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어느 날, 균열이 시작되었다
“아, 망했다! 지각이야!”
서시아는 텅 빈 아침 식탁을 뒤로하고 현관문을 박차고 나섰다. 쨍한 햇살이 눈을 찔렀지만, 교문이 닫히기 전까지 저 길고 긴 언덕을 뛰어 올라야 한다는 절박함에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등 뒤로 묵직한 가방이 덩실거렸고,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하아, 하아. 이 놈의 언덕은 왜 갈수록 가팔라지는 것 같지?
“서시아! 죽기 직전이냐?”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단발머리의 민지였다. 시아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이 세상에서 가장 지각을 밥 먹듯 하는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 주는 동지.
“어… 어서 와, 민지야….”
“어서 오긴 뭘 어서 와. 우리 둘 다 어서 빨리 뛰지 않으면 오늘 벌점 폭탄이라고!”
민지가 시아의 팔을 잡아끌며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혼자가 아니면 덜 힘든 법이지. 시아는 민지의 속도에 맞춰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숨을 헐떡이며 교문 안으로 발을 들이는 순간, 마침 정각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휴… 살았다.”
“네가 아니라 우리가 살았지.”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언제나 그렇듯 평범하고, 조금은 고된 아침의 시작이었다.
***
따분한 역사 시간이 끝나고, 무료한 수학 시간을 겨우 버텨내자 기다리고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시아는 급식실에서 쟁반 가득 맛있는 메뉴를 받아 들고는 창가 자리에 앉아 크게 한술 떴다.
“아, 오늘 불고기 대박이다!”
민지는 이미 밥그릇의 절반을 비운 채였다. 시아는 그런 민지를 보며 웃었다.
“넌 어쩜 그렇게 매일 맛있게 먹냐?”
“맛있으니까 맛있게 먹지! 너도 어서 먹어. 오늘 오후에 수행평가 발표 있지 않았어?”
아, 맞다. 영어 수행평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시아는 영어가 제일 어려웠다. 괜히 밥맛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너 다 준비했어?”
“그럼! 난 어제 밤새도록 연습했다고. ‘헬로 에브리원, 마이 네임 이즈 민지…’ 어때, 완벽하지?”
민지는 능글맞게 웃으며 콩나물무침을 집어 먹었다. 시아는 그런 민지의 여유가 마냥 부럽기만 했다. 자신은 아직도 문장을 매끄럽게 연결하는 게 어려웠는데.
점심을 대충 먹고 교실로 돌아온 시아는 발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교과서를 붙들고 영어 대사를 중얼거렸지만, 혀는 자꾸만 꼬였다.
“후… 한숨만 나온다.”
그때, 갑자기 교실 창밖이 어두워졌다. 구름 한 점 없던 맑은 하늘에 먹구름이 순식간에 몰려든 것이다.
“어? 뭐야? 갑자기 왜 이렇게 어두워?”
“비 오려나? 이상하다, 아침엔 쨍했는데.”
아이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시아도 창밖을 내다봤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햇살이 쏟아지던 풍경은 온데간데없고, 마치 밤이 된 것처럼 어둡고 음침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학교 뒤편 숲에서… 번개처럼 섬광이 터지는 것을 보았다.
“어…?”
시아는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건가? 아니, 분명 뭔가가 있었다. 섬광과 동시에, 마치 유리가 깨지는 듯한 ‘쨍그랑’ 하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물론, 교실 안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저 천둥이 치는 줄 알았는지, 몇몇 아이들이 움찔거리는 정도였다.
시아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 순간, 시아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작은 브로치에서 빛이 깜빡였다. 엄마가 졸업 선물이라며 며칠 전 사준, 평범한 꽃 모양 브로치였다. 은은한 분홍빛 보석이 박혀있는.
“어…?”
브로치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분홍빛 보석에서 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시아는 홀린 듯 브로치를 집어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을 감쌌다.
“시아야, 괜찮아? 너 안색이 안 좋아.”
민지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왔다.
“어? 어… 나 그냥, 갑자기 좀 추워서…”
시아는 브로치를 황급히 가방 속으로 넣었다. 착각이겠지. 그냥 피곤해서 그런 걸 거야.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지만, 어쩐지 그 섬광과 소리, 그리고 브로치의 진동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
수업이 끝나고 하교 시간. 하늘은 여전히 어두컴컴했고, 기분 나쁜 침묵이 감돌았다. 습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진짜 비 올 건가 봐. 우산 가져왔어야 했는데.”
민지가 투덜거렸다.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는 분명 화창한 날씨였는데. 이런 갑작스러운 날씨 변화는 처음이었다.
“시아, 나 오늘 학원 있어서 먼저 가야 해. 조심해서 가!”
“어, 너도!”
민지와 헤어진 시아는 혼자 언덕길을 내려갔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학교 뒤편 숲 쪽을 다시 쳐다봤다. 아까 본 섬광은 대체 뭐였을까?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때였다. 숲 쪽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검은 그림자였다. 그것은 형체가 불분명했지만,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빠르게, 그리고 불규칙하게. 시아는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그림자는 공중을 휘젓더니 이내 학교 운동장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에는… 마치 생명력을 잃은 듯, 풀들이 시들고 나무들이 바싹 말라버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저… 저게 뭐야…?”
시아는 너무 놀라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림자는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실 건물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굉음과 함께 건물 한쪽 벽이 무너져 내렸다.
“안 돼…!”
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학생들이 아직 교실에 남아있을 수도 있었다. 시아는 두려웠지만, 차마 발을 뗄 수 없었다. 그 순간, 가방 속에서 아까 그 브로치가 다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더 강렬하게.
‘가… 가야 해…!’
브로치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시아의 머릿속에 울렸다. 마치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듯한 간절한 외침이었다. 시아는 홀린 듯 가방에서 브로치를 꺼냈다. 분홍빛 보석이 환하게 빛나며 따뜻한 기운이 온몸을 감쌌다.
“이게… 뭐야…?”
그때, 브로치에서 작은 빛줄기가 솟아오르더니 이내 작은 요정의 형체를 갖췄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투명한 날개를 가진, 분홍빛으로 빛나는 요정이었다.
“드디어… 깨어났군, 소녀여.”
요정은 맑고 영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아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요정? 지금 내 눈앞에 요정이 말을 하고 있다고?
“너… 너는 누구야?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나는 루나. 이 세계의 균형을 수호하는 정령이지. 그리고 너는, 선택받은 자. ‘별의 수호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소녀다.”
루나는 시아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녀의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시아의 불안한 마음을 조금 진정시켜 주었다.
“별의 수호자… 내가?”
“그래. 지금 저 사악한 그림자는 ‘어둠의 존재’이다. 세계의 균열을 틈타 현실로 넘어와 생명력을 흡수하고 있지. 저것을 막아야 해.”
시아는 학교 건물 쪽을 바라봤다. 어둠의 존재는 점점 더 커지고, 건물은 더욱 심하게 붕괴되고 있었다. 공포가 다시 몰려왔다. 저런 괴물을 내가 어떻게 막는다는 말인가? 나는 평범한 고등학생인데.
“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난 그냥… 평범한 서시아일 뿐이라고!”
“넌 평범하지 않아. 네 안에 잠든 힘을 깨워야 해. 네 이름은… ‘스타라이트 시아’!”
루나가 외치자, 브로치에서 더욱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시아의 온몸을 감쌌고, 따뜻한 기운이 그녀의 심장 속으로 스며들었다. 눈부신 빛 속에서 시아의 교복이 마법소녀의 의상으로 변했다. 순백의 드레스에 반짝이는 보석 장식, 그리고 등 뒤에는 투명한 날개가 돋아났다. 손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이… 이건…!”
새로운 힘이 온몸에 넘실거리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알 수 없는 용기가 솟아났다.
“가자, 루나! 저 괴물을 막아야 해!”
시아는 힘찬 발걸음으로 학교 운동장을 향해 날아갔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바람과, 눈앞에 펼쳐진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어둠의 존재는 이제 교실 건물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 거대한 그림자 안에서 으스스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하하하… 드디어 이 세계의 생명력을 흡수할 시간이구나! 인간들의 절망이 나의 양식이 되리라!”
어둠의 존재가 시아를 향해 거대한 그림자 촉수를 뻗었다. 시아는 본능적으로 지팡이를 휘둘러 빛의 방패를 만들었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 촉수가 튕겨 나갔다.
“제법인데? 하지만 여기까지다!”
어둠의 존재는 수십 개의 촉수를 한꺼번에 뿜어냈다. 시아는 필사적으로 막아냈지만, 속수무책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너무 강했다. 아직 이 힘에 익숙지 않은 자신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으윽…!”
하나의 촉수가 방패를 뚫고 시아의 어깨를 강타했다. 강렬한 고통과 함께 몸이 휘청거렸다.
“안 돼! 스타라이트 시아!”
루나가 다급하게 외쳤다. 시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끝인가? 이대로 모든 게 파괴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걸까?
그때였다. 귓가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과 함께, 눈앞에 섬광이 번뜩였다. 그리고 어둠의 존재가 내뿜던 수많은 그림자 촉수들이 마치 무언가에 잘린 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 무슨…?”
시아는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그곳에… 서 있었다.
달빛을 닮은 은빛 머리카락. 밤하늘처럼 깊은 보랏빛 눈동자. 날카로운 턱선과 오뚝한 콧날이 빚어낸 완벽한 조각상 같은 얼굴. 그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화 속 존재에 가까웠다. 그의 등 뒤에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거대한 검은 날개가 펼쳐져 있었고, 손에는 검은 검이 들려 있었다. 검 끝에서는 아직도 푸른 섬광이 일렁였다.
그는 어둠의 존재 앞에 당당히 서 있었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에 어둠의 존재조차 잠시 멈칫하는 듯했다.
“감히… 이 세계를 더럽히려는가.”
그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깊은 울림이 있었다. 시아는 숨을 멈췄다. 그의 눈이, 짧게 시아를 스쳐 지나갔다. 보랏빛 눈동자 속에 담긴 알 수 없는 감정. 슬픔? 연민? 아니면… 경고?
“크으으윽! 감히… 이계의 존재가 인간 세상에 나타나다니!”
어둠의 존재가 분노하며 포효했다. ‘이계의 존재’? 시아는 의문이 들었지만, 곧이어 남자가 보여준 압도적인 힘에 경악했다. 그는 한순간에 어둠의 존재의 심장부를 향해 날아갔고, 검은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빛과 함께 어둠의 존재를 두 조각으로 갈라버렸다.
“크아아악…!”
어둠의 존재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파괴되었던 건물은 거짓말처럼 원상 복구되었고, 시들었던 풀과 나무들도 다시 생기를 되찾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남자는 검을 거두고 시아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여전히 차가운 눈빛이었지만, 시아는 그의 눈 속에서 자신을 구원해 준 따뜻한 빛을 본 것 같았다.
“너는… 누구세요?”
시아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시아에게 다가왔다.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마치 환상 같았다. 시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녀를 휩쓸었다.
그는 시아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시아를 완전히 덮었다. 시아는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가 시아의 심장을 꿰뚫는 것 같았다.
“인간 세상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하지만 그 말에는 경고와 동시에, 자신을 향한 알 수 없는 슬픔이 담겨 있었다.
“너는… 나를 만나서는 안 될 존재다.”
그의 손이 시아의 뺨을 부드럽게 스쳤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었지만, 그 감촉은 시아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었다.
“우리는….”
그가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순간, 루나가 시아의 어깨에서 날아올라 그의 앞을 막아섰다.
“물러서라! 류엔! 그녀에게 접근하지 마라!”
‘류엔?’ 그의 이름이었다. 류엔은 루나를 한 번 쳐다보더니, 다시 시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잊지 마라, 인간 소녀. 이 세상에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의 말과 동시에, 그의 몸이 빛으로 변하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끝나자, 시아의 몸을 감싸던 마법소녀의 의상이 다시 평범한 교복으로 돌아왔다. 손에 들려있던 지팡이도 사라졌다.
“방금… 그분은 누구야?”
시아는 루나에게 물었다. 루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시아를 올려다봤다.
“류엔… 그는 이계의 그림자 종족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혈통을 가진 자야. 절대로 인간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되는 존재지. 게다가… 우리 ‘별의 수호자’들과는 영원히 공존할 수 없는 존재다.”
루나의 말은 시아의 머릿속에 혼란을 가져왔다. 공존할 수 없는 존재? 하지만 그는 분명 자신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그의 눈빛에는…
시아는 텅 빈 하늘을 올려다봤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어둠에 잠식되어 있던 하늘은, 이제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시아의 마음속에는, 방금 전 만난 그 신비로운 존재의 보랏빛 눈동자가 선명하게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넘어서는 안 될 선… 공존할 수 없는 존재…
하지만 시아는 직감했다. 이미, 그 ‘선’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심장은, 그 ‘선’ 너머의 미지의 존재에게 강렬하게 이끌리고 있었다.
이제 막, 그녀의 평범했던 일상에 균열이 시작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