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추리 미스터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낡은 책방의 속삭임

    한시우는 평범했다. 아니, 적어도 자신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여느 고등학생처럼 치열한 입시 경쟁에 허덕이고, 간간히 친구들과 농담 따먹기를 하며 피식 웃는, 지극히 현실적인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은밀한 일탈이 있었다. 바로, 낡은 것들에 대한 탐닉이었다. 먼지 쌓인 고서나 빛바랜 유물에 깃든 시간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그의 발걸음은 늘 도심의 번잡함에서 한 발짝 벗어난, 낡은 상점가 골목 어딘가에 위치한 헌책방으로 향하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시험 기간의 압박을 잠시 잊으려는 듯, 시우는 오래된 책 냄새가 가득한 ‘시간의 흔적’이라는 헌책방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문이 그의 방문을 알렸지만, 주인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늘 그랬듯, 고요한 책방 안에는 낡은 종이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희미하게 울리는 시계 초침 소리만이 존재했다.

    시우는 익숙하게 고대사 섹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때 묻은 역사서들 사이를 손가락으로 훑으며, 잊힌 이야기들을 찾아 헤매는 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책장 가장 구석, 거의 보이지 않는 틈새로 향했다. 그곳은 다른 책들보다 유독 깊숙이 박혀 있어, 마치 오래도록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듯했다. 호기심이 발동했다. 시우는 몸을 숙여 겨우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것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감촉이었다. 낡은 종이의 푸석함이나 가죽의 거친 질감이 아니었다. 매끄러우면서도 차갑고, 동시에 묘하게 따뜻한, 표현하기 어려운 이상한 재질이었다. 마치 돌과 금속, 그리고 뼈가 뒤섞인 듯한. 시우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끌어냈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책방 구석에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손에 쏙 들어올 만한 작은 상자였다. 책이라기엔 너무나 견고하고, 상자라기엔 이음새가 보이지 않았다. 검회색의 표면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글자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시우의 눈에는 그것이 오히려 강렬한 존재감을 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먼지 한 톨 앉지 않은, 너무나 깨끗한 외형은 오히려 섬뜩할 정도였다. 그는 상자를 손에 들고 책장 틈새를 빠져나와 좀 더 밝은 곳으로 향했다.

    창가에 서서 햇빛에 비춰보니, 검회색 표면은 미묘하게 빛을 흡수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우의 손끝에서부터 전율이 흘렀다. 상자가 미세하게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표면에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물 위에 유화 물감이 번지듯, 검은 바탕 위에 은색과 푸른색이 뒤섞인 문양들이 생겨났다. 그것들은 기하학적인 도형인 동시에 살아있는 생물의 움직임을 담고 있는 듯했다.

    “이게… 뭐지?”

    시우의 목소리는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경이로움과 당혹감으로 가득 찼다. 문양들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회로처럼 서로 연결되더니, 이내 상자 전체를 휘감았다. 그리고 그 정점에 이르자, 상자의 중앙에서부터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나 고요하고 부드러운 빛이라 눈부시지도 않았지만, 그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시우는 홀린 듯 빛나는 상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상자에서 흘러나오는 빛줄기가 그의 눈에 닿는 순간, 시우의 머릿속으로 폭풍처럼 무언가가 쏟아져 들어왔다.

    수천 년 전의 폐허가 된 도시.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거대한 석상들이 어둠 속에서 웅장함을 뽐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고대 기록들, 허공을 가로지르는 번개 같은 에너지.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인간의 형상을 했지만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존재들의 모습. 그들의 손끝에서 터져 나오는 찬란한 마법의 섬광과, 그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는 바위와 물결치는 대지의 모습.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압도적인 힘과 아득한 지식의 파편들이 시우의 의식을 휘몰아쳤다.

    “크윽…!”

    순식간에 이어진 환상에 시우는 무릎을 꿇었다.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과 함께, 온몸의 세포가 새롭게 깨어나는 듯한 기묘한 감각에 휩싸였다. 손에 든 상자는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지만, 더 이상 불안한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그의 심장과 함께 규칙적으로 박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환상 속에서 본 엄청난 힘의 잔상이 그의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희미한 기운을 느낀 건 착각일까?

    “손대지 말았어야 할 것을 건드렸구나, 젊은이.”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오는 굵고 건조한 목소리에 시우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주인 할아버지, 김 노인이었다. 늘 그림자처럼 조용히 존재하던 그는 어느새 시우의 등 뒤에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평소의 무기력하고 흐릿한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예리한 빛을 띠고 있었다.

    “할… 할아버지… 이게 대체…?” 시우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김 노인은 시우의 손에 들린 상자를 잠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오랜 기억 속에서 무언가를 되짚는 듯한 아득함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네. 오랜 세월 동안 잠들어 있던, 세계의 틈새를 잇는 조각이지.”

    “세계의 틈새요?”

    “그래. 이 세상의 이치를 벗어난 힘, 우리가 마법이라 부르는 것들의 근원과 연결된 물건이야. 감히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이 잠들어 있지.” 김 노인의 목소리에는 경고와 함께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것은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었네. 하지만 자네가 깨웠군.”

    시우는 자신의 손에 든 상자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미세하게 진동하는 그 물체가, 방금 그가 경험한 믿을 수 없는 환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제가… 제가 이걸 어떻게 깨웠다는 말씀이세요? 저는 그냥… 그냥 만졌을 뿐인데…”

    “그것은 선택받은 자를 찾아다니지. 제 주인을 만나야만 진정한 빛을 발하니까.” 김 노인은 시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자네에게서 그 빛을 보았어.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돌덩이에 불과할 테지만, 자네에게는… 다른 의미가 있는 모양이군.”

    “선택받은 자라니요? 저는 그저 평범한 학생일 뿐인데요!” 시우는 절박하게 말했다. 평범함만이 자신의 삶을 지탱해온 유일한 믿음이었다.

    김 노인은 쓴웃음을 지었다. “평범함이란 껍데기에 불과해, 젊은이. 잠재된 힘은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다만 그것을 발견하고 깨우는 자만이 ‘특별’해지는 법이지. 자네는 이제 그 길을 걷게 되었네.”

    그의 말은 시우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그는 이제 평범한 존재가 아니라는 말인가? 아니, 애초에 평범했던 적이 있었나? 환상 속에서 본 그 광경들이 다시금 뇌리를 스쳤다.

    “이 물건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자네가 가져가게.” 김 노인의 대답은 단호했다. “한번 연결된 인연은 끊을 수 없어. 그것은 이제 자네의 일부가 되었네.”

    “하지만 위험하다고 하셨잖아요!”

    “위험하지. 아주 크게. 그것이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 자네의 삶은 송두리째 뒤바뀔 걸세. 수많은 자들이 그것의 힘을 탐할 테고, 어쩌면 자네를 노릴지도 몰라.” 김 노인의 눈빛은 다시 아득해졌지만,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그러니 조심하게.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고,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돼. 아직은 때가 아니야.”

    김 노인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오래된 예언자처럼, 모든 것을 말한 뒤 침묵 속으로 잠기는 듯했다. 시우는 혼란과 두려움,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감에 휩싸인 채 헌책방을 나섰다.

    거리로 나오자, 시우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방금 전과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빌딩 숲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조차 다른 색을 띠는 것 같았다. 그의 손에 들린 상자는 이제 더 이상 빛나지 않았지만, 여전히 따뜻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는 김 노인의 경고가 메아리쳤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말고,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돼.’

    시우는 자신의 손을 꽉 쥐었다. 손끝에 여전히 남아있는 따끔거리는 감각, 그리고 머릿속을 맴도는 고대의 환상들. 그의 삶은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 순간, 시우의 시야 가장자리로 무언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찰나의 순간이라 형태를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 그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차가운 시선이었다.

    그림자. 아주 미약하고 희미한, 하지만 분명한 존재의 기척.

    시우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동자에 불안과 함께, 새로운 모험의 불씨가 타올랐다. 이제부터 그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될 참이었다.

  • 사이버펑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심연의 메아리

    고요는 비단 같았다. 아니, 비단보다 더 차갑고, 더 깊고, 더 영원했다. 함선 ‘세이렌’은 마치 살아있는 검은 고래처럼, 광막한 우주의 암흑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수천 광년 떨어진 인류 문명의 마지막 불빛은 이곳까지 닿지 못하는, 완벽한 심연의 한가운데였다.

    “캡틴, 항로 이상 없습니다. 에너지 코어 출력 안정적.”

    조종석에 앉은 김선우 항해사가 건조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그의 얼굴 절반을 덮은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는 수많은 데이터와 별들의 지도를 쉴 새 없이 띄워 올렸다. 눈동자 속에는 미약하게 푸른빛이 깜빡거렸다. 오랜 우주 생활이 만들어낸 피로의 흔적이자, 인공적인 생체 시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수고했어요, 김 항해사. 별다른 특이사항은?”

    함교 중앙, 홀로그램 콘솔 앞에 선 이지아 함장이 물었다. 짧게 자른 머리칼은 군더더기 없는 그녀의 성격을 대변했고, 짙푸른 제복은 무수한 항해의 상흔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녀의 눈은 스크린 너머의 검은 공간을 꿰뚫어 보려는 듯 날카로웠다.

    “늘 그렇듯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광활하고… 텅 비어 있죠.”

    김 항해사는 피식 웃었다. 그의 말대로였다. 인류는 끝없이 뻗어 나가는 성간 문명을 꿈꾸었지만, 현실은 대부분의 우주가 쓸모없는 진공 상태라는 잔혹한 진실을 매번 일깨워주었다. ‘세이렌’호는 바로 그 ‘아무것도 없는’ 곳을 탐사하기 위해 수십 년 전 지구를 떠난 탐사선이었다. 선내의 시간은 가속되었지만, 여전히 수많은 선원들이 긴 동면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다. 깨어 있는 이는 최소한의 운영 인원뿐.

    그때, 함교 한쪽에 위치한 연구실에서 튀어나오듯 한유진 박사가 걸어 나왔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기름때 묻은 작업복, 그리고 심연의 우주를 탐사하는 이들만이 가질 법한 어딘가 공허하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눈빛. 그녀는 이 탐사선의 유일한 외계 생명체 전문 연구원이자 고고학자였다.

    “캡틴, 저… 이전에 보고했던 ‘초고밀도 암흑 물질’의 이상 신호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한 박사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이 함선에서 그녀가 무언가에 흥분할 정도라면, 그것은 결코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결론부터 말해요, 한 박사.” 이 함장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초고밀도 암흑 물질은 수많은 행성계에서 관측되었지만, 대부분 우주의 자연적인 현상으로 분류되었다. 이전에 한 박사가 제기한 ‘인공적인 패턴’이라는 가설은 언제나 기각되어 왔다.

    “인공적입니다. 그것도… 매우 거대하고, 매우 오래된 인공 구조물일 가능성이 90퍼센트 이상입니다.”

    정적이 흘렀다. 우주선 내부의 미약한 전자기음만이 그들의 귀를 간질였다. 김 항해사는 고개를 팩 돌려 한 박사를 바라보았다. 그의 홀로그램 디스플레이 속 별들이 일제히 멈춘 듯했다.

    “90퍼센트? 한 박사, 당신 연구실에 있는 고장 난 센서로 계산한 건 아니겠죠?” 김 항해사가 농담처럼 던졌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농담할 상황이 아니에요, 김 항해사. 제가 가진 모든 장비를 총동원했고, 메인 코어의 AI 분석까지 마쳤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에너지를 고정된 형태로 유지하며, 수천 광년을 이동해왔다는 것 자체가 자연 현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해요. 게다가… 방출되는 에너지 패턴이, 아주 미약하지만, 특정 주기를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무언가를 알리려는 듯이.”

    이 함장은 곧장 자신의 콘솔을 조작했다. 그녀의 눈앞에 한 박사가 전송한 데이터가 펼쳐졌다. 수십만 년 전의 별빛 패턴, 알 수 없는 물질의 스펙트럼 분석, 그리고 기하학적인 그래프들.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숫자와 기호들이었지만, 그녀는 그 속에서 섬뜩한 진실을 읽어냈다.

    “위치는?”

    “바로 이 항로 전방, 0.5파섹 거리입니다. 현재 속도라면… 2시간 내에 육안으로 확인 가능할 겁니다.”

    “2시간….” 이 함장은 턱을 쓸었다. “함선 내부 모든 인원에게 비상 경계령을 내리고, 동면 중인 보안팀 인원 중 3팀을 깨워 비상 대기시키세요. 박정민 기술병에게는 비상 착륙 및 견인 장치 점검을 지시하고요.”

    “캡틴!” 김 항해사가 불렀다. “지금 이 상황에서 동면 인원을 깨우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최소 12시간은 지나야 신체가 정상으로 돌아올 텐데요.”

    “위험을 감수해야 할 만큼 중대한 발견이란 뜻입니다.” 이 함장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수백 년간 인류가 꿈꾸던 미지의 지성체를 만날 기회가 올 수도 있습니다. 김 항해사, 2시간 후 목표 지점으로 항로를 고정하고, 현 속도를 유지하세요. 한 박사, 계속해서 분석을 진행하고, 추가적인 정보를 보고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캡틴!” 한 박사는 이미 다시 연구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김 항해사는 침묵 속에 고개를 끄덕이고, 조종간에 손을 올렸다. 그의 눈동자 속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홀로그램 디스플레이에는 ‘미확인 거대 구조물’이라는 경고 문구가 번쩍였다.

    두 시간 후, 세이렌호의 함교는 깊은 침묵에 잠겼다. 외부 스크린에는 여전히 검은 우주가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 검은 장막 한가운데, 아주 작은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별처럼 보였던 그것이, 세이렌호가 다가갈수록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세상에….” 김 항해사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별이 아니었다. 인공위성도, 유성체도 아니었다. 육각형의 판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만들어진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언뜻 보기에 어떤 행성 파편 같기도 했지만, 그 표면은 매끄럽고 균일했으며, 미세한 금속성 광택이 감돌았다. 무엇보다, 그 기하학적인 완벽함은 자연의 조화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건… 우리가 아는 어떤 문명의 양식과도 다릅니다.” 한 박사가 망원경 조작기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경외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이었다.

    구조물은 침묵 속에 우주를 떠다녔다. 아무런 움직임도, 빛도, 신호도 없었다. 마치 수십억 년간 그곳에 존재해온 것처럼, 완벽한 정지 상태였다. 거대한 건축물이자, 동시에 심연의 흑요석 같은 단일체처럼 보였다.

    “측정된 크기는… 장축 기준 500km입니다.” 김 항해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지구의 소행성 벨트에 있는 가장 큰 소행성보다도 훨씬 거대합니다. 그리고… 질량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낮게 측정됩니다.”

    “낮다고요?” 이 함장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저 정도 크기라면 최소한 행성급의 질량을 가져야 할 텐데요.”

    “정확히 그렇습니다, 캡틴. 내부가 텅 비어 있거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초경량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세이렌호는 거대한 육각형 구조물의 그림자 아래 멈춰 섰다. 마치 한 마리의 작은 물고기가 심해의 거대 바위 아래 멈춰 선 것처럼 보였다. 스크린 너머의 구조물은 이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표면에는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문자는 아니었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깊은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추상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패턴들이었다.

    “생명체 신호는?” 이 함장이 물었다.

    한 박사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없습니다. 완벽한 죽은 공간입니다. 에너지 방출도 완전히 멈췄고요.”

    “죽은 공간이라….” 이 함장은 홀로그램 콘솔을 가볍게 두드렸다. “김 항해사, 세이렌호를 저 구조물의 동체 0.5km 지점까지 접근시키세요. 박정민 기술병에게 연락해서 외부 탐사선 ‘섀도우’의 준비를 지시합니다. 한 박사, 당신은 ‘섀도우’에 탑승해서 저 구조물에 대한 직접 조사를 시작하세요.”

    “캡틴!” 한 박사가 놀란 얼굴로 외쳤다. “직접 탐사라니요? 너무 위험합니다! 저것이 무엇인지,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가야 합니다. 한 박사.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당신만이 저 유물이 가진 단서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이 함장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탐사는 외부 접근만 허용합니다. 내부 진입은 허가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구조물이 비활성화 상태가 아니거나, 위협적인 에너지를 방출한다면 즉시 철수하세요. 모든 명령은 제 허가 하에 이루어집니다. 안전 수칙을 최우선으로 지키세요.”

    한 박사는 잠시 망설였다. 위험했지만, 그녀의 학자적인 호기심은 그 어떤 두려움보다 강렬했다. 이런 기회는 평생 한 번 올까 말까 한 것이었다. 인류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는 발견이었다.

    “알겠습니다, 캡틴. 준비하겠습니다.”

    그녀가 함교를 나서자, 이 함장은 다시 스크린 너머의 거대 유물을 바라보았다. 검은 우주를 배경으로, 완벽한 육각형의 그림자가 세이렌호 위로 드리워졌다. 수십억 년간의 침묵이 곧 깨질 참이었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어떤 메아리가 울려 퍼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인류가 상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미지의 존재와의 조우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다크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밤은 어둠을 토해내고 도시는 그 토사물을 웅얼거리는 불빛으로 감쌌다. 30층 높이의 아파트 창문 너머로, 서울의 밤은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반짝였다. 미나는 피곤한 눈으로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디자인 시안 마감일은 코앞이었고, 그녀의 아파트는 온통 작업의 흔적으로 난잡했다. 한숨을 쉬며 차가운 머그컵을 든 순간, 거실 저편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미나는 고개를 들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낡은 스탠드 조명 아래, 읽다 만 책들이 쌓인 협탁은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피곤해서 헛것이 들렸나 보다. 어차피 이 늦은 시간까지 깨어있는 건 그녀밖에 없었다.

    시간은 새벽 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작업은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미나는 잠시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목을 주무르며 부엌으로 향하던 그녀의 발걸음이 문득 멈췄다. 주방 한가운데 놓인 식탁 의자가 미묘하게 앞으로 당겨져 있었다. 어렴풋이, 누군가 앉으려다 만 것처럼.

    “내가 끌어냈던가…?”

    기억에 없었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랬을 수도 있지. 아파트가 낡아서 혼자 움직이는 가구가 한두 개던가. 미나는 의자를 제자리에 밀어 넣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차가운 물 한 모금을 들이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순간, 거실에서 다시 한번 ‘쾅!’ 하는 소리가 울렸다. 이번에는 좀 더 크고, 명확했다.

    “이번엔 또 뭐야!”

    미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거실로 향했다. 거실 한복판, 티 테이블 위엔 방금 전까지 멀쩡히 놓여 있던 유리잔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컵받침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미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이건 확실히 이상했다. 그녀는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습관이 있었다. 유리잔이 저절로 떨어질 리 없었다. 게다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테이블 위에 버젓이 놓여 있었다.

    공포가 조금씩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 시간까지 깨어있을 친구는 없었다. 결국 아무에게도 닿지 못한 채, 미나는 바닥의 유리 조각들을 쓸어 담았다.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다음 날. 미나는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잠들려고 노력할 때마다 귓가에 알 수 없는 긁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천장 어딘가에서 톡톡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을 때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늦은 오후, 잠에서 깬 미나는 어젯밤의 사건을 되짚었다. 피곤해서 환각을 보았거나, 건물이 낡아서 그런 것이라고 애써 합리화했다. 하지만 밤이 찾아오자, 그녀의 합리화는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려 부엌으로 갔을 때였다. 분명히 제자리에 두었던 프라이팬이 싱크대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수도꼭지에선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미나는 소름이 돋아 황급히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리고 그때, 식칼 하나가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칼꽂이에서 튀어나와 바닥에 박혔다.

    “악!”

    미나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숨이 가빠왔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의 아파트에 침입한 것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도어락은 걸쇠까지 채워져 있었다.

    그날 밤, 미나는 잠시도 눈을 붙일 수 없었다. 침대에 웅크려 앉아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그녀를 짓누르는 듯했다. 집 안의 모든 전등을 켜두었지만, 그림자는 살아있는 것처럼 일렁였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미나는 목이 쉬도록 소리쳤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침대 협탁 위에 놓인 액자들이 하나둘씩 바닥으로 떨어졌다. ‘탁! 탁! 탁!’ 연이어 터지는 파열음과 함께, 미나의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졌다. 액자 속 그녀의 가족사진은 깨진 유리 파편들 사이에서 슬프게 웃고 있었다.

    다음 날, 미나는 결국 아파트를 벗어나려 했다. 짐을 싸고 현관문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덜컹거렸다. 분명히 잠겨 있었는데. 그녀는 두려움에 질려 손잡이를 잡았다. 열리지 않았다. 잠금장치가 쇠붙이를 긁는 듯한 소리를 내며 제멋대로 움직였다. 잠겼다가, 열렸다가, 다시 잠기는 것을 반복했다.

    “문 열어! 문 열라고!”

    미나는 손잡이를 마구잡이로 돌렸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힌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녀를 가두려는 듯이.

    그 순간, 거실에서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옷장이 넘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온 아파트를 흔들었다. 그리고 그 뒤로, 누군가 발을 끄는 듯한 소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터벅… 터벅…’

    미나는 숨을 멈췄다.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차가운 기운이 현관까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털이 곤두서는 공포 속에서, 그녀는 겨우 몸을 돌렸다.

    거실 한가운데, 쓰러진 옷장 옆에 짙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이 짙어진 그림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그림자가 서서히 움직였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녀를 향해.

    “으아악!”

    미나는 비명을 지르며 현관문에 등을 기댔다. 그림자는 그녀의 눈앞까지 다가왔다. 차가운 냉기가 피부를 꿰뚫는 듯했다. 그녀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때, 그녀의 귓가에 끔찍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넌… 가지 못해…”*

    낮고 굵은 목소리였다. 기계음처럼 일그러지고, 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가 그녀의 영혼을 파고들었다. 미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지만, 소리는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림자가 그녀의 팔을 감싸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기운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싫어! 저리 가! 제발!”

    공포에 질린 그녀의 외침은 아파트 전체에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듣지 못했다. 창밖의 도시는 여전히 무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순간, 아파트 전체의 전등이 일제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꺼졌다. 암흑 속에서, 미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단지, 그녀를 짓누르는 차가운 기운과 귓가에 끊임없이 울리는 끔찍한 속삭임만이 있을 뿐이었다.

    *“넌… 나야… 나는… 너고…”*

    미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바닥에 머리를 찧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의식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다음 날 아침, 관리인이 수도 누수를 확인하러 미나의 아파트를 방문했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지만, 미세하게 열린 틈새로 찬 기운이 흘러나왔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관리인은 비상 키로 문을 열었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가구들, 깨진 액자들,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 쓰러져 있는 미나의 모습. 관리인은 경악하며 그녀에게 달려갔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미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핏기가 가신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

    “이제… 안 도망가…”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듯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어둠이 깃들어 있었다. 창밖의 햇살이 그녀를 비추었지만, 그림자는 더욱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도시는 여전히 활기차게 숨 쉬고 있었다. 그 무심한 움직임 속에서, 미나의 아파트는 더 이상 평범한 공간이 아니었다. 이제 그곳은, 어둠이 둥지를 튼 곳이었다. 그리고 미나는, 그 어둠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눈은 창밖의 아득한 도시를 응시했지만, 그 시선은 그 너머의,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아니, 영원히 혼자였다. 영원히 함께였다.

  • 던전 탐험 상세한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

    ## 심연의 그림자: 새벽불꽃

    **장르:** 던전 탐험, 다크 판타지, 반란 서사

    **시놉시스:**
    타락하고 거대한 아퀼라 제국은 ‘심연의 틈’이라 불리는 거대 광산에서 ‘원시의 숨결’이라는 위험한 고대 에너지를 비밀리에 무기화하려 한다. 수많은 평민들이 노예처럼 착취당하고 희생되는 가운데, 전직 광부 ‘류’가 이끄는 저항 세력 ‘새벽불꽃’은 제국의 야망을 막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심연의 틈으로 잠입을 시도한다. 그들의 목표는 제국의 심장부를 꿰뚫고, 암흑 속에서 희망의 불꽃을 피우는 것이다.

    **등장인물:**

    * **류 (RYU):** (20대 중반) 전직 광부이자 ‘새벽불꽃’의 실질적인 리더. 강인한 정신력과 뛰어난 공간 지각 능력, 함정 해체에 능하다. 과거 광산에서 겪은 동료들의 희생이 제국에 대한 깊은 증오로 이어졌다.
    * **아리아 (ARIA):** (20대 초반) 날렵하고 민첩한 암살자/척후병. 단검과 활을 능숙하게 다룬다. 어릴 적 가족을 제국에게 잃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재빠른 판단력과 강철 같은 의지를 가졌다.
    * **칼반 (KALVAN):** (30대 후반) 전 아퀼라 제국군 검사. 제국의 부패에 환멸을 느끼고 ‘새벽불꽃’에 합류했다. 과묵하고 냉철하지만, 동료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거대한 양손검을 사용한다.
    * **베론 사령관 (COMMANDER BERON):** (40대 후반) 아퀼라 제국의 고위 장교. 심연의 틈 작전의 총책임자. 냉혹하고 야심만만하며,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는 어떤 잔혹한 명령도 서슴지 않는다.

    ### **장면 1**

    **[오프닝 – 암전 속에서]**

    **[음향 효과]** 거친 숨소리, 쇠망치 소리, 금속이 긁히는 날카로운 소리, 이따금씩 들리는 채찍 소리.

    **[장면 전환 – INT. 심연의 틈 광산 갱도 – 밤]**

    카메라는 어둠 속을 헤치듯 천천히 전진한다. 이윽고 거대한 지하 갱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거대한 바위 기둥들이 천장을 지탱하고 있고, 낡은 목재 지지대가 곳곳에 불안하게 서 있다. 곳곳에 박힌 ‘흑요정석’ 광맥들이 희미하게 보랏빛을 내며 갱도를 밝힌다.

    수백 명의 광부들이 보인다. 그들의 몸은 해골처럼 마르고, 등에는 채찍 자국이 선명하다. 땀과 먼지로 뒤덮인 얼굴에는 절망과 체념이 드리워져 있다. 그들은 낡고 해진 옷을 입고 곡괭이와 쇠망치를 휘두르며 끊임없이 흑요정석을 캐내고 있다. 그들의 움직임은 기계적이고 무기력하다.

    **[카메라]** 높은 철골 구조물 위를 비춘다. 그곳에는 아퀼라 제국군 감시병들이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서 있다. 그들의 창끝은 날카롭게 아래를 향하고 있고, 얼굴은 냉혹하다.

    **감시병 1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목소리)**
    게으름 피우지 마라! 황제의 광산은 너희의 눈물까지도 마르게 할 것이다!

    **[음향 효과]** 채찍이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카메라]** 휘청이며 쓰러지는 늙은 광부를 비춘다. 그의 옆구리에서 피가 솟구친다. 다른 광부들은 두려움에 몸을 떨면서도, 작업 속도를 늦추지 못한다.

    **류 (RYU) (20대 중반, 다부진 체격, 먼지로 뒤덮인 얼굴)**
    그는 허리를 숙여 흑요정석을 캐고 있다. 그의 얼굴은 피로와 먼지로 얼룩졌지만,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글거린다. 그는 쓰러진 늙은 광부를 슬쩍 곁눈질한다. 그의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진다. 류의 시선은 늙은 광부의 창백한 얼굴과 그 위를 덮는 어둠을 번갈아 본다.

    **류 (독백, 낮은 목소리)**
    …이 빌어먹을 제국. 끝내야 해.

    **[카메라]** 갱도 한쪽 벽에, 희미하게 새겨진 문양을 클로즈업한다. 오래된 상형문자 같은 형태로, 류가 그것을 유심히 살핀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지상에서 들었던 전설이 스쳐 지나간다.

    **류 (독백, 에코 효과)**
    <심연의 틈, 그 이름처럼 깊은 곳에는 제국의 가장 추악한 비밀이 잠들어 있다...>

    **[화면 전환 – INT. 새벽불꽃 은신처 – 지하 동굴 – 밤]**

    좁고 습한 지하 동굴. 희미한 횃불이 벽을 비춘다. 동굴 안에는 낡은 지도와 스케치, 그리고 깨진 광물 조각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다.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류, 아리아, 칼반의 그림자가 횃불 빛에 일렁인다. 그들의 얼굴에는 결연함과 함께 약간의 초조함이 서려 있다.

    **아리아 (ARIA) (20대 초반, 날렵한 체구, 날카로운 눈빛)**
    (지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제국군 순찰은 예상보다 잦아지고 있어. 특히 광산 입구 쪽은 철통이야. 오늘 새벽에만 세 번의 순찰대가 교대하는 걸 봤어.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칼반 (KALVAN) (30대 후반, 전 제국군 병사, 강인하고 과묵한 인상)**
    (무표정하게 팔짱을 낀 채)
    황제는 ‘원시의 숨결’에 미쳐있다. 그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선 어떤 희생도 불사할 테지. 광부들의 숫자가 최근 급격히 줄었다는 보고가 있어. 아마 심층 구역으로 끌려갔겠지.

    류는 한숨을 쉰다. 그의 주먹이 다시 한번 꽉 쥐어진다.

    **류 (진지하게, 횃불 빛이 그의 눈빛을 더욱 강렬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가 광산으로 잠입해야 할 이유야. ‘원시의 숨결’. 제국이 그것을 완벽히 제어하기 전에, 그 위험성을 세상에 알려야 해. 그들의 무기가 되어 우리를 억압하기 전에.

    **아리아**
    하지만 어떻게? 지하 3층, ‘심층 실험 구역’은 제국군 최정예 병력만이 접근할 수 있는 곳이야. 정문은 그야말로 지옥문이야.

    류는 지도 위의 특정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는다. 그곳은 지도에는 전혀 표시되어 있지 않은 틈새였다.

    **류**
    이곳. 내가 광부였을 때, 우연히 발견한 좁은 통로야. 오래된 수갱으로 이어지는데, 지도엔 표시되어 있지 않아. 아마 제국군도 모르고 있을 거야. 지상으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깊은 지하로 통하는 비밀 통로야.

    **칼반**
    (미간을 찌푸리며)
    위험하다. 폐쇄된 통로라면 함정이나 붕괴 위험이 높을 테고.

    **류**
    알아.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어. 우리는 제국의 눈을 피해, 그 심장부에 칼을 꽂아야 해. 이 암흑 같은 시대에, 작은 불씨라도 던져야 해.

    아리아는 허리에 찬 단검을 만지작거린다. 그녀의 눈빛은 불길처럼 이글거린다.

    **아리아**
    그렇다면 움직여야지. 더 이상 기다릴 시간은 없어. 내일 밤, 달이 가장 어두워지는 시각에.

    류는 그들을 차례로 바라본다. 그의 눈빛은 굳건하고 흔들림이 없다. 희미한 횃불 그림자가 그들의 얼굴을 더욱 비장하게 만든다.

    **류**
    제국의 어둠이 가장 깊은 곳, 그곳에서 우리는 새벽을 맞이할 거야.

    **[화면 전환 – 암전]**

    ### **장면 2**

    **[INT. 심연의 틈 광산 입구 근처 – 폐쇄된 수갱 – 밤]**

    달빛조차 스며들지 않는 깊은 밤. 폐쇄된 수갱 입구는 굵은 쇠사슬과 낡은 나무판자로 봉쇄되어 있다. 주변에는 제국군 초소와 순찰로가 보이지만, 수갱 입구는 너무 낡고 보잘것없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하다.

    **[카메라]** 류가 쇠사슬에 걸린 낡은 자물쇠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클로즈업한다. 그의 손은 능숙하게 도구를 움직여 자물쇠를 해체한다. ‘딸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풀린다.

    **아리아 (속삭임)**
    정말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네.

    **칼반**
    (주변을 경계하며)
    방심하지 마라. 이런 곳에 오히려 더 치명적인 함정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류는 낡은 나무판자를 조심스럽게 제거한다. 그 안쪽에는 좁고 어두운 수직 통로가 끝없이 아래로 이어져 있다. 습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훅 끼쳐온다.

    **류**
    (낮은 목소리로)
    먼저 내려가겠다. 아리아, 후방을 맡고. 칼반은 중간을 지탱해 줘.

    그는 허리춤에 찬 밧줄을 수갱 가장자리의 굵은 바위에 단단히 묶고, 밧줄을 잡은 채 어둠 속으로 몸을 던진다.
    아리아가 활과 화살을 준비하고, 칼반은 묵직한 양손검을 어깨에 메고 수갱 입구를 주시한다.

    **[카메라]** 류의 시점에서 아래를 비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점점이 사라지는 밧줄, 그리고 보이지 않는 바닥. 그는 한참을 내려간다. 그의 손은 밧줄을 꽉 쥐고 있고, 시선은 아래의 어둠을 꿰뚫으려는 듯 날카롭다.

    **류 (독백)**
    이 어둠이… 제국의 탐욕만큼이나 깊구나. 하지만 이 심연에서 우리는 길을 찾아야 해.

    몇 분 후, 류의 발이 단단한 바닥에 닿는 소리가 들린다. 그는 손전등을 켜고 주변을 비춘다. 좁은 동굴 형태의 공간이다.

    **류**
    (통신용 휘파람 소리, 짧고 간결하게 두 번)

    위에서 아리아와 칼반이 차례로 내려온다. 세 명이 모두 모이자, 류는 손전등으로 주변 벽을 비춘다. 벽에는 오래된 광물층과 함께, 희미한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아까 광산 갱도에서 봤던 문양과 비슷하다.

    **아리아**
    이게 뭐야? 광물 지도 같기도 하고…

    **류**
    (손가락으로 문양을 훑으며)
    아니, 단순한 지도는 아닌 것 같아. 이건… 옛 부족의 경고문이야. ‘생명의 뿌리, 어둠에 물들다.’ 이 근처에 고대 생명체가 있었거나, 아주 특별한 광맥이 있었을 거야.

    **칼반**
    ‘원시의 숨결’과 관련이 있겠군. 제국이 그 존재를 알기 전부터 이곳에 뭔가 중요한 것이 있었다는 뜻인가.

    그때, 저 멀리서 희미하게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세 명의 얼굴에 긴장감이 스쳐 지나간다.

    **아리아**
    제국군인가? 여기까지?

    **류**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규칙적이지 않아. 그리고 저 소리는… 뭔가 끌려가는 소리 같아.

    그들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전진한다. 좁은 통로가 미로처럼 얽혀 있다. 통로의 벽면은 축축하고 미끄럽다.

    **[카메라]** 아리아가 가장 앞에서 날렵하게 움직이며 앞을 살핀다. 류는 통로 바닥에 깔린 자갈과 흙을 유심히 살핀다. 미세한 발자국과 함께, 억지로 끌려간 듯한 흔적이 보인다.

    **류 (독백)**
    설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통로 끝에 다다른다. 그곳에는 거대한 철문이 박혀 있었다.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안에서 신음 소리와 함께 둔탁한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아리아**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아.

    **칼반**
    (양손검을 살짝 뽑아 들며)
    돌입한다.

    **류**
    (손을 들어 칼반을 제지하며)
    잠깐. 문을 함부로 열지 마. 제국은 이런 비밀 통로를 감시하지 않을 리 없어. 분명 함정이 있을 거야.

    류는 철문에 귀를 대고 내부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문 주변의 벽면과 바닥을 손전등으로 비추며 조심스럽게 살핀다. 그의 눈이 문 상단의 미세한 틈새에 박힌 금속 실을 발견한다.

    **류**
    역시. 이건 압력 감지 함정이야. 문을 열면 천장에서 돌이 쏟아져 내릴 거야.

    **아리아**
    (놀란 눈으로)
    대단해. 어떻게 이걸 알아냈어?

    **류**
    (작게 웃으며)
    광산에서 살아남으려면 땅의 비명을 들을 줄 알아야 하거든. 저들은 폐광된 통로를 감시할 병력이 아까우니, 이런 간단한 함정으로 방문자를 막으려 했을 거야.

    류는 등에서 작은 도구 세트를 꺼낸다. 그는 능숙하게 금속 실을 잘라내고, 문 아래쪽의 작은 구멍에 갈고리 모양의 도구를 넣어 내부 잠금장치를 해제한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문이 아주 살짝 흔들린다.

    **류**
    준비됐어.

    칼반은 다시 검을 쥐고, 아리아는 단검을 양손에 든다. 류는 문에 바짝 붙어선다.

    **류**
    하나, 둘… 셋!

    그가 문을 힘껏 밀어젖힌다. 육중한 철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린다.

    **[장면 전환 – INT. 심연의 틈 광산 – 비밀 실험실 입구 – 밤]**

    문이 열리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혹했다. 좁은 공간에 여러 개의 우리(cage)가 놓여 있고, 그 안에는 피골이 상접한 광부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의 눈은 공포와 체념으로 가득 차 있다. 한쪽 구석에서는 제국군 병사 두 명이 쓰러진 광부에게 채찍질을 하고 있다.

    **제국군 병사 1**
    말해라! ‘원시의 숨결’에 대해 들은 것이 무엇이냐!

    광부는 고개를 저으며 쉰 목소리로 신음한다.

    **[카메라]** 그 모습을 본 아리아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그녀의 눈이 살짝 붉게 빛난다.
    그녀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단검을 던지려던 찰나, 류가 그녀의 어깨를 붙잡는다.

    **류 (낮은 목소리로)**
    섣부르게 움직이지 마. 함정이야. 저 병사들은 미끼일 뿐이야.

    류는 열린 문 너머의 어둠을 응시한다. 그의 눈은 빛이 없는 곳에서도 무언가를 읽어낸다. 그는 벽에 희미하게 그어진 레이저 센서를 발견한다.

    **류 (독백)**
    이런 조악한 함정으로 우리를 꾀어낼 수 있을 리가… 뭔가 이상하다.

    그때, 철문이 열린 충격으로 우리 중 하나가 흔들리며, 우리 안에 갇혀 있던 한 광부가 손을 뻗어 철창 너머의 류를 향해 속삭인다.

    **광부 (쉰 목소리로, 희미하게)**
    …도망쳐… 이건… 그들의… 함정…

    그 순간, 광부의 등 뒤에서 기이한 형체가 솟아오른다. 반쯤 인간의 형상을 잃고, 피부는 녹색으로 변했으며, 팔은 길게 늘어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괴물. 광부들은 괴물의 공격에 그대로 찢겨 나간다.

    **아리아**
    (경악하며)
    저건… 실험체인가?!

    괴물은 류와 아리아, 칼반을 향해 으르렁거린다. 그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입에서는 녹색 액체가 흐른다.

    **칼반**
    (양손검을 뽑아 들며)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괴물이 이들을 향해 맹렬히 돌진한다.
    칼반이 거대한 검을 휘둘러 괴물의 앞발을 막아내고, ‘콰앙!’ 하는 쇠붙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리아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활을 뽑아든다. 활시위를 당기는 그녀의 손은 흔들림이 없다. ‘쉬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괴물의 눈을 향해 날아간다.

    **[카메라]** 화살이 괴물의 눈에 정확히 박히고, 괴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른다. 그 틈을 타 칼반이 검을 휘둘러 괴물의 몸을 가로지른다. 괴물은 녹색 피를 뿜으며 쓰러진다.

    하지만 그들의 뒤에서, 닫힌 철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제국군 정예 병사들이 진형을 갖춰 들어선다. 그들의 갑옷은 더욱 정교하고, 손에는 마법이 깃든 장총이 들려 있다.

    **정예 병사 1**
    침입자들이다! 생포하라!

    **류 (이를 악물며)**
    젠장, 예상보다 더 철저하군. 퇴로가 막혔다!

    그들은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완벽히 포위되었다. 눈앞에는 제국군 정예 병사들, 뒤쪽에는 닫힌 철문. 그리고 양옆으로는 또 다른 좁은 통로들이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카메라]** 류의 시선이 재빨리 주변을 스캔한다. 좁은 통로 중 하나가 다른 곳보다 더 깊고 어두워 보인다. 그곳에서 희미하게 고대 문자 같은 것이 벽에 새겨져 있는 것이 류의 눈에 들어온다. ‘원시의 숨결’과 관련된 단서일지도 모른다.

    **류**
    (낮은 목소리로 아리아와 칼반에게)
    저쪽! 저 통로로 돌파한다! 내가 길을 열 테니, 무조건 따라와!

    **[음향 효과]** 제국군 병사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장총의 장전 소리가 날카롭게 울린다.

    **[화면 전환 – END SCENE]**

    **내레이션 (류의 목소리)**
    제국의 심연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잔혹했다.
    하지만, 어둠 속에서 빛을 찾으려 했던 우리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길을 선택했다.
    새벽은… 반드시 올 것이다.

    **[화면 전환 – 암전]**

    **[엔딩 크레딧]**

  • 좀비 아포칼립스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챕터 1: 폐허 속의 그림자**

    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도시의 잔해가 흉터처럼 늘어서 있었다. 녹슨 철골은 부러진 뼈대 같았고, 깨진 유리창들은 텅 빈 눈동자처럼 세상을 응시했다. 마지막 비가 내린 것이 언제인지조차 가물가물한 메마른 거리에는 먼지만이 춤을 추고, 이따금 스산한 바람이 썩어가는 악취를 실어 날랐다. 이곳은 인간의 시대가 끝난 후, 모든 것이 멈춰버린 거대한 무덤과도 같았다.

    지후는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폐허가 된 슈퍼마켓 입구에 섰다. 텅 빈 진열대와 엎어진 카트, 그리고 바닥에 말라붙은 붉은 얼룩들. 이곳은 한때 풍요로웠던 인간 문명의 씁쓸한 박물관이었다. 생존자 캠프의 식량 비축분이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 이제는 매일같이 목숨을 걸고 바깥으로 나와야 했다. 어딘가에서 찾아낸 깡통 하나,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과자 부스러기라도 가져가지 않으면 오늘은 굶주린 이웃들의 원망 섞인 시선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자, 침묵만이 그를 맞았다. 으스스한 정적은 오히려 위험의 징조였다. 너무 조용한 곳은 대개 그들, 움직이는 시체들이 먹잇감을 기다리는 사냥터였다. 지후는 벽에 걸려있던 녹슨 소방도끼를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얼마나 헤매었을까. 먼지 쌓인 선반을 뒤지고, 쓰러진 냉장고를 살폈지만 먹을 만한 것은커녕 물 한 모금도 찾을 수 없었다. 절망감이 목구멍을 조여왔다. 빈손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 해가 지면 이 도시는 그들의 세상이 된다. 어둠은 그들에게는 은신처였고, 인간에게는 죽음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 안쪽, 어둠 속에 잠긴 창고에서 ‘끄으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후의 심장이 발끝까지 쿵 떨어졌다. 그들이었다. 한 마리일까, 아니면 무리일까? 도망칠까? 아니,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면…

    지후는 심호흡을 하고, 도끼를 고쳐 쥐었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창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은 낡은 경첩 소리를 내며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틈새로 보이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비릿한 냄새가 풍겨왔다. 역겨운 악취가 코를 찔렀다.

    문이 완전히 열리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썩어가는 살점, 찢어진 옷가지, 그리고 광기에 물든 눈. 일반적인 ‘워커’였다. 지후는 본능적으로 도끼를 휘둘렀지만, 그 워커는 예상보다 빨랐다. 지후의 팔을 잡고 거친 숨을 내쉬며 달려들었다. 워커의 입에서 구역질 나는 악취가 뿜어져 나왔다.

    “크악!”

    악력이 엄청났다. 워커의 손가락이 지후의 팔을 파고들었다. 이대로 물린다면 끝이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워커를 밀어냈다. 도끼를 내려쳐 보았지만, 워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후의 목덜미를 노리고 고개를 숙였다. 날카로운 이빨이 시야 가득 들어왔다. 죽음이 코앞이었다.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렇게 끝인가.

    그때였다.
    갑자기, 워커가 퍽 소리와 함께 옆으로 날아갔다. 마치 거대한 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벽에 부딪히며 몸이 터져 나갔다. 붉고 검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지후는 눈을 비비며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워커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가 반쯤 날아간 채, 뇌수가 바닥에 흥건했다.

    그를 구해준 건… 누구지?
    지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스르르 모습을 드러내는 그림자.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길고 검은 그림자. 하지만 분명한 실루엣은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다만, 피부는 잿빛처럼 창백했고, 근육은 비정상적으로 팽창해 있었다. 옷은 다 헤져 너덜거렸지만, 워커들처럼 완전히 썩어 문드러지지는 않았다. 마치 살아있는 시체와 같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단단하고, 강인한 느낌을 주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눈이었다. 핏발 선 워커들의 눈과는 달리, 그 그림자의 눈은 깊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듯했다. 마치… 검은 보석 같았다. 그리고 그 눈에는 광기 대신, 차가운 지성이 서려 있는 듯했다.

    지후는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공포감. 하지만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경외감이 그의 심장을 옥죄어왔다. 저것은 무엇인가? 새로운 종류의 변종인가? 아니면… 진화한 워커?

    그 존재는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지후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예리하고 날카로운 시선. 마치 그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지후는 도끼를 쥔 손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도망쳐야 했다. 이성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발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한 걸까.

    그 존재는 지후의 어깨 너머, 방금 쓰러진 워커를 한 번 흘깃 보았다. 그리고 다시 지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 지후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그 존재의 손.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나 있었고, 손목에는 검고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은… 방금 워커를 날려버린 것에 비해 너무도 깔끔했다. 피 한 방울 묻어있지 않았다.

    그 존재는 천천히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어둠 속에서 사그락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유령 같은 움직임이었다. 지후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공포가 온몸을 지배했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시선은 그 존재의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눈동자 안에는 설명할 수 없는 깊이가 있었다.

    그 존재는 멈춰 섰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 동작은 놀랍도록 인간적이었다. 광기에 찬 워커들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움직임.
    그리고…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마치 억눌린 한숨 같기도 하고, 바람이 스치는 소리 같기도 한. 폐허의 정적 속에서 그 소리는 묘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살아… 있군.”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지후는 얼어붙었다. 목소리였다. 인간의 언어였다!
    쉰 목소리, 마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굳어버린 성대에서 억지로 짜내는 듯한 소리. 하지만 분명히, 인간의 언어였다. 그 존재가 인간의 말을 하다니! 이성은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공포와 경외심, 그리고 이제는 경악이 뒤섞여 그의 머릿속을 휘저었다.

    그 존재는 다시 지후를 꿰뚫어 보았다. 그 검은 눈동자 속에는 미미한 슬픔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그 존재는 돌아서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애초에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지후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의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날뛰었다.
    워커의 피가 튀어 얼룩진 벽, 그리고 아직도 꿈틀거리는 워커의 잔해.
    모든 것이 현실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방금… 뭐였지?”

    지후는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뇌리에는 오직 그 존재의 검은 눈동자와, 텅 빈 폐허 속을 울렸던 쉰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살아… 있군.’
    그것은 경고였을까? 아니면… 단순한 확인?
    지후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폐허 속에서 그를 구해준 미지의 존재가, 평범한 워커와는 차원이 다른 ‘무언가’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지후의 메마른 세상은 알 수 없는 균열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슴속에는 공포와 동시에, 강렬한 호기심이라는 이름의 독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금지된 질문이 떠올랐다.
    저것은 도대체 무엇이며, 왜 자신을 구해준 것인가?
    그 질문은 폐허의 정적 속에서 메아리쳤다.
    지후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삶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 SF (공상과학)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가운 금속 냄새가 코를 찔렀다. 27번 격리 섹터, ‘아스타르 제7 정화소’의 외곽은 예상보다 더욱 견고했다. 카엘은 망원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 거대한 구조물은 마치 죽은 거인의 뼈대처럼 웅장하면서도 불길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옆에 웅크린 레나를 돌아봤다.

    “감지된 경계는 예상과 동일합니다, 대장님. 주황색 등급. 감시망은 규칙적이고, 순찰 경로는… 젠장, 새로운 경로가 추가됐습니다.” 레나가 손목의 홀로패드를 재빨리 조작하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카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어느 방향이지?”

    “서쪽 외벽. 5분 간격으로 병력 증강이 탐지됩니다. 아무래도 저번 43번 섹터 공습의 여파인 듯합니다.” 레나는 고개를 젓더니 짧게 한숨을 쉬었다. “안 그래도 악명 높은 곳인데, 더욱 빡빡해졌네요.”

    “예상했던 일이다.” 카엘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우리의 목표는 그들이 모르는 심층부다. 류, 너는?”

    수풀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류가 날렵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바람의 흐름, 지열 신호. 모두 양호합니다. 굴절 위장막은 완벽해요. 제국 병사들은 제 그림자조차 보지 못할 겁니다.”

    “좋아. 레나는 후방 지원, 류는 선두에서 길을 뚫어라. 나는 류의 후방을 맡는다. 최대한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움직여라.” 카엘의 지시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거대한 정화소의 외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류는 작은 돌멩이 하나 놓치지 않고 밟을 자리를 계산하며 나아갔고, 레나는 끊임없이 제국의 감시망을 교란하며 경로를 업데이트했다. 카엘은 언제든 총을 꺼낼 준비를 하며 주변을 경계했다. 얇은 위장막이 그들의 몸을 흐릿하게 만들었지만, 제국의 기술력은 언제나 한발 앞서 있었다. 조그만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곳이었다.

    “왼쪽 위, 고해상도 열감지기입니다.” 레나의 경고가 귀에 꽂혔다. “3초 후 활성화됩니다!”

    류는 벽에 바짝 몸을 붙이며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등 뒤로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감지기가 허공을 훑고 지나갔다. 카엘은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단 한 발자국만 늦었어도 발각될 뻔했다. 이런 아슬아슬한 순간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그들은 폐쇄된 환풍구 통로에 도착했다. 녹슨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레나가 홀로패드를 문에 밀착시키자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잠금장치가 해제됐다. 철문이 삐걱이며 열리자, 안에서는 습하고 퀴퀴한 냄새가 확 풍겨 나왔다.

    “여기로 진입한다.” 카엘은 가장 먼저 몸을 숙여 안으로 들어섰다. 좁고 어두운 통로였다. 빛 한 줄기 없는 암흑 속에서 오직 그들의 발소리와 숨소리만이 울렸다. 이따금씩 어디선가 들려오는 기계음이 그들의 긴장감을 더욱 조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 끝에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문이 보였다. 류가 손을 들어 멈춤 신호를 보냈다. 그는 문에 귀를 대고 잠시 기다리더니,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안에서 움직임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소리가 들려요. 규칙적이면서도 둔탁한 진동음.”

    카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짓으로 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레나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안에서 펼쳐진 광경에 숨을 들이켰다.

    거대한 공간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투명한 기둥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었다. 기둥 안에는 각각 사람의 형상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발가벗겨진 채, 무수한 관에 연결되어 있었다. 희미한 생체 신호만이 그들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몸을 지탱할 힘조차 없는 듯, 그들은 마치 식물처럼 기둥 안에 박혀 있었다.

    “이게… 대체…” 레나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녀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게 그들이 말하는 ‘정화’의 실체였군.” 카엘의 목소리는 분노로 낮게 깔렸다. 그들의 임무는 제국이 개발 중인 새로운 에너지원의 정보를 캐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설마 그 에너지원이, 인간의 생명을 갈취하는 것이었을 줄이야.

    “대장님, 저기 중앙 제어판.” 류가 손가락으로 거대한 홀로스크린을 가리켰다. 스크린에는 복잡한 데이터와 그래프가 실시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것들을 조작해서… 생체 에너지를 추출하고 있는 겁니다.”

    “데이터를 뽑아내야 해.” 카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증거가 있다면, 제국의 만행을 전 우주에 폭로할 수 있다.”

    레나는 자신의 장비를 들고 중앙 제어판으로 향했다.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이내 전문가답게 콘솔에 접속하기 시작했다. “이건… 이건 말도 안 돼요. 매일 수백 명의 생명력이… 이 시설 하나에서… 젠장!”

    그 순간이었다.
    삐빅-!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붉은 비상등이 깜빡이며 어둠을 갈랐다.

    “젠장, 내가 뭘 건드렸지?” 레나가 경악한 얼굴로 콘솔을 바라봤다. “경보 시스템이 연동되어 있었어! 은폐된 센서에 노출된 것 같습니다!”

    “망할!” 카엘은 즉시 총을 빼 들었다. “류, 출구 확보! 레나는 데이터 전송 즉시 빠져나와!”

    콰앙! 육중한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검은 제복의 제국 충격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헬멧에 달린 조명등이 어둠 속에서 섬뜩하게 빛났다.

    “반란군이다! 사살하라!”

    수십 발의 에너지탄이 허공을 갈랐다. 류는 재빨리 몸을 굴려 엄폐물 뒤로 숨었다. 카엘은 그의 뒤를 따르며 정확하게 두 명의 병사를 쓰러뜨렸다. 하지만 병사들의 수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들은 맹렬하게 총격을 가하며 전진했다.

    “레나, 얼마나 남았지?!” 카엘이 외쳤다.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에너지탄이 뒤편의 벽을 녹였다.

    “40%… 젠장, 너무 느려요! 암호화 때문에!” 레나는 총격 속에서도 눈을 감지 않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녀의 손은 피아노 건반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류는 민첩하게 기둥 사이를 오가며 병사들을 교란했다. 그의 단검이 번개처럼 날아들어 병사 한 명의 목에 박혔다. 하지만 병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강력한 에너지 방어막을 두른 중장갑 병사들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대장님, 후퇴해야 합니다! 이대로는…!” 류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카엘은 병사들의 총격에 밀려 뒤로 물러섰다. 그는 눈앞에 펼쳐진 절망적인 광경을 보았다. 거대한 기계 장치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실루엣, 그리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무자비하게 달려드는 제국의 병사들.

    “젠장, 아직은 안 돼!” 카엘은 이를 악물었다. “레나, 마지막이다! 지금 당장!”

    그 순간, 거대한 홀로스크린에 ‘전송 완료’라는 메시지가 깜빡였다.

    “대장님, 됐습니다! 데이터 전송 완료!” 레나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녀는 곧바로 장비를 챙겨 몸을 일으켰다.

    “좋아, 이제 후퇴한다! 류, 엄호해!” 카엘이 소리쳤다. 그는 레나를 향해 달려가려 했지만, 갑자기 측면에서 쏟아지는 집중 사격에 발이 묶였다. 중장갑 병사들이 그의 퇴로를 막았다.

    “젠장, 이쪽이 막혔다!”

    “제가 길을 열겠습니다!” 류가 외쳤다. 그는 거대한 기둥 위로 솟구쳐 올랐다. 그의 손에는 연막탄이 들려 있었다. “대장님, 레나! 먼저 가세요!”

    류는 연막탄을 터뜨리며 병사들의 시야를 가렸다. 뿌연 연기 속에서 병사들이 혼란에 빠졌다. 그 틈을 타 카엘은 레나를 끌고 옆 통로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류의 등 뒤에서, 거대한 중장갑 병사 한 명이 마치 그림자처럼 연기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의 에너지 도끼가 섬광처럼 번뜩였다. 류는 미처 반응할 틈도 없었다.

    “류!” 카엘의 절규가 정화소 안에 울려 퍼졌다.

    도끼는 류의 어깨를 강타했고, 그의 몸은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는 차가운 금속 바닥에 떨어지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병사들이 류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안 돼! 류!” 레나가 뒤돌아보려 했지만, 카엘이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멈춰, 레나! 지금 돌아가면 모두 죽는다! 류의 희생을 헛되이 할 셈이냐!”

    카엘의 눈빛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류를 두고 갈 수 없다는 고통스러운 사실에 이를 악물었다. 레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뒤에서는 총성이 빗발쳤다.

    그들은 도망쳐야 했다. 류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제국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하지만 류가 잡히는 그 순간, 그들이 확보한 모든 정보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섬뜩한 예감이 카엘의 머릿속을 스쳤다.

    “젠장…!”

    카엘은 레나를 끌고 좁은 통로 속으로 사라졌다. 뒤에서는 류의 비명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맹렬한 총성과, 철문이 닫히는 육중한 굉음만이 그들의 귓가를 찢을 뿐이었다.

    과연 그들은 이 지옥 같은 시설에서 무사히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류는… 류는 어떻게 될까? 카엘은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손에 쥐어진 데이터 단말기를 꽉 쥐었다. 이것만이 그들의 희망이었다. 류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 스페이스 오페라 독립적인 단편 소설

    광활한 성간의 어둠 속에서, 나는 망각을 향해 표류했다. 내 이름은 카엘. 한때는 미지의 성계를 탐험하는 선구자였고, 누구보다 빛나는 꿈을 꾸던 사내였다. 그리고 내 곁에는 언제나 리안이 있었다. 그는 나의 오랜 친구이자, 우주를 함께 헤치던 동료였으며, 내 모든 것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우리는 어릴 적부터, 낡은 스크랩 우주선 한 척을 고쳐 타고 맹세했다. 언젠가 은하계의 끝에 도달해, 전설 속의 ‘별의 심장’이라 불리는 고대 문명의 유물을 찾아낼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그것을 찾아냈다. 수백 년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잊힌 성단의 심장부에서 잠들어 있던 거대한 구조물. 그 안에는 우주의 법칙을 뒤흔들 만한 힘을 지닌, 찬란한 빛을 내뿜는 크리스탈이 있었다. ‘별의 심장’. 우리의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리안은 내 어깨를 굳게 잡았다. “카엘, 해냈어! 우리가 해냈다고!” 그의 목소리는 감격으로 떨렸고, 눈에는 벅찬 기쁨이 서려 있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우리는 우주를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짧았다. 잔인하리만큼.

    며칠 후, 유물의 봉인을 풀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돌입했을 때였다. 우리는 방대한 에너지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복잡한 절차를 수행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리안의 조종석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그의 패널에 붉은빛이 번쩍였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 “카엘! 비상 사태! 외부 침입이야!”

    나는 급히 내 패널을 확인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주변은 고요했다. 의아함이 스쳤지만, 나는 즉시 전투 태세에 돌입하려 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섬뜩한 냉기가 느껴졌다. “미안하다, 카엘.” 리안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마치 얼음 조각처럼.

    나는 고개를 돌렸다. 리안은 내게 레이저 피스톨을 겨누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이전에 보았던 기쁨도, 감격도 없었다. 오직 탐욕과 냉정한 계산만이 번뜩였다. “뭐… 뭐 하는 거야, 리안?” 내 목소리가 떨렸다. 믿을 수 없었다.

    “이 유물은 너무나도 강력해. 우리 둘이 나누기엔 아깝지.”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덤덤하게 말했다. “이 힘만 있다면, 나는 은하계를 지배할 수 있어. 넌 걸림돌일 뿐이야.”

    그의 말과 동시에, 내 뒤에서 억압 장치가 솟아올라 나를 붙잡았다.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고,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버둥거렸지만 소용없었다. “리안! 대체 무슨 소리야! 정신 차려! 우리는 친구잖아!” 나는 절규했다.

    그는 냉소를 흘렸다. “친구? 그래, 친구였지. 하지만 이제부터 넌 내 위대한 여정의 비극적인 서막일 뿐이야.” 그는 유물의 봉인 해제 시스템을 조작했다. 거대한 크리스탈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그리고 그 빛은, 그 순간 리안의 눈동자 속에서도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것 봐, 카엘. 이제 이 유물은 나에게만 반응할 거야.” 그는 피스톨을 내 머리에 겨눈 채, 다른 한 손으로는 거대한 크리스탈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끔찍한 고통과 함께, 나는 우주선의 비상 탈출 캡슐에 실려, 빛의 영역 밖으로 강제로 사출되었다. 내 우주선, 내 꿈, 그리고 내 친구였던 리안은 빛과 함께 사라졌다. 그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나는 무한한 어둠 속으로 던져졌다.

    산소 고갈 경고음이 삐삐거렸다. 캡슐은 고장 나 있었다. 우주의 냉기가 내 살을 파고들었다. 나는 죽음을 예감했다. 하지만 그때, 내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고통과 분노가, 죽음보다 더 강하게 나를 붙잡았다. ‘리안. 나는 너를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반드시 돌아와서, 네가 빼앗아 간 모든 것을 되찾을 거야.’

    그렇게 나는 이틀 밤낮을 표류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나는 낡고 버려진 화물선에 의해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화물선은 불법 밀수품을 나르는 작은 범죄 조직의 것이었다. 나는 그들의 구역에서, 아무도 모르게 숨을 쉬고, 오로지 한 가지 목표만을 가슴에 품고 살아갔다. 복수.

    나는 이름을 바꿨다. ‘어둠 추격자’라고 스스로를 명명했다. 내 존재는 이제 리안의 죄를 추적하는 그림자에 불과했다. 나는 밤을 가르고, 은하계의 가장 어둡고 위험한 구석을 찾아다녔다. 싸움을 배우고, 조작 기술을 익히고, 정보를 캐내고, 잊힌 기술을 해독했다. 내 몸은 흉터로 가득했지만, 내 정신은 강철처럼 단단해졌다.

    수년이 흘렀다. 리안은 ‘별의 심장’을 이용해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자칭 ‘빛의 황제’라 불리며, 수많은 성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의 함대는 별을 가렸고, 그의 군대는 저항하는 모든 것을 짓밟았다.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숭배했다. 그가 가져온 기술 발전과 질서 때문에.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그의 거짓과 배신 위에 세워진 모래성이라는 것을.

    내 손에는 이제 녹슨 레이저 피스톨 대신, 그림자 함대의 지휘권이 쥐어져 있었다. 내 배, ‘레퀴엠’호는 은하계의 악몽이었다. 그림자처럼 나타나, 번개처럼 공격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유령선. ‘레퀴엠’의 함교에서, 나는 리안의 함대 움직임을 감지했다. 그는 직접 ‘별의 심장’이 있는 본성, ‘에테르니아’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새로운 정복을 위한 준비였을 것이다.

    “엔진 출력 최대로. 목표는 에테르니아. 전 함대, 그림자 모드 유지.” 내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내 심장은 폭풍처럼 요동쳤다. 드디어. 마침내.

    ‘레퀴엠’은 어둠 속을 가르며 에테르니아 성계로 진입했다. 에테르니아는 리안의 힘의 상징이었다. 거대한 우주 정거장들이 행성 주위를 위성처럼 돌고 있었고, 수천 척의 전함들이 요새처럼 진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리안은 빛에 익숙해져 어둠에 갇힌 자신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황제 리안의 기함, ‘정의의 심판’호가 포착됐다.” 내 통신 장교가 보고했다. “행성 대기권으로 진입 중입니다.”

    나는 씨익 웃었다. “좋아. 계획대로. 그림자 함대는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본대는 ‘정의의 심판’호를 직접 노린다. 전술 비행 모드. 절대 들키지 마라.”

    ‘레퀴엠’은 은밀하게 접근했다. 리안의 함대는 우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들은 너무나도 오만했다. 그들이 ‘빛의 황제’라 칭송하는 리안처럼.

    우리의 기습 공격은 완벽했다. 그림자 함대는 리안의 후방 함대에 혼란을 주었고, ‘레퀴엠’은 그의 기함에 직격타를 날렸다. “쉴드 파괴! 동력실 마비!” 리안의 기함에서 절망적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카엘! 이럴 수는 없어! 어떻게…!” 리안의 다급한 목소리가 내 통신망을 뚫고 들어왔다. “어떻게 네가 아직 살아있는 거야! 그때 분명히…!”

    “네가 죽였다고 생각했겠지.” 나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내 심장은 너에 대한 복수로 뛰고 있었다. 이제 네 거짓 왕국은 무너질 시간이야, 리안.”

    내 함선은 ‘정의의 심판’호에 도킹했다. 나는 내 부하들을 이끌고 기함 내부로 진입했다. 리안의 병사들은 혼란에 빠져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 나는 복도의 끝에서 리안을 발견했다. 그는 화려한 황제의 복장을 입고, ‘별의 심장’이 안치된 홀 한가운데 서 있었다. 여전히 오만한 표정이었다.

    “카엘… 네가 여기까지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리안은 피스톨을 뽑아 들었다. 그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소용없어. 난 ‘별의 심장’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얻었어. 너 따위가 감히…!”

    “그건 우리가 함께 찾아낸 것이었지.” 나는 침착하게 내 피스톨을 겨눴다. “네가 빼앗아 간 것을 돌려받을 시간이다.”

    “돌려받는다고? 멍청한 소리! 넌 나를 이해 못 해! 이 힘은 나만이 다룰 수 있어! 나만이 진정한 황제야!” 그는 발악하듯 외쳤다. 그리고 ‘별의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푸른빛이 그를 감쌌다.

    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방아쇠를 당겼다. ‘탕!’ 섬광이 리안의 어깨를 꿰뚫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별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도 일렁이며 약해졌다.

    “네 착각이야, 리안.” 나는 쓰러진 그의 앞에 다가섰다. 그의 얼굴은 고통과 분노,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넌 단지 힘에 현혹된 어리석은 인간일 뿐이야. 이 유물은 너 같은 탐욕스러운 자를 위한 게 아니었어.”

    “네가… 네가 어떻게 감히…” 리안은 신음했다. “이 모든 게… 내 것이었는데…”

    나는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네 것이 아니었다. 단 한순간도. 우리는 함께 꿈꿨고, 함께 찾아냈지만, 너는 그 꿈을 배신으로 짓밟았다.”

    나는 그를 ‘별의 심장’이 놓인 제단으로 끌고 갔다. 거대한 크리스탈은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기억나나? 우리가 이 유물을 처음 발견했을 때, 약속했지. 이 힘으로 정의롭고 평화로운 은하계를 만들겠다고.”

    리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텅 비어 있었다.

    나는 ‘별의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유물의 푸른빛이 내 손을 감쌌다. 리안은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네가…!”

    “나는 너와 달라, 리안.” 나는 ‘별의 심장’의 힘을 느끼며 말했다. “나는 이 힘을 내 욕망을 채우는 데 쓰지 않아. 나는 단지, 네가 나에게서 빼앗아 간 것을 돌려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네가 저지른 모든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나는 ‘별의 심장’의 에너지를 역으로 조작했다. 리안의 기함 전체에 경고음이 울렸다. 과부하가 걸린 시스템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럴 순 없어! 네가 뭘 하려는 거야!” 리안은 필사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그의 힘은 이미 소진된 상태였다.

    “네가 나를 망각 속으로 던져버렸듯이, 나는 너를 네 죄의 무게 속으로 던져줄 것이다.”

    ‘정의의 심판’호는 강력한 에너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별의 심장’이 내뿜던 힘은 이제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처럼 변해갔다. 함선은 찢겨나가고, 파편들이 우주 공간으로 흩뿌려졌다. 리안의 절규는 거대한 폭발음 속에 묻혔다.

    나는 ‘레퀴엠’호로 돌아왔다. 내 손안의 ‘별의 심장’은 이제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더 이상 폭주하는 에너지는 없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창밖의 우주는 여전히 광대하고 차가웠다. 내 마음속의 불타오르던 복수의 불꽃은 사그라들었다. 허망함이 밀려왔다. 내가 이 모든 것을 위해 희생했던 시간들. 잃어버린 꿈. 잃어버린 친구.

    “함장님, 이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통신 장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우주를 바라봤다. “어디든, 리안의 그림자가 닿지 않는 곳으로.” 내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리고… 이 유물이 진정으로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지, 내가 직접 확인할 것이다.”

    내 손 안의 ‘별의 심장’은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마치 잊힌 꿈을 다시 속삭이는 것처럼. 나는 더 이상 카엘도, 어둠 추격자도 아니었다. 나는 망망대해 같은 우주를 유영하는, 새로운 시작의 표류자였다. 리안에게서 빼앗긴 내 과거는 복수로 마무리되었지만, 내 미래는 이제 ‘별의 심장’과 함께 다시 시작될 것이다. 이 광활한 우주 어딘가에, 진정한 평화가 존재하기를 바라며.

  • 메카 액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성계무도대회: 묵룡, 각성

    천외천(天外天), 일곱 태양이 불타는 성계의 중심. 우주를 가로지르는 수십 개의 거대 궤도선과 행성 간 도시들 사이, 은하의 심장이 고동치는 듯한 이 장엄한 공간에 오직 하나의 목적을 위해 지어진 거대한 건축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바로 천하의 명운을 건 무신(武神)들의 대결장, ‘천룡 경기장’이었다.

    수백억 인류의 시선이 집중된 곳. 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홀로그램 비전에는 각 무신구(武神具)의 격투 장면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관객석을 가득 메운 인간과 이종족, 심지어 고대 기계 종족들까지 열광적인 환호성을 토해냈다. 그들의 함성은 은하계의 먼 변방까지 전파되어, 수많은 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곳은 단순한 경기가 아니었다. 수천 년 역사의 무림 강호(武林江湖)가 우주로 확장되며 빚어낸, 새로운 시대의 ‘성계무도대회(星界武道大會)’였다. 패자는 모든 것을 잃고, 승자는 천하를 제패한다.

    “크아아아악! 광무문(狂武門)의 ‘광뢰신(狂雷神)’이 폭주한다!”

    비전에서 터져 나오는 해설자의 목소리는 이미 쉬어 있었다. 광활한 아레나 위, 고대 무림의 살법(殺法)을 기반으로 한 맹렬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무신구 ‘광뢰신’이 거대한 손톱으로 바닥을 찢으며 돌진했다. 붉은 섬광을 뿜어내는 기체는 마치 살아있는 맹수 같았다. 그 안에는 광무문의 젊은 대주(代主), 혈기 넘치는 ‘진천풍’이 탑승해 있었다. 그의 목적은 오직 하나, 선대부터 이어진 ‘천하제일’의 칭호를 되찾는 것이었다.

    진천풍의 광뢰신은 아레나를 종횡무진하며 압도적인 기세로 상대를 몰아붙였다. 광뢰신의 주먹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파공성이 울려 퍼졌고, 맞으면 행성 요새마저도 부술 것 같은 일격이 쏟아졌다. 그의 상대는 거대하고 화려한 여타 무신구들과는 사뭇 다른, 검은색 외장으로 덮인 낡아 보이는 기체였다.

    “묵룡(墨龍)… 저 무신구는 대체 뭐지? 어디 문파의 것인지 기록에도 없는데!”
    “저 조종사는 또 뭐야? 표정이 전혀 없잖아! 광뢰신을 상대로 저렇게 버티다니, 괴물이군!”

    묵룡. 검은 용이라는 이름처럼,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외형의 무신구는 광뢰신의 맹렬한 공격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었다. 번개처럼 쏟아지는 주먹과 발길질을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피하거나 흘려내며, 마치 태풍 속의 바위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안에는 강혁(姜赫)이 앉아 있었다.

    강혁은 묵룡의 조종석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내면은 고요한 호수와 같았다. 수백 번, 수천 번을 반복했던 훈련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기체에 흐르는 자신의 기(氣), 묵룡의 강철 골격에 새겨진 고대 무술의 흔적들. 이 모든 것이 강혁의 육신과 영혼에 완벽하게 동화되어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긴장이 아닌, 기운의 흐름을 조절하는 미묘한 움직임이었다.

    *버텨라, 묵룡. 아직은 아니다.*

    강혁의 내면에서 깊은 목소리가 울렸다. 이 묵룡은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유산이자, 한때 강호를 지배했던 고대 무신(武神)의 혼이 깃든 전설의 기체였다. 그러나 그 전설은 이제 잊혀진 과거가 되어버렸고, 묵룡은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고철 덩어리 취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강혁은 알고 있었다. 묵룡의 내면에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궁극의 힘이 잠들어 있다는 것을.

    “이봐, 쥐새끼! 그깟 방어만으로 언제까지 버틸 셈이냐! 광뢰신의 주먹 맛을 제대로 보여주마!”

    진천풍의 거친 외침이 강혁의 귀를 때렸다. 광뢰신의 거대한 팔뚝에서 푸른 전기가 번쩍였다. 진천풍은 ‘광무팔괘장(狂武八卦掌)’의 궁극기인 ‘뇌신쇄파(雷神碎破)’를 시전할 참이었다. 팔괘를 그리며 회전하는 광뢰신의 몸체는 엄청난 속도로 가속했고, 그 끝에서 터져 나오는 주먹은 아레나의 보호막마저 뒤흔들었다.

    콰아아아앙!

    번개와도 같은 속도로 날아든 주먹이 묵룡의 흉갑을 강타했다. 묵룡은 거대한 충격에 뒤로 밀려났지만, 균형을 잃지 않았다. 강혁은 기체에 흐르는 충격파를 온몸으로 느끼며 더욱 깊이 눈을 감았다.

    *때가 왔다.*

    강혁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눈동자에서 희미한 푸른 빛이 스쳤다. 조종석의 조작 패널이 아닌, 오직 정신과 육체의 연결만으로 묵룡의 모든 회로가 깨어났다. 묵룡의 검은 외장 곳곳에 숨겨져 있던 푸른색 마노(瑪瑙) 장식들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낡고 투박했던 묵룡의 기체에서 엄청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오랜 잠에서 깨어난 고대의 용이 기지개를 켜는 듯했다.

    “뭐… 뭐야! 갑자기 기운이…!” 진천풍이 당황한 목소리로 외쳤다.

    강혁은 묵룡의 조종석에서 손을 뻗어 허공을 잡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그의 손끝에서 무형의 기운이 묵룡의 팔을 타고 흘러갔다. 묵룡의 거대한 팔이 허공에 원을 그리며 ‘태극권(太極拳)’의 ‘운수(雲手)’ 자세를 취했다. 느릿하면서도 기묘한 움직임이었다.

    광뢰신이 다시 한번 ‘뇌신쇄파’를 준비하며 돌진해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묵룡의 움직임이 달랐다. 묵룡은 진천풍의 공격 방향을 예측하는 듯, 몸을 비틀어 힘을 흘려내며 동시에 광뢰신의 사각으로 파고들었다.

    “말도 안 돼! 저 속도에… 저렇게 유연하다고?!” 진천풍은 경악했다.

    묵룡은 광뢰신의 거대한 몸체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가, 마치 검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광뢰신의 턱밑으로 파고들었다. 강혁의 입술이 비틀렸다.

    “묵룡비공(墨龍飛空), 칠성권(七星拳)!”

    강혁의 두 팔이 마치 용의 춤처럼 유려하게 휘둘러졌다. 묵룡의 양 주먹이 맹렬한 속도로 광뢰신의 취약점을 노렸다. 파앙! 파파팡! 파바바박! 일반적인 기체가 낼 수 없는, 오직 무술 고수의 내공이 깃든 주먹만이 낼 수 있는 연타였다. 첫 주먹은 광뢰신의 보호막을 꿰뚫었고, 두 번째는 장갑을 찌그러트렸다. 세 번째, 네 번째… 일곱 번째 주먹이 터져 나갈 때마다 광뢰신의 기체는 엄청난 충격에 휘청거렸다.

    콰드드드득!

    마지막 주먹이 광뢰신의 동력로 바로 아래를 강타했다. 푸른 번개를 뿜어내던 광뢰신의 움직임이 순간 정지했다. 그리고 이내 전신에서 스파크가 튀며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악! 말도 안 돼! 감히 광무문의 광뢰신을…!”

    진천풍의 절규가 끝나기도 전에, 묵룡은 다시 한 번 고대의 권법을 펼쳤다. 이번에는 ‘용비승천(龍飛昇天)’의 자세. 거대한 몸체가 회전하며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그리고는 낙하하는 힘을 이용해 광뢰신의 정수리를 향해 묵직한 발길질을 날렸다.

    퍼억!

    그 한 방에 광뢰신의 머리 부분이 통째로 찌그러들었다. 기체는 균형을 잃고 아레나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처참하게 고꾸라졌다. 광뢰신의 몸에서 푸른 전기가 사그라들고, 이내 모든 불빛이 꺼졌다.

    장내는 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수백억 관중의 시선이 움직임을 멈춘 광뢰신과, 그 옆에 묵묵히 서 있는 검은 무신구 ‘묵룡’에게 꽂혔다. 그리고 이내 거대한 폭발과도 같은 환호성이 천룡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우오오오오! 묵룡! 묵룡! 저게 대체 어디 문파의 무신구란 말이냐!”
    “새로운 강자가 나타났다! 천하제일의 칭호를 노릴 진정한 존재가!”

    강혁은 묵룡의 조종석에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승리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이 성계무도대회에는 묵룡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숨겨진 힘을 가진 무신구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모두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궁극의 비밀에 닿아 있었다.

    아레나의 중앙 비전에는 강혁의 이름이 선명하게 빛났다. ‘강혁, 다음 라운드 진출’.

    경기장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VIP 관람석. 그곳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강혁의 묵룡을 응시하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 잊혀졌던 묵룡의 기운이… 마침내 깨어났는가.”

    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의 심연처럼 어두웠다. 노인의 옆에 서 있던 그림자 같은 인물이 낮게 속삭였다.

    “예상보다 빠릅니다, 문주(門主). 그 아이는… 위험한 변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노인은 피식 웃었다. 왠지 모를 서늘함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변수라… 재미있지 않은가. 어차피 이 대회의 끝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묵룡이라면… 어쩌면 오랜만에 흥미로운 광경을 보여줄지도 모르지.”

    그의 시선은 다시 아레나의 묵룡을 향했다. 검은 용은 모든 이의 시선을 받으며 묵묵히 다음 도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강혁은 이 거대한 대회의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그는 결코 물러서지 않을 터였다. 아버지의 유산을 짊어진 자로서, 묵룡의 진정한 힘을 각성시켜야만 했다.

    성계무도대회의 막이, 비로소 제대로 오르고 있었다.

  • 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골짜기의 심연

    카인의 폐부는 잿빛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쇳내와 흙내, 그리고 이름 모를 축축한 악취가 뒤섞인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그의 손에 들린 곡괭이는 이미 수십 년은 족히 넘었을 낡은 광물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이곳, 잿빛 골짜기의 심장부에서, 그는 날마다 죽어갔다.

    아스모데아 제국은 거대했다. 끝없이 펼쳐진 대지 위에서,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흑요석 첨탑들이 수도의 위용을 자랑했다. 황제의 이름은 대지 위에 깔린 족쇄처럼 백성들의 삶을 짓눌렀다. 제국은 광물을 요구했고, 우리는 그 요구에 따라 땅속 깊이 파고들었다. 끝없이, 멈추지 않고.

    “카인, 잠깐 쉬어가라. 네 꼴이 말이 아니다.”

    늙은 광부 제이슨이 허물어진 돌벽에 기대어 한숨을 쉬었다. 그의 얼굴은 석탄 가루와 주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카인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랜턴 불빛 아래에서 겨우 주저앉았다. 희미한 불빛은 갱도 저편의 어둠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고, 그 어둠 속에서 마치 무언가가 숨 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쉬어가고 싶어도, 내일 닥쳐올 할당량을 생각하면 잠시도 눈을 붙일 수가 없네.”

    카인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제국은 날마다 할당량을 높였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광물을 요구했고, 그에 미치지 못하면 ‘불경죄’라는 명목으로 끌려갔다. 끌려간 이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또, 며칠 전에는 젊은 마르쿠스도 사라졌지. 밤마다 광산 끝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중얼거리더니….”

    제이슨의 목소리에 진득한 공포가 묻어났다. 어둠 속에서 광부들은 때때로 이상한 것을 보거나 들었다. 형체가 없는 그림자가 시야를 스치고, 멀리서 알 수 없는 언어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이도 있었다. 어떤 이는 밤마다 꾼 꿈에 대해 중얼거렸다. 꿈속에서 모든 별이 죽고, 거대한 눈동자가 온 우주를 응시하고 있었다고. 그 꿈 이야기를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며칠 밤낮을 잠 못 이루며 떨었다.

    카인도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위협을 느끼곤 했다. 특히 깊은 갱도에서 발견되는 ‘밤의 광물’ 때문이었다. 흑요석처럼 검고, 미세하게 푸른빛을 띠는 그 광물은 만질 때마다 손끝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것처럼 미약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 광물은 제국이 가장 탐내는 것이었고, 가장 많은 할당량이 매겨졌다. 그 광물을 캐낼 때마다 카인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이곤 했다.

    “그만 쉬었으면 다시 일해야지? 황제 폐하의 자비로운 통치가 너희를 게으름뱅이로 만들지 않도록, 나는 너희를 부지런히 감독해야 할 의무가 있다.”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오는 비릿한 목소리에 카인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랜턴 불빛 아래, 비대한 몸집의 대장 바르데가 서 있었다. 번쩍이는 황금 제복은 잿빛 골짜기의 모든 것과 이질적이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채찍이 매달려 있었고, 콧수염을 비튼 그의 얼굴에는 탐욕과 잔인함이 번들거렸다.

    “대장 바르데!”

    카인과 제이슨은 황급히 일어섰다. 바르데는 힐끗 우리를 내려다보더니, 쇠약한 제이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늙은이는 쓸모가 없지. 제이슨, 너는 지난주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더군.”

    “하지만 대장님! 제가 며칠 동안 열병에 시달려서…!”

    제이슨이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가 역력했다. 끌려가는 광부들의 비명소리가 잿빛 골짜기의 오래된 동굴 속에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는 듯했다.

    “변명은 필요 없다. 불경한 자에게는 오직 처벌뿐! 병사들!”

    바르데의 손짓 한 번에 뒤따라온 두 명의 제국 병사가 제이슨에게 달려들었다. 강철 갑옷으로 무장한 그들은 거친 손으로 제이슨을 움켜쥐었다. 늙은 광부의 몸은 깃털처럼 가볍게 들려 올라갔다.

    “안 돼! 제이슨 아저씨!”

    카인이 다급히 외쳤으나, 병사들은 묵묵히 제이슨을 끌고 갱도 입구 쪽으로 사라졌다. 제이슨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멀어질수록 카인의 가슴속에는 무언가가 들끓었다. 불경죄. 제국이 우리를 옭아매는 가장 잔인한 족쇄. 우리는 그저 먹고살기 위해 광물을 캤을 뿐인데, 제국은 우리의 삶마저도 재물로 요구했다.

    “다음은 누구일까? 너일 수도 있고, 아니면 네 가족일 수도 있지.”

    바르데는 카인의 어깨를 툭툭 치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시선은 카인의 눈을 꿰뚫는 듯했다. 카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대로 죽는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죽음과 공포 속에서, 카인의 마음속에 서서히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밤, 잿빛 골짜기의 작은 오두막들이 어둠에 잠겼을 때, 카인은 광부 휴게실 뒤편의 허름한 창고로 향했다. 낡은 문을 열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안에는 몇몇 광부들이 이미 모여 있었다. 모두가 지쳐 보였지만, 그들의 눈에는 절망과 함께 처음 보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카인, 왔구나.”

    가장 나이가 많은 광부, 한스가 침침한 랜턴 불빛 아래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피로에 절어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제이슨 아저씨가 끌려갔습니다. 오늘은 제이슨 아저씨지만, 내일은 우리 중 누구든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족이 될 수도 있고요.”

    카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어떤 쇳소리보다 단단했다. 다른 광부들의 시선이 카인에게 집중되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각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분노와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래, 카인의 말이 맞아. 이렇게 죽어가느니, 한 번쯤은 맞서 싸워야지.”

    젊은 광부 에릭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 앉은 광부, 멜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낡은 도끼를 만지작거렸다.

    “하지만 제국은 너무나 거대해. 우리는 겨우 이 작은 광산촌에 갇힌 광부들일 뿐이야. 병사들의 무기도 제대로 상대할 수 없어.”

    한숨 섞인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현실이었다. 제국의 군대는 강했고, 우리의 무기는 고작 곡괭이와 삽이었다. 하지만 카인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약하지만, 제국은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카인이 말했다. 그는 바닥에 고여 있는 흙탕물을 발로 툭툭 찼다.

    “밤의 광물. 그 검은 광물이 제국의 가장 큰 욕망입니다. 그 광물에는 분명 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광물이 나오는 갱도의 가장 깊은 곳… 저도 가끔 알 수 없는 소리를 듣곤 했습니다. 마치 심장이 뛰는 듯한, 하지만 인간의 것이 아닌… 그런 소리요.”

    모두의 얼굴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들은 모두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껴왔다. 갱도의 깊은 곳에서 풍겨오는 기묘한 악취,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정체 모를 빛. 그것들은 분명 제국이 광물을 요구하는 이유와 관련이 있었다.

    “제국이 이 밤의 광물에 집착하는 이유가 뭘까? 그리고 제이슨 아저씨를 비롯해 사라진 광부들은 정말 ‘불경죄’로 처벌받은 걸까?”

    카인의 질문은 창고 안에 무거운 침묵을 불러왔다.

    “제국은 우리를 노예처럼 부립니다. 우리의 피와 땀을 짜내어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죠.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제국의 먹잇감이 되지 않을 겁니다.”

    카인은 주먹을 꽉 쥐었다. 랜턴 불빛 아래, 그의 그림자가 거대하게 흔들렸다.

    “이 잿빛 골짜기에서, 제국의 어둠에 맞서는 불꽃을 피웁시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불꽃일지라도, 언젠가는 제국의 거대한 어둠을 태워버릴 수 있을 겁니다.”

    광부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한참의 침묵 끝에, 한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늙은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좋다, 카인. 이 늙은이도 마지막 불꽃을 태워보지. 이 지긋지긋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라도 찾아보자고.”

    그의 말에 다른 광부들도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 절망의 그림자 속에서, 아주 작지만 확실한 반란의 불씨가 잿빛 골짜기 깊은 곳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들이 맞서 싸울 것이 단지 부패한 제국만이 아니라는 것을. 제국의 어둠 밑에 훨씬 더 오래되고, 훨씬 더 거대한 무언가가 숨 쉬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무언가가 깨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 사이버펑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사이버네틱스 빌딩들의 강철 비늘 숲이 하늘을 찔렀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것 같은 네온 간판들이 지상을 축축하게 비추는 도시, 뉴-서울의 최하층. 그곳은 인간의 탐욕이 뱉어낸 온갖 잔해들이 켜켜이 쌓인 무덤이자, 끝없는 생존의 전쟁터였다. 빗물이 끊임없이 녹슨 파이프를 타고 흘러내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전자 부품 타는 냄새가 섞인 공기를 가득 채웠다.

    카인은 허리까지 오는 스크랩 더미 속에서 몸을 웅크렸다. 그의 눈은 나이트 비전 필터를 통해 희미하게 빛나는 통로의 끝을 응시했다. ‘지하 32구역’. 한때 거대 기업 ‘프로메테우스 코퍼레이션’의 핵심 데이터 서버 팜이 있던 곳이었지만, 20년 전의 대화재 이후로는 완전히 버려진 채 봉인된 곳이었다. 도시의 ‘청소부’들이 몇 번 뒤졌지만, 여전히 건질 게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리고 카인은 그 소문을 좇아 여기까지 내려왔다.

    “이 빌어먹을 구역은, 언제쯤 미련을 버릴까.”

    그의 조용한 중얼거림은 고요한 정적을 깨뜨리지 못했다. 손목에 찬 다용도 도구 ‘멀티-랜서’를 켰다. 스크린에 미세한 전자기장 스캔 데이터가 깜빡였다. 목표는 단 하나, 초고대역 뉴로-칩. 재수 좋으면 하나에 도시 외곽의 작은 아파트 월세를 해결할 수 있는 귀한 물건이다.

    카인은 망가진 보안 게이트를 조용히 해킹해 열었다.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신경을 긁었지만, 이내 침묵에 잠겼다. 텅 빈 데이터 룸은 검은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채 흡사 거대한 유령선 같았다. 먼지 쌓인 서버 랙들이 미로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는 익숙하게 낡은 케이블을 피하고, 바닥에 널린 파편들을 밟지 않으며 안쪽으로 향했다.

    십여 분을 더 들어갔을까. 스캔이 미약하게 반응했다.
    “잡았다.”
    카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 스캔은 뉴로-칩의 것이 아니었다. 미세하지만, 기이한 에너지 파동. 마치 심해 속에서 빛나는 생명체처럼, 분명 존재하는 무언가였다.

    낡은 서버 랙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자, 룸의 가장 안쪽 벽면이 드러났다. 다른 벽들과는 이질적인 재질의 검은 돌. 그리고 그 한가운데, 마치 돌이 스스로 갈라져 피워낸 꽃처럼, 그것이 박혀 있었다.

    “이게… 뭐야.”

    카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예상했던 어떤 형태의 부품도 아니었다. 야구공만 한 크기. 매끄럽고 짙은 암회색 표면. 마치 검은 유리를 깎아 만든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보면 미세한 금속성 섬유가 얽혀 있는 듯했다. 그리고 가장 기이한 것은, 그 표면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녹색 빛이었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카인은 멀티-랜서를 가까이 가져갔다. 스캔 파동이 휘청거렸다.
    ‘경고: 알 수 없는 에너지원 감지. 접근 금지.’
    액정에 붉은 경고 메시지가 점멸했다. 이 장비로 스캔조차 불가능하다는 건 처음이었다. 카인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빛나는 물체에 닿았다.

    그 순간,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격렬한 진동이 덮쳤다. 하지만 그것은 전기적인 충격이 아니었다. 그의 뇌 깊숙한 곳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의 파동이었다. 빛나는 물체에서 뿜어져 나온 녹색 섬광이 그의 눈을 강타했다. 찰나의 순간, 그의 시야에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폭풍처럼 스쳐 지나갔다. 마치 수천 년 전의 기억이 강제로 주입되는 것 같았다. 거대한 힘이 그의 의식을 압도하려 했다.

    “크윽!”

    카인은 비명을 참으며 손을 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마치 자석에 이끌린 것처럼 물체에 단단히 달라붙어 있었다. 녹색 빛은 더욱 강렬해졌고, 그의 몸 안에서 뭔가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벽에 박혀 있던 그 물체가 스스로 떨어져 나와 그의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손바닥에 올려진 물체는 따뜻했다.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리고 그 진동과 함께, 서버 팜의 고요는 산산조각 났다.

    삑- 삐비빅-!

    귀청을 찢는 비상 알람이 울려 퍼졌다. 룸 전체에 붉은색 비상등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젠장!”
    카인은 욕설을 내뱉으며 물체를 황급히 허름한 코트 안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알람은 점차 가까워지는 듯했다. 이곳은 버려진 구역이지만, 보안 시스템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건 아주 나쁜 징조였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금속성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무겁고 규칙적인 소리. 도시의 순찰대가 아니었다. 그들의 발자국은 더 가볍고, 더 산만했다. 이 소리는… 마치 ‘청소부’들의 전투 부츠가 바닥을 긁는 소리 같았다. 아니면, 이 물건을 찾던 다른 스크래퍼들이거나. 어느 쪽이든, 목숨이 위험했다.

    카인은 빛나는 물체가 있던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미 균열이 간 벽에 더 큰 금이 갔다. 그는 그것을 발판 삼아 옆쪽의 좁은 환기구 통로로 몸을 밀어 넣었다. 먼지와 거미줄이 그의 몸을 휘감았지만,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환기구는 좁고 어두웠다. 그는 멀티-랜서의 손전등을 켜고 전방을 비췄다. 낡은 볼트와 너트가 박힌 철골 구조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통로를 따라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뒤에서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크게 울렸다.

    “여기를 확인해!”
    “내부 침입자 확인! 즉각 포획하라!”

    거친 음성이 금속 벽을 타고 울렸다. 카인은 이를 악물었다. 그들은 최소한 둘 이상이었다. 그리고 이 구역에서 그들이 찾던 게 뭔지 알게 된다면… 그는 이대로 사라질 수 없을 터였다.

    좁은 통로의 끝, 간신히 출구로 보이는 곳에 도달했다. 거대한 원형 통로, 한때는 도시의 하수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었을 법한 곳이었다. 하지만 출구는 낡은 격자 철문으로 막혀 있었다. 멀티-랜서로 해킹을 시도했지만, 오랜 세월 닫혀 있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등 뒤에서 금속성 긁는 소리가 더 커졌다. 좁은 환기구 안으로 손전등 불빛이 길게 뻗어 들어왔다.
    “거기서 꼼짝 마!”

    카인은 몸을 돌렸다. 환기구 끝,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붉게 빛나는 광학 센서가 으르렁거리며 그를 향했다. 한눈에 봐도 싸구려 사이버웨어로 덕지덕지 치장한 ‘스크랩 해적’이었다. 녀석의 팔뚝에는 녹슨 칼날이 번뜩였다.

    “찾았다, 개자식! 네가 가지고 있는 거, 내놔!”

    카인은 손에 들고 있던 낡은 렌치를 꽉 쥐었다. 상대는 최소 200kg은 되어 보이는 거구였다. 정면으로 붙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그의 눈은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낡은 철문, 그리고 그 옆의 부식된 벽.

    “네가 가진 게 뭔지 아는 순간, 넌 이 도시에서 살아남지 못할 거야!” 스크랩 해적은 킬킬거렸다.

    카인은 대꾸 대신, 격자 철문 옆의 부식된 벽을 향해 전력으로 몸을 날렸다. 쾅! 낡은 벽에서 ‘우지직’하는 소리와 함께 균열이 생겼다. 해적은 당황한 듯 잠시 주춤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인은 격자 철문의 잠금장치를 향해 멀티-랜서의 드릴 기능을 작동시켰다. 낡은 볼트들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저 새끼가!”
    해적의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카인은 가까스로 몸을 비틀어 피했다. 칼날이 그의 어깨를 스치며 코트 자락을 찢었다. 삐걱거리는 문이 가까스로 열렸다. 카인은 망설임 없이 좁은 틈새로 몸을 던졌다.

    그의 몸은 낡은 하수구 파이프와 부식된 계단에 부딪히며 미끄러져 내려갔다. “크아악!” 거친 물줄기가 쏟아지는 통로 끝, 그는 간신히 바닥에 착지했다. 뒤에서 격자 철문이 완전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망칠 생각 마! 어디까지 가나 보자!”

    해적의 목소리는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카인은 더 이상 뒤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필사적으로 내달렸다. 어두컴컴한 지하 터널, 낡은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미로. 익숙한 지형이었다. 이곳은 카인의 영역이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의 급회전, 몇 개의 낡은 환기 통로를 통과하자, 마침내 추격대의 발자국 소리가 희미해졌다. 그는 낡은 콘크리트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안전한가? 아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일단은 위기를 넘겼다. 카인은 천천히 코트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의 손에 잡힌 물체는 여전히 따뜻했고, 미세한 떨림을 전해왔다. 그는 그것을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녹색 빛은 여전히 은은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주변의 어둠 속에서 마치 유일한 생명체처럼 빛났다. 그리고 그 빛 아래, 그의 손바닥에는 희미한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고대의 상형문자 같기도, 아니면 알 수 없는 문명의 흔적 같기도 한 기묘한 문양이었다. 마치 그것이 그의 피부를 태워 만든 듯했지만, 전혀 아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맥박과 함께 그 문양이 미세하게 박동하는 것 같았다.

    카인의 시선은 그 문양에 고정되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것은 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이 물건이 깨어나자마자, 대체 누가, 왜 나를 쫓아오는 거지?
    그의 머리 위로, 도시의 차가운 네온 빛이 끊임없이 번뜩였다. 그 빛은 마치 그를 비웃는 듯, 혹은 거대한 비밀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