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대체 역사물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늦은 밤, 정우는 침대에 반쯤 기댄 채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잠이 올 리 만무했다. 시계는 이미 새벽 두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고, 아파트 전체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정우의 귀는 예민하게 곤두서 있었다. 언제 또 시작될지 모르는 ‘그것’을 기다리면서.

    며칠 전부터였다. 처음엔 그저 피곤해서 헛것을 듣는 거라고 생각했다. 밤마다 들려오는 희미한 속삭임,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밤중에 이웃집에서 나는 생활 소음이겠거니, 잠결에 꿈을 꾸는 것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어제, 모든 것이 변했다.

    그날도 자정 무렵이었다. 정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리컵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듯, 아주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탁자 가장자리로 향했다. 정우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눈을 깜빡이자 컵은 멈춰 있었다. 착각이라고 믿으려 했다. 하지만 잠시 후, 컵은 다시 움직였다. 결국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쨍그랑 하는 소리는 고요한 밤을 갈랐고, 정우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꼼짝없이 앉아 깨진 유리 파편들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착각도, 피로도 아니었다. 뭔가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지금, 정우는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작은 액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액자는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정우는 알고 있었다. 녀석이 다음엔 어디를 건드릴지 모른다는 것을.

    심장이 쿵, 쿵, 쿵, 불규칙하게 울렸다.
    벽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똑, 똑, 똑.
    어디선가 아주 희미한, 마치 아이가 흥얼거리는 듯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환청인가?
    정우는 숨을 들이켰다. 아니, 환청이 아니었다. 분명히 들렸다. 아주 작고, 희미했지만, 그 멜로디는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마치 벽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누구… 누구야?” 정우는 거의 속삭이듯 물었다.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노랫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워지는 듯했다. 이제는 가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 의미 없는 음절의 반복. 기괴하고 섬뜩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정우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맨발이 바닥에 닿자 차가운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방 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으려는데, 갑자기 손잡이가 ‘덜컥’ 하고 돌아갔다.

    정우는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손을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방문이 아주 천천히,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가 보였다. 저 안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정우는 핸드폰을 들어 손전등 기능을 켰다. 흔들리는 빛이 복도를 비췄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노랫소리는 여전히 들렸다. 이번엔 거실 쪽에서 들리는 듯했다.

    그는 용기를 내어 복도를 가로질러 거실로 향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루가 삐걱거렸다. 복도 끝에 다다랐을 때, 정우는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냉장고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보았다. 냉장고 안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어둠 속에서 유일한 길잡이였다.

    노랫소리는 냉장고 안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이건… 말도 안 돼.” 정우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냉장고 문에 고정되어 있었다. 문이 조금 더 열리더니, 이내 ‘덜커덕’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열려버렸다.

    냉장고 안의 불빛이 거실을 환하게 비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냉장고 맨 위 칸에 놓여 있던 우유팩이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밀어내는 것처럼. 노랫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찢어질 듯한 고음,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정우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우유팩은 멈추지 않고 선반 하나하나를 타고 내려왔다. 마지막 칸에 이르자, 마치 발이라도 달린 것처럼 우유팩이 냉장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차가운 마룻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우유팩은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하얀 우유가 끈적하게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정우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의 눈은 우유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냉장고 문이 ‘쿵’ 하고 세게 닫혔다. 동시에 거실의 모든 불이 일제히 꺼졌다.

    암흑.

    노랫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이제는 마치 그의 바로 옆에서 부르는 것처럼 생생했다. 정우는 소름 끼치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그는 손을 휘저으며 벽을 더듬었다. 스위치를 찾아야 했다. 뭐라도, 어떤 빛이라도 필요했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정우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그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우며, 기분 나쁘게 울렸다. 바로 그의 귀 옆에서 속삭인 것 같았다.

    그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돌아보면 안 된다는 본능적인 공포가 그를 지배했다. 눈앞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지만, 그는 어둠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무언가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거실 한가운데에 있던 텔레비전이 저절로 켜졌다. 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화면 가득 알 수 없는 흑백 패턴이 일렁였다. 채널은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수신되지 않는 방송을 틀어놓은 것처럼.

    그리고 텔레비전 화면 속의 흑백 패턴이 일렁이더니, 서서히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필름 사진처럼, 흐릿하고 왜곡된 이미지. 어렴풋이 사람의 형상인 듯했다.

    정우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화면 속의 흐릿한 형상에 고정되었다. 형상은 점차 선명해졌다.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창백한 얼굴,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 아이는 화면 너머의 정우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텔레비전의 잡음 속에서, 아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것 같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 순간, 텔레비전 화면 속 아이의 손이 천천히 화면 밖으로 뻗어 나왔다. 마치 액체를 뚫고 나오듯, 희뿌연 아지랑이를 일으키며. 다섯 개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정우를 향해 뻗어 나왔다.

    정우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는 온몸의 근육이 경직된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의 광경은 비현실적이었고, 그의 이성은 이미 한계를 넘어섰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제발 멈춰…!”

    그러나 아이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차가운 기운이 그의 뺨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마치 얼음장 같은 손가락이 닿는 순간, 정우는 영혼까지 뽑혀나가는 듯한 섬뜩한 감각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텔레비전 화면 속 아이의 얼굴은 기괴하게 일그러지며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귀에는, 멈추지 않는 그 기괴한 노랫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 좀비 아포칼립스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황도의 외곽, 무너져 가는 흙벽돌집이 미로처럼 얽힌 빈민가. 아침부터 끓어오르는 태양은 한 점 구름도 없는 하늘을 뚫고 내려와, 이미 지쳐 있는 이선(李宣)의 등골을 땀으로 적셨다. 황제 폐하의 자비로운 통치 아래, 오늘도 백성들은 평화로이…… 일하고 있었다. 평화로운 노동. 이선은 코웃음을 쳤다. 삽날에 짓눌린 흙먼지가 폐 깊숙이 파고드는 기분이었다.

    이곳은 ‘천인의 진흙구덩이’. 황도 외곽의 버려진 채석장으로, 제국이 버린 이들, 즉 천인들이 죽을 때까지 돌을 캐내야 하는 지옥 같은 곳이었다.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돌덩이들은 황궁의 새 탑을 쌓는 데 쓰이고, 그 탑은 하늘에 닿을 듯이 높아져만 갔다. 그럴수록 이선과 같은 천인들의 등은 더욱 굽어졌다.

    “이선! 또 꾸물거려? 해 질 때까지 할당량을 못 채우면 네놈 밥그릇은 오늘부터 없다!”
    감시병의 쩌렁쩌렁한 고함이 나른한 공기를 찢었다. 굵은 쇠몽둥이가 그의 눈앞, 바닥을 강하게 후려쳤다. 콰앙! 흙먼지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징벌의 의미를 담은 위협에 이선은 묵묵히 삽질을 이어갔다. 어차피 밥그릇이라 부를 만한 것도 없었다. 매일 주어지는 묽은 죽 한 그릇과 썩은 채소가 전부였다.

    “쳇.”
    이를 악물었다. 그의 팔에는 이미 굳은살이 박히다 못해 돌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언제부턴가 감각마저 무뎌진 오른팔을 휘두를 때마다, 십 년 전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이곳에 끌려온 순간이 섬광처럼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의 흐느낌, 아버지의 무릎 꿇린 모습. 제국의 사유지에 발을 들였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이곳에 던져졌다.

    그날 이후, 그의 삶은 거대한 바위에 짓눌린 풀잎과 같았다.
    이선은 허리춤에 찬 낡은 물통을 들어 목을 축였다. 미지근한 물은 갈증을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메마른 목구멍을 축여주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저 멀리, 황도 안쪽의 화려한 지붕들이 보였다. 황금빛 기와와 푸른색 유리창이 햇빛을 받아 번쩍였다. 그곳은 제국의 심장, 귀족들의 낙원이자 천인들에게는 감히 꿈조차 꿀 수 없는 곳이었다.

    “젠장…!”
    그때였다. 돌을 캐던 다른 천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이선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쪽으로 향했다.
    황궁 쪽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처음엔 작은 불씨인가 했지만,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기세로 치솟았다. 그리고 이어서, 둔탁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궁의 비상사태를 알리는 종. 저 종소리는 수십 년 만에 처음 듣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황궁에 불이 났나?”
    사람들의 얼굴에는 경외심과 불안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 순간, 진흙구덩이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비명이 들렸다. 그건 사람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짐승의 포효 같기도, 아니면 목이 찢어지는 듯한 절규 같기도 했다.
    이내 패닉에 빠진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황궁 쪽에서부터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황궁 경비병들마저도 창과 칼을 버린 채 도망치고 있었다.

    “길을 막아! 이 미친놈들!”
    감시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이미 공포가 가득했다.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불어왔다. 비릿하고 역겨운,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냄새. 이선은 본능적으로 삽을 고쳐 잡았다.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저게… 뭐야?”
    한 천인이 넋 나간 얼굴로 손가락질했다. 황궁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 뒤로, 기괴한 그림자들이 쫓아오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아니, 사람이었던 것들이었다.
    찢어진 옷, 피로 얼룩진 몸. 그들은 눈이 뒤집힌 채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달려왔다. 입가에는 검붉은 침이 흘렀고, 기괴한 신음소리를 내뱉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들이 서로에게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 먹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쓰러진 이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비명을 지르는 이를 짐승처럼 찢어발겼다.

    “괴물이다! 괴물이 나타났다!”
    누군가 절규했다. 진흙구덩이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감시병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안전한 곳으로 도망쳐야 할 그들이 가장 먼저 도망쳤다. 제국의 질서는 단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망할…!”
    이선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쓰러진 천인들과 그들에게 달려드는 괴물들의 모습이었다. 그의 옆에 있던 늙은 천인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다 발을 헛디뎠다. 괴물 중 하나가 늙은이에게 달려들었다. 이선은 망설일 틈도 없이 삽을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삽날이 괴물의 머리를 강타했다. 녀석은 비틀거리며 쓰러졌지만, 곧바로 다시 일어서려 했다. 일반적인 생명체라면 한 방에 죽었을 충격이었다.
    “크르르르…!”
    뒤집힌 눈동자가 이선을 향했다. 썩어가는 살점 사이로 보이는 이빨은 날카롭게 돋아나 있었다.

    “젠장!”
    이선은 재빨리 삽을 다시 휘둘러 괴물의 목을 겨냥했다. 깊숙이 박힌 삽날이 뼈와 살을 으스러뜨리는 소리가 났다. 드디어 녀석은 미동도 없이 쓰러졌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돌아봤다. 이미 채석장 곳곳에서 괴물들이 천인들을 덮치고 있었다. 천인들은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도망치거나, 혹은 삽이나 곡괭이를 들고 저항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괴물들은 수가 너무 많았고, 멈추지 않았다.

    그때였다. 흙먼지 너머로, 황도 외곽을 둘러싼 거대한 성벽의 문이 굳게 닫히는 모습이 보였다. 철컥! 묵직한 쇠사슬이 걸리는 소리가 이선에게까지 들리는 듯했다.
    안전한 황궁 안으로 도망친 귀족들과 황궁 경비대원들이, 감염된 괴물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천인들을 버리고 성문을 닫아버린 것이었다. 버려진 것. 다시 한번, 이선은 제국에게 버려졌다. 이 거대한 제국은 백성들의 생명에는 단 한 푼의 가치도 부여하지 않았다.

    “저런 씨발…!”
    이선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이 거대한 제국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삽을 고쳐 잡고,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아수라장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제 더 이상, 누군가의 명령을 따르는 노예가 아니었다. 생존을 위해, 자신을 위해 싸우는 하나의 존재였다.
    이 혼돈 속에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세상의 끝에는, 언제나 버려지고 짓밟히던 천인들의 반란이 있을 터였다.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회색빛 하늘이 찢어진 아스팔트 위로 재처럼 흩어졌다. 지훈은 망가진 상점가의 헐거워진 간판 아래를 조용히 미끄러져 지나갔다. 낡은 배낭의 어깨끈이 뼈마디를 파고들었지만, 그는 익숙한 통증에 무감각했다. 도시는 거대한 무덤과 같았다. 살아남은 자는 그림자처럼 움직여야 했다. 죽은 자들이 아직 그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오늘은 운이 좋았으면 했다. 아니, 운 같은 건 진작에 바닥났을 것이다. 그저 어제보다 조금 덜 비극적인 하루이길 바랄 뿐이었다. 며칠째 물 한 모금, 건더기 하나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갈증이 목구멍을 긁어대고, 허기가 위장을 갉아먹는 느낌이었다. 저 너머, 유리창이 깨진 슈퍼마켓이 눈에 들어왔다. 위험할 게 뻔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지훈은 최대한 낮은 자세로, 거의 기어가다시피 슈퍼마켓 입구에 도달했다. 깨진 자동문은 뼈대만 남은 채 벌어져 있었고, 그 안쪽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조용히 안으로 발을 들였다.

    슈퍼마켓 안은 암흑이었다. 희미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썩은 살과 먼지, 그리고 희미한 피 냄새. 지훈은 숨을 죽이고 발소리를 죽였다. 폐허가 된 진열대 사이로 빛바랜 과자 봉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을 멈춘 듯, 불과 몇 달 전의 평범한 일상이 박제되어 있는 것 같았다.

    “흐읍… 흐읍…”

    저 안쪽, 어둠 속에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불규칙적인 숨소리, 혹은 썩어가는 폐에서 나오는 쉰 소리. 하나가 아니었다. 최소 셋. 지훈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빌어먹을.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는데.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빠져나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의 신발이 바닥에 굴러다니던 빈 통조림 캔을 건드렸다. 쨍그랑! 둔탁한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크어어어어!”

    소리에 반응한 그림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썩어 문드러진 피부, 텅 빈 눈구멍, 피와 살점이 뒤섞인 입술. 그들이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지훈을 향해 발을 질질 끌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역겨운 냄새가 더욱 강렬해졌다.

    지훈은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날렸다. 이제 숨을 이유도, 조용히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그는 낡은 식칼을 뽑아 들고 가장 가까이 다가오는 ‘그것’의 머리를 겨냥했다. 망설일 틈도 없이, 단숨에 깊숙이 꽂아 넣었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축축한 감각이 손에 전해졌다. 그것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풀썩 쓰러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다른 두 마리가 옆에서 달려들었다. 지훈은 뒤로 물러서며 진열대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진열대가 쓰러지며 잠시 시간을 벌었다. 그는 그 틈을 타 안쪽으로 더 깊숙이 뛰어들었다. 목표는 분명했다. 식량. 물. 살아남을 수 있는 모든 것.

    진열대 구석에 처박힌 박스에서 눅눅해진 에너지바 몇 개와 작은 생수병을 겨우 찾아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뒤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넘어뜨린 진열대를 기어코 넘어온 모양이었다.

    등 뒤에서 썩어 문드러진 손이 그의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지훈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비쩍 마른 시체가 게걸스러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입에서는 썩은 이빨이 드러나 있었다.

    “이 개자식들…!”

    그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그의 손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곳에서 죽을 수는 없었다. 절대로. 지훈은 손에 든 물품들을 놓치지 않으려 악을 썼다. 삶의 마지막 희망 같은 것들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칼을 휘둘러 가장 가까이 다가온 시체의 목을 깊이 베었다. 끈적한 체액이 튀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지훈은 가까스로 슈퍼마켓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온몸은 땀으로 축축했고, 팔에는 날카로운 무언가에 긁힌 상처가 길게 나 있었다. 하지만 한 손에는 눅눅해졌지만 여전히 먹을 수 있는 에너지바 몇 개와 작은 생수병이 꽉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또 하나의 물건.

    슈퍼마켓의 캐셔 데스크 뒤편, 찢어진 달력 한 귀퉁이에 테이프로 붙어있던 것이었다. 누가 그린 건지 알 수 없는, 조악한 그림. 크레파스로 엉성하게 그려진 가족의 모습. 해맑게 웃는 아이와 부부의 얼굴. 그 아래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우리 가족은 사랑해요!’라고 적혀 있었다.

    지훈은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잊고 있던, 그러나 한때는 당연했던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듯했다. 그는 그림을 조심스럽게 접어 품 안에 넣었다. 희망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미약한, 그러나 절망 속에서 문득 마주한 어떤 흔적이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지훈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살아야 했다. 이 그림을 가지고, 이 기억을 품고서. 언제까지 이 지옥 같은 세상이 이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는 아직 살아갈 이유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아주 작고 희미한,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 SF (공상과학)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 17화: 어둠 속의 맥동

    *덜컹*.

    육중한 금속 문이 뒤로 밀리며 거대한 굉음을 토해냈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거대한 짐승의 하품처럼 먹먹하게 지하 공간을 울렸다. 먼지가 거친 숨을 토하듯 쏟아져 나왔고, 텁텁한 흙먼지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금속성의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젠장… 이 문을 여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어.”

    선우가 숨을 헐떡이며 장갑 낀 손으로 이마를 훔쳤다. 그의 얼굴은 방진 마스크에 가려져 있었지만, 눈빛만으로도 극도의 피로감과 흥분이 뒤섞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한 것 같군.”

    지윤이 스캐너를 든 채 문 안쪽을 응시했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에도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레이저 포인터가 어둠 속을 가르자, 거대한 동공을 닮은 공간의 윤곽이 천천히 드러났다. 지금까지 탐사해왔던 어떤 공간보다도 압도적인 규모였다.

    하준은 헬멧의 조명을 최대로 밝히고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고대 유적의 내부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곳은 분명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니, 적어도 그들이 알고 있는 인류의 기술로는 불가능했다.

    발아래의 바닥은 매끄러운 검은색 재질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치 유리를 깔아놓은 듯 주변의 빛을 흡수하며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심연을 드러내는 듯했다. 하준이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부드러운 진동이 발끝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살아있는 듯한 반응이었다.

    “스캐너 반응은?”

    하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선우가 인상을 찌푸리며 장비의 디스플레이를 두드렸다. “이상합니다, 하준 대장님. 모든 주파수 대역에서 노이즈가 너무 심해요. 간헐적으로 희미한 에너지 파동이 감지되긴 하는데… 패턴을 알 수 없습니다. 기존 데이터베이스에는 없는 형태입니다.”

    “나도 마찬가지야.” 지윤이 고개를 저었다. “지질학적 스캔 결과, 이 공간을 이루는 물질은 지구상에서 발견된 적 없는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리고 저… 저 기둥들을 봐.”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검은 기둥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단순히 바닥에서 천장까지 이어진 기둥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비틀리고 꼬여 있었고, 그 표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기하학적 무늬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곳에서는 기둥 사이로 희미한 푸른빛이 맥동하고 있었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그 빛은 주기적으로 깜빡이며 공간에 알 수 없는 생명감을 불어넣었다.

    “이곳은… 무언가의 중심부인 것 같아.” 하준은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동굴의 저편, 아득한 어둠 속에 잠긴 거대한 구조물을 향해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그 실루엣은 거대한 피라미드 같기도, 혹은 끝없이 뻗어 나가는 도시 같기도 했다.

    그때, 선우의 무전기에서 날카로운 잡음이 터져 나왔다. “크윽…! 대장님! 갑자기 전력 소모량이 급증합니다! 비상 백업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하준은 주변을 돌아봤다. 동굴 입구의 조명이 깜빡이며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검은 기둥들 사이를 흐르던 푸른빛의 맥동이 한층 강렬해지더니, *쉬이이익* 하는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공간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모두 엎드려!” 하준이 급하게 소리쳤다.

    세 사람은 반사적으로 몸을 숙였다. 거대한 파동이 그들의 위를 스쳐 지나갔다. 빛의 파동은 고요했던 어둠을 산산조각 냈다. 시야는 온통 푸른색으로 물들었고, 귀에서는 고음의 이명이 울렸다.

    파동이 지나가자, 빛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주변의 조명은 모두 꺼진 듯 암흑에 잠겼다. 헬멧의 비상등만이 희미하게 빛나며 그들의 존재를 알렸다.

    “다들 괜찮아?!” 하준이 조심스럽게 일어서며 물었다.

    “네… 다친 곳은 없습니다.” 지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선우는 자신의 장비를 확인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전력 시스템이 완전히 마비됐습니다. 비상등 외에는 아무것도 작동하지 않아요. 통신도… 먹통입니다.”

    주변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하지만 이전과는 다른 종류의 정적이었다. 방금 전까지 희미하게나마 느껴지던 공간의 ‘침묵’이 사라졌다. 대신, 바닥에서부터 미세한 진동이 심장을 쿵쿵 울리듯 느껴졌다.

    *위이이잉….*

    낮은 울림이 공기 중에서 발생했다. 기둥들 사이에서 깜빡이던 푸른빛이 이번에는 더 깊고 어두운 보랏빛으로 변하며 일제히 빛나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정지된 것이 아니라, 흐느적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수많은 눈동자가 동시에 자신들을 응시하는 것 같았다.

    하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동굴 안쪽, 저 멀리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거대한 구조물의 변화였다. 그것은 더 이상 정적인 실루엣이 아니었다. 푸른빛과 보랏빛의 경계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점들이 마치 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점들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깜빡이며, 점차 어떤 문양을 그려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거대한 구조물 전체에 새겨진, 살아 숨 쉬는 듯한 회로도였다.

    “하준 대장님… 저게… 저게 움직입니다!” 선우의 목소리에 공포가 깃들었다.

    검은 기둥들 사이를 흐르던 보랏빛이 더욱 선명해지더니, 거대한 동굴의 천장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조약돌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지만, 그 울림은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하준은 헬멧 조명을 천장으로 향했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수천 년간 잠들어 있던 고대 유적이 기지개를 켜는 광경이었다.

    천장의 돌들이 우지끈거리며 갈라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스며 나오는 것은 칠흑 같은 어둠, 그리고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수많은 붉은 안광이었다.

    마치, 그들은 방금 잠든 거인의 심장을 깨운 것이었다.

    “도망쳐…!”

    하준의 외침과 동시에, 천장에서 첫 번째 ‘그것’이 긴 다리를 펼치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콰앙!*

    바닥에 충돌하며 일으킨 진동은 지진처럼 모든 것을 흔들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수많은 붉은 눈들이 그들을 향해 일제히 번뜩였다.

    그 순간, 그들은 깨달았다. 이곳은 단순히 버려진 유적이 아니었다.

    이곳은…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생명체들은 깨어난 것이다.

  • 심리 스릴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잿빛 심장의 그림자**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짓눌렀다. 썩은 물 냄새와 흙먼지가 뒤섞인 악취가 코를 찔렀지만, 이안은 익숙한 듯 깊게 숨을 들이켰다. 발아래 흐르는 검은 물줄기는 끈적했고, 천장에서는 불규칙하게 물방울이 떨어져 날카로운 파열음을 만들었다. 그녀의 등 뒤로, 방금 닫힌 철문 너머에서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환청일까, 아니면 정말로…

    “이안 님!”

    어둠 속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이안은 비좁은 통로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흐릿한 등불 아래로 세 명의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공포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지만, 이안의 존재를 확인하자 미약한 안도감이 스치는 듯했다.

    “지훈, 무사했구나.” 이안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가느다란 떨림이 실려 있었다. “다른 이들은?”

    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땀과 먼지로 얼룩져 있었고,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저만 겨우 빠져나왔습니다. 그들이… 벽을 허물고 안으로 들어왔어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이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예상은 빗나갔다. 이 통로는 수십 년 전, 제국의 지하수로 정비 사업이 끝나고 버려진 비밀 통로였다. 그들이 아는 한, 이 통로의 존재를 아는 자는 극소수였다. 그런데 어떻게…

    “선아 노파는?” 그녀는 마지막 남은 희망을 움켜쥐듯 물었다. 선아 노파는 이들의 정보원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제국 고위층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었고, 이들이 ‘새벽별’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지하에서 움직일 수 있었던 것도 노파의 도움이 컸다.

    지훈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흙먼지가 날리는 바닥으로 그의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 순간, 이안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아니… 그럴 리 없어. 노파는 그들의 눈을 수십 번도 더 피해 왔어. 노파만큼 신중하고 지혜로운 이는 없어.” 이안은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지훈의 고개는 더욱 깊이 숙여질 뿐이었다. 침묵은 어떤 외침보다도 잔혹했다.

    세 번째 그림자, 나이든 여인의 흐느낌이 어둠 속을 갈랐다.
    “마지막까지… 우리를 위해 시간을 벌려 하셨습니다. 직접 미끼가 되어… 다른 이들을 도망치게… 노파는… 잡혔습니다.”

    이안은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검은 벽돌의 차가운 감촉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선아 노파. 노파의 지식과 경험은 ‘새벽별’에게 황금보다 귀한 것이었다. 노파가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면… 그들이 아는 모든 정보가, 모든 계획이, 그리고 모든 동지들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이었다.

    “우리가… 노파를 잃은 건가?” 지훈의 목소리가 거의 울음에 가까웠다.

    이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아까의 미약한 떨림 대신, 차갑게 식어가는 강철의 빛을 띠고 있었다.
    “아니.”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잃은 게 아니야. 빼앗긴 거지.”
    그녀의 목소리에는 복수심과 결의가 뒤섞여 있었다. 놈들이 선아 노파를 잡았다면, 노파에게서 모든 것을 뜯어내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노파는… 어떤 고문에도 쉽게 입을 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이 희망이라면 희망이었다. 노파가 시간을 벌어줄 동안, 그들은 움직여야 했다.

    “우리는 노파를 구해야 해.” 이안은 어둠 속의 세 그림자를 하나하나 응시했다. “그들은 노파의 입을 열기 위해 어떤 짓이든 할 거야. 하지만 노파는… 버텨낼 거야. 우리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하지만 어떻게…?” 나이든 여인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 지하 통로조차 뚫렸습니다. 제국의 감시는 날마다 더욱 촘촘해지고 있어요. 그들은 우리를 쥐 잡듯 찾아낼 겁니다.”

    “놈들이 촘촘해질수록, 빈틈은 더 커지는 법이야.” 이안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힘에 도취되어 세밀한 부분에서 실수를 저지르지. 이번 침투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분명 흔적을 남겼을 거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어두운 통로 위를 응시했다. 지상에서는 화려한 황금 제국의 수도, ‘아스타르’가 잠들어 있을 터였다. 황제는 백성들의 피와 땀으로 쌓아 올린 궁전에서 달콤한 꿈을 꾸고 있을 것이고, 귀족들은 비단 옷을 입고 방탕한 밤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화려함 아래, 이렇게 썩어가는 지하에서 반란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었다.

    “정보가 필요해. 누가 노파의 통로를 알았는지, 그리고 노파가 어디로 끌려갔는지.” 이안은 손을 뻗어 지훈의 어깨를 잡았다. “지훈, 너는 가장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어. ‘눈먼 까마귀’에게 연락해. 제국 병사들의 이동 경로와 기밀 정보를 수집하게 해.”

    지훈은 이안의 눈빛에서 자신감을 읽었는지, 고통스러운 표정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안 님.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이안은 다른 두 명의 동지들을 바라봤다. “우리의 비밀 은신처가 안전한지 다시 확인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이동 경로를 새로 짜야 해. 놈들이 이 통로를 알았다면, 다른 곳도 안전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명심하겠습니다.”

    그들이 어둠 속으로 흩어지자, 이안은 홀로 남아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얽히고설켰다. 선아 노파를 잃은 것은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노파는 제국 내부에 심어둔 ‘씨앗’들의 연락망을 총괄하고 있었다. 그 씨앗들이 이제 뿌리 뽑힐 위기에 처한 것이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아련하게 스쳐 지나갔다.
    굶주림에 지쳐 쓰러져가는 이웃들, 허가 없이 곡물을 수확했다는 이유로 채찍질당하던 농부들, 그리고… 제국 기사의 칼날 아래서 목숨을 잃었던 그녀의 가족들.
    그 모든 아픔과 분노가 그녀를 이 자리까지 이끌었다. ‘새벽별’이라는 이름 아래, 작은 불씨들이 모여 언젠가 저 거대한 어둠을 태워버릴 수 있으리라는 믿음.

    하지만 그 믿음이 오늘 밤,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선아 노파를 잃는 것은 단순히 한 명의 동지를 잃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벽별’의 한쪽 날개를 잃는 것과 같았다.

    차가운 벽돌 틈새로 희미한 바람이 새어 들어왔다. 저 위, 지상의 아스타르에서는 밤의 장막이 걷히고 희미한 새벽빛이 드리우고 있을 터였다.
    그 새벽빛이 자신들에게는 희망이 될까, 아니면 더 깊은 절망의 그림자를 드리울까.

    이안은 천천히 손을 들어 목에 걸린 낡은 펜던트를 만졌다. 닳고 닳아 문양이 희미해진 그것은, 그녀의 가족이 물려준 유일한 유품이었다.
    “노파… 부디, 조금만 더 버텨주세요.”
    그녀의 입술에서 간절한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벽에서 몸을 떼어냈다. 잿빛 그림자가 드리운 통로 끝, 희미한 빛이 스며드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빼앗긴 것은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그것이 이안의, 그리고 ‘새벽별’의 존재 이유였다.

    그때였다.
    저 멀리, 통로 저편에서 철컥, 하고 쇠사슬이 끌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뒤이어,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렸다.
    “이안. 설마 이런 시궁창에서 제국을 거스를 생각이었나?”

    이안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황금 제국의 붉은 문장이 새겨진 갑옷, 그리고 핏빛 망토를 휘날리며 서 있는 한 남자.
    그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제국 중앙 감찰부 총수, ‘카이론’.
    이안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허리춤의 단도를 움켜쥐었다.
    젠장.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통로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모든 것이, 처음부터 이들의 손아귀에 있었던 것이다.

    어둠 속에서 카이론의 목소리가 뱀처럼 스산하게 울렸다.
    “네놈들의 모든 불씨는, 오늘 밤 여기서 재가 될 것이다.”
    이안은 그의 눈빛을 똑바로 응시했다. 희망은 이미 절망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꺼지지 않는 작은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노파가 시간을 벌어준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니, 기회로 만들어야만 했다.
    잿빛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절대로.

  • 좀비 아포칼립스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챕터 1. 고요한 서원, 깨어난 기원

    회색빛 도시의 잔해가 끝없이 이어졌다. 한때 번화했던 서울의 거리는 이제 녹슨 철골과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 그리고 이름 모를 잡초들로 뒤덮인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이지혁은 낡은 등산화 밑창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은 이미 오래전에 말라붙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식량과 물 때문에 목구멍은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어.’

    며칠째 헤매고 있지만, 쓸 만한 것이라고는 먼지 쌓인 통조림 깡통 몇 개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것들이라 뚜껑을 딸 때마다 혹시 모를 위험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지혁은 낡은 백팩을 고쳐 메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좀비들의 으르렁거림은 이제 배경 음악처럼 익숙해져 버렸지만, 그 익숙함은 결코 공포를 덜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불안감만 키울 뿐이었다.

    폐허가 된 상가 건물을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유난히 무성하게 자란 담쟁이덩굴과 무너져 내린 벽돌더미 사이에서, 왠지 모르게 주변과 동떨어져 보이는 건물이 지혁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른 건물들처럼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 방치된 듯 낡고 초라했다. 얼핏 보면 평범한 낡은 주택 같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풍겨오는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뭐지? 여긴 지도에도 없던 곳인데.”

    그가 가진 낡은 종이지도는 이미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였지만, 이런 식의 ‘예상 밖’ 장소는 항상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담쟁이덩굴 틈새로 낡은 목판 현판이 드러났다. ‘화원서원(花源書院)’. 알아보기 힘든 한자였지만, 지혁은 이곳이 적어도 수백 년은 된 고색창연한 서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좀비 사태 이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자연에 잠식된 채 잊힌 곳인 모양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외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정갈하게 가꿔졌을 터인 마당은 잡초가 무릎까지 자라 있었지만, 본채와 부속 건물들은 놀랍도록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이곳이 외부의 소음과 단절된 듯한 고요함이었다. 멀리서 들리던 좀비들의 으르렁거림조차 이곳에서는 희미한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없나?”

    지혁은 권총을 꽉 쥐고 경계하며 서원 안으로 들어섰다. 흙먼지로 뒤덮인 마루를 지나, 여기저기 찢겨나간 고서들이 쌓인 방을 발견했다. 아마도 서재였던 모양이다. 희미한 햇빛이 창틈으로 쏟아져 들어와 먼지 알갱이들이 춤추는 것을 비췄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들을 뒤적거렸지만, 모두 좀벌레 먹은 종이 뭉치일 뿐, 쓸 만한 정보나 물건은 없었다.

    그때였다. 낡은 책장 뒤편에서 미묘한 틈새가 지혁의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나무의 결을 자세히 살피자, 손잡이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조심스럽게 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끼이이익—’ 끔찍한 마찰음을 내며 책장이 옆으로 밀리자,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좁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로 이어지는 듯한 어둡고 습한 통로였다.

    숨을 들이쉬며 조심스럽게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공기 중에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향내가 희미하게 맴돌았다. 통로 끝에는 자그마한 석실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이끼가 가득했고, 중앙에는 낡은 나무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먼지 한 겹 없이 깨끗하게 보존된, 기묘한 형태의 목간(木簡)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지혁은 조용히 다가가 목간을 바라봤다. 일반적인 목간과는 달랐다. 나무가 아닌, 마치 돌처럼 단단하면서도 맑은 옥색 빛을 띠는 재질이었다.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상형문자들이 미세하게 새겨져 있었고, 손끝으로 만져보니 희미하게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목간에서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기운’이 느껴졌다. 살아 있는 듯한,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기운이었다.

    “이게 뭐야?”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목간을 만지는 순간이었다.

    ‘콰앙!’

    정적을 깨고 섬광이 터져 나왔다. 목간에서 뿜어져 나온 옥색 빛이 석실을 가득 채웠고, 지혁의 몸을 타고 거대한 에너지가 흘러들어왔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활성화되는 듯한 강렬한 전율이 그를 덮쳤다. 그의 피부 위로 목간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상형문자들이 옥색 빛을 내며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동시에,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그의 뇌를 때려 박는 듯했다. 멀리서 들리던 좀비들의 으르렁거림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고, 흙냄새 사이로 스며든 희미한 혈향, 그리고 무언가 기어 다니는 소리까지. 오감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된 듯했다.

    갑자기, 지혁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고대의 숲, 신비로운 의식, 그리고 사람의 형상을 한 존재들이 손에서 빛을 뿜어내는 모습… 너무나 빠르고 혼란스러워 붙잡을 수 없는 이미지들이었다.

    ‘으윽…!’

    그가 고통에 신음하며 무릎을 꿇었다. 목간은 여전히 옥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 빛은 그의 몸 안으로 계속해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 애쓰던 그때, 지하 통로 저편에서 기분 나쁜 마찰음이 들려왔다.

    ‘크르르… 으으…’

    익숙하면서도 섬뜩한 소리. 좀비였다. 그것도 일반 좀비와는 다른, 뼈가 뒤틀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 아마도 이 섬광에 이끌려 온 것이 분명했다.

    지혁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정신은 아직 혼미했지만, 목간에서 흘러들어온 힘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자신감과 함께, 주변의 모든 에너지가 그의 의식 속에 선명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흙 속의 미세한 진동, 벽돌 사이의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냉기, 심지어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 하나하나까지.

    통로 입구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보통 좀비보다 훨씬 거대하고, 피부는 마치 검은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변이 좀비였다. 놈의 몸에서는 끔찍한 악취가 풍겨왔고, 핏발 선 눈동자가 지혁을 노려봤다.

    ‘크아아악!’

    변이 좀비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은 맹수처럼 빨랐다. 지혁은 피할 새도 없이 놈의 거대한 팔에 깔릴 위기에 처했다.

    그때였다. 지혁의 손바닥에서 옥색 빛이 섬광처럼 터져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은 그에게서, 목간과 동일한 빛의 장벽이 순식간에 형성되었다. 투명하면서도 단단한, 영롱한 빛의 벽.

    ‘콰앙!’

    변이 좀비의 거대한 주먹이 빛의 장벽에 부딪쳤다. 금속이 부딪히는 듯한 굉음과 함께 장벽이 흔들렸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좀비의 팔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리며 뒤로 밀려났다.

    지혁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힘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이걸, 내가 만들었다고?’

    변이 좀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괴성을 질렀다. 놈의 눈빛에 분노와 함께 미약한 혼란이 스치는 듯했다. 좀비는 다시 한번 달려들 준비를 했다.

    지혁은 자신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옥색 빛을 내려다봤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혼란스럽고 두려웠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희열과 함께 거대한 가능성이 그의 앞에 펼쳐진 듯했다.

    이 힘은 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어쩌면, 이 끝없는 절망 속에서 그가 찾던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하고도 찬란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 예감만큼이나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지하 석실은 다시 한번 변이 좀비의 포효로 가득 찼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독립적인 단편 소설

    비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쏟아져 내렸다. 미진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때리는 소리가 꼭 제 심장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며칠 전, 아니, 정확히는 사흘 전, 그녀의 세상이 산산조각 났다. 가장 믿었던 친구, 수연에게서 온 연락은 그녀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뽑아가는 잔인한 통보였다.

    “미진아, 미안하지만 우리 이제 같이 못 할 것 같아. 네 아이디어는 정말 좋았지만…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다들 그러네. 나 혼자라도 시작해야 할 것 같아.”

    현실성이 부족하다고? 미진은 그 말에 기가 막혔다. 밤낮없이 매달려 레시피를 개발하고, 낡은 수첩에 빼곡히 손님들을 위한 메모를 적었던 건 자신이었다. ‘따뜻한 차 한 잔으로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공간’이라는 꿈을 처음 꺼낸 것도, 그 꿈을 구체적인 그림으로 만들어낸 것도 자신이었다. 수연은 그저 미진의 열정에 매혹된 듯 보였을 뿐이었다. 그녀의 능숙한 말솜씨와 사교성이 카페 홍보에 도움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래서 기꺼이 모든 것을 공유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혼자?

    며칠 뒤, 수연은 정말 혼자 카페를 열었다. 미진의 손끝에서 탄생한 시그니처 블렌딩 티와, 그녀가 직접 구상한 아늑한 실내 디자인 콘셉트까지 고스란히 베껴서. 미진의 이름은 그 어느 곳에도 없었다. 간판에는 수연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고, 새로 꾸며진 블로그에는 ‘오랜 꿈을 혼자 힘으로 일궈낸 열정적인 사장님’이라는 문구가 걸려 있었다. 미진은 그 글을 읽다가 노트북을 덮어버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배신감과 절망감에 몸이 으스러지는 듯했다.

    그 후 미진은 며칠을 폐인처럼 보냈다. 휴대폰은 껐고,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텅 빈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정말 내가 모자랐던 걸까?’ 끝없이 자신을 의심하고 자책했다. 심장이 시커먼 구멍이라도 뚫린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구멍 안에서 아주 작은, 날카로운 파편 하나가 반짝이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어.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어느 날 오후, 비가 그친 뒤 햇살이 창을 비집고 들어왔다. 미진은 불현듯 낡은 앞치마를 찾아 입었다. 그리고 베란다 구석에 먼지 쌓인 작업 도구들을 꺼냈다. 한동안 손대지 않았던 흙 반죽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하지만 망설임 없이 물을 붓고, 주무르기 시작했다. 투박하고 거친 흙이 그녀의 손끝에서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미진은 원래 도예를 전공했다. 카페는 오랜 꿈이었지만, 흙을 만지는 일은 그녀의 존재 자체와 같았다. 수연에게 보여줬던 카페 콘셉트에는 직접 만든 찻잔과 접시들이 가득한 그림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연은 그저 ‘공간을 특별하게 해줄 소품’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미진은 이제 알았다. 그녀에게 소중한 것은 ‘공간’이 아니라, 그 공간을 채울 ‘진심’과 ‘이야기’라는 것을. 그리고 그 진심을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 건, 바로 그녀의 손으로 빚어낸 것들이었다.

    첫 몇 주는 힘들었다. 손은 굳었고, 마음은 쉽게 평온해지지 않았다. 흙을 빚다가도 문득 수연의 얼굴이 떠올라 손을 멈추고 한숨을 쉬곤 했다. 하지만 흙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쏟아붓는 시간과 정성만큼 형태를 갖춰갔다. 서툴고 투박했지만, 그 안에 미진의 모든 감정이 스며들었다. 절망, 분노,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

    미진은 찻잔을 빚었다. 누구에게도 보여줄 생각 없이, 오직 자신을 위한 찻잔. 슬픔을 담는 찻잔, 고독을 담는 찻잔,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희망을 담는 찻잔. 그렇게 빚어낸 찻잔에 자신이 블렌딩한 차를 내려 마셨다. 찻잎이 뜨거운 물에 닿아 서서히 피어오르는 향은, 그녀의 마음속 응어리를 조금씩 풀어주는 듯했다.

    어느 날, 미진은 자신이 만든 찻잔과 함께 마시는 차 한 잔을 사진 찍어 SNS에 올렸다. 아무런 기대 없이, 그저 기록처럼. 그런데 뜻밖에도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찻잔이 너무 아름다워요.” “어딘지 모르게 편안해지는 느낌이에요.” “어떤 차인지 궁금하네요!”

    따뜻한 반응에 미진은 조금씩 용기를 얻었다. 잊고 지냈던 자신의 재능이, 자신의 진심이 누군가에게 닿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녀는 작은 온라인 상점을 열었다. 거창한 이름 대신, ‘미진의 흙과 차’라는 단순한 이름을 붙였다. 직접 빚은 찻잔과, 그 찻잔에 어울리는 소량의 블렌딩 티를 함께 팔았다.

    시간이 흘렀다. 수연의 카페는 한때 반짝했지만, 고유한 색깔이 없다는 평을 들으며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흐려졌다. 처음엔 미진의 레시피로 운영했지만, 점차 다른 흔한 메뉴들을 들여왔고, 공간은 특별함 없는 평범한 곳이 되어갔다. 수연은 늘 바쁘고 초조해 보였다. 새로운 유행을 쫓느라 진정한 만족을 얻지 못하는 듯했다.

    반면 미진의 작은 상점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그녀의 찻잔은 투박하면서도 따뜻한 질감, 자연스러운 색감,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안에 담긴 미진의 진심이 느껴졌다. 사람들은 미진의 찻잔을 통해 잠시나마 일상의 번잡함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미진의 흙과 차’는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마음을 위로하는 공간이 되어갔다.

    어느 늦은 오후, 미진은 작은 작업실 겸 쇼룸에서 새로 만든 찻잔들을 정성스럽게 진열하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흙의 따스함이 가득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여기 미진 씨 작업실 맞나요?”

    미진은 고개를 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수연이었다. 수연의 얼굴에는 피로가 역력했고, 억지로 지은 듯한 미소가 어색하게 걸려 있었다. 그녀의 눈은 미진의 작업실을 스캔하듯 훑었다. 흙으로 빚은 아름다운 찻잔들, 아늑한 분위기, 그리고 창가에 놓인, 미진이 직접 끓여낸 차에서 피어나는 향기까지.

    미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수연을 바라봤다. 더 이상 그녀에게 화가 나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그저, 먼 옛날의 일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수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 요즘 많이들 이야기하길래, 궁금해서 와봤어요. 정말… 미진 씨 작품들이었네요. 그 찻잔들… 다 미진 씨가 만든 거예요?”

    미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손으로 직접 빚은 것들이에요.”

    수연의 시선이 미진의 손끝으로 향했다. 그때의 미진이라면, 수연이 자신의 작품을 칭찬하는 것에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미진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수연은 잠시 침묵하다가,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부럽다. 이렇게 진심을 담은 공간을 만들다니. 나는… 요즘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그냥 매일매일 버티는 것 같아.”

    미진은 그 말을 들으며 깨달았다. 자신이 원했던 복수는 이런 것이었음을. 칼날 같은 분노도, 격렬한 싸움도 아니었다. 그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일을 진심으로 해내는 것. 그녀의 평화롭고 진실된 행복이, 수연에게는 가장 잔인한 형벌이라는 것을.

    미진은 조용히 수연에게 차 한 잔을 내밀었다. 새로 빚은, 따뜻한 흙빛 찻잔이었다. 그 안에는 그녀가 직접 블렌딩한, 향긋하고 편안한 허브차가 담겨 있었다.

    “괜찮다면… 차 한 잔 하시겠어요? 새로 개발한 블렌딩이에요.”

    수연은 떨리는 손으로 찻잔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찻잔 너머로 보이는 미진의 얼굴은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옛 친구의 그림자에 갇혀 있지 않았다. 빛을 향해 스스로 걸어 나온 강인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수연은 찻잔을 들고 말없이 서 있었다. 그 따뜻한 차 한 모금이, 그녀의 메마른 마음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는 미진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미진은 더 이상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흙과 차를 통해 평화롭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창밖으로는 해가 저물고, 노을빛이 작업실 안을 따스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미진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았다.

  • 메카 액션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어둠 속 불꽃] 1화 – 폐허의 그림자

    **[프롤로그]**

    **패널 1**
    * **장면:** 잿빛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폐허 도시의 광경. 거대한 구조물들이 뼈대만 남아 비스듬히 서 있고, 먼지가 끊임없이 바람에 흩날린다. 저 멀리, 제국군의 감시탑에서 붉은 탐조등이 느리게 움직이며 어둠을 훑는다.
    * **글:** “아스칼 제국은 태양처럼 군림했다. 그들의 거대한 그림자는 모든 것을 집어삼켰고, 자유의 숨통을 조였다.”
    * **효과음:** (삭막한 바람 소리) 쉬이이익…

    **패널 2**
    * **장면:** 폐허 속에서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 잔해들 사이로, 허름한 옷차림의 사람들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움직이고 있다. 흙먼지에 덮인 그들의 얼굴은 피로와 체념으로 가득하다. 몇몇 아이들은 굶주린 눈으로 바닥을 뒤진다.
    * **글:** “한때 번성했던 도시들은 이제 제국의 탐욕이 남긴 거대한 무덤일 뿐. 평범한 이들의 삶은 먼지처럼 흩어져갔다.”
    * **효과음:** (희미하게 들리는 기침 소리) 콜록… 콜록…

    **패널 3**
    * **장면:** 한 아이가 바닥에서 낡은 기계 부품 조각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집어 든다. 녹슬고 닳았지만, 한때는 중요한 역할을 했을 부품이다. 아이의 눈에 아주 잠깐, 희미한 호기심과 절망이 교차한다.
    * **글:** “하지만 꺼지지 않는 불씨는 언제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법.”

    **[본문 시작]**

    **제목: 어둠 속 불꽃 – 1화: 폐허의 그림자**

    **패널 1**
    * **장면:**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진 반란군의 기지 내부. 낡은 금속과 천 조각으로 얼기설기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활기찬 움직임으로 가득하다. 사람들이 복잡한 회로를 수리하고, 부서진 장비들을 조립하며 땀을 흘리고 있다. 벽에는 조악하게 그려진 제국군의 기체 설계도와 작전 지도가 걸려있다.
    * **인물:** 여러 반란군 대원들.
    * **글:** (벽에 걸린 제국군 메카의 설계도에 적힌 글씨) ‘블레이즈 가드 Mk.III’
    * **효과음:** (기계음) 윙- 칙- (망치질 소리) 쿵! 쿵!

    **패널 2**
    * **장면:** 기지 한가운데, 반쯤 해체된 거대 메카 ‘천둥매’의 엔진룸 앞에서 한 남자가 부품을 만지고 있다. 그의 얼굴은 기름때로 얼룩졌지만, 예리한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은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그의 등 뒤로 용접 불꽃이 튀어 오른다.
    * **인물:** 카이 (30대 초반, 반란군 지휘관이자 파일럿)
    * **글:** “우리의 무기는 녹슬었지만, 우리의 의지는 강철보다 단단하다.”
    * **효과음:** (용접 불꽃 소리) 찌이이이익!

    **패널 3**
    * **장면:** 카이에게 다가오는 박 정비사 (50대 후반, 노련한 기술자). 그의 손에는 오래된 공구들이 쥐어져 있다. 박 정비사의 얼굴엔 주름이 깊지만,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다.
    * **인물:** 카이, 박 정비사
    * **박 정비사:**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엔진 과부하 문제, 아직 완벽히 잡지 못했네. 이번 작전,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닌가?”
    * **카이:** (부품을 조립하며) “시간이 없습니다, 박 정비사님. 식량은 바닥났고, 약품도 부족합니다. 저 수송선을 놓치면… 우리는 여기서 말라죽을 겁니다.”
    * **효과음:** (도구 부딪히는 소리) 쨍그랑

    **패널 4**
    * **장면:** 박 정비사가 카이의 어깨를 잡는다. 그의 눈빛은 굳건하다.
    * **인물:** 카이, 박 정비사
    * **박 정비사:** “자네의 심장이 이 천둥매의 엔진이야, 카이. 과부하가 걸리기 전에 내가 먼저 막아설 걸세. 걱정 말고 임무에 집중하게.”
    * **카이:** (옅게 미소 지으며) “고맙습니다, 정비사님. 항상.”

    **패널 5**
    * **장면:** 작전실. 조악한 홀로그램 스크린에 제국군 수송선의 예상 항로와 주변 지형도가 띄워져 있다. 카이와 몇몇 대원들이 지도를 응시한다.
    * **인물:** 카이, 그리고 젊은 통신병 ‘리나’ (20대 초반, 침착하고 영리하다)와 전술가 ‘제로’ (20대 후반, 냉철한 분석가).
    * **카이:** “수송선 ‘아틀라스-7’은 30분 뒤, 폐기된 ‘크로노스 발전소’ 섹터를 통과한다. 우리의 목표는 발전소 외곽에서 매복, 수송선을 제압하는 것.”
    * **제로:** “제국군 순찰대는요? 크로노스 섹터는 ‘블레이즈 가드’ 중대의 주 순찰 구역입니다.”
    * **리나:** “제국군 통신망 해킹 결과, 10분 전 순찰대 일부가 서쪽 구역으로 이동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최소 2개 소대가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패널 6**
    * **장면:** 카이가 홀로그램 지도를 확대한다. 크로노스 발전소의 복잡한 구조와 주변 폐건물들이 상세히 나타난다.
    * **인물:** 카이
    * **카이:** (결의에 찬 목소리로) “그게 우리의 기회다. 제국의 눈을 피해 수송선을 확보해야 해. 이 작전에 우리의 모든 것이 걸려있다.”

    **패널 7**
    * **장면:** ‘천둥매’의 격납고. 어둠 속에 거대한 그림자로 서 있는 ‘천둥매’의 모습. 수십 개의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고, 마지막 점검이 한창이다. 전신에 검은색과 짙은 회색의 도장이 되어있고, 어깨 부분에 긁히고 패인 자국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한쪽 팔에는 거대한 개틀링 건이 장착되어 있고, 다른 팔에는 날카로운 칼날 형태의 근접 무기가 접혀 있다.
    * **글:** “천둥매. 폐기된 고철 더미 속에서 부활한, 자유를 향한 반란의 날개.”
    * **효과음:** (웅장한 기계음) 우우우웅…

    **패널 8**
    * **장면:** 카이가 ‘천둥매’의 조종석에 오른다. 복잡한 패널들이 빛을 발하고, 여러 개의 모니터에 외부 전경이 잡힌다.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려 있지만, 눈빛은 흔들림이 없다.
    * **인물:** 카이
    * **카이:** (숨을 깊게 들이쉬며) “좋아, 시작해볼까.”
    * **효과음:** (조종석 시스템 부팅 소리) 삐비비빅- 촤르륵!

    **패널 9**
    * **장면:** ‘천둥매’가 지하 기지의 거대한 출입문을 열고 폐허의 밤하늘 아래로 모습을 드러낸다. 먼지와 자갈이 굴러떨어지고, 메카의 육중한 발걸음이 땅을 울린다. 달빛이 희미하게 메카의 금속 표면에 반사된다.
    * **효과음:** (거대한 문 열리는 소리) 쐐애애액! (메카 발소리) 쿵! 쿵! 쿵!

    **패널 10**
    * **장면:** ‘크로노스 발전소’ 외곽의 폐허 속. ‘천둥매’가 고층 빌딩 잔해들 사이에 숨어 매복하고 있다. 완벽한 위장 덕분에 폐허의 일부처럼 보인다.
    * **카이 (내레이션):** “어둠은 우리의 친구이자 방패. 제국의 눈을 피해 움직여야 한다.”
    * **효과음:** (새벽 바람 소리) 쉬이이익…

    **패널 11**
    * **장면:** ‘천둥매’의 모니터에 열 감지기로 포착된 제국군 수송선 ‘아틀라스-7’의 모습이 흐릿하게 잡힌다. 그 뒤로는 제국군 메카 ‘블레이즈 가드’ 3기가 호위하며 접근하고 있다.
    * **리나 (무전):** “수송선, 시야에 포착되었습니다! 후방에 ‘블레이즈 가드’ 3기 확인! 목표는 아틀라스-7, 전방의 중계탑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 **제로 (무전):** “추가 순찰대 감지! 서쪽에서 빠르게 접근 중! 예상보다 빠릅니다!”
    * **카이:** (조종간을 꽉 쥐며) “젠장, 이런!”
    * **효과음:** (경보음) 삐이이익! (무전 잡음) 치이익…

    **패널 12**
    * **장면:** 제국군 ‘블레이즈 가드’ 메카 중 한 기가 갑자기 멈춰 서더니, 광학 센서를 ‘천둥매’가 숨어있는 쪽으로 향한다.
    * **제국군 조종사 (무전):** “대원들, 잠시 정지. 뭔가 이상하다. 이 근방에서 미약한 에너지 신호가 감지됐다.”
    * **카이:** (식은땀을 흘리며) “들켰나!”
    * **효과음:** (시스템 알림) ‘적 탐지! 적 탐지!’

    **패널 13**
    * **장면:** ‘블레이즈 가드’ 메카가 경계 태세에 들어가며 무기를 겨눈다. 그들의 몸체에서 푸른빛이 번쩍인다.
    * **제국군 조종사 (무전):** “폭격 준비! 구역 일대 광역 스캔 실시!”
    * **카이:** (결심한 듯) “더 이상 숨을 곳은 없어! 전방으로 돌파한다!”
    * **효과음:** (메카 무기 충전음) 즈으으으응-

    **패널 14**
    * **장면:** ‘천둥매’가 숨어있던 건물 잔해를 부수고 튀어나온다. 거대한 개틀링 건이 불을 뿜으며 제국군 ‘블레이즈 가드’를 향해 맹렬하게 발포한다.
    * **카이:** “자유를 위해! 어둠 속 불꽃!”
    * **효과음:** (개틀링 건 발포음) 타타타타타탕! (금속 파편 튀는 소리) 챙! 챙!
    * **SFX 폰트:** 거대하고 날카롭게, ‘천둥매’의 포효와 함께.

    **패널 15**
    * **장면:** 선두에 있던 ‘블레이즈 가드’ 한 기가 ‘천둥매’의 기습적인 공격에 직격당하고, 방어막이 깨지며 파편을 흩뿌리며 뒤로 휘청거린다.
    * **제국군 조종사 (무전):** “크악! 반란군 메카다! 대응 사격 실시!”
    * **효과음:** (메카 피격음) 콰과광!

    **패널 16**
    * **장면:** 나머지 ‘블레이즈 가드’ 두 기가 즉시 ‘천둥매’를 향해 반격한다. 레이저 포탄이 붉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온다. ‘천둥매’는 민첩하게 폐허 사이를 가로지르며 공격을 회피한다.
    * **카이 (내레이션):** “그들의 무기는 강력하지만, 우리는 폐허를 이용할 수 있다!”
    * **효과음:** (레이저 발사음) 퓨슈슈슈! (회피하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 휘이이잉-

    **패널 17**
    * **장면:** ‘천둥매’가 한 바퀴 회전하며 거대한 칼날 형태의 근접 무기를 휘둘러 뒤따라오던 ‘블레이즈 가드’의 다리 부분을 베어버린다. 금속이 찢어지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 **효과음:** (금속 절단음) 찌이이이이익! (메카 고장음) 삐빅- 삐이익-

    **패널 18**
    * **장면:** 다리를 잃은 ‘블레이즈 가드’ 메카가 균형을 잃고 쓰러진다. ‘천둥매’는 그 위에 올라타 개틀링 건을 조준 사격하여 조종석 부분을 완전히 파괴한다.
    * **제국군 조종사 (비명):** “안돼에에에!”
    * **효과음:** (메카 추락음) 쿵! (개틀링 건 연사) 따따따따땅! (폭발) 콰아아앙!

    **패널 19**
    * **장면:** 수송선 ‘아틀라스-7’은 이미 제압당한 채 정지해 있고, 나머지 한 대의 ‘블레이즈 가드’가 ‘천둥매’와 대치한다. 조종사는 패닉 상태다.
    * **제국군 조종사:** “이… 이럴 수가! 두 대가… 순식간에…”
    * **카이:** “이제 너 혼자다. 항복해라!”

    **패널 20**
    * **장면:** 그때, 멀리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강렬한 붉은 섬광이 번쩍인다. 하늘에서 지축을 흔드는 굉음이 들려오고, 거대한 메카 한 기가 폐허를 가르며 엄청난 속도로 다가온다. 그 메카는 일반 ‘블레이즈 가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위압적이며, 몸체에 붉은색 불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 **인물:** 엘리시스 (이 메카의 파일럿, 제국군 특수부대 지휘관)
    * **글:** “그들의 사냥개가 나타났다.”
    * **효과음:** (거대한 메카 이동음) 쿠구구구궁! (경보음) 삐이이이익- 삐이이이익-

    **패널 21**
    * **장면:** ‘천둥매’의 모니터에 새로 나타난 메카의 정보가 뜬다. ‘타이탄 가드 Mk.II – 엘리시스 전용기’. 경고등이 붉게 깜빡인다.
    * **리나 (무전):** “카이님! 저건… ‘불꽃의 여왕’ 엘리시스의 ‘타이탄 가드’입니다! 제국군 특수부대 ‘블레이즈 리전’의 지휘관!”
    * **제로 (무전):** “젠장! 최악의 상대야! 그녀의 기동력과 화력은… 일반 ‘블레이즈 가드’와는 차원이 달라!”

    **패널 22**
    * **장면:** 엘리시스의 ‘타이탄 가드’가 ‘천둥매’ 앞에 우뚝 멈춰 선다. 그 거대한 기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폐허 전체를 짓누르는 듯하다. 조종석에서 냉철하고 잔인한 눈빛의 엘리시스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 **인물:** 엘리시스
    * **엘리시스:** (차갑고 기계적인 음성) “반란군 잔당들. 감히 제국의 보급선을 건드리다니. 여기서 끝장을 내주마.”
    * **효과음:** (메카 내부 기계음) 윙- (저음의 통신음) 즈으응…

    **패널 23**
    * **장면:** 카이가 이를 악문다. ‘천둥매’의 개틀링 건이 이미 엘리시스의 메카를 향해 겨눠져 있지만, 그의 얼굴에는 긴장과 함께 비장함이 떠오른다.
    * **카이:** (굳건한 목소리로) “끝장은 누가 낼지 아직 모른다! 제국에 짓밟힌 자들의 분노가 뭔지 똑똑히 보여주마!”
    * **효과음:** (메카 엔진 포효음) 으르르르릉!
    * **글:** “그들의 반란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에피소드 종료]**

  • 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심연의 속삭임

    어둠은 익숙한 벗이었다. 아니, 어쩌면 나를 영원히 잠식하려 드는 그림자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발을 디딘 이 낡은 저택은 바깥세상과 단절된 작은 섬과도 같았다. 창밖으로는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두꺼운 유리와 묵직한 커튼은 그 소리마저 집어삼켰다. 유일하게 들리는 것은 내 심장의 불규칙한 박동과, 펜이 종이에 사각거리는 소리뿐이었다.

    탁자 위에는 온갖 고문서와 기묘한 형상의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대부분은 내가 직접 발굴했거나, 아니면 대대로 전해 내려온 가문의 저주 같은 유산이었다. 내 조상 중 하나는 미지의 언어를 탐구하다가 미쳐버렸고, 다른 하나는 존재해서는 안 될 형상을 묘사하다가 스스로 눈을 도려냈다고 한다. 그들의 광기는 내 피 속에도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광기를 피하려 애쓰기보다, 오히려 더 깊이 파고들었다.

    오늘 밤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작은 석판이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매끄럽게 다듬어진 표면 위로 기묘하고 불규칙한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지구상의 어떤 문자와도 달랐다. 원형도 아니고, 선형도 아니며, 마치 우주의 오류처럼 느껴지는 형상들이었다. 나는 지난 몇 달간 이 석판의 해석에 매달렸다. 잠을 줄이고, 식사를 거르면서, 오직 이 알 수 없는 언어의 베일을 벗기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망자들의… 노래… 아니, 심연의… 갈망?”

    나는 중얼거렸다. 겨우 몇 개의 기호를 해독해낸 참이었다. 단어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았고, 문법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간신히 끌어낸 파편들 속에서 나는 이상한 연관성을 발견했다. 그것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언급이었다. 어둠 속에서 태어나, 어둠을 갈망하며, 어둠 그 자체가 된 존재들.

    밤은 더욱 깊어졌다.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해독의 실마리가 잡힐 때마다 두통이 격렬해졌고, 마치 뇌가 뜨거운 불로 지져지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이 석판은 나를 불렀다. 깊고, 끈적하고,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로.

    나는 손끝으로 석판의 표면을 쓸었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 마치 어떤 존재의 비늘 같았다. 그때였다. 석판의 한 귀퉁이에 새겨진 가장 복잡하고 기괴한 문양에서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내 시선이 그곳에 고정되었다. 그 문양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아니, 정말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검은 흑요석 표면 위로 희미한 푸른빛이 번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어올랐다. 단순한 상상이나 피로로 인한 착시가 아니었다. 푸른빛은 점점 뚜렷해지더니, 마침내 문양 전체를 감쌌다. 그리고 마치 잠금장치가 해제되듯, 그 문양의 복잡한 선들이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어둠 속의 이 방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너는, 나의 부름에 응하려는 자인가?”**

    목소리였다. 내 귀가 아닌, 내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목소리. 차갑고도 따스하며, 비극적이면서도 황홀한, 형용할 수 없는 이질적인 음성이었다. 그것은 언어가 아니었다. 모든 언어의 근원이자, 모든 개념의 정점에 있는 무언가였다. 나는 그 소리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달았다. 우주의 먼지보다도 하찮은 존재.

    푸른빛은 점점 더 강렬해졌다. 빛이 뿜어져 나오는 석판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벽은 물결치듯 흔들리고, 책장의 모서리는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비유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랬다.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악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현실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나는 고통에 찬 신음과 함께 석판을 떨어뜨렸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석판은 마루에 부딪혔지만, 놀랍게도 깨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밝게 빛났다. 그 빛 속에서, 일그러진 공간의 틈새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형태는 명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흐릿한 실루엣이었다. 길고 유려하며, 인간적인 동시에 지극히 비인간적인. 그것은 마치 깊은 바닷속을 유영하는 거대한 심해 생물이면서 동시에 별들의 먼지로 빚어진 여신 같았다. 팔다리가 있었지만 관절은 보이지 않았고, 머리가 있었지만 얼굴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얼굴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한 존재였다. 그저 빛의 집합체인 동시에, 완벽한 어둠의 구현체 같았다.

    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그 존재의 중심에서 빛나는 두 개의 푸른 점이었다. 그것은 눈이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영원하고 고독한 눈. 그 눈과 마주한 순간, 나는 내 삶의 모든 기억이 한순간에 스캔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 욕망, 내 좌절, 내 광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알지 못했던 나의 깊은 외로움까지도.

    그 존재가 움직였다. 형체 없는 팔이 빛의 잔상만을 남기며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내게로 뻗어왔다. 빛의 손가락 끝에서 무언가 번쩍였다. 그것은 물리적인 접촉이 아니었다. 내 영혼 깊숙한 곳에 닿는, 차갑고도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내 안의 모든 고통과 혼란이 한순간에 잠잠해졌다. 마치 뜨거운 불길이 덮친 자리에 시원한 샘물이 솟아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찾았어. 나의 작은 조각이여.”**

    다시 그 목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더욱 선명하게, 마치 내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나의 작은 조각.’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 심장은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휩싸였다. 공포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보다 더 거대한, 알 수 없는 매혹이 나를 지배했다. 이 알 수 없는 존재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내 평생의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빛의 손길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고, 의식이 아득해졌다. 세상의 모든 색채가 사라지고, 오직 푸른빛만이 남았다. 내가 의식을 잃기 직전, 그 존재의 형체가 아주 잠깐, 마치 인간의 실루엣을 흉내 낸 것처럼 부드럽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칠흑 같은 머리카락과 깊은 푸른 눈, 그리고 어렴풋한 미소. 너무나 아름다워서, 너무나 두려워서,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쿵*.

    내 몸이 차가운 마루에 닿았다. 마지막으로 느껴진 것은 석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의 따스함과, 심연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매혹적인 속삭임이었다. 세상은 어둠으로 다시 잠겼고, 나는 그 속에서 영원히 잠들 것 같았다.

    하지만 잠들지 않았다.

    몇 시간 후, 혹은 며칠 후. 나는 차가운 마루 위에서 눈을 떴다. 억수 같던 비는 그쳤고, 창밖으로는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방은 여전히 어지러웠지만, 어제의 광기 어린 공간 왜곡은 사라진 뒤였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아무것도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내 손이 뻗어 나간 곳에는 내가 떨어뜨렸던 흑요석 석판이 놓여 있었다. 여전히 그 자리에, 미미한 푸른빛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감촉은 여전했지만, 이제는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에는 알 수 없는 감각들이 뒤섞여 있었다. 어제 밤의 공포는 희미해졌지만, 그 대신 형용할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왔다. 마치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무언가를 되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석판을 든 내 손이 떨렸다. 나는 어둠 속에서 나를 부르던 그 존재를 생각했다. 그 압도적인 광채와 비인간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마지막 순간, 나를 향해 지었던 어렴풋한 미소.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나는 조상들의 전철을 밟아 광기에 잠식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영혼은 분명히 느꼈다. 어제 밤, 심연 속에서 날아온 그 목소리는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금지된 문을 열어버린 첫 번째 균열.
    그리고 나는, 그 문을 통해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응답해야만 하는 운명임을 직감했다.

    “세린…”

    내 입에서 알 수 없는 이름이 흘러나왔다. 어디서 들었는지, 언제부터 알고 있었는지 알 수 없는 이름. 하지만 그 이름은 내 영혼을 흔들었다. 심연 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그 푸른 눈동자처럼, 거부할 수 없는 매혹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밖은 이제 완연한 새벽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내 세상은 이제 더 이상 새벽이 아니었다. 영원한 밤의 심연이 시작되었을 뿐. 그리고 그 심연 속에는, 나를 기다리는 존재가 있었다. 나의 작은 조각이라 불렀던, 미지의 존재가.

    나는 그 존재를 찾아야만 했다. 설령 그 길이 파멸로 이어진다 해도.

  • 추리 미스터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첫 번째 조각

    회색빛 도시의 낡은 빌딩 숲 속, 해묵은 간판들이 켜켜이 쌓인 뒷골목 어딘가. 눅진한 공기와 미세먼지 냄새가 뒤섞인 곳에서, 이서진은 마치 그림자처럼 존재했다. 닳고 닳은 가죽 소파에 몸을 구긴 채, 그는 창밖의 도시를 응시했다. 밤은 깊었고, 불빛들은 마치 저마다의 욕망처럼 반짝였다. 저 빛들 중 하나는, 분명 그의 것이었어야 했다.

    두 달 전만 해도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성공’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젊은 나이에 IT 업계를 휘어잡은 천재,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현실로 구현해내는 마술사. 사람들은 그를 그렇게 불렀다. 그리고 그 모든 영광의 순간마다, 최민준은 그의 곁에 있었다. 그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 그리고 누구보다 굳건한 그의 편이라고 굳게 믿었던 존재.

    하지만 그 믿음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조각난 파편들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서진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믿음은 찢기고, 신뢰는 갈가리 찢겼으며, 모든 것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남은 것은 지옥 같은 현실과, 타오르는 증오뿐이었다.

    탁, 탁.
    그의 손끝에서 낡은 라이터가 몇 번 헛돌다 불꽃을 피웠다. 담배는 없었다. 그저 습관처럼 불을 붙였다 껐다 할 뿐. 희미한 불꽃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거울이라도 있다면, 그 옛날의 이서진과 지금의 이서진이 얼마나 다른지 한눈에 알 수 있었을 터였다. 날카롭던 눈매는 피곤에 절어 초점을 잃었고, 늘 자신감으로 가득했던 표정은 굳게 닫힌 석상처럼 변해 있었다. 하지만 그 깊은 곳에는, 차가운 불씨가 살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빛바랜 신문 스크랩이 놓여 있었다. ‘최민준 대표, 업계 최고 혁신 기업인으로 선정…’, ‘젊은 기업가 최민준, 새로운 기술 개발로 투자 유치 성공…’ 온통 최민준의 이름으로 도배된 기사들이었다. 그 기사들마다 민준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자신의 공적인 양. 마치 자신이 서진의 존재를 아예 지워버린 것처럼.

    “하…….”
    서진의 입술 사이로 마른 한숨이 새어 나왔다. 웃음이라기엔 너무나 공허하고, 울음이라기엔 너무나 메마른 소리였다. 그는 손을 뻗어 신문 기사 속 민준의 얼굴을 쓸었다. 종이의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 끝을 타고 전해졌다.

    “네가 가진 모든 것, 내 것이었어야 했어.”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텅 빈 방 안에서 울림 없이 흩어졌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낡은 소파가 삐걱이는 소리를 냈다. 창밖의 야경은 여전히 번잡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중 누구도, 이 어둠 속에 갇힌 남자가 어떤 지옥을 헤쳐 나왔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남자가 이제 어떤 지옥을 만들어낼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 터였다.

    그는 벽에 기대어 놓았던 낡은 노트북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열자 희미한 빛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바탕화면에는 하나의 파일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파일명은 ‘계획’.

    그것은 지난 두 달간 서진이 매달린 유일한 일이었다. 밤낮없이 매달려, 모든 자료를 긁어모으고, 모든 가능성을 계산하고, 모든 허점을 파고들었다. 마치 거미가 먹이를 노리듯, 끈질기고 집요하게.

    “네가 내 모든 걸 앗아갔지, 민준아.”
    화면 속 민준의 환한 미소가 서진의 굳은 표정 위로 겹쳐지는 듯했다.
    “이제 내가 네 모든 걸 앗아갈 차례야.”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스쳤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 그의 결심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었다. 복수는 차갑게 식은 접시에 담아 대접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서진은 그 접시에, 민준이 겪게 될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채워 넣을 생각이었다.

    덜컥.
    낡은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예상치 못한 소리에 서진의 몸이 경직됐다. 그는 재빨리 노트북 화면을 껐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이 낡은 건물에 밤늦게 찾아올 이는 없었다. 침입자? 아니면…

    “서진아.”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그가 가장 증오하는 최민준이었다.

    심장이 발작하듯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민준이, 이 지옥 같은 공간에 어떻게…

    어둠 속에서 민준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깔끔한 수트 차림에, 고급스러운 시계가 그의 손목에서 빛났다. 그는 여전히 그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치 자신을 파멸시킨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

    “찾느라 애먹었어. 이렇게 꽁꽁 숨어있을 줄은 몰랐네.”
    민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미안함도, 죄책감도 없었다. 그저 약간의 짜증과, 모든 것을 통제하려는 듯한 오만함만이 묻어날 뿐이었다.

    “왜… 왔어?”
    서진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낮게 깔렸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이 복수의 서막을 앞둔 시점에서, 민준이 직접 나타나다니.

    민준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걱정돼서 왔지. 친구가 이렇게 사라졌는데.”
    ‘친구’라는 단어에 서진의 입술이 비틀렸다. 역겨움이 치밀었다.

    “친구? 네가… 친구?”
    서진은 민준을 노려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지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네 입에서 그 단어가 나올 줄이야. 구역질 나는군.”

    민준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서진의 심장을 찢는 칼날 같았다.
    “아직도 화가 많이 났나 보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사업이라는 게 다 그런 거잖아.”
    그의 손이 서진의 어깨로 향했다. 서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뺐다.

    “사업? 넌… 넌 내 모든 걸 뺏었어. 내 기술을 훔치고, 내 명예를 더럽히고, 날 나락으로 떨어뜨렸어. 그게 네가 말하는 ‘사업’이야?”
    서진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되기 시작했다. 억눌렸던 분노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민준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냉정하고 계산적인 표정이 스쳤다.
    “아니, 서진아. 난 네가 길을 잃었을 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 준 거야. 네 기술은 아직 미숙했고, 네 비전은 너무 순진했지. 난 그걸 완성시켰을 뿐이야. 그리고 보란 듯이 성공했잖아.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순간, 서진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 오만함, 그 뻔뻔함. 민준은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괴물이었다. 자신이 만들어낸 괴물.

    서진의 주먹이 떨렸다. 당장이라도 민준의 면상에 날리고 싶었지만, 그는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아직은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그는 민준을 파멸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감정에 휩쓸려 모든 것을 망칠 수는 없었다.

    “고맙다?”
    서진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네게 해줄 건, 오직 하나뿐이야.”

    민준은 눈썹을 치켜떴다. 여전히 여유로운 표정이었다.
    “뭔데? 또 허황된 복수극이라도 꿈꾸는 거야? 정신 차려, 서진아. 넌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라고?”
    서진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차갑고 서늘했다.
    “그래, 난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넌 내가 겪은 고통을 정확히, 아니 그보다 더 깊게 느껴야만 할 거야.”

    민준의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의 눈빛에 아주 희미한 불안감이 스치는 것을 서진은 놓치지 않았다. 복수는 이미 시작되었다. 민준이 발을 들인 이 어둠 속에서, 그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서진은 다시 노트북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다시 ‘계획’ 파일을 열었다.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그의 얼굴을 섬뜩하게 비췄다. 민준의 눈빛이 그 화면에 고정됐다.

    “난 이제 ‘이서진’이 아니야.”
    서진은 차갑게 읊조렸다.
    “난 이제, 너를 위해 존재하는 지옥이야.”

    민준의 얼굴에서 비로소 오만함이 사라지고, 당혹감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스치고 지나갔다. 서진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길고도 처절한 복수극의, 아주 작은 첫 번째 조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