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세계는 병들어 있었다.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오던 ‘천강의 기운’이 소멸의 그림자를 드리운 이후, 만물은 생기를 잃고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흙은 메마르고, 강물은 흐름을 잃었으며, 드높던 산봉우리에는 기이한 균열이 생겨났다. 사람들은 이유 모를 병마에 시달렸고, 무림인들의 내공은 점점 고갈되어 갔다. 절망의 그림자가 대지를 덮으려는 찰나, 오랜 침묵을 깨고 천신봉에서 신탁이 내려왔다.

    「천하무신결을 개최하라. 천강의 심장을 다시 울릴 단 한 명의 무신을 찾아, 이 저무는 세계를 구원할지니.」

    그리고 오늘, 천신봉의 정기가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땅에 만 년에 한 번 열린다는 천하무신결이 드디어 막을 올리려 하고 있었다.

    장대하게 펼쳐진 천신봉 아래, 강진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눈앞에는 실로 아득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십만 인파가 산자락을 따라 운집해 있었고, 그들의 머리 위로는 오색찬란한 무림 문파의 깃발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춤을 추고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천신봉 정상은 신비로운 안개에 싸여 마치 다른 세계의 것처럼 보였다.

    “사부님, 저것이…… 정말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입니까?”

    강진의 목소리에는 경외와 함께 약간의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는 아직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은 젊은 무인으로, 그의 사부인 ‘운룡자(雲龍子)’를 따라 이 먼 길을 달려왔다. 운룡자는 강진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그럼.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진실이니라. 무림의 고수들이여, 명문가의 세력들이여, 혹은 천신만고 끝에 기연을 얻은 은둔 고수들이여. 이들은 모두 천강의 심장을 울릴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모여든 이들이지.”

    운룡자의 눈빛은 강진과는 달리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깊은 우려와 기대를 동시에 담고 있었다. 운룡자의 희끗희끗한 수염이 바람에 살랑였다.

    “천강의 기운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의 활력이 줄어든다는 의미가 아니다. 생명의 근원, 존재의 이치, 만물을 지탱하던 힘 그 자체가 소멸하는 것과 같으니라. 이를 막지 못하면, 이 세계는 서서히 숨을 거두고 사라질 것이다.”

    강진은 고개를 숙였다. 최근 몇 년간, 그가 사는 벽촌에서도 매일같이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 밭을 갈던 농부들이 이유 없이 쓰러지거나, 평생 메마르지 않던 우물이 바닥을 드러내고, 밤하늘의 별들이 예전보다 훨씬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저 자연의 변화라고만 생각했지만, 사부의 말을 들으니 그 모든 것이 이 천강의 기운 소멸과 연결되어 있음을 깨달았다.

    “사부님, 그…… 천강의 심장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천강의 심장은 이 세계의 핵이자, 생명의 근원. 오직 천신봉 정상에만 존재하는 고대의 유물이다. 오랜 옛날, 세상이 혼돈에 빠졌을 때 천신이 직접 내려와 박아 넣었다는 전설이 있지. 그 힘이 있기에 이 세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 심장이 병들어 버린 것이야.”

    운룡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천하무신결은, 그 심장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가려내기 위한 시험이다. 단순히 강함만을 겨루는 것이 아니다. 무학의 경지, 심성의 깊이,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계를 구원하고자 하는 의지까지 모두 시험받는 자리이니라.”

    그때, 저 멀리서 웅장한 북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콰아앙! 콰앙! 거대한 소리가 산자락 전체를 뒤흔들자, 수십만 인파가 일순간 침묵에 잠겼다. 깃발의 펄럭임마저 멈춘 듯했다. 그 모든 시선이 천신봉의 정상으로 향했다.

    천신봉 정상의 신비로운 안개가 걷히자, 거대한 비무대(比武臺)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비무대는 단순한 대지가 아니었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기이한 암석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암석 사이사이에는 붉게 빛나는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비무대 주변으로는 거대한 수정 기둥들이 하늘을 꿰뚫을 듯이 솟아 있었고, 그 기둥들에서는 강력한 영력이 뿜어져 나와 주변 공간을 뒤틀었다.

    “보아라, 진아. 저것이 바로 ‘운명지혈(運命之血)’ 비무대다. 저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 모든 참가자들은 세계의 운명을 짊어지게 되는 것이지.”

    운룡자의 말에 강진은 다시금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비무대 위에 홀로 서 있는 한 인물이었다. 온몸을 감싼 백색 도포, 허리에는 아무 장식 없는 검은 검을 차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뿜어내는 기운은 주변의 모든 것을 압도하고 있었다. 강진은 그 인물에게서 차가운 고요함과 동시에 폭풍 전야의 거대한 힘을 느꼈다.

    그때, 비무대 주변의 수정 기둥들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오색찬란한 빛이 하늘로 솟구쳐 올랐고, 그 빛이 모여 하나의 거대한 홀로그램처럼 허공에 문자를 새겨 넣었다.

    「천하무신결. 첫 번째 시련. ‘영기심원(靈氣心願)의 시험’.」

    홀로그램이 사라지고, 비무대 중앙에 서 있던 백색 도포의 인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아래에 운집한 모든 인파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고 형언할 수 없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천하의 운명을 걸고, 영혼의 각오를 증명하라.”

    그 목소리가 천신봉 전체를 뒤흔들자, 강진의 가슴이 격렬하게 울렁였다. 그의 심장이 비명처럼 요동쳤다. 이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목격하고 있는 것이 단순한 무술 대회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은 이 세계의 생사를 결정할, 거대한 운명의 서막이었다.

    그때였다.
    수십만 인파 속에서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몇몇 인물들의 기운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세 개의 기운이 천신봉의 대기를 찢고 솟구쳐 올랐다.

    서쪽에서는 마치 태양을 삼킨 듯한 붉은 기운이 용솟음쳤다. 강렬한 화염의 기운은 주변의 공기를 뒤틀고 땅바닥을 녹여내릴 듯했다. 동쪽에서는 푸른 번개가 하늘을 갈랐다. 번개의 기운은 날카롭고 거침없이 뻗어 나가며 모든 것을 베어버릴 듯한 예리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북쪽, 그림자처럼 음습하고 차가운 기운이 마치 심연에서 기어 나온 듯 스멀스멀 대기를 잠식했다. 그 기운은 생명 있는 모든 것의 활력을 앗아가는 듯했다.

    강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의 눈은 경악으로 가득 찼다.
    세상은 아직 숨 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누가 이기든 지든, 그들의 힘이 세계를 구원할지, 아니면 또 다른 파멸로 이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천하무신결의 첫 시련이 시작되려는 찰나였다.

    ***

    (계속)

  • 좀비 아포칼립스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대본: 잔해 속의 숨 (The Breath in the Rubble)

    **제목:** 잔해 속의 숨

    **장르:** 좀비 아포칼립스, 생존

    **시놉시스:** 폐허가 된 도시, 지수, 현우, 미영 세 명의 생존자는 식량과 물을 찾아 허름한 건물 숲을 헤맨다. 작은 슈퍼마켓에서 예상치 못한 수확을 꿈꾸지만, 그곳엔 이미 또 다른 포식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하루하루, 그들의 삶은 한 조각의 빵만큼이나 위태롭다.

    ### **에피소드 1: 깨진 유리 너머**

    **[장면 1]**

    **컷 1:** (와이드 샷)
    회색빛 먼지로 뒤덮인 황폐한 도시 전경. 무너진 고층 빌딩 잔해들, 뒤틀린 철골 구조물이 하늘을 찌르고, 도로 위에는 버려진 차량들이 녹슨 채 방치되어 있다. 햇빛은 희미한 안개 사이로 겨우 비쳐 들어온다.
    **내레이션 (지수):** 세상은 죽었다. 우리가 알던 모든 것이 먼지가 되고, 재가 되었다. 남은 건 폐허뿐. 그리고… 저것들.

    **컷 2:**
    화면 중앙에 검은 후드티를 눌러쓴 **지수** (20대 후반 추정, 날카로운 눈매, 굳게 다문 입술). 어깨에 낡은 배낭을 메고, 한 손에는 묵직한 쇠파이프를 들고 있다. 표정은 긴장과 피로가 뒤섞여 있다.
    **내레이션 (지수):** 우리는 그 폐허 속에서 숨을 쉬는 마지막 인간들일지도 모른다.

    **컷 3:**
    지수의 뒤를 따르는 **현우** (30대 초반, 건장한 체격, 우직해 보이는 인상). 그의 등에는 큰 등산용 배낭이 짊어져 있고, 양손에는 개조된 듯한 작살이 들려 있다. 조용히 주변을 경계하며 걷고 있다.

    **컷 4:**
    현우의 옆에 바짝 붙어 걷는 **미영** (10대 후반, 다소 마른 체구, 겁에 질린 듯 불안한 눈빛). 작은 가방을 메고 있고, 한 손으로는 현우의 옷자락을 꽉 쥐고 있다. 이따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핀다.
    **내레이션 (지수):**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어둠 속에서 살아남는 법을 다시 배운다.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 무엇을 경계해야 할지.

    **컷 5:** (클로즈업)
    지수의 발이 부서진 유리 조각과 잔해 위를 조심스럽게 딛는 모습. ‘사각… 사각…’ 소리가 크게 들린다.
    **내레이션 (지수):** 소리는 곧 죽음이다.

    **[장면 2]**

    **컷 6:**
    세 사람은 무너진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을 빠져나오고 있다. 공기 중에는 눅눅한 흙먼지와 부패한 냄새가 섞여 있다.
    **현우:** (나지막이) 이쪽이야.

    **컷 7:**
    지수가 손을 들어 잠시 멈추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정면의 건물을 응시한다.
    **지수:** (작은 소리로) 저기… 슈퍼마켓 간판. 깨져서 잘 안 보이긴 하지만.

    **컷 8:** (줌 아웃)
    세 사람의 시선이 향하는 곳. ‘XX마트’라고 쓰여 있던 간판의 절반이 떨어져 나가고, 남은 글자도 희미하다. 건물 외벽은 시커먼 얼룩과 넝쿨로 뒤덮여 있지만, 문과 창문은 비교적 온전해 보인다.
    **미영:** (불안하게) 저 안에… 있을까요? 먹을 거…

    **컷 9:**
    지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다. 현우는 작살을 고쳐 쥐며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본다.
    **현우:** 며칠째 제대로 된 거 못 먹었어. 운이 좋으면 통조림이라도 건질 수 있을 거야.

    **컷 10:** (클로즈업)
    지수의 꽉 쥔 손. 쇠파이프의 녹슨 부분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녀의 표정은 희미한 희망과 깊은 경계심이 공존한다.
    **지수:** 너무 조용해. 오히려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장면 3]**

    **컷 11:**
    세 사람이 슈퍼마켓 건물에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입구의 자동문은 파손되어 반쯤 열려 있고, 그 틈으로 어두운 내부가 보인다.
    **현우:** 내가 먼저 들어갈게. 미영이는 내 뒤에 붙어. 지수 씨는 후방 경계.

    **컷 12:** (로우 앵글)
    현우가 작살을 앞으로 내밀고 먼저 문틈으로 몸을 비집고 들어가는 모습. 발밑의 깨진 유리 조각이 ‘쨍그랑!’ 소리를 낸다.
    **현우:** (속삭이듯) 젠장.

    **컷 13:**
    지수가 주변을 살피며 내부로 진입한다. 미영은 잔뜩 웅크린 채 현우의 등 뒤에 달라붙어 있다.
    **내부 전경:** 진열대는 대부분 쓰러져 있거나 텅 비어 있다. 바닥에는 상품 포장지와 유리 조각, 흙먼지가 뒤섞여 발 디딜 틈이 없다. 어둡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지수:** (작은 소리로) 이미 한바탕 휩쓸고 간 것 같네.

    **컷 14:**
    현우가 조심스럽게 계산대 쪽으로 이동하며 주변을 살핀다. 이내 고개를 저으며 실망한 표정을 짓는다.
    **현우:** 통조림은커녕 라면 부스러기도 없어.

    **컷 15:**
    미영이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미영:** 그럼… 우리 오늘 또 굶는 거야?

    **컷 16:**
    그때, 지수의 시선이 매장 구석, 직원 전용 통로로 향한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쓰인 낡은 표지판이 간신히 걸려 있다.
    **지수:** (현우를 보며) 저쪽. 창고일 수도 있어.

    **컷 17:** (클로즈업)
    지수의 눈빛. 작은 희망의 불씨가 다시 피어오르는 듯하다.

    **[장면 4]**

    **컷 18:**
    현우가 조심스럽게 창고 문을 연다. ‘끼이이익…’ 하는 낡은 경첩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진다.
    **현우:** (작게) 조용히.

    **컷 19:**
    창고 내부는 매장보다 훨씬 어둡다. 선반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지만, 대부분 비어 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몇몇 상자 위에는 두꺼운 먼지가 쌓여 있다.
    **미영:** 여기도 아무것도 없어요…

    **컷 20:**
    현우가 손전등을 켜고 내부를 비춘다. 불빛이 움직일 때마다 길게 드리워지는 그림자들.
    **현우:** 이쪽 끝 선반, 뭔가 있어.

    **컷 21:** (클로즈업)
    선반 가장 안쪽에 놓인, 먼지 쌓인 플라스틱 물통 몇 개와 통조림 캔 서너 개. 작은 양이지만, 이들에게는 생명수와 같다.
    **지수:** (낮은 탄성) 찾았다…

    **컷 22:**
    현우가 통조림을 집어 드는 순간, 어둠 속에서 ‘크르르르륵…’ 하는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사운드 효과:** 크르르르륵…

    **컷 23:** (익스트림 클로즈업)
    미영의 얼굴. 공포에 질려 눈이 커지고, 입술을 깨물며 소리를 죽이려 애쓴다.

    **컷 24:**
    창고 깊숙한 곳, 선반 사이의 어둠 속에서 불분명한 형체가 꿈틀거린다. 썩은 살점과 뼈가 드러난 손이 천천히 움직인다.
    **사운드 효과:** 끄으으읍…

    **컷 25:**
    지수가 쇠파이프를 꽉 쥐고 현우의 앞을 막아선다. 그녀의 눈은 번뜩인다.
    **지수:** (작게) 물러서! 현우!

    **컷 26:**
    어둠 속의 형체가 선반에서 천천히 기어나온다. 온몸이 찢기고 썩어가는 좀비 한 마리. 한쪽 팔이 너덜거리고, 뼈가 드러난 얼굴은 끔찍하게 일그러져 있다.
    **좀비:** 끄어어어어어어…

    **컷 27:** (액션 샷)
    좀비가 거친 숨을 내쉬며 지수를 향해 달려든다. 현우는 즉시 몸을 돌려 작살을 앞으로 내세운다.
    **현우:** (고함) 비켜!

    **[장면 5]**

    **컷 28:** (고속 연출)
    현우가 날카롭게 작살을 휘둘러 좀비의 머리를 노린다. 좀비는 둔탁한 움직임으로 피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사운드 효과:** 꿰에엑! (좀비의 비명)

    **컷 29:**
    작살촉이 좀비의 머리를 꿰뚫는다. 좀비는 잠시 몸부림치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진다. 핏자국이 바닥에 흥건히 퍼진다.
    **사운드 효과:** 쿵!

    **컷 30:**
    미영이 공포에 질린 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주저앉는다.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다.
    **미영:** 끄윽… 흐윽…

    **컷 31:**
    지수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쓰러진 좀비를 경계한다. 쇠파이프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지수:** (낮은 한숨) 하아… 괜찮아? 다친 데 없어?

    **컷 32:**
    현우는 작살을 뽑아 들고, 팔뚝에 묻은 피를 대충 닦아낸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다.
    **현우:** 괜찮아. 너희는?

    **컷 33:**
    미영은 고개를 젓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지수:** 미영아, 괜찮아. 이제 끝났어.

    **컷 34:** (클로즈업)
    지수의 시선이 아까 발견했던 물통과 통조림으로 향한다. 피 묻은 바닥 옆, 여전히 놓여있는 작은 생존의 조각들.
    **내레이션 (지수):** 우리는 겨우 한 줌의 생명수를 얻기 위해 목숨을 건다. 이 작은 승리가 과연 내일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장면 6]**

    **컷 35:**
    세 사람이 통조림과 물통을 챙겨 조용히 슈퍼마켓을 빠져나온다. 서서히 지는 해가 폐허 위로 붉은 빛을 드리운다.
    **현우:**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 해. 소리에 다른 것들이 몰려올 수도 있어.

    **컷 36:**
    미영은 여전히 불안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다. 그녀의 눈에는 방금 겪은 공포가 잔상처럼 남아있다.
    **미영:** 저기… 저기서… 걔가…

    **컷 37:**
    지수가 미영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등을 토닥인다. 그녀의 시선은 멀리, 해가 지고 있는 수평선 너머를 향한다.
    **지수:** 알아. 괜찮아. 우리 같이 갈 거야. 어디든.

    **컷 38:** (와이드 샷)
    황량한 도시를 배경으로, 세 명의 작은 실루엣이 붉게 물든 하늘 아래에서 폐허를 벗어나고 있다. 그들의 발걸음은 지쳐 보이지만, 멈추지 않는다.
    **내레이션 (지수):** 어둠이 다시 찾아오고, 또 다른 하루가 끝난다. 하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오늘도 살아남았다. 내일도, 그리고 또 내일도… 그렇게 죽은 세상 속에서 삶을 이어가야 한다. 깨진 유리 조각 위를 걷듯이, 매 순간 위태롭게.

    **[에피소드 끝]**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세상은 멸망했다.
    지옥문이 열린 것처럼, 단 하루 만에 인류의 절반이 썩어 문드러지는 망자(亡者)로 변했다. 그들은 죽지 않는 몸으로 살아있는 것들을 탐했으며, 문명은 삽시간에 폐허가 되었다. 도시의 불빛은 꺼지고, 거리는 피와 비명으로 얼룩졌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사전에서나 찾을 수 있는 고루한 유물이 되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끝난 건 아니었다.
    깊은 산속, 은밀한 계곡, 세상의 눈을 피해 존재해왔던 강호(江湖)의 무인(武人)들. 그들은 혼돈 속에서도 맹렬히 싸웠고, 일부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마침내, 세상의 종말을 막기 위한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다.

    명문 정파의 거두들과 음지에서 힘을 키워왔던 사파의 은거 고수들, 심지어는 이단으로 치부되던 마교(魔敎)의 잔당들까지.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황폐해진 대륙 한가운데, 망자의 발길이 닿지 않는 유일한 성역, 천검곡(天劍谷)이었다. 수백 년 전, 무림의 패권을 가리던 천하제일 비무대회가 열렸던 바로 그곳. 지금은 인류의 운명을 건 ‘구세지쟁(救世之爭)’을 위한 결전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천지회(天地會)의 늙은 고수들이 탁한 눈빛으로 선언했다.
    “이제 더 이상 피할 곳은 없다. 우리는 단합해야 한다. 이 구세지쟁에서 승리하는 자, 그가 무림의 맹주가 되어 남은 인류를 이끌 것이다. 천하의 모든 힘은 그에게 집중될 것이며, 그의 명령은 곧 천명(天命)이 될 것이다.”

    그렇게 하여, 수많은 무림 고수들이 천검곡에 모여들었다. 저마다의 사연과 문파, 그리고 무엇보다 강대한 무공을 지닌 채. 그들 중에는 젊고 패기 넘치는 신예도 있었고, 오랜 세월 강호의 풍파를 겪어온 노장도 있었다.

    그들 사이, 한 젊은이가 조용히 서 있었다. 이현(李玄).
    그는 화려한 문파의 도포를 걸치지도 않았고, 번쩍이는 명검을 차고 있지도 않았다. 낡은 회색 무복에 맨손이 전부였다. 그의 눈빛은 깊은 호수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쉬이 가늠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감춰져 있었다. 그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그저 홀로, 이 지옥 같은 세상 속에서 살아남아 이곳에 도달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수군거렸다.
    “저 자는 누구인가? 어디 문파의 고수인가?”
    “맨손이라니? 비무대회에 저런 자가 끼어들다니… 용기가 가상하군.”
    “무림 맹주가 될 만한 재목으로는 보이지 않는군.”

    이현은 그들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만히 천검곡 중앙에 우뚝 솟은 비무대(比武臺)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망자들로 뒤덮인 폐허가 아니라, 아직 살아 숨 쉬는 인류의 희망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첫 번째 대결.
    이현의 상대는 소림(少林)의 속가 제자 중 한 명인 ‘강륜’이었다. 그는 우락부락한 체격에 온몸이 근육으로 뒤덮여 있었고, 쇠방망이처럼 단단한 주먹을 자랑하는 철사자(鐵獅子)라는 별호를 가지고 있었다.
    “풋, 애송이. 감히 소림의 철사자를 상대로 맨손이라니. 네 오만함을 찢어발겨 주마!”
    강륜은 으르렁거렸다. 우레와 같은 기합과 함께 그의 주먹이 이현에게로 날아들었다. 거대한 바위가 굴러오는 듯한 압력. 주변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이현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강륜의 주먹이 다가오는 순간, 그의 몸이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처럼 부드럽게 기울었다. 강륜의 주먹은 허공을 갈랐고, 그 충격으로 인해 강륜의 몸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뭐… 뭐야?”
    강륜이 당황하는 찰나, 이현의 손이 마치 춤을 추듯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기운이 번개처럼 뻗어 나와 강륜의 혈도(穴道)를 정확히 찍었다.
    팟!
    “크억!”
    강륜의 몸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그는 경악에 찬 눈으로 이현을 바라보았다. 내공을 실어 혈도를 막아버린 이현의 수법은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고금의 무인들조차 익히기 어렵다는 고차원 무공이었다.
    “더 이상 무리하지 마십시오. 몸을 해칠 뿐입니다.”
    이현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낮았다. 그는 강륜의 어깨를 가볍게 짚어주었다. 그러자 강륜의 몸이 스르르 풀렸다. 강륜은 얼굴을 붉히며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무심한 척했지만, 이현의 무공에 깊은 경외심을 느꼈다.

    관중들은 침묵했다. 그 누구도 이토록 쉽고 유려하게 소림의 고수를 제압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저것은… 마치 구름처럼 흘러가는 듯한 움직임이 아닌가?”
    “마치 그림을 보는 듯했다. 저런 무공은 처음 본다.”
    수군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경멸이 아닌, 경탄과 호기심이 섞인 목소리였다.

    그 후로도 이현의 대결은 계속되었다.
    그의 상대들은 하나같이 강호에 이름 좀 날린 고수들이었다. 어떤 이는 날카로운 검을 휘둘렀고, 어떤 이는 거대한 도(刀)로 산을 쪼갤 듯한 기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현은 단 한 번도 무기를 들지 않았다. 그의 맨손은 때로는 가벼운 바람처럼, 때로는 굳건한 바위처럼 변하며 모든 공격을 막아내고 되돌려주었다.

    이현의 무공은 ‘유운권(流雲拳)’이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유려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상대의 공격을 흡수하고, 그 힘을 역이용하여 되돌려주는 신묘한 권법이었다. 그의 몸은 마치 물 흐르듯 움직였고, 그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이변은 계속되었고, 마침내 이현은 결승에 올랐다.
    그의 마지막 상대는 ‘흑룡회(黑龍會)’의 암흑 고수, 묵천(墨天)이었다. 묵천은 강호의 암흑가를 지배했던 비밀스러운 문파의 마지막 생존자로, 그의 무공은 잔인하고도 파괴적이었다. 그는 오로지 힘과 살기로 상대를 제압하는, 짐승과 같은 전사였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검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묵천이 비무대에 오르자, 천검곡 전체에 묵직한 살기(殺氣)가 깔렸다. 관중들의 심장이 옥죄는 듯한 압박감에 숨을 죽였다.
    “네놈이 이 자리까지 오다니, 꽤나 재주가 있구나.”
    묵천의 목소리는 깊은 동굴에서 울려 나오는 듯 낮고 거칠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은 비무대 주변의 돌들을 조금씩 부식시키는 듯 보였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네놈의 그 고고한 무공은 내 힘 앞에선 한낱 모래성에 불과할 테니.”

    이현은 평온한 얼굴로 묵천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한 호수 같았다.
    “강함은 힘의 크기로만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의 깊이에서 나옵니다.”
    “흥! 허황된 소리! 내 마음은 오직 파괴만을 원한다!”
    묵천이 포효했다. 그의 발이 땅을 박차자, 비무대 바닥이 쩌저적 금이 갔다. 거대한 그림자가 이현에게로 돌진했다. 묵천의 주먹에서는 마치 검은 용이 튀어나오는 듯한 기세가 느껴졌다.

    콰아앙!
    두 사람의 격돌은 마치 천지가 진동하는 듯했다.
    묵천의 주먹이 이현의 유운권을 강타했다. 하지만 이현의 몸은 깃털처럼 가벼워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내지 않고 흘려보냈다. 묵천의 힘이 이현의 몸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 이현은 마치 바람에 실린 잎새처럼 뒤로 물러났다.

    “하찮은 잔재주!”
    묵천은 끊임없이 맹공을 퍼부었다. 그의 공격은 폭풍처럼 몰아쳤고, 비무대 주변의 공기는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이현은 그 모든 공격을 유려하게 피하고 흘려보냈다. 마치 거대한 폭풍 속에서 한 척의 나룻배가 흔들리면서도 가라앉지 않는 것처럼.

    이현의 몸은 마치 춤을 추는 듯했다. 그의 발은 지면을 거의 밟지 않는 듯 가벼웠고, 그의 손은 묵천의 공격을 잡아채고, 비틀고, 밀어냈다. 묵천의 기세등등한 공격은 번번이 허공을 가르거나 이현의 부드러운 방어에 흡수되어 힘을 잃었다.

    점차 묵천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무리 맹공을 퍼부어도 상대에게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는 상황에 초조함이 피어올랐다.
    “죽어라! 흑룡파천장(黑龍破天掌)!”
    묵천이 마침내 비장의 무공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거대한 용의 형상을 취하며 이현을 덮쳤다. 그 파괴적인 힘은 비무대 일부를 부서뜨릴 만큼 강력했다.

    이현의 얼굴에 비로소 진지한 기색이 스쳤다. 그는 깊은 숨을 내쉬며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았다. 그의 몸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망자들로 오염된 세상 속에서 찾기 힘든, 순수하고 청명한 기운이었다.
    “흐름은 강하지만, 꺾이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이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그의 몸이 마치 거대한 연꽃이 피어나듯 천천히, 그러나 힘차게 움직였다. 그의 두 손이 마치 강물을 가르듯 묵천의 검은 용을 받아냈다.

    쉬이이익! 꽈아앙!
    검은 기운과 푸른 기운이 충돌하며 비무대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묵천의 흑룡이 이현의 푸른 기운에 휘감겨 들었다. 이현은 묵천의 파괴적인 힘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내지 않고, 오히려 그 힘의 흐름을 비틀고 역이용했다. 묵천의 힘이 그의 손바닥을 통해 흡수되는가 싶더니,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묵천 자신에게로 되돌아갔다.

    “이… 이럴 수가!”
    묵천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이 발산한 강력한 기운이 역류하여 자신에게로 쏟아져 들어오자, 그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악!
    묵천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흩어지며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는 비무대 바닥에 쓰러져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에 큰 상처는 없었지만, 내공(內功)이 흐트러지고 기세가 완전히 꺾인 상태였다.

    비무대 위에는 이현 홀로 고요히 서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푸른 기운의 잔흔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천검곡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이번 침묵은 경악과 전율로 가득 찬 것이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 맨손의 무명 고수가 무림의 맹주 자리에 올랐다.

    천지회의 늙은 고수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의 눈빛에는 깊은 깨달음과 함께 기대감이 서려 있었다.
    “이현, 그대가 승리했다. 구세지쟁의 진정한 승리자이며, 무림의 새로운 맹주다.”
    노인이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하자, 천검곡에 모인 모든 무인들이 이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강호의 오랜 전통이었다. 맹주에게 복종을 맹세하는 의식.

    이현은 조용히 비무대를 내려와 천지회 노인들 앞에 섰다.
    “소인은 그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더 많은 이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싸웠을 뿐입니다. 맹주의 자리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이는 그대의 의지로 거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하늘이 정한 바이며, 인류의 운명이 그대에게 달렸다.”
    노인의 말에 이현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이제 세상의 무게가 내려앉아 있었다.

    “맹주님.”
    한 노인이 이현을 향해 손짓했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거대한 비석이 있었다. 고대의 문자로 빼곡히 새겨진 비석.
    “망자들은 단순한 역병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재앙의 서막일 뿐. 인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잊었던 힘을 다시 찾아야만 한다. 이 비석에는 그 열쇠가 잠들어 있다. 오직 순수한 내공과 의지를 가진 자만이 그 비밀을 열 수 있지. 그대가 바로 그 열쇠가 될 것이다.”

    이현은 비석을 응시했다. 그의 어깨는 무거웠지만, 그의 등은 꼿꼿했다.
    그는 이 순간, 무림의 맹주가 된 것이 아니었다. 망자들이 들끓는 세상에서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짊어진 영웅이 된 것이었다.
    밤하늘에는 별 하나 없이 먹구름이 가득했지만, 천검곡의 사람들은 이현이라는 작은 불씨가 언젠가 세상을 밝힐 거대한 불꽃이 되리라 믿기 시작했다.

    인류의 절망은 깊었지만, 새로운 희망이 피어오르는 순간이었다.
    이현은 고요한 눈빛으로 망자들의 세상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아직 알려지지 않은, 더 큰 위협과 함께 구원의 길이 동시에 놓여 있을 터였다. 이제 그의 손에 모든 것이 달렸다. 망자의 시대, 무림의 맹주가 된 이현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 스팀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도시의 심장이 울리는 소리가 아스팔트 바닥을 타고 발끝까지 전해져 왔다.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음, 증기압이 배출되는 쉬익거리는 숨소리, 그리고 어딘가에서 쇠망치로 단련되는 금속의 비명까지. 연무 도시 베레타는 언제나 그렇게 살아 숨 쉬는 거대한 기계 괴물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급 주거지이자 상류층의 유흥가인 ‘황금 톱니 지구’는 증기와 기름, 그리고 쾌락의 냄새로 범벅되어 있었다.

    카이는 어둠 속에 잠긴 비좁은 골목길을 스치는 바람처럼 미끄러져 들어갔다. 낡은 작업복 위로 두터운 방풍 코트를 걸치고, 얼굴의 절반을 가린 방진 마스크 너머로 예리한 눈동자만이 빛나고 있었다. 그의 손목시계는 단순한 시간을 알리는 기계가 아니었다. 십여 개의 정교한 기어가 맞물려 돌아가며, 골목길 저편에서 들려오는 순찰 로봇의 발소리 패턴을 분석하고 있었다. 투박한 외형과 달리 섬세한 움직임이 요구되는 작업이었다.

    “젠장, 3번 로봇의 순찰 간격이 17초에서 18.5초로 늘었어.”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카이는 주머니에서 놋쇠로 된 작은 만능 드라이버를 꺼내 시계의 측면 나사를 조였다. 미세한 클릭 소리와 함께 시계판의 숫자가 재조정되고, 그제야 0.5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정확한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17.8초. 이제 완벽했다.

    그의 시선은 한 건물, 에녹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거대한 강철 정문을 향했다. 번쩍이는 황동 장식과 육중한 철문은 그 자체로 권력과 부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옛 친구, 에녹이 있었다.

    3년 전, 그날을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차갑게 식어버릴 것만 같았다. 둘이 함께 밤을 새워가며 완성했던 ‘무중력 제어 엔진’의 설계도. 세상의 흐름을 바꿀 혁신적인 기술이었다. 하지만 그 영광은 카이가 아닌 에녹의 것이 되었다. 동업자라는 이름 아래, 그는 카이의 모든 연구 성과를 가로챘고, 심지어는 기밀 유출이라는 누명까지 씌워 지하 감옥으로 던져버렸다. 지하의 축축한 공기 속에서 카이는 뼈저리게 깨달았다. 우정이란, 탐욕 앞에서는 한낱 부서지는 유리 조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쉬이이익, 쿵. 쉬이이익, 쿵.*

    순찰 로봇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카이는 지체 없이 움직였다. 그의 등 뒤에 숨겨진 특수 제작된 ‘증기 추진 갈고리’가 쉬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어둠 속으로 뻗어 나갔다. 쇠줄 끝의 갈고리가 건물 외벽의 정교한 장식물에 정확히 박혔다. 드르륵, 팽팽하게 당겨지는 쇠줄의 진동이 손끝까지 전해졌다.

    “이 빌어먹을 장식물도 네놈의 허영심만큼이나 쓸모가 있군.”

    카이는 중얼거리며 몸을 공중으로 날렸다. 증기압이 등 뒤의 추진기를 밀어 올리자, 그는 마치 거미처럼 가파른 벽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수놓은 무수한 톱니바퀴 문양의 조명들이 그의 움직임을 잠시 비췄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목표는 건물 3층에 위치한 작은 환기구였다. 에녹이 가장 아끼는 보물들, 그 중에서도 특히 ‘푸른 심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희귀한 광물 샘플이 보관된 비밀 연구실과 연결된 통로였다.

    환기구 철망 앞. 카이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철망을 두드렸다. 미세한 진동이 그의 귀에 닿았다. 일반적인 강철이 아니었다. 특수 합금. 에녹이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해둘 터였다. 하지만 카이에게는 모든 것이 계산되어 있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얇고 긴 공구 – ‘금고 따개’라는 별명이 붙은 –를 꺼냈다. 끝부분은 마치 의료용 메스처럼 날카로웠지만, 미세한 증기압을 이용해 진동을 만들어내는 기능이 내장되어 있었다. 철망의 볼트 이음새에 공구의 끝을 갖다 대자, 미세한 진동음과 함께 볼트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지이잉… 지이잉…*

    수십 개의 볼트를 풀어내는데 걸린 시간은 단 3분. 숙련된 기술자의 솜씨였다. 철망이 조용히 떨어져 나가자, 환기구 내부의 어둡고 답답한 공간이 드러났다. 먼지와 기름때가 퀴퀴한 냄새를 풍겼다. 카이는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내부는 예상대로 좁았다. 강철 덕트 내부를 기어가는 동안, 그의 코트가 벽면에 쓸리며 먼지를 일으켰다. 이따금씩 덕트 내부를 오가는 작은 청소 로봇들을 피하며, 그는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수많은 가지들로 뻗어 나간 덕트 통로 중에서, 에녹의 연구실로 향하는 정확한 길을 아는 자는 세상에 몇 안 될 터였다. 하지만 카이는 달랐다. 이 건물의 모든 배관, 모든 전선, 심지어는 공기 흐름까지, 그는 에녹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건물 설계에 참여했던 사람이 바로 그였으니까.

    마침내, 목적지였다. 덕트 끝에 연결된 얇은 금속판 아래로, 연구실 내부의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금속판을 들어 올리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과거의 자신과 에녹이 함께 꾸었던 꿈의 공간이, 철저히 에녹만의 왕국이 되어버린 풍경이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으스스한 푸른빛을 내뿜는 거대한 광물 샘플, ‘푸른 심장’이 유리 케이스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수많은 설계도와 알 수 없는 장치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에녹은 분명 이 광물의 에너지를 이용하여 자신의 ‘무중력 엔진’을 더욱 완벽하게 만들려 하고 있을 터였다.

    그때, 연구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이는 재빨리 몸을 숨겼다.

    “에녹 님, 자정을 넘겼습니다. 휴식을 취하시는 게…”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에녹의 오른팔이라 불리는 거구의 경비대장, 라그나였다. 그의 얼굴에는 온통 흉터가 가득했고, 한쪽 팔은 증기 동력으로 움직이는 의수였다.

    에녹의 나지막하지만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다, 라그나. 곧 있으면 마지막 단계에 돌입한다. 이 ‘푸른 심장’의 에너지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면, 베레타의 모든 하늘을 우리 가문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거야.”

    카이의 심장이 차갑게 수축했다. 그의 예상대로였다. 에녹은 자신과의 약속, 세상을 위한 기술이라는 대의를 짓밟고, 오직 개인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이 모든 기술을 독점하려 했다.

    “하지만 에녹 님, 최근 주변에서 이상한 징후들이 포착되고 있습니다. 몇몇 하급 연구원들이 사라졌고, 외곽 기계 공장에서는 정체불명의 소형 증기 로봇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혹시… 그 자일까요?” 라그나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에녹은 조용히 웃었다.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웃음이었다.
    “카이? 하! 그놈은 3년 전, 그 빌어먹을 감옥에서 영원히 썩어 없어졌을 거야. 설령 살아남았다고 한들, 그의 기술력만으로는 우리 가문의 철통같은 보안을 뚫을 수 없어. 그리고 사라진 연구원들은 그저 불필요한 존재들이었을 뿐이다. 신경 쓸 필요 없어.”

    카이의 숨이 턱 막혔다. 에녹은 아직도 자신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리고, 불필요한 존재… 카이는 바로 그 ‘불필요한 존재’가 되어 수많은 밤을 증오와 복수심으로 지새웠다.

    ‘내가 불필요하다고? 네놈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데 필요충분조건이 될 텐데.’

    라그나가 연구실을 떠나고, 에녹이 다시 ‘푸른 심장’ 앞에 섰을 때, 카이는 기회를 엿보았다. 그가 계획한 첫 번째 복수는 ‘푸른 심장’ 그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녹의 자존심이자, 그가 가장 신뢰하는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것이었다.

    카이는 주머니에서 작은 기폭 장치가 달린 증기 캡슐을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이 캡슐은 특정 주파수를 발생시켜 기계 시스템의 오작동을 유발하는 장치였다. 그는 캡슐을 손에 쥐고 조용히 대기했다. 에녹이 책상에 놓인 커피잔을 들고 등을 돌리는 찰나의 순간, 카이는 캡슐을 공중으로 던졌다.

    *쉬익!*

    작은 캡슐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정교하게 천장의 환기구 덮개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에녹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카이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완벽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에녹 가문의 대저택에 비상이 걸렸다. 밤새도록 저택의 핵심 보안 시스템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마비되었고, 모든 경비 로봇들이 일시적으로 오작동을 일으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재산상의 피해는 없었지만, 이 철통같은 보안이 뚫렸다는 사실 자체에 에녹은 격노했다.

    에녹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연구실로 향했다. 그가 아끼는 ‘푸른 심장’이 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유리 케이스 속에서 푸른빛을 내뿜는 광물을 확인하고 나서야 에녹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광물 옆에 놓인 작은 조각상으로 옮겨지는 순간,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와 카이가 함께 작업하던 시절, 처음으로 성공적인 무중력 엔진 모형을 만들었을 때, 카이가 기념으로 직접 깎아 만든 작은 톱니바퀴 조각상이었다. 아무런 의미 없는 조각품이라며, 에녹 자신이 직접 쓰레기통에 버렸던 물건이었다.

    그리고 그 톱니바퀴 조각상 위에, 작은 종이쪽지가 놓여 있었다. 에녹은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집어 들었다. 그 위에는 단 한 문장이, 낡고 잊혀졌을 법한 잉크로 쓰여 있었다.

    『에녹,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부터 부서뜨려 주마.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쪽지에는 카이의 서명 대신, 그들 둘만의 은밀한 표식, 망치와 톱니바퀴가 교차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에녹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가득했다.
    “카이… 네 이놈…!”

    그의 외침은 거대한 저택의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울리는 소리뿐이었다. 연무 도시 베레타의 하늘 아래, 잊혀진 줄 알았던 복수의 톱니바퀴가, 이제 막 첫 바퀴를 돌리기 시작한 참이었다.

  • 심리 스릴러 독립적인 단편 소설

    도시의 불빛은 밤을 집어삼키는 거대한 괴수 같았다. 그 빛의 잔해 속에서, 한 남자가 희미한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지후는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번쩍이는 고층 빌딩들을 응시했다. 그중 가장 높고 화려한 건물, 그 꼭대기 층의 불빛 하나가 유난히 그의 눈을 찔렀다. 태준의 사무실이었다.

    한때는 같은 꿈을 꾸었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 헤매던 두 젊은이는 서로의 등을 기꺼이 기댔다. 지후의 머릿속에서 샘솟는 기발한 아이디어와 태준의 거침없는 추진력이 만나면 세상도 뒤집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자라, 둘만의 거대한 숲을 이루는 듯했다.

    “지후야, 이건 혁명이야. 네 아이디어는 세상을 바꿀 거야.” 태준은 지후의 어깨를 붙잡고 흥분해서 말했다. 그의 눈은 언제나처럼 열정으로 반짝였다. 그 눈빛에 지후는 매번 홀린 듯이 더 깊은 곳까지 자신을 내보였다. 밤샘 작업은 일상이었고, 컵라면과 커피로 버티는 나날이 그들에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공유했다. 미래도, 꿈도, 심지어 서로의 연애사까지도.

    그들의 공동 프로젝트가 마침내 빛을 보는 듯했다. 투자자들의 관심이 쏟아졌고, 계약 직전까지 갔다. 지후는 생애 최고의 순간이 다가왔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 순간, 태준은 지후의 뒤통수를 갈랐다.

    “죄송합니다, 지후 씨. 저희는 태준 대표님의 단독 아이디어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말 한마디가 지후의 세상을 산산조각 냈다. 태준은 지후가 모든 자료를 정리해 넘겨준 파일을 자신의 이름으로 바꾸어 제출했고, 치밀하게 준비된 거짓 증언들로 지후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지후는 졸지에 아이디어를 훔치려던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낙인찍혔다. 오랜 기간 쌓아온 신뢰는 한순간에 무너졌고, 그의 이름은 업계에서 완전히 매장됐다. 태준은 지후의 아이디어를 발판 삼아 승승장구했고, 지후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한동안 지후는 폐인처럼 살았다. 술에 절어 의미 없는 날들을 보냈고, 눈을 뜨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매일 밤, 태준의 웃는 얼굴이 악몽처럼 그를 쫓아다녔다. 죽고 싶었다. 하지만 죽음 앞에서, 문득 깨달았다. 죽는 것보다, 죽이는 것이 낫다는 것을.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었다. 태준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그가 지후에게서 앗아간 그 모든 것을, 똑같이 앗아와야 했다. 아니, 그보다 더 처절하게.

    그때부터 지후는 그림자가 되었다. 태준의 주변을 맴돌며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태준은 성공의 단맛에 취해 조금씩 방심하고 있었다. 그의 허세와 탐욕, 숨겨진 약점들이 지후의 눈에는 마치 거대한 설계도의 빈틈처럼 보였다. 지후는 더 이상 옛날의 순진한 지후가 아니었다. 그의 눈에는 복수심이라는 차가운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첫 번째 복수는 태준의 가장 큰 자랑이었던 프로젝트에서 시작되었다. 지후는 완벽한 전문가처럼 위장하여 태준의 회사와 거래하는 하청업체에 잠입했다. 그리고 아주 작은, 그러나 치명적인 오류들을 심어 넣었다. 눈에 띄지 않는 코드 한 줄, 자칫하면 간과할 수 있는 재료의 미세한 변경. 그 모든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거대한 나비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이게 뭐야? 왜 자꾸 시스템에 에러가 나는 거야?” 태준의 고함 소리가 회사를 뒤흔들었다. 화면 속 지후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이제 시작일 뿐이야, 태준아.”

    초반에는 사소한 문제들이었다. 작은 손실, 납기 지연. 하지만 점차 문제가 커져갔다. 핵심 기술에서 오류가 발생하고, 제품의 불량률이 치솟았다. 투자자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태준은 점점 예민해졌다.

    “도대체 누가! 누가 내 뒤통수를 치는 거야!” 태준은 회의실에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의 얼굴은 핏발이 서 있었다. 지후는 그의 불안정한 모습을 보며 심장이 저릿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피 끓는 복수심과 함께, 묘한 쾌감이 뒤섞였다.

    지후는 태준의 개인적인 삶도 파고들었다. 태준의 아내는 완벽한 커리어 우먼이었다. 지후는 익명의 제보자로 위장하여 아내에게 태준의 은밀한 사생활에 대한 조작된 정보를 흘렸다. 증거는 없었다. 그저 작은 의심의 씨앗을 심었을 뿐이었다.

    “당신 요즘 이상해. 누구랑 통화하는 거야?”
    “아니야, 여보. 오해하지 마!”
    태준의 집에서는 잦은 부부싸움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는 지후에게는 달콤한 자장가 같았다. 지후는 태준의 차에 몰래 녹음 장치를 심어 두기도 했다. 태준은 점점 의심의 늪에 빠져들었다. 동료들을 불신하고, 아내를 의심했다. 그의 눈빛은 광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한 방은 태준의 가장 큰 프로젝트 발표회 날이었다. 지후는 태준의 PT 자료에 아주 미묘한 조작을 가했다. 수치 하나를 바꾸고, 그래프의 오차 범위를 교묘하게 뒤틀었다. 언뜻 보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 작은 조작은 전체 프로젝트의 신뢰도를 바닥으로 끌어내리기에 충분했다.

    “태준 대표님, 이 수치는 좀 이상합니다만.” 한 투자자가 날카롭게 지적했다.
    태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자신의 자료가 완벽하다고 확신했기에,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해명하려 했지만, 그의 말은 점점 더 설득력을 잃어갔다. 지후가 심어놓은 작은 오류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럴 리가 없어… 누가, 누가 날 함정에 빠뜨린 거야!” 태준은 마치 발버둥 치는 물고기처럼 허우적거렸다. 발표회는 아수라장이 되었고, 태준의 회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언론은 연일 태준의 실패를 보도했고, 투자자들은 등을 돌렸다.

    태준은 사무실에 홀로 앉아 있었다. 온 사방이 어둠이었다. 창밖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빛났지만, 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술병을 기울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문득, 그의 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준아… 기억나? 우리가 같이 만들었던 그 꿈.”
    섬뜩한 목소리였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태준은 몸을 덜덜 떨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그때, 책상 위의 모니터가 저절로 켜지더니, 흐릿한 옛날 사진 한 장이 나타났다. 해맑게 웃고 있는 젊은 태준과 지후의 모습이었다. 태준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네가 앗아간 건… 내 꿈만이 아니었어. 내 인생이었다.”
    목소리는 더욱 선명해졌다. 태준은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나동그라졌다.
    “지후! 지후야! 네가… 네가 살아있었어?”
    그때, 모니터 속 지후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가고, 눈은 시퍼런 불꽃을 뿜어냈다.

    “나는 죽지 않았어, 태준아. 네가 나를 죽이려 했을 뿐.”
    사무실의 불이 일제히 꺼지고, 다시 켜지기를 반복했다. 깜빡이는 불빛 사이로 지후의 그림자가 언뜻언뜻 비치는 것 같았다. 태준은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질렀다.
    “네가 왜 나한테 이래! 난 그냥… 네 아이디어를 조금 빌렸을 뿐이야!”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그의 뇌리에 번개처럼 스치는 깨달음이 있었다. 이 모든 불행이, 어쩌면 지후의 복수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직감.

    “빌렸다고? 네가 훔쳐 간 내 인생을… 과연 빌렸다고 할 수 있을까?”
    목소리는 이제 태준의 바로 옆에서 들리는 듯했다. 태준은 두 손으로 귀를 막고 흐느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명예, 재산, 가족, 그리고 마지막 남은 그의 정신까지도.

    “이제 알겠어? 이 지옥이, 네가 나에게 선물했던 그 지옥의 맛이야.”

    지후는 태준의 사무실 건너편 빌딩 옥상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태준의 흐느낌, 그의 절규, 그의 무너지는 모습이 지후의 귀에 똑똑히 들려왔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의 머리칼을 스쳤다.

    복수는 끝났다.
    태준은 폐인이 되어 더 이상 일어서지 못할 것이었다. 지후는 그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후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만족감도, 기쁨도 없었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폐허처럼, 공허만이 가득했다. 그의 손에 남은 것은 복수라는 이름의 차가운 재뿐이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옥상을 내려왔다. 밤은 여전히 깊었고, 도시는 여전히 시끄러웠다. 하지만 지후의 세상은 영원히 침묵 속에 갇힌 듯했다. 그는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복수의 끝에서, 그는 자신마저도 잃어버린 듯했다.

  • 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야행(夜行) – 1304호의 그림자

    밤 11시, 이지한은 지친 몸을 이끌고 13층 자신의 아파트 1304호 문을 열었다. 삭막한 복도를 지나 익숙한 공간으로 들어서자마자, 어깨를 짓누르던 하루의 무게가 일순간 덜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안심도 잠시, 묘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흘렀다. 분명 보일러를 약하게 틀어두고 나왔는데도 집안 공기는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젠장, 또 보일러 고장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현관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소리와 함께 거실의 메인 등이 켜졌다. 익숙한 풍경. 창문은 굳게 닫혀있고, 거실 테이블 위에는 어젯밤 먹다 남은 과자 봉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그의 일상 공간. 하지만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낯선 기운이 감돌았다. 마치 누군가 자신의 부재 중에 이곳에 침입해 흔적을 남긴 듯한 불쾌감이었다.

    지한은 피곤한 한숨을 내쉬며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퇴근하면 곧장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푹 자는 것이 유일한 낙인데, 며칠 전부터 이런 불청객 같은 기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착각이겠거니 했다. 고층이라 바람이 샐 리 없는데도 문틈에서 스며드는 듯한 냉기, 아무도 없는 밤에 복도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발소리, 전원이 꺼진 TV 화면에서 스치는 시커먼 그림자 같은 것들. 모두 피로와 스트레스 탓으로 돌렸다.

    주방으로 가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병을 꺼냈다. 컵에 물을 따르는 순간,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식기 건조대에 놓여있던 젓가락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런….”

    지한은 작게 중얼거리며 허리를 숙였다. 젓가락을 주워 다시 건조대에 올려놓았다. 너무 바짝 붙어있어서 떨어졌나? 평소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러다 편집증 환자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가운을 걸쳤다. 개운해진 기분으로 침대에 몸을 던지려는데, 거실에서 옅은 ‘스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발을 끄는 듯한 소리.

    “누구세요?”

    지한은 무심코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거실 창문 커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피로가 가시고 정신이 맑아지자, 오감이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섰다.

    어둠이 드리운 거실은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불빛이 촘촘히 박혀 빛나고 있었다. 13층 높이에서 보는 야경은 언제나 아름다웠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차갑고 섬뜩하게 느껴졌다.

    지한은 커튼이 흔들렸던 곳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바람도 없었고, 창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었다. 그는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미쳐가고 있나….”

    그때였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커피잔이 아주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들린 듯 공중으로 떠올랐다.

    지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숨이 턱 막혔다. ‘아니, 이건….’

    커피잔은 잠시 공중에 멈춰 서 있는가 싶더니, 이내 거실 바닥으로 ‘쨍그랑!’ 하고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뜨거웠던 물이 쏟아지며 희뿌연 김이 피어올랐다.

    지한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널뛰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기이한 현상에 그의 이성은 마비되었다. 이건 꿈도, 착각도 아니었다. 명백한 현실이었다.

    그 순간, 집안의 모든 전등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깜빡이기 시작했다. 밝았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며 거실 전체를 기괴한 스트로보 조명 아래 놓았다. 동시에 냉기가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며 지한의 몸을 꿰뚫었다. 피부에 소름이 돋고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음습하고 끈적한 냉기였다.

    어둠이 드리울 때마다, 지한의 시야에 뭔가가 스쳤다. 희미하고 흐릿한 형체. 마치 검은 연기가 사람의 형상을 흉내 낸 듯한. 그것은 거실 한가운데, 커피잔이 깨진 자리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너… 너 뭐야…!”

    지한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그의 목소리는 두려움에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끼이이이익…’

    오래된 나무 문이 닫히는 듯한 소리가 그의 침실에서 들려왔다. 잠시 후, 지한의 침실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경첩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그리고 침실 문틈으로,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기어나왔다. 그것은 형태가 불분명했지만, 기이하게도 사람의 팔다리처럼 보이는 잔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림자는 바닥을 기어오는 듯 스르륵 움직이며 지한을 향해 다가왔다.

    지한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그림자는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그리고 그림자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머릿속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그의 비명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혼란스러운 아우성이었다.

    동시에, 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며 혈관을 타고 뜨거운 피가 맹렬히 돌았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강력하고 낯선 힘이었다. 몸을 짓누르던 냉기가 그 뜨거운 기운과 부딪히며 ‘쉬이익’ 소리를 내는 듯했다.

    그림자는 지한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에 검고 깊은 심연이 비쳤다. 그리고 심연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두 개의 붉은 점이 나타났다. 마치 분노에 찬 눈동자처럼.

    ‘내… 놔….’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그러나 명확히 귀에 박히는 목소리가 그의 뇌리를 직접 강타했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질렀다. 압도적인 공포 속에서, 지한은 필사적으로 버텼다. 가슴속 뜨거운 기운이 마치 외부의 침입자를 막아내려는 듯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의 심장이 ‘쿵, 쿵, 쿵’ 하고 고막을 울릴 정도로 크게 울렸다.

    순간, 지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릴 적, 분명 꿈이라고만 생각했던, 낡은 도포를 입은 백발노인이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손을 잡고 무언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노인의 손에서, 그의 손으로 흘러들어왔던 뜨겁고 강렬했던 어떤 기운. 그 기억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그의 의식을 흔들었다.

    “꺼져…!”

    지한은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의 외침과 함께 가슴에서 솟구치던 뜨거운 기운이 마치 파도처럼 터져 나갔다. ‘화악!’ 하는 소리와 함께, 검은 그림자는 잠시 휘청이더니 뒤로 물러섰다. 붉은 눈동자도 희미해졌다.

    그림자는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대신, 거실의 모든 전등이 동시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완전한 어둠이 지한을 덮쳤다. 도시의 불빛만이 창문 너머에서 흔들릴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지한은 비틀거리며 벽에 기댔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온몸을 짓누르던 냉기와 알 수 없는 압박감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귀에 명확하게 들려왔다.

    ‘기다려라… 나의… 그릇….’

    소리는 그의 귓속을 파고들어 뇌리에서 메아리쳤다. 공포가 다시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번에는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자신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미지의 존재와 엮여버렸다는 섬뜩한 자각이었다.

    지한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바라봤다. 방금 전 솟구쳤던 그 뜨거운 기운의 잔열이 아직도 손끝에서 아릿하게 남아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던 평범한 일상이, 방금 이 아파트 1304호에서 산산조각 났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자신 안에,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어떤 ‘힘’이 깨어나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이 모든 기이한 현상이, 어쩌면 자신으로부터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의 아파트, 1304호는 더 이상 평범한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알 수 없는 존재가 드리운 그림자 아래 놓인, 거대한 미스터리의 시작점이었다.

    밤은 길었다. 그리고 지한의 악몽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27화: 흑룡의 발톱, 섬광의 칼날

    웅장한 천운각의 중심, 거대한 원형 투기장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감돌았다. 고대의 기운이 현대의 빌딩 숲 한가운데 박혀버린 듯, 이곳은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한 이질적인 공간이었다. 수십 층 높이의 관객석은 이미 만원이었지만, 그 누구도 감히 기침 한번 하지 못했다. 오직 경기장 한가운데 선 두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殺氣)와 기세만이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한쪽에는 흑색 도포 자락이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에서 미세하게 펄럭이는 사내가 서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 날카로운 눈매는 맹수처럼 번뜩였고, 단단하게 다져진 근육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묵직한 압박감을 발산했다. 강림, 흑룡무의 계승자. 그는 천하를 뒤흔들 무(武)의 재림을 꿈꾸는 젊은 광룡(狂龍)이었다. 그의 시선은 마치 상대의 영혼까지 꿰뚫어 볼 듯 강렬했다.

    그의 맞은편에는 한없이 여리고 고요한 모습의 여인이 서 있었다. 순백의 도복이 그녀의 가냘픈 몸을 감싸고 있었으나, 허리에 찬 한 자루 검에서는 서릿발 같은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서휘, 섬광검법의 달인. 그녀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찰나의 순간에 모든 것을 베어낼 번개와 같은 살기가 응축되어 있었다.

    결승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 이 두 사람 중 오직 한 명만이 천하의 운명을 건 최종 결전에 참여할 수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군.”

    강림이 먼저 침묵을 깼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지만, 투기장 전체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대답할 필요 없다. 어차피 이 자리에서 쓰러질 자에게는.”

    서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숨을 고르며 강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알았다. 이 사내는 분명 지금까지 만났던 모든 강적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것을.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검객에게 있어 불안은 죽음과 동의어였다.

    심판의 신호는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의 기세가 정점에 달했을 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움직였다.

    콰아앙!

    강림의 발이 투기장의 단단한 바닥을 부수며 폭발적인 힘을 터뜨렸다. 한 걸음 만에 수십 미터를 주파한 그의 주먹이 섬광처럼 서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단순한 주먹질이 아니었다. 주먹을 감싼 검은 기운은 마치 살아있는 흑룡의 머리처럼 보였고, 그 주변의 공기마저 압축되어 폭음과 함께 비명을 질렀다.

    “흑룡파천권(黑龍破天拳)!”

    서휘의 눈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강림의 주먹을 쫓았다. 그녀의 몸이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유려하게 움직였다. 강림의 주먹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뿜어져 나온 충격파가 뒤편의 강철 기둥을 박살 내는 순간, 그녀는 이미 주먹의 궤적을 벗어나 강림의 옆구리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까지 파고들었다.

    쉬이이잉!

    허리춤에서 뽑혀 나온 서휘의 검은 햇빛 한 조각 없는 투기장을 섬광으로 물들였다. 칼날에 실린 냉기는 강림의 피부에 소름 돋는 감각을 선사했다. 그녀의 검은 마치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듯, 눈에 보이는 순간 이미 강림의 옆구리를 노리고 있었다. 섬광검법, 그 이름 그대로 번개처럼 빠르고 치명적인 검술이었다.

    강림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이 정도로 빠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더욱 빨랐다. 옆구리에 꽂히는 검을 온몸의 근육을 뒤틀어 간발의 차이로 비켜냈다. ‘챙!’ 하는 맑은 금속음과 함께 검날이 그의 흑색 도포를 스쳤고, 강림의 옆구리에서는 한 줄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얕은 상처였지만, 첫 공격에서 피를 보았다는 사실은 강림의 자존심을 긁었다.

    “호오….”

    강림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이 이전보다 더욱 이글거렸다.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는 오히려 그의 투지를 불태우는 촉매가 되었다.

    “제법이군. 하지만 이걸로 날 쓰러뜨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강림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용솟음쳤다. 그의 피부 위로 검은 비늘이 돋아나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투기장 바닥의 파편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검은 기운에 닿자마자 미세한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검은 아우라, 흑룡의 기운 그 자체였다.

    “이제부터 진짜다, 여자.”

    강림의 목소리가 흑룡의 포효처럼 투기장을 진동시켰다. 그는 팔을 크게 휘둘러 옆구리의 피를 닦아냈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천지를 뒤흔들 듯한 파괴적인 기세가 실렸다.

    서휘는 묵묵히 검을 고쳐 잡았다. 검 끝이 강림을 향했고, 그녀의 눈빛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녀는 알았다. 지금부터는 단순한 기술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생사를 건 기 싸움, 영혼을 건 격돌의 시작이었다. 그녀의 가슴 속 심장이 고요하지만 격렬하게 울리고 있었다.

    “…내 검은, 죽음을 부른다.”

    서휘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섬뜩하게 울렸다. 그녀의 검 끝에서 미세한 빛의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투명한 검날이 마치 주변의 빛을 흡수하는 듯 일렁였다.

    콰아아앙!

    강림이 다시 한번 바닥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주먹이 아니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거대한 흑룡의 형상을 이루며 서휘를 덮쳐왔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였다. 흑룡무의 진정한 위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흑룡멸파진(黑龍滅破陣)!”

    투기장을 가득 채운 흑룡의 기운에 관객석의 무림 고수들조차 숨을 헐떡였다. 저 거대한 파괴력을 맨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존재가 과연 있을까?

    하지만 서휘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눈동자에 섬광이 번뜩였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검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의 파동이 거대한 소용돌이를 이루며 강림의 흑룡과 정면으로 맞섰다.

    “섬광뇌격참(閃光雷擊斬)!”

    하얀 섬광이 흑룡의 어둠을 갈랐다. 마치 밤하늘에 떨어진 한 줄기 번개처럼, 서휘의 검은 모든 파괴력을 응축하여 흑룡의 정수리를 노렸다.

    쿠구구궁!

    두 거대한 기운이 충돌하자 투기장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빛과 어둠이 뒤섞여 폭발했다. 먼지와 파편이 뒤섞여 시야를 가렸고, 관객들은 두려움에 질린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잠시 후, 굉음이 멎고 먼지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그들이 다시 눈을 떴을 때, 투기장 한가운데에는 섬광이 사라진 검을 든 서휘가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녀의 도복 곳곳은 찢어지고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앞, 거대한 바닥이 움푹 파인 자리에는…

    강림이 무릎을 꿇은 채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온몸을 감쌌던 흑룡의 기운은 산산이 흩어졌고, 갑옷처럼 단단하던 그의 도포는 너덜너덜하게 찢겨 있었다. 얼굴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그의 턱에는 한 줄기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적.

    관객석에서는 아무도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 방금 전의 공격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지, 그리고 두 사람의 실력이 얼마나 막상막하였는지 모두가 절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강림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키려 애썼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죽지 않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지만,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서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이 다시 한번 미약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빛은 희미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결의는 결코 희미하지 않았다. 그녀는 알았다. 상대가 완전히 쓰러지기 전까지는 승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마지막이다.”

    그리고 그녀의 검 끝이 다시 한번, 섬광처럼 번뜩였다.

  • 마법소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둑한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도시, 낡은 아파트 단지 틈새에서 희미한 불빛들이 깜빡였다. 그중 한 불빛 아래, 열아홉 살 유리는 책상에 엎드린 채 깊은 숨을 내쉬었다. 시험 기간은 끝났지만, 늘 그렇듯 엄마는 야근이었다. 빈집의 고요함은 익숙했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평소와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

    “후우…”

    피곤한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킨 유리는 삐걱거리는 의자 소리에 살짝 몸을 움츠렸다. 거실에서는 텔레비전이 저 혼자 켜져 있다가, 다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꺼졌다. 유리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 또 접촉 불량인가.’ 이 아파트는 지은 지 꽤 된 터라 이런 일이 잦았다.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향하던 유리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과일 접시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접시 안의 사과가 한 바퀴 빙그르르 돌더니, 이내 정지했다. 유리는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였나 싶었다.

    “내가 요즘 너무 예민한가…”

    중얼거리며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 유리컵에 물을 따랐다. 맑은 물이 컵에 찰랑이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그때, 설거지통에 놓여 있던 플라스틱 수세미가 스르륵 움직이더니, 싱크대 아래로 떨어졌다. ‘툭’ 하는 소리가 유리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

    “어어?”

    유리는 황급히 몸을 숙여 수세미를 주웠다. 아무런 바람도 없었는데, 어떻게 저게 떨어졌을까. 스멀스멀 올라오는 싸늘한 기운에 유리는 팔을 문질렀다. 다시금 부엌을 둘러봤지만,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었다.

    이상함을 뒤로하고 다시 방으로 돌아온 유리는 침대에 앉아 스마트폰을 들었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는데, 갑자기 방 안의 스탠드 등이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다다닥, 다다다닥! 마치 누군가 전원 스위치를 장난스럽게 껐다 켰다 하는 것 같았다.

    “젠장, 대체 왜 이래!”

    유리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스탠드는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순간,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전공 서적이 스르륵 밀리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소리가 꽤 컸다. 유리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었다. 이건 더 이상 착각이나 고장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분명, 뭔가 이상했다.

    유리는 숨을 죽이고 방 안을 살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창문 또한 잠겨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저기, 책상 의자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누구… 있어요?”

    겁에 질린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방 안의 온도가 급격하게 떨어지는 것을 유리는 느꼈다. 마치 한여름에 한기가 스며든 듯, 소름이 돋아났다.

    그때,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던 작은 인형이 붕 떠오르더니,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유리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려 커졌다. 거짓말처럼 인형은 공중에 멈춰서 있었다.

    “흐읍…!”

    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꿈일까? 아니, 생생한 공포가 온몸을 조여 왔다. 인형은 마치 유리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녀의 얼굴 앞에서 좌우로 흔들렸다.

    “꺄악!”

    결국, 유리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인형은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동시에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이 일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벽에 걸려있던 포스터가 너덜너덜하게 찢어지듯 펄럭였고, 책장 위의 책들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와장창!’

    유리컵이 깨지는 소리, 액자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뒤섞여 방 안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거대한 invisible 손이 모든 것을 뒤엎고 있는 것 같았다.

    유리는 침대 구석으로 몸을 웅크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제발 사라져 달라고 속으로 빌었다. 하지만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격렬해졌다.

    거대한 책장이 기우뚱거리더니, 마치 유리를 향해 쓰러지려는 듯 천천히 기울어졌다. 유리는 눈을 뜨자마자 그 광경을 목격했다. 죽음의 공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안… 안 돼…!”

    그 순간, 유리의 손목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평소 유리가 늘 착용하고 다니던, 할머니가 주신 팔찌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팔찌는 유리의 심장 박동에 맞춰 강렬하게 빛났다.

    푸른빛은 강렬한 파동을 일으키며 방 안을 휩쓸었다. 그 빛이 닿는 곳마다, 격렬하게 움직이던 물건들이 멈칫했다. 유리를 향해 쓰러지던 책장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제자리로 돌아왔다. 깨진 조각들이 바닥에서 멈췄고, 흔들리던 의자도 정지했다.

    방 안의 모든 소란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방금 전까지 요동치던 공간은 다시금 정적에 휩싸였다. 다만,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과 찢겨진 포스터만이 방금 전의 참상이 현실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유리는 팔찌를 쥔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푸른빛이 서서히 사그라들더니, 팔찌는 다시 평범한 은색 팔찌로 돌아왔다. 하지만 팔찌가 있던 자리에서는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 이건 대체… 뭐야…?”

    유리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에 대한 혼란과 두려움이 더해졌다. 아파트는 다시 고요했지만, 유리는 알고 있었다. 이 밤의 사건은, 이제 막 시작된 서막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녀의 평범했던 일상이,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 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화: 검은 천공 아래, 무림의 비원**

    천지는 침묵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침묵해야 할 모든 것이 강제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 핏빛으로 물든 노을이 희미한 잔광을 드리우는 저녁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 무림 역사상 가장 성스러운 결투장으로 칭송받던 천하봉(天下峰)의 정상은 마치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심연처럼 고요했다. 바람조차 숨을 죽인 듯,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대지는 차갑게 식어 있었고, 그 위에 선 모든 무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하운은 차가운 암석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느껴지는 것은 오직 한기뿐이었다. 단순히 기온 탓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온기를 앗아가려는 듯한, 영혼 깊숙이 파고드는 싸늘함이었다. 몇 달 전부터 무림 전역을 뒤덮기 시작한 기운이었다. 처음에는 미약했다. 굳건한 내공으로 막아낼 수 있을 정도의 이질적인 기운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기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고,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다 정신을 잃거나, 아니면 눈을 뜬 채로 미쳐갔다.

    세상 끝에서부터 밀려오는 듯한 그 기운의 근원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저, 이계의 것이라는 어렴풋한 추측만이 떠돌았다. 하늘은 점점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갔고, 이따금씩 섬뜩한 형체의 그림자들이 구름 사이를 스치듯 지나가는 것이 목격되었다. 그 존재들은 너무나 거대하고,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이성을 갉아먹는 듯했다.

    결국, 무림의 맹주를 비롯한 오대세가, 구파일방의 모든 수뇌부는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 알 수 없는 재앙을 막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이 천하제일 무술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이름하여, **’흑천무회(黑天武會)’**. 검게 물든 하늘 아래에서, 무림의 운명을 건 최후의 승자를 가리는 대회. 우승자에게는 그 어떤 명예나 부도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이계의 기운에 오염된 ‘절대 봉인석’을 다룰 수 있는 권한과, 그 봉인석을 들고 미지의 존재와 맞서 싸워야 하는 막중한 임무만이 주어질 뿐이다. 그것은 영광이 아니라, 인류를 위한 처절한 희생이었다.

    하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느 젊은 무사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깊은 피로와 함께, 형형한 칼날 같은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각 문파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개막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파의 자부심, 오대세가의 후계자들이 냉철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깨에 짊어진 가문의 명예와 인류의 운명을 동시에 느끼고 있는 듯했다. 사파의 거목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피와 광기에 물든 그들의 눈빛 속에도, 알 수 없는 공포와 함께 이 절망적인 상황을 타개하려는 비장함이 엿보였다. 심지어 오랫동안 모습을 감추었던 마교의 잔존 세력까지, 이 사상 초유의 위기 앞에서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듯, 무거운 침묵 속에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군.’

    하운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스승인 비연각(飛燕閣)의 노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진정한 고수는 자신의 두려움을 똑바로 마주하고, 그 두려움을 뛰어넘는 자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의 두려움은 단순히 패배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이해할 수 없는 공포였다.

    저 멀리, 대회가 열릴 거대한 원형 경기장의 중심에는 흑단으로 만들어진 단상이 솟아 있었다. 그 위에는 무림맹주와 오대세가의 가주들, 그리고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무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와 근심이 가득했다. 백발이 성성한 무림맹주는 평소의 위엄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그저 세월에 짓눌린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의 옆에는 거대한 검은 돌덩이가 놓여 있었다. ‘절대 봉인석’. 사람들은 그것을 그렇게 불렀다. 검은 돌덩이에서는 이따금씩 기괴한 문양들이 꿈틀거리며 빛을 발했고, 그럴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비틀리는 듯한 환영이 보였다. 저것이야말로 이계의 존재들이 이 세상에 드리운 그림자를 붙잡고 있는 마지막 보루이자, 동시에 그 그림자를 더욱 짙게 만드는 근원이었다.

    갑자기, 무림맹주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무거운 고통이 서려 있는 듯했다. 수많은 시선이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정적은 더욱 깊어져, 침을 삼키는 소리조차도 크게 들릴 것 같았다.

    “제군들.”

    맹주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속에는 무거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천하봉 정상에 모인 모든 무인들의 귓가에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 자리의 모든 이들이 알고 있을 터다. 우리 무림은 지금,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위기에 직면해 있음을.”

    그의 시선이 검붉은 하늘을 향했다. 모두의 시선 또한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하늘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섬뜩한 검은 그림자들이 춤추는 듯 흘러 다니고 있었다.

    “이계의 존재들… 우리는 그들을 이름조차 감히 붙일 수 없는 ‘심연의 존재들’이라 부른다. 그들은 태고적부터 이 세계의 틈새에 잠들어 있었고, 지금, 그 잠에서 깨어나 우리의 세상을 침범하고 있다.”

    수군거림이 터져 나오려 했지만, 맹주의 단호한 기세에 다시 잦아들었다.

    “그들의 기운은 우리의 내공을 오염시키고, 우리의 정신을 잠식하며, 우리의 육신을 비틀어 버린다. 이미 많은 동료가, 많은 백성이 그들의 손아귀에 사로잡혀 버렸다. 우리 무림의 무공은… 그들의 완전한 침략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임이 드러났다.”

    맹주의 목소리는 비탄으로 물들었다. 무림의 자부심이 철저히 짓밟힌 현실을 인정하는 고통이 역력했다.

    “하여, 우리는 마지막 해법을 찾았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비록(秘錄)에 따르면, 이계의 존재를 온전히 봉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심연의 기운’에 가장 강하게 저항하는 자의 순수한 내공을 ‘절대 봉인석’에 주입하여, 이 세상과 저 심연 사이의 틈새를 영원히 봉쇄하는 것이다.”

    맹주는 자신의 옆에 놓인 검은 봉인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거대한 돌덩이에서 다시 한번 기괴한 문양이 번뜩였다.

    “이 돌은 이계의 기운을 흡수하는 동시에, 그 기운을 제어할 수 있는 자에게는 강력한 힘을 부여한다. 하지만… 동시에 미치도록 강렬한 이계의 부식에 노출될 것이다. 단 한 명만이, 이 모든 것을 감당하고, 우리의 마지막 희망이 될 수 있다.”

    그의 시선이 다시 아래의 무인들을 향했다.

    “그 한 명을 가리기 위해, 우리는 ‘흑천무회’를 개최한다. 이 대회는 승패를 다투는 단순한 무술 대회가 아니다. 이는 우리 인류의 존망을 건, 그리고 이 세상의 운명을 결정할 마지막 의식이다.”

    하운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는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오직 맹주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을 강하게 울릴 뿐이었다.

    “승자는… 무림의 영웅으로 추앙받지 않을 것이다. 그는 단지, 가장 고통스러운 짐을 짊어진 채,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심연의 존재와 홀로 맞서야 할 운명을 부여받을 뿐이다. 이는 영광이 아니라, 희생이다.”

    무림맹주의 말은 냉혹했지만, 그 누구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맹주의 말보다 훨씬 더 잔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 이제 시작이다. 너희 중 가장 강한 자, 가장 순수한 의지를 지닌 자. 그리고 이계의 심연에 가장 깊이 저항할 수 있는 자. 세상의 모든 희망을 짊어지고, 인류의 마지막 보루가 될 자를 가려내라!”

    맹주의 외침과 동시에, 천하봉 정상의 대기가 요동쳤다. 사방에서 강력한 내공의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이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하운의 귓가에 낮고 끈적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 *그는… 너희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감히 가늠하고 있다…*
    — *모든 것은… 이미… 결정되었다…*

    속삭임은 환청처럼 사라졌지만, 하운의 등골을 차갑게 타고 올랐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경기장으로 향하는 입구를 응시했다. 이계의 기운이 더욱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이 세상은, 우리가 알던 그 세상이 아니었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하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손은 저절로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로 향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심장을 진정시키는 듯했다. 검은 천공 아래, 무림의 비원(悲願)을 짊어진 영웅들의 처절한 싸움이 이제 막 막을 올리고 있었다.

  • 이세계 전생 (Isekai) 독립적인 단편 소설

    밤 11시 37분. 지훈은 늘 그랬듯 식탁에 앉아 차가 식어버린 머그잔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서는 의미 없는 숫자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초점을 잃은 지 오래였다. 빌딩 숲의 창밖은 시커먼 먹물처럼 번져 있었고, 이따금 차 한 대가 스쳐 지나갈 때마다 어슴푸레한 불빛이 실내로 짧게 침범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삶은 딱 그 불빛만큼이나 짧고, 간헐적인 자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때였다. 쨍그랑! 맑고 날카로운 소리. 지훈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거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작은 도자기 장식품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얇은 목선을 자랑하던 백색 도자기는 산산조각이 나 파편을 흩뿌린 채였다.

    “젠장… 뭐야?”

    지훈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째서?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분명히 조금 전까지는 멀쩡하게 제자리에 있었다. 혹시 고양이라도 키웠다면 몰라도, 이 조용한 원룸에 저절로 물건이 떨어질 리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깨진 조각들을 치웠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거나, 아니면 지진의 미약한 흔들림이 있었나 싶었다. 도시의 소음과 진동은 때로 기괴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곤 하니까.

    그날 밤부터였다. 기묘한 일들이 지훈의 아파트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처음에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분명히 잠가두었던 화장실 문이 스르륵 열려 있다거나, 냉장고 문이 살짝 벌어져 냉기 섞인 김을 뿜어내고 있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지훈은 건망증이 심해졌나, 아니면 아파트가 오래되어 문짝이 헐거워졌나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따금씩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자기 집 앞에서 멈췄다가 사라지는 듯한 착각도 들었다. 옆집 사람이 지나가는 소리겠거니 했다.

    하지만 점차 그 빈도와 강도가 심해졌다.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 거실로 나갔을 때였다. 식탁 의자가 네 발 모두 들린 채로 공중에 떠 있었다. 정확히 30센티미터 정도. 지훈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다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선명한 광경이었다. 의자는 10초가량 그렇게 떠 있다가,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미쳤나… 내가 미쳤나…?”

    그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심장이 발광하듯 뛰어댔다. 분명 잠이 덜 깬 상태일 거라고, 혹은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환각을 보는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어두컴컴한 집을 뒤로한 채.

    회사에서도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는 떠 있던 의자만이 맴돌았다. 퇴근길, 그는 일부러 아파트 근처 편의점에 들러 소주 몇 병과 안주를 샀다. 술의 힘을 빌려 이 기묘한 현상들을 잊고 싶었다.

    집에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분명히 비워두었던 신발장이 신발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것도 자신의 신발이 아닌, 낯선 종류의 신발들. 낡은 구두, 검게 그을린 장화, 심지어는 이끼가 낀 듯한 샌들까지. 마치 수십 년 전에 유행했을 법한, 혹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이질적인 디자인들이었다.

    “이게 뭐야… 씨발, 이게 도대체…”

    술병을 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신발들을 발로 찼다. 신발들은 가볍게 툭, 하고 밀려났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 집 안에서 서늘한 기운이 확 풍겨 나왔다. 마치 깊은 동굴 안으로 발을 들인 것처럼, 등골이 오싹했다.

    지훈은 현관문을 쾅 닫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복도에 서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옆집 문패를 확인하고, 층수를 다시 확인했다. 맞다. 제 집이 맞다. 그는 다시 문고리를 잡았다. 안에서 누군가 문고리를 잡아당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손 안으로 스며드는 기괴한 한기.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그는 소리쳤다. 답은 없었다. 하지만 안에서 무언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끼이익. 마치 손톱으로 나무 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

    결국 그는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

    집 안은 어두웠다. 모든 전등이 꺼져 있었다. 그런데 창문 밖에서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이 평소와 달랐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줄기가 물속에 비친 것처럼 일렁거렸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텔레비전이 놓여 있었는데, 전원이 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화면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흑백 화면에 노이즈가 자글거렸다. 마치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이해할 수 없는 형체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때였다. 거실 벽면에서부터 시작된 기이한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실금 같았지만, 지훈의 눈앞에서 빠르게 굵어지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쩍, 쩍, 쩌저적! 벽지가 찢어지고 콘크리트가 부서지는 소리. 벽면의 균열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확장되었다. 그 균열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는데, 그것은 도시의 불빛과는 전혀 다른, 은은하면서도 기묘한 보라색 빛이었다.

    “뭐… 뭐야, 이게…”

    지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균열은 더욱 빠르게 번져나갔다. 벽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에서도, 천장에서도, 심지어는 식탁 위에서도 균열이 생겨나며 보라색 빛을 뿜어냈다. 집 안의 모든 사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머그잔, 책, 액자, 심지어는 오래된 서랍장까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격렬하게 진동했다. 그러나 지훈의 몸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만이 고정된 채, 미쳐 날뛰는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려줘…!”

    그는 뒤돌아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현관문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보라색 빛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거대한 균열의 소용돌이뿐이었다. 균열은 이제 집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바닥이 사라지고, 벽이 사라지고, 천장이 사라졌다. 아파트라는 물리적인 공간 자체가 찢겨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훈의 발밑에서 강력한 중력이 그를 잡아당겼다. 보라색 빛의 소용돌이가 그를 빨아들였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몸이 무언가에 짓눌리는 듯한 고통과 함께, 온몸의 세포가 비틀리는 듯한 감각이 밀려왔다. 시야가 온통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빠르게 회전하는 빛과 함께, 그의 의식 또한 희미해져 갔다.

    마지막으로 그가 인지한 것은, 아파트의 잔해가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서, 광활한 밤하늘에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 별들은 이 세계의 별들과는 달랐다. 붉고 푸른,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색채를 띠고 있었다. 거대한 은하수가 마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아래로는 인간의 눈으로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거대한 실루엣의 대륙이 펼쳐져 있었다.

    지훈은 그 이질적인 풍경에 압도당한 채, 마지막 의식을 잃어갔다.

    아파트의 폴터가이스트는, 어쩌면 단순히 그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이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향하는 길을 알리는, 찢어진 차원의 틈새에서 새어 나온 절규이자 부름이었을 것이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의 발밑에는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축축한 흙냄새가 나는 이끼 낀 땅이 느껴졌다. 그리고 머리 위로는, 아파트의 천장이 아닌, 수천 개의 낯선 별들이 미친 듯이 춤추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더 이상 도시의 아파트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