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침묵하는 서울이었다. 한때는 생기로 넘치던 빌딩 숲은 이제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이 되어 썩어가는 시체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지아는 무너진 육교 난간에 위태롭게 매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녹슨 철근과 부서진 아스팔트 사이로 덩굴 식물이 집어삼킬 듯 자라나 있었고, 그 길 위에는 무심히 떠다니는 먼지처럼 느릿느릿 움직이는 ‘그것들’이 보였다. 좀비, 혹은 ‘변이체’라고 불리는 존재들.
“젠장, 저긴데…”
지아가 숨을 들이켰다. 육교 아래 편의점은 여전히 건재해 보였다. 유리문은 깨졌지만, 선반 위에는 뒹구는 통조림 캔들이 보였다. 며칠째 물만 마시며 버틴 터라, 캔 하나라도 절실했다. 하지만 아래에는 최소 열 마리 이상의 변이체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무모한 짓이라는 걸 알았지만, 배고픔은 이성을 마비시켰다.
“숨은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낡은 등산용 칼을 움켜쥐었다. 지아는 육교에서 뛰어내릴 지점을 가늠했다. 저 아래 쓰레기 더미 위라면 착지 충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소리는? 소음은 변이체를 끌어모으는 가장 위험한 요소였다.
망설임도 잠시, 지아는 이를 악물고 몸을 던졌다.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쓰레기 더미 위에 착지했다. 발목이 욱신거렸지만 부러지지 않은 것에 안도했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가장 가까이 있던 변이체 서너 마리가 느릿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렸다. 찢어진 옷자락, 핏발 선 눈, 그리고 악취.
“하아… 망할!”
지아는 비명처럼 욕설을 내뱉으며 편의점을 향해 달렸다. 변이체들은 예상보다 빠르게 지아를 추격했다. 쿵, 쿵, 쿵. 불균형한 발소리가 뒤를 쫓았다. 낡은 유리문을 박차고 들어가자, 지아는 서둘러 선반 뒤로 몸을 숨겼다.
끼이익- 끔찍한 소리와 함께 변이체들이 편의점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지아는 숨을 죽인 채 칼을 고쳐 쥐었다. 심장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끝나는 건가. 이렇게, 굶주린 괴물들의 먹이가 되어.
그때였다.
“크르르르…”
낮게 깔린 짐승의 울음소리가 편의점 안을 가득 채웠다. 일반적인 변이체들의 쉰 목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깊고 위협적인 소리였다. 이어 섬뜩한 그림자가 편의점 입구를 완전히 가로막았다. 지아는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입구에 선 존재는 일반 변이체와는 달랐다. 키는 두 배는 더 커 보였고, 근육질의 몸은 찢어진 옷 사이로 단단하게 드러나 있었다. 피부는 창백했지만 썩어들어가지 않았고, 무엇보다 눈빛이 달랐다. 핏발 서린 광기 대신, 그 깊은 어둠 속에는 차갑고 예리한 지성 같은 것이 번뜩였다. 날카로운 손톱은 마치 칼날처럼 길게 뻗어 있었다. 이형(異形), ‘특수 변이체’라고 불리는 존재들.
“크아아아악!”
그 이형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려는 변이체들을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보통 변이체들은 이형의 힘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형은 거대한 손톱으로 변이체의 머리를 으깨고, 뼈를 부러뜨리며 단숨에 제압했다. 마치 자신이 이 구역의 왕임을 증명하듯, 빠르고 무자비하게 움직였다. 지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형은 지아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다른 변이체들에게서 지아를 *보호하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정신없이 싸우던 이형은, 어느새 편의점 안의 모든 변이체를 처리했다. 바닥에는 찢기고 부서진 시체들이 널브러져 피 웅덩이를 만들었다. 지아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칼을 내렸다. 이형의 거친 숨소리가 편의점 안을 울렸다.
이형은 천천히 몸을 돌려 지아를 향했다. 지아는 벽에 바싹 붙어 몸을 웅크렸다. 눈이 마주쳤다. 이형의 깊은 눈동자 속에서, 지아는 찰나의 순간 동안 혼란과 경계, 그리고… 뭔지 모를 슬픔 같은 것을 읽어냈다. 착각일 리 없었다.
“크르르…”
낮은 울음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이형은 지아에게 한 발자국 다가섰다. 지아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죽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이형은 공격하지 않았다. 대신, 찢어진 바닥에 뒹굴던 캔 통조림 하나를 발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그리고는 지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움직임은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다. 명령하는 듯, 혹은 제안하는 듯. 지아는 조심스럽게 기어가 캔을 주웠다. 낡은 복숭아 통조림이었다. 이형은 지아가 캔을 집어 드는 것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몸을 돌려 편의점 밖으로 사라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아는 캔을 든 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지?
***
그날 이후, 이상한 동거가 시작되었다. 지아는 그 이형을 ‘카인’이라고 마음속으로 불렀다. 성경 속 형제 살해자의 이름. 그가 죽인 건 동족이 아닌, 다른 변이체들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카인은 지아가 활동하는 구역에서 항상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지아가 위험에 처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그녀를 보호했다. 처음에는 그저 우연이거나, 아니면 제 영역을 침범하는 다른 변이체를 경계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지아는 확신했다. 카인은 *의도적으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카인은 지아를 직접적으로 돕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저 멀리서, 혹은 은밀하게 나타나 위협을 제거하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말을 하지 못하는 그였지만, 지아는 그의 눈빛과 어렴풋한 몸짓으로 그가 무언가를 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는 그저 존재했다. 지아의 세상에, 조용히 스며들었다.
어느 날, 지아는 폐허가 된 도서관에서 책을 뒤지고 있었다. 종이의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크게 느껴지는 적막 속에서,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익숙한 존재감.
“카인?”
지아가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책장 사이에서 어둠이 움직였다. 카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눈은 평소보다 더욱 깊고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아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카인의 손에는 찢어진 그림책이 들려 있었다. 오래된 동화책이었다. 표지는 너덜너덜했고, 내용물은 그림과 글자가 뒤섞인 채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게… 뭐야?”
지아가 물었다. 카인은 아무런 대답 없이 그림책을 지아에게 내밀었다. 그의 손은 크고 거칠었지만, 책을 건네는 동작은 조심스러웠다. 지아는 그림책을 받아들었다. 어린아이들이 보던 낡은 그림책이었다.
카인은 찢어진 그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림 속에는 어린아이와 엄마가 손을 잡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카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분명한 슬픔과, 그리고… 상실감이었다.
“기억해…?”
지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은 그림 속 행복한 가족을 떠나지 못했다. 그 순간, 지아는 깨달았다. 카인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인간성을 잃어버린 채 변이된 존재일 뿐이었다. 어딘가 깊은 곳에, 여전히 ‘카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한 남자의 조각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날 밤, 지아는 도서관 한 구석에 모닥불을 피우고, 카인은 그 맞은편에 앉아 밤하늘을 응시했다. 밤이 깊어질수록 하늘은 더욱 선명한 별들을 쏟아냈다.
“저 별들, 옛날에는 이렇게 잘 보이지 않았어.”
지아가 중얼거렸다. “도시의 불빛 때문에 다 가려졌었지. 어둠이 모든 걸 삼키고 나니까, 이런 것들이 보이네.”
카인은 아무런 말없이 지아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깊은 호수 같았다.
“너는… 뭐가 기억나?” 지아가 물었다.
카인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그리고는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크르르…” 낮은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래… 고통스럽겠지.”
지아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나도 다 잊어버리고 싶을 때가 많아. 이 모든 걸 잊고 싶어.”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족, 친구, 꿈…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이었다. 지아는 혼자였다. 철저하게 혼자였다.
그때, 카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아에게 다가왔다. 지아는 숨을 멈췄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지아를 덮쳤다. 카인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지아의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다. 그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움직임은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지아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깊은 눈동자 속에는 슬픔, 이해, 그리고 어떤 위로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종족을 뛰어넘는 교감이 이루어졌다. 인간과 변이체. 포식자와 피식자. 모든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지아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뻗어 카인의 차가운 손등을 감쌌다. 그의 피부는 거칠고, 뼈대는 단단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지아는 따뜻한 온기 같은 것을 느꼈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내면에서 피어나는 인간성의 잔해일지도 몰랐다.
“카인…”
지아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이제 혼자가 아니네.”
***
두 사람의 유대감은 점차 깊어졌다. 지아는 카인에게서 인간성을 보았고, 카인은 지아에게서 잃어버린 과거의 파편들을 되찾는 듯했다. 그는 더 이상 그저 변이체가 아니었다. 지아에게 그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유일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그들의 금지된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생존자 무리들은 도시의 잔해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변이체 사냥꾼’이라 불리며, 모든 변이체를 죽여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그리고 카인처럼 인간과 흡사한 지능을 가진 이형 변이체는 더욱더 위험한 존재로 분류되었다.
어느 날, 지아와 카인은 버려진 마트에서 식량을 찾던 중, 생존자 무리와 마주쳤다. 무기는 총으로 무장한 건장한 남자들이었다.
“이봐, 거기 여자!”
생존자 무리의 리더가 소리쳤다. “뭘 들고 있는 거야? 내려놔! 그리고 네 뒤에 있는 그 괴물은 또 뭐야!”
지아는 카인 뒤로 몸을 숨겼다.
“그는… 괴물이 아니에요.”
“헛소리 마! 저건 변이체야. 네 옆에 있는 모든 변이체는 우리의 적이다. 당장 떨어져, 아니면 너도 괴물과 똑같이 취급할 거야!”
카인은 낮은 경고음을 냈다. 그의 눈은 불타는 듯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크르르르…”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생존자 무리를 잠시 주춤하게 만들었다.
“빌어먹을! 저것 봐! 특수 변이체야! 더 위험해!”
생존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총구를 카인에게 겨누었다. 지아는 카인의 손을 꽉 잡았다.
“안 돼! 쏘지 마세요!”
탕!
총성이 울렸다. 카인의 어깨에 총알이 박혔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맹렬한 기세로 생존자들을 노려보았다.
“젠장, 저놈은 보통이 아니야! 조심해!”
생존자들은 카인을 향해 일제히 총격을 가했다. 카인은 지아를 자신의 거대한 몸으로 감싸 안았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등에 총알이 박혔지만, 그는 묵묵히 지아를 보호했다.
“카인!”
지아의 비명 속에서, 카인은 몸을 돌려 생존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번개처럼 빨랐다. 총알을 피하며 생존자들에게 달려들어, 날카로운 손톱으로 무기를 부수고, 그들을 제압했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슬픔이나 고통을 담고 있지 않았다. 오직 지아를 지키겠다는 맹렬한 의지만이 불타올랐다.
순식간에 생존자 무리는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총성과 비명이 잦아들자, 마트 안에는 오직 지아와 카인만이 남았다. 카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등과 어깨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지아는 카인에게 달려가 그의 몸을 살폈다.
“괜찮아? 카인! 괜찮냐고!”
카인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힘없이 쓰러졌다. 지아는 그의 머리를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그의 창백한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미안해… 미안해, 카인… 나 때문에…”
지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카인은 흐릿한 눈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어렵사리 손을 들어 지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지아는 그 속에서 모든 것을 느꼈다. 사랑, 희생, 그리고 절망.
“크르르…”
카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고통스러웠지만, 그 안에는 지아를 향한 변치 않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카인…!”
지아는 필사적으로 그의 상처를 압박했지만, 피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카인의 눈빛이 점점 흐려졌다.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해 지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그 손에 자신의 뺨을 기댔다.
지아는 카인의 뺨에 흐르는 차가운 눈물을 느꼈다. 그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그의 몸에서 모든 온기가 사라졌다.
“카인… 안 돼… 안 돼…!”
지아는 절규했다. 그녀의 외침은 폐허가 된 마트 안에 울려 퍼졌다. 세상은 다시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서, 지아는 차가워진 카인의 몸을 끌어안고 오열했다. 종족을 뛰어넘어 피어난 금지된 사랑은, 결국 세상의 잔혹함 앞에서 스러졌다.
하지만 지아는 알고 있었다. 카인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절망 속에서도 피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세상에서, 그들의 사랑은 영원히 지아의 심장에 살아 숨 쉴 것이었다.
지아는 차가운 카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더 이상 절망만이 아니었다. 카인이 그녀에게 남긴 용기와 사랑. 그것이 그녀를 다시 살아가게 할 유일한 이유였다. 이 잔혹한 세상에서, 홀로 살아남아 그들의 이야기를 증언할 것이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