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자네, 대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가? 1분 1초가 급한 상황에, 또 그놈의 우주적 영감이라도 얻고 있는 중이야?”

    서지우 경위의 목소리는 전화기 너머에서도 살벌한 기세로 이안의 고막을 때렸다. 이안은 눈을 감은 채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지금 그는 완벽한 잔향 효과를 위해 조용한 카페 구석에 앉아 음파의 미묘한 파동을 분석 중이었다. 아, 이 우주에는 어쩜 이렇게 소음이 많은지.

    “지우 씨. 자네는 늘 시간에 쫓기듯 말하는군. 시간은 그저 관념적인 개념일 뿐. 모든 존재는 각자의 속도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해. 그리고 지금 나는, 고독한 물리학자의 심정으로 이 공간의 음향학적 특성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중일세.”

    “그놈의 음향학적 특성 이해는 개나 줘 버리고 당장 여기로 오라고! 강태산 회장 살인 사건이야! 밀실 살인이라고! 자네 없이 이걸 어떻게 해결하라는 거야?”

    서지우 경위의 외침에 이안은 결국 눈을 떴다. 으레 그렇듯, 그녀의 비명에 가까운 호출은 늘 그를 세상의 불협화음 속으로 끌어들이곤 했다. 강태산 회장이라. 유명한 미술품 컬렉터이자, 사치와 기벽으로 악명 높은 인물. 흥미롭군.

    “알겠네. 지우 씨의 영혼을 울리는 비명에 내 평화가 깨졌으니, 어쩔 수 없지. 가보도록 하지.”

    이안은 젠틀하게 대화를 끝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리에 차고 있던 작은 가죽 케이스 안에서 돋보기와 만년필을 슬며시 꺼내 탁자 위 커피 잔을 툭 건드렸다. 쨍- 하는 청아한 소리가 울리며 잔이 미끄러졌다. 그의 미간은 다시 한번 찌푸려졌다. 완벽한 마찰 계수는 아니었다.

    ***

    강태산 회장의 펜트하우스는 도시의 스카이라인 한복판에 위압적으로 솟아 있었다. 80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야경은 아찔할 만큼 아름다웠지만, 지금 그 아름다움은 거대한 죽음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펜트하우스 입구는 이미 노란색 폴리스 라인으로 봉쇄되어 있었고, 수십 명의 경찰과 감식반 요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안 씨! 드디어 오셨습니까!”

    지우는 이안을 보자마자 반가움보다는 분노에 가까운 표정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이미 흐트러져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놈의 ‘탐정님’ 소리는 제발 하지 말라고 했잖아, 지우 씨. 나는 그저 진실을 사랑하는 예술가일 뿐이야. 예술은 탐정이 될 수 없지.”

    이안은 지우의 격앙된 목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며, 바닥에 깔린 카펫의 문양을 유심히 살폈다. 지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안이 나타나면 다들 한숨을 돌리는데, 그녀는 오히려 뒷목이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일단 들어오시죠. 상황은 최악입니다. 강태산 회장님은 서재에서 돌아가신 채 발견됐습니다. 사인은 흉기에 의한 과다 출혈.”

    지우는 한숨을 쉬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서재 문은 안에서 이중 잠금 되어 있었습니다. 창문도 마찬가지고요. 밖에서 침입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발코니 문까지 완벽하게 잠겨 있었어요. 집 전체의 CCTV를 확인했지만, 회장님 외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거나 나간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완벽한 밀실이에요.”

    지우의 설명에 다른 형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모두 난감한 표정이었다.
    “사망 시각은 오늘 새벽 2시에서 3시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흉기는 회장님의 서재에 있던 이집트 투탕카멘 단검으로 보입니다. 회장님 손에 쥐여 있었어요.”

    이안은 지우의 설명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서재로 향하는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흩뿌려진 먼지, 벽에 걸린 그림의 미세한 기울기, 심지어 천장의 조명갓에 맺힌 미세한 물방울까지 놓치지 않았다.

    “이안 씨! 제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까?” 지우가 다시 한번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물론이지, 지우 씨. 자네의 목소리만큼이나 생생하게 이 공간의 모든 정보가 내게 속삭이고 있네. 하지만 자네의 목소리는 너무 커서 다른 소리들을 방해하는군.”

    지우는 분노를 삭이며 이안을 서재 앞으로 안내했다. 문 앞에는 이미 감식반원들이 분주하게 지문을 채취하고 있었다.

    “보십시오. 문고리 보이시죠? 안에서 잠갔다는 겁니다.”

    이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문고리뿐만 아니라, 문틈에 끼어 있는 작은 종이 조각, 문지방에 살짝 패인 흠집, 심지어 문에 사용된 나무의 나이테까지 그의 시선은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드디어 서재 안.
    방은 고풍스러운 책들과 고급스러운 가구들로 가득했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책장 앞, 강태산 회장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눈은 크게 뜨여 있었고, 핏자국이 가슴 부근에 선명했다. 그의 오른손에는 화려한 장식의 단검이 굳게 쥐여 있었다.

    모든 것이 지우의 설명과 일치했다. 밀실, 피해자의 손에 쥐여 있는 흉기, 외부 침입 흔적 없음. 누가 봐도 자살로 보일 만한 완벽한 상황이었다.

    “자살이라고요? 이건 아무리 봐도 타살입니다! 회장님은 자살할 이유가 전혀 없어요! 게다가 단검을 그렇게 꽉 쥐고 죽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한 강력반 형사가 흥분해서 말했다. 지우 역시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은 시체는 잠깐 흘깃 본 후, 마치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고개를 돌려 책장과 책상, 그리고 벽에 걸린 그림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의 눈은 핏자국 하나, 널브러진 책 한 권이 아니라, 벽면의 미세한 균열, 천장의 먼지, 그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에 꽂혀 있었다.

    “이안 씨, 대체 뭘 보시는 겁니까? 시체를 먼저 확인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우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이안은 그제야 시체 쪽으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시체의 얼굴이나 상처가 아니라, 바닥에 떨어진 회장님의 안경을 집어 들었다. 테두리에 묻은 미세한 흠집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는 이안의 얼굴에는 심각함보다는 호기심이 더 강하게 비쳤다.

    “흠… 안경 알이 조금 돌아가 있군. 그리고 이 미세한 흠집은… 꽤 거친 표면에 긁힌 자국인데…”

    “그게 지금 중요합니까? 중요한 건 밀실 트릭이라구요!” 지우가 미칠 지경이라는 듯 소리쳤다.

    이안은 지우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바닥에 앉아 회장님의 손에 쥐여 있는 단검을 꼼꼼히 살폈다. 그의 손은 장갑도 끼지 않은 채, 마치 자신의 물건인 양 자연스럽게 만졌다. 지우가 경악하며 소리치기도 전에, 이안은 이미 단검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단검… 강 회장이 직접 사용한 것은 아니군.”

    모두의 시선이 이안에게로 향했다.

    “이게 무슨 소리죠?” 한 형사가 물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회장님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리고는 그의 손가락 끝에 묻어 있는 미세한 가루를 돋보기로 확인했다.

    “자네들, 이 단검의 손잡이 부분에 끈적임이 느껴지지 않나? 그리고 회장님의 손가락 끝에는… 미세한 염분 결정이 묻어 있네. 게다가 이 안경, 이 안경테의 긁힌 자국은… 이 방의 특정 사물과 완벽하게 일치하지.”

    이안은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나, 거대한 책장 한가운데 놓인, 삐뚤어진 작은 도자기를 가리켰다. 도자기 표면은 거칠었고, 그 색상은 회장님의 안경테 흠집과 미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자살이 아니지. 게다가 이건 밀실도 아니었네. 애초에 ‘밀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어.”

    이안의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처럼 빛났다.

    “이 모든 건, 완벽하게 꾸며진 하나의 연극일 뿐이야.”

    지우는 이안을 멍하니 바라봤다. 밀실이 아니라고? 그럼 누가, 어떻게, 그리고 왜? 머릿속이 온통 의문으로 가득 찼지만, 이안의 확신에 찬 목소리가 그녀의 혼란을 잠재웠다. 그의 얼굴에는 늘 그렇듯 무표정한 예술가의 냉철함과, 동시에 장난기 어린 소년의 미소가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밀실 살인 사건은, 이제 이안이라는 이름의 천재적인 연출가를 만난 것이다.
    그리고 지우는, 그 연극의 첫 번째 관객이 되었다.

  • 마법소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차가운 바람이 회색빛 도시의 좁은 골목을 휩쓸었다. 낡은 상점의 간판들이 위태롭게 흔들렸고, 그 아래로 웅크린 사람들의 얼굴엔 삶의 고단함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저 멀리, 황금빛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제국 궁전의 웅장한 실루엣이 보였지만, 이곳 평민 구역에는 그 영광의 그림자조차 드리우지 않았다. 굶주림과 냉기만이 그들의 유일한 친구였다.

    “엄마… 너무 추워요…”

    어린아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얼어붙은 공기를 갈랐다. 해진 담요 한 장에 의지해 웅크린 모자의 모습은 이 골목의 흔한 풍경 중 하나였다. 아린은 낡은 창고 문에 기대 선 채, 그들을 무기력하게 바라봤다. 그녀의 손엔 오늘 겨우 구한 딱딱한 빵 한 조각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저 아이들에게 내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빵마저 없으면, 오늘 밤 그녀의 여동생, 미나는 또다시 굶주림에 울 것이다.

    그때였다. 쿵, 쿵, 쿵.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둔중한 발소리가 골목을 진동시켰다. 사람들의 눈동자에 공포가 어렸다. 제국 병사들의 순찰이었다. 강철 갑옷에 박힌 붉은 깃발은 피의 깃발처럼 느껴졌다.

    “문 열어라! 숨어봤자 소용없다! 어제 통금 위반자들을 아직 다 못 잡았다!”

    병사들의 우악스러운 외침이 들려왔다. 곧이어 골목 입구가 시끄러워지더니, 삐까뻔쩍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물밀 듯 들어섰다. 그들의 눈은 먹잇감을 찾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병사들 사이를 헤치며 앞장선 것은 다름 아닌 이 구역을 담당하는 ‘징수관’이었다. 비대한 몸집에 기름진 얼굴, 탐욕스러운 눈빛의 사내. 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린의 맞은편 창고 문을 발로 걷어찼다.

    “이봐, 이 안에 누가 있었던 것 같았는데?” 징수관은 씩 웃으며 병사들에게 손짓했다. “안에 들어가 뒤져봐! 분명 어제 도망친 놈들 중 하나가 숨어 있을 게야!”

    창고 안에서 희미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곳은 늙은 할머니와 병든 손자가 살던 곳이었다. 통금 위반이 아니라, 병든 손자를 위해 약초를 구하러 나갔던 할머니가 간발의 차이로 돌아오지 못했던 것뿐이었다.

    아린의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이 지긋지긋한 폭압. 끝없는 착취. 사람들은 그저 살아가기 위해 발버둥 칠 뿐인데, 제국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몇 달 전, 아린의 아버지는 강제 징집되어 북부 전선으로 끌려갔고, 어머니는 그 충격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건 미나뿐이었다. 미나마저 잃을 수는 없었다.

    “그만하세요!”

    자신도 모르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아린에게로 향했다. 징수관의 기름진 얼굴에 조롱 섞인 웃음이 번졌다.

    “오호라? 이 어린 계집이 지금 누구에게 말대꾸를 하는 것이냐?” 징수관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의 눈이 빵을 든 아린의 손으로 향했다. “이봐, 빵이 있네? 네 주제에 이런 귀한 것을 어디서 얻었지? 분명 어딘가에서 훔친 것이겠지? 제국에 세금 한 푼 내지 않는 것들이 감히!”

    징수관이 빵을 뺏으려 손을 뻗는 순간, 아린은 엉겁결에 뒷걸음질 쳤다.

    “이건… 제 겁니다! 미나… 미나가 먹어야 해요…!”

    “건방진 것!” 징수관이 손을 들어 아린의 뺨을 후려쳤다.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아린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입술 안쪽이 터져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빵은 바닥에 떨어져 더러운 먼지와 뒤섞였다.

    “네 아비가 강제 징집된 게 불만인 게냐? 제국의 은혜를 모르는 천한 것! 너 같은 것들은 죄다 싹을 잘라버려야 해!”

    그의 마지막 말이 아린의 뇌리를 강타했다. ‘싹을 잘라버려야 해.’ 어제 밤, 굶주림에 지쳐 잠든 미나의 마른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대로 가다간 미나마저… 미나마저 이 제국에게 짓밟히고 말 것이다.

    아린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빵 조각을 움켜쥐었다. 더러워진 빵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공포에 질려 있지 않았다. 차가운 분노와 뜨거운 절망이 뒤섞여 타올랐다. 이 억압 속에서, 이 비참함 속에서, 평범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감. 그러나 그 무력감의 끝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그 순간, 아린의 심장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밤하늘을 가르는 유성처럼, 오랜 시간 잊혔던 고대의 힘이 그녀의 혈관을 타고 맹렬히 흘러들었다.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전율. 땅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아린의 등 뒤에서, 푸른색과 은색이 뒤섞인 영롱한 날개가 순식간에 솟아났다.

    “크아악!” 징수관이 경악하며 뒷걸음질 쳤다. 병사들도 당황한 표정으로 창을 겨눴다.

    아린의 온몸을 감싸던 낡은 옷은 순식간에 밤하늘의 별빛을 담은 듯한 푸른색 드레스로 변했다. 가슴팍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별 문양이 새겨졌고, 찢어진 맨발에는 투명한 크리스탈 부츠가 신겨졌다. 머리카락은 길게 흩날리며 은빛으로 물들었고, 눈동자는 별을 품은 듯 깊은 푸른색으로 빛났다. 그녀의 손에는 마치 운명처럼, 빛나는 은빛 지팡이가 쥐어져 있었다.

    “이… 이건 대체…!” 병사 중 하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것은 더 이상 나약한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정의의 불꽃이 이글거렸다.

    “당신들은… 우리의 굶주림을 조롱하고, 우리의 슬픔을 짓밟고, 우리의 희망을 빼앗았어!” 아린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단하고 강렬하며, 그 안에 담긴 분노는 골목의 냉기를 녹일 듯 뜨거웠다. “제국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훔쳐 갔어! 하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안 돼!”

    은빛 지팡이에서 푸른색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아린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바닥에 떨어져 부서진 빵 조각들이 마치 마법처럼 공중에 떠올라 다시 온전한 빵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빵은 굶주림에 허덕이던 모자의 손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이건 마녀의 짓이다! 당장 저년을 잡아라!” 징수관이 미친 듯이 소리쳤다.

    병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창끝이 아린을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아린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의 등 뒤에 솟아난 날개가 찬란한 빛을 뿜으며 그녀를 공중으로 띄웠다. 지팡이를 휘두르자, 푸른 빛줄기가 병사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빛줄기는 병사들의 갑옷을 직접 타격하는 대신, 그들의 창을 무력화시키고, 그들의 발밑에 투명한 에너지 장벽을 만들어 가로막았다. 혼란에 빠진 병사들이 서로 부딪히며 넘어졌다.

    “더 이상 누구도… 이 불의에 고통받지 않을 거야!”

    아린은 하늘로 솟아올라 도시 위를 날았다. 그녀의 존재는 마치 어둠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별빛과 같았다. 골목에 숨어 있던 평민들은 그녀의 모습을 올려다봤다. 처음엔 경외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이었지만, 이내 그 눈빛은 희미한 희망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저 빛은, 어쩌면… 이 지긋지긋한 어둠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했다.
    아린은 제국 궁전의 첨탑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곳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황제와 귀족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이 평민들의 고통을 단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녀의 별의 각인과 함께,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한 소녀의 각성이 아니었다.
    이것은 강철 제국의 심장에 박힐, 작은 평민들의 거대한 반란의 서막이었다.
    밤하늘의 별들이, 드디어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이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독립적인 단편 소설

    드넓은 초원, 저 멀리 희미하게 솟아오른 푸른 산맥, 그리고 그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구름. <아르카디아 크로니클>의 로그인 화면은 언제 봐도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시온은 접속 버튼을 누르며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현실의 팍팍한 삶은 잠시 잊고, 이곳에서만큼은 자유롭게 모험가 시온으로 살아갈 시간이었다.

    “으음, 오늘은 뭘 해볼까.”

    시온이 접속한 곳은 펠로스 숲의 가장자리, 이름 없는 작은 오솔길이었다. 초보자 사냥터와 멀지 않은 곳이라 몬스터도 약하고 퀘스트도 거의 없는, 그야말로 버려진 땅이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레벨 20만 넘어도 이곳을 떠나버렸고, 가끔 길을 잃은 초보자들이나 들르는 곳이었다. 하지만 시온은 이상하게도 이런 한적한 곳을 좋아했다. 복잡한 도시나 시끄러운 사냥터보다는 이렇게 조용히 풍경을 감상하며 몬스터를 잡거나, 혹은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것이 더 좋았다.

    그는 오늘도 별다른 목적 없이 숲을 걷고 있었다. 오래된 나무들이 뿜어내는 짙은 흙냄새와 싱그러운 풀 내음이 가상현실임에도 코끝을 간지럽혔다.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그마저도 그림 같았다.

    “이런 곳에 왜 아직도 안 와본 거지, 다들….”

    감탄사를 내뱉으며 걷던 시온은 문득 발밑의 흙이 푹 꺼지는 것을 느꼈다. 젠장! 급하게 몸을 뒤로 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몸은 그대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악!”

    짧은 비명과 함께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다행히 높지 않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착지하며 무릎이 살짝 삐끗하는 정도의 대미지 표시가 떴다. 고개를 들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흙먼지와 함께 어렴풋이 보이는 거친 돌벽이었다.

    “여기, 뭐지?”

    평범한 흙구덩이가 아니었다. 시온이 떨어진 곳은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듯한 좁은 통로였다. 주변을 둘러보자, 천장은 그의 키보다 살짝 낮은 정도였고, 옆으로는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길이 희미하게 보였다. 퀘스트 마크는 없었다. 미니맵에도 아무런 표시가 뜨지 않았다.

    완전 미탐사 구역?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아르카디아 크로니클>은 방대한 세계관을 자랑했지만, 이 정도로 알려지지 않은 공간은 거의 없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시온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흙먼지 냄새 사이로 희미한 금속성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는 점점 넓어지더니 이내 작은 동굴로 이어졌다. 동굴의 중앙에는 닳고 닳은 듯한 돌 제단이 놓여 있었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주변 벽에는 고대의 문양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다.

    “설마, 숨겨진 유적인가?”

    시온은 손전등 스킬을 켜고 벽면의 문양들을 자세히 살폈다. 그의 캐릭터는 고고학 스킬이 없었기 때문에 문양의 의미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기묘한 형태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가 꿈틀거리는 듯한, 혹은 거대한 마법진의 일부인 듯한 느낌.

    그는 조심스럽게 제단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그때였다. 그의 손바닥에서부터 미세한 진동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제단 전체에서 희미한 빛이 스며 나오더니, 이내 동굴 안을 은은하게 비추기 시작했다. 벽에 새겨진 문양들도 빛을 발하며 마치 혈관처럼 꿈틀거렸다.

    – [알 수 없는 고대 마법의 기운이 당신을 감지합니다.]
    – [선택: 고대 마법의 힘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눈앞에 뜬 시스템 메시지를 본 시온은 숨을 들이켰다. 알 수 없는 고대 마법의 기운? 이런 메시지는 난생 처음이었다. 대개는 특정 퀘스트를 완료하거나 아이템을 사용했을 때 스킬을 습득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선택하라는 메시지가 뜨는 것은, 그것도 ‘고대 마법의 힘’이라는 거창한 수식어와 함께 뜨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시온은 ‘예’를 선택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예’를 누르자마자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은 더욱 강렬해졌고, 동굴 전체가 눈부신 황금빛으로 가득 찼다. 시온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힘이 솟구치는 듯한 느낌에 온몸의 세포가 전율했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지만, 그것들은 형태 없는 감각으로만 다가왔다.

    빛이 사그라들고 눈을 떴을 때, 동굴은 다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제단은 평범한 돌덩이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지만 시온은 알고 있었다. 무언가가 변했다는 것을.

    캐릭터 정보창을 열었다. 새로운 스킬이나 특성창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실망하려는 찰나, 그의 시선이 스탯창 하단, ‘기타 정보’ 항목에 꽂혔다.

    – [특수 능력: 고대의 공명 (미개방)]
    – [설명: 세계의 근원과 연결된 고대의 힘. 아직 잠들어 있으며, 자원을 소모하여 공명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현재 공명 단계: 1단계)]

    고대의 공명? 미개방?

    시온은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스킬도 아니었고, 특성도 아니었다. 그저 ‘특수 능력’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그리고 ‘세계의 근원과 연결된 힘’이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그는 곧바로 인벤토리를 뒤져 가장 저렴한 마나 포션을 하나 꺼내 들었다.

    “이게… 자원을 소모해서 강화한다는 말인가?”

    반신반의하며 마나 포션을 사용했다. 그의 마나 바가 가득 채워지는 것과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 [특수 능력 ‘고대의 공명’이 미량의 마나를 감지합니다. 공명을 강화하시겠습니까? (필요 마나: 100)]
    – [현재 마나: 1000/1000]

    시온은 곧바로 ‘강화’를 선택했다. 그의 마나가 100만큼 줄어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몸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가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 [특수 능력 ‘고대의 공명’이 1단계 강화되었습니다. (총 강화 횟수: 1회)]
    – [공명 단계: 2단계 (미개방)]
    – [추가 정보: 주변 환경과의 미약한 연결이 형성됩니다.]

    주변 환경과의 미약한 연결?

    시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고대의 공명이라는 특수 능력이 일반적인 게임 시스템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는 동굴 밖으로 나가 보기로 했다. 다시 좁은 통로를 지나 흙구덩이를 통해 밖으로 나왔을 때,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평범한 펠로스 숲이었지만, 시온의 눈에는 이제 숲이 다르게 보였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심지어 땅속을 기어가는 벌레 한 마리까지. 그 모든 것에서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는 ‘생명의 기운’ 같은 것이 있었다. 이전에는 그저 게임 그래픽으로만 보이던 풍경이, 이제는 살아 숨 쉬는 듯한 생생함으로 다가왔다.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야생화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방금 얻은 ‘고대의 공명’을 활성화시키는 것을 상상했다. 아무런 주문도, 동작도 없이 그저 ‘활성화’라는 생각만을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의 손에서 희미한 녹색 빛이 피어올랐다. 그 빛은 야생화로 스며들었고, 시들어가던 꽃잎이 조금 더 생생하게 피어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마나 바는 100만큼 줄어들어 있었다.

    “세상에….”

    시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기존의 ‘힐’ 마법과는 달랐다. 생명의 힘을 직접적으로 끌어내어 조작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마치 세계의 일부와 연결되어 그 생명의 흐름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짝 바꿀 수 있는 것처럼.

    게임에서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고대에 숨겨진 마법의 힘. 그것이 지금, 그의 손안에 있었다.
    시온은 펠로스 숲의 이름 없는 오솔길에 서서, 앞으로 펼쳐질 자신의 모험을 상상하며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그의 <아르카디아 크로니클>은 완전히 새로운 페이지를 맞이하게 될 터였다. 그것은 그 어떤 유저도 경험하지 못한, 오직 그만이 열어갈 수 있는 특별한 이야기의 시작이었다.

  • 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아르카나 마법 학원은 평범함을 거부했다. 모든 마법이 최고급 재료와 정밀한 주문으로 완벽하게 구현되는 곳. ‘실수’라는 단어는 금기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솔아는 예외였다. 그녀는 천재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그 재능이 언제 어떻게 터질지는 아무도, 심지어 본인도 예측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마법은 마치 럭비공 같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읏차!”

    솔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법진이 일그러지는 듯한 붉은 섬광이 눈꺼풀 뒤를 강렬하게 때렸다. 분명 ‘치유의 물약’ 소환 주문을 외웠는데… 이 불길한 예감은 뭐지? 그녀의 주문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했으나, 실전에서는 늘 솔아만의 독창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눈을 뜨자, 예상대로였다. 쨍그랑!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마법 지팡이 끝에서 튀어나온 것은 치유의 물약이 아니라, 반짝이는 은색 가루를 흩뿌리는 거대한 무쇠 냄비였다. 그것도 하필이면, 수업을 진행하던 멜리사 교장 선생님의 최애 빈티지 마법 지팡이 위로!

    멜리사 교장 선생님의 얼굴은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지팡이는 냄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두 동강 나 있었고, 주변에는 은색 가루가 폭설처럼 쌓여 있었다.

    “이솔아! 또 너로구나! 이번 학기에만 세 번째다, 세 번째! 너의 지팡이가 그렇게 창의력을 발휘할 시간에, 기본 주문이나 제대로 외워!”

    솔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교장 선생님… 저는 분명….”

    “변명은 필요 없다! 당장 저 냄비를 치우고, 마법 도서관 지하 창고에 가서 마나 측정기를 가져와! 이번 일로 마나 흐름이 불안정해졌을지도 모르니!”

    마나 측정기는 도서관 깊숙한 곳에, 거의 사용되지 않는 낡은 문 뒤에 있었다. 멜리사 교장 선생님은 아르카나 학원의 마나 흐름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솔아는 자신의 불운에 한숨을 쉬며 삐걱이는 문을 열었다. 오래된 먼지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낡은 책장들을 지나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바닥에 희미하게 빛나는 마법진 하나가 눈에 띄었다.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 안에 새겨진 문양은 묘하게 솔아의 지팡이 끝에서 늘 튀어나오는 ‘예측 불가능한 마나 흐름’과 닮아 있었다.

    “어라? 이건…”

    무심코 발을 들이자, 마법진이 푸르게 번쩍이며 바닥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열렸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솔아는 어둠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

    어둠 속에서 정신없이 굴러 떨어진 솔아는, 엉덩이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아야야… 여기가 어디야?”

    주변을 둘러보니, 묘한 푸른빛이 희미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의 근원에는…

    “맙소사!”

    거대한, 아니, ‘초거대’라고 해야 할까? 거대한 크기에 보라색을 띠는 젤리 같은 몸체, 그리고 그 몸체 여기저기에 튀어나온 수많은 눈알들이 깜빡이는 생명체가 거대한 홀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의 몸에서는 끊임없이 작고 반짝이는 무언가가 퐁퐁 솟아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작고 빛나는 버섯 요정들이었다! 하나가 튀어나오면 둘이 되고, 둘이 튀어나오면 셋이 되고… 홀의 바닥은 이미 수천, 수만 마리의 버섯 요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녀석들은 쪼르륵 움직이며 솔아의 주변을 맴돌았다. “뾰로롱! 뾰로롱!”

    “정말… 끔찍한 금기…” 솔아는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끔찍하다기보다는, ‘기괴하고 귀엽고, 동시에 말도 안 되게 번거로운’ 것이었다. 이 생명체가 만들어내는 버섯 요정들은 어딘지 모르게 솔아의 마법처럼 통제 불가능한 기운을 뿜어냈다.

    그때, 홀의 구석에서 그림자가 움직였다. “누구냐!” 날카로운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히익!” 솔아는 화들짝 놀라며 돌아봤다.

    그곳에는 아르카나 학원의 수석, 서하준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마나 안정기가 들려 있었고, 얼굴은 심각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솔아를, 아니 솔아가 발견한 이 ‘끔찍한 금기’를 통째로 얼려버릴 듯이 차가웠다.

    “서… 서하준 선배?”

    “이솔아! 네가 여기 왜 있어! 여긴… 여긴 절대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곳이야!” 하준은 솔아의 팔을 잡아끌었다. “당장 나가! 이건 너와 상관없는 일이야!”

    “하지만 버섯 요정들이 너무 많잖아요! 게다가 쟤네들, 저한테 자꾸 말을 거는 것 같아요!” 솔아는 손가락으로 한 버섯 요정을 가리켰다. 요정은 “뾰로롱!” 하는 소리를 내며 솔아의 코를 간지럽혔다.

    하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솔아를 노려봤다. “말을 건다고? 그저 불안정한 마나 덩어리에 불과해! 착각하지 마!”

    그때, 솔아의 지팡이 끝에서 튀어나온 무쇠 냄비가 굴러가더니, 가장 큰 버섯 요정 무리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쨍그랑! 냄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집히자, 그 안에 남아있던 은색 가루들이 버섯 요정들에게 쏟아졌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버섯 요정들이 “뾰로롱뾰로롱!” 하며 더욱 신나게 춤을 추기 시작하더니, 은색 가루를 온몸에 뒤집어쓰고는 춤추는 인형들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하필이면 하준 선배가 가장 싫어하는, 핑크색 토끼 인형으로!

    하준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눈을 비볐다. “말도 안 돼… 이솔아, 네 마나는 도대체 무슨 짓을 벌인 거야!”

    솔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몰라요! 그냥… 제 마나는 좀 자유분방한가 봐요?”

    하준은 이마를 짚었다. 이 거대한 젤리 형태의 생명체는 학원의 전설적인 창립자가 마나 오염을 정화하기 위해 만들려 했던 ‘마나 흡수체’였다. 하지만 실패한 실험으로 인해, 불안정한 마나를 흡수할 때마다 이렇게 통제 불가능한 버섯 요정들을 뿜어내는 ‘마나 먹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는 순간, 아르카나 학원의 명성은 땅에 떨어질 터였다. 하준은 몇 달째 이 비밀을 혼자서 감당하며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이솔아라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나타났다.

    ***

    며칠 뒤, 아르카나 마법 학원은 작은 혼돈에 휩싸였다. 마법 교실의 칠판 지우개가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하고, 식당의 모든 수프가 반짝이는 젤리로 변하는가 하면, 심지어 멜리사 교장 선생님의 머리 위에 작은 뿔이 돋아나는 기이한 일까지 벌어졌다. 모든 현상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작고 빛나는 버섯 요정들이 목격되었다는 것.

    “유진아, 이거 혹시…” 솔아는 불안한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봤다.

    “응, 솔아! 나도 알아! 요즘 학원에 이상한 버섯 요정들이 돌아다니는 것 같아! 어제 밤에는 내 침대 위에서 뾰로롱 거려서 잠을 설쳤다니까!” 유진은 과장된 몸짓으로 말했다. “왠지… 네가 연루되어 있을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천만에! 난 아무것도 몰라!” 솔아는 시치미를 뚝 떼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귓가는 이미 빨개져 있었다. 버섯 요정들은 솔아의 지팡이 끝에서 튀어나온 냄비에 담겨 있던 은색 가루, 즉 솔아의 예측 불가능한 마나와 반응하며 바깥세상으로 스며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하준은 지하에서 솔아를 붙잡고 추궁했다. “이솔아! 네가 그 버섯 요정들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녀석들이 학원 전체로 퍼지고 있어!”

    “제가 뭘 했다고 그래요! 그냥 제 마나가 조금 스며들었을 뿐인데… 걔들이 그렇게 반응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어이없다는 듯 솔아를 보던 하준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좋아. 어쩔 수 없지. 네 마나가 녀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면, 역으로 네 마나로 녀석들을 다시 지하로 돌려보내는 방법을 찾아야 해.”

    그렇게 아르카나 학원의 수석과 학원의 예측 불가능한 말썽꾸러기는 학원의 가장 끔찍한 금기를 감추기 위한 기묘한 동맹을 맺게 되었다. 둘은 밤마다 몰래 지하로 내려가 마나 먹보와 버섯 요정들을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해프닝이 발생했다. 솔아의 마법은 번번이 예상 밖의 결과물을 만들어냈고, 하준은 매번 이마를 짚거나 기겁을 했다. 한번은 버섯 요정들이 솔아의 마나와 반응해 하준의 지팡이를 거대한 핑크색 솜사탕으로 바꿔버리기도 했다.

    “이솔아, 제발 좀 진정해!” 하준은 솜사탕 지팡이를 들고 절규했다.

    “죄송해요! 저도 이런 마법은 처음이에요!” 솔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솜사탕 지팡이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근데 이거… 엄청 맛있네요?”

    하준은 솔아의 해맑은 얼굴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감정이 그의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솔아의 예측 불가능한 마나는 혼돈 그 자체였지만, 어딘가 따뜻하고 순수한 에너지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누구도 두려워했던 마나 먹보를 신기하게 여기며 말을 걸 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

    드디어 학원의 가장 큰 행사, ‘창립자의 날’이 다가왔다. 아르카나 학원의 모든 학생들과 교수진, 그리고 학부모와 귀빈들이 연단 앞에 모여 창립자의 업적을 기리는 순간. 멜리사 교장 선생님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한 표정으로 연단에 올랐다.

    “친애하는 아르카나 학원의 가족 여러분!”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쨍그랑!

    연단 뒤편에서 거대한 마나 측정기가 쓰러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틈으로, 수천, 수만 마리의 버섯 요정들이 “뾰로롱뾰로롱!” 하는 소리와 함께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요정들은 연단 위로, 귀빈들의 머리 위로, 학생들의 마법 지팡이 위로 흩뿌려졌다. 연단에 놓여 있던 창립자의 초상화는 삽시간에 온몸이 은빛으로 번쩍이는 거대한 핑크 토끼 인형으로 변해버렸다!

    “맙소사! 이게 무슨 짓이냐!” 멜리사 교장 선생님은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아침에 사라졌던 작은 뿔이 다시 돋아나 있었다.

    “서둘러, 선배!” 솔아는 하준을 향해 소리쳤다. “제 마나가 제일 잘 통하는 것 같아요!”

    솔아는 자신의 지팡이를 높이 들었다. 그녀의 몸에서 예측 불가능한 마나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마나의 흐름은 마치 춤을 추듯 자유분방하게 버섯 요정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요정들은 솔아의 마나에 반응하여 더욱 격렬하게 춤을 추는 듯했다.

    하준은 침착하게 솔아의 마나 흐름을 자신의 안정된 마법으로 보조했다. 그의 마나는 솔아의 예측 불가능한 마나를 잡아주고, 방향을 제시해 주는 닻과 같았다. 둘의 마나가 얽히고설켜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을 이루자, 홀에 퍼져나가던 버섯 요정들이 빛나는 물방울로 변하기 시작했다. 퐁! 퐁! 터지는 물방울들은 학원 전체를 신비로운 빛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요정들은 다시 순수한 마나의 형태로 돌아가 거대한 ‘마나 먹보’에게 흡수되었다.

    ***

    모든 것이 정리된 후, 학원 전체는 고요함 속에 잠겼다. 창립자의 초상화는 원래대로 돌아왔고, 교장 선생님의 뿔도 사라졌다.

    멜리사 교장 선생님은 솔아와 하준을 번갈아 보았다. “그래서… 저 괴상한 버섯 요정들이 전부 네 마나와 연관이 있다는 거냐, 이솔아?”

    솔아는 쭈뼛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제 마나가 원래 좀 독특해서요…”

    하준이 대신 나섰다. “이솔아의 마나가 ‘마나 먹보’와 버섯 요정들의 마나 흐름을 안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어쩌면 이 ‘금기’는… 이솔아의 마나를 통해 비로소 제 기능을 찾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멜리사 교장 선생님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끔찍한 금기’가 ‘학원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아이러니에 당황한 듯했다. 아르카나 학원의 명성은 마나 순환 시스템의 완벽함에 달렸으니, 이 ‘마나 먹보’를 ‘특이 마나 순환 장치’로 포장하면 되는 문제였다.

    그날 저녁, 모든 소동이 잠잠해진 후, 솔아는 하준과 함께 학원 뜰에 앉아 있었다. 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질 듯 빛나고 있었다.

    “선배, 그런데 ‘마나 먹보’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솔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준은 피식 웃었다. “이제 더 이상 ‘끔찍한 금기’는 아니게 될 거야. 교장 선생님이 새로운 ‘마나 순환 장치’라고 부르기로 했어. 그리고…”

    그는 솔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네가 가끔 가서 마나를 안정시켜줘야 할 것 같아. 네 특별한 마나가 그 녀석과 가장 잘 맞으니까.”

    솔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제… 제가요?”

    “응. 그리고… 나도 같이 갈게. 혼자 두기엔 네 마나가 너무 위험하니까.” 하준의 눈빛은 별빛처럼 부드럽게 빛났다. “아니, 사실은… 혼자 두기엔 네가 너무 위험하니까.”

    솔아는 고개를 숙였다. 쿵, 쿵, 쿵. 심장이 버섯 요정들처럼 뾰로롱 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하늘의 별을 올려다봤다. 아르카나 마법 학원의 지하에는 더 이상 ‘끔찍한 금기’가 아닌, 작고 귀여운 비밀이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비밀은, 두 사람의 가장 로맨틱한 동기가 될 것이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독립적인 단편 소설

    차디찬 금속성 알림음이 가상현실 다이브 헬멧 속으로 울려 퍼졌다. [미궁의 서재] 공식 알림: “길드 ‘황금 가지’의 남작 발레리우스가 자신의 서재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현재 서재는 외부인 출입 금지 상태이며, 밀실 살인으로 추정됩니다. 모든 플레이어는 수사에 협조해 주십시오.”

    코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흥미로운데. 이 지루한 연금술 레시피 탐색 와중에 이런 자극적인 사건이라니. 그는 시스템 메시지를 닫고, 현재 위치인 [어둠골 공동 묘지]의 스산한 분위기를 뒤로한 채 [발레리우스 남작 저택]으로 향하는 전이 마법을 시전했다.

    “젠장, 대체 누가 이럴 수 있어? 이 방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
    저택의 거대한 강철 문 앞에는 이미 수십 명의 플레이어와 NPC 경비병들이 웅성거리고 있었다. 현장 보존이라는 명목 아래, 아무도 서재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코드의 시선은 곧장 굳게 닫힌 서재의 육중한 문에 박혔다. 낡았지만 견고한 참나무 문은 두꺼운 강철 볼트로 단단히 걸쇠 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 볼트들은 모두 안에서 걸린 상태였다.

    “코드님, 오셨군요!”
    경비대장 NPC인 ‘엘런’이 코드를 발견하고 안도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정말 끔찍합니다. 남작님은 늘 저택을 삼엄하게 관리하셨는데… 이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문은 안에서 잠겼고, 창문은 모조리 쇠창살로 막혀 있습니다. 환기구도, 비밀 통로도 없습니다. 완벽한 밀실입니다.”

    코드는 아무 말 없이 엘런의 말을 들으며 문 주변을 훑었다. 문틀에는 미세한 먼지조차 없이 깨끗했지만, 코드의 예리한 시선은 문 아래쪽 틈새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은색 가루 한두 개를 놓치지 않았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의, 마치 잘게 부서진 별빛 같은 조각들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볼까요.”
    코드의 말에 엘런은 당황했다. “하지만… 밀실이라… 어떻게 들어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사건 현장에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수사를 하겠습니까?” 코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열쇠가 필요하겠군요. 이 문의 마스터 키를 가지고 있는 자는 누구입니까?”
    “남작님 본인과… 집사 카셀 뿐입니다.”
    “카셀을 불러오세요. 그리고 방에 들어갈 모든 인원은 맨손으로 아무것도 만지지 않도록 주의하고, 발자국을 남기지 않도록 천 조각을 덧댈 것.”

    잠시 후, 땀에 젖은 얼굴의 집사 카셀이 도착했고, 코드는 그에게서 마스터 키를 건네받았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참나무 문이 마침내 열리고, 서재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레리우스 남작은 서재 중앙의 앤티크 책상 위, 수많은 책 더미에 파묻힌 채 쓰러져 있었다. 가슴팍에는 거대한 칼이 박혀 있었고, 그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맙소사…!” 여기저기서 낮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코드는 천천히 서재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게임 속 그래픽은 현실보다 더 섬세하고 생생하게 범죄 현장을 구현해냈다.
    우선 시신을 살폈다. 살해 시각은 대략 2시간 전. 치명상은 가슴에 박힌 칼에 의한 것. 사망 당시 남작은 자신의 가장 아끼는 유물 중 하나인 ‘별의 비망록’을 양손에 꼭 쥐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혹은 누군가에게 주려는 듯.

    그는 천천히 서재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수많은 고서적과 희귀 유물들이 즐비한 방.
    “남작님은… 문을 잠그고 혼자 글을 쓰거나 유물을 감상하셨습니다. 평소에도 외부인의 침입을 극도로 경계하셨죠.” 집사 카셀이 침통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무도 남작님 허락 없이 이 방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코드는 창문으로 다가갔다. 모든 창문은 두꺼운 쇠창살로 막혀 있었고, 안쪽에는 굳게 닫힌 덧문까지 있었다. 잠금쇠 역시 안에서 걸려 있었다.
    “완벽한 밀실이군.” 코드가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 문으로 돌아왔다. 문 안쪽에는 육중한 강철 볼트들이 단단히 걸려 있었다. 그런데, 코드의 눈에 문 상단, 볼트와 문틀 사이에 아주 희미하게 긁힌 자국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금속이 다른 금속에 마찰되어 생긴 것처럼 보였으나, 위치가 너무 높고 애매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서재의 중앙으로 돌아왔다. 남작의 시신이 있는 책상에서 시선을 돌려, 그는 방을 가로질러 벽에 걸린 거대한 거울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거울은 [미궁의 서재]에서 희귀한 유물로 통하는 ‘공간 왜곡의 거울’이었다. 착시 현상을 일으키거나, 멀리 있는 풍경을 비추는 등 다양한 마법적 기능을 가진 아이템이었다. 남작은 이 거울을 특히 아꼈다고 알려져 있었다.

    코드는 거울 가까이 다가갔다. 거울 주변의 벽지는 다른 곳과 달리 미묘하게 들떠 있었다. 마치 거울이 최근에 살짝 움직였던 것처럼. 그리고 그 거울의 뒷면, 벽과 거울 사이에 미세한 틈새로 아까 문 아래에서 보았던 것과 동일한 은색 가루, ‘공간의 잔향’이 희미하게 묻어 있었다.

    “이게 단서로군.”
    코드는 거울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공간의 잔향’은 [공간 조작의 팔찌]라는 희귀한 유물에서만 나오는 마력 잔류물이다. 이 팔찌는 사용자가 아주 작은 공간 균열을 만들거나, 제한적으로 물체를 텔레키네시스로 조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때, 저택의 또 다른 플레이어인 ‘어둠의 사냥꾼’ 길드의 길드장인 ‘레오나르도’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코드를 믿지 마십시오! 저자는 단지 흥미를 위해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몰아갈 겁니다!” 레오나르도는 남작과 사업적으로 깊이 얽혀 있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어둠의 사냥꾼 길드는 황금 가지 길드의 숙적이었다.

    코드는 레오나르도를 쳐다보지도 않고 천천히 거울을 벽에서 떼어냈다. 그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벽일 뿐이었다.
    “아무것도 없지 않습니까!” 레오나르도가 비웃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겠죠.” 코드는 거울을 원래 자리에 다시 걸어두었다. “만약 범인이 [공간 조작의 팔찌]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 밀실은 더 이상 밀실이 아니게 됩니다.”

    주변의 시선이 코드에게 집중되었다.
    “범인은 남작을 살해했습니다.” 코드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 후, 이 방의 모든 문과 창문을 안에서 잠갔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갔죠.”
    “말도 안 돼! 어떻게 나갔다는 겁니까?” 엘런이 소리쳤다.
    “이 ‘공간 왜곡의 거울’을 이용했습니다.” 코드는 거울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공간 조작의 팔찌]도 함께 사용했죠. 이 거울은 단순한 유물이 아닙니다. 아주 미세하게, 주변의 공간을 휘게 만드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팔찌로 만들어진 공간 균열은 평소에는 극도로 작아 아무것도 통과할 수 없지만, 이 거울의 왜곡과 중첩되면 아주 잠깐 동안이지만, 특정 지점에 ‘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코드는 시선을 문 상단의 긁힌 자국으로 옮겼다.
    “범인은 [공간 조작의 팔찌]를 이용해 이 거울 뒤에 아주 작은 공간 균열을 만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균열을 통해 손에 쥔 ‘문걸쇠 조작 도구’ 같은 것을 밖으로 내밀어 문 상단의 외부 볼트를 잠갔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문 상단으로 향했다. 그들은 코드가 짚어낸 긁힌 자국을 보았고, 그제야 그 자국이 왜 그렇게 높은 곳에, 그리고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에서 생긴 것 같은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나갔다면… 안의 볼트는 여전히 걸려 있는 상태로 남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한 플레이어가 질문했다.
    “그렇습니다.” 코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이 이 공간 균열을 통해 밖으로 나가려면, 안쪽 볼트를 먼저 잠근 뒤, 다시 팔찌를 이용해 밖에서 외부 볼트를 잠가야 합니다. 그리고 문 아래쪽 틈새와 거울 뒤에서 발견된 ‘공간의 잔향’은 범인이 여러 번 공간 균열을 열고 닫았다는 증거입니다. 아마도 문을 나가기 전, 안쪽에서 외부 볼트를 잠그고 나가는 데 팔찌의 마력을 많이 소모했을 겁니다. 그리고 나간 뒤에는 다시 문이 안에서 잠긴 것처럼 보이도록 외부 볼트를 다시 건드려 최종적으로 잠갔을 테죠.”

    엘런이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어떻게 나간 뒤에 다시 안에서 잠긴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었단 말입니까?”
    “그게 바로 밀실 트릭의 핵심이죠.” 코드가 말했다. “범인은 문이 닫히기 직전, 거울 뒤 공간 균열을 통해 문 바깥으로 손을 내밀어 문을 닫는 동시에 외부 잠금쇠를 조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이 완벽하게 닫히고, 안쪽 볼트가 잠긴 것처럼 보이도록 밖에서 팔찌를 이용해 조작했을 겁니다. 이 방의 문은 외부에서도 특정한 방식으로 힘을 가하면 내부 볼트가 작동하는 구조로 되어 있죠. 물론, 아주 복잡하고 미세한 조작이 필요해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불가능하지만요. [공간 조작의 팔찌]가 아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입니다.”

    코드는 모든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레오나르도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공간 조작의 팔찌]는 이 게임에서 단 두 개만 존재하는 유물입니다. 하나는 이미 죽은 남작 발레리우스가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어둠의 사냥꾼 길드장, 당신의 수집품 중 하나죠.”

    정적이 흘렀다. 레오나르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무슨 헛소리야! 나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어!”
    “정말입니까?” 코드가 팔짱을 끼며 비웃었다. “그럼 남작의 손에 쥐여 있던 ‘별의 비망록’은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그 비망록은 당신의 길드만이 가지고 있는 암호로 적혀 있지 않습니까? 남작이 당신을 만나러 갔다가, 혹은 당신에게 무언가에 대해 경고하려고 했지만… 결국 살해당하고, 그 증거를 놓지 않으려고 했던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코드가 말을 이었다. “남작의 시신 주변에서 발견된 칼은, [어둠의 사냥꾼] 길드의 문양이 새겨진 단검입니다. 당신의 길드원이라면 누구나 소지하는 기본 장비 중 하나죠. 아무리 시뮬레이션이라 해도, 이렇게나 많은 증거를 남기고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까?”

    레오나르도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좌절감으로 일그러졌고, 이내 온몸에서 시스템의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플레이어 레오나르도가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심판의 방으로 이송됩니다.]

    코드의 입가에 다시금 옅은 미소가 감돌았다. 역시 이 게임은 지루할 틈이 없다. 탐색 퀘스트도 좋지만, 가끔은 이렇게 머리 쓰는 일이 더 짜릿하다. 그는 어지러이 흩어진 책들 사이를 지나쳐 서재를 나섰다. 밖은 여전히 웅성거리는 플레이어들과 경비병들로 가득했다. 오늘 밤, [미궁의 서재]의 세계는 잠시 동안 떠들썩할 것이다. 천재 탐정 코드의 이름과 함께.

  • 로맨틱 코미디 독립적인 단편 소설

    하늘은 높고, 푸르렀으나, 황금 제국의 수도 ‘칼렌시아’의 뒷골목은 어둡고 눅진했다. 길모퉁이에 자리한 조그만 빵집 ‘달콤한 도피처’의 주인, 아리(26세)는 이른 아침부터 밀가루 반죽을 치대며 열기로 가득 찬 주방에서 땀을 흘렸다. “젠장, 또 설탕세가 올랐다고? 이쯤 되면 빵에 금가루라도 뿌려야겠어.” 덧문에 붙은 제국의 새 공고문을 째려보며 아리가 투덜거렸다. 그녀의 손은 리드미컬하게 반죽을 때리고 밀었고, 그 움직임에는 오랜 세월 제국의 횡포에 시달린 민초들의 분노가 서려 있었다.

    빵집 문이 달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들어섰다. 퀴퀴한 흙먼지를 뒤집어쓴 낡은 외투 차림의 사내였다. 그의 눈빛은 짙은 그림자 속에 가려져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단단함은 숨길 수 없었다. 사내는 가게 안을 쓱 훑어보더니, 갓 구워져 나온 빵들의 향기에 살짝 코를 찡긋했다.

    “여기, 배고픈 아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좀 구할 수 있습니까?” 사내가 묻는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아리는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아이들? 요 며칠 아이들 코스프레하고 먹을 거 얻어가려는 덩치 큰 양반들이 부쩍 늘었더군요. 설마 당신도?”

    사내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피곤함과 동시에 어딘가 익살스러운 기운을 담고 있었다. “나는 덩치가 좀 크지만, 내 동료들이 데리고 있는 아이들은 정말 배고픕니다.”

    “동료? 길드라도 되는 모양이지?” 아리는 콧방귀를 뀌며 어제 팔다 남은 굳은 빵 몇 조각을 대충 봉투에 담았다. “이게 전부예요. 돈은 없어도 공짜는 없으니까.”

    사내는 아리가 내민 봉투를 받아 들더니, 품속에서 구겨진 은화를 몇 개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고맙습니다. 아가씨의 빵은… 굳어도 맛있군요.”

    “굳은 빵을 돈 주고 사 먹으면서 그 말은 모욕 아닌가요?” 아리가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가게 문을 나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아리는 문득 그의 어깨 뒤로 보이는 외투 아래, 칼집에 번뜩이는 강철 조각을 보았다. ‘뭐야, 그냥 평범한 거지떼가 아니었잖아?’

    그날 밤, 아리는 밀린 장부 정리를 하며 창밖을 내다봤다. 제국군의 순찰대가 횃불을 들고 거리를 지나갔다.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쯤, 다시 빵집 문이 달랑거렸다. 낮의 그 사내였다. 이번에는 외투가 젖어 있었고, 빗물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또 아이들 때문입니까?” 아리가 반쯤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사내는 봉투를 건넸다. 낮에 그녀가 준 빵 봉투였다. “오해가 좀 있었던 것 같군요. 당신은… 이대로 제국의 횡포를 보고만 있을 겁니까?”

    아리는 봉투를 받아 들고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무슨 꿍꿍이에요? 제국군 끄나풀이면 당장 나가요.”

    “나는 제국에 맞서는 자입니다. 이름은 진우.” 진우는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 훨씬 더 날카로웠고, 결의에 차 있었다. “당신의 빵집이 필요합니다. 정보를 교환하고, 동지들을 모으며, 배고픈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은밀한 거점으로서.”

    아리는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내 빵집이요? 농담도 참. 난 그냥 빵 굽는 사람이에요. 무슨 거점? 반란 같은 거창한 말은 나와는 상관없어요.”

    “상관없다고요?” 진우가 한 발짝 다가섰다. “당신이 굽는 빵에 붙는 터무니없는 설탕세, 밀가루세는요? 매달 제국군에 상납해야 하는 공물은요? 매일 밤 배를 ꋷ고 잠드는 아이들은요? 그 모든 것이 당신과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리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진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상관있죠. 그래서 매일 이렇게 욕하고, 투덜거리고, 한숨 쉬는 겁니다. 그렇다고 내가 칼 들고 거리로 뛰쳐나갈 수는 없잖아요.”

    “칼은 우리가 들 겁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힘을 줄 수 있습니다. 빵으로.” 진우는 테이블 위의 반죽용 밀가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신의 빵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지친 영혼을 위로합니다. 그 어떤 선동보다 강력할 수 있습니다.”

    아리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말에 설득당해서라기보다는, 그의 눈에 비친 확고한 신념과, 그에게서 느껴지는 피곤함 속의 간절함 때문이었다. “좋아요. 딱 일주일만. 대신, 내 빵값은 제대로 지불해야 할 거예요. 나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니까.”

    그렇게 ‘달콤한 도피처’는 낮에는 평범한 빵집, 밤에는 ‘새벽의 그림자’라는 반란 조직의 은밀한 거점이 되었다. 진우는 매일 밤 조직원들과 함께 아리의 빵집으로 몰려들었고, 아리는 그들에게 갓 구운 빵과 따뜻한 수프를 제공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의 티격태격 로맨틱 코미디가 시작되었다.

    “진우 씨, 당신 동료는 왜 맨날 식빵을 다섯 개씩 먹어요? 곰인가요?” 아리가 쟁반을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뚱딴지는 원래 좀 많이 먹습니다. 힘쓰는 일이 많아서요. 아리 씨 빵이 맛있기도 하고.” 진우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칭찬을 가장한 돌려 까기입니까? 그럼 뚱딴지는 힘쓰고, 당신은 뭐 해요? 여기서 작전 짠다고 밤새도록 펜만 굴리는데, 뾰족이처럼 똑똑한 건지도 모르겠고.”

    “저는… 총대 메는 일이죠. 그리고 아리 씨에게 잔소리 듣는 일도.” 진우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눈빛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아리는 픽 웃었다. “아니, 빵집이 놀이터인 줄 알아요? 그리고 당신, 밀가루통 옆에 칼을 그렇게 아무렇게나 두면 어떡해요? 이거 위생상 문제라고요!”

    “아, 죄송합니다. 급해서.” 진우는 황급히 칼을 치웠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어설펐고, 아리는 그 모습에 한숨을 쉬면서도 묘한 감정을 느꼈다. 강직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허술한 구석이 많았다.

    어느 날 밤, 중요한 작전을 앞두고 진우는 아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제국군의 식량 보급 수레를 습격하여 빼앗긴 세금을 되찾아오자는 계획이었다. “제국군 보급로는 늘 삼엄합니다. 뾰족이가 알아낸 바로는, 뒷골목을 통하는 지름길이 있는데… 거기는 미로 같아서 길을 잃기 쉽습니다.”

    “미로요? 이 골목에서 태어나 이 빵집에서 자랐는데, 내가 모르는 길이 있을 것 같아요?” 아리가 자신만만하게 팔짱을 꼈다. “내가 지도를 그려줄게요. 아니, 내가 직접 길 안내를 할 수도 있지.”

    진우는 놀란 눈으로 아리를 봤다. “위험합니다. 아리 씨는 이곳에서 가장 중요해요.”

    “내가 없으면 보급 수레를 털어 와도 먹을 빵이 없는데, 뭐가 더 중요해요? 그리고 이 작전 성공하면 우리 빵집 매출에도 큰 도움이 될 텐데. 내가 가야지!” 아리는 기어코 진우를 따라나서겠다고 우겼다. 그녀의 단호한 모습에 진우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작전 당일, 아리는 밀가루 자루를 짊어진 척 위장하여 진우와 함께 나섰다. 어두운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치며 그들은 제국군 보급 수레가 지나갈 경로를 미리 파악했다. 아리는 마치 거미줄처럼 얽힌 골목길을 거침없이 안내했고, 진우는 그런 아리의 능숙함에 감탄했다.

    “이 길이 가장 빠르고, 저쪽 구석에는 감시병의 시야를 가리는 담벼락이 있어요. 그리고… 저기, 저 냄새 맡아봐요.” 아리가 고개를 갸웃하며 킁킁거렸다. “아마 제국군 보급 수레에 들어갈 고급 치즈 냄새일 거예요. 내가 개발한 신메뉴 ‘폭군 치즈 타르트’에 딱인데.”

    진우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 작전 중인데 음식 타령입니까? 아리 씨는 정말….”

    “작전 중에도 먹고살 걱정은 해야죠! 그리고 내 빵집 레시피를 위한 첩보 활동이기도 하고.”

    바로 그때, 멀리서 철컥거리는 수레바퀴 소리와 함께 제국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다!” 진우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작전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진우와 뚱딴지, 뾰족이 등 ‘새벽의 그림자’ 조직원들은 아리가 알려준 지점을 따라 보급 수레를 기습했다. 아리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나 빵집에서 가져온 ‘특제 방해용 끈적 달콤 빵’을 던졌다. 빵은 제국군 병사들의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시야를 가렸고, 그들은 끈적한 빵을 떼어내느라 혼비백산했다.

    “이게 무슨… 빵이 왜 이렇게 끈적거려?!”

    “윽, 눈에 들어갔다!”

    혼란을 틈타 진우의 동료들은 재빠르게 수레를 제압했다. 그러나 한 병사가 아리를 발견하고 칼을 휘둘렀다. “꼼짝 마라, 반란군의 쥐새끼!”

    아리는 얼어붙었다. 그때 진우가 번개처럼 그녀 앞을 가로막으며 병사의 칼을 막아섰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밤하늘에 울렸다. “감히 우리 아리 씨에게 손대려 해?!”

    진우의 목소리에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는 칼날을 쳐내고 병사를 제압했다. 아리는 그의 뒤에 서서, 그의 넓은 어깨와 거친 숨소리를 느끼며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 남자, 의외로 듬직하잖아….’

    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다. 빼앗겼던 세금과 함께 귀한 식량들이 민초들에게 돌아갔다. 사람들은 환호했고, ‘새벽의 그림자’의 명성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작전 후, 아리의 빵집은 다시 조용해졌다. 진우는 상처를 치료하고 있는 아리의 옆에 앉았다. “괜찮습니까? 다칠 뻔했어요.”

    “덕분에 살아났죠, 뭐.” 아리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귓가는 살짝 붉어져 있었다. “그 칼놀림은 어디서 배웠어요? 빵만 굽는 줄 알았더니.”

    진우는 피식 웃었다. “빵만 굽는 아리 씨 덕분에 나도 칼을 더 잘 휘두르게 된 겁니다.”

    “이게 다 내 덕이라는 말이에요?”

    “그럼요. 당신의 빵이 나에게 힘을 주고, 당신의 잔소리가 나를 채찍질하죠.” 진우가 아리의 손에 쥐여진 굳은 빵 조각을 바라봤다. “가끔은… 당신의 빵처럼, 겉은 딱딱해도 속은 따뜻한 사람 같아요.”

    아리는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무슨… 빵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내가 언제 딱딱했다고요? 난 항상 부드러웠지!”

    “그럼요, 그럼요.”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리의 손을 슬쩍 잡았다. 그의 손은 거칠었지만 따뜻했다. 아리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오히려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그래서, 다음 작전은 뭐예요?” 아리가 물었다.

    진우는 그녀의 손을 꼭 쥐며 웃었다. “다음 작전은… 이 제국을 달콤하게 뒤집어엎는 겁니다. 당신의 빵과 함께라면 가능할 거예요.”

    아리는 진우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피곤함과 함께 강한 신념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에 대한 묘한 감정까지.

    “좋아요. 그럼 다음 작전은 ‘폭군 제국 전복 기념 케이크’를 만드는 걸로 하죠.” 아리가 피식 웃으며 진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들의 손에는 희망과 사랑, 그리고 달콤한 반란의 끈끈한 서약이 담겨 있었다. 제국은 아직 건재했지만, 칼렌시아의 뒷골목, 달콤한 도피처 빵집에서는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아주 달콤하고, 아주 뜨거운 바람이.

  • 메카 액션 상세한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

    ## 기계 심장: 반역의 서곡

    **시놉시스:**
    거대하고 부패한 ‘강철 제국’의 지배 아래, 평민들은 숨조차 쉬기 어려운 삶을 살아간다. 제국의 첨단 기계병기 ‘골렘’은 그들의 유일한 희망마저 짓밟는다. 먼지투성이 변두리 정착지에서 고물 기계를 수리하며 살아가던 젊은이, 강휘. 그의 삶은 제국의 무자비한 수탈과 폭력에 의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잊혀진 고대 기계 ‘천둥’을 만나면서 운명의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과연 그는 제국의 강철 심장에 균열을 낼 수 있을까?

    **[장면 1]**

    **장소:** 변두리 정착지 ‘먼지골’ – 낡은 고물상 작업장
    **시간:** 해 질 녘

    **[화면]**
    하늘은 잿빛 먼지로 탁하게 물들어 있고, 거대한 황제궁의 첨탑만이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그와 대조적으로, 화면 하단에는 녹슬고 낡은 금속 조각들로 가득 찬, 허름한 정착지가 펼쳐진다. 좁은 골목길 사이로 아이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놀고, 피곤에 절은 어른들은 무거운 짐을 옮기고 있다.

    고물상 작업장. 거대한 고철 더미 사이로 낡은 작업등 하나가 겨우 빛을 밝히고 있다. 젊은 남자가 너저분한 작업복 차림으로 쪼그려 앉아 있다. 그의 손은 기름때로 거뭇하고, 렌치와 전선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는 작업대 위로 분해된 기계 부품들이 흩어져 있다.

    **강휘 (20대 초반, 날카로운 눈매, 지쳐 보이지만 어딘가 반항적인 표정)**
    (한숨을 쉬며) 빌어먹을… 또 이 부품이 문제잖아.

    그는 낡은 작업등을 좀 더 가까이 당겨 고물 기계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희미하게 깜빡이던 전원 램프는 기어이 꺼지고 만다. 강휘는 작업용 장갑을 벗어 던지며 머리를 헝클어트린다.

    **강휘 (독백)**
    이 빌어먹을 제국 놈들은, 쓸 만한 건 모조리 가져가고, 이런 쓰레기들만 남겨 놓고서… 뭘 하라는 건지. 우리에게 남은 건 이 망가진 기계들과, 부서진 희망뿐인가?

    작업장 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어른들의 언성이 섞여 있다. 강휘는 무심하게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심상치 않은 정적에 고개를 든다.

    **[장면 2]**

    **장소:** 먼지골 – 정착지 입구
    **시간:** 즉시

    **[화면]**
    정착지 입구. 거대한 제국군 ‘골렘’ 몇 대가 굉음을 내며 서 있다. 강철로 번쩍이는 육중한 팔다리, 위압적인 디자인은 보는 이들을 압도한다. 골렘 조종석에서는 차가운 눈빛의 제국군 병사들이 내려다보고 있고, 그들 앞에는 공포에 질린 먼지골 주민들이 무릎을 꿇거나 웅크리고 있다.

    제국군 병사들이 주민들의 짐을 뒤지고, 먹을 것을 빼앗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들은 엄마의 치마폭에 숨어 흐느끼고, 늙은이는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제국군 병사 A (차가운 목소리, 확성기를 통해 울려 퍼진다)**
    자원 수탈은 제국의 정당한 권리다! 저항하는 자는 반역자로 간주, 즉결 처형될 것이다! 순순히 따르라!

    강휘는 작업장에서 뛰쳐나와 이 광경을 목격한다. 그의 눈빛에 분노와 무력감이 교차한다. 그는 이를 악문다.

    **강휘 (독백)**
    빌어먹을… 빌어먹을 제국!

    한 제국군 병사가 어린아이의 손에 들려 있던 낡은 빵 조각을 빼앗아 바닥에 던진다.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고, 그 아이의 엄마가 달려들어 병사의 발밑에 매달린다.

    **아이 엄마 (울부짖으며)**
    제발… 제발 우리 아이에게 먹일 것만은…!

    병사는 아이 엄마를 발로 걷어찬다. 여자는 힘없이 쓰러진다. 강휘의 주먹이 떨린다. 그는 앞으로 나서려 하지만, 옆에서 류진이 그의 어깨를 잡는다.

    **류진 (50대 중반, 온화하지만 단단한 표정, 먼지골의 지도자 격 인물)**
    (낮은 목소리로) 진정해, 강휘. 지금은 때가 아니야.

    **강휘 (분노에 찬 목소리로)**
    하지만…! 저들을 그냥 놔둘 수 없어요!

    **류진**
    죽음만이 기다릴 뿐이다. 우리의 힘으로는 저 거대한 강철 괴물들을 이길 수 없어.

    그 순간, 멀리서 또 다른 골렘 부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것이 보인다. 제국군의 지원 병력이다. 류진은 강휘의 팔을 잡아끌며 황급히 몸을 숨긴다. 강휘는 눈물을 흘리는 아이와 쓰러진 여자를 뒤로한 채, 무력하게 끌려간다.

    **[장면 3]**

    **장소:** 먼지골 외곽 – 버려진 옛 기계 격납고
    **시간:** 밤

    **[화면]**
    정착지 외곽, 갈대밭 너머로 낡고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희미하게 보인다. 수십 년간 버려진 듯, 녹이 슬고 이끼가 낀 옛 기계 격납고다. 강휘는 류진과 함께 이곳으로 숨어들어 왔다. 격납고 안은 어둠과 먼지로 가득 차 있고, 습하고 눅눅한 공기가 느껴진다.

    **류진**
    이제 밤이 되면, 제국군 놈들이 더 날뛸 거다. 살아남은 이들은 숨어 지내야 해.

    **강휘**
    (벽에 기대어 주저앉으며)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숨어만 있어야 합니까? 언제까지 저들에게 짓밟혀야 하냐고요!

    **류진**
    나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언젠가, 이 어둠을 걷어낼 빛이 찾아올 거라고 믿는다.

    강휘는 고개를 떨군다. 그의 눈에 분노와 절망, 그리고 어렴풋한 결의가 스친다. 그는 문득 격납고 안쪽 깊숙한 곳에 쌓여 있는 고철 더미를 응시한다. 그곳에선 유독 거대한 형체가 어렴풋이 드러나 있었다.

    **강휘**
    (혼잣말처럼) 어둠을 걷어낼 빛…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철 더미를 향해 걸어간다. 류진은 의아한 표정으로 강휘를 바라본다.

    **류진**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강휘. 그저 오래된 폐기물일 뿐…

    강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낡은 천막과 부식된 금속 조각들을 걷어낸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고, 그 아래에서 거대한 금속의 실루엣이 드러난다. 그것은 일반적인 제국군 골렘과는 확연히 다른, 날카롭고 유려한 곡선미를 가진 기체였다. 수십 년간 잠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위용은 압도적이었다.

    **강휘**
    (눈을 크게 뜨고) 이게… 뭐야?

    기체의 중앙에는 알 수 없는 문양과 함께 투박하지만 강인해 보이는 해골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강휘는 조심스럽게 기체 표면을 어루만진다. 차갑고 단단한 금속의 감촉이 그의 손끝에 전해진다.

    **류진**
    (놀란 목소리로) 저건… 전설로만 전해지던 고대의 기계병기… ‘천둥’인가? 설마… 아직까지 여기에 남아있었을 줄이야…

    천둥의 조종석 해치가 희미하게 열려 있는 것을 발견한 강휘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선다. 낡은 계기판과 복잡한 조작 장치들이 그의 눈앞에 펼쳐진다. 그는 작업복 주머니에서 작은 공구들을 꺼내들고, 망설임 없이 기계의 내부를 들여다본다.

    **강휘 (독백)**
    이 기계… 살아있어. 숨 쉬고 있어…

    그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낡은 메인 스위치를 향한다. 손가락이 스위치에 닿자, 기체 내부에서 희미하게 파란빛이 깜빡이기 시작한다. 먼지투성이었던 계기판에 생기가 돌고, 잠들어 있던 기계의 심장이 서서히 뛰기 시작한다.

    **류진**
    (황급히) 강휘! 위험해!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하지만 강휘는 이미 기계와 하나가 된 듯, 주변의 소음조차 들리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의 눈은 활성화되는 천둥의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체 전체에서 나지막한 웅웅거림이 울려 퍼지고, 먼지 쌓인 격납고 안을 거대한 에너지가 채우는 듯한 느낌이 든다.

    **[장면 4]**

    **장소:** 먼지골 외곽 – 갈대밭
    **시간:** 즉시

    **[화면]**
    격납고 문이 거대한 굉음을 내며 열리고, 그 안에서 푸른빛을 내뿜으며 천둥이 모습을 드러낸다. 거대한 기체는 낡은 격납고의 그림자를 뚫고 나오며 달빛 아래 그 위용을 뽐낸다. 강휘는 천둥의 조종석에 앉아, 경이로운 표정으로 눈앞의 풍경을 바라본다.

    **강휘 (감격에 찬 목소리로)**
    움직인다… 정말 움직여!

    천둥의 육중한 팔다리가 천천히 움직이며 갈대밭을 헤치고 나아간다. 기체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부드럽고 강력하게 움직인다. 강휘는 조심스럽게 조작 레버를 움직여본다. 천둥은 그의 의지대로 정확하게 반응한다.

    **류진**
    (천둥의 거대한 발밑에 서서 경외로운 표정으로 올려다본다) 믿을 수 없어… 정말 전설 속의 기계였을 줄이야…

    **강휘**
    (조종석 안에서, 천둥의 거대함을 느끼며) 이걸로… 이걸로라면…!

    그의 눈빛이 결의에 찬다. 제국에 대한 분노, 주민들의 고통, 그리고 이 거대한 기계가 주는 새로운 희망이 그의 마음속에서 뒤섞인다.

    **[장면 5]**

    **장소:** 먼지골 – 정착지 주요 도로
    **시간:** 밤

    **[화면]**
    먼지골 주요 도로. 제국군 골렘들이 순찰을 돌고 있다. 골렘의 발소리가 땅을 울리고, 그들의 스포트라이트가 어둠을 헤치며 주민들의 낡은 집들을 비춘다. 주민들은 창문 틈으로 숨죽여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제국군 병사 B (확성기를 통해)**
    통행 금지 시간을 어기는 자는 즉시 체포된다! 모든 불빛을 끄고 순순히 따르라!

    바로 그때, 멀리서 굉음과 함께 갈대밭을 헤치고 천둥이 나타난다. 푸른빛을 내뿜는 천둥의 등장에 제국군 골렘들은 일제히 정지한다. 강휘는 천둥의 조종석에서 결연한 표정으로 전방을 응시한다.

    **강휘 (독백)**
    더 이상은… 당하지 않아!

    **제국군 병사 C (놀란 목소리로)**
    저건… 저건 또 뭐야?! 정체불명의 기계다! 공격!

    제국군 골렘들이 일제히 천둥을 향해 기관포를 발사하기 시작한다. 불꽃이 터지고 흙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린다. 강휘는 능숙하게 천둥을 조작하여 공격을 피한다. 천둥은 놀라운 속도와 민첩성으로 거대한 몸을 움직인다.

    **강휘**
    (조작 레버를 꺾으며) 이 정도는… 아직 멀었어!

    천둥의 한쪽 팔에서 강력한 에너지 블레이드가 솟아오른다. 푸른빛으로 번뜩이는 블레이드는 어둠 속에서 섬광처럼 빛난다. 강휘는 망설임 없이 제국군 골렘을 향해 돌진한다.

    **[액션 시퀀스]**
    * **컷 1:** 천둥이 빠른 속도로 돌진하며 제국군 골렘 한 대의 다리를 에너지 블레이드로 베어버린다. 골렘은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린다.
    * **컷 2:** 나머지 제국군 골렘들이 천둥을 향해 집중 사격을 가한다. 천둥은 몸을 회전시켜 공격을 회피하고, 동시에 팔에 장착된 에너지 방패를 펼쳐 총탄을 막아낸다.
    * **컷 3:** 강휘는 천둥의 특수 능력을 활용, 지면에 강력한 진동파를 발생시켜 주변 골렘들을 잠시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다. 그 틈을 타 다른 골렘의 조종석을 블레이드로 꿰뚫는다.

    주민들은 창문 틈으로 이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함께 희미한 희망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류진 (격납고 앞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강휘… 네가 해내는구나…

    두 대의 제국군 골렘이 파괴되고, 나머지 골렘들은 당황하며 후퇴하기 시작한다. 강휘는 숨을 몰아쉬며 천둥의 조종석에 앉아있다. 비록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그는 제국에 작은 균열을 내는 데 성공했다.

    **강휘 (천둥의 심장 박동을 느끼며, 강렬한 눈빛으로)**
    이것이… 우리의 반격이다! 제국… 이제부터 시작이야!

    천둥의 푸른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그의 눈앞에는 황제궁의 첨탑이 여전히 위압적으로 서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절대적인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다.


    **[장면 끝]**

    **[에필로그]**
    먼지골 주민들은 밤새 강휘의 활약에 대한 소문을 속삭인다. 작은 승리였지만, 오랜 절망 속에서 그들에게 찾아온 한 줄기 빛이었다. 그러나 제국은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이 무모한 반역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강휘와 천둥, 그리고 반역의 불씨는 이제 막 타오르기 시작했다.

  • 크툴루 신화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어둠의 심연, 잠든 문

    **에피소드 1: 균열 아래의 침묵**

    **[1화 시작]**

    **[장면 1]**
    **배경:** 삭막한 황무지. 거친 바위산맥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하늘은 짙은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날카로운 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굉음을 낸다. 두 사람이 험준한 바위 능선을 따라 위태롭게 걷고 있다. 앞장선 사람은 배낭을 멘 남성, 그 뒤를 따르는 이는 여성이다. 둘 다 두툼한 방한복과 고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내레이션 (강현):** (작고 불안한 글씨체)
    …아무도 찾지 않았던 곳.
    그 어떤 지도에도, 그 어떤 전설에도 희미하게만 언급되었을 뿐인…
    잊힌 문명의 흔적.

    **내레이션 (강현):**
    미쳤다고 했다. 환상에 사로잡힌 몽상가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진실이…
    이 척박한 땅 아래서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음을.

    **[장면 2]**
    **클로즈업:** 강현의 거친 숨소리. 고글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동자는 피로에 지쳐 있지만, 그 안에 희미하게 불타는 열정이 보인다. 그의 손에 들린 낡은 양피지 지도가 바람에 격렬하게 펄럭인다. 지도의 가장자리엔 알아보기 힘든 고대 문자와 기하학적인 문양이 그려져 있다.

    **강현:**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글과 마스크 사이로 간신히 새어 나오는 목소리)
    …유진, 저기 보여? 저… 저 암석층.
    기록과 일치해! 완벽하게!

    **[장면 3]**
    **시점:** 유진의 등 뒤에서 바라본 강현. 그는 손가락으로 멀리 떨어진 거대한 바위 절벽을 가리키고 있다. 그 절벽 한가운데, 자연적으로 생겼다고 보기 어려운 거대한 균열이 어렴풋이 보인다.

    **유진:** (낮고 침착한 목소리)
    …강현 씨. 아직 확신하긴 이릅니다.
    저기가 우리가 찾던 ‘균열’일지, 아니면 단순한 지형 변화일지는…
    가까이 가봐야 알겠죠.

    **[장면 4]**
    **클로즈업:** 유진의 얼굴. 고글 너머로 드러난 그녀의 눈은 냉철하고 분석적이다. 그녀의 손은 망원경을 쥔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유진:** (나지막이)
    그리고… 저곳까지 가려면 이 암벽을 타야 합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험해요.

    **[장면 5]**
    **전신샷:** 강현과 유진이 암벽을 오르는 모습. 가파른 절벽은 바람과 눈보라에 의해 미끄럽고 불안정하다. 강현은 조금 버거워 보이지만, 유진은 능숙하게 암벽 장비를 다루며 올라간다.

    **효과음:** 쉬이이익- (바람소리)
    **효과음:** 촤라락- (로프 소리)

    **강현:** (끙끙거리며)
    하지만… 저기에 우리의 모든 단서가 있었잖아!
    그… ‘별 없는 자들의 기록’…!

    **유진:** (로프를 조이며)
    그 별 없는 자들이 대체 누구인지도 모르는 채로 말이죠.
    확실한 건, 그들의 기록은 이성적인 인간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강현을 한 번 돌아본다)
    …그걸 읽고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사람이 드물 정도니까.

    **내레이션 (강현):**
    유진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그녀는 언제나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비이성적인 것’에 이끌렸다.
    오랜 꿈처럼, 저 깊은 곳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광기였을까, 아니면…
    진정한 지식에 대한 갈증이었을까.

    **[장면 6]**
    **배경:** 드디어 균열 앞에 도착한 강현과 유진. 균열은 생각보다 거대하고, 마치 무언가 거대한 힘에 의해 강제로 찢겨 나간 듯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균열의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다. 주변 바위에는 희미하게 정교하게 다듬어진 인공적인 흔적들이 보인다.

    **강현:** (숨을 헐떡이며, 감탄한 듯)
    세상에… 정말이야…!
    이건… 자연 현상이 아니야.
    보여, 유진? 이 매끄러운 단면들…
    정확하게 재단된 흔적들이야!

    **유진:** (손전등을 꺼내 균열 안쪽을 비춘다)
    …음. 거대한 구조물의 입구로군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내려갈 수 있는지는 확인해야겠어요.

    **효과음:** 철컥! (손전등 켜지는 소리)

    **[장면 7]**
    **시점:** 손전등 빛이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습. 빛이 닿는 곳은 기괴하게 뒤틀린 암석 벽과, 그 틈새로 뻗어 내려가는 듯한 나선형의 계단이 희미하게 보인다. 계단은 마모되어 있고, 알 수 없는 끈적한 물질로 뒤덮여 있다.

    **유진:** (마이크를 켜고 귀에 댄다)
    강현 씨, 저는 먼저 통신 장비와 환경 센서를 설치할게요.
    내려가는 도중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준비는 철저히 해야 합니다.

    **강현:** (이미 균열 입구에 바싹 다가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알았어, 알았어. 서둘러줘, 유진!
    나는… 나는 한시라도 빨리 저 안으로 들어가야 해!

    **[장면 8]**
    **배경:** 강현이 균열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차가운 공기와 곰팡내, 그리고 알 수 없는 비릿한 냄새가 훅 끼쳐 올라온다. 그의 머리 위로 기괴한 형상의 종유석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

    **내레이션 (강현):**
    그 순간, 내 심장은 광란하듯 뛰었다.
    수천 년간 닫혀 있던 문이, 이제 내 앞에서 열리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초대장.
    어쩌면 지옥으로 향하는 편도 티켓일지도 모를…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장면 9]**
    **클로즈업:** 강현의 손이 균열 입구의 벽을 짚는다. 그의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갑고 축축하며, 마치 살아있는 것 같은 불쾌한 점액질이다. 그의 눈이 불안하게 흔들린다.

    **효과음:** 스윽… (손끝에 닿는 점액 소리)

    **강현:**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건… 뭐야…?
    돌이 아닌… 것 같은데…?

    **[장면 10]**
    **시점:** 강현의 손이 닿았던 벽면을 비춘다. 그곳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듯한 미세한 균사가 얽혀 있고, 점액질 아래로 꿈틀거리는 듯한 어두운 형체가 스쳐 지나간다.

    **유진:** (무전기로 들려오는 목소리)
    강현 씨, 들리십니까?
    환경 센서에서 이상 수치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대기 성분이… 보통이 아니에요.

    **강현:** (정신을 차리며)
    어… 어어, 들려!
    (손을 황급히 뗀다)
    나도… 뭔가 이상한 걸 만졌어.

    **[장면 11]**
    **배경:** 강현과 유진이 드디어 지하 통로로 진입한다. 유진이 로프를 고정하고, 강현은 휴대용 랜턴을 들고 앞장선다. 통로는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깔때기 모양으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기 어려운 각도로 기울어져 있다. 벽면에는 기괴한 문양과 형상을 알아볼 수 없는 조각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강현:** (랜턴으로 벽을 비추며)
    이 문양들…! 고문헌에서 봤던 것들과 비슷해…!
    하지만 훨씬 더… 복잡하고 섬뜩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해.

    **유진:** (주변을 경계하며)
    (한숨) 제발 벽에 너무 가까이 붙지 마세요.
    저 불쾌한 점액은 아직도 흘러내리고 있으니까요.
    (무전기를 확인한다)
    아무래도 대기 중 산소 농도가 조금 낮아지는 것 같습니다.
    공기 정화 마스크를 착용해야겠어요.

    **효과음:** 쏴아아… (어디선가 들려오는 물 흐르는 소리)

    **[장면 12]**
    **시점:** 통로를 따라 내려가던 강현의 랜턴 빛이 한 지점에 멈춘다. 통로가 갑자기 넓어지며 거대한 공간이 나타난다. 수직으로 깎아내린 듯한 절벽 아래로 광대한 동굴이 펼쳐져 있다. 동굴의 중심에는 검은색의 매끄러운 거대한 제단이 솟아 있고, 그 위로 알 수 없는 형상의 암석 기둥들이 천장까지 닿아 있다. 제단 주위로는 알 수 없는 액체가 고여 웅덩이를 이루고 있다.

    **강현:** (경이와 두려움이 뒤섞인 목소리)
    이… 이곳은…
    믿을 수가 없어…

    **내레이션 (강현):**
    모든 감각이 마비되는 듯했다.
    시간도, 공간도 의미를 잃었다.
    그것은 단순한 동굴이 아니었다.
    절대적이고, 비인간적인…
    존재의 흔적.

    **[장면 13]**
    **클로즈업:** 강현의 얼굴. 그의 눈은 동공이 확장되어 있고, 얼굴엔 미약한 광기가 번진다. 그는 제단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려 한다.

    **유진:** (강현의 팔을 잡아채며)
    강현 씨, 멈춰요!
    섣불리 움직이지 마세요!
    (센서에 비정상적인 수치가 뜨는 것을 확인한다)
    저 액체… 보통 물이 아닙니다.
    게다가 저 제단에서… 알 수 없는 파장이 감지돼요.
    생체 반응을 교란시키는…

    **[장면 14]**
    **배경:** 유진이 강현의 팔을 잡고 제지하지만, 강현은 이미 제단의 매력에 사로잡힌 듯 그곳을 응시한다. 제단 위에 놓인 것은 기괴한 형상의 조각상.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체 같기도, 기계 장치 같기도 한, 이 세상의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형태로 뒤틀려 있다.

    **강현:** (유진의 손을 뿌리치고 한 발짝 더 나아간다)
    저걸 봐, 유진! 저 조각상…
    내가 연구했던 그… ‘별의 씨앗’과 일치해!
    이곳이 바로… 그들의 성소였던 거야!
    그들이… 무엇을 숭배하고… 무엇을 기다렸는지…

    **[장면 15]**
    **클로즈업:** 제단 위에 놓인 조각상. 뼈와 살, 금속이 뒤섞인 듯한 질감에, 수많은 눈과 촉수가 기묘하게 배열되어 있다. 조각상 중앙에는 어둠을 빨아들이는 듯한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내레이션 (강현):**
    그것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 수천 개의 지식의 파편들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수수께끼는 풀렸고,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거대한 심연의 문턱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그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길이었다.

    **[장면 16]**
    **배경:** 강현이 조각상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제단 주위에 고여 있던 액체 웅덩이에서 기포가 터져 오르기 시작한다. 웅덩이 깊은 곳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인다. 동시에 동굴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효과음:** 부글부글… (액체 끓는 소리)
    **효과음:** 우우우웅… (낮고 깊은 진동음)

    **유진:** (놀라서 눈을 크게 뜨며)
    강현 씨, 위험해요!
    뒤로 물러서요! 지금 당장!

    **[장면 17]**
    **클로즈업:** 강현의 눈동자에 비친 액체 웅덩이. 그 안에서 어둠보다 더 짙은 형체가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형태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촉수였고, 수천 개의 눈을 가진 듯한 끔찍한 윤곽이 드러난다.

    **내레이션 (강현):**
    그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논리와 이성을 초월한 존재.
    천년의 잠에서 깨어난, 이름 없는 공포.

    **[장면 18]**
    **시점:** 거대한 촉수 하나가 웅덩이에서 솟아올라 강현을 향해 맹렬하게 뻗어 나온다. 촉수의 표면에는 기괴한 빨판들이 득실거리고, 그 끝은 날카로운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있다. 강현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한다.

    **효과음:** 촤아악-! (촉수가 뻗어 나오는 소리)

    **유진:** (절규하듯)
    강현 씨!!!

    **[장면 19]**
    **클로즈업:** 촉수가 강현의 코앞까지 다가온 순간, 강현의 눈은 공포에 질려 있지만, 그 안에 희미하게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이해와 깨달음의 빛이 보인다.

    **내레이션 (강현):**
    아…
    이것이…
    진정한…

    **[장면 20]**
    **마지막 패널:** 동굴 전체가 혼돈의 그림자로 뒤덮인다. 거대한 괴물의 형체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고, 강현과 유진은 그 압도적인 존재감 앞에 한없이 작아 보인다.

    **내레이션 (강현):** (점점 흐려지는 글씨체)
    …진실.

    **[1화 끝]**
    **[다음 화 예고]**
    **[텍스트]** 압도적인 공포 앞에서,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됩니다.

  • 크툴루 신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우주선 ‘헤르메스’ 호는 망막한 심우주 속을 떠돌았다. 은하의 나선팔 저 너머, 별빛조차 희미하게 바래는 미지의 공간. 이곳은 지도에도, 기록에도 없는 곳이었다. 헤르메스 호의 승무원들은 인류가 탐사한 가장 먼 지점이라는 자부심과, 동시에 끝없는 어둠 속에서의 고립감에 짓눌려 있었다.

    함교는 적막했다. 캡틴 유진은 홀로 함장석에 앉아 전방의 칠흑 같은 허공을 응시했다. 함선을 감싸는 미약한 엔진음만이 고요를 깨트렸다. 우주는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었다. 그 거대한 공허함 속에서 인류는 한없이 작았다.

    그때, 함교의 메인 스크린에 경고음이 울렸다. 삑- 삑- 삑-.
    “캡틴! 미확인 에너지원 감지!” 수석 탐사관 미라의 목소리가 통신을 타고 날카롭게 전해졌다. “좌현 341, 거리 120만 킬로미터. 스캔 결과… 비정상입니다. 이렇게 오래된 신호는 처음 봐요.”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세히 스캔해. 유형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분류에도 해당되지 않아요. 단순 에너지원이 아니라… 어떤 구조물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엄청난 밀도를 가지고 있어요.”

    헤르메스 호는 조심스럽게 미지의 에너지원을 향해 나아갔다. 수십 시간 후, 전방 스크린에 흐릿한 형체가 나타났다. 처음엔 그저 거대한 암석 덩어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것은 차가운 공포로 변해갔다.

    “맙소사…” 엔지니어 한이 터져 나오는 탄식을 참지 못했다.
    그것은 거대했다. 행성보다는 작지만, 소행성대 전체를 합쳐놓은 것보다 더 불규칙하고 육중한 검은 구조물이었다. 표면은 깎아지른 듯 날카로운 각도로 솟아올라 있었고, 빛을 반사하기는커녕 주변의 빛마저 집어삼키는 듯 보였다. 모든 윤곽선은 불안정하게 일렁이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마치 공간 자체가 그 앞에서 뒤틀리는 것 같았다.

    “함장님, 이건… 어떤 문명의 흔적도 아니에요.” 미라의 목소리에 흥분과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섞여 있었다. “우리가 아는 모든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형태입니다.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같아요.”
    유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탐사팀 준비시켜. 미라, 한. 너희가 간다.”
    “네, 캡틴.” 미라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저… 함장님, 정말 들어가야 합니까?” 한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떨림이 있었다.
    “명령이다, 한.” 유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정보가 필요해.”

    EVA(선외활동) 팀이 꾸려졌다. 미라와 한은 중무장한 우주복을 입고 에어록으로 향했다. 의료 장교 지아는 그들의 생체 신호를 모니터링하며 불안한 얼굴로 스크린을 주시했다.
    “긴장하지 마세요, 한 엔지니어님.” 지아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이 안 될 리가요… 저걸 보세요, 지아님. 저건 그냥 ‘벽’이 아니에요. 저건… 눈을 돌리고 싶게 만들어요.”

    이윽고 두 사람은 에어록을 통해 미지의 구조물 내부로 진입했다. 내부 또한 외부와 다를 바 없었다. 검은색의 불규칙한 벽면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복도는 직선이 아닌, 마치 공간 자체가 꺾여버린 듯한 기묘한 각도로 꺾여있었다. 그들의 헬멧 라이트가 비추는 곳마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고, 그 그림자는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착시를 일으켰다.

    “이건… 건축물이 아니에요. 이건… 그냥 ‘있어요’.” 미라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경외감과 함께 섬뜩한 매혹이 담겨 있었다.
    한은 벽을 더듬었다. “재질도 모르겠어요. 만져지는데… 만져지지 않는 것 같아요. 아무런 감각도 없어요.”

    그들은 미로 같은 통로를 지나 중앙으로 향했다. 발걸음마다 희미한 마찰음이 울렸지만, 그 외에는 완벽한 정적만이 존재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홀이 나타났다. 홀의 중앙에는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듯한, 더욱 기이한 물체가 서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검은색 모놀리스였다. 하지만 매끄러운 표면이 아니었다. 마치 수많은 날카로운 조각들을 엉성하게 이어붙인 것처럼, 혹은 거대한 크리스털이 불가능한 각도로 부서진 것처럼 보였다. 그 모서리는 시선을 붙잡을 수 없게 흐릿했고, 형상 자체는 끊임없이 변형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어떤 빛도 반사하지 않았지만, 주변 공간은 묘하게 일렁였다.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들리지 않는 주파수의 울림이 온몸의 뼈를 타고 전해지는 듯했다.

    “이게… 유물인가요?” 한이 헬멧 너머로 침을 삼켰다. 그의 눈은 그 섬뜩한 존재를 애써 외면하려 하면서도, 동시에 강렬하게 끌리는 듯했다.
    미라는 그 유물에 홀린 듯 다가갔다. “가까이 가볼게요. 스캔을 시도해야 해요.”
    “너무 가까이는 안 됩니다, 미라.” 유진의 목소리가 통신을 통해 들려왔다.
    미라는 대답 없이 유물에 손을 뻗었다. 닿기 직전, 그녀의 손목에 차인 스캐너가 격렬하게 오작동하며 붉은 경고음을 냈다. 삐이익-! 스크린에는 의미 없는 숫자와 기호들이 폭주하듯 나열됐다.

    “안 돼요, 캡틴. 스캔이 안 먹혀요. 모든 장비가 맛이 갔어요.” 미라는 실망했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타오르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한은 뒤에서 유물을 응시했다. 그는 등골을 타고 흐르는 냉기를 느꼈다. 유물에서 나오는 ‘울림’이 점점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것은 소리가 아니라, 어떤… 존재의 압박이었다.

    두 사람은 결국 아무런 샘플도 채취하지 못한 채 헤르메스 호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들의 눈과 마음속에는 그 검은 유물의 형상이 깊이 새겨졌다.

    그날 이후, 헤르메스 호에는 미묘한 변화가 찾아왔다. 함선 곳곳의 조명이 간헐적으로 깜빡거렸고, 통신 시스템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노이즈가 섞이기 시작했다. 함선의 AI는 ‘경미한 시스템 오류’를 반복해서 보고했지만, 육안으로 확인되는 문제는 없었다.

    가장 먼저 변화를 겪은 것은 한이었다. 그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 꿈속에는 형태 없는 검은 그림자들이 광활한 우주를 떠다녔고, 그 그림자들은 한의 의식을 조롱하듯 속삭였다.
    “캡틴, 죄송하지만… 두통이 너무 심합니다. 며칠 밤을 제대로 못 잤어요.” 한은 유진에게 보고했다. 그의 얼굴은 피곤에 절어 창백했고,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아는 한에게 진정제를 처방했지만, 효과는 미미했다. “한 엔지니어님, 혹시 환청을 들으시거나… 뭔가 이상한 것을 보신 적은 없으세요?”
    한은 고개를 저었지만, 그의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니요… 그냥… 뭔가… 느껴져요. 저 유물이…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아요.”

    미라는 유물에서 가져온 스캔 ‘데이터’를 분석실에 틀어박혀 밤낮없이 파고들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노이즈와 깨진 신호들뿐이었지만, 그녀는 그 안에서 어떤 패턴을 찾으려 필사적이었다. 그녀는 식사도 거른 채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들을 스크린에 띄워놓고 중얼거렸다.
    “이건… 언어야. 분명해. 우리가 모르는 언어. 하지만 분명히 뭔가 말하고 있어.”
    그녀의 광기 어린 집착은 유진의 불안감을 더욱 키웠다.

    유진은 유물 발견 지점으로부터 후퇴할 것을 고려했다. 하지만 미라는 맹렬히 반대했다. “함장님! 이건 인류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지식의 보고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후퇴하는 건… 범죄에요!”

    결국 유진은 망설였다. 유물의 위협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류의 탐사 영역을 넓힐 기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단지 함선의 경계를 강화하고, 모든 승무원의 상태를 면밀히 주시하라고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다.
    한은 기관실에서 혼자 일하고 있었다. 시스템 로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지만, 그는 자꾸만 미세한 진동과 이상한 소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몽롱한 정신으로 제어판을 살피고 있었다.
    그때, 벽 저편에서 섬뜩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마치 수천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겹쳐진 듯한, 이해할 수 없는 언어였다.
    “누구… 야?” 한은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속삭임은 점점 더 선명해졌고, 그의 귓가를 찢어발기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관실의 금속 벽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물결처럼 출렁이는 벽. 그 안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솟아오르고, 꿈틀거렸다. 무수히 많은 눈알이 그를 노려보는 듯했다.

    “아아아악!!! 보여! 보여! 저기… 저것들이…!” 한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는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그의 눈동자는 공포에 질려 뒤집혔고, 입에서는 거품이 새어 나왔다. “오지 마… 오지 마…!”

    바로 그 순간, 미라의 분석실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흐릿한 노이즈 속에서 마침내 하나의 패턴, 하나의 이미지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었다. 그녀의 뇌리에 직접적으로 박히는, 광대하고 압도적인 지식의 파편이었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그녀는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입력했다. 그리고 스크린에 번역된 문장이 나타났다.

    **”너희의 존재는 오류다. 침묵을 깨지 마라. 우리는…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헤르메스 호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함선은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과 정적 속에 잠겼다. 오직,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한의 비명소리만이 찢어질 듯 이어지고 있었다.

  • 메카 액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심연의 시작

    강철 거인들이 으르렁거리는 전장이었다. 거대한 도시를 집어삼킬 듯 솟아오른 마천루 사이로 섬광이 번개처럼 작렬했고, 굉음은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폐허가 된 거리 위에서 ‘아크 포스’는 우아하면서도 치명적인 춤을 추고 있었다. 새하얀 장갑에 새겨진 푸른색 라인이 전기를 머금은 듯 섬뜩하게 빛났다. 조종석 안의 강현우는 숨조차 쉴 틈 없이 전황을 주시했다.

    “현우, 셋 세는 동안 우측으로 치고 빠져. 내가 엄호할게!”

    귓전을 때리는 목소리는 현우의 심장 박동만큼이나 익숙한 것이었다. 이준호, 그의 둘도 없는 전우이자 친구. ‘타이탄 엣지’의 묵직한 기동음이 현우의 기체 뒤를 든든히 받치며 따라붙었다. 검은색 장갑에 붉은 악마 문양이 새겨진 타이탄 엣지는 거대한 방패처럼 현우의 후방을 커버하고 있었다.

    “알았어! 이번엔 내가 미끼가 될게!”

    현우는 망설임 없이 속도를 올렸다. 아크 포스의 백팩에서 푸른색 분사광이 뿜어져 나오며 기체가 폭발적인 가속으로 적 기체 세 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이준호와 함께 ‘쌍룡’이라 불렸다. 하늘을 가르며 적을 꿰뚫는 아크 포스와 굳건한 방어와 강력한 일격으로 적을 부수는 타이탄 엣지. 그들은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호흡이 어긋난 적 없었다. 수많은 위기 속에서 서로의 등 뒤를 맡기며 살아남았고, 그들의 이름은 전설처럼 회자되었다.

    적 기체들이 현우에게 포화를 집중했다. 붉은색 레이저와 에너지탄이 빗발쳤지만, 현우는 정교한 회피 기동으로 모든 공격을 흘려보냈다. 마치 물 위를 미끄러지는 백조처럼, 아크 포스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적들을 농락했다.

    “지금이야, 준호!”

    현우의 외침과 동시에, 타이탄 엣지의 거대한 어깨포가 불을 뿜었다. 엄청난 위력의 에너지포가 현우의 등 위를 지나쳐 적 기체들을 강타했다. 콰앙! 콰쾅! 두 대의 적 기체가 폭발하며 시커먼 연기를 뿜어냈다. 남은 한 대는 현우가 기다렸다는 듯, 광속으로 달려들어 고에너지 검으로 일격을 가했다. 챙! 적 기체의 머리 부분이 허무하게 떨어져 나갔다.

    “완벽해, 현우!” 준호의 목소리에는 언제나처럼 활기가 넘쳤다. “오늘 저녁은 내가 쏠게! 소고기 어때?”

    “좋지! 물론 네 지갑으로 말이야.” 현우는 짧게 웃었다.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임무는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마지막 남은 적의 본거지, 코어 벙커만 파괴하면 된다.

    “준호, 코어 벙커는 내가 먼저 들어가서 데이터 스캔할게. 넌 입구를 막아줘.”

    “걱정 마! 한 마리도 못 들어오게 막아줄게.”

    아크 포스는 유연하게 벙커 안으로 진입했다. 내부의 경비 시스템은 이미 대부분 무력화되어 있었다. 현우는 코어 시스템에 접속, 빠르게 데이터를 추출하기 시작했다. 임무 완료까지 30초. 그의 시선은 시간 카운터를 좇았다.

    20초… 15초…

    그때였다. 조종석의 비상 알림이 미친 듯이 울렸다. 시스템 이상? 외부 침입? 아니, 기체 내부에서 시작된 경고였다. 그리고 동시에 등 뒤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감지되었다.

    “현우, 미안하다.”

    준호의 목소리. 차갑고, 건조하며, 낯선 감정이 실려 있었다. 현우는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미안하다니? 뭐가?

    돌아볼 틈도 없이, 아크 포스의 등 뒤에서 엄청난 충격이 덮쳐왔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듯한 격통, 모든 시스템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주 전력 공급이 중단되고, 메인 코어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는 경고가 미친 듯이 점멸했다.

    “이… 이건…!”

    현우는 겨우 고개를 돌려 등 뒤를 확인했다. 타이탄 엣지. 이준호의 기체였다. 흑철의 거인에게서 뻗어 나온 거대한 에너지 블레이드가 아크 포스의 핵심 동력부에 정확히 박혀 있었다. 블레이드가 회전하며 아크 포스의 내부 회로를 난도질하는 소리가 현우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준호! 지금 뭐 하는 거야?! 적 습격인가?! 농담할 때가 아니야!” 현우는 절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분노,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배신감이 뒤섞여 있었다.

    “농담이 아니야, 현우.” 준호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더욱 선명하고, 차가웠다. “여기까지다. 네 시대는 끝났어.”

    “무슨 소리야?! 우리가… 우리가 같이 여기까지 왔잖아! 쌍룡이잖아!” 현우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아크 포스는 이미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다. 팔다리가 그의 의지를 따르지 않았다.

    “쌍룡? 웃기지 마.” 준호의 조롱 섞인 웃음소리가 들렸다. “늘 네 그림자에 가려져야 했던 내 심정을 네가 뭘 알아? 모두가 현우, 현우, 네 이름만 부르짖었지. 내가 쌓아 올린 공로는 늘 네 몫이었어!”

    타이탄 엣지의 블레이드가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크 포스의 비명 소리가 현우의 고막을 찢었다. 그의 시야가 일렁였다.

    “이건 내가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한 발판이야, 현우.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라, 그 아래 심연이야.”

    섬광이 번뜩였다. 타이탄 엣지는 아크 포스의 코어를 완전히 파괴했다. 폭발 직전의 경고음이 조종석을 가득 채웠다. 현우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비상 탈출을 시도했다. 퍽! 그의 비상 포드가 아크 포스의 잔해에서 튕겨져 나갔다. 포드는 이미 파괴된 코어 벙커의 잔해 속으로,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그것은 단순한 추락이 아니었다.

    그것은 추락이었다.
    희망의 추락.
    우정의 추락.
    삶의 추락.

    현우는 의식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준호의 차가운 눈빛과 비웃는 듯한 표정을 떠올렸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 속에서 그의 모든 것이 부서져 내렸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현우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눈을 떴다. 칙칙한 천장이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왼쪽 팔은 붕대로 감겨 있었다. 조그맣고 비좁은 방,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병원도, 군 막사도 아니었다. 버려진 건물의 한구석 같았다.

    “정신이 드세요?”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허름한 옷차림의 노인이 따뜻한 차 한 잔을 내밀었다. 현우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이 쑤셨다.

    “며칠 동안 꼬박 잠들었어요. 기체가 폭발하면서 충격이 컸을 텐데, 용케 살아났더군요. 자네 기체는 알아볼 수도 없게 박살이 났어.”

    현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크 포스. 그의 삶 그 자체였던 기체.

    “이준호는… 이준호는 어떻게 됐습니까?” 현우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노인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준호 대위는… 영웅이 됐죠. 자네가 임무 중 적에게 회유되어 아군에게 총구를 겨눴다고 발표되었고, 이 대위가 홀로 그 모든 것을 막아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코어 벙커의 중요 데이터를 확보해서 큰 공을 세웠다고… 곧 특진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해요.”

    현우는 노인이 건넨 차를 엎어버릴 뻔했다. 거짓말.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다. 그가 아크 포스에 박힌 타이탄 엣지의 블레이드를 생생하게 기억했다. 준호의 차가운 목소리를, 그 비웃음을.

    그 순간, 현우의 뇌리 속에서 과거의 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나란히 서서 황량한 벌판을 바라보던 어린 시절의 현우와 준호.*
    *”언젠가 우리만의 기체를 만들어서 저 하늘을 누비자, 준호!”*
    *”물론이지, 현우! 우리는 최고가 될 거야!”*

    그 모든 약속과 꿈이 한순간에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를 배신하고, 그의 명예를 더럽히고,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이준호.

    현우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왼쪽 팔의 통증도, 머릿속을 울리는 고통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것은 이제 배신감과 슬픔을 넘어선, 순수한 형태의 분노였다.

    이준호.
    내 이름 석 자를 걸고 맹세하건대.
    네가 앗아간 모든 것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되갚아주리라.
    심연의 끝까지 쫓아가, 너를 끌어내릴 것이다.

    강현우는 차갑게 식어버린 두 눈을 번뜩였다. 그의 새로운 삶은, 이 잔혹한 심연의 시작에서부터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