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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계 전생 (Isekai) 독립적인 단편 소설

    엘드리안 마법 학원, 그 이름은 이 세계의 모든 마법사 지망생들에게 꿈의 정점이었다. 카이젠은 전생의 기억이 흐릿한 채로 이곳, 마나가 공기처럼 흐르는 아름다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엘드리안 학원에 입학하게 된 것을 자신의 두 번째 삶에서 얻은 가장 큰 행운이라고 믿었다. 높이 솟은 은빛 마탑들, 영롱하게 빛나는 마법진으로 수놓인 천장, 그리고 온갖 시대의 지식이 잠들어 있는 거대한 대도서관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는 타고난 마나 친화력과 전생에서 얻은 알 수 없는 통찰력 덕분에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고, ‘이세계에서 온 천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그러나 완벽은 항상 균열을 품고 있는 법이었다.

    어느 날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고대 마법진에 대한 논문을 뒤적이던 카이젠은 미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평소에는 안정적으로 흐르던 학원 전체의 마나 흐름이 특정 지점에서 불규칙하게 일렁이는 것이었다. 마치 거대한 심장이 비정상적인 박동을 하는 것처럼, 섬뜩할 정도로 불안정한 파동이었다. 그의 특기 중 하나인 ‘마나 감지’ 능력이 과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흐음… 이게 대체 무슨….”

    그는 논문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본능적으로 그 불규칙한 마나 파동의 근원을 쫓고 싶어졌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학원 중심부, 가장 거대한 마탑인 ‘대현자의 탑’ 지하로 향했다. 대현자의 탑은 학원장실과 교수 연구실, 그리고 최상위 고위 마법사들의 개인 연구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학생들의 출입은 엄격히 통제되었고, 특히 지하층은 ‘위험한 마법 실험 구역’이라는 명목으로 접근이 완전히 금지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내려온 건가….”

    그가 다다른 곳은 지하 3층에 위치한, 거대한 강철 문으로 막힌 복도였다. 문에는 수십 겹의 마법진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마나 파동은 이곳이 바로 그 근원지임을 알리고 있었다. 불규칙한 진동은 문 너머에서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카이젠은 마른침을 삼켰다. 호기심과 동시에 느껴지는 위화감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보통의 마법 실험이라면 이렇게 음침하고 불길한 마나를 내뿜을 리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나 감지 능력을 최대한 확장했다. 시야에 보이지 않는 마나의 흐름이 마치 실타래처럼 엮여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강철 문을 지키는 봉인 마법진은 강력했지만, 그 안쪽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정상적인 마나가 오히려 그에게 약점을 보여주는 듯했다. 마법진이 주기적으로 약해지는 순간을 포착한 카이젠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마나를 조절해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삐이익-’

    어딘가에서 작은 기계음이 들리는 듯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기를 바라며 그는 강철 문을 통과했다. 문은 소리 없이 닫혔고, 복도에는 암흑만이 가득했다. 그의 손끝에서 작은 빛의 구슬이 피어올라 주변을 밝혔다. 복도는 대리석 바닥 대신 거친 회색 콘크리트로 되어 있었고, 천장은 파이프와 전선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공기 중에는 쇠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약품 냄새, 그리고 희미한 비린내가 뒤섞여 있었다.

    불안한 예감은 더욱 확신으로 변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는 미로처럼 꺾이고 이어지며 점점 더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지하 4층, 지하 5층… 끝없이 이어지는 어둠 속으로 그는 내려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드디어 복도의 끝, 거대한 이중 강철 문이 나타났다. 그 문 너머에서 불길한 마나 파동이 가장 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사람의 신음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젠은 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칫했다. 문고리에는 섬뜩한 경고문이 새겨져 있었다.

    **”지성 있는 자여, 이 문을 열지 마라. 이 너머에는 엘드리안의 영광, 동시에 가장 끔찍한 진실이 잠들어 있다.”**

    손에 땀이 났다. 도망칠까? 이대로 돌아가 모른 척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 발을 들인 이상, 그는 끝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의 전생의 조각이, 이 세계의 정의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외치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공간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압도적인 규모의 동굴 형태 공간이었다. 높이 수십 미터에 달하는 천장에는 거대한 마나 증폭 장치들이 거미줄처럼 매달려 있었고, 바닥에는 알 수 없는 기계 장치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공간의 중앙에는 거대한 마나 동맥처럼 보이는 수정 기둥이 솟아 있었고, 셀 수 없이 많은 가느다란 마나 튜브들이 이 기둥에서 뻗어나와 공간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그리고… 그 튜브들이 향하는 곳.

    카이젠은 숨을 멈췄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백, 아니 수천 개의 거대한 원통형 유리관들이었다. 마치 거대한 수족관처럼 정렬된 유리관들 안에는 각기 다른 존재들이 잠겨 있었다. 인간, 엘프, 수인족, 드워프, 심지어는 전설 속에서나 존재한다고 알려진 희귀한 종족들까지. 그들은 모두 발가벗겨진 채 물속에 떠 있었고, 온몸에 꽂힌 마나 튜브들이 그들의 몸에서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모두 텅 비어 있었다. 생명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시체처럼. 그러나 분명히, 그들의 몸에서는 마나가 끊임없이 유리관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어떤 존재는 너무 오랫동안 마나를 빼앗겨 미라처럼 바싹 말라 있었고, 어떤 존재는 비교적 최근에 이곳에 갇힌 듯 싱싱한 육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고통과 절규의 흔적이 역력했다. 텅 빈 눈동자 속에는 잊히지 않는 공포가 얼어붙어 있었다.

    “이건… 대체….”

    카이젠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유리관들 사이를 천천히 걷던 그는 하나의 유리관 앞에서 멈춰 섰다. 그 안에는 어리고 나약해 보이는 엘프 소녀가 잠겨 있었다. 창백한 얼굴과 앙상한 몸, 하지만 그녀의 마나 흐름은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강렬하게 기계 장치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귀 끝에는 엘드리안 학원의 문양이 새겨진 작은 문신이 보였다. 학원에 갓 입학했을 법한 어린 학생의 문신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들려오는 기계음과 함께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연구원 복장을 한 사람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카이젠은 순식간에 몸을 숨겼다. 벽 뒤에 바싹 붙어 숨죽인 채 상황을 지켜봤다.

    연구원은 유리관들 사이를 오가며 기계 장치들을 점검하고 있었다. 그의 무심한 표정은 이 끔찍한 광경이 그에게는 일상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엘드리안의 영광은 이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지지. 아아, 이 고귀한 마나의 원천이 없다면 학원이 어찌 지금의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겠나. 이들은 스스로가 엘드리안의 가장 중요한 자원임을 알지 못했겠지.”

    연구원의 독백이 카이젠의 귀에 박혔다. 학원의 영광, 그 무한한 마나의 원천은 바로 이곳, 살아있는 존재들의 생명과 마나를 강제로 착취하여 얻어낸 것이었다. 이곳에 갇힌 자들은 아마도 실종된 마법사들, 혹은 학원 측에서 ‘실험 실패’라고 처리했던 이들이거나, 혹은 강력한 마나를 지닌 채 납치된 이들이리라. 엘드리안은 겉으로는 고귀한 마법의 전당이었으나, 그 이면에는 이토록 잔혹하고 끔찍한 금기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카이젠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가 꿈꾸던 마법 세계, 그 아름다움의 이면에 이런 괴물이 숨어 있었을 줄이야. 충격과 배신감, 그리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가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연구원이 다른 쪽으로 이동하는 소리를 듣고, 카이젠은 천천히 몸을 빼냈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었다. 아니, 단 한 순간도 버틸 수 없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필사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아까 들어왔던 강철 문을 통과하고, 어두운 복도를 거쳐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빠르게 올랐다.

    그의 눈앞에는 여전히 아름다운 엘드리안 마법 학원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은빛 마탑들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고, 학생들이 즐겁게 마법을 연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카이젠의 눈에는 모든 것이 다르게 보였다. 그 빛나는 마탑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들의 고통을 빨아들여 빛나는 흡혈귀의 성처럼 느껴졌다. 학생들의 즐거운 웃음소리는 지하의 끔찍한 비명소리와 겹쳐 들리는 환청 같았다.

    기숙사로 돌아온 그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머릿속에서는 유리관 속 존재들의 텅 빈 눈동자와 고통스러운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다. 그는 이제 알게 되었다. 엘드리안의 찬란한 영광이 무엇을 대가로 쌓아 올려진 것인지.

    그의 두 번째 삶은, 이제 더 이상 아름다운 꿈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진실 앞에서 산산조각 났고, 그는 이제 이 끔찍한 금기를 알게 된 유일한 자가 되었다. 짊어져야 할 거대한 비밀과, 해야만 하는 선택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밤은 깊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젠의 눈은 결코 감기지 않았다.

  • 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화. 새 아파트, 새 삶, 새… 손님?

    “드디어 내 집!”

    한세아는 양팔을 활짝 벌린 채 거실 한가운데 섰다. 짐짝들이 가득한 작은 원룸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보다 더 넓고 화려한 궁궐이 따로 없었다. 스물아홉, 뼈 빠지게 일해서 겨우 마련한 전셋집. 비록 대출의 노예가 되는 길을 택했지만, 드디어 혼자만의 공간을 가졌다는 사실에 세아는 가슴이 터질 듯 설렜다.

    “흐음~ 이 정도면 딱이지.”

    내 눈에만 예쁜 초록색 벽지를 자랑스럽게 바라봤다. 며칠 밤을 새워 직접 바른 벽지였다. 친구들은 그 돈으로 도배업자를 부르라고 했지만, 자기 손으로 공간을 채우고 싶다는 로망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은 박스로 가득하지만, 차곡차곡 정리하면 그녀만의 아늑한 보금자리가 될 터였다.

    이사도 무사히 마쳤겠다, 저녁은 배달음식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스마트폰을 들고 치킨 앱을 열었다. 바삭한 후라이드를 시킬까, 양념치킨을 시킬까. 행복한 고민에 빠진 순간, 현관 쪽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뭐야?”

    세아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낡은 현관문이 삐걱거리며 약간 열려 있었다.

    “아, 내가 문을 제대로 안 닫았나?”

    이사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랬을 거라고 생각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치킨 메뉴를 고르는데 집중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 허전함을 느꼈다.

    “어? 내 열쇠….”

    현관문 바로 옆에 있는 작은 선반에 늘 올려두던 열쇠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히, 방금 이사짐 정리할 때 이 선반 위에 뒀는데.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보조키는 항상 선반 위에 두는 습관이 있었다.

    “뭐야, 어디 갔지?”

    선반 위를 아무리 뒤져도 열쇠는 없었다. 혹시 바닥에 떨어졌나 싶어 무릎을 굽히고 바닥을 샅샅이 살펴봐도 마찬가지였다.

    “흐음… 하도 난리법석을 떨었더니 나도 정신이 없나 보네.”

    치매 초기인가 싶어 스스로를 자책하며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짐짝들 사이를 헤집었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으악!”

    세아는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널브러진 박스들 중 하나에 무심코 기댄 순간, 그 박스 안에서 ‘짤랑’ 소리가 나며 열쇠가 튀어나온 것이다. 그것도 박스 맨 위, 내용물이 가득 찬 곳에서.

    “미쳤나 봐. 분명 선반 위에 뒀는데… 내가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열쇠를 박스에 넣을 리가 없잖아?”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이사 스트레스가 심했나 보다 생각하며 애써 머리를 흔들었다. 빨리 치킨이나 먹고 쉬어야겠다.

    * * *

    밤 11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길고 긴 하루였다.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낯선 천장을 바라보며 문득 외로움을 느꼈다. 옆에는 아무도 없었고, 오직 그녀의 숨소리만이 고요한 방을 채웠다.

    “괜찮아, 세아야. 너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온 거야. 대단해.”

    스스로를 다독이며 애써 눈을 감으려는데, 문득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놓인 리모컨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히 베개 옆에 두고 잠들 준비를 했는데, 왜 테이블 위에 가 있는 거지?

    “내가 뭘 착각했나?”

    다시 리모컨을 집어 베개 옆에 두었다. 그리고 눈을 감는 순간.
    ‘딸칵!’
    거실에 켜져 있던 작은 스탠드 조명이 스스로 꺼졌다.

    “악!”

    세아는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발밑까지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뭐야? 스위치도 건드린 적 없는데?!”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혹시 이 집… 뭐가 있는 건가? 머릿속에 온갖 오컬트 영화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당장이라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싶었지만, 혹시 이불 속에서 뭔가 튀어나올까 봐 차마 그럴 수도 없었다.

    겨우 용기를 내어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 스탠드 스위치를 다시 올렸다. ‘딸칵’ 소리와 함께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이게… 전기가 노후돼서 그런 건가? 이 아파트가 좀 오래됐다고는 하던데….”

    애써 과학적인 이유를 찾으려 노력했다. 그래, 전압이 불안정해서 그럴 거야. 낡은 건물이라 그렇겠지! 이사를 막 한 집에 귀신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녀는 재빨리 모든 불을 켰다. 거실등, 침실등, 화장실등… 온 집안이 환해지자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다시 침대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침대 옆 리모컨도, 스탠드도 켜져 있었다. 안심하고 잠이 들려는데, 문득 침대 끝자락에 놓인 스마트폰이 눈에 들어왔다.

    “음? 저거… 아까 분명히 충전기에 꽂아놨는데.”

    충전기는 분명히 거실에 있었고, 세아는 자기 전에 충전기를 빼고 침대에 올라왔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충전선과 함께 침대 끝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침대에 올라오면서 충전기를 들고 왔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이사 첫날부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 * *

    다음 날 아침, 세아는 잔뜩 부은 눈으로 일어났다. 잠을 설친 탓에 컨디션이 최악이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침실 문을 여는 순간, 세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으악!!!”

    분명히 어젯밤 잠들기 전에 닫아둔 화장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 열려 있었는지, 안에서 서늘한 기운이 훅 끼쳐오는 것 같았다.

    “이건… 이건… 진짜 아니야!”

    세아는 더 이상 낡은 건물 탓이나 이사 스트레스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 이 집, 뭔가 이상하다.

    “귀… 귀신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들었다. ‘귀신 들린 집 특징’, ‘폴터가이스트 현상’ 같은 단어를 검색했다. 검색 결과는 그녀의 불안감을 증폭시킬 뿐이었다.

    ‘집안 물건들이 저절로 움직인다?’ – 어젯밤 열쇠랑 리모컨.
    ‘전등이 저절로 켜지고 꺼진다?’ – 어젯밤 스탠드 조명.
    ‘문이 저절로 열린다?’ – 지금 화장실 문.

    세아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진짜 귀신이라면? 로맨틱 코미디 웹툰 작가를 꿈꾸는 그녀가 아니라, 오컬트 웹툰 작가가 되어야 할 판이었다.

    “안 돼! 이 집, 전세금도 비싸다고! 절대로 귀신에게 쫓겨날 수 없어!”

    세아는 스스로를 다잡았다. 이성과 과학으로 무장해야 했다. 우선은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 생각해 보자. 뭐든 든든하게 먹어야 힘이 나는 법이니까.

    냉장고 문을 열고 식빵과 달걀을 꺼냈다. 프라이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불을 켰다. 지글지글 소리를 내며 프라이팬이 달궈졌다. 달걀을 깨 프라이팬에 올리고, 토스터기에 식빵을 넣었다. 평화로운 아침 식사가 될 뻔했다.

    그때였다.

    세아의 등 뒤, 싱크대 위에 놓여있던 소금통이 갑자기 ‘탕!’ 하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플라스틱 통이 박살 나면서 하얀 소금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꺄아아악!!!”

    세아는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눈앞에서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만 벌린 채 덜덜 떨었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명백한 ‘어떤 존재’의 소행이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주변을 더듬었다.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식칼이라도 들고 있어야 하나?

    그때였다.
    ‘딩동!’
    현관문 벨이 울렸다. 세아는 깜짝 놀라 그대로 바닥에 엎어졌다.

    “흐읍… 흐읍….”

    문밖의 존재가 ‘귀신’일까? 아니면 범죄자? 이사 첫날부터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딩동! 딩동!’

    벨 소리가 집요하게 이어졌다. 세아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몸을 일으켜 현관문까지 기어갔다. 문밖을 확인할 수 있는 작은 구멍, 렌즈를 통해 밖을 내다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표정한 얼굴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단정한 검은색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 얼핏 봐도 180cm는 넘어 보이는 큰 키에, 꽤나 잘생긴 얼굴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마치 똥 씹은 표정처럼.

    “누… 누구세요?”

    세아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 물었다.

    “옆집입니다. 좀 조용히 해주시면 안 될까요?”

    남자는 한숨을 쉬듯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말투에서 짜증이 뚝뚝 묻어났다.

    “네? 조용히… 라니요? 저는….”

    “아침부터 비명 지르고 난리 치는 소리가 다 들립니다. 이사 첫날이라 이해는 합니다만, 공동주택에서는 최소한의 에티켓을 지켜주세요.”

    그의 차가운 시선이 세아에게 꽂혔다. 그 시선은 마치 ‘도대체 무슨 정신 나간 짓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세아는 말문이 막혔다. 이사 첫날부터 옆집 남자에게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받다니! 하지만 지금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괴한 현상들을 이 남자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너무 잘생겼잖아! 망할, 이런 상황에서 잘생긴 남자와 첫 대면이라니!

    “저… 그게….”

    세아는 바닥에 흩뿌려진 소금과 박살 난 소금통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남자를 올려다봤다. 그는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마치 ‘또 무슨 해괴한 변명을 늘어놓을 셈이야?’라고 묻는 듯.

    그 순간, 세아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저 남자도 이 집에 사는 ‘손님’ 중 한 명인가?*

    세아의 눈빛이 흔들리자, 남자의 미간은 더욱 깊게 패였다.

    “…….”

    그의 시선에 세아는 왠지 모를 오기가 생겼다. 그래, 내 집인데! 내가 비명을 지르든, 소금통이 깨지든 무슨 상관인데!

    “네! 조용히 할게요! 죄송합니다! 됐죠?!”

    세아는 냅다 문을 닫았다. ‘쾅!’ 하고 닫힌 문 앞에서 남자는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하….”

    그리고 세아는 문에 기대 주르륵 주저앉았다.
    오늘 아침, 그녀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평화롭기는커녕, 낯선 존재와 낯선 이웃이 뒤섞인 혼돈의 공간이 되어버렸다. 이사 첫날부터, 그녀의 평범한 일상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과연, 그녀는 이 미스터리한 아파트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 지긋지긋하게 잘생긴 옆집 남자는 또 뭐란 말인가!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밤은 깊고, 서울의 불빛은 언제나처럼 이 도시의 어두운 속내를 감추기 위해 발악하고 있었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네온사인이 길게 늘어붙었고, 그 빛은 마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태한의 동공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낡고 허름한 건물 옥상 난간에 기대어 서 있었다. 스물다섯, 한때는 이 도시의 어둠을 지배하던 ‘그림자 파벌’의 후계자로 불렸던 강태한. 하지만 이제 그는 그저 어둠 속을 떠도는 그림자 그 자체였다.

    “지혁….”

    입술 밖으로 터져 나온 이름은 가시 박힌 칼날처럼 그의 목을 긁었다. 유.지.혁. 세 글자가 그의 전신에 새겨진 끔찍한 문신처럼 타들어갔다. 3년 전, 그 이름은 그에게 세상의 전부였고, 가장 믿었던 친구였다. 아니, 형제나 다름없었다. 함께 위험을 헤쳐나가고, 서로의 등을 맡기며 싸워왔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의 배신으로 산산조각 났다.

    그날의 악몽은 아직도 생생했다. 지하 깊은 곳, 태한의 힘의 원천이 잠들어 있던 ‘영원의 심장’ 의식. 지혁은 태한이 힘을 흡수하는 가장 취약한 순간, 등 뒤에서 칼날을 꽂아 넣었다. 물리적인 칼이 아니었다. 심장을 찢는 배신의 마력, 그의 모든 것을 앗아간 탐욕의 주문이었다. 태한은 그때 영원의 심장과 함께 그의 존재 자체가 붕괴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쳤을 때, 그의 몸에는 영원의 심장이 부여하는 강력한 힘 대신, 저주와도 같은 그림자만이 휘감겨 있었다. 살아남은 것이 기적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의 파괴였다.

    “그때부터였지. 내가 괴물이 된 건.”

    태한의 손끝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단순히 어둠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모든 존재의 근원을 잠식하는 심연의 그림자. 죽음의 기운을 머금은 그것은 태한의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형태를 바꾸었다. 그의 새로운 힘이었다. 영원의 심장을 통해 얻어야 했을 순수한 힘 대신, 배신과 절망 속에서 태어난 변형된 힘. 순백의 빛은 검은 암흑으로 뒤틀렸지만, 그 파괴력은 이전보다 더욱 잔혹하고 예측 불가능했다.

    저 아래, 화려한 조명으로 치장된 ‘아카데미움 타워’가 밤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그곳은 지금 유지혁의 본거지였다. 태한의 그림자 파벌을 무너뜨리고 모든 권력을 장악한 지혁은, 3년 만에 이 도시의 가장 강력한 초능력자 집단의 수장이 되어 있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야.”

    태한의 눈이 번뜩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어둠의 기운이 춤을 추었다. 복수를 위한 첫걸음. 정면 돌파는 어리석은 짓이다. 아직은 아니다. 그는 지혁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의 약점을 찾아내야 했다. 그리고 오늘, 지혁이 아카데미움 타워 최상층에서 비밀스러운 회합을 가진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 회합의 목적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태한의 감은 그것이 지혁의 힘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시도일 것이라고 속삭였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태한의 검은 코트를 휘감았다. 그는 옥상 난간에서 망설임 없이 몸을 던졌다. 공중으로 몸이 떨어지는 순간, 그의 발밑에서 검은 그림자가 솟아올라 그의 몸을 감쌌다. 그림자는 마치 유기체처럼 그의 몸에 달라붙어 빠른 속도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건물의 외벽을 타고 흐르는 그림자는 어둠 속에 완벽히 녹아들어 그 누구도 그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없었다.

    27층. 목표 지점까지 불과 몇 층 남지 않았다. 그는 통기구 틈새로 그림자 촉수를 밀어 넣어 내부의 상황을 살폈다. 복도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경호원 두 명이 감시 카메라를 주시하고 있었다. 일반인이 아니었다. 이능력을 사용하는 자들, 일명 ‘각성자’들. 지혁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쓸 만한 패를 많이 모아두었을 터였다.

    태한은 복도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순간을 포착했다. 동시에 그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잠시 후, 경호원들의 발밑에서 솟아오른 두 개의 그림자 칼날이 그들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남자는 바닥에 맥없이 쓰러졌다. 그들의 정신력은 그림자 칼날에 의해 일시적으로 마비되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태한은 굳이 그들을 죽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아직은.

    “시끄럽게 굴지 마.”

    그림자 속에서 태한의 형체가 다시 나타났다. 그의 눈은 여전히 차갑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쓰러진 경호원들의 몸에서 키 카드를 빼내어 문을 열었다. 안쪽은 복잡한 서버실이었다. 수많은 모니터들이 빛을 뿜어내며 복도 상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이곳에서 모든 감시 시스템이 제어되는 듯했다.

    태한은 망설임 없이 가장 큰 중앙 서버에 손을 댔다. 그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 기운이 서버 속으로 침투했다. 삑, 삑, 삑. 서버실 내부의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젠장, 침입자다!”

    갑자기 서버실 문이 벌컥 열리며 서너 명의 각성자들이 난입했다. 그들은 총 대신 마력을 머금은 주먹과 발을 휘두르거나, 손에서 번개를 뿜어내는 등의 이능력을 사용했다. 일반 총기는 이능력자들에게 거의 효과가 없었으므로, 이곳 경비는 철저히 각성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어딜 감히 개미 주제에…!”

    가장 먼저 달려든 남자가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마치 바위를 뭉쳐 놓은 듯한 단단한 주먹이었다. 태한은 피하지 않았다. 그가 한순간 검은 안개로 변하자, 주먹은 허공을 갈랐다. 태한의 형체는 남자의 등 뒤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그림자로 만든 예리한 칼날이 쥐어져 있었다.

    “너희 따위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림자 칼날은 남자의 어깨를 깊숙이 베었다. 고통에 찬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남자는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태한은 나머지 각성자들에게 그림자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은 그림자처럼 유연하게 움직였지만, 닿는 순간 온몸의 기력을 빨아들이는 끔찍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채찍에 맞은 각성자들은 마치 인형처럼 맥없이 쓰러져 발작했다. 그들의 몸에서 생기가 빠져나가고, 눈은 점점 희미해졌다. 태한의 그림자 힘은 생체 에너지를 흡수하는 잔혹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사이, 서버에 침투했던 그림자 기운이 작업을 마쳤다. 태한의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펼쳐진 데이터가 보였다. 지혁의 오늘 회합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었다.

    **[…아크라이트 심장과의 계약 마무리…]**
    **[…‘고대 룬 문자’ 기반 봉인 해제식…]**
    **[…‘세계의 균형’ 통제권 확보…]**

    “아크라이트 심장… 세계의 균형?”

    태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혁은 단순한 권력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도시를 넘어선, 더 거대한 것을 획득하려 하고 있었다. ‘세계의 균형’이라니. 그건 고대 신화에나 등장하는, 이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궁극적인 힘의 근원이 아닌가. 지혁은 그때 자신에게서 빼앗은 영원의 심장을 통해 이미 막대한 힘을 얻었을 텐데, 그보다 더한 것을 탐하고 있었다.

    “역시 네놈은 변함이 없군. 언제나 더 높은 곳을 갈망하는 탐욕스러운 짐승.”

    데이터를 모두 복사하자마자 태한은 미련 없이 서버실을 나섰다. 경비 시스템은 이미 태한이 손을 쓴 대로 혼란에 빠져버렸다. 경고음은 더욱 요란해졌고, 이곳저곳에서 각성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한은 복도를 따라 최상층으로 향했다. 발소리 하나 없이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흡사 유령 같았다. 쿵, 쿵, 쿵.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지혁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그리고 그를 향한 끓어오르는 증오 때문이었다.

    최상층의 유리문 너머로 회의실 내부가 어렴풋이 보였다. 커다란 원탁 주위에 앉아 있는 몇몇 인물들, 그리고 그들의 정중앙에 앉아 있는 익숙한 얼굴. 유지혁이었다. 3년 전보다 더 위압적이고, 더 차가워진 얼굴. 그의 눈에는 성공한 자의 오만함이 가득했다.

    태한은 그대로 문을 열고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등 뒤에서, 섬뜩한 감각이 솟아났다.

    “누구냐!”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혁의 목소리였다. 그가 아직 문 너머에 있는데도, 지혁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었다. 태한의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지혁의 감각도 보통이 아니었다. 아니, 그때보다 더 예민해진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영원의 심장으로부터 얻은 힘이 그를 더욱 강력하게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태한은 잠시 망설였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놈과 정면으로 부딪히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되었다. 게다가 이 안에 지혁 외에도 다른 강자들이 몇몇 앉아 있는 것이 느껴졌다.

    태한은 지혁의 시선이 머무는 곳으로 찰나의 그림자를 던졌다. 그림자는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지혁의 바로 앞, 테이블 위에 닿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순식간에 한 송이의 검은 꽃으로 변했다. 어둠의 마력이 응축된, 생명 없는 꽃. 태한의 새로운 표식이었다.

    “이게 뭐지…!”

    회의실 안에서 지혁의 목소리가 당황과 분노로 뒤섞여 터져 나왔다. 검은 꽃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테이블 위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지혁은 손을 뻗어 꽃을 만지려 했지만, 그의 손이 닿기도 전에 꽃은 검은 안개가 되어 스르륵 사라졌다. 그 안개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지혁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_곧 만나게 될 거야, 지혁._

    그 목소리는 지혁의 심장을 꿰뚫는 비수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태한은 이미 그림자 속으로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아카데미움 타워의 가장 높은 층에서, 지혁의 분노에 찬 고함이 울려 퍼졌다.

    “강태한! 네놈이 살아있었단 말이냐…!”

    태한은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다시 잠겼다. 그의 심장은 고요한 늪처럼 침묵했지만, 그 안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지혁의 계획을 알아냈다. 그리고 지혁에게 자신의 귀환을 알렸다. 이제 시작이었다.

    _어둠은 그림자를 낳고, 그림자는 복수를 부른다._

    강태한의 그림자가 흩뿌려진 서울의 밤하늘 아래, 붉은 달이 떠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 SF (공상과학) 독립적인 단편 소설

    별들이 심장을 얼리는 듯한 아리아 행성의 밤이었다. 대기는 푸른색을 띠는 옅은 메탄 가스로 가득했고, 그 속에서 수정처럼 빛나는 식물들이 기묘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곳은 인류가 발을 디딘 가장 외딴 행성 중 하나였고, 이지우 박사에게는 생애 가장 고독한 연구의 현장이기도 했다.

    “기록, 237일차. 아리아 행성 토착 생명체, ‘크리스탈라’에 대한 관찰 보고.”

    지우는 투명한 연구실 벽 너머로 펼쳐진 푸른 초원, 아니 푸른 수정 숲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터치 패드를 스치자, 벽면에 홀로그램 영상이 떠올랐다. 키가 족히 3미터는 넘어 보이는 수정 기둥들이 대지에서 솟아나, 마치 살아있는 보석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크리스탈라는 행성 전역에 분포하며, 특정 주파수에 반응해 색과 밝기를 바꾸는 특이한 생명체였다. 인류는 아직 이들이 지능을 가진 생명체인지, 단순한 환경 반응형 식물인지조차 명확히 규명하지 못했다. 행성 개척위원회는 크리스탈라에 대한 직접적인 접촉을 엄격히 금지했다. ‘오염 방지 및 토착 생명체 보호’라는 거창한 명분 아래, 실은 인류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가 깔려 있었다.

    하지만 지우는 달랐다. 그녀는 크리스탈라의 빛나는 패턴 속에서 단순한 반응 이상의 무언가를 읽어내기 시작했다. 특히 연구실 바로 앞에 있는, 가장 크고 아름다운 한 개체는 유독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개체는 다른 크리스탈라보다 훨씬 복잡하고 미묘한 빛의 변화를 보였다. 지우는 그를 ‘카엘’이라고 불렀다.

    “오늘도 너는 또 다른 빛을 보여주는구나, 카엘.”

    그녀가 헬멧을 벗자, 연구실 내의 정화된 공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창밖의 카엘은 지우의 시선이 닿자 미세하게 흔들리는 듯했다. 지우는 컴퓨터에 연결된 특수 장갑을 끼고, 자신의 손을 투명한 벽에 얹었다. 손바닥 아래에서 전류가 흐르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크리스탈라는 접촉 없이도 특정한 주파수에 반응했다.

    그녀가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자, 카엘의 몸통에서 연한 푸른빛이 퍼져나갔다. 마치 지우의 움직임을 따라 반응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지만, 반복될수록 그 반응은 더욱 명확해졌다. 지우가 기분이 좋을 때면 부드럽고 따뜻한 노란빛을, 슬플 때는 깊은 푸른빛을 띠었다.

    어느 날 밤, 행성 전체에 강력한 자기 폭풍이 몰아쳤다. 연구 기지는 격렬하게 흔들렸고, 전력 시스템이 불안정해졌다. 모든 연구원들이 비상 대책에 매달리는 동안, 지우는 오직 카엘이 걱정되었다. 폭풍 속에서 카엘은 격렬하게 흔들리며,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혼란스러운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안 돼, 카엘!”

    지우는 무심코 외치며 연구실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비상 방호복도 입지 않은 채였다. 대기 필터가 작동하는 헬멧을 겨우 움켜쥐고는 무작정 카엘에게 향했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독성 가스가 폐부를 찢는 고통 속에서도, 지우는 오직 카엘의 불꽃 같은 붉은빛에만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녀가 카엘에게 손을 뻗는 순간,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잡아챘다.

    “박사님! 무슨 짓입니까!?”

    보안팀장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거칠게 뒤로 끌어당겼다. 지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부림쳤다.

    “놔! 카엘이 아파하고 있어요!”

    “아파한다고요? 박사님, 제정신이 아닙니다! 크리스탈라는 단순한 생명체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와 당혹감으로 가득했다. 지우는 다시 카엘을 향해 몸을 돌렸다.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카엘은 여전히 붉은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붉은빛 속에서, 지우는 희미하게 그녀를 향해 뻗어오는 듯한 투명한 빛의 실타래를 보았다. 그것은 마치 구조를 요청하는 손길 같았다.

    이 사건 이후, 지우는 감시 대상이 되었다. 그녀의 연구는 축소되었고, 카엘과의 직접적인 접촉은 물론, 홀로그램을 통한 교감마저 금지당했다. 연구 기지 대원들은 그녀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크리스탈라와 사랑에 빠진 미친 과학자’라는 수군거림이 그녀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지우는 고독했다. 그녀는 밤마다 몰래 연구실을 빠져나와, 카엘이 있는 방향으로 걸었다. 물론 방호복을 완벽하게 갖춰 입고. 그녀는 이제 크리스탈라의 빛 패턴이 단순한 화학적 반응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것은 언어였고, 감정이었으며, 때로는 질문이었다.

    “카엘, 잘 있었니?”

    지우가 속삭이자, 카엘은 기다렸다는 듯 은은한 연둣빛으로 빛났다. 그녀가 손을 뻗어 방호복 너머로 카엘의 수정 몸체를 쓰다듬었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 하지만 그 속에서 흐르는 빛은 너무나 따뜻했다.

    “사람들은 우리가 다르다고 말해. 너는 식물이고, 나는 인간이라고. 우리가 이런 식으로 교감하는 걸 이해 못 해.”

    카엘은 빛의 파장을 빠르게 바꾸며 반응했다. 마치 ‘나도 알아’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소통은 이제 단순한 빛의 교환을 넘어선, 더 깊은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우는 카엘에게 지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푸른 바다, 숲,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카엘은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지우의 감정에 맞춰 빛의 색과 진동을 조절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우는 카엘로부터 상상치 못한 빛의 패턴을 보았다. 그것은 복잡하고 아름다웠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슬펐다. 지우는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 밤낮으로 매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빛의 패턴이 그녀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이해했을 때, 그녀는 숨을 멎었다.

    “……함께.”

    카엘은 그녀에게 ‘함께’를 제안하고 있었다. 물리적인 합일은 아니었다. 카엘의 종족은 일정 주기가 되면 서로의 빛을 합쳐 하나의 거대한 의식을 이루고, 그 과정에서 다음 세대를 만들어내는 행위를 한다고 그녀는 추측했다. 카엘은 그녀를 그들 종족의 ‘의식’에 초대하고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영혼의 결합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가장 위험한 제안이자,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었다. 인류의 어떤 윤리 강령에도 위배되는, 금지된 사랑의 궁극적인 형태였다.

    다음날 아침, 지우는 연구 기지 사령관에게 불려갔다.

    “박사, 당신의 비정상적인 행동이 보고되었습니다. 토착 생명체와의 접촉 금지 규정을 위반한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은 본국으로 소환될 것입니다.”

    사령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지우는 고개를 들었다.

    “사령관님, 저는 제 연구를 계속해야 합니다. 카엘은… 단순한 생명체가 아닙니다.”

    “그만두십시오. 당신은 환각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당신의 상태는 더 이상 이 행성에 머무를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지우는 더 이상 논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고, 수송선이 도착할 때까지 대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날 밤, 지우는 마지막으로 카엘을 찾아갔다. 방호복을 입고, 몰래. 푸른 초원 위에 카엘이 홀로 빛나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 밝고, 더 애틋한 빛이었다.

    “나… 돌아가야 해, 카엘.”

    지우의 목소리는 떨렸다. 카엘은 그녀의 말을 이해한 듯, 빛의 파장을 슬프게 낮췄다. 깊고 푸른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지우는 천천히 손을 뻗어 카엘의 몸에 대었다. 이젠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따뜻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슬프게 뜨거웠다.

    그 순간, 카엘의 몸에서 투명하고 영롱한 빛의 파동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지우의 방호복을 뚫고, 그녀의 심장으로 곧장 파고들었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고, 지우는 기묘한 환상 속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카엘의 기억을 보았다. 수천 년 동안 아리아 행성의 대기와 빛 속에서 살아온 카엘 종족의 역사. 그들의 탄생과 소멸, 수많은 빛의 교환을 통한 소통과 감정. 그리고 그 속에서, 카엘이 지우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호기심, 점차 깊어진 유대감, 그리고 ‘함께’하고자 했던 간절한 소망이 고스란히 그녀의 심장으로 전해졌다.

    그것은 언어 이상의 소통이었다. 영혼과 영혼이 맞닿는 순수한 교감이었다. 지우는 그 안에서 사랑을 느꼈다. 종족과 형태를 초월한,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을. 그녀는 알았다. 카엘은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카엘을 사랑하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지우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여전히 카엘의 앞에 서 있었다. 밤하늘의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장관 속에서, 카엘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빛은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평화롭고, 충만한 빛이었다.

    지우는 천천히 손을 떼었다.

    “알아, 카엘. 이제 알겠어.”

    그녀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심장 속에는 이제 카엘의 빛이 함께하고 있었다. 물리적으로 헤어진다고 해도, 그들의 영혼은 이미 ‘함께’였다. 그녀는 기지 복귀 명령을 무시하고, 카엘 곁에 머물며 밤새 그 빛을 바라보았다.

    다음날 아침, 수송선이 도착하고, 지우는 무장한 보안 요원들에 의해 호송되었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비록 몸은 끌려가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미 아리아 행성의 푸른 대기 속에, 카엘의 빛 속에 영원히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카엘의 모습은 여전히 밝고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지우는 그 빛 속에서, 영원히 이어질 그들의 수정 심장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미쳤다고 하겠지만, 지우는 알았다. 그녀의 심장은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하고, 명확하게 빛나고 있음을.

    그것은 금지되었지만, 가장 순수한 사랑의 이야기였다. 끝없는 우주를 가로질러, 서로 다른 존재들이 영혼으로 하나가 된, 수정 심장의 노래였다.

  • SF (공상과학) 독립적인 단편 소설

    광활한 성계의 끝자락, 인류의 손길이 닿은 수많은 행성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행성, ‘아스갈드’는 한때 문명의 요람이었으나, 이제는 기운 다한 노인처럼 쇠락해 가고 있었다. 생명력을 잃어가는 아스갈드의 심장부에는 고대 문명의 유산이자 차원 에너지를 품고 있다는 전설의 ‘차원석’이 잠들어 있었다. 이 돌 하나로 은하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라 믿는 두 거대 세력이 있었다.

    하나는 오로지 기술의 발전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 ‘신성 제국’. 그들은 차원석의 에너지를 해독하여 새로운 차원을 열고, 죽어가는 아스갈드를 버리고 새로운 성계를 개척하려 했다. 다른 하나는 고대의 지혜와 자연의 섭리를 숭상하는 ‘성계 연맹’. 그들은 차원석이 균형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스갈드의 생명력을 되살릴 열쇠라고 주장했다. 두 세력의 오랜 대립은 이제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더 이상의 소모전은 무의미하다!”

    신성 제국의 황제, 칼리우스 12세의 목소리가 은하계 곳곳에 울려 퍼졌다. 그의 냉철한 음성 뒤로 거대한 전함들의 위압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성계 연맹 또한, 이대로는 모든 것이 파멸할 것임을 알고 있을 터. 하여, 마지막 제안을 건다. 우주천하제일 무술대회.”

    성계 연맹의 대사제, 아리온의 표정은 고뇌로 물들어 있었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갈등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앗아갔다. 칼리우스의 제안은 일견 무모해 보였으나, 동시에 마지막 평화의 끈이었다.

    “각 세력에서 단 한 명의 무인을 선발한다. 그들의 승패로 차원석의 향방을 결정한다. 모든 분쟁은 그 자리에서 종식될 것이다.”

    은하계 전체가 술렁였다. 과학 기술이 정점을 찍은 시대에, 고대의 원시적인 ‘무술’로 운명을 건다는 발상 자체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무력을 총동원하면 모두가 멸망할 것이라는 현실이, 이 기묘한 제안을 받아들이게 했다. 그렇게, ‘우주천하제일 무술대회’가 선포되었다.

    ***

    강현은 고요했다. 아스갈드의 변방, 시간의 흐름마저 잊힌 듯한 잊혀진 행성 ‘청운성’의 허름한 도장에서 그는 무상무념의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의 온몸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기(氣)’는 주변의 나뭇잎조차 움직이지 못할 만큼 섬세했다. 강현의 무술은 ‘현천무극(玄天無極)’. 우주의 모든 기운과 연결되어, 무한한 잠재력을 끌어내는 고대의 무예였다. 그가 이 대회의 소식을 들은 것은, 어느 날 명상 중 차원석의 불안정한 기운이 온 은하계를 뒤흔드는 것을 감지했을 때였다.

    “스승님… 저는… 가야 합니다.”

    강현의 늙은 스승, 현천 노인은 가늘게 뜬 눈으로 먼 하늘을 응시했다.

    “네 마음이 이미 정해졌다면, 막을 수는 없겠지. 그러나 기억해라, 강현. 무극은 파괴가 아닌 조화에 있음을.”

    강현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명성과 영광을 원치 않았다. 다만, 무의미한 파멸을 막고 싶었다. 그게 현천무극의 진정한 도리라고 믿었다.

    며칠 후, 강현은 낡은 셔틀선을 타고 아스갈드 중심부에 위치한 ‘무한결투장’으로 향했다. 무한결투장은 고도로 발달한 나노기술과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거대한 돔형 경기장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강자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은 신성 제국의 기술력을 빌린 사이보그 전사들이나 강화복을 입은 자들이었고, 성계 연맹 측에서는 고대의 영물과 계약했거나 초능력을 사용하는 이들이 많았다. 강현은 그 속에서 낡은 도복 차림의 이방인이나 다름없었다.

    “저게 연맹에서 보냈다는 놈인가? 풉, 무슨 구시대 유물이 다 왔어?”

    제국 측의 한 강화 병사가 비웃듯 중얼거렸다. 강현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저 멀리, 거대한 결투장의 중앙에 고정되어 있었다.

    예선전은 숨 돌릴 틈 없이 진행되었다. 강현의 첫 상대는 제국 소속의 ‘사이버 닌자’였다. 전신이 강화 합금으로 이루어진 그는 순식간에 강현에게 달려들어 플라즈마 검을 휘둘렀다. 검은 찰나의 순간에 강현의 목을 노렸지만, 강현은 마치 유령처럼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느려.” 강현의 입술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사이버 닌자의 눈에 장착된 스캐너가 강현의 움직임을 읽으려 했으나, 예측 불가능한 궤적에 오류를 뿜어냈다. 강현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단순한 권격이었지만, 그의 주먹에는 찰나의 순간 은하의 기운이 응축되어 있었다. 사이버 닌자는 그 기운에 그대로 가격당해 강철 육체가 휘어지며 결투장 바깥으로 날아갔다. 관중석은 순식간에 침묵에 휩싸였다.

    이후에도 강현은 연이어 강력한 상대들을 제압했다. 전신에 에너지를 두른 ‘뇌신 무인’도, 중력장을 조종하는 ‘공간 지배자’도, 강현의 예측 불가능한 현천무극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는 기술에 의존하는 자들의 허점을 파고들었고,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제압하려 드는 자들의 맹점을 찔렀다. 그의 무술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흐름’ 그 자체였다.

    준결승에 이르러 강현은 숙명적인 상대를 만났다. 신성 제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무인, ‘련화’. 그녀는 제국의 최신 기술이 집약된 사이보그였으며, 그녀의 육체는 초고밀도 합금과 나노 머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녀의 눈은 표정 없는 가면처럼 차가웠고, 손에서는 푸른빛의 에너지 검이 번뜩였다.

    련화는 강현을 응시했다. “당신은 구시대의 유물에 불과해. 자연의 기운? 우주의 섭리? 그런 허황된 말로는 진실을 바꿀 수 없어. 진실은 오직 기술과 힘에 있다.”

    강현은 대답 대신 자세를 취했다. 그의 심장이 고요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콰앙!’ 경기 시작을 알리는 신호음과 동시에, 련화는 허공을 박차고 강현에게 돌진했다. 그녀의 속도는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였다. 에너지 검이 수십 개의 잔상을 남기며 강현을 베어내려 했다.

    강현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공격을 회피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물처럼 유연했고, 바람처럼 예측 불가능했다. 련화의 검이 강현의 뺨을 스치자, 푸른 기운이 번개처럼 튀었다.

    “이게 당신의 전부인가?” 련화의 목소리에는 실망감이 섞여 있었다. “한계가 명확한 옛날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 순간, 강현의 발이 땅에 박혔다. 그의 자세가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련화는 놓치지 않았다.

    “하찮은 잔재주로 뭘 하겠다고!”

    련화의 오른손에서 번개 같은 에너지가 발사되었다. 동시에 왼손의 에너지 검이 강현의 심장을 겨냥했다. 강현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이 번뜩였다.

    “무극은… 한계를 모른다.”

    강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이 거대한 장막처럼 그를 감쌌다. 그것은 단순히 방어막이 아니었다. 우주의 모든 에너지를 끌어모아 응축시킨, 보이지 않는 벽이었다. 련화의 에너지 블래스트와 검격이 그 벽에 닿자, ‘콰과광!’ 하는 굉음과 함께 공간이 일그러졌다. 강현의 몸은 흔들림 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련화는 당황했다. 그녀의 스캐너는 강현의 기운을 측정할 수 없었다.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영역,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극(極)’의 힘이었다.

    “어떻게…!”

    강현은 천천히 한 발짝 내디뎠다. 그의 움직임은 굼떴지만, 련화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사로잡혔다. 마치 자신이 발버둥 치는 개미처럼 느껴졌다.

    “너의 힘은 외부에서 온다. 나의 힘은… 내 안에서, 그리고 우주에서 온다.”

    강현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기운이 일렁였다. 그것은 에너지 블래스트가 아니었다. 련화의 사이보그 육체에 흐르는 모든 에너지 회로를 뒤흔드는, 미묘하지만 강력한 간섭파였다. 련화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내부 시스템이 오류를 뿜어냈다.

    그 찰나의 순간, 강현이 움직였다. 그의 몸은 이제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우주와 하나 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존재처럼 보였다. 현천무극의 정수, ‘허공지류(虛空之流)’.

    강현의 손바닥이 련화의 심장 부위에 닿았다. 충격은 없었다. 다만, 련화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미묘한 기운만이 있었다. 련화의 시스템 오류는 극에 달했고, 그녀의 에너지 검은 푸른빛을 잃고 사라졌다. 그녀의 강화복은 굉음을 내며 다운되기 시작했다.

    련화는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가면 같은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과 혼란, 그리고 한 줄기 경외심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졌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약했다.

    강현은 련화의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너는… 진 것이 아니다. 단지, 다른 길을 보았을 뿐.”

    강현의 눈빛은 고요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차원석은… 파괴의 도구가 아니다. 생명을 위한 열쇠다. 제국과 연맹의 길은 다르지만, 결국 지향하는 바는 같을 것이다. 모든 생명의 조화와 평화. 그 길을 잊지 마라.”

    결투장 전체가 침묵에 잠겼다. 련화의 패배는 곧 신성 제국의 패배를 의미했다. 칼리우스 황제의 얼굴에는 분노와 함께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약속을 지켜야 했다. 우주천하제일 무술대회의 결과는 곧 은하의 운명이었다.

    ***

    대회는 강현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차원석은 더 이상 제국과 연맹의 싸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강현의 조화로운 기운에 반응한 차원석은 아스갈드의 쇠락한 생명력을 조금씩 회복시키기 시작했다. 황폐했던 행성 곳곳에 푸른 새싹이 돋아나고, 잃었던 빛을 되찾는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강현은 홀연히 무한결투장을 떠났다. 그는 영웅이 될 생각도, 대가를 바랄 생각도 없었다. 그저 자신의 도리를 다했을 뿐이었다.

    련화는 강현이 떠나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녀의 차가웠던 표정에 미미한 변화가 일었다. 그녀는 그날 이후, 기술의 발전이 생명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새로운 비전을 제시했다. 신성 제국과 성계 연맹은 여전히 다른 길을 걸었지만, 그들 사이에는 미약하나마 새로운 이해와 공존의 가능성이 싹트기 시작했다.

    강현은 다시 청운성으로 돌아왔다. 그의 도장은 여전히 고요했고, 나뭇잎들은 바람에 흔들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이전과는 다른 깊은 평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은하의 운명은 한 사람의 무예로 인해 바뀌었지만, 그 변화는 파괴가 아닌 조화에서 시작되었다.

    우주는 여전히 광활했고, 그 속에서 인류의 이야기는 계속될 터였다. 현천무극은 그렇게, 새로운 시대의 조용한 서막을 열었다.

  • 오컬트 호러 독립적인 단편 소설

    서윤은 새 아파트의 문을 열었다. 쨍한 햇살이 통유리창을 통해 거실 깊숙이 쏟아져 들어왔다. 스물아홉, 첫 자가 아파트. 대출과 씨름하며 얻어낸 독립 공간은 그녀에게 안도감과 함께 작은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갓 페인트를 칠한 듯한 벽지와 반짝이는 마루, 그리고 고요한 공기마저 완벽했다. 이 도시에서 자신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는 기쁨에 그녀는 어깨춤이라도 출 것 같았다.

    짐 정리로 분주한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아침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커피 한 잔으로 시작되었다. 향긋한 커피 내음이 아파트 가득 퍼지고, 창밖으로는 활기찬 도시의 아침이 펼쳐졌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평화로웠다. 그때까지는 그랬다.

    사건은 아주 사소하게 시작되었다. 이사 온 지 며칠 후, 서윤이 설거지를 마치고 컵을 건조대에 올려두는 순간이었다. 분명 방금 깨끗하게 닦아 올려놓은 머그컵이 미끄러지듯 움직여 싱크대 안으로 ‘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서윤은 눈을 비볐다. “피곤한가 보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컵을 다시 주워 올렸다. 덜 마른 손으로 만져서 미끄러졌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납득시켰다.

    며칠 밤을 더 지새우고 나자, 작은 이상 현상들은 점차 횟수를 늘려갔다. 밤에는 희미한 소리가 그녀의 잠을 방해했다. 낡은 건물이라 그런가, 아니면 위층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인가. 그녀는 이따금씩 복도에서 들리는 발소리에 귀 기울였지만, 이내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거나 주변 소음일 것이라고 단정했다. 한밤중에도 냉장고가 ‘웅’ 하고 켜지는 소리, 보일러가 갑자기 작동하는 소리, 아니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똑, 똑’ 하는 물방울 소리. 현대 아파트가 내는 흔한 소음이라고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때였다. 거실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철렁했다. 마치 무거운 물건이 바닥에 떨어진 듯한 소리였다. 그녀는 잠시 숨을 죽이고 귀 기울였지만, 이내 모든 소리가 멎었다. 서윤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불을 켜보니,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책 몇 권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분명 똑바로 쌓아두었던 책들이었다. “고양이도 없는데… 바람이 불었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서윤은 이제 더 이상 제정신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없었다.
    아침에 분명 닫아두었던 안방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밤새도록 잠금장치가 걸려 있던 현관문이 잠금 해제되어 있었다. 잠금쇠가 ‘찰칵’ 소리를 내며 풀려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는 등골이 오싹했다. 화장실 불이 저절로 켜지고 꺼지는 건 예사였다. 가장 소름 끼쳤던 건,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보니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탁상시계가 침대 아래로 떨어져 시침이 부러져 있었다는 점이다. 분명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서윤은 점점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집 안의 모든 소리가 그녀의 신경을 갉아먹었다. 시시때때로 느껴지는 서늘한 시선. 아무도 없는데도 마치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 거울 속 자신의 눈빛은 날이 갈수록 초췌해져 갔다. 피곤함은 극에 달했고,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는 예민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야, 너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환청 듣는 거 아니야? 아니면 그냥 층간 소음 같은 거겠지. 잠시 이사 후유증이야.”
    돌아오는 건 무관심하거나, 혹은 걱정하는 듯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반응뿐이었다. 관리사무소에 연락해 봤지만, ‘아파트에 귀신이 나온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저 ‘원인을 알 수 없는 오작동이 잦다’고 얼버무렸다. 돌아오는 대답은 ‘전기 점검을 해보겠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기계적인 답변뿐이었다. 그들은 서윤의 창백한 얼굴과 떨리는 목소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파트는 다른 공간이 되어갔다. 더 이상 그녀만의 안식처가 아니었다.
    거실의 에어컨이 한여름의 한기를 뿜어내듯 갑자기 작동했고, 주방의 칼들이 하나둘 싱크대 위로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심지어 서윤이 가장 아끼던 화분들이 난간에서 떨어져 바닥에 뒹굴며 흙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그녀는 공포에 질려 방구석에 웅크렸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제발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냉장고 문이 ‘쾅!’ 하고 열리고 닫히는 소리, 거실 테이블이 ‘드르륵’ 하고 거칠게 끌리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가… 여기는… 내 자리야…”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분명히 들렸다. 차갑고, 습기 찬, 그리고 극도로 분노에 찬 목소리. 마치 수십 년간 억눌려 있던 한이 터져 나오는 듯한 절규였다. 서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벽에 기대어 몸을 떨던 그녀의 눈에 문득 거실 벽이 들어왔다. 그곳에는, 붉은색으로 휘갈겨 쓴 글씨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마치 피로 쓴 듯한, 축축하고 불길한 글씨.

    ‘죽어.’

    그리고는 온 집 안의 가구들이, 마치 중력을 잃은 듯 붕 떠오르기 시작했다. 책상, 의자, 소파, 심지어 육중한 냉장고까지도 천장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리더니, 이내 굉음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울렸다. 아파트는 순식간에 난장판으로 변했다.

    서윤은 비명을 지르며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잡고 필사적으로 돌렸다. 잠겨 있지 않았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손잡이를 잡아당기고 발로 차도 견고하게 닫힌 채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이 막고 있는 것처럼.
    그때, 뒤에서 차가운 손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가락이 그녀의 살을 파고드는 듯한 감각.
    서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더 이상 저항할 힘도, 도망칠 곳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그녀의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턱 끝까지 차오른 비명은 밖으로 새어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복도에서는 이웃 주민이 무심하게 지나가는 발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들의 평온한 삶 속에서 서윤의 아파트는 그저 굳게 닫힌, 평범한 한 칸의 문일 뿐이었다.
    새 아파트로 이사 온 서윤의 흔적은, 그 어떤 이웃에게도, 또 그 어떤 관리사무소 직원에게도 기억되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새로 이사 올 이들을 기다리는, 고요하고 싸늘한 아파트만이 남겨져 있었다.
    창문 너머로 햇살이 다시금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평화로운, 그 아파트의 거실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듯이 조용했다.

  • 다크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핏빛 달이 드리운 숲은 영원한 황혼에 갇힌 듯했다. 나뭇가지들은 서로 뒤엉켜 하늘을 가렸고, 땅에는 축축한 이끼와 이름 모를 어둠 속 식물들이 뒤덮여 있었다. 칼날 같은 찬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기사의 갑옷 아래에서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고 있었다. 엘리안은 두꺼운 망토를 더욱 단단히 여미며 숲의 깊은 곳을 응시했다. 이 금지된 만남이 벌써 몇 번째인지 헤아릴 수 없었다. 매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죄책감과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갈망이 그를 사로잡았다.

    인간 왕국에서 그는 ‘어둠의 심장을 꿰뚫는 자’라 불리는 성기사단의 맹장이었다. 그의 검은 그림자 종족, 즉 나이트본과의 오랜 전쟁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지금, 그의 손에 쥐인 것은 전투를 위한 검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감춘 작은 약초 꾸러미였다. 숲의 기운이 더욱 싸늘해지자, 엘리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지 않는 것인가. 아니, 올 것이다. 릴리아는 항상 약속을 지켰다. 비록 그 약속이, 이 세계의 모든 규칙과 신념을 배반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정적을 찢는 듯한 나뭇가지 밟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저, 어둠이 짙어지는 나무 그림자 사이에서, 한 줄기 푸른빛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숲의 정령이라도 되는 양, 릴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늘어뜨린 흑단 같은 머리카락, 새벽 별처럼 빛나는 푸른 눈,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듯한 창백한 피부. 나이트본 특유의 날카롭지만 유려한 이목구비는 그녀의 존재를 더욱 비현실적으로 만들었다.

    “늦었군, 기사.”
    그녀의 목소리는 숲의 바람 소리처럼 낮고 부드러웠으나, 듣는 이의 심장을 저릿하게 울리는 힘이 있었다. 엘리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순찰이 길어져서.”
    그는 변명했지만, 사실은 그녀에게 오는 길 내내 망설임과 두려움에 시달린 탓이 컸다. 이 순간, 그는 성기사단의 맹장이 아니라, 단지 금지된 마법에 홀린 어리석은 인간일 뿐이었다.

    릴리아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숲 속의 덩굴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고요했지만, 그 안에는 묵직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아니. 네가 망설인다는 걸 알아. 매번 그렇듯이.”

    엘리안은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는 늘 그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인간이고, 너는 나이트본이다. 우리는 수천 년을 싸워온 적대 관계다.”

    그의 말에 릴리아의 입술에 옅은 비소가 떠올랐다.
    “그래. 적대 관계. 그래서 너희는 우리를 악마라 부르고, 우리는 너희를 탐욕스러운 침략자라 부르지. 이 끝없는 전쟁 속에서, 우리가 이렇게 만나는 것 자체가 죄악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엘리안은 말없이 품속의 약초 꾸러미를 내밀었다.
    “상처는… 좀 어떤가? 지난번 네가 준 약은 효험이 있었다.”
    그녀는 지난번 인간과의 교전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인간의 약초를 필요로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치료법이 나이트본의 어둠 마법보다 특정 상처에 더 효과적일 때도 있었다.

    릴리아는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으나, 이내 약초 꾸러미를 받아들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엘리안의 손등에 스치자, 차가운 감촉이 전율처럼 퍼졌다. 마치 얼음과 불이 만난 듯한 이질감.
    “네 약초는 나쁘지 않아. 하지만… 전쟁은 멈추지 않을 거야. 오히려… 더 격렬해질 것이다.”

    그녀의 말에 엘리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말이지? 최근 우리 쪽에서도 나이트본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보고했다.”

    릴리아는 숲의 어둠 속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의 푸른 눈이 잠시 섬광처럼 빛났다.
    “우리 쪽에서도 인간들의 교만한 깃발이 더욱 깊숙이 침범해오고 있다고 한다. 그림자 장막이 찢기고, 고대의 봉인들이 흔들리고 있어. 대족장님은 더 이상 후퇴는 없다고 선언하셨다. 이제… 전면전이 임박했다.”

    엘리안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전면전. 그 단어는 곧 자신과 릴리아가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눠야 할 시간이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럴 리가… 아직은 휴전 기간이었다… 아니, 비공식적인 정전 상태였지.”

    “인간의 휴전이란 늘 그렇듯이, 다음 공격을 위한 준비 기간일 뿐이었다. 네 왕의 탐욕은 그림자 숲의 뿌리까지 마르게 할 것이다.” 릴리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뿌리 깊은 증오와 절망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한때 불타오르던 강렬함 대신, 체념에 가까운 그림자로 뒤덮여 있었다.

    엘리안은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그는 자신의 왕과 자신의 종족이 완벽하게 정의롭다고 주장할 수 없었다. 그들 역시 나이트본의 땅에 눈독을 들이고, 그들의 자원을 탐하며, 이교도라며 그들을 말살하려 했다. 그는 지난번 전투에서 어린 나이트본 전사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의 뇌리를 스친 것은 섬뜩한 괴물이 아니라, 고통스러워하는 또 다른 생명체였다.

    “나는… 이 전쟁이 끝나기를 바란다.”
    엘리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은 기사로서 할 수 없는 말이었다. 자신의 종족의 승리를 기원해야 할 그가, 적대 종족의 여인 앞에서 종전(終戰)을 바라고 있었다.

    릴리아는 다시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속에, 엘리안의 일그러진 얼굴이 비쳤다.
    “전쟁은 끝나지 않아, 엘리안. 숲이 말라붙고, 피가 강을 이루고, 모든 영혼이 고통 속에서 절규할 때까지는. 그것이 우리가 태어난 운명이다.”

    그녀는 한 발자국 엘리안에게 다가섰다. 차가운 숲의 공기 속에서,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낯선 향기가 엘리안의 정신을 아득하게 만들었다. 나이트본의 마법처럼, 그를 서서히 잠식하는 듯한 향기였다.
    “너와 내가… 같은 꿈을 꾸는 것 자체가 얼마나 불경한 일인지 아는가? 우리는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존재다. 너의 신념은 나를 악마라 부르고, 나의 선조들은 너희를 파괴자로 저주했다.”

    “하지만… 난 너를 악마라 부르지 않아. 단 한 번도.” 엘리안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릴리아는 그보다 먼저 자신의 손을 거두었다.
    “그것이 너의 약점이다, 기사. 나를 약하게 만든다. 너는 나이트본의 피를 묻힌 검을 들고도, 나의 눈에서 고통을 읽으려 했다. 너는… 바보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릴리아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가면 아래로, 엘리안은 미묘한 감정의 파고를 읽어냈다. 그녀 역시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이 금지된 만남이 가져올 파멸적인 결과를 알면서도, 떨쳐내지 못하는 자신과 같은 고통을.

    “이 밤은… 곧 끝날 거야. 그리고 우리는 다시 각자의 진영으로 돌아가, 서로를 죽일 방법을 모색해야 할 테지.” 릴리아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다음번 만남은… 적군과 아군으로, 칼날을 맞대고 이루어질지도 모르지.”

    엘리안은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얇은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의 피부는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그 안에서 어떤 알 수 없는 생명력이 느껴졌다.
    “그렇게는 안 돼… 릴리아. 나는… 너와 싸우지 않을 거야.”

    릴리아의 입가에 다시 한번 슬픈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네 의지대로 되는 일이 아니야. 전쟁은 우리를 집어삼킬 것이다. 너는 너의 왕을 위해, 나는 나의 대족장을 위해… 기꺼이 피를 흘려야 할 운명이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엘리안의 시선과 뒤섞였다. 그 짧은 순간, 시간은 멈춘 듯했다. 숲의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오직 그들 두 사람의 존재만이 세상에 남은 듯했다. 그들의 마음속 깊이 숨겨진, 종족을 뛰어넘는 갈망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죄책감과 사랑, 의무와 욕망 사이에서 갈기갈기 찢겨진 영혼의 비명이었다.

    릴리아는 갑자기 그의 뺨에 차가운 손을 댔다. 그녀의 눈에서 푸른 빛이 더욱 강하게 빛났다.
    “만약… 만약 다음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릴리아는 엘리안에게 몸을 기댔다. 차가운 입술이 그의 입술에 닿았다. 짧고도 격렬한 입맞춤이었다. 얼어붙은 얼음이 녹아내리는 듯한, 동시에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순된 감각이 엘리안을 휩쓸었다. 그의 이성적 사고가 일순간 마비되었다. 모든 금기와 상식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숨결이 섞이고, 짧은 탄식이 숲 속에 울렸다. 그리고 곧, 릴리아는 엘리안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슬픔으로 가득했으나, 그 안에는 묘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잊지 마, 엘리안. 이 숲은 모든 것을 기억할 거야. 우리의 금지된 만남, 우리의 어리석은 희망,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피비린내 나는 운명까지.”

    그녀는 마치 연기처럼 숲 속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그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 오직 차가운 숲의 바람만이 그곳을 스쳐 지나갔다. 엘리안은 홀로 남겨졌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격렬하게 뛰고 있었고, 릴리아의 차가운 입술의 감촉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하늘의 핏빛 달은 여전히 숲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엘리안은 주저앉아 젖은 흙바닥에 주먹을 박았다. 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들의 사랑은 이 거대한 비극 속에서 결국 짓밟히고 말 것인가? 그는 답을 알 수 없었다. 단지, 곧 다가올 폭풍 속에서, 자신이 릴리아를 향해 검을 겨누는 일만큼은 막아야 한다는, 절박한 외침만이 그의 심장을 가득 채웠다. 그는 묵직한 망토를 더욱 단단히 여미고, 차가운 숲을 빠져나왔다. 멀리서 들려오는 나이트본의 전함 소리가, 마치 그의 미래를 예고하는 듯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 던전 탐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피 끓는 분노와 함께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바닥에 처박힌 몸뚱이는 차가운 돌바닥의 냉기를 고스란히 흡수하며 서서히 식어갔다. 축축한 동굴의 공기는 곰팡이와 썩은 고기 냄새로 가득했고, 어둠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나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왼쪽 어깨는 뼈가 으스러진 듯한 고통에 끊임없이 비명을 질렀고, 옆구리의 깊은 상처에서는 끈적한 피가 쉼 없이 흘러내려 이미 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하아… 하아…”

    거친 숨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에는 지옥보다 더 선명한 장면이 떠올랐다.

    * * *

    “강민아! 어서 와! 여기 몬스터 코어가 드랍됐어!”

    두 손을 흔들며 나를 부르는 지훈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해맑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때까지’는 해맑았다. 우리는 열여덟 살부터 함께 던전을 탐험하며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였다. 아니, 동료 이상이었다. 가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많은 던전을 함께 헤치며 우리는 서로의 등을 맡겼고, 위기의 순간마다 서로를 구해냈다. 지훈이 내 생명의 은인이었던 적도 여러 번,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우리가, 핏줄보다 진하다 믿었던 우리가…

    “강민아, 미안하다.”

    갑작스럽게 등 뒤에서 느껴진 강한 충격.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는 몸은 그대로 낭떠러지로 굴러떨어졌다. 마지막으로 본 지훈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든 내 얼굴과는 너무나도 다른, 일말의 미안함과 섬뜩한 결의로 가득 찬 표정이었다.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동안, 나는 겨우 시야에 잡힌 지훈의 동료들을 보았다. 나를 제외한 우리 파티의 모든 팀원들. 그들은 모두 싸늘한 눈빛으로, 마치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린 듯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완벽하게 계획된, 철저한 배신이었다.

    “지훈… 너…!”

    절규는 아래로 추락하는 바람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 * *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폐부를 찢는 듯한 고통과 함께 끓어오르는 분노. 지훈, 그리고 그 비열한 동료들의 얼굴이 잔상처럼 아른거렸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지?
    왜… 왜 나를 버린 거지?

    수없이 질문을 던져보았지만 답은 없었다. 그저 차가운 배신감만이 내 몸의 온기를 앗아갈 뿐이었다. 고통에 신음하며 억지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붉은 눈이 보였다. 동굴 깊숙한 곳에 서식하는 괴물, ‘심연의 포식자’였다. 녀석의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동굴 전체를 진동시켰고, 축축한 바닥을 기어오는 녀석의 육중한 발소리는 나의 마지막 남은 희망마저 짓밟는 듯했다.

    여기서 죽는 건가.
    이렇게… 허망하게…

    온몸의 힘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복수? 개뿔. 지훈의 얼굴을 다시 보는 일도, 그 비열한 동료들에게 내가 살아있음을 알리는 일도 불가능할 터였다. 나는 그저 배신당하고 버려진, 던전 속의 하찮은 먹잇감일 뿐이었다.

    죽음이 목전이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귓가에는 심연의 포식자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차가운 혀가 내 발을 핥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들었다. 끝이었다.

    그때였다.
    내 안에서, 심장의 가장 깊은 곳에서, 뭔가 뜨겁고 거대한 것이 솟구쳐 올랐다.

    <경고! 생명 유지 시스템 치명적 손상!>
    <사용자 ‘강민’의 각성 조건 충족. ‘멸망의 권능’이 발현됩니다.>
    <새로운 스킬 ‘고통 흡수’를 획득했습니다.>
    <새로운 스킬 ‘절대 회복(초급)’을 획득했습니다.>
    <…>
    <‘멸망의 권능’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눈앞에 홀로그램 창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알던 그 어떤 던전 시스템과도 다른, 기이하고 섬뜩한 메시지였다. 고통에 일그러졌던 얼굴에 서서히 의문이 떠올랐다. 멸망의 권능? 이게 대체…

    내 몸을 덮치려던 심연의 포식자가 순간 움찔하더니, 기이한 비명을 내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녀석의 붉은 눈동자에 공포가 가득했다. 나를 노려보던 거대한 괴물이 왜 갑자기 겁을 먹은 거지?

    “크윽…!”

    옆구리의 상처가 다시 한번 욱신거렸지만, 이전만큼 고통스럽지 않았다. 아니, 고통이 오히려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이한 감각이었다. 마치 누군가 내 고통을 대신 흡수하고 있는 것처럼.

    손을 들어 올렸다. 피로 얼룩진 손바닥 안에서, 검고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을 보았다. 단순한 마나나 오라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증오와 분노가 응집된 듯한, 불길하고도 강력한 힘이었다.

    심연의 포식자가 이제는 완전히 공포에 질린 채, 동굴 안쪽으로 도망치려 발버둥 쳤다.
    그 순간, 내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딜 도망가.”

    방금까지 죽어가던 자의 목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싸늘하고도 단호한 음성이었다.
    왼쪽 어깨의 으스러진 뼈는 여전히 고통스러웠지만, 그 고통은 마치 먼 옛날의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그 고통은 내 안에 끓어오르는 분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고통을 흡수한다… 회복… 멸망의 권능…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힘이라면.
    이것이 내가 죽음의 문턱에서 부여받은 기회라면.

    나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갈가리 찢긴 옷과 피로 범벅된 몸은 여전히 끔찍했지만, 내 눈빛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삶에 대한, 그리고 복수에 대한 맹렬한 집념으로 활활 타올랐다.

    “지훈…”

    낮게 읊조린 그 이름은 더 이상 한때 믿었던 친구의 이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복수의 대상이자, 내가 기필코 박살 낼 증오의 이름이었다.

    “내가… 살아 돌아갈 거다.”

    차가운 동굴 속에서, 핏빛 섬광이 번뜩였다. 심연의 포식자를 향해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자의 첫걸음이었다. 그 걸음은 지옥으로 향하는 첫걸음이자, 배신자들에게 멸망을 선사할 복수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너희 모두를… 산 채로 지옥에 처넣어 주지.”

    내 입꼬리가 섬뜩하게 올라갔다. 피에 젖은 미소였다.

  • 무협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어둠이 짙게 깔린 지하 동굴, 습한 공기 속에서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촛불조차 제대로 켜지지 않은 으스스한 공간에서, 거대한 석상처럼 웅크리고 앉아 있던 마혈교의 교주, 마군(魔君)이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여덟 개의 거대한 석주는 이미 검기로 인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운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렸다. 전신은 물론이요, 정신까지 한 톨의 기력도 남지 않은 듯 피로에 절어 있었다. 손에 든 검은 끓어오르는 용광로에서 방금 꺼낸 쇠처럼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의 옆에는 절친한 벗이자, 청운문에서 함께 수련한 유일한 지기(知己)인 태진이 서 있었다. 태진 역시 옷이 찢기고 몸 곳곳에 상처가 가득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형형하게 빛났다.

    “해냈다, 태진아. 우리가 마침내 이 자를 꺾었어!”

    운현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수년간 무림을 공포에 떨게 했던 마혈교를 와해시키고, 그 수괴인 마군을 제압하는 것은 청운문 개파 이래 가장 큰 공적이었다. 이제 그들은 문파의 영웅이 되어 돌아갈 것이었다. 운현은 피 묻은 손으로 태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태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운현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래, 운현아. 우리가 해냈지.”

    태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차분했지만, 운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극심한 전투 후에 오는 나른함과 흥분이 뒤섞인 감정 때문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의 눈에는 이미 청운문의 장로들이 자신들을 맞이하며 환호하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그 순간, 운현의 등 뒤에서 섬뜩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섬광처럼 터져 나온 날카로운 기운이 그의 심장을 향해 맹렬히 파고들었다.

    “크윽!”

    운현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순간적으로 온몸의 근육이 뒤틀리고,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대체 무슨… 일인가? 그는 겨우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검은 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찌른 존재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믿음직스러운 얼굴이었다.

    태진.

    날카롭게 빛나는 검날은 정확히 운현의 심장을 관통하고 있었다. 검 끝에서 흘러나온 선홍색 피가 뚝뚝 떨어져 차가운 바닥에 스며들었다. 운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넋이 나간 표정으로 태진을 바라보았다.

    “태… 진아…?”

    핏기가 가신 그의 입술에서 겨우 흘러나온 소리였다. 심장을 꿰뚫는 고통보다 더 큰 배신의 충격이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태진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운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고, 그 안에는 일말의 동정심조차 없었다.

    “미안하다, 운현아.”

    태진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의 말은 운현의 고막을 찢고 영혼에 비수처럼 박혔다.

    “너의 재능은 너무 눈부셨지. 내 그림자를 가릴 만큼.”

    운현의 눈에 절망이 물들었다. 어째서? 우리가 함께 싸워왔던 세월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어릴 적부터 동고동락하며, 서로의 등을 지켜주었던 그 수많은 맹세와 약속들은 모두 거짓이었단 말인가?

    심장을 꿰뚫은 검날이 회전하며 그의 내부를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극심한 고통에 운현의 무릎이 꺾였다. 그가 휘청거리며 쓰러지려는 순간, 태진은 잔인하리만큼 빠르게 검을 빼냈다. 피가 울컥 솟구치며 그의 입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너는… 나의… 친구였다…!”

    운현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내며 소리쳤다. 하지만 태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친구? 그래, 한때는.” 태진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무림은 강자만이 살아남는 곳. 그리고 너는… 너무 순수했어. 나약했고.”

    태진은 운현이 비틀거리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지자, 그의 발치에 굴러떨어진 마군의 칠흑 같은 검을 집어 들었다. 마군의 검은 그의 손에 들리자마자 뿜어내던 사악한 기운을 감추는 듯했다.

    “이것으로 나는 청운문의 영웅이 될 것이다. 모두가 나를 우러러보고, 이 무림의 정점에 서게 되겠지.”

    태진은 쓰러져 신음하는 운현을 내려다보며 읊조렸다. 그의 눈에는 이미 승자와 정복자의 오만함이 가득했다. 운현은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 채, 태진의 등 뒤로 보이는 마군의 희미한 미소를 보았다. 이미 제압당했다고 생각했던 마군이 그의 시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운현은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태진과 마군의 계략이었음을.

    마지막 기력이 스러지는 순간, 운현은 온몸을 꿰뚫는듯한 배신감과 함께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 속에서, 그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태진이 천천히 발을 들어 운현의 옆구리를 강하게 걷어찼다. 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운현의 몸이 옆으로 굴러떨어졌다. 그는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었다. 시야는 암전되고, 세상의 모든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이 어두운 동굴 속에서, 마군의 시체와 함께 썩어갈 네놈의 시체를 누가 찾아낼까. 아무도 너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영원히.”

    태진의 차갑고 잔혹한 목소리가 운현의 귓가에 마지막으로 울렸다.

    어둠… 끝없는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운현의 뇌리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살아남아… 복수하리라.*

    비록 몸은 피로 물들고 영혼은 찢어졌을지라도, 그의 마지막 의지는 절대로 꺾이지 않았다.
    차가운 대지 위, 숨이 멎어가는 운현의 핏기 없는 얼굴 위로, 동굴 천장에서 떨어진 한 방울의 물이 마치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모든 것이 끝난 듯 보였다. 그러나 이 비극적인 결말은,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는 잔혹한 서막에 불과했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37화: 붉은 실, 얽히는 그림자

    햇살이 투명한 유리창을 넘어 서재 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작은 먼지들이 그 빛줄기 속에서 우주 유영을 하듯 느릿하게 떠다녔다. 갓 내린 차의 은은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고, 그 안락한 공기 속에서 민준은 조용히 노트북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듯 경쾌하게 움직였지만, 그 소리와는 달리 민준의 눈빛은 한없이 깊고 차가운 심연을 담고 있었다.

    “……완벽해.”

    나지막이 읊조린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어딘가 섬뜩한 희열이 깃들어 있었다. 화면 가득 빼곡히 채워진 복잡한 데이터와 시뮬레이션 결과값들. 평범한 사람이 본다면 그저 난해한 숫자의 배열에 불과할 테지만, 민준에게는 이 모든 것이 거대한 그림의 마지막 조각이나 다름없었다.

    따뜻한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쌉쌀하면서도 달콤한 여운이 혀끝에 남았다. 마치 지난 시간들을 압축해 놓은 듯한 맛이었다. 달콤한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배신은, 결국 이토록 잔인한 쓴맛을 남겼으니까.

    화면 한구석에 작게 띄워진 오래된 사진 속, 지은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햇살처럼 따스했던 미소. 그 미소 뒤에 숨겨진 차가운 칼날을 왜 그때는 보지 못했던 걸까. 그녀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하나가 얼마나 치밀하게 계산된 연극이었는지 깨달았을 때, 민준의 세상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혼을 갉아먹는 독이자, 살아있는 육신을 서서히 죽이는 지독한 병이었다.

    그때부터 민준의 일상은 ‘치유’라는 가면을 썼다. 맑은 날에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고, 비 오는 날에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사색에 잠겼다. 가끔은 가까운 숲길을 걷거나, 작은 공방에서 도자기를 빚기도 했다. 겉보기에는 영혼의 상처를 보듬고 아물게 하는 평화로운 시간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그를 보며 “민준 씨, 많이 괜찮아지셨네요. 역시 시간이 약인가 봐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시간은 약이 아니었다. 시간은 민준에게 복수를 설계할 충분한 여유를 주었을 뿐이었다. 겉으로는 고요한 호수처럼 보였던 그의 마음속은, 실은 거친 폭풍을 품고 있었다. 그 폭풍이 언젠가 휘몰아쳐 모든 것을 집어삼킬 날만을 기다리며.

    화면의 사진 속 지은의 미소는 여전히 밝았다. 하지만 민준의 눈에는 이제 그 미소가 섬뜩한 가면으로만 보였다. 그녀가 자신의 손아귀에 넣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이용하고 버렸는지, 그가 알게 된 사실들은 너무나 잔혹했다. 특히, 민준이 전부였던 그 시절, 그녀가 자신에게 속삭였던 거짓된 약속들. ‘우리는 평생 함께 할 거야, 민준아.’ 그 말은 그저 그를 묶어두기 위한 족쇄였을 뿐이었다.

    민준은 키보드 엔터키에 손가락을 올렸다. 지금 이 순간, 하나의 시작이자, 또 다른 끝을 알리는 방아쇠였다. 그가 클릭하는 순간, 지난 몇 달간 그가 밤낮으로 공들여 심어놓은 붉은 실들이 거미줄처럼 얽혀들며 작동하기 시작할 터였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이 복수가 그에게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줄까? 아니면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일까?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속삭였다. ‘멈춰. 이대로도 충분해.’ 하지만 그 목소리는 이내 거대한 분노의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아니, 충분하지 않다. 지은이 자신에게 준 고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꿈, 명예, 그리고 가장 소중했던 신뢰까지. 이제 그녀의 차례였다.

    민준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의 심장은 평온하게 박동했다. 그의 겉모습은 여전히 차분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는 마치 오랜 시간 준비한 퍼포먼스의 마지막 장면에 임하는 연기자처럼,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이때, 작은 알림음이 울렸다. 메신저였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지은이었다.

    [지은]: 민준아, 잘 지내? 오랜만에 연락하네. 잘 지내고 있다고 들었어. 다행이다. 언제 한번 차 한잔할까? 너 요즘 너무 조용해서 걱정돼.

    화면 속 지은의 메시지는 걱정 어린 친구의 진심처럼 보였다. 민준은 피식, 쓴웃음을 흘렸다. 걱정? 그녀는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씻어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양심을 위장하고, 혹시라도 자신이 무슨 짓을 할까 봐 떠보는 비겁한 속셈이 훤히 보였다.

    민준은 지은의 메시지에 답장을 하는 대신, 키보드의 엔터키를 힘껏 눌렀다.

    클릭!

    화면 속 데이터들이 순식간에 처리되며, 준비된 시스템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던 그의 붉은 실들이 일제히 지은을 향해 조여들었다.

    민준은 지은의 메시지 창을 닫고,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평온했지만, 그 깊은 곳에는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맹수의 광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다. 그녀가 쌓아 올린 견고한 성이 어떻게 무너져 내리는지, 그 처절한 과정을 그는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볼 터였다. 그 어떤 잔인한 복수도, 그가 겪었던 고통에 비하면 한없이 가벼울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창밖의 햇살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민준의 서재에는 차가운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 지은을 향한 그의 복수는 이제 막 그 서막을 올린 참이었다.

    민준은 휴대폰을 들어 지은에게 짧은 답장을 보냈다.

    [민준]: 응, 잘 지내. 덕분에. 차는 다음에 마시자. 요즘 좀 바빠서.

    그는 덧붙여 웃는 이모티콘을 하나 찍어 보냈다. 그 웃음은 지은에게는 그저 친구의 평범한 미소로 보이겠지만, 민준의 얼굴에는 소리 없는 승리의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이제 붉은 실들은 걷잡을 수 없이 얽혀들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분명 그녀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한 파멸일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