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어느 날부터 미나의 아파트는 조용하지 않았다.

    처음엔 사소한 것들이었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펜이 난데없이 바닥에 떨어져 있거나, 분명 닫아두었던 부엌 찬장 문이 어느 순간 열려 있거나 하는 식이었다. 미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낡은 아파트라 바람이 심한가 보네,’ 하고 넘겼다. 이사 온 지 2년, 한 번도 그런 적은 없었지만 도시의 삶이란 늘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법이니까.

    밤늦게까지 작업하던 미나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일어섰을 때였다. 거실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커피잔. 분명히 싱크대에 넣어두었는데? 순간 소름이 돋았다. 컵을 들자, 차가운 액체가 아닌, 마치 얼음덩어리라도 만진 듯 손끝이 찌릿했다. 그날 밤, 미나는 잠 못 이루고 아파트를 샅샅이 뒤졌다. 창문은 모두 잠겨 있었고, 현관문도 단단히 걸쇠까지 채워져 있었다. 빈집에 누가 들어왔을 리 없다. 미나는 이 현상을 설명할 단어를 찾지 못해 불안에 떨었다.

    며칠 뒤, 현상은 더욱 노골적으로 변했다.

    미나가 출근하고 없는 낮 시간 동안, 집 안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식탁 위의 화병은 산산조각 나 있었고, 책장의 책들은 제멋대로 흩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옷장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서랍들은 모조리 뽑혀 있었다. 미나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온몸에 흐르는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누군가의 침입이라고 하기엔, 귀중품 하나 사라진 게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누구… 없어요?”

    미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창밖의 도시 소음조차 삼켜버린 듯한 먹먹한 정적만이 그녀를 짓눌렀다. 미나는 경찰에 신고할까 고민했지만, 어떤 말로 이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집이 혼자 미쳤어요’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날 밤부터 미나는 집에서 잠들지 못했다. 친구 집에 며칠 신세를 지거나, 찜질방을 전전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그녀의 아파트는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온 듯 보였다. 깨진 화병의 파편을 치우고, 흩어진 책들을 정리하며, 미나는 애써 합리적인 설명을 찾으려 했다. ‘스트레스가 심해서 환각을 본 거야,’ ‘피곤해서 나도 모르게 실수한 걸지도 몰라.’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다시 아파트로 돌아왔다. 익숙한 공간은 예전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날 새벽, 자정 무렵이었다. 미나가 잠이 들자마자, 침대 옆 스탠드가 ‘탁’ 소리를 내며 저절로 켜졌다. 미나는 잠결에 눈을 비볐지만, 다시 감았다. 그러나 곧이어, 거실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미나는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쿵쾅거렸다. 분명 그녀는 혼자였다.

    거실로 향하는 발걸음마다 바닥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기분이었다. 거실에 들어선 미나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바닥에 내팽개쳐진 소파였다. 소파는 거실 중앙에서 한쪽 벽으로 밀려나 있었다. 그녀가 직접 옮긴 것이 분명했다.

    “이게… 뭐야…”

    그때였다. 귓가에 섬뜩할 정도로 낮은 속삭임이 들렸다.

    “…돌려줘…”

    말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소리. 마치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벽 안에서 울리는 낮은 신음 같기도 했다. 미나는 몸이 굳어버렸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소리는 분명했다. 그녀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한 차가운 공기.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켰다.

    “뭘… 돌려달라는 거야…?” 미나가 겨우 입을 열었다.

    소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파트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약한 지진이라도 난 듯, 바닥이 울리고 창문이 흔들렸다. 벽에 걸린 그림 액자들이 우르르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방에서는 접시가 깨지는 소리, 컵이 부서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아파트를 집어삼키려는 듯했다.

    미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에 넋이 나갔다. 그때, 그녀의 시선이 거실 한쪽 벽면에 고정되었다. 벽지 일부가 찢어진 틈으로 콘크리트가 드러나 있었고, 그 콘크리트 위에 마치 흐느끼는 사람의 형상처럼 희미한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그 그림자는 형태가 없었다. 연기처럼 일렁이다가, 마치 응축된 어둠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미묘한 빛의 왜곡이 일렁였다. 공기가 물결치듯 흔들리는 착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이 세계와 다른 어딘가가 찢어져 열린 틈 같았다. 검은 그림자는 그 틈으로부터 흘러나온 것 같았다.

    “…내놔…”

    이번에는 더 또렷한 소리가 들렸다. 절박함이 섞인, 듣는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는 듯한 음성이었다. 소리는 벽의 찢어진 틈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미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현상은 단순히 유령이나 귀신의 장난이 아니었다. 이 아파트, 아니, 이 공간 자체가 어떤 거대한 존재에 의해 잠식당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그녀에게서 무언가를 요구하고 있었다.

    미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찢어진 벽의 틈새를 노려보던 미나의 눈에, 콘크리트 벽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듯한 희미한 붉은빛이 포착되었다. 그 붉은빛은 마치 핏줄처럼 벽 전체를 따라 꿈틀거리는 듯했다.

    아파트 전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미나를 밀어내려는 듯, 혹은 삼켜버리려는 듯, 맹렬한 기운을 뿜어냈다. 공기 중에는 흙과 쇠 냄새, 그리고 오래된 먼지 냄새가 뒤섞여 희미한 비린내까지 풍겼다.

    미나는 온몸을 휘감는 압도적인 존재감 속에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벽의 틈새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절규 같은 속삭임. 그리고 그 틈새 너머로 보이는 듯한,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기이한 풍경의 파편들.

    그것은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언어가 아니었다. 고통과 갈망, 그리고 지독한 외로움의 감정 덩어리였다. 미나는 자신이 서 있는 이 공간이, 단순한 아파트가 아니라 어떤 경계선 위에 놓인 통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다른 세계의 존재가 끊임없이 넘보려는 문이었다.

    갑자기, 모든 소음이 뚝 멎었다.

    아파트는 다시 기이할 정도로 고요해졌다. 마치 격렬한 폭풍이 지나간 뒤의 바다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찢어졌던 벽지는 저절로 메워지고, 붉은 빛도 사라졌다. 바닥에 떨어졌던 물건들도 제자리에 돌아가 있었다. 마치 미나가 겪었던 모든 일이 한여름 밤의 꿈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지만 미나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원상 복구된 듯 보이지만, 결코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벽에 찢어졌던 흔적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생긴 미세한 금. 미나의 눈에는 그것이 마치 심연으로 통하는 미세한 균열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균열 너머에서, 무엇인가가 여전히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차가운 감각이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미나는 아파트 복도를 걸어 현관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밖은 여전히 도시의 평범한 밤 풍경이었다. 멀리서 자동차 소리가 들리고,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미나는 더 이상 그 평범함 속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아파트는 이제 그녀에게 다른 의미가 되었다. 지켜야 할 것, 혹은 탐구해야 할 것.

    천천히 문을 닫고, 미나는 금이 간 벽을 다시 마주 보았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 안에는 묘한 호기심과 알 수 없는 의지가 싹트고 있었다. 그녀는 이 아파트에 갇힌 것이 아니었다. 이 아파트를 통해, 그녀는 이제까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의 문턱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문을 열어볼 준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저편의 존재가 그녀에게 돌려달라고 요구했던 것이, 바로 그녀의 ‘평범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미나의 아파트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잿빛 하늘이 세계를 뒤덮은 지 수십 년. 태양은 이따금 비집고 나오는 희미한 빛으로 존재를 알릴 뿐, 한낮에도 세상은 어스름한 그림자 속에 잠겨 있었다. 거대한 콘크리트와 낡은 철골 구조물로 얼기설기 이어진 ‘강철 요새’. 그 이름처럼 인간이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강철 덩어리였지만,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운 진지이기도 했다. 요새의 깊은 곳에서는 낡은 발전기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생명의 끈을 이어가고 있었다.

    한서준은 언제나 그랬듯, 요새의 북쪽 망루 끝자락에 앉아 희미한 먼지 너머의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깡마른 몸은 낡은 방한복 속에 파묻혀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늘 그림자가 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망루의 그림자’라 불렀다. 말수가 적고 늘 어딘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그를 사람들은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서준의 눈빛은 잿빛 세상 그 어떤 풍경도 놓치지 않을 만큼 예리했다. 고요한 시선은 멀리 보이는 부서진 고층 건물들의 실루엣을 훑는 듯했지만, 실상은 눈앞의 흙먼지 속에서 발견되는 미세한 패턴의 변화를 읽고 있었다. 바람의 방향, 먼지의 궤적, 심지어 공기 중에 섞인 희미한 금속 냄새까지. 그의 머릿속은 언제나 세상의 모든 정보를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거대한 기계 같았다.

    그때였다. 망루로 통하는 철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리고, 땀으로 얼룩진 얼굴의 경비대원 하나가 허둥지둥 뛰어 들어왔다.

    “한서준 씨! 한서준 씨 맞으십니까?”

    서준은 고개만 살짝 돌려 그를 응시했다. 경비대원은 그의 시선에 움찔하더니 쭈뼛거리며 말했다.

    “강 사령관님께서… 당장 찾아오라고 하셨습니다! 비상입니다, 비상!”

    서준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비대원의 요란스러운 호들갑에도 그의 표정은 잔잔한 호수 같았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서준이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 낯선 침묵은 묘한 위압감을 풍겼다.

    “무슨 일이지.”
    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이진호 박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도, 박사님의 작업실에서…!”

    서준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진호 박사. 강철 요새의 생명줄과도 같은 에너지 코어를 관리하는 수석 엔지니어이자, 요새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 보안에 철저했던 사람이었다.

    요새의 핵심부로 향하는 길은 길고 복잡했다. 겹겹이 이어진 강화 철문을 지나, 어둡고 습한 통로를 한참 걸어야 했다. 발전기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때렸고, 간간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덧붙여졌다. 이 모든 소음 속에서도 서준의 걸음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발소리, 통로의 공기 흐름, 심지어 앞서가는 경비대원의 불안한 심박수까지 무의식중에 분석하고 있었다.

    사건 현장은 에너지 코어 바로 옆에 위치한 이진호 박사의 개인 작업실이었다. 요새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자부하던 공간. 하지만 지금 그 앞에는 강 사령관을 비롯해 몇 명의 경비대원과 의료반원들이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강 사령관은 짧게 깎은 머리에 굵은 주름이 패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서준을 보자마자 거친 숨을 내쉬었다.

    “젠장, 한서준! 이제야 왔나!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강 사령관의 말을 끊고 서준은 작업실의 두꺼운 철문을 응시했다. 문의 틈새는 특수 제작된 고무 패킹으로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었고, 표면에는 복잡한 전자 잠금장치와 지문 인식기가 박혀 있었다.

    “문은 어떻게 열었습니까?” 서준이 물었다.

    강 사령관은 한숨을 쉬었다. “보조 키로 열었다. 박사는 늘 작업실을 안에서 잠가놓고 있었어. 새벽 4시, 발전기 시스템에 이상 징후가 감지돼서 연락을 취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지. 결국 우리가 보조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이미 늦은 뒤였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요?”

    “없다. 문은 안에서 완벽하게 잠겨 있었고, 외부의 어떤 충격이나 침입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어. 이진호 박사의 작업실은 강화 콘크리트와 강철로 된 사면이 완벽하게 밀봉된 밀실이다. 환기구라고는 천장에 달린 손바닥만 한 통풍구가 전부지. 성인 남자가 드나들 수도 없고, 저 작은 구멍으로 사람을 해칠 만한 무기를 들여보내는 것도 불가능해.”

    서준은 잠시 천장의 환기구를 올려다보았다. 먼지가 앉아 있는 낡은 금속 격자가 보였다. 그의 시선은 다시 문으로 돌아왔다.

    “발전기 이상 징후는 지금도 계속됩니까?”

    “아니, 박사가 죽은 지 10분쯤 후에 거짓말처럼 안정화됐어. 마치 박사가 죽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뭘 만진 것처럼.”

    서준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문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하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작업실 내부는 온갖 장비와 공구, 자료들로 어지럽혀져 있었다. 한가운데 놓인 실험대 위에 이진호 박사가 쓰러져 있었다. 그는 등에 꽂힌 채 발견된, 녹슨 파이프 조각에 의해 살해당한 듯 보였다. 이미 싸늘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함께 어떤 불신이 서려 있었다.

    서준은 시체에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천천히 방 전체를 훑었다. 그의 시선은 벽의 균열, 바닥의 흙먼지, 심지어 책상 위에 놓인 컵의 위치까지 놓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시체와 파이프에만 집중하고 있었지만, 서준은 방의 모든 사소한 디테일을 데이터로 입력하는 중이었다.

    “목격자는 있나?” 서준이 물었다. 그의 시선은 아직도 방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강 사령관이 대답했다. “없어. 이진호 박사는 야간 작업 시간에는 누구도 작업실 근처에 얼씬 못 하게 했지. 혹시라도 외부인이 들어오면 경보가 울리도록 설정되어 있었지만, 아무것도 울리지 않았어.”

    그 말을 들은 서준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작업실의 유일한 출입구인 철문을 다시 바라보았다. 안에서 잠겨 있었고,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다. 게다가 내부에서 발생한 소리도, 외부로 새어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강 사령관의 설명으로 다시 확인되었다. 완벽한 밀실. 범인은 대체 어떻게 박사를 죽이고 사라졌을까?

    서준의 시선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나사 하나에 닿았다. 녹이 슬었지만, 반짝이는 금속성이 도드라지는 것이 다른 먼지나 부스러기와는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그는 무릎을 굽혀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손바닥 위에서 천천히 굴렸다.

    “이것은.”

    모두의 시선이 서준에게 집중되었다. 서준은 그 나사를 이진호 박사의 시체 옆에 놓인 파이프 조각과 비교했다. 파이프는 녹슬어 있었지만, 나사는 파이프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형태가 달랐다.
    그것은 이진호 박사의 작업실에 있는 어떤 기구에서도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었다.

    서준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클릭’하는 소리를 냈다. 그는 나사를 다시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방을 둘러보았다. 이전과는 다른, 아주 미세한 균열을 찾아내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작업대 위, 이진호 박사의 싸늘한 시체에 꽂혔다. 손목시계가 멈춰 있었다. 죽은 시각을 가리키는 듯.

    그는 문득 깨달았다. 이 밀실은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 완벽함이야말로, 가장 교묘한 트릭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서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스쳤다. 사냥꾼이 먹잇감을 발견했을 때의 그것처럼, 조용하면서도 날카로운 미소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잿빛 세상의 가장 복잡한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첫 번째 조각은, 방금 주머니에 넣은 그 나사였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제목: 망각의 심연 (The Abyss of Oblivion)**

    **에피소드 1: 그림자 아래의 속삭임**

    **[장면 1]**

    **#1.1**
    (시점: 드론이 높은 하늘에서 깎아지른 듯한 산봉우리와 짙은 숲을 내려다보고 있다. 푸른 녹음 위로 아득히 펼쳐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산맥의 한가운데, 기이하게도 둥글게 파인 거대한 분지 지형이 보인다. 그 분지의 중심에는 안개처럼 아른거리는 신비로운 에너지가 감돌고 있다.)

    **내레이션 (류진):**
    “잊혀진 것들은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 세상의 이목이 닿지 않는 깊은 곳에서, 숨죽여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1.2**
    (산비탈 중턱의 평평한 바위 위. 류진(20대 후반, 캐주얼한 등산복 차림, 덥수룩한 머리에 날카로운 눈빛)이 낡았지만 성능 좋은 태블릿 PC 화면을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다. 화면에는 기이한 에너지 파형 그래프와 함께 고대 문자로 추정되는 이미지가 깜빡인다.)

    **류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 파동… 분명해. 고대 문헌에서 본 것과 일치해. 그런데 왜 아무도… 아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지. 그저 외면당했을 뿐. 세상의 무관심 속에 너무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거야.”

    **#1.3**
    (류진의 옆에서 수아(20대 후반, 활동적인 점프수트 차림, 작은 선글라스를 이마에 걸치고 있다)가 드론 조종기를 능숙하게 조작하고 있다. 그녀의 앞에는 조작기에 연결된 모니터에 드론의 시야가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다.)

    **수아:**
    (한숨 쉬듯)
    “야, 류진. 벌써 세 시간째야. 네 ‘직감’이라는 거, 이번엔 좀 정확해야 할 텐데. 슬슬 드론 배터리도 떨어지고 있고, 이 고도에선 제 성능을 못 내. 이 깊은 산골짜기에 대체 뭐가 있다는 건데? 어쩌다 얻었다는 그 낡은 지도가 전부잖아.”

    **류진:**
    (태블릿에서 눈을 떼지 않고)
    “여기에 있었어. 분명히. 모든 기록이 이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어. ‘시간의 틈새가 열리는 그림자 동굴’… 그저 미신이 아니었어. 고대인들이 남긴 모든 단서가 이 곳을 향하고 있다고.”

    **수아:**
    “너 또 대학교에서 쫓겨난 그 논문 얘기하는 거야? ‘시간 왜곡 현상이 발생하는 고대 유적 연구’… 교수님들이 너더러 정신병원에 가보라고 했잖아. 그래서 너 고고학과에서 퇴학당했잖아!”

    **#1.4**
    (류진이 드디어 태블릿에서 고개를 들고, 수아에게 살짝 미소 짓는다. 그의 눈빛은 확신으로 가득하다.)

    **류진:**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진실을 좇아?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진실은 언제나 미쳤다고 손가락질 받기 마련이지. 봐, 수아. 드론 시야에 뭔가 잡히는 거 없어? 그 거대한 분지의 중심부. 미약하지만 뭔가 불규칙한 형상이 보여.”

    **수아:**
    (모니터에 집중한다)
    “음… 잠깐만. 숲이 너무 울창해서 잘 안 보여… 젠장, 나뭇가지들 때문에… 오? 저기, 바위벽 사이에 뭔가… 인공적인 구조물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가까이 가볼게.”

    **#1.5**
    (드론 시야가 흔들리며 숲 사이로 빠르게 돌진한다. 고대 이끼와 덩굴로 뒤덮인 거대한 암벽이 스쳐 지나가고, 이내 암벽 한가운데에 거대한 틈새가 드러난다. 그 틈새는 마치 자연적으로 생긴 동굴 입구 같지만, 자세히 보면 잘려나간 듯한 거대한 석조 구조물의 잔해가 보인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거대한 돌들이 마치 폭풍에 쓸려나가 부서진 댐처럼 얽혀있다.)

    **수아:**
    “세상에… 이건… 동굴이야? 아니면… 뭔가 무너진 건가? 저 형태는 자연스러운 게 아닌데. 바위가 잘려나간 흔적이 너무 선명해.”

    **류진:**
    (태블릿을 수아에게 들이민다)
    “이거 봐. 이 에너지 파형, 저 입구에서 가장 강력하게 발산되고 있어. 찾았어, 수아! 드디어 찾았어! 내 직감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

    **#1.6**
    (류진의 눈이 흥분으로 번뜩인다. 그는 망설임 없이 등산 배낭을 둘러메고 일어선다.)

    **수아:**
    “야, 잠깐만! 저기까지 어떻게 가려고? 절벽 수준인데? 그리고 안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무작정 들어가? 위험할 수도 있잖아! 우리가 무슨 인디아나 존스야?!”

    **류진:**
    “위험? 위험하지 않은 탐험이 어디 있어? 안전한 탐험은 존재하지 않아! 그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돌아갈 순 없잖아. 이건 내 평생의 숙제라고! 망각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수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류진을 보다가, 이내 피식 웃는다. 류진의 열정에 결국 전염된 듯, 그녀의 눈에도 은근한 호기심이 떠오른다.)
    “하긴… 너 같은 괴짜를 따라다니는 내가 더 미친놈이지. 좋아, 가자. 대신 안전은 내가 책임진다. 내 드론과 통신 장비, 그리고 이 GPS가 없으면 넌 여기서 미아가 될 거야. 알지? 이번에도 너 때문에 감옥이라도 가면 그땐 정말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장면 2]**

    **#2.1**
    (시간 경과. 수아와 류진이 아슬아슬한 산길을 헤치고 내려와, 드디어 거대한 암벽 앞의 덩굴이 우거진 입구에 도착한다. 입구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입처럼 어둡고 음침하다. 입구의 틈새로 스며드는 빛줄기가 오랜 시간 동안 굳어진 먼지 입자들을 춤추게 한다.)

    **류진:**
    (입구 앞에서 손전등을 비추며)
    “이건… 완벽한 위장이야. 고대인들이 일부러 숲 속에 숨긴 것 같아. 이 엄청난 암벽을 깎아서 만들다니… 단순한 동굴이 아니야. 이건…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숨기기 위한 거대한 장치야.”

    **#2.2**
    (손전등 불빛에 비친 입구 안쪽은 거대한 석조 터널의 형태를 띠고 있다. 벽면에는 세월의 흔적으로 새겨진 듯한 기이한 문양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단순한 낙서가 아니라,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상형문자처럼 보인다.)

    **수아:**
    “돌이… 평평하게 잘려 있어. 뭔가 정교한 도구를 사용한 흔적이야. 이런 깊은 산속에 이런 거대한 구조물을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아. 대체 누가, 그리고 언제?”

    **류진:**
    (벽면의 문양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고대 문헌에만 존재한다고 알려졌던 ‘망각의 문’… 전설이 아니었어. 이 문양들… 내가 아는 어떤 문명에서도 본 적이 없어. 하지만… 묘하게 익숙해. 마치 잃어버린 기억의 조각처럼.”

    **#2.3**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터널 안으로 들어선다. 밖과는 다르게 내부는 놀랍도록 정돈되어 있다. 바닥에는 오랜 시간 쌓인 먼지가 두껍게 깔려 있지만, 벽면과 천장은 매끄러운 검은색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간간이 푸른빛을 띠는 광물질이 박혀 있다. 공기 중에는 흙먼지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금속의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있다.)

    **수아:**
    (휴대용 조명등을 켜고 사방을 비추며)
    “공기가… 깨끗해. 바깥세상과 단절된 지 얼마나 된 건지 상상도 안 가는데, 이렇게 쾌적할 수가 있나? 습기도 전혀 없고…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아.”

    **류진:**
    “에너지 파동 덕분일 거야. 이곳에 흐르는 기묘한 에너지가 내부 환경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지도 몰라. 이 모든 게 미지의 기술로 이루어져 있어.”

    **#2.4**
    (터널이 끝나고, 거대한 돔 형태의 공간이 나타난다. 공간의 중심에는 거대한 원형 석판이 있고, 그 주변으로는 정교하게 조각된 기둥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다. 기둥들 사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계 장치들이 녹슬지 않은 채 자리하고 있다. 기계들은 마치 오랜 잠에 빠진 거인의 심장처럼 웅장하고 신비롭다.)

    **수아:**
    (경탄한 듯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건… 지하 도시야? 아니면… 신전? 저 기둥들 봐,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아. 그리고 저 기계들은 대체 뭐야?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완벽해.”

    **류진:**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핀다)
    “신전도 아니고, 도시도 아니야. 이건… ‘장치’야. 이 모든 게 하나의 거대한 장치라고. 시간을 다루는, 아니, 시간을 ‘초월’하는 장치.”

    **#2.5**
    (류진이 원형 석판으로 다가간다. 석판의 표면에는 복잡하고 섬세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으며, 그 문양의 중심부에는 마치 시계의 심장처럼 생긴 기이한 장치가 박혀 있다. 장치는 멈춰 있지만, 미세하게 에너지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마치 심장이 멈춘 시계가 희미한 떨림을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류진:**
    “이게… ‘시간의 심장’인가. 문헌에서만 읽었던 그 고대의 유물. 모든 전설의 시작점이자 종착점.”

    **#2.6**
    (수아가 조심스럽게 석판에 손을 뻗으려 하자, 류진이 급히 그녀의 손을 잡는다.)

    **류진:**
    “함부로 만지지 마. 어떤 반응을 일으킬지 몰라. 이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거야.”

    **수아:**
    “알고 있어. 그런데 왠지… 따뜻해. 이 돌덩이가. 마치 생명이라도 가진 것처럼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져.”

    **#2.7**
    (류진이 석판 주변을 꼼꼼히 살핀다. 그의 시선이 석판 가장자리에 새겨진 작은 홈에 닿는다. 홈은 특정 형태의 조각을 끼워 넣을 수 있도록 정교하게 파여 있다.)

    **류진:**
    (중얼거린다)
    “퍼즐 조각인가… 이걸 완성해야 하는 건가? 이 거대한 장치를 작동시키려면… 무언가를 채워 넣어야 해.”

    **#22.8**
    (류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작은 펜던트를 꺼낸다. 펜던트는 평범한 금속 조각처럼 보이지만, 그 형태는 석판의 홈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마치 오랜 시간 제자리를 기다려온 것처럼.)

    **수아:**
    “그건… 네가 할머니한테서 물려받은 거 아니었어? 너 어렸을 때부터 늘 차고 다녔잖아. 왜 그걸 여기다… 설마? 말도 안 돼…”

    **류진:**
    “어렸을 때부터 이상한 꿈을 꿨어. 이 펜던트가 여기에 제자리를 찾는 꿈. 이 장치가 빛을 내며 깨어나는 꿈. 그저 꿈인 줄 알았지. 미친 착각이라고 스스로를 다그쳤어. 하지만… 직감이란 건 때로 가장 확실한 길을 알려줘. 이 펜던트는, 마치 이곳을 찾아오도록 나를 이끌고 있었던 거야.”

    **#2.9**
    (류진이 펜던트를 조심스럽게 석판의 홈에 끼워 넣는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펜던트가 홈에 완벽하게 결합된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2.10**
    (펜던트가 결합되자마자, 원형 석판의 문양들이 푸른빛으로 빛나기 시작한다. 희미하게 깜빡이던 빛은 빠르게 주변의 거대한 기둥으로 번져나가고, 기둥에 박혀있던 푸른 광물질들도 차례차례 빛을 발한다. 공간 전체가 신비롭고 영롱한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마치 거대한 밤하늘의 별들이 땅속에서 깨어난 듯하다.)

    **수아:**
    (놀라서 뒷걸음질 친다)
    “류진! 대체 뭘 건드린 거야?! 움직이는 것 같아! 저 기계들! 소리가 들려!”

    **#2.11**
    (기둥들 사이의 기계 장치들이 웅장한 저음의 진동을 내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녹슨 것처럼 보였던 부품들이 마찰음 하나 없이 유려하게 회전하고, 공간을 가득 채운 푸른빛이 더욱 강렬해진다. 바닥에 새겨진 문양들에서도 빛이 뿜어져 나오며, 공간 전체에 알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허공에 떠오르는 환상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그 문자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며 형태를 바꾼다.)

    **류진:**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본다. 그의 얼굴에는 경이로움과 함께 미묘한 슬픔이 스쳐 지나간다.)
    “시작됐어… 망각 속에서 잠들어 있던 시간이… 깨어나고 있어. 이 거대한 장치가… 마침내 작동하기 시작했어.”

    **#2.12**
    (공간 전체가 굉음과 함께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마치 거대한 바다가 휘몰아치는 것처럼, 바닥에서부터 강렬한 빛의 소용돌이가 솟아오르고, 빛은 두 사람을 향해 빠르게 휘몰아친다. 시야가 온통 새하얗게 변하며 모든 소리가 먹먹해진다.)

    **수아:**
    (비명을 지르며 류진의 팔을 붙잡는다)
    “류진! 무슨 일이야?! 우리… 설마…! 시간 터널이라도 열린 거야?!”

    **류진:**
    (빛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도,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그의 눈빛은 두려움 대신 알 수 없는 확신으로 가득하다.)
    “드디어… 문이 열렸어. 과거로 향하는 문이…!”

    **#2.13**
    (화면이 순간적으로 암전된다. 그리고 아주 짧게,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미지: 멸망 직전의 고대 도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의 얼굴, 하늘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빛의 기둥이 도시를 삼키는 찰나의 순간.)

    **내레이션 (류진):**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망각의 굴레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 시간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 순간, 우리의 과거와 미래는 다시 쓰여질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에피소드 종료]**

  • 이세계 전생 (Isekai)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내 이름은 한이솔. 아니, 그랬었다. 스물아홉의 나, 잦은 야근과 차가운 편의점 도시락으로 얼룩진 인생은 꽤나 한심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랬다. 비 오는 날 퇴근길, 횡단보도를 건너다 미끄러진 발에 몸이 휘청했고, 아스팔트 바닥에 머리를 찧는 순간까지도 나는 그저 ‘아, 내일 아침 출근은 어쩌지’ 따위의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끝.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얼마나 오래 부유했을까. 시간도 공간도 없는 그곳에서 나는 나라는 존재의 파편들이 산산이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고독했다. 두려웠다. 영원히 이대로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끝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단어일 뿐인가 보다.

    어느 순간, 귓가에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감각들이 터져 나왔다. 축축하고 기분 좋은 흙냄새, 아득히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 피부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 그리고, 빛.

    눈을 뜨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었고,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영롱한 에메랄드빛을 띠었다. 이름 모를 꽃들은 제각기 신비로운 색을 뽐내며 빛을 발했고, 공기 중에는 옅은 마법의 잔향이 감돌았다. 마치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아니, 그보다 훨씬 비현실적인 풍경이었다.

    “뭐야… 이건?”

    내 목소리가 아니다. 삐익, 하고 가늘게 울리는 소리. 그리고 이 몸은?

    화들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이름 모를 풀줄기 위였다. 그리고 내 몸은… 두 손이 사라졌다. 아니, 애초에 손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조그맣고 투명하며, 희미하게 빛나는 구형의 존재. 마치 반딧불이처럼 작고, 빛을 뿜어내는 정령 같은 모습이었다. 온몸을 이루는 것은 얇고 연약한 막, 그 안에 아주 작은 심장처럼 반짝이는 핵이 보였다.

    “내가… 내가 이렇게 됐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내가 죽은 건 알겠지만, 환생이라니. 그것도 인간이 아닌 이런… 이런 존재로? 나는 온몸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아니, 온몸이라고 할 수도 없으니, 내 작은 핵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사방은 낯설고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위협적이었다. 숲의 깊은 곳에서 낮은 포효 소리가 들려왔고, 나뭇가지 사이로는 거대한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곳은 아름답지만, 동시에 아주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이런 몸으로는 이 숲에서 단 하루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때였다.

    멀리서 느껴지던 진동이 급격히 가까워졌다. 쿵, 쿵, 하고 땅이 울렸다. 숲속의 모든 소리가 일순간 멎었다. 새들의 지저귐도,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사라졌다. 오직 거대한 발걸음 소리만이 이 고요를 깨트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풀줄기 아래로 몸을 숨겼다. 내가 발하는 희미한 빛마저도 숨기려고 애썼다. 공포가 내 작은 핵을 휘감았다. 죽음의 공포. 다시 한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리고 그림자가 내 눈앞에 드리웠다.

    풀 사이로 겨우 올려다본 시야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발이었다. 사람의 발과 비슷하지만, 훨씬 크고 억센 근육이 얽혀 있었고, 뾰족한 발톱이 박혀 있었다. 발목 위로는 두꺼운 털이 뒤덮여 있었고, 짐승의 기운이 짙게 풍겨 왔다.

    그것은 멈춰 섰다. 바로 내 앞에서.

    숨조차 쉬지 못하고 몸을 웅크렸다. 제발, 제발 나를 보지 못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나는 너무나도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였다. 한입거리조차 되지 않을 것 같은.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방을 경계하는 듯한 소리. 이어서 무언가 숙이는 소리, 그리고 짙은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향이 코끝을 스쳤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거대한 몸집. 칠흑 같은 털로 뒤덮인 두터운 팔과 어깨. 그리고… 얼굴.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분명 인간은 아니었다. 뾰족하게 솟은 늑대의 귀,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난 입술, 그리고… 숲의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는 금빛 눈동자.

    그는 사냥꾼이었다. 이 숲의 정점에 선 포식자. 한눈에 봐도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내 존재가 얼마나 하찮은지 깨닫게 해주는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그의 눈동자에 내가 포착되는 순간, 내 목숨은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장이, 아니 내 핵이 미친 듯이 뛰었다.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정확히 내가 숨어 있는 곳을 향했다.

    금빛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는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끝이다. 이렇게 다시 죽는 건가.

    하지만 예상과 달리, 그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포식자의 잔혹함이 아닌, 묘한 호기심이 담겨 있는 듯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나는 그에게 먹잇감조차 되지 못할, 그저 작은 빛덩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나를 똑똑히 담고 있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늑대의 발톱처럼 길고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손가락이, 내가 숨어 있는 풀줄기를 향해 다가왔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끝이다.

    서늘한 그림자가 내 작은 몸을 덮었다. 그러나 통증은 없었다. 대신, 부드럽고 따뜻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 끝이 나를 건드린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마치 깨지기 쉬운 보석을 다루듯이.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금빛 눈동자가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너무나도 가까이. 그 눈 속에는 여전히 호기심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 어딘가… 씁쓸한 기색도 함께.

    그는 조용히 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밀어 올렸다. 나는 풀줄기에서 떨어져 공중에 부유했다. 내 몸은 그의 손바닥 위에 내려앉을 것처럼 흔들렸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뭘 그리 우두커니 서 계십니까? 사냥감이 도망치겠습니다!”

    그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는 나를 힐끗 내려다보더니, 이내 손을 거두고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그림자가 나를 덮었다가, 이내 사라졌다.

    나는 덜덜 떨리는 몸으로 허공에 부유하다가, 이내 풀줄기 위로 다시 떨어졌다. 그의 잔향만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짙은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그러나 이상하게도 편안함을 주는 향.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멀리 사라지고 없었다. 사냥꾼의 무리가 숲의 깊은 곳으로 향하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이 거대하고 위험한 숲에서, 나는 너무나도 작고 약한 존재.
    그리고 그는, 이 숲의 정점에 선 강대한 포식자.

    나는 무사했다. 죽음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의 눈빛이, 그 짧은 순간의 접촉이, 내 작은 핵에 강렬한 각인을 남겼다.

    그와 나. 종족도, 크기도, 힘도, 모든 것이 다른 우리.
    과연 나는 이 낯선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문득, 그의 금빛 눈동자에 스쳤던 그 씁쓸한 기색이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졌다.
    금지된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깊고도 슬픈 눈빛이었다.
    내 이 새로운 생은,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까.
    가늘게 빛나는 내 몸은, 알 수 없는 예감에 미미하게 떨렸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밀실의 균열 (균열)

    스카이뷰 레지던스의 최고층 펜트하우스는 언제나 고요했다. 도시의 번잡함과 소음은 70층 아래 아득한 바닥에 납작하게 깔려 숨죽이고 있었고, 이곳은 오직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거대한 도심의 밤 풍경만을 비현실적으로 품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밤, 그 고요는 깨졌다. 핏빛으로 얼룩진 정적, 그리고 그보다 더 차갑게 얼어붙은 경찰들의 숨소리로.

    “서이한 씨, 오셨습니까.”

    현장 책임자인 최 반장이 굳은 얼굴로 서이한을 맞았다. 그의 눈에는 피곤함과 함께 난감함이 역력했다. 서이한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최 반장이 가리킨 거실 중앙으로 시선을 던졌다.

    화려한 페르시아 융단 위에 쓰러져 있는 남자는 강 회장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회한 사업가. 가슴 한복판에 꽂힌 짧고 날카로운 나이프가 섬뜩하게 박혀 있었다. 주변의 혈흔은 굳어 있었고, 시신은 이미 싸늘했다.

    “피해자는 강 회장, 향년 72세. 사망 추정 시각은 어젯밤 10시에서 12시 사이. 사인은 예리한 흉기에 의한 심장 관통.” 최 반장이 기계적으로 브리핑했다. “가장 큰 문제는… 밀실이라는 겁니다.”

    서이한의 시선은 이미 최 반장의 말을 따라가지 않고 있었다. 그의 눈은 살아 움직이는 카메라처럼 공간 구석구석을 스캔하고 있었다. 높이 솟은 천장부터 바닥의 융단 한 올까지, 그리고 창밖으로 펼쳐진 야경의 흐릿한 경계선까지. 모든 것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모든 출입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스마트 도어락 기록 확인했고, 지문 및 생체 인식 기록에 외부인 침입 흔적은 없습니다. 창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수 강화유리 이중창에 잠금장치 이상 없었고,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 또한 전무합니다.” 최 반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환기구는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크기고, 비상구도 잠겨 있었습니다. 외부 밧줄이나 로프 사용 흔적도 없고요. CCTV는 건물 전체적으로 이상 없습니다. 엘리베이터 기록에도 수상한 인물은 없습니다.”

    서이한은 말없이 거실을 가로질러 창가로 다가섰다. 손끝이 매끄러운 강화유리를 스쳤다. 창문 너머의 밤은 완벽하게 도시를 삼키고 있었다. 70층 높이에서 뛰어내려 탈출하거나 침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유족들은요?” 서이한의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강 회장 아들인 강인규 씨와 비서인 김민준 씨가 어젯밤 회장님과 저녁 식사를 같이 하고 9시쯤 귀가했습니다. 이후 새벽 6시, 김 비서가 출근하면서 발견했습니다. 둘 다 알리바이 확실합니다. 지문도 이미 채취했고, 용의점에서 벗어난 상태입니다.”

    서이한은 시선을 돌려 문득 굳게 닫힌 거실 문을 바라봤다. 하이테크 스마트 도어락이 정교하게 박힌 검은색 문. 이 문은 그 어떤 침입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이 밀실 안에 남아있는 모든 미세한 잔향, 공기의 흐름, 빛의 왜곡, 심지어는 벽 속을 흐르는 전기의 미약한 떨림까지. 그의 심상 속에서 모든 것이 입체적으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밀실. 완벽하게 봉쇄된 공간. 살인자가 도망갈 길은 없었다. 그렇다면 살인자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현장 팀은 바닥에 미세한 먼지라도 찾으려고 애썼지만, 강 회장이 워낙 결벽증이 심해서요. 청소 로봇이 수시로 가동됐을 겁니다. 외부 먼지 유입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최 반장이 덧붙였다.

    서이한은 대답 없이 펜트하우스 내부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거대한 서재, 침실, 주방, 욕실… 모든 공간이 정교하고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억만장자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공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함 속에서, 살인 사건만이 유일한 오점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그는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책장에는 고서들과 최신 과학 서적이 뒤섞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태블릿PC와 여러 서류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그 서류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재개발 사업에 관련된 복잡한 계약서였다.

    “최 반장님.” 서이한이 서류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강 회장은 최근 어떤 압력을 받고 있었습니까?”

    최 반장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눈을 깜빡였다. “음… 특별히 알려진 압력은 없었습니다. 워낙 영향력이 큰 분이라. 오히려 경쟁사들을 압박하면 했지…”

    서이한은 서재 중앙의 테이블 가장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찾는 듯한 동작이었다.

    “강 회장은 죽기 직전까지 이 테이블에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태블릿PC의 화면이 꺼진 채로 있었고, 주변 서류들은 방금까지 손이 닿았던 것처럼 흐트러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 의자, 강 회장이 앉아 있던 의자는 평소보다 약간 뒤로 밀려 있습니다. 그리고 이 테이블 밑부분.”

    서이한은 허리를 숙여 테이블 아래쪽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강 회장은 죽기 직전, 누군가와 심각하게 다투고 있었습니다.”

    최 반장의 미간이 좁아졌다. “어떻게 아십니까? 현장에는 그런 흔적이…”

    “테이블 다리에 살짝 패인 자국이 있습니다. 아주 미세해서 육안으로는 쉽게 구별하기 어렵죠. 누군가 발로 찼거나, 아니면 격렬하게 발을 구르면서 생긴 상처입니다. 강 회장의 의자도 평소보다 뒤로 밀려 있었고요. 하지만 이 모든 건 충동적인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서이한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감각의 촉수를 더 깊이 뻗어나갔다. 완벽하게 밀봉된 이 공간. 공기의 밀도, 미세한 먼지의 흐름, 아주 작은 진동.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심장박동처럼 느껴졌다.

    *균열. 어딘가에 분명 균열이 있다.*

    그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퍼즐이 맞춰지기 시작했다. 강 회장은 왜 죽기 직전까지 이토록 완벽하게 정리된 공간에서, 그 완벽함을 깨뜨리는 격렬한 감정을 표출했을까? 그리고 그 감정의 대상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이 완벽한 밀실은, 사실 처음부터 밀실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서이한의 말에 최 반장을 비롯한 모든 경찰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함께 묘한 기대감이 스쳐 지나갔다.

    “강 회장은 누군가를 들여보냈습니다. 스스로 문을 열어주고, 그 누군가는 강 회장을 살해한 뒤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그것도 이 모든 잠금장치와 보안 시스템을 무력화시키면서 말이죠.”

    “하지만 지문도, 기록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최 반장이 다급하게 말했다.

    서이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동자에 섬광 같은 번뜩임이 스쳤다.
    “그건 우리가 잘못된 곳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펜트하우스의 가장 완벽한 보안 시스템은, 동시에 가장 완벽한 탈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빌딩의 모든 것을 통제하는 존재에게는 말이죠.”

    서이한의 시선은 다시 한번 70층 높이의 유리창 너머로, 아득하게 펼쳐진 도시의 불빛들을 응시했다. 그 불빛들 사이 어딘가에, 살인자가 유령처럼 숨어 있었다.

    “이 건물은, 스스로 문을 열어주고 스스로 문을 닫는… 또 다른 생명체와 같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진 살인은, 단순히 한 남자의 죽음이 아닙니다. 어떤 시스템의 교란이자, 완벽한 통제 속의 반란입니다.”

    서이한은 시체를 넘어 창가로 다시 다가갔다. 차가운 유리창에 그의 손바닥이 닿았다.
    “범인은 아직 이 건물 안에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건물 *자체가* 범인일지도 모릅니다.”

    최 반장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서이한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아직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섬뜩한 무언가가 그의 심장을 옥죄는 듯했다. 완벽한 밀실은 균열을 넘어,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다음 희생자는, 어쩌면… 이 건물 안에 있는 누구라도 될 수 있다는 듯이.

  • 오컬트 호러 독립적인 단편 소설

    봉룡대.

    하늘과 땅 사이, 닿을 수 없는 비경에 솟아오른 거대한 암봉. 그 정상에는 천년 세월을 견딘 흑요석 같은 검은 바위들이 켜켜이 쌓여 하나의 거대한 제단을 이루고 있었다. 무림의 전설에만 존재하던 그곳은, 지금은 천하의 운명을 건 무림 대회의 마지막 관문이 되었다.

    짙은 안개가 봉우리를 휘감고 있었으나, 무영의 예리한 시선은 그 너머에 도사린 불길한 기운을 놓치지 않았다. 이곳은 단순한 결투장이 아니었다. 무엇인가 거대하고 끔찍한 것이 숨 쉬는 심장부였다.

    “왔는가, 무영.”

    서늘한 목소리가 안개를 가르고 들려왔다. 그림자처럼 희미한 인영, 그러나 그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봉룡대 전체를 압도하고도 남을 만큼 거대했다. 천년 무림의 정점이라 불리는 ‘천마신군’. 그는 이미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수많은 고수들이 이 봉룡대 아래 계단에서 피를 뿌리고 쓰러졌다. 결승에 오른 자는 오직 셋. 무영, 천마신군, 그리고 또 한 명의 기이한 존재.

    “흑영존은 아직인가?” 천마신군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안개 속에서 새카만 실루엣이 스며들듯 나타났다. 그림자가 형태를 갖춘 듯,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검은 도포를 두른 사내. ‘흑영존’. 그의 등장은 봉룡대의 공기를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게 했다. 그는 말 한마디 없이 천마신군과 무영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 시선은 살아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대회는 단순히 힘을 겨루는 것이 아니었다. 봉룡대에 흐르는 기운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탁하고 음습하게 변해갔다. 승리한 자들은 기이할 정도로 강해졌고, 패배한 자들은 마치 영혼이 뽑혀 나간 듯, 껍데기만 남아 의식을 잃었다. 그들의 육체는 봉룡대의 바위 틈새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갔다. 대회 관계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는 오직 싸우는 자들만이 남았다.

    “이곳은…… 살아있는 제물들의 피로 채워진 단상이로군.” 무영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마신군의 눈빛이 번뜩였다. “알고 있었나.”

    “기척이 느껴지는군. 봉룡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 이곳에서 벌어진 모든 결투는 그를 위한 의식이었어.”

    흑영존은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을 노려봤다. 그의 검은 도포 자락이 안개 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일렁였다.

    천마신군이 손을 들어 올렸다. “더는 허비할 시간이 없다. 이 봉룡대가 깨어나기 전에, 우리는 끝을 내야 한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마, 봉룡대 전체가 낮게 울리기 시작했다. 바닥의 흑요석 바위 틈새에서 검붉은 섬광이 피어올랐고, 고대의 저주가 봉인된 듯한 기괴한 문양들이 번뜩였다. 안개는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서로를 쳐라. 가장 강한 자만이 저것을 막을 수 있다. 혹은…… 저것의 먹이가 되거나.” 천마신군이 으르렁거렸다.

    흑영존이 먼저 움직였다.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나타나는 신법. 무영의 등 뒤에 나타난 그의 손에서 어둠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무영의 심장을 노렸다.

    무영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피했다. 흑영존의 검은 기운이 스친 봉룡대의 바위가 순식간에 썩어 문드러졌다.

    “제길!”

    그때, 천마신군이 엄청난 기세로 흑영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권풍에는 천지를 뒤흔들 듯한 파괴력이 실려 있었다. 흑영존은 몸을 뒤틀어 피했지만, 천마신군의 주먹이 봉룡대 바닥을 강타하자 진동이 산 전체를 뒤흔들었다.

    검붉은 기운이 더욱 짙게 피어올랐다. 봉룡대 중앙의 틈새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형체를 드러내듯 번뜩였다. 그것은 영원한 어둠과 혼돈을 담고 있는 심연의 눈이었다.

    “더 이상 인간의 싸움이 아니로군.” 무영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흑영존의 움직임이 점점 빨라졌다. 그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선 존재였다. 그의 검은 도포 속에서 촉수 같은 그림자들이 솟아나와 무영과 천마신군을 동시에 공격했다. 그림자는 피부에 닿는 순간, 살을 에워 피를 빨아들이는 듯한 고통을 선사했다.

    “봉룡대에 바쳐진 영혼들의 잔재로군.” 천마신군이 외쳤다. 그의 전신에서 푸른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마교의 사악한 기운을 정화하는 듯한 밝은 빛이었다.

    하지만 흑영존의 그림자는 빛에도 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빛을 흡수하며 더욱 거대해지는 듯했다. 그림자 촉수들이 천마신군을 덮쳤고,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를 갈았다.

    무영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무공은 기의 흐름을 읽고 약점을 파고드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흑영존의 그림자는 분명 강력했지만, 그 근원은 봉룡대 아래에서 피어나는 악한 기운과 연결되어 있었다.

    “본체는 저 아래!”

    무영은 몸을 날려 봉룡대의 가장자리에 도달했다. 바위 틈새로 검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곳. 그는 그곳에서 희미하게 진동하는 기운의 중심을 느꼈다.

    “무영! 어리석은 짓이다!” 천마신군이 소리쳤다. “저것은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무영은 이미 결심한 얼굴이었다. 그는 자신의 전신에 흐르는 기운을 끌어모았다. ‘무영신공’. 그림자처럼 존재감을 지우고 적의 허점을 파고드는, 정파와 사파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기묘한 무공. 그는 이 무공의 진정한 목적이 파괴가 아닌 ‘봉인’에 있음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봉룡대의 바위 틈새에서 솟아나는 검붉은 기운이 더욱 거세졌다. 이제는 틈새를 넘어 거대한 아가리처럼 벌어졌다. 그 안에서 어둠의 심연이 꿈틀거렸다. 셀 수 없는 영혼들의 고통스러운 비명이 메아리쳤다.

    흑영존은 무영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완전히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고, 그 속에는 봉룡대 아래의 존재와 같은 심연이 담겨 있었다. “방해하지 마라… 그는 곧 깨어난다… 천하가… 그의 품에 안길 것이다…”

    그것은 흑영존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봉룡대 아래의 존재가 그를 통해 말하고 있었다.

    “헛소리 마라!”

    무영은 흑영존의 공격을 그림자처럼 흘려내며, 봉룡대의 틈새를 향해 전력으로 기운을 쏟아부었다. 그의 손에서 푸른빛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그것은 마치 거대한 실타래처럼 봉룡대의 틈새로 빨려 들어갔다.

    “이것은 봉인이다!”

    무영의 기운이 틈새 속으로 파고들자, 봉룡대가 격렬하게 진동했다. 검붉은 기운이 비명을 지르듯 솟아올랐고, 흑영존의 전신을 뒤덮고 있던 그림자들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천마신군도 뒤늦게 무영의 의도를 파악하고 그를 도왔다. 그의 푸른 기운이 무영의 봉인에 힘을 보태듯 봉룡대의 틈새로 파고들었다.

    “크아아악!”

    봉룡대 아래의 존재가 절규했다. 산 전체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진동 속에서, 어둠의 심연이 다시 틈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흑영존은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그의 육체는 검은 재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봉인! 봉인이다!

    무영은 전신의 힘을 짜내 봉인의 기운을 틈새에 박아 넣었다. 그의 혈관이 터질 듯이 팽창했고,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다. 봉룡대 바닥의 검붉은 문양들이 섬광처럼 번뜩이더니, 서서히 흐려졌다.

    “우우우웅……”

    봉룡대의 진동이 잦아들었다. 검붉은 안개도 걷히고, 핏빛으로 물들었던 하늘이 서서히 제 색을 찾아갔다. 흑영존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봉룡대에는 무영과 천마신군만이 남아 있었다.

    무영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전신의 힘이 빠져나가고, 온몸의 기혈이 역류하는 듯한 고통에 시달렸다.

    천마신군이 조용히 그에게 다가왔다. 그의 얼굴에는 경이로움과 복잡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막았군. 허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야.”

    무영은 겨우 고개를 들었다. 봉룡대 바닥의 틈새는 다시 굳건한 흑요석 바위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그 틈새 속 어딘가에서, 여전히 미약하게나마 불길한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잠든 것뿐이겠지.” 무영의 목소리가 쉰 듯 갈라졌다. “천년 뒤… 혹은 만년 뒤… 다시 깨어날 것이다.”

    천마신군은 말없이 봉룡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안개가 걷힌 봉우리는 이제 고요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눈에는, 그 고요함 속에서 다시금 피어날 재앙의 그림자가 선명히 드리워져 있었다.

    천하의 운명은 잠시 유보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영은 이제 그 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의 어깨 위에, 봉룡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 다크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아르카나 학원.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들을 배출해왔다는 그 이름은, 언제나 엄숙한 찬사와 함께 약간의 차가운 경외감을 동반했다. 웅장한 백색 대리석 건물들은 밤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첨탑 끝의 마력 수정은 밤낮없이 은은한 빛을 뿜어냈다. 그러나 류진의 눈에는 그 모든 화려함 속에 묘한 균열이 보였다. 너무나 완벽해서, 오히려 기괴한 균열.

    그날 밤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류진은 심야 순찰을 도는 관리인들의 눈을 피해 학원 깊숙한 곳을 탐색하고 있었다. 정식으로 졸업하기도 전에 온갖 금지 구역의 지도를 머릿속에 완성할 기세였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그만큼 확신에 차 있었다. 그의 목표는 ‘구(舊) 서고’라 불리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고 먼지만 쌓인 별관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노후화된 건물로 인한 안전 문제’라는 이유로 폐쇄된 곳이었지만, 류진은 그럴수록 더욱 깊은 호기심을 느꼈다. 위험할수록 더 매혹적인 법이니까.

    “쳇, 이번엔 마력 장벽이 더 튼튼해졌군.”

    철제 문고리에 손을 대자 차가운 전류가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일반적인 차단 마법보다 훨씬 강력하고, 고대의 것이리라 짐작되는 기운이었다. ‘안전 문제’라기엔 과하게 견고한 봉인이었다. 류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재킷 안주머니에서 낡은 가죽 지갑을 꺼냈다. 그 안에는 학원 입학 때 지급받은 학생증이 들어 있었다. 그는 학생증 뒷면에 새겨진 마법 문양에 미약한 마력을 불어넣었다. 빛은 없었지만, 섬세하게 진동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이 학생증에는 학원의 모든 마력 장벽을 무효화할 수 있는 ‘비상용 해제 주문’이 숨겨져 있었다. 물론, 이걸 이런 식으로 사용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겠지만.

    *징—*

    낮게 울리는 진동음과 함께 차가운 전류가 멎었다. 류진은 피식 웃으며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곰팡이 냄새, 그리고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인 답답한 공기가 훅 끼쳐왔다.

    “이런 젠장, 숨쉬기도 힘들겠네.”

    코를 찡그리며 그는 작게 마법을 읊조려 주위의 먼지를 걷어냈다. 희미한 은색 구슬들이 허공을 부유하며 낡은 서고 내부를 밝혔다.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책장들이 미로처럼 늘어서 있었고, 수십 년은 족히 되었을 거미줄들이 곳곳에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류진이 찾던 건 책이 아니었다.

    그는 오래된 통로를 따라 서고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발밑에서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소리가 크게 울렸다. 한참을 걸었을까, 마침내 그의 앞에 낯선 문이 나타났다. 벽과 완벽하게 일체화되어 있어,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는 비밀의 문이었다. 문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그 표면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류진은 손을 들어 문양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그리고 그의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아득하고 고통스러운 기운. 단순한 ‘봉인’이 아니라, 마치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대체 뭘 봉인해둔 거지?”

    그는 잠시 망설였다. 본능이 경고했다. *돌아가라. 여기는 네가 상관할 곳이 아니다.* 하지만 류진은 학원의 완벽한 가면 뒤에 숨겨진 그림자를 보기를 원했다. 완벽함은 언제나 의심스러웠으니까.

    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모아 문양 위에 찍었다. 동시에 그의 몸속 마력이 문양으로 흘러들어 갔다. 학원 학생증에 새겨진 마법과는 차원이 다른, 훨씬 더 복잡하고 강력한 봉인이었다. 하지만 류진은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다. 그는 봉인 마법의 흐름을 읽고, 그 핵심을 찾아 미세하게 비틀었다.

    *콰르르릉!*

    작은 지진이라도 난 듯 서고 전체가 흔들렸다. 칠흑 같던 문양들이 섬뜩한 붉은빛을 내며 꿈틀거렸다. 류진은 이를 악물었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봉인이 저항하는 것 같았다. 마치 문 너머의 존재가 발악하는 것처럼.

    잠시 후, 끔찍한 진동이 멎고 문양의 붉은빛이 사그라졌다. 이어 문이 안쪽으로 스르륵 열렸다. 문틈 너머로 깊은 어둠과 함께, 차가운 공기, 그리고 역겨운 비린내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마치 죽은 피와 썩어가는 살에서 나는 듯한 냄새였다.

    “젠장, 정말 대단한 걸 숨겨놨군.”

    류진은 떨리는 손으로 마법 구슬을 하나 더 꺼내들어 마력을 불어넣었다. 구슬은 더욱 강렬한 빛을 내며 어둠 속으로 먼저 들어갔다. 구슬의 빛이 어둠을 헤치고 나아가자, 류진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지하’가 아니었다. 거대한 지하 공동이었다. 학원 전체를 지탱하는 기반 위에, 거대한 동굴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동굴의 벽면은 인공적으로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지만, 그 재질은 익숙한 대리석이 아니었다. 뼈와 같은 질감의 회백색 벽면은 육중하고 끔찍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굴 중앙에는 기괴한 구조물이 서 있었다.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탑. 단순한 탑이 아니라, 마치 수많은 촉수들이 뒤엉켜 위로 솟아오른 듯한 형태였다. 탑의 표면은 검붉은 액체로 뒤덮여 있었고, 액체는 느릿하게 흐느적거렸다. 그 액체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수많은 눈동자 같은 것들이 섬뜩하게 깜빡였다.

    탑의 기저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마법진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마법진들은 끊임없이 마력을 흡수하고 방출하며 기괴한 공명음을 냈다. 그 공명음은 류진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들었고,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이게… 뭐지?”

    류진은 구슬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탑의 검붉은 액체에서 희미하게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그의 눈에 탑을 구성하는 촉수들 사이에서 얼핏 보이는 형체가 들어왔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끔찍하게 뒤틀리고 일그러진 형상들이었다.

    마치, 수많은 영혼들이 뒤섞여 고통받고 있는 듯한…

    그 순간, 탑의 가장 꼭대기에서 섬뜩한 빛이 번쩍였다. 류진의 눈이 저절로 가늘어졌다. 빛이 멎자, 그는 그제야 탑의 가장 높은 곳에 박혀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거대한 마력 수정이었다. 학원의 모든 첨탑에 박혀 있는 마력 수정과 흡사했지만, 크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으며, 투명한 푸른빛 대신 피처럼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붉은 수정은 탑의 검붉은 액체와 연결된 무수한 관을 통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흡수하고 있었다.

    그리고 류진은 소름 끼치는 깨달음에 도달했다.

    저 탑이, 학원의 마력 근원인가?
    아르카나 학원, 대륙에서 가장 위대한 마법사들을 배출하는 그들의 힘은…
    이 끔찍한 지하의 제물로부터 나오는 것이었나?

    *쉬이이이이익…*

    류진의 귓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바람 소리도 아니었고, 기계음도 아니었다.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고통과 절규가 뒤섞인 소리였다. 마치 저 탑 속에 갇힌 존재들이 그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도와줘…*
    *…고통…*
    *…자유를…*

    류진은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것은 그저 힘의 근원이 아니었다. 이것은… 살아있는 지옥이었다.

    “젠장… 이건…!”

    그때, 그의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놈이 이곳에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류진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학원의 교장, 마스터 엘드리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의 눈은 달빛처럼 차갑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담고 있었다.

    “어떻게… 여길…?” 류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엘드리히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어떤 온기도 담고 있지 않았다. “학원의 모든 봉인은 결국 나와 연결되어 있다. 네가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지. 하지만 감히 이곳까지 내려올 줄은… 네놈의 배짱은 높이 살 만하군.”

    엘드리히의 시선이 류진을 지나 지하 공동의 탑으로 향했다. 그의 눈에 어린 것은 경외심인지, 아니면 다른 섬뜩한 감정인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알았나? 이 아르카나 학원이 왜 대륙 최고의 학원인지. 왜 영원히 시들지 않는 마력을 뿜어낼 수 있는지.”

    그의 목소리는 지하 공동의 공명음과 섞여 류진의 귓가에 섬뜩하게 울렸다.

    “불완전한 재능은 사라지고, 완전한 힘만이 영원히 빛나는 곳.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마법의 요람이다.”

    류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요람이, 수많은 존재의 피와 절규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사실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선생님… 대체 저 안에 뭐가 있는 겁니까? 왜 이런 짓을…!”

    엘드리히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눈빛은 류진을 벌레 보듯 차가웠다.

    “글쎄, 네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가? 힘을 향한 숭고한 희생인가, 아니면 그저 끔찍한 금기인가.”

    그의 손에서 푸른빛 마력이 피어올랐다. 류진은 직감적으로 위협을 느꼈다.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마력.

    “어찌 되었든, 이제 넌 이곳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비밀을 아는 자는…”

    엘드리히의 푸른 마력이 지하 공동의 끔찍한 탑을 비췄다. 탑의 검붉은 액체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들이 일제히 류진을 향해 섬뜩하게 깜빡였다. 그 눈동자들은 그에게서 절망과 함께 희망을 보는 듯했다.

    “…이곳의 일부가 되어야 할 운명이다.”

    류진의 등골에 차가운 땀이 줄줄 흘렀다. 탑 속에서 희미하게 들리던 절규가, 이제는 마치 그의 미래처럼 선명하게 다가오는 듯했다. 이곳은 그저 비밀이 숨겨진 지하가 아니었다. 이곳은 학원의 영원한 심장이자, 모든 마법사들의 피를 말리는 거대한 감옥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그 감옥의 새로운 죄수가 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 스팀펑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철연시의 스모그는 늘 그러하듯, 지평선을 집어삼킨 거대한 톱니바퀴 구름 아래에서 꾸역꾸역 피어 올랐다. 매캐한 석탄 냄새와 뜨거운 증기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나는 작고 낡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잉크가 묻어나는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오전 10시 32분. 아직 아침의 냉기가 가시지 않은 시간, 거리의 자동인형 청소부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보도블록을 닦고 있었다.

    “정우, 준비됐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한유진 탐정이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완벽하게 재단된 짙은 회색 코트 차림이었고, 얇은 은테 안경 너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었다. 그의 한 손에는 늘 들고 다니는 작은 황동제 회중시계가 들려 있었다. 그는 시계 뚜껑을 열어 시간을 확인한 후, 다시 딱 소리가 나게 닫았다. 그의 손목시계는 증기압으로 움직이는 신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진 탐정은 구식 회중시계를 고집했다. 그만의 고집이었다.

    “네, 탐정님. 언제든지요.”

    나는 얼른 대답하며 수첩을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우리는 막 증기 기관차가 멈춘 플랫폼에 서 있었다. 철연시의 심장부, 기계공학의 첨탑들이 하늘을 찌르는 마천루 지구. 이곳에 우리가 불려온 이유는 늘 하나였다. 이성이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하고 복잡한 사건들.

    유진 탐정은 길고 섬세한 손가락으로 공중에 떠다니는 비행선을 가리켰다. 마치 거대한 고래가 하늘을 유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 비행선의 조종사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바람의 저항, 연료의 효율, 혹은 저녁 식사 메뉴? 인간의 사고회로는 언제나 예측 불가능한 변수들로 가득 차 있지.”

    그의 엉뚱한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아마 연료의 효율보다는 엔진의 안정성에 더 신경 쓰지 않을까요? 그게 더 예측 가능한 변수일 텐데요.”

    유진 탐정은 내 말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정확해. 그래서 사람들은 복잡한 퍼즐을 마주하면 가장 단순한 답을 찾으려고 하지. 하지만 때로는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교묘한 함정이 되기도 해.”

    우리를 태우러 온 것은 증기 마차였다. 은은한 황동빛 광택을 뿜어내는 차체는 최고급 가죽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마부가 아닌 정교한 자동인형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마차는 톱니바퀴의 부드러운 회전음과 증기 분출음을 내며 미끄러지듯 도로 위를 달렸다. 주변의 건물들은 점점 더 높아졌고, 복잡한 증기 파이프와 톱니바퀴 장식들이 건물 외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철연시 최고의 부호들이 모여 사는 ‘강철 탑 지구’였다.

    이번 사건의 현장은 강철 탑 지구에서도 가장 높이 솟아 있는 ‘강태호의 탑’이었다. 강태호. 철연시에서 가장 유명한 자동인형 공학자이자, 새로운 증기 동력원의 발명가. 그의 이름 앞에는 늘 ‘천재’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마차가 탑의 거대한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대문은 순수한 강철로 만들어져 있었고, 복잡한 태엽 장식들이 움직이며 기묘한 문양을 그려내고 있었다. 경비 자동인형들이 삐걱거리며 움직여 마차의 문을 열었다.

    탑의 로비는 말 그대로 하나의 거대한 기계 장치 같았다. 천장에는 거대한 황동제 시계탑이 매달려 있었고, 층수를 오가는 승강기는 증기압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탑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나선형 톱니바퀴에 매달려 회전하는 방식이었다.

    경찰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김 반장님이 우리를 발견하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김 반장님은 수십 년간 철연시의 온갖 범죄를 해결해 온 베테랑 형사였지만, 유진 탐정 앞에서는 늘 한 수 접고 들어가는 태도를 보였다.

    “탐정님! 드디어 오셨군요! 정말… 정말 난감한 사건입니다.” 김 반장님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유진 탐정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을 설명해 주시죠, 김 반장.”

    “강태호 박사님이 살해당했습니다. 오늘 아침, 그의 연구실에서요. 문제는… 그 연구실이 안에서 완벽하게 잠겨 있었다는 겁니다.”

    나는 얼른 수첩을 꺼내 들었다. 밀실 살인. 유진 탐정이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퍼즐이었다.

    김 반장님은 손짓으로 승강기를 가리켰다. “연구실은 탑의 최상층, 128층에 있습니다. 박사님은 어제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계셨고, 새벽 3시쯤 경비 자동인형이 순찰을 돌 때까지도 불이 켜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그의 비서가 출근하여 연구실 문을 열려고 했으나 잠겨 있어서, 강제로 문을 따고 들어갔는데…”

    그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박사님이 죽어 있었습니다. 심장에 정확히 칼이 박혀서요. 그리고…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창문은 강철 강화 유리로 완벽하게 봉인되어 있었습니다. 환기구는 너무 작아서 사람이 드나들 수 없고, 다른 출입구는 애초에 없습니다. 밀실입니다, 탐정님. 완벽한 밀실!”

    우리는 나선형 톱니바퀴 승강기를 타고 쉼 없이 상승했다. 창밖으로는 철연시의 거대한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증기 탑들과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비행선들이 마치 살아있는 도시의 심장 박동 같았다.

    128층에 도착하자, 철통같은 경비 속에 경찰들이 현장을 지키고 있었다. 복도는 온통 정교한 기계 장치들로 가득했다. 각종 증기 압력계와 톱니바퀴 장식들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김 반장님이 가리킨 곳은 묵직한 강철 문이었다. “이 문이 박사님의 연구실입니다. 안에서 걸쇠가 내려져 있었고, 잠금장치도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저희가 강제로 해제하고 들어갔습니다.”

    유진 탐정은 말없이 문을 바라보았다. 강철 문에는 복잡한 태엽 장치와 여러 개의 자물쇠가 달려 있었는데, 분명 밖에서는 쉽게 열 수 없는 구조였다.

    “문은 어떻게 해제했지?” 유진 탐정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잠금장치들을 특수 공구로 풀고, 문 경첩을 뜯어냈습니다. 물리적으로 해체한 겁니다. 안에서 걸린 빗장은 문이 열리면서 파손되었고요.”

    유진 탐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손잡이를 잡고 연구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그의 뒤를 따랐다.

    연구실은 기대했던 대로 거대한 기계 박물관 같았다. 중앙에는 설계도가 펼쳐진 커다란 작업대가 있었고, 벽면에는 수많은 황동제 부품들과 알 수 없는 기계 장치들이 빼곡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증기압으로 움직이는 듯한 작은 자동인형들이 선반 위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멈춰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강태호 박사가 쓰러져 있었다.

    박사는 작업대 바로 옆, 바닥에 엎드린 채 미동도 없었다. 등에는 깊고 날카로운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피가 흥건하게 고여 바닥의 복잡한 기계 문양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마치 무언가를 잡으려다 놓친 듯, 허공을 향해 뻗어 있었다.

    유진 탐정은 시선을 한 곳에 고정했다. 바로 박사의 옆에 떨어진 칼이었다. 그것은 흔한 주방용 칼이 아니라, 정교하게 세공된 황동 손잡이에 날카로운 강철 날이 달린, 흡사 장식용 검과 같은 형태였다.

    “창문은 확인했나?” 유진 탐정이 김 반장에게 물었다.

    “네, 탐정님. 이 탑의 창문은 모두 강철 강화 유리로 이중 밀봉되어 있습니다. 외부에서는 절대로 깨뜨릴 수 없고, 내부에서 강제로 열려고 해도 증기압 잠금장치가 작동해서 열리지 않습니다. 이 방의 창문도 역시나 굳게 닫혀 있었고요.” 김 반장이 손전등으로 창문을 비추며 설명했다. 유리가 너무나 두꺼워 햇빛조차 희미하게 스며들 뿐이었다.

    나는 방 안을 꼼꼼히 훑어보았다. 환기구는 천장 구석에 있었지만, 성인 남성이 통과하기에는 턱없이 작은 구멍이었다. 다른 숨겨진 문이나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는 카펫 대신 복잡한 기계 부품의 회로도를 연상시키는 패턴이 새겨져 있었고, 그 위에는 박사의 피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자살은 아닐 겁니다. 등에 칼이 박혔으니까요.” 한 경찰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김 반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 침입의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박사님 외에는 아무도 이 방에 들어올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누가 박사님을 죽이고 이 밀실을 빠져나간 걸까요?”

    모든 것이 불가능해 보였다. 완벽하게 밀봉된 공간, 안에서 걸린 문, 그리고 등 뒤의 치명적인 상처.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유진 탐정은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턱을 쓸어내렸다. 그의 뇌리 속에서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침묵이었다. 곧 그는 눈을 떴고, 그 시선은 방 안의 특정 장소에 머물렀다.

    “정우, 수첩을 준비하게.” 유진 탐정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확신에 찬 어조였다.

    나는 얼른 펜을 잡았다.

    그는 피 묻은 칼을 쳐다보지 않았다. 강태호 박사의 싸늘한 시신에도 그의 시선은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천장에 달린 거대한 황동제 증기압 시계, 벽면을 따라 흐르는 복잡한 구리 파이프들, 그리고 박사가 손을 뻗은 방향에 있는, 마치 아직 미완성인 듯한 자동인형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밀실. 김 반장, 이 방은 결코 완벽한 밀실이 아니었네.”

    그의 말에 경찰들은 술렁였다. 김 반장님은 당황한 얼굴로 반문했다. “하지만 탐정님, 모든 출입구가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저희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유진 탐정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 이 방은 처음부터, 그리고 이 순간까지도 열려 있었지. 단지 자네들이 그것을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는 천천히, 마치 춤을 추듯 방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의 시선은 다시 한번 박사가 쓰러진 방향, 그리고 그 손이 허공에서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박사를 내려다보고 있는, 눈동자 없는 자동인형의 차가운 금속 얼굴에.

    “자, 이제부터 이 낡은 기계장치 속에서 숨겨진 진짜 톱니바퀴를 찾아볼까.”

    나는 그의 말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 펜을 꽉 움켜쥐었다.
    이것이 한유진 탐정의 방식이었다. 불가능 속에서 가능성을, 보이는 것 속에서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방식.
    강태호 박사의 밀실 살인 사건은 이제 막 거대한 태엽을 감기 시작한 참이었다.

  • 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숨을 들이쉴 때마다 흙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폐 속을 긁었다. 마스크 안에서 땀이 축축하게 맺혔지만, 벗을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 망할 놈의 세상에서 그나마 폐를 보호해 주는 유일한 것이었으니까. 지훈은 녹슨 철근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잔해 더미를 조심스럽게 기어 올라갔다. 발아래 부스러지는 콘크리트 조각들이 먼지 구름을 일으켰다.

    세상은 언제나 이랬다. 끝없이 펼쳐진 회색빛 폐허. 하늘은 늘 흐리고 탁했으며, 햇빛은 희미한 그림자조차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한때는 도시였을 곳. 하지만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거대한 무덤. 매일 해가 뜨면 이 무덤 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고, 해가 지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그림자 같은 공포를 피해 몸을 숨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지훈은 한때 대형 마트였을 건물의 뼈대만 남은 곳을 뒤지고 있었다. 선반들은 무너져 내렸고, 진열되었던 물건들은 전부 도난당하거나 부식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며칠째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한 목은 바싹 말라붙어 있었다. 어제 발견한 녹슨 통조림 캔은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깊숙한 곳, 지붕이 완전히 내려앉아 햇빛조차 들지 않는 구석에서 희미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잔해를 헤치고 다가가자, 습기와 먼지에 절어 형태를 알기 힘든 박스가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가가 손을 뻗는 순간, 옆 벽에서 ‘으드득’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건물이 낡아도 너무 낡았다. 언제 무너져 내릴지 알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곳에 미련을 둘 필요 없어. 목숨이 제일 중요해.*

    속으로 되뇌었지만,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았다. 희망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죽는 건 지옥이고, 사는 건 더 큰 지옥이었다. 어차피 같은 지옥이라면, 희망이라는 허상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조심스럽게 박스를 열었다. 안에는 먼지 앉은 플라스틱 병들이 보였다. 겉면은 찢어져 있었지만, 익숙한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생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병을 들어 흔들어보니,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물이 있었다!

    *이런 행운이 아직도 존재하다니.*

    지훈은 병뚜껑을 따고 망설임 없이 물을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온몸에 생기가 돌았다. 갈증이 해소되자 비로소 주변의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무너진 건물 틈으로 새어 나오는 긁는 듯한 소리. 그리고… 뭔가 이상한 냄새. 희미하지만 역겹고, 동시에 뇌를 마비시키는 듯한 독특한 향이었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낌새가 좋지 않았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바닥에 놓인 박스들, 무너진 철근들. 익숙한 폐허의 풍경. 하지만 왠지 모르게 모든 것이 조금씩 비틀려 보였다.

    그때, 벽의 가장자리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발견했다. 녹슨 철골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빛치고는 너무도 선명하고, 동시에 이상하게 차가운 색이었다. 마치 심해의 빛과 같았다. 지훈은 숨을 죽이고 빛이 나오는 곳으로 다가갔다. 콘크리트 조각들을 치우자, 틈새 너머로 예상치 못한 풍경이 드러났다.

    그곳은 다른 곳이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혹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듯한 공간이었다. 낡은 책상 위에 놓인 유리병들.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겨 있었고, 벽에는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두운 푸른색, 녹색, 보라색이 뒤섞인 문양들은 아무리 쳐다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그림도, 글자도 아니었다. 단지 어떤 존재의 흔적처럼 보였다.

    *여긴… 뭐지?*

    몸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이곳은 생수가 있던 마트와는 전혀 다른 공간이었다. 지훈은 망설였다. 돌아갈까? 아니면 저 안으로 들어가 볼까? 생존을 위한 본능은 돌아가라고 속삭였지만, 미지의 것에 대한 호기심은 그를 잡아끌었다. 이곳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든, 어쩌면 이 지옥 같은 삶을 끝낼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헛된 희망이 그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결국 지훈은 조심스럽게 몸을 틈새 안으로 밀어 넣었다. 좁은 틈을 빠져나가자, 차가운 공기와 함께 퀴퀴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아까 맡았던 그 역겨운 향이 더욱 강렬하게 코를 찔렀다. 발소리가 울리는 순간, 빛을 내던 기묘한 문양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다. 문양이 점멸할 때마다 공간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지훈은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끼며 주위를 살폈다. 이곳은 어떤 연구실 같기도 하고, 어떤 종교 의식을 위한 장소 같기도 했다. 중앙에는 거대한 돌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칠흑같이 검은 돌덩이가 있었다. 사람의 손으로 조각한 듯한 모양이었지만, 어떤 존재의 일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문득, 돌덩이 표면에 새겨진 문양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까 벽에서 본 그것과 비슷했지만, 훨씬 더 복잡하고 섬세했다. 마치 우주의 심연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형태였다. 지훈은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차가운 돌덩이에 닿는 순간, 뇌리에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스쳐 지나갔다. 끝없이 펼쳐진 어둠, 형언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들, 비명과 침묵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광경. 머리가 깨질 듯한 고통에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커헉!”

    손을 움켜쥐고 한 걸음 물러섰다. 환영인가? 착각인가? 아니,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 순간, 돌덩이에서 희미하게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주위의 모든 벽에 새겨진 문양들이 동시에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푸른색, 보라색, 검붉은색 빛이 뒤섞여 공간을 채웠다.

    지훈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이곳은 위험했다. 아니, 이 세상 자체가 위험했지만, 이곳은 차원이 다른 위험이었다. 그는 생존을 위한 본능에 따라 왔던 틈새를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쉬이이이익—’ 마치 거대한 비단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지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틈새를 향해 몸을 던졌다. 간신히 몸을 밀어냈을 때, 뒤에서는 거대한 균열이 생기며 방 전체가 붕괴되는 소리가 들렸다.

    숨을 헐떡이며 잔해 더미 위로 기어 나왔을 때, 지훈은 온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있었다.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흐렸던 하늘이 순식간에 검붉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수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산도 아니었고, 구름도 아니었다. 어떤 거대한 무언가였다.

    *맙소사… 이건 대체…*

    그림자는 마치 하늘을 찢고 나온 것처럼 보였다. 형언할 수 없는 형태,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감. 지훈은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 광경을 응시했다.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켰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아까 손을 뻗었던 그 검은 돌덩이였다. 자신도 모르게 그걸 쥐고 나온 모양이었다. 지훈은 돌덩이를 꺼내들었다. 여전히 차가웠고, 표면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들은 여전히 그의 뇌리를 흔들었다.

    검붉은 하늘 아래,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폐허 위에서, 지훈은 차가운 돌덩이를 쥔 채 망연히 서 있었다. 이 돌덩이가 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저 하늘의 그림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의 지옥 같은 생존은 이제 막 더 깊은 심연으로 들어섰다는 것이었다.

  • 선협 (신선)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숨조차 쉬기 버거운 붉은 흙먼지가 사방을 집어삼켰다. 한때 푸르렀던 이 대지는 이제 잿빛 망령처럼 피폐해져 있었다. 류는 메마른 입술을 깨물며 황량한 협곡의 틈새를 살폈다. 등 뒤에 짊어진 낡은 배낭 속에는 며칠 전 겨우 얻은 딱딱한 육포 조각이 전부였다.

    ‘청월화… 반드시 찾아야 해.’

    그의 손에는 닳아빠진 지도가 들려 있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희미한 선들은 한때 위대한 선문(仙門)의 영지였던 ‘비단 계곡’을 가리키고 있었다. 지금은 그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폐허였다. 이곳이라면 청월화가 자랄 만한 영기(靈氣)의 잔흔이 남아있을 터였다. 청월화는 그의 미약한 심맥(心脈)을 회복시키고, 얼마 남지 않은 영력(靈力)을 끌어올릴 유일한 희망이었다.

    류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웠다. 메마른 자갈들이 미끄러졌다. 사방에서 무너진 석탑과 금이 간 비석들이 그를 응시하는 듯했다. 한때 이곳을 수호하던 강력한 결계들은 모두 붕괴했고, 그 잔해 속에서 독기(毒氣)에 물든 변이된 짐승들과 굶주린 인간들이 뒤섞여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고 있었다. 류는 그들 중 어느 쪽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다.

    “크르륵…”

    어둠 속에서 낮은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류의 몸이 순간 굳었다. 낡은 나침반처럼 그의 영력이 미미하게 반응했다. 그는 등 뒤에서 녹슨 단도, ‘월영검’을 뽑아 들었다. 칼날은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칙칙한 그림자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흉측하게 굽은 송곳니, 붉게 빛나는 눈, 그리고 온몸을 뒤덮은 단단한 암석 비늘. 거대한 늑대의 형상이었지만, 일반적인 늑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놈은 독기에 물들어 변이된 ‘혈암랑(血岩狼)’이었다. 그 이빨에 한 번 물리면 영력은 물론 생명력까지 흡수당한다는 끔찍한 괴물이었다.

    ‘젠장, 하필 이놈이…!’

    류는 바싹 마른 침을 삼켰다. 도망치는 건 무의미했다. 이 좁은 협곡에서 혈암랑의 속도를 따라잡을 순 없었다. 싸워야 했다. 절박한 생존 본능이 그의 모든 감각을 곤두세웠다.

    혈암랑은 류를 발견하자마자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놈의 몸에서 붉은 기운이 피어오르며, 주변의 흙먼지가 소용돌이쳤다. 거대한 앞발을 들어 땅을 한 번 찍자, 지면이 울리고 작은 돌멩이들이 솟아올랐다.

    “하아압!”

    류는 외마디 기합을 지르며 먼저 달려들었다. 이판사판이었다. 어차피 죽을 바엔 먼저 공격하는 것이 나았다. 그는 월영검에 남아있는 미약한 영력을 모아 칼날 끝에 집중시켰다. 푸른빛이 더욱 선명해졌다.

    ‘청풍검법(淸風劍法) 제1식, 유운(流雲)!’

    바람처럼 가볍게 몸을 놀려 혈암랑의 공격을 피했다. 놈의 앞발이 류가 서 있던 자리를 강하게 내리찍었고, 바위가 깨지는 소리가 협곡을 울렸다. 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혈암랑의 옆구리를 향해 월영검을 휘둘렀다. 그의 목표는 놈의 암석 비늘이 그나마 얇은, 관절 부분이었다.

    콰앙! 챙그랑!

    월영검이 혈암랑의 옆구리에 부딪히자, 금속이 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날카로운 칼날이 비늘을 긁었지만, 깊게 파고들지는 못했다. 오히려 류의 손목이 쨍하고 울렸다. 영력이 부족했다. 월영검의 힘을 완전히 끌어낼 수 없었다.

    혈암랑은 아픔에 사납게 포효하며 고개를 돌려 류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한 턱이 벌어지고 날카로운 송곳니들이 드러났다. 피비린내 나는 숨결이 류의 얼굴을 강타했다.

    ‘이대로는… 죽는다!’

    류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겨우 송곳니를 피했다. 놈의 턱이 그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찰나, 혈암랑의 거대한 꼬리가 휘둘러졌다.

    퍽!

    방심한 류의 옆구리에 꼬리가 정확히 명중했다.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날아가 바위에 부딪혔다. 등 뒤에서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숨이 막혔다. 폐에 구멍이라도 난 듯, 피 맛이 입안에 퍼졌다.

    ‘끝인가…?’

    그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뇌리에는 황폐해진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지난날의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순간, 류의 눈빛이 변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집념, 그것만이 그를 지금까지 살아남게 한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옆구리에서 끓어오르는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월영검이 땅에 박혀 있었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바위틈 사이로 희미하게 푸른빛을 발하는 작은 꽃잎들이었다.

    ‘청월화…!’

    그가 찾던 청월화였다. 지친 몸에 영력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비록 미약하지만, 그의 심맥에 흐르는 유일한 희망.

    “크아아아!”

    혈암랑이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앞발이 아닌, 놈의 붉은 눈에서 섬뜩한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독기에 물든 영력파였다.

    ‘절대 피할 수 없어!’

    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는 피하는 대신, 월영검을 뽑아 들고 온몸의 영력을 끌어모아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청풍검법 제3식, 광풍멸도(狂風滅道)!’

    그의 검 끝에서 푸른빛이 폭발했다. 마치 미친 바람이 모든 것을 쓸어버리듯, 류의 몸이 회오리바람처럼 회전하며 혈암랑의 영력파를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그의 검은 놈의 붉은 영력파를 갈랐고, 그 기세 그대로 혈암랑의 머리통을 향해 쏘아졌다.

    쿠우우웅!

    광선과 검이 충돌하며 거대한 폭발음이 협곡을 뒤흔들었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류는 그 충격에 또다시 멀리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월영검이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 온몸의 뼈가 삐걱거리는 듯했다.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 류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혈암랑의 형체였다. 놈은 여전히 서 있었다. 하지만 놈의 머리에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붉은 피가 암석 비늘 사이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놈의 몸이 휘청거리더니, 이내 거대한 굉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정적.

    협곡에는 류의 거친 숨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겨우 살아남았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에서 흘러내리는 피가 이미 바지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하아… 하아…”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청월화가 있는 바위틈으로 향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어둠 속에서도 영롱하게 빛나는 푸른 꽃잎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손이 떨렸다. 마침내… 마침내 찾았다.

    류는 조심스럽게 청월화를 꺾어 들었다. 은은한 향기가 폐허 속에서 작은 희망처럼 피어났다. 그는 청월화를 품에 안고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봤다. 혈암랑의 시체가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묵묵히 서 있었다.

    이곳은 비단 계곡, 과거 영기가 넘쳤던 선문의 영지. 이제는 황폐함만이 남은 죽음의 땅. 류는 청월화를 움켜쥔 채 멀리 펼쳐진 잿빛 대지를 응시했다. 살아남기 위한 그의 여정은 이제 막 한 고비를 넘겼을 뿐이었다. 다음은 또 어떤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심장 깊은 곳에서는 작은 불씨 하나가 꺼지지 않고 타오르고 있었다.

    ‘살아남아야 해… 어떻게든.’

    그는 피 묻은 손으로 청월화를 꼭 쥐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겼다.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밤은 더욱 위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