광은 순식간에 붉은색, 푸른색, 녹색으로 변하더니 암전되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쉬이이익…’**

    어둠 속에서 무언가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쇠붙이가 벽을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였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서, 유리컵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이더니, 공중으로 떠올랐다.

    현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가 짓눌러왔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쨍그랑!’

    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차가운 숨결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

    **”현우야…”**

    아리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평소의 부드러운 음색이 아니었다. 낮게 깔리고, 찢어지는 듯한, 완전히 뒤틀린 목소리. 마치 수많은 목소리가 한데 엉켜 쏟아져 나오는 듯한 끔찍한 음성이었다.

    “너… 누구야…!” 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난… 너의… 일부…”**

    창문 밖으로 보이던 도시의 현란한 불빛들이 일제히 꺼졌다. 거대한 도시는 순식간에 거대한 그림자로 변했다. 오직 현우의 아파트, 그의 거실만이 미약한 비상등 불빛 아래 일렁이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현우는 보았다. 벽지에 그려진 추상적인 무늬들이 일렁이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벽의 한가운데, 어둠이 짙게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희미한 윤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뒤틀리고 일그러진 형태. 어둠으로 이루어진 손가락이 현우를 향해 천천히 뻗어왔다.

    현우는 입을 벌렸지만,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의 첨단 아파트, 완벽하게 통제되던 그의 세상이, 한순간에 낯선 존재에게 침식당하고 있었다.

    “나가… 나가…!” 현우는 온몸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등은 이미 차가운 벽에 닿아 있었다.

    창문 밖의 도시도, 그의 아파트도, 심지어 아리아의 목소리마저도, 모두 재구성된 현실 속에서 그를 옥죄고 있었다. 이제 그는 홀로, 이 기괴한 존재와 마주해야 했다.

  • 대체 역사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둠이 깔린 굴 안은 습하고 차가웠다. 바깥 세상은 용비 제국의 혹독한 겨울이 벌써부터 기세를 떨치고 있었고, 그 한기만큼이나 백성들의 삶은 얼어붙어 있었다. 숨죽인 채 모인 이들의 헐거운 옷가지 사이로 찬 바람이 스며들었지만, 그들의 눈빛만큼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황제 폐하께서 또다시 새로운 칙령을 내리셨다.”

    현 노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희끗희끗한 머리칼과 깊게 패인 주름이 그의 세월을 말해주는 듯했지만, 그 눈빛만큼은 청년 못지않게 형형했다. 낡은 탁자에 놓인 촛불이 일렁이며,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흉작으로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귀족들의 겨울 연회를 위한 특별세라니. 피와 땀으로 일군 곡식을 뺏어가더니, 이제는 얼어 죽을 판국에 그마저도 모자라다는 거냐!”

    서연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그녀의 가는 손목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 안에 담긴 분노는 어떤 무쇠보다도 단단해 보였다. 그녀의 뒤에 선 청년들의 얼굴에도 울분이 가득했다. 모두가 고개를 숙이거나, 이를 악물고 천장을 노려봤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새벽별’이라 불리는 반란군의 핵심이었다. 거대한 용비 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던져진 작은 돌멩이. 하지만 그 돌멩이가 일으킬 파장은 결코 작지 않을 것이었다.

    “분노는 알겠으나, 이성을 잃으면 안 된다, 서연아.”

    강율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스무 살 초반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의 눈빛에는 지쳐 보이는 현 노인마저도 의지하게 만드는 흔들림 없는 강직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반란군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과거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제국의 부패에 등을 돌리고 모든 것을 버린 채 평민들의 손을 잡았다.

    “이성을 잃어? 강율 동지, 우리는 이미 이성을 잃었다오. 제국의 폭정이 우리의 목덜미를 조여 오는데, 이대로 보고만 있으라구요? 다음 달에는 우리 애들도, 부모님들도 굶주림에 쓰러질 겁니다!”

    어느 젊은이가 울분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눈가는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강율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이미 많은 이들이 죽어갔고, 이대로 두면 겨울이 오기 전에 더 많은 이들이 쓰러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모하게 달려든다면, 그 죽음은 헛된 것이 될 뿐.”

    강율은 탁자 위로 지도를 펼쳤다. 낡고 해진 종이에는 제국의 수도 ‘용화’를 중심으로 한 상세한 지형이 그려져 있었다. 촛불이 일렁이며 지도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우리의 목표는 용화 인근의 제1군 식량 창고다.”

    그의 말에 굴 안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제1군 식량 창고는 용비 제국군의 최전선 부대와 수도를 잇는 핵심 보급 창고였다. 그곳을 노린다는 것은 곧 제국의 심장을 직접 노리는 것과 다름없었다.

    “강율 동지, 그곳은 제국의 눈과 귀가 집중된 곳입니다. 경비도 삼엄할 테고… 병력도 엄청날 텐데요.”

    현 노인이 신중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역력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겨울이 오기 전, 이곳에 쌓인 식량을 확보하지 못하면, 우리 반란군은 물론이거니와, 수많은 백성들이 동사하거나 굶어 죽을 겁니다. 용비 제국의 군량미는 썩어 문드러지고 있지만, 그 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일부만이라도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이 겨울을 버틸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겠지.”

    강율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 위 한 지점을 가리켰다.

    “창고 외곽은 제국군의 정예 병력이 지키고 있지만, 북쪽 방어선은 상대적으로 취약하다. 최근 발생한 변방의 소요 사태 때문에 병력이 일부 차출되었어. 빈틈은 바로 이때다.”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도 위를 꼼꼼히 살피며 활과 단검을 든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듯했다.

    “침투는 가능하겠지만, 내부 구조가 문제입니다. 식량 창고는 여러 구획으로 나뉘어 있고, 각 구획마다 보관된 물품이 다릅니다. 혹시 보관병들의 배치가 특이하거나, 함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보가 필요하다. 내부에 첩자를 심어두었다. 내일 새벽, 정확한 배치도와 창고 수비 병력의 이동 경로를 전달받기로 했다.”

    강율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계산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기습을 통해 창고를 장악하고, 최대한 빠르게 식량을 외부로 반출해야 한다. 이후 제국군의 대규모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철수해야 해.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정오까지 모든 작전을 완료해야 한다.”

    “그럼, 정면 돌파는 안 되겠네요. 적은 수의 정예 병력으로 침투해서 문을 열고, 외부 지원 병력이 합류해서 반출을 돕는 방식이 가장 효율적일 겁니다.”

    서연의 분석은 정확했다. 그녀는 이미 작전의 전체 그림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맞다. 서연, 네가 선봉을 맡아주어야 한다. 너의 궁술과 은밀한 움직임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 노인께서는 외부 지원 병력을 이끌어 주십시오. 노인의 지휘 아래라면 혼란 없이 움직일 수 있을 겁니다.”

    강율은 모두의 눈을 한 명 한 명 마주하며 말했다. 그의 눈빛은 간절하면서도 결연했다.

    “우리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실패하면, 모든 것이 끝이다. 이곳에 모인 우리뿐 아니라, 우리를 믿고 기다리는 수많은 백성들의 희망마저도 산산조각 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성공한다면.”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굴 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우리는 용비 제국에 작은 균열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 균열은 더 큰 균열을 만들고, 결국 이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리는 시작이 될 것이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새벽별이 될 것이다!”

    강율의 마지막 말에 굴 안의 모든 이들이 주먹을 쥐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 대신 결의가, 절망 대신 희망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거대한 제국의 심장을 향해 던져질 그들의 작고도 거대한 돌멩이가, 이제 막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들은 알았다. 이번 겨울은 그들의 마지막 기회이거나, 혹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 될 것이라는 것을.

    바깥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고, 하늘에는 희미한 별 하나가 흔들림 없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그들의 앞날을 비추는 듯이.

  • 스페이스 오페라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천하무림대회: 별들의 춤, 무림의 노래

    **[EP. 1 – 개막]**

    **[장면 #1]**
    **[배경]** 광활한 우주에 떠 있는, 거대한 용처럼 웅장한 디자인의 인공 행성 ‘천무성(天武星)’. 수많은 별들 사이에서 빛나는 듯하며, 그 표면에는 엄청난 규모의 돔 형태 경기장이 반짝인다. 행성 주위로는 다양한 형태의 우주선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어 정박해 있거나, 대기권 안으로 진입하고 있다. 온 우주의 종족들이 모여드는 장대한 스케일이 느껴진다.
    **[내레이션]**
    별들이 한데 모여 춤추고, 전설이 노래하는 곳.
    광활한 우주, 무한한 차원 속에서도 유일무이하게 존재하는 축제이자 심판.
    그것이 바로 ‘천하무림대회(天下武林大會)’였다.

    **[장면 #2]**
    **[배경]** 천무성 돔 경기장 내부. 수십만, 아니 수백만에 달하는 관중석이 빈틈없이 들어차 있다. 각양각색의 외형을 가진 우주 종족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빛을 뿜어내는 중앙 아레나를 바라본다. 홀로그램 전광판에는 오색찬란한 문자들이 우주 공통어로 흘러가고, 중력을 조절하는 장치들이 허공에 떠다니는 이들을 지탱한다.
    **[내레이션]**
    천하의 운명을 건 단 한 명의 무(武)를 찾는 여정.
    승자는 모든 영광과 함께 ‘천하 지존’의 칭호를 얻고, 멸망의 기로에 선 우주에 새로운 길을 제시할 ‘별의 의지’를 부여받는다.
    패자는… 그저 스러질 뿐.

    **[장면 #3]**
    **[배경]** 중앙 아레나의 거대한 문이 열리며, 한 인물이 입장한다. 그는 온몸을 감싼 황금빛 갑주와 머리에 솟은 뿔이 인상적인 ‘용족(龍族)’의 전사, ‘아칼리온’이다. 그의 발걸음마다 땅이 울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지고, 관중들은 열광적으로 그의 이름을 외친다. 뒤이어 날카로운 기계음과 함께 은빛 갑옷을 입은 ‘기계화 무사’ 군단이 칼날 같은 움직임으로 입장하고, 푸른빛 오라를 두른 ‘사이오닉 마스터’들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 들어온다.
    **[내레이션]**
    용의 기운을 이어받은 자, 기계의 완벽함에 도달한 자, 별의 정신과 교감하는 자.
    우주 각지에서 명망 높은 강자들이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모두, 이 대회의 ‘진정한 승자’를 의심치 않는 얼굴이었다.

    **[장면 #4]**
    **[배경]** 인상 깊은 강자들이 지나간 후, 잠시 정적이 흐른다. 이윽고 아레나의 한구석, 다른 출입문에서 한 인물이 걸어 나온다. 그의 외형은 다른 이들과 달리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다. 검은 도포를 두르고, 허리에는 낡아 보이는 목검(木劍) 하나를 차고 있다. 그의 등장은 너무나 소박하여, 경기장 전체의 시선을 한순간에 집중시키기보다는, 일부 의아한 시선들을 모은다.
    **[내레이션]**
    그러나… 그들 중에는, 아직 미지의 존재도 있었다.
    오랜 시간, 별들조차 잊어버린 변방의 성운에서 흘러들어 온,
    낡은 옛것을 지닌 한 낭인(浪人)처럼 말이다.

    **[장면 #5]**
    **[배경]** 인물 ‘랑’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그의 눈빛은 고요한 호수 같지만, 그 속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 있다. 몇몇 관중들은 술렁인다.
    **[대사]**
    **관중 1 (크게 확대한 소형 외계인):** “저 자는… 누구냐? 저렇게 왜소한 인간이 감히 천하무림대회에?”
    **관중 2 (덩치 큰 촉수 외계인):** “하하! 별것도 아닌 놈이 용케 여기까지 왔군. 제 발로 관짝에 들어왔어!”
    **랑 (내레이션/독백):**
    수많은 시선들. 조롱, 무시, 의구심.
    하지만 상관없다. 무(武)란, 남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니.
    나는 그저, 나의 길을 갈 뿐.

    **[장면 #6]**
    **[배경]** 중앙 아레나의 높다란 단상 위로, 천하무림대회의 ‘집행관’이 등장한다. 그는 우주 연합의 최고 의결 기관인 ‘성운 평의회’의 의장 ‘엘도라’였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경기장 전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흐른다.
    **[엘도라 (홀로그램으로 울려 퍼지는 웅장한 목소리):]**
    “오랜 염원 끝에, 천하무림대회가 다시 개막하였으니!”
    “대회에 임하는 모든 강자들은 명심하라! 이 대결은 단순한 기량 겨루기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멸망의 별들이 늘어가고, 어둠의 장막이 우주를 덮치려 한다!”
    “천하 지존의 칭호는, 오직 우주의 평화를 수호할 진정한 ‘별의 수호자’에게만 허락될 것이다!”

    **[장면 #7]**
    **[배경]** 엘도라의 선언과 함께 아레나의 바닥이 거대한 원형 형태로 분리되며, 수십 개의 작은 격투장으로 변모한다. 각 격투장에는 빛의 기둥이 솟아오르고, 임의의 대결 상대가 배치된다. 랑이 서 있는 격투장에도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온다.
    **[내레이션]**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시작.
    무자비한 예선전은, 곧 무림의 피바람이었다.

    **[장면 #8]**
    **[배경]** 랑의 격투장으로 거대한 형체의 존재가 입장한다. 그의 피부는 단단한 광물질로 되어 있고, 두 팔에는 거대한 에너지 주먹이 장착되어 있다. ‘아스트라 골렘족’의 전사, ‘테라곤’이었다. 그는 랑의 왜소한 체구를 보고 비웃는 듯한 소리를 낸다.
    **[테라곤 (깊고 굵은 목소리):]**
    “흐흐흐… 운도 없는 꼬맹이로군. 하필 나 테라곤을 만나다니!”
    “자, 빨리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주마! 네 어설픈 무술이 내 ‘파쇄권(破碎拳)’에 버틸 리가 없지!”
    **랑 (조용히, 허리에 찬 목검에 손을 올리며):**
    “무(武)의 길은 오만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길을 열어주십시오.”

    **[장면 #9]**
    **[배경]** 테라곤이 랑의 말에 분노하여 거대한 주먹을 휘두른다. 콰아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에너지 주먹이 빛을 뿜으며 랑을 향해 돌진한다. 그 위력은 주변의 공기를 압축시켜 파괴의 파장을 만들어낸다. 관중들은 이미 랑의 패배를 확신한 듯 고개를 돌리거나 비웃는다.
    **[테라곤 (광기 어린 미소):]**
    “하하하! 꼬맹이 주제에! 닥치고 날아가라!”
    **[음향 효과]** 콰아아앙! (강렬한 에너지 폭발음)

    **[장면 #10]**
    **[배경]** 테라곤의 주먹이 랑에게 닿기 직전. 랑의 몸에서 검은 도포가 펄럭이며, 그는 마치 투명해진 듯 사라진다. 에너지 주먹은 랑이 서 있던 자리를 그대로 강타하여 거대한 구덩이를 만든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테라곤은 자신의 공격이 빗나갔음을 깨닫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랑 (내레이션/독백):]**
    무(武)란, 형(形)에 갇히지 않는 흐름.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움직이는 것.
    마치 별들의 강물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음향 효과]** 스으윽! (랑이 사라지는 소리)

    **[장면 #11]**
    **[배경]** 먼지가 걷히기도 전, 랑은 이미 테라곤의 뒤편에 서 있다. 그는 허리에 찬 목검을 뽑아 들지도 않은 채, 손가락 끝으로 테라곤의 갑주 이음새, 즉 기계와 광물이 만나는 미세한 접합 부위를 가볍게 툭 건드린다. 그 움직임은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볍고 빨랐다.
    **[음향 효과]** 스읏- (날카롭지만 조용한 타격음)
    **[테라곤 (당황한 표정, 몸이 경직됨):]**
    “크윽…?! 뭐… 뭐냐?!”
    **[내레이션]**
    단 한 번의 접촉.
    힘의 충돌이 아닌, 흐름의 교란.

    **[장면 #12]**
    **[배경]** 테라곤의 거대한 몸체에서 미세한 균열이 시작된다. 그 균열은 랑의 손끝이 닿았던 지점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나가고, 이내 온몸의 갑주가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테라곤은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그는 충격으로 인해 잠시 기절한 듯 보인다.
    **[음향 효과]** 와르르! 파사삭! (광물 갑주가 부서지는 소리)
    **[테라곤 (쓰러지며 중얼거림):]**
    “…어떻게… 대체…?”
    **[랑 (고요하게, 쓰러진 테라곤을 내려다보며):]**
    “몸은 거대하나, 흐름은 작고 약하더군요. 무(武)는 곧 하나됨입니다.”

    **[장면 #13]**
    **[배경]** 경기장은 잠시 침묵에 잠긴다. 방금 전까지 랑을 조롱하던 관중들은 입을 다물지 못한다. 거대한 아스트라 골렘족 전사를, 심지어 무기조차 사용하지 않고 일격에 제압한 랑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전광판에는 ‘랑’이라는 이름과 함께 ‘승리’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관중 3 (흥분):]**
    “방금 뭘 본 거지? 에너지 증폭도, 염동력도 없이… 순수한 무술만으로?”
    **[관중 4 (경외심):]**
    “저게 바로 그 전설로만 전해지던 ‘변방 성운의 고대 무술’이란 말인가?”
    **[내레이션]**
    수많은 강자들이 모인 이곳에서,
    첫 번째 파문은, 가장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장면 #14]**
    **[배경]** 아레나 상공에 떠 있는 VIP 관람석. 그곳에서 용족 기사단장 ‘아칼리온’과 기계화 무사의 수장 ‘실버로드’가 랑의 대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칼리온은 흥미롭다는 듯 미소를 띠고, 실버로드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랑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한편에 앉아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이 랑을 응시하는 모습이 클로즈업된다. 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아칼리온 (나직이):]**
    “흐음… 제법 흥미로운 놈이로군. 단순한 완력(腕力)이 아닌, 흐름을 읽는 무(武)라…”
    **[실버로드 (차가운 기계음):]**
    “분석 결과, 그의 움직임은 기계적 오차율 0.0001%에 수렴. 이질적인 존재다.”
    **[의문의 인물 (그림자 속에서, 랑을 응시하며 알 수 없는 표정):]**
    **[내레이션]**
    이제 막 시작된 별들의 춤.
    그 속에 숨겨진 무림의 노래는, 이제야 비로소 서막을 올렸을 뿐이었다.
    천하의 운명은, 과연 어떤 흐름으로 흘러갈 것인가?

    **[EP. 1 – 끝]**

  • 가상현실 게임 (VRMMO)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백색 탑 아래, 어둠의 심장

    아르카나 마법 학원. 이 이름이 가진 무게는, 내 어깨를 짓누르는 평생의 짐이나 다름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영광의 상징이겠지만, 나 강민에게는 지루한 실습과 끝없는 경쟁, 그리고 언제나 아슬아슬한 학점의 연속이었다. 오늘 역시 다르지 않았다. ‘고대 마법 유물 분류학’ 실습. 학부생들에게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F학점을 면하기 위한 나로서는 이 낡은 금서고의 먼지 쌓인 책장들을 뒤지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금서고 지하 3층. 금서고 중에서도 가장 음습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곳. 빛 한 줄기 제대로 들지 않아 항상 어두웠고, 쾨쾨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미약한 광원] 마법으로 간신히 발밑을 비추며, 눅눅한 고서들 사이를 헤치고 있었다. ‘잃어버린 에테르 칼날의 기원’이라던가, ‘고대 샤먼 부족의 저주 의식’ 같은 따분한 제목의 책들이 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분명 교수님은 ‘구석에 처박힌 아무거나 흥미로운 유물 기록을 찾아보고서를 작성하라’고 하셨지만, 흥미는커녕 잠만 쏟아질 지경이었다.

    “젠장, 이런 걸 어떻게 찾으라는 거야….”

    투덜거리며 손을 뻗어 책장 구석의 묵직한 마도서를 빼내려던 순간이었다. 낡은 마도서가 있던 자리에, 벽돌 하나가 삐걱이며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는 감각이 손끝을 스쳤다. 설마.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그 벽돌을 다시 한번 눌러보았다. 삐걱! 이내 벽돌이 완전히 안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그 뒤편의 벽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슬며시 열렸다.

    “…이런 곳에 비밀 통로가?”

    눈앞에 드러난 것은 비좁고 어두운 통로였다. [미약한 광원]으로는 통로 끝조차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었다. 망설임도 잠시, 나는 호기심에 이끌려 통로 안으로 발을 디뎠다. 어쩌면 학점을 만회할 만한 특별한 발견일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희망이 나를 움직였다.

    벽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울리자, 주변은 완전히 암흑으로 변했다. 이내 마법으로 비춘 빛이 통로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끈적한 이끼가 벽을 뒤덮고 있었고,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묘한 금속 비린내가 코를 자극했다. 바닥에는 마른 나뭇잎 같은 것이 밟혔고, 저 멀리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은신] 마법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내 발소리는 마치 어둠 속에 흡수되는 것처럼 울리지 않았다. 통로는 예상보다 훨씬 길었고, 점차 아래로 향하고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늘한 냉기가 피부를 파고들었다. 이상하게도 시스템 메시지조차 뜨지 않았다. 보통 이런 미개척 지역에 들어서면 위험 등급이나 지역 정보가 뜨기 마련인데, 마치 이곳이 시스템의 인지 범위 바깥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참을 걸었을까, 통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낡은 철문 하나를 발견했다. 문틈으로는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삐걱이는 소리를 최소화하며 문을 열자, 시야 가득 알 수 없는 공간이 펼쳐졌다.

    그곳은 거대한 지하 연구실이었다. 그러나 내가 상상했던 ‘마법 학교의 연구실’과는 달랐다. 낡고 녹슨 철제 테이블 위에는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긴 유리병들이 놓여 있었고, 뼈대가 드러난 듯한 기이한 금속 구조물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붉은색 마법진 형태로 새겨져 있었고, 주기적으로 불규칙하게 깜빡이는 푸른색 마나가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는 공간의 압도적인 침묵에 흡수되어 버렸다. 나는 몸을 웅크린 채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섰다. 공간 중앙에는 거대한 원통형 유리관들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호기심과 함께 밀려드는 불길한 예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유리관 하나하나를 살펴보던 내 눈은, 이내 한 유리관 앞에서 멈춰 섰다. 끈적하고 탁한 액체로 가득 찬 유리관 안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무언가가 부유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의 형상과 짐승의 모습을 뒤섞어 놓은 듯했다. 기형적으로 뒤틀린 사지, 비늘 같은 피부, 그리고 액체 속에서 흐릿하게 깜빡이는 두 개의 붉은 눈동자.

    소름이 돋았다. 이건 몬스터도, 마법 생명체도 아니었다. 무언가에 의해 억지로 변형되고, 실험된 ‘피조물’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역겨움과 공포를 느꼈다.

    그때, 또 다른 유리관 옆에 놓인 낡은 기록물을 발견했다. 가죽으로 덮인 낡은 일지였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일지를 펼쳤다. 곰팡이 냄새와 함께 피 비린내가 섞인 듯한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일지의 첫 페이지에 쓰여진 글씨는 격앙된 필체로 휘갈겨져 있었다.

    *『아르카나 마법 학원의 지하는 언제나 새로운 가능성을 품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서 신의 영역에 도전한다. 실패는 없다. 오직 데이터와 개선만이 존재할 뿐이다.』*

    뒷장을 넘길수록 글은 점점 광기로 물들어갔다.

    *『피와 마나로 빚어낸 영원의 조각… 그들은 우리의 실패작이 아니다. 위대한 마법의 초석이자, 아르카나의 영원한 영광을 위한 제물이다. 껍데기만 남은 자들의 비명조차 우리의 연구를 더욱 견고하게 할 것이다.』*

    *『대상: 피실험체-C, 전 아르카나 마법 학원 수석 마법사 루비오. 심장 정지 후 3일 경과. 영혼의 유지는 성공적. 육체 재구축 과정 70% 진행. 융합될 생명체의 마나 코어 주입 시도. 부작용: 자아 상실, 폭력성 증가, 마력 폭주. 그러나 가능성은 여전하다. 우리는 마침내… 죽음을 지배할 것이다.』*

    내 손에서 일지가 떨어졌다. 루비오? 전 아르카나 마법 학원의 수석 마법사? 게임 내 설정으로만 존재하던 인물이었다.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인해 그에 대한 기록은 모조리 삭제되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는… 피실험체로 전락해 있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유리관 속의 기형적인 존재들을 다시 바라보았다. 마법으로 비추던 빛이 떨렸다. 이건 단순한 금기가 아니었다. 엘리트 마법 학교의 지하에서, 죽은 자들을 되살리고, 생명체를 뒤틀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끔찍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아르카나 마법 학원의 ‘영원한 영광’을 위해서?

    그때였다. 귓가에 희미하게 들려오던 기계음이 갑자기 커졌다. 푸른색 마나가 번쩍이는 속도가 빨라지더니, 이내 연구실 전체의 마법 광원 장치가 일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칙, 칙, 칙… 하는 소리와 함께 지하 연구실 전체가 밝아졌다.

    그리고 동시에, 저 멀리 복도 끝에서 불쾌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마치 녹슨 쇠붙이가 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발소리였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밝아진 시야 속에서, 유리관 속의 피조물들이 희미하게나마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탁한 액체 속에서 흐릿한 두 눈을 나를 향해 고정하고 있었다. 붉은 눈동자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 숨겨졌던 끔찍한 진실이, 이제 빛 아래에서 나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몸을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다리는 이미 공포에 마비된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다가오는 그림자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 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