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던전 탐험 독립적인 단편 소설

    메마른 바람 한 줄기가 굳게 닫힌 석문의 틈새를 스쳐 지나갔다. 수천 년의 세월이 켜켜이 쌓인 먼지가 희미한 햇빛 아래 춤을 추는 동안, 강우는 거친 손으로 턱을 쓸었다. 그의 눈은 낡은 가죽 지도와 눈앞의 거대한 문을 번갈아 응시했다.

    “젠장, 지도는 맞는데… 이 지점에서부터는 죄다 먹칠이 되어 있군.” 강우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실망보다는 오랜 탐험가 특유의 끈기가 배어 있었다.

    옆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세준이 묵직한 망치를 어깨에 얹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어차피 고대 유적이란 게 다 그렇지. 입구부터 친절하게 안내문을 붙여놓을 리가 있나. 힘으로 밀고 들어가면 그만 아니겠어?”

    세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작은 체구의 지혜가 석문 표면의 문양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훑었다. 그녀의 눈은 반짝이는 호기심과 학자적인 진지함으로 가득했다. “잠시만요. 힘으로 해결할 문제는 아닌 것 같아요. 이 문양들… 이건 그림자 제국의 언어입니다. 아주 오래된 형식이에요.”

    “그림자 제국?” 강우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전설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여겨지던 그 제국 말인가?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네, 맞아요. 희미한 기록들조차 제국의 찬란한 번영과 갑작스러운 소멸에 대한 단편적인 언급뿐이죠. 이 유적은 아마도 그들의 수도, 혹은 그들이 숨기려 했던 어떤 중요한 장소일 겁니다.” 지혜의 손가락이 문양 위를 미끄러졌다. “음… ‘진실을 아는 자, 문을 열어라. 오만함은 파멸을 부르고, 지혜는 길을 밝히리라.’ 대충 이런 내용인 것 같아요.”

    “진실을 아는 자라… 우리가 뭘 안다고.” 세준이 코웃음 쳤다. “그럼 뭘 해야 열리는 건데? 제국의 역사를 줄줄 읊어야 하나?”

    지혜는 고민에 잠긴 듯 문양의 배열을 다시 살펴보았다. “아니요, 그럴 리가 없어요. 고대 제국의 지식은 비전(秘傳)으로 전해지거나, 상징적인 방식으로 기록되었을 거예요. 어쩌면… 이 문양들 자체가 열쇠일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시선이 문 주변에 새겨진 여러 개의 홈과 부조물로 향했다. 마치 태양과 달, 별자리를 형상화한 듯한 조각들이었다.

    “이건 단순한 장식이 아니에요. 퍼즐입니다.” 지혜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고대인들은 중요한 통로에 늘 지혜의 시험을 두었죠. 태양은 낮을, 달은 밤을, 별은 흐르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아마도 낮과 밤의 순서,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상징하는 방식으로 맞춰야 할 거예요.”

    강우는 지혜의 설명을 들으며 부조물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문득, 오래된 기록에서 읽었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림자 제국은 어둠 속에서 태어나 빛을 숭배하고, 다시 어둠으로 돌아갔다.’*

    “지혜야, 혹시… 이 태양과 달이 단순한 낮과 밤이 아니라, 그림자 제국의 흥망성쇠를 의미할 수도 있을까?” 강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둠에서 시작해 빛의 시대를 누렸고, 결국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 그런 식으로 말이야.”

    지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우 씨! 그거예요! 어둠을 상징하는 달부터 시작해서, 태양의 번영을 거쳐 다시 달, 그리고 마지막엔 침묵하는 별들! 시퀀스가 분명할 거예요!”

    셋은 머리를 맞대고 부조물들을 이리저리 맞춰보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낡은 기계장치의 잠에서 깨어나듯 울렸다. 이윽고, 마지막 별 조각이 제자리를 찾아 박히자, 거대한 석문이 굉음과 함께 안쪽으로 서서히 밀려들어갔다.

    밀려들어간 문 뒤로는 칠흑 같은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스산한 바람이 유적의 깊숙한 곳에서부터 불어와 셋의 얼굴을 스쳤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오래된 돌의 눅눅한 기운이 코끝을 찔렀다.

    “성공했군.” 세준이 만족스럽게 말했다.

    강우는 허리춤에서 마력석 랜턴을 꺼내어 빛을 밝혔다. 랜턴의 푸른빛이 어둠을 가르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셋은 숨을 삼켰다.

    **시간을 잊은 지하 도시.**

    눈앞에는 거대한 광장이 펼쳐져 있었다. 검은색 대리석 기둥들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사이에 기괴하면서도 웅장한 형상의 조각상들이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바닥에는 부서진 비석 조각들과 정체불명의 금속 파편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천장은 너무나 높아서 랜턴 빛으로는 그 끝을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맙소사…” 지혜가 넋 나간 듯 중얼거렸다. “전설은 사실이었군요. 그림자 제국은 단순한 왕국이 아니라, 거대한 지하 도시를 건설했던 겁니다.”

    “저기 좀 봐.” 세준이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거대한 기둥들 너머, 광장의 중심에 폐허가 된 제단 같은 것이 보였다. 제단 주변으로는 방패와 칼을 든 거대한 석상들이 마치 살아있는 병사들처럼 서 있었다.

    강우의 발걸음이 먼저 앞으로 향했다. “조심해. 이런 곳은 으레 방문객을 반기지 않는 수호자들이 있기 마련이야.”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셋이 광장 한가운데 이르렀을 때, 정적을 깨고 돌과 돌이 부딪히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주변에 서 있던 석상들의 눈에서 붉은 불꽃이 번뜩이더니, 거대한 몸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젠장, 역시 환영 인사는 없었군!” 세준이 망치를 고쳐 잡으며 달려드는 석상병을 향해 뛰어들었다. 콰앙! 묵직한 망치가 석상병의 어깨를 강타하자, 돌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석상병은 미동도 없이 다음 공격을 준비했다.

    “강우 씨! 이 석상들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 이건 단순한 장식이 아니에요! 에너지 통로를 의미하는 겁니다!” 지혜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녀의 손에서 작은 마력탄이 튀어나가 석상병의 옆구리를 스쳤지만, 돌에 흡수되는 듯 효과가 미미했다.

    강우는 검을 뽑아들고 석상병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거대한 돌팔이 그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자, 주변의 기둥이 흔들렸다. 그는 지혜의 말을 곱씹었다. ‘에너지 통로.’ 고대 마법에 능했던 그림자 제국이라면, 마력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골렘을 만들었을 것이다. 약점은 분명 어딘가에 있을 터.

    강우의 눈은 석상병의 몸통을 훑었다. 복잡하게 얽힌 문양들 속에서, 유독 어둠을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색 문양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마치 회로의 중심처럼 석상의 심장부에 위치해 있었다.

    “세준! 저 석상의 왼쪽 가슴 문양을 노려!” 강우가 소리쳤다. “약점은 저기야!”

    세준은 강우의 말을 듣자마자 몸을 돌려 돌진해오는 또 다른 석상병의 공격을 회피했다. 그리고는 마치 맹수처럼 달려들어 망치를 휘둘렀다. 쩌저적! 망치가 석상병의 가슴에 박히자, 검은색 문양이 푸른빛을 발하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석상병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더니 거대한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좋아! 다들 같은 곳을 노려!” 강우가 외쳤다.

    셋은 힘을 합쳐 나머지 석상병들을 처리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세준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번졌다. “휴, 제법 강하잖아. 하마터면 망치에 금 갈 뻔했네.”

    “고대 제국의 수호자들이었으니 당연하겠죠.” 지혜가 바닥에 부서진 석상병의 파편을 살펴보며 말했다. “이곳은 평범한 유적이 아니에요. 제국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겁니다.”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폐허가 된 제단을 지나 광장 끝에 위치한 거대한 아치형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를 따라 이어진 좁은 복도는 마치 미궁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벽에는 기괴한 생명체들이나 알 수 없는 우주를 묘사한 듯한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는데, 랜턴 빛이 닿자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복도의 끝에는 원형의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은 도서관처럼 보였다. 수많은 석판과 두루마리들이 낡은 선반 위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놓여 있었다.

    “이런… 이곳이 지혜의 전당이로군요.” 지혜가 경외심 가득한 눈으로 선반을 바라봤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한 석판을 집어 들었다. 석판에는 그림자 제국의 문자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해독할 수 있겠어?” 강우가 물었다.

    “네,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어쩌면 이곳에서 그림자 제국의 멸망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지혜는 곧바로 석판 해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강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도서관은 단순한 지식의 보고가 아닌 듯했다. 곳곳에 알 수 없는 기계 장치들과 신비로운 문양들이 새겨진 수정들이 박혀 있었다. 마치 고대 마법과 과학이 뒤섞인 연구실 같았다.

    몇 시간 후, 지혜의 얼굴에는 충격과 경악이 뒤섞인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해독하던 석판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강우 씨… 세준 씨… 이곳은… 이곳은 그림자 제국의 무덤이자, 그들의 오만이 묻힌 곳입니다.” 지혜의 목소리는 떨렸다.

    “무슨 소리야? 뭘 알아낸 건데?” 세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림자 제국은… 영원한 생명을 추구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법과 고대 지식을 총동원해서 ‘영원한 영혼’을 만들려고 했어요. 죽음을 초월하고, 신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지혜의 눈빛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신이라니? 불가능하잖아.” 강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불가능에 도전한 거죠. 이 석판에 따르면, 그들은 고대 우주의 근원 에너지를 끌어모으려 했어요. 수많은 존재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그것을 한데 모아 순수한 영혼의 형태로 가공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이 지하 도시는 그들의 거대한 실험실이자, 제물이 바쳐지던 제단이었던 거예요.”

    “그럼… 결국 성공했나?” 세준의 목소리에 섬뜩함이 스쳤다.

    “아니요… 그들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나 완벽하게 실패했죠. ‘영원한 영혼’은 육체를 초월한 존재가 되기는커녕,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공허한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생명력과 영혼을 갈망하는 끝없는 구렁텅이… 제국의 모든 존재가 그 공허에 흡수되어 사라졌다고 해요. 이 도서관에 남아있는 기록은 마지막 황제가 남긴 경고문이었습니다. ‘탐욕은 끝없는 어둠을 낳고, 오만함은 스스로를 집어삼키리라. 우리가 만든 것은 생명이 아닌, 끝없는 허무의 심연이다. 이 심연을 봉인하고, 누구도 다시는 탐하지 못하게 하라.’”

    강우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림자 제국의 갑작스러운 멸망이 바로 자신들이 만든 공허 때문이었다니. 이곳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인류가 범해서는 안 될 금기를 범한 대가로 만들어진 거대한 봉인처였던 것이다.

    “그럼 그 ‘심연’이라는 게 아직도 이 안에 있다는 거야?” 세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네… 마지막 기록에 따르면, 제국의 현자들이 최후의 힘을 모아 그것을 봉인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지하 도시의 가장 깊은 곳, 제국의 심장부에.” 지혜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찾던 비밀이 이거였어요. 그리고 이 비밀은… 절대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도서관 중앙에 있던, 다른 통로보다 훨씬 크고 위압적인 문으로 향했다. 그 문은 마치 존재 자체로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표면에는 섬뜩한 경고 문자들이 핏빛으로 새겨져 있었다.

    **’심연으로 가는 문.’**

    강우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었다. 미지의 보물을 찾던 모험은 인류의 가장 어두운 오만을 마주하는 여정으로 변모해 있었다. 이 문을 열면, 그림자 제국을 집어삼킨 공허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어떻게 할 거지?” 세준이 묵직하게 물었다. 그의 망치가 저절로 꽉 쥐어졌다.

    강우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우리는 이 유적의 마지막 탐험가이자, 마지막 파수꾼이 되어야 해. 저 문 뒤에 무엇이 있든, 그것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지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공포 대신 비장함이 떠올랐다. “네, 강우 씨. 우리가 막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유적에 오게 된 진짜 이유일지도 몰라요.”

    강우는 천천히 검은 문으로 다가갔다. 그의 손이 차갑고 단단한 문에 닿았다. 문은 마치 그 뒤에 봉인된 존재의 차가운 기운을 전달하는 듯했다. 그들은 더 이상 보물을 쫓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류의 오만이 빚어낸 재앙을 봉인할 운명을 짊어진 자들이었다.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빛도, 소리도 아닌,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섬뜩한 침묵과 차가운 공허함이었다. 그 너머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만이 존재했다.

    “가자.” 강우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셋은 어둠 속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그림자 제국이 남긴 가장 위험한 유산, 영원한 공허의 심연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고대 제국의 오만을 마주하고, 인류의 미래를 위한 마지막 싸움을 시작해야 했다.

  • 사이버펑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진은 눅눅한 철골 더미 아래에서 눈을 떴다. 삐걱이는 구형 침낭이 얇은 막처럼 몸을 감싸고 있었지만, 스며드는 냉기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콘크리트 잔해 틈새로 비집고 들어온 희미한 광선이 먼지 낀 공기를 가르며 춤을 추고 있었다. 창문 없는 도시의 새벽은 늘 이런 식이었다. 인공적인 광원만이 존재를 증명하는, 영원히 해가 뜨지 않는 밤의 연속.

    “젠장…”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입 안은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다. 어제 저녁에 마지막 남은 정화 필터로 겨우 한 모금 마신 물이 고작이었다. 허리춤에 찬 낡은 장비 벨트에서 작은 금속 용기를 꺼냈다. 잔량 표시등은 깜빡이는 붉은빛으로 조롱하듯 그의 절박함을 알리고 있었다. 전력도, 식수도 바닥이었다. 이대로는 하루도 버티기 힘들다.

    진은 몸을 일으켰다.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낡고 해진 방호복은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그 틈으로 냉기가 파고들었다. 고철과 폐허의 냄새, 그리고 오염된 비가 남긴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그의 은신처는 무너진 메가코프 빌딩의 지하 주차장 한 귀퉁이였다. 수십 년 전, 이 빌딩이 아직 ‘살아있는’ 존재였을 때, 아마 최신형 플라잉 카들이 질서 정연하게 주차되어 있었겠지. 지금은 녹슨 덩어리들과 깨진 홀로그램 간판 조각들만이 뒹굴고 있었다.

    그의 눈은 이미 익숙한 풍경을 스캔했다. 망가진 감시 카메라의 적외선 렌즈를 분해해 만든 조악한 센서가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약한 전류가 흐르는 낡은 배선이 진동했지만, 아직 경고음은 없었다. 외부 침입자는 없었다는 뜻. 그래도 방심은 금물이었다. 이 회색 지대에서는 모든 것이 적이었다. 보이지 않는 독성 물질부터, 굶주린 다른 생존자들, 그리고 가장 위험한 건… 관리국 드론들이었다.

    배낭을 챙겼다. 내용물은 단출했다. 녹슨 멀티툴, 몇 개의 빈 전력 셀, 닳아빠진 필터 없는 마스크, 그리고 가장 귀한 것 – 먼지투성이의 에너지 바 두 개. 이것들이 진이 가진 전부였다.

    “오늘도 죽지 말아야지.”

    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습관적인 다짐이었다. 살아남는다는 건 이제 고통스러운 의무에 가까웠다.

    은신처의 입구를 가리고 있던 삐걱이는 철판을 조심스럽게 밀어냈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새벽이라기보다는 영원한 황혼에 가까운 풍경. 회색 먼지가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었고, 저 멀리, 한때 하늘을 찔렀던 초고층 빌딩들은 앙상한 뼈대만을 드러낸 채 거대한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 빌딩들의 가장 높은 곳에서, 간헐적으로 붉은 경고등이 깜빡였다. ‘접근 금지. 오염 구역.’ 진에게는 그저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젠장, 저번 주에 저쪽 구역에서 잡았어야 했는데…”

    그는 낡은 홀로맵을 꺼냈다. 전력이 불안정하게 공급되는 화면에는 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파란색 점들이 깜빡였다. 버려진 보급소, 혹은 아직 전력이 남아있을지 모르는 폐쇄된 연구 시설. 하지만 대부분은 이미 다른 생존자들에 의해 털렸거나, 관리국 드론들의 순찰 구역이었다.

    진의 시선이 한 곳에 멈췄다. 지도 외곽, ‘황무지’라고 표시된 구역의 한 지점. 오래 전, 대붕괴가 일어나기 전에는 거대한 데이터 센터가 있었던 곳이었다. 접근하기는 매우 위험했지만, 그만큼 아직 온전한 전력 셀이나 식수 정화 장치를 찾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래, 거기로 가보자.”

    심장이 조용히, 하지만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익숙한 감각이었다. 이곳에서 희망은 가장 위험한 마약과도 같았다. 잠시 행복하게 만들지만, 결국 더 큰 고통으로 몰아넣는.

    그는 폐허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의 깨진 유리 조각과 금속 파편들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멀리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기계음이 낮게 울렸다. 어쩌면 관리국 드론의 순찰 소리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이 황폐한 도시 어딘가에서 아직 가동 중인 낡은 생산 시설의 소리일 수도 있고.

    진은 낡은 방호복의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마스크를 조절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금속 필터를 거친 공기는 여전히 불쾌했지만, 독성 먼지를 완전히 거르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그의 눈동자는 굳게 다져진 채, 주변의 모든 움직임을 탐색하고 있었다. 벽의 균열, 떨어진 간판, 그림자 속의 미세한 흔들림까지.

    한때 번화했던 상업 지구의 잔해 속을 헤치고 나갔다. 찢어진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끔찍한 소리를 냈다. 부서진 쇼윈도 안에는 녹슨 마네킹들이 기괴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들의 눈은 진을, 이 모든 것의 마지막 증인 중 한 명을 텅 비게 응시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진은 걸음을 멈췄다.
    코너 너머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그것은 단순히 전력 부족으로 깜빡이는 낡은 네온사인 조각이 아니었다.
    규칙적이고, 강렬했다.
    경고등.
    그는 즉시 몸을 낮춰 거대한 쓰레기 더미 뒤로 숨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관리국 드론이었다. 그것도 일반 순찰용이 아닌, 무장 드론.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묵직한 공중 순찰 드론 한 대가 코너를 돌아 나타났다.
    세 개의 빨간 감시 렌즈가 사방을 훑고 있었다.
    진은 숨을 죽였다.

    너무 가까웠다.

    이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었다. 이것은 매 순간, 죽음과의 숨바꼭질이었다.

  • 마법소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이상한 이웃

    밤 11시, 유진은 책상에 엎드려 늘어져 있었다. 문제집 위로 널브러진 팔은 더 이상 연필을 쥘 힘조차 없는 듯했다. 시계 초침 소리만 유난히 크게 들리는 고요한 방이었다. 거실에서는 낡은 벽시계가 틱, 톡, 틱, 톡, 규칙적으로 시간을 갉아먹는 중이었다.

    “아, 진짜. 이놈의 미적분은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 거야.”

    나른한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창밖은 온통 회색빛 고층 건물들로 가득했다. 답답한 도심의 야경이 언제나처럼 유진의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대충 묶은 머리는 이미 산발이 된 지 오래였다. 손을 뻗어 한 모금 남은 차가운 녹차를 홀짝였다. 컵받침도 없이 놓인 머그컵이 좁은 책상 위에서 위태롭게 서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스르륵.
    컵이 아주 미세하게, 하지만 분명히 옆으로 움직였다.

    유진은 눈을 비볐다. “피곤했나? 왜 컵이 움직이는 것 같지?”

    환각이겠거니 했다. 하도 책을 들여다봤더니 눈이 이상해졌나 보다. 다시 컵을 제자리에 밀어 넣고 펜을 들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아무리 애를 써도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아까 컵이 스르륵 움직이던 감각만이 맴돌았다.

    결국 유진은 문제집을 덮어버렸다. 어차피 오늘은 글렀다. 내일 새벽 일찍 일어나서 마저 해야지. 그렇게 결심하고는 침대에 풀썩 몸을 던졌다. 푹신한 매트리스가 몸을 받아주었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당기고 눈을 감았다. 익숙한 도시의 소음과 낡은 아파트의 미세한 진동이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잠은 금방 찾아올 것 같았다.

    그리고, 또다시.

    철컥.

    누군가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화들짝 눈을 떴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구세요?”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거실에서는 벽시계가 여전히 틱, 톡, 틱, 톡, 심장을 조이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유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다시 한번, “누구세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유진은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잘못 들었나? 밤늦게 누가 장난을 쳤나?
    안전고리가 걸려 있으니 설마 누가 들어올 리는 없었다. 안심하며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한번 깨진 잠은 쉽사리 찾아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유진은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렸다. 어제 잠을 설친 탓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아침밥이고 뭐고 다 귀찮았다. 토스트 한 조각을 입에 물고 현관을 나섰다. 낡은 복도에는 희미한 형광등 불빛이 감돌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문을 등지고 서 있는데,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스으윽.

    복도 끝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유진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복도만이 길게 이어져 있을 뿐. 착각이겠지. 유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밤새 예민해진 신경이 아직 진정되지 않은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저녁, 집안 공기는 유난히 무겁고 축축했다. 으스스한 기운에 몸을 웅크리며 현관문을 닫았다. 그런데 현관문을 닫자마자, 잠겨있던 방문이 ‘쾅’하고 크게 열렸다.

    “헙!”

    유진은 너무 놀라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을 기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바람이 분 것도 아니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집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문이 닫히기 전까지는 분명 닫혀있었다. 유진은 천천히 방문에 다가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싸늘한 냉기가 후욱 끼쳐왔다. 마치 한겨울의 냉골 같은 찬 기운이었다.

    “뭐지? 보일러가 고장 났나?”

    유진은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침대에 놓아두었던 담요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제 밤에 내가 발로 찼나?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냉기가 가득한 방에서 벗어나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 불을 켜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부엌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유진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부엌으로 다가갔다. 설마 도둑? 하지만 현관문은 분명 잠겨 있었다. 부엌으로 들어선 유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흩어져 있는 머그컵 조각들이었다. 어제 밤에 녹차를 마셨던 그 컵이었다.

    “세상에…”

    유진은 넋을 잃고 조각들을 바라봤다. 이건 내가 떨어뜨린 게 아니었다. 분명히 식탁 한쪽에 잘 두었는데. 컵 조각 옆에는 물기가 흥건했다. 누가 컵을 떨어뜨리고 도망친 걸까? 아니, 도둑이 컵을 떨어뜨리고 도망갈 리가 없지.

    그때, 유진의 뒤에서 무언가가 스르륵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유진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식탁 위에 놓인 과일 바구니였다. 바구니에 담겨 있던 사과 하나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데구르르, 데구르르. 유진의 발끝에 닿았다.

    “꺄악!”

    작은 비명소리와 함께 유진은 뒷걸음질 쳤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더 이상 착각이 아니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집 안에 있었다.

    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아니면 엄마에게 전화할까?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무서움에 몸이 덜덜 떨렸다.

    그때, 거실에서 다시 쿵, 쿵, 쿵, 발소리가 들렸다. 분명 누군가 걸어 다니는 소리였다. 유진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숨을 참고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제는 거실을 지나 유진이 있는 부엌으로 향하고 있었다.

    유진은 재빨리 싱크대 아래 수납장 문을 열고 몸을 웅크렸다. 차가운 타일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발소리는 부엌 안으로 들어섰다.

    툭.

    유진이 숨어있는 수납장 바로 위, 싱크대 상판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유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는 더 이상 숨을 수도, 도망칠 수도 없었다. 차라리 정체를 알 수 있다면…

    그때, 수납장 문틈으로 스며드는 어둠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찾았다…」

    아주 낮고, 싸늘하고, 섬뜩한 속삭임이었다. 유진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붉고 작은 두 개의 점. 마치 살아있는 눈동자처럼 깜빡였다.
    그것은 유진이 숨어있는 수납장 문틈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유진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유진의 귓가에, 다시 그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드디어…」

  • 가상현실 게임 (VRMMO)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제3장: 녹슨 칼날의 맹세

    삭막한 바람이 불었다. 흙먼지 섞인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고대 도시의 폐허 위에 세워진 제국군의 감시탑, 그 망루 위에 걸린 제국군의 깃발이 검은 장막처럼 휘날렸다.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짙은 절망의 그림자였다. 진호는 낡은 가죽 갑옷 위에 두른 두꺼운 천을 단단히 여몄다. 손에 쥐인 녹슨 단검은 그의 심장박동과 함께 미미하게 떨렸다. 현실의 배고픔이 가상현실 속에서도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기분이었다. 아니, 이곳에서만큼은 달랐다. 적어도 이곳에서는, 우리는 스스로 싸울 수 있었다.

    “진호님, 순찰병이 사라졌어요. 예상보다 일찍입니다.”

    아라의 조용한 속삭임이 귓가를 스쳤다. 앳된 얼굴이지만 눈빛은 밤의 올빼미처럼 날카로웠다. 등에는 짧은 활과 화살통이 매달려 있었다. 그녀는 이 무너져가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희망과도 같았다.

    “함정인가?”

    노인장이 묵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흙빛 얼굴에 깊게 패인 주름은 수많은 전투와 고난의 흔적이었다. 그의 손에는 제국군 병사의 것을 뺏은 듯한, 묵직한 철퇴가 들려 있었다. 그가 지닌 경력만큼이나 묵직한 삶의 무게가 실린 무기였다.

    “아닙니다. 감시를 강화한 겁니다. 우리가 계속 주변을 맴돌았으니… 슬슬 낌새를 챘겠죠.”

    진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후방의 숲을 가리켰다.

    “아라, 후방을 맡아줘. 노인장님은 저와 함께 중앙 돌파입니다. 신호는 제가 보냅니다.”

    세 사람은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폐허가 된 마을의 낡은 벽돌담을 따라 그림자처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지나자, 거대한 곡물창고의 그림자가 육중하게 버티고 섰다. 썩은 곡식 냄새와 땀 냄새가 뒤섞인 역겨운 공기가 코를 찔렀다. 제국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수확한 곡식을 이곳에 쌓아두고 썩히고 있었다. 당장 내일 먹을 양식도 없는 이들이 수두룩한데도 말이다.

    그때였다. 으스스한 정적을 깨고, 등 뒤에서 철커덕거리는 금속음이 들렸다. 진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지만, 이미 늦었다.

    “거기 누구냐!”

    갑자기 켜진 횃불이 어둠을 가르고, 제국군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병사들의 갑옷은 밤하늘 아래서도 번들거렸고, 헬멧 아래의 눈은 살기등등했다. 잘 훈련된 그들의 움직임은 평범한 도적떼와는 차원이 달랐다.

    “젠장, 들켰군!”

    노인장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는 지체 없이 철퇴를 휘둘러 가장 가까이 다가온 병사의 머리를 강타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병사가 쓰러졌다. 그의 몸에서 경험치 메시지가 희미하게 번득였지만, 진호는 그런 것에 신경 쓸 틈도 없었다.

    “돌격!”

    진호는 외치며 단검을 뽑았다. 녹슨 칼날이 횃불 빛에 번뜩였다.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병사들의 대열 속으로 뛰어들었다. 훈련받은 병사들이었지만, 이들은 절박한 민초의 분노를 알지 못했다. 그들의 무기는 잘 벼려져 있었지만, 진호의 단검에는 삶을 향한 처절한 갈망이 담겨 있었다.

    단검은 제국군 병사들의 엉성한 갑옷 틈새를 찾아 정확히 파고들었다. 진호는 옆구리를 스치는 창날을 간신히 피하며, 적의 목덜미를 베었다.

    “크아악!”

    병사의 비명이 짧게 터져 나왔다. 곧이어 뒤에서 덮쳐오는 또 다른 병사의 팔을 쳐내고, 진호는 바닥에 구르며 그의 다리를 베었다. 민첩함이 곧 생존이었다. 그에게는 장대한 기술이나 화려한 마법이 없었다. 오직 본능과 경험, 그리고 분노만이 무기였다.

    그 순간, 숲 쪽에서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아라의 신호였다. 뒤이어 화살들이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와 병사들의 다리나 어깨에 박혔다. 병사들이 잠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노인장은 거구의 병사 하나를 발로 차 넘어뜨리고는 곡물창고 문으로 향했다.

    “진호! 폭탄을 설치해!”

    진호는 이미 가방에서 간이 폭탄을 꺼내 들었다. 이 게임 속에서 ‘폭탄’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는 것은, 다름 아닌 마법 재료를 조합하여 만든 불안정한 연소 장치였다. 작고 볼품없었지만, 그 위력만큼은 확실했다. 그는 빠르게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불꽃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모두 물러나!”

    진호의 외침과 동시에 아라가 쏘아 올린 불화살이 창고의 마른 지붕에 정확히 박혔다. 낡은 목재와 먼지가 뒤섞인 곳에 불길이 순식간에 번지기 시작했다. 제국 병사들은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 당황하여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일부는 불을 끄려 허둥댔고, 일부는 여전히 진호와 노인장을 막으려 했다.

    콰아앙!

    귀청을 찢는 폭발음이 밤하늘을 갈랐다. 곡물창고의 낡은 목재 가루와 썩은 곡식들이 불길과 함께 솟구쳐 올랐다. 진동이 땅을 울렸다. 마치 썩어가는 제국의 심장이 터져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화염은 순식간에 거대한 곡물창고를 집어삼키며 붉은 혀를 낼름거렸다.

    “성공이다…!”

    노인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땀과 흙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눈빛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뜨거웠다.

    진호는 불타는 창고를 바라보았다. 저 안에는 백성들의 피땀이 섞인 곡식이 썩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지는 것이다. 허무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시원한 해방감이 밀려들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그는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지고, 그 재 위에서 새로운 세상이 피어날 겁니다.”

    아라가 달려와 진호의 옆에 섰다. 그녀의 눈에도 결의가 가득했다.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그녀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네, 진호님.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세 사람은 불타는 곡물창고를 뒤로하고,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졌다. 그들의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어깨에는 무거운 짐이 놓여 있었다. 썩어가는 제국의 심장에 박힐, 또 다른 칼날을 향한 걸음이었다. 어둠 속에서 녹슨 단검이 다시 번뜩이는 듯했다. 아직 갈 길이 멀었지만, 적어도 오늘 밤, 그들은 작은 승리를 쟁취했다. 그리고 그 승리는, 먼 훗날 거대한 불길이 될 작은 불씨가 될 터였다.

  • 다크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지후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삐걱거리는 현관문을 열었다. 자정 가까운 시각, 낡은 아파트 복도에는 형광등 하나가 깜빡이며 희미한 빛을 흘리고 있었다. 도시의 소음은 20층 높이까지도 쉬이 가라앉지 않았지만, 이 문만 닫으면 그 모든 것이 차단될 것이었다. 지후는 익숙하게 손을 뻗어 벽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소리와 함께 거실에 불이 들어왔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고독.

    거실 한복판에 놓인 작은 유리 테이블 위, 며칠 전 사다 둔 빵 봉지가 묘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지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어제 저녁에 똑바로 세워뒀던 것 같은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봉지를 바로 세웠다.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아니면 고양이라도 키우나? 혼자 피식 웃었다. 고양이는커녕 식물 하나도 없는 집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였다.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거실로 향하는데, 문득 삐걱이는 마루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 그 위를 걷는 듯한 소리였다. 지후는 걸음을 멈췄다. “누구… 없어요?” 허공에 던진 목소리는 메아리도 없이 집어삼켜졌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었다. 혼자였다.

    그는 다시 걸었다. 침실 문 앞을 지나치려는데, 방문이 스르륵,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분명 닫아두었을 터였다. 아침에 나갈 때 닫았던 기억이 선명했다.

    지후는 마른침을 삼켰다. 바람? 환기 때문에 창문을 살짝 열어뒀으니, 그럴 수도 있지. 애써 태연한 척 문을 다시 닫았다. ‘쾅’ 하고 닫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잠자리에 들 시간이었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려 했지만, 시선이 자꾸 침실 구석의 옷장으로 향했다. 닫힌 옷장 문틈으로 어둠이 새어 나왔다.

    그때였다.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둔 물컵이 쿵,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마치 누군가 그 컵을 살짝 건드린 듯한 소리였다. 물방울 하나가 컵의 표면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지후는 몸을 굳혔다.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졌다. 이 모든 게 착각이라고? 피곤해서? 예민해서?

    그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젠장, 미쳤나 봐.”

    하지만 그가 중얼거린 순간, 옷장 문이 스르륵, 아까보다 훨씬 더 크게 열렸다. 틈새가 벌어지며 그 안의 어둠이 더욱 깊어진다.

    지후는 벌떡 일어났다. 손에 땀이 흥건했다. “누구야? 누구 있어?!”

    대답은 없었다. 다만, 옷장 안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삐걱이는 나무 냄새, 먼지 냄새, 그리고 아주 희미한, 싸늘한 냉기.

    그때, 탁.

    침대 헤드 위 벽에 걸려 있던 액자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얇은 유리가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침묵을 찢었다. 액자 속 사진은, 활짝 웃고 있는 어린 지후의 모습이었다. 그 사진이 깨진 유리 파편들 속에 파묻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지후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시선은 여전히 옷장과 깨진 액자 사이를 오갔다.

    몸을 돌려 침실 문으로 향하려던 순간,

    ‘쿵!’

    거실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마치 냉장고라도 넘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바닥이 울리고 벽이 진동했다.

    지후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용수철처럼 침실을 뛰쳐나왔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 중앙,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을 초월했다.

    거실 한복판에 있어야 할 소파가 벽에 바싹 붙어 거꾸로 뒤집혀 있었다. 테이블은 산산조각 나 있었고, TV는 액정이 박살 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모든 것이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간 듯 엉망진창이었다.

    그리고 그 잔해 한가운데,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느껴졌다. 차가운 공기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누군가 아주 가까이 다가와 숨을 쉬는 듯한 섬뜩한 감각.

    지후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발악했다.

    “나가… 나가라고!”

    그는 떨리는 손으로 현관문을 향해 더듬거렸다. 손잡이를 잡으려던 순간,

    ‘쾅!’

    현관문이 바깥에서 안쪽으로, 마치 거대한 힘에 밀쳐진 듯 활짝 열렸다. 칠흑 같은 바깥 복도의 어둠이 거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리고 그 어둠의 한가운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후는 확신했다.

    *누군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집 안에, 그리고 문 밖에 서 있었다.

    그의 발목을 무언가가 차갑게 휘감는 듯한 섬뜩한 감각과 동시에, 현관문이 맹렬한 속도로 다시 닫히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 쾅!’

    지후는 현관에 갇혔다.

  • 메카 액션 상세한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

    ## 애니메이션 대본 & 스토리보드: 심연의 메아리 (Echoes of the Abyss)

    ### 캐릭터 소개

    * **김민준 (Kim Min-jun):** 40대 후반. 탐사선 ‘아라크네’의 함장. 오랜 항해로 단련된 노련함과 냉철함을 지녔지만, 미지의 존재에 대한 경외심과 탐구심이 내면에 깊이 자리한다. 때로는 비상식적인 결정을 내릴 정도로 직감을 중시한다.
    * **이지연 (Lee Ji-yeon):** 30대 초반. 일등 항해사 겸 조종사. 뛰어난 상황 판단력과 침착함으로 함장을 보좌한다. 기계 조작에 탁월하며, 우주선을 자신의 몸처럼 다룬다.
    * **박서준 (Park Seo-joon):** 20대 중반. 기술 총괄 담당. 천재적인 엔지니어링 감각과 문제 해결 능력을 지녔으나, 때때로 과도한 호기심과 엉뚱함으로 주변을 놀라게 한다. 우주선 내 모든 시스템을 꿰뚫고 있으며, 괴팍한 천재의 전형.

    ### 프롤로그: 침묵의 심연

    **[장면 전환]**

    **[화면]**
    광활하고 검푸른 우주의 정적. 수많은 별들이 차가운 보석처럼 박혀 무한한 심연을 비추고 있다. 은하수는 은은한 빛의 강물처럼 흐르고, 그 너머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 펼쳐져 있다.
    스크린 중앙으로 인류의 최첨단 심우주 탐사선, ‘아라크네’가 느릿하게 비행하는 모습이 잡힌다. 거대한 거미를 연상시키는 유선형의 흰색과 은색 외벽은 탐사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최소한의 무장과 최대한의 센서 어레이로 장식되어 있다. 외벽에는 오랜 항해의 흔적인 미세한 긁힘 자국들이 희미하게 보이며, 그 속에는 무수한 탐사의 역사가 담겨 있다.
    카메라는 서서히 탐사선의 외부에서 내부로, 메인 함교를 향해 진입한다.

    **[음향 효과]**
    깊고 저음의 우주선 엔진음. 미세한 기계음들이 배경에 깔린다. 정적 속에서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마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인 시스템의 운영음.

    **[화면]**
    ‘아라크네’ 함교 내부. 푸른빛과 주황빛 홀로그램 패널들이 반짝이며, 다양한 탐사 데이터와 시스템 정보들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된다. 함교는 차분하고 정돈되어 있지만, 오랜 항해로 인한 약간의 피로감이 공기 중에 스며들어 있는 듯하다.
    조종석에 앉아 있던 일등 항해사 이지연이 길게 하품하며 어깨를 뒤로 젖혀 스트레칭한다. 그녀의 눈은 피로하지만, 언제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예리함이 살아있다. 그녀는 능숙하게 조작 패드를 몇 번 터치하더니, 따뜻한 커피 한 잔을 홀로그램 테이블 위로 불러낸다.
    함장석에 앉아 있던 김민준이 커피잔을 든 채 메인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다. 그의 표정은 담담하다 못해 지루해 보인다. 그는 한숨을 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함교 한쪽 구석, 복잡한 케이블 뭉치와 장비들 사이에 파묻혀 잠들어 있던 박서준이 시끄러운 코골이 소리를 내다가, 이지연의 기지개 소리에 맞춰 흠칫 깨어난다. 그의 머리는 헝클어져 있고, 안경은 코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다. 그는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이지연:** (나른하게, 그러나 또렷하게) 함장님, 이제 슬슬 지루함으로 인한 우주 멀미가 올 때입니다. 15광년 떨어진 미지의 성간 먼지 구역을 탐사한 지 6개월째. 변수라고는 제 커피 취향이 에스프레소에서 아메리카노로 바뀐 것밖에 없네요. 이 속도라면 앞으로 2년은 더 이 검은 공간만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민준:**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나지막이) 불평은 미덕이 아니지, 이 항해사. 우리는 인류의 미개척지를 탐사하고 있어. 언제든 우주가 예상치 못한 선물을 안겨줄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그 선물이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모르지.

    **박서준:** (기지개 켜며 비몽사몽한 목소리로) 선물? 설마 저번에 엔진에 들러붙어서 광년 단위로 번식하려던 그 성간 바퀴벌레 같은 건 아니겠죠? 아, 진짜 그땐 식겁했습니다, 함장님. 차라리 엔진이 고장 나는 게 나았을 거예요. 비주얼이… 으으.

    **이지연:** (피식 웃음,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박서준, 깨어났으면 빨리 시스템 상태 점검이나 해. 저번에 네가 설치한 임시 패치 때문에 보조 센서가 맛이 갔잖아. 데이터가 계속 튀어.

    **박서준:** (허둥지둥 안경을 바로 쓰고, 억울한 표정으로) 아, 아닙니다! 그건 제 과실이 아니라… 미지의 방사선이 예상치 못하게… 읍읍…! (황급히 자리로 돌아가 장비들을 만지작거린다)

    **[화면]**
    그때, 함교 중앙의 메인 홀로그램 패널이 갑자기 붉은 경고음과 함께 깜빡이기 시작한다. 패널의 푸른빛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바뀌며, 화면에는 알 수 없는 데이터들이 빠르게 스크롤된다. 승무원들의 얼굴에 순간적인 긴장감이 스친다.

    **[음향 효과]**
    날카로운 전자 경고음: 삐비빅! 삐비빅!
    모니터에서 튀어나오는 듯한, 불규칙적인 전자 노이즈음.

    **김민준:** (순간적으로 표정이 굳어지며, 침착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로) 이지연, 무슨 일이지? 데이터는?

    **이지연:** (눈을 가늘게 뜨고 패널을 확인하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함장님… 믿기 힘든데요. 광역 스캔 센서가 뭔가 포착했습니다.

    **박서준:** (순식간에 잠이 깨서 패널 앞으로 다가서며, 눈을 크게 뜨고) 뭐라고요? 이 허허벌판,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던 공간에서 뭘 포착했다는 겁니까? 유성우? 아니면 궤도를 이탈한 인공위성 잔해? 제발 지겹도록 보던 그거 아니라고 해주십시오!

    **이지연:** (진지하게, 목소리에 미묘한 떨림이 섞인다) 둘 다 아닙니다. 기존 데이터베이스에 일치하는 정보가 없습니다. 특정 대역의 강력한 에너지 방출원이… 감지됩니다. 좌표는 여기… (패널에 새로운 좌표가 점멸한다)

    **[화면]**
    홀로그램 패널에 희미한 주황색 점 하나가 나타나고, 그 주변으로 알 수 없는 파동 그래프가 춤추듯 불규칙하게 펼쳐진다. 그래프의 패턴은 일반적인 자연 현상과는 확연히 다르다.
    박서준이 재빨리 자신의 개인 패드를 꺼내 뭔가를 맹렬히 타이핑한다. 그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춤추듯 움직인다.

    **박서준:** (흥분한 목소리로, 데이터에 몰입하며) 에너지 스펙트럼이… 비정상적입니다. 일반적인 별의 에너지도, 블랙홀 주변의 복사 에너지도 아니에요. 기존에 알려진 어떤 형태의 에너지 방출과도 다릅니다. 이 특정 패턴은… 마치…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인공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김민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난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탐구심이 그의 피를 끓게 만든다.) ‘의도적’이라고? 이 심우주, 우리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 외딴곳에 말인가? 이지연, 항로를 수정해. 감지된 에너지원으로. 속도는 최대. 우리가 여태껏 찾던 ‘선물’일지도 모르지.

    **이지연:** 예, 함장님! (능숙하고 빠르게 조종간을 조작한다. 그녀의 손놀림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모든 관성 제어 장치 가동. 초고속 항행 모드로 전환합니다!

    **[음향 효과]**
    우주선 엔진음이 더욱 커지며, 우주선을 뒤흔드는 듯한 진동음이 함교를 가득 채운다. 가속기로 인해 발생하는 웅장한 기계음.

    **[화면]**
    ‘아라크네’ 탐사선이 방향을 틀어 미지의 에너지원을 향해 돌진한다.
    별들이 뒤로 빠르게 점멸하며 스쳐 지나가는 시각 효과. 마치 시간이 가속하는 듯한 역동적인 연출.

    **[장면 전환]**

    **[화면]**
    몇 시간 후.
    ‘아라크네’ 함교 내부. 모든 승무원의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하다. 함교 전체의 분위기는 침묵과 기대,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이지연은 계속해서 조종간을 잡고 있고, 그녀의 시선은 메인 패널과 전면 스크린을 번갈아 오간다. 김민준은 팔짱을 낀 채 메인 패널을 노려보고 있다. 그의 턱선은 날카롭게 굳어 있고, 눈은 어떤 것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예리하게 빛난다.
    박서준은 온갖 장비를 연결하고 데이터를 분석하느라 여념이 없다. 그의 주변에는 홀로그램 그래프들과 알 수 없는 기호들이 잔뜩 떠다니며, 그의 손은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린다.

    **박서준:** (흥분한 목소리로,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에너지 출력은 계속 증가하고 있어요. 중력 파동도 감지됩니다. 아주 미약하지만… 마치 공간을 뒤트는 듯한… 일반적인 천체에서는 볼 수 없는 중력 패턴입니다!

    **김민준:** 비상 착륙 준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모든 시스템을 수동으로 전환한다. 접근 반경 100km에서 정지한다.

    **이지연:** 예, 함장님! 충격 흡수 장치 활성화. 실드 전면 전개. 모든 비상 탈출 모듈 대기 상태로 전환합니다.

    **[화면]**
    메인 패널과 전면 스크린에 드디어 정체불명의 물체가 희미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작은 점에 불과했지만, ‘아라크네’가 접근할수록 서서히 거대한 윤곽을 드러낸다.
    그것은 우주의 깊은 어둠 속에서 홀로 존재하는 거대한 검은색 정육면체였다. 그 크기는 마치 작은 행성과 같았다. 매끄럽고 완벽한 표면은 주변의 별빛을 모조리 흡수하는 듯, 심연보다 더 깊은 어둠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떤 행성이나 소행성, 심지어 일반적인 인공 구조물과도 달랐다. 너무나 완벽하고 이질적인 형태에 승무원들은 숨을 멈춘다.

    **[음향 효과]**
    깊은 저음의 진동음이 함교를 서서히 울린다. 기계음 사이로 알 수 없는 미세한 노이즈와 함께, 공간 자체가 비틀리는 듯한 불쾌한 소리가 섞여 들어온다.

    **박서준:** (경악한 목소리로, 거의 비명에 가깝게) 말도 안 돼… 저건… 저건 누가 만들었습니까? 자연적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형태입니다!

    **김민준:** (굳어진 표정으로, 물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지연, 최대 확대. 모든 센서를 저 물체에 집중시켜.

    **[화면]**
    화면이 줌인되면서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의 디테일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표면은 완벽하게 매끄러우며, 어떠한 이음새나 접합부, 질감조차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에서 정교하게 깎아낸 듯, 완벽한 수학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 완벽한 어둠 속에서, 아주 미세한 푸른빛의 선들이 규칙적인 패턴으로 표면을 따라 흐르는 것이 포착된다. 마치 살아있는 혈관처럼, 혹은 복잡한 회로도처럼 보였다. 그 빛은 정육면체 내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발산되는 듯하다.

    **이지연:** (숨을 들이쉬며, 경외심이 섞인 목소리) 표면 온도는 절대 영도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되고 있어요. 스캔 센서가 제대로 측정하지 못할 정도의 고밀도 에너지입니다.

    **박서준:** (데이터를 확인하며, 식은땀을 흘린다) 함장님, 이 물체… 내부 밀도가 너무 높아요. 우리가 아는 어떤 물질로도 저런 밀도는 불가능합니다. 마치… 블랙홀의 특이점을 압축해 놓은 것 같아요. 아니,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김민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 물체를 응시한다. 그의 눈빛에는 경악과 탐욕, 그리고 알 수 없는 흥분이 뒤섞여 있다.) 접촉 거리를 유지하고, 모든 스캔을 재개해. 우리가 가진 모든 프로토콜, 모든 탐사 방법을 사용한다. 저게 뭔지… 저게 도대체 뭘 하는 물건인지 알아내야 해. 인류의 존재 의의를 바꿀지도 모르는 발견이야.

    **[화면]**
    ‘아라크네’ 탐사선이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 주위를 천천히 선회하기 시작한다. 마치 작은 곤충이 거대한 바위를 탐색하는 듯한 모습이다.
    탐사선에서 발사된 다양한 스캔 광선(붉은색, 초록색, 보라색)이 정육면체의 표면을 훑는다. 하지만 스캔 광선은 마치 검은 표면에 흡수되는 것처럼, 아무런 반사도 일으키지 않고 사라져 버린다.

    **[음향 효과]**
    스캔 광선이 흡수될 때 발생하는 둔탁하고 먹먹한 소리. 이명 같은 고주파음이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지연:** (당황한 목소리) 스캔 데이터가… 반환되지 않습니다! 모든 스캔 파장이 표면에 도달하자마자 소멸해요! 어떤 파장도 저 표면을 통과하지 못합니다!

    **박서준:** (절망적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얼굴이 창백해진다) 말도 안 돼요! 어떤 전자기파든, 중력파든… 이 정도 규모의 에너지가 있다면 최소한의 반사는 있어야 합니다! 이건 마치… 모든 정보를 먹어치우는 것 같아요! 모든 인식과 탐지를 거부하는… 그런 존재입니다!

    **김민준:** (눈을 가늘게 뜨고 정육면체를 주시한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것이 느껴진다.) 모든 정보를 먹어치운다… 우리를 관찰하는 건가? 아니면…

    **[화면]**
    그 순간,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 표면을 흐르던 푸른빛의 선들이 갑자기 더욱 밝아지기 시작한다. 미세했던 빛은 순식간에 강렬한 푸른색으로 변하며, 규칙적이던 패턴이 요동치고, 선들이 마치 살아있는 신경망처럼 복잡하게 얽히며 전체 표면을 뒤덮는다.
    점점 더 강렬해지는 푸른빛이 거대한 빛의 파동을 형성하며 ‘아라크네’ 탐사선을 비춘다.

    **[음향 효과]**
    강렬한 푸른빛과 함께 점점 커지는 고주파음. 유리잔이 깨질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함교를 가득 채운다.
    함교 내부의 모든 전자기기들이 지직거리는 소리, 스파크가 튀는 소리.

    **이지연:** (경악하며, 조종간을 부여잡는다) 함장님! 실드 강도가 급격히 약해지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에너지 간섭입니다! 우주선 전체에 부담이…!

    **박서준:** (비명을 지르듯, 패널을 연신 두드리지만 아무 반응이 없다) 함장님! 메인 컴퓨터가… 먹통입니다! 보조 시스템도… 모든 장비의 제어권이… 상실되고 있어요! 외부로부터의 강력한… 침입입니다!

    **[화면]**
    함교 내부의 모든 홀로그램 패널들이 지직거리며 꺼지기 시작한다. 빛을 잃은 패널들은 텅 빈 어둠으로 변한다.
    내부 조명도 깜빡이다가 완전히 암전된다.
    오직 비상등의 붉은빛만이 위태롭게 깜빡이며, 승무원들의 공포에 질린 얼굴을 섬뜩하게 비춘다.

    **[음향 효과]**
    모든 기계음이 멈추고, 고주파음만 더욱 날카롭고 강렬하게 함교를 채운다.
    ‘아라크네’ 탐사선 외부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크기의 금속 파열음, 그리고 알 수 없는 유기적인 소리.

    **김민준:** (이를 악물고, 비상 제어 패널을 두드리지만 반응이 없다) 박서준! 수동 제어는! 하다못해 비상 동력으로 전환해!

    **박서준:** (절규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공포와 절망이 뒤섞여 있다) 안 됩니다! 모든 인터페이스가 마비됐어요! 함장님, 우리 우주선이… 외부의 무언가에 의해… 해킹당하고 있습니다! 아니… 점거당하고 있어요! 물리적으로 변형되고 있어요!

    **[화면]**
    검은 정육면체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아라크네’ 탐사선 전체를 휘감는다. 탐사선이 푸른빛 에너지에 완전히 잠식되는 듯한 모습.
    탐사선의 외벽에 푸른빛의 에너지 문양이 마치 낙인처럼 새겨지는 것이 보인다. 단순한 빛이 아니라, 살아있는 패턴처럼 꿈틀거린다.
    그리고 탐사선 ‘아라크네’의 기계음이 급격하게 변한다.
    친숙하던 엔진음과 기계음 대신,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체의 목소리 같은 소리가 들려온다. 탐사선 전체가 푸른빛으로 빛나기 시작하며, 그 빛은 마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깜빡인다.

    **[음향 효과]**
    ‘아라크네’의 기계음이 변조되어 깊은 저음의 으르렁거림으로 변한다. 기계적인 소리와 유기적인 소리가 뒤섞인다.
    낮게 깔리는 비장하고 신비로운 배경 음악이 고조된다. 심우주의 고독함과 미지의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담은 선율.

    **이지연:** (패닉에 빠져, 눈을 크게 뜨고 허공을 응시한다) 함장님… 우주선이… 우주선이 이상해지고 있어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김민준:** (주먹을 꽉 쥐고 창밖의 정육면체를 응시한다. 그의 눈빛에는 경악과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경외심이 교차한다. 그리고 한 줄기 광기 어린 기대감마저 스친다.)
    (낮게 읊조리듯, 그의 목소리는 경외와 공포 사이를 오간다) …아라크네가… 우리를… 아니… 스스로를…

    **[화면]**
    김민준의 눈에 비치는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 그 완벽한 형태는 변함없이 심연 속에 존재한다.
    그리고 푸른빛으로 완전히 뒤덮여 변형되기 시작하는 ‘아라크네’ 탐사선. 탐사선의 거미 같은 외형이 더욱 날카롭고 유기적인 형태로, 마치 거대한 기계 괴수처럼 변모하는 듯한 암시가 보인다. 탐사선이 마치 정육면체의 일부가 되려는 듯, 혹은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하려는 듯, 푸른 에너지를 뿜어낸다.
    화면은 서서히 멀어지며, 검은 정육면체와 그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빛나는 푸른빛의 ‘아라크네’를 비춘다.
    그것들은 마치 우주의 두 눈동자처럼 심연 속에서 차갑게, 그리고 강력하게 빛나고 있다. 모든 인류의 지식을 초월한 미지의 문명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음향 효과]**
    음악이 절정에 다다르며, 심우주의 침묵 속에 기이하고도 압도적인 존재감이 남는다.
    페이드 아웃.

    **[장면 종료]**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정수리 위로 내리쬐는 태양은 여전히 붉었다. 핵의 불꽃이 대지를 태운 후, 몇십 년이 지나도록 하늘은 본래의 푸른빛을 되찾지 못했다. 대신 피처럼 붉은 기운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모든 생존자의 피부를 건조하게 만들었다. 먼지 섞인 열풍이 폐허가 된 경기장을 휩쓸었다. 한때 환호와 열기로 가득했던 관중석은 이제 금이 가고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로 뒤덮여 있었고, 듬성듬성 자란 잡초들만이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그 황량한 원형 경기장 한가운데, 간이로 만들어진 흙먼지 나는 무대 위에서 두 사내가 마주 서 있었다.

    “드디어 세 번째 관문이군… ‘철벽’ 강진을 넘어서야 ‘대지’로 가는 길을 바라볼 수 있다니.”

    관중석 잔해에 기대어 앉아 있던 한 노인이 거칠게 기침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지친 피로와 함께, 한 줄기 희망을 갈구하는 듯한 빛이 어렸다. 모두의 시선은 무대 위 두 사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곳에 모인 수천 명의 생존자들, 황폐한 세상 속에서 삶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는 이들은 모두 ‘천하제일 무도대회’의 결과에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우승자에게는 전설로만 전해지던 비옥한 땅, ‘대지’의 소유권이 주어질 터였다.

    한쪽에는 거대한 덩치와 굳건한 자세로 뿌리 박고 서 있는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강진. 별호는 ‘철벽’. 온몸의 근육은 강철처럼 단단하게 뭉쳐 있었고, 그의 눈은 투박하지만 굳건한 의지로 번뜩였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은 투박한 대도(大刀)였으나, 그 위압감은 여느 명검 못지않았다. 강진은 느릿하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며, 대지로부터 올라오는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의 주변 공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어설픈 기술로는 이 강진의 벽을 넘을 수 없을 것이다!”

    강진의 목소리는 굵고 낮았다. 거친 숨소리가 섞여 있었지만, 그의 선포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한없이 왜소해 보이는 청년, 류건이 서 있었다. 류건은 허리춤에 찬 낡은 검을 굳게 잡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새벽 이슬처럼 맑았다. 강진의 압도적인 기세 앞에서도 류건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깊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차분한 집중력이 가득했다. 그의 몸은 거친 바위보다 유연하고,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같았다.

    “강진 대협의 철벽을 깨려면… 어설픈 기술로는 안 되겠지요. 하지만, 저는 제 검을 믿습니다.”

    류건은 나직이 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과 함께, 결코 꺾이지 않을 강철 같은 심지가 담겨 있었다.

    ‘정면 돌파는 무리다. 저 거대한 육체와 굳건한 내공은 웬만한 공격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을 터. ‘철벽’이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겠지. 내가 가진 유일한 강점은… 속도와 유연함.’

    류건의 뇌리에는 순식간에 수십 가지의 상황 분석과 대응책이 스쳐 지나갔다. 지난 두 차례의 혈전에서 그는 온몸의 기력을 소진할 뻔했다. 이 강진과의 대결이 마지막 고비가 될 것이라는 예감이 그의 심장을 짓눌렀다.

    먼저 움직인 것은 강진이었다. 거대한 몸집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류건을 향해 돌진했다. 대도가 허공을 가르며 우렁찬 바람 소리를 냈다.

    “받아라! 철혈 맹참(鐵血猛斬)!”

    강진의 첫 공격은 이름 그대로 피 냄새 나는 맹렬한 일격이었다. 대도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궤적은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류건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경기장의 바닥이 진동할 정도의 기운이 검날 끝에 응축되어 있었다.

    ‘피한다!’

    류건은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강물 위를 미끄러지는 한 잎의 갈대 같았다. 검은 류건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고, 류건이 서 있던 자리는 대도가 파고든 충격으로 깊은 균열이 생겨났다. 흙먼지가 폭풍처럼 치솟았다.

    “빠르군! 하지만 피하는 것만으로는 날 이길 수 없다!”

    강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거대한 몸으로 연속 공격을 퍼붓는 것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힘을 믿었다. 그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맹렬한 기세로 다시 한번 류건을 향해 휘둘러졌다.

    류건은 몸을 낮게 숙여 강진의 다리 쪽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검이 섬광처럼 뽑혀 나갔다. 낡은 검날이 강진의 허벅지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무모하군!”

    강진은 비웃음 섞인 소리를 내뱉으며 대도를 거둬들여 검날의 옆면으로 류건의 검을 후려쳤다. 묵직한 충격과 함께 류건의 검이 튕겨 나갔다. 그의 손목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류건은 이미 그 순간을 노리고 있었다. 검이 튕겨 나가는 반동을 이용해, 류건은 강진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이게… 무슨!”

    강진은 눈을 크게 떴다. 류건의 팔꿈치가 마치 번개처럼 솟구쳐 올랐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류건의 팔꿈치가 강진의 명치에 정확히 박혔다. 강진의 몸이 뒤로 크게 휘청거렸다. 그의 거대한 체구가 균형을 잃는 모습은 실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강진의 입에서 억하는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그의 얼굴은 고통과 당황스러움으로 일그러졌다.

    “크으으윽… 이런… 야비한!”

    강진은 한 손으로 명치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운 듯 신음했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철벽이라는 별호가 괜히 붙은 것이 아니었다.

    ‘역시… 명치에 내공을 모아 단련했군.’

    류건은 자신의 일격이 생각보다 큰 타격을 주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강진의 내공은 그의 육체만큼이나 견고했던 것이다. 류건은 뒤로 물러나 강진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는 숨을 고르며 강진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강진은 눈을 부릅뜨고 류건을 노려보았다. 고통과 분노가 뒤섞인 그의 눈빛은 이글거리는 용광로 같았다.

    “내가… 너 같은 애송이에게 이런 식으로 당하다니! 용서 못 한다! 필멸 벽력(必滅霹靂)!”

    강진의 대도에서 푸른빛이 섬광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순수한 내공의 기운이 검날을 휘감은 것이었다. 푸른빛은 순식간에 커지며 거대한 파동을 이루었고, 경기장 전체가 그 기운에 짓눌리는 듯했다. 필멸 벽력, 강진의 필살기였다. 일격에 모든 것을 걸겠다는 듯, 그의 몸에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저것은… 피할 수 없다!’

    류건은 직감했다. 이 거대한 기운의 폭발을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면으로 받아내거나, 아니면…

    류건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기운이 미친 듯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류건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의 온몸에서 미세하지만 맹렬한 내공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단 한 번의 기회!”

    류건은 낮게 읊조리며 허리춤에 찬 낡은 검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검날에 류건의 내공이 모여들자, 낡은 검은 마치 새로 벼린 것처럼 선명한 푸른빛을 띠기 시작했다. 강진의 거대한 푸른 섬광이 류건을 향해 맹렬하게 쇄도해 들어왔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 순간, 류건은 마치 모든 중력을 거부하듯 땅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그의 움직임은 눈으로 쫓기 힘들 만큼 빨랐다. 강진의 필살기가 그가 서 있던 자리를 파괴하며 흙먼지를 뒤집어썼지만, 류건은 이미 공중으로 몸을 던진 후였다.

    “무슨… 짓을!”

    강진은 경악했다. 자신의 필살기를 정면으로 받아내지 않고, 오히려 그 힘을 타고 넘어오는 류건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했다.

    공중에 뜬 류건의 검에서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의 검은 강진의 머리 위에서부터 아래로, 모든 기운을 응축하여 꽂아 내렸다.

    “유수검결(流水劍訣), 단공참(斷空斬)!”

    강물처럼 유연하게 흐르다가, 결정적인 순간 모든 것을 단절시키는 일격!

    류건의 검은 강진의 거대한 대도와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았다. 대신, 번개처럼 빠르게 강진의 목덜미를 노렸다. 필살기를 방출한 후, 잠시나마 허점이 생겨난 그 찰나의 순간을 류건은 놓치지 않았다.

    “흐읍!”

    강진은 뒤늦게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철벽 같은 육체도 그 일격을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피가 뿜어져 나오지는 않았지만, 검날이 그의 피부를 깊숙이 베고 지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굳건했던 시선이 흐려지며, 강진의 거대한 몸이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류건은 착지하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의 검 끝에서는 피가 맺혀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경기는 침묵에 잠겼다. 수많은 생존자들이 숨을 죽이고, 무대 위 두 사내를 주시했다.

    강진은 손으로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강렬했으나, 그 안에는 깊은 충격과 함께 알 수 없는 좌절감이 비쳤다. 그는 천천히, 마치 세상의 모든 무게를 짊어진 듯이 무릎을 꿇었다. 그의 거대한 대도가 흙먼지 위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젠장… 내가… 지다니.”

    강진의 목소리는 절망으로 가득했다. 그의 패배는 단순히 한 경기에서의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 대회를 통해 ‘대지’를 얻어내어 동료들을 살리려 했던 그의 모든 염원이 부서지는 소리였다.

    류건은 강진을 바라보았다. 승리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기쁨 대신 깊은 고뇌가 서려 있었다. 이 대회는 모두의 간절한 염원이 충돌하는 격전장이었다. 승자는 단 한 명 뿐이지만, 패자 역시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강진 대협… 부디 몸조리하십시오.”

    류건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승리자는 패자에게 연민을 보일 여유조차 없었다. 다음 상대는 더욱 강할 것이고, 그는 아직 ‘대지’에 닿지 못했다. 붉은 태양이 지평선 너머로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길게 드리워진 류건의 그림자가 흙먼지 쌓인 경기장 위로 위태롭게 흔들렸다.

    ‘아직… 멀었다.’

    류건은 낡은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심장은 다음 관문을 향해 다시 뛰기 시작했다.

  • 메카 액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차가운 금속의 냄새가 콧속을 찔렀다. 조종석은 사방이 강화 유리와 홀로그램 패널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그 안에 갇힌 강민준은 마치 망망대해의 작은 조각배에 홀로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은 겹겹의 창을 뚫고 밖으로 펼쳐진 암흑 속을 응시했다. 은하의 먼지조차 희미하게 느껴지는 우주의 척박한 변방. ‘제7 변방 수비대’라는 거창한 이름이 무색하게, 이곳은 그저 시간과 빛이 버려진 공간이었다.

    그의 애기(愛機), 대형 전투 메카닉 ‘파랑새’는 거대한 날개를 접은 채 심연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감도는 티타늄 합금 외피는 주변의 어둠을 흡수하며 존재감을 감추었다. 파랑새의 심장부에서 울리는 저음의 공명은 민준의 심장 박동과 묘하게 겹쳐졌다.

    “민준 소위. 현 시각부로 제타 구역 순찰 임무 시작한다. 특이사항 발생 시 즉각 보고.”
    통신기를 통해 들려오는 상관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건조하고 단조로웠다. 민준은 짧게 “알겠습니다.” 하고 답하며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차가운 감촉이 오히려 그의 정신을 맑게 했다.

    “파랑새, 기동 준비. 에너지 코어, 최대 출력.”

    그의 명령에 따라 파랑새의 거대한 관절들이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강철 거인은 유연하게 몸을 틀며 목적지를 향했다. 외부 스크린에는 제타 구역의 지형도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난파된 소행성 조각들과 정체불명의 잔해들이 뒤섞인 곳. 이곳은 수십 년 전, 인류와 ‘아르카디아’ 종족 간의 대전쟁 이후 버려진 전장이자, 끊임없이 불법 채굴과 밀거래가 이루어지는 무법지대였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은… 아르카디아의 잔존 세력이 출몰하기도 했다.

    민준은 아르카디아를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저 홀로그램 자료와 보고서에서만 그들의 모습을 접했을 뿐이었다. 길고 가느다란 사지와 은회색의 피부, 그리고 뇌 전두엽을 따라 흐르는 신비로운 문양. 그들은 인간의 시선으로는 기괴하고 아름다운 동시에 위험한 존재였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들의 존재는 인류에게 영원한 경계심을 심어주었다. 모든 아르카디아는 잠재적인 적이었다.

    순찰 임무는 지루함의 연속이었다. 이따금 떠오르는 난파선의 잔해들을 스캔하고, 텅 빈 우주 공간을 가로지르는 것이 전부였다. 그때였다.

    삐비빅!
    경보음이 조종석을 가득 채웠다. 민준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침입자 감지! 미확인 비행체, 제타-3 구역 진입 중. 속도… 비정상적으로 빠름!”

    스크린에 붉은 점이 빠르게 깜빡였다. 파랑새의 기동 속도를 훨씬 뛰어넘는 속도였다. 저 정도면 아르카디아의 고위급 정찰선이거나, 혹은… 신형 병기일 수도 있었다.
    “제어권 전환. 전투 모드!”

    민준의 명령과 함께 파랑새의 외피 곳곳에서 무장 시스템이 튀어나왔다. 어깨의 대구경 레이저 포가 장전되고, 손목의 칼날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거대한 메카닉은 이제 더 이상 조용한 탐사선이 아니었다. 죽음을 몰고 오는 강철의 사신으로 변모했다.

    “타겟 포착! 시야 확보!”
    붉은 점이 선명한 형상으로 바뀌었다. 예상과 달리 그 비행체는 단 한 대였다. 인간의 정찰선이라기엔 너무나 유려하고 기묘한 곡선을 지닌 형태. 아르카디아의 것이 분명했다.
    “젠장, 또 너희들이냐!”
    민준의 입술에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그들은 항상 이렇게 예고 없이 나타나 변방의 평화를 깨뜨렸다.

    “접근 중! 회피 기동!”
    아르카디아의 비행체는 놀라운 민첩성으로 파랑새의 레이저 공격을 피했다. 마치 파랑새의 움직임을 미리 읽고 있는 듯했다. 조종석 안에서 민준의 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는 조종간을 으스러뜨릴 듯 움켜쥐며 반격에 나섰다.

    “이곳은 인류의 영역이다! 즉각 철수하라!”
    그의 경고 통신은 상대에게 닿지 않는 듯했다. 아니, 들을 의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르카디아 비행체는 오히려 파랑새의 방어막을 뚫고 들어올 듯 돌진했다. 자살 공격이라도 하려는 것인가?

    “피하지 않겠다고? 좋아, 본때를 보여주지!”
    민준은 파랑새의 기동력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파랑새는 마치 살아있는 맹수처럼 우주 공간을 가로질렀다. 거대한 메카닉의 손에서 푸른빛의 에너지 칼날이 뻗어 나왔다. 섬광처럼 빛나는 칼날이 아르카디아 비행체의 꼬리 부분을 정확히 노렸다.

    쉬이이이익!
    치명적인 칼날이 목표에 닿는 순간, 비행체는 번개처럼 방향을 틀어 칼날을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기체의 한쪽 날개가 파랑새의 스쳐 지나간 잔해에 부딪혔다. 불꽃이 파열하며 비행체는 균형을 잃고 주변의 소행성 지대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잡았다!” 민준은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추락 지점 확인. 파일럿 생포 준비.”
    그는 파랑새를 조종하여 추락하는 비행체를 뒤쫓았다. 소행성 표면에 불시착한 비행체는 잔해를 흩뿌리며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완전히 파괴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파일럿이 살아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민준은 파랑새를 비행체 근처에 착륙시켰다. 거대한 발이 소행성 표면에 쿵 소리를 내며 박혔다. 조종석의 문이 열리고, 그는 외부 기압을 조절하는 헬멧을 착용한 채 비행체 쪽으로 향했다. 비상용 라이플을 든 그의 손에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연기가 걷히자, 찌그러진 비행체의 동체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틈새로, 뭔가가 희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민준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처참하게 부서진 조종석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기대와는 다른 모습이 그를 맞이했다.

    파일럿은 쓰러져 있었다. 헬멧은 깨져 산산조각 났고, 길고 은회색의 머리카락이 파편 속에 흩어져 있었다. 눈에 띄는 것은 그들의 전유물인 뇌 전두엽을 따라 흐르는 신비로운 푸른색 문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얼굴은… 놀랍도록 인간과 흡사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인간의 미적 기준으로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섬세한 턱선, 오뚝한 콧대, 창백한 피부. 상상했던 기괴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민준을 응시했다. 그 눈에는 두려움이나 적대감보다는, 오히려 체념과 희미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아주 짧은 순간, 그 에메랄드빛 눈동자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파동이 민준의 뇌리를 스쳤다. 마치 오래된 꿈처럼, 잊고 있던 기억처럼.

    “…시아.”
    무의식중에 그의 입에서 어떤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는 그 이름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르카디아의 언어일까? 아니면 그저 그의 상상 속 이름일까?

    파일럿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은 뭔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했다. 그들의 길고 가는 손가락이 민준을 향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손가락 끝에는 푸른빛의 작은 결정이 박혀 있었다. 아르카디아 종족만이 지닌, 이른바 ‘정신석’이라고 불리는 것.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는 매개체였다.

    민준은 라이플을 든 손을 멈췄다. 그의 임무는 적을 생포하거나 처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앞의 존재는, 어떤 광기로 가득 찬 전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상처 입고, 연약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생명체였다. 그리고 그 눈동자 속의 슬픔은, 그의 마음속 깊은 곳을 건드렸다.

    “젠장…”
    그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인류의 군인이었고, 저들은 적이었다. 수십 년간 이어진 전쟁과 증오의 역사가 그 둘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이미 라이플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고 쓰러진 파일럿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몸 곳곳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는 깊어 보였다. 이대로 두면…

    “너…”
    민준은 말을 잇지 못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그녀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안에서 절박함이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녀의 손끝에 박힌 정신석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그의 마음속으로 파고들려는 듯이.

    그녀의 눈빛과 정신석의 빛이 닿는 순간, 민준의 뇌리에 강렬한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폐허가 된 도시, 불타는 하늘. 그리고 그 속에서 손을 내미는 작은 손.
    환영은 짧고 강렬했다. 그리고 사라졌다.

    민준은 숨을 헐떡였다. 이건 뭐지? 그녀가 보여준 것인가?
    그는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희미하게 감겼다.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군인으로서의 의무, 종족에 대한 충성심, 전쟁의 명분… 모든 것이 그의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뒤엉켰다. 하지만 그의 손은 이미 망설임 없이 그녀의 몸을 부축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어째서 이런 곳에 혼자 있는 거야…”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녀의 몸은 놀랍도록 가벼웠다. 섬세한 뼈대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민준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등 뒤에서 통신기의 호출이 시끄럽게 울렸다. ‘민준 소위! 보고해라! 대체 무슨 일인가!’

    그는 통신을 꺼버렸다. 잠시 후 보고하면 된다. 지금은…
    그는 정신을 잃은 아르카디아 파일럿을 품에 안은 채 파랑새의 조종석으로 향했다. 인류의 적을, 인류의 병기로 끌어안고서. 우주의 심연 속에서, 금지된 운명의 첫 페이지가 이렇게 펼쳐지고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소행성 위에 버려진 아르카디아의 비행선 잔해가 스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챕터 1. 녹슨 행성의 그림자**

    희뿌연 모래폭풍이 휩쓸고 간 거대 도시의 잔해 사이로, 시아는 낡은 작업복 위로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발밑에는 녹슨 금속 조각과 깨진 합성 섬유가 뒤섞여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수백 년 전, 이곳은 ‘아스가르드’라 불리던 찬란한 문명의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그저 잊힌 문명의 거대한 무덤일 뿐이었다.

    그녀의 호흡기 필터는 이미 한계치에 다다라 거친 숨소리와 함께 금속성 먼지 냄새를 걸러내고 있었다. 귓가에는 끊임없이 모래바람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시아의 신경은 온통 전방의 붕괴된 빌딩에 집중되어 있었다. 오래전, 이곳은 첨단 통신 장비들을 보관하던 ‘에코 타워’라 불리던 곳이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타워 깊숙한 곳에 남아있을지 모르는 구형 T-23 에너지 변환기였다. 망가진 잔해 속에서 그걸 찾아내야만 했다.

    “젠장… 여기도 상황은 똑같군.”

    낮게 읊조린 목소리가 먹먹한 호흡기 속에서 맴돌았다. 시아의 손에 들린 탐사 단말기는 약한 전력 신호를 띄엄띄엄 잡아내고 있었다. 희망적인 신호라고 하기엔 너무나 미약했다. 그녀의 우주선, 아니, ‘떠도는 관짝’이라 불리는 낡은 수송선의 점프 코어는 완전히 먹통이었다. T-23 변환기가 없으면 이 죽은 행성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녀 또한 이 행성의 먼지처럼 사라질 터였다.

    한때 푸른 생명으로 가득했던 아스가르드 행성은 대균열 이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우주를 뒤흔든 알 수 없는 재앙, ‘대균열’은 수많은 항성계의 문명을 파괴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파편화된 채 우주를 떠돌거나, 이렇게 죽어가는 행성에 갇혀 버렸다. 시아는 후자에 속하는 운명이었다.

    그녀는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타고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발아래로 펼쳐진 풍경은 끝없는 회색과 갈색의 바다였다. 수평선 끝에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희미하게 보였는데, 대균열 당시 떨어진 운석이 만든 상처였다. 그곳은 생존자들 사이에서 ‘망자의 턱’이라 불렸다.

    “여기쯤인데…”

    단말기의 신호가 미약하게나마 강해졌다. 그녀는 붕괴된 빌딩의 상층부,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통신국의 제어실로 향했다. 문은 이미 오래전 부식되어 떨어져 나갔고, 내부에는 먼지와 함께 정체 모를 잔해들이 가득했다. 시아는 허리에 찬 다목적 도구를 꺼내 빛을 비추며 내부를 살폈다.

    벽면에는 오래된 스크린들이 거미줄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모두 꺼져 있었지만, 중앙 콘솔에는 아직 희미한 전원 표시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시아는 희미한 희망을 품고 콘솔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때, 바닥에 흩어져 있던 금속 조각 하나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젠장, 이런 곳에까지…!”

    시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본능적인 경고음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몸을 낮추고 다목적 도구를 전투 모드로 변환했다. 찰나의 순간, 먼지 더미 속에서 기다란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뼈벌레’라 불리는 아스가르드 토착 변종 생명체였다. 대균열 이후 독성 환경에 적응하며 흉포해진 녀석들은 주로 버려진 기계의 잔류 에너지나 고장 난 전력원에서 나오는 미세한 전자기파에 이끌려 나타났다.

    뼈벌레는 길고 낫처럼 생긴 앞다리로 시아를 향해 돌진했다. 그녀는 몸을 날려 피했고, 동시에 다목적 도구에서 짧은 전자기 펄스를 발사했다.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뼈벌레의 몸 일부가 경련하듯 움찔거렸다. 녀석은 고통스러운 듯 기이한 울음소리를 내며 몸을 뒤틀었다.

    이 녀석은 한 마리가 아니다. 시아의 직감이 속삭였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봤다. 어둠 속에 숨어있던 두 번째 뼈벌레가 그녀의 등 뒤에서 튀어나왔다. 시아는 간신히 몸을 틀어 공격을 막았지만, 뼈벌레의 낫은 그녀의 왼쪽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낡은 작업복이 찢어지며 날카로운 통증이 밀려왔다.

    “이 빌어먹을 벌레 녀석들!”

    시아는 비명을 지르며 다목적 도구를 휘둘러 두 번째 뼈벌레의 관절을 공격했다. 전자기 펄스는 녀석의 외피를 뚫고 들어가 내부 회로를 교란시켰다. 뼈벌레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고, 그 사이 시아는 첫 번째 뼈벌레에게로 돌진했다. 그녀는 짧게 충전된 전자기 충격파를 녀석의 머리에 직접 발사했다. 섬광과 함께 뼈벌레의 머리 부분이 산산이 부서지며 검은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더 이상 뼈벌레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녀는 찢어진 어깨를 부여잡고 벽에 기대섰다. 아드레날린이 식자 통증이 확 밀려왔다. 호흡기 필터는 이미 새빨간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시간 낭비할 틈이 없었다.

    시아는 다시 콘솔로 시선을 돌렸다. 파괴된 뼈벌레의 잔해 옆에서, 마침내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콘솔 내부, 깨진 보호막 아래에 얇은 금속 케이스가 보였다. T-23 에너지 변환기. 먼지에 덮여 있었지만, 분명 그것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케이스를 열었다. 내부는 복잡한 회로와 함께 손톱만 한 크기의 광물 결정이 박혀 있었다. 시아는 자신의 단말기를 꺼내 스캔했다.

    [T-23 에너지 변환기 – 기능성 34% – 심각한 손상 감지. 추가 부품 필요: 고효율 전류 안정기 x2, 고밀도 전해액 0.5L.]

    “빌어먹을…” 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작동은 하지만, 제대로 쓰려면 추가 부품이 필요하다니. 이 행성에서 그 부품들을 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녀는 변환기를 조심스럽게 품에 넣었다. 그래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일단 기지로 돌아가서 수리 방안을 찾아야 했다. 어쩌면 다른 폐허에서 호환되는 부품을 찾을 수도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문득, 고요해진 통신국 제어실 너머, 창문 밖으로 희미하게 깜빡이는 빛이 시아의 시야에 들어왔다. 너무나 멀어서 육안으로는 점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강화된 시야 장비는 그것이 주기적으로 발신되는 신호임을 알려주었다.

    [발신지: 아스가르드 궤도. 신호 패턴: 표준 조난 코드 (S.O.S.). 식별 코드: 미확인.]

    조난 신호? 이 죽은 행성 궤도에 누군가가 아직도 살아있다는 건가? 그것도 식별 코드조차 없는 미확인 신호였다. 시아의 등골에 차가운 전율이 흘렀다. 이 신호는 희망일 수도, 아니면 또 다른 함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지옥 같은 행성에서 벗어날 단 하나의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는 망설였다.

    시아는 잠시 고민하다가, 찢어진 어깨의 통증을 애써 무시하며 자신의 우주선이 있는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돌렸다. T-23 변환기를 수리해야 했다. 그리고 이 미확인 조난 신호의 정체를 밝혀낼지 말지 결정해야 했다.

    죽음의 행성 아스가르드의 붉은 노을이 그녀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살아남기 위한 그녀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막 시작된 것인지도 몰랐다.

  • 던전 탐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장. 어둠 속에서 깨어난 그림자

    숨결마저 삼켜버릴 듯한 어둠이 강현우의 랜턴 불빛을 휘감았다. 눅눅하고 축축한 공기 속에서 흙과 곰팡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이끼의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고대 문명의 유적은 늘 이런 식이었다. 위대한 역사는 항상 음침한 깊은 곳에 자신을 묻어두는 것을 좋아했다.

    “여기 확실히 길이 있었어요. 고문서에 분명히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뒤편에서 들려오는 이수아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에는 긴장감이 역력했지만, 그 안에는 고고학자 특유의 억누를 수 없는 흥분이 숨어 있었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친 바위벽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아득한 시간의 무게를 말해주는 듯했다.

    “고문서가 죄다 맞다면, 이 넓은 세계에 우리가 굳이 삽 들고 땅 파고 다니지는 않았겠지.”

    현우는 농담처럼 말했지만, 그의 시선은 날카롭게 주변을 훑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수많은 ‘잊혀진’ 유적을 탐사했지만, 이렇게 입구부터 심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는 곳은 드물었다. 십 년 넘게 던전을 드나들며 얻은 본능적인 감각이 이 심연의 끝에는 뭔가 거대한 것이 도사리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좁은 동굴의 끝자락이었다. 지난 한 달간 고된 탐색 끝에 찾아낸,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잊혀진 산맥의 깊숙한 곳. 전설처럼 전해지던 ‘침묵의 도시’로 향하는 유일한 입구라고 했다.

    “진동 감지기로는 여기까지가 한계예요. 그 이후는 암반층이 너무 두꺼워서… 하지만 저 바위틈 너머에 인공 구조물이 있는 건 확실합니다.”

    수아가 현우의 옆으로 다가와 랜턴을 비췄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거대한 바위벽 중간에 손바닥만 한 틈이 보였다. 그 틈새 너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없는 끌림이 현우의 발길을 잡아당겼다.

    현우는 배낭에서 도구 몇 가지를 꺼내 들었다. 특수 제작된 확장식 지지대와 소형 폭약. 최대한 진동을 적게 발생시켜야 했다. 잊혀진 유적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함정이나 붕괴 위험을 안고 있었다.

    “조금 물러서 있어. 먼지 많이 날 거야.”

    수아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섰다. 현우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소형 폭약을 설치하고 기폭 장치를 연결했다. 짧게 울리는 경고음과 함께 작은 폭발음이 동굴 안을 흔들었다.

    콰앙!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콜록이며 잠시 기다리자, 서서히 먼지가 가라앉았다. 현우의 랜턴 불빛이 그들을 반겼다.

    바위벽에는 사람 한 명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뚫려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놀랍게도, 완벽하게 다듬어진 거대한 돌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순한 동굴이 아니었다. 분명히 인공 구조물이었다.

    “이럴 수가… 진짜로 문이 있었어요!”

    수아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녀의 눈은 경외감과 흥분으로 반짝였다. 현우도 미간을 찌푸렸다. 돌문은 아무런 문양도 없이 매끄러웠다. 마치 존재감을 지우려는 듯이. 하지만 그 완벽한 형태 자체가 주는 위압감은 대단했다.

    “이 문은…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양식이네요. 어떤 문명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아요.”

    수아는 문에 손을 대고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현우는 주변을 살폈다. 문 옆 바닥에 미세하게 파인 홈이 보였다. 단순한 틈새가 아니었다. 마치 문을 열기 위한 어떤 장치가 있었던 흔적 같았다.

    “이거… 열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우는 허리를 숙여 홈을 자세히 살폈다. 손가락 끝으로 만져지는 이질적인 감촉. 분명 금속이었다. 하지만 녹슬거나 부식된 흔적 없이, 마치 어제 만들어진 것처럼 매끄러웠다.

    “혹시… 지레 장치인가요?” 수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현우는 배낭에서 또 다른 도구를 꺼냈다. 휴대용 광선 스캐너였다. 홈에 스캐너를 대자, 미세한 빛이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이내 스캐너 화면에 복잡한 내부 구조가 그려졌다.

    “지레 장치라기보다는… 봉인 장치에 가깝네. 고유의 에너지원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 현우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그 에너지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과 비슷한데?”

    그가 가리킨 것은 그의 장비 곳곳에 박혀 있는 작은 수정 구슬이었다. 던전에서 마력을 응축하여 만들어지는, 이 시대의 ‘배터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물건이었다. 수아는 순간 숨을 들이켰다.

    “만약 그게 맞다면… 이 문은 아직 기능하고 있다는 뜻이 돼요.”

    현우는 말없이 가장 큰 마력 수정 구슬을 꺼내 들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투명한 구슬 안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일렁였다. 그는 홈에 수정 구슬을 밀어 넣었다.

    짜자자작!

    순간, 정전기가 흐르는 듯한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문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문(無紋)의 매끄러운 표면에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미세한 선들이 빛을 따라 떠오르기 시작했다. 복잡하고 난해한 기하학적 문양들이 서로 얽히며 마치 살아있는 회로처럼 움직였다.

    쿵… 쿠웅…

    이윽고, 거대한 돌문에서 진동이 시작되었다. 수천 년의 침묵을 깨고 움직이는 문은 마치 심장이 뛰는 소리처럼 묵직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돌문이 서서히 안쪽으로 밀려들었다. 흙먼지가 다시 한번 자욱하게 피어올랐고, 그 너머로 어둠이 사라진 거대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동굴 입구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거대한 돔형 공간이었다. 천장은 까마득히 높았고, 그 너머로 희미하게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돔의 중앙에는 거대한 기둥이 솟아 있었는데, 그 기둥은 단순한 지지대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복잡한 문양들이 새겨진 표면에서 푸른 빛줄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와 공간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 아래,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의 끝자락이었다. 절벽 아래로는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그 심연은 완전한 어둠이 아니었다. 저 아래, 아주 멀리서, 흐릿한 윤곽의 구조물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도시의 잔해 같기도 했고, 거대한 기계 장치 같기도 했다.

    “말도 안 돼… 이게 정말… 침묵의 도시였나요?”

    수아는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경외감과 함께 공포가 서려 있었다. 너무나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도시…라고 하기엔 너무 깊은 곳인데.” 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분명해. 이건 인간이 만든 문명이 아니야.”

    그의 시선은 절벽 아래의 아득한 풍경을 훑었다. 저 아래에 있는 것은 분명히 어떤 문명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완전히 잊혀진,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지워진 존재의 흔적.

    현우는 망설임 없이 절벽 끝으로 다가섰다. 그는 망설임 없는 눈으로 아래를 응시했다. 아래에서 불어오는 미지근한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어떻게 내려가죠? 저 아래까지는…” 수아의 목소리가 잠겼다.

    “내려갈 수 있는 방법은 언제나 있어.”

    현우는 씨익 웃었다. 그리고 허리춤에 찬 갈고리 달린 밧줄을 꺼내 들었다. 그의 시선은 절벽 아래 아득히 펼쳐진, 푸른빛 속에서 잠들어 있던 고대 도시의 그림자를 향하고 있었다. 수천 년의 침묵을 깨고, 이제 그들의 발자국이 이 잊혀진 심연의 비밀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으려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