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스팀펑크 상세한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

    # 애니메이션 대본 & 스토리보드: 강철 심장 아래, 첫 증기

    ## 작품 정보
    * **장르**: 스팀펑크, 액션, 드라마
    * **핵심 줄거리**: 부패한 제국의 억압 속에서 살아가는 하층민 소녀 아린이 제국에 맞서기 위한 작은 반란을 시작한다.
    * **시대 배경**: 거대한 증기기관과 톱니바퀴가 도시를 움직이는 스팀펑크 세계. ‘제피로스’ 제국은 상층과 하층으로 나뉘어 있으며, 상층은 화려한 기술의 정수를, 하층은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대변한다.

    ### **에피소드 1: 잿빛 하늘, 끓어오르는 증기**

    ### **씬 1: 잿빛 하늘 아래, 끓어오르는 불만**

    **# INT. 제피로스 하층민 구역, ‘구름다리 골목’ – 해 질 녘**

    * **[카메라]** 상층 도시의 찬란한 황금빛 첨탑들이 석양에 반짝인다. 그 아래, 검은 연기로 뒤덮인 하층 도시의 전경이 펼쳐진다. 거대한 강철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고, 녹슨 기계음이 낮게 깔린다. 도시 전체를 짓누르는 거대한 증기기관의 ‘쉬이이익,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먹먹하게 울린다. 멀리 상층 도시에서는 경쾌한 증기 기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온다.
    * **[사운드]** 공장 증기기관의 둔탁한 ‘쉬이이익, 쿵!’, 멀리서 들리는 상층 도시의 경쾌한 기차 소리, 하층민들의 웅성거림, 흙먼지 날리는 소리.

    * **[카메라]** 낡은 수레를 끌고 힘겹게 언덕을 오르는 노인의 등 뒤로, 제국의 증기 자가용이 ‘크으으응’ 하는 엔진음을 내며 흙먼지를 일으키며 빠르게 지나간다. 노인이 콜록거리며 기침한다.
    * **[카메라]** 좁고 기름때 낀 골목 한구석, 낡은 작업대에 쪼그리고 앉아 앙상한 손으로 복잡한 시계를 수리하는 **아린**의 클로즈업. 그녀의 찢어진 작업복과 얼굴의 기름때가 고된 삶을 보여주지만, 낡은 고글 너머의 눈빛은 날카롭고 강렬하다. 그녀의 손은 망설임 없이 복잡한 기계 부품들을 다룬다.
    * **아린 (내레이션/독백)**: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저 위, 빛나는 강철 심장은… 우리들의 피와 땀으로 뛰고 있지. 하지만 그 심장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아.

    * **[카메라]** 골목 저편, 낡은 공을 차며 놀던 꼬마 아이들이 갑자기 멈칫한다. 시선을 따라가니, 육중한 **자동 감시병** 두 기가 증기를 뿜으며 골목 입구에 들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 **[사운드]** 자동 감시병의 육중한 발소리, 증기 배출음 ‘쉬익- 쉬익-‘.
    * **꼬마 아이**: (겁먹은 목소리로) 아린 누나! 저 왔어요!
    * **아린**: (미간을 찌푸리며 감시병을 쳐다본다. 작은 한숨을 내쉰다) 쳫, 또 왔군. 이젠 숨 쉴 구멍조차 통제하려는 건가.

    * **[카메라]** 자동 감시병이 천천히 골목을 순찰하는 모습. 꼬마 아이들은 잔뜩 웅크린 채 몸을 숨긴다. 아린은 다시 시계에 집중하는 척하며 감시병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 **아린 (내레이션/독백)**: (시계를 조립하며, 뇌리에 맴도는 생각들) 이대로는 안 돼. 언젠가는, 이 빌어먹을 강철 심장을 우리 손으로 멈춰 세워야 해. 작은 톱니바퀴 하나라도 엇나가게 해야지.

    ### **씬 2: 증기 압력 조절기 탈취 작전**

    **# EXT. 제국 지하 동력 파이프라인 관제소 – 한밤중**

    * **[카메라]** 어둠 속에 잠긴 거대한 강철 파이프라인. 상층과 하층을 잇는 이 미로 같은 구조물은, 제피로스의 모든 동맥과 같다. 곳곳에서 증기가 ‘푸쉬쉭’ 하고 새어 나오고, 붉은 경고등이 불안하게 깜빡인다.
    * **[사운드]** 파이프라인에서 새어 나오는 증기음, 금속 마찰음,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제국 감시병의 발소리.

    * **[카메라]** 낡은 강철 파이프 위를 조심스럽게 기어가는 아린의 모습. 그녀는 낡은 고글을 쓰고 손전등으로 앞을 비춘다. 허리에는 작은 공구 주머니가 매달려 있다. 그녀의 움직임은 고양이처럼 민첩하다.
    * **아린 (독백)**: (속삭이듯) 증기 압력 조절기… 저것만 있으면 내 ‘개조식 증기 추진기’가 완성될 텐데. 낡은 파이프라인 관제소라면 경비가 허술할 거야. 운이 좋으면, 썩어 빠진 제국의 심장에 작은 칼날 하나 박아 넣을 기회도 생기겠지.

    * **[카메라]** 아린이 녹슨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선다. 내부에는 거대한 압력 게이지와 밸브들이 즐비하다. 증기 동력이 흐르는 파이프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중앙에는 증기 압력 조절기들이 탑처럼 쌓여 있다. 이곳은 제국 동력의 가장 취약한 부분 중 하나다.
    * **[사운드]** 아린의 발소리가 울리는 금속 복도. 기계들의 웅장한 작동음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 **[카메라]** 아린이 목표물을 발견하고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그녀는 재빨리 공구를 꺼내 능숙하게 압력 조절기를 분리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손놀림은 정확하고 빠르다.
    * **[사운드]** 금속이 분리되는 ‘드르륵, 쨍그랑’ 소리, 아린의 거친 숨소리.

    * **[카메라]** 갑자기 ‘삐빅!’ 하는 경고음이 관제소 전체에 울려 퍼진다. 아린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긴장감이 감돈다. 그녀는 주위를 경계한다.
    * **아린**: (낮게 욕설을 읊조린다) 젠장, 너무 안일했어!

    * **[카메라]** 복도 끝에서 두 대의 자동 감시병이 증기를 내뿜으며 다가온다. 그들의 붉은 감시등이 아린을 향해 번쩍인다. 육중한 몸체가 금속 바닥을 울리며 다가오는 모습이 위협적이다.
    * **[사운드]** 자동 감시병의 ‘우우웅’ 하는 가동음, 금속 발소리 ‘쾅, 쾅!’.
    * **자동 감시병 (기계음)**: [침입자 발견. 즉시 정지하라.]

    * **[카메라]** 아린이 황급히 조절기 하나를 낚아채 허리 주머니에 넣고 도주를 시작한다. 그녀의 작은 몸이 기민하게 움직인다.
    * **[사운드]** 아린의 질주하는 발소리, 자동 감시병들의 추격 소리가 점점 빨라진다.

    ### **씬 3: 기지를 발휘한 탈출, 그리고 예상치 못한 조력자**

    **# INT. 관제소 내부 – 파이프 미로 – 한밤중**

    * **[카메라]** 아린이 좁은 파이프 사이를 민첩하게 통과한다. 뒤에서는 자동 감시병들이 육중한 몸으로 파이프를 부수며 쫓아온다. 부서진 파이프에서 증기가 터져 나오며 시야를 가린다.
    * **[사운드]** 금속 부서지는 ‘콰아앙!’ 소리, 증기 폭발음 ‘쉬이이익!’, 아린의 절박한 숨소리.
    * **자동 감시병 (기계음)**: [도주 경로 예측 완료. 포위망 형성.]

    * **[카메라]** 아린이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고, 천장의 거대한 증기 배출 밸브를 발견한다. 낡고 녹슨 밸브는 위험해 보인다. 그녀의 눈에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친다.
    * **아린**: (이를 악물며) 그래, 한 번 해볼까!

    * **[카메라]** 아린이 손에 든 스패너를 힘껏 던져 밸브를 강타한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낡은 밸브가 터지며 뜨거운 증기가 맹렬히 뿜어져 나온다. 관제소 전체가 하얀 증기로 뒤덮인다.
    * **[사운드]** 증기 폭발음 ‘쉬이이이익!!!’, 금속 파열음, 경고음.
    * **[카메라]** 솟구치는 증기 속에서 자동 감시병들이 잠시 주춤하며 시야를 가린다. 그들의 감시등이 붉게 깜빡이며 혼란을 드러낸다. 그 틈을 타 아린이 아래로 뛰어내려 다른 통로로 사라진다.
    * **[사운드]** 아린이 착지하는 ‘쿵’ 소리, 증기가 사그라드는 소리, 자동 감시병의 혼란스러운 기계음.
    * **자동 감시병 (기계음)**: [시야 확보 불가. 침입자 추적 상실.]

    * **[카메라]** 아린이 간신히 탈출해 낡은 창고 같은 곳에 숨어 숨을 고른다. 거친 숨을 내쉬며 고글을 벗자 땀에 젖은 얼굴이 드러난다. 그녀는 주머니 속 압력 조절기를 만지며 안도한다.
    * **[사운드]** 아린의 거친 숨소리, 멀리서 들리는 감시병들의 수색 소리.
    * **[카메라]** 그때,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나타난다. 아린은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린다.
    * **[사운드]** 미세한 금속 마찰음, 발소리.
    * **카이**: (낮고 침착한 목소리) 꽤나 능숙하군, 꼬맹이. 하지만 다음엔 좀 더 조용하게 움직이는 게 좋을 거다. 제국은 귀 밝은 놈들이거든.
    * **[카메라]** **카이**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살짝 드러난다. 낡은 작업복 차림에 연륜이 느껴지는 눈빛을 하고 있다. 그의 손에는 아린이 파이프 미로에서 떨어뜨린 공구가 들려 있다.
    * **아린**: (놀라 뒤돌아보며) 당신은… 누구시죠? 이걸… 제가 떨어뜨린 건가요?
    * **카이**: (공구를 아린에게 던져주며) 중요한 건 네가 뭘 하려 했는지다. 강철 심장을 멈춰 세우려 했던 건지, 아니면 그저 배를 채우려 했던 건지.
    * **[카메라]** 카이가 아린을 꿰뚫어 보듯 응시한다. 아린은 잠시 망설이다 주머니에 넣어둔 증기 압력 조절기를 꽉 쥔다. 그녀의 눈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다.
    * **아린**: (강한 눈빛으로) 전… 제 갈 길을 가는 겁니다. 그 강철 심장을, 부셔버릴 겁니다.
    * **카이**: (피식 웃으며) 후훗… 흥미롭군. 나도 가끔은 그 강철 심장에 작은 구멍이라도 내고 싶었지. (잠시 침묵) 혼자서는 힘든 싸움이 될 거다. 필요하면 찾아와라. (그는 어둠 속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 **[사운드]** 카이의 발소리가 멀어지는 소리, 아린의 거친 숨소리.
    * **[카메라]** 홀로 남겨진 아린의 뒷모습. 그녀는 굳은 결심을 한 듯 주먹을 쥔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빛만은 강렬하게 빛난다.
    * **아린 (내레이션/독백)**: (결의에 찬 목소리로) 혼자든, 함께든… 난 멈추지 않아.

    ### **씬 4: 암약하는 그림자 (쿠키 영상)**

    **# INT. 대공작 헬리오스의 집무실 – 새벽**

    * **[카메라]** 호화로운 대공작의 집무실. 벽면에는 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거대한 톱니바퀴 문양이 새겨져 있고, 창밖으로는 상층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다. **대공작 헬리오스**가 펜촉으로 서류를 쓰고 있다. 그의 표정은 냉정하고 차갑다. 집무실은 제국의 압도적인 권력을 상징하듯 웅장하지만, 어딘가 차갑고 공허하다.
    * **[사운드]** 펜촉이 종이를 스치는 ‘사각사각’ 소리, 벽시계의 묵직한 ‘째깍’ 거림.

    * **[카메라]** 경직된 자세로 서 있는 **제국 병사**가 헬리오스에게 보고한다.
    * **제국 병사**: 대공작님, 하층민 구역 파이프라인 관제소에서 경미한 증기 압력 조절기 도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자동 감시병 두 기가 파손되었으나, 도주한 침입자는 잡지 못했습니다.
    * **[카메라]** 헬리오스가 펜을 내려놓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병사를 바라본다. 그의 눈빛은 얼음장 같다. 병사는 그의 시선에 움찔한다.
    * **헬리오스**: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경미하다고?… 감시병 두 기를 파손시키고 증기 밸브를 터뜨린 것이? 겨우 압력 조절기 몇 개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만한 하층민은 흔치 않지.

    * **[카메라]** 헬리오스의 얼굴 클로즈업. 미미한 짜증과 함께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섬뜩한 통찰이 그의 눈빛에 스친다.
    * **헬리오스**: (창밖, 상층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증기 압력 조절기는, 곧 동력의 심장. 그 심장을 노리는 자들은… 언젠가 제국 전체의 심장을 멈추려 할 것이다. (의미심장하게,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흥미롭군. 이 잿빛 도시에도 아직 불꽃이 남아 있었나.
    * **[사운드]** 헬리오스의 낮게 웃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린다.
    * **[카메라]** 헬리오스의 실루엣이 상층 도시의 불빛을 등지고 서 있는 모습으로 페이드아웃.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도시 전체를 뒤덮는 듯 드리워진다.


    **[에피소드 1 끝]**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회색빛 노을이 졌다. 해가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자, 버려진 고등학교 건물 위로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마치 거대한 괴물의 혀처럼 도시를 집어삼키는 듯했다. 건물 안은 바깥 세상의 지옥과는 단절된, 생존자들의 유일한 안식처였다. 그러나 그 안식처의 평화는, 단 한 명의 죽음으로 산산조각 났다.

    “강태한 씨! 강태한 씨!”

    한밤중, 거친 숨을 몰아쉬는 김민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의 얼굴은 피난처의 희미한 비상등 아래서도 창백했다. 잠에서 깬 생존자들이 웅성거렸다. 강태한은 자신의 작은 방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눈빛은 짙은 그림자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무슨 일입니까.”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모든 혼란을 꿰뚫는 듯한 냉철함이 배어 있었다.

    “박선영 의무관이… 돌아가셨습니다. 의무실에요. 밀실입니다, 밀실!”

    민준의 목소리에는 공포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강태한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박선영. 이 생존자 캠프의 핵심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었다. 혼란과 불신, 그리고 생존의 위협을 의미했다.

    강태한은 민준을 따라 의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는 내내,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들렸다.

    “어떻게 된 거야?”
    “박 의무관님이 왜?”
    “혹시… 우리 중에 살인마가 있는 건가?”
    “밖에 ‘그것들’도 모자라서…!”

    의무실 문 앞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공포와 불안감이 섞인 시선들이 강태한에게로 향했다. 그들은 천재적인 두뇌로 세상이 멸망하기 전에도 난해한 사건들을 해결했던 그에게, 지금도 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다들 떨어져요.”

    강태한의 목소리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그는 굳게 닫힌 의무실 문을 응시했다. 원래 학교 과학실이었던 공간을 개조한 의무실은 두꺼운 철판으로 덧대어져 있었고, 창문은 완전히 막혀 있었다. 낡은 철문에는 육중한 강철 빗장이 걸려 있었다.

    “안에서 걸린 겁니까?” 강태한이 물었다.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가 문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빗장이 안에서 굳게 걸려 있었어요. 다른 출입구는 없습니다.”

    강태한은 문에 손을 얹었다. 차갑고 단단한 철의 감촉. 그는 문 틈새와 주변 벽면을 꼼꼼히 살폈다. 그의 시선이 문 아래 작은 틈새에 잠시 머물렀다.

    민준이 문을 열었다. 내부에서 풍기는 비릿한 피 냄새가 강태한의 코를 스쳤다. 바닥에는 박선영 의무관이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머리맡에는 묵직한 공구, 녹슨 렌치가 놓여 있었다. 분명 살해당한 것이었다. 방 안은 깨끗했다. 엉망이 된 흔적도, 외부 침입의 흔적도 없었다. 마치 그녀가 혼자 의무실에 있다가, 갑자기 쓰러진 것 같았다.

    강태한은 시신에 다가섰다. 그는 희미한 비상등 불빛 아래서, 박선영 의무관의 창백한 얼굴과 굳은 시선을 응시했다. 그녀의 옷차림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방어흔도 보이지 않았다. 기습당했다는 증거였다. 렌치는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스크래치 같은 것이 바닥에 나 있었다.

    그는 렌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평범한 렌치가 아니었다. 특정 부위에 용접 자국과 개조된 흔적이 선명했다. 그의 시선이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약품 상자들, 낡은 수술 도구들, 의료용 침대, 그리고 환기구. 천장에 달린 작은 환기구는 좁아서 사람이 통과하기에는 불가능해 보였다.

    “범인은 어떻게 밖으로 나갔을까…?” 누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강철 빗장에 꽂혀 있었다. 안에서 걸렸으니, 범인은 사라졌을 리 만무했다. 그렇다면 아직 안에 있거나, 아니면…

    “이성민이요!” 갑자기 한 남자가 외쳤다. “이성민, 그 자식입니다! 얼마 전에 박 의무관님이 식량 배급 문제로 자기 동생 치료 미뤘다고 난리 치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 곳으로 향했다. 이성민. 이 캠프에서 가장 뛰어난 기술자 중 한 명. 그는 구석에서 잔뜩 움츠린 채 떨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기름때가 묻어 있었고, 얼굴은 식은땀으로 번들거렸다.

    “아니야! 내가 아니야!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이성민이 소리쳤다.

    강태한은 아무 말 없이 이성민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이성민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는 다시 문으로 향했다. 빗장의 잠금쇠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그리고 문 아래 틈새에 시선을 고정했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아주 미세한 홈이 바닥과 문의 경계에 나 있었다. 일반적인 문에는 있을 수 없는 형태의, 미세하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진 흔적이었다. 그리고 빗장 손잡이에도 아주 희미한 스크래치 자국이 보였다. 마치 무언가에 긁힌 듯한.

    그는 시선을 들어 이성민을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렌치에 새겨진 개조 흔적을 떠올렸다. 이성민은 늘 특별한 공구를 사용하곤 했다. 그의 손재주는 이 캠프에서 가장 뛰어났다.

    “누구도 방 안에 숨을 수 없습니다.” 강태한이 나직이 말했다. “환기구는 너무 작고, 다른 은폐물도 없습니다. 박 의무관님은 외부 침입 없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죠.”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됐다. 그의 말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듯 보였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민준이 물었다.

    강태한은 렌치를 들어 올렸다. “이 렌치, 이성민 씨가 늘 가지고 다니던 것 아닙니까? 손잡이에 새겨진 특이한 문양, 그리고 여기에 덧댄 쇠붙이까지. 당신의 작업 방식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이성민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그… 그건… 그냥 제 공구일 뿐입니다… 제가 떨어뜨렸을 수도…!”

    “아니요.” 강태한이 그의 말을 잘랐다. “당신은 이 렌치로 박선영 의무관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 방에서 나간 뒤, 밀실을 만들었죠.”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불가능합니다!” 누군가 외쳤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요!”

    강태한은 고개를 저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였을 뿐입니다. 박선영 의무관은 매일 밤 의무실에 홀로 남아 약품을 정리하고, 안전을 위해 빗장을 걸어 잠그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그 습관을 이용했습니다.”

    그는 다시 문 아래 틈새를 가리켰다. “여기에 나 있는 미세한 흔적, 그리고 빗장 손잡이의 스크래치. 이것은 박 의무관님이 잠글 때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외부에서 조작되었을 때 생기는 흔적입니다.”

    “이성민 씨는 박 의무관님이 의무실에 들어서기 전, 빗장 손잡이에 아주 얇고 질긴 낚싯줄, 혹은 고장 난 의료 기기에서 얻은 와이어를 묶어두었습니다. 그 와이어는 문 아래의 작은 틈새로 빠져나가 있었겠죠.”

    모두가 숨을 죽였다.

    “박 의무관님은 평소처럼 빗장을 걸고 잠들거나, 작업을 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성민 씨는 기다렸죠. 박 의무관님이 잠들었을 때, 혹은 방심한 틈을 타, 그는 문 밖에서 와이어를 잡아당겼습니다. 빗장 손잡이가 돌아가며 문이 열렸을 겁니다. 그 후 그는 의무실로 침입하여 박 의무관님을 살해했고, 자신의 공구인 렌치를 버려두고 나왔습니다.”

    “하지만…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민준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게 이 트릭의 핵심입니다.” 강태한이 싸늘하게 말했다. “이성민 씨는 방에서 나간 뒤, 다시 문 아래로 와이어를 넣어 빗장 손잡이에 걸고, 밖에서 와이어를 잡아당겨 빗장을 걸었습니다. 마치 박 의무관님이 안에서 잠근 것처럼 보이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와이어는 다시 문 밖으로 회수했겠죠. 그에게는 이런 정교한 작업을 해낼 손재주와 기술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이 렌치를 이용해 빗장 손잡이에 와이어를 묶는 작업을 더욱 손쉽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성민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얼굴은 피가 모두 빠져나간 것처럼 하얗게 질렸다. “아… 아니야…! 말도 안 돼…!”

    “이 렌치에서는 박 의무관님의 혈흔과 함께, 미세한 금속 가루가 묻어 나왔습니다. 이 금속 가루는 박 의무관님이 마지막으로 수리하던 발전기 부품에서 나온 것과 동일한 성분입니다. 박 의무관님은 이 렌치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사용한 것이죠.” 강태한이 렌치를 이성민을 향해 내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손에 들고 있던 그 렌치를 쥐었던 때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동공은 거짓말을 할 때마다 미세하게 확장되죠. 당신의 동생이 고열로 시달릴 때 박 의무관님이 약을 주지 않자, 당신은 박 의무관님을 원망했습니다. 캠프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라 해도, 당신의 동생에게는 그녀가 악마처럼 보였겠죠.”

    이성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미안해… 미안해요…! 내 동생이… 내 동생을 살려야만 했어…!”

    울부짖는 이성민의 목소리가 의무실을 채웠다. 사람들은 경악과 배신감에 휩싸인 채 이성민을 노려봤다.

    강태한은 묵묵히 이성민을 바라봤다. 세상이 멸망하고, ‘그것들’이 득실거리는 지옥이 되었어도,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욕망과 분노, 그리고 지혜는 사라지지 않았다. 어떤 이는 생존을 위해, 어떤 이는 증오를 위해 그 지혜를 사용했다. 바깥세상에는 ‘그것들’이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지만, 이처럼 닫힌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잔혹함은 또 다른 종류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어둠 속으로 시선을 돌렸다. 밤은 아직 길었다. 그리고 생존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터였다. 강태한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어깨 위에 올려진 짐은, 세상이 멸망하기 전보다 훨씬 무거워 보였다.

  • 에픽 하이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싸늘한 새벽 공기가 고대 요새 아에리온의 견고한 돌벽을 타고 흘렀다. 철옹성이라 불리던 이 거대한 구조물은 지금, 섬뜩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아에리온의 심장부, 대현자 에라스무스의 연구실에서 밀실 살인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전해진 직후였다.

    카이렌은 굳게 닫힌 연구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아에리온 최고 수사관인 수석 기사 에릭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에릭은 핏기 없는 얼굴로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카이렌 경.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부터 줄곧. 창문은 고대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고, 그 어떤 존재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대현자 본인이 걸어둔 강력한 보호 마법이 아직도 활성화되어 있어요.” 에릭의 목소리에는 좌절감이 묻어났다.

    카이렌은 대답 없이 문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아래로 희미한 마력의 잔류가 느껴졌다. 에라스무스 본인이 활성화한 강력한 봉인 마법의 흐름이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완벽한 봉인.

    “시신은 어떻게 발견되었습니까?” 카이렌이 물었다.

    “새벽 기도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대현자님께서 모습을 보이지 않아, 견습 마법사 리아가 걱정되어 찾아왔습니다. 문을 두드려도 아무런 응답이 없자, 저희에게 알렸고… 파공 마법으로 겨우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대현자님은 이미….” 에릭은 말을 잇지 못했다.

    “다른 이의 침입 흔적은 없었습니까?”

    “전혀요.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안에는 대현자님 시신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범인은 대체 어떻게….” 에릭은 고개를 저었다.

    카이렌은 문이 부서진 틈으로 연구실 안을 들여다봤다. 거대한 책장과 고문서들이 빼곡히 들어찬 방은 단정했다. 한쪽 벽난로에는 불씨가 꺼진 지 오래인지 차가운 재만 남았고, 중앙의 커다란 책상 위에는 수많은 양피지와 잉크병, 마법 도구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책상에 엎드린 채 미동도 없는, 대현자 에라스무스의 시신. 그의 등에는 기이한 **수정 단검**이 깊이 박혀 있었다. 단검은 투명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고, 마치 얼음처럼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단검은….” 카이렌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반적인 무기가 아니군요.”

    “네. 아무도 저런 단검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시신과 함께 발견되었고, 만져보니 얼음장같이 차가웠습니다. 마법적인 무기인 듯합니다만….” 에릭은 곤란한 표정이었다.

    카이렌은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망설임이 없었다. 그는 먼저 시신에 다가가 단검을 유심히 살폈다.

    “이건 일반적인 수정이 아닙니다. 응축된 아르카나 에너지로 이루어진 무기군요. 매우 불안정해서, 숙련된 마법사가 끊임없이 마력을 공급하거나 특별한 안정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종류입니다.”

    “사라진다고요?” 에릭이 놀라 물었다. “하지만 저 단검은 분명히 저기에 있습니다.”

    카이렌은 대답 없이 방의 구석구석을 살폈다. 굳게 닫힌 창문, 마법이 새겨진 벽, 심지어 천장의 석재까지. 그의 시선은 매 순간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는 창문 모서리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아주 미세한 균열이 감지되었다.

    “이 균열은 언제부터 있었던 거죠?”

    에릭이 다가와 살펴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아마 오래전부터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틈새는 아주 미세하고, 그 위에도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커녕, 작은 쥐 한 마리도 통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군요.” 카이렌은 눈을 감았다. 그는 주변에 남아있는 마력의 흔적들을 더듬었다. 에라스무스의 강렬한 보호 마법, 그리고… 아주 희미하지만 이질적인, 섬뜩할 정도로 정교한 마법의 잔류. 마치 허공에서 무언가가 형성되었다가 사라진 듯한 흔적. 오래된 약초와 오존이 뒤섞인 듯한 옅은 향기 또한 감지되었다.

    잠시 후, 젊은 마법사 리아가 울먹이며 들어왔다. 그녀는 에라스무스의 유일한 견습생이었다.

    “대현자님께서는… 어째서….” 리아는 흐느끼며 책상 위의 시신을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대현자님을 뵌 게 언제입니까?” 카이렌이 부드럽게 물었다.

    “어젯밤… 늦게까지 연구하시다가, 제가 가져다 드린 차를 드시고는 늘 하시던 대로 ‘이제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걸세’ 하시며 연구실 문을 걸어 잠그셨어요. 방어 마법도 직접 활성화하시는 걸 봤습니다.”

    “그 말씀은… 대현자님 본인이 문을 걸어 잠그고 마법을 걸었다는 뜻이군요.” 카이렌이 중얼거렸다.

    “네. 늘 그렇게 하셨습니다. 중요한 연구를 하실 때는 완전히 고립되시곤 했어요.” 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 이후로 아무도 이곳에 접근하지 못했겠군요.”

    “그렇습니다. 저도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 돌아섰습니다.”

    카이렌은 다시 수정 단검을 응시했다. ‘이제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걸세.’ 에라스무스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방어 마법은 완벽했다. 살인자는 어떻게 들어오고 나갔을까?

    그때, 카이렌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방의 중앙에 서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는 굳게 닫힌 문, 완벽한 봉인 마법, 그리고 사라지지 않는 수정 단검, 모든 것이 하나의 점으로 연결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범인은 물리적으로 이 방에 들어오거나 나가지 않았습니다.” 카이렌이 조용히 말했다.

    에릭과 리아, 그리고 주변에 모여 있던 다른 수사관들이 일제히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이렌 경?” 에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현자 에라스무스께서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봉인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이 마법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완벽하게 차단합니다. 하지만… **내부로부터의 침입**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내부로부터요? 그게 무슨… 범인이 이미 안에 있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시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에릭이 반박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없습니다.” 카이렌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살인이 일어난 순간에는, 이곳에 **’무언가’**가 존재했습니다. 대현자님은 자신의 방어 마법에 대한 자부심이 컸습니다. 그 자부심이 그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외부의 위협만을 경계했을 뿐, 내부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기만을 간과했습니다.”

    카이렌은 수정 단검을 가리켰다. “이 단검은 응축된 아르카나 에너지로 만들어졌습니다. 매우 불안정하죠. 하지만 이 단검은 사라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단검이 특정 마법사의 마력에 의해 끊임없이 **’고정’**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정이라니요?” 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것은 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잔영 마법’**의 정수입니다.” 카이렌의 목소리에 확신이 담겼다. “잔영 마법. 극히 희귀하고 난해하며,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이 마법은 시전자의 의식과 마력을 투영하여, 완벽하게 물리적인 **’환영’**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이 환영은 잠시 동안 실체화되어 실제처럼 행동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거나 마력이 고갈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에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환영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어떻게 그 환영이 이 봉쇄된 방 안으로….”

    “환영은 물리적으로 방에 들어온 것이 아닙니다.” 카이렌이 창문 모서리의 미세한 균열을 다시 가리켰다. “이 균열은 너무 작아서 사람이 통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잔영 마법을 사용하기에는 충분합니다. 살인자는 외부에서 이 균열을 통해 자신의 의식과 마력을 **’투영’**시켜, 방 안에 자신의 환영을 실체화했습니다.”

    “투영….” 리아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네. 범인은 자신의 환영을 방 안에 만들어냈고, 그 환영이 이 수정 단검을 휘둘러 대현자님을 살해했습니다. 이 단검은 잔영 마법의 완벽한 보조 도구였던 것이죠. 그리고 임무를 완수한 환영은…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방어 마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고 말이죠. 심지어 범인은 단검에 걸어둔 마법으로, 사라진 환영이 남긴 마력의 잔류를 이 단검에 흡수하도록 했을 겁니다. 그래서 이 단검만이 유일한 물리적 증거로 남은 것이죠.”

    카이렌은 잠시 숨을 골랐다. “이 방에서 감지된 희미한 오존과 약초 향기… 그것은 잔영 마법을 발현시키기 위해 필요한 희귀한 촉매의 잔류입니다. 그리고 대현자님의 봉인 마법에서 느껴졌던 순간적인 불균형… 그것은 환영이 실체화될 때, 주변의 마력장을 일시적으로 교란시킨 흔적입니다. 너무 미미해서 대현자님조차 눈치채지 못했을 겁니다.”

    “그럼 범인은… 대체 누구란 말입니까? 잔영 마법은 거의 전설 속의 마법이 아닙니까?” 에릭이 다급하게 물었다.

    카이렌의 시선은 에릭의 옆에 서 있던 대마법사 솔론에게로 향했다. 솔론은 아에리온의 원로 마법사이자 에라스무스의 오랜 경쟁자였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미세한 동요가 일고 있었다.

    “잔영 마법은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부 고대 문헌에는 그 기록이 남아있죠. 그리고 제가 알기로, 그 문헌들을 가장 집요하게 연구해 온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카이렌은 솔론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마법사 솔론. 당신은 수년 전부터 잔영 마법에 매료되어 있었죠. 에라스무스 대현자님은 그 마법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당신을 막으려 했고, 그 때문에 두 분 사이에 깊은 불화가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솔론의 얼굴에서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무슨 헛소리를! 나는 결코….”

    “대현자님께서는 그저 외부의 침입을 막으려 했을 뿐입니다. 그의 방어 마법은 견고했지만, 자신의 경쟁자가 그토록 난해한 마법을 습득하여 자신을 노릴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겁니다. 게다가 대현자님의 시신은 전혀 저항한 흔적 없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이는 그가 범인을 인식하기도 전에 기습당했거나, 혹은 그를 공격한 존재를 ‘사람’으로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카이렌은 수정 단검을 다시 한번 가리켰다. “그리고 이 단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범인이 여전히 이 단검에 마력을 공급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당신이 이곳에 들어온 이후로 이 단검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흐름이 미세하게나마 더 강해졌습니다, 솔론 경.”

    솔론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마력의 빛이 일렁였다. 그 순간, 수정 단검에서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나는 그저… 그의 연구가 더 이상 방해받지 않도록 돕고 싶었을 뿐이다. 그는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어….” 솔론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에릭은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솔론의 목에 겨눴다. “대마법사 솔론, 당신을 대현자 에라스무스 살해 혐의로 체포한다!”

    카이렌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밀실은 완벽했지만, 그 속에서 벌어진 기만은 천재 탐정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잔영은 사라졌지만, 그 잔혹한 진실은 명백히 드러난 것이다. 아에리온의 견고한 심장에 드리워졌던 어둠이, 이제야 빛을 보았다.

  • 메카 액션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제목:** 에리두의 붉은 맹세

    **에피소드 1: 붉은 별의 조우**

    **[장면 1]**
    **배경:** 짙은 성운이 드리워진 황량한 우주 공간. 붉은 행성 ‘에리두’가 저 멀리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그 주위를 부서진 소행성 잔해들이 느릿하게 떠다닌다. 화면 상단에 ‘UEDF 소속 가디언 ‘아레스-7′, 정찰 임무 중’ 자막.
    **내레이션 (서진):** 에리두는 붉은 죽음의 별이었다. 인간에게는 자원의 보고이자, 미지의 젤렌 종족과의 최전선.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생명 그 자체의 터전이기도 했겠지.

    **[장면 2]**
    **배경:** ‘아레스-7’의 조종석 내부. 강철과 회로로 이루어진 복잡한 공간. 전면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에리두의 지형과 우주 지도가 표시되어 있다.
    **인물:** 이서진 (20대 후반, 날카로운 눈매와 단단한 입매. 흐트러짐 없는 전투복을 입고 있지만, 어딘가 모르게 자유분방한 기운이 느껴진다.)
    **대사 (서진):** (무전기를 통해 차분하게) 사령부, 아레스-7, 예정 경로 진입 완료. 섹터 감마-4, 특이사항 없음.
    **효과음:** *쉬이익… 지지직… (무전 노이즈)*

    **[장면 3]**
    **배경:** 서진의 홀로그램 스크린 클로즈업. 텅 비어 있던 레이더에 갑자기 여러 개의 붉은 점들이 빠르게 깜빡이며 나타난다.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한다.
    **효과음:** *삐이익! 삐이익! 삐비빅! (경고음)*
    **대사 (서진):** (눈을 가늘게 뜨고 화면을 응시하다가, 놀란 듯) …아니, 특이사항 발생! 다수 젤렌 전투정, 고속으로 접근 중! 교전 거리 진입 임박!
    **내레이션 (서진):** 특이사항 없음, 이라니. 이 빌어먹을 전쟁터에서 평화라는 건 대체 언제쯤 오는 걸까.

    **[장면 4]**
    **배경:** ‘아레스-7’이 소행성 틈새를 고속으로 돌파하는 와이드 샷. 뒤편에서 번개처럼 빠르게 날아오는 젤렌 전투정들이 보인다. 유선형의 검은 외피에 붉은 센서가 섬뜩하게 빛난다. 레이저가 가디언 주변을 스치고 지나간다.
    **효과음:** *쉬이이잉! 파앙! (레이저 발사음 및 폭발음)*
    **대사 (현준 / 무전, 다급하게):** 서진! 무슨 일이야?! 젤렌이라고?! 교전 돌입해! 엄폐하고 반격해!
    **대사 (서진):** (이를 악물며) 알겠습니다, 소대장님! 이번에도 저 오징어들 대가리 따다 바치죠! (조종간을 거칠게 꺾는다)

    **[장면 5]**
    **배경:** 격렬한 우주전 시퀀스. 서진의 가디언 ‘아레스-7’이 복잡한 기동으로 젤렌 전투정들의 공격을 피하며, 동시에 강력한 플라즈마 캐논을 발사한다. 젤렌 전투정 하나가 폭발하며 산산조각 난다. 서진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스친다.
    **효과음:** *콰아앙! (젤렌 전투정 폭발음)*
    **대사 (서진):** 하! 잡았다, 요놈!
    **내레이션 (서진):** 나는 전투를 즐기는 건 아니다. 단지, 내가 살아있음을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순간이 바로 이런 때일 뿐.

    **[장면 6]**
    **배경:** 승리의 순간도 잠시, 서진의 가디언 측면에서 섬광이 터진다. 보이지 않던 곳에서 날아온 젤렌 전함의 주포 공격. ‘아레스-7’이 비명을 지르듯 심하게 흔들린다. 조종석 내부에는 경고등이 미친 듯이 깜빡이고,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효과음:** *크아아앙! 찌이이이익! (주포 폭발음, 기체 파손음)*
    **대사 (서진):** (고통스러운 신음) 젠장! 실드 파손! 엔진 출력 불안정! 비상 착륙 모드… 안 돼! (전방 스크린에 ‘CRITICAL DAMAGE’ 경고 문구가 뜬다)
    **내레이션 (서진):** 그리고 죽음의 공포는 언제나 이 짜릿함 뒤에 숨어 있었다.

    **[장면 7]**
    **배경:** 붉은 에리두 행성을 향해 ‘아레스-7’이 통제 불능 상태로 추락한다. 꼬리에는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르고, 기체가 대기권과 마찰하며 붉게 달아오른다.
    **효과음:** *끼이이이잉! 휘이이이이잉! (기체 마찰음)*

    **[장면 8]**
    **배경:** 에리두의 붉고 거친 지표면. 거대한 분화구 안에 ‘아레스-7’이 처참하게 박혀 있다. 기체는 반쯤 파괴되었고, 여기저기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인물:** 서진 (얼굴에는 검댕이 묻고 헬멧은 깨져 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려는 듯 눈을 깜빡인다.)
    **대사 (서진):** 으윽… (떨리는 목소리로 무전기를 찾는다) 사령부… 아레스-7… 추락… 위치… (무전기에서 노이즈만 들릴 뿐 응답이 없다) …젠장.
    **효과음:** *지지직… (무전 노이즈) 퍽! (무전기를 던지는 소리)*

    **[장면 9]**
    **배경:** 서진이 파손된 가디언의 비상 해치에서 빠져나온다. 손에는 전투용 소총을 굳게 쥐고 있다. 에리두의 대기는 붉고 뿌옇다. 황량한 협곡만이 사방에 펼쳐져 있다.
    **대사 (서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런 젠장. 여긴 대체 어디야. 생존 신호도 안 잡히고… 완전 고립이잖아.
    **내레이션 (서진):** 혼자가 되었다. 이 끝없는 붉은 지옥에서.

    **[장면 10]**
    **배경:** 서진이 주변을 경계하며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모습. 그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즉시 소리가 난 방향으로 총을 겨눈다.
    **효과음:** *바스락… 바스락… (돌 부스러지는 소리)*

    **[장면 11]**
    **배경:** 협곡의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 인간과는 확연히 다른 실루엣. 젤렌 종족의 전사, 카이로스 (20대 후반~30대 초반의 인간 외모와 비슷한 나이대. 키가 크고 늘씬하며, 검고 매끈한 생체 갑옷을 입고 있다. 그의 갑옷 역시 전투의 흔적으로 손상되어 있다. 그의 얼굴은 반쯤 가려져 있지만, 푸른빛 눈동자가 강렬하게 빛난다.)
    **대사 (서진):** (숨을 들이키며) …젤렌?

    **[장면 12]**
    **배경:** 카이로스가 서진을 발견하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그의 손에는 유려하고 기괴한 형태의 젤렌 무기가 들려 있다. 침묵 속에서 긴장감이 고조된다.
    **대사 (카이로스 / 젤렌어, 아래 자막):** 인간… 전사인가.
    **대사 (서진):** (경계하며) 너… 혼자냐?

    **[장면 13]**
    **배경:** 그 순간, 땅이 격렬하게 흔들린다. 서진과 카이로스 모두 휘청거린다. 그들의 등 뒤에 있던 협곡 벽이 무너지며,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난다.
    **효과음:** *크르르르릉! 우르르쾅쾅! (땅 흔들리는 소리, 바위 무너지는 소리)*

    **[장면 14]**
    **배경:** 에리두의 토착 생물체. 거대한 갑각류와 뱀을 섞어놓은 듯한 맹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나고,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이 돋아나 있다. 이빨에서는 녹색 점액이 흐른다.
    **인물:** 서진과 카이로스, 둘 모두 순간적으로 경악하는 표정.
    **내레이션 (서진):**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행성에서는, 종족의 갈등보다 더 근원적인 위협이 존재한다는 것을.

    **[장면 15]**
    **배경:** 맹수가 서진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한다. 서진은 미처 반응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는다.
    **효과음:** *쉬이이익! (맹수 돌진음)*

    **[장면 16]**
    **배경:** 하지만 맹수의 공격은 서진에게 닿지 못한다. 카이로스가 서진 앞을 막아서며 자신의 무기를 발사한 것. 맹수의 거대한 몸체에서 녹색 피가 튀며 맹수가 잠시 주춤한다.
    **효과음:** *쉬이이잉! 파앙! (젤렌 무기 발사음)*
    **대사 (카이로스 / 젤렌어, 자막):** (짧고 단호하게) 물러서라.
    **내레이션 (서진):** 적의 보호. 이 아이러니한 상황에, 내 정신은 혼란스러웠다.

    **[장면 17]**
    **배경:** 서진은 카이로스의 행동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소총을 들어 맹수를 향해 발사한다. 둘은 잠시 망설임도 없이 서로의 등을 맡긴 채 공통의 적과 맞서 싸운다.
    **효과음:** *타타탕! 콰앙! (소총 발사음)*

    **[장면 18]**
    **배경:** 격렬한 전투 시퀀스. 서진은 인간의 전투 방식으로 빠르고 정확하게 약점을 노리고, 카이로스는 젤렌 종족 특유의 유려하고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으로 맹수를 교란한다. 그들의 움직임은 서로 다르지만,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다.
    **내레이션 (서진):** 이 상황이 말이 되는가? 젤렌과 인간이, 이 붉은 행성 위에서 생존을 위해 함께 싸우고 있다니. 서로를 향한 증오심은, 잠시 동안 사라졌다.

    **[장면 19]**
    **배경:** 맹수가 마침내 쓰러진다. 거대한 몸체가 진동하며 땅바닥에 처박힌다. 서진과 카이로스 모두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기를 내린다. 둘의 몸에는 새로운 상처들이 늘어나 있다.
    **효과음:** *쿵! (맹수 쓰러지는 소리)*

    **[장면 20]**
    **배경:** 둘이 마주 본다. 처음에 가득했던 적의는 사라지고, 대신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한다. 놀라움, 피로,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동지애.
    **대사 (서진):** (작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맙다.
    **대사 (카이로스 / 젤렌어, 자막):** (그의 헬멧이 반쯤 열리며, 날카로운 턱선과 푸른 눈동자가 드러난다) …생존은, 종족을 가리지 않으니.

    **[장면 21]**
    **배경:** 서진의 손 클로즈업. 흙과 피로 얼룩진 인간의 손. 이어서 카이로스의 손 클로즈업. 섬세하지만 강인해 보이는 젤렌 종족의 손. 서로 다른 손이지만, 강인함은 똑같다.
    **내레이션 (서진):** 우리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고 죽여야 할 적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우리는 그저 생존자였다.

    **[장면 22]**
    **배경:** 황량한 에리두의 지평선. 서진과 카이로스가 서로에게서 적당한 거리를 둔 채 서 있다. 붉은 태양이 그들을 비추고, 다음 행동을 묻는 듯한 침묵이 흐른다.
    **내레이션 (서진):** 이 순간의 평화는, 얼마나 허망하고 또 얼마나 달콤한가.

    **[장면 23]**
    **배경:** 저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점멸하는 불빛. 그리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엔진 소리. 젤렌 함선의 탐색등이 어둠을 가른다.
    **효과음:** *윙… 쉬이이이잉… (젤렌 함선 접근음)*

    **[장면 24]**
    **배경:** 카이로스의 푸른 눈동자 클로즈업. 한순간 흔들리지만, 이내 냉정함을 되찾는다. 이어서 서진의 눈동자 클로즈업. 복잡한 감정이 스친다.
    **대사 (서진 / 내레이션):** 이 붉은 별 위에서, 우리는 적이 아니었다. 적이 될 수 없었다. 적이어서는 안 됐다.
    **대사 (카이로스 / 젤렌어, 자막):** …시간이 없다.

    **[장면 25]**
    **배경:** 카이로스가 서진을 뒤로한 채 소리 없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진다. 서진은 그가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본다. 카이로스가 사라진 자리에, 그의 갑옷 파편 조각 하나가 떨어져 있다. 젤렌 기술로 만들어진, 매끈하고 검은 조각.
    **효과음:** *스윽… (카이로스 움직이는 소리)*

    **[장면 26]**
    **배경:** 서진이 조심스럽게 그 조각을 주워든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그녀의 손가락이 조각의 표면을 쓸어내린다.
    **대사 (서진 / 내레이션):** 하지만… 우리는 적이었다. 돌아갈 곳에서는. 증오와 파괴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는.

    **[장면 27]**
    **배경:** 서진의 어깨에 놓인 무전기에서, 강현준 소대장의 목소리가 지지직거리며 들려온다. 멀리서 인간 함선의 탐색등도 번쩍인다.
    **효과음:** *지지직… 현준 (무전): 서진! 서진! 들리나?! 응답하라!*

    **[장면 28]**
    **배경:** 서진이 손에 쥔 젤렌 조각을 꽉 쥐었다가, 이내 자신의 전투복 안주머니에 넣는다. 그녀는 복잡한 표정으로 인간 구조 신호가 오는 방향을 바라본다.
    **내레이션 (서진):** 그 붉은 별에서의 조우는…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금지된 사랑의 씨앗이, 전쟁의 폐허 속에 뿌려진 순간이었다.

    **[에피소드 종료]**

  • 오컬트 호러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아르카나의 심연: 첫 번째 울림

    **장르:** 오컬트 호러
    **줄거리:** 엘리트 마법학교 지하에 숨겨진 끔찍한 금기

    **[장면 1] 아르카나 마법 아카데미 – 중앙 도서관, 오후**

    **(배경: 고풍스러운 아치형 천장과 벽을 가득 채운 오래된 책장들. 마법으로 켜진 촛불들이 은은하게 빛나고, 공기 중에는 먼지와 낡은 종이 냄새가 섞여 있다. 학생들은 낮은 목소리로 대화하거나 책을 읽고 있다. 유진은 높이 쌓인 고서들 사이에 파묻혀 인상을 찌푸린 채 두꺼운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유진 (내레이션):** 아르카나 마법 아카데미. 세상의 모든 지식과 마법의 정수가 모인 곳. 빛나는 재능을 가진 자만이 발을 들일 수 있는, 꿈의 요람이자… 완벽하게 포장된 거짓의 성지.

    **(화면: 유진의 얼굴 클로즈업. 피곤함과 짜증이 섞인 표정.)**

    **유진:** 젠장, ‘고대 봉인술의 퇴화와 현대 마법의 재해석’이라니. 교수님은 대체 뭘 원하시는 거야? 봉인술이 왜 퇴화했는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아니, 애초에 그런 걸 연구할 필요가 있나? 봉인해야 할 만큼 강력한 존재는 이미 다 사라진 거 아니야?

    **(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책장을 넘기자, 먼지가 후욱 일어난다. 옆에 앉아있던 하준이 재채기를 한다.)**

    **하준:** 엣취! 야, 유진아. 좀 살살 넘겨라. 코 간지러워 죽겠다.

    **(화면: 하준은 유진보다 훨씬 여유로운 모습으로, 간단한 마법 역사 개론서를 펼쳐놓고 있다.)**

    **유진:** 어휴, 미안. 근데 도저히 모르겠어. 이 고대 봉인술 파트는 너무 난해해. 현대에 와서 거의 쓰이지 않는 기술인데, 왜 교수님은 이걸 파고들라고 하시는 걸까?

    **하준:** 글쎄. 고대 마법 교수님이시니까 뭐든 옛날 게 최고라고 생각하시겠지. 정 힘들면 그냥 대충 적어. 어차피 이 과목, 학점 잘 받기 어렵잖아.

    **유진:** 대충은 안 돼. 난 그래도 아카데미에 온 이상,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고 싶다고. 특히나 이런 알 수 없는 부분일수록 더 파고들어야 직성이 풀려. 어쩌면 이 안에서 뭔가 중요한 걸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하준:** 너의 그 호기심이 언젠가 너를 잡아먹을 거다, 유진아.

    **유진:** 걱정 마. 아직까지는 호기심이 날 살렸으니까. (책을 다시 들여다보며) 아… 아무래도 이 책으로는 안 되겠어. ‘대륙 최하층 봉인 마법사 길드의 기록’이라는 고서가 있다는데, 그건 제7 금지 구역에 있잖아.

    **하준:** 제7 금지 구역? 거긴… 거의 아무도 안 가는 곳 아니야? 사서 선생님도 꺼리는 곳인데, 네가 어떻게 들어가려고?

    **유진:** 방법은 있어. (음흉하게 웃으며) 특별 연구 자료 열람 신청서를 내야지.

    **[장면 2] 아르카나 마법 아카데미 – 중앙 도서관, 제7 금지 구역 입구**

    **(배경: 일반 열람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 어두운 복도를 지나 낡고 육중한 철문 앞에 섰다. 문 위에는 닳아버린 룬 문자들이 새겨져 있고, 희미한 푸른빛을 낸다. 공기가 더 무겁고 차갑게 느껴진다.)**

    **(사서가 망설이는 표정으로 문을 열어준다.)**

    **사서:** 유진 학생.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곳은 일반적인 자료가 아닙니다. 오래된 마법의 잔재가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 조심하세요. 그리고… 너무 깊게 파고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유진:** 네, 사서 선생님. 조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서가 굳은 얼굴로 문을 닫고, 유진은 안으로 들어선다. 문이 닫히자 ‘철컥’ 하는 무거운 소리가 울리고, 복도마저 어둠 속으로 잠기는 듯하다.)**

    **(배경: 제7 금지 구역 내부. 일반 책장과는 다른, 돌로 된 벽감에 고서들이 꽂혀 있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있고, 곳곳에 거미줄이 쳐져 있다. 책들은 마법으로 보호되어 있지만, 왠지 모를 음습한 기운이 감돈다. 창문이 없어 더욱 답답하다.)**

    **유진 (내레이션):** 이곳은… 꼭 거대한 무덤 같았다. 살아있는 지식의 보고가 아니라, 잊혀진 비밀들을 봉인해 둔 관처럼.

    **(유진은 손에 든 마법 등불을 켜고, 주변을 살핀다. 이내 그녀가 찾던 책을 발견한다. 제목이 희미하게 새겨진 낡은 가죽 장정의 책이다.)**

    **유진:** ‘대륙 최하층 봉인 마법사 길드의 기록’… 드디어 찾았다!

    **(책을 뽑으려는 순간, 유진의 손에 닿는 벽의 감촉이 이상하다. 다른 돌과는 다르게 매끄럽고,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손바닥을 대자 싸늘한 냉기가 스며든다.)**

    **유진:** 어라?

    **(유진은 책을 뽑지 않고 벽을 손으로 훑는다. 다른 벽과 다른 재질, 그리고 미세하게 벌어진 틈이 느껴진다. 귀를 대자, 아주 희미하게, 마치 심장이 뛰는 듯한 ‘두근… 두근…’ 하는 낮은 울림이 들린다.)**

    **유진 (속으로):** 이게 뭐지? 건물 구조도에서 이런 곳은 없었는데…

    **(유진은 손가락으로 틈새를 더듬다, 틈새를 누르자 벽이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낡은 돌덩이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가고, 이내 작은 틈이 생긴다. 그 틈 안에서 썩은 흙과 곰팡이 냄새가 훅 끼쳐온다.)**

    **유진 (내레이션):** 그 순간, 내 안의 호기심이 모든 경고음을 집어삼켰다. 어쩌면, 내가 찾던 ‘봉인술의 퇴화’에 대한 실마리가 저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과 함께.

    **(틈 사이로 마법 등불을 비춰본다. 안쪽은 좁고 어둡지만, 뭔가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유진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안쪽을 더듬는다. 손에 잡힌 것은 얇고 바스락거리는 양피지 뭉치였다.)**

    **[장면 3] 유진의 기숙사 방 – 밤**

    **(배경: 아카데미 기숙사의 소박한 방. 침대 옆 작은 책상에 유진이 꺼내 온 양피지를 펼쳐놓고 있다. 램프 불빛 아래, 양피지는 세월의 흔적으로 누렇게 변색되어 있다.)**

    **유진:** 이걸 사서 선생님께 보여드려야 하나… 아니, 그분이 이런 걸 숨겨둔 걸 알면 더 이상 열람을 못하게 할 거야.

    **(펼쳐진 양피지에는 삐뚤빼뚤한 고대 문자와 함께 손으로 그린 듯한 조악한 지도가 그려져 있다. 지도는 아카데미의 지하를 나타내고 있는데, 공식적인 지하 1, 2층이 아닌, 그 아래로 더 깊숙이 파고드는 미지의 공간들이 그려져 있다.)**

    **유진 (내레이션):** 지도는 조악했지만, 그 내용만은 섬뜩할 정도로 명확했다. 아르카나 아카데미 지하에 존재하지 않는, 금지된 영역.

    **(화면: 지도 클로즈업. ‘지하 제3층’, ‘심연의 복도’, ‘봉인된 문’ 등의 고대 문자들이 보인다. 그리고 지도 한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커다란, 불길한 문양 하나가 그려져 있다. 뾰족한 뿔이 달린 거대한 눈동자에서 검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듯한 형상이다.)**

    **유진:** 이건… 뭐야? 공식 지도에는 이런 곳은 없어. 도대체 언제 누가 이런 지도를 그린 거지? 그리고 이 문양은… 왠지 모르게 불길해.

    **(그녀는 양피지 구석에 작게 적힌 문구를 발견한다. 고대어로 쓰여 있지만, 유진은 고대어에 능숙하다.)**

    **유진:** “…어둠의 심장이 이 땅 아래 잠들어 있다. 그 깨어남은 모든 것의 끝이 될지니, 피로써 그 잠을 지켜야 하리라.”

    **(유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어둠의 심장’? ‘피로써 잠을 지켜야 하리라’? 이 지도는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하준이 들어온다.)**

    **하준:** 야, 유진아! 오늘 저녁식사… (양피지를 보고 멈칫한다) 그게 뭐야?

    **유진:** (허둥지둥 양피지를 숨기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하준아!

    **하준:** (양피지를 들여다본다.) 뭐야, 이 낡은 종이 쪼가리는? 너 설마 또 도서관 금지 구역에서 뭘 주워온 거야? 저번에 이상한 마법 거울 가져왔다가 일주일 내내 가위에 눌렸잖아!

    **유진:** 이건 달라. 봐. (양피지를 보여주며) 이 지도… 아카데미 지하를 그린 것 같아. 그런데 공식 지도에는 없는 곳이야. 그리고 이 문구… ‘어둠의 심장’.

    **(하준은 지도를 들여다본다. 그의 표정이 점점 굳어진다.)**

    **하준:** 미쳤어? 학교 지하라고? 공식 지도에도 없는 곳을? 너 진심으로 이런 걸 믿는 거야? 이건 그냥… 누군가 장난으로 그린 거겠지. 아니면 옛날 마법사들이 꾸며낸 허무맹랑한 이야기거나.

    **유진:** 아니, 달라. 이 진동… 제7 금지 구역 벽에서 느껴졌던 그 미세한 진동이랑, 이 지도에 그려진 봉인 문양이 어딘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 ‘피로써 그 잠을 지켜야 한다’는 말도… 왠지 소름 끼치고.

    **하준:** 야, 유진아. 그냥 갖다 버려. 이런 건 네 호기심 영역을 넘어선 일이야. 학교 지하에 뭔가 위험한 게 있다는 소문은 많지만… 그건 다 괴담일 뿐이야.

    **유진:** 괴담이라고? 하지만 너무 생생해. 이 지도, 그리고 그 벽의 감촉. 그리고 ‘어둠의 심장’이라니… 도대체 뭘 봉인해 둔 걸까? 난 알아내야겠어.

    **하준:** 뭐? 알아내? 너 설마… 그 지하로 내려가려는 생각인 건 아니지?

    **유진:** (양피지를 꽉 쥔다. 눈빛이 결의에 찬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하준:** 야, 유진아! 안 돼!

    **[장면 4] 아르카나 마법 아카데미 – 오래된 지하 복도, 자정**

    **(배경: 낡고 어두운 지하 복도. 먼지가 자욱하고,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유진이 마법 등불을 들고 앞장서고, 하준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뒤를 따른다.)**

    **하준:** 야… 유진아… 정말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그냥 돌아가면 안 될까? 난 지금도 어딘가에서 뼈다귀 기사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고…!

    **유진:** 걱정 마. 여기는 아직 공식 지도에 있는 지하 1층 복도야. 우리가 찾는 곳은 더 아래라고. (지도를 들여다보며) 지도를 보면 이 근처에 오래된 연금술 실험실이 있는데… 그 뒤에 숨겨진 문이 있다고 했어.

    **(복도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천장에서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유진은 지도에 표시된 대로 낡은 벽화를 지나 폐쇄된 연금술 실험실 문 앞에 섰다. 퀴퀴한 쇠 냄새가 난다.)**

    **유진:** 여기야!

    **(유진은 조심스럽게 실험실 안으로 들어선다. 낡은 실험 기구들이 녹슨 채 방치되어 있고, 벽에는 알 수 없는 마법 기호들이 그려져 있다.)**

    **하준:** 으으… 냄새 봐. 역겨워.

    **(유진은 지도를 다시 확인하며 실험실 안쪽 벽을 더듬는다. 벽에 걸린 낡은 태피스트리를 걷어내자, 다른 벽과 확연히 다른, 검은색 돌로 된 부분이 드러난다. 돌에는 희미한 룬 문자가 새겨져 있다.)**

    **유진:** 찾았어!

    **(유진이 손을 대자, 룬 문자가 희미하게 빛나더니 벽이 옆으로 스르륵 열리기 시작한다. 안에서는 지독한 흙냄새와 함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차갑고 음산한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하준:** 젠장…!

    **(열린 문 안쪽은 그야말로 심연이었다. 한 줄기 등불 빛조차 삼켜버릴 듯한 어둠 속으로, 불규칙하게 깎인 돌계단이 끝없이 이어진다. 계단 벽에는 알 수 없는 검붉은 얼룩들이 지워지지 않은 채 남아있고, 공기 중에는 묘한 비린내가 섞여 있다.)**

    **유진 (내레이션):** 그곳은 평범한 학교의 지하가 아니었다. 태초의 어둠이 응축된 듯한, 모든 것을 집어삼킬 준비를 마친 끔찍한 구렁텅이였다.

    **(그때, 깊은 어둠 속에서 아주 멀리서부터, 하지만 분명하게 들려오는 소리. 규칙적이면서도 둔탁한,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아주 느리게 움직이는 듯한 ‘쿵… 쿵…’ 하는 울림. 그 소리는 심장 박동 같기도, 아니면 거대한 망치가 바닥을 때리는 것 같기도 했다.)**

    **하준:** (얼굴이 창백해진다.) 유… 유진아… 이건… 이건 아니야…!

    **(유진의 손에 든 등불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그녀의 눈은 공포와 함께, 이 모든 것의 근원을 파헤치려는 강렬한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유진 (내레이션):** 나는 알았다. 이곳이 바로, 아르카나 아카데미의 빛나는 외피 아래 숨겨진, 그 끔찍한 금기의 심장부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 심장을 향해 발을 내딛고 있었다.

    **(화면: 유진이 등불을 들고 돌계단을 향해 한 발 내딛는 뒷모습. 그 아래는 끝없는 어둠과 불길한 ‘쿵… 쿵…’ 소리만이 가득하다. 마지막 컷은 계단 아래쪽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나는, 지도 속 ‘뾰족한 뿔이 달린 거대한 눈동자’와 유사한 문양의 실루엣이다.)**


    **[계속]**

  • 스페이스 오페라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화: 벽장 속의 속삭임

    민준은 익숙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푹신한 소파가 하루 종일 뻣뻣하게 굳었던 어깨를 받아주는 느낌은 언제나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 이 고층 아파트의 18층 거실은 삭막한 도시의 야경을 한눈에 담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수많은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아득한 은하수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민준의 시선은 그 현란한 풍경에 머물지 못했다. 그의 눈은 거실 한가운데, 방금 전까지 멀쩡히 놓여 있던 커피잔이 사라진 자리를 맴돌았다.

    분명히, 여기에 두었었다. 퇴근하고 돌아와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마시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잠시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인데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하… 피곤한가 보네.”

    민준은 낮게 중얼거렸다. 피곤하면 헛것이 보인다는 말처럼, 피곤하면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도 잊을 수 있는 법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주변을 더듬었다. 혹시 바닥에 떨어져 보이지 않는 건가? 테이블 아래를 들여다보고, 옆에 놓인 책꽂이까지 뒤졌지만 커피잔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냉장고 문을 열어 탄산수를 꺼냈다. 컵을 들고 거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사라졌던 커피잔이 소파 테이블 정중앙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커피와 함께.

    민준은 자신이 들고 있던 탄산수 컵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다. 심장이 갑작스레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의 손끝이 저릿했다.

    “이게… 뭐지?”

    그는 헛웃음을 지었다. 누가 장난을 친 건가? 하지만 그는 이 넓은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었다. 오늘 방문한 사람도 없었다. 도어락은 완벽하게 잠겨 있었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커피잔에 다가갔다. 커피는 아직 따뜻했다. 방금 전 자신이 내려 마신 커피가 맞았다. 찻잔 테두리에 희미하게 묻은 그의 입술 자국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는 애써 머릿속의 비현실적인 생각을 지워버리려 노력했다. 그래,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거야. 아니면 잠시 정신이 나갔었나? 그는 커피잔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에 컵을 내려놓으며 그는 일부러 큰 소리를 냈다.

    “별거 아니야, 별거 아니라고!”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어쩐지 떨리고 있었다.

    밤은 깊어지고 있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커피잔이 저절로 제자리를 찾아오는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는 결국 휴대폰을 들어 인터넷 검색창에 ‘폴터가이스트’라는 단어를 입력했다. 괴기스러운 경험담들이 쏟아져 나왔다. 물건이 저절로 움직이고, 소리가 나고, 사람을 밀치기도 한다는 내용들.

    “젠장… 설마.”

    그는 휴대폰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리가 없어.

    그때였다.
    안방 문밖에서 ‘끄으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낡은 나무 문이 서서히 열리는 듯한 소리. 민준은 숨을 멈췄다.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속의 문을 응시했다.

    문은 닫혀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착각일까?

    ‘끼이익…’

    이번에는 좀 더 분명하게 들렸다. 거실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오래된 가구가 마찰하며 내는 듯한, 으스스한 소리. 민준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맨발로 바닥에 섰을 때, 발밑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냉기가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분명히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보일러도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열었다. 복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는 벽을 더듬어 거실 불을 켰다.

    환하게 밝아진 거실. 하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아무것도 움직인 흔적이 없었다. 민준은 한숨을 쉬었다.

    “내가 미쳤나 봐…”

    그는 중얼거리며 불을 끄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쾅!’

    거실 끝에 위치한 다용도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굉음은 아파트 전체를 울리는 듯했다. 민준은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을 느꼈다. 몸이 굳어버렸다.

    다용도실은 평소 잡다한 물건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그곳의 문은 항상 굳게 닫혀 있었고,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저절로 열릴 리 없었다. 그는 천천히,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다용도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이 열린 틈 사이로 어둠이 더욱 깊게 느껴졌다. 습하고 퀴퀴한 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한, 금속성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저 멀리 우주선이 엔진을 가동하는 듯한, 이상하고 기계적인 소리. 그 소리는 일반적인 잡음과는 달랐다. 뇌 깊숙한 곳을 자극하는 듯한, 미세한 진동을 동반한 소리였다.

    민준은 손을 뻗어 다용도실 안의 전등 스위치를 켰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전구가 깜박이며 어둠을 걷어냈다.

    그는 경악했다.
    다용도실 안은 난장판이었다. 선반 위의 물건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걸려 있던 빗자루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캔 음료수들은 터져서 내용물이 벽에 흥건하게 튀어 있었다. 마치 회오리바람이라도 휩쓸고 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난장판 속에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민준의 눈에 들어왔다.

    벽 한쪽 구석에,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이상한 문양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을 내는 그 문양은 마치 고대 문자의 조각 같기도 하고, 복잡한 회로도 같기도 했다. 그 문양 주변의 벽지는 미세하게 일렁이며, 마치 뜨거운 아지랑이처럼 공간이 왜곡되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 왜곡된 공간 너머에서, 아까 들었던 금속성의 웅웅거림이 한층 더 크게 울려 퍼졌다.

    민준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이것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현실의 법칙을 거스르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웅… 웅… 웅…’

    소리는 점점 커지고, 벽의 문양은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왜곡되는 공간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압축된 채 존재하려는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민준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그의 발은 바닥에 단단히 붙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다용도실 안쪽 구석에 놓여 있던 낡은 거울이 ‘쨍그랑!’ 하고 깨지는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그리고 그 거울 파편들이 바닥에 흩뿌려지는 순간, 푸른빛 문양의 왜곡된 공간 속에서, 마치 희미한 잔상처럼 거대한 눈동자 하나가 민준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는 섬뜩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숨이 막혔다.
    그것은 단순히 ‘본다’는 느낌이 아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 눈동자에 흡수되는 듯한, 아득하고 초월적인 공포였다.

    “흐읍… 흐으읍…”

    민준은 겨우 목구멍에서 쉰 소리를 짜냈다.
    다용도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차가운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하지만 그건 물리적인 바람이 아니었다. 마치 저 멀리, 우주의 심연에서 불어오는 듯한, 알 수 없는 존재의 차가운 숨결이었다.

    그 거대한 눈동자가, 일렁이는 푸른 문양 너머에서, 조금씩… 아주 조금씩…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은 확신했다.
    그것은 이 아파트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아파트를, 아니, 이 현실을 ‘뚫고’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눈앞에서, 차원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웅… 웅… 웅…’

    거대한 진동이 온몸을 때렸다. 민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순간, 등 뒤에서 무언가 차가운 것이 그의 발목을 쥐는 느낌에,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에테르니아: 망각의 잔영 (Aeternia: Echoes of Oblivion)

    **에피소드 1: 잊혀진 돌멩이와 균열의 속삭임**

    **[장면 1: 잊혀진 자들의 무덤, 입구]**

    **강민 (20대 후반 남성, 게임 닉네임: ‘서리발’)**
    (게임 속 캐릭터, 낡은 가죽 갑옷을 걸치고 한 손에는 녹슨 단검, 다른 손에는 묵직한 곡괭이를 들고 있다. 입구에 선 채 깊은 한숨을 내쉰다.)

    **서리발:** 하아… 이 지겨운 ‘잊혀진 자들의 무덤’이라니. 벌써 일주일째잖아. 대체 ‘은광석’ 조각은 어디에 숨어 있는 거야? 고작 제작 퀘스트 하나 깨자고 이걸 파고 있다니… 내가 생각해도 참 대단하다.

    (주위를 둘러본다. 입구는 거대한 석문으로 막혀 있고, 문틈으로 희미한 흙먼지가 새어 나온다. 주변에는 다른 플레이어의 흔적은커녕 몬스터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이미 고인물들이 버린, 효율 없는 저레벨 던전이었다.)

    **서리발:** (중얼거림) 아무도 안 오는 곳이라 몬스터도 젠이 느리네. 뭐, 덕분에 조용히 파밍이라도 할 수 있지만… 이쯤 되면 버그 아니야? 은광석 조각 드랍률이 이렇게 바닥일 리가 없는데.

    (맵을 띄워 자신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미 던전의 80% 이상을 탐색했음에도 여전히 목표물을 찾지 못했다. 지도는 낡고 희미한 선들로 가득하며, 미탐색 지역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서리발:** 에휴, 남은 곳은 저기 안쪽의 ‘영원의 회랑’ 뿐인가. 거긴 함정도 많고 몬스터도 짜증 나서 아무도 안 가던데… 설마 거기에 숨겨져 있을 리는 없겠지. 보통은 던전 초입부에 있어야 하는 재료인데.

    (망설이는 듯 잠시 멈춰 선다. 하지만 마감 기한이 임박한 제작 퀘스트를 생각하며 이내 결심한 듯 발걸음을 옮긴다.)

    **서리발:**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맵 100% 탐색이나 하고 오자. 나중에 ‘탐험가’ 칭호라도 받으면 이 고생이 아깝진 않을 거야.

    **[장면 2: 영원의 회랑]**

    (영원의 회랑은 이름과는 달리, 좁고 어두운 통로로 이루어져 있다. 천장에서는 간헐적으로 흙과 작은 돌들이 떨어져 내리고, 바닥에는 이끼 낀 돌들이 미끄럽게 널려 있다. 공기 중에는 눅눅하고 퀴퀴한 냄새가 가득하다.)

    **서리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으, 분위기 봐라. 괜히 ‘영원’이 아니네. 영원히 잊혀진 느낌인데.

    (앞서 가던 서리발의 시야에 희미한 빛이 들어온다. 통로가 끝나고 작은 원형의 방이 나타난다. 방 중앙에는 부서진 석상이 덩그러니 서 있고, 벽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서리발:** 여긴 또 어디야? 맵에도 표시 안 된 곳인데…

    (맵을 다시 확인하지만, 해당 지역은 여전히 미탐색 구역으로 표시되어 있다. 희미하게 빛나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쪽 벽에 다른 문양들과는 확연히 다른, 기묘한 돌 하나가 박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서리발:** 응? 저건 뭐지?

    (돌에 다가선다. 다른 돌들이 거칠고 투박한 반면, 이 돌은 표면이 매끄럽고 검은색을 띠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돌의 표면에는 복잡하고 미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손을 대자,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서리발:** (감탄) 와, 인게임에서 이런 디테일은 처음 보는데? 이걸 왜 아무도 발견 못 했지?

    (시스템 메시지가 뜨지 않는 것을 확인한다. 보통 이런 오브젝트는 [조사하기], [상호작용], [채취] 등의 옵션이 뜨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돌은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서리발:** 이상하네. 아무 반응이 없어. 단순한 장식인가? 그래도 뭔가 특별한 것 같은데…

    (그는 호기심에 돌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본다. 문양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자, 손가락 끝에서 아주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순간, 돌의 검은 표면에서 아주 희미한 푸른색 빛줄기가 스쳐 지나갔다.)

    **서리발:** 어? 봤어? 방금 빛이…

    (그는 다시 돌을 만져본다. 이번에는 엄지손가락으로 문양의 중앙을 지그시 눌러본다. 그러자 돌이 박혀있던 벽면에서 ‘쉬이익-‘ 하는 낮은 기계음이 들려왔다. 서리발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서리발:** 으악! 뭐야! 함정인가?!

    (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더니, 이내 옆으로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먼지가 자욱하게 쏟아져 나오고, 그 안에서 신비로운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서리발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리발:** (경악) 히, 히든 던전?! 아니, 히든 룸?! 이걸 내가 발견했다고?!

    **[장면 3: 숨겨진 방]**

    (열린 틈새로 보이는 방은 작고 아늑했다. 사방이 매끄러운 검은 돌로 마감되어 있었고, 공중에는 미세한 푸른색 입자들이 춤추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낡았지만 기품 있는 제단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투명한 수정구 하나가 빛을 내뿜고 있었다.)

    **서리발:**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선다. 발밑에서 ‘사각사각’ 소리가 난다. 바닥에는 오래된 마법진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크아… 이건… 이건 진짜 대박이다! 아무도 몰랐던 곳이야!

    (그는 수정구에 시선을 고정한다. 수정구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하며, 주변의 푸른빛 입자들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손을 뻗어 수정구를 만지려고 하자, 뇌리에 익숙한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알 수 없는 위험’이라거나 ‘강력한 마법의 기운’ 같은.)

    **서리발:** (속으로 생각) 보통 이런 건 만지면 폭발하거나, 강력한 몬스터가 튀어나오거나… 아니면 엄청난 버프를 주거나, 아예 퀘스트가 시작되거나 할 텐데.

    (그는 조심스럽게 수정구에 손을 가져간다. 망설임 끝에, 그의 손가락 끝이 차갑고 매끄러운 수정구의 표면에 닿았다. 예상했던 시스템 메시지는 뜨지 않았다. 대신, 수정구에서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강렬한 파동이 전해져 왔다.)

    **서리발:** 으읍?!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 차갑던 수정구는 순간적으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그의 손을 통해 그 열기가 몸속으로 전이되는 것 같았다. 눈앞이 잠시 하얗게 번쩍이더니, 그의 시야에 새로운 UI 창이 팝업 되었다. 게임 내에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검고 푸른 문양으로 장식된 창이었다.)

    **[시스템 메시지: <고대 마력의 잔영>이 당신의 본질에 깃듭니다.]**

    **서리발:** 뭐?! 고대 마력의 잔영?! 이게 무슨…

    (새로운 메시지가 이어서 뜬다. 이번엔 더 짧고 간결했다.)

    **[시스템 메시지: 미지의 근원이 당신의 내면에서 반응합니다.]**

    (그의 캐릭터 주변으로 푸른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보통 캐릭터가 레벨업을 하거나 새로운 스킬을 습득할 때 나타나는 이펙트와는 달랐다. 빛은 훨씬 더 깊고, 영롱했으며, 마치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듯했다.)

    **서리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본다) 내 안에… 뭐가 들어온 거지? 스킬 창에 아무것도 안 뜨는데?

    (그는 황급히 스킬 창을 열어본다. 새로운 스킬이나 버프 아이콘은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캐릭터 초상화 옆에, 전에 없던 작은 문양 하나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푸른색의 회오리 모양이었다.)

    **서리발:** 저건… 뭐지? 저런 아이콘은 없었는데…

    (그는 무심코, 습관처럼 손에 들고 있던 녹슨 단검을 휘둘러 본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가장 기본적인 공격 스킬인 ‘찌르기’를 사용했다. 휙!)

    (평소라면 단지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단검의 끝에서 푸른색의 마력 줄기가 얇게 뻗어 나가더니, 방 안의 검은 벽에 부딪혀 희미한 파동을 일으켰다. 파동이 사라진 자리에, 벽은 원래보다 훨씬 더 깊게 파여 있었다.)

    **서리발:** (입이 떡 벌어진다) 으어어?! 방금 그게… 뭐지?! 내 ‘찌르기’ 스킬이… 이렇게 강했나?!

    (단검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강화된 것도, 마법이 부여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가 스킬을 사용했을 뿐인데, 평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마법적인 효과가 추가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손목에 새겨진 작은 문양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서리발:** 고대 마력의 잔영… 미지의 근원… 설마… 설마 내가 지금…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게임에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게임 공략집에도, 위키에도 없는, 진정한 ‘히든 파워’를 손에 넣은 것만 같았다. 그는 이 엄청난 발견 앞에서 흥분과 함께,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서리발:** (전율하며) 이거… 이거 나 혼자 감당할 수 있는 힘인가?

    **[장면 4: 영원의 회랑, 복귀]**

    (서리발은 숨겨진 방에서 나와, 열린 벽이 다시 닫히는 것을 확인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흥분과 혼란이 뒤섞인 표정이 역력했다.)

    **서리발:** (숨을 헐떡이며) 방금 그건 꿈이 아니었어… 진짜였어. 평범한 찌르기 스킬에서 마법이 터져 나오다니… 이건 게임의 기본적인 시스템을 벗어난 일이야!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캐릭터 초상화 옆의 푸른 회오리 문양을 확인한다.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혹시 다른 스킬에도 적용되는지 궁금해졌다. 가장 쉬운 마법 스킬인 ‘불꽃 구슬’을 시전한다.)

    **서리발:** ‘불꽃 구슬!’

    (그의 손에서 평소보다 훨씬 크고, 선명하며, 푸른색 불꽃이 감도는 구슬이 생성되었다. 구슬은 마치 작은 별처럼 빛나며 공중을 맴돌았다. 이전에 시전하던 불꽃 구슬과는 비교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서리발:** (놀라움과 경악) 말도 안 돼…! 이 정도면 ‘고급 불꽃 폭탄’ 수준인데?! 마나 소모량은 그대로인데 위력이 몇 배나 강해졌어!

    (그는 벽에 불꽃 구슬을 날려본다.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벽의 일부가 시커멓게 그을리며 무너져 내렸다. 평소의 불꽃 구슬이라면 이 정도의 피해는 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깃든 이 미지의 힘을 믿을 수 없었다.)

    **서리발:**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나… 나 진짜 뭔가 엄청난 걸 손에 넣은 것 같아. 이 힘이 대체 뭐지? 어디서 온 거지? 그리고… 이걸 어떻게 써야 하는 거야?

    (그의 머릿속은 수많은 질문으로 가득 찼다. 그는 이제 단순한 ‘서리발’이 아니었다. 그는 고대 마력의 잔영을 품게 된, 에테르니아에서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을 걷게 된 존재였다. 그의 눈빛은 혼란스러움 속에서도, 새로운 모험에 대한 강렬한 기대감으로 빛나고 있었다.)

    **서리발:** (결심한 듯) 일단 여기서 나가자. 그리고… 이 힘에 대해 알아봐야 해. 반드시!

    (그는 낡은 던전을 뒤로하고,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딘다. 그의 손목에 깃든 푸른 회오리 문양은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에피소드 끝]**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청운학원 지하, 금단의 비명

    **1화. 푸른 하늘 아래 검은 심연**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청운학원 수련장은 늘 그랬듯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천 년 묵은 비룡목이 드리운 그늘 아래, 학원생들은 각자의 영력을 끌어올리며 술법 훈련에 매진했다. 공중을 가르는 비검의 섬광, 땅을 뒤흔드는 폭렬진의 굉음, 허공에 피어나는 오색 영기의 향연. 그 모든 활기찬 풍경 속에서 이현은 홀로 잔잔한 파동만을 겨우 일으키고 있었다.

    “후우…….”

    깊은 숨을 내쉬었지만, 식어버린 영력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그의 양손에서 겨우 피어난 작은 영기의 구슬은, 주변의 화려한 술법들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했다. 명문가 자제들이 대부분인 청운학원에서 그는 이방인이었다. 특별한 혈통도, 압도적인 재능도 없었다. 그저 어릴 적 우연히 발견한 심오한 영맥 덕분에 간신히 입학할 수 있었을 뿐. 사람들은 그의 영맥을 ‘잡영(雜靈)’이라 비웃었다. 어떤 속성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쓸모없고 불안정한 영혼의 뿌리라는 뜻이었다.

    “이현, 또 영력 고갈이냐? 네 그 빌어먹을 잡영은 언제쯤 제 기능을 할래?”

    경박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니 강지훈이었다. 청운학원에서도 손꼽히는 천재이자 강대한 ‘화염신군’ 가문의 적자. 그는 비웃음을 담은 눈으로 이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놈 같은 게 우리 학원의 명예를 더럽히는 꼴이라니. 차라리 수련장에 발 들이지 않는 게 낫지 않겠냐?”

    “그건 네가 신경 쓸 바 아니잖아.”

    이현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의 시선은 강지훈의 화려한 비단 도포와 번뜩이는 비검에 닿았다가, 이내 자신과 다를 바 없는 검소한 수련복으로 돌아왔다.

    “건방진 자식! 너도 내 술법에 한 번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겠군!”

    강지훈이 코웃음 치며 손바닥을 펼쳤다. 붉은 화염이 그의 손에서 일렁였다. 순간, 송백 사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수련장을 가로질렀다.

    “강지훈! 당장 그만두지 못할까!”

    송백 사부의 엄한 시선에 강지훈은 움찔하며 손안의 화염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이현에게 독기를 품고 있었다.

    “흥, 오늘은 송백 사부 덕분에 목숨 건진 줄 알아라.”

    강지훈이 비웃음을 남기고 사라지자, 이현은 바닥에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잡영’이라는 비난은 언제나 그의 심장을 갉아먹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은 호기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잡영은 분명 불안정했지만, 때때로 다른 영맥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묘한 파동을 감지하곤 했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속성을 미약하게나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영맥이 가장 격렬하게 반응하는 곳은 다름 아닌 청운학원 지하 깊은 곳이었다. 학원의 심장부, 학원장의 서고 뒤편에 위치한 봉인된 문. 그곳에는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금단의 영역이 존재했다. 어릴 적 우연히 주워 들었던 학원 관리인의 투덜거림, “차라리 그 지하가 아예 없었다면 편했을 것을….”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은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날 밤, 이현은 잠 못 이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학원 전체가 고요함에 잠겨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잡영은 다시 한번 미약하게나마 울렁이기 시작했다. 강하게 끌어당기는 듯한 기묘한 파동. 마치 누군가 그를 간절히 부르는 것만 같았다.

    “대체 저 안에는 뭐가 있는 거지…?”

    그는 결심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학원장 서고를 향했다. 낡은 복도를 지나 서고의 후미진 곳에 이르자, 희미한 달빛 아래 거대한 돌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위에는 고대의 봉인술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앞에서조차 잡영은 격렬하게 반응했다.

    이현은 숨을 죽이고 돌문을 감쌌던 봉인진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오래된 문헌에서 본 적 있는 해법이 그의 머리를 스쳤다. 잡영의 특성을 이용해 모든 속성의 영기를 미세하게 조절할 수 있다면, 봉인진의 균형을 일시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몰랐다.

    손가락 끝에서 희미한 영기가 피어났다.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초록색… 마치 무지개처럼 다양한 색상의 영기가 그의 손끝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며 돌문에 새겨진 봉인진을 더듬었다. 한 치의 오차라도 있었다면 봉인진은 즉시 경보를 울렸을 것이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끼이이익—!

    길고 끔찍한 쇳소리와 함께 돌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스며 나오는 것은 차가운 공기와 함께 진득한 곰팡내, 그리고 비릿한 피 냄새였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내부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었다. 이현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돌문은 그의 뒤에서 다시 닫혔고, 철커덕 하는 소리는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은 낡고 축축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거대한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고, 영기의 파동은 혼탁해졌다. 그의 잡영은 이제 통증에 가까울 정도로 강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계단의 끝에 닿자, 거대한 지하 공간이 드러났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이현의 숨을 멎게 만들었다.

    수십 개의 쇠사슬이 천장에서부터 늘어져 있었다. 그 쇠사슬들은 붉은색 비단으로 감싸인 거대한 제단 주위에 늘어선 석상들에 연결되어 있었는데, 석상들은 하나같이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석상마다 봉인되어 있는 것들은… 인간의 형태를 한 무언가였다. 그것들은 모두 뼈만 남은 채 말라비틀어져 있었지만, 그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도의 고통과 증오의 기운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제단의 중앙에는 검붉은 빛을 내뿜는 거대한 수정구가 놓여 있었다. 수정구는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불규칙하게 쿵, 쿵, 하고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검은 영기가 뿜어져 나와 사슬에 묶인 존재들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 *흡수*되고 있었다.

    “이게… 대체….”

    이현의 눈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끔찍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비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과 절망, 그리고 한없는 원한이 뒤섞인 소리였다.

    이현은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울음소리의 근원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어둠이 걷히고, 그의 눈앞에 드러난 것은… 쇠사슬에 묶여 천장에 매달려 있는 또 다른 존재였다. 그것은 아직 완전히 말라붙지 않은, 희미하게나마 생기가 남아있는 듯한 인간의 형체였다. 몸 전체가 기이한 고대 문자로 뒤덮여 있었고, 그 문자들이 붉은색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존재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지만, 이현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끔찍한 고통의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저 존재임을. 그리고 저 존재가 발하는 미약한 영기가, 자신이 학원 지하에서 감지했던 기묘한 파동의 근원임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매달려 있던 존재의 고개가 천천히 이현 쪽으로 돌아갔다. 영혼이 없는 듯 텅 비어 있는 눈동자. 하지만 그 속에는 찰나의 순간, 형언할 수 없는 증오와 함께 어떤 *강렬한 시선*이 이현을 꿰뚫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했다. 이현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금단의 광경과, 자신을 꿰뚫는 존재의 시선 속에서, 학원의 푸른 하늘 아래 숨겨진 검은 심연의 비밀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이곳은 단순한 금기가 아니었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 사이버펑크 독립적인 단편 소설

    네오서울 2372. 도시의 심장은 위로 솟아올라 크롬과 홀로그램의 거대한 정글을 이루고, 그 그림자는 아래, 썩어가는 구시가지, 즉 ‘언더크로프트’의 심연을 삼켰다. 선우는 그 그림자 속에서 살았다. 한때 번성했던 지상 세계의 잔해를 뒤져 희귀한 부품이나 미등록 데이터를 찾아다니는 스캐빈저였다. 그의 삶은 낡은 사이버네틱 팔다리와 고물 데이터패드의 점멸하는 화면처럼 불안정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언더크로프트 7구역, 과거에는 거대한 지하철 노선이었으나 이제는 거미줄처럼 얽힌 폐허가 된 터널 속을 헤치고 있었다. 공기는 축축하고 금속 비린내가 진동했다. 선우의 시야 인터페이스에는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가득했다. “젠장, 여기 통신은 언제나 이 모양이지.” 그는 중얼거렸다. 그의 보조 AI, ‘지니’가 삑사리 나는 목소리로 응답했다.

    “네트워크 연결 불량률 98%, 선우님. 외부 통신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목표물 감지 확률 0.05% 이하. 철수하시겠습니까?”

    “닥쳐, 지니. 0.05%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가끔 그 0.05%가 인생을 바꾸거든.”

    선우는 낡은 작업화로 바닥에 널린 파편들을 걷어찼다. 그의 임플란트 된 눈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에너지 잔류물을 쫓았다. 7구역은 유난히 ‘죽은’ 구역이었다. 전자파가 기묘하게 차단되어 선우의 스캐너조차도 먹통이 되는 곳. 고대의 방어막이라도 쳐져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남들이 찾지 못한 귀한 것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

    오랜 탐색 끝에, 그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 앞에 섰다. 벽에는 정교하지만 오랜 세월에 풍화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현대 도시의 설계 방식과는 전혀 다른, 고대의 건축 양식이었다. 선우의 손이 벽을 훑었다. 차가운 금속 대신, 이상하게 매끄럽고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그의 사이버네틱 팔이 스캐너를 뻗었다.

    “지니, 여기 뭔가 이상해. 모든 스펙트럼에서 물질 반응이 전혀 없어.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감지 실패, 선우님. 벽은 존재하지만, 스캔할 수 없습니다.”

    선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스캔할 수 없는 벽’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플라스마 토치를 꺼내 들었다. 푸른 불꽃이 벽을 향해 뿜어져 나왔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녹아내리는 것도 아니고, 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불꽃 자체가 벽에 흡수되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그는 짜증을 내며 토치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우연히 손바닥을 벽에 완전히 밀착시켰을 때였다. 손바닥에 희미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벽 안에서 무언가가 맥동하는 듯한. 그의 사이버네틱 팔의 감각 증폭기가 오작동을 일으키며 신경망으로 이상한 파동을 쏘아보냈다. 두통이 밀려왔다.

    그 순간, 벽의 문양이 선우의 손바닥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아주 미약한, 푸른빛이었다. 빛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벽을 따라 흐르더니, 이내 거대한 원을 그리며 벽 중앙에서 합쳐졌다. 거대한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은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 안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지만,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선우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내부는 원형의 공간이었다. 벽은 매끄러운 검은 돌로 되어 있었고, 천장에서는 알 수 없는 발광체가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방 중앙에는, 거대한 크리스탈 기둥이 솟아 있었다. 기둥의 표면에는 정교한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안에서 고동치는 듯한 푸른빛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전기의 빛과는 달랐다. 생명의 빛, 혹은 어떤 영혼의 빛 같았다.

    선우는 기둥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사이버네틱 팔이 저절로 뻗어 나갔다. 손끝이 크리스탈에 닿는 순간, 거대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온몸의 회로가 쇼트 나는 듯한 섬뜩한 고통이 밀려왔다. 그의 사이버네틱 임플란트들이 비명을 지르며 정지했다. 시야 인터페이스는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찼고, 모든 감각이 마비되었다.

    “으아악!”

    그는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통증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그 자리를 거대한 에너지의 흐름이 채웠다. 선우의 눈앞에는 크리스탈 기둥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이 거대한 용처럼 솟아올라 그의 몸을 감쌌다. 빛은 그의 피부를 뚫고, 혈관을 따라 흐르고, 뇌 속까지 침투하는 듯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선우는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사이버네틱 팔과 다리는 멀쩡했다. 아니, 멀쩡한 것을 넘어선 이상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의 시야 인터페이스가 다시 활성화되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이전에는 그저 데이터를 분석하고 시각 정보를 보정하는 기계적인 화면이었지만, 지금은…

    그는 방의 벽을 바라봤다. 벽의 검은 돌 사이에서 흐르는 미세한 에너지의 줄기가 보였다. 천장의 발광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단순한 빛이 아니라, 어떤 에너지가 응축된 덩어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상이 달라 보였다. 모든 것이 에너지로 이루어진 것처럼, 그 흐름과 맥동이 눈에 보였다.

    “지니? 지니!” 선우가 다급하게 불렀다.

    “활성화되었습니다, 선우님. 그러나… 시스템 오류 발생. 인식 불가한 새로운 프로세스가 감지되었습니다. 제어 불능.” 지니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불안정하고 떨렸다.

    선우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손바닥 중앙에 희미하게 푸른색 문신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크리스탈 기둥에서 봤던 그 문양이었다. 그는 문양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손끝에서 푸른색 섬광이 튀어 나왔다. 섬광은 바닥의 검은 돌에 닿자마자, 돌을 작은 파편으로 산산조각 냈다.

    “이게… 뭐야?”

    그는 경악했다. 자신의 손에서 이런 강력한 에너지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것은 플라스마 토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순수한 힘이었다.

    그때였다. 밖에서 둔탁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젠장!”

    선우는 닫히는 문을 향해 달려갔다. 문은 이미 절반쯤 닫혀 있었고, 그 틈새로 헬릭스 코퍼레이션의 경비 드론의 불빛이 번쩍이는 것이 보였다. 헬릭스 코퍼레이션, 언더크로프트의 모든 자원을 탐내는 거대 기업. 그들이 이곳을 찾아냈단 말인가?

    “선우님! 외부 에너지 반응 감지. 매우 강력합니다. 이 지점에서 발생한 충격파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지니가 외쳤다.

    자신이 크리스탈에 손을 댔을 때 발생한 에너지 파동이 그들을 이끌었을 터였다. 선우는 절망적으로 닫히는 문틈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손바닥에 새겨진 문양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그는 문을 향해 에너지를 쏘았다.

    푸른 섬광이 문틈으로 뿜어져 나갔다. 밖에서 경비 드론의 기계음이 비명처럼 끊겼고, 이내 금속이 녹아내리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문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며 파괴되었다.

    선우는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에 다시 한번 경악했다. 바깥 터널은 엉망진창이었다. 경비 드론 두 대는 녹아내린 금속 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처박혀 있었고, 그 옆에는 헬릭스 소속의 정찰병 두 명이 재가 되어 쓰러져 있었다. 불과 몇 초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마법’ 같은 힘이 한 일이었다.

    “이런… 씨발.”

    선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바닥의 문양은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단순한 스캐빈저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이 낡고 죽어가는 세상에 감춰진 고대의 힘을 깨운 존재였다. 이 힘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삶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었다. 어쩌면 이 힘은 그를 거대한 위험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 지옥 같은 언더크로프트에서 벗어날 유일한 열쇠일지도 몰랐다.

    선우는 터널 저편에서 들려오는 또 다른 드론들의 엔진 소리를 들었다. 헬릭스 코퍼레이션은 그를 절대 놓아주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이전의 선우가 아니었다. 그의 심장 속에서, 그리고 손바닥의 문양 속에서, 고대의 마력이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폐허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은 이전보다 가벼웠고,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길을 읽고 있었다. 선우는 알았다. 이 힘을 이해하고, 제어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이 썩어가는 도시의 운명까지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SF (공상과학)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새벽의 황사 낀 하늘은 핏물이라도 쏟아부은 듯 붉었다. 준은 갈라진 입술을 혀로 축이며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 속을 걸었다. 낡은 방진 마스크는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고, 텁텁한 흙먼지가 매 순간 목구멍을 긁어댔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늘 똑같았다. 무너진 빌딩, 뼈대만 남은 자동차, 그리고 이름 모를 잡초들이 뒤덮은 검은 콘크리트 바닥.

    “젠장, 물….”

    준의 중얼거림은 이내 바람에 흩어졌다. 어깨에 멘 낡은 배낭은 묵직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건 텅 빈 물통과 거의 바닥을 드러낸 식량뿐이었다. 사흘째 마실 물 한 모금을 찾지 못했다. 목마름은 이제 고통을 넘어 환각처럼 아른거렸다.

    그는 무너진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다 멈춰 섰다. 저 멀리,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거대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쇼핑과 유흥의 중심지였을 ‘그린 마트’ 간판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폐허 속에서 저 정도 규모의 건물이 살아남은 건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희망의 빛이었다.

    “혹시라도….”

    희미한 기대감에 준은 발걸음을 옮겼다.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건물 파편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주변은 고요했다. 바람 소리마저 삼켜버린 듯한 적막감. 그 침묵은 늘 그랬듯, 다음 순간 모든 것을 찢어발길 것 같은 예고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입구는 이미 산산조각 나 있었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햇빛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였다. 준은 낡은 전술 나이프를 꺼내들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쇠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내부는 지옥 그 자체였다. 진열대는 쓰러지고 상품들은 내용물이 튀어나온 채 짓밟혀 있었다. 몇 십 년 전의 흔적들이 먼지 속에 박제되어 있었다. 준은 바닥에 흩어진 캔들을 훑었다. 대부분 찢어지거나 부패해 있었다. 기대는 빠르게 실망으로 변해갔다.

    ‘그래도, 이 정도 규모라면….’

    그는 구석에 처박힌 낡은 카트를 발견하고 그 안에 놓인 부서진 박스를 뒤적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채로 먼지만 쌓여있었다. 그때, 그의 시선이 바닥에 멈췄다.

    먼지 쌓인 바닥에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 인간의 것은 아니었다. 길고 날카로운 발톱 자국 세 개가 확연했고, 그 사이에 마치 끈적한 액체를 끌고 간 듯한 흔적이 이어져 있었다. 최근에 생긴 것이 분명했다. 먼지가 그 위에 아주 얇게 앉았을 뿐이었다.

    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소리 없는 비명을 삼켰다. 이 건물은 비어있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나이프를 고쳐 쥐고 주변을 살폈다.

    복도 저편, 어둠 속에 잠겨있는 식료품 코너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슥… 스슥…* 마치 무언가가 바닥을 질질 끄는 듯한 소리였다. 준은 벽에 바싹 붙어 몸을 숨겼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저건, ‘추적자’였다. 황폐화된 세상에서 가장 피해야 할 존재 중 하나. 뛰어난 청각과 후각,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행동 패턴으로 악명 높은 돌연변이 생명체. 놈들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며, 먹이를 감지하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숨통을 끊었다.

    준은 숨을 죽였다. *스슥… 스슥…*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불규칙하게 반짝이는 희미한 녹색 빛. 그건 추적자의 눈이었다. 녀석은 어둠 속에서도 완벽하게 볼 수 있었다.

    피해야 했다. 지금 이대로라면 준은 놈의 훌륭한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추적자는 준이 숨어있는 진열대 코앞까지 다가왔다. 녀석의 짐승 같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썩은 살과 쇠 냄새가 진동했다.

    녹색 눈이 진열대 틈새로 준을 향해 잠시 멈췄다. 준은 놈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절대 움직이지 마. 숨도 쉬지 마.

    추적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스슥… 스슥…* 소리를 내며 지나쳐갔다.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희미한 녹색 눈. 준은 그대로 숨을 참고 있었다. 놈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는 천천히 벽에 기댔다. 몸의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물통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그는 마지막 남은 체력을 쥐어짜냈다. 이대로 나가면, 다음 생존지는 보장할 수 없었다. 지금 여기서 뭔가 찾아야만 했다.

    준은 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추적자가 지나간 반대편 구역, 창고로 향하는 듯한 표시가 희미하게 보였다. 저곳이라면, 아직 뒤지지 않은 물품이 있을지도 모른다.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는 물 한 모금이라도 마시기 위해 이 미친 짓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창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준은 낡은 쇠지렛대로 억지로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쇳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안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공포에 그는 나이프를 바짝 세웠다. 다행히 안은 고요했다.

    창고는 비교적 깨끗했다. 먼지 쌓인 선반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위에 낡은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준은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것을 느끼며 박스들을 뒤졌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가장 흔한 건 실망이었다. 그는 또다시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그의 손에 묵직한 무언가가 잡혔다. 유리병에 담긴 정수 필터. 그것도 새것이었다! 단단히 밀봉된 채 상자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품에 안았다. 마치 금덩이라도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이 필터만 있으면…!

    그 순간이었다.

    *쿵!*

    창고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준은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아까 그 추적자보다 훨씬 거대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녹색 눈은 두 개가 아니라 네 개였다. 온몸이 강철처럼 단단한 갑피로 뒤덮여 있고, 턱에서는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었다. 등에서는 거대한 갈퀴 같은 팔이 솟아 있었다.

    놈은 단순한 추적자가 아니었다. ‘탐식자’. 추적자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이자, 압도적인 힘과 지능을 가진 변종. 놈은 준이 쥐고 있는 필터를 정확히 꿰뚫어본 듯, 네 개의 눈을 번뜩이며 천천히 다가왔다.

    준은 얼어붙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솟구쳤다. 이 필터를 포기하고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탐식자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창고 전체를 진동시켰다. 준은 결심했다. 여기서 죽더라도, 빈손으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배낭을 고쳐 메고, 필터 두 개를 품에 안은 채, 전술 나이프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젠장….”

    그는 이를 악물었다. 탐식자는 이미 눈앞에 와 있었다. 거대한 갈퀴 같은 팔이 준을 향해 뻗어오는 순간, 준은 이를 악물고 몸을 던졌다. 살아야 했다. 이 필터를 가지고,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콰아앙!*

    창고 안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준이 미리 설치해 두었던, 낡은 가스통을 이용한 급조 폭탄이 터진 것이었다. 불길이 치솟고, 탐식자의 비명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준은 폭발의 충격파에 몸을 날려 창고 바깥으로 굴렀다. 깨진 유리 파편과 쇳조각들이 비 오듯 쏟아졌다.

    준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오른팔이 욱신거렸다. 팔목에는 깊은 상처가 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필터를 놓지 않았다. 탐식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폭발에 휘말려 잠시 정신을 잃었거나,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터였다.

    그는 피를 뚝뚝 흘리며 절뚝거렸다. 겨우 건물 밖으로 나와 뒤를 돌아보자, 창고 쪽에서는 여전히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는 필터를 품에 꼭 안고 다시 폐허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살았다. 간신히.

    하지만 그가 살아남은 대가로, 그를 놓친 탐식자의 비명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놈은 이제 준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이 세상 모든 그림자들을 불러모을 듯한, 깊고 거대한 울음소리가 폐허 저편에서 메아리쳤다. 그 울음은 마치 준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듯했다.

    황금빛 정수 필터를 품에 안은 채, 준은 피 묻은 손으로 낡은 나이프를 고쳐 쥐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은 마치 피가 흐르는 강처럼 아득하게 펼쳐졌다. 또다시 밤이 오고 있었다. 지옥 같은 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