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벽 속의 속삭임**
어둠은 공기처럼 아파트 구석구석을 채웠다. 지훈은 손전등의 희미한 빛에 의지해 식탁 위에 놓인 라면 봉지를 뜯었다. 도시 전체를 집어삼킨 혼돈은 밖에서 으르렁거리는 짐승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비명으로 존재감을 과시했지만, 지훈의 세계는 이 좁은 13층 아파트 내부로 축소된 지 오래였다. 창문은 두꺼운 합판과 버려진 가구들로 꼼꼼히 막혀 있었다. 빛 한 줄기, 소리 한 점 새어 들어오지 못하게. 안전을 위해서. 고독을 위해서.
“젠장, 또 전기가 나갔네.”
중얼거림과 동시에 방금 켜졌던 거실의 작은 스탠드가 ‘팟!’ 하는 소리와 함께 꺼졌다. 지훈은 손전등을 들어 스탠드를 비췄다. 분명 멀쩡한 전구인데.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외부 전력은 언제 끊길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는 배터리와 태양열 충전기가 전부였다.
찬물을 부어놓은 라면을 휘저으며 그는 눈을 감았다. 굶어 죽지는 않을 만큼은 남아있었다. 아직은.
그때였다.
‘드드득.’
벽 속에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손전등을 벽 쪽으로 향했다. 나무 긁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가 기어가는 소리 같기도 했다. 딱딱한 발톱으로 콘크리트를 긁어대는 듯한, 신경을 곤두세우는 마찰음.
“뭐야, 쥐인가?”
이런 고층 아파트에 쥐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게다가 지난 며칠간은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는 벽에 귀를 대보았다. 소리는 잠잠해졌다. 마치 제 존재를 숨기는 양.
지훈은 찝찝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라면을 입에 밀어 넣었다. 미지근한 면발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몇 분 후, 소리가 다시 시작됐다. 이번에는 더 크게, 더 명확하게. 안방 쪽 벽에서 시작해 주방 벽을 타고 거실 쪽으로 이어졌다. 마치 벽 안쪽에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처럼.
지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전등을 든 손에 땀이 흥건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메마른 목소리가 허공에 맴돌았다.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한 곳에 멈춰서서 ‘드드득, 긁적긁적’ 하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꼭 제 존재를 알리려는 것처럼.
그는 조심스럽게 안방으로 향했다.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안방 침대 위에 놓여 있던 베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저 베개일 뿐인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분명 아침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는데.
‘쿵!’
갑자기 거실 쪽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번개처럼 몸을 돌렸다. 손전등 빛이 허공을 갈랐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작은 탁자 위에서, 그가 아끼던 도자기 컵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컵 옆에는 그가 어제 읽다 만 책이 널브러져 있었다. 탁자 모서리에서 밀쳐 떨어지기라도 한 듯한 모습이었다.
“이봐, 이건 장난이 아니야.”
지훈은 숨을 헐떡였다. 손전등을 미친 듯이 휘둘러 방 구석구석을 비췄다. 침대 밑, 커튼 뒤, 옷장 안. 아무도 없었다. 쥐는 이런 짓을 할 수 없다. 바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니, 아예 막혀 있었다.
‘끼이이이익—’
닫혀 있던 화장실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녹슨 경첩 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어둠 속에서 문이 서서히 벌어졌다. 마치 안에서 누군가가 문고리를 잡아 돌리는 것처럼.
지훈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머리칼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저 안에는 아무도 없을 터였다. 그는 혼자였다. 이 건물 전체에 자신 말고 누가 있을까?
문이 완전히 열리고, 어둠 속의 화장실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지훈은 손전등을 화장실 안으로 비췄다. 세면대, 변기, 거울.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그때, 거울에 무언가 비쳤다.
‘…?’
아니, 비친 것이 아니었다. 거울 표면에 무언가 새겨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긁어낸 듯한 자국.
희미한 손전등 빛 아래, 거울에는 삐뚤빼뚤한 글씨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나가.’**
피가 식는 듯한 차가움이 지훈의 전신을 덮쳤다. 글씨는 단 한 단어였지만, 그 속에 담긴 위협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제 공간을 침범하고 있다는 기분이 맹렬하게 덮쳐왔다. 그것은 단순히 유령이 아니었다. 이 도시를 뒤덮은 재앙만큼이나 이해할 수 없고, 더더욱 피할 수 없는 종류의 공포였다.
거울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손전등이 흔들리며 글씨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차가운 숨결이 느껴졌다.
‘쉬이이이—’
귓가에 뱀이 기어가는 듯한 끔찍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도망쳐….”
그리고 동시에, 아파트 전체가 거대한 진동에 휩싸였다. 바닥이 울리고 천장에서 뭔가가 후두둑 떨어졌다. 합판으로 막아둔 창문 너머에서, 도시의 비명 소리가 이제는 이 아파트 안으로까지 스며들어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 모든 소음 속에서도, 그 속삭임은 더 선명하게, 더 또렷하게 지훈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지훈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도망칠 곳조차 없었다. 이 아파트가, 이 벽들이, 더 이상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끔찍한 확신이 전신을 마비시켰다. 대체, 이 안에 들어온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 모든 현상은 바깥의 재앙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그는 눈을 떴다. 거울 속의 글씨는 여전히 ‘나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뒤에, 새로운 단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붉고 진득한 액체로 쓰인 듯한 글씨가.
**’우리가 왔어.’**
지훈의 입에서 피 맺힌 비명이 터져 나오려던 찰나, 아파트 전체가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요동쳤다.
모든 불이 다시 켜졌다. 거실 스탠드, 주방 형광등, 안방의 침대 곁 조명까지. 번쩍이는 빛 속에서, 지훈은 화장실 거울 너머, 자신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보았다.
그림자는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너무나도 길고 뒤틀려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서서히, 자신의 목을 감싸오는 것을 느꼈다.
지훈은 비명 대신,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됐다.
빛 속에서, 문득, 그 그림자의 손이 어렴풋이 보였다.
손가락은 다섯 개였으나, 그 끝이 뭉툭하고 끔찍하게 변형되어 있었다.
마치… 썩어가는 시체의 손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가운데, 지훈의 시야는 암전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