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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좀비 아포칼립스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잿더미 속, 고대의 맥동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빛은 사치였다. 찢겨진 도시의 심장부, 한때 휘황찬란했던 백화점의 잔해 속에서 우리는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눅눅한 곰팡이 냄새와 피비린내가 섞인 공기, 언제나 지독하게 달라붙는 이 기분 나쁜 악취가 이제는 우리의 두 번째 피부 같았다.

    “지훈 오빠, 이쪽은 아무것도 없어요. 전부 텅 비었네요.”

    하준의 목소리가 텅 빈 매장 안을 울렸다. 스무 살 초반의 어린 친구는 언제나 긍정적인 기운을 잃지 않으려 애썼지만, 텅 빈 선반과 찢겨진 마네킹의 앙상한 팔다리 앞에서 그조차도 기운이 빠지는 듯했다.

    “하준아, 다치지 않게 조심해. 섣부르게 움직이지 말고.”

    우리 무리의 실질적인 리더, 수진 누나가 차분하게 지시했다. 군인 출신인 그녀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였다. 꼼꼼하고 침착하며, 무엇보다 흔들리지 않는 강인함이 있었다. 나는 묵묵히 그녀의 등 뒤를 따르며 주변을 경계했다. 내 낡은 소총은 언제나 든든한 동반자였지만, 총알은 갈수록 귀해지고 있었다.

    우리의 목표는 식량과 의약품. 특히 항생제가 절실했다. 하준의 팔에 생긴 작은 상처가 며칠째 아물지 않고 있었다. 이곳 백화점은 꽤 오랫동안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은 듯했지만, 그만큼 위험했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언제든 튀어나올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거기, 옷장 쪽 확인해봐. 박스 같은 거 있을지도 몰라.”

    수진 누나가 손전등을 들어 한때 여성복 코너였을 법한 곳을 비췄다. 찢겨진 옷가지들이 뒹구는 사이, 쓰러진 진열대 너머로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총을 들었다.

    “움직인다.”

    내 낮은 경고음에 수진 누나와 하준이 즉시 경직됐다.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의 형체가 드러났다. 피부가 썩어 문드러지고, 핏기 없는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나는 ‘그들’. 흔히 좀비라 불리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우리는 ‘망자’라고 불렀다.

    두 마리… 세 마리…

    망자들은 느릿느릿 걸어 나오며 쉰 목소리로 신음했다. 백화점의 밀폐된 공간은 이 소음을 증폭시켜 마치 수십 마리가 포효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손전등을 망자의 머리에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탕! 경쾌한 총성이 어둠을 찢고 첫 번째 망자의 머리를 산산조각 냈다. 하지만 동시에, 총성은 다른 망자들을 깨우는 비명이기도 했다.

    “젠장, 윗층에서 내려와요!” 하준의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들자, 위층에서 난간을 넘어 쿵쿵대며 떨어지는 망자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도망쳐!” 수진 누나가 소리쳤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가장 깊숙한 곳으로, 가장 어두운 곳으로 내달렸다. 굉음과 신음소리가 좁은 복도를 가득 채웠다. 망자들의 숫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폐쇄된 직원용 통로를 통해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지옥이라도 기어들어가야 했다.

    “여긴… 어디지?”

    계단을 한참 내려왔을까. 콘크리트 바닥이 흙길로 변하고, 주변의 벽이 거친 돌덩이로 바뀌었다. 손전등 빛이 닿는 곳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석벽과 낯선 문양이 새겨진 조각상들이었다. 흡사 오래된 유적지 같았다. 백화점 지하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이봐, 이건 분명히 지상에 있어야 할 유물이 아니야. 지질도가 완전히 달라.” 수진 누나가 벽에 손을 짚고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함께 미묘한 호기심이 스쳐 지나갔다.

    “오빠, 저기 좀 봐!”

    하준이 가리킨 곳에는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우리의 발소리를 들은 건지, 망자들의 신음소리가 저 멀리 위쪽에서 다시 들려오기 시작했다. 망설일 틈이 없었다. 우리는 빛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작은 통로 끝, 둥근 형태의 공간이 나타났다. 그 중앙에는 기이한 형태의 제단이 서 있었다. 제단 위에는 거대한 돌이 놓여 있었는데, 그 돌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돌 주변의 석벽에는 난해한 상형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문자들이 뿜어내는 빛은 돌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과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게 뭐야…?” 하준이 숨을 들이켰다.

    “고대의 유적 같아. 하지만… 이런 게 도심 지하에 숨겨져 있었다니.” 수진 누나의 눈빛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동시에 나는 알 수 없는 이끌림에 홀린 듯 돌에 시선을 빼앗겼다. 푸른빛은 마치 나를 부르는 듯 희미하게 깜빡이는 착각마저 들게 했다.

    쿵, 쿵.

    심장이 불규칙하게 울렸다. 마치 이 돌과 내 심장이 같은 박자로 뛰는 것 같았다. 망자들의 소리가 더 가까워졌다. 시간이 없었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한 발짝, 한 발짝 제단으로 다가섰다. 수진 누나가 내 어깨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내 손은 돌을 향해 뻗어 나가고 있었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온기, 그러나 동시에 강렬하고 압도적인 힘이 손끝을 통해 내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몸 안의 모든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고, 머릿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거대한 나무들이 하늘을 뚫을 듯 솟아 있고, 그 아래에서 사람들이 빛나는 손짓으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푸른빛이 있었다.

    내 눈앞에 일어난 현상에 하준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현실 감각은 저 멀리 사라진 뒤였다.

    푸른빛이 내 손을 타고 뻗어나가더니, 내 몸을 감쌌다. 섬광처럼 빛나는 빛은 순식간에 주변을 집어삼켰고, 나는 그 빛의 한가운데서 존재의 경계를 허무는 듯한 고통과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크아아아악!”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제단 주변의 석벽에 새겨진 문양들을 활성화시켰다. 잊혀졌던 고대의 문자들이 푸른빛을 띠며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 속에서, 나는 팔을 뻗어 나를 향해 달려드는 망자들을 향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내 손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빛줄기는 망자들을 정확히 가격했다. 꿰뚫는 대신, 그들을 짓눌렀다. 쩌적, 쩌적. 마치 돌덩이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망자들의 육신은 순식간에 잿빛으로 변하며 부스러져 내렸다. 고작 몇 초 만에,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정적.

    내 몸을 휘감았던 푸른빛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손에 남아있는 찌릿한 감각과 심장이 터질 듯한 고동만이 내가 겪은 일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지… 지훈 오빠?” 하준의 목소리는 공포와 경외심이 뒤섞여 있었다. 수진 누나는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의문과 함께 깊은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 달라졌다. 내 안에서, 새로운 힘이 깨어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대한 힘의 일부가, 내 존재의 일부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망자들의 신음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고요함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미지 앞에서 떨고 있었다. 이 힘은 무엇이며, 왜 내게 나타난 것인가? 이 힘으로 우리는 이 지옥 같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혹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질까?

    내 안에서 맥동하는 고대의 힘이 속삭였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이 잿더미 속에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고.

  • 무협 독립적인 단편 소설

    천무문의 새벽은 언제나 고요하고 장엄했다. 안개 덮인 기와지붕 위로 희미하게 솟아오르는 햇살은 고요한 평화를 드리웠으나, 그 평화는 단 한 줄의 비명 소리에 산산이 부서졌다. 비명은 문파 내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 천무문의 장로 강백산이 기거하는 비수각에서 터져 나왔다.

    현명객은 그날 아침, 문파의 초청으로 방문한 천무문 객잔에서 막 차를 우려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며 세상의 이치를 읽어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의 깡마른 체구와 수수하면서도 기품 있는 도포는 강호의 수많은 고수들 사이에서 그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는 무력보다 지혜로 강호를 꿰뚫는 ‘지혜의 검객’으로 불렸다.

    “현명객 어르신! 큰일 났습니다!”

    다급한 외침과 함께 천무문 호법대장 진무량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객잔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얼굴은 피를 토한 듯 붉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에는 공포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현명객은 찻잔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고개만 살짝 돌렸다. “무량대장, 대체 무슨 소란이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낮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한 서늘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강백산 장로께서… 비수각에서… 살해당하셨습니다!”

    진무량의 말에 객잔 안의 몇몇 무사들이 술렁였다. 현명객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뿐, 놀라움보다는 깊은 사색에 잠긴 듯 보였다.

    “안내하시오. 직접 살펴보겠소.”

    비수각은 천무문 내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견고한 건물 중 하나였다.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두꺼운 벽돌로 지어졌고, 창문에는 쇠창살이 박혀 있었다. 현명객이 도착했을 때, 비수각 앞에는 이미 천무문의 수제자 이청운과 강백산 장로의 조카딸 강소연이 초췌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청운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강소연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현명객 어르신…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이청운이 현명객을 보자마자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진무량은 이청운의 말을 끊고 설명했다. “아침 일찍 장로께 조반을 올리러 갔다가 발견했습니다. 문은 안에서 굳게 잠겨 있었고, 창살도 그대로였습니다. 장로께서는… 그분 침상 옆에서 목에 비수가 꽂힌 채 발견되셨습니다.”

    현명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비수각의 문을 살펴보았다. 문은 두껍고 견고한 나무로 되어 있었으며, 안쪽에서 걸쇠가 단단히 잠겨 있다는 것이 육안으로도 확인되었다. 문틈 하나 없이 굳게 닫힌 상태였다.

    “문은 누가 열었소?” 현명객이 물었다.

    “제가 직접 안에서 잠긴 빗장을 부수고 들어갔습니다.” 진무량이 대답했다. “안에는 장로님 시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침입의 흔적도, 외부로 나간 흔적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현명객은 비수각 안으로 들어섰다.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는 이미 수습되었으나, 바닥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은 그날 밤의 참혹함을 짐작게 했다. 비수각 내부는 장로의 기품을 드러내듯 단정하고 고풍스러웠다. 벽면에는 무림 고수들의 필적과 그림들이 걸려 있었고, 한쪽에는 수십 년 묵은 서책들이 가득한 책장이 자리했다.

    현명객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멈추는 곳 없이 움직였고, 때로는 아주 작은 부분에 오래 머물기도 했다. 그는 벽을 따라 걷다가 창문에 닿았다. 쇠창살은 견고했고, 틈 하나 없이 완벽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창문으로는 사람이 드나들 수 없습니다. 설령 아이라 해도 불가능할 겁니다.” 진무량이 확인시켜 주듯 말했다.

    현명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을 살폈다.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게 정돈된 마루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바닥 한 곳을 쓸어보았다. 그리고는 코끝으로 가져가 킁킁거렸다.

    “이것은…?” 강소연이 현명객의 행동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현명객은 대답 대신, 다시 시선을 들어 비수각의 문으로 향했다. 안쪽 빗장 부분을 유심히 살피던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빗장 주변의 나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보았다. 그리고는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쥔 듯 손을 살짝 쥐었다가 폈다.

    “살펴보니, 장로님께 꽂힌 비수는 장로님께서 아끼시던 ‘만파비수(萬波匕首)’였습니다. 늘 침상 옆 벽에 걸려 있던 것이지요. 범인이 그것을 뽑아 장로님을 해한 것 같습니다.” 이청운이 말했다.

    현명객은 고개를 돌려 이청운을 바라보았다. “만파비수라… 그렇다면 범인은 장로님과 상당히 가까운 사이이거나, 적어도 이 비수각의 구조를 잘 아는 자였겠구려.”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문파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무량이 분개했다.

    현명객은 다시 침묵했다. 그는 비수각의 문턱에 쪼그려 앉더니, 문과 문틀 사이의 아주 미세한 틈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이 틈은 너무나 작아서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세월의 흔적이나 흠집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대장.” 현명객이 진무량을 불렀다. “여기에 아주 얇은 실이나 끈을 넣어 보시오. 강하고 질긴 것으로.”

    진무량은 의아했지만, 곧 허리춤에서 평소 무기 수리에 쓰던 얇고 질긴 비단실을 꺼냈다. 그는 현명객이 가리킨 문틈에 실을 넣어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 틈으로는 아무것도 들어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진무량이 난감해했다.

    “더 깊이, 그리고 힘을 주지 말고 아주 부드럽게 넣어보시오.” 현명객이 지시했다.

    진무량은 현명객의 말대로 다시 시도했고, 놀랍게도 실은 문틈 사이로 아주 미세하게 들어갔다. 그 틈은 문이 닫힐 때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틈새가 아니라, 나무의 결을 따라 길게 갈라진 듯한 흠집이었다.

    “이것이…?” 진무량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현명객은 미소 대신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범인은 이 작은 틈을 이용했소. 장로님을 살해한 후, 범인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섰을 것이오. 그리고는…”

    현명객은 진무량에게 문 안쪽 빗장의 손잡이에 비단실을 묶게 했다. 그리고는 그 실의 다른 한쪽 끝을 방금 그 틈을 통해 밖으로 빼내게 했다.

    “자, 이제 문 밖으로 나가서 실을 당겨 보시오.” 현명객이 말했다.

    진무량은 반신반의하며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현명객이 가르쳐준 대로 실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문 안쪽의 빗장이 완벽하게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문은 이제 안에서 잠긴 완벽한 밀실이 되었다.

    이청운과 강소연은 경악한 표정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럼 범인은 실을 당겨 문을 잠그고… 그 실을 다시 밖으로 빼냈다는 말씀이십니까?” 이청운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현명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빗장에 묶인 실은 강한 힘으로 당겨지면 풀리도록 특수한 매듭으로 묶었을 것이오. 혹은 얇지만 끈끈한 접착력을 가진 특수 약재를 발라 임시로 고정시킨 뒤, 잠근 후 다시 잡아당겨 분리했겠지. 그리고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틈 사이로 실을 다시 빼낸 것이오.”

    “하지만… 어떤 자가 이런 기묘한 재주를 부릴 수 있단 말입니까?” 진무량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현명객의 시선은 비수각 내부, 강백산 장로의 침상 옆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을 향했다. 그 그림에는 강백산 장로가 젊은 시절, 한 송이 매화나무 아래에서 얇고 긴 비단끈을 휘두르며 무예를 연마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천무문의 비기 중 하나인 ‘매화비수(梅花飛手)’였다.

    “매화비수… 손끝의 미세한 힘으로 비단끈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무예지. 그 미세한 틈을 통해 끈을 넣고, 빗장을 조작하며, 마지막에는 흔적 없이 끈을 회수하는 재주는 오직 ‘매화비수’를 완벽하게 익힌 자만이 가능할 것이오.” 현명객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예리했다.

    이청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는 천무문 내에서 ‘매화비수’를 가장 완벽하게 계승한 수제자였다.

    “장로님께서는 그대의 비범한 재주를 높이 사셨겠지만, 그 재주가 이런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초래할 줄은 꿈에도 모르셨겠지.” 현명객은 이청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아닙니다! 저는… 저는 장로님을…!” 이청운은 손사래를 치며 부인하려 했으나, 그의 눈동자는 이미 거짓을 말하고 있었다.

    “장로님은 오늘 새벽, 문파의 오랜 비밀이 담긴 ‘벽하보전(碧霞寶典)’을 읽고 계셨소. 이 책은 오직 다음 문주에게만 전해지는 천무문의 보물이지. 자네는 다음 문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장로님의 죽음이 필요했던 것이오. 어젯밤, 장로님은 이 책을 읽던 중 갑자기 찾아온 자네를 보고 놀라셨을 것이고… 결국 만파비수가 자네의 손에 들려진 채 그분을 꿰뚫었겠지. 자네가 비수각을 떠나면서 문을 안에서 잠긴 것처럼 위장했고.” 현명객은 모든 진실을 꿰뚫어 보듯 단호하게 말했다.

    이청운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절망과 광기로 뒤덮였다.

    “크아아악!” 이청운은 결국 참지 못하고 울부짖으며 현명객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서 매화비수 무공의 잔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현명객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무량이 순식간에 이청운을 제압했다.

    천무문의 밀실 살인 사건은 그렇게 현명객의 날카로운 지혜 아래에서 모든 비밀을 드러냈다. 현명객은 고요히 비수각을 나왔다. 그의 그림자는 새벽 안개 속으로 다시 스며들었고, 강호의 또 다른 어둠을 찾아 떠나는 듯했다. 그의 발걸음은 늘 그랬듯 가볍고, 그의 눈빛은 여전히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 서늘했다. 강호는 그런 현명객을 ‘움직이는 그림자’라 불렀다.

    현명객은 홀로 걸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인간의 욕망은 아무리 교묘한 꼼수를 부린다 한들, 그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는 법. 세상에 완벽한 밀실은 없다. 다만 완벽을 가장한 어리석음만이 존재할 뿐.”

  • 다크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 잿빛 가시넝쿨

    태양은 언제나 뜨거웠고, 제국의 철갑은 언제나 차가웠다. 하지만 수렁골의 겨울은 그보다 더 혹독했다. 거대한 제국, ‘아스타르 제국’의 그림자는 수렁골을 집어삼켰고, 그 그림자 아래에서 사람들은 굶주림과 착취에 시달렸다. 세금은 숨 쉬는 공기만큼이나 당연했고, 공물은 피를 말리는 저주와 같았다. 잿빛 흙먼지가 이는 길 위로 제국 병사들의 부츠 소리가 울리면, 아이들은 울음을 삼키고 어머니들은 창백한 얼굴로 벽 뒤에 숨었다.

    카인은 그 모든 것을 온몸으로 겪어냈다. 그의 아버지는 채찍질에 쓰러졌고, 어머니는 열병으로 죽었다. 어린 여동생은 뼈만 남은 손으로 흙을 움켜쥐다 결국 싸늘하게 식었다. 그 모든 비극의 중심에는 늘 제국의 탐욕스러운 그림자가 있었다.

    어느 날, 마을 중앙의 낡은 나무 앞에 사람들이 강제로 끌려 나왔다. 병사들의 대장, 킬리안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삿대질을 해댔다. 그의 눈은 썩어가는 고기 같았다.

    “이곳의 공물은 언제나 부족하다! 제국은 너희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베풀었는데, 고작 이 정도냐?”

    킬리안의 손짓 한 번에 병사들이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젊은이들이 쓰러지고,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중에는 카인의 친구, 루벤도 있었다. 루벤은 건장한 사내였지만, 제국의 폭력 앞에서는 그저 한낱 나약한 피조물일 뿐이었다.

    “루벤! 안 돼!”

    카인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병사 하나가 그를 밀쳐냈지만, 카인의 눈은 루벤을 향해 있었다. 루벤은 얼굴에 피를 흘리면서도 고통을 꾹 참고 있었다. 킬리안이 루벤에게 다가가 발로 걷어찼다.

    “건방진 것들. 제국에 반항하는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이걸 기억해라.”

    킬리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마을을 뒤져라. 쓸 만한 것은 모조리 가져와. 젊은 사내들은 징집병으로 끌고 간다!”

    마을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아이들의 울음소리, 여인들의 비명, 그리고 병사들의 비웃음이 뒤섞였다. 루벤이 끌려가고 있었다. 그의 눈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끊어졌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날 밤, 카인은 흙먼지 덮인 골목길에 앉아 밤새도록 이를 갈았다.

    “죽여버릴 거야… 모두… 죽여버릴 거야!”

    분노와 함께 찾아온 것은 뼛속까지 시린 절망이었다. 어떻게? 나약한 그가 거대한 제국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둠 속에서 낡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마을의 가장 나이 많은 어르신이었다. 눈가의 주름은 그녀가 살아온 고단한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카인아, 분노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단다.”

    “그럼… 뭘 해야 합니까? 그저 이렇게 죽어가야 합니까?” 카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어르신은 그의 옆에 앉아 차분히 말했다. “아니. 하지만 지혜가 필요해. 제국은 강대하지만, 그들의 힘은 위에서부터 온다. 뿌리를 흔들면, 거대한 나무도 흔들릴 수 있지.”

    “뿌리요?”

    “그래. 이 땅에 억압받는 이들이 너희 수렁골뿐이겠느냐. 제국의 탐욕은 끝이 없고, 그만큼 고통받는 이들도 많지. 흩어진 가시넝쿨들이 모이면, 거목도 뒤덮을 수 있단다.”

    그날 밤, 어르신은 카인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제국의 지배가 시작되기 전, 자유롭게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제국의 폭정에 맞서 싸우다 사라진 작은 저항의 역사들. 어르신의 이야기는 카인의 절망 속에 한 줄기 빛을 던져주었다.

    며칠 후, 카인은 결심을 굳혔다. 루벤을 구하고,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어르신이 알려준 옛 지도를 들고, 루벤을 찾아 나섰다.

    루벤은 제국의 징집병 캠프에 있었다. 흙으로 만든 허술한 막사 안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굶주림과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카인은 밤의 장막을 틈타 잠입했다.

    “루벤!”

    어둠 속에서 들려온 카인의 목소리에 루벤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피폐해져 있었지만,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카인… 네가 어떻게 여기에?”

    “널 구하러 왔다. 그리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카인은 루벤에게 어르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흩어진 가시넝쿨이 모여 거대한 나무를 뒤덮을 수 있다는 이야기. 루벤은 처음에는 망설였다. 제국의 힘은 너무나 거대했다.

    “카인… 우린 아무것도 아니야. 그들과 싸우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야.”

    “혼자서는 그래. 하지만 우리처럼 고통받는 이들이 수천, 수만이라면? 이대로 죽어가는 것보다는, 싸우다 죽는 게 낫지 않겠나? 너와 나, 그리고 이 캠프의 모든 이들을 위해서라도.”

    카인의 눈빛에는 전에 없던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루벤은 그 눈을 보며 결심했다. 그날 밤, 카인과 루벤은 몇몇 동조자들과 함께 징집병 캠프를 탈출했다. 그들의 탈출은 작은 불씨였다.

    그들은 수렁골로 돌아와 어르신에게 보고했다. 어르신은 미소 지었다. “그래, 첫 가시넝쿨이 뿌리를 내렸구나.”

    그때부터 카인과 루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몇몇 젊은이들은 밤마다 인근 마을을 돌았다. 그들은 제국의 횡포를 고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두려워했지만, 카인과 루벤의 진심 어린 호소와, 그들이 보여주는 작은 용기는 서서히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특히 제국 병사들의 보급 마차를 습격해 빼앗은 식량을 가난한 마을에 나누어 주었을 때, 사람들은 그들을 ‘잿빛 가시넝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잿빛 흙먼지 속에서 자라나, 제국이라는 거목을 뒤덮으려는 가시넝쿨들.

    물론 제국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킬리안은 더욱 잔혹해졌다. 그는 잿빛 가시넝쿨을 숨겨주는 마을들을 불태우고, 무고한 이들을 학살하며 본보기를 보였다. 공포는 그림자처럼 퍼져나갔지만, 동시에 분노도 함께 자라났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잿빛 가시넝쿨에 합류했다. 그들은 굶주린 농부였고, 억압받던 장인이었고,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었다.

    “우리는 군대가 아니다.” 카인은 새로운 동지들 앞에서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는 그저 억압받던 이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제국의 먹잇감이 아니다. 우리는 가시넝쿨이다. 제국의 살갗을 찢고, 그들의 피를 빨아먹을 것이다!”

    루벤은 카인의 옆에서 묵묵히 칼을 갈았다. 그의 어깨에는 징집병 캠프에서 입었던 상처 자국이 선명했다. 그는 이제 주저하지 않았다.

    킬리안은 잿빛 가시넝쿨을 단순한 도적 떼로 치부했지만, 그들은 빠르게 성장했다. 수렁골 인근의 ‘잿빛 요새’는 제국이 수탈한 식량과 금화를 쌓아두는 곳이자, 반항적인 민간인들을 가두는 악명 높은 곳이었다. 킬리안은 이 요새에 상주하며 주변 지역의 모든 것을 감시하고 통제했다.

    “우리는 잿빛 요새를 함락시킬 것이다.” 카인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횃불 앞에서 말했다. “그들의 식량을 빼앗아 우리 백성에게 돌려주고, 갇힌 이들을 해방할 것이다.”

    몇몇은 경악했고, 몇몇은 환호했다. 잿빛 요새는 견고한 철벽으로 둘러싸인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들의 수는 제국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미친 짓이야, 카인!” 한 노인이 소리쳤다. “거긴 철벽의 요새다. 수천의 병력이 있어도 힘들어!”

    “우리는 군대가 아니다.” 카인은 다시 한번 말했다. “우리는 잿빛 가시넝쿨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나, 가장 연약한 틈을 파고들 것이다.”

    공격은 한밤중에 시작되었다. 몇몇 정예 요원들이 요새의 배수로를 통해 잠입했다. 그들은 내부에서 문을 열고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임무였다. 카인과 루벤은 나머지 병력과 함께 요새 주변에 매복해 있었다.

    요새의 문이 열리는 순간, 카인은 신호를 보냈다. “돌격!”

    울부짖는 함성과 함께 잿빛 가시넝쿨이 요새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그들은 제대로 훈련받은 군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눈에는 분노와 절망, 그리고 희망이 섞여 있었다. 굶주림에 지친 몸이었지만, 그들의 칼날은 제국 병사들의 철갑을 꿰뚫었다.

    요새 내부는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제국 병사들은 반란군의 기습에 당황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반격에 나섰다. 잿빛 가시넝쿨은 좁은 복도와 계단에서 필사적으로 싸웠다.

    카인은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오직 킬리안의 얼굴이었다. 루벤은 그의 옆을 지키며 거대한 망치를 휘둘러 병사들을 쓰러뜨렸다.

    “이곳에 킬리안이 있다! 그를 찾아라!” 카인이 소리쳤다.

    마침내 카인은 요새의 가장 높은 탑에서 킬리안을 발견했다. 킬리안은 여유롭게 전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찮은 쓰레기들이 감히…!” 킬리안은 카인을 발견하고 비웃었다. “네가 이 난동의 주범인가? 꼴이 우습구나. 나약한 촌뜨기가 제국을 거스르려 하다니.”

    “네놈의 피로 이 땅의 한을 씻어주마!” 카인은 검을 뽑아 들고 킬리안에게 달려들었다.

    킬리안은 능숙한 검사였다. 제국의 장교답게 그의 움직임은 빠르고 강력했다. 카인의 검은 몇 번이고 킬리안의 칼날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카인은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굶주림에 죽어간 여동생, 채찍에 쓰러진 아버지, 열병에 신음하던 어머니, 그리고 수렁골의 모든 억압받던 이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나의 복수가 아니다… 이 땅의 백성들의… 복수다!”

    카인은 마지막 힘을 짜내 킬리안의 빈틈을 노렸다. 그의 검이 킬리안의 옆구리를 깊숙이 찔렀다. 킬리안은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카인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킬리안의 심장을 꿰뚫었다.

    킬리안은 눈을 부릅뜨고 쓰러졌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킬리안이 쓰러지자, 제국 병사들의 저항은 급격히 약해졌다. 잿빛 요새는 함락되었다.

    카인은 피투성이가 된 채 요새의 성벽에 서 있었다. 동이 터오르는 하늘 아래, 요새의 문이 열리고 갇혀 있던 백성들이 해방되었다. 그들은 자유를 향한 갈망과 감격에 찬 눈물로 카인을 바라보았다.

    승리는 달콤했지만, 동시에 무거웠다. 수많은 동지들이 싸움 중에 쓰러졌다. 카인 자신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이제 절망이 아닌, 새로운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우리는 해냈다…!” 루벤이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루벤의 얼굴도 피와 흙먼지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의 눈은 살아 있었다.

    어르신이 다가와 카인의 어깨를 감쌌다. “잘했다, 카인아.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지만, 너희가 잿빛 가시넝쿨을 심었다. 이 가시넝쿨은 이제 제국의 심장까지 파고들 것이다.”

    카인은 고개를 들어 동이 트는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거대한 아스타르 제국의 수도가 보이지 않는 곳에 자리 잡고 있을 터였다. 요새 안에 쌓여 있던 금화와 식량은 굶주린 이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잿빛 요새의 함락은 작은 승리에 불과했지만, 그것은 거대한 제국에 맞서는 불굴의 의지를 심어주었다.

    이제 잿빛 가시넝쿨은 단순한 반란군이 아니었다. 그들은 희망의 상징이자,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존재였다. 제국은 곧 그들의 존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진정한 전쟁이 시작될 것이었다. 카인은 칼날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결심했다. 그의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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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인된 비원(秘苑)의 외침

    영월문(映月門)의 깊은 곳, 언제나 은은한 영기(靈氣)와 고요함이 감돌던 운파 진인(雲波眞人)의 비원(秘苑)에 일찍이 없던 살기(殺氣)와 혼란이 휘몰아쳤다. 평소 새소리조차 조심스러이 속삭이던 그곳은 지금, 절규와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비원 전체를 에워싼 거대한 방어 진법(陣法)은 온전히 작동 중이었고, 단단히 잠긴 입구는 조금의 손상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문파의 중진이자 공간 진법의 대가인 운파 진인은, 그 완벽하게 봉인된 공간 안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문파의 모든 장로들이 모여든 가운데, 거대한 영월문의 문주(門主)조차 창백한 얼굴로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백련 선사(白蓮禪師)께서 오신다 하셨느냐?”
    문주의 물음에 고개를 숙인 젊은 제자, 사량(沙量)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예, 문주님. 방금 전 전령 비둘기가 도착했습니다. 영월문 경계에 막 당도하셨다고….”

    그때였다. 닫힌 비원의 입구, 두텁게 드리워진 영기 결계 바깥에서 마치 허공을 가르듯 맑고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파 진인의 비원이 어찌 이리 소란스러운가? 설마 신선이 되시는 길이라도 찾으셨단 말인가?”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천하 제일의 기인(奇人)이자, 온갖 난해한 사건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데 도가 튼 백련 선사. 그의 별호는 ‘공허의 추적자’. 어떤 잔재도 남기지 않는다는 완전무결한 살인 속에서도 희미한 영기 흐름이나 공간의 뒤틀림을 읽어내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명성에 걸맞지 않게, 그의 모습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희고 깨끗한 도포를 입었을 뿐, 별다른 치장도, 위압적인 영력의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만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처럼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량이 황급히 백련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백련 선사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 사량, 길 안내를 맡겠습니다.”
    “고생은 내가 아니라, 영월문이 겪고 있는 듯하구나.”
    백련은 희미하게 웃으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스치는 곳마다 문파 장로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백련이 비원의 입구에 다다랐다. 비원을 둘러싼 진법은 영월문의 자랑이었다. 수백 년간 단 한 번도 외부의 침입을 허락한 적이 없는 견고한 영기 장벽. 지금은 문주의 허락 아래 일부분이 해제되어 내부로 통하는 통로가 겨우 열린 상태였다. 하지만 살인 사건이 일어난 운파 진인의 개인 수련실은 여전히 진법으로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었다.

    “사량 제자. 상황을 설명해 보거라.” 백련의 나긋한 목소리에 사량이 떨리는 목소리로 브리핑을 시작했다.
    “운파 진인께서는 어제저녁부터 수련실에 드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중요한 수련을 하실 때면 비원 전체의 진법을 강화하고, 특히 수련실 내부는 ‘공간 유영진(空間遊泳陣)’으로 완전히 봉쇄하셨습니다. 일주일간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단단히 일러두셨지요. 그런데 오늘 아침, 진인께 차를 올리러 간 시동이 문밖에서 미약한 영기 소실(消失)의 흔적을 느끼고는… 감히 문을 열지 못하고 문주님께 보고드렸습니다.”
    사량은 꿀꺽 침을 삼켰다.
    “문주님께서 진법 해제 명을 내리시고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운파 진인께서는 수련실 정중앙에 앉으신 채로… 고요히 운명하신 뒤였습니다.”
    백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신은 움직였는가?”
    “아니요! 문주님께서 선사님께서 오시기 전까지는 그 어떤 것도 건드리지 말라 명하셨습니다.”
    “다행이군.”

    백련은 수련실의 입구, 여전히 굳게 닫힌 거대한 석문 앞에 섰다. 석문은 매끄러웠고, 그 위에 새겨진 고대 진법 문양들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문이 닫힌 이후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전혀 없었다. 내부에서 문을 열고 나간 흔적도 없었다. 마치 운파 진인이 스스로 문을 닫고 들어간 뒤, 아무도 드나들지 않은 그 완벽한 밀실 안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듯했다.

    백련은 문에 손을 대었다. 차갑고 단단한 석문 위로 그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영기가 흘러나갔다.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순간, 주변의 모든 소음이 사라진 듯했다. 백련은 온몸의 감각을 깨워 수련실 내부와 외부를 에워싼 거대한 영기 흐름에 집중했다. 수련실 외부의 공기는 영월문 특유의 청정한 영기로 가득했으나, 수련실 내부에서는 미약하게나마 이질적인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것은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될, 지독히도 섬세한 파동이었다.

    “진법은 온전하군.”
    백련이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고요했으나, 그 속에 숨겨진 날카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운파 진인의 공간 유영진은 외부의 침입을 완벽히 차단하며, 심지어 내부에서 외부로의 영기 유출마저 막아내는 최상급 방어 진법. 허공에 떠 있는 연꽃과 같아서, 아무리 강한 공격이라도 허공으로 흘려보내 버리지. 이 진법이 깨졌다면 영월문 전체가 진동했을 테고, 이렇게 고요할 리 없지.”
    사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백련 선사님. 그래서 모두가 경악하는 것입니다. 어찌 진인께서 밀실 안에서 돌아가실 수 있었는지….”

    백련은 대답 없이 석문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마치 그림자를 밟듯 문을 가로질러 나아갔다. 놀랍게도 그의 몸은 석문과 진법을 아무런 저항 없이 통과했다. 사량과 장로들은 경악하며 입을 다물었다.
    “백련 선사님! 이건…!” 사량이 외치려 했으나, 백련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염려 마라. 나는 진법을 파괴한 것이 아니다. 그저 이 진법이 한때 ‘비어있던’ 흔적을 찾아 그 길을 잠시 빌렸을 뿐.”

    텅 빈 듯 고요한 수련실 내부. 중심에는 영기 방석에 앉은 채 미동도 않는 운파 진인의 시신이 있었다. 그의 표정은 평화로웠으나, 미간에는 희미한 주름이 잡혀 있었고, 온몸의 영맥(靈脈)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모든 영기를 한순간에 빨아먹힌 듯한 모습이었다. 주변에는 그 어떤 흐트러짐도 없었다. 심지어 향로의 연기마저 미동도 없이 굳어버린 듯했다. 완벽한 죽음의 밀실.

    백련은 시신에 다가가지 않고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의 발걸음은 마치 실 한 올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섬세하고 느렸다. 그의 시선은 수련실 벽면과 바닥에 새겨진 공간 유영진의 문양을 훑었다. 문양들은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며 진법의 건재함을 알리고 있었다.
    그때, 백련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수련실의 서쪽 벽면, 고대의 문양이 새겨진 돌기둥의 한 모퉁이였다.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손톱만큼도 안 될 아주 미세한, 거미줄처럼 옅은 균열이 있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손상이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예리한 칼이 공간 자체를 아주 잠시, 아주 미세하게 비틀어버린 흔적 같았다.

    백련은 그 균열에 손을 댔다. 주변 공기가 희미하게 떨렸다. 그의 눈이 다시 감겼고, 이번에는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외부에서는 감지할 수 없었던, 하지만 내부에서는 명확하게 느껴지는 이질적인 영기 파동이 그 미세한 균열을 중심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운파 진인의 영기와는 확연히 다른, 지극히 차갑고 날카로운 기운이었다.

    “역시….” 백련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량 제자. 저 균열은 언제부터 있었는가?” 그가 문밖의 사량에게 물었다.
    사량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이 수련실은 운파 진인께서 직접 주조하시고 진법을 새기신 곳이라, 감히 저희가 들여다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감히 단언하건대, 지난번 정기 점검 때까지는 아무런 균열도 없었습니다!”

    백련은 다시 벽의 균열에 집중했다. 그리고는 문득 고개를 들어 운파 진인의 시신을 응시했다. 시신은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으나, 백련의 눈에는 그 평화로운 표정 아래 숨겨진 절규가 보였다. 진인의 영기가 빨려 나간 방향… 그것은 벽면의 미세한 균열을 향하고 있었다.

    “사량 제자, 운파 진인의 공간 유영진은 무엇을 기반으로 작동하는가?” 백련이 물었다.
    “예? 그것은… 영월문의 근원 영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수한 영기를 끌어다 씁니다. 진인께서는 그것을 ‘공허의 실’이라 부르셨습니다. 실을 엮어 그물처럼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이 외부의 공격을 흐트러트리는 방식입니다.”
    “공허의 실… 그렇군.” 백련이 읊조렸다. “그렇다면, 이 ‘공허의 실’이 외부의 공격을 막아낼 뿐 아니라, 내부의 존재를 ‘흡수’할 수도 있을까?”
    사량은 경악했다. “그, 그럴 리가요! 그것은 방어 진법인데….”

    백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법이란 결국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해석될 뿐. 공허의 실이 외부의 영기를 흡수하여 소멸시킬 수 있다면, 역으로 내부의 영기 또한 흡수하여 소멸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핵심은, 누가 이 진법의 ‘명령’을 바꿨는가 하는 것이다.”

    백련은 다시 벽의 균열에 손을 얹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그의 손에서 빛나는 영기가 균열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내 수련실 전체가 미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벽면의 진법 문양들이 푸른빛으로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하더니, 그 빛이 진인 주변으로 모여들며 마치 투명한 영기의 밧줄이 풀리듯 흐트러졌다.

    “이것은…!” 사량과 장로들이 일제히 외쳤다.
    백련은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깊은 고뇌 끝에 해답을 찾은 자의 빛으로 가득했다.
    “범인은 이 공간 유영진의 원리를 완벽히 꿰뚫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운파 진인 본인과 함께 이 진법을 연구했던 자일지도 모르지.”
    그의 손끝에서 섬세한 영기 파동이 벽면의 균열에서부터 운파 진인의 시신으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흐름을 가리켰다.
    “이 진법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데 완벽했다. 범인은 굳이 침입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공허의 실’이 작동하는 방식, 즉 공간을 유영시켜 존재를 흐트러뜨리는 원리를 역이용했을 뿐.”

    백련은 잠시 숨을 고르더니, 낮은 목소리로 결론을 내렸다.
    “이 벽의 미세한 균열은 외부에서 영기를 주입하여, 운파 진인 본인이 활성화시킨 공간 유영진의 한 부분을 일시적으로 ‘뒤틀리게’ 만들었다. 마치 거대한 방어막에 아주 작은 구멍을 내는 것과 같지. 그리고 그 구멍을 통해, 외부에서 은밀하게 ‘소멸’의 명령을 주입했다.”
    “소멸의 명령…?” 사량이 되물었다.
    “그렇다. 외부의 공격을 허공으로 흘려보내 소멸시키는 것처럼, 진법의 방향을 뒤틀어 내부의 운파 진인 자신을 ‘소멸’시키도록 조종한 것이다. 운파 진인께서는 자신을 지키는 진법에 의해 모든 영기가 흡수되어 소멸되는 고통 속에서 절규하며 돌아가셨을 터. 시신의 영맥이 텅 비어버린 것이 그 증거다. 이 방은 밀실이었다. 하지만 살인자는 이 방 밖에 있었다.”

    백련은 서쪽 벽의 미세한 균열을 다시 가리켰다.
    “이 균열은 외부에서 영기를 주입할 때 순간적으로 발생한 공간의 왜곡이다. 비록 운파 진인의 진법이 강력하여 즉시 스스로 치유되었지만, 이 미세한 잔흔은 남았다. 범인이 사용한 영기는 일반적인 영월문의 영기가 아니었다. 지극히 차갑고, 모든 것을 지워버리려는 듯한… 그런 특이한 기운이 이 균열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자, 이제 이 특이한 영기를 가진 자가 누구인지 찾아 나설 차례다. 진법을 뒤트는 데 필요한 정교함과, 운파 진인의 진법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진 자. 그리고 이 살해 방식은, 단순한 살인을 넘어선 ‘파괴’의 의지가 담겨 있군. 운파 진인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 한 의지….”

    백련의 마지막 말이 수련실 안에 싸늘하게 울려 퍼졌다. 완벽한 밀실 살인의 트릭은 깨졌다. 하지만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은, 이제 막 수면 위로 떠오른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누가, 왜, 운파 진인을 자신의 보호막 속에서 소멸시켜 버린 것일까? 영월문에는 또 다른 어떤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인가. 백련의 고요한 눈빛 속에, 다음 난해한 진실을 추적하는 섬광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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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지된 시간의 파편

    **1화. 심연의 부름**

    칠흑 같은 심연. 그곳은 모든 소리가 질식하고, 모든 빛이 삼켜지는 무(無)의 공간이었다. 인류의 항해는 이제 막 그 미약한 돛을 펼치기 시작한 아기의 첫걸음과 같았지만, ‘카시오페아 호’는 그 모든 한계를 뛰어넘어 미지의 영역을 유영하고 있었다. 함선 내부는 쾌적한 백색광과 낮은 기계음으로 가득했지만, 창밖은 영원히 이어질 것 같은 공포스러운 어둠뿐이었다.

    항해사 류승민은 메인 콘솔 앞, 익숙한 자세로 홀로그램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반복되는 정례 브리핑, 예상 범위 내의 미약한 전자기 교란, 그리고 별것 아닌 소행성군의 데이터. 언제나처럼 지루한 임무가 계속될 터였다. 그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가볍게 패널을 훑었다.

    “이상 없음. 표준 항로 유지.” 그의 목소리는 나른하게 공기를 갈랐다.

    그때였다.
    평소와 다름없는 스크린 위, 아주 미세한 선 하나가 깜빡였다. 처음엔 그저 노이즈라고 생각했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는 예기치 않은 오류가 종종 발생하곤 했다. 하지만 선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희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류승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는 스크린을 확대하고, 다시 데이터 재검색을 명령했다.

    삐빅- 삐비빅-

    경고음이 울렸다. 작고 거슬리는 소리였지만, 이 고요한 심연 속에서는 마치 굉음처럼 들렸다. 류승민의 몸에 순간적인 긴장감이 흘렀다. 센서가 잡아낸 것은 단순한 노이즈가 아니었다. 거대한,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조용한’ 무언가가 카시오페아 호의 탐지 범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캡틴, 이상 신호 감지.” 그의 목소리에 나른함이 사라지고, 날카로운 직감이 묻어났다. “수치가… 이상합니다.”

    캡틴 이지안은 호출을 받자마자 함교로 들어섰다. 그녀의 걸음걸이는 언제나처럼 단정하고 힘이 있었지만, 류승민의 눈빛에서 읽어낸 비상함에 그녀의 표정도 굳어졌다. 뒤이어 부함장 박선우와 탐사대장 김현민이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 박선우는 말없이 류승민의 콘솔 화면을 응시했고, 김현민의 눈에는 이미 과학자 특유의 호기심이 가득했다.

    “자세히 보고해, 류 항해사.” 이지안 캡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네. 초장거리 탐지 센서가… 약 10만 킬로미터 전방에서 대규모의 질량체를 감지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질량체가 방출하는 에너지가 거의 없다는 겁니다. 흡사 블랙홀처럼 주변의 모든 에너지를 삼키는 듯한 특이한 패턴을 보입니다.” 류승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겁니다. 기존에 알려진 어떤 천체와도 다른 형태의 데이터입니다.”

    그가 스크린에 띄운 3D 모델링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거대한 질량체는 끊임없이 형상을 왜곡하는 것처럼 보였다. 육면체였다가, 오각형이 되고, 다시 한순간에 뫼비우스의 띠처럼 뒤틀렸다.

    “이게 뭔가? 센서 오류인가?” 박선우 부함장이 냉철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모든 센서 어레이가 동일한 정보를 보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컴퓨터는 이 데이터를 하나의 ‘물체’로 인식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자꾸만 ‘인식 불가’ 에러를 뿜어냅니다.” 류승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인식 불가라고?” 김현민이 흥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런 건 처음이야! 우리가 드디어 미지의 존재를 발견한 건가?” 그의 눈은 이미 번뜩이고 있었다.

    이지안 캡틴은 잠시 침묵했다. 미지의 존재. 그것은 인류의 오랜 꿈이자, 동시에 가장 끔찍한 악몽일 수도 있었다.
    “일단 탐사선 속도를 30%로 줄이고, 모든 시스템을 비상 대기 상태로 전환해. 박 부함장은 센서 데이터를 재확인하고, 김 대장은 탐사 준비를 서두르십시오. 일단 근접 관측이 우선이다.”

    캡틴의 명령에 따라 함선은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미지의 존재를 향한 느린 전진은 마치 거대한 어둠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함교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단순한 소리의 부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심연이 내뿜는 압도적인 존재감, 곧 맞닥뜨릴 진실에 대한 예고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몇 시간인지, 아니면 며칠 밤낮이었는지, 정확한 감각조차 사라진 듯했다. 어둠 속에서 마침내, 그것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캡틴, 시각 탐지 성공.” 류승민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카시오페아 호의 전면 스크린에 잡힌 영상은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것은 행성이 아니었다. 거대한 인공 구조물이었다. 아니, 인공이라는 단어조차 적절치 않았다. 그 형상은 어떤 문명도, 어떤 생명체도 만들어낼 수 없을 것 같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세상에….” 엔지니어 한아람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녀의 얼굴은 경외와 공포로 뒤섞여 있었다.
    의료담당 최유진은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뼈대가 드러난 듯했다. 검은색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색이라 규정할 수도 없는 심연의 색깔. 비정형의 거대한 덩어리. 거울처럼 빛을 반사하는 대신,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듯한 표면은 그 존재 자체로 주변 공간을 뒤틀어 놓는 것 같았다. 수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그 거대한 구조물은 어떤 규칙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직선과 곡선이 기괴하게 뒤섞이고, 상식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각도로 꺾여 있었다. 마치 차원 자체가 뒤틀려 응고된 잔해 같았다.

    “이건… 우리가 아는 물질이 아니야.” 박선우 부함장이 데이터를 분석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경직되어 있었다. “센서가 계속 오류를 냅니다. 표면 온도는 절대 영도에 가깝고, 내부 밀도는… 말도 안 되는 수치입니다.”

    그것은 회전하지도,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곳에, 영원히 멈춰 선 채로 존재했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고요함 속에서, 카시오페아 호의 승무원들은 그 압도적인 침묵의 무게에 짓눌렸다.

    “캡틴… 이 물체에서… 어떤 파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류승민이 갑자기 몸을 떨었다. “아니, 파장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건… 소리도, 빛도, 어떤 에너지도 아닙니다. 그냥… 존재 그 자체가… 저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습니다.”

    “류 항해사, 진정해.” 이지안 캡틴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 또한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도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가슴을 짓누르는 듯한 막연한 공포.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듯한 기시감.

    김현민은 이미 탐사선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보다 탐구심이 더 크게 드리워져 있었다.
    “캡틴, 저희가 근접 탐사를 진행해야 합니다. 저것은 인류의 지평을 바꿀 발견입니다!”

    “아니, 기다려.” 이지안 캡틴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스크린 속 기괴한 구조물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순간,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 *저것은 마치… 고대 신화 속 괴물들의 심장처럼 보이는군.*

    그때, 거대한 구조물의 표면에서 아주 미세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무수히 뒤틀린 면들 중 하나가 마치 눈꺼풀처럼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틈새는 절대적인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안에서 아주 미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이지안 캡틴은 똑똑히 보았다.

    “젠장…!” 한아람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 빛은 우리가 아는 어떤 빛과도 달랐다. 무지개색이었지만 동시에 모든 색을 부정하는 듯한, 인지할 수 없는 색채였다. 그것은 단순한 빛이 아니라, 정신을 직접 긁어내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카시오페아 호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비상등이 붉은색으로 깜빡이며 함교를 뒤덮는 순간, 류승민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몸을 비틀었다.

    “내 머릿속에…! 누군가… 누군가 내 머릿속에 들어왔어!”

    그의 절규와 함께, 스크린 속 거대한 구조물의 틈새가 활짝 열렸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이제 어떠한 여과도 없이 카시오페아 호를 집어삼켰다. 그 빛 속에서, 이지안 캡틴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오직 꿈에서나 존재할 법한 형상들이 어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문어의 촉수 같기도, 수십 개의 눈동자 같기도 한 형상들이 끊임없이 변형되며 그녀의 정신을 침범하는 듯했다.

    “모두 진정해! 제정신을 붙잡아!” 이지안 캡틴은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그녀의 목소리조차 비현실적인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때, 김현민 대장이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눈은 광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는 홀린 듯이 제어판에 손을 뻗어, 기어코 탐사선 발사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카시오페아 호의 격납고에서, 작은 탐사선 한 대가 굉음을 내며 미지의 존재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이지안 캡틴은 절망적인 눈으로 탐사선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귓가에, 수십만 년 전의 심연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듯한, 알 수 없는 언어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_그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었다._

  • 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화: 첫 만남은 언제나 최악이었다

    “아, 진짜 망할 커피 머신! 오늘따라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낡아빠진 에스프레소 머신을 퍽퍽 때리며 잔뜩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새벽부터 삐걱거리더니 기어코 손님에게 엉뚱한 라떼를 내보내고 말았다. 하필이면 매일 아침 정확히 8시 5분, 카푸치노를 마셔야만 직성이 풀리는 옆 건물 세무사 아저씨에게! 덕분에 그의 하얀 셔츠에는 거품 반, 우유 반의 예술적인 라떼 아트를 수놓고 말았다. 죄송하다는 말을 백 번은 한 것 같다.

    “하은 씨, 괜찮아요?”

    주방에서 갓 구운 스콘 냄새를 풍기며 나온 선배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괜찮을 리가. 오늘 아침부터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알람은 안 울리고, 출근길에는 똥 밟고, 겨우 도착한 카페에서는 머신이 사고 치고… 이게 다 무슨 조화야!

    “선배, 저 그냥 오늘 죽을 운명인가 봐요. 그냥 집에 가서 이불 뒤집어쓰고 웹툰이나 그릴래요….”

    내가 영혼 없이 중얼거렸다. 웹툰 작가를 꿈꾸며 휴학까지 했지만, 현실은 시궁창. 낡은 카페에서 최저 시급 받고 일하며, 밤에는 간신히 몇 컷 끄적이는 게 전부였다. *젠장, 재능은 있는데 시간이 없어. 시간만 있으면 내가 이 빌어먹을 현실 따위…!*

    “하은 씨, 힘내요! 퇴근하고 맥주 한잔할까요?”

    선배의 위로에도 내 기분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악!”

    “하은 씨!”

    몸을 돌리다 미처 보지 못한 물웅덩이에 발이 미끄러졌다. 균형을 잃고 뒤로 나자빠지려는 찰나, 눈앞에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낯선 이의 얼굴이 불쑥 나타났다.

    “…뭐야?”

    나를 잡아챈 손은 이상하리만큼 차가웠다. 마치 얼음장 같았다.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그와 마주 보았다. 그는 새까만 슈트 차림에 완벽하게 정돈된 머리칼, 그리고 새하얗게 질린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마치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듯 비현실적인 외모였다. 그리고 그의 눈. 무감정한 듯 차분했지만, 묘하게 붉은 기가 돌았다.

    그는 나를 바닥에 내팽개치듯 놓아주더니 팔짱을 끼고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훑어봤다.

    “이봐요, 사람 잡아 놓고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댁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요!”
    아니, 죽을 뻔한 건 내가 미끄러져서지만, 갑자기 나타나서 사람을 이리저리 던지는 건 또 뭐람?

    그는 내 말을 무시하더니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예정된 시간이 아닌데… 착오인가.”

    “예정된 시간? 무슨 소리예요? 혹시 저 스토커예요? 죄송한데 저 남자친구 있어요!”
    *없지만 일단 질러놓고 보자.*

    그는 내 허세 섞인 말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아니다. 잠시 착각했다. 당신은 아직 때가 아니다.”

    “때가 아니면 뭔데요! 아저씨 이상한 사람이에요? 경찰 부를까요?”
    나는 잔뜩 경계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미간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어라, 저 잘생긴 얼굴이 찌푸려지니 살짝 무서워지는데?*

    “아저씨? 나는 아저씨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당신의 때를 담당하는 자다.”

    “내 때를 담당해요? 내 뭘 담당하는데요? 카페 청소? 설마 진상 손님 담당은 아니겠죠?”

    내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묻자, 그는 한숨처럼 낮은 소리를 내뱉었다.

    “이봐요, 당신. 나는 당신의….”

    그가 말을 끝맺으려 할 때였다.

    “제하 씨! 여기였군! 어르신 놓치겠어!”

    갑자기 카페 문이 활짝 열리며 또 다른 새까만 슈트 차림의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그 역시 묘하게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는 나를 힐끗 보더니 아까 그 남자, 그러니까 ‘제하’ 씨를 다급하게 끌어당겼다.

    “어르신이 지금 저기 길 건너 병원 응급실로 가고 계신다니까? 늦으면 큰일 나! 신참이라 아직 멀었구만!”

    “하지만… 이 여자는.” 제하 씨가 나를 다시 쳐다봤다. 붉은 기가 돌던 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 여자는 나중에 처리해! 빨리 가자고!”

    “나중에 뭘 처리해요! 아저씨들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에요? 혹시 장기…!”

    내가 소리치기도 전에 두 사람은 순식간에 카페를 빠져나갔다. 마치 연기처럼 사라지는 모습에 나는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선배가 뒤늦게 달려와 내 어깨를 흔들었다.

    “하은 씨, 괜찮아요? 아까 그 사람들은 누구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몰라요….”

    나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카페 문이 닫힌 곳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비현실적인 남자와 그의 동료. 나중에 ‘처리’하겠다니. *무슨 소리야, 도대체?*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내가 미끄러졌던 물웅덩이 옆에 떨어져 있는, 반짝이는 검은색 명함 한 장. 얇고 단단한 종이 위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붓글씨체로 단 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저승.**

    나는 명함을 주워 들었다. 차가웠던 그의 손처럼, 명함도 섬뜩하리만치 차가웠다. 등골에 오싹한 한기가 스쳤다.

    *아까 그 남자, 김제하… 설마 진짜 이세계에서 온 사람인가? 아니, 그보다… 나중에 처리하겠다는 건 무슨 뜻인데?*

    오늘 하루가 끝날 때까지도, 그 명함과 김제하라는 남자의 얼굴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차가운 눈빛, 창백한 피부, 그리고 묘하게 붉던 눈동자. 그리고…

    *그에게서 풍기던, 세상에 없는 것 같은 서늘한 향기.*

    그날 밤, 나는 침대에 누워 뒤척였다. 이상하게도 아까 그 남자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고개를 저었지만, 가슴 한구석이 묘하게 간질거렸다.

    *설마… 내가 꿈에서 본 건 아니겠지?*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훨씬 일찍 카페에 도착했다. 불안한 마음에 어제 일을 확인하고 싶었다. 어제 그들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카페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저기요… 문은 아직 안 열었는데….”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어제 그 남자였다. 김제하.

    그는 어제와 똑같은 검은 슈트 차림으로, 손에는 장미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고,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쪽이… 저를 담당하시는 분이었죠?”

    그가 느릿하게 말했다. 내 머릿속은 새하얗게 변했다.
    *뭐라고? 담당?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들고 있던 장미를 내밀었다. 붉은 장미가 그의 창백한 손과 대비되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죄송하다. 어제 업무에 착오가 있었다. 당신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하지만 당신과 나는 엮여버렸다.”

    “엮여… 엮이다니요? 무슨 개똥 같은 소리예요!”

    그의 말에 나는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는 태연한 얼굴로 장미를 내 손에 쥐여주며, 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듯이 덤덤하게 말했다.

    “나는 저승사자 김제하. 오늘부터 당신의… 운명을 담당하게 됐다.”

    그의 말은 마치 차가운 강물처럼 내 심장을 휘감았다.
    *저승사자? 운명을 담당?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 이대로 죽는 거야?*
    내 눈앞이 아찔해졌다.

    “뭐… 뭐라고요?”

  • 스팀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내 이름은 류한. 이 도시의 수많은 마천루 중 하나에 불과한 낡은 아파트 1301호에 산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 하지만 내 방은 외부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벽에는 낡은 황동 기어들이 복잡하게 얽힌 장식용 시계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고, 책상 위에는 증기압으로 작동하는 자그마한 태엽 인형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제각기 다른 소리를 냈다. 공기 중에는 쇠 기름 냄새와 뜨거운 증기가 섞인 묘한 향이 늘 감돌았다. 이곳은 나의 연구실이자 은신처였다.

    오늘도 나는 늦은 밤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낡은 금속 안경 너머로 작은 태엽 부품들을 조립하는 내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교했다.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인 증기기관의 칙칙거리는 소리가 유일한 배경음악이었다. 창밖으로는 불야성을 이룬 현대 도시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과 끊임없이 움직이는 차량들의 불빛. 나와는 다른, 빠르고 차가운 세상.

    “거의 다 됐어, 아르키메데스.”

    나는 내 손바닥만 한 황동 올빼미 인형에 마지막 톱니바퀴를 끼워 넣으며 중얼거렸다. 아르키메데스는 내 오랜 친구이자, 가장 섬세하게 만든 작품 중 하나였다. 이 녀석의 눈동자에 작은 루비를 박아 넣으면, 주변의 습도와 기압을 감지해 날개를 펄럭이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딸깍!

    마지막 부품이 제자리에 안착하는 소리가 적막한 방에 울려 퍼졌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르키메데스를 작업대 한쪽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제 증기압을 공급해 줄 작은 파이프만 연결하면 완벽했다.

    그때였다.

    작업대 위, 아르키메데스 옆에 놓여 있던 낡은 금속 연필이 스르륵 미끄러지더니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둔탁한 소리가 밤의 정적을 갈랐다.

    “어이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허리를 숙였다. 피로가 쌓여 손이 미끄러졌거나, 아니면 진동 때문일 거라고. 13층 아파트의 오래된 건물 구조상 작은 진동은 늘 있는 일이었다. 금속 연필을 주워 다시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아르키메데스의 루비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 응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갸웃하는 듯한 움직임.

    “…음?”

    나는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걸까? 아르키메데스는 아직 증기 파이프를 연결하지 않아 움직일 리 없었다. 나는 무심결에 아르키메데스의 머리를 톡톡 건드려 보았다. 움직임은 없었다. 역시 피곤한 탓이겠지.

    다시 작업에 집중하려던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방 안의 보일러는 밤새도록 가동되어 실내 온도를 25도에 맞춰놓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느껴지는 한기는 마치 한겨울 새벽의 칼바람 같았다.

    후우욱-

    내 책상 위, 오래된 증기식 난로의 밸브가 갑자기 스르륵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난로의 압력계 바늘이 ‘위험’ 구간을 향해 빠르게 치솟았다.

    “젠장!”

    나는 황급히 난로 쪽으로 몸을 돌렸다. 난로의 밸브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서 손으로는 돌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런데 저절로 움직였다니? 나는 서둘러 밸브를 잠그려고 손을 뻗었다. 밸브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내 손가락이 닿기도 전에, 밸브는 다시 틱- 하고 원래 위치로 돌아왔다. 압력계의 바늘도 거짓말처럼 안정적인 구간으로 되돌아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는 멍하니 밸브를 바라보았다. 환각이었을까? 하지만 내 손끝에 남은 차가운 감촉은 너무나 생생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난로에서 미묘한 쇠 기름 냄새가 아니라, 비릿하고 알 수 없는 이질적인 냄새가 희미하게 풍겨왔다.

    “이게 무슨…”

    내가 중얼거리는 순간, 벽에 걸린 거대한 증기 시계의 추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멈췄다. 원래는 1분에 한 번, 정확하게 좌우로 흔들리며 시계추 특유의 묵직한 소리를 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소리도 없이, 마치 무언가에 붙잡힌 듯 정지해 있었다.

    나는 시계를 향해 걸어갔다. 시계는 나의 가장 큰 자랑거리였다. 수천 개의 톱니바퀴와 스프링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걸작. 이런 식으로 멈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손이 시계에 닿으려던 순간, 시계추가 휙! 하고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좌우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태엽이 끊어진 인형처럼. 삐걱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금속이 긁히는 듯한 불쾌한 소음으로 변했다. 시계의 모든 톱니바퀴가 갑자기 엇나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기어들이 제자리에서 튀어 오르고, 내부의 증기 파이프에서는 쉬이익- 하고 압력이 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압력계의 바늘이 다시 한번 ‘위험’ 구간을 넘어 ‘초과’ 구간까지 치솟았다. 빨간 경고등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안 돼! 터져!”

    나는 본능적으로 외치며 시계에서 멀어졌다. 만약 저 거대한 시계가 터진다면, 이 방은 물론이고 내 모든 소중한 기계들이 파괴될 것이다. 금속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고압의 증기가 뿜어져 나올 터였다.

    나는 진정하려고 애썼다. 이건 단순한 기계 고장이 아니었다. 분명,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시계의 경고등이 섬뜩하게 깜빡이는 가운데, 거실 한쪽에 세워둔 낡은 금속 마네킹이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내가 가장 아끼는 증기기관식 자율 작업 보조 인형이었다. 아직 미완성이라 평소에는 미동도 없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 텅 빈 철제 눈구멍이 정확히 나를 향해 있었다.

    끼이익… 끼이익…

    마네킹의 팔다리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내부에 보이지 않는 실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팔이 들리고, 다리가 미세하게 벌어졌다. 마치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괴로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움직임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팔다리가 휘청거리고, 철제 몸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 모든 움직임에는 아무런 동력 장치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낡은 금속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만이 가득했다.

    공포가 심장을 움켜쥐었다. 폴터가이스트. 어릴 적 읽었던 기괴한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하지만 이곳은 현대 도시의 아파트, 내 증기기관 연구실이었다. 이런 비과학적인 일이 일어날 리 없었다.

    “거기… 누구 있어?”

    목소리가 떨렸다. 방 안은 여전히 나 혼자였지만, 수십 개의 눈이 나를 노려보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들었다.

    그때, 나의 작업대 위, 조용히 놓여 있던 아르키메데스가 갑자기 파드득! 하고 날개를 펼쳤다. 증기 파이프는 연결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작은 황동 날개는 마치 살아있는 새처럼 격렬하게 퍼덕였다. 루비 눈동자에서는 섬뜩한 붉은 빛이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그리고 아르키메데스의 작은 부리가 벌어지더니, 금속이 갈리는 듯한 기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돌아… 가… 라…”

    기계적인 소리. 하지만 그 안에는 분명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의 모든 기계들이 미친 듯이 반응하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작은 기압계들이 제멋대로 바늘을 움직였다. 천장의 증기 파이프에서 갑자기 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뜨거운 증기가 아니라, 얼음처럼 차가운 안개였다. 안개는 바닥으로 깔리며 방 안을 뿌옇게 만들었다.

    안개 속에서,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작업대 위, 방금 전 주워 올렸던 금속 연필이었다. 연필이 공중에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종되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필은 내 가장 아끼는 스케치북 위로 다가갔다. 나는 온몸이 굳은 채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연필이 스케치북 위에 닿았다. 그리고는 거친 필체로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끼이익- 끼이익-

    쇠가 긁히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연필은 힘껏 종이를 긁어댔다.
    새겨진 글자는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낡은 고대 문헌에서나 보았을 법한, 이해할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문양들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선이 그어지는 순간, 스케치북 전체에서 차가운 푸른빛이 섬광처럼 터져 나왔다.
    동시에 내 뒤편, 거대한 증기 시계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파-앙!

    금속 파편과 함께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시계 내부의 모든 톱니바퀴들이 한순간에 멈춰 섰다. 마치 누군가 시간을 멈춘 것처럼.

    그리고 멈춰버린 시계의 압력계 바늘이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초과’ 구간을 넘어, 이제는 ‘파열’을 알리는 붉은색 최상단 지점까지.

    그때, 깨진 시계의 시계판에서 섬뜩한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어둠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유동하며, 방 안의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네… 시대는… 끝났다…”

    그것은 기계음이었다. 하지만 차갑고, 고통스러우며, 동시에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의 목소리였다. 내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 방, 나의 모든 것이 이 기괴한 존재의 놀이터가 된 것 같았다.

    어둠이 점점 더 시계판을 넘어 방 안 전체로 번져 나가고 있었다. 차가운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나는 더 이상 숨 쉴 수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눈앞의 광경은 비현실적이었다. 나의 증기기관들이, 나의 자랑스러운 작품들이, 나를 공격하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나의 세상이 이렇게 무너지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내 정신을 아득하게 만드는 섬뜩한 광경이 펼쳐졌다.

    어둠 속에서, 깨진 시계의 잔해 위로, 수많은 황동 기어들이 마치 살아있는 눈동자처럼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어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회전하는 순간, 방 안의 모든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완벽한 어둠 속에서, 나는 차가운 비명을 삼켜야 했다.
    나의 아파트, 나의 증기기관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이 기괴한 폴터가이스트.
    이제, 진짜 밤이 시작될 참이었다.

  • 대체 역사물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47화: 어둠을 찢는 비수

    대철제국의 심장, 황궁은 폭풍 전야의 고요를 가장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하늘 아래, 거대한 궁궐의 지붕들이 웅크린 짐승처럼 보였고,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는 불길한 징조처럼 황제의 불안한 마음을 흔들었다.

    용상에 앉아 있던 황제 이진은 옥안 가득 드리워진 그늘을 감추지 못했다. 보위에 오른 지 5년, 그를 지지하던 세력은 확고했고 민심은 겉보기에 평온했으나, 최근 궐내를 맴도는 불길한 소문들은 그 평온을 갉아먹고 있었다. ‘흑야회(黑夜會)’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집단이 황실과 조정의 부패를 낱낱이 파헤치며 백성들의 마음을 선동하고 있었다.

    “폐하, 김상서가 결국 사가에 연금되고 말았습니다. 흑야회 놈들이 내놓은 증거들이 너무나 명백하여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었습니다.”

    총애하던 내관, 최득영이 조심스럽게 고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경외심마저 서려 있었다. 김상서, 조정의 주요 요직을 차지하며 이진 황제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던 인물이었다. 그가 오랜 세월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고 뇌물을 수수하며 축재한 비리들이 흑야회에 의해 낱낱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장부를 조작하고 은밀한 거래를 성사시켰던 그의 수법은 정교했고, 그것을 파헤친 흑야회의 수단은 더욱 정교했다.

    이진의 손아귀에 들린 옥잔이 미세하게 떨렸다. 김상서는 단순한 충신이 아니었다. 5년 전, 이진이 아직 태자였을 때, 북융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며 백성들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대책사 이형우를 역모로 몰아 제거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이진은 김상서의 죄가 드러나는 순간, 마치 자신의 과거가 들통나는 듯한 섬뜩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 흑야회라는 것들은 대체 어떤 자들인가?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조정의 근간을 흔들고 있거늘, 아직도 그 수괴조차 파악하지 못했단 말이냐!”

    이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심연처럼 번득였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놈들은 물증만 남기고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마치… 이형우가 살아 돌아온 듯한 치밀함입니다.”

    최득영의 말에 이진의 미간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이형우. 그 이름은 이진의 기억 속에서 망령처럼 떠돌았다. 수년 전, 북융과의 전쟁에서 기적과 같은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진의 시기심과 권력욕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허망하게 사라져간 천재 책사.

    _형우… 설마 네가 살아있을 리 없어. 너는 분명 죽었어. 내 손으로 직접, 네 목숨을 거두었단 말이다._

    이진은 눈을 감았다. 뜨거운 전장의 먼지 속에서, 피로 물든 갑옷을 입고 칼날처럼 빛나는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던 이형우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곧이어 그의 죽음을 선포하는 칙령에 찍힌 붉은 옥새의 기억이 스쳤다. 그는 과거의 망령을 쫓아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허황된 생각이었다.

    ***

    한편,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한적한 기와집에서는 달빛 아래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모습은 영락없는 고요한 선비였으나, 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강물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사내의 옆에는 단단한 체격의 중년 무사가 정좌해 있었다.

    “김상서의 몰락은 예상했던 바입니다, 유성님. 황제는 이제 그의 뿌리부터 흔들리는 것을 체감할 것입니다.”

    중년 무사, ‘매화’라 불리는 사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에는 충직함과 함께 오랜 세월 겪어낸 고통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사내, 유성(流星)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으나, 희미하게 비치는 달빛 아래 그의 입꼬리가 냉소적으로 휘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매화. 저들은 내가 심어놓은 작은 가시 하나에 불과해. 진짜 고통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유성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속에는 끓어오르는 용암 같은 증오와 서늘한 복수심이 담겨 있었다.

    “황제는 분명 그의 충복들을 시켜 우리를 쫓을 것입니다. 백장군(白將軍)이 움직인다면, 우리의 움직임도 더 은밀해져야 합니다.”

    매화의 말에 유성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백장군. 5년 전, 이형우의 옛 동료이자 친구였으나, 황제의 명에 따라 이형우를 추포하려 했던 인물이었다. 그 또한 이진의 충실한 개였다.

    “그래. 백장군… 그 또한 제 손으로 처리해야 할 업보 중 하나지. 하지만 그전에, 이진은 더 많은 것을 잃어야 한다. 그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듯이, 나 또한 그의 모든 것을 부숴버릴 것이다.”

    유성의 시선은 멀리 황궁을 향하고 있었다. 그의 뇌리에는 불타오르던 자신의 집과, 싸늘하게 식어버린 가족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모든 비극의 중심에 서 있던 옛 친구, 태자 이진의 비릿한 미소가 아른거렸다. 그는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억누르듯 주먹을 꽉 쥐었다. 피와 고통으로 점철된 5년의 세월, 오직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다.

    ***

    이진 황제는 결국 그의 가장 믿음직한 군부의 수장, 백장군을 불렀다.

    “백장군. 흑야회라는 이 요망한 것들을 뿌리 뽑으시오. 그리고 그 배후에 누가 있는지 기필코 알아내어, 그 목을 내게 가져오시오!”

    이진의 명령에 백장군은 굳건한 태도로 답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소신, 폐하의 명에 따라 이 땅에 발붙일 곳이 없도록 철저히 소탕할 것이옵니다.”

    백장군은 즉시 움직였다. 흑야회가 남긴 흔적을 쫓아 철저한 조사를 진행했다. 김상서의 비리 장부를 찾아낸 곳, 흑야회가 숨어들었다는 소문이 돌았던 빈 창고, 그리고 그들이 백성들에게 뿌린 격문들까지 샅샅이 뒤졌다.

    며칠 밤낮을 새워가며 조사를 진행하던 백장군과 그의 부하들은, 김상서의 비리 장부가 발견되었던 창고의 바닥에서 굳게 박힌 돌 틈 사이로 작은 종잇조각 하나를 찾아냈다. 누군가 급하게 숨긴 듯한, 하지만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남겨진 흔적이었다.

    종잇조각은 오래되어 낡았지만, 그 위에 그려진 문양은 선명했다. 백장군은 그 문양을 보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운 전율을 느꼈다. 그것은 화려한 꽃잎들이 흩날리는 매화가 아니었다. 짓밟히고 찢겨, 피와 흙으로 얼룩진 듯한, 산산이 조각난 매화 한 송이였다.

    그 매화는… 죽은 이형우 대책사의 인장 문양이었다.

    백장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종잇조각을 움켜쥐었다. 5년 전, 그는 이형우의 시신을 확인하지 못했다. 명백한 유골은 없었고, 단지 불에 탄 흔적만이 그의 죽음을 증명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의 직감은 늘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외치고 있었다.

    _설마… 설마 그자가…_

    백장군은 황급히 종잇조각을 품에 넣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그의 심장은 북처럼 울렸고, 뇌리에는 단 한 가지 생각만이 맴돌았다.

    “폐하! 폐하! 큰일났습니다!”

    백장군의 다급한 외침이 황궁의 적막을 깨트렸다. 이진 황제는 침전에서 그의 보고를 들었다. 백장군이 건넨 낡은 종잇조각 위, 산산조각 난 매화 문양을 본 순간, 이진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그의 눈동자가 광기 어린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_이형우… 네놈이… 살아 있었단 말인가!_

    그의 머릿속에서 섬광처럼 번개가 쳤다. 흑야회의 치밀한 계획, 김상서의 몰락을 유도한 교묘한 수법, 그리고 이제 눈앞에 나타난 그의 상징. 이 모든 것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그림처럼 연결되기 시작했다.

    황제 이진의 심장은 얼음송곳으로 꿰뚫린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였다고 확신했던 망령이, 5년 만에 피와 증오를 머금고 돌아왔음을 직감했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복수의 칼날은, 이제 막 그 첫 희생자를 갈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칼날은 이진 황제의 목덜미를 향해 섬뜩한 예고편을 보내고 있었다.

  • 좀비 아포칼립스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무한한 어둠 속에서 ‘아레스 III호’는 한 점 빛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빛조차 집어삼킬 듯한 심연의 일부였다. 은하계 가장자리의, 인류의 탐사선이 채 도달하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 지구 시간으로 3년, 왕복 6년이라는 임무는 승무원들의 정신을 서서히 마모시키고 있었다. 드넓은 우주 공간에서 유일한 인류의 흔적은 아레스 III호, 그리고 그 안의 여섯 명의 선원들뿐이었다.

    정적과 기계음만이 공존하는 함교. 이하윤 함장은 깊은 우주를 가로지르는 창밖의 풍경을 말없이 응시했다. 수억 개의 별들이 희미한 점으로 박혀 있는 그 풍경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섬뜩할 만큼 고독했다. 그녀는 손목에 찬 구형 단말기를 힐끗 보았다. 앞으로 3년. 지루하고도 아득한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정적을 깨고 관제실의 경고음이 울린 것은.
    “함장님! 알 수 없는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박선우 부함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이하윤은 즉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선우는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는 인물이었기에, 그의 목소리에 담긴 긴장감은 더욱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자세한 내용은?” 이하윤이 짧게 물었다.
    “기존 데이터와 일치하는 바가 없습니다. 에너지 반응이 극도로 높고, 물리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파편이나 소행성은 아닙니다. 너무나… 완벽한 형태로 접근 중입니다.”
    선우의 말에 최지훈 수석 과학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소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지훈이었지만, 그의 눈은 호기심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함장님, 좌표를 보여주십시오. 제가 직접 분석하겠습니다.”
    함교 중앙 홀로그램 스크린에 미지의 물체가 투영되었다. 처음에는 흐릿한 점에 불과했지만, 줌 인 될수록 그 실체가 드러났다.
    “이건…” 이하윤의 미간이 좁혀졌다.
    “인공물입니다. 그것도 엄청나게 거대한.” 지훈이 숨을 헐떡였다. “지름이 최소 수십 킬로미터에 달합니다. 표면은 칠흑 같지만, 미세하게 파동치는 듯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 같기도, 혹은 아주 오래된 고대의 유적 같기도 합니다.”
    화면 속의 물체는 완벽한 구형이었다. 어떤 우주선이나 정거장과는 달랐다. 차가운 금속 같으면서도, 동시에 생명력을 품고 있는 듯한 기이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인류가 발견한 최초의 외계 문명 유물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우주의 지성체들이 남긴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지훈의 목소리가 들떴다.
    “섣부른 판단은 금지입니다, 박사.” 이하윤이 차분하게 제지했다. “박선우 부함장, 항로 재조정. 해당 좌표로 최대한 접근. 김민준 기관장, 모든 시스템 점검하고 비상 대기.”
    “알겠습니다, 함장님!” 민준이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의 손은 이미 조종간 위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레스 III호가 거대한 유물에 다가갈수록,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구형의 유물은 우주의 심연 속에서 홀로 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빛은 차갑고도 신비로웠다.
    “함장님, 유물에서 약한 에너지 파장이 감지됩니다.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박선우가 보고했다.
    “그럼 뭘 하려는 거지?” 이하윤이 중얼거렸다.
    “확인해 봐야 합니다!” 최지훈 박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탐사선 ‘헤르메스’를 보내겠습니다. 직접 샘플을 채취하고 데이터를 수집해야 합니다!”
    이하윤은 잠시 망설였다. 미지의 위험에 대한 본능적인 경고음이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인류가 미지의 영역에서 마주한 첫 번째 외계 문명의 흔적일 수도 있었다.
    “좋아. 탐사선 발사 준비. 하지만 유물에 너무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어떤 식으로든 직접적인 접촉은 금지합니다.”
    “예! 함장님!” 지훈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외쳤다.

    소형 탐사선 ‘헤르메스’가 아레스 III호의 격납고를 떠나 조용히 우주로 나아갔다. 조종은 베테랑 조종사 이진우가 맡았다. 그는 능숙하게 헤르메스를 유물 표면 가까이로 유도했다.
    “함장님, 헤르메스, 유물 표면 500미터 지점 도달.” 진우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침착했다.
    홀로그램 스크린에 유물 표면이 확대되어 나타났다. 칠흑 같은 표면은 마치 살아있는 피부처럼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듯했다. 자세히 보니, 표면에는 복잡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언어인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샘플 채취 로봇 팔 작동.” 진우가 보고했다.
    헤르메스의 로봇 팔이 조심스럽게 뻗어나갔다. 유물과의 거리가 점점 좁혀졌다. 100미터, 50미터…
    그때였다.
    “젠장! 함장님! 알 수 없는 파장이 탐사선을 덮치고 있습니다! 모든 시스템이 먹통이 되고 있습니다!”
    진우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났다. 스크린 속 헤르메스 주변에 푸른빛의 파동이 일렁였다.
    “진우 조종사! 무슨 일이야! 응답해!” 이하윤이 소리쳤다.
    “조… 조종이 안 됩니다! 헤르메스가… 빨려 들어갑니다!” 진우의 비명.
    헤르메스는 마치 거대한 자석에 이끌린 쇠붙이처럼 유물 표면으로 강하게 끌려갔다.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탐사선은 유물의 표면에 달라붙고 말았다. 통신이 완전히 끊겼다.
    “젠장! 헤르메스를 회수하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하윤이 소리쳤다.

    아레스 III호의 거대한 로봇 팔이 헤르메스를 향해 뻗어나갔다. 유물이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 때문에 쉽지 않았지만, 숙련된 김민준 기관장의 조작으로 겨우 헤르메스를 아레스 III호 격납고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다.
    격납고 문이 열리고, 이진우 조종사는 좌석에 축 늘어진 채 발견되었다. 그는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의료팀! 긴급 후송!” 이하윤이 명령했다.
    정혜진 의료팀장이 직접 진우를 의료실로 옮겼다. 그녀는 진우의 상태를 확인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함장님, 이진우 씨의 활력 징후가 불안정합니다. 열이 40도 이상이고, 피부에 이상한 반점들이 빠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뇌 활동도 비정상적입니다. 마치… 무엇인가가 급속도로 증식하는 것 같습니다.”
    지훈 박사가 의료실로 달려왔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불안감도 섞여 있었다.
    “유물에서 방출된 에너지가… 탐사선 뿐만 아니라, 이진우 조종사에게도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일종의 생체 에너지 간섭일지도 모릅니다.”
    “생체 에너지 간섭? 구체적으로 뭘 뜻하는 겁니까?” 이하윤이 날카롭게 물었다.
    “아직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반점들… 마치 세포 단위에서부터 변형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진우는 의료용 침대 위에서 계속해서 신음했다. 몸을 뒤틀고,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번쩍 떠졌다.
    정혜진이 놀라 뒷걸음질 쳤다. 진우의 홍채는 탁하게 변색되어 있었고, 핏발이 가득했다. 그의 시선은 텅 비어 있었다.
    “이진우 씨? 정신 차리세요!” 혜진이 조심스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진우의 고개가 느릿하게 혜진을 향했다. 그의 입에서 낮고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으으으… 배고파… 먹고 싶어…”
    그의 손이 느릿하게 혜진의 목을 향해 뻗어왔다. 혜진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몸을 뒤로 뺐지만, 진우의 움직임은 의외로 빨랐다. 강철 같은 손아귀가 혜진의 목을 움켜쥐었다.
    “크윽!” 혜진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젠장! 이진우 조종사! 뭐 하는 짓이야!”
    소란을 듣고 달려온 김민준 기관사가 진우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진우의 팔을 잡아 떼어내려 했지만, 진우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민준의 노련한 완력에도 진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친 숨을 내쉬며 민준을 노려봤다.
    “물러서, 민준! 저건 더 이상 이진우가 아니야!”
    이하윤 함장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들었다. 그녀의 손은 미세하게 떨렸지만,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진우는 이제 완전히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네 발로 기어다니기 시작했다. 그의 움직임은 기괴하고 비틀거렸지만, 짐승처럼 빠르게 혜진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의 입가에는 거품이 맺혔다.
    “피… 피가 필요해…”
    “정혜진 박사! 어서 피해요!” 이하윤이 외치며 방아쇠를 당겼다.
    섬광과 함께 충격음이 의료실을 뒤흔들었다. 진우의 어깨에 총알이 박혔지만, 그는 잠시 움찔할 뿐,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계속 달려들었다.
    “이건… 이건 단순한 병이 아니에요!” 혜진의 절규.
    그때, 함교에서 또 다른 경고음이 울렸다.
    “함장님! 의료실 내부 통신이 끊겼습니다! 그리고… 의료실 격벽 일부에 이상한 부식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박선우의 다급한 목소리가 통신망을 뚫고 들려왔다.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의료실 격벽의 일부가 검게 변하며 녹아내리는 모습이 나타났다. 마치 유물 표면의 문양처럼 기괴한 형태로 부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하윤의 얼굴에 절망과 함께 차가운 결의가 교차했다. 그녀는 진우를 노려보며 낮게 읊조렸다.
    “젠장… 우리가 뭘 건드린 거지?”
    박선우가 핏기 없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함장님… 혹시… 저 유물이… 씨앗이 아닐까요? 이 우주를 집어삼키려는… 악몽의 씨앗이…”
    아레스 III호는 미지의 유물 앞에서, 그리고 이제는 우주선 내부에서 피어난 새로운 공포 앞에서 침묵했다. 그 침묵은 다가올 비극을 예고하는 전주곡과도 같았다.

  • 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 덧문 너머의 속삭임

    도시의 심장은 밤에도 잠들지 않았다. 스물네 시간 내내 쿵쾅거리는 소음과 빛의 향연 속에서, 고층 아파트 숲은 고독한 섬처럼 우뚝 서 있었다. 민준은 그 섬 중에서도 가장 흔한, 17층의 작은 보금자리에서 지친 몸을 뉘었다. 막 퇴근하고 샤워를 마친 참이었다. 축축한 머리칼을 대충 수건으로 비벼 말리며 식탁 위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일찍 자야지, 다짐했지만, 손가락은 이미 무의식적으로 화면을 스크롤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흐음?”

    작은 소리였다. 아주 작고 희미한, 마치 멀리서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소리. 거실 구석, 창문으로 향하는 블라인드가 덧문처럼 닫혀 있는 곳에서 들려왔다. 민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옆집에서 넘어오는 소리인가? 아니면 윗집? 층간소음은 아니지만, 뭐… 도시란 원래 이런 잡음으로 가득 찬 곳이니.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지만 불과 몇 초 뒤, 그 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이번엔 조금 더 선명하게, 마치 덧문 너머에서 무언가가 긁히는 듯한 신경질적인 소음과 함께.

    “뭐야, 설마 바람 소리인가?”

    민준은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에어컨은 꺼져 있었고,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다. 방충망 틈새로 바람이 새어 들어온다고 해도 저런 소리가 날 리 없었다. 그는 덧문으로 다가가 손을 뻗었다. 회색빛을 띤 덧문의 표면은 매끈했고, 아무런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 덧문을 툭툭 두드려 보았다. 텅 빈 소리만 울릴 뿐, 아무 반응도 없었다.

    “내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이 들리나.”

    피식 웃으며 도로 침대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몸을 돌리는 순간, 등 뒤에서 또다시 ‘슥- 사악’하는 마찰음이 들렸다. 이번엔 아까보다 훨씬 가까웠다. 마치 누군가 손톱으로 덧문을 천천히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였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민준은 숨을 멈추고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등골을 타고 차가운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분명 아무도 없는데. 혼자 사는 이 아파트에,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누구… 없어요?”

    식은땀이 흘렀다. 어둠에 잠긴 거실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낮에는 그저 편안한 공간이었던 곳이, 밤이 되자 알 수 없는 위협을 품고 있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덧문을 응시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조차 드리워지지 않은 완벽한 정적.

    “장난치지 마.”

    민준은 애써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하지만 떨리는 그의 목소리는 그 자신이 느끼기에도 너무나 약했다. 그때, 그의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닫혀 있던 덧문의 가장자리, 손잡이 반대편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마치 안에서 누군가 문을 비트는 것처럼, 단단히 고정된 나무판이 불가능하게 비틀리는 듯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아주 옅은 푸른빛. 섬광처럼 번쩍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먼지 입자가 가득한 공간에 빛이 스며드는 것처럼, 서서히, 불안하게.

    민준은 뒷걸음질 쳤다. 말문이 막혔다. 저건 환각일 리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덧문의 비틀림이 점차 강해졌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그의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콰앙!

    굉음과 함께 덧문이 안쪽으로 거칠게 밀려 열렸다. 아니, 밀려 열렸다는 표현보다는, 마치 내부에서 강력한 힘이 폭발하듯 찢겨져 나갔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덧문은 경첩이 부러진 채 바닥에 곤두박질쳤고, 그 뒤에 있던 창문이 온전히 드러났다.

    밤이었다. 창밖은 여전히 도시의 불빛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그 불빛들 너머, 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무언가가 번뜩였다. 하늘에서 드리워진 것인지, 아니면 땅에서 솟아오른 것인지 알 수 없는 거대한 빛의 기둥이 수직으로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단순한 도시의 조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에너지 덩어리처럼 거대한 용오름을 그리며 하늘을 찢고 있었다.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그 광경은 마치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린 듯 비현실적이었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의 시선은 그 거대한 빛의 기둥에 꽂혀 있었다. 그의 아파트 17층에서 그 모든 광경이 너무나 선명하게 보였다. 저것은… 대체 무엇인가?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비현실적인 재앙의 전조인가?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다시금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고, 명확했다.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짚은 듯한 생생한 감각.

    “안녕.”

    귓가에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 차갑고, 음산하고, 무엇보다 너무나 가까웠다. 너무나 명확하게 사람의 목소리였다. 민준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 무언가가 걸린 듯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감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그 존재의 손길이 점점 더 차갑고 무겁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차가운 손길이 그의 어깨를 지나, 그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드디어, 찾았다.”

    속삭임은 더 이상 인간의 언어가 아닌 듯했다. 수천 개의 목소리가 동시에 겹쳐진 듯한, 이해할 수 없는 울림이 그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민준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거대한 빛의 기둥이 시야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돌아갈 시간이야.”

    그와 동시에 민준의 몸은 바닥에서부터 서서히 떠올랐다. 중력이 사라진 듯, 그의 몸은 창문 밖으로 향하는 듯했다. 그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무언가를 잡으려 했지만,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고대어가 웅웅거리는 듯했고, 그의 눈에 보이는 아파트 내부의 풍경은 마치 물에 잉크가 번지듯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꿈이 아니었다.
    이것은 장난도 아니었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일은, 이 도시의 밤하늘을 찢는 거대한 힘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제 막 시작이라는 것을.

    그의 아파트 17층, 찢겨진 덧문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춤추는 가운데, 민준의 몸은 점점 더 허공으로 빨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