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던전 탐험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 하늘 아래, 제국의 심장부가 썩어 들어가는 동안, 변방의 촌락들은 서서히 죽어갔다. 높디높은 첨탑은 태양을 가리고, 금박을 입힌 마차는 굶주린 이들의 마지막 숨통을 밟고 지나갔다. 진호는 오늘도 무너져가는 흙벽에 등을 기댄 채, 제국의 기사들이 휘두르는 채찍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굶주린 배에서 울리는 절규와 겹쳐져, 그의 심장을 찢어발겼다.

    “오늘도 빈손이냐?”
    수아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로웠지만, 그 속에는 깊은 절망이 숨어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녹슨 단검이 들려 있었고, 눈은 밤하늘처럼 어두웠다.
    “놈들이 곡물창고를 다 태웠어. 남은 거라곤 쥐새끼들 배만 불릴 썩은 밀알뿐이다.”
    진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의 등 뒤로 흙먼지가 풀썩이며 일어났다.

    그때였다. 낡은 오두막 그림자에서 영감이 나타났다. 얼굴에 깊은 주름이 새겨진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눈은 나이를 잊은 듯 예리하게 빛났다.
    “하늘이 도울 리 없다면, 땅을 파야지.”
    영감의 말에 수아가 코웃음을 쳤다.
    “땅을 파서 뭐가 나온다고요? 제국의 썩은 뿌리라도요?”
    “뿌리라면 뿌리지. 아니, 어쩌면 그 뿌리를 자를 칼날일 수도 있겠고.”
    영감은 진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기억하느냐, 진호? 옛 전설에 제국의 가장 깊은 곳, 모든 힘의 원천이 잠들어 있다는 심연의 심장부를.”

    진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심연의 심장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잠자리에서 들려주던 아득한 이야기. 제국이 건국될 때부터 존재했다는, 모든 마법과 기술의 근원이라는 전설의 장소. 그러나 동시에 그 누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죽음의 굴이었다.
    “그곳은…… 죽음뿐입니다, 영감.”
    “죽음? 그래, 죽음이 있지. 하지만 동시에 삶도 있지. 제국이 그곳에서 힘을 얻듯, 우리도 그곳에서 저항의 불씨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감은 지팡이 끝으로 진호의 발밑을 툭툭 쳤다. “제국은 그곳에 ‘제국의 심장석’이라는 것을 숨겨두었다. 모든 마법병기와 빛의 기사단을 움직이는 힘. 만약 우리가 그걸 손에 넣는다면…….”

    수아의 눈이 번뜩였다. “혁명의 불꽃을 지필 수 있다는 말인가요?”
    “불꽃 정도가 아닐 게다. 폭풍이 될 수도 있겠지.” 영감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진호는 잠시 망설였다. 가족의 죽음, 끝없는 착취, 그리고 반복되는 실패. 그의 마음속에는 분노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영감의 눈빛, 수아의 간절함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감은 낡은 양피지 한 조각을 꺼냈다. 손때 묻은 종이에는 희미한 글씨와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수백 년 전, 제국의 선조들이 심연의 심장부를 봉인하며 남긴 유일한 기록이다. 제국의 비밀 통로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길이 표시되어 있지. 위험할 거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남은 길은 이 길뿐이다.”

    다음 날 새벽, 진호와 수아, 그리고 몇몇의 젊은 반란군들이 영감의 배웅을 받으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의 목적지는 제국의 수도 아래, 그림자 속에 숨겨진 심연의 심장부였다.
    “명심해라, 아이들아. 너희는 그저 보물을 훔치러 가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시대를 훔치러 가는 것이다.” 영감의 목소리가 바람에 실려 그들의 뒤를 쫓았다.

    깊은 지하로 통하는 비밀 통로는 눅눅한 흙냄새와 함께 오랫동안 닫혀 있었던 듯한 곰팡이 냄새를 풍겼다. 횃불의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길고 기괴한 그림자들이 벽을 타고 춤을 추었다.
    “젠장, 여기가 길은 맞아요?” 수아가 신경질적으로 뱉었다. 그녀의 손은 단검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양피지에 따르면 맞다.” 진호는 지도를 보며 답했다. 그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역력했다.

    갑자기, 진호의 발밑에서 ‘딸깍’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함정이다!”
    너무 늦었다. 바닥이 푹 꺼지며 그들은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진호는 가까스로 수아의 팔을 잡아챘고, 다른 이들도 서로의 몸을 의지하며 낙하의 충격을 줄였다.
    “크윽!”
    바닥에 떨어진 진호는 신음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떨어진 곳은 거대한 동굴이었다. 천장에는 형광 버섯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고, 뼈가 뒹구는 바닥에는 녹슨 무기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여긴… 제국의 옛 무기고인가?” 수아가 경악하며 물었다.
    “아니, 더 깊은 곳이다. 아마도 함정을 피하지 못한 불운한 선대 탐험가들의 무덤이겠지.” 진호는 바닥에 박힌 낡은 제국군 투구를 발로 툭 쳤다.

    그때, 어둠 속에서 쇠사슬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철컥, 철컥.’
    “무슨 소리야?” 한 반란군이 두려움에 떨며 속삭였다.
    어둠 속에서 푸른빛이 번쩍였다. 거대한 금속 골렘이었다. 제국의 마법으로 조작된 수호병. 녹슬고 닳았지만,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다.
    “싸워야 한다!” 진호가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골렘은 묵직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진호는 동료들에게 후퇴를 지시하며 자신이 미끼가 되었다. 그는 검을 휘둘러 골렘의 다리를 노렸지만, 단단한 금속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머리! 약점은 머리다!” 수아가 소리쳤다. 그녀는 날렵하게 골렘의 등 뒤로 돌아가 단검을 휘둘렀다. 단검은 골렘의 목 부분에 박혀 있던 작은 마력 핵에 정확히 꽂혔다.
    ‘콰직!’
    골렘은 비명을 지르듯 몸을 떨며 바닥에 쓰러졌다. 푸른빛이 깜빡이다 이내 꺼졌다.
    “젠장, 겨우 하나인데도 이 정도라고?” 진호가 땀을 닦으며 말했다.
    수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영감이 괜히 위험하다고 한 게 아니잖아.”

    그들은 다시 전진했다. 미로 같은 통로와 숨겨진 함정들을 뚫고 나아가며, 간간이 나타나는 제국 수호병들을 쓰러뜨렸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의지했고, 그들의 유대는 더욱 단단해졌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그들은 마침내 거대한 문 앞에 섰다. 문은 제국의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거대한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다.
    “여기다… 심연의 심장부.” 진호가 숨을 삼키며 말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영감의 양피지에는 문을 여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복잡한 마법진이 새겨진 문 옆의 기둥에 특정 주문을 외우고 피를 바쳐야 했다.
    “내가 하겠다.” 진호가 나서며 손목의 상처에서 피를 흘렸다. 붉은 피가 차가운 기둥에 닿자, 마법진이 섬광처럼 빛났다.
    ‘우우우웅……’
    거대한 문이 굉음을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했다.

    문 안에는 거대한 원형 공간이 나타났다.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색 수정이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제국의 심장석’이었다. 수정에서는 푸른빛과 붉은빛이 번갈아 뿜어져 나왔고, 그 에너지가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저게…… 제국의 심장석?” 수아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공간의 네 귀퉁이에서 섬광이 터지며, 완전무장한 제국의 빛의 기사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심장석을 수호하는 정예 병력이었다.
    “침입자들! 제국의 심장을 더럽힌 죄를 물어 죽음을 선사하겠다!” 기사단의 선두에 선 자가 투구 아래서 음산한 목소리로 외쳤다.

    진호는 검을 고쳐 잡았다. “죽음은 우리가 너희에게 선사할 것이다, 이 제국의 개들아!”
    숨 막히는 정적이 흘렀다.
    “돌격!” 진호가 외치자, 반란군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기사단은 빈틈없는 대형으로 공격을 막아냈다. 그들의 갑옷은 단단했고, 칼날은 날카로웠다. 반란군 중 몇몇이 쓰러졌다.
    “젠장! 이대로는 안 돼!” 수아가 외쳤다.

    진호는 심장석을 노려보았다. 제국의 심장. 저것만 없앤다면, 모든 것이 바뀔 수 있었다.
    그는 기사들의 맹공을 뚫고 심장석을 향해 돌진했다. 방패에 부딪히고, 검에 베였지만, 그의 눈은 오직 심장석만을 향했다.
    “진호! 위험해!” 수아가 소리쳤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가까스로 심장석 앞에 다다른 진호는 온몸의 힘을 실어 검을 휘둘렀다. 검은 심장석 표면에 부딪혀 불꽃을 튀겼지만, 깨지지 않았다. 심장석은 진호의 공격을 흡수하듯 푸른빛을 더 강하게 뿜어냈다.

    “하하하! 어리석은 필멸자여! 제국의 심장은 결코 깨지지 않는다!” 기사단장이 비웃었다.
    하지만 진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 영감의 목소리가 울렸다. ‘제국이 그곳에서 힘을 얻듯, 우리도 그곳에서 저항의 불씨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불씨! 파괴가 아니라, 이용해야 하는 것인가?
    진호는 다시 한번 검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파괴가 아닌, 흡수를 목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마력을 끌어모아 검 끝에 집중시켰다.

    그 순간, 심장석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섞이며 혼란스럽게 폭주했다. 진호의 검 끝과 심장석이 맞닿자, 엄청난 에너지가 그의 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온몸이 타오르는 듯한 고통과 함께, 잊고 있던 힘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크아아악!” 진호의 몸에서 황금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 빛은 제국의 기사들을 압도했다. 기사들은 눈을 가리고 뒤로 물러섰다.
    진호는 자신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보았다. 심장석의 에너지가 그의 몸에 동화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나약한 평민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제국의 심장을 품은 자였다.

    “이게… 이게 대체…” 기사단장이 경악하며 진호를 노려보았다.
    진호는 기사단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황금빛 번개가 발사되어 기사단장을 강타했다. 기사단장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남은 기사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더 이상 제국의 심장은 너희 것이 아니다. 이제 이것은 우리의 것이고, 이 땅의 모든 억압받는 자들의 것이다!”
    진호의 목소리는 동굴 전체를 뒤흔들었다. 그의 눈빛은 맹렬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수아와 살아남은 반란군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의 얼굴에는 승리와 희망이 교차했다.
    진호는 심장석을 다시 바라보았다. 이제 그것은 조용히 빛을 내고 있었다. 파괴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 주인이 바뀐 것뿐이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진호는 동료들을 이끌고 심연의 심장부를 나섰다. 밖으로 나서는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망설임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낸 평민들의 반란은 이제 막 뜨거운 불꽃을 지폈고, 그 불꽃은 곧 거대한 제국을 집어삼킬 폭풍이 될 것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여전히 험난한 길이 펼쳐져 있었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싸울 힘과, 무엇보다도 희망이 있었다.

  • 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화. 첫 만남은 늘 격정적이지. 돌멩이든 사람이든.

    북쪽 설산의 얼어붙은 칼바람도, 남쪽 바다의 거친 파도도, 서쪽 사막의 뜨거운 모래폭풍도, 동쪽 밀림의 음습한 맹독도,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수많은 무림인들이 숨죽여 기다려온 바로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바로 천하제일 무림 대회의 서막이었다.

    “젠장, 여기가 맞나? 지도는 무슨 암호문이여. ‘제2 연무장 뒤편, 소나무 세 그루 옆’이라니, 소나무가 여기 한두 그루여야 말이지!”

    거대한 비석으로 만든 ‘천하제일 무림 대회’라는 글자가 입구에 우뚝 솟아 있었지만, 그 웅장함과는 달리 나의 목적지는 미로와 같았다. 쨍한 햇살 아래, 삐죽삐죽 솟은 소나무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나는 손바닥만 한 지도를 펴들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등에 짊어진 기다란 검은 보자기가 축 늘어졌다. 그 안에는 남들이 보면 그저 폐품으로 여길, 녹슨 쇠붙이 하나가 들어 있었지만, 나에게는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대회장 입구부터 왁자지껄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화려한 문파의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저마다 기상천외한 무공을 자랑하는 문파의 복색을 한 무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신의 무용담을 뽐내고 있었다. 귓가에는 벌써부터 ‘천룡문의 검법은 어쩌고, 혈마문의 장법은 저쩌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투덜거렸다. “흥, 누가 보면 지들만 무림인인 줄 알겠네. 다들 허세 부리는 건 똑같구먼.”

    사실 나는 어떤 문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떠돌이 무인이었다. 어릴 적 우연히 주워들은 무공 비급을 달달 외워 수련했고, 혼자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배고픔에 시달리며 산속을 헤매기 일쑤였고, 멧돼지 엉덩이를 걷어차고 도망 다니기 바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웬만한 문파의 정예 제자들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문제는, 아무도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는 거였지만.

    “아니, 등록은 어디서 하는 거야? ‘서쪽 문루 옆 간이 천막’이라더니, 여기 천막이 서쪽 문루 옆에만 백 개는 있겠네!”

    나는 기어이 짜증을 폭발시키며 지도를 구겨버렸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은자 몇 푼을 꺼내 주막으로 향했다. 등록이고 뭐고, 일단 배를 채우는 게 먼저였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기력을 보충해야지.

    주막은 이미 인산인해였다. 땀 냄새와 음식 냄새, 그리고 왠지 모를 알코올 냄새가 뒤섞여 진동했다. 나는 겨우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탁자를 닦지도 않은 채로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어이, 여기 국밥 한 그릇이랑… 탁주 한 잔 주쇼!”

    시끄러운 주막 안에서 목청껏 소리치자, 주모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내 옆자리 의자를 거칠게 빼내어 앉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내 옆에 앉은 사내는… 한마디로 ‘그림’이었다. 먹물로 휘갈긴 듯한 새카만 머리칼은 마치 폭포수처럼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고, 날카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눈매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높고 오뚝한 콧대, 굳게 다문 입술, 그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조각상이었다. 새하얀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그 단정함이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켰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이건 좀 심했잖아. 세상에 저런 얼굴이 존재한다고? CG 아니야?

    그는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에 자신의 검을 내려놓았다. 검집에는 섬세한 용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얼핏 보기에도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주막 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감히 말을 걸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의 차가운 눈매가 스르륵 움직여 나를 향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거기, 좀 비켜라.”

    낮게 깔린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 만큼 서늘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저기요, 제가 먼저 앉았는데요?

    “저… 제가 먼저 앉았는데요.” 내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자리는 내가 앉을 자리다.”

    “무슨 소리예요? 여기가 무슨 전세 낸 자리도 아니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잘생겼기로서니 이렇게 무례할 수가! 내 안의 ‘쌈닭’ 기질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손을 뻗어 탁자 한가운데 놓인 술병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하필 그 술병 바로 옆에, 내가 아껴 마시려고 꺼내 놓은 육포 조각이 놓여 있었다. 그는 거침없이 손을 뻗었고, 그의 손끝이 육포 조각을 툭 건드렸다.

    육포 조각은 힘없이 탁자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내 고함에 주막 안의 모든 대화가 뚝 끊겼다. 모든 시선이 우리 둘에게로 향했다. 나는 그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내 육포! 내 소중한 육포 조각!

    사내는 내가 던진 고함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까짓 육포 조각 하나로 소란이군.”

    “그까짓 육포라니! 너는 이게 얼마나 귀한 건 줄 알아? 내가 이걸 사려고 얼마나 돌아다녔는데! 그리고 남의 물건을 떨어뜨렸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이 내 코앞에 있었다. 여전히 냉랭한 표정.

    “사과?” 그의 입술이 비웃듯이 움직였다. “그대의 불찰로 벌어진 일이다. 감히 내게 소리친 것을 용서할 수 없군.”

    “뭐? 내 불찰? 지금 누가 누굴 탓하는 거야? 이 얼음 송곳 같은 녀석이 정말!”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잘생긴 얼굴에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충동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의 주변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지만,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켰다.

    바로 그때, 주모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아이고, 도련님! 아가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요! 이 분은 천무혁 도련님이시고, 이 분은… 어험, 처음 뵙는 아가씨신데….”

    천무혁. 나는 그 이름을 되뇌었다. 어딘가 익숙한 이름인데. 아, 맞다. 이번 대회 우승 후보 1순위로 거론되던 그 천무혁! 천룡문의 차기 문주이자, 어린 나이에 이미 최고 경지에 도달했다는 천재 무인!

    하지만 내 눈엔 그저 잘생긴 싸가지였다.

    “됐소, 주모.” 천무혁이 차갑게 말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 여인은 무례를 범했다.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될 것 같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막 안의 모든 무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 기세로 자세를 취했다. 살벌한 기운이 주막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피식 웃었다. “오호라, 무례를 범했다고? 그럼 네놈은 남의 육포를 떨어뜨린 무례를 범했으니, 당장 바닥에 엎드려 빌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천룡문 도련님?”

    내 말에 천무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얼굴에 비로소 작은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그게 재미있었다.

    “좋다. 결투를 신청한다. 이 주막에서 감히 내게 도전할 배짱이 있다면 말이다.” 천무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막 안은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감히 천무혁에게 결투를 신청하다니? 그것도 이름 없는 떠돌이 무인이? 다들 미쳤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등을 휙 돌렸다. “결투는 무슨 결투야. 여기는 대회장이 아니라 밥집이거든? 육포 값이나 물어내!”

    나는 천무혁의 반응을 보지 않고 주모에게 국밥값과 탁주 값을 던져주고 문을 나섰다. 육포 값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어차피 저 인간에게 받을 생각이었다.

    주막 문을 나서자, 시끄러운 대회장 분위기가 다시 나를 감쌌다.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젠장, 천하제일 무림 대회가 아니라 천하제일 짜증 대회겠구먼. 시작부터 저런 얼음 송곳 같은 녀석을 만나다니!”

    하지만 이내 씨익 웃었다. 그래, 잘생기면 뭐 해. 내 육포를 건드렸는데.

    어차피 이 대회에서 만나게 될 운명이었을 터.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에서, 제일 먼저 만난 인간이 그 재수 없는 천무혁이라니. 운명치고는 꽤나 격정적인데?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등록처를 향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육포 값까지 다 뽑아내야겠다. 저 잘생긴 놈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서!

    어쩌면 이 대회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 *

    (계속)

  • 오컬트 호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첫 번째 챕터: 잿더미 속의 숨**

    차가운 새벽 공기가 허물어진 유리창 틈새로 비집고 들어왔다. 재민은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기둥 뒤에 웅크린 채 가늘게 떨었다. 바람이 찢어진 벽 사이를 휘돌며 늑대의 울음소리 같은 음산한 소리를 토해냈다. 회색빛 먼지가 가득한 이 도시는, 이제 생존자에게는 거대한 공동묘지나 다름없었다.

    배낭 속에는 며칠 전 겨우 찾아낸 딱딱한 건빵 몇 조각과, 녹이 슬기 시작한 낡은 통조림 하나가 전부였다. 손에 쥔 쇠지렛대는 유일한 동반자이자 무기였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것들’에게서 자신을 지켜줄, 믿을 수 있는 것은 이 차가운 쇳덩이뿐이었다. 재민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이런 곳에서는 작은 소리 하나도 죽음을 부를 수 있었다.

    오늘은 식량을 찾아 이 폐허가 된 병원을 뒤질 차례였다. 외곽 지역에 위치한 이 병원은 그나마 ‘혼돈의 그림자’들이 덜 들끓는 곳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저 다른 곳보다 ‘조금 덜 위험하다’는 막연한 희망에 불과했다.

    “젠장…”

    재민은 땀으로 축축한 이마를 쓸어 올렸다. 며칠째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해 눈꺼풀은 천근만근이었다. 하지만 잠을 잘 수도 없었다. 눈을 감는 순간, 망자들의 속삭임이 귓가에 들려오는 환청에 시달리거나,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들에게 습격당할지도 몰랐으니까.

    조심스럽게 발을 떼어 복도를 가로질렀다. 한때는 환자들로 북적였을 복도였지만, 이제는 깨진 유리 파편과 뜯겨나간 문짝, 알 수 없는 얼룩들만이 음산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삐걱이는 쇠붙이 소리, 어딘가에서 물이 새는 듯한 ‘똑, 똑’ 하는 소리만이 정적을 깨뜨렸다. 재민의 신경은 곤두서 있었다.

    “……없나.”

    중얼거리는 목소리조차 주변의 공기에 흡수되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응급실 표지판이 간신히 매달려 있는 문을 열었다. 내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엉망진창이 된 의료기구들, 찢어진 차트들, 그리고… 벽에 새겨진 붉은 손자국. 손바닥 자국은 선명했지만, 손가락은 기이할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어 인간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했다.

    재민은 본능적으로 쇠지렛대를 고쳐 쥐었다. 이 병원에도 ‘그것들’이 머물다 간 흔적이 역력했다. 핏자국이 아니라는 게 위안이라면 위안이랄까. 그것들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그저 삶의 흔적을 지우고, 공포를 남길 뿐이었다.

    그때, 저편에서 작은 빛줄기가 보였다. 희미했지만 분명한, 아직 전원이 살아있는 듯한 모니터의 불빛이었다. 호기심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이런 폐허에서 전력이 살아있는 곳은 드물었다.

    재민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깨진 유리 조각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빛을 향해 다가갔다. 불빛은 수술실 안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낡은 문을 살짝 밀자,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확 풍겨 나왔다. 수술실 내부는 어두웠지만, 저 안쪽에서 깜빡이는 모니터의 푸른빛이 희미하게 공간을 밝혔다.

    모니터에는 아무것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전원이 들어와 있다는 맹목적인 빛. 재민은 실망했지만, 혹시 다른 물건이라도 있을까 싶어 주변을 살폈다. 낡은 수술 도구들과 함께 바닥에 엎어진 캐비닛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캐비닛을 일으켜 세우자, 안에서 작은 물건 하나가 툭 하고 굴러 나왔다. 낡은 종이 상자였다. 먼지를 털어내자, 한때는 화려했을 포장지 무늬가 드러났다. 비상용 구급상자였다.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뛰었다. 내용물은 기대하기 어려울지라도, 이 자체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발견이었다.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자, 마른 붕대 몇 개와 소독약, 그리고 손바닥만 한 작은 성경책 한 권이 나왔다. 재민은 픽 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이런 세상에서 신을 찾는 이들이 아직도 있다니. 하지만 곧 그의 시선은 성경책 뒤에 숨겨져 있던 것에 멈췄다. 작은 비닐 지퍼백이었다. 안에는 꽤 많은 양의 비상 식량이 들어있었다. 딱딱한 육포와 견과류, 그리고 에너지바 몇 개. 재민은 떨리는 손으로 지퍼백을 움켜쥐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희망이 조금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수술실 한쪽 구석, 그림자가 유난히 짙게 드리워진 곳에서 희미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처음에는 단순히 빛이 만들어낸 착시 현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림자는 점점 더 짙어지며,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유동적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공기가 갑자기 차갑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재민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심장이 발버둥 치듯 쿵쾅거렸다. 쇠지렛대를 꽉 쥐었지만,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혼돈의 그림자’. 그것이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연기 같기도 하고, 어둠이 뭉쳐진 덩어리 같기도 한 존재. 그것은 서서히 수술실 바닥을 따라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재민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움직임은 유령처럼 미끄러졌고, 그 존재 자체가 모든 소리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하지만 재민의 귓가에는 들리지 않는 속삭임이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공포를 끄집어내는 듯한 낮은 울림이었다.

    그림자가 가까워질수록, 재민의 시야가 흐릿해졌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낡은 수술실의 벽이 비틀리는 것처럼 보였다. 환영이었다. 그것이 사람의 정신을 파고들어 공포를 극대화하는 방식이었다. 절대로 눈을 마주쳐선 안 된다. 그게 이 폐허에서 살아남기 위한 몇 안 되는 규칙 중 하나였다.

    재민은 억지로 시선을 그림자에서 떼어냈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이 좁은 수술실 안에서.

    그때, 그의 눈에 모니터의 푸른빛이 다시 들어왔다. 전원이 살아있다는 사실. 순간적인 직감이 뇌리를 스쳤다. 빛. 빛은 때때로 그것들을 잠시나마 쫓아낼 수 있었다.

    재민은 주저 없이 쇠지렛대를 휘둘러 모니터를 후려쳤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모니터의 화면이 지지직거렸다. 푸른빛이 갑자기 강렬하게 번쩍이며 수술실 전체를 일순간 환하게 밝혔다.

    ‘쉬이이이익-‘

    혼돈의 그림자가 역한 소리를 내며 움츠러들었다. 마치 빛에 데인 것처럼, 검은 연기가 일렁이며 뒤로 물러섰다. 순간적인 틈이었다.

    재민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비닐 지퍼백과 성경책을 배낭에 쑤셔 넣고, 몸을 날려 수술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복도를 가로질러 달렸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시선과 점점 커지는 속삭임이 그를 쫓아오는 듯했다.

    “젠장! 젠장!”

    계단을 두 칸씩 건너뛰며 내려갔다. 발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가워지고, 곰팡이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침내 병원 뒷문으로 통하는 낡은 철문을 발견했다. 녹슨 손잡이를 힘껏 비틀자,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재민은 허물어진 담벼락을 넘어섰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끊임없이 쫓아오는 공포를 등지고, 오직 살아남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잠시 멈춰 섰다. 저 멀리 동쪽 하늘에는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하고 있었다. 희미한 붉은빛이 잿빛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재민은 찢어진 옷소매로 땀을 닦아냈다. 식량은 얻었지만, 이 도시의 공포는 여전했다. 어쩌면 전보다 더 가까워진 것 같았다. 그는 텅 빈 눈으로 떠오르는 해를 응시했다. 이 희망 없는 세상에서,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날은 과연 며칠이나 더 남았을까. 그는 알 수 없었다. 단지, 오늘 하루도 겨우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어쩌면 그 끝에,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를 길을.

  • 선협 (신선) 독립적인 단편 소설

    천상학원. 그 이름처럼 하늘 아래 가장 고귀한 영기와 지식을 갈고닦는 곳.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학원은 세상 모든 선인 지망생들의 꿈이자 목표였다. 나는 강휘. 천상학원에서 손꼽히는 수재였지만, 동시에 가장 ‘문제아’ 딱지를 달고 다니는 학생이기도 했다. 학원의 규율보다는 금지된 고서의 먼지 쌓인 페이지에,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무용담보다는 감춰진 전설의 조각들에 더 흥미를 느꼈으니까.

    “강휘, 또 그 잡다한 영환술 서적에 코를 박고 있더냐? 너의 타고난 영맥으로 그리 낭비할 시간이 없다.”

    현 교수의 호통에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는 언제나처럼 학원의 정통 심법(心法)과 올바른 수련법을 강조했다. 그의 눈에는 내가 그저 잠재력을 허비하는 방랑자로 보일 뿐일 테지.

    “교수님. 이 책에 묘사된 ‘영맥의 심연을 더듬는 법’이 흥미로워서요. 평범한 영기 순환과는 다른 흐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 교수가 혀를 찼다. “그것은 금서다. 애초에 학원 도서관에 있어서는 안 될 것. 오래전 폐기되었어야 할 사악한 잡기술에 불과해. 천상학원의 영기는 태초부터 순수하고 맑은 자연의 숨결이며, 우리의 심법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알겠느냐?”

    “네, 교수님.” 나는 순순히 대답했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는 씨앗 하나가 심겼다. ‘심연을 더듬는 법’이라… 어쩌면 천상학원의 완벽함 아래 감춰진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

    며칠 후, 나는 의도적으로 금지된 구역, 즉 학원의 가장 오래된 하부 영맥 수련실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사색의 전당’이라 불리는 그곳은 천 년 전 천상학원을 처음 세운 선조들이 영기를 수련하던 곳이라고 전해졌지만,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폐쇄된 공간이었다. 고요하고, 축축하며,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현 교수가 그토록 경멸했던 그 ‘잡기술’을 펼쳤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영맥을 따라 흐르는 영기를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려보냈다. 보통 영기는 몸 밖으로 나선형으로 퍼져나가지만, 나는 의식을 더 깊이, 아래로, 땅속으로 파고들게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굳건한 땅의 기운뿐. 그러나 수련이 깊어질수록,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주 희미하고 불규칙한,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맥동 같은 진동이었다.

    그 진동은 학원의 영맥 흐름과 완전히 달랐다. 학원 전체를 지탱하는 영기는 맑고 힘찼지만, 이 진동은 어딘가 탁하고, 고통스러웠다. 나는 그 진동을 따라 내 의식을 더욱 밀어 넣었다. 의식이 심연으로 추락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쿵- 쿵- 쿵-.

    진동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것은 더 이상 희미한 맥동이 아니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심장처럼 뛰는 소리였다. 나의 영기가 그 소리에 이끌려 자석처럼 빨려 들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낡은 수련실 바닥이 아니라, 기이하게 뒤틀린 바위로 이루어진 동굴 같은 공간에 서 있었다. 사방이 암흑이었으나, 벽면에 새겨진 고대 문양들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문양들은… 학원 도서관의 어떤 금서에서도 본 적 없는, 알 수 없는 언어와 상징들이었다.

    “이게 대체… 어디지?”

    내 목소리가 동굴 속으로 메아리쳤다. 동굴의 끝에는 거대한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문은 영기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는데, 그 봉인의 기운 또한 학원의 것과는 달랐다. 차갑고, 날카로우며, 어딘가 잔혹한 기운이었다. 나는 문에 손을 대보았다. 금속의 냉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그 순간, 나는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영기의 파동을 감지했다. 그것은 순수함을 넘어선, 너무나도 거대하고 압도적인 영기였다. 천상학원의 모든 영기를 합친 것보다도 더 강렬한.

    하지만 그 영기 안에는… 분명히 고통이 서려 있었다. 비명과 탄식, 절규가 뒤섞인 듯한 감정의 소용돌이.

    나는 망설였다. 현 교수의 경고, 금서의 위험성. 그러나 나의 타고난 호기심과 그 압도적인 영기에 대한 갈망이 나를 밀어붙였다. 나는 고대 주술을 이용해 봉인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주술은 나의 영기를 엄청나게 소모했지만, 문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며 그 잠금을 풀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수천 년 동안 닫혀 있던 문이 마침내 열렸다.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나의 영혼까지 얼어붙게 하는 듯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곳은 거대한 지하 공간이었다. 푸른빛을 내는 수정들이 천장을 뒤덮고 있었고, 그 수정들에서 뻗어 나온 수많은 영기 사슬이 중앙의 거대한 구조물을 붙잡고 있었다. 구조물은 마치 살아있는 제단 같았다. 검은색의 불길한 광택을 띠는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형용할 수 없는 존재였다. 거대한, 하지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검은 덩어리. 무수히 많은 눈과 입이 뒤틀린 채 박혀 있는 듯했고, 그 모든 것에서 끊임없이 영기가 흘러나와 사슬을 타고 수정들을 통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흡사 거대한 영혼 착취 장치 같았다.

    그리고 그 검은 덩어리 안에서, 나는 무수히 많은 생명의 빛을 보았다. 작고 희미한 빛들이 덩어리 속에서 고통스럽게 꿈틀대고 있었다. 그것들은 흡수되고, 정제되어, 깨끗한 영기로 변환되고 있었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천상학원의 풍부하고 순수한 영기, 학생들의 빠른 수련 속도, 선인들이 도달했다는 궁극의 경지… 이 모든 것이 저 지하의 끔찍한 존재로부터, 혹은 그 존재에게서 추출된 수많은 생명 정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건… 제물이야. 영혼… 혹은 존재 자체를 갈아 넣어 만들어진 영기…!”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동안 내가 마시고, 수련하며, 나의 영맥을 채웠던 ‘순수한’ 영기가 사실은 이런 끔찍한 희생 위에서 세워진 것이었다니. 천상학원은 영기를 정화하는 곳이 아니었다. 영혼을 갈아 영기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영혼 동력로였다.

    그 순간, 검은 덩어리 속에서 가장 큰 눈 하나가 나를 향해 번뜩였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그러나 동시에 엄청난 고통이 담긴 시선이었다. 나는 마치 심장을 움켜쥐어진 듯한 고통에 비틀거렸다. 내 몸 안의 영기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누가… 누가 감히 이곳에…!”

    갑자기 공간이 일그러지며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 교수의 목소리였다. 그는 순식간에 내 뒤에 나타나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강휘! 감히 금지된 봉인을 풀고 이곳에 발을 들여놓다니! 네놈이 천상학원의 오랜 비밀을 깨뜨리려 하는구나!”

    “교수님… 이, 이게 대체…!”

    “쉿!” 현 교수가 단호하게 내 입을 막았다. “네놈의 어리석은 호기심이 감당할 수 있는 진실이 아니다. 천상학원이 수천 년간 이어진 이유, 수많은 선인이 탄생한 이유. 이 모든 것은 바로 이 ‘존재’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영기의 원천이자,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학원을 지키는 최종 방어선이기도 하다. 너 같은 어린애가 감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의 눈은 광기로 번득였다. 평소의 현 교수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마치 광신도처럼 보였다.

    “이 끔찍한 제물 위에서 천상학원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현 교수가 비웃었다. “제물? 무지한 소리! 이것은 우주의 균형을 위한 위대한 희생이자, 더 많은 생명들이 선도(仙道)에 오르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너처럼 감정적인 꼬마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너는 이 진실을 보지 못했어야 했다.”

    그의 손에서 푸른 영기가 섬광처럼 뿜어져 나왔다. 내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강렬한 충격이 내 몸을 덮쳤다. 나는 뒤로 나가떨어지며, 거대한 존재가 뿜어내는 고통의 비명과 현 교수의 광기 어린 눈빛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도, 내 몸을 채웠던 ‘순수한’ 영기가 이제는 더럽고 역겨운 피 냄새를 풍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천상학원. 그 완벽한 이름 아래 숨겨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금기. 나는 보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 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화. 첫 만남은 늘 격정적이지. 돌멩이든 사람이든.

    북쪽 설산의 얼어붙은 칼바람도, 남쪽 바다의 거친 파도도, 서쪽 사막의 뜨거운 모래폭풍도, 동쪽 밀림의 음습한 맹독도, 그 무엇도 막을 수 없었다. 수많은 무림인들이 숨죽여 기다려온 바로 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으니, 바로 천하제일 무림 대회의 서막이었다.

    “젠장, 여기가 맞나? 지도는 무슨 암호문이여. ‘제2 연무장 뒤편, 소나무 세 그루 옆’이라니, 소나무가 여기 한두 그루여야 말이지!”

    거대한 비석으로 만든 ‘천하제일 무림 대회’라는 글자가 입구에 우뚝 솟아 있었지만, 그 웅장함과는 달리 나의 목적지는 미로와 같았다. 쨍한 햇살 아래, 삐죽삐죽 솟은 소나무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나는 손바닥만 한 지도를 펴들고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등에 짊어진 기다란 검은 보자기가 축 늘어졌다. 그 안에는 남들이 보면 그저 폐품으로 여길, 녹슨 쇠붙이 하나가 들어 있었지만, 나에게는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대회장 입구부터 왁자지껄한 기운이 넘쳐흘렀다. 화려한 문파의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리고, 저마다 기상천외한 무공을 자랑하는 문파의 복색을 한 무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자신의 무용담을 뽐내고 있었다. 귓가에는 벌써부터 ‘천룡문의 검법은 어쩌고, 혈마문의 장법은 저쩌고’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며 투덜거렸다. “흥, 누가 보면 지들만 무림인인 줄 알겠네. 다들 허세 부리는 건 똑같구먼.”

    사실 나는 어떤 문파에도 소속되지 않은 떠돌이 무인이었다. 어릴 적 우연히 주워들은 무공 비급을 달달 외워 수련했고, 혼자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물론 그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배고픔에 시달리며 산속을 헤매기 일쑤였고, 멧돼지 엉덩이를 걷어차고 도망 다니기 바빴다. 하지만 그 덕분에 나는 웬만한 문파의 정예 제자들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문제는, 아무도 그걸 알아주지 않는다는 거였지만.

    “아니, 등록은 어디서 하는 거야? ‘서쪽 문루 옆 간이 천막’이라더니, 여기 천막이 서쪽 문루 옆에만 백 개는 있겠네!”

    나는 기어이 짜증을 폭발시키며 지도를 구겨버렸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은자 몇 푼을 꺼내 주막으로 향했다. 등록이고 뭐고, 일단 배를 채우는 게 먼저였다.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기력을 보충해야지.

    주막은 이미 인산인해였다. 땀 냄새와 음식 냄새, 그리고 왠지 모를 알코올 냄새가 뒤섞여 진동했다. 나는 겨우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탁자를 닦지도 않은 채로 국밥 한 그릇을 시켰다.

    “어이, 여기 국밥 한 그릇이랑… 탁주 한 잔 주쇼!”

    시끄러운 주막 안에서 목청껏 소리치자, 주모가 땀을 뻘뻘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내 옆자리 의자를 거칠게 빼내어 앉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얼어붙었다.

    내 옆에 앉은 사내는… 한마디로 ‘그림’이었다. 먹물로 휘갈긴 듯한 새카만 머리칼은 마치 폭포수처럼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고, 날카로우면서도 깊이 있는 눈매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높고 오뚝한 콧대, 굳게 다문 입술, 그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조각상이었다. 새하얀 도포를 입고 있었는데, 그 단정함이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을 더욱 부각시켰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 이건 좀 심했잖아. 세상에 저런 얼굴이 존재한다고? CG 아니야?

    그는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에 자신의 검을 내려놓았다. 검집에는 섬세한 용 문양이 새겨져 있었고, 얼핏 보기에도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주막 안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감히 말을 걸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그의 차가운 눈매가 스르륵 움직여 나를 향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거기, 좀 비켜라.”

    낮게 깔린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 만큼 서늘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저기요, 제가 먼저 앉았는데요?

    “저… 제가 먼저 앉았는데요.” 내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자리는 내가 앉을 자리다.”

    “무슨 소리예요? 여기가 무슨 전세 낸 자리도 아니고….”

    나는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잘생겼기로서니 이렇게 무례할 수가! 내 안의 ‘쌈닭’ 기질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는 내 말을 무시하고 손을 뻗어 탁자 한가운데 놓인 술병을 잡으려 했다. 그런데 하필 그 술병 바로 옆에, 내가 아껴 마시려고 꺼내 놓은 육포 조각이 놓여 있었다. 그는 거침없이 손을 뻗었고, 그의 손끝이 육포 조각을 툭 건드렸다.

    육포 조각은 힘없이 탁자 아래로 떨어졌다.

    나는 순간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야! 너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내 고함에 주막 안의 모든 대화가 뚝 끊겼다. 모든 시선이 우리 둘에게로 향했다. 나는 그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내 육포! 내 소중한 육포 조각!

    사내는 내가 던진 고함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까짓 육포 조각 하나로 소란이군.”

    “그까짓 육포라니! 너는 이게 얼마나 귀한 건 줄 알아? 내가 이걸 사려고 얼마나 돌아다녔는데! 그리고 남의 물건을 떨어뜨렸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니야!”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의 얼굴이 내 코앞에 있었다. 여전히 냉랭한 표정.

    “사과?” 그의 입술이 비웃듯이 움직였다. “그대의 불찰로 벌어진 일이다. 감히 내게 소리친 것을 용서할 수 없군.”

    “뭐? 내 불찰? 지금 누가 누굴 탓하는 거야? 이 얼음 송곳 같은 녀석이 정말!”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잘생긴 얼굴에 한 방 먹이고 싶다는 충동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의 주변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지만,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켰다.

    바로 그때, 주모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아이고, 도련님! 아가씨!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요! 이 분은 천무혁 도련님이시고, 이 분은… 어험, 처음 뵙는 아가씨신데….”

    천무혁. 나는 그 이름을 되뇌었다. 어딘가 익숙한 이름인데. 아, 맞다. 이번 대회 우승 후보 1순위로 거론되던 그 천무혁! 천룡문의 차기 문주이자, 어린 나이에 이미 최고 경지에 도달했다는 천재 무인!

    하지만 내 눈엔 그저 잘생긴 싸가지였다.

    “됐소, 주모.” 천무혁이 차갑게 말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 여인은 무례를 범했다.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될 것 같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막 안의 모든 무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 기세로 자세를 취했다. 살벌한 기운이 주막 안을 가득 채웠다.

    나는 피식 웃었다. “오호라, 무례를 범했다고? 그럼 네놈은 남의 육포를 떨어뜨린 무례를 범했으니, 당장 바닥에 엎드려 빌어야 할 거 아니야? 안 그래? 천룡문 도련님?”

    내 말에 천무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얼굴에 비로소 작은 균열이 생기는 것을 보았다. 그게 재미있었다.

    “좋다. 결투를 신청한다. 이 주막에서 감히 내게 도전할 배짱이 있다면 말이다.” 천무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막 안은 한순간 정적이 흘렀다. 감히 천무혁에게 결투를 신청하다니? 그것도 이름 없는 떠돌이 무인이? 다들 미쳤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등을 휙 돌렸다. “결투는 무슨 결투야. 여기는 대회장이 아니라 밥집이거든? 육포 값이나 물어내!”

    나는 천무혁의 반응을 보지 않고 주모에게 국밥값과 탁주 값을 던져주고 문을 나섰다. 육포 값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어차피 저 인간에게 받을 생각이었다.

    주막 문을 나서자, 시끄러운 대회장 분위기가 다시 나를 감쌌다.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젠장, 천하제일 무림 대회가 아니라 천하제일 짜증 대회겠구먼. 시작부터 저런 얼음 송곳 같은 녀석을 만나다니!”

    하지만 이내 씨익 웃었다. 그래, 잘생기면 뭐 해. 내 육포를 건드렸는데.

    어차피 이 대회에서 만나게 될 운명이었을 터.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에서, 제일 먼저 만난 인간이 그 재수 없는 천무혁이라니. 운명치고는 꽤나 격정적인데?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등록처를 향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육포 값까지 다 뽑아내야겠다. 저 잘생긴 놈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서!

    어쩌면 이 대회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 *

    (계속)

  • 선협 (신선) 독립적인 단편 소설

    천상학원. 그 이름처럼 하늘 아래 가장 고귀한 영기와 지식을 갈고닦는 곳.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학원은 세상 모든 선인 지망생들의 꿈이자 목표였다. 나는 강휘. 천상학원에서 손꼽히는 수재였지만, 동시에 가장 ‘문제아’ 딱지를 달고 다니는 학생이기도 했다. 학원의 규율보다는 금지된 고서의 먼지 쌓인 페이지에, 선배들의 자랑스러운 무용담보다는 감춰진 전설의 조각들에 더 흥미를 느꼈으니까.

    “강휘, 또 그 잡다한 영환술 서적에 코를 박고 있더냐? 너의 타고난 영맥으로 그리 낭비할 시간이 없다.”

    현 교수의 호통에 나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교수는 언제나처럼 학원의 정통 심법(心法)과 올바른 수련법을 강조했다. 그의 눈에는 내가 그저 잠재력을 허비하는 방랑자로 보일 뿐일 테지.

    “교수님. 이 책에 묘사된 ‘영맥의 심연을 더듬는 법’이 흥미로워서요. 평범한 영기 순환과는 다른 흐름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 교수가 혀를 찼다. “그것은 금서다. 애초에 학원 도서관에 있어서는 안 될 것. 오래전 폐기되었어야 할 사악한 잡기술에 불과해. 천상학원의 영기는 태초부터 순수하고 맑은 자연의 숨결이며, 우리의 심법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알겠느냐?”

    “네, 교수님.” 나는 순순히 대답했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는 씨앗 하나가 심겼다. ‘심연을 더듬는 법’이라… 어쩌면 천상학원의 완벽함 아래 감춰진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

    며칠 후, 나는 의도적으로 금지된 구역, 즉 학원의 가장 오래된 하부 영맥 수련실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사색의 전당’이라 불리는 그곳은 천 년 전 천상학원을 처음 세운 선조들이 영기를 수련하던 곳이라고 전해졌지만,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는 폐쇄된 공간이었다. 고요하고, 축축하며,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현 교수가 그토록 경멸했던 그 ‘잡기술’을 펼쳤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 영맥을 따라 흐르는 영기를 평소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려보냈다. 보통 영기는 몸 밖으로 나선형으로 퍼져나가지만, 나는 의식을 더 깊이, 아래로, 땅속으로 파고들게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굳건한 땅의 기운뿐. 그러나 수련이 깊어질수록, 미세한 진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주 희미하고 불규칙한,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맥동 같은 진동이었다.

    그 진동은 학원의 영맥 흐름과 완전히 달랐다. 학원 전체를 지탱하는 영기는 맑고 힘찼지만, 이 진동은 어딘가 탁하고, 고통스러웠다. 나는 그 진동을 따라 내 의식을 더욱 밀어 넣었다. 의식이 심연으로 추락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쿵- 쿵- 쿵-.

    진동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것은 더 이상 희미한 맥동이 아니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심장처럼 뛰는 소리였다. 나의 영기가 그 소리에 이끌려 자석처럼 빨려 들어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낡은 수련실 바닥이 아니라, 기이하게 뒤틀린 바위로 이루어진 동굴 같은 공간에 서 있었다. 사방이 암흑이었으나, 벽면에 새겨진 고대 문양들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문양들은… 학원 도서관의 어떤 금서에서도 본 적 없는, 알 수 없는 언어와 상징들이었다.

    “이게 대체… 어디지?”

    내 목소리가 동굴 속으로 메아리쳤다. 동굴의 끝에는 거대한 철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문은 영기로 단단히 봉인되어 있었는데, 그 봉인의 기운 또한 학원의 것과는 달랐다. 차갑고, 날카로우며, 어딘가 잔혹한 기운이었다. 나는 문에 손을 대보았다. 금속의 냉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그 순간, 나는 문 너머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영기의 파동을 감지했다. 그것은 순수함을 넘어선, 너무나도 거대하고 압도적인 영기였다. 천상학원의 모든 영기를 합친 것보다도 더 강렬한.

    하지만 그 영기 안에는… 분명히 고통이 서려 있었다. 비명과 탄식, 절규가 뒤섞인 듯한 감정의 소용돌이.

    나는 망설였다. 현 교수의 경고, 금서의 위험성. 그러나 나의 타고난 호기심과 그 압도적인 영기에 대한 갈망이 나를 밀어붙였다. 나는 고대 주술을 이용해 봉인을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주술은 나의 영기를 엄청나게 소모했지만, 문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며 그 잠금을 풀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수천 년 동안 닫혀 있던 문이 마침내 열렸다.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나의 영혼까지 얼어붙게 하는 듯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곳은 거대한 지하 공간이었다. 푸른빛을 내는 수정들이 천장을 뒤덮고 있었고, 그 수정들에서 뻗어 나온 수많은 영기 사슬이 중앙의 거대한 구조물을 붙잡고 있었다. 구조물은 마치 살아있는 제단 같았다. 검은색의 불길한 광택을 띠는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위에는…

    나는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형용할 수 없는 존재였다. 거대한, 하지만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검은 덩어리. 무수히 많은 눈과 입이 뒤틀린 채 박혀 있는 듯했고, 그 모든 것에서 끊임없이 영기가 흘러나와 사슬을 타고 수정들을 통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흡사 거대한 영혼 착취 장치 같았다.

    그리고 그 검은 덩어리 안에서, 나는 무수히 많은 생명의 빛을 보았다. 작고 희미한 빛들이 덩어리 속에서 고통스럽게 꿈틀대고 있었다. 그것들은 흡수되고, 정제되어, 깨끗한 영기로 변환되고 있었다.

    그제야 모든 퍼즐이 맞춰졌다. 천상학원의 풍부하고 순수한 영기, 학생들의 빠른 수련 속도, 선인들이 도달했다는 궁극의 경지… 이 모든 것이 저 지하의 끔찍한 존재로부터, 혹은 그 존재에게서 추출된 수많은 생명 정수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건… 제물이야. 영혼… 혹은 존재 자체를 갈아 넣어 만들어진 영기…!”

    내 목소리가 떨렸다. 그동안 내가 마시고, 수련하며, 나의 영맥을 채웠던 ‘순수한’ 영기가 사실은 이런 끔찍한 희생 위에서 세워진 것이었다니. 천상학원은 영기를 정화하는 곳이 아니었다. 영혼을 갈아 영기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영혼 동력로였다.

    그 순간, 검은 덩어리 속에서 가장 큰 눈 하나가 나를 향해 번뜩였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그러나 동시에 엄청난 고통이 담긴 시선이었다. 나는 마치 심장을 움켜쥐어진 듯한 고통에 비틀거렸다. 내 몸 안의 영기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누가… 누가 감히 이곳에…!”

    갑자기 공간이 일그러지며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현 교수의 목소리였다. 그는 순식간에 내 뒤에 나타나 있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강휘! 감히 금지된 봉인을 풀고 이곳에 발을 들여놓다니! 네놈이 천상학원의 오랜 비밀을 깨뜨리려 하는구나!”

    “교수님… 이, 이게 대체…!”

    “쉿!” 현 교수가 단호하게 내 입을 막았다. “네놈의 어리석은 호기심이 감당할 수 있는 진실이 아니다. 천상학원이 수천 년간 이어진 이유, 수많은 선인이 탄생한 이유. 이 모든 것은 바로 이 ‘존재’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영기의 원천이자,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학원을 지키는 최종 방어선이기도 하다. 너 같은 어린애가 감히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의 눈은 광기로 번득였다. 평소의 현 교수의 온화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마치 광신도처럼 보였다.

    “이 끔찍한 제물 위에서 천상학원이 유지되고 있었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현 교수가 비웃었다. “제물? 무지한 소리! 이것은 우주의 균형을 위한 위대한 희생이자, 더 많은 생명들이 선도(仙道)에 오르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과정이다! 너처럼 감정적인 꼬마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야. 너는 이 진실을 보지 못했어야 했다.”

    그의 손에서 푸른 영기가 섬광처럼 뿜어져 나왔다. 내가 제대로 반응하기도 전에, 강렬한 충격이 내 몸을 덮쳤다. 나는 뒤로 나가떨어지며, 거대한 존재가 뿜어내는 고통의 비명과 현 교수의 광기 어린 눈빛을 마지막으로 보았다.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도, 내 몸을 채웠던 ‘순수한’ 영기가 이제는 더럽고 역겨운 피 냄새를 풍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천상학원. 그 완벽한 이름 아래 숨겨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금기. 나는 보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 선협 (신선) 독립적인 단편 소설

    도시의 흉터처럼 솟아오른 회색 아파트 숲 사이, 그중에서도 유독 평범해 보이는 한 동의 14층에 김민준은 살고 있었다. 이십대 후반의 그는 프리랜서 웹툰 작가 지망생으로, 낮에는 웹소설 연재 플랫폼에서 계약직 편집 업무를 보며 생계를 유지했고, 밤이면 캔버스 대신 액정 태블릿 위에서 자신의 꿈을 그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청년이었다. 그의 삶은 규칙적이고, 소박하며, 그래서 더욱 예측 불가능한 일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적어도, 그 일들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밤늦게 작업을 마치고 주방으로 가 물을 마시려는데, 분명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컵이 싱크대 옆에 놓여 있었다. ‘내가 건망증이 심해졌나?’ 민준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튿날 아침, 침대 옆 협탁에 두었던 스마트폰이 엉뚱하게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액정은 멀쩡했지만, 민준은 슬슬 찜찜함을 느꼈다.

    “뭐야, 내가 술 마시고 집어던졌나?”

    하지만 그는 전날 밤 맥주 한 캔조차 마시지 않았다.

    사건들은 점점 기묘해졌다. 분명 닫아두었던 창문이 활짝 열려있어 거실에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거나, 밤중에 전등이 저절로 깜빡이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날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화장실 문이 안에서 잠겨 있어 한참을 애를 먹기도 했다. 민준은 처음에는 누군가 자신의 집에 침입했다고 생각하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지만, 현관문 잠금장치는 멀쩡했고, 어떠한 침입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수사관은 피곤한 얼굴로 민준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점점 더 심해지는 현상들에 민준은 불안에 떨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그의 작업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텅 빈 방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그의 액정 태블릿이 혼자 켜져 화면 위로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빠르게 그려졌다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섬뜩함에 뒷목이 서늘해졌다. 귀신인가? 민준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영적인 현상을 믿어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다 내가 미쳐버리겠어.”

    그는 초조하게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는 더 이상 이 아파트에서 혼자 잠들 수 없었다. 주말마다 본가로 도망치듯 향했고, 평일 밤에는 친구 집에 얹혀 잠을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간 아파트를 비웠다가 돌아오면, 현상은 더욱 격렬해져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이 거꾸로 뒤집혀 있거나, 냉장고 문이 활짝 열린 채 음식물들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밤, 민준은 용기를 내어 밤샘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마감이 코앞이라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적막이 흐르는 아파트에,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또렷하게 울렸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가더니, 그의 어깨를 누군가 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흐읍!”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엎어진 채 뒤를 돌아보니, 텅 비어 있어야 할 공간에, 희미하게 빛나는 반투명한 형체가 서 있었다. 그것은 얼핏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흐릿한 윤곽 속에서 낡고 오래된 비단 옷자락이 나부끼는 듯했고,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감정이 짙게 서려 있는 듯했다.

    “누, 누구세요…?”

    민준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떨렸다. 형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더니, 민준의 앞에 놓인 컴퓨터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희미하고 알아듣기 어려운 고어(古語)로 중얼거렸다.

    “눈부신 기계덩어리… 요망한 소음… 지루하기 짝이 없는 형상…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냐?”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이 존재는 자신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혼란스러워하는 것뿐이었다.

    “저… 저건 컴퓨터에요. 제가 이걸로 일을 해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설명했다. 형체는 민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아파트 내부를 빙 둘러보았다.

    “이 돌덩어리 같은 상자들이 하늘을 찌르고… 속에는 이토록 시끄럽고 어지러운 기운들이 가득하니… 어찌 편히 쉬란 말이냐.”

    점점 선명해지는 목소리에 민준은 놀랐다. 고어는 현대 한국어와는 달랐지만, 묘하게 그 의미가 전달되는 듯했다. 이 존재는 아파트를 이루고 있는 콘크리트 숲과 현대 문명의 소음, 전자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자파 등을 불편해하는 듯 보였다.

    “당신은… 대체 누구세요?”

    민준이 조심스럽게 묻자, 형체는 한숨을 쉬듯 희미하게 떨렸다.

    “나는… 잊혀진 자. 이 땅의 기맥을 지키던 미천한 신선이었으나, 오랜 세월 속에서 기억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지. 헌데 어느 날, 갑자기 솟아오른 이 거대한 돌산들이 나의 잠을 깨웠고, 나의 거처 위에 요란한 기운들을 쏟아내더구나.”

    신선이라니. 민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웹툰이나 웹소설에서나 보던 설정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럼 당신이… 그동안 제 물건들을 움직이거나… 했던 건…?”

    “나는 그저 너희가 만든 이 기이한 상자들과 요란한 소음, 눈을 어지럽히는 빛에 짜증이 나서… 조용히 해달라고, 혹은 사라져 달라고 했을 뿐이다. 너희 인간들은 어찌 이리 둔한지, 나의 기운조차 알아채지 못하는구나.”

    신선은 투명한 손으로 민준의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잔은 둥둥 떠올라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다시 식탁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민준은 경악과 동시에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에 휩싸였다. 자신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고작 이 신선님의 ‘조용히 해달라는 투정’이었다니.

    “죄송합니다, 신선님… 제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기서 살아야 하고, 일도 해야 해서…”

    “시끄럽다. 네놈의 시끄러운 작업은 나의 기운을 흩트리고, 저 번쩍이는 상자들은 나의 눈을 아프게 한다. 이 아파트는, 정확히 말하면 이 자리는, 과거 이 일대의 영험한 기운이 모이던 곳. 나는 그 기운을 다스리며 잠들어 있었으나, 너희의 탐욕스러운 건설이 나의 잠을 깨웠을 뿐더러, 내 거처를 부수고 그 위에 이런 철근과 시멘트 덩어리를 쌓아올렸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느냐!”

    신선의 투명한 몸체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분노가 느껴지는 영적인 기운에 민준은 저절로 무릎을 꿇을 뻔했다.

    “진정하세요, 신선님! 제가 어떻게든 조용히 해볼게요! 정말이에요!”

    민준은 필사적으로 빌었다. 신선은 한참 동안 민준을 노려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내 기운은 약해져서, 너희의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그저 한탄스러울 뿐. 하지만 네놈이 나의 심기를 더 이상 거스르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이리 지내보자꾸나.”

    그렇게 민준과 신선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민준은 작업실 한켠에 작은 상을 차려 조용한 향을 피우고, 맑은 물과 제철 과일을 올려두었다. 신선은 그 공간을 자신의 새로운 거처로 삼았는지, 그 주변만큼은 기이한 현상들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신선은 여전히 현대 문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민준이 밤늦게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 그 헤드폰이 민준의 귀에서 홀연히 사라져 공중을 유영하곤 했다. 휴대폰으로 웹툰을 보며 깔깔 웃는 소리에는 민준의 폰이 벽으로 날아가 박히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어느 날은 민준이 밤샘 작업에 지쳐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투명한 손이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었다.

    “밤새도록 저 번쩍이는 상자에 매달려 무엇을 하는 것이냐. 잠은 자야 할 것 아니냐.”

    신선은 여전히 투덜거렸지만, 그 목소리에는 어딘가 걱정하는 듯한 묘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민준은 피식 웃었다. 이제는 이 괴짜 신선님의 잔소리조차 정겹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파트의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신, 미묘하게 변했다. 민준이 작업에 집중할 때면, 그의 등 뒤에서 기묘한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때로는 막혔던 아이디어가 물 흐르듯 풀리기도 했고, 때로는 붓질 하나하나에 섬세한 영감이 깃드는 듯했다. 신선이 무의식중에 민준에게 자신의 오랜 지혜나 영적인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민준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묘한 동거가 그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그의 웹툰 스토리는 점점 더 신비롭고 깊은 세계관을 담게 되었고, 독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전에는 없던 ‘영적인 무언가’를 느낀다고 평했다.

    현대 도시의 아파트 14층. 그곳에는 웹툰 작가 지망생 김민준과, 현대 문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잊혀진 신선이 함께 살고 있었다. 불협화음처럼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어쩌면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가장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민준은 신선이 가끔 옮겨놓는 리모컨을 찾아 헤매며, 그의 투명한 동거인과 함께 고요하면서도 활기찬 하루를 보낸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비가, 바로 우리 곁에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아파트의 14층처럼 말이다.

  • 선협 (신선) 독립적인 단편 소설

    도시의 흉터처럼 솟아오른 회색 아파트 숲 사이, 그중에서도 유독 평범해 보이는 한 동의 14층에 김민준은 살고 있었다. 이십대 후반의 그는 프리랜서 웹툰 작가 지망생으로, 낮에는 웹소설 연재 플랫폼에서 계약직 편집 업무를 보며 생계를 유지했고, 밤이면 캔버스 대신 액정 태블릿 위에서 자신의 꿈을 그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청년이었다. 그의 삶은 규칙적이고, 소박하며, 그래서 더욱 예측 불가능한 일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적어도, 그 일들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밤늦게 작업을 마치고 주방으로 가 물을 마시려는데, 분명 식탁 위에 올려두었던 컵이 싱크대 옆에 놓여 있었다. ‘내가 건망증이 심해졌나?’ 민준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튿날 아침, 침대 옆 협탁에 두었던 스마트폰이 엉뚱하게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액정은 멀쩡했지만, 민준은 슬슬 찜찜함을 느꼈다.

    “뭐야, 내가 술 마시고 집어던졌나?”

    하지만 그는 전날 밤 맥주 한 캔조차 마시지 않았다.

    사건들은 점점 기묘해졌다. 분명 닫아두었던 창문이 활짝 열려있어 거실에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거나, 밤중에 전등이 저절로 깜빡이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날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화장실 문이 안에서 잠겨 있어 한참을 애를 먹기도 했다. 민준은 처음에는 누군가 자신의 집에 침입했다고 생각하고 경찰에 신고까지 했지만, 현관문 잠금장치는 멀쩡했고, 어떠한 침입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수사관은 피곤한 얼굴로 민준을 묘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점점 더 심해지는 현상들에 민준은 불안에 떨었다. 가장 심각했던 것은, 그의 작업실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텅 빈 방에서 누군가 중얼거리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그의 액정 태블릿이 혼자 켜져 화면 위로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빠르게 그려졌다 지워지기를 반복했다. 섬뜩함에 뒷목이 서늘해졌다. 귀신인가? 민준은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영적인 현상을 믿어본 적이 없었지만, 이제는 다른 가능성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러다 내가 미쳐버리겠어.”

    그는 초조하게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는 더 이상 이 아파트에서 혼자 잠들 수 없었다. 주말마다 본가로 도망치듯 향했고, 평일 밤에는 친구 집에 얹혀 잠을 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며칠간 아파트를 비웠다가 돌아오면, 현상은 더욱 격렬해져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이 거꾸로 뒤집혀 있거나, 냉장고 문이 활짝 열린 채 음식물들이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어느 날 밤, 민준은 용기를 내어 밤샘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마감이 코앞이라 도저히 피할 수 없었다. 적막이 흐르는 아파트에,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또렷하게 울렸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스쳐 지나가더니, 그의 어깨를 누군가 툭 치는 느낌이 들었다.

    “흐읍!”

    민준은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바닥에 엎어진 채 뒤를 돌아보니, 텅 비어 있어야 할 공간에, 희미하게 빛나는 반투명한 형체가 서 있었다. 그것은 얼핏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흐릿한 윤곽 속에서 낡고 오래된 비단 옷자락이 나부끼는 듯했고,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감정이 짙게 서려 있는 듯했다.

    “누, 누구세요…?”

    민준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떨렸다. 형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더니, 민준의 앞에 놓인 컴퓨터 모니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는 희미하고 알아듣기 어려운 고어(古語)로 중얼거렸다.

    “눈부신 기계덩어리… 요망한 소음… 지루하기 짝이 없는 형상… 대체 무엇을 하는 것이냐?”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이 존재는 자신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혼란스러워하는 것뿐이었다.

    “저… 저건 컴퓨터에요. 제가 이걸로 일을 해요.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설명했다. 형체는 민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아파트 내부를 빙 둘러보았다.

    “이 돌덩어리 같은 상자들이 하늘을 찌르고… 속에는 이토록 시끄럽고 어지러운 기운들이 가득하니… 어찌 편히 쉬란 말이냐.”

    점점 선명해지는 목소리에 민준은 놀랐다. 고어는 현대 한국어와는 달랐지만, 묘하게 그 의미가 전달되는 듯했다. 이 존재는 아파트를 이루고 있는 콘크리트 숲과 현대 문명의 소음, 전자기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자파 등을 불편해하는 듯 보였다.

    “당신은… 대체 누구세요?”

    민준이 조심스럽게 묻자, 형체는 한숨을 쉬듯 희미하게 떨렸다.

    “나는… 잊혀진 자. 이 땅의 기맥을 지키던 미천한 신선이었으나, 오랜 세월 속에서 기억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지. 헌데 어느 날, 갑자기 솟아오른 이 거대한 돌산들이 나의 잠을 깨웠고, 나의 거처 위에 요란한 기운들을 쏟아내더구나.”

    신선이라니. 민준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웹툰이나 웹소설에서나 보던 설정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럼 당신이… 그동안 제 물건들을 움직이거나… 했던 건…?”

    “나는 그저 너희가 만든 이 기이한 상자들과 요란한 소음, 눈을 어지럽히는 빛에 짜증이 나서… 조용히 해달라고, 혹은 사라져 달라고 했을 뿐이다. 너희 인간들은 어찌 이리 둔한지, 나의 기운조차 알아채지 못하는구나.”

    신선은 투명한 손으로 민준의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잔은 둥둥 떠올라 공중에서 한 바퀴 돌더니, 다시 식탁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민준은 경악과 동시에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에 휩싸였다. 자신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고작 이 신선님의 ‘조용히 해달라는 투정’이었다니.

    “죄송합니다, 신선님… 제가… 몰랐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기서 살아야 하고, 일도 해야 해서…”

    “시끄럽다. 네놈의 시끄러운 작업은 나의 기운을 흩트리고, 저 번쩍이는 상자들은 나의 눈을 아프게 한다. 이 아파트는, 정확히 말하면 이 자리는, 과거 이 일대의 영험한 기운이 모이던 곳. 나는 그 기운을 다스리며 잠들어 있었으나, 너희의 탐욕스러운 건설이 나의 잠을 깨웠을 뿐더러, 내 거처를 부수고 그 위에 이런 철근과 시멘트 덩어리를 쌓아올렸으니, 어찌 분통이 터지지 않겠느냐!”

    신선의 투명한 몸체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분노가 느껴지는 영적인 기운에 민준은 저절로 무릎을 꿇을 뻔했다.

    “진정하세요, 신선님! 제가 어떻게든 조용히 해볼게요! 정말이에요!”

    민준은 필사적으로 빌었다. 신선은 한참 동안 민준을 노려보더니, 이내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내 기운은 약해져서, 너희의 이 시끄러운 세상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그저 한탄스러울 뿐. 하지만 네놈이 나의 심기를 더 이상 거스르지 않는다면… 당분간은 이리 지내보자꾸나.”

    그렇게 민준과 신선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민준은 작업실 한켠에 작은 상을 차려 조용한 향을 피우고, 맑은 물과 제철 과일을 올려두었다. 신선은 그 공간을 자신의 새로운 거처로 삼았는지, 그 주변만큼은 기이한 현상들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신선은 여전히 현대 문명을 이해하지 못했다. 민준이 밤늦게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 그 헤드폰이 민준의 귀에서 홀연히 사라져 공중을 유영하곤 했다. 휴대폰으로 웹툰을 보며 깔깔 웃는 소리에는 민준의 폰이 벽으로 날아가 박히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어느 날은 민준이 밤샘 작업에 지쳐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투명한 손이 그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는 느낌이었다.

    “밤새도록 저 번쩍이는 상자에 매달려 무엇을 하는 것이냐. 잠은 자야 할 것 아니냐.”

    신선은 여전히 투덜거렸지만, 그 목소리에는 어딘가 걱정하는 듯한 묘한 기색이 담겨 있었다. 민준은 피식 웃었다. 이제는 이 괴짜 신선님의 잔소리조차 정겹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아파트의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신, 미묘하게 변했다. 민준이 작업에 집중할 때면, 그의 등 뒤에서 기묘한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때로는 막혔던 아이디어가 물 흐르듯 풀리기도 했고, 때로는 붓질 하나하나에 섬세한 영감이 깃드는 듯했다. 신선이 무의식중에 민준에게 자신의 오랜 지혜나 영적인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민준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묘한 동거가 그의 삶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듯했다. 그의 웹툰 스토리는 점점 더 신비롭고 깊은 세계관을 담게 되었고, 독자들은 그의 작품에서 전에는 없던 ‘영적인 무언가’를 느낀다고 평했다.

    현대 도시의 아파트 14층. 그곳에는 웹툰 작가 지망생 김민준과, 현대 문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잊혀진 신선이 함께 살고 있었다. 불협화음처럼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어쩌면 이 거대한 도시 속에서 가장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늘도 민준은 신선이 가끔 옮겨놓는 리모컨을 찾아 헤매며, 그의 투명한 동거인과 함께 고요하면서도 활기찬 하루를 보낸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비가, 바로 우리 곁에 숨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평범해 보이는 아파트의 14층처럼 말이다.

  • 추리 미스터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제1장. 사라진 그림자

    카르틴의 하늘은 늘 잿빛이었다. 제국의 심장인 황도, 그란테이아가 눈부신 대리석과 황금빛 돔으로 치장되어 있을 때도, 제국의 끄트머리 빈민구역 카르틴은 한 번도 햇살을 제대로 받은 적 없는 낡은 구두창처럼 칙칙했다. 퀴퀴한 뒷골목에서는 시궁창 냄새와 썩은 과일 냄새가 뒤섞여 희망 없는 하루를 알렸고, 허리춤에 권총을 찬 제국군 병사들의 딱딱한 군화 소리만이 유일하게 규칙적인 리듬을 만들었다.

    진우는 그 냄새와 소리에 익숙했다. 열여덟 해를 이 잿빛 도시에서 살았고, 스물여덟 해를 살게 될지도 몰랐다. 그는 낡은 수레에 짐을 싣고 시장통을 가로질렀다. 등에는 무거운 마대 자루가 축 늘어져 있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어느 노인보다도 형형했다. 짐꾼이라는 그의 직업은 단순히 물건을 나르는 것을 넘어, 도시의 모든 소문과 풍경을 눈과 귀에 담는 관찰자의 역할이기도 했다.

    “쳇, 젠장!”

    진우의 앞에서 걷던 어린 짐꾼 하나가 삐끗하며 짐을 쏟아냈다. 그 옆을 지나가던 제국군 병사가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게으른 놈 같으니. 질질 끄는 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하나?”

    병사는 구둣발로 쏟아진 사과 몇 개를 뭉개버리고는 성큼성큼 지나쳤다. 어린 짐꾼은 그저 바닥에 엎드려 울먹일 뿐이었다. 진우는 차마 발을 멈추지 못하고 어린 짐꾼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돕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제국군의 눈에 띄어 자신마저 빌미 잡힐 게 뻔했다. 이 도시에선 정의는 사치였다.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미덕이었다.

    점심 무렵, 그의 단골 식당인 ‘노을 주막’에 들렀다. 이곳은 카르틴에서 유일하게 따뜻한 국밥 한 그릇과 함께 인간적인 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주막 안은 여느 때와 다르게 쥐죽은 듯 조용했다. 늘 왁자지껄하던 손님들은 고개만 숙인 채 식사를 하고 있었고, 주인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깊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주머니, 국밥 한 그릇이요.”

    진우가 평소처럼 활기 없이 중얼거리자, 아주머니가 낡은 행주로 상을 닦으며 진우에게로 다가왔다.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고 쉬어 있었다.

    “진우야, 못 들었니? 어제 밤에… 박 이장님이 사라지셨어.”

    진우는 수저를 들다 말고 멈칫했다. 박 이장님이라니. 카르틴의 이장이자, 빈민들을 위해 늘 제국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던 몇 안 되는 어른이었다. 특히 최근 제국이 발표한 ‘운하 확장세’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며 서명운동까지 벌이던 참이었다. 운하 확장은 황실의 사치일 뿐, 그 비용은 고스란히 이 가난한 동네의 짐이 될 것이라고 그는 늘 강조했다.

    “사라지셨다고요? 어디로요?”

    “모르지… 어젯밤에 집에 가보니 문이 열려 있었는데, 아무도 없었단다. 이웃들도 아무것도 못 봤다고 하고….” 아주머니는 낡은 행주를 쥐어짜듯 비틀었다. “사람들이 수군대는데… 분명 제국군 놈들이겠지. 어르신께서 그 빌어먹을 운하세에 대해 자꾸 따지셨으니….”

    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이 도시에선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제국의 눈 밖에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람들. 박 이장님은 그래도 달랐다. 많은 이들이 따랐고, 그의 목소리는 카르틴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 분이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지다니.

    국밥은 모래를 씹는 것처럼 퍽퍽했다. 그는 억지로 몇 숟갈 떠먹고는 주막을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박 이장님의 집으로 향했다. 낡은 목조 가옥, 마당에는 늘 정성껏 가꾼 채소들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생기를 잃은 듯 보였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아주머니 말대로 빗장이 열려 있었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마당은 깨끗했다. 너무나 깨끗해서 오히려 수상했다. 흙 한 줌 흐트러진 곳 없이 정돈되어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장님…”

    진우가 나직이 이름을 부르자, 마당 한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작은 헛기침 소리였다. 진우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낡은 창고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누군가의 눈이 불안하게 진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누구…세요?” 진우가 경계하며 물었다.

    창고 문이 조심스럽게 더 열리며, 낡은 천을 뒤집어쓴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막에서 봤던 어린 짐꾼의 어머니였다. 그녀는 늘 겁이 많았고, 사람들과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젊은이… 이장님 찾으러 왔는가?” 그녀의 목소리는 몹시 떨렸다.

    “혹시… 뭘 보셨나요?”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고개를 젓는 척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진우의 어깨 너머, 하늘을 맴도는 제국군의 탐사정 쪽으로 향했다. 진우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거대한 탐사정이 굉음을 내며 카르틴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저것은 단순히 감시의 눈이 아니었다. 침묵을 강요하는 제국의 거대한 위협이었다.

    다시 여인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녀는 이미 땅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것도….”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창고 문 안쪽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손에서 작고 낡은 나무 조각이 툭 하고 떨어졌다. 진우의 시선이 재빨리 그 조각에 닿았다. 그것은 단순한 나무 조각이 아니었다. 이장님이 늘 허리에 차고 다니던 작은 지팡이의 한 조각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나무 조각에는 작게, 아주 작게, 긁힌 듯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무늬는 진우의 눈에 익숙했다. 카르틴의 빈민들이 몰래 모여 비밀리에 정보를 교환하는, ‘달그림자’라는 조직의 상징이었다. 그들은 제국군에 대한 저항을 꿈꾸며, 아주 은밀하게 움직였다. 이장님이 그들과 연관되어 있었다니. 진우는 생각지 못한 실마리에 가슴이 뛰었다.

    여인은 급히 나무 조각을 발로 덮으려 했지만, 진우는 이미 자신의 눈에 그 무늬를 새겼다. 그녀는 진우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거의 애원하듯 말했다.

    “제발… 모른 척해주십시오.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공포를 이해했다. 제국의 그림자는 너무나도 길고 어두웠다. 그는 나무 조각을 줍는 대신, 그 무늬가 새겨진 부분을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그와 똑같은 무늬가 새겨진 낡은 쇠붙이를 만졌다. 그것은 그가 과거에 우연히 주웠던, 달그림자 조직원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암호 키였다.

    박 이장님은 단순한 실종이 아니었다. 그는 달그림자와 연관되어 있었고, 제국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혹은, 이장님이 제국이 숨기고 싶어 하는 무언가를 알아냈고, 그것이 그의 실종으로 이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진우는 조용히 대문을 나섰다. 잿빛 하늘 아래, 카르틴의 거리는 더욱 음울해 보였다. 멀리서 탐사정의 굉음이 다시 울려 퍼졌다. 제국은 모든 것을 감시하고,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다. 하지만 진우의 심장은 묘한 불안감과 함께 뜨거워지고 있었다. 박 이장님의 사라진 그림자 뒤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진실은, 이 잿빛 도시 카르틴에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킬까?

    진우는 낡은 쇠붙이를 꽉 쥐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짐꾼이 아니었다. 진실을 좇는 그림자이자,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자가 되어야 했다. 제국의 거대한 장막 뒤에 숨겨진 추악한 민낯을, 그는 기어이 파헤쳐야만 했다. 그것이 박 이장님에 대한, 그리고 이 잿빛 도시에 사는 모두에 대한 그의 마지막 의무일지도 모른다.

    밤이 깊어질수록, 카르틴의 어둠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진우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지금부터, 제국이 만든 거대한 미로 속으로 첫발을 내딛는 참이었다.

  • 추리 미스터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제1화: 그림자 속의 밀실]**

    차갑고 끈적이는 장마비가 끝없이 이어졌다. 흑영관은 비에 젖은 거대한 그림자처럼 산등성이에 박혀 있었다.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낡은 석조 건물은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고, 창문마다 드리워진 두꺼운 커튼은 내부의 비밀을 더욱 굳게 닫고 있는 듯했다.

    나는 민준이었다. 강력계 경위 김민준. 비상벨이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형사과장님과 함께 이 끔찍한 장소에 도착했다. 빗물에 젖은 자갈길을 밟고 현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왠지 모르게 무거웠다. 이미 도착해 있던 초동수사팀원들이 굳은 얼굴로 우리를 맞았다.

    “과장님, 경위님. 현장은…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베테랑 형사의 목소리에는 드물게도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평생 온갖 끔찍한 사건을 접해왔을 그들마저 혼란스럽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는 직감이 스쳤다.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낡은 목재 바닥이 발걸음마다 희미하게 삐걱거렸다. 복도 끝,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서재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나 그 안으로 발을 들이밀기도 전에 이미 싸늘한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희미하게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젠장.” 과장님의 낮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서재 안은 그야말로 참혹했다. 앤티크한 가구와 수십 년 묵은 고서들로 가득 찬 방 한가운데, 대리석 바닥에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희뿌연 조명 아래 그의 몸은 섬뜩하리만치 창백했고, 피가 흥건하게 고여 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날카로운 흉기에 여러 차례 찔린 듯한 상처가 선명했다.

    “피해자는 윤태성 씨입니다. 흑영관의 주인.” 초동팀장이 보고했다. “발견자는 집사 박상현 씨입니다.”

    “밀실인가?” 과장님이 읊조리듯 물었다.

    “네, 과장님. 완벽한 밀실입니다.” 팀장이 고개를 숙였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도 그렇더군요. 창문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고,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채워져 있었습니다. 환풍구는… 사람이 통과할 수 없을 정도로 좁습니다. 지하실이나 다락방으로 통하는 다른 통로도 없습니다.”

    나는 현장을 꼼꼼히 살폈다. 방 안에는 어떤 침입의 흔적도 없었다. 부서진 창문도, 훼손된 문틈도, 뒤집힌 가구도 없었다. 마치 피해자가 혼자 이 방에 들어가 스스로 문을 잠그고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발견 당시 상황은?” 내가 물었다.

    “집사 박상현 씨의 진술에 따르면, 밤늦도록 서재에 계시던 윤 회장님이 아침까지 나오지 않아 걱정스러워 열쇠로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열쇠로 문을 열었다는 것은 바깥에서 잠겨 있었다는 말이 아니었다. 안에서 잠긴 문이었다. 범인은 어떻게 이 방을 나간 거지?

    모든 경찰관들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함께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이 현장은 누가 봐도 상식적인 이해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미스터리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완벽한 밀실 살인.

    그때, 서재 문 앞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꽤 흥미롭군.”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빗물에 약간 젖은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 강이한이었다.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머리, 날카로우면서도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그리고 묘한 여유가 느껴지는 표정. 그는 강력계 소속은 아니었지만, 경찰 내부에서는 물론 외부에서도 ‘천재 탐정’으로 불리는 특별수사팀의 고문이었다. 어려운 사건이 터지면 과장님은 항상 그를 불렀다.

    “강 고문님!” 과장님이 반색하며 맞았다.

    강이한은 굳이 현장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 문턱에 선 채로 방 전체를 한 번 스윽 훑어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피해자의 시신에서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이내 방 구석구석을 훑었다. 특히 문과 창문의 잠금장치, 그리고 벽면과 천장, 바닥을 유심히 살폈다.

    “경찰 측에서는 완벽한 밀실이라고 판단하고 있겠죠.” 강이한이 나른한 어조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고문님. 모든 증거가 밀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외부 침입은 불가능합니다.” 팀장이 설명했다.

    강이한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비웃음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난제에 직면한 지성인의 표정에 가까웠다.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직 그 방법을 알지 못할 뿐이죠.”

    그는 천천히 서재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희생자의 시신에 가까이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그는 시신을 직접 만지지는 않았지만, 날카로운 눈으로 상처 부위와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는 바닥에 고인 피의 농도와 퍼진 정도를 관찰했다.

    “사인은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 사망 시각은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로 추정되는군요.” 강이한이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시신 위를 맴돌고 있었다. “흉기는… 아마도 이 근처에 있어야 할 텐데, 보이지 않는군요.”

    “네, 고문님. 흉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다 갑자기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앤티크한 샹들리에가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내 그의 시선은 천장에서 벽으로, 다시 바닥으로, 마침내 문과 창문의 잠금장치로 향했다.

    “잠금장치가 훼손된 흔적은 없죠?”

    “네, 완벽합니다.”

    강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손으로 문틀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잠금장치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마치 평범한 쇠붙이에서 숨겨진 비밀을 찾아내려는 듯했다.

    “이 문은 안에서 잠겼다가, 밖에서 열쇠로 열린 문. 그게 전부입니까?”

    “네. 집사 박상현 씨의 진술입니다. 그는 외부에서 잠겨 있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강이한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밀실 살인 사건은 언제나 범인의 교활함과 탐정의 지혜 싸움입니다.” 그는 읊조리듯 말했다. “여기서 사라진 것은 단지 흉기뿐만이 아닙니다. 살인범이 사라졌죠. 그리고 그 사라진 살인범은 이 완벽해 보이는 밀실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의 말은 논리적이었지만,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었다. 어떻게 완벽한 밀실 속에 범인이 숨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강이한은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김 경위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세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진실은 우리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는 말을 마친 후, 서재 문턱을 넘어 밖으로 나섰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흑영관의 어둠은 더욱 짙어지는 듯했다. 완벽한 밀실. 과연 그 속의 진실은 무엇일까. 나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그가 떠난 자리를 응시했다. 시작부터 난해한 사건이었다. 그의 천재적인 통찰력이 아니었다면, 이 사건은 영원히 미궁 속에 갇힐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