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선협 (신선) 상세한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

    당신은 천재적인 한국인 작가이며, 저의 요청에 따라 상세한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를 작성했습니다.

    **애니메이션 제목: 불모의 영혼 (Barren Soul)**
    **장르: 선협 (신선) / 생존 드라마**

    **SCENE 1**
    **장면 제목: 붉은 황야의 그림자**

    **시간:** 오후 늦게, 해가 붉게 물들어가는 시간. 하늘은 흙먼지로 탁하고, 태양은 희미한 붉은 원반처럼 보인다.
    **장소:** 끝없이 펼쳐진 붉은 황무지. 균열 가득한 대지, 말라붙어 비틀린 나무의 잔해, 드문드문 솟아난 기괴한 암석들. 바람이 불어 흙먼지가 회오리치고, 멀리 폐허가 된 도시의 실루엣이 거대한 무덤처럼 보인다.

    [화면]
    * **WIDE SHOT:** 붉은 황토 먼지가 바람에 흩날리는 황량한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지평선 너머로 한때 번성했을 도시의 잔해가 거대한 그림자처럼 서 있다. 압도적인 황량함과 고독감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 **MID SHOT:** 두 그림자가 묵묵히 황무지를 걷고 있다. 앞서는 이는 ‘랑’ (10대 후반의 청년. 핏기 없는 얼굴이지만 단단한 눈빛을 가졌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검은 도포를 걸치고 허리춤에 닳고 닳은 영검 ‘파천’을 차고 있다. 등에는 제법 큰 짐을 메고 있다). 그 뒤를 따르는 이는 ‘연’ (10대 초반의 소녀. 창백하고 마른 몸으로 랑의 도포 자락을 꼭 쥐고 걷는다. 눈빛에는 불안감과 함께 랑에 대한 깊은 신뢰가 엿보인다).
    * **CLOSE UP:** 랑의 얼굴. 미세하게 떨리는 입술과 굳게 다문 표정. 그의 눈동자는 끝없이 주변을 살핀다. 이 척박한 땅에서 생존하기 위한 본능적인 경계심이 역력하다.
    * **SOUND:** 삭막한 바람 소리. 발이 붉은 흙을 밟는 마른 소리.
    * **BGM:** 낮고 음울하며 서정적인 현악기 선율. 피아노와 첼로의 조화.

    **랑 (내레이션, 낮은 목소리)**
    “영기(靈氣) 고갈… 천지개벽(天地開闢). 불과 백 년 전, 이 땅은 신선들의 기운이 충만하고 영초(靈草)들이 만발했던 낙원이라 했다. 허나 지금은… 모든 것이 말라비틀어진 죽음의 땅일 뿐. 살아남은 자들은 그저 연명할 뿐, 예전의 영화(榮華)는 전설 속의 이야기가 되었다.”

    **연**
    “오라버니… 목마르지 않으세요?”

    **랑**
    (뒤돌아보며, 애써 미소 지으려 하지만 실패한다)
    “괜찮다, 연아. 조금만 더 가면… 물줄기를 찾을 수 있을 게다.”

    [화면]
    * **MID SHOT:** 랑이 품속에서 바싹 마른 육포 조각을 꺼내 연에게 내민다. 연은 망설이다 받아든다. 그녀의 손은 너무나 가늘고 여리다.
    * **CLOSE UP:** 연이 육포 조각을 조심스럽게 베어 문다. 맛없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절박함과 함께 귀중한 음식을 얻은 안도감이 깃들어 있다.
    * **SFX:** 육포 씹는 마른 소리.

    **랑 (내레이션)**
    “희망이란 이 척박한 땅에서는 사치다. 허나, 이 작은 아이의 눈빛 속에서… 나는 매일 밤, 내일을 살아갈 이유를 찾는다. 내가 무너지면, 연은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SFX:**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스산한 메아리가 황야에 퍼진다.

    [화면]
    * **OVERHEAD SHOT:**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황량한 풍경 속에서 두 인물의 작은 모습이 더욱 도드라진다. 그들은 점처럼 작고 나약해 보인다.
    * **CLOSE UP:** 랑의 손이 허리춤의 영검 ‘파천’의 손잡이를 무의식중에 매만진다. 그의 눈빛에 날카로운 빛이 스친다. 경계심이 한층 강화된다.

    **랑**
    “…조심해라, 연아. 놈들의 기운이 느껴진다.”

    **연**
    (몸을 움츠리며 랑의 등 뒤로 바싹 붙는다)
    “네… 오라버니.”

    **SCENE 2**
    **장면 제목: 어둠 속의 습격**

    **시간:**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둠이 깔린 시간. 밤하늘에는 흙먼지 때문에 별조차 희미하다.
    **장소:** 폐허가 된 고대 사원 터. 무너진 석탑과 금이 간 석상들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바람 소리가 더욱 거칠고 음산하게 들린다.

    [화면]
    * **WIDE SHOT:** 고대 사원의 잔해가 달빛(혹은 흐린 하늘 사이로 희미하게 비치는 별빛) 아래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랑과 연은 그 잔해 속에서 겨우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찾았다. 작은 모닥불이 위태롭게 타오른다. 불꽃이 어둠 속에서 흔들린다.
    * **MID SHOT:** 랑이 모닥불에 마른 가지를 더하며 불꽃을 키운다. 연은 그의 옆에 웅크리고 앉아 잔뜩 얼어붙은 얼굴로 불을 쬐고 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다.
    * **CLOSE UP:** 연의 손. 손톱 밑에 흙때가 잔뜩 끼어 있고, 손등은 갈라져 있다. 어린아이의 손이라기엔 너무나 거칠고 고된 삶의 흔적이 역력하다.
    * **SOUND:** 불꽃 튀는 소리. 바람 소리. 돌 틈새로 바람이 스치는 소리.

    **랑**
    “밤은… 가장 위험한 시간이다.”

    **연**
    “저기… 물은 정말 없을까요?”

    **랑**
    (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그의 손길은 거칠지만 따뜻하다)
    “여기서 이틀 정도 북쪽으로 가면, 영기가 희미하게 흐르는 작은 샘터가 있다고 했다. 폐허가 된 문파의 기록에서 본 적이 있어.”

    **연**
    “…정말요? 그럼 우리도 살 수 있을까요?”

    **랑**
    (하늘을 올려다본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눈빛)
    “…그럼. 살아남아야지.”

    **SFX:** 모닥불 너머,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 돌멩이가 굴러가는 소리.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화면]
    * **ANGLE SHOT:** 랑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변한다. 그는 빠르게 ‘파천’의 손잡이를 움켜쥐고 몸을 일으킨다.
    * **POV SHOT (랑의 시점):**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두 개의 붉은 눈. 그리고 서서히 드러나는 거대한 그림자. 거대한 생명체의 실루엣이 모닥불 불빛에 의해 길게 늘어진다.
    * **MID SHOT:** 흙먼지와 함께 거대한 짐승이 그림자에서 뛰쳐나온다. 온몸이 딱딱한 비늘로 뒤덮여 있고, 턱에서는 독액 같은 것이 흘러내린다. ‘변이살무사’ – 옛 영기가 변질되어 태어난 괴물. 그 모습은 끔찍하고 흉측하다.
    * **SOUND:** 거친 짐승의 포효. 쉬이이익, 독액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 모닥불 불꽃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 **BGM:** 급박하고 긴장감 넘치는 전투 음악이 시작된다. 심장을 울리는 타악기 소리와 웅장한 금관악기.

    **연**
    (비명을 지르며 랑의 등 뒤로 숨는다)
    “꺄악! 오라버니!”

    **랑**
    “연아! 내 뒤에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

    [화면]
    * **DYNAMIC SHOT:** 랑이 순식간에 튀어나간다. 영검 ‘파천’이 푸른 영기를 뿜으며 어둠을 가른다. 칼날에서 번개 같은 섬광이 뿜어져 나온다.
    * **CLOSE UP:** ‘변이살무사’의 비늘에 ‘파천’이 부딪히며 섬광을 일으킨다. 금속성 마찰음이 귀를 찢는다. 불꽃이 튀고, 랑의 얼굴에 긴장감이 가득하다.
    * **ACTION SHOT:** 랑이 검을 휘두르며 살무사의 공격을 막아낸다. 살무사의 꼬리가 거대한 힘으로 휘둘러지며 폐허가 된 석탑의 잔해를 부숴버린다. 돌덩이들이 사방으로 파편처럼 흩어진다.
    * **SFX:** 검과 비늘이 부딪히는 쨍그랑 소리. 석탑이 부서지는 굉음.

    **랑 (내레이션, 거친 숨소리)**
    “젠장. 이런 변이수들은 끝도 없이 튀어나오는군. 영기가 희박해지면서 놈들은 더욱 강해지고… 더 악독해졌다.”

    [화면]
    * **MID SHOT:** 살무사가 독액을 뿜어낸다. 랑이 재빨리 몸을 비틀어 피한다. 독액이 랑이 서 있던 자리에 떨어지자 바닥이 쉬이이익 소리와 함께 녹아내리며 연기가 피어오른다.
    * **CLOSE UP:** 랑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다. 그의 내단(內丹)에서 영기(靈氣)가 격렬하게 회전하며 푸른 빛을 뿜어낸다.
    * **EFFECT:** 랑의 몸에서 푸른 기운이 더욱 강하게 뿜어져 나온다.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결의에 찬 표정으로 변한다.

    **랑**
    “네 이놈! 감히 내 동생에게 해를 끼치려 하는가!”

    [화면]
    * **SLOW MOTION:** 랑이 허리에 찬 작은 영석 주머니에서 영석(靈石) 하나를 꺼내든다. 손안에서 영석이 빠르게 흡수되며 그의 영기가 폭발적으로 증폭된다. 주변 공기가 일렁이는 듯하다.
    * **ACTION SHOT:** 랑이 몸을 낮춰 살무사의 다리 사이로 파고든다. ‘파천’에 푸른 영기가 집중되며 날카로운 검기(劍氣)가 형성된다. 검날이 푸르게 빛난다.
    * **WIDE SHOT:** 랑이 살무사의 복부를 향해 검을 찌른다. 살무사의 비늘은 단단하지만, 복부는 상대적으로 약점이다. 강력한 영기가 담긴 검격에 살무사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다.
    * **SFX:** 꿰뚫리는 소리. 짐승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

    [화면]
    * **MID SHOT:** 살무사가 몸부림치며 랑을 쳐내려 한다. 랑은 간신히 몸을 피하지만, 그의 팔에 살무사의 꼬리가 스치며 깊은 상처를 입힌다. 옷이 찢어지고 붉은 피가 솟구친다.
    * **CLOSE UP:** 랑의 얼굴. 고통에 일그러지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살무사를 노려보고 있다. 독기 어린 눈빛으로 괴물을 응시한다.
    * **SOUND:** 랑의 거친 숨소리.

    **랑**
    (이를 악문다)
    “크윽… 아직인가!”

    [화면]
    * **ACTION SHOT:** 랑이 다시 한번 검기를 모아 살무사의 상처 부위를 파고든다. 이번에는 영기가 칼날을 따라 흐르며 살무사의 내부를 직접 공격한다. 검날이 살무사의 몸 깊숙이 박힌다.
    * **EFFECT:** 살무사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거대한 몸을 질질 끌며 쓰러진다. 그 몸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와 붉은 흙을 더욱 짙게 물들인다.
    * **SOUND:** 살무사의 마지막 비명. 그리고 싸늘하게 가라앉는 침묵. 바람 소리만이 다시 황량하게 들린다.
    * **BGM:** 전투 음악이 서서히 잦아들고, 다시 낮고 음울한 BGM으로 전환된다.

    **SCENE 3**
    **장면 제목: 생존의 대가**

    **시간:** 살무사와의 싸움 직후. 밤은 더욱 깊어졌다.
    **장소:** 여전히 폐허가 된 고대 사원 터. 쓰러진 변이살무사의 거대한 시체가 어둠 속에 놓여 있다.

    [화면]
    * **MID SHOT:** 랑이 쓰러진 살무사를 확인한다. 완전히 숨통이 끊어진 것을 보고 나서야 검을 거둔다. 그의 팔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다. 그의 어깨가 축 늘어진다.
    * **CLOSE UP:** 랑의 상처. 옷이 찢어지고 뼈가 보일 정도로 깊은 상처다. 독액에 스친 것인지 주변 피부가 붉게 변해 있다.
    * **SOUND:** 랑의 거친 숨소리. 연의 흐느낌.

    **연**
    (조심스럽게 랑에게 다가온다.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오라버니… 피… 피가 많이 나요.”

    **랑**
    (억지로 미소 짓는다. 그의 미소는 찢어지는 듯하다)
    “괜찮다. 이 정도 상처는… 늘 있는 일이지.”

    [화면]
    * **MID SHOT:** 랑이 품에서 낡은 약초 주머니를 꺼낸다. 거기서 바싹 마른 영초 조각 몇 개와 흰색 가루를 꺼낸다. 연이 조심스럽게 그 가루를 랑의 상처에 발라준다. 랑은 고통에 입술을 깨물지만, 연을 안심시키려는 듯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짓는다.
    * **CLOSE UP:** 연의 손길이 떨린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약초 가루가 상처에 닿는 쉬이익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그녀의 눈에 맺힌 눈물이 랑의 상처 위로 떨어진다.
    * **SOUND:** 약초 가루가 상처에 닿는 쉬이익 소리. 연의 작은 울음소리.

    **랑 (내레이션)**
    “상처는 익숙하다. 죽음은 늘 우리 곁을 맴돈다. 하지만 이 아이의 눈물을 볼 때마다… 나는 어째서인지 더욱 살고 싶어진다. 내가 살아남아야 할 이유… 그 이유가 내게 고통마저 감내하게 한다.”

    **연**
    “…아파요?”

    **랑**
    “아니. 연이가 발라줘서 하나도 안 아프다.”

    [화면]
    * **MID SHOT:** 랑이 연의 머리를 다시 쓰다듬는다. 그의 손길은 지쳐 있지만 따뜻하고 다정하다. 연은 그의 손길에 기대어 흐느낌을 멈춘다.
    * **FULL SHOT:** 랑이 쓰러진 변이살무사를 보며 한숨을 쉰다. 살무사의 몸에서 희미한 영기가 빠져나오는 것이 보인다. 죽은 괴물의 몸 위로 아지랑이처럼 영기가 피어오른다.
    * **CLOSE UP:** 랑이 살무사의 머리 부분으로 다가간다. 뿔처럼 솟아난 비늘 하나를 조심스럽게 뽑아낸다. 그 안에서 탁하지만 작은 영석 조각이 나온다. ‘탁영석’ – 변이된 영기가 굳은 것. 순수한 영석에 비해 가치는 없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

    **랑**
    “그래도… 이걸로 이틀은 버틸 수 있겠군.”

    [화면]
    * **WIDE SHOT:** 랑과 연이 다시 모닥불가에 앉아 있다. 밤은 더욱 깊어졌고, 바람 소리가 스산하게 들린다. 랑은 탁영석 조각을 쥐고 자신의 내단으로 흡수시킨다. 미미하지만 따뜻한 영기가 그의 몸을 채우며, 그의 얼굴에 생기가 조금 돌아온다.
    * **CLOSE UP:** 연이 랑의 상처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녀의 눈빛에 결연함이 스친다. 더 이상 울지 않고, 깊이 생각하는 표정이다.

    **연**
    “…오라버니. 제가… 오라버니를 지켜줄게요.”

    **랑**
    (놀란 듯 연을 바라본다. 그리고 피식 웃음이 터져 나온다. 피곤하지만 진심이 담긴 웃음이다)
    “꼬마가 무슨… 네가 날 지켜?”

    **연**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눈빛에는 작은 불꽃이 피어오른다)
    “네. 저도 강해질 거예요. 오라버니가 그랬잖아요. 희망은… 우리 안에 있다고.”

    [화면]
    * **FULL SHOT:** 랑은 연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한 채, 멀리 어둠 속에 잠긴 폐허 도시의 실루엣을 바라본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어둡지만, 그 안에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는 듯하다. 희망의 씨앗이 발아하는 순간이다.
    * **OVERHEAD SHOT:** 두 아이의 작은 그림자가 어둠 속에서 서로에게 의지한 채 앉아 있다. 그들 위로 별들이 드문드문 빛나지만,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황량하다. 하지만 그들의 어깨는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는다.

    **랑 (내레이션)**
    “희망. 그건 내가 연에게 해주었던 말이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 작은 희망을 움켜쥐고 우리는… 오늘 밤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내일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이 죽음의 땅에 다시 영기가 흐르는 그날을 꿈꾸며.”

    **FADE OUT.**
    **BGM:** 희망적이면서도 애잔한 선율로 마무리. 피아노 선율이 고조되며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 스팀펑크 독립적인 단편 소설

    금속성 비릿함이 카이의 영원한 동반자였다. 흙먼지와 재뿐만이 아니었다. 잊힌 문명의 녹슨 심장, ‘철심’ 그 자체의 본질이었다. 오물로 얼룩진 고글 너머로, 산업 매연과 무너진 거인들의 먼지가 뒤섞인 영원한 황혼이 도시를 덮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리벳 박힌 강철의 거대한 뼈대, 앙상한 다리가 낡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삐걱이며 녹가루를 쏟아낼 듯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클락, 수치 확인.” 카이의 목소리는 거칠었고, 목은 바싹 말라 있었다.

    옆구리에 매달린 작고 닳아빠진 증기 드론, 클락이 쳇바퀴 같은 엔진음을 내며 짧게 울었다. 그의 눈앞에 푸른 홀로그램 패널이 깜빡였다.

    [수분 필터 효율: 12% ↓]
    [에너지 저장량: 18% ↓]
    [식량 잔여량: 3일분]

    “젠장.”

    수치들은 익숙하고도 잔혹한 비가(悲歌)였다. 3일치 식량. 이 속도라면 아마 이틀, 어쩌면 그보다도 짧으리라. 문제는 물이었다. 그의 생명줄인 대기 응축기가 삐걱거렸다. 1차 필터는 수리 불능일 정도로 막혔고, 2차 필터… 음, 2차 필터 자체가 그가 찾고 있는 부품이었다.

    카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한때 웅장했을 ‘중앙 증기 관리국’의 거대한 껍데기를 훑어보았다. 하늘을 집어삼킬 듯 거대한 건물이었다. 영원을 스쳐 멈춰버린 듯, 거대한 황동 시계는 12시 15분에 멈춰 아무 의미 없는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이 그의 목표였다. 전설에 따르면 실험적이고 과했던 3차 여과 시스템이 그 심장부 깊숙한 곳에 보관되어 있다고 했다. 그 시스템에는 그가 절실히 필요한 ‘증기 변환 코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들어가자, 클락.”

    클락은 카이의 어깨 위로 솟아올라 주변을 비추는 작은 랜턴 불빛을 내뿜었다. 이 거대한 폐허 속에서 그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희망이었다. 녹슨 철문은 이미 절반쯤 부식되어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삐걱거리는 경첩은 오래전에 본연의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다. 카이는 부서진 문틈으로 몸을 구겨 넣었다.

    내부는 거대한 공허였다. 한때 사람들의 분주한 발걸음으로 가득 찼을 복도는 이제 먼지와 잔해로 가득했다. 무릎 높이까지 쌓인 폐기물 더미 사이로 쥐들이 쓱싹거리며 지나갔다. 곰팡이 핀 벽면을 따라 굵은 증기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밸브들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금속이 마찰하는 소리, 아마도 건물의 거대한 무게가 스스로를 갉아먹는 소리일 터였다.

    카이는 손전등을 휘둘러 가장 튼튼해 보이는 길을 찾았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그는 더 깊이 들어갔다. 증기 변환 코어는 단순히 물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작은 이동식 은신처에 전력을 공급하고, 최소한의 난방을 유지하며, 밤에 잠시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게 해주는 생존 그 자체였다. 코어가 없다면, 그는 이 차가운 금속 도시에서 서서히 얼어붙거나 목말라 죽을 수밖에 없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카이는 마침내 거대한 원형 홀에 도달했다. 이곳은 과거 증기 관리국의 핵심부였을 것이다. 홀 중앙에는 거대한 시계 장치가 멈춰 서 있었다. 수십 개의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서로 맞물려 있었지만, 이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위로는 빛바랜 유리 천장을 통해 희미한 빛줄기가 쏟아져 내려 먼지 입자들이 춤을 추었다.

    “클락, 코어 위치.”

    클락은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며 홀 중앙의 시계 장치 쪽으로 빛을 쏘았다. 홀로그램 패널에 붉은 점이 깜빡였다. 거대한 시계 장치의 가장 아래, 숨겨진 통로 뒤에 있었다.

    카이는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바닥에는 부식된 금속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공구 벨트에서 다용도 렌치를 꺼내 들었다. 시계 장치 옆에 숨겨진 패널을 발견했다. 먼지를 닦아내자, 복잡한 잠금장치가 드러났다.

    “이런, 아직도 작동하는 건가?”

    카이가 렌치를 집어넣어 자물쇠를 돌리려던 순간, 등 뒤에서 차가운 금속성 마찰음이 들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섬광과 함께 낡은 강철 화살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 벽에 박혔다.

    “꼼짝 마.” 날카롭고 낮은 여성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뭘 찾는 거지? 나랑 같은 거라면, 꿈도 꾸지 마.”

    카이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그와 마찬가지로 먼지투성이였지만, 훨씬 더 단단한 인상이었다. 두꺼운 가죽 갑옷 위에 덧대어진 녹슨 금속 조각들이 그녀의 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한 손에는 스팀 추진식 석궁을 들고 있었다. 다른 손은 허리에 찬 무거운 도끼 자루를 쥐고 있었다. 고글은 그녀의 이마에 걸쳐져 있었고, 그 아래로 매서운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이름 모를 독성 식물처럼 거칠고 강인해 보였다.

    “당신은… 누구시죠?” 카이는 당황했지만, 렌치를 놓지 않았다.

    “그건 내가 할 말이지. 여긴 내 구역이야. 증기 변환 코어? 그거 찾으러 온 거지? 어림없는 소리.”

    “구역이라니? 이 낡은 폐허가 당신 거라고?” 카이는 실소를 터뜨렸다. “이건 누구나 먼저 찾는 사람이 임자인 곳이야. 당신이 먼저 도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난 찾았어!”

    “찾는다고 다 네 것이 되는 건 아니지. 난 며칠째 이곳을 탐색했어. 너 같은 얼간이가 나타나서 날강도 짓 하는 걸 막으려고.” 그녀는 석궁을 다시 조준했다. 작은 증기 압축 소리가 들렸다. “지금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네놈 머리에 구멍을 뚫어줄 수 있어.”

    카이는 여인의 눈에서 단호함을 읽었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러나 코어 없이 돌아가는 것은 곧 죽음이었다.

    “진정해요. 당신도 코어가 필요하고, 나도 필요하겠지. 하지만… 여기 혼자서는 들어갈 수 없어.” 카이는 시계 장치를 가리켰다. “이 잠금장치, 꽤 복잡해 보여. 그리고… 내가 들어올 때 뭔가 수상한 소리를 들었어.”

    여인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이 시계 장치와 카이, 그리고 다시 시계 장치로 옮겨갔다.

    “수상한 소리?”

    “마치… 톱니바퀴가 긁히는 소리? 작동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뭔가 안에서 움직이는 것 같았어. 당신이 화살을 쏘기 직전에.”

    여인은 카이의 눈을 꿰뚫어 보더니, 석궁을 살짝 내렸다. “날 속이려는 건 아니겠지? 이곳에 혼자 들어오면서 그런 소리를 놓쳤을 리가 없어.”

    “당신도 날 보자마자 화살부터 쐈잖아. 누가 누굴 믿겠어?” 카이는 어깨를 으쓱였다. “봐봐. 이곳은 설계부터가 사람 한 명이 조작하기 힘든 곳 같아. 잠금장치도 그렇고, 안쪽으로 통하는 문도 꽤 거대한 것 같아. 협력하면 양쪽 다 얻을 수 있을 거야.”

    여인은 여전히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었다. “이름이 뭐야?”

    “카이. 당신은?”

    “세라.”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좋아, 카이. 난 너만큼 멍청하지 않아. 만약 네가 날 속이려 한다면, 다음번엔 급소에 박아줄 거야.”

    “나도 마찬가지야, 세라. 필요 이상으로 덤비면, 내 렌치도 꽤 아플 거야.” 카이는 렌치를 다시 잡았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세라는 석궁을 등에 메고 허리춤의 도끼를 뽑아 들었다. 그녀는 능숙하게 시계 장치 옆의 다른 패널을 찾았다. 카이가 잡고 있던 잠금장치와는 다른, 거대한 지렛대 형식의 잠금장치였다.

    “여긴 꽤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어. 하나는 기계식, 다른 하나는 압력식인 것 같군.” 세라가 중얼거렸다. “좋아, 내가 이 지렛대를 당기는 순간, 너는 저쪽 잠금장치를 풀어. 타이밍이 중요할 거야. 둘 중 하나라도 실패하면, 전체 시스템이 봉쇄될 거야.”

    카이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실패는 죽음과 같았다.
    “알았어. 내 신호에 맞춰 움직여.”

    세라가 지렛대에 손을 얹었다. 녹슨 금속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삐걱거렸다. 카이는 렌치를 잠금장치의 홈에 정확히 맞췄다.
    “하나… 둘… 셋!”

    카이가 렌치를 힘껏 돌리는 동시에 세라는 지렛대를 당겼다. 낡은 기계음이 홀을 가득 채웠다. ‘끼이이이익- 텅!’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꿈틀거리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덜컹!’ 소리와 함께 시계 장치 아래 숨겨진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 안에서는 습하고 어두운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희미하지만 분명한 증기 압축 소리가 들렸다. 코어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였다.

    “성공했어!” 카이가 외쳤다.

    세라는 문이 완전히 열리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카이도 재빨리 그녀를 따랐다.

    내부는 예상대로 어두컴컴한 통로였다.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의 웅덩이를 만들었다. 끈적한 이끼가 벽을 뒤덮고 있었다. 몇 걸음 걷자,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밀집된 공간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3차 여과 시스템이 있는 곳이었다. 중앙에는 커다란 증기 보일러가 있었고, 그 주위로 복잡한 파이프와 밸브들이 얽혀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황동색 원통형 코어가 보였다.

    “찾았다!” 카이는 흥분해서 코어 쪽으로 달려가려 했다.

    “기다려!” 세라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 순간, 그들 뒤편에서 ‘철컥- 철컥-‘ 거친 금속음이 들렸다. 카이와 세라가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녹슨 뼈대가 드러난 금속 자동인형이었다. 한쪽 팔에는 망치 대신 날카로운 드릴이 달려 있었고, 다른 쪽 팔은 부러져 있었지만, 증기 엔진은 여전히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작동하고 있었다. 눈에서는 붉은 빛이 섬뜩하게 깜빡였다.

    “경비 자동인형!” 세라가 이를 갈았다. “아직 작동하고 있었군!”

    자동인형은 그들을 향해 느릿하지만 위협적인 걸음으로 다가왔다. 녹슨 드릴 팔이 무시무시한 소리를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젠장, 이런 게 남아있을 줄이야!” 카이가 외쳤다. “빨리 코어를 빼야 해!”

    “시간 없어!” 세라가 도끼를 움켜쥐었다. “내가 저걸 막는 동안, 네가 코어를 뽑아내! 빨리!”

    자동인형은 이미 그들에게 충분히 가까워져 있었다. 세라는 망설임 없이 자동인형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녀의 도끼가 녹슨 철골에 부딪히며 스파크를 튀겼다. ‘콰앙!’

    카이는 코어 쪽으로 몸을 날렸다. 코어는 복잡한 연결 장치에 묶여 있었다. 그는 공구 벨트에서 드라이버와 렌치를 꺼냈다. 손이 떨렸다. 서둘러 연결부를 분리하기 시작했다. ‘딸깍, 찰칵!’ 낡은 볼트들이 하나씩 풀려나갔다.

    뒤에서는 세라와 자동인형의 사투가 이어졌다. ‘삐걱- 쾅! 쾅!’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와 세라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젠장, 단단해!” 세라의 목소리에 고통이 섞여 있었다. “서둘러, 카이!”

    마지막 볼트가 풀리는 순간, 카이는 코어를 움켜쥐었다. 묵직하고 따뜻했다. 코어는 희미한 에너지를 발산하고 있었다.

    “뽑았다!” 카이가 소리쳤다.

    그 순간, 자동인형의 드릴 팔이 세라의 방패를 뚫고 지나갔다. 세라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세라!”

    카이는 코어를 품에 안은 채 세라에게 달려갔다. 자동인형은 이제 그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드릴이 굉음을 내며 회전했다.

    “클락, 유인!” 카이가 외치자 클락이 윙윙거리며 자동인형의 시야를 가로질렀다. 자동인형의 드릴이 클락을 향해 뻗었지만, 클락은 민첩하게 피했다.

    그 사이에 카이는 세라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녀의 방패는 완전히 망가져 있었고, 어깨에는 깊은 상처가 나 피가 스며 나왔다.

    “괜찮아요?”

    세라는 신음하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 저 놈을… 저 놈을…”

    카이는 코어를 재빨리 가방에 넣고 세라의 부러진 도끼를 주웠다. 그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코어를 얻었지만, 이제 이 괴물을 상대해야 했다. 클락은 자동인형의 주의를 끌기 위해 사방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세라, 버텨요! 내가 시간을 벌게!”

    카이는 세라에게서 물러나 자동인형을 향해 도끼를 치켜들었다. 묵직한 도끼가 그의 손에서 흔들렸다. 그는 기계 수리는 잘했지만, 싸움은 익숙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리 와, 고철 덩어리!”

    자동인형은 마치 그의 도발을 이해한 듯, 클락을 무시하고 카이에게로 향했다. 드릴이 다시 속도를 높였다. 카이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드릴을 피했다. ‘휙!’ 드릴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는 도끼를 휘둘러 자동인형의 옆구리를 찍었다. ‘끼익!’ 금속이 긁히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튀었지만, 자동인형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동인형은 강철 발로 바닥을 박차며 더욱 맹렬하게 공격해 왔다. 카이는 필사적으로 도끼를 휘두르며 방어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그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때, 세라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는 쓰러져 있던 석궁을 다시 집어 들었다.
    “카이! 저놈의… 등 뒤에… 동력 코어가 보여!” 세라가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약점이야!”

    카이는 자동인형의 공격을 피하며 뒤를 돌아봤다. 과연, 녹슨 등판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동력 코어가 보였다. 저것을 파괴해야 했다.

    “알았어!” 카이는 이를 악물었다. “세라, 유인해줄 수 있어?”

    세라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석궁을 겨누고 자동인형의 다리를 향해 쏘았다. ‘쉬이익!’ 증기 화살이 자동인형의 다리에 박혔지만, 큰 손상은 주지 못했다. 그러나 자동인형의 주의를 분산시키기에는 충분했다. 자동인형은 잠시 비틀거리며 세라를 향해 방향을 틀었다.

    그 순간, 카이는 재빨리 자동인형의 뒤편으로 달려갔다. 그는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쾅!’ 도끼가 동력 코어에 정확히 박혔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코어가 폭발하고, 자동인형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붉은 눈빛이 꺼지더니, 거대한 고철 덩어리가 되었다.

    카이는 숨을 헐떡이며 도끼를 떨어뜨렸다.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해냈어…”

    세라가 겨우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놈… 제법이군.”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당신 덕분이야.” 카이는 세라의 상처를 살폈다. “빨리 나가서 치료해야 해. 내 은신처로 가자. 거기 기본 의료 장비는 있어.”

    세라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하지만 먼저… 이 주변을 더 뒤져봐야겠어. 코어만으로는 부족해. 다른 건 없을까?”

    카이는 그녀의 눈에서 희미한 욕망을 읽었다. 생존을 위한, 끝없는 갈증. 하지만 그는 그녀를 막을 수 없었다.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들은 부서진 자동인형과 쓰러진 장치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다른 부품들을 찾기 시작했다. 카이가 품속의 증기 변환 코어를 만졌다. 묵직한 희망이 느껴졌다. 살아남았다. 적어도 오늘은.

    세라는 작은 약병 하나를 발견하고 희미하게 웃었다. “운이 좋군. 보급품이 이 안에 있을 줄이야.”

    이 폐허는 언제나 그들을 시험했다. 하나의 위험을 넘어서면 또 다른 위험이 기다리고, 하나의 희망을 얻으면 또 다른 절망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그러나 카이와 세라는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이 끔찍하고 황량한 세상에서, 그들은 잠시나마 고독이 아닌 연대를 택할 수 있었다. 코어와 약병을 얻었지만, 그들의 앞에는 여전히 안개처럼 짙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먼 곳에서, 또 다른 기계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 다크 판타지 상세한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

    ## 애니메이션 대본 & 스토리보드: 흑월탑의 그림자

    **장르:** 다크 판타지
    **핵심 줄거리:** 엘리트 마법학교 지하에 숨겨진 끔찍한 금기

    ### EPISODE 1: 심연의 태동

    **SCENE 1**

    **FADE IN:**

    **EXT. 흑월탑 마법 학원 – 밤**

    **VISUAL:**
    카메라, 고요히 잠든 학원의 전경을 비춘다. 거대한 고딕 양식의 첨탑들이 달빛 아래 날카롭게 솟아 있고, 창문마다 희미한 마법의 빛이 새어 나온다. 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흩뿌려져 있지만, 학원 위로는 마치 어둠이 더 짙게 드리워진 듯하다. 바람이 낮게 스쳐 지나가며, 창백한 달빛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SOUND:**
    낮게 깔리는 현악기 소리.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부엉이 울음소리. 먼 곳에서 들려오는 마법 실험실의 희미한 윙-하는 소리.

    **NARRATION (이안, V.O):**
    사람들은 흑월탑이 가장 고귀한 지식의 전당이라 했다. 별의 궤도를 읽고, 원소의 비밀을 해독하며, 죽음조차 거스를 수 있는 힘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나는 종종 느꼈다. 이 모든 빛나는 영광 아래, 뭔가 차갑고 끈적이는 것이 꿈틀거린다는 것을. 마치 땅속 깊이 묻힌 거대한 심장이 밤마다 낮게 박동하는 것처럼.

    **INT. 흑월탑 도서관, 제한 구역 – 밤**

    **VISUAL:**
    어둡고 먼지 쌓인 도서관의 제한 구역. 낡은 책장들이 미로처럼 얽혀 있고, 고대어로 된 두꺼운 서적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한쪽 구석, 촛불 몇 개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책상에 이안(17세, 마르고 지적인 분위기)이 앉아 있다. 그의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깊게 드리워져 있고, 손에는 낡고 해진 고문서가 들려 있다. 고문서에는 거의 알아볼 수 없는 희미한 글자들이 적혀 있다. 이안의 옆에는 펜과 잉크병이 놓여 있고, 주변에는 그가 해독한 듯한 필사본들이 쌓여 있다.

    **SOUND:**
    초가 타들어 가는 사그락거리는 소리. 이안이 펜으로 종이를 긁는 소리. 바람이 창문을 덜컹거리는 소리.

    **이안 (독백):**
    “…심연의 심장을 봉인하고… 그 대가로… 무한한 힘을 얻으리라…”

    **VISUAL:**
    이안의 손가락이 고문서의 한 구절을 짚는다. 그림처럼 보이는 문양들이 그의 눈에는 흐릿하게 빛나는 듯하다. 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는 주변을 슥 둘러본다.

    **NARRATION (이안, V.O):**
    다른 이들은 알지 못했다. 혹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 학원의 지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그 미세한 진동을. 나는 그 진동에 유독 민감했다. 때로는 두통처럼, 때로는 뼛속까지 시린 냉기처럼. 마치, 그 진동이 내 안의 무언가를 깨우려는 듯이.

    **VISUAL:**
    이안의 손에 든 낡은 고문서가 갑자기 희미하게, 아주 잠시 푸른빛을 뿜는다. 이안은 놀라 움찔하며 책을 내려다본다. 빛은 이내 사라지지만, 이안의 시선은 고문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안:**
    (작게 중얼거린다)
    이건… 단순한 고문서가 아니야. 마력이… 옅지만 분명히 흐르고 있어.

    **VISUAL:**
    이안이 고문서를 펼친 채, 책상 위에 놓인 몇몇 마법 도구들(수정구, 룬이 새겨진 자)을 슬쩍 본다. 그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 그러다 결심한 듯, 고문서를 펼쳐 들고 다시 집중한다. 그의 손가락이 고문서의 특정 문양을 따라 훑는다. 그때, 고문서의 글자들이 일렁이며 빛을 내기 시작한다.

    **SOUND:**
    나직한 마법 에너지의 웅웅거리는 소리. 이안의 심장 박동 소리 (점점 빨라진다).

    **VISUAL:**
    카메라, 이안의 얼굴을 클로즈업. 그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는 숨을 들이쉰다. 그의 눈이 고문서 아래, 바닥의 특정 지점을 향한다. 바닥의 낡은 나무판자들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것을 본다. 아주 미약하지만, 그 빛은 고문서의 문양과 기묘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이안:**
    (놀란 숨소리)
    이건… 숨겨진 지점이야.

    **VISUAL:**
    이안이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선다. 촛불을 들고 바닥의 빛나는 지점으로 다가간다. 그는 손가락으로 바닥을 조심스럽게 쓸어본다. 나무 마루 아래, 희미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진다. 이안은 손끝에 마력을 모아 바닥에 대고 집중한다.

    **SOUND:**
    마법 에너지가 증폭되는 소리. 나무판이 천천히 미끄러지는 듯한 마찰음.

    **VISUAL:**
    바닥의 나무판들이 서서히 양옆으로 미끄러지며, 그 아래 어두운 계단이 드러난다. 계단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다. 서늘하고 습한 공기가 계단에서 뿜어져 나와 이안의 뺨을 스친다. 곰팡이와 쇠 녹슨 냄새가 섞인 듯한, 기분 나쁜 냄새.

    **이안:**
    (작게 헐떡인다)
    여기였어… 이 진동의 근원이…

    **VISUAL:**
    이안은 잠시 망설인다. 그의 눈에는 호기심과 함께 미약한 두려움이 스쳐 지나간다. 그는 다시 고문서를 훑어본다. 고문서에는 ‘깊은 곳으로 가는 자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나, 그 지식은 심장을 갉아먹으리라’는 구절이 선명하게 빛난다.

    **NARRATION (이안, V.O):**
    나는 알고 있었다. 이 문을 여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넘으리라는 것을. 하지만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홀려 있었다. 이 미지의 진동이 나를 부르는 것처럼.

    **SCENE 2**

    **INT. 지하 계단 – 이안의 시점**

    **VISUAL:**
    이안의 시점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을 비춘다. 계단 벽은 거칠게 다듬어진 돌로 이루어져 있고, 이따금 고대 문양이 음각되어 있다. 촛불의 희미한 빛이 그의 주위를 감싼다. 계단은 점점 더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 이어진다.

    **SOUND:**
    계단을 딛는 이안의 발소리.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낮은 웅웅거림.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어딘가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 소리.

    **VISUAL:**
    이안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함께 점차 불안감이 드리워진다.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마력석을 꺼내 든다. 마력석은 희미하게 빛나며 주변을 비춘다.

    **이안:**
    (숨을 헐떡이며)
    대체… 얼마나 깊은 거야…

    **VISUAL:**
    카메라, 이안이 지나쳐 온 벽의 문양들을 비춘다. 처음에는 평범한 기하학 문양 같았지만, 점점 인간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고통스러워 보이는 얼굴들, 사슬에 묶인 듯한 형상들, 그리고 그들의 피로 물든 것처럼 보이는 붉은 선들이 얽혀 있다.

    **SOUND:**
    낮은 웅웅거림이 더욱 선명해진다. 마치 수천 개의 심장이 동시에 박동하는 듯한 소리. 아주 희미하게, 마치 물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속삭임들이 섞여 들어온다.

    **VISUAL:**
    이안이 멈춰 서서 벽의 문양을 응시한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린 듯 크게 뜨인다. 문양 속 인물들의 표정이 너무나 생생하다. 마치 그들의 고통이 벽에 새겨진 듯하다.

    **이안:**
    (겁에 질린 목소리로)
    이건… 벽화가 아니야… 기록이야…

    **VISUAL:**
    카메라, 이안의 손에 들린 촛불이 강한 바람에 흔들리며 꺼진다. 순식간에 어둠이 그를 집어삼킨다. 이안은 당황하여 마력석을 더욱 움켜쥔다. 마력석의 빛이 더욱 강해지지만, 어둠은 여전히 짙다.

    **SOUND:**
    촛불이 꺼지는 ‘쉬익’ 소리. 이안의 거친 숨소리. 이제 속삭임이 더 가까이, 더 선명하게 들려온다. 마치 그의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속삭임 (ECHO, 여러 목소리 중첩):**
    *…어둠… 고통… 자유… 허락…*

    **VISUAL:**
    이안이 주변을 둘러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투명한 유령 같은 형상들이 그의 주위를 맴도는 듯하다. 형상들은 불분명하지만, 그들의 팔이 마치 그를 향해 뻗어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낀다.

    **이안:**
    (떨리는 목소리로)
    누구… 누구야…?

    **VISUAL:**
    형상들은 대답 없이 그저 맴돌 뿐이다. 이안은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끼고, 발걸음을 재촉한다. 계단은 끝없이 이어진다.

    **SCENE 3**

    **INT. 지하 최심부, 금기 Chamber**

    **VISUAL:**
    이안이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자, 거대한 지하 공간이 드러난다. 공간은 원형으로, 중앙에는 거대한 ‘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제단은 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져 있고, 그 위로는 수십 개의 두꺼운 마법 사슬이 하늘로 뻗어 있다. 사슬들은 모두 중앙의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듯하다.

    **SOUND:**
    웅웅거리는 박동 소리가 최고조에 달한다. 모든 것을 압도하는 듯한 저음의 진동. 속삭임이 아우성처럼 섞여 들려온다.

    **VISUAL:**
    카메라, 중앙의 제단을 클로즈업한다. 사슬들이 붙잡고 있는 것은, 불확실한 형태의 거대한 유기체 덩어리였다. 그것은 검은 그림자와 희미한 자주색 빛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마치 거대한 심장처럼 규칙적으로 쿵, 쿵, 하고 박동하고 있었다. 그 박동은 이안의 몸을 뒤흔드는 듯한 진동을 일으켰다.

    **NARRATION (이안, V.O):**
    어둠의 태동. 고문서에 적혀 있던, 이 학원의 모든 마력의 근원. 그 모든 영광의 토대.

    **VISUAL:**
    유기체 덩어리 주변에는, 수천 개의 희미한 빛나는 점들이 마치 나방처럼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 점들은 주변 공간에서 유기체 덩어리로 끊임없이 빨려 들어갔고, 점들이 흡수될 때마다 덩어리의 박동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 빛나는 점들은 다름 아닌, 희미한 인간 형상의 영혼들이었다.

    **이안:**
    (말문이 막힌 듯)
    이… 이건… 영혼…

    **VISUAL:**
    카메라, 이안의 얼굴을 비춘다. 그의 눈은 경악과 공포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이해했다. 학원의 모든 마법은, 이곳에 갇힌 존재로부터, 그리고 끝없이 흡수되는 영혼들로부터 공급되고 있었다는 것을. 엘리트 마법 학교의 찬란한 빛이, 이 끔찍한 심연의 희생 위에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을.

    **NARRATION (이안, V.O):**
    그것은 단순히 마법의 근원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을 먹어치우는, 영원히 굶주린 심연 그 자체였다. 그리고 흑월탑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니, 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있었다.

    **VISUAL:**
    그때, 이안의 뒤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린다. 이안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다. 어둠 속에서, 한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흑월탑의 교장, 크레온이었다. 그의 얼굴은 차분하고, 마치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이안을 응시한다. 그의 손에는 마법 지팡이가 들려 있지만, 위협적이지 않다. 그저 지켜보는 듯하다.

    **크레온:**
    (나직하고 단호한 목소리)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이안. 네가 이 진동에 이끌릴 줄 알았다.

    **VISUAL:**
    이안의 얼굴이 공포와 분노로 일그러진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의 시선은 크레온과, 다시 ‘어둠의 태동’ 사이를 오간다.

    **크레온:**
    이것이 흑월탑의 심장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세상이 여전히 마법의 빛을 누릴 수 있는 이유. 고귀한 희생 없이는, 그 어떤 위대한 마법도 존재할 수 없지.

    **VISUAL:**
    이안은 뒷걸음질 친다. 그는 지금껏 배워왔던 모든 것, 존경했던 모든 가치가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몸서리친다.

    **이안:**
    (떨리는 목소리로)
    말도 안 돼… 이건… 금기야! 인간이 해서는 안 되는 짓이에요!

    **크레온:**
    (아주 미소 지으며)
    금기? 후후. 금기는 약한 자들이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허상일 뿐이다. 진정한 힘은, 그 금기를 깨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자의 것이다. 너는 이 지식을 견딜 수 있겠느냐? 아니면, 너 또한… 이 심장의 일부가 될 셈이냐?

    **VISUAL:**
    크레온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난다. ‘어둠의 태동’의 박동이 더욱 강렬해지며, 주변의 영혼들이 더 빠르게 빨려 들어간다. 이안은 공포에 질려,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듯 뒤로 돌아서 필사적으로 도망치기 시작한다. 그의 등 뒤로 크레온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크레온:**
    어느 쪽이든, 너는 이제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안.

    **VISUAL:**
    이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처음 내려왔던 계단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간다. 그의 뒤로 ‘어둠의 태동’의 박동 소리가 점차 멀어지지만, 그 소리는 이미 그의 심장 깊이 각인된 듯하다. 그는 다시는 이 학원을 예전의 눈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FADE OUT.**

    **최종 Scene:**

    **INT. 흑월탑 도서관, 제한 구역 – 새벽**

    **VISUAL:**
    동이 터오기 시작하는 새벽. 이안은 도서관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눈은 충혈되어 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낡은 고문서가 들려 있지만, 이제는 그 내용이 너무나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 아래, 숨겨진 계단의 입구는 다시 닫혀,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평범한 나무 마루로 돌아와 있다.

    **SOUND:**
    이안의 거친 숨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NARRATION (이안, V.O):**
    그날 밤, 나는 진실을 보았다. 찬란한 지식의 전당 뒤편에 숨겨진, 끔찍하고 거대한 거짓을. 이제 이 학원은 더 이상 배움의 터가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묘지이자, 살아있는 감옥이었다.

    **VISUAL:**
    카메라, 이안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공포가 서려 있지만, 그 밑바닥에는 차가운 결의가 싹트고 있다. 그는 고문서를 꽉 움켜쥔다. 옅은 새벽빛이 창문으로 새어 들어와 이안의 얼굴을 비춘다.

    **이안:**
    (나지막하고 굳은 목소리로)
    나는… 이 모든 것을 폭로할 것이다.

    **FADE TO BLACK.**

    **SOUND:**
    박동 소리 (ECHO, 희미하게).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천명전(天命戰) 에피소드 1: 운명의 그림자**

    [장면 1]
    **배경**: 서울의 밤. 빌딩 숲 사이로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인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북적이는 강남 한복판. 그 중 한 편의 이자카야 ‘달빛주점’ 앞.
    **나레이션 (강진우)**: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이 화려하고 시끄러운 도시의 불빛 아래, 또 다른 세계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나조차도, 그 세계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삶, 따뜻한 밥 한 끼, 친구들과의 시시콜콜한 농담. 그게 전부였으면 좋았을 텐데.

    **진우 (독백)**:
    젠장, 알바 시급으로는 택도 없는 세상에서… 나는 왜 하필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데.

    **장면**: 주방 안. 스무 살 초반의 강진우, 능숙하게 꼬치를 굽고 있다. 땀방울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지만, 그의 눈빛은 퍽 초연해 보인다.
    **점장 (목소리, 안 보임)**:
    진우 씨, 5번 테이블 안주 나왔어요! 빨리빨리!

    **진우**:
    네! (꼬치를 접시에 담으며)

    [장면 2]
    **장면**: 주방 문을 열고 홀로 나선 진우. 순간, 그의 시야가 살짝 일그러진다.
    **진우 (독백)**:
    (젠장, 또 시작인가.)
    희미하게, 그의 눈에 보이지 않던 ‘기(氣)’의 흐름이 포착된다. 왁자지껄한 홀 안, 손님들의 웃음소리, 접시 부딪히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진다.
    **진우 (독백)**:
    (어째서 요즘 들어 이 감각이 더 강해지는 거지? 제발… 이젠 그만 좀…)

    **장면**: 5번 테이블 앞에 도착한 진우. 술에 취해 시끄럽게 떠들던 아저씨 손님들이 진우를 올려다본다.
    **아저씨1**:
    어이, 총각! 여기 맥주 더 줘! 시원한 걸로!

    **진우**:
    (억지로 미소 지으며)
    네,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나레이션 (진우)**:
    나는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예전처럼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운명이란 건 참으로 끈질기고 잔인한 것이다. 마치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며 기어이 붙잡아 놓고야 마는.

    [장면 3]
    **장면**: 진우의 자취방. 낡은 원룸. 침대에 앉아 고서적 한 권을 들여다보고 있는 진우. 책 속에는 오래된 문양들과 기묘한 인물화들이 그려져 있다. 책의 제목은 희미하게 ‘천명록(天命錄)’이라 적혀 있다.
    **진우 (독백)**:
    ‘천명전(天命戰)’. 개소리도 정도껏이지. 이딴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내 강씨 가문 대대로 전해지는 비전(秘傳)이라니. 나는 그냥… 이젠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장면**: 책장을 덮는 진우. 덮인 책의 표지에는 흐릿하게 새겨진 ‘강(姜)’ 자 문양이 보인다.
    **진우 (독백)**:
    하지만… 최근 들어 서울 곳곳에서 발생하는 기이한 사건들. 건물 붕괴, 돌연한 화재, 설명할 수 없는 강력 범죄들. 모든 게 이 책에 적힌 예언과 섬뜩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그리고 내 몸에 나타나는 이 알 수 없는 변화들까지. 기운을 감지하는 능력이 예전보다 훨씬 강해졌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똑똑-!**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

    **진우**:
    누구세요?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 (걸걸함)**:
    이놈 자식, 네놈 스승님이 왔는데 문도 안 열어줄 셈이냐? 이 할애비가 네놈 어릴 적부터 기저귀 갈아주던 사이인데! 버르장머리 하고는!

    **진우**:
    (짜증 섞인 한숨)
    하아, 사부님… 왜 또 찾아오신 거예요.

    [장면 4]
    **장면**: 문이 열리고, 낡은 도복을 입고 수염을 희끗하게 기른 노인, 홍 사부(洪 師父)가 들어선다. 그의 등 뒤로 석양빛이 스며들어 후광처럼 보인다. 방 안으로 들어선 그의 몸에서 은은하지만 깊이 있는 기운이 느껴진다.
    **홍 사부**:
    (방 안을 쓱 훑어보며)
    쯧쯧, 여전히 더럽구나. 젊은 놈이 돼지우리에 사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청소라는 걸 모르고 사나?

    **진우**:
    (문 닫으며)
    용건이나 말씀하세요, 사부님. 요즘 왜 이렇게 자주 찾아오세요? 전 이제 그쪽 일에 엮이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더 이상 그 허황된 무림의 잔재 같은 건…

    **홍 사부**:
    (침대에 앉으며, 진우의 말을 가로막는다)
    엮이고 싶지 않다고? 네가? 허허, 천만에. 네 핏속에 흐르는 피가 그걸 허락할 리가 없지. 네 아비의 피가, 네 조상들의 혼이 가만둘 리가 없지 않느냐.

    **진우**:
    무슨 소리세요?

    **홍 사부**:
    (진지한 얼굴로)
    때가 왔다. ‘천명전’의 막이 올랐어.

    **진우**:
    (표정이 굳어지며)
    벌써…요? 예전보다 훨씬 빨리?

    **홍 사부**:
    그래. 그리고 넌… 피할 수 없다.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넌 강씨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이자, 이번 천명전의 ‘선택받은 자’ 중 한 명이다. 네게 주어진 천명(天命)이니라.

    **진우**:
    (주먹을 꽉 쥐며)
    말도 안 돼! 저는… 저는 그럴 자격도, 힘도 없어요! 그저 평범한 알바생일 뿐이라고요!

    **홍 사부**:
    (진우의 어깨를 툭 치며)
    자격? 힘? 흥, 네 아비도 처음엔 그랬지. 징징대기는. 하지만 결국 모두를 지켜냈어. 네 안에 잠든 힘을 깨워야 한다, 진우야. 세상이 널 필요로 한다. 네게 부여된 천명이니라.

    **진우**:
    세상이요? 제발, 그런 거창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전 그냥… 제발 평범하게 살게 해달라고요!

    **홍 사부**:
    (진우의 말을 끊으며, 눈빛이 매섭게 변한다)
    세상의 운명이 걸려있다. 천명전의 승자는 이 세계의 균형을 조율할 ‘천명지주(天命之主)’가 된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이번 천명전은… 단순히 최강자를 가리는 대회가 아니야.

    **진우**:
    (숨을 삼키며)
    다르다니요?

    **홍 사부**:
    (눈빛이 날카로워진다. 그의 주변으로 희미한 기운이 맴도는 것이 진우의 눈에는 보인다.)
    영겁의 봉인이 풀리고 있다. 과거의 금기된 존재들이 이 현계(現界)를 침범하려 해. 천명전은 그들을 막을 유일한 수단이자, 어쩌면 그들의 침공을 알리는 서곡이 될 수도 있다. 네 아비가 목숨 걸고 지키려 했던 균형이, 지금 무너지고 있다고!

    **나레이션 (진우)**:
    세상에 숨겨진 진실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나를 덮쳐왔다. 나는 그저 파도에 휩쓸리는 작은 조각배에 불과했다. 하지만 파도는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붙였고, 이제 더 이상 피할 곳은 없었다.

    [장면 5]
    **배경**: 다음날 밤. 서울 외곽의 낡은 체육관. 겉보기엔 허름하지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분위기가 확 바뀐다. 웅장한 아레나, 최첨단 홀로그램 스크린, 그리고 압도적인 기운을 뿜어내는 수많은 인파. 이들은 평범한 관중이 아니다. 모두 각기 다른 무문(武門)의 고수들, 혹은 그들의 후계자들이다. 그들의 눈빛에는 강렬한 투지와 알 수 없는 기세가 서려 있다.
    **나레이션 (진우)**:
    결국 나는 이끌려 왔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처럼. 홍 사부의 말은 현실이었다. 이곳이 바로, 천명전의 첫 번째 결전장이었다. 내가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또 다른 세상의 시작점.

    **장면**: 아레나 중앙. 거대한 홀로그램 스크린에 ‘천명전: 현계 무도(現界武道)’라는 글자가 웅장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 아래, 첫 번째 대진표가 공개된다.
    **사회자 (목소리, 우렁참)**:
    모두 주목! 영겁의 맹세를 잇는, 천하의 운명을 건 대결! ‘천명전’의 서막이 드디어 올랐습니다! 혼돈의 시대를 밝힐 천명지주는 누가 될 것인가!

    **진우 (독백)**:
    (수많은 고수들의 기운에 압도되어 숨쉬기조차 힘들다. 저들 중 몇이나 ‘평범한 인간’일까? 아니, 평범한 자는 한 명도 없을 거야.)

    **장면**: 진우의 시선이 아레나 한곳에 멈춘다. 아레나 한쪽에 자리한 VIP 석. 그곳에 거만한 미소를 띠고 앉아있는 한 남자. 하얀 도복 위로 수려한 용 무늬가 금실로 새겨져 있다. 그의 눈빛은 맹렬한 불꽃 같았고, 그의 주위에는 다른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백호연 (독백, 오만한 미소)**:
    흐흐, 드디어 시작되는군. 이번 천명전의 천명지주(天命之主)는 오직 나, 백호연뿐이다. 감히 내 앞길을 막을 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의 주변으로 푸른색의 미약한 기운이 아른거린다.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꿈틀거린다.

    **진우 (독백)**:
    (저 녀석의 기운… 심상치 않다. 마치… 백 호랑이의 기상 같아. 아니, 그보다 더 강렬하고 냉혹한… 저 녀석도 강씨 가문의 후예인가?)

    **사회자**:
    자, 그럼 대망의 첫 번째 경기! 청룡 문파의 ‘서윤’ 선수와… 저 서쪽의 숨겨진 문파, ‘무영도’의 ‘강진우’ 선수입니다! 양 선수, 입장해 주십시오!

    **진우**:
    (자신을 가리키며, 얼굴이 창백해진다)
    네? 저… 저요?! 무영도? 그게 뭔데?!

    **나레이션 (진우)**:
    무영도? 나는 들어본 적도 없는 문파였다. 홍 사부에게 속은 건가? 아니면 이것 또한 운명인가? 내 이름은 이미 아레나를 울리고 있었다.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가, 드디어 나를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장면**: 스포트라이트가 진우에게 쏟아진다. 그는 불안한 얼굴로 아레나 중앙으로 발을 옮긴다. 그의 반대편에서, 푸른 도복을 입은 날카로운 눈매의 여인이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다. 그녀의 몸에서 희미하게 물결치는 기운이 느껴진다. 마치 맑은 물줄기처럼 차갑고도 강렬한.

    **진우 (독백)**:
    (젠장… 첫 상대부터 만만치 않아 보인다. 무영도? 청룡 문파? 이 힘없고 평범한 내가…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아니, 살아남을 수나 있을까?)

    **[컷 아웃]**

    **다음 화에 계속.**

  • 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아니, 진짜. 이 함선 조종간은 왜 또 이 모양이야?”

    저 먼 우주에서, 고작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으려다 손가락을 데인 한유진이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푸른빛이 감도는 광활한 우주가 창밖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캡슐 안에서 졸고 있는 듯한 ‘아틀란티스’ 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한 심우주 탐사선이었고, 그녀는 그 영광스러운 항해의 막내 연구원이었다. 물론, 지금 그녀의 가장 큰 임무는 엉망진창인 자판기와 씨름하는 것이었지만.

    “한 연구원, 오늘도 지독한 아침을 맞이하는군.”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이 함선에서 저런 느끼하고 재수 없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바로 함장 대리이자 그녀의 직속 상사인 이강훈이었다. 이강훈은 늘 완벽하게 다듬어진 헤어스타일과 여유로운 미소를 장착하고 나타났는데, 오늘따라 그 미소가 유독 거슬렸다.

    “함장 대리님, 조종간이 또 고장 났습니다. 이거 벌써 세 번째입니다.”

    유진이 뜨거운 컵을 흔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강훈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얄밉게도 완벽한 자세로 커피를 뽑아 들었다. 그의 커피는 언제나처럼 아무 문제없이 내려왔다.

    “흐음, 기계도 사람을 가리는 모양이지. 유진 연구원은 너무 딱딱해서 기계도 놀라는 거 아닐까?”

    “제가 딱딱하면 함장 대리님은 기름투성이시죠. 미끌거려서 잡히지도 않을 정도랄까요.”

    유진이 대꾸하며 휙 돌아서자, 강훈의 낮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등 뒤를 따라왔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두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티격태격했다. 주변에서는 그런 그들을 보고 ‘결혼할 사이’ 아니면 ‘곧 터질 폭탄’이라고 수군거렸지만, 유진은 후자에 가까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녀가 함교로 들어서자, 오늘 아침 첫 번째 보고를 기다리고 있던 박사무엘 박사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유진 연구원, 드디어 나타났군! 자네 없으니 뭔가 허전해. 이 우주선에서 자네만큼 깐깐하게 데이터를 쪼개보는 사람은 없어!”

    박 박사는 인류 최고의 외계 문명 연구자였다. 그는 늘 세상의 모든 외계 종족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천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박사님, 그냥 제가 자리를 자주 비워서 그렇겠죠.”

    유진이 대충 대꾸하며 자신의 콘솔에 앉았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그녀의 임무는 탐사선이 수집하는 모든 종류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상 징후를 감지하는 것이었다.

    “다들 자리에 착석. 일일 보고 시작한다.”

    강훈의 목소리가 엄격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일단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빈틈없는 함장 대리였다. 모든 승무원이 각자의 자리에서 화면을 응시했다.

    “어제까지의 항해 경로 정상. 탐사 구역 D-17 완전 스캔 완료. 특이 사항 없음.”

    조종사 김민준 대위의 보고가 이어졌다. 민준 대위는 과묵한 성격이었지만, 조종 실력만큼은 우주 최고였다. 그는 늘 미간을 찌푸린 채 어딘가 불만이 있는 듯 보였다.

    “통신 상태 양호. 지구와의 주기적인 링크도 문제 없습니다.”

    통신관 아라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라는 이 딱딱한 함선에서 유일하게 싱그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였다. 그녀는 늘 긍정적이고 밝았으며, 유진에게 “유진 선배, 강훈 선배랑 너무 싸우지 마요. 두 분 사실은 좋아하는 거 다 알아요!” 같은 말을 서슴없이 던지는 발랄한 후배였다.

    “박 박사님, 외계 생명체 반응은 없습니까?”

    강훈이 박 박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박 박사는 눈을 반짝이며 화면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하지만 이 우주는 넓고, 미스터리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그때였다. 유진의 콘솔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삐이익- 삐이익-!’ 평소에는 듣기 힘든 붉은색 경고등이 번쩍였다.

    “무슨 일이지?” 강훈의 목소리에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유진은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화면을 응시했다. “강한 에너지 시그널이 감지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없던 패턴입니다.”

    “에너지 시그널? 혹시… 외계 생명체?” 박 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뇨, 생명체 반응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에너지는 매우 독특해요. 마치 어떤 규칙적인 주파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속도가 너무 빨라서 현재까지의 탐사 기록에는 없는 물질 같습니다.”

    유진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섞였다. 그녀는 수십 년간 축적된 인류의 모든 과학 데이터베이스를 탐색했지만, 이런 패턴의 에너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위치 확인해.” 강훈의 명령이 떨어졌다.

    “현재 아틀란티스 호에서 약 32만 킬로미터 전방. 초고밀도 소행성대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민준 대위가 즉시 경로를 확인하며 보고했다.

    “소행성대라고? 그곳은 스캔으로도 침투가 어려울 텐데.”

    “정확히 그렇습니다. 이 에너지 시그널은 소행성대의 방해 전파를 뚫고 오고 있어요. 최소한 엄청난 출력이거나, 아니면… 우리 기술로는 감지하기 어려운 특수한 성질을 가진 에너지일 겁니다.”

    유진은 손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던 심우주 탐사선에 드디어 뭔가 ‘사건’이 터진 것이다.

    “방향 전환. 민준 대위, 최대 출력으로 접근한다. 아라, 함선 전체 비상 대기 상태 전환. 박 박사님, 탐사 장비 최대로 가동 준비해 주십시오. 유진 연구원, 계속 에너지 패턴 분석해.”

    강훈의 지시는 빠르고 정확했다. 그는 역시 유능한 함장 대리였다. 유진은 그 순간만큼은 그의 느끼하고 재수 없는 면모를 잊고 그의 리더십에 집중했다.

    아틀란티스 호는 굉음을 내며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함선이 텅 빈 우주를 가로질러 미지의 에너지원을 향해 돌진했다. 창밖으로는 별들이 선처럼 길게 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화면에는 우뚝 솟은 검은 바위들이 빼곡한 소행성대가 나타났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함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유진 연구원, 거리!” 강훈이 외쳤다.

    “10만 킬로미터, 5만, 1만… 젠장, 사라졌습니다!”

    유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의 화면에는 방금까지 붉게 번쩍이던 에너지 시그널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사라졌다고? 대체 무슨 말이지?” 강훈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잔여 에너지 파동은 감지됩니다! 아주 미약하지만, 특정 지점에 집중되어 있어요!”

    유진은 황급히 좌표를 계산했다. “저기입니다! 소행성대 한가운데, 가장 밀집된 지역의 빈 공간입니다!”

    “빈 공간…?”

    민준 대위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레이더에는 그저 암석과 먼지만 가득한 곳이었다.

    “강훈 함장 대리님, 탐사 소형 비행정을 출동시켜야 합니다! 육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박 박사가 흥분해서 말했다.

    강훈은 잠시 망설였다. 미지의 에너지원이 사라진 곳에, 그것도 위험한 소행성대에 탐사정을 보내는 것은 분명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은 과학자들의 숙명이었고, 탐사선 승무원들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알겠다. 민준 대위, 탐사정 출격 준비. 조종은 내가 한다. 유진 연구원, 동행해서 직접 패턴을 분석해.”

    “네? 제가요?” 유진은 눈을 깜빡였다. 그 위험한 곳에 강훈과 단둘이 가라고? 그녀는 순간 거절하려 했지만, 이내 눈빛이 바뀌었다. 이 미스터리를 직접 풀어낼 기회였다. 게다가, 강훈이 조종하는 탐사정에 탄다면, 그가 얼마나 능숙하게 운전하는지 지켜볼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녀는 그의 운전 실력에 대해 끊임없이 트집을 잡을 예정이었다.)

    ***

    “벨트 꽉 맸나, 유진 연구원? 내 조종 실력에 홀딱 반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좁은 탐사정 안에서 강훈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탐사정 ‘하이에나’ 호는 아틀란티스 호의 보조선으로, 소형 탐사용으로 특화된 기체였다.

    “제발 추락만 하지 마세요. 홀딱 반할 겨를도 없이 저 세상으로 갈 테니.”

    유진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였다. 탐사정은 아틀란티스 호의 격납고를 빠져나와 거친 소행성대로 진입했다. 수많은 암석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강훈의 손은 조종간 위에서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는 작은 암석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며 하이에나 호를 능숙하게 몰았다. 유진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의 조종 실력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좌표로 진입 중. 충돌 가능성 70%.” 민준 대위의 경고음이 무전기를 통해 들려왔다.

    “괜찮다. 내가 누군데.” 강훈은 여유롭게 대답하며 기체를 더욱 깊숙이 몰아붙였다.

    곧이어 유진의 화면에 잔여 에너지 파동이 가장 강하게 감지되는 지점이 표시되었다. 그곳은 소행성대가 빽빽하게 들어찬 곳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공간을 만들어놓은 것처럼.

    “바로 저기입니다!” 유진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강훈은 하이에나 호를 그 빈 공간으로 부드럽게 진입시켰다. 그리고 모두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소행성들 사이에 홀로 떠 있는 것은… 검은색의 매끈한 구체였다. 농구공보다 조금 더 큰 크기였고, 어떤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표면에는 미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지구상의 어떤 문자나 문명에서도 본 적 없는 기하학적인 패턴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는 아주 미약하게, 푸른색과 보라색 빛을 뿜어내며 주기적으로 ‘웅-‘ 하는 낮은 진동음을 내고 있었다.

    “세상에…!” 유진은 숨을 들이켰다.

    “이것이… 그 에너지원의 정체였단 말인가.” 강훈의 목소리에도 경외감이 서렸다.

    이것은 인류가 우주에서 최초로 발견한 명백한 외계 문명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지구로부터 수십만 광년 떨어진, 인류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심우주에서.

    “유진 연구원, 스캔!”

    유진은 재빨리 탐사정의 모든 센서를 구체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스캔 불가능합니다. 어떤 센서도 이 구체의 내부를 읽어낼 수 없어요. 마치 모든 전파를 흡수하는 것 같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을 만큼 견고한 재질인가?”

    “아뇨, 표면은 아주 매끄러워 보입니다. 마치…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은 재질입니다.”

    강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탐사정을 구체에 더욱 가까이 접근시켰다. 이제 구체는 유리창 바로 앞에까지 와 있었다. 그 순간, 구체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이며 현란한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이내, 구체의 표면에 홀로그램 영상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흐릿한 형체였으나, 곧 선명해졌다.

    화면에는… 우주선 아틀란티스 호의 승무원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강훈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구체가 보여주는 영상은 단순한 승무원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첫 번째 영상은 주먹을 꽉 쥐고 뭔가에 잔뜩 짜증 내는 유진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젓고 있었고, 그 옆에는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놀리는 강훈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떠 있었다.

    유진은 자신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다음 영상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민준 대위가 조종석에서 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옆에는 아라가 몰래 다가와 그의 머리에 낙서를 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으악! 아라!” 민준 대위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뚫고 비명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구체는 새로운 영상을 띄웠다. 이번에는 박 박사가 외계인 봉제 인형을 품에 안고 행복하게 잠든 모습이었다.

    모두가 경악했다. 이 구체는 어떻게 아틀란티스 호 승무원들의 이런 사적인 순간들을 알고 있는 것인가? 더군다나, 방금 막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이게 뭐야…! 도대체 이 구체의 정체가 뭐냐고!” 유진이 소리쳤다.

    구체는 유진의 외침에 반응하듯, 마지막 영상을 띄웠다.

    이번에는 강훈과 유진이 탐사정 안에서 티격태격하다가,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서로에게 밀착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고,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키스라도 할 것처럼.

    “읍-!”

    유진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얼른 강훈을 쳐다봤다. 강훈 역시 당황한 얼굴로 구체를 바라보다가, 이내 뜨거워진 얼굴로 유진을 흘끗 쳐다봤다.

    갑자기, 하이에나 호 안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마치 우주 공간처럼 넓고 깊었다.

    “이, 이건… 조작된 거야! 그래! 외계인이 우리를 농락하려는 거라고!”

    유진은 더듬거리며 외쳤다. 강훈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그의 귀 끝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외계 문명이 이런… 이런 영상을 왜 보여주겠나.”

    강훈이 허둥지둥 변명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구체의 마지막 영상은 그들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넣은 후 사라졌고, 이내 다시 푸른빛과 보라색 빛을 은은하게 뿜어내며 조용히 떠 있었다.

    이 미지의 외계 유물은, 인류의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의 가장 은밀한 순간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앞으로 이 심우주 탐사선에 탑승한 이들의 관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방금 전 구체가 보여준 마지막 영상이었다.

    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저 느끼하고 재수 없는 함장 대리랑… 키스할 뻔한 모습이라니! 최악의 악몽이었다.

    강훈은 슬그머니 유진을 쳐다봤다. 그녀의 빨개진 귀 끝을 보니, 그의 얼굴도 다시금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조종간을 잡았다.

    “일단… 회수하자. 박 박사님께 보고해야겠군.”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건조했다. 그리고 유진은 확신했다. 이 알 수 없는 구체가 아틀란티스 호에 실리는 순간, 심우주 탐사선 ‘아틀란티스’ 호의 평화는 영원히 깨질 것이라고.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신과 이강훈 함장 대리가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1챕터 끝***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거웠다. 찢어진 비닐하우스 지붕 사이로 스며드는 흙먼지 섞인 햇살은 희미했고, 눅눅한 공기는 퀘퀘한 곰팡이 냄새와 녹슨 쇠 냄새로 가득했다. 지혁은 녹슨 쇠 파이프를 쥐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작업화가 으깨진 벽돌 부스러기를 밟을 때마다 거슬리는 소음이 터졌다.

    오늘 목표는 폐허가 된 병원의 지하 창고였다. 소문으로는 아직 쓸만한 약품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물론 그건 지겹도록 들어온 ‘소문’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당장 마을의 어린아이들에게 필요한 해열제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그는 작은 희망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젠장, 또 놈들 흔적이야.”

    벽에 긁힌 검붉은 자국. 사람이 아닌, 어떤 짐승의 발톱 자국이었다. 거대한 맹수와는 달랐다. 분명 날카롭지만, 기이하게도 질서 정연한 선. 그것은 ‘변종’들의 흔적이었다. 예전 세상의 동물들이 바이러스에 잠식되어 흉측하게 변이한 괴물들. 그들은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가장 취약한 순간을 노렸다.

    지혁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훈련받은 대로, 폐건물의 구조를 머릿속에 그리며 가장 안전한 길을 택했다. 복도를 지나 계단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크르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지혁은 즉시 몸을 낮춰 옆 벽에 바짝 붙었다. 소리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두세 마리. 변종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더욱 위험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쇠 파이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을 죽이고 그림자 속에서 기다렸다. 놈들의 육중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썩어가는 고기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찔렀다. 놈들은 후각으로 사람을 쫓았다.

    세 마리의 변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와 개의 중간쯤 되는 크기.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길고 날카로운 발톱과 송곳니, 그리고 온몸을 뒤덮은 시커먼 털 사이로 불규칙하게 솟아난 뼈 돌기들이 흉측했다. 특히 빛 없는 눈동자는 피에 굶주린 광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지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변종들은 킁킁거리며 복도를 탐색했다. 놈들이 그를 지나쳐 갈 것이라는 계산은 빗나갔다. 선두에 선 변종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허공을 향해 포효했다.

    “크아아악!”

    들켰다.

    지혁은 망설일 틈도 없이 몸을 날렸다. 선두에 선 변종의 목덜미를 쇠 파이프로 후려쳤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변종은 휘청거리며 쓰러졌지만, 곧바로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놈들은 어지간한 타격으로는 죽지 않았다. 뇌를 직접 공격하거나, 치명상을 입혀야만 했다.

    나머지 두 마리가 좌우에서 달려들었다. 지혁은 벽을 등지고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놈들의 발톱이 벽을 긁으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한 마리가 그의 다리를 노리고 달려들었을 때, 그는 파이프를 휘두르며 점프해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한 마리의 변종이 그의 뒤를 노렸다.

    *휘익!*

    날카로운 발톱이 지혁의 등 뒤를 향해 뻗어왔다. 피할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따가운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앞으로 굴렀다. 등에 깊은 상처가 났음을 직감했다.

    “젠장…!”

    변종들은 먹잇감을 발견한 굶주린 짐승처럼 그를 포위했다. 놈들의 눈은 붉게 번뜩였다. 이대로 끝인가. 지혁은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다. 놈들에게 찢겨 죽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마지막 발악을 준비하며 쇠 파이프를 고쳐 쥐었다.

    바로 그때였다.

    *쉬이익…!*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개처럼 날아왔다. 섬광처럼 빛나는, 날카로운 파편. 그것은 선두에 서 있던 변종의 머리에 정확히 박혔다. 놈은 짧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마치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채.

    지혁은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기도 전에, 두 번째 파편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다른 변종의 심장 부위. 놈은 발버둥 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남은 한 마리는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살기 어린 눈으로 어둠 속을 노려봤다. 지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은 파편이 날아온 곳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어둠에 물들어 있었고, 늘씬한 몸매는 밤색 가죽 옷에 싸여 있었다. 후드 아래 가려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 눈만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은색 눈동자. 차갑지만 어딘가 신비로운, 인간의 것이 아닌 눈동자였다.

    ‘황혼족…?’

    지혁의 머릿속에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폐허 너머 숲 속에 산다는 이형의 존재들. 인간과는 다른 생김새, 다른 언어, 그리고 인간을 해친다는 소문이 자자한 존재들. 그들은 ‘황혼족’이라 불렸다.

    그 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였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부드러운 움직임. 남은 변종은 그 그림자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마치 거대한 뱀이 먹이를 덮치듯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림자는 더 빨랐다. 그녀의 손에서 또 다른 파편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손에 쥐어진 채 그대로 휘둘러졌다. 변종의 목이 피를 뿜으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나머지 몸통은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싸움은 시작과 동시에 끝났다. 지혁은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었다. 공포와 경계, 그리고 미약한 경외감. 복합적인 감정이 그를 덮쳤다.

    황혼족은 쓰러진 변종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천천히 지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후드 아래의 얼굴이 조금 더 드러났다. 창백한 피부, 날카롭게 뻗은 턱선. 그리고 여전히 푸른빛을 머금은 은색 눈동자.

    그녀의 시선이 지혁의 등 뒤에 난 상처에 닿았다.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오지 마…!”

    지혁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쇠 파이프를 휘둘러 경고했다. 그녀는 그제야 멈춰 섰다. 차가운 은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했다. 마치 그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응시할 뿐. 고요한 침묵이 폐허를 가득 채웠다. 지혁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형의 존재가 뿜어내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작고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안에는 푸른빛을 띠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병을 내밀었다. 지혁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독인가? 함정인가?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처음 듣는 언어. 알아들을 수 없는, 하지만 어딘가 부드럽고 맑은 음성이었다.

    “…이런, 상처에… 좋아.”

    어눌했지만, 분명 한국말이었다. 띄엄띄엄 끊어진 단어였지만, 뜻은 명확했다. 그녀는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려 하는 건가?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아는 건가?

    지혁은 혼란에 빠졌다. 마을 사람들은 황혼족을 ‘괴물’이라고 불렀다. 인간을 해치고, 잡아먹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 황혼족은… 자신을 구해줬고, 심지어 치료제를 건네고 있었다.

    그의 등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상처는 점점 더 쓰라려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병을 내민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은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는 위협이나 적의가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평온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게, 뭐야…?”

    지혁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아픔, 사라져.”

    아픔이 사라진다고.

    지혁은 망설였다. 평생 들어온 경고와 지금 눈앞의 현실 사이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 속에서, 그는 어떤 종류의… 호기심을 보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스치는 순간, 차가운 온기가 전해졌다. 인간의 것과는 다른, 서늘하고 매끄러운 감촉이었다.

    병을 받아든 순간, 그녀의 얼굴에 미약한 변화가 스쳤다. 후드 아래 가려져 있던 입술 끝이 아주 살짝 위로 올라가는 듯했다. 그건… 미소였다.

    지혁은 병을 쥔 채,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인간과 황혼족. 그 금지된 경계가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자신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이름은?” 지혁은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질문을 이해한 듯, 아니면 그저 자신의 역할을 다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질 준비를 하는 듯했다.

    지혁은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만! 당신…!”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눈을 마주했을 때, 그녀의 은색 눈동자에서 희미하게 푸른빛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마치 어둠 속의 별처럼.

    그리고 그녀는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지혁은 홀로 남아, 핏자국이 선명한 복도와 손에 든 푸른빛 액체 병, 그리고 미지의 황혼족이 남긴 잔상을 응시했다. 심장이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쳤다.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잊혀진 심연의 왈츠

    메마른 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수천 년은 족히 묵었을 법한 고대 유적의 공기는 습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카인이 걸음을 멈추자, 그의 뒤를 따르던 리온이 팔짱을 끼며 불평했다.

    “야, 카인. 잠깐 쉬어 가는 건 어떻냐? 벌써 세 시간째 내리 달리고 있잖아. HP는 둘째 치고, 내 정신력이 바닥나기 직전이라고.”

    리온은 큼지막한 타워 실드를 땅에 쿵, 하고 내려놓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강철 같은 방어력을 자랑하는 중갑 전사였지만, 연달은 탐사에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쉬어? 리온, 이런 위대한 유적에서 감히 쉼을 논하다니. 이건 탐험가의 모독이야!” 카인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낡고 거대한 고문서가 들려 있었다. 시스템상으로는 그냥 ‘오래된 양피지’였지만, 카인에게는 보물 그 이상이었다.

    “모독 좋아하시네. 내 발바닥이 모독당하고 있는 기분이다.” 리온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리온 말이 맞아, 카인.” 이마에 잔뜩 주름을 잡은 제이가 카인에게 다가왔다. 그의 푸른 마법사 로브는 곳곳에 찢기고 흙먼지가 묻어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이 정도 깊이까지 내려왔으면, 이젠 고대 문명이 남긴 심장부에 가까워졌을 거야. 무작정 돌진하는 것보단… 잠시 멈춰서 주변을 탐색하는 게 현명해.”

    카인은 제이의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는 파티의 브레인이었다. 고대 언어 해독부터 마법 이론까지, 그의 지식은 이 잊혀진 유적을 탐사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럼 이 홀에서 잠시 휴식 겸 탐사를 시작해볼까?” 카인은 주변을 둘러봤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원형 홀이었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푸르스름한 빛을 내뿜는 정체불명의 광석들이 벽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중앙에는 마치 거대한 조각상처럼 우뚝 솟은 장치가 있었다. 복잡한 기계 장치와 알 수 없는 문양들로 뒤덮인 그것은 어떠한 동력으로 움직이는지 가늠조차 어려웠다.

    “이게… 대체 뭐야?” 리온이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장치를 노려봤다. 그녀의 거대한 실드에서 은은한 방어 마법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이런 규모의 장치는 처음 봐.” 제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장치에 새겨진 문양을 응시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장치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마치 살아있는 듯한 푸른빛이 그의 손끝을 감쌌다. “흥미롭군. 마력이 아닌, 전혀 다른 종류의 에너지가 흐르고 있어. 이건 우리가 아는 고대 문명의 기술과는 달라. 훨씬… 훨씬 더 오래된 것 같아.”

    카인은 벌써 장치 주변을 맴돌며 손으로 이리저리 더듬고 있었다. “여기, 이 문양들 좀 봐! 이건 내가 고문서에서 봤던… ‘별의 노래’를 뜻하는 상형문자와 비슷해! 설마, 이 유적의 진짜 이름이 ‘별의 심연’이라는 게 사실이었나?”

    “별의 심연? 그건 전설 속에나 나오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던 고대 유적이잖아.” 제이의 목소리에 놀라움이 섞였다.

    “그래! 그 전설의 유적이 여기라고! 내 육감이 말해주고 있어!” 카인이 흥분해서 외쳤다. 그는 기계의 복잡한 구조를 손으로 따라가다, 문득 한 부분에 시선이 꽂혔다. 다른 부분과는 달리 매끄럽게 마모된, 손으로 자주 만진 듯한 홈이 파여 있는 곳이었다. 마치… 열쇠 구멍처럼.

    “이거 봐! 여기 뭔가 끼워 넣는 곳이 있어!” 카인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함부로 만지지 마, 카인! 또 무슨 괴물 튀어나오게 하려고!” 리온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난번, 카인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고대 제단을 건드렸다가 쏟아져 나온 미이라들을 그녀가 홀로 막아내야 했다.

    “괴물이 나오면 막으면 되지! 우리는 파티잖아?” 카인은 리온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허리춤을 뒤졌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주먹만 한 크기의 푸른빛 수정구를 꺼냈다. 그는 이 수정구를 몇 주 전, 이 유적의 입구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했다며 소중하게 보관해 왔다.

    제이가 경고했다. “카인! 기다려! 저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패턴이 심상치 않아. 뭔가 큰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어!”

    하지만 카인은 이미 수정구를 홈에 맞춰 끼워 넣고 있었다. 마치 제자리를 찾은 조각처럼, 수정구는 완벽하게 홈에 들어맞았다.

    **콰아아앙!**

    홀 전체가 굉음과 함께 진동했다. 천장에 박힌 푸른 광석들이 미친 듯이 깜빡였고, 중앙의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눈이 멀 정도로 강력하게 폭발했다.

    “젠장! 역시나!” 리온이 외치며 본능적으로 실드를 들어올렸다. 폭발적인 빛과 함께 먼지가 걷히자, 장치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복잡한 문양들이 살아 움직이듯 빛나기 시작했고, 장치의 상단부가 천천히 열리며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솟아올랐다.

    그리고 그 에너지 덩어리 너머로, 이전에 없던 새로운 통로가 나타났다. 어둠 속에 잠겨 있던 통로는, 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받아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통로가 아니었다. 겹겹이 쌓인 고대 금속 문 너머, 거대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저게… 뭐야?” 리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카인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통로 너머의 공간은 마치 밤하늘을 옮겨놓은 듯했다.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검은 우주가 펼쳐져 있었고, 그 중심에는 거대한 행성이 떠다니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주가 아니었다. 거대한 홀의 천장과 벽면에 홀로그램처럼 투영된, 환상적인 영상이었다.

    “이건… 차원 전송 장치인가? 아니, 그 이상의 무언가야.” 제이가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이 유적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비밀을 품고 있었어.”

    그때였다. 홀로그램 우주의 한가운데 떠 있던 거대한 행성 형상에서, 아주 미약하지만 명확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거인이 기지개를 켜는 듯한, 묵직하고 심장을 울리는 소리.

    **’…환영한다, 새로운 계승자들이여…’**

    나지막하고 거대한 목소리가 홀 전체를 가득 메웠다. 그 목소리는 어떤 언어로도 정의할 수 없었지만, 놀랍게도 그들의 뇌리에 직접적으로 박히는 듯했다.

    “계승자?” 리온이 실드를 꽉 쥐었다. “저게 말하는 거야?”

    카인의 얼굴에는 경외심과 함께 지독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세상에… 이건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어… 살아있는… 살아있는 문명 자체였어!”

    그때, 거대한 홀로그램 행성에서 한 줄기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빛이 그들에게 향했다.

    “피해!” 제이가 비명을 질렀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섬광은 그들의 몸을 순식간에 관통했고, 그들의 시야는 강렬한 백색 빛으로 가득 찼다.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한 기묘한 감각과 함께, 그들은 미지의 힘에 이끌려 홀로그램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마지막으로 카인의 귓가에 맴돈 것은, 묵직한 목소리의 다음 말이었다.

    **’…이제 너희는… 진정한 심연의 비밀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빛이 사라지고, 카인의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그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눈동자를 본 듯했다. 그 눈동자는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천 년간 잊혔던 비밀이, 드디어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 추리 미스터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거대한 홀 안은 인파의 열기로 가득했다. 천장을 뚫을 듯 치솟은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부신 빛을 흩뿌렸고, 샴페인 잔 부딪히는 소리, 형식적인 웃음소리들이 웅웅거리는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그 모든 화려함의 중심에는 재하가 있었다. 검은 연미복 차림의 그는 무대 위에 서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능숙하게 청중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거대한 스크린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위로는 그가 야심 차게 추진해 온 신도시 프로젝트, ‘새벽’의 환상적인 조감도가 빛나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께,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곳에서 인류의 미래가 시작될 것입니다.”

    재하의 목소리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상 아래, 칵테일 잔을 든 수많은 거물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감탄사를 뱉어냈다. 강현은 홀의 가장 어두운 구석,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재하의 오만한 미소를 볼 때마다, 그의 심장 속에서 차갑게 응고되어 있던 복수의 칼날이 쨍그랑거리는 소리를 내는 듯했다.

    수년 전, 강현은 그와 재하가 함께 밤샘 연구를 거듭하며 피와 땀으로 일궈낸 아이디어를 재하에게 빼앗겼다. 친구라는 이름 아래 뒤통수를 맞은 강현은 모든 것을 잃었다. 그의 명성, 미래,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영혼까지. 그는 밑바닥으로 떨어졌고, 재하는 그 폐허 위에 자신의 거대한 왕국을 쌓아 올렸다. 오늘, 그 왕국의 가장 화려한 첨탑이 무너져 내릴 차례였다.

    강현의 손에 쥐어진 낡은 스마트폰 액정 위로 작은 초록색 점이 깜빡였다. 재하가 연설을 시작한 지 정확히 12분 30초가 지났다는 신호였다. 완벽한 타이밍. 강현의 입술 새로 싸늘한 미소가 스쳤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작은 USB 드라이브를 꺼내 들었다. 단순한 저장 장치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재하가 지금 자랑하고 있는 ‘새벽’ 프로젝트의 진짜 설계도면과, 그 도면의 치명적인 결함에 대한 분석 자료, 그리고 그 도면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히 밝혀줄 결정적인 증거들이 담겨 있었다.

    그는 홀의 측면에 위치한 작은 문을 통해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복도는 조용했고, 보안 요원들은 모두 무대 주변에 집중되어 있었다. 강현은 망설임 없이 서버실로 향했다. 어둡고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그곳에서, 수많은 케이블들이 복잡하게 얽혀 거대한 기계들을 움직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새벽’ 프로젝트의 모든 데이터가 모이고, 오늘 발표될 영상과 자료들이 송출되는 심장이었다.

    강현은 능숙하게 한쪽 서버의 커버를 열었다. 내부의 복잡한 회로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손바닥 안의 지도와 같았다. 과거, 이 모든 시스템의 설계에 참여했던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재하는 그를 배신했지만, 그의 지식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

    “네가 나에게서 훔쳐간 것은 단순한 아이디어가 아니었어, 재하. 내 열정, 내 꿈, 내 전부였지.”

    강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확한 포트에 USB 드라이브를 꽂아 넣었다. 몇 초간의 정적. 그리고 드라이브 안에 숨겨져 있던 악성 코드가 서버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 코드는 ‘새벽’ 프로젝트 발표 자료의 핵심 프레임을 찾아내, 미리 준비된 대체 영상으로 교체할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드라마틱하게’.

    다시 홀로 돌아왔을 때, 재하의 연설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새벽’이 단순한 도시를 넘어, 인류 진보의 상징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재하가 힘찬 목소리로 외치며 손짓하자, 뒤편의 거대한 스크린에 ‘새벽’ 프로젝트의 최종 홍보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웅장한 음악과 함께 드론이 촬영한 듯한 도시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첨단 빌딩들이 하늘로 솟아 오르고, 친환경적인 교통수단들이 유려하게 움직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청중들의 입에서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재하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만개했다.

    바로 그때였다.

    화면이 갑자기 지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그러졌다. 웅장한 음악도 삑사리를 내며 끊겼다. 홀 안의 모든 시선이 스크린에 집중되었다. 재하의 미소가 굳어졌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한 그는 스태프를 향해 다급히 손짓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일그러졌던 화면이 거짓말처럼 선명해지더니, 전혀 다른 영상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스크린에는 ‘새벽’ 프로젝트의 초기 설계 도면과 복잡한 수식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설계의 원작자: 강현」

    홀 안의 웅성거림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재하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마이크를 쥔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어지는 영상에는 더욱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다. ‘새벽’ 프로젝트의 핵심 기술인 ‘중력 완화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을 지적하는 분석 리포트가 펼쳐졌다. 그 리포트에는 해당 시스템이 장기적으로 도시의 지반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몇 차례의 시뮬레이션 결과 데이터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심지어 그 보고서의 작성자도 ‘강현’이라는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게… 이게 뭐야?! 당장 꺼! 꺼버리란 말이야!”

    재하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홀 안에 울려 퍼졌다. 그의 절규는 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증거 영상의 완벽한 배경음악이 되었다. 청중들의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술렁거림으로 변했고, 곧이어 분노와 혼란이 뒤섞인 비난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저게… 사실이야?”
    “저 중력 완화 시스템, 원래 강현 씨 아이디어 아니었어?”
    “그럼 재하 그룹은 사기극을 벌인 거란 말인가?”

    강현은 어둠 속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재하의 얼굴에 스며드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무너져 내리는 모든 것을. 그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심장 속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재하가 강현에게서 빼앗아간 모든 것을, 그는 몇 배로 되돌려줄 생각이었다.

    스크린 속의 영상은 마지막으로 강현의 오래전 인터뷰 영상으로 바뀌었다. 풋풋하고 열정적이었던 젊은 강현이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저는 사람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고 싶습니다. 단 하나의 오점도 없는, 완벽한 도시를요.”

    그리고 그 인터뷰 영상 위로 붉은 글씨가 떠올랐다.

    「당신이 파괴한 것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강현은 홀의 혼란을 뒤로하고 그림자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복수가 이제 막 첫발을 내디뎠을 뿐이었다. 그리고 재하, 너는 이제부터 내가 준비한 지옥을 맛보게 될 것이다. 그의 입술 새로, 피처럼 차가운 미소가 흘러나왔다.

  • SF (공상과학)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둠은 류진의 오랜 친구였다. 창밖으로는 신시아의 불꽃놀이 같은 네온사인이 미친 듯이 번뜩였지만, 그의 낡은 작업실은 심연처럼 고요했다. 공기 중에는 묵직한 오존 냄새와 차가운 금속의 비릿한 향이 섞여 있었다. 류진은 홀로그램 스크린 위로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데이터 스트림을 응시했다. 과거의 잔해들이 그를 다시 과거로 끌어당겼다.

    “강태호…….”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차가운 쇠붙이처럼 날카로웠다. 스크린 속에는 찬란한 웃음을 짓고 있는 젊은 시절의 강태호가 있었다. 그 옆에는 아직 상처가 없던 류진 자신도 있었다. 눈부신 미래를 함께 꿈꾸던 두 명의 천재. 그들은 인류의 지평을 넓힐 위대한 프로젝트, ‘헤르메스’의 핵심 브레인이었다. 둘도 없는 친구이자 동료. 서로의 등을 맡기고 죽음의 문턱까지 함께 걸었던 전우.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한낮의 신기루에 불과했다.

    최종 단계에 이르렀을 때, 태호는 류진을 미끼로 삼았다.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해, 류진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개발 중이던 ‘초공간 도약 엔진’의 치명적인 결함에 류진을 홀로 노출시키고, 자신은 뒤에서 모든 데이터를 복사한 채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 결과, 류진은 불타는 실험실 속에서 시체처럼 버려졌고, 태호는 ‘인류의 영웅’이라는 찬사와 함께 신시아의 최고 권력자로 등극했다.

    화면 속 태호의 웃음이 점점 더 커다란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류진은 무의식적으로 왼쪽 팔을 움켜쥐었다. 팔목부터 어깨까지는 차가운 크롬 합금으로 대체된 의수였다. 불타는 실험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의 육신은 절반이 기계가 되었고, 정신은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적으로 응축되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림자 속에서 태호가 쌓아 올린 제국을 지켜보며 칼날을 갈아왔다.

    “네가 만든 그 지옥, 내가 다시 돌려줄 시간이야.”

    류진은 스크린을 끄고 작업대 위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그가 직접 제작한 광자 라이플, ‘밤의 숨결’이었다. 검은색 무광 합금으로 마감된 총신은 섬뜩하리만큼 날렵했다. 내부에 압축된 플라즈마 에너지가 가느다란 전류음과 함께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그의 의수는 라이플의 손잡이를 완벽하게 감싸 쥐었다. 마치 애초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낡은 작업실의 한쪽 벽이 열리며 숨겨진 통로가 드러났다. 류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았다. 검은 전투복 위로 부착된 초경량 강화 장갑은 그의 몸을 더욱 단단하게 보이게 했다. 헬멧의 바이저가 내려오자, 그의 얼굴은 완벽히 숨겨졌다. 이제 그는 류진이 아니었다.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 강태호의 모든 것을 파괴할 망령이었다.

    통로는 신시아의 지하 배수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하수구의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류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는 지능형 드론 ‘세르베로스’를 활성화시켰다. 작은 드론은 그의 어깨 위로 날아올라 그의 시야를 보조하기 시작했다.

    “강태호의 거점은 아크로폴리스 최상층 펜트하우스. 고도 500미터 이상, 3중 방어 시스템. 경비 인력 200명 이상, AI 감시 체계 가동 중. 접근 경로 열 개 중, 유일하게 알려지지 않은 경로 하나를 확보했다.”

    세르베로스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류진의 헬멧 내부로 울려 퍼졌다.

    “예상 소요 시간?”
    “침입 성공 시, 목표 지점까지 12분.”

    류진은 씨익 웃었다. 헬멧 바이저 너머로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12분. 충분해.”

    그는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먹이를 쫓는 그림자처럼 미끄러웠다. 지하 배수로를 따라 한참을 나아갔을까, 거대한 환기구 터널이 나타났다. 수십 개의 거대한 팬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도시의 탁한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곳을 통해 아크로폴리스의 심장부까지 침투할 수 있었다.

    “강태호, 네가 한 짓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어.”

    류진은 거친 철제 사다리에 의수를 걸었다. 낡고 녹슨 철제 사다리는 그의 무게에 맞춰 비명을 질렀다. 그는 한 칸 한 칸 신중하게 몸을 끌어올렸다. 수백 미터 상공까지 이어지는 수직 통로였다. 바람 소리가 헬멧을 강타했고, 기계 팬이 내뿜는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했다. 그러나 류진의 심장은 얼음처럼 차분했다.

    마침내, 그는 환기구 통풍구의 상단에 도달했다. 얇은 철제 그리드 너머로 아크로폴리스 펜트하우스의 화려한 내부가 희미하게 보였다. 태호의 호화로운 생활, 그가 류진의 희생 위에 쌓아 올린 가식적인 왕국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순간, 세르베로스가 경고음을 울렸다.
    “미확인 침입 감지! 경비 인력 출동 중!”

    류진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밤의 숨결’이 푸른빛을 발했다. 망설임 없이 그리드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자, 고밀도 플라즈마 광선이 철제 그리드를 순식간에 녹여 버렸다. 금속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경보음이 더욱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강태호.”

    그의 목소리는 헬멧 내부에서 낮게 울렸다. 마치 지하에서 기어 올라온 복수의 화신처럼.

    “이제 겨우 시작이야.”

    류진은 무너진 그리드를 박차고 펜트하우스 내부로 뛰어들었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호화로운 홀 중앙에 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경비 병력들을 보고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강태호의 모습이었다. 태호의 얼굴에서 모든 미소가 사라진 채, 공포에 질린 표정이 역력했다. 류진은 그 표정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복수의 시작점이었다.

  • 로맨틱 코미디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폐허 속 썸, 고철 심장 두근거리다!

    **[에피소드 1: 낡은 백화점의 수상한 그림자]**

    **[장면 #1]**
    **[장소]** 잿빛으로 변해버린 도시 외곽, ‘희망 백화점’ 잔해
    **[시간]** 오후 늦게,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인물]** 이유진

    **[컷 #1]**
    **[그림]** 무너지고 삭아버린 ‘희망 백화점’의 낡은 간판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나가 뼈대만 앙상하고, 건물 외벽에는 식물들이 끈질기게 엉겨 붙어 있다. 황량하지만 동시에 기묘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풍경. 먼지 가득한 하늘에는 주황빛 노을이 스며들고 있다.
    **[효과음]** (바람 소리) 스아아아…

    **[컷 #2]**
    **[그림]** 백화점 내부. 거대한 홀의 천장은 뚫려있고, 한때 화려했을 에스컬레이터는 끊어져 기괴한 형상으로 널브러져 있다. 흙먼지가 쌓인 바닥에는 부서진 진열대와 상품 잔해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 사이를 커다란 배낭을 멘 유진이 조심스럽게 지나가고 있다. 그녀의 작업복은 낡았지만 활동성이 좋아 보인다. 얼굴에는 흙먼지가 약간 묻어있다.
    **[대사]**
    (유진, 혼잣말) “젠장, 벌써 닷새째 아무것도 못 찾았잖아. 이대로 가다간… 겨울을 못 넘겨.”
    **[효과음]** (발걸음 소리) 사각, 사각… (작게 울리는 메아리)

    **[컷 #3]**
    **[그림]** 유진의 시점. 그녀의 눈은 마치 스캐너처럼 주변을 훑고 있다. 부서진 전자제품 더미, 찢어진 의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잡동사니들. 그녀는 특히 ‘전자제품 코너’였을 법한 곳을 끈질기게 살피고 있다.
    **[대사]**
    (유진, 혼잣말) “태양광 충전 컨트롤러… 제발, 딱 그 부품 하나만이라도… 아니, 하다못해 비슷한 규격이라도!”
    **[생각]** (유진) 물이 얼기 전에, 식물들이 시들기 전에… 발전기를 제대로 돌려야 해.

    **[컷 #4]**
    **[그림]** 유진이 낡은 테이블 아래를 들여다보는 모습. 그녀의 손에 든 소형 탐지기가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다. 그녀의 표정은 잔뜩 기대를 품고 있지만, 이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
    **[대사]**
    (유진) “하아… 또 폐기물.”
    **[효과음]** (탐지기) 삐빅- (멈춤)

    **[컷 #5]**
    **[그림]** 유진이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본다. 갑자기 어딘가에서 찢어지는 듯한 금속음이 들려온다. 백화점의 윗층, 혹은 좀 더 깊숙한 곳에서 나는 소리 같다. 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진다.
    **[대사]**
    (유진) “뭐지? 다른 사람인가… 아니면 고물 쥐새끼?”
    **[생각]** (유진) 이 시간에 여기 들어올 사람은… 나 같은 놈들뿐인데.
    **[효과음]** (쇠 긁는 소리) 끼이이이익-!

    **[컷 #6]**
    **[그림]** 유진이 벽 뒤에 바싹 몸을 숨기고 귀를 기울인다. 그녀는 등에 맨 배낭에서 낡은 단검을 꺼내 쥐고 있다. 얼굴에는 경계심이 가득하다. 금속음은 멈추고, 대신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효과음]** (발소리) 터벅, 터벅… (멀리서 희미하게)

    **[컷 #7]**
    **[그림]** 유진이 조심스럽게 벽 모퉁이 너머를 엿본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한 남자의 뒷모습. 검은 후드티를 입고 있고, 한쪽 어깨에는 라이플처럼 보이는 것을 메고 있다. 그는 낡은 선반 위를 조심스럽게 뒤지고 있다.
    **[대사]**
    (유진, 속삭임) “젠장, 진짜 사람이었네… 그것도 총 든 놈.”
    **[생각]** (유진) 여기서 또 꼬이면 피곤한데… 내 물건 뺏으러 온 건 아니겠지?

    **[컷 #8]**
    **[그림]** 남자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손을 뻗는 순간, 낡은 선반이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와르르 무너지는 잔해들과 함께 먼지가 폭풍처럼 일어난다. 남자는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간신히 잔해들을 피한다.
    **[효과음]** (선반 붕괴) 와아아아앙-! (먼지 폭풍) 후우우우욱!

    **[컷 #9]**
    **[그림]** 먼지 속에서 남자가 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킨다. 그의 손에는 작은 금속 조각 하나가 쥐어져 있다. 먼지로 인해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대사]**
    (남자, 낮게 읊조림) “크흐읍… 겨우 찾았는데.”
    **[생각]** (남자) 이런 망할 건물.

    **[컷 #10]**
    **[그림]** 유진이 숨어있던 곳에서 뛰쳐나온다. 그녀의 눈에 남자의 손에 든 금속 조각이 들어온다. 그것은 그녀가 찾던 태양광 충전 컨트롤러의 부품이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남자에게 달려간다.
    **[대사]**
    (유진) “잠깐만요! 그거! 혹시… 태양광 컨트롤러 부품이에요?”
    **[효과음]** (유진의 발소리) 타닥, 타닥!

    **[컷 #11]**
    **[그림]** 남자가 갑작스러운 유진의 등장에 놀란 듯, 재빨리 몸을 돌려 라이플을 겨눈다. 먼지로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드러나는데, 꽤 날카롭고 잘생긴 인상이다. 유진은 그가 총을 겨누는 모습에 멈칫한다.
    **[대사]**
    (남자) “누구냐.”
    (유진) “아니, 나… 나도 탐색자인데… 당신 혹시 그 부품… 태양광 발전기 관련 부품 찾고 있었어요?”

    **[컷 #12]**
    **[그림]** 남자의 눈동자가 유진의 손에 들린 단검을 훑고, 이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그의 표정에는 경계심이 가득하다. 그는 자신이 찾던 부품을 단단히 쥐고 있다.
    **[대사]**
    (남자) “그렇다면.”
    (유진) “그거… 나한테 꼭 필요하거든요. 혹시… 팔 생각 없어요? 다른 물건이랑 교환이라도…”
    (남자) “없다.”

    **[컷 #13]**
    **[그림]** 유진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남자의 단호한 대답에 그녀의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녀는 주먹을 꽉 쥔다.
    **[대사]**
    (유진) “뭐라고요? 아니, 사람 말하는데 그렇게 칼같이 자르면 어떡해요? 내가 먼저 이 백화점에 들어왔거든?!”
    (남자) “내가 먼저 찾았다.”
    **[생각]** (유진) 와, 진짜 말 안 통하는 인간이네!

    **[컷 #14]**
    **[그림]** 바로 그때, 백화점 깊숙한 곳에서 날카로운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마리가 동시에 으르렁거리는 소리다. 유진과 남자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지고, 대신 긴장감이 번진다.
    **[효과음]** (짐승 울음) 캬르르르릉! 아우우우! (여러 마리)

    **[컷 #15]**
    **[그림]** 남자가 빠르게 주위를 살핀다. 그의 눈이 백화점 입구 쪽을 향한다.
    **[대사]**
    (남자) “들켰다. 변이견이다. 떼로 몰려온다.”
    **[생각]** (남자) 하필 이런 타이밍에…

    **[컷 #16]**
    **[그림]** 유진도 소리를 듣고 표정이 굳어진다. 그녀는 남자를 흘깃 쳐다본다.
    **[대사]**
    (유진) “변이견? 망할… 여기 둥지가 있었나? 아까 왜 몰랐지?”
    **[효과음]** (바닥을 긁는 소리) 그르륵, 그르륵… (발톱 소리) 따각, 따각! (점점 가까워진다)

    **[컷 #17]**
    **[그림]** 백화점 입구의 어둠 속에서 붉게 빛나는 여러 개의 눈들이 번뜩인다. 앙상하고 비정상적으로 큰 덩치의 짐승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네 발 달린 괴물들, 늑대와 개의 잡종처럼 보이지만 훨씬 사납고 기괴하다.
    **[효과음]** (변이견 무리) 으르르르르릉-!!!

    **[컷 #18]**
    **[그림]** 남자가 재빨리 유진의 팔목을 잡아챈다. 유진은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지만,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끌고 간다.
    **[대사]**
    (남자) “잔말 말고 따라와. 여기서 싸울 생각이면 죽는다.”
    (유진) “뭐, 뭐야?! 놔요! 나 혼자도 충분히…”
    **[효과음]** (남자가 유진을 끌고 가는 소리) 쿵, 쿵!

    **[컷 #19]**
    **[그림]** 남자는 유진을 끌고 부서진 에스컬레이터 잔해를 넘어간다. 변이견 무리가 그들을 향해 사납게 짖으며 쫓아온다. 가장 앞서가는 변이견의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있다.
    **[효과음]** (변이견) 크아아아앙! (사나운 추격)

    **[컷 #20]**
    **[그림]** 남자가 유진을 데리고 ‘직원 전용’이라고 쓰여진 낡은 문을 발로 차서 연다. 먼지가 풀썩인다.
    **[대사]**
    (남자) “빨리!”

    **[컷 #21]**
    **[그림]** 어두컴컴한 비상계단으로 들어선 두 사람. 남자는 재빨리 문을 닫으려고 하지만, 한 변이견이 문틈으로 머리를 들이밀며 으르렁거린다. 유진이 본능적으로 단검을 휘두르지만, 변이견은 재빨리 물러난다.
    **[효과음]** (문이 닫히는 소리) 쾅! (변이견) 컹! (단검 휘두르는 소리) 슈우욱!

    **[컷 #22]**
    **[그림]** 겨우 문을 닫아 막은 두 사람. 문은 금방이라도 뜯겨나갈 듯 흔들리고, 변이견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계단 전체를 뒤흔든다. 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남자를 바라본다.
    **[대사]**
    (유진) “이, 이거 얼마나 버틸 수 있겠어요?!”
    (남자) “몰라. 당장 여기는 1층. 위로 올라가야 해.”
    **[효과음]** (문 두드리는 소리) 쾅! 쾅! (변이견) 끄으으응-!

    **[컷 #23]**
    **[그림]** 남자가 먼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간다. 유진도 그의 뒤를 따른다. 그녀는 여전히 어이없다는 표정이지만, 지금은 일단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대사]**
    (유진) “아니, 좀 전에 그렇게 날 홀대하더니 이제는 같이 도망가자는 거예요?”
    (남자) “시끄럽다. 혼자 죽고 싶으면 돌아가든가.”
    **[생각]** (유진) 저 싸가지… 진짜!

    **[컷 #24]**
    **[그림]** 낡은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가는 남자와 그를 따라가느라 허둥대는 유진. 그녀의 발걸음이 위태롭다. 낡은 난간에는 녹이 슬어있고, 계단 벽은 곰팡이와 이끼로 얼룩져 있다.
    **[효과음]** (두 사람의 발소리) 탁, 탁, 탁탁! (유진의 거친 숨소리) 흐읍, 흐읍!

    **[컷 #25]**
    **[그림]** 유진이 계단을 오르다 발을 헛디딘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며 넘어진다. 그녀의 배낭에서 금속 조각들이 쏟아져 나온다.
    **[대사]**
    (유진) “아악!”
    **[효과음]** (넘어지는 소리) 쿵! (금속 조각 떨어지는 소리) 쨍그랑!

    **[컷 #26]**
    **[그림]** 남자가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본다. 넘어져 있는 유진과 흩어진 그녀의 물건들을 본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하지만, 아주 미세하게 인상을 쓴다.
    **[대사]**
    (남자) “…”

    **[컷 #27]**
    **[그림]** 유진이 주저앉은 채 흩어진 물건들을 허둥지둥 주워 담으려고 한다. 그녀의 팔에는 작은 찰과상이 생겼다.
    **[대사]**
    (유진) “괜찮아요… 잠깐만요, 내 부품들…”

    **[컷 #28]**
    **[그림]** 남자가 계단을 다시 몇 칸 내려와 유진에게 손을 내민다. 그녀는 예상치 못한 그의 행동에 잠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본다. 어두운 계단 복도 사이로 희미한 빛이 들어와 그의 손을 비춘다.
    **[대사]**
    (남자) “잡아. 시간 없다.”
    **[생각]** (유진) 이 사람이… 날 도와주는 건가?

    **[컷 #29]**
    **[그림]** 유진이 잠시 망설이다가 그의 손을 잡는다. 남자의 손은 거칠지만 단단하다. 그는 유진을 가볍게 일으켜 세운다.
    **[효과음]** (손 잡는 소리) 스윽.

    **[컷 #30]**
    **[그림]** 유진이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부품 중 하나를 줍는 순간, 그녀의 손이 남자의 손과 스친다. 짧지만 강렬한 접촉에 둘 다 미세하게 움찔한다. 유진의 얼굴에 희미한 홍조가 번진다. 남자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시선을 돌린다.
    **[효과음]** (심장 소리) 쿵! (작게)
    **[생각]** (유진) 어, 어라? 방금…

    **[컷 #31]**
    **[그림]** 남자가 먼저 계단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한다. 유진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등 뒤를 바라본다. 굳게 닫힌 문 뒤에서 변이견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거세진다.
    **[대사]**
    (남자) “안 올라오고 뭐 하냐. 감상할 시간 없다.”
    (유진) “아, 알아요, 알아!”
    **[생각]** (유진) 이 망할 자식… 심장은 왜 이러는 거야, 또!

    **[컷 #32]**
    **[그림]** 둘은 계속해서 계단을 올라간다. 멀리 보이는 창문 밖으로 노을이 점차 어둠에 잠식당하고 있다. 어둠이 내리면 변이견들은 더욱 사나워질 것이다. 유진과 남자는 무너져가는 백화점 안에서, 서로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효과음]** (변이견 소리) 끄으으응-!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 허억, 허억…
    **[장면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