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가상현실 게임 (VRMMO) 독립적인 단편 소설

    어둠이 지배하는 이세계에서, 빛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탐험가 류진에게 등불의 불꽃은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길을 밝히는 유일한 친구였다. 류진은 낡은 양피지 지도를 등불에 비춰 들었다. 세월의 흔적으로 바싹 마른 양피지는 찢어질 듯 위태로웠지만, 한가운데 새겨진 문양 하나만큼은 섬뜩하리만치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봐, 세라. 여기야.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곳.”

    류진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그림자 추적자 세라가 그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짙은 밤색 눈은 어둠 속에서도 날카롭게 빛났다.

    “확실해? 또 자네의 망상병이 도진 건 아니고?” 세라가 비죽거렸다. 그녀의 말투는 언제나 시니컬했지만, 그 속에는 류진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담겨 있었다.

    “망상병이라니! 이건 명백한 증거라고. ‘메아리치는 심연’으로 향하는 입구. 고대 아르카디아 문명이 남긴 유일한 기록에 언급된, 잊혀진 자들의 영원한 안식처.”

    류진은 지도를 접어 가죽 주머니에 넣고는 낡은 곡괭이를 어깨에 멨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망각의 뼈대’라 불리는 거대한 산맥의 깊은 골짜기였다. 차가운 바람이 뼈를 에는 듯 불어왔지만, 류진의 눈은 흔들림 없이 빛나고 있었다.

    “안식처? 아군인지 적군인지도 모르는 놈들의 안식처에 왜 우리가 목숨 걸고 가야 하는데?” 세라가 팔짱을 끼며 물었다.

    “세라, 탐험은 말이야. 단순히 싸워서 강해지는 것만이 아니야. 미지의 진실을 파헤치고, 잊혀진 역사의 조각을 맞추는 것. 그게 바로 진정한 탐험가의 길이지.”

    류진은 바위에 새겨진 희미한 문양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오랜 풍파에 마모되어 거의 알아보기 힘든 문양이었다.

    “거창한 소리 마시고, 보물이나 많이 나왔으면 좋겠네. 자네의 ‘진실’은 언제나 배를 채워주진 않더군.”

    세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류진이 환호성을 질렀다.

    “찾았다! 여기야! 지도의 문양이 가리키는 곳!”

    그의 손이 닿은 바위 틈에서 희미한 마법진의 빛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류진은 재빨리 곡괭이를 휘둘러 바위 틈을 넓혔다. 거친 바위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자, 그 아래에서 거대한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땅이 입을 벌린 듯한 기괴한 형상이었다.

    “진짜였어….” 세라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스쳤다.

    통로 안에서는 축축하고 비릿한 흙냄새가 올라왔다. 류진은 망설임 없이 등불을 들고 발을 내디뎠다.

    “준비됐지? 메아리치는 심연이 우리를 부르고 있어.”

    동굴은 예상보다 훨씬 깊고 복잡했다. 류진은 고고학자 특유의 예리한 시선으로 벽면을 훑으며 나아갔다. 세라는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그녀의 발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벽면의 재질이… 심상치 않아. 단순한 돌이 아니야.” 류진이 손전등으로 벽을 비췄다. “고대 아르카디아 기술이 집약된 특수 합금인가? 하지만 이런 거대한 규모로 만들었다고?”

    벽면에는 오래된 벽화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들은 고대인들이 숭배하던 거대한 존재와, 그들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모습들을 담고 있었다.

    “저게 뭔데? 거대한 지렁이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하고….” 세라가 벽화를 가리켰다.

    “아니. 저건… 별들의 길을 나타내는 상징이야. 고대인들은 별에서 온 존재들을 숭배했지. 아니면… 그들 자신이 별에서 왔거나.” 류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벽화를 자세히 살폈다.

    더 깊이 들어가자, 통로는 점차 넓어지며 웅장한 공간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홀이었다. 홀의 천장은 너무 높아 등불 빛도 닿지 않았다. 바닥에는 검은 물이 고여 있었고, 그 위로는 기묘한 부유물들이 떠다니며 희미하게 빛났다.

    “젠장, 냄새가… 이건 썩은 물 냄새가 아니야. 뭔가 인공적인 악취야.” 세라가 코를 막았다.

    “이봐, 세라. 저기 봐.”

    류진의 손전등이 한쪽 구석을 비췄다. 그곳에는 기괴한 형태의 기계 장치가 놓여 있었다. 넝쿨과 이끼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 거대한 규모와 복잡한 구조는 여전히 압도적이었다. 기계 장치의 중앙에는 수정 구슬 같은 것이 박혀 있었는데, 미약하지만 규칙적인 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건… 발전 장치인가? 아니면…” 류진은 기계 장치 주변을 맴돌며 분석했다. 그의 탐험가 스킬 ‘유물 감정’이 발동하자, 기계 장치의 정보가 파노라마처럼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찾았다! ‘시간의 파수꾼’… 이 기계는 시간을 기록하고, 특정 시점을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아.”

    “시간을 고정시킨다고? 그게 뭔데?” 세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은 모르겠어.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메아리치는 심연’이라는 이름과 연결되어 있을 거야. 아마도… 이 장치는 어떤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고, 그 메아리를 영원히 울리도록 설계된 건지도 몰라.”

    류진은 기계 장치의 옆면을 따라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닿은 곳에서 벽면이 갈라지듯 열리며,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 안에는 고대 아르카디아 문자로 쓰인 석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게… 뭘까?” 세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류진은 석판을 조심스럽게 꺼내 등불에 비춰 들었다. 그의 ‘고대 문자 해독’ 스킬이 석판의 글자들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놀랍군… 이건… 고대 아르카디아인들의 마지막 기록이야.” 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석판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었다. 고대 아르카디아인들은 단순히 별을 숭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별의 씨앗’이라 불리는 거대한 생명체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 심연 아래에서 별의 씨앗을 이용해 시간을 조작하고, 새로운 우주를 창조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별의 씨앗은 통제 불능이 되었고, 그것은 모든 것을 삼키는 ‘공허’가 되어버렸다.

    ‘우리는 우리의 오만을 봉인하기 위해 이곳을 지었다. 별의 씨앗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히 잠들어 있어야 한다. 만약 그것이 깨어난다면, 모든 시간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이다. 이 심연은 우리의 무덤이자, 우주를 위한 마지막 방패이다.’

    석판의 마지막 문단이었다.

    “공허… 시간의 방패… 그럼 이 기계는… 그 공허를 영원히 잠재우기 위한 장치였다는 거야?” 세라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깃들었다.

    “그래. 이 심연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어. 거대한 재앙을 봉인하기 위한 감옥이자… 동시에 그 재앙을 기록하는 장치였던 거야.” 류진은 석판을 든 채 눈을 감았다. 고대인들의 절박함과 오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그때, 거대한 홀의 검은 물 속에서 기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투명한 부유물들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며 불길한 징조를 드러냈다. 바닥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류진! 뭔가 오는 것 같아!” 세라가 재빨리 단검을 뽑아 자세를 취했다.

    검은 물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그것은 형체가 없었다. 마치 어둠 그 자체가 응축된 듯한,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존재였다. 마치 석판에 적힌 ‘공허’가 깨어난 것만 같았다.

    “이럴 수가… 깨어난 건가? 시간의 파수꾼이 약해진 건가?” 류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공허’는 홀의 중앙에 솟아올라 있었다. 그것은 천장을 뚫고 나갈 기세로 솟구쳤고,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의 모든 존재감을 압도하는 듯했다. 마치 우주의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처럼, 기계 장치의 수정 구슬은 더욱 빠르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젠장! 저것과 싸우라고? 저건… 차원이 다른 존재잖아!” 세라가 주춤했다.

    류진은 석판을 급히 다시 기계 장치 옆면에 끼워 넣었다. 그러자 기계 장치의 수정 구슬이 붉은색으로 변하며 폭주하듯이 빛났다. 강력한 마력이 홀 전체를 뒤흔들었다.

    “이 장치는… 공허를 봉인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기도 해! 고대인들은 이곳을 파괴되지 않도록 만들었고, 누군가 발견하면 다시 봉인할 수 있도록 장치를 남겨둔 거야!”

    류진은 기계 장치에 손을 얹고 자신의 모든 마력을 쏟아부었다. 그의 몸에서 푸른빛의 오라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그가 기계 장치와 하나가 된 듯한 모습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봉인한다! 과거는 과거로, 미래는 미래로!” 류진이 외쳤다.

    그의 외침과 함께, 기계 장치의 붉은빛이 ‘공허’를 향해 뿜어져 나갔다. ‘공허’는 고통스러운 듯 일렁였다. 공간이 뒤틀리고, 시간의 흐름이 교란되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홀을 지배했다.

    세라는 주저하지 않고 그림자 은신 스킬을 사용해 ‘공허’의 측면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단검은 ‘공허’의 불확실한 형태를 꿰뚫으려 했지만, 칼날은 허공을 가르는 듯 아무런 저항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의 공격은 ‘공허’의 움직임을 미약하게나마 방해했다. 그 틈을 타 류진은 모든 힘을 끌어모아 장치를 작동시켰다.

    “봉인하라! 영원히 잠들어라!”

    기계 장치의 붉은빛이 정점에 달했고, ‘공허’를 마치 거대한 끈으로 묶는 듯이 감싸기 시작했다. ‘공허’는 저항했지만, 빛의 끈은 더욱 단단히 조여들었다. 결국, 홀 전체를 뒤흔들던 ‘공허’는 점차 수축하기 시작했다. 검은 물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으며, 다시금 형체 없는 어둠이 되었다.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홀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기계 장치의 수정 구슬은 다시금 미약한 푸른빛을 깜빡였다.

    류진은 기진맥진한 듯 벽에 기댔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흥건했다.

    “하아… 하아… 성공했어….”

    세라는 은신을 풀고 류진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경계심으로 가득했지만, 그 안에는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대체… 저게 뭐야? 우리가 봉인한 게… 정말 공허라는 거야?”

    “그래. 고대인들이 실패했던… 별의 씨앗의 폭주. 우주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시간의 공허. 이 모든 문명이 그 공허를 막기 위해 존재했고, 결국 실패했지만… 우리 덕분에 잠시나마 다시 잠들게 된 거야.”

    류진은 석판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그의 눈은 피로했지만, 그 속에는 새로운 지식을 얻은 탐험가의 만족감이 빛났다.

    “잠시나마라니? 그럼 또 깨어날 수도 있다는 얘기잖아?” 세라가 불안하게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 우리는 이 심연의 비밀을 알아냈어. 이 ‘메아리치는 심연’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우주의 운명이 걸린 거대한 봉인 장치였던 거야.” 류진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야, 세라. 고대 아르카디아 문명은 우리가 알던 것보다 훨씬 거대한 비밀을 감추고 있었어. 그리고 우리는 그 비밀의 문을 이제 막 열었을 뿐이라고.”

    바람이 홀의 입구 쪽에서 불어왔다. 깊은 지하 유적 속에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는 마치 잊혀진 시간의 메아리처럼 들렸다. 그들은 이제 더 큰 미지의 부름을 들은 듯했다. 이 ‘메아리치는 심연’의 비밀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류진의 심장을 강하게 울렸다.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심연의 메아리

    고요. 광활한 우주의 칠흑 같은 침묵 속에서, 탐사선 아르고스호는 표류하듯 느리게 회전하고 있었다. 함교의 투명한 시창 너머로 보이는 것은, 태곳적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법한 거대한 검은 구조물. 빛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듯한 절대적인 어둠으로 빚어진 그것은, 어떤 별의 잔해도, 어떤 소행성의 파편도 아니었다. 완벽하게 인공적인, 하지만 그 어떤 문명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규모의 미지.

    “캡틴, 저건… 우리 탐사 기록에 없던 겁니다.”
    선임 과학자 박준영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은 거대한 시창 너머의 존재에 완전히 고정되어 있었다. 통계학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균일한 표면, 어떤 기하학적인 규칙도 찾을 수 없는 듯하면서도 완벽하게 조화로운 형태.

    윤설아 캡틴은 눈을 가늘게 떴다. 굳게 다문 입술은 그녀의 긴장감을 숨기지 못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침착하게 계기판과 구조물을 오갔다.
    “아니, 탐사 기록뿐만이 아니지. 인류의 어떤 역사에도 저런 건 존재하지 않아.”
    그녀의 말은 모든 승무원의 생각과 일치했다. 수만 광년을 떠돌며 수많은 성계와 유적을 탐사했지만, 이런 종류의 ‘발견’은 처음이었다.

    “각종 에너지 파동, 물질 구성, 심지어 중력 분석까지… 모두 오류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감지 센서가 전부 오작동하는 것 같아요.”
    박준영의 보고에 기관장 김민준이 작게 투덜거렸다.
    “오작동이라기엔 너무 일관성이 있군. 아예 인지 불가능한 물질로 이루어진 게 아닐까?”
    그의 얼굴에는 평소의 너스레 대신 짙은 경계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현재 거리는 500킬로미터. 더 이상 접근하지 마. 엔진은 대기 상태 유지.” 윤설아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지혜 팀장, 보안 인력 전원 비상 대기. 모든 무기 시스템을 최대로 활성화시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보안팀장 이지혜는 무뚝뚝하게 “알겠습니다” 하고 답하며 자리를 비웠다. 그녀의 그림자에도 긴장감이 묻어났다.

    그때였다. 함교를 감싸고 있던 정적이 깨지고, 낮고 느리게 울리는 소리가 모두의 귓속에 파고들었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진동에 가까웠다. 뇌를 직접 울리는 듯한, 뼈를 타고 전해지는 것 같은 묵직한 떨림.
    “이게… 무슨 소리야?” 김민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음파 탐지기로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습니다, 캡틴. 하지만… 제 몸이 울려요.” 박준영의 목소리에도 불안감이 묻어났다.

    윤설아는 침을 삼켰다. 그녀 역시 그 기분 나쁜 떨림을 느끼고 있었다. 외부 스피커로 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아르고스호의 선체가 통째로 거대한 공명체가 된 듯했다. 그 진동은 차가운 우주의 공백을 뚫고, 검은 구조물에서부터 직접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시창 너머의 거대한 검은 물체. 아무것도 반사하지 않던 그 표면에서, 갑자기 희미한 빛이 일렁였다. 심해의 먹물처럼 검던 구조물의 특정 부분이, 마치 살아있는 맥박처럼 아주 미세하게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캡틴! 저것 보십시오! 구조물이… 반응하고 있습니다!” 박준영이 외쳤다.
    그 순간, 아르고스호 내부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깜빡였다. 시스템 경고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메인 전력 공급 불안정! 보조 발전기 가동 중단! 생명 유지 장치… 일시 정지!”
    김민준의 다급한 외침이 함교를 가득 채웠다.

    윤설아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무슨 짓을 한 거야? 기관부! 비상 동력으로 전환! 시스템 복구시켜!”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격렬해지는 진동 속에 묻혔다. 함교의 바닥이 미세하게 떨리고, 천장의 패널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선장님… 이상합니다! 외부 물질 접촉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르고스호의 선체 구조가… 미세하게 변형되고 있습니다!” 김민준이 경악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눈은 함선 내부 구조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프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변형이라고? 도대체 무슨 소리야?” 윤설아의 심장이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듯 쿵쾅거렸다.

    그때, 박준영이 창백한 얼굴로 시창 너머의 구조물을 가리켰다.
    “캡틴… 저건… 저건 그냥 구조물이 아닙니다… 저건… 어떤 종류의… 공명기입니다!”
    그의 말과 동시에, 검은 구조물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의 파동이 급격히 증폭됐다. 그것은 물리적인 빛이 아니었다. 시각을 넘어선, 영혼을 뒤흔드는 순수한 에너지의 흐름.
    그 파동이 아르고스호에 닿는 순간, 함교 내부에 설치된 모든 금속 기물들이 낮은 음으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진동은, 승무원들의 뇌리를 직접 강타했다.

    모두의 눈앞에 환상이 펼쳐졌다.
    윤설아의 눈에, 함교의 벽면이 일그러지며 거대한 눈알로 변하는 것이 보였다. 수백 개의 눈이 그녀를 응시하며, 심연의 바닥에서 들려오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김민준은 자신이 앉아있는 의자가 갈비뼈가 드러난 시체의 손아귀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뼈들이 그의 몸을 조이는 듯한 섬뜩한 감각에 그는 경기를 일으켰다.
    박준영은 자신의 손이 투명해지며, 그 안으로 우주의 먼지와 별빛이 스며드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듯한 공포가 그를 덮쳤다.

    “이건… 환각이야! 착각이야! 정신 차려!” 윤설아는 이를 악물고 외쳤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조차 메아리쳐 돌아오지 않는 듯했다. 공기 자체가 끈적해지고, 모든 움직임이 느려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아르고스호 내부에서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금속이 찢어지는 듯한, 그리고 무언가가 찢겨 나가는 듯한 처절한 비명.
    그것은 이지혜 팀장이었다. 그녀가 선 채로, 함선의 통로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몸이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주변 공간이 왜곡되면서, 그녀의 몸 또한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여 들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그녀를 쥐어짜는 것처럼.

    “이지혜!” 윤설아가 절규했다. 하지만 그녀는 발조차 뗄 수 없었다. 함교의 바닥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이지혜의 몸은 순식간에 인간의 형태를 잃어버렸다.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살과 뼈가 마치 고무처럼 늘어나고 휘어지며,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저, 이전에 그녀가 서 있던 곳과는 미묘하게 다른, 뒤틀린 공간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말도 안 돼…!” 김민준이 헛구역질을 했다.
    박준영의 눈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는 거대한 검은 구조물을 향해 떨리는 손가락을 뻗었다.
    “캡틴… 저건… 차원을… 왜곡시키고 있어요…! 아르고스호는… 아르고스호는 지금… 저것의 내부에… 갇혀버렸어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설아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왔다. 함교의 시창 너머로 보이던 검은 구조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동시에 함교의 벽면을 이루던 금속 패널들이 꿈틀거리며, 마치 그 구조물과 동일한 재질로 변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르고스호가… 내부부터 붕괴되고 있었다. 아니, 붕괴가 아니었다. 흡수되고 있었다.

    저 거대한 유물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주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살아있는… 재앙이었다.
    그리고 지금, 아르고스호는 그 재앙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 추리 미스터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둑한 도시는 잠들지 않는 거대한 야수 같았다. 사방을 짓누르는 고층 빌딩 숲에서 빛들이 뿜어져 나왔고, 그 빛들 중 하나가 민지네 아파트 창문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고단한 하루였다. 푹 꺼지는 소파에 몸을 던진 민지는 눈을 감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죽겠다, 죽겠어.”

    천장 조명이 깜빡이는 것 같았지만,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언제나 똑같은 풍경, 똑같은 냄새, 똑같은 정적이 흐르는 익숙한 공간이었다. 적어도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늦은 저녁을 간단히 해결하고 식기를 정리하는데, 거실 쪽에서 ‘툭’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민지는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베란다 문을 안 닫았나? 바람에 뭔가 떨어졌나? 설마.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뭐지?”

    물을 뚝뚝 흘리는 손을 대충 닦아내고 거실로 향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제자리에 있어야 할 작은 화병 하나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쨍그랑하고 깨지지는 않았지만, 제법 높이 있던 선반에서 떨어졌는데도 멀쩡한 게 이상했다.

    “아, 깜짝이야. 떨어졌네.”

    별일 아니라고 애써 태연한 척 중얼거렸다. 어쩌다 툭 건드렸겠지, 아니면 고양이라도 있었으면 모를까… 혼자 사는 집에 뭐가 있겠어. 다시 화병을 제자리에 올려놓고 부엌으로 돌아섰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싸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오싹.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봤지만, 거실은 여전히 조용하고 비어 있었다. 방금 올려놓은 화병도 제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정신 차려, 김민지.”

    자신을 다독이며 설거지를 마쳤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며 작은 볼륨으로 뉴스를 켰다. 오늘의 피로를 잊게 해줄 편안한 밤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드라이어가 갑자기 ‘픽’ 하고 꺼졌다. 민지는 짜증 섞인 한숨을 쉬며 콘센트를 확인했다. 제대로 꽂혀 있었다. 다시 전원 버튼을 눌렀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분명히 아침까지 잘 쓰던 거였는데.

    “고장 난 건가?”

    찝찝한 기분을 뒤로하고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꾹꾹 눌러 닦았다. 축축한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는 느낌이 싫었다.
    그때, 방금 전 꺼진 드라이어가 ‘쉬이이잉-‘ 하는 소리를 내며 혼자 작동하기 시작했다.

    민지는 숨을 헙 들이켰다. 손에 든 수건을 떨어뜨릴 뻔했다.
    드라이어는 세면대 위에 놓여진 채로 강한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다. 전원 버튼은 여전히 꺼져 있었고, 플러그도 뽑혀 있었다.

    “거… 거짓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손을 뻗어 플러그를 뽑으려 했지만, 이미 뽑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손을 움츠렸다.
    드라이어는 마치 민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바람 소리를 내며 윙윙거렸다. 마치 누군가 그 안에 숨어 장난치는 것처럼.

    그때, 화장실 문이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잠그고 나왔는데.
    민지는 공포에 질린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드라이어는 여전히 소리를 내고 있었고, 열린 문틈 너머로 어둠이 시야를 잠식했다. 복도 끝, 현관문이 있는 곳까지 어둡고 싸늘한 기운이 뻗어 나가는 것 같았다.

    “누구… 누구세요?”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민지는 혼자가 아니라는 섬뜩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갑자기, 거실 쪽에서 유리 깨지는 소리가 ‘쨍그랑!’ 하고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민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귀청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화장실 안의 드라이어가 ‘푹!’ 하고 꺼졌다.
    이제 남은 건 오직 정적, 그리고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흩뿌려진 차가운 광경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민지의 눈은 그 그림자를 쫓았다. 현관 쪽에서 거실을 가로질러 주방으로 향하는 거대한 검은 그림자.

    “으… 윽!”

    다리가 풀려 주저앉으려는데, 문득 눈길이 닿은 곳이 있었다.
    거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였다.
    분명히 아침까지 걸려 있던 액자가 깨진 채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액자가 걸려 있던 자리에는 붉은색 글씨로 무언가가 쓰여 있었다.

    핏빛 같은 글씨는 마치 피가 흘러내린 것처럼 벽을 타고 번지고 있었다.
    ‘혼자’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니었다. 자세히 보니, 그 글씨는 ‘혼자’가 아니었다.
    글씨의 획 하나하나가, 마치 가느다란 머리카락들로 엮인 것처럼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수많은 머리카락들이 모여 만들어진 문장은 바로 이것이었다.

    ‘혼자가 아니야.’

    그 순간, 민지는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서 있던 화장실 문이,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활짝 열리는 것을.
    그리고 그 안에서, 차가운 손이 뻗어 나오는 것을.
    그 손은… 분명히 자신의 손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차갑고, 창백하며, 핏기 없는 손이.
    민지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흐읍!”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
    그 차가운 손이 민지의 발목을 잡고 화장실 안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아니다. 이건 꿈이 아니다. 절대로 꿈일 리가 없다.
    민지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세면대를 잡으려 했지만, 미끄러운 손은 헛바퀴만 돌았다.
    차가운 시멘트 바닥이 맨발에 스치며 살갗이 찢기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 나는… 혼자가 아니야.’

    그 문장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화장실 안의 어둠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민지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우리… 함께….”

    몸은 점점 더 화장실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발목을 잡은 손의 힘은 엄청났다.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거실의 불빛은, 점멸하듯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홀로 남겨진 민지의 마지막 희망처럼, 그렇게 스러져 가고 있었다.

    “안… 안 돼…!”

    민지의 비명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잠식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아파트에는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섬뜩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하지만, 분명히, 무언가가 남았다.
    아니, 누군가가 남았다.
    민지의, ‘새로운’ 동거인이.

  • 다크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천공무대. 세상의 모든 운명이 저 자그마한 원형 위에 걸려 있었다. 거대한 결계가 사방을 둘러싸고, 그 너머로 수만의 시선이 칼날처럼 꽂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고요하지만 팽팽한 살기가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천하무결 쟁패전의 결승. 이제 단 한 경기만이 남았다.

    환호와 비명, 욕설과 탄성이 뒤섞였던 이전의 열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모두가 침묵했다. 이 침묵은 경외심이자, 두려움이고, 동시에 절박한 염원이었다. 저 무대 위에서 결정될 것이 비단 무림의 서열만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무대 위에는 두 명의 그림자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한쪽은 거구의 사내, ‘혈랑’이었다. 피로 물든 짐승의 눈빛, 험악한 인상, 그리고 온몸을 휘감은 검붉은 투기(鬪氣)는 그가 걸어온 길을 웅변하는 듯했다. 혈랑. 말 그대로 피바람을 몰고 다니는 늑대였다. 그의 손에는 거대한 철퇴가 들려 있었고, 그 철퇴는 마치 지옥에서 갓 뽑아낸 듯 불길한 기운을 내뿜었다. 그가 한 발짝 움직일 때마다 천공무대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의 맞은편에는 여인이 서 있었다. ‘련’. 가느다란 어깨, 바람에 흔들릴 듯 연약해 보이는 몸. 그녀가 입은 옅은 비단옷은 피와 땀으로 얼룩진 이전의 대결들을 무색하게 할 만큼 깔끔했다. 그녀의 무기는 길고 새하얀 검, ‘백화검’이었다. 마치 서리꽃이 피어난 듯 차가운 검신이 은은한 광채를 띠고 있었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저 가녀린 여인이 혈랑을 상대할 수 있을까…?”
    “대협문의 마지막 희망이 저리도 여리다니…”
    “아니, 그녀는 이미 여덟 명의 고수를 꺾고 여기까지 왔다. 분명 뭔가 있을 게야.”
    “하지만 혈랑은 달라! 그자는 사람의 탈을 쓴 짐승이야!”

    련은 관중들의 시선과 혈랑의 압도적인 기세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깊은 우물처럼 고요했으나,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는 강철 같은 의지가 잠재되어 있었다.

    ‘운명이라….’

    그녀의 뇌리에 스승의 마지막 말이 스쳐 지나갔다.
    “이 대회를 멈추지 마라. 이 세상의 운명이 걸린 단 한 번의 기회다. 승자가 되어라, 련. 그리하여 잠들어 있는 그 힘을 깨워야만 한다.”

    련은 자신의 손에 들린 백화검을 쥐었다. 차가운 검신의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에 선명하게 와 닿았다. 이 검과 함께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야만 했다.

    갑자기 혈랑이 으르렁거렸다. 마치 실제 늑대가 울부짖는 듯한 소리였다.
    “흐하하! 계집이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가상하다! 하지만 네년을 보니 오히려 역겹구나. 감히 이 혈랑에게 도전하다니!”

    그의 목소리가 천공무대를 뒤흔들었다. 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혈랑을 더욱 자극했다.

    “흥! 대답조차 못 하는 것이냐? 겁에 질려 오줌이라도 지렸나!”

    혈랑은 비웃으며 철퇴를 한 바퀴 휘둘렀다. 콰앙! 철퇴가 허공을 가르자마자 뿜어져 나온 기류가 무대 바닥에 작은 흠집을 냈다. 그 엄청난 힘에 관중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련은 천천히 백화검을 들어 올렸다. 검 끝이 혈랑을 향했다.
    “…시작하시죠.” 그녀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어떤 비명보다도 또렷하게 혈랑의 귀에 박혔다.

    혈랑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건방진 계집!”

    그는 기다릴 새도 없이 맹렬하게 돌진했다. 거대한 몸집에서 나올 거라고는 믿기지 않는 속도였다. 콰콰콰쾅! 무대가 그의 발걸음에 부서지는 듯 진동했다. 철퇴가 허공을 가르며 불기둥처럼 련을 향해 덮쳐들었다.

    쉬이이익!

    련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그녀의 발걸음은 마치 물 위를 걷는 학처럼 가볍고 유려했다. 핏빛 철퇴가 스쳐 지나간 자리에 강풍이 몰아쳤고, 련의 비단옷자락이 휘날렸다.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하며 련은 검을 휘둘렀다.

    파팟!

    백화검이 허공을 가르자마자 차가운 검기가 혈랑의 옆구리를 스쳤다. 철퇴의 강력함에 비해 검기는 보잘것없어 보였다. 하지만 혈랑의 검붉은 투기 사이로 희미한 핏줄기가 터져 나왔다.

    “크으읍…!”

    혈랑은 예상치 못한 상처에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이 더욱 흉포하게 번뜩였다.
    “네년… 제법이구나!”

    그는 더욱 사납게 철퇴를 휘둘렀다. 회전하는 철퇴는 마치 검은 태풍 같았다. 련은 백화검으로 철퇴의 공격을 받아냈다.

    쨍그랑! 콰앙!

    금속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련의 몸이 충격에 뒤로 밀려났다. 가느다란 손목에 핏줄이 튀어 오를 듯했고,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의 그림자가 스쳤다. 백화검은 겨우 버티고 있었지만, 혈랑의 맹공은 쉬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돼. 저자의 힘은 너무 강해.’

    련은 몸을 띄워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혈랑은 놓치지 않고 철퇴를 위로 휘둘렀다. 거대한 철퇴가 바람을 갈라 련의 발치까지 솟구쳤다. 련은 간발의 차이로 몸을 비틀어 철퇴를 피했다. 그 순간, 그녀의 시선이 혈랑의 턱을 향했다.

    ‘지금이다!’

    련은 공중에서 백화검을 휘둘렀다. 검 끝에서 차가운 기운이 응축되더니, 여러 갈래의 서리꽃잎처럼 혈랑에게 쏟아졌다. 백화검술, ‘설화난무(雪花亂舞)’였다.

    쉬이이익! 파파팟!

    수십 개의 검기가 혈랑의 전신을 꿰뚫으려 했다. 혈랑은 거대한 투기로 몸을 감쌌지만, 서리꽃잎처럼 날카로운 검기는 그의 방어를 파고들었다.

    “으아아악!”

    혈랑의 온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작은 상처들이 순식간에 수십 개로 늘어났다. 그의 얼굴은 분노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피범벅이 된 그의 모습은 더욱 짐승 같았다.

    “계집… 죽여버릴 테다…!”

    혈랑은 포효하며 땅을 박찼다. 무대 바닥이 폭발하는 듯 부서졌다. 그 엄청난 속도로 혈랑은 련에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철퇴를 휘두르는 대신, 거대한 주먹을 련에게 날렸다. 주먹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기운은 마치 거대한 악령의 얼굴 같았다.

    련은 착지하며 자세를 낮췄다. 백화검의 끝이 바닥을 스치며 희미한 자국을 남겼다. 그녀는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는 대신, 정면으로 받아칠 준비를 했다.

    관중들은 경악했다.
    “미쳤나! 저 주먹을 정면으로 받는다고?!”
    “저것은 혈랑의 필살기, ‘마혈강타(魔血强打)’가 아닌가!”

    마혈강타. 그 이름처럼 마귀의 피가 담긴 듯한 강력한 일격이었다. 일격에 바위산도 부숴버릴 수 있다는 기술.

    련의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너무나 미세해서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무림의 고수들은 그 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내공의 기운이자, 그녀의 잠재된 힘이 깨어나고 있음을 알리는 징조였다.

    혈랑의 주먹이 련의 얼굴을 향해 맹렬하게 날아들었다. 공기의 흐름이 뒤틀리고, 거대한 압력이 련을 짓눌렀다.

    그 순간, 련은 백화검을 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혈랑의 주먹을 향하지 않았다. 대신, 련은 자신의 심장을 향해 검을 겨눴다.

    “지금… 여기서….” 그녀의 입술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작은 속삭임이 터져 나왔다.

    관중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결인가?!”
    “아니, 저것은…!”

    혈랑의 주먹이 련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련은 망설임 없이 백화검을 자신의 가슴에 꽂아 넣었다.

    쑤욱!

    피가 튀는 대신, 백화검이 련의 몸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련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순식간에 거대한 폭풍처럼 번져 나갔다. 그녀의 몸은 더 이상 연약한 비단옷을 입은 여인이 아니었다. 거대한 푸른 기운에 휩싸인, 마치 신화 속 여신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녀의 눈빛은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혈랑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주먹을 멈칫했다.
    “이… 이건 대체… 무슨…!”

    하지만 이미 늦었다. 푸른 기운의 폭풍이 혈랑의 몸을 덮쳤다. 그의 거대한 마혈강타는 푸른빛의 파도 속으로 흡수되는 듯 사라졌다.

    콰아아앙!!!

    천공무대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푸른 기운의 기둥이 하늘로 솟구쳤다. 결계가 흔들리고, 관중들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기운이 걷히자, 무대 한가운데에는 련이 서 있었다. 그녀의 몸에는 백화검 대신, 푸른 빛을 내는 투명한 검신이 홀연히 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모든 것이 정지한 듯 고요했다. 혈랑은… 온데간데없었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련의 푸른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에서 다시 작은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시작되었다.”

    천공무대의 바닥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균열 속에서 검은 안개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심연의 어둠을 품은 듯한 검은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련의 푸른 검신이 그 안개를 향해 서서히 움직였다.

  • 크툴루 신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밤은 항상 오래된 건물에 가장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특히 학교 도서관의 폐쇄된 고문서 보관실이라면 더욱 그랬다. 퀴퀴한 종이 냄새와 먼지, 그리고 죽은 시간의 침묵만이 가득한 그곳에서, 김현우는 낡은 서가를 힘겹게 밀어내고 있었다. 비시급 알바치고는 꽤나 고된 일이었다. 교내 최고(最古)의 도서관, 그중에서도 사람의 발길이 끊긴 이 지하 깊은 곳은 마치 살아있는 무덤 같았다.

    “젠장, 이게 무슨 무게야…”

    투덜거리며 서가의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따금씩 천장에서 들려오는 물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를 찢고 지나갔다. 곰팡이가 피어오른 벽면은 습기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닳고 닳은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마저 삼켜버릴 듯한 정적이 찾아왔을 때. 서가를 완전히 밀어내자, 그 뒤편의 벽면에 희미한 선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그저 낡은 벽에 생긴 균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그건 균열이 아니었다. 벽면의 돌들이 다른 모양으로 정확히 맞물려 형성된, 완벽하게 숨겨진 이음새였다. 손으로 더듬자, 차가운 돌 틈으로 손가락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평범한 균열이었다면 이런 기분이 들 리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벽의 한 부분을 눌러보았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다시 다른 부분을. 이윽고 손바닥을 대고 밀어보자, 묵직한 마찰음을 내며 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들어갔다. 동시에 어딘가에서 웅웅거리는 낮은 기계음 같은 것이 들려왔다. 밀려 들어간 벽은 옆으로 스르륵 움직이며 좁은 통로를 드러냈다. 통로 너머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세상에…”

    현우는 핸드폰의 플래시를 켜서 안을 비췄다. 통로는 길지 않았다. 몇 걸음 옮기자 원형의 작은 방이 나타났다. 방의 벽은 거친 돌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그 위에는 기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지구상 어떤 문자도, 어떤 상징도 아니었다.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불규칙하게 얽혀 있었는데, 마치 눈으로 보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저절로 시선이 미끄러지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그것들을 똑바로 응시하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방의 중앙에는 원형의 낮은 단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단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무언가 있었던 자리 같았다. 움푹 파인 홈이 있었는데, 그 중앙에서 아주 희미한, 하지만 존재감을 지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옅은 보랏빛과 검푸른색이 뒤섞인 듯한 빛. 깜빡이지도, 흔들리지도 않고,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미세하게 팽창하고 수축하는 듯한 빛이었다. 그 빛은 주위의 어둠을 밀어내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그 어둠의 일부인 것만 같았다.

    현우는 단상 앞으로 다가갔다. 발소리가 먹먹하게 흡수되는 느낌. 빛에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에서 희미한 이명이 울렸다. 그건 일반적인 이명이 아니었다. 수천, 수만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중얼거리는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속삭이는 듯한, 비명과 탄식, 광기가 뒤섞인 소리였다.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그 소리는 귓속이 아니라, 바로 뇌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손을 뻗었다. 빛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그저 존재했다. 손가락 끝이 빛의 경계에 닿으려 하자, 빛이 더욱 강하게 팽창하는 듯한 착시가 일었다. 동시에 현우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찰나의 순간, 우주적인 비전이 스쳐 지나갔다. 무한한 어둠 속에서 거대한 촉수들이 요동치고, 셀 수 없는 눈동자들이 동시에 자신을 응시하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가 현우의 심장을 짓눌렀다.

    현우는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고는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시 플래시를 비춰보아도 그 빛은 여전히 단상 위에서 미약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그 비전이 현실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지나친 긴장으로 인한 환각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이 방과 저 빛이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현우는 서둘러 그 방을 벗어났다. 닫힌 문을 등지고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밀려들어간 서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굳건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현우는 더 이상 그 공간이 예전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제 그는 알고 있었다. 이 도서관 지하 깊은 곳, 그 누구도 찾지 않는 어둠 속에 감춰진 것이 무엇인지를.

    그날 밤, 현우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웠지만, 눈을 감으면 빛나던 단상의 보랏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이 울리고 있었다. 그것은 때로는 저음의 웅얼거림으로, 때로는 고음의 비명으로 변하며 그의 정신을 갉아먹는 것 같았다.

    새벽 두 시. 잠자코 천장을 응시하던 현우는 거실 쪽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똑, 똑, 똑. 마치 못으로 단단한 나무를 긁는 듯한 소리였다. 현우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불을 켜지 않은 거실은 어둠 속에서 더욱 넓고 깊어 보였다.

    소리가 멈췄다. 현우는 숨을 죽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헛것을 들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그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창밖은 완벽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파트 단지 특유의 희미한 가로등 불빛조차 그의 창문까지는 닿지 않는 각도였다. 검은 유리창 너머로 자신의 초췌한 얼굴이 비쳤다. 그리고 그 순간, 현우는 얼어붙었다.

    거울처럼 반사된 유리창 속 그의 두 눈동자가, 마치 도서관 지하의 그 단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희미한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섬뜩할 정도로 차갑고 깊은 빛이었다. 불과 몇 초였다. 보랏빛은 스르륵 사라졌고, 그의 눈은 다시 평범한 인간의 그것으로 돌아왔다.

    현우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단순한 꿈이나 환각이 아니었다. 도서관 지하에서 우연히 발견한 고대의 힘은, 그를 단지 ‘목격자’로만 남겨두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그것은 이미 그의 안에, 그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예감이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 우연한 발견이 그의 삶, 아니, 인류의 삶을 완전히 뒤바꿔놓을 무언가를 깨웠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었다.

    창밖의 어둠은 여전히 깊었다. 하지만 이제 그 어둠은 그저 밤의 잔상이 아니었다. 뭔가 거대하고 알 수 없는 존재가 그 안에 숨 쉬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존재는… 자신을 주목하고 있었다. 확실하게.

  • 크툴루 신화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심연의 자물쇠 (The Lock of the Abyss) – 제1화: 닫힌 방의 속삭임

    **[#1컷]**
    **(어둑하고 거친 바다가 보이는 외딴 절벽. 거센 파도가 절벽 아래를 때리고, 그 위로 낡았지만 웅장한 ‘어둠골 저택’이 위태롭게 서 있다. 창문마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저택 주변으로는 이미 몇 대의 경찰차가 주차되어 있다. 사이렌 소리는 낮게 깔려 음산한 분위기를 더한다.)**

    **내레이션 (한유진):** 악몽 같은 밤이었다. 아니, 모든 악몽이 시작되는 밤이었는지도 모른다. 저택의 이름처럼, 그곳은 어둠을 품고 있었다.

    **[#2컷]**
    **(저택 안, 낡은 응접실. 경위 한유진이 통화 중이다. 그녀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고,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묻어난다. 주변으로는 젊은 형사들이 분주히 움직이지만, 그들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역력하다.)**

    **한유진 (통화):** …네. 현장은 완벽한 밀실입니다.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고, 문은 안에서 걸쇠로 잠겨 있었어요. 창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부 안에서 잠금쇠가 채워져 있습니다. 피해자는… 한재희 씨입니다. 네, 그 유명한 고서 수집가이자 기이한 유물 연구가요.

    **[#3컷]**
    **(한유진의 통화 상대방인 ‘서하’의 모습. 어딘가 초연해 보이는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무심한 듯 날카로운 눈빛, 그리고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긴 손가락.)**

    **서하 (전화 너머, 나른하게):** 한재희라…. 흥미롭군. 그가 모았던 유물만큼이나 기이한 죽음일 터.

    **한유진 (한숨):** 흥미롭다니요? 지금 상황은 심각합니다, 서하 씨. 시신은 서재에서 발견됐는데, 머리가 깨진 채 피범벅이 되어 있었어요. 흉기는… 섬뜩하게 생긴 석상 모양의 문진이고요. 피해자의 오른손에는… 열쇠가 꽉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 서재 문을 잠그는 열쇠요.

    **[#4컷]**
    **(한유진이 서재 문을 가리킨다. 육중한 나무 문에는 낡았지만 견고해 보이는 빗장이 걸려 있고, 문틈으로는 빛 한 줄기 새어 들어오지 않는다. 그 모습이 마치 거대한 관의 입구처럼 느껴진다.)**

    **한유진:** 완벽하게 안에서 잠긴 방. 살인자는 유령인가요? 아니면…

    **서하 (낮게 깔리는 목소리):** 유진 경위님, 유령은 밀실 살인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으니까. 지금 필요한 건 유령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보지 못하는 눈을 꿰뚫는 ‘시선’입니다.

    **[#5컷]**
    **(장면 전환. 어둠골 저택 서재 입구. 경찰 통제선이 쳐져 있고, 몇몇 형사들이 굳은 얼굴로 서 있다. 그 사이를 뚫고 서하가 무심한 듯 걸어 들어온다. 그의 주변으로 미묘한 찬 공기가 감도는 듯하다.)**

    **형사 1:** 저분은… 서하 탐정님 아닙니까?

    **한유진 (서하에게 다가가며):** 서하 씨, 너무 늦게 오셨어요. 벌써 현장을 보존해뒀지만… 보시다시피 답이 없습니다.

    **서하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서재 안쪽을 응시한다. 그의 눈동자에 미미한 흔들림이 감지된다.):** 예상보다… 더 깊은 어둠이군요.

    **[#6컷]**
    **(서재 내부. 고색창연한 책장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일반적인 책들 사이사이로,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인 고서들이나 기이한 문양의 두루마리, 형상 없는 조각상들이 기괴하게 전시되어 있다. 방 중앙에는 육중한 나무 책상이 놓여 있고, 그 위로 피가 흥건하다. 피해자 한재희는 책상에 엎드려 죽어 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은빛 열쇠가 쥐어져 있다. 피 묻은 기이한 문진이 시체 옆에 굴러 있다. 서하의 시선이 천천히 방을 훑는다.)**

    **내레이션 (서하):** 방은 그 주인의 취향을 여실히 드러냈다.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세상의 금기를 엿보는 듯한 기이한 분위기. 그리고… 그 안에 잠복한, 형언할 수 없는 차가운 기운. 마치 이 방의 공기 자체가 슬픔과 공포로 물들어 있는 듯했다.

    **[#7컷]**
    **(클로즈업: 서하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의 시야에 방의 벽면이 아주 미약하게 일렁이는 듯한 착각이 스친다. 낡은 벽지 문양이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다시 뜬다.)**

    **서하 (나지막이):** 이 방은… 살아있군.

    **한유진:** 네? 무슨 말씀이신가요, 서하 씨?

    **서하 (한유진의 말을 무시하고 책상으로 다가간다. 피해자 한재희의 시신을 내려다본다. 그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으로 일그러진 채 굳어 있다.):** 죽음의 흔적은 명확하나, 그 심연은 명확지 않군.

    **[#8컷]**
    **(서하의 손이 피 묻은 문진을 가리킨다. 문진은 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졌고, 여러 개의 눈동자가 불규칙하게 박힌 듯한 끔찍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 눈동자들이 마치 서하를 응시하는 것 같다.)**

    **서하:** 이 문진이 흉기라 했죠?

    **한유진:** 네. 법의학팀에서도 동일한 의견입니다. 두부에 가해진 충격이 사망 원인입니다.

    **서하 (문진을 빤히 응시하며):** 이 눈동자들은… 마치 모든 것을 아는 듯하군. 아니, 모든 것을 본 듯하군.

    **[#9컷]**
    **(서하가 방의 벽면에 걸린 낡은 태피스트리를 올려다본다. 희미하게 바랜 색감 속에서, 뒤틀린 팔다리의 형상들이 고통스럽게 춤을 추는 듯한 기이한 패턴이 보인다. 서하의 시선이 그 패턴을 따라 움직인다.)**

    **서하:** 이 태피스트리는 언제부터 걸려 있었습니까?

    **한유진:** 저택을 물려받았을 때부터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고인께서 특히 아끼시던 유물 중 하나였다고 해요. 오래된 주술적인 의미가 있다고…

    **서하 (중얼거리듯):** 주술… 그렇군요. 이 방의 공기에는 죽음뿐만 아니라, 망각된 시간의 흔적도 섞여 있군.

    **[#10컷]**
    **(한유진이 서하에게 서재 안에 있었던 사람들을 소개한다. 집사 김노인, 조카 이서연, 고고학자 박교수. 세 명 모두 초췌한 얼굴로 서 있다. 그들의 표정은 불안감, 슬픔, 그리고 무언가 숨기는 듯한 복잡한 감정들이 뒤섞여 있다.)**

    **한유진:** 여기 계신 분들이 어젯밤 이 저택에 함께 계셨던 분들입니다. 김 집사님은 평생 한재희 씨를 모셨고, 이서연 씨는 고인의 유일한 혈육인 조카입니다. 박교수님은 고인과 함께 고대 문헌을 연구하시던 분이고요. 모두 알리바이가… 명확치 않습니다. 이 밀실에서 어떻게 살인이 일어났는지 모르니, 그 누구도 완벽한 알리바이를 댈 수 없죠.

    **[#11컷]**
    **(서하가 세 사람을 차례로 응시한다. 그의 시선은 마치 그들의 영혼까지 꿰뚫어 보는 듯 날카롭다.)**

    **서하 (김 집사를 향해):** 집사님, 어젯밤 고인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김노인 (잔뜩 긴장한 채):** 서재에 계셨습니다. 늘 그러셨던 것처럼… 밤새도록 고서를 읽고, 기록을 정리하셨죠. 평소보다 더 몰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차를 가져다드리려 했으나, 안에 계신다는 이유로 문을 열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서하:** 밤새도록 말입니까?

    **김노인:** 네. 새벽녘까지 불이 켜져 있는 걸 보았습니다. 저는 아침에… 아침에 인기척이 없어 걱정되어 문을 두드렸고… 응답이 없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12컷]**
    **(서하가 이서연에게 시선을 돌린다. 이서연은 눈을 내리깔고 있지만, 그 속에서 미묘한 분노 같은 것이 읽힌다.)**

    **서하:** 이서연 씨, 삼촌과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이서연 (피식 웃으며):** 관계라뇨. 형식적인 조카였죠. 돈 때문에 찾아오는… 귀찮은 존재. 삼촌은 늘 기이한 것에만 빠져 살았어요. 가족엔 관심도 없었죠. 하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돌아가실 줄은 몰랐어요.

    **서하:** 서재에 잠입할 만한 동기는 있습니까? 예를 들어… 유산을 노린다거나.

    **이서연 (흥분한 듯):** 유산이라면 제가 상속받을 겁니다! 굳이 살인까지 저지를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저도 어젯밤엔 제 방에 있었습니다. 삼촌의 서재에 갈 이유가 없었어요. 그곳은… 음침하고 불쾌했어요.

    **[#13컷]**
    **(서하가 마지막으로 박교수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박교수는 불안하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 그의 얼굴은 어딘가 피곤하고, 눈빛은 초점을 잃은 듯 흐릿하다.)**

    **서하:** 박교수님, 고인과 함께 연구하시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박교수 (목소리가 떨린다):** 으음… 잃어버린 문명의 기원… 잊혀진 신들의 기록… 그런 것들입니다. 특히 한재희 선생은… 특정 고대 문헌에 깊이 몰두하고 계셨습니다. 너무 위험한 내용이라 제가 만류했는데도…

    **서하:** 위험한 내용?

    **박교수:** 네… 그 책은… 읽는 자를 미치게 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선생이 홀로 서재에 틀어박혀 계셨던 건지도 모릅니다. 외부의 방해 없이… 그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서…

    **[#14컷]**
    **(서하가 박교수의 말을 끊고 다시 서재를 둘러본다. 그의 시선이 책상 위에 놓인, 펼쳐진 채 굳어버린 낡은 고서에 머무른다. 표지에는 기이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고, 내용은 알 수 없는 상형문자로 가득하다. 책 주변으로는 몇 개의 해독 노트와 펜이 흩어져 있다.)**

    **내레이션 (서하):** 밀실의 자물쇠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의 탐욕이나 증오가 아닌, 더 깊은 곳에서 기원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채워졌을지도 모른다.

    **[#15컷]**
    **(서하가 시신 옆에 굴러 있는 문진을 다시 내려다본다. 문진의 여러 눈동자들이 더욱 섬뜩하게 빛나는 것 같다.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문진에 닿는다. 문진에서 미약하게 진동하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서하:** 유진 경위님, 이 문진은… 고인을 살해한 직접적인 흉기가 아닙니다.

    **한유진 (경악):** 네?! 하지만 법의학팀에서는…

    **서하:** 상처의 깊이, 피의 흔적, 그리고 이 방에 남은… 압도적인 공포. 이 문진은 그저… 시선을 돌리게 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고인의 진짜 죽음은, 이 문진이 만들어낸 상처보다 더 깊은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6컷]**
    **(클로즈업: 한재희의 시신.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드리워진 공포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 눈은 크게 뜨여 있고, 마치 무엇인가 형언할 수 없는 것을 목격한 듯하다.)**

    **서하:** 보십시오. 고인의 눈은 깨진 머리에서 오는 고통보다는… 더 근원적인 공포를 보고 있습니다. 마치… 그의 영혼이 찢어발겨진 듯한 공포.

    **[#17컷]**
    **(서하가 천천히 서재의 벽면을 짚어가며 걷는다. 그의 손끝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는 창문을 지나, 가장 오래된 책장 앞에 멈춰 선다. 책장에는 다른 책들과 달리, 유독 낡고 거대한 책들이 꽂혀 있다. 그 중 한 권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서하:** 이 방의 자물쇠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인은 스스로 이 문을 잠갔고, 스스로…

    **[#18컷]**
    **(서하가 꺼내든 책은 박교수가 언급했던 ‘위험한 책’인 듯하다. 낡은 가죽 표지에는 기이한 상징들이 음각되어 있고, 책장 곳곳에는 핏자국처럼 보이는 얼룩이 묻어 있다. 서하의 손이 책의 표면을 쓸어내린다. 책에서 차가운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서하:** …스스로를 봉인한 겁니다. 이 책을 읽음으로써.

    **[#19컷]**
    **(서하가 책을 펼친다. 알 수 없는 언어와 기이한 삽화들이 가득한 페이지가 펼쳐진다. 그 삽화들은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한 기괴하고 끔찍한 형상들을 담고 있다. 서하의 얼굴에 미미한 동요가 스친다. 한유진과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공포와 혼란으로 가득하다.)**

    **서하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로):** 이 밀실은… 고인을 가두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깥세상을… 이 안에서 깨어난 **‘무언가’**로부터 지키기 위한 것이었겠죠.

    **[#20컷]**
    **(클로즈업: 서하의 눈동자. 그의 시야에 펼쳐진 책 속의 기이한 삽화가 겹쳐 보인다. 삽화 속의 형상들이 꿈틀거리며, 마치 서하의 눈을 통해 현실로 뛰쳐나오려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방 안의 공기가 더욱 차갑고 무거워진다.)**

    **서하 (나지막이, 그러나 단호하게):** 이 방의 자물쇠는… 인간의 손으로 잠긴 것이 아니었군. 그리고, 이 죽음 또한… 인간의 범주에 있지 않아. 우리는… 그저, 우연히 엿본 것뿐입니다. **심연의 속삭임**을.

    **[#21컷]**
    **(마지막 컷. 서하의 뒤로 보이는 서재의 모든 유물과 책들이 기괴하게 일렁이는 듯한 시각적 효과. 태피스트리의 그림자 속에서 형상 없는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 같고, 문진의 눈동자들은 섬뜩하게 빛을 발한다. 서하의 얼굴에는 결코 쉬이 풀릴 것 같지 않은, 더 깊은 미스터리에 대한 예감과 함께…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한 자의 허무함이 서려 있다.)**

    **내레이션 (한유진):** 그날 밤, 우리는 밀실 살인의 범인을 찾으러 갔지만, 그 대신… 인간의 영역 밖의 무언가를 마주했다. 서하 씨의 눈빛은 마치 심연 그 자체를 들여다본 자의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직감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을.

    **— 계속 —**

  • 이세계 전생 (Isekai) 독립적인 단편 소설

    차가 굴러왔다. 굉음과 함께 들이닥친 빛은 기어이 시야를 잠식했다. 아스팔트 위에서 나동그라지며 본 하늘은 이상하리만치 푸르렀고, 그 푸른빛은 온몸을 덮쳐오는 뜨거운 고통과 함께 점멸했다. 그래, 거기까지였다. 강민준의 29년 인생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건 눅진한 흙먼지 냄새와 귀를 찢을 듯한 정적이었다. 방금 전까지 눈부시던 푸른 하늘은 간데없고, 회색빛 먼지로 뒤덮인 뿌연 하늘만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목덜미와 팔다리가 쑤셨지만, 이상하게도 아스팔트 바닥에 긁혔을 상처 하나 없었다. 말끔한 몸뚱이. 어리둥절함에 주위를 둘러봤다.

    “여… 여기가 어디야?”

    목소리는 쉰 듯 갈라졌고, 입안은 바싹 말라 있었다. 그 질문에 답해줄 존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잿빛으로 변해버린 도시의 잔해였다. 고층 빌딩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하늘을 찔렀고, 거리는 온갖 종류의 잔해와 폐기물로 뒤덮여 있었다. 길거리에는 녹슨 차량들이 뒤집히거나 찌그러진 채 버려져 있었고, 간혹 보이는 가로등은 기이하게 휘어진 채 전등갓이 깨져 있었다. 잿빛 먼지 바람이 불어와 모래알갱이를 흩뿌렸다. 씁쓸한 쇠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이것은 꿈인가? 그는 자신의 뺨을 꼬집었다. 따끔한 통증. 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지옥인가? 아니면 환생?

    ‘설마 이세계 전생?’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온라인 소설에서나 보던 일들이 자신에게 일어났다고 믿기에는 눈앞의 현실은 너무나 참혹했다. 이세계라고 하기엔 너무나 익숙한 듯 낯선 풍경. 분명 도시였는데, 왜 이렇게 폐허가 되었지?

    갈증이 목을 옥죄었다. 살갗은 건조했고, 햇빛은 없지만 희끄무레한 하늘에서 내리쬐는 열기는 피부를 따갑게 만들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살 만한 것을 찾아야 했다. 물이든, 뭐든.

    휘어진 간판들이 매달려 있는 건물의 잔해 사이를 걷기 시작했다. 바닥에는 깨진 유리 조각과 금이 간 콘크리트 파편이 널려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미지의 공간. 숨 쉬는 것조차 조심스러웠다.

    폐허가 된 상점가에 들어섰다. 텅 빈 진열대는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찢어진 상품 포장지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먹을 만한 것도, 마실 만한 것도. 절망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이렇게 죽는 건가? 교통사고로 죽은 것도 황당한데, 이제는 낯선 폐허에서 굶어 죽으라는 말인가?

    그때였다. 으스스한 그림자가 시야를 가로질렀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눈은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을 쫓았다. 저건… 사람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기괴하게도 길쭉하고 비틀린 팔다리, 굽은 등, 그리고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얼굴이었다. 눈코입이 없는 매끈한 피부, 혹은 어둠이 응축된 듯한 검은 구덩이가 얼굴을 대신하고 있었다.

    ‘괴물…인가?’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차가운 공포가 목을 조르고, 몸이 굳어버렸다. 그는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벽 뒤에 바싹 몸을 붙였다. 괴물은 느릿느릿 걸어오고 있었다. 아니, 걷는다기보다는 흐느적거리며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에 가까웠다. 부러진 전봇대 기둥을 짚고 서 있던 민준의 눈에, 괴물의 앙상한 손가락이 콘크리트 벽을 스치는 것이 보였다. 긁히는 소리가 섬뜩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민준은 더 깊이 숨었다. 들키면 죽을 거라는 본능적인 확신이 있었다. 그는 숨을 죽였다. 자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 커서 들킬 것만 같았다. 괴물은 느리지만 끈질기게 건물 안쪽으로 들어왔다. 민준이 숨어 있는 기둥을 지나쳐 복도 끝으로 향하는 듯했다.

    ‘지금이야.’

    그는 몸을 돌려 반대편 출구로 달아났다. 최대한 소리 내지 않으려 발에 힘을 뺐지만, 깨진 유리 파편을 밟고 말았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깼다.

    “크르르르르…”

    뒤에서 들려오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 민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살아야 했다. 이유도 모른 채 죽는 건 억울했다.

    거리를 가로질러 달렸다. 폐허는 복잡했고, 건물 잔해들은 미로 같았다. 뒤에서는 끈질긴 발소리가 따라왔다. 그것은 빠르지 않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림자처럼.

    한참을 달리던 민준은 간신히 무너진 벽 틈새로 몸을 던졌다. 좁은 공간, 앞은 막혀 있었다. 사방이 콘크리트 잔해로 둘러싸인 막다른 골목이었다. 숨을 헐떡였다.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보이는 공간은 그에게 아무런 희망도 주지 않았다.

    “크르르르르…”

    괴물이 다가오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벽 너머에서 그림자가 흔들렸다. 민준은 주위를 둘러봤다. 손에 잡히는 것이라곤 바닥에 굴러다니는 녹슨 쇠막대기뿐이었다. 그는 쇠막대기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각이 손바닥에 선명하게 와닿았다. 싸워야 했다. 피할 수 없다면.

    괴물이 좁은 틈새로 몸을 구겨 넣으며 들어왔다. 그 끔찍한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역한 썩은 내가 코를 찔렀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삼켰다.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키려 했지만, 그의 손은 쇠막대기를 꽉 쥐고 있었다.

    괴물의 앙상한 팔이 뻗어 나왔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피했다. 팔이 벽에 부딪히며 콘크리트 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녀석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죽을 수 없어!’

    몸을 낮춰 괴물의 다리 쪽으로 쇠막대기를 휘둘렀다. 쾅! 무언가 단단한 것에 부딪힌 듯한 둔탁한 소리. 괴물은 잠시 휘청거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았다. 녀석의 다리는 돌처럼 단단했다. 그러나 민준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한번 휘둘렀다. 이번엔 좀 더 높게, 몸통을 겨냥했다. 녀석은 속도가 느렸다. 그 점을 노려야 했다.

    하지만 폐허귀는 민첩성은 떨어져도,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민준의 공격을 피했다. 녀석의 팔이 다시 뻗어와 민준의 어깨를 스쳤다. 날카로운 통증. 살이 찢어진 듯했다. 그는 비틀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때, 민준의 눈에 괴물의 텅 빈 얼굴 한가운데, 아주 미세하게 움푹 들어간 부분이 보였다. 다른 부위와 달리, 약간 무른 듯한 질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곳이다.

    “죽어!”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쇠막대기를 괴물의 얼굴을 향해 내리찍었다. 콰직!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끈적한 액체가 튀었다. 괴물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녀석의 몸이 경련하더니, 이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괴물의 몸은 먼지처럼 서서히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모래성이 무너지듯,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민준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숨을 헐떡이며 상처 입은 어깨를 부여잡았다. 뜨거운 피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살았다. 이 끔찍한 세상에서, 처음으로 괴물을 죽이고 살아남았다.

    폐허귀가 사라진 자리에 작은 조약돌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검붉은 색의 돌멩이. 희미하게 맥박처럼 빛나고 있었다. 민준은 주저하며 손을 뻗었다. 차가운 돌멩이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자마자, 온몸에 알 수 없는 기운이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랜 갈증에 시달리던 몸에 시원한 물줄기가 닿는 듯한 상쾌함. 그리고 동시에, 주변의 모든 것이 조금 더 선명하게 보이는 듯한 감각. 흐릿했던 폐허의 모습이 마치 초점이 맞춰진 카메라처럼 또렷해졌다. 먼지 냄새는 더 강하게, 희미한 바람 소리는 더 날카롭게.

    ‘이건… 대체 뭐지?’

    돌멩이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민준은 자신이 이전과는 달라졌음을 직감했다.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몸 안에 깃든 것만 같았다. 그는 돌멩이를 꽉 쥐었다. 이 미지의 힘이 무엇이든 간에, 이것이 그의 생존에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겨우 몸을 추스른 민준은 폐허를 벗어나기 위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갈증은 여전했지만, 조금 전의 절망감은 사라져 있었다. 그는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돌멩이가 주는 미약한 변화가, 어쩌면 이 끔찍한 세상에서 그를 지탱해 줄 유일한 희망일지도 몰랐다.

    그는 부서진 건물들 사이를 헤치며 나아갔다. 그의 눈은 이전보다 더 예리하게 주변을 살폈다. 어디에 물이 있을지, 어떤 길이 안전할지, 다음 위협은 어디서 올지. 모든 감각이 이 미지의 돌멩이로 인해 예민해진 듯했다.

    오랜 시간 헤매다, 마침내 민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빗물에 잠긴 폐건물 지하였다. 지붕이 통째로 날아간 건물 한쪽, 빗물이 고여 고요한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흐린 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 아직 오염되지 않은 듯 투명했다.

    “물!”

    그는 거의 울부짖다시피 외치며 웅덩이로 달려갔다. 무릎을 꿇고 손으로 물을 움켜쥐었다. 망설임 없이 입을 대자, 차갑고 신선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온몸의 세포가 깨어나는 듯한 감각. 살았다. 정말 살았다.

    물을 충분히 마시고 나서야 민준은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이 건물은 그래도 형태가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붕괴된 잔해들 사이로, 잠시나마 비바람을 피할 만한 공간이 보였다. 이곳이라면 하룻밤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어깨의 상처를 확인했다. 깊지는 않았지만,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상처를 소독할 만한 것은 없었지만, 그는 일단 주워온 천 조각으로 지혈을 했다.

    고인 물웅덩이 옆에 쭈그려 앉아, 민준은 품속의 검붉은 돌멩이를 꺼냈다.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이 돌멩이를 ‘생명의 핵’이라고 멋대로 이름 지었다. 이 폐허에서, 그의 생명을 이어준,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줄 존재.

    밤이 되자, 폐허는 더욱 음산한 침묵에 잠겼다. 멀리서 알 수 없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민준은 잠 못 이루고 주위를 경계했다. 그는 이곳이 더 이상 그가 알던 세상이 아님을 분명히 인지했다. 이곳은 죽음과 생존의 경계가 희미한 세계였다.

    하지만 그는 깨달았다. 두려움 속에서도, 그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투지가 끓어오르고 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남은 경험은 그를 무력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심장을 더 강하게 뛰게 했다. 그는 이 끔찍한 세계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이유도 모른 채 던져진 이곳에서, 그는 자신만의 생존 방식을 찾아낼 것이다. 이 황폐해진 세상의 끝에서, 어떤 의미를 찾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강민준은 살아남아야만 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폐허의 밤은 길었고, 내일도 오늘처럼 험난할 터였다. 하지만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품속의 따뜻한 돌멩이가, 희미하게나마 그의 앞길을 밝혀주고 있었다. 생존은, 이제 그의 숙명이 되었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첫 번째 장. 균열

    강민준은 지루했다. 쨍한 오후 햇살이 연구실 창문을 넘어 끈적하게 달라붙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온통 어제 마저 깨지 못한 모바일 게임의 막판 보스전 생각으로 가득했다. 자료 더미에 파묻힌 컴퓨터 화면에는 의미 없는 그래프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고고학 전공 3학년,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과 현실에 대한 지독한 권태감 사이에서 그는 늘 위태롭게 흔들렸다.

    “하아… 오늘도 망했군.”

    작게 중얼거리며 민준은 의자를 뒤로 젖혔다. 기지개를 켜자 굳어있던 어깨 근육이 우드득 소리를 냈다. 시계를 보니 퇴근까지 두 시간. 차라리 학교 뒤편에 새로 생긴 낡은 유적지나 구경할까. 어차피 오늘 할당된 작업은 얼추 마무리했고, 교수님은 워낙 자유분방한 분이라 이 정도 일탈은 눈감아 주실 터였다.

    결심이 서자 몸이 가벼워졌다. 엉덩이를 털고 일어선 민준은 짐을 챙겨 연구실을 나섰다. 바람 한 점 없는 꿉꿉한 공기가 도심의 냄새를 한층 짙게 만들었다. 낡은 유적지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잡초가 무성한 비포장도로를 한참 걸어 올라가자, 이정표도 없이 버려진 작은 언덕이 나타났다. 언덕배기 위에는 몇 개의 돌기둥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듯 부서진 채 서 있었다.

    “와, 진짜 아무것도 없네.”

    민준은 실망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발길이 끊겼더라니. 겨우 이 정도 유적을 보겠다고 힘겹게 올라온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돌기둥 중 가장 커 보이는 것을 살펴보았다. 글인지 그림인지 알 수 없는 희미한 문양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는 무심코 손을 뻗어 차가운 돌 표면을 쓸어보았다. 손끝에 닿는 오래된 이끼의 감촉이 이상하게도 생생했다.

    바로 그때였다.

    하늘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쨍하던 햇살은 온데간데없고 먹구름이 순식간에 머리 위를 뒤덮었다. 우르릉, 쾅! 요란한 천둥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민준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름에 흔한 소나기겠지, 생각했지만 불안한 예감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번개 한 줄기가 허공을 갈랐다. 섬광이 너무 강렬해 눈을 감았지만, 잔상이 시야에 강하게 박혔다. 그리고 이어진 엄청난 진동. 땅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발버둥 치는 듯한 진동에 몸의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돌기둥에 부딪히며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쿵, 하고 머리를 세게 박자 아찔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새하얘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차가운 돌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었다. 섬광은 점점 거세지더니 이내 온 세상을 뒤덮었다. 마치 거대한 블랙홀이 자신을 빨아들이는 듯한 강력한 중력에 몸이 갈가리 찢기는 듯했다.

    “젠장… 이게… 뭐야…!”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 민준은 마지막으로 생각했다.
    *나는… 죽는 건가?*

    ***

    싸늘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팠고,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간신히 눈을 뜨자 낯선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낡은 나무 천장. 창문 너머로 보이는, 그의 생전 보도 듣도 못한 낯선 풍경. 기와지붕이 늘어선 마을, 흙먼지 폴폴 날리는 길거리,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현대의 고층 건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낮고 너른 산세.

    “여긴… 어디지?”

    민준은 허스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욱신거리는 통증이 전신을 덮쳤다. 겨우 상체를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이 누워있던 곳은 흙벽으로 지어진 낡은 방이었다. 구석에는 누군가가 쓰다 버린 듯한 낡은 이불과 베개가 뒹굴고 있었고, 흙으로 빚은 듯한 작은 탁자 위에는 낯선 약재들이 놓여 있었다.

    가장 이상한 것은 자신의 옷이었다. 분명 평소에 입던 청바지와 티셔츠가 아니었다. 옅은 회색의 두꺼운 면포로 만들어진, 낯선 디자인의 옷이 몸에 걸쳐져 있었다. 혹시 누군가 자신을 데려와 병원복 같은 것을 입힌 건가?

    혼란스러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 순간, 기억 속으로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푸른빛. 그리고 찢어질 듯한 고통.

    ‘설마… 꿈은 아니겠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비틀거리며 방 밖으로 나섰다.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열자, 정오의 햇살이 눈을 찔렀다. 눈을 가늘게 뜨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길거리에는 갓을 쓴 남자들과 비단 치마를 두른 여인들이 오가고 있었다. 짚신을 신은 채 낡은 짐수레를 끄는 사람, 등짐을 진 채 시장을 오가는 상인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 낯선 어투의 대화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보시오, 거 참 이상한 양반이군!”

    갑자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 쳤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인상을 찌푸린 덩치 큰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기다란 칼이 매달려 있었고, 얼굴에는 험악한 흉터가 길게 나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정신이 없어서…”

    민준은 본능적으로 사과했지만, 사내는 더욱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정신이 없다니? 이놈 보게, 어디서 온 놈이길래 눈깔을 그렇게 뜨고 지랄이야? 옷차림도 괴상망측하구만.”

    험악한 말씨에 민준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분명 한국말인데… 어조나 단어 선택이 너무나도 옛스러웠다. 흡사 사극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대화였다.

    “저… 여기가 어디입니까?”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묻자, 사내는 코웃음을 쳤다.

    “여기가 어디냐니? 쯧쯧, 머리를 어디다 박고 왔는가 보군. 여기가 어디긴 어디야, 백하촌이지! 천하제일 무도회가 열리는 대성산 입구에 있는 백하촌 말이다!”

    천하제일 무도회? 민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사극 드라마 촬영 현장인가? 아니, 아무리 봐도 이건 너무나도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 천하제일 무도회라니요? 혹시 무슨 행사라도 하는 겁니까?”

    “행사? 이 미친놈이! 천하의 운명을 가를 대결이 벌어지는 성전인데 행사는 얼어 죽을! 각 문파와 세가의 고수들이 모여 천하의 패권을 다투는 천하쟁패전(天下爭覇戰)이 바로 내일부터 열린다고!”

    사내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그의 말은 민준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천하의 운명? 천하쟁패전? 문파와 세가?*
    이 모든 단어들이 그가 즐겨 읽던 무협지에서 튀어나온 듯했다.

    “하, 하지만… 제가 어떻게 여기에…”

    민준은 더듬거렸다. 사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그의 멱살을 잡았다.

    “닥쳐라, 이놈! 어딜 감히 나 사검맹(邪劍盟)의 장문인 밑에서 맹원들을 교육하는 조강(助講)을 맡고 있는 정위(正衛) 나협(羅俠) 앞에서 헛소리를 지껄여? 천하쟁패전 소식도 모르는 놈이 어찌 여기까지 왔단 말이냐!”

    나협이라는 사내는 민준의 멱살을 움켜쥔 채 씩씩거렸다. 그의 눈빛은 살기 등등했다. 민준은 숨이 막혀 컥컥거렸다.

    “하… 하필… 백하촌이라니…!”

    그는 자신의 처지를 뒤늦게 깨달았다. 시간 여행을 온 것도 모자라, 하필이면 천하의 운명을 건 무림 고수들의 무술 대회가 열리는 곳이라니.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민준은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그리고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나협의 거친 손아귀에 붙들린 채, 민준의 눈앞에는 온통 낯선 세계의 풍경이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집으로… 돌아가야 해.*
    *하지만… 어떻게?*

    새로운 세상의 문이, 강민준 앞에 강제로 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 뒤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혼돈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 무협 독립적인 단편 소설

    무림의 밤은 언제나 혼돈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온 세상이 암흑에 잠식될 위기에 처한 적은 없었다. 태고적부터 전해 내려오는 불길한 예언, ‘검은 재앙의 서’는 마침내 그 서문을 펼쳤고, 천지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혼돈의 기운은 강호를 뒤덮고, 사악한 그림자가 도처에 출몰하여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다.

    유일한 희망은 ‘운명결전’이었다. 천하의 운명을 걸고, 무림에서 가장 강한 고수들이 한데 모여 진정한 승자를 가리는 대회. 그 승자에게는 오랜 세월 전설로만 내려오던 ‘천지의 심장’을 다룰 권능이 주어질 것이라 했다. 천지의 심장은 혼돈을 잠재우고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이라 믿어졌다.

    무영대전(無影大殿)은 일찍이 이처럼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적이 없었다. 웅장한 아레나를 둘러싼 관중석은 이미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차 있었고, 한때 대륙을 호령했던 문파의 장문인들과 은거했던 고수들까지 모두 그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눈빛에는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수많은 예선과 본선을 거쳐 마침내 두 명의 마지막 결전자가 대전 중앙에 섰다.

    한 명은 강호의 떠오르는 별, ‘청운검’ 류진(柳眞)이었다. 스무 해 남짓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의 검은 이미 초월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평을 받고 있었다. 푸른 도포 자락이 바람에 살랑였고, 허리춤의 백옥 같은 검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맑은 기운은 주변의 탁한 공기마저 정화하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는 불안 대신 굳건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검은 도포를 뒤집어쓴 의문의 사내, ‘묵혼(默魂)’이 서 있었다. 묵혼의 존재는 처음부터 의문투성이였다. 그는 어떤 문파에도 소속되지 않았고, 그의 무공은 이제껏 강호에 알려진 어떤 유파와도 달랐다. 묵혼의 주변은 늘 한기가 감도는 듯했고, 그의 그림자는 대전의 밝은 조명조차 삼켜버릴 듯 짙었다. 그의 얼굴은 깊은 후드로 가려져 있었지만, 그 아래에서 느껴지는 존재감은 류진 못지않은, 아니 그 이상의 압박감을 선사했다.

    대전을 감싼 침묵은 무겁고 날카로웠다. 심판을 맡은 무림맹주 천위명(千威明)이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운명결전, 마지막 승부를 시작한다!”

    맹주의 목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묵혼의 검은 도포 자락이 미동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어둠처럼 꿈틀거렸다. 류진은 곧바로 청운검을 뽑아 들었다. 쨍그랑! 맑은 옥색 검날이 햇빛을 받아 섬광처럼 빛났다. 그의 검은 한 줄기 푸른 번개 같았다.

    묵혼은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마치 뿌리 깊은 고목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류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첫 일격은 언제나처럼 빠르고 정확했다.
    “청운제일식(靑雲第一式), 봉황유섬(鳳凰流閃)!”
    검 끝에서 피어난 푸른 기운이 거대한 봉황의 형상을 이루며 묵혼을 향해 돌진했다. 그것은 단순히 무형의 기운이 아니었다. 실체를 가진 듯한 거대한 환영이 묵혼의 전신을 꿰뚫으려 했다.

    그러나 묵혼은 움직이지 않고 왼손을 스윽 들어 올렸다.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평범한 움직임이었으나, 그의 손끝에서 검은 실타래 같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그 실타래는 순식간에 수백 가닥으로 갈라지며 봉황의 형상을 감아들어 갔다. 푸른 봉황이 발버둥 쳤지만, 검은 실타래는 마치 독사를 감듯 더욱 강하게 조여들었다. 이내 봉황의 형상은 산산이 부서지며 어둠 속으로 스러졌다.

    류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의 무공이 이리도 허무하게 막힌 것은 처음이었다.
    “크윽….”
    묵혼은 여전히 한 마디도 없었다. 다만 그의 후드 아래에서 희미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류진은 곧바로 다음 초식을 이었다.
    “청운제이식, 천룡파산(天龍破山)!”
    이번에는 검의 기세가 산을 부수고 강을 가를 듯 웅장했다. 거대한 용의 형상이 류진의 검에서 뿜어져 나와 묵혼을 향해 포효했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파괴력이 느껴졌다. 아레나의 돌바닥이 용의 기운에 의해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묵혼은 여전히 그 자리였다. 그러나 그의 검은 도포 아래에서 오른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저 앙상한 손가락 끝에서 검은 그림자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 그림자는 순식간에 거대한 손아귀가 되어 포효하는 용의 목을 틀어쥐었다.
    콰아앙!
    용은 그 기세를 잃고 발버둥 치다가 이내 검은 손아귀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관중석에서는 경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저것은 대체 무슨 무공이란 말인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이다!”

    류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묵혼은 이제껏 그가 상대했던 어떤 고수보다도 예측 불가능하고 강력했다. 평범한 검으로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류진은 눈을 감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전신에서 푸른 기운이 더욱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무공의 기운을 넘어선, 그의 내면에 잠재된 순수한 생명력과 투지였다.

    “묵혼… 당신은 대체 누구시오?” 류진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 속에는 결연함이 담겨 있었다.
    묵혼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다만 후드 아래에서 깊은 한숨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류진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세를 취하고 청운검을 자신의 심장 앞으로 가져갔다.
    “청운삼식(靑雲第三式), 만천화우(萬天花雨)!”
    검 끝에서 수많은 검기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단순한 검기가 아니었다. 각각의 검기는 살아있는 듯한 생명력을 품고 있었고, 그 속에는 류진의 모든 정신력이 담겨 있었다. 수천, 수만 개의 푸른 검화(劍花)가 일제히 묵혼을 향해 돌진했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회피 불가능한 공격이었다.

    묵혼은 마침내 움직였다. 그의 두 팔이 좌우로 크게 펼쳐졌다. 검은 도포 자락이 거대한 날개처럼 휘날렸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은 마치 지옥의 문이 열린 듯했다. 그 어둠은 단순히 기운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체를 가진,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심연이었다.

    푸른 검화들이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팟, 팟, 팟! 하는 소리와 함께 검화들은 어둠에 닿는 순간 형체를 잃고 소멸했다. 어둠은 마치 거대한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흡수하고 잠식했다. 류진의 필살기가 속절없이 사라지는 모습에 관중석은 다시금 술렁였다.

    류진은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어둠이 모든 것을 삼키려 한다면, 자신은 빛이 되어야 했다. 그는 청운검을 양손으로 단단히 붙잡고 온몸의 기를 검에 집중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 기운이 점점 더 농축되어 마침내 눈부신 흰빛으로 변했다. 검날은 이제 푸른 옥색이 아닌, 순수한 빛을 발하는 듯했다.

    “나의 검은… 결코 어둠에 굴복하지 않는다!”
    류진의 목소리가 대전을 흔들었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흰빛은 점차 그 형상을 갖추었다. 그것은 거대한 검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빛으로 이루어진 성검이었다.
    “청운최후식(靑雲最後式), 광명멸혼참(光明滅魂斬)!”

    류진이 온 힘을 다해 성검을 휘둘렀다. 빛의 성검이 어둠의 심연을 향해 떨어졌다.
    쿠과광!
    빛과 어둠이 충돌하는 순간, 대전 전체가 요동쳤다. 아레나의 견고한 바닥이 거대한 충격에 갈라지기 시작했고, 관중석의 일부가 무너지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거대한 섬광이 사방을 뒤덮었고, 잠시 동안 모든 것이 사라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빛이 걷히고 먼지가 가라앉았다.
    무영대전의 중앙에는 깊게 파인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류진이 서 있었다. 그의 전신은 상처투성이였고, 푸른 도포는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그는 간신히 청운검을 지탱하며 서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지쳐 있었지만, 그 속에는 승리의 빛이 어렸다.

    묵혼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어둠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듯한 검은 천 조각만이 남아 바람에 흩어지고 있었다.

    천위명 맹주가 천천히 아레나로 내려왔다. 그의 얼굴에는 감격과 안도가 교차했다.
    “승자는… 청운검 류진이다!”
    맹주의 외침이 울려 퍼지자, 대전을 가득 메웠던 관중들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들의 목소리는 무영대전의 지붕을 뚫고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류진은 휘청거리며 겨우 서 있었다. 그의 눈은 검은 천 조각이 흩날리던 자리를 향했다. 묵혼은 사라졌지만, 그가 남긴 어둠의 잔재는 여전히 류진의 심장을 짓눌렀다.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운명결전은 끝났지만,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었다. 천지의 심장을 손에 쥔 그는 이제 세상의 운명을 짊어지고, 다가올 검은 재앙에 홀로 맞서야 했다.

    류진은 고통스러운 숨을 몰아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혼돈의 기운이 감도는 먹구름이 걷히지 않은 밤하늘이었다. 그는 자신이 짊어져야 할 무게를 직감했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꺾이지 않았다. 그는 이대로 쓰러질 수 없었다. 이 세상의 희망은 이제 오직 그의 손에 달려 있었으므로. 그의 청운검은 다시금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아직 모든 것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심연 속 한 조각의 꿈

    드넓은 우주, 그 아득한 심연을 유유히 가르던 우주선 ‘별무리호’. 초록빛과 푸른빛이 오묘하게 뒤섞인 성운의 꼬리를 따라 수천 년 전 버려진 항로를 훑어가던 중이었다. 우주선 내부, 딱딱한 금속 벽면과 대비되는 포근한 승무원 휴게실. 유리창 너머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박힌 보석 같은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하아, 또 양자 물리학 개론이야? 나루 씨는 정말 대단하다니까.”

    무중력 상태의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간이 테이블에 다리를 걸치고 누워 있던 기관사 강이 툴툴거렸다. 덥수룩한 수염은 영락없는 불곰 같았지만, 그 눈빛만큼은 별무리호의 그 누구보다도 날카로운 베테랑이었다. 그의 시선은 휴게실 한쪽 구석, 태블릿에 코를 박고 앉아 책을 읽는 과학관 나루에게 향해 있었다.

    나루는 그 말에 대꾸할 새도 없이 고개만 살짝 들었다. 그녀의 동그란 안경 너머로 지적인 눈매가 반짝였다. “강 기관사님, 이건 기본 소양이에요. 심우주 탐사선에 타면서 이 정도는 알아야죠.”

    “흥, 난 내 기관실만 잘 돌아가면 그만이야. 우주선 엔진 돌아가는 소리만큼 아름다운 교향악이 어디 있다고.”

    강 기관사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나루를 향해 있었다. 나루는 피식 웃으며 다시 태블릿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렇게 투덜거려도, 강 기관사는 사실 누구보다 별무리호와 그 안에 탄 모든 생명체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때, 함장 유진의 차분한 목소리가 함내 방송을 통해 울려 퍼졌다.

    — 승무원 여러분, 잠시 집중해 주십시오. 과학관 나루, 함교로 와 주십시오.

    나루는 깜짝 놀라 태블릿을 덮었다. “네? 지금요?”

    — 네, 지금. 아주 흥미로운 무언가를 포착했습니다.

    강 기관사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흥미로운 거라니? 이 외딴 우주에서?”

    나루는 얼른 몸을 일으켜 휴게실을 나섰다. 함교는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수많은 패널의 불빛들이 초록색, 파란색, 주황색으로 깜빡이며 살아 숨 쉬는 듯했다. 함장 유진은 커다란 메인 모니터 앞에 서서 무언가를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갈색 머리카락은 언제나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곧게 뻗은 어깨는 묵직한 책임감을 말해주는 듯했다.

    “함장님, 부르셨습니까?”

    “왔나, 나루.” 유진은 고개를 돌려 나루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에는 평소의 차분함 대신 묘한 호기심이 어려 있었다. “이것 좀 보게.”

    메인 모니터에는 별무리호의 센서 스캔 결과가 떠 있었다. 칠흑 같은 우주 공간 한가운데, 아주 미약하지만 분명한 에너지 신호가 포착된 지점이었다.

    “이게… 뭐죠? 소행성도 아니고, 성간 먼지 구름도 아닌데요.” 나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캔 결과는 기존에 알려진 어떤 물질의 패턴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불규칙하면서도 동시에 완벽하게 균형 잡힌 곡선들이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 우리 탐사선이 이 구역을 지나온 게 벌써 다섯 번째인데, 단 한 번도 탐지되지 않던 신호야. 갑자기 나타났어.” 유진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새로운 형태의 별인가요? 아니면… 미발견 행성?” 나루가 흥분하여 물었다.

    “아니. 그 어떤 천체도 이런 식으로 에너지를 방출하진 않아. 심지어… 움직임이 없어. 완벽한 정지 상태에서 에너지만 발산하고 있어.”

    그때, 함교 문이 열리고 강 기관사가 들어섰다. “무슨 일이에요, 함장님? 설마 외계 문명이라도 발견한 겁니까?” 그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분명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유진은 메인 모니터의 화면을 확대했다. 희미한 점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자네들, 보게나.”

    점점 더 가까워지는 미지의 존재. 별무리호는 조심스럽게 속도를 줄이며 접근했다. 외부 카메라 화면이 메인 모니터에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함교 안의 모든 숨소리가 멎었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투명했다. 마치 심연의 어둠 그 자체를 정교하게 깎아 만든 조각품처럼, 주변의 별빛과 성운의 색깔을 그대로 투과시키며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주변 공간이 미세하게 일렁였고, 그 중심에서부터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색깔을 정의하기 어려운, 온화한 무지갯빛이었다.

    “세상에….” 나루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게 뭐야…?” 강 기관사마저도 넋을 잃은 듯 중얼거렸다. 그의 거친 눈매에 순수한 경외감이 어린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유진은 조용히 카메라 줌을 최대로 당겼다. 이제 그 투명한 존재의 중심에서 나오는 빛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 빛은 정형화된 형태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가 숨을 쉬듯, 부드럽게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하며 주위 공간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에너지 패턴은… 여전히 동일합니다. 하지만 어떤 물리적 형태도 감지되지 않아요. 투명하다고 해도 빛을 반사하거나 굴절시켜야 하는데… 이건 그냥, *존재*하고 있어요.” 나루는 침을 꿀꺽 삼키며 분석 패널을 두드렸다. 모든 수치는 미지였다.

    “아무런 공격적인 신호도 없어. 그저… 거기에 있어.” 유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위협보다는 깊은 호기심이 배어 있었다. “접근할까?”

    강 기관사가 움찔했다. “함장님,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미지의 물질, 미지의 에너지원입니다!”

    “강 기관사, 자네는 이 우주선이 외계 문명을 만났을 때를 대비한 비상 매뉴얼을 전부 외우고 있지 않나?” 유진이 피식 웃었다.

    “그, 그렇지만 이건… 매뉴얼에도 없는 형태잖습니까!”

    유진은 나루를 바라봤다. 나루의 눈은 이미 그 투명한 유물에 홀린 듯 빛나고 있었다. “함장님, 저는…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요. 이게 뭔지 알아내야 해요.”

    “알겠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 기관사, 비상 탈출 준비와 동시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주게. 나루, 자네는 모든 센서를 활성화하고,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하도록.”

    별무리호는 우주를 유영하는 거대한 고래처럼, 조심스럽게 미지의 유물에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한 무지갯빛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프리즘 같았다.

    유물과의 거리가 단 100미터가 되었을 때였다.

    함교 전체에 묘한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에어컨 소리도, 기계음도, 심지어 승무원들의 숨소리마저도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듯했다. 모든 것이 희미해지는 느낌. 그리고 그 희미함 속에서, 나루는 아주 부드럽고 따뜻한 에너지가 자신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물리적인 접촉이 아니었다. 어떤 소리도, 냄새도 없었다. 그저, *느낌*이었다. 마치 어릴 적 엄마의 품처럼 포근하고, 모든 걱정을 잊게 만드는 편안함. 그녀의 마음속 깊숙이 묻어두었던, 오래된 그리움과 막연한 불안감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

    “…이게 뭐지?” 나루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스크린 너머의 유물을 향해.

    “나루 씨?” 유진이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나루는 그 목소리마저 멀게 느껴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무지갯빛 에너지가 그녀의 정신 속으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복잡했던 생각들이 하나둘 정리되고, 흐릿했던 기억들이 선명해졌다. 어린 시절, 숲속에서 길을 잃었을 때 느꼈던 막연한 두려움이,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다시 길을 찾았을 때의 안도감으로 변하는 경험. 그녀는 그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이상합니다, 함장님.” 강 기관사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엔진 출력에 이상은 없는데… 기분 탓인지, 몸이 묘하게 가벼워지는 것 같습니다.”

    유진도 팔을 들어 자신의 심박수를 확인했다. 평소보다 훨씬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에서, 오래전 고향 행성을 떠나올 때 느꼈던 아련한 향수와 우주에서의 고독감이 점차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알 수 없는 평온함과 잔잔한 행복감이었다.

    그들은 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빛에 완전히 잠식되어 있었다. 그것은 강렬한 빛도, 거대한 소리도 아니었다. 그저, 존재 그 자체만으로 주위를 치유하는 듯한 부드러운 파동이었다. 그 파동은 별무리호의 차가운 금속 벽을 뚫고 들어와 승무원들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을 어루만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루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이슬이 맺혀 있었다. 슬픔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나 큰 안도감과,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깨달은 듯한 벅찬 감동 때문이었다.

    “함장님… 강 기관사님…” 그녀의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촉촉했다.

    유진은 나루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도 편안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강 기관사는 자신의 거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마치 어미 고양이에게 기대는 아기 고양이처럼 묘한 평온함에 젖어 있었다.

    “신기하군.” 유진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발견한 걸까.”

    투명한 유물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부드러운 무지갯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우주선이 발견한 거대한 외계 문명의 흔적일 수도 있었고, 어쩌면 우주 그 자체가 남긴 태초의 흔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것이 별무리호의 승무원들에게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평온함과 깊은 치유를 선물했다는 것이었다.

    그날 밤, 별무리호의 항해일지에는 한 줄의 기록이 더해졌다.

    *…미지의 유물을 발견하다. 형태는 투명하며, 모든 감각을 넘어선 형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주에서의 외로움을 씻어주고, 마음속 깊은 곳에 잊고 있던 평온함을 일깨워주었다.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마주하게 될까?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별무리호는 새로운 목적지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지의 유물은 칠흑 같은 우주 속에서 여전히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은 마치 심연 속 한 조각의 꿈처럼 아련하게 뒤를 따르는 듯했다. 이제 그들은 알 수 없는 미래로 향하는 길 위에서, 가슴 한 켠에 새로운 희망과 궁금증을 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