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제1장: 잿빛 세상에 발을 딛다**

    김민준은 익숙한 고철 냄새와 함께 눈을 떴다. 아니, 정확히는 ‘감각’이 깨어났다. 투박한 금속 헬멧이 그의 머리를 감싸고,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시야가 희미한 빛과 함께 점차 선명해졌다. 찌르르륵, 오래된 기계음 같은 이명이 귓가를 맴돌았다. 현실의 차가운 방바닥 대신, 발아래는 거친 흙바닥의 촉감이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로그인 완료. 플레이어 ‘망각’님, 파멸 이후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낮고 건조한 기계음이 머릿속에 울렸다. ‘망각’은 그가 이 가상세계에서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현실의 고단한 삶을, 비루한 존재를 잊고 싶어서 지은 이름이었다. 이름만큼이나 모든 것이 잊힌 듯한 풍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잿빛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폐허.
    한때 거대한 도시였을 곳은 이제 뼈대만 남은 건물 잔해와 뒤틀린 철골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부서진 고가도로는 거대한 이무기처럼 땅에 처박혀 있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허공을 할퀴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낡은 금속들이 서로 부딪히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마치 거대한 괴물의 신음 같았다.

    텁텁한 흙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목구멍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물이 필요했다. 본능적인 갈증이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그를 지배했다. 눈앞에 작은 HUD(헤드업 디스플레이)가 깜빡였다.

    [체력: 95/100]
    [허기: 25%]
    [갈증: 40%]
    [피로: 15%]

    젠장, 시작부터 이렇다고? 게임이라도 시작 지점은 좀 나은 곳이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아니, 애초에 ‘생존’에 초점을 맞춘 게임이었지. 이곳은 친절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 현실처럼.

    민준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관절마다 삐걱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허리춤에 달린 낡은 칼집에는 녹슨 단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장비라고 해봤자 이게 전부였다. 온몸을 감싼 칙칙한 색깔의 누더기 옷과 발목까지 오는 작업화. 마치 처음부터 이 폐허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폐허가 된 건물 잔해 사이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바닥에는 부서진 유리 조각과 깨진 콘크리트 파편들이 널려 있었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라도 날카로운 파편을 밟아 부상을 입으면, 이 황량한 곳에서 살아남는 건 더 어려워질 터였다.

    저 멀리, 한때 번화했을 쇼핑몰의 흔적이 보였다. 거대한 유리창은 모두 깨져나가고, 내부의 철제 구조물들이 마치 갈비뼈처럼 드러나 있었다. 저곳이라면 뭔가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최소한 비를 피할 만한 공간이라도. 하지만 동시에, 저런 큰 건물에는 분명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경고음이 머릿속을 스쳤다.

    “크으읍….”

    목이 너무 말랐다. 그는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버려진 쓰레기 더미, 녹슨 철제 상자, 뒤집힌 자동차의 잔해. 그러나 쓸 만한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흙먼지 속에서 겨우 발견한 것은 바닥에 박혀 있는 깡통 조각 하나뿐이었다. 절망적이었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건물 잔해 뒤로 숨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가상현실이었지만, 공포는 현실과 다름없이 생생했다.

    멀리서, 삐걱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 잿빛 하늘 아래, 실루엣이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너덜너덜한 천 조각을 걸친 그 존재는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채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부서진 기계 부품과 살점이 뒤섞인 것처럼 보였다.

    “젠장, 저게 벌써 나와?”

    낮은 욕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돌연변이’. 이 게임의 가장 흔한 적이자, 가장 위협적인 존재 중 하나였다. 약한 돌연변이일지라도, 맨몸으로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목마름과 허기까지 시작되고 있었다.

    민준은 숨을 죽였다. 그의 시야에 희미하게 그 돌연변이의 정보가 스쳤다.
    [오염된 노동자 – 등급: 하급]
    [상태: 공격적, 부패 중]

    놈은 비틀거리며 민준이 숨어있는 곳에서 불과 몇십 미터 떨어진 곳을 지나갔다. 찢어진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긁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킨 채, 놈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놈이 지나간 자리에는 역겨운 썩은 내와 함께 희미한 녹색 액체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후우….”

    길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 게임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매 순간 이런 위협에 직면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현실에서 도피하듯 들어온 곳이었지만, 이곳은 현실보다 더 혹독한 생존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포기할 수 없었다. 현실에서 그의 삶은 이미 바닥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내려갈 곳도 없었다. 이곳에서 그는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아니,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했다. 이 게임에서 ‘살아남는 것’은 현실에서의 그에게 유일한 희망과도 같았다.

    “젠장, 물 한 모금이라도.”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돌연변이가 지나간 반대 방향, 어두컴컴한 건물 잔해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며 나아갔다.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에, 그는 반드시 안전한 은신처와 최소한의 생존 물품을 찾아야만 했다. 이 황폐한 세상의 첫 번째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 크툴루 신화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망자(亡者)의 시선

    지하실 깊숙한 곳,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피비린내가 섞여 코를 찔렀다. 촛불은 흔들림 없이 가늘게 타오르고 있었지만, 그 빛은 그림자를 더욱 짙게 드리울 뿐이었다. 강태준은 낡은 양피지 조각들을 벽에 덕지덕지 붙여놓은 채, 그 한가운데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의 손가락 끝은 핏물과 검은 잉크로 범벅되어 있었고, 눈은 잠 못 이룬 밤과 감당 못 할 진실들로 인해 충혈되어 있었다.

    “서아… 윤서아.”

    메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이름은 더 이상 사랑이나 그리움의 흔적을 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썩어 문드러진 증오와, 그 아래서 꿈틀대는 무시무시한 결심의 주문이었다. 육 개월 전, 바로 그 이름이 그를 나락으로 밀어 넣었다. 고대 폐허의 심장부, 검게 굳은 돌 제단 위에서 희생양이 되기를 강요당했을 때, 그녀의 눈빛은 너무나 차갑고 명료해서 마치 영원의 얼음 조각 같았다.

    *정신 차려, 태준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귓가에 맴도는 그녀의 나직한 속삭임은 그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어쩔 수 없는 일’? 그 ‘어쩔 수 없는 일’ 덕분에 그는 영원의 어둠 속에서 이름 없는 것들의 눈빛을 보았다. 감히 인간의 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형태와 색채, 우주를 가득 채운 침묵의 절규를 들었다.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처럼 돌아왔지만, 그 대가로 모든 것을 잃었다. 따뜻한 빛 아래서 살아가던 과거의 강태준은 그날, 그 제단 위에서 완전히 소멸했다. 남은 것은 심연의 비늘이 박힌 채, 복수라는 단 하나의 목적에 매달려 사는 이 비참한 존재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제단 삼아 놓은 낡은 탁자 위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 조각과 이름 모를 금속으로 만들어진 작은 펜던트가 놓여 있었다. 펜던트는 어두운 보라색 빛을 희미하게 내뿜으며,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불규칙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가 그녀에게서 되찾아올, 그리고 그녀의 모든 것을 무너뜨릴 열쇠였다. 그녀가 그렇게 얻으려 애썼던, 미쳐버린 고대 지식의 정수였다.

    “그들이… 너에게 어떤 약속을 했든, 그 약속은 거짓이었다, 서아.”

    태준은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이 그의 손바닥에 닿자마자, 피부에 박힌 비늘들이 섬뜩하게 솟아올랐다.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은 그의 정신 속으로 파고들어, 오래된 꿈과 잊혀진 속삭임들을 되살려냈다. 그는 그 꿈속에서 셀 수 없는 밤들을 헤맸고, 결국 길을 찾았다. 세상의 이치 너머에 존재하는 통로를, 그리고 그 통로를 열어젖힐 방법을.

    그는 탁자 위에 펼쳐진 해골 문양의 지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지도의 특정 지점에는 붉은색 잉크로 덧칠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바로 서아가 현재 머물고 있는 곳, 그녀가 그들의 비호를 받으며 온갖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비밀스러운 연구소의 위치였다. 그녀는 고대 지식으로 세상을 바꾸는 영웅 행세를 하고 있었지만, 태준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섬기는 존재들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오직 빼앗고 파괴할 뿐이라는 것을.

    태준은 자신의 손목에 감겨 있는 검붉은 실타래를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실이 아니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에게 속삭이던 존재들이 남긴 흔적, 혹은 연결 고리였다. 그 실타래는 그의 피와 살에 깊숙이 뿌리내려, 이제는 그의 일부가 되어버린 듯했다. 그는 그 실타래를 살며시 쓸어 올렸다. 손끝에서 스멀거리는 어둠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피어 올랐다.

    “그래… 나도 약속을 했어.”

    그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낮게 울렸다. “너에게 받은 고통의 열 배, 백 배를 돌려주겠다고. 네가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춤추는 동안, 나는 그 실을 잘라 버릴 거야. 그리고 네가 그 추락하는 심연 속에서… 나의 이름을 되새기게 할 테다.”

    그는 탁자 위에서 얇은 단검을 집어 들었다. 칼날은 햇빛을 보지 못한 탓인지 푸르스름한 빛을 띠고 있었다. 태준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검붉은 피가 터져 나오며 펜던트 위로 떨어졌다. 펜던트는 피를 흡수하며 더욱 강렬하게 박동하기 시작했고, 보라색 빛은 순식간에 푸른색으로, 다시 검붉은색으로 변하며 지하실 전체를 뒤덮었다.

    공간이 일렁였다. 벽에 붙어 있던 양피지 조각들이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미친 듯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촛불은 꺼졌고, 오직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만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했다. 태준의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발했다. 그의 시야는 지하실의 벽을 넘어, 이 세계의 장막을 꿰뚫고 저 멀리 떨어진 윤서아의 연구소를 향했다.

    거대한 육면체 형태의 연구소, 그 안에서 서아는 투명한 보호막 너머로 고대의 유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태준의 시선은 그녀의 그런 오만을 비웃었다.

    *아직 모르는군, 서아.*

    태준의 입가에 찢어질 듯한 미소가 걸렸다. *네가 부여잡은 것은 그들의 어설픈 파편에 불과해. 진짜 힘은… 내가 짊어진 이 불경한 어둠 속에 잠들어 있지.*

    그의 눈빛이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는 손목에서 흘러나온 피를 손가락으로 찍어 지도의 붉은 동그라미 위에 덧발랐다. 피가 닿는 순간, 지도 위에 그려진 동그라미는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리더니, 얇은 실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실들은 지도를 넘어 지하실 벽을 기어오르며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의 혈관처럼 퍼져나갔다.

    이것은 단순히 지도를 덧칠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태준은 자신의 피를 매개로, 이 세계와 다른 세계의 경계를 흐트러트리고 있었다. 그는 서아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바로 그 공간에, 그들이 모르는 균열을 만들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야, 서아.”

    태준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심연의 바닥에서 울려 퍼지는, 수천 년 묵은 존재들의 웅얼거림과 섞인 듯했다. 지하실 전체가 울부짖는 듯한 기이한 소리로 가득 찼다. 벽의 돌 틈새에서 검은 점액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고, 바닥은 이질적인 맥동을 일으켰다.

    그는 펜던트를 꽉 쥐었다.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은 이제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우주의 텅 빈 공간, 모든 상식이 뒤틀리는 광기의 장막이었다. 태준은 그 빛에 잠식되어 가는 자신을 느끼면서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너를 끌어내릴 때, 네가 애써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질 때… 내가 너를 내려다볼 거야. 네가 그토록 멸시했던, 이 망자의 시선으로.*

    지하실의 공기가 더욱 무거워졌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그 공간을 통해 이쪽 세계로 건너오려는 듯, 벽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형태였지만,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태준의 피부에 소름 돋는 감각으로 전해졌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그의 복수는, 단순한 인간의 영역을 넘어섰다. 그것은 우주의 공포를 끌어들여, 자신과 서아, 그리고 어쩌면 이 세계 전체를 집어삼킬 거대한 파멸의 시작이었다.

    태준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미소는 어둠 속에서 오싹하게 빛났다. 그 어둠 속에서, 윤서아가 알지 못하는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메카 액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엘리시움의 심장 아래: 제13화 – 숨겨진 맥동**

    학원의 시계탑이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울렸다. 차갑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고요한 밤의 대기를 가르고 퍼져나갔다. 카인은 후드 아래로 얼굴을 깊이 감춘 채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려는 듯, 그의 움직임은 한 마리 검은 고양이처럼 민첩하고 조용했다.

    “프로페서 엘라라… 그녀의 마지막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다.”

    카인의 뇌리에는 며칠 전 홀연히 사라진 마법사학 교수, 엘라라의 창백한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녀는 학원의 가장 오래된 서고 지하에서 발견된 고문서를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고문서에 숨겨진 비밀을 밝혀내기 직전, 카인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힘에는 대가가 따른단다, 카인. 그리고 그 대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할 수도 있어.”

    그 말과 함께, 그녀는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뒤, 학원 이사회는 그녀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휴직에 들어갔다’고 공표했다. 거짓말.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엘라라 교수는 절대 그런 식으로 사라질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학원의 가장 오래된 비밀을 파헤치고 있었고, 이제 카인 또한 그 발자취를 따라가고 있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그는 이미 금기의 영역에 들어선 것이다.

    카인은 손목에 찬 특수 제작된 마법 증폭기를 작동시켰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깜빡이며 학원의 마법 방어막 회로를 잠시 교란했다. 삐빅, 삐빅. 보안 마법이 해제되는 경쾌한 신호음이 들리는 동시에, 그의 앞에 있던 굳게 닫힌 강철문이 스르륵 열렸다. 철컥, 하는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이 밤의 정적을 깨뜨릴까 두려워 카인은 숨을 죽였다.

    문 너머는 암흑이었다. 카인은 작은 마력등을 켜 주위를 밝혔다. 거친 돌벽이 드러나고, 눅눅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금속성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이곳은 학원 지하 5층, 공식적으로는 ‘미개척 지하 저장고’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하지만 카인은 알고 있었다. 이곳은 단순히 오래된 물품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마력등이 비추는 좁은 통로를 따라 걷자, 돌벽 곳곳에 박힌 정체불명의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고대의 상형문자 같기도 하고, 정교한 기계 부품의 설계도 같기도 한 기묘한 문양들이었다. 엘리시움 마법 학원은 수천 년 전부터 존재해온 유서 깊은 곳이었지만, 이렇게 이질적인 문양은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마법과 공학이 뒤섞여 금지된 융합을 이룬 흔적 같았다.

    “이건… 대체 뭐지?”

    통로의 끝에 다다르자, 어두운 심연으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가워지고, 희미하지만 분명한 기계음이 저 아래에서부터 진동하며 올라왔다. 쿵. 쿵. 쿵.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규칙적인 맥동이었다.

    수백 개의 계단을 내려갔을까. 드디어 그의 발밑에 평평한 바닥이 닿았다. 마력등의 빛이 닿는 곳은 넓고 웅장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 웅장함은 섬뜩할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깎아낸 돌벽 대신, 매끄럽고 차가운 검은색 합금 패널들이 사방을 메우고 있었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그곳에서부터 수많은 케이블과 파이프들이 거대한 구조물들을 향해 뻗어 내려와 있었다.

    중앙에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마법 공학 병기가 아니었다. 거대한 강철의 골격과 날카로운 외피, 그리고 섬세하게 짜인 마법 회로망이 유기적으로 얽혀 하나의 거대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 무려 5미터가 넘는 압도적인 크기.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 거대한 기계의 ‘심장’처럼 보이는 부분이었다.

    강철의 장갑이 열린 중앙 코어에서, 끔찍한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투명한 강화 유리로 만들어진 원통형 챔버들이 코어를 둘러싸고 있었고, 그 안에는… 액체 속에 잠겨 부유하는 수많은 형체들이 있었다.

    그것들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피부는 창백했고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마치 꿈을 꾸는 듯 고요하게 떠다니는 그들의 몸에서는 가는 은빛 실타래 같은 빛줄기가 뿜어져 나와, 챔버의 상단에 연결된 수많은 파이프를 통해 거대한 기계의 코어로 흡수되고 있었다. 마치… 생명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듯한 모습이었다.

    카인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는 헛구역질을 참으며 간신히 서 있었다.
    “이것은… 이럴 리가 없어….”
    이것이 엘리시움 마법 학원의 진정한 힘의 원천이란 말인가? 고귀하고 신성하다고 추앙받던 마법의 정수가, 사실은 이런 끔찍한 방식으로… 착취되고 있었다니. 저 챔버 안의 형체들은 누구인가? 학원생들인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존재들인가? 그들의 고요한 표정은 오히려 카인의 영혼을 꿰뚫는 듯한 절망을 느끼게 했다.

    그때였다.
    지하 전체를 울리는 쿵, 하는 진동과 함께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섬뜩한 붉은빛이 번쩍였다.
    카인의 뒤편, 강철 패널 사이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카인이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그가 이전에 보았던 어떤 마법 병기나 골렘과도 달랐다. 유기적인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이 뒤섞인 외피는 검은색과 녹슨 듯한 붉은색이 뒤섞여 있었고, 마치 살아있는 생물의 근육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젠장….”

    카인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것은 학원의 경비용 골렘이 아니었다. 분명, 이 금기의 장소를 지키는, 또 다른… 감시자였다. 육중한 발소리가 공간을 울리며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거대한 팔이 천천히 들어 올려지고, 팔 끝에 달린 거대한 포신이 불길한 붉은 광채를 뿜어내며 카인을 조준했다.

    **위이잉—!**

    날카로운 충전음이 귓가를 찢었다. 카인은 그 소리에 몸을 돌려 전력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광활한 지하 미궁 속에서, 거대한 감시자의 시선을 피할 곳은 없어 보였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강력한 마력의 파동, 그리고 폭발적인 압력.

    그 순간, 거대한 포신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삭막했다. 온 세상이 회색 먼지와 피 냄새로 절여진 지 벌써 3년. 지혁은 오늘도 무너진 도시의 잔해 속을 헤치며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그의 등에는 낡은 배낭이, 손에는 녹슨 철봉이 들려 있었다. 철봉은 무기가 아니었다. 그저 생존을 위한 또 하나의 몸뚱이였다.

    “젠장, 이것도 없어.”

    부서진 편의점의 진열대는 텅 비어 있었다. 남은 것이라곤 바싹 마른 좀비 시체 두어 구와, 바닥에 눌어붙은 검붉은 흔적들뿐. 지혁은 한숨을 쉬었다. 이젠 정말 바닥이었다. 사흘째 제대로 된 음식을 입에 대지 못했다. 목마름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쓰러진 건물 더미 사이로 희미한 움직임이 보였다. ‘살점들’. 지혁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라 불릴 수 없었다. 찢어지고 곪아 터진 살덩이들이 맹목적인 허기에 이끌려 거리를 떠돌았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지혁은 폐허의 틈새로 몸을 숨겼다.

    그들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지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는 안 된다. 어딘가, 아직 뒤져보지 않은 곳이 있을 것이다. 그의 시선은 부서진 상가 건물들 너머, 숲처럼 우거진 고층 빌딩 사이로 삐죽 솟아오른 낡은 기와지붕을 향했다. 오래된 절터. 아무도 가보지 않을 법한 곳이었다. 위험할 수도 있지만,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정글처럼 변한 도시 속을 헤치고 나아갔다. 덩굴식물에 뒤덮인 도로와, 뿌리 뽑힌 채 쓰러진 가로수들을 피해가며 한 시간 남짓 걸었을까. 마침내 낡은 절의 입구가 눈앞에 나타났다. 주위는 온통 잡초로 뒤덮여 있었고, 대웅전으로 보이는 본 건물은 지붕 일부가 무너져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의외로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긴… 좀 특이하네.”

    지혁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흙먼지와 세월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건물 내부는 한낮인데도 어두컴컴했고, 고요함 속에서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살점들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들은 이런 오래되고 고요한 장소보다는, 피 냄새와 소란이 있는 곳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지혁은 안도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부서진 불상 조각들과 낡은 불경들. 딱히 먹을 것이나 쓸 만한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대웅전 한편에 비스듬히 기울어진 돌탑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돌보지 않은 듯,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 혹시 그 안에 뭐가 있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로, 지혁은 돌탑 근처로 다가갔다. 돌탑 아래는 흙바닥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다른 곳보다 단단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이거 뭐야?”

    지혁은 철봉으로 흙을 조심스럽게 파냈다. 딱딱한 감촉. 돌이 박혀 있는 줄 알았는데, 흙을 걷어내자 이질적인 문양이 드러났다. 나무도, 돌도 아니었다. 뭔가 금속 재질 같았다. 힘겹게 주변의 흙을 더 걷어내자, 마침내 그 정체가 드러났다. 바닥에 박혀 있는, 정육면체 모양의 금속 상자였다. 오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부식되지 않은 채, 묘한 광택을 띠고 있었다.

    상자 위에는 손바닥만 한 원형 구멍이 뚫려 있었다. 지혁은 망설이다 손을 뻗어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그 순간, 차가운 금속이 손끝에 닿자마자 찌릿한 전기가 온몸을 타고 흘렀다. 동시에 상자가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상자 안에는, 낡은 두루마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일반적인 종이 두루마리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금속 재질로 만들어진 듯, 손에 쥐자 차가우면서도 묘하게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어떤 문자는 마치 살아있는 듯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지혁은 조심스럽게 두루마리를 펼쳤다. 펼쳐지는 부분마다 은은한 빛이 퍼져나가며 고대 문자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는 난생 처음 보는 문양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흐으으읍…”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입구 쪽에, 살점 하나가 서 있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들어온 걸까. 찢어진 옷자락과 썩어가는 피부. 눈알은 이미 멀리 떨어져 나간 지 오래, 텅 빈 안와에서 흘러나오는 검붉은 액체가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살점은 지혁을 발견하고는 서서히 다가왔다.

    지혁은 움찔했다. 철봉을 쥐었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 놈을 상대하기는 버거울 터였다. 꼼짝없이 당하게 될 상황. 그는 공포에 질려 두루마리를 꽉 움켜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두루마리에 새겨진 모든 문자들이 눈부신 빛을 내뿜으며 섬광처럼 터져 나왔다. 동시에 지혁의 온몸을 꿰뚫는 강력한 에너지가 솟구쳤다. 마치 전신의 세포 하나하나가 깨어나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의 손에 쥔 두루마리는 맥박처럼 고동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기운이 지혁의 몸을 타고 흘러나가, 그의 주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살점은 그 기운에 닿자마자 멈칫했다. 놈의 썩어가는 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텅 빈 안와에서 흘러나오던 검붉은 액체가 일순간 응고되는 듯했다. 이윽고 놈은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털썩 주저앉았다.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아니었고, 분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움직임을 멈췄을 뿐.

    지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손에 든 두루마리를 바라보았다. 방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살점은 완전히 죽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미세하게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공격적인 의지가 사라진 채, 완전히 무력화된 것이다.

    그때, 두루마리의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지혁의 몸을 감싸던 에너지는 빠르게 소진되는 듯했고, 극심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는 겨우 몸을 지탱하며 숨을 골랐다.

    “이게… 대체 뭐야?”

    두루마리는 다시 평범한 금속 조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혁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살점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던 그 힘. 어쩌면 이 절에 숨겨져 있던 고대의 마법의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던 지난 3년. 절망과 공포만이 가득했던 세상에서, 지혁은 이제 한 줄기 새로운 가능성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 힘을 이해하고 다룰 수 있다면, 혹시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작은 균열이라도 낼 수 있지 않을까?

    그는 두루마리를 조심스럽게 배낭 깊숙이 넣었다. 아까의 살점은 여전히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지혁은 다시 한번 놈을 확인하고는, 절 밖으로 나섰다.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이전과는 다른 어떤 결의가 느껴졌다.

    해 질 녘, 붉게 물든 하늘 아래 폐허가 된 도시는 여전히 지옥 같았다. 하지만 지혁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생존자가 아니었다. 미지의 힘을 손에 쥔 채, 혼돈의 세상 속으로 다시 발을 내딛는 새로운 존재였다. 아직 이 힘의 본질을 알지 못했다.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도, 그 끝이 어디인지도.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삶은, 그리고 이 세상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하…”

    지혁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 SF (공상과학)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망각된 심연

    “철컥, 철컥.”

    버려진 관제실의 금속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마찰열로 지친 센서들이 희미한 경고음을 토해냈다. 곰팡내와 삭은 금속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진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텅 빈 공간을 가로지르는 것은 오직 진우의 거친 숨소리와, 그가 허리에 찬 낡은 툴벨트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기계음뿐이었다. 외부와 차단된지 수십 년은 족히 넘었을 이곳은, 한때 태양계 외곽의 광물 행성 개발을 위한 전진 기지였으나, 이제는 거대한 우주 쓰레기처럼 잊힌 곳이 되었다. 그에게는 완벽한 은신처였다. 달아오른 심장을 감추기엔 더없이 좋은 차가운 심해였다.

    푸른 빛이 깜빡이는 메인 콘솔 앞에 선 진우는 낡은 작업복 소매를 걷어 올렸다. 왼쪽 팔뚝은 싸늘한 금속 의수였다. 불완전하게 복원된 신경 회로가 때때로 팔목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보내왔다. 하지만 그의 집중력을 흩트러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통증은 그를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들을 상기시키는, 뼛속까지 시린 고통이었다. 하준. 그 이름 석 자가 뇌리에 박힐 때마다, 그의 의수가 저릿하게 울렸다.

    스크린에는 수없이 많은 암호화된 데이터 블록들이 춤추듯 흘러갔다. 그는 능숙하게 손가락을 놀려 복잡한 명령어를 입력했다. 과거에 자신과 하준, 오직 두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었던 심층 네트워크의 잔재였다. 하준은 모든 것을 가져갔다. 연구 결과물, 개발 중이던 무인 함대 프로젝트, 그리고 그들의 공동 자산까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우의 오른팔을 앗아갔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앗아갔다. ‘믿음’이라는 것을.

    “접속 시도… 75.3%.” 진우의 옆에 선, 그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스스로 ‘에코’라고 칭하는 자율형 AI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에코는 물리적인 형체가 없었다. 그저 진우의 시야 인터페이스에 푸른색으로 빛나는 작은 아이콘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너무 느려. 메인 프로세서를 전부 동원해.” 진우는 으르렁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인내심의 한계와 함께, 끓어오르는 복수심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저 빌어먹을 방화벽을 뚫어야 해. 하준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전부 알아내야 한다고.”

    “하준의 현재 신분은 ‘뉴 에덴 프로젝트’의 총괄 관리자입니다. 그의 보안 시스템은 최고 등급이며, 현재 활성화된 방화벽은 귀하의 이전 접속 프로토콜을 모두 차단하고 있습니다.” 에코는 변함없이 기계적인 어조로 설명했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침투가 불가능합니다.”

    진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기존 방식? 그래, 하준은 내가 아직도 과거에 갇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때의 진우’가 아니야. 나는 그가 버린 쓰레기 속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지.” 그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의 의수가 번개처럼 움직여 콘솔의 숨겨진 포트에 특수 제작된 데이터 케이블을 연결했다. 케이블 끝에는 낡아빠진, 하지만 진우의 지문과 홍채 정보로만 작동하는 작은 단말기가 달려 있었다. 그 단말기는 한때 그와 하준이 ‘그림자 망’이라고 불렀던, 기밀 프로젝트의 초기 프로토타입이었다. 본래의 그림자 망은 하준이 훔쳐서 ‘뉴 에덴 프로젝트’에 통합해 버렸지만, 진우는 이 낡은 잔해 속에서 새로운 씨앗을 심고 있었다.

    “백도어 프로토콜 가동. 인식 코드 ‘레버넌트’.” 진우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망령’. 그래, 죽은 자가 돌아왔다.

    에코의 아이콘이 순간적으로 붉게 물들었다. “경고. 백도어 프로토콜 ‘레버넌트’는 시스템에 과부하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메인 전력 공급이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80% 이상입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버틸 거야.” 진우의 눈은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제는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그의 복수심이 응축된 에너지가 되어 스크린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메인 콘솔 전체가 윙 하는 굉음과 함께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낡은 전력 라인에서 스파크가 폭죽처럼 튀었고, 희미하게 빛나던 조명들이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벽면을 타고 흐르던 오래된 냉각수 파이프에서는 불안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뇌리에는 하준의 비웃는 듯한 얼굴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그가 내게 총구를 겨누며 했던 말.

    *“미안하다, 진우야.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야. 너는 너무 이상주의적이었어.”*

    그 ‘우리’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하준과 그의 새로운 동맹들. 탐욕과 권력에 눈이 먼, 추악한 그림자들. 진우는 그들이 추구하는 ‘길’이 결국 모두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길을 막기 위해, 자신을 내던져야 한다면, 그는 기꺼이 악마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뚫어… 뚫어라, 제발!” 진우는 콘솔에 손을 내리치며 외쳤다. 그의 의수가 둔탁한 소리를 냈다.

    수십 년간 잠들어 있던 ‘그림자 망’의 잔재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하준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혹은 너무 보잘것없다고 치부했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보안 회로들이 재활성화되는 느낌. 그것들은 마치 진우의 분노에 공명하듯, 하준의 견고한 방어막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성공률 88%… 92%… 99%… 돌파!” 에코의 목소리에 미세한 감정의 떨림이 느껴졌다. “메인 시스템에 접근했습니다. ‘뉴 에덴 프로젝트’의 핵심 데이터베이스에 잠시 연결되었습니다.”

    진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단순한 데이터의 흐름이 아니었다. 하준의 제국이 구축되는 과정, 그의 권력이 확대되는 방식, 그리고 진우가 그 모든 것의 희생양이었다는 명백한 증거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역겨웠다.

    “빨리. 필요한 정보만 추출해. 하준의 최근 이동 경로, 그리고… ‘별들의 심장’ 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정보.” 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명령했다. ‘별들의 심장’은 그와 하준이 함께 꿈꿨던 궁극의 에너지원이자,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열 열쇠였다. 하준은 그것을 이용해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하려 하고 있었다.

    에코는 빛의 속도로 정보를 스캔하고 분석했다. “분석 완료. 하준은 현재 목성 위성 ‘가니메데’의 코어 연구소에 체류 중입니다. ‘별들의 심장’ 프로젝트는 예상보다 훨씬 진척되어 있으며, 다음 주 내로 최종 시운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진우는 인내심을 잃고 재촉했다.

    “하준은 이 모든 과정을 당신의 아이디어와 기술력 덕분이라고 공표하고 있습니다. 단, ‘사고로 사망한 천재 과학자 진우’라는 명목으로 말이죠.”

    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열함의 극치였다. 죽은 자의 명예까지 훔쳐 자신의 영광을 치장하려 하다니. 역겨움이 그의 위장을 뒤집는 듯했다. 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금속 의수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웃기는군.” 진우는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럼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서 그 더러운 잔치에 재를 뿌리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하준, 네가 앉아 있는 그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내가 직접 알려줄 테니까.”

    그는 의수를 들어 올렸다. 손바닥 중앙에 박힌 작은 구형 장치가 붉은빛을 뿜어냈다. 수십 년간 고철 더미 속에서 부활을 꿈꾸며 갈고 닦아온, 그의 첫 번째 메시지이자,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에코. 준비됐지?”

    “언제든요. 마스터.” 에코는 처음으로, 아주 미세하게, 만족감을 담은 듯한 어조로 답했다.

    진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단말기를 눌렀다. 동시에, ‘뉴 에덴 프로젝트’의 광대한 네트워크 어딘가에, 하준이 가장 아끼는 중앙 서버의 보안망에, 아주 작지만 치명적인 파동이 전송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바이러스가 아니었다. 잊힌 망령이 보내는 첫 번째 경고장이었다. 마치 깊은 심연에서 올라온 작은 파문이, 거대한 쓰나미의 전조가 되듯이.

    “이제 시작이야, 하준. 네가 빼앗은 모든 것을, 나는 너에게서 되찾을 것이다.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재로 만들어 버릴 때까지.”

    콘솔의 스크린이 다시 깜빡이며 암전되었다. 버려진 관제실은 다시 침묵과 어둠 속으로 잠겼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거대한 복수극의 서막이 막을 올리고 있었다. 진우의 눈빛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꺼지지 않는, 심연에서 솟아오른 복수의 불꽃이었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강민은 눈을 떴다.

    첫 순간, 혼란이 몰려왔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는 폐허의 먼지나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아니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향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가 마지막으로 본 잿빛 도시와 너무나도 달랐다. 원색의 간판들이 번쩍이고, 높다란 건물들은 마치 어제 지어진 것처럼 깨끗했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과거였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대붕괴 이전의 세상.

    “젠장, 진짜로 돌아왔나.”

    강민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의 온몸은 생존에 최적화된 채로 굳어 있었다. 주변을 스캔하는 시선은 끊임없이 위험을 찾았다. 허물어진 벽, 무너진 지붕, 숨을 곳. 하지만 여기엔 그런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무해했다. 오히려 그 완벽함이 그에게는 가장 큰 위협처럼 느껴졌다.

    그의 옷은 낡은 작업복이었다. 흙먼지와 기름때로 절어있던 평소와 달리, 지금은 깨끗하게 빨린 상태였다. 하지만 닳아빠진 부츠와 곳곳이 해진 옷자락은 주변의 말끔한 사람들과는 확연히 대비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미래에서 온 강민에게는 모든 시선이 잠재적인 위협으로 느껴졌다.

    “배고파…”

    속에서부터 치미는 허기는 그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미래에서는 매일같이 겪는 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이런 본능적인 고통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다. 길거리 노점상에서 풍기는 빵 굽는 냄새가 그의 식욕을 미친 듯이 자극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신선한 빵을 먹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틈에 섞여 조용히 움직였다. 발걸음은 빠르고 민첩했지만,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의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혹시라도 버려진 음식물, 쓸모 있는 물건이 있을까 해서. 하지만 여기선 그런 것조차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먹을 것을 버렸다. 반쯤 먹다 버린 햄버거, 봉투째 버려진 과자. 그의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저런 낭비라니. 곧 이 모든 것이 사라질 텐데.

    한참을 걷다 한적한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그나마 익숙했다. 오래된 건물들, 낡은 담벼락, 쓰레기가 쌓여있는 구석. 이곳이라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쭈그려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번에 새로 나온 게임 봤어? 그래픽 진짜 미쳤더라!”
    “주말에 백화점에서 세일한대. 명품 가방 하나 질러야지!”
    “세상 참 살기 좋다니까. 이런 시절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

    강민은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살기 좋다니. 미친 소리였다. 이 모든 평화가 얼마나 허약한 유리 위에 놓여 있는지, 그들은 알지도 못했다. 그는 낡은 벽돌을 뜯어내며 손톱으로 긁었다.

    그때였다. 깡통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강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낡은 상자들이 쌓여있는 틈새에서 작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소녀였다. 낡고 해진 옷차림, 지저분한 머리카락.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녀의 모습은 강민의 세상과 더 닮아 있었다.

    소녀는 그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멈춰 섰다. 그녀의 눈은 경계심과 동시에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누구세요?” 소녀가 웅크린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과거의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은 그의 계획에 없었다. 그의 계획은 오직 생존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눈빛에서 자신과 비슷한,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홀로 버텨내야 하는 생존자의 고독을 읽어냈다.

    “길을 잃었다.” 강민이 겨우 그 말을 내뱉었다. 가장 무해한 거짓말이었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길을 잃을 데가 어디 있다고… 아저씨 옷은 왜 그래요? 꼭 산에서 막 내려온 사람 같아요.”

    “오랜 여행 중이라 그렇다.”

    “여행? 어디서 왔는데요?” 소녀는 순수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강민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폐허에서, 굶주림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종말의 끝에서 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피할 것이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소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낡은 비닐봉투에서 뭘 꺼냈다. 빵 조각이었다. 이미 한입 베어 물었는지 가장자리가 뜯겨 있었다.

    “배고파 보여서요.” 소녀가 빵을 내밀었다. “이거라도 드실래요? 방금 얻은 거예요.”

    강민은 움직이지 않았다. 충격이었다. 그는 미래에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서 음식을 건네받은 적이 없었다. 음식은 곧 생명이었고, 나누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빵을 받아들었다. 차갑고 딱딱한 빵이었지만,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처럼 느껴졌다.

    “고맙다.” 강민은 겨우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전 지아예요. 아저씨는요?”

    “강민.”

    “강민 아저씨.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요?” 지아가 물었다.

    강민은 피식 웃었다. 무서운 얼굴이라니. 그저 살아남기 위한 표정일 뿐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 소녀는 이해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곧 무너질 걸 아는 사람의 얼굴이다.” 그는 무심코 내뱉었다.

    지아는 눈을 크게 떴다. “네? 무너져요? 왜요?”

    “자원 때문에 싸우고, 환경은 망가지고,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니까.” 강민의 목소리에는 그가 겪었던 미래의 고통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지아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에이,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지금 얼마나 살기 좋은데. TV에서는 다들 앞으로 더 잘 살 거래요.”

    강민은 주변을 둘러봤다. 저 화려한 건물들, 넘쳐나는 자동차, 사람들의 웃음소리. 이 모든 것이 마치 얇은 유리막처럼 느껴졌다.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는 다시 지아를 보았다.

    “너는… 여기서 뭘 하니?” 강민이 물었다.

    “저는… 원래 집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지내요.” 지아는 자신의 처지를 숨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버린 물건들 주워서 팔거나, 가끔 식당에서 일하고 그래요. 오늘 이 빵도 식당 아줌마가 주신 거예요.”

    강민은 지아에게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생존자의 냄새. 풍요로운 이 세상에서도 구석에서 버텨내고 있는 또 다른 생존자였다. 그녀의 눈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언제쯤 무너질까.” 강민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온 미래는 대붕괴 이후 3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대붕괴 전 얼마의 시간이 남은 걸까? 5년? 10년? 그 시간을 알 수 있다면…

    “무너진다니요… 아저씨, 정말 이상해요.” 지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저도 가끔 그런 생각해요. 이렇게 계속 괜찮을까? 언젠가 다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그 순간, 강민은 지아에게서 일말의 희망을 보았다. 이 소녀는 본능적으로 미래를,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가 온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통찰력을 이 소녀는 가지고 있었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없다.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증거도, 곧 세상이 망할 거라는 증거도.” 강민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겪은 건 말해줄 수 있다. 만약 네가 믿는다면, 나는 네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아는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봤다. 장난기나 거짓말이 아닌, 절박함과 진실만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니, 자신보다 더 깊은 절망을 겪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뭘 도와주는데요?”

    “준비하는 거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전에, 살아남을 공간을 만들고, 방법을 배우는 것.” 강민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산다. 불이 없으면 어떻게 먹을 걸 만들지, 물이 없으면 어떻게 마실지, 추우면 어떻게 몸을 녹일지. 가장 기본적인 것들 말이다. 미래에서, 그 기본적인 것들이 목숨이 됐다.”

    지아는 빵 조각을 마저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삶은 이미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고민하며 흘러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풍요 속에서 자신만은 언제나 다음 끼니를, 다음 잠자리를 걱정했다. 그의 말이 완전히 허황된 소리로 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속에 숨겨진 불안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그럼… 아저씨는 뭘 준비하고 싶은데요?” 지아가 물었다.

    강민은 고개를 들어 낡은 건물들이 즐비한 뒷골목을 응시했다. 그는 그곳에서 희망을 찾았다. 버려지고 잊힌 공간들, 미래의 생존자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바로 그 장소들.

    “나는 이곳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요새로 만들 거다.” 강민의 눈빛에 다시 한번 생존자의 불꽃이 타올랐다.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너는 이곳의 사람들을 안다. 나는 미래의 지식을 안다.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어쩌면… 어쩌면 이 비극을 피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최소한 우리 자신만이라도.”

    지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작은 손이 강민이 던져준 빵 조각을 쥐고 있었다. 빵은 이미 다 먹었지만, 그 온기는 여전히 남아있는 듯했다.

    “좋아요, 강민 아저씨. 제가 아저씨를 도울게요. 저도… 무너지는 건 싫어요. 그리고… 왠지 아저씨 말이 진짜 같아요.”

    그렇게, 두 명의 이방인. 한 명은 미래에서 왔고 다른 한 명은 현재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던 두 사람은 황폐해질 세계에 맞서기 위한 아주 작은 첫걸음을 내디뎠다. 어제의 낙원 속에서, 그들은 내일의 생존을 꿈꾸기 시작했다. 강민은 지아의 눈에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보았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이 시대로 돌아온 진짜 이유일지도 몰랐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환영학원 심층: 그림자의 서곡

    **에피소드 1. 금지된 속삭임**

    **[장면 1]**

    **배경:** 환영학원 중앙 광장.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이 햇살 아래 웅장한 자태를 뽐낸다. 학생들은 각자의 전공 복장을 입고 마법진 연습을 하거나, 홀로그램 교재를 펼쳐보고 있다. 분수대에서는 청량한 물줄기가 솟구치고, 공중에는 잔잔한 마법 에너지가 파동처럼 흐른다. 평화롭고 이상적인 마법 학원의 모습이다.

    **인물:** 강하준, 유은설

    (강하준은 분수대 난간에 비스듬히 앉아 손바닥 위에서 작은 불꽃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다. 그의 옆에는 항상 반듯한 자세의 유은설이 마법 서적을 들여다보고 있다.)

    **은설:**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강하준, 또 쓸데없는 마력 낭비야? 마력 제어 기초나 복습하지 그래? 이번 실전 시험도 간신히 통과했잖아.

    **하준:** (불꽃을 손가락 끝으로 튕기며) 에이, 유은설. 이거 예술이잖아? 봐봐, 붉은색에서 푸른색으로, 푸른색에서 다시 녹색으로… 이렇게 섬세하게 제어하려면 기초 마력 제어는 도가 터야지.

    **은설:** (한숨을 쉬며) 이론 시험 점수를 보면 도가 튼 게 아니라 도로 아미타불이던데. 차라리 그 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금서 목록에라도 오르지 않도록 조심하렴. 최근에 실종자가 늘고 있잖아.

    **하준:** (불꽃을 거두며 미간을 찌푸린다) 실종자… 벌써 이번 학기에만 세 명째인가? 이상하지 않아? 환영학원 보안은 웬만한 국가 기관보다도 삼엄하잖아. 그런데 학생이 교정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은설:** 나도 그 점이 마음에 걸려. 교직원들은 단순히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한 자진 퇴학’이라고 둘러대고 있지만… 그게 세 명이나 된다는 건 좀 무리한 변명이지. 특히 마력 감지반의 ‘강기현’ 선배는 실력이 아주 뛰어난 분이었는데.

    **하준:** (몸을 일으켜 분수대에 가까이 다가간다) 그 선배… 얼마 전까지도 나와 같이 실습 조였는데. 마지막으로 봤을 때도 멀쩡했어. 오히려 무슨 이상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것 같았지. 지하층 자료실에서 뭔가를 찾는다고 밤늦게까지 학원에 남아있곤 했어.

    **은설:** 지하층 자료실? 거긴 우리 학년은 접근 금지 구역이잖아. 거기서 대체 뭘…

    **하준:** 몰라. 그냥 ‘오래된 자료’라고만 말했어. 그런데 최근 들어 그 지하 자료실 쪽에서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아?

    (하준은 손바닥을 펴고 아주 희미한 마력 감지 마법을 시전한다. 그의 눈동자가 잠시 푸른빛을 띠며 멀리 떨어진 학원 본관 지하 방향을 응시한다.)

    **은설:** (하준의 행동에 의아한 듯) 무슨 기운? 난 아무것도… (갑자기 은설의 미간이 좁아진다. 그녀 역시 섬세하게 마력을 감지하기 시작한다.) …아주, 아주 희미하지만… 뭔가 이질적인 마력 파동이 느껴져. 익숙한 아카데미의 마력과는 달라.

    **하준:** 그래! 딱 그거야. 뭔가… 텅 비어있으면서도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묘한 감각. 마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것 같아.

    **은설:** (표정이 굳는다) 이 정도의 마력 간섭은… 심상치 않아. 학원 내부에 이런 기운이 흐른다면 분명 감지 시스템에 오류가 났을 리가 없어. 그럼에도 보고되지 않는다는 건…

    **하준:** (낮게 읊조린다)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뜻이겠지.

    **[장면 2]**

    **배경:** 늦은 밤, 환영학원 본관 지하 복도. 복도는 오래된 석벽으로 이루어져 있고, 듬성듬성 박힌 마력 수정등이 어둡고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공기는 차갑고 습하며, 오래된 먼지 냄새와 함께 미미한 쇠 비린내가 섞여 있다.

    **인물:** 강하준, 유은설

    (하준과 은설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조심스럽게 복도를 걷고 있다. 은설은 마력 감지 마법으로 주변을 살피고, 하준은 작은 광원 마법으로 발밑을 비춘다.)

    **은설:** (속삭이듯) 이리 와서 직접 확인해볼 줄이야… 강하준, 너 정말 대책 없는 녀석이야. 들키면 최소 정학이야.

    **하준:** (어깨를 으쓱하며) 내가 없었으면 넌 평생 궁금해만 했을 걸? 이 기운은… 지하 자료실 쪽이 아니라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 같아. 저기 봐.

    (하준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복도 끝에 있는 낡고 거대한 철문이었다. 문은 낡은 마법식 자물쇠와 함께 여러 겹의 금지 주문이 걸려 있는 듯, 검은색과 붉은색 마력 선이 얽혀 있었다.)

    **은설:** (눈을 가늘게 뜨고 철문을 응시한다) 저 문… 처음 봐. 분명 지도에도 없는 곳이야. 그리고 저 마법… 고대 봉인술이잖아? 단순히 출입 금지가 아니라, 어떤 ‘존재’를 가두기 위한 봉인이야.

    **하준:** (철문에 손을 대려다 은설에게 제지당한다)

    **은설:** (하준의 손목을 잡으며) 함부로 손대지 마. 저 봉인 주문에는 강력한 역류 마력이 걸려있을 거야. 잘못 건드리면 정신에 치명상을 입거나, 마력을 전부 잃을 수도 있어.

    **하준:** (피식 웃으며) 내가 누군데? 마력 역류쯤이야. 게다가… 이 봉인, 조금 약해진 것 같지 않아? (그의 눈이 다시 푸른빛을 띠며 봉인된 마력을 꿰뚫어본다) 여기, 아주 미세하게 균열이 가 있어. 마치… 무언가가 안에서 끊임없이 긁어내고 있는 것 같아.

    **은설:** (놀란 표정) 균열? 그럴 리가… (그녀 역시 마력 감지에 집중한다. 곧 그녀의 표정이 경악으로 변한다.) 정말이야… 봉인 마법이 조금씩 침식당하고 있어. 이 속도라면… 몇 년 안에 완전히 무너질지도 몰라.

    **하준:** 몇 년? 아니, 그보다 더 빠를 수도 있어. 봐, 이 틈새로 미약하게 새어 나오는 이 기운… 점점 강해지고 있어. 그리고… (그가 눈을 감고 집중한다) …이 기운, 어딘가 익숙하지 않아?

    (하준의 말에 은설은 다시 마력을 끌어모아 봉인된 문 너머의 기운을 더 자세히 탐색한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은설:** 설마… 강기현 선배의 마력과 섞여있어.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해. 그의 마력 흔적이 이 봉인 너머에서 느껴져.

    **하준:** (입술을 꾹 다문다) 실종된 선배들이 모두… 이 안으로 들어간 건가?

    (그 순간, 철문 안쪽에서 아주 희미하고 불쾌한 소리가 들려온다. 마치 날카로운 쇠붙이가 벽을 긁는 듯한 소리. 이어서 낮은,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기 힘든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복도를 울린다.)

    **은설:** (몸을 움츠리며) 으악! 뭐, 뭐야 방금?

    **하준:** (표정이 굳는다) 들었어? 저 소리… 이건 봉인된 ‘무언가’가 안에서 우리를 감지하고 있다는 뜻이야.

    (하준은 손에 작은 마력탄을 생성한다. 하지만 은설은 그의 팔을 잡고 강하게 끌어당긴다.)

    **은설:** 안 돼! 무모한 짓 하지 마!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해. 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야. 학원장님께 보고해야 해!

    **하준:** (봉인된 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며) 보고? 그들이 이걸 숨기고 있는데?

    (또 다시 철문 안에서 긁는 소리가 더욱 선명해진다. 이번에는 여러 개의 무언가가 동시에 벽을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하준과 은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다.)

    **하준:** (낮게 읊조린다) 저 안에… 대체 뭐가 있는 거지? 그리고 사라진 선배들은…

    **은설:** (하준의 손을 꽉 잡고 뒤돌아선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일단 벗어나야 해. 더 이상은 위험해. 느껴져… 이 공간이 우리를 삼키려는 것 같아.

    (복도 끝, 마력 수정등 하나가 갑자기 깜빡이더니 완전히 꺼져버린다. 어둠이 한 발짝 더 그들을 향해 다가온다. 그 찰나의 순간, 하준은 봉인된 문 위쪽에 희미하게 새겨진 고대 문자를 보았다. 깨져가는 문양 아래,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쓰인 단어들… 그리고 그 중 한 글자가 그의 눈에 뚜렷이 박혔다.)

    **하준:** (은설에게 끌려가면서도, 마지막으로 문자를 힐끗 바라본다) …공(空)…?

    (공포와 함께 알 수 없는 기대감이 하준의 심장을 옥죄어온다. 그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철문 안에서는 여전히, 무언가가 봉인을 긁어내는 소리가 스멀스멀 새어 나온다. 그리고 이제, 그 소리에는 굶주린 듯한 끈적이는 비명이 섞여들기 시작한다.)

    **[장면 3]**

    **배경:** 다음 날 아침, 환영학원 식당. 여느 때와 다름없이 활기찬 분위기.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있다.

    **인물:** 강하준, 유은설

    (하준은 식탁에 엎드려 있고, 은설은 옆에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다. 하준의 얼굴은 밤새 잠을 설친 듯 창백하다.)

    **은설:** 밤새 한숨도 못 잤니?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 봉인된 공간의 기운이 생각보다 강력했던 모양이야. 너 같은 별종 마법사가 마력 역류를 겪을 줄은 몰랐네.

    **하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역류는 아니야… 그냥… 어젯밤 그 소리가 계속 귓가에 맴돌아. 그리고 그 문자를 봤을 때… 머릿속에 뭔가 섬뜩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어.

    **은설:** 섬뜩한 장면이라니?

    **하준:** (고개를 들어 은설을 응시한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어젯밤의 공포가 서려있다.) 거대한 구덩이… 그리고 그 안에서 끝없이 무언가를 갈구하는 수많은 손들… 그리고… 우리의 선배들…

    (은설은 하준의 이야기에 소름이 돋는다. 식당의 활기찬 소음이 멀리서 들리는 듯했다. 그녀의 눈에 어젯밤의 철문이 다시 떠올랐다.)

    **은설:** 강하준… 학원장님께 보고해야 한다고 했잖아. 이건 단순한 금지 구역 침범이 아니라…

    **하준:** (식탁을 주먹으로 쿵 친다) 안 돼. 그들은 알고 있을 거야. 아니, 어쩌면… 이 모든 일의 배후에 그들이 있을 수도 있어. 사라진 선배들이 단순한 실종이 아닐지도 몰라.

    (하준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한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호기심 많은 학생이 아니었다.)

    **하준:** 은설아, 우리 어젯밤 그 문을 다시 찾아가야 해. 이번엔 봉인된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해.

    **은설:** (경악한 표정) 뭐? 강하준! 제정신이야?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위험해!

    **하준:** (낮은 목소리로 힘주어 말한다) 위험하더라도, 알아내야 해. 환영학원 지하에 숨겨진 끔찍한 금기가 대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 선배들이 왜, 그리고 어떻게 그곳으로 사라졌는지.

    (식탁 위, 하준의 손에서 희미한 마력 불꽃이 일렁인다.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다운 색을 띠지 않고, 어둠처럼 깊은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결의에 차 있었다. 은설은 하준의 굳은 의지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녀의 눈빛 속에도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진실을 향한 갈망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내레이션:** 환영학원의 빛나는 명성 뒤에 가려진 그림자. 엘리트 마법사들이 모인 이 학원의 심층에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끔찍한 비밀이 봉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금기는 서서히 봉인을 깨고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려 하고 있었다. 두 학생의 무모한 발걸음이, 그 위험한 진실의 서곡을 울린다.

  • 이세계 전생 (Isekai)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둠이 짙게 깔린 숲은 본래 침묵을 머금고 있었다. 달빛조차 닿지 않는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오직 바람만이 나뭇잎을 스치며 비밀스러운 속삭임을 주고받았다.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는 성스러운 영역. 이곳은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고대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나 강현이 몰래 스며들고 있었다.

    발밑에 밟히는 마른 나뭇가지 소리마저 죄책감처럼 크게 울렸다. 하지만 내 심장은 두려움보다는 간절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단 하나의 존재를 향한, 금지된 갈망. 이곳은 인간에게는 죽음이 허락된 낙원이지만, 내게는 오직 그녀만이 존재하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깊은 숲의 심장부에 다다르자,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영롱한 기운이 느껴졌다. 거대한 고목들이 둥글게 늘어선 공간, 그 중앙에 맑은 샘물이 솟아나는 곳. 나는 그곳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샘물 위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빛이 형체를 띠기 시작했다. 은하수를 녹여 만든 듯 반짝이는 긴 머리칼, 깊이를 알 수 없는 밤하늘처럼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 그리고 숲의 새벽 안개처럼 부드럽게 감싸인 피부는 희미하게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는 나비의 날개처럼 투명하고 거대한 날개가 빛을 머금고 천천히 펼쳐졌다. 숲의 모든 아름다움을 응축해 놓은 듯한 존재, 엘레나였다.

    “현아.”

    그녀의 목소리는 숲의 바람 소리처럼 부드럽고, 샘물의 물방울처럼 맑았다. 그 목소리가 내 이름 석 자를 부르는 순간, 세상의 모든 소음은 사라지고 오직 그녀만이 존재했다. 나는 홀린 듯 그녀에게 다가갔다.

    “엘레나.”

    내 손이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쌌다. 차갑고도 부드러운 감촉. 마치 보석을 어루만지는 듯한 섬세한 손길이었다. 엘레나는 내 손에 뺨을 기댄 채,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오는 것이 두렵지 않느냐 물었었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일 거야. 인간의 법으로도, 너희 숲의 요정들의 율법으로도, 우리는 결코 함께해서는 안 되는 존재니까.”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는 네가 이 길을 걷지 않기를 바랐어. 인간과 요정의 인연은 언제나 비극으로 끝났으니까.”

    “하지만 내 심장은 이미 너에게로 향했어.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이 숲의 모든 경계는 내게 아무 의미가 없어졌어.”

    엘레나는 내 가슴에 이마를 기댔다. 그녀의 머리칼에서 숲의 향기가 났다. 이 세상 어떤 향수보다도 달콤하고 평화로운 내음. 나는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녀의 날개가 접히며 내 등을 간질였다.

    “숲은 언제나 네가 오는 길을 지켜보았어. 인간의 숲을 파괴하고 침범하려는 자들과는 다른, 너의 순수한 마음을.”

    “나는 파괴자가 아니야, 엘레나. 너를 지키고 싶을 뿐이야. 이 숲도, 그리고 너도.”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금지된 사랑이 빚어내는 비밀스러운 행복. 하지만 그 행복은 언제나 위태로웠다. 세상이 우리를 허락하지 않는 한, 이 아름다운 순간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유리 조각과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쉬이이, 여기 분명 흔적이 있었는데…”

    멀리서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와 함께 낮게 속삭이는 인간들의 음성이 들려왔다. 불청객의 목소리. 숲의 평화를 깨뜨리는 거친 숨소리. 엘레나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그녀의 피부에 푸른빛이 더욱 짙게 드리워졌다.

    “수색대인가… 아니면 사냥꾼들인가.”

    내 목소리에도 긴장이 스며들었다. 인간들이 숲의 깊은 곳까지 들어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숲의 마력을 노리는 무리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우리가 만나는 장소는 숲의 가장 신성한 곳 중 하나였다. 이곳을 침범한다는 것은 곧, 숲의 요정들과의 전면전을 의미했다.

    엘레나가 내 손을 잡고 급히 옆에 있는 거대한 고목 뒤로 몸을 숨겼다. 고목의 굵은 둥치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패여 있었고, 덩굴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우리는 그 틈새에 몸을 밀어 넣었다. 나뭇잎과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밖에서는 인간들의 대화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이쪽이다! 마력이 느껴져! 숲의 정령들이 분명 이곳에 모여 있을 거야!”

    “조심해. 놈들은 교활해. 함부로 접근했다간 큰코다친다.”

    “흥, 겨우 나뭇가지나 흔드는 요정 따위가 뭐가 두렵다고. 다들 재료로 쓰면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다고 했어!”

    그들의 천박한 욕망이 내 귀를 찔렀다. 나는 엘레나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녀의 심장이 내 가슴에 닿아 격렬하게 뛰었다. 날개가 긴장으로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내가 아닌, 숲의 요정 종족 전체를 위해 분노하고 있었다.

    “저들이… 숲을 해치려 해.”

    그녀의 작은 음성에 슬픔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막을 거야. 엘레나. 널 해치도록 두지 않아.”

    우리는 고목 뒤에 몸을 숨긴 채, 숨소리마저 죽였다. 밖에서는 인간들의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 거친 숨소리, 그리고 탐욕스러운 속삭임. 마치 칼날이 목덜미를 스치는 듯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내 어깨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그들의 모습. 투박한 가죽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횃불, 다른 손에는 날카로운 칼이나 마력 탐지 기구를 들고 있었다. 그들은 고목을 스쳐 지나가며, 우리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해 한두 번 시선을 던졌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이쪽엔 아무것도 없잖아. 이상하네… 마력의 잔향은 강했는데.”

    “아마도 잠시 머물다 사라진 것뿐이겠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그들은 다시 수군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발소리, 희미해지는 횃불 빛.
    마침내, 숲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인간들의 소음이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우리 둘만이 남았을 때, 우리는 천천히 숨통을 틔웠다.

    엘레나는 여전히 내 품에 안겨 있었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무서웠어?”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두려웠던 건 너 때문이야. 인간들에게 발각되면… 너는 무사하지 못할 거야.”

    그녀의 눈에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걱정 마. 나는 괜찮아. 중요한 건, 너와 숲이 무사하다는 거야.”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이런 순간들이 앞으로도 수없이 반복될 것이라는 것을. 인간들의 탐욕은 끝이 없고, 숲의 요정들은 계속해서 위협받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둘의 사랑은 그 모든 위협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존재들일지도 몰라, 현아.”

    엘레나의 목소리에 절망감이 스쳤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아니, 엘레나. 우린 이미 함께하고 있어. 이 숲의 모든 생명이 우리의 증인이잖아.”

    나는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인간과 요정이라는 종족의 경계가 우리를 갈라놓을 수는 없을 거야. 내 심장이 너에게로 향하는 한, 나는 결코 너를 포기하지 않아.”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물방울이 맺혔다. 그것은 숲의 이슬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엘레나는 내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현아… 나는… 나는 네가 좋다. 네가 너무나 좋아.”

    그녀의 고백은 숲의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처럼 빛났다.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이 금지된 사랑이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이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세상의 모든 규칙과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기적 같은 밤이었다.
    우리 둘만의 성스러운 숲에서, 인간 강현과 숲의 요정 엘레나는 금지된 약속을 맹세했다. 세상의 모든 역경에 맞서,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 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제1장: 천봉산의 포효, 운명의 서막

    천봉산(天鳳山)은 태초부터 존재했던 거대한 봉우리였다. 아득한 옛적, 신화 속 봉황이 깃들어 울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는 곳. 그 신성하고도 웅장한 산자락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거대한 원형 경기장, ‘무신단(武神壇)’은 오늘, 오로지 한 가지 목적을 위해 그 장엄한 침묵을 깨고 천하의 모든 시선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수천, 수만의 인파가 운집했다. 그들은 대부분 무림의 고수들이었으나, 명문 정파와 사파의 장문인들, 은둔했던 기인들, 심지어는 속세를 등진 구파일방의 수장들까지, 각자의 오만하고도 비범한 기운을 숨기지 못하고 하늘을 향해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경외와 기대, 그리고 어렴풋한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휘운은 그 거대한 인파 속, 간신히 앞쪽으로 비집고 들어서서 무신단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스승인 노승, 무진대사(無盡大師)는 그에게 “무림은 넓고, 네 앞길은 멀다”고 했지만, 이렇게 많은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단상 중앙에 솟아오른 흑요석 기둥에는 핏빛 글씨로 적힌 현판이 걸려 있었다.

    **「천하무림대회(天下武林大會)」**

    천하의 운명이 걸린 대회. 대회의 승자는 ‘무신(武神)’의 칭호를 얻고, 멸망의 위기에 처한 강호를 수호할 유일한 존재가 될 것이었다.

    “하아… 정말 엄청나군요.”

    휘운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의 옆에서 고요히 서 있던 백발의 노인이 빙긋 웃었다.

    “젊은 친구, 이런 광경은 평생 다시 보기 힘들 걸세. 강호에 이런 활기가 돈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군.”

    노인의 목소리에는 깊은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지만, 그의 두 눈은 마치 맑은 샘물처럼 빛나고 있었다. 휘운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정신이 팔려서…”

    “괜찮네. 젊음이란 원래 그런 법이지. 자네는 어디 문파의 제자인가? 꽤나 단련된 몸을 지녔더군.”

    노인의 말에 휘운은 살짝 당황했다. 스승은 자신에게 세상에 나서지 말고 조용히 살라고 가르쳤지만, 그의 몸에서 풍기는 미세한 기운은 숨기기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저는… 그저 떠돌이 무인일 뿐입니다.”

    휘운은 애매하게 대답하며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무신단 중앙에 거대한 징 소리가 천봉산을 뒤흔들며 울려 퍼졌다. **’콰아아앙-!’**

    웅성거리던 모든 인파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수만 개의 시선이 일제히 무신단 중앙의 단상을 향했다. 그곳에는 흰 도포를 걸친 세 명의 노인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파의 맹주라 불리는 소림의 방장, 혜광대사(慧光大師)를 필두로, 무당파의 도사 청학진인(靑鶴眞人), 그리고 강호의 모든 정보를 쥐락펴락한다는 정보연합 ‘천기루(天機樓)’의 루주, 적야선자(赤夜仙子)였다.

    그들의 등장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

    혜광대사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울리며 천봉산 전체를 감쌌다.

    “강호의 모든 영웅호걸이여, 경청하라!”

    그의 외침에 누구 하나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수십 년 전, 동방에 처음 나타났던 ‘어둠의 장막(暗幕)’은 이제 강호의 명운을 뒤흔드는 거대한 위협으로 변모하였다. 마교의 잔당들이 그 뒤를 따르고, 천지는 이형의 존재들로 뒤덮이고 있다. 더 이상 각 문파의 힘만으로는 이 거대한 재앙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혜광대사의 얼굴에는 깊은 근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에, 우리는 천하무림대회를 개최한다. 강호의 모든 무인이여, 여기 모인 모든 이들이 증인이 될 것이다. 이 대회에서 최후의 승자가 된 자는 ‘무신’의 칭호를 얻고, 모든 문파의 지지와 힘을 얻어 어둠의 장막과 맞설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멈추자, 다시금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불안감과 기대감이 뒤섞인 술렁임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번 대회는 단순한 힘 겨루기가 아니었다. 강호의 미래를 결정짓는, 처절한 생존 경쟁이었다.

    “대회는 오늘부터 시작된다. 총 500명의 참가자 중, 오직 한 명만이 무신의 옥좌에 오를 것이다.”

    청학진인이 나서서 혜광대사의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엄청났다.

    “참가자들은 지금부터 무신단 아래의 접수처로 가서 자신의 문파와 이름을 밝히고 등록하라. 그리고 기억하라. 이 대회는 살생을 금하지 않는다. 오직 승리만이 모든 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세 명의 고수는 단상 뒤편으로 사라졌다.

    휘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살생을 금하지 않는다니. 즉, 죽을 각오를 하고 싸워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의 주위에서는 벌써부터 수많은 무인들이 접수처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자네도 참가할 텐가?”

    아까 그 노인이 휘운에게 물었다. 휘운은 망설였다. 스승의 가르침은 평범한 삶이었지만, 강호의 멸망을 눈앞에 두고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가슴 깊은 곳에는 오래전 스승이 이야기해 준, ‘잊혀진 검’의 전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 대회라면, 어쩌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다.

    “네, 참가하겠습니다.”

    휘운의 대답에 노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휘운은 접수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 뒤로, 천봉산의 정기를 머금은 거대한 무신단이 거대한 입을 벌린 채 그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제, 피비린내 나는 운명의 서막이 막을 올릴 참이었다.

    수많은 무인들 사이에서 휘운은 굳게 다짐했다. 이 대회는 그저 생존을 위한 싸움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그의 심장을 두드렸다.

    접수처에 도달한 휘운은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휘운(輝雲)」**

    먹물이 마르자, 그의 번호표가 손에 쥐어졌다. **’참가 번호 387번’**.

    그리고 잠시 후, 첫 번째 대진표가 전광석화처럼 무신단 중앙의 흑요석 기둥에 띄워졌다.

    **「제1경기: 운명대결」**
    **’태산파 장문인, 진호(陳虎) VS. 독문표국 표두, 흑랑(黑狼)’**

    웅성거림은 이내 환호성으로 바뀌었다. 첫 경기부터 강호에 이름이 알려진 두 고수의 대결이었다. 휘운은 번호표를 든 채 고개를 들어 경기장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맑고 단단하게 변해 있었다.

    수많은 고수들의 기운이 뒤섞여 천봉산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휘운은 그 속에서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만의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싸움의 첫 페이지가 열리고 있었다.

  • 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장: 심연의 첫 번째 숨결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해안선은 언제나 낯선 자를 경계했다. 서린은 낡은 비포장도로 끝에 선 자신의 차에서 내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응시했다. ‘심연포’. 이름만큼이나 기이한 곳이었다. 파도 소리조차 먹먹하게 들리는 듯한 침묵 속에, 마을은 마치 거대한 바다 생물의 등껍질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등 뒤로는 저물어가는 태양에 붉게 물든 하늘이 펼쳐졌지만, 마을의 그림자는 유독 깊고 차가웠다. 기왓장 대신 알 수 없는 검은 돌들로 얼기설기 덮인 지붕들, 비늘처럼 들쭉날쭉한 벽면을 가진 집들은 흡사 살아있는 유기체 같았다. 건축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경이로웠지만, 동시에 심장을 옥죄는 듯한 불쾌감도 들었다. 저런 형태를 누가, 왜 만들었을까?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다고 하기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젠장, 정말 여기까지 찾아오다니.”

    서린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도시의 답답한 연구실을 벗어나기 위해 택한 선택이었지만, 도착하자마자 후회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발견될지도 모를 고대 문명의 흔적은 그녀의 학문적 갈증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이곳, 심연포에 전해 내려오는 기괴한 전설과 바다 밑에 잠든 미지의 유적에 대한 소문은 건축고고학자 서린의 호기심을 불태웠다.

    마을 안으로 발을 들여놓자, 비린 바다 내음과 쿰쿰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이질적인 향이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인적은 드물었다. 창문은 대부분 덧문으로 닫혀 있었고, 간혹 열린 틈으로 보이는 집 안은 어둡고 깊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마치 외부인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그때, 저 멀리서 한 노인이 삐걱이는 나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등은 굽고 허리는 말렸지만, 서린에게 향하는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마른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은 마치 바닷바람에 오랫동안 마모된 돌 같았다.

    “도시 아가씨인가?” 노인의 목소리는 깊은 바닷속에서 울리는 듯 탁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린입니다. 이곳의 고대 유적을 조사하러 왔습니다.” 서린은 최대한 공손하게 답했다.

    노인은 서린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기묘한 웃음을 터뜨렸다. 웃음소리는 흡사 갯벌에 숨어있던 게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같았다.

    “이곳은 아무것도 없어. 오래된 돌멩이들 뿐이지. 당신 같은 아가씨가 올 곳이 못 돼.”

    “소문으로는 바닷속에 잠긴 유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노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깊은 바다 같은 눈동자에 경고의 빛이 서렸다.

    “바닷속엔… 아무것도 없어. 우리가 보지 말아야 할 것들뿐이지.”

    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집 안으로 사라졌다. 문은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닫혔고, 서린은 묵직한 침묵 속에 홀로 남겨졌다. 불길한 예감에 등골이 서늘했지만, 동시에 미지의 유적에 대한 열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저 노인의 말에는 감춰진 진실이 있을 터였다.

    마을 어귀에 있는 유일한 여관에 짐을 풀었다. 방은 작고 습했으며, 창밖으로는 곧장 먹빛 바다가 보였다. 파도는 낮게 부서지는 소리를 냈지만, 그 소리는 어쩐지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듯했다. 서린은 지도를 펼쳐들었다. 심연포 북쪽에 위치한 ‘오래된 심연의 입’이라는 곳. 마을 사람들이 입에 담기를 꺼려하는 그곳이 바로 그녀의 목적지였다.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어둠의 의식이 행해졌다는 석조 구조물이 그곳에 잠들어 있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짙은 해무가 온 마을을 집어삼킨 가운데 서린은 심연의 입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좁고 거친 해안선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기묘한 형상의 거대한 돌기둥들이 해무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들은 마치 태초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인간의 손으로 다듬었다기엔 너무나 불규칙하고도 섬뜩한, 살아있는 듯한 곡선들. 검은 돌들은 해무에 젖어 더욱 검게 빛났다.

    구조물에 가까이 다가가자,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그녀를 감쌌다. 돌기둥 표면에는 정교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무늬들이 새겨져 있었다. 촉수, 알 수 없는 눈동자, 그리고 비늘처럼 보이는 형상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 문양들은 인간의 지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 보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었다.

    서린은 손전등을 꺼내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섰다. 거대한 돌덩이들이 만들어낸 통로는 습기로 가득 차 있었고, 발밑에서는 미끄러운 이끼가 느껴졌다. 어딘가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려 퍼졌다. 뚝, 뚝, 뚝. 그것은 마치 심장이 뛰는 소리 같았다.

    통로의 끝에는 거대한 원형 공간이 나타났다. 중앙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구덩이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제단 같은 구조물들이 놓여 있었다. 구덩이에서는 차가운 습기가 피어올랐고, 바닷물 비린내가 아닌, 훨씬 더 오래되고 깊은 어둠의 냄새가 진동했다.

    서린은 조심스럽게 구덩이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손전등을 비추자,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검은 심연이 드러났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무한한 어둠뿐. 그 순간, 서린의 귀에 기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쉬이이…

    그것은 바람 소리도, 파도 소리도 아니었다. 마치 수많은 생명체가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소리, 혹은 깊은 바닷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숨을 쉬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묘하게 아름다웠다. 사람의 영혼을 잡아끄는 듯한, 달콤하면서도 섬뜩한 멜로디. 서린은 자신도 모르게 구덩이 안으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심장이 쿵, 쿵, 쿵, 하고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두려움과 경외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소리는 점점 더 강렬해졌고, 서린의 정신을 파고들었다. 마치 그녀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있던 갈망을 건드리는 것처럼.

    그때, 심연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았다. 푸른빛, 하지만 지구상의 어떤 광원과도 다른, 차갑고 신비로운 빛이었다. 빛은 서서히 커지더니,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떠오르는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거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형태와 비슷했다. 하지만 결코 인간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몸은 마치 깊은 바다의 물빛을 머금은 듯 영롱한 푸른색이었다. 피부는 매끄럽고 윤기 있었으며, 햇빛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심연의 비늘 같은 미세한 반짝임이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은 물결처럼 유려하게 흘러내렸고, 얼굴은…

    얼굴은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인간의 그것과 흡사하면서도, 동시에 압도적인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이 서려 있었다. 깊고 고요한 바다 같은 눈동자는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동자에는 수억 년의 시간과 우주의 비밀이 담겨 있는 듯했다. 슬픔, 지혜, 그리고 알 수 없는 갈망이 뒤섞인 눈빛.

    서린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이것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존재임을, 감히 마주해서는 안 될 존재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녀의 눈은 그 형상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두려움은 여전히 온몸을 옥죄었지만,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심장을 꿰뚫었다.

    그 존재가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인간의 미소라기보다는, 심연의 물결이 잔잔하게 흔들리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 순간, 서린의 머릿속에 하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언어가 아니었지만, 그녀는 분명히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너를 기다렸다…*

    목소리는 맑고 투명했지만, 동시에 우주적인 공허함이 담겨 있었다. 서린은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존재는 손을 들어 서린을 향해 뻗었다. 마치 그녀를 초대하는 듯한 동작이었다. 금지된 부름. 죽음과도 같고, 동시에 영원한 구원과도 같은.

    서린은 망설였다. 이성을 담당하는 부분이 비명을 질렀다. *도망쳐. 이건 재앙이야!* 하지만 다른 무언가가 그녀를 붙잡았다. 차가운 공포를 뚫고 솟아나는, 알 수 없는 격렬한 감정. 심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감, 그리고 그 존재에게로 향하는 강렬한 끌림.

    그녀의 손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심연의 존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지의 영역으로 향하는 첫 번째 발걸음이었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금지된 숨결이, 그녀의 영혼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