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대체 역사물 상세한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

    ##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 새벽의 불씨

    ### **제목: 새벽의 불씨 – 1화: 약탈자의 계절**

    **로그라인:** 부패한 제국의 끝없는 수탈 아래, 모든 것을 잃은 평범한 농민 ‘진’이 절망의 땅에서 작은 희망의 불씨를 지피고 거대한 폭정에 맞서 새로운 새벽을 열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다.

    **장르:** 대체 역사, 액션, 드라마, 판타지

    ### **[SCENE 1] 메마른 대지**

    **시간:** 낮
    **장소:** ‘서녘 마을’ 외곽 – 황량한 밭, 멀리 보이는 제국의 수로

    **카메라:**
    * **[LONG SHOT]** 황량하게 갈라진 밭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한때 푸르렀을 땅은 메마른 황토색으로 변해 있고, 뜨거운 아지랑이가 지평선을 일렁인다. 멀리, 제국의 거대한 수로가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져 있지만, 그 물줄기는 마을 쪽으로는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다. 수로 주변에는 거대한 감시탑이 듬성듬성 서 있다.
    * **[MEDIUM SHOT]** 밭고랑 사이에서 허리를 숙인 몇몇 농민들이 쇠스랑과 괭이를 들고 힘없이 흙을 고르고 있다. 그들의 얼굴에는 땀과 먼지가 뒤섞여 있고, 뺨은 깊게 패여 있다. 옷은 해지고 너덜너덜하다.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 **[CLOSE-UP]** 한 젊은이의 굳게 다문 입술과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 그의 손은 흙투성이이고, 뼈마디가 굵다. 손등의 상처와 굳은살이 그의 지난한 삶을 보여준다. 바로 ‘진’이다.

    **액션:**
    * 진은 쇠스랑을 땅에 박아 넣지만, 흙은 너무 단단해 쉽게 부서지지 않는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은 조롱하듯 평화로워 보인다. 그의 눈빛에는 짙은 피로와 함께 작은 반항심이 스쳐 지나간다.
    * 주변의 농민들도 지쳐 쓰러지듯 앉거나 묵묵히 제 할 일만 하고 있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다. 오직 쇠스랑이 흙을 긁는 둔탁한 소리만이 가끔 들릴 뿐이다.
    * 진은 다시 쇠스랑을 힘껏 내리찍는다. 그의 어깨 근육이 단단하게 솟아오른다. 바짝 마른 흙이 먼지와 함께 흩날린다. 그는 땀을 닦지도 않은 채 계속해서 흙을 파헤친다.

    **음악:**
    * 애잔하면서도 희망 없는 멜로디가 낮게 깔린다. 현악기의 느린 선율이 건조하고 고된 분위기를 강조한다. 점차 고조되는 듯하다가 다시 사그라드는, 잔인하게 반복되는 삶을 연상케 하는 멜로디.

    **효과음:**
    * 메마른 흙이 부서지는 ‘퍽, 퍽’ 하는 둔탁한 소리.
    *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 (건조한 휘파람 소리)
    * 지친 농민들의 거친 숨소리.

    **대사:**
    (없음)

    ### **[SCENE 2] 침묵의 마을**

    **시간:** 낮 (해 질 녘으로 넘어가는 시간)
    **장소:** 서녘 마을 어귀 – 초라한 집들, 먼지 날리는 길

    **카메라:**
    * **[TRACKING SHOT]** 진이 지친 몸을 이끌고 마을로 들어선다. 그의 등 뒤로 해가 기울고 있다. 붉은 노을이 마을을 감싸지만, 그 빛은 따뜻하기보다 스산하다. 마을은 낡고 초라한 집들이 듬성듬성 모여 있으며, 길가에는 아이들이 흙장난을 하고 있다기보다는 힘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몇몇 어른들은 아무 말 없이 문간에 기대앉아 허공을 응시한다.
    * **[MEDIUM SHOT]** 진이 작은 집 앞에 다다른다. 문은 낡았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낼 것 같다. 집의 벽은 금이 가 있고, 지붕은 군데군데 헐어 있다.

    **액션:**
    * 진은 집 안으로 들어서기 전, 잠시 멈춰 서서 마을을 둘러본다. 그의 시선은 허름한 집들 사이를 오가며 무언가를 찾는 듯하다. 그의 눈빛에는 피로와 함께 짙은 불안감이 서려 있다. 아무도 그에게 말을 걸지 않고, 그 또한 아무에게도 말을 걸지 않는다.
    * 작은 아이 하나가 진을 보더니 눈을 반짝이지만, 이내 흙투성이인 손을 바라보며 고개를 떨군다. 아이의 눈가에 작은 흙먼지가 앉아 있다.
    * 진은 한숨을 쉬고 낡은 나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다. 문이 ‘삐걱’ 하는 소리를 낸다.

    **음악:**
    * 음악이 조금 더 희미해지며, 불안하고 정체된 분위기를 유지한다. 낮은 현악기 소리가 희미하게 이어진다.

    **효과음:**
    * 바람에 흔들리는 낡은 지붕의 삐걱거리는 소리.
    * 아이들의 기운 없는 웅얼거림. (마치 굶주린 고양이 소리처럼)
    * 진의 지친 발소리.
    * 낡은 문이 열리는 ‘삐걱’ 소리.

    **대사:**
    (없음)

    ### **[SCENE 3] 사라져가는 생명**

    **시간:** 낮 (집 안은 어둡다)
    **장소:** 진의 집 안 – 어둡고 좁은 방, 낡은 식탁

    **카메라:**
    * **[CLOSE-UP]** 낡은 나무 식탁 위, 먼지 쌓인 빈 그릇들. 그릇 가장자리에는 말라붙은 음식물 찌꺼기가 희미하게 보인다.
    * **[MEDIUM SHOT]** 방 안은 어둡고 협소하다. 작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줄기가 방 안의 먼지를 가로지른다. 낡은 짚자리 위에 ‘어르신’이 쇠약해진 몸을 뉘여 있다. 그의 얼굴은 주름지고 창백하며, 눈은 거의 감겨 있다. 진의 여동생 ‘솔아’가 옆에서 물수건으로 어르신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닦아주고 있다. 솔아는 진보다 훨씬 어려 보이며, 아직 어린 소녀지만 눈빛은 이미 깊은 슬픔과 체념으로 가득하다. 그녀의 손은 작고 가늘다.
    * **[TWO SHOT]** 진과 솔아가 서로를 마주 본다.

    **액션:**
    * 진이 방으로 들어서자, 솔아가 고개를 들어 진을 본다. 그녀의 표정은 어둡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다.
    * 진은 어르신 곁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는다. 어르신은 미약하게 눈을 뜨지만, 진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 흐릿하다. 그의 입술은 바싹 말라있다.
    * 진은 어르신의 마른 손을 잡는다. 그의 얼굴에 고통이 스친다. 어르신의 손은 뼈만 남았다.
    * 솔아가 진에게 조용히 고개를 젓는다. ‘가망이 없다’는 무언의 신호다. 그녀의 입술이 희미하게 떨린다.

    **음악:**
    * 더욱 슬프고 애절한 선율로 변한다. 바이올린 솔로가 비극적인 분위기를 이끈다. 심장 박동 소리처럼 느리게 울리는 베이스가 고조된 감정을 표현한다.

    **효과음:**
    * 어르신의 옅고 마른 기침 소리.
    * 진의 옷깃 스치는 소리.
    * 솔아가 물수건을 짜는 나지막한 소리.
    * 어르신의 가쁜 숨소리.

    **대사:**
    **솔아:** (작은 목소리로, 거의 속삭이듯) 오라버니… 오늘은 아무것도…
    **진:** (어르신의 손을 꽉 잡으며, 목이 메인 듯) 괜찮아, 솔아. 내가 어떻게든… 찾아올게.
    **솔아:** (진의 눈을 똑바로 보며,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없어요. 밭도, 창고도… 제국 놈들이 어제 와서 남은 곡식까지 다 가져갔어요. 이제 남은 건… 이 흙뿐이에요.
    **진:**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꽉 쥔다) …미안하다.
    **어르신:**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환영을 보는 듯) 물… 물을… 푸른… 푸른 밭을… 내… 내 밭을…

    ### **[SCENE 4] 약탈자의 행진**

    **시간:** 해 질 녘 (붉은 노을이 마을을 물들인다)
    **장소:** 서녘 마을 중앙 – 황량한 광장, 제국 병사들의 마차

    **카메라:**
    * **[WIDE SHOT]** 마을 광장에 제국 병사들의 마차가 늘어서 있다. 마차 위에는 마을에서 약탈한 곡식 자루와 이제 막 잡아온 가축들이 가득 실려 있다. 병사들은 갑옷을 입고 칼을 찬 채 삼엄하게 주변을 지키고 있다. 그들의 갑옷은 서녘 마을의 흙색과는 이질적으로 번쩍인다. 마을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멀찍이 서서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얼굴은 절망감으로 얼룩져 있다.
    * **[CLOSE-UP]** 병사의 투박한 가죽 부츠가 쓰러진 늙은 농부의 손을 짓밟는다. 늙은 농부는 고통에 신음하며 손을 빼내려 하지만 역부족이다.
    * **[TRACKING SHOT]** 진이 분노에 찬 얼굴로 광장을 향해 걸어온다. 그의 옆에는 솔아가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잡고 말리고 있다. 진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솔아는 거의 질질 끌려오듯 따라온다.
    * **[OVER-THE-SHOULDER SHOT]** 진의 시선으로, 병사들이 웃으며 마지막 곡식 자루를 마차에 던져 넣는 모습. 한 병사가 조롱하듯 쌀알을 한 움큼 쥐어 바닥에 흩뿌린다. 굶주린 아이 하나가 그 쌀알을 향해 손을 뻗으려 하지만, 어미가 황급히 막는다.
    * **[CLOSE-UP]** 진의 눈빛이 흔들린다. 슬픔, 절망,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그 안에 뒤섞여 있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인다.

    **액션:**
    * 진은 어르신의 마지막 말이 귓가를 맴도는 듯, 병사들의 약탈 장면을 본다. 그가 본 것은 단순한 식량 약탈이 아니다. 마을의 미래, 아이들의 희망, 그리고 어르신의 생명까지도 빼앗아가는 잔인한 폭력이다. 그는 어르신의 모습과 눈앞의 약탈을 겹쳐 본다.
    * 병사 중 한 명이 늙은 농부를 발로 차며 “이 놈의 천것들은 도통 알아듣질 못하는군! 신성 제국 율리아누스에 바치는 공물은 마땅한 도리거늘!” 하고 소리친다. 그의 목소리에는 권력에 취한 오만함이 가득하다.
    * 솔아는 진을 붙잡고 “오라버니, 안 돼요! 제발! 다쳐요! 죽어요!” 하며 울먹인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과 흙으로 얼룩져 있다.
    * 진은 솔아의 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나선다. 그의 발걸음은 망설임 없이 단단하다. 그의 눈은 오직 병사들을 향한다.
    * 그가 땅에 뿌려진 쌀알을 본다. 그리고 하늘을 본다. 그리고 병사들을 본다. 그의 손은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린다. 그의 몸에서 뜨거운 분노의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음악:**
    * 긴장감 넘치는 드럼 비트와 함께 현악기의 불협화음이 커진다. 분노와 절망을 표현하는 강렬한 선율이 울려 퍼진다. 저음의 금관악기가 제국의 위압감을 표현한다.

    **효과음:**
    * 곡식 자루가 마차에 던져지는 둔탁한 소리.
    * 병사들의 거친 웃음소리와 조롱하는 말소리.
    * 늙은 농부의 고통스러운 신음.
    * 솔아의 울음 섞인 애원.
    * 진의 거친 숨소리. 그의 심장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대사:**
    **병사1:** (늙은 농부를 발로 차며) 이 놈의 천것들은 도통 알아듣질 못하는군! 신성 제국 율리아누스에 바치는 공물은 마땅한 도리거늘!
    **솔아:** (울먹이며) 오라버니, 안 돼요! 제발! 다쳐요! 죽어요!
    **진:** (분노에 찬 목소리로, 떨리는 숨을 내쉬며) …너희… 너희는… 인간이 아니야!
    **병사2:** (진을 돌아보며 비웃듯, 칼집에 손을 얹는다) 오호라, 저런 촌놈이 감히 제국 병사에게 대들어? 어르신이 죽어가니 정신이 나갔나 보군. 잡아!

    ### **[SCENE 5] 불씨**

    **시간:** 해 질 녘 – 밤으로 넘어가는 순간
    **장소:** 서녘 마을 광장

    **카메라:**
    * **[MEDIUM SHOT]** 병사들이 진을 향해 달려든다. 그들의 얼굴에는 경멸과 비웃음이 가득하다.
    * **[ACTION SHOT]** 진은 피하지 않고 주먹을 불끈 쥔다. 그의 손에는 밭에서 가져온 쇠스랑이 들려 있다. 그는 쇠스랑을 단단히 잡고 자세를 취한다.
    * **[CLOSE-UP]** 진의 눈빛에 광기와 결의가 번뜩인다. 그의 눈동자는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다.
    * **[SLOW MOTION]** 진이 쇠스랑을 휘두르며 병사들에게 맞선다. 그의 몸놀림은 숙련된 전사는 아니지만, 절박함과 생존을 위한 처절한 분노가 실려 있다. 쇠스랑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선명하다.
    * **[WIDE SHOT]** 마을 사람들이 숨죽이며 이 광경을 지켜본다. 몇몇은 경악하고, 몇몇은 희미한 희망을 본다. 그들의 눈빛에는 오랜 공포 속에서 잊혔던 감정들이 스쳐 지나간다.
    * **[CLOSE-UP]** 솔아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의 주먹도 작게 쥐어져 있다.

    **액션:**
    * 병사 두 명이 진에게 달려들어 칼을 휘두른다. 진은 쇠스랑으로 칼날을 막아내고, 반동을 이용해 한 병사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다. ‘크악!’ 하는 비명과 함께 병사가 쓰러진다.
    * 다른 병사가 뒤에서 진을 노리지만, 진은 민첩하게 몸을 틀어 피한다. 그는 쇠스랑 끝으로 병사의 투구를 강타한다.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가 휘청거리며 칼을 떨어뜨린다.
    * 진은 비록 수적으로 열세이지만, 절규와 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병사들을 당황시킨다. 그는 흙투성이 얼굴로 병사들을 노려본다.
    * 하지만 결국, 수십 명의 병사들을 당해낼 수는 없다. 진은 다른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진압된다. 쇠스랑은 바닥에 떨어지고, 그의 몸은 발길질에 짓밟힌다. 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는다.
    * 그 순간, 광장 한구석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가 ‘툭’ 하고 날아와 병사의 등에 맞는다. 병사가 “악!” 하고 외친다. 그리고 또 다른 돌멩이. 그리고 또…
    * 마을 사람들이 작은 돌멩이들을 던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몇 개에 불과했지만, 이내 수십 개, 수백 개의 돌멩이가 비처럼 쏟아진다. 병사들은 당황하며 방패를 들지만, 예상치 못한 저항에 움찔한다.
    * 진은 고통 속에서도 간신히 고개를 들어 마을 사람들을 본다. 그들의 눈빛에는 공포뿐 아니라, 작은 불씨가 타오르고 있다. 망설이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주저 없이 돌을 던진다.
    * 병사들이 당황하며 “뭐야! 저 천것들이 감히!” “수가 너무 많다! 일단 후퇴!” 하고 외친다. 그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황급히 마차를 몰아 마을을 벗어나려 한다. 완벽한 약탈은 실패한 것이다. 마차 바퀴가 급하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진다.
    * 진은 피투성이가 된 채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그의 손에 쥐여 있는 것은, 방금 전 누군가 던진 작은 돌멩이 하나다. 그는 돌멩이의 서늘한 감촉을 느낀다.

    **음악:**
    *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잠시 침묵이 흐르다가, 진의 반격과 함께 격렬한 오케스트라 사운드가 터져 나온다. 마을 사람들의 돌멩이가 날아들 때, 희망을 암시하는 코러스가 작게 깔리며 점차 고조된다. 병사들이 후퇴할 때, 승리의 팡파르처럼 울려 퍼진다.

    **효과음:**
    * 쇠스랑과 칼이 부딪히는 ‘챙!’ 소리, 금속성 마찰음.
    *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와 신음, 비명.
    * 돌멩이가 날아와 맞는 ‘툭, 팍, 따닥’ 하는 소리들.
    *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작은 외침, 그리고 던져지는 돌멩이 소리.
    * 마차가 황급히 떠나는 요란한 바퀴 소리.
    * 진의 고통 섞인 신음과 거친 숨소리.

    **대사:**
    **병사3:** (칼을 뽑으며) 덤벼봐라, 촌뜨기! 이 한 방에 죽여주마!
    **진:**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를 악물고) 죽어도… 못 준다!
    **(병사들과 진의 격투, 쇠스랑과 칼이 부딪히는 소리, 진이 제압당하는 고통스러운 소리)**
    **병사4:** (돌멩이에 맞고) 악! 뭐야! 누가 던졌어?!
    **병사1:** (당황하며) 이 천것들이 미쳤나! 수가 너무 많아! 후퇴! 일단 물러난다! 황급히 마차를 몰아라!
    **솔아:** (작은 목소리로, 울먹이다가 결연한 눈빛으로 변한다) 오빠…
    **진:** (피투성이가 된 채 간신히 몸을 일으키며, 손안의 돌멩이를 본다. 그의 얼굴에 고통 속에서도 미약한 미소가 번진다.) …우리… 살아있어.

    ### **[SCENE 6] 새벽의 서약**

    **시간:** 밤 (달빛이 희미하게 비춘다)
    **장소:** 서녘 마을 외곽 – 숲 속 동굴 입구

    **카메라:**
    * **[LONG SHOT]** 어둠이 깔린 숲. 멀리 마을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인다. 나뭇가지 사이로 달빛이 부서져 내린다. 깊은 숲의 고요함이 감돈다.
    * **[MEDIUM SHOT]** 진이 솔아와 몇몇 젊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동굴 입구에 서 있다. 진은 이마에 붕대를 감고 있고, 팔에는 흙과 피가 엉겨 붙어 있지만,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절망적이지 않다. 오히려 굳건한 결의와 새로운 희망이 서려 있다. 솔아는 진의 옆에 바싹 붙어 서 있다.
    * **[CLOSE-UP]** 진의 손에 쥐여 있던 작은 돌멩이. 그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품에 넣는다. 그것은 단순한 돌멩이가 아닌,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 **[TWO SHOT]** 진과 솔아가 서로를 바라본다. 솔아의 눈빛에는 아직 걱정이 서려 있지만, 오빠의 결의에 대한 굳건한 믿음도 함께 엿보인다.
    * **[CLOSE-UP]** 늙은 노인의 주름진 손이 진의 손에 작은 천 조각을 건넨다. 천 조각에는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한 문양이 수놓아져 있다. (새벽에 피어나는 작은 ‘새싹’이 역동적으로 솟아오르는 이미지)

    **액션:**
    * 마을 사람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진을 보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존경과 희망, 그리고 결속의 의지가 섞여 있다. 그들은 진에게 작은 작별 인사를 건넨다.
    * 한 노인이 진에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작은 천 조각을 건넨다. 노인의 눈빛은 현명하고 온화하지만, 슬픔이 짙게 깔려 있다.
    * 진은 천 조각을 받아들고, 그 문양을 가만히 응시한다. 그의 얼굴에 비장함과 함께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는 문양을 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본다.
    * 솔아는 진의 손을 잡는다. 그녀의 손은 차갑지만, 잡고 있는 오빠의 손은 뜨겁다.
    * 진은 동굴 안 어둠을 응시한다. 미지의 길, 거친 고난이 기다리는 길임을 알지만, 이제는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음악:**
    * 웅장하면서도 희망적인 멜로디가 점차 고조된다. 역경을 이겨내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한 분위기. 낮은 코러스가 배경에 깔리며 영웅적인 비장함을 더한다.

    **효과음:**
    * 밤벌레 소리, 숲 속 동물의 작은 소리.
    *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는 ‘사각거리는’ 소리.
    * 옷깃 스치는 소리.
    * 진의 조용하고 단호한 발걸음 소리.

    **대사:**
    **노인:** (진에게 천 조각을 건네며, 작은 목소리로) 이건…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것이네. ‘새벽을 여는 자들’의 흔적이지. 숨죽여 기다리던 불씨는 이제… 자네의 손에 있네.
    **진:** (문양을 응시하며,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새벽을… 여는 자들…
    **솔아:** (진의 손을 꽉 잡으며, 울음을 참는 목소리로) 오라버니… 돌아와야 해요. 꼭… 저희가 기다릴게요.
    **진:** (솔아의 손을 꽉 잡고, 결연한 눈빛으로 동굴 안 어둠을 본다) 그래, 솔아. 반드시. 이 제국의 길고 긴 밤을 끝내고, 새로운 새벽을 가져올 때까지. (고개를 돌려 마을 사람들을 잠시 응시하고 다시 동굴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 시작이야.

    **나레이션 (진):**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 에코 효과)
    그날, 우리는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든 것을 얻었다. 절망의 끝에서 피어난 작은 불씨가, 언젠가 거대한 들불이 되어 이 제국의 어둠을 태워버릴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약탈자의 계절은 끝났다. 이제, 새벽을 여는 자들의 계절이 시작될 것이다.

    **[장면 전환: 검은 화면 위, ‘새벽의 불씨’ 타이틀이 강렬하게 떠오른다. 타이틀 아래에는 작은 ‘새싹’ 문양이 붉은색으로 피어난다.]**

  • 다크 판타지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제목: 피 묻은 천명대전, 그 첫 장**

    **등장인물:**
    * **련 (煉):** 젊은 검사. 눈빛은 얼음처럼 차갑지만, 그 속엔 활활 타오르는 불꽃이 숨어있다. 고독하고 잔혹한 과거를 지녔다.
    * **백무진 (白無盡):** ‘광한검제(廣寒劍帝)’라 불리는 강자. 모든 것을 얼릴 듯한 냉기 어린 검술의 달인. 차분하지만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다.
    * **관중:** 무림의 수많은 문파와 세력들.

    **장면 1**

    **[배경: 고대 유적 위에 세워진 ‘비원의 투기장’. 거대한 돌기둥들은 부서진 채 하늘을 찌르고 있고, 바닥에는 알 수 없는 핏자국 같은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 먹구름이 짙게 깔린 하늘에서 번개가 간헐적으로 섬광을 터뜨린다. 투기장 중앙에는 흙먼지가 자욱한 원형 결투장이 있고, 그 주위를 수많은 무림인들이 에워싸고 있다. 공기는 무겁고 침묵이 흐르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긴장감이 응축되어 있다.]**

    **내레이션:**
    세상은 끝에 다다랐다.
    고대부터 이어져 온 마(魔)의 기운이 강호를 집어삼키려 들 때,
    무림은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단 하나의 자리.
    오직 강자만이 오를 수 있는 피의 제단.
    천명대전(天命大戰)이, 지금, 그 첫 막을 올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장면 2**

    **[비원의 투기장 중앙. 먼지가 자욱한 결투장 위로 련이 서 있다. 그의 검 ‘흑뢰(黑雷)’는 낡고 투박하지만, 그 끝에는 섬뜩한 기운이 감돈다. 그의 얼굴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난다. 상대는 이미 쓰러져 움직임이 없다.]**

    **관중 1 (속삭이듯):** 또… 또 저 자가 이겼군.
    **관중 2 (경악):** ‘흑뢰검(黑雷劍)’의 련… 대체 몇 명째 쓰러트린 건가? 괴물이다, 괴물.
    **관중 3 (두려움):** 저 자의 검 끝에는 망자(亡者)의 한이 서려 있어… 가까이 가는 것만으로도 살기가 느껴진다.

    **[련은 아무 말 없이 쓰러진 상대를 내려다본다. 그의 시선은 일말의 동요도 없다. 마치 투기장의 일부인 것처럼,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

    **련 (독백):**
    하찮은 감상(感傷)은 사치다.
    이곳은 오직 생존만이 허락된 전장.
    단 한 번의 망설임이, 모든 것을 무너뜨릴 것이다.

    **[그의 낡은 검 흑뢰에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피를 갈구하는 듯한 사악한 기운이다.]**

    **장면 3**

    **[그때, 투기장 북쪽 관중석에서 한 인물이 천천히 걸어 나온다. 새하얀 도포를 입고, 은빛으로 빛나는 검 ‘광한(廣寒)’을 찬 백무진이다. 그의 등장에 투기장은 더욱 싸늘한 침묵에 잠긴다. 그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지만, 그 눈빛은 한없이 깊고 차갑다.]**

    **백무진:** (나지막하지만 투기장 전체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로)
    수고 많았다, 련.
    그 검에 깃든 망자의 비명이 여기까지 들리는군.
    네 놈의 재주는 분명 뛰어나다. 허나…

    **[백무진의 시선이 련에게 닿자, 투기장 전체에 날카로운 한기(寒氣)가 퍼진다. 련의 몸 주변에 맴돌던 흑뢰의 기운이 순간 움츠러든다.]**

    **백무진:** (미소를 지으며)
    진정한 강함이란, 그리 추잡한 과거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다.
    천하의 운명은, 오직 순수한 힘으로 결정되어야 하는 법.
    네 놈의 ‘흑뢰’는… 너무 더럽다.

    **[련의 표정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그의 손아귀가 흑뢰의 검자루를 더욱 강하게 움켜쥔다. 뼈마디가 하얗게 드러날 정도로.]**

    **련:** (낮고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닥쳐라.
    네 놈이 무엇을 안다고 지껄이는가.

    **백무진:** (여전히 미소를 유지하며)
    나는 안다. 세상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네 놈이 무엇에 사로잡혀 있는지.
    자, 마지막 준결승이다.
    네 검이 과연, 내 ‘광한’의 냉기를 견뎌낼 수 있을지…

    **[백무진이 천천히 광한을 뽑아든다. 은빛 검신에서 푸른 냉기가 피어오르며 투기장 바닥에 서리가 맺히기 시작한다. 흙먼지조차 얼어붙는 듯한 기세다.]**

    **효과음:** 촤아아악- (냉기가 퍼지는 소리)

    **장면 4**

    **[련과 백무진이 결투장 중앙에 마주 선다. 둘 사이의 공간은 마치 두 개의 거대한 기운이 충돌하는 듯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하다. 련의 흑뢰에서는 칠흑 같은 기운이 솟아오르고, 백무진의 광한에서는 시린 냉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하늘의 먹구름이 더욱 짙어지고, 번개가 쉴 새 없이 번뜩인다.]**

    **내레이션:**
    세상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고요 속,
    두 개의 다른 운명이, 두 개의 다른 의지가,
    단 하나의 자리, 천하의 명운을 걸고 맞섰다.
    어둠을 머금은 불꽃과, 모든 것을 얼리는 얼음의 대결.

    **[먼저 움직인 것은 백무진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한없이 우아하고 가벼웠으나, 그가 지나는 길마다 바닥의 흙먼지가 얼어붙으며 하얗게 변했다.]**

    **백무진:** (나지막이)
    ‘설화만검(雪花萬劍)’…

    **[백무진의 광한이 허공을 가르자, 수천 개의 얼음 조각이 마치 눈보라처럼 련에게 쇄도한다. 각각의 조각은 날카로운 검날처럼 빛났다.]**

    **효과음:** 쉬이이익- 쏴아아아- (얼음 조각들이 날아오는 소리)

    **[련은 검을 뽑지 않았다. 대신, 그의 두 눈에서 검은 광채가 터져 나온다. 그의 몸 주위에 흑뢰의 기운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얼음 조각들을 산산조각 낸다.]**

    **련:** (이를 악물고)
    하찮은 잔재주!

    **효과음:** 콰아앙-! (기운이 충돌하는 소리)

    **[련이 마침내 흑뢰를 뽑아든다. 번개처럼 빠르게 백무진의 품으로 파고든다. 그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하며, 살기가 뼈 속까지 파고드는 듯하다. 마치 살아있는 악귀처럼.]**

    **련:** (절규하듯)
    죽어라!

    **[흑뢰가 번뜩이며 백무진의 목을 향해 내리꽂힌다. 칠흑 같은 검기가 허공을 가르자, 마치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시 현상이 일어난다.]**

    **효과음:** 스스스슥- (검기가 찢어지는 소리)

    **[하지만 백무진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그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검을 들어 련의 흑뢰를 막아낸다. 은빛 광한과 칠흑 같은 흑뢰가 부딪히자,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시린 냉기와 검은 살기가 사방으로 흩뿌려진다.]**

    **효과음:** 쨍강! 콰르릉-! (검이 부딪히는 소리, 에너지 폭발)

    **백무진:** (여유롭게)
    성급하군.
    네 놈의 분노는 검을 무디게 할 뿐이다.
    나와 같은 냉정함이 없이는… 결코 이 천하를 구할 수 없다.

    **[백무진이 련을 밀어낸다. 련의 몸이 투기장 바닥에 수 미터 미끄러진다. 련은 자세를 잡고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백무진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그의 몸을 옥죄는 듯하다.]**

    **련:** (숨을 헐떡이며)
    네 놈의 오만함이… 언젠가 네 목을 죄는 족쇄가 될 것이다!

    **장면 5**

    **[백무진은 웃음을 터뜨린다. 그 웃음소리가 투기장에 메아리친다.]**

    **백무진:**
    나는 천하의 족쇄를 풀러 온 자.
    어리석은 무림의 관습과 낡은 도리를 부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울 자다.
    네 놈의 어둠 따위는… 감히 나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

    **[백무진의 뒤편으로 거대한 얼음 결정이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투기장 전체가 얼어붙을 것 같은 기세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온화한 미소가 아닌, 절대자의 오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련:** (이를 갈며, 흑뢰를 고쳐 잡는다)
    질서? 네 놈의 피로 물들 질서인가!
    나의 어둠이… 네 놈의 빛을 삼켜줄 것이다.
    이것이 나의 업(業)이다!

    **[련의 전신에서 검은 오라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온다. 그의 주변 바닥이 균열을 일으키며 솟아오른다. 련의 눈동자는 피처럼 붉게 물들고, 그의 검 흑뢰는 마치 악마의 심장처럼 고동치는 듯하다. 투기장 전체를 진동시킬 정도의 끔찍한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효과음:** 우우우웅- 콰르르릉- (검은 오라가 솟아오르는 소리, 투기장이 흔들리는 소리)

    **내레이션:**
    그의 심장 속 깊이 잠들어 있던
    가장 어둡고, 가장 잔혹한 힘이
    마침내, 봉인을 뚫고 깨어나고 있었다.
    세상의 운명이 걸린 이 피의 투기장에서,
    그는 과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절망의 어둠 속에서, 홀로 타오르는 광염(狂焰)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재앙이 될 것인가.

    **[련과 백무진, 두 개의 극단적인 기운이 폭풍처럼 격돌하기 직전의 순간. 그들의 모습 위로 하늘의 번개가 거대한 섬광을 터뜨리며 화면을 가득 채운다.]**

    **- 1화 끝 -**

  • 크툴루 신화 독립적인 단편 소설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앙상한 이빨처럼 솟아오른 폐허 속에서, 지훈은 숨을 죽였다. 무너진 고가도로는 거대한 뼈대처럼 하늘을 가로질렀고, 그 아래로 찌그러진 차량들이 녹슨 망령처럼 늘어서 있었다. 지긋지긋한 보랏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이 세계를 짓누르고 있었다. 해는 없었다. 그저 어스름한 보랏빛 광선만이 모든 것을 음울하게 비출 뿐이었다.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긁었다. 오래된 곰팡이와 썩은 철의 비린내가 뒤섞여 역겨웠다. 지훈은 등에 메인 낡은 배낭의 끈을 고쳐 매며 잔뜩 날이 선 신경으로 주위를 살폈다. 왼쪽 팔뚝에 새겨진 희미한 문신이 흐릿한 통증처럼 느껴졌다. 그건 이제 아무 의미도 없는 과거의 표식이었다.

    끼이익.

    고철이 긁히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지훈은 재빨리 멈춰 서서 부서진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거칠게 울렸다. 놈들인가? 아니면… 다른 생존자?

    희망은 늘 절망의 전조였다. 지난 몇 년간 지훈이 겪은 경험은 그러했다.

    시야 한구석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거대한 그림자가 느릿하게 움직였다. 놈이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몸뚱아리, 수십 개의 눈이 사방으로 번뜩이는, 흡사 모든 재앙을 한데 뭉쳐놓은 듯한 그 기괴한 존재. 사람들은 그것을 ‘뒤틀린 망령’이라 불렀다. 아니, 이제 부를 수 있는 사람 자체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망령은 천천히 폐허 속을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주변의 부서진 건물 파편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망령이 지나간 자리에는 콘크리트 바닥에 섬뜩한 점액이 남았다. 지훈은 온몸의 근육을 굳히고 숨을 참았다. 조금이라도 소리를 내면, 저 망령의 수많은 눈 중 하나라도 자신을 발견하면…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다행히 망령은 이쪽을 눈치채지 못한 듯, 느릿하게 방향을 틀어 멀어졌다. 그 뒤틀린 그림자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망령의 불쾌한 기운이 완전히 사라진 뒤에야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젠장…”

    낮게 읊조린 욕설이 무미건조하게 허공에 흩어졌다. 지훈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이곳저곳을 떠돌며 먹을 것을 찾고, 안전한 잠자리를 찾는 것이 일상이었다. 몇 년 전, 이 모든 것이 시작되었을 때의 혼란은 이제 무감각한 일상이 되었다. 하늘이 찢어지고, 알 수 없는 존재들이 나타나 인류를 학살하던 그날. 아수라장 속에서 가족의 손을 놓쳤다. 그 이후로 그는 홀로 이 지옥을 헤매고 있었다.

    낡은 상가 건물의 잔해 속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창문은 모두 깨져나갔고, 내부의 상품들은 썩거나 먼지에 뒤덮여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진열대 위에는 해골처럼 마른 마네킹만이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쓸 만한 건 없나…”

    벽에 붙어있던 오래된 포스터 조각을 떼어내자, 벽면이 무너져 내렸다. 그 뒤에서, 지훈의 눈에 익숙한 무언가가 보였다. 낡은 상자. 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분명 누군가 숨겨둔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먼지 앉은 깡통 몇 개와, 바싹 마른 육포 조각들이 있었다. 그리고… 한 권의 낡은 수첩. 지훈은 육포 한 조각을 입에 넣어 씹으며 수첩을 집어 들었다. 가죽 표지는 닳아 해져 있었고, 종이들은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다.

    수첩을 펼치자, 펜으로 쓴 듯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삐뚤빼뚤하지만 또렷한 글씨체. 그리고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섬뜩하게 변해가는 그림들. 처음에는 평범한 가족의 스케치였다가, 어느 순간부터 기이한 형상의 괴물들이 그려져 있었다. 모든 페이지에 걸쳐 반복되는 기하학적인 문양들, 끝없이 이어지는 선들이 마치 저주의 주문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르렀을 때, 지훈의 손이 멈췄다.

    거기에는 익숙한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다소 어리고 앳된 모습이었지만, 분명 지훈이 아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 아래에 쓰여진 이름.

    *유진*.

    지훈의 여동생 이름이었다.

    “유진아…?”

    그의 목소리가 낯설게 떨렸다. 수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유진은 이 폐허 속에서 마지막까지 찾아 헤매던 유일한 희망이었다. 전쟁통에 헤어졌을 때, 유진은 겨우 초등학생이었다. 이토록 끔찍한 세상에서, 그 어린 동생이 살아남았을 리 없다고, 지훈은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어왔다. 하지만 이 수첩은…

    수첩의 마지막 장에는 유진의 그림 옆에, 또 다른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대충 그려진 약도였지만, 익숙한 지형 몇 군데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지도의 끝에는 알 수 없는 문자로 쓰인 지명이 있었다. 그 문자를 따라 몇 번의 점이 찍혀 있었는데, 그 점들이 이어져 ‘고요한 숲’ 이라는 글자가 한글로 쓰여져 있었다.

    ‘유진이 이곳에 왔었다는 건가? 그리고… 고요한 숲으로 갔다고?’

    심장이 다시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절망 속에서 빛을 찾았을 때의 아찔함이었다. 그것이 진짜 희망이든, 아니면 더 깊은 절망으로 이끄는 환영이든, 지훈은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며칠 밤낮을 걸어 지도는 지훈을 도시의 외곽으로 이끌었다. 폐허가 된 도시를 벗어나자 풍경은 기이하게 변했다. 콘크리트와 철골 대신, 검게 뒤틀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선 숲이 나타났다. 나뭇잎은 없었다. 가지들은 마치 저주받은 팔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었고, 그 사이로 보랏빛 하늘이 조각조각 부서져 보였다.

    ‘고요한 숲.’

    이곳이 과연 ‘고요’라는 이름에 걸맞을까. 공기 중에는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지훈의 발소리와 제 자신의 거친 숨소리만이 모든 소리의 전부였다.

    숲으로 들어선 순간, 지훈은 뭔가에 홀린 듯 걸음을 멈췄다. 땅바닥에 떨어진 낡은 천 조각. 빛바랜 빨간색이었다. 분명 유진의 스웨터 조각이었다. 어린 시절, 유진이 가장 좋아했던 스웨터.

    “유진아!”

    지훈은 저도 모르게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숲의 정적에 흡수되어 메아리조차 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외침이 마치 신호라도 된 듯, 숲의 풍경이 미묘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무의 형상이 흐려지고, 검은 나뭇가지들이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착각이 들었다.

    순간, 숲의 깊은 곳에서 희미한 빛이 번뜩였다. 푸른색, 아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기묘한 색의 빛이었다. 홀린 듯 그 빛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수첩에 그려진 약도의 끝, 그 ‘고요한 숲’의 중심이었다.

    숲이 점점 더 기괴해졌다. 나무들은 점액질의 줄기를 드러냈고, 그 줄기 사이에서 셀 수 없는 눈알들이 지훈을 응시하는 듯했다. 땅은 울퉁불퉁하게 융기되어 있었고, 그 위로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맥박처럼 깜빡이는 섬광을 뿜어냈다.

    마침내, 지훈은 숲의 중심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건물이 있었다. 아니, 건물의 잔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온전했다. 차라리 ‘구조물’이라고 불러야 할 터였다. 높이가 수십 미터에 달하는 검은색 석탑. 매끄러운 표면에는 인간의 손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을 것 같은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탑의 맨 위에는 보랏빛 하늘을 향해 거대한 눈동자가 꿰뚫어져 있었다. 살아있는 듯, 그 눈동자는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탑의 한쪽 면에는 녹슨 철문이 박혀 있었다.

    그 문 앞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검은 로브를 걸치고 있었고, 핏기 없는 얼굴에는 기묘한 황홀경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석탑의 눈동자를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 무리의 한가운데에…

    “유진…?”

    지훈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바싹 말랐다. 로브를 걸친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한 소녀. 어릴 적 모습 그대로는 아니었지만,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얼굴이었다. 유진이었다.

    소녀는 로브를 입고 있지 않았다. 낡고 헤진 옷차림, 여전히 어린아이의 티를 벗지 못한 몸. 그러나 그녀의 눈빛은… 지훈이 알던 유진의 눈이 아니었다. 그 눈동자는 석탑의 눈동자처럼 푸른색,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유진의 손에는 낡은 수첩이 들려 있었다. 지훈이 발견했던 그 수첩과 똑같은. 그리고 그 수첩을 든 채, 유진은 공허한 눈으로 석탑의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나직이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바닷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수많은 벌레들이 한꺼번에 윙윙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한 남자가 유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로브를 입은 남자였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그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이제 때가 되었다. 아이여.”

    남자의 목소리가 숲의 정적을 갈랐다.

    “그분께서 너를 통해 말씀하시리라.”

    유진의 푸른 눈동자가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시선이 지훈에게 닿았다. 그러나 그 눈에는 아무런 인식도, 감정의 흔적도 없었다. 마치 지훈이 풍경의 일부인 것처럼, 그저 텅 비어 있었다.

    “유진아! 나야, 오빠!”

    지훈은 정신없이 달려 나갔다. 찢어진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흠칫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텅 빈 눈동자들이 일제히 지훈에게 향하자, 지훈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멈춰라, 어리석은 자여.”

    남자가 조용히 말했다.

    “그녀는 이미 그분의 품에 안겼다. 너는 그저… 어둠 속으로 돌아갈 존재일 뿐.”

    남자의 손이 허공을 향해 들렸다. 그러자 주변의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마치 허수아비처럼 느릿하게 몸을 움직여 지훈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섬뜩할 정도로 부자연스러웠다.

    유진은 여전히 석탑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알 수 없는 주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석탑의 거대한 눈동자도 같은 색으로 더욱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유진아!”

    지훈은 다시 한번 외쳤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할 뿐. 그 순간, 지훈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찾아 헤매던 유진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 껍데기만 남은 소녀는… 그저 거대한 존재의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들의 손에는 부서진 돌멩이 조각이나 녹슨 철조각들이 들려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더 이상 인간의 감정이 없었다. 그저 어떤 거대한 존재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만이 있을 뿐이었다.

    지훈은 주저앉았다. 희망을 쫓아 달려왔던 길의 끝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더 깊은 절망이었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모든 순간이 한순간에 부질없어졌다.

    ‘유진아…’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울음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목구멍에서 터져 나오려는 비명은 그저 가슴 속에서 맴돌 뿐이었다.

    유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알 수 없는 언어가 점점 더 커졌다. 석탑의 눈동자는 마치 심장처럼 격렬하게 박동했다. 그리고 보랏빛 하늘이 석탑의 눈동자와 같은 푸른색으로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하늘이 열리는 듯, 거대한 균열이 생겨나며 그 너머의 심연이 드러났다.

    로브를 입은 사람들이 지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지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푸른색으로 빛나는 유진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동자 속에서, 지훈은 자신이 발 딛고 선 이 세상이 얼마나 작고 하찮은 존재인지, 그리고 저 거대한 심연의 존재가 얼마나 오래되고 막강한 것인지 깨달았다.

    이 세상의 모든 고통과 절규는, 그 거대한 존재에게는 한낱 하찮은 잡음에 불과했다. 인류의 생존은 이미 정해진 비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훈은 마지막으로 이를 악물었다.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설령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지라도, 이 모든 절망 속에서 단 하나라도…

    그의 손에 들린 녹슨 파이프가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유진아!”

    그는 다시 외쳤다. 이번에는 절규였다.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유진의 껍데기를 향한,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리고 그 비명은, 거대한 심연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고요한 숲을 집어삼켰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제1장: 낡은 흑요석 목걸이

    이진우는 텅 빈 편의점 창밖을 응시했다. 밤은 깊었고, 불 꺼진 도로 위로 가끔 택시 한 대만이 미끄러지듯 지나갈 뿐이었다.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는 이 도시의 약속은, 그에게만은 예외였다. 진우의 안에서는 오래전부터 모든 불이 꺼져 있었다. 무언가 뜨겁게 끓어오르던 시절은 아득한 옛날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의 손목에는 낡은 흑요석 목걸이가 감겨 있었다. 조부께서 물려주신 유품이었다. 언제나 차갑고 매끄러웠던 그 돌은, 어린 시절 진우에게 신비로운 힘의 상징이었다. 조부는 늘 말씀하셨다. “이 돌은 네 안에 잠든 것을 일깨워줄 게다.” 하지만 그 ‘잠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진우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카운터 옆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던 진우의 시선이 문득 목걸이에 닿았다. 흑요석 표면이 아주 희미하게,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착각인가? 진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손목을 들어 올렸다. 흑요석은 다시 차가운 검은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진우는 피식 웃었다. 한때는 무림의 신동이라 불리며 ‘천마신공’을 익히던 아이였다. 열 살 때 이미 고수들의 초식을 흉내 내고 열두 살에 문파의 비기를 깨쳤다. 하지만 가족을 잃고 모든 것을 포기한 후, 그의 세계는 더 이상 무림이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퍽퍽한 현실만이 존재했다.

    “진우 씨, 벌써 교대 시간이에요?”

    야간 알바생, 여대생 민서가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산대에서 일어섰다.

    “어. 수고해.”
    “아니, 이 시간에 이렇게 힘든 표정으로 퇴근하는 사람 처음 봐요.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예요?”
    “별거 없어. 그냥 좀… 지쳐서.”

    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편의점 문을 나섰다. 싸늘한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집으로 향하는 길, 그는 주머니 속 흑요석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다시 한번, 미묘한 온기가 손끝에 닿는 것 같았다. 그는 무심코 목걸이 표면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 순간, 흑요석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검은 돌이 붉은 불꽃을 토해내며 이글거렸다. 진우는 놀라 손을 놓치려 했지만, 목걸이는 마치 그의 피부에 들러붙기라도 한 듯 떨어지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덮쳤다.

    “이게… 뭐야?!”

    사방이 온통 새빨간 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거대한 용광로 속에 갇힌 듯, 뜨겁고 아찔한 열기가 그를 휘감았다. 공간이 일그러지고, 바닥이 뒤틀렸다. 진우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았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고, 귓가에는 거대한 폭포수가 쏟아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는 저항할 틈도 없이 거대한 힘에 휩쓸려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의식이 끊어졌다.

    ***

    차가웠다. 온몸이 얼어붙을 듯한 한기가 그를 감쌌다. 코끝을 스치는 흙내음과 풀잎 향기, 그리고… 비릿한 피 냄새.
    진우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빽빽하게 우거진 거대한 나무들의 잎사귀였다. 달빛이 나뭇잎 사이를 뚫고 들어와 바닥에 얼룩덜룩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여기… 어디지?’

    그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낯선 숲이었다. 키 큰 고목들과 얽히고설킨 넝쿨, 이름 모를 야생화들이 가득한 곳. 분명 퇴근길 골목이 아니었다. 꿈인가?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진우는 손을 뻗어 자신의 몸을 더듬었다. 입고 있던 편의점 유니폼이 찢겨 너덜거렸다. 손목의 흑요석 목걸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빛을 잃고 다시 차가운 돌로 돌아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그의 귓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목소리. 싸우는 소리? 아니, 그보다는… 무언가 격렬하게 부딪히는 소리였다. 금속이 부딪히는 쨍한 소리, 사람들의 비명과 신음.

    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몸이 가벼웠다. 너무나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어릴 적, 천마신공을 수련하며 느끼던 그 전성기의 육체와 흡사했다. 잊고 지냈던 감각들이 마치 오래된 서랍 속 물건처럼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숲의 장막을 뚫고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발소리를 죽이고 풀숲에 몸을 숨겼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서로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낡고 해진 무복을 입은 자들, 그리고 갑옷 비스무리한 것을 걸친 자들. 그들은 칼과 창, 그리고 맨손으로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허공을 가르는 검기, 땅을 뒤흔드는 장풍.

    이건… 영화가 아니었다. 뿜어져 나오는 피 냄새와,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 그리고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들. 모든 것이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크아악!”

    한 남자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등에는 꽂힌 비수가 섬뜩하게 빛났다. 진우는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이 모든 상황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다.

    “저들을 막아라! 저들이 ‘혈마종’의 본거지에 당도하면 천하의 운명이 위태로워진다!”

    한 무복 차림의 중년 남자가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는 절박함이 묻어 있었다.

    “천하의 운명?”

    진우는 혼란스러웠다. 혈마종? 무림? 이 모든 것이 대체…

    바로 그때, 한 인영이 진우가 숨어있는 풀숲으로 튕겨져 나왔다. 낡은 무복을 입은 청년이었다. 그는 허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청년의 눈에 진우가 들어왔다.

    “누, 누구냐…?”

    청년의 눈빛은 경계심과 동시에 절박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진우는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자신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 타임슬립 해왔다고?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흥, 숨어있던 잔당이냐?”

    싸움터에서 한 남자가 비웃듯이 진우와 청년을 향해 다가왔다. 검은 비단옷을 입고 얼굴에는 흉터가 가득한 남자였다. 그의 눈빛은 사악하게 빛났다. 남자의 손에는 검붉은 기운이 서린 장검이 들려 있었다.

    “어린 놈이 숨어있다가 목숨이라도 구걸하려 했더냐? 꼴에 무림인이라고 피 비린내 나는 이 장소를 기웃거리는 꼴이 가련하구나.”

    남자의 입가에는 잔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주저 없이 검을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검기가 진우의 목덜미를 스쳤다.

    ‘죽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죽음의 위협이었다. 본능적으로 그의 몸이 반응했다. 발끝에서부터 거대한 기운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흑요석 목걸이가 다시 뜨겁게 타오르는 착각에 빠졌다.

    “건방진 놈!”

    남자는 비웃으며 검을 휘둘렀다. 검은 거대한 뱀처럼 진우의 목을 노렸다.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릴 적 천마신공을 수련하며 익혔던 ‘환영보법’이었다. 그의 몸은 마치 그림자처럼 일렁이며 남자의 검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옆에서 피를 흘리던 청년도 놀란 표정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네, 네놈…! 그건…!”

    진우는 자신도 믿을 수 없었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뇌에서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그의 육체가 모든 위협에 반응하고 있었다. 잊고 지냈던 무공의 감각이 핏속에 용해되어 흐르는 듯했다.

    “흥미롭군. 제법 실력이 있는 놈이었더냐? 하지만 어림없지.”

    남자는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훨씬 빠르고 강력한 기세였다.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기는 살을 에는 듯했다. 진우는 다시 한번 몸을 틀어 피했지만, 이번에는 검기가 그의 뺨을 스치며 한 줄기 피를 냈다.

    뜨거운 피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살벌한 기운이 그를 압박했다. 이 남자… 강하다. 단순한 폭력배가 아니었다. 명백히 죽이려는 의지를 가진 살수였다.

    “감히 내 검을 두 번이나 피하다니. 네놈, 보통 놈이 아니었군. 좋아, 네놈의 피로 이 밤을 물들여주마!”

    남자는 외치며 전신에 검은 기운을 두르고 돌격했다. 그의 검은 마치 지옥에서 솟아난 마검처럼 섬뜩한 살기를 뿜어냈다.

    진우는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잊고 지냈던 열망이 그의 내면에서 꿈틀거렸다. 끓어오르는 피, 불타오르는 투지. 그가 이 모든 것을 포기했던 이유와는 상관없이, 그의 몸은 싸우기를 원하고 있었다.

    “크아아악!”

    남자가 달려들며 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손바닥에서 잊고 지냈던 차가운 기운이 솟아났다.

    ‘이건…!’

    빙결장! 조부가 가르쳐주셨던 천마신공의 일초였다. 진우는 그대로 남자의 검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콰아앙!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얼음 기운이 남자의 검과 격렬하게 부딪혔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검은 사방으로 파편을 튕겨내며 얼어붙었다.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경악이 서려 있었다.

    “이, 이런 마공을…! 네, 네놈 대체…!”

    진우 역시 놀랐다. 자신의 몸이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다. 그는 무의식중에 자신에게 잠들어 있던 ‘힘’을 일깨운 것이었다.

    그 순간, 싸움터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그리고 한 인영이 그의 옆으로 순식간에 날아와 남자의 목에 칼을 겨눴다.

    “혈마종의 잡배가 감히 건방지게 날뛰는군.”

    목에 칼을 겨눈 이는 백발의 노인이었다. 낡았지만 고급스러운 무복을 입었고, 깊은 눈빛에는 수많은 세월의 흔적이 깃들어 있었다. 노인은 남자를 한순간에 제압하고는 진우를 돌아보았다.

    “어린 친구, 자네는 대체 누구인가? 이 비천한 장소에서 이런 심오한 내공을 펼치다니. 그것도 잊혔던 천마신공의 빙결장이라니… 혹, ‘북천무신류’의 후인이더냐?”

    노인의 눈빛이 날카롭게 진우를 꿰뚫었다. 진우는 말문이 막혔다. 북천무신류?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천마신공은… 그가 잊고 지냈던, 자신의 가족에게 내려오던 무공이었다.

    “천마신공을 익힌 젊은이여… 어째서 이곳에 왔는가?”

    노인의 목소리에는 압도적인 기운이 실려 있었다. 진우는 직감했다. 이 노인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전설 속의 무림 고수.

    “지금 무림은 전례 없는 위기에 처해 있네. 혈마종이 천하제일무도대회를 통해 혼란을 조장하고, 마교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천하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이때, 자네 같은 무인이 나타나다니… 하늘의 뜻이로구나.”

    노인은 진우의 어깨를 굳건히 잡았다. 그의 눈빛은 굳건한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자네의 힘이 필요하네. 젊은 무인. 우리와 함께 천하를 구할 지혜와 용기를 보여주지 않겠는가?”

    진우는 혼란에 빠졌다. 천하의 운명? 무림? 마교?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단지 평범한 21세기 대한민국 청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손목에 감긴 흑요석 목걸이가, 그리고 그의 핏속에서 끓어오르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힘이,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이끌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피와 비명이 난무하는 무림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그는 서 있었다. 잊고 지냈던 과거의 그림자,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의 운명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나는… 대체 어디로 온 거지…?”

    진우의 입에서 흘러나온 질문은,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는 것이었다. 다만 노인의 시선만이 그의 내면에 숨겨진 거대한 잠재력을 꿰뚫어 보듯 빛나고 있었다.

  • 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고요한 침묵 속의 균열

    김현우는 텅 빈 엘리베이터가 뱉어내는 차가운 공기를 맞으며 비척거렸다. 새벽 한 시, 그의 몸은 늘어붙은 껌처럼 끈적거리는 피로로 축 늘어져 있었다. 열두 시간 넘게 컴퓨터 화면 앞에서 씨름한 대가는 어깨와 목을 짓누르는 돌덩이와 번쩍이는 편두통이었다. 삑, 삑, 삑.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조차 지쳐 느릿했다. 낡은 복도등 아래, 1403호라는 숫자가 어쩐지 오늘따라 더욱 쓸쓸하게 느껴졌다.

    철컥.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어둠이 그를 맞았다. 언제나처럼 정적만이 가득한 공간. 홀로 사는 30대 미혼 남성의 자취방은 언제나 그랬다. 현우는 몸을 숙여 신발을 벗어 던지고는 주머니 속 스마트폰을 꺼내 거실 불을 켰다. 형광등이 한참을 삐걱거린 후에야 겨우 제 색을 찾았다. 너무 오래된 건가. 이 아파트도, 내 인생도. 그는 피식 웃었다. 실없는 농담으로 자기 자신을 위로하는 것도 이제는 습관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어 며칠 전 사다 놓은 맥주 캔을 꺼냈다. 시원한 캔이 손에 닿자 그제야 온몸의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차갑게 식은 밥에 반찬 몇 가지를 늘어놓고 대충 끼니를 때웠다. 식사를 마친 현우는 설거지통에 그릇을 던져 넣고는 곧장 침실로 향했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유일한 낙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침대에 몸을 뉘었다. 시트는 눅눅했고, 베개는 어쩐지 축축한 느낌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눈을 감으려 했다. 그때였다.

    따닥.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하게 들려오는 소리. 현우는 눈을 번쩍 떴다. 어디서 들린 거지? 마치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 그는 귀를 기울였다. 다시금 고요가 찾아왔다. 위층에서 나는 소리인가? 아니면 옆집? 이 시간까지 소음을 낼 이웃은 아마 없을 텐데. 그는 피곤함에 이 모든 것을 망상으로 치부하기로 했다.

    하지만 다시 눈을 감으려 하자, 이번엔 거실 쪽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게 보였다. 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거실 불을 끄고 왔는데? 그는 몸을 일으켜 침실 문을 열었다. 거실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나 분명히, 주방 쪽에 설치된 센서등이 아주 짧게, 마치 맥박처럼 희미하게 깜빡였다 사라졌다.

    “뭐야… 고장 났나?”

    그는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센서등은 이제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방 안으로 몇 걸음 더 들어섰다. 쨍한 정적 속에서 문득, 손등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몸을 움찔거렸다. 에어컨을 켜지도 않았는데, 마치 얼음장 같은 냉기가 그의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소름이 돋았다.

    그때였다. 씽크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머그컵 하나가, 아주 느릿하게, 쥐도 새도 모르게 옆으로 스르륵 움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밀어낸 것처럼.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현우의 눈은 그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는 숨을 들이켰다.

    “이게… 뭐야…?”

    현우는 머그컵을 빤히 쳐다봤다.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그가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걸까? 아니면 너무 지쳐서 시각에 일시적인 착란이 온 걸까? 그는 손을 뻗어 머그컵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컵 바닥에 물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가 손을 떼자마자, 컵은 다시 몇 밀리미터 정도 옆으로 미끄러졌다.

    쿵.

    현우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피가 머리로 쏠리는 듯한 아찔함.
    그때 거실 쪽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주방을 벗어나 거실로 향했다.

    거실은 아까와 다름없이 어두웠다. 그러나 바닥을 비추는 희미한 달빛 아래, 그가 분명히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TV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현우는 리모컨을 주워 들었다. 건전지 덮개가 열려 있었고, 건전지 두 개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리모컨을 던진 것 같은 모양새였다.

    “장난해? 대체 누가…?”

    현우는 혼잣말을 했다. 이 집엔 자신 말고 아무도 없었다. 도둑? 그럴 리가. 문은 분명히 잠겨 있었다. 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발끝까지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복도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낡은 나무 바닥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휘어지는 듯한 소리. 현우는 몸을 굳혔다. 복도 끝, 현관문과 연결된 통로. 그곳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누구… 누구 없어요?”**

    그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대신, 어둠 속에서 아주 희미하게,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것 같은 끈적거리는 속삭임이 들려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언어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음절들이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분명히, 그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현우는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복도 쪽으로 한 발자국 내디뎠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복도 벽에 걸려 있던 액자 하나가, 그가 아끼던 도시 풍경화 액자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액자를 바로잡았다. 그때, 그의 손가락 끝에 닿는 차가운 벽의 감촉. 마치 살아있는 피부처럼 미끄러웠다.

    그리고 바로 그때, 등 뒤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콰아앙!**

    현우는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거실 벽에 붙어 있던 높은 책장에서 두꺼운 양장본 책 한 권이 떨어져 있었다. 그가 즐겨 읽던 고대 문명 관련 서적이었다. 책은 바닥에 엎어진 채 활짝 펼쳐져 있었고, 그 속의 한 페이지가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페이지 속에는 기괴한 문양들이 가득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도저히 그려낼 수 없는 비틀리고 얽힌 선들. 그것들은 마치 살아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림 속 중앙에는 기이한 형체가 그려져 있었다. 어떤 신성모독적인 생물인지, 아니면 상상 속의 괴물인지 알 수 없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 그것은 그를, 현우를 똑바로 쳐다보는 것 같았다. 눈알이 없는 곳에서 알 수 없는 시선이 그를 꿰뚫었다.

    그 순간, 아파트 전체가 정전된 듯, 모든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어둠이 덮쳤다. 절대적인, 시야를 완전히 집어삼키는 칠흑 같은 어둠.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앞에는 아직도 책 속의 기괴한 문양과 형체가 잔상으로 아른거렸다.

    그리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바로 그의 등 뒤에서, 아까 들었던 그 끈적거리는 속삭임이 이번에는 훨씬 더 또렷하게, 마치 그의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흐으… 흐으으…”**

    그것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피 섞인 침묵이 엉겨 붙은 듯한, 세상의 모든 불쾌함이 농축된, 심해의 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듯한 소리. 그 소리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현우의 등 뒤에서 그의 어깨로, 그리고 목덜미로 다가오고 있었다.

    움직일 수 없었다. 그의 몸은 공포에 질려 굳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차가운 숨결이 그의 목덜미를 스쳤다.
    그것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숨 쉬는 소리가. 끈적거리는, 이질적인 숨결이. 바로 그의 등 뒤에서.

    아니, 그것은 숨결이 아니었다.
    그것은 *웃음소리*였다.
    인간이 아닌, 고대하고, 이질적인 존재의, 섬뜩한 웃음소리였다.

  • 추리 미스터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둑한 새벽, 차서진은 낡은 신당 앞에서 담배를 깊게 빨았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는 훅, 하고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가 텁텁한 연기와 함께 뱉어졌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신당의 기울어진 기와지붕과 빛바랜 단청을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 이곳은 도시의 끝자락, 재개발 예정지였던 만큼 인적 드문 폐가들 사이에 덩그러니 놓인 섬 같은 곳이었다.

    “이번엔 또 여기군.”

    그의 옆에서 후배 형사 박민준이 낮게 중얼거렸다. 민준의 목소리에도 피로와 함께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며칠 전부터 미제 사건으로 분류될 뻔했던 연쇄 실종 사건의 세 번째 희생자가 이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사건 현장은 언제나 그랬듯 기묘했다. 몸에는 외상이 거의 없었지만, 마치 생기가 통째로 뽑혀 나간 듯한 끔찍한 창백함. 그리고 늘 그렇듯, 범인이 남긴 흔적은 먼지 한 톨도 없었다.

    “범행 수법이 점점 대담해지고 있어. 처음 두 건은 인적이 드문 외곽이었는데, 여긴 그래도 마을에서 멀지 않잖아.” 서진이 뼈아픈 현실을 짚었다. “게다가… 시신의 상태도.”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상합니다. 피 한 방울 안 흘렸는데, 시신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말라 비틀어졌어요. 마치 모든 활력이 빨려 나간 것처럼요.”

    서진은 담배꽁초를 발로 비벼 껐다. 그의 시선은 신당 안쪽에 놓인 피해자의 흔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낡고 부서진 제단 위, 붉게 칠해졌던 흔적마저 세월에 바랜 곳. 그곳에 쓰러져 있던 희생자의 모습은 잊으려 해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단순히 ‘엽기적’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현상이었다.

    이런 종류의 사건을 마주할 때마다, 서진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얼굴이 떠올랐다.
    윤하.

    그녀와는 우연히 골동품 경매장에서 처음 만났다. 낡은 서책에 담긴 희귀한 식물의 삽화를 놓고 서로 다른 종류의 집착을 보이다가 결국 그녀의 고집에 서진이 한발 물러섰던 것이 시작이었다. 그녀는 늘 희귀한 것, 오래된 것, 그리고 평범한 시선으로는 알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에 이끌리는 사람이었다. 서진은 그런 그녀의 신비로운 매력에 홀린 듯 빠져들었다.

    하지만 윤하는 늘 어딘가 위태로웠다. 사람들 속에 섞여 있지만, 마치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듯한 이질감. 그녀의 눈동자는 빛을 머금고 반짝일 때면, 마치 오래된 이야기 속의 정령처럼 형언할 수 없는 영롱함을 띠었다. 그녀의 손은 늘 차가웠고, 피부는 비단결처럼 매끄러웠지만, 가끔 햇빛 아래에서 피부가 유난히 투명하게 비치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녀는 또한 특정 소리에 극도로 민감했고, 밤에 특히 활기 넘쳤으며, 이상하게도 금속이나 기계 장치 근처에서는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진은 그것들을 그저 ‘예술가의 예민함’이라 치부하며 애써 외면했지만, 이 기이한 사건들이 겹치면서 그녀의 모습이 자꾸만 오버랩되었다.

    “선배, 이쪽에서 뭔가 발견했습니다.”

    민준의 목소리에 서진은 생각의 끈을 놓았다. 민준이 손전등을 비춘 곳은 신당 뒤편,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잡초 무성한 언덕이었다. 그곳에 돌멩이 몇 개가 어지럽게 놓여 있었는데, 마치 오래된 돌무덤의 잔해 같기도 했다. 그중 하나, 유독 매끄럽고 검은 돌멩이 틈에서 무언가가 빛나고 있었다.

    서진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민준이 손전등을 비추자, 돌멩이 틈새에 박혀 있는 작은 물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마치 손톱 크기만 한 어두운 색의 비늘 조각 같았다. 검은색이었지만, 빛을 받으면 미묘하게 푸른빛이 감돌았다. 마치 깊은 밤바다의 색 같기도, 혹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별의 조각 같기도 했다.

    “이게 뭐지?” 서진이 중얼거렸다. 손으로 집어 들자, 예상과 달리 단단하고 차가웠다. 매끄러운 표면에는 아주 미세한, 눈에 잘 띄지 않는 문양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너무 작아서 맨눈으로는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 순간, 서진의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몇 달 전, 윤하와 함께 서점에서 발견한 고고학 서적이었다. 고대 유물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에서, 그녀는 유독 한 장의 그림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림 속에는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진 돌 조각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그림과 지금 제 손에 들린 비늘 조각의 문양이 어딘가 비슷했다.
    그녀는 그림을 한참 응시하다가, 문득 서진을 향해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단순한 돌이 아니에요, 서진 씨.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자들에게, 혹은 길을 찾으려는 자들에게 이끌리는 표식 같은 거죠.”*

    그때는 그저 시적인 표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비늘 조각을 손에 든 채, 끔찍한 시신이 발견된 이 신당 앞에서, 그 말이 섬뜩할 정도로 현실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자들… 희생자들이? 아니면…

    서진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 이 조각이, 이 문양이, 만약 윤하와 연결되어 있다면? 그녀가 이 모든 것에 대해 알고 있거나, 혹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면? 그럴 리가 없었다. 사랑하는 윤하가… 하지만 그의 이성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경고음은 멈추지 않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는 주머니 속에서 작은 지퍼백을 꺼내 조심스럽게 비늘 조각을 담았다. 그리고 손에 남아있는 차가운 감각에 전율했다.

    *

    같은 시각, 도시 외곽의 한적한 아파트에 자리한 윤하의 작업실.
    창밖은 아직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지만, 윤하는 잠들지 못했다. 작업대 위에 펼쳐진 낡은 양피지 위로 섬세한 붓질을 이어가던 그녀의 손이 문득 멈췄다. 붓 끝에서 떨어진 먹물이 양피지에 번질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숨을 들이켰다.
    몸 안을 흐르는 무언가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마치 깊은 심해의 지층이 흔들리듯,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오래전부터 느껴왔던, 동족의 ‘흐름’이 위협받고 있다는 경고였다. 최근 들어 이런 감각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마치 투명한 막이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

    그녀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검푸른 홍채 가장자리에 미세한 금빛 반점이 떠올랐다. ‘이아’족에게 위험이 닥쳤을 때 나타나는 징후였다.
    특히 이번에는 강렬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먹이를 찾아 나서는 것처럼, 숨 막히는 압력이 도시의 어딘가에서 솟아나 그녀의 감각을 짓눌렀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윤하의 목소리는 미약한 떨림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작업대 한구석에 놓인 낡은 목각 인형을 어루만졌다. 인형의 눈동자는 검은 흑단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눈이 어딘가를 응시하는 듯했다.
    그녀는 이 불안감의 근원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최근 도시에서 발생한 기이한 연쇄 실종 사건들.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강력 범죄처럼 보였지만, 그녀의 동족 사이에선 오래된 전설이 현실이 되고 있다는 공포가 퍼지고 있었다. ‘흐름’을 흡수하는 존재. 인간의 형상을 띠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공허의 사냥꾼’.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빛의 바다 어딘가에, 서진이 있었다. 서진은 이 사건을 쫓고 있었다. 형사로서, 정의를 쫓는 그의 열정은 누구보다 뜨거웠다. 하지만 그 열정이, 그녀가 필사적으로 숨겨온 진실을 파헤치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와 함께한 밤을 떠올렸다. 그의 품에 안겨 있을 때면, 이 세상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격리된 듯한 안정감을 느꼈다. 그가 자신의 비밀을 알게 된다면… 과연 그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해줄 수 있을까. 아니,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그들의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을 터였다. 금지된 것을 사랑하는 자의 운명은 비극뿐이었으니까.

    *따르릉!*

    갑작스러운 전화벨 소리가 정적을 깼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 새벽에 전화할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자,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차서진’.

    윤하는 심호흡을 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평소처럼, 미소를 가장하며 전화를 받아야 했다. 그의 목소리에서 조금이라도 의심의 흔적을 발견한다면, 그날로 그녀의 세계는 무너질 터였다.

    “서진 씨?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귓가에는 심해의 포효 같은 불길한 예감이 울려 퍼졌다. 마치 그가, 그녀가 숨긴 진실의 문고리를 막 잡은 것처럼.

    수화기 너머 서진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고, 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윤하 씨, 미안해요. 너무 늦은 시간이라… 그런데 지금 좀 물어볼 게 있어서.”
    그의 목소리는 망설임으로 가득했지만, 질문의 내용은 분명했다.
    “예전에 우리 같이 봤던 책에서… 어떤 비늘 조각 그림 기억해요? 검은색인데 푸른빛이 도는…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했었죠?”

    윤하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그가 이미, 너무 가까이 와 있었다. 어쩌면, 이미 손에 쥐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 비늘 조각은… ‘어둠의 심장’을 상징하는, 이아족의 수호석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은, 존재를 찾아 헤매는 ‘공허의 사냥꾼’을 부르는 유일한 표식이었다.
    절대 인간에게 노출되어서는 안 될, 가장 위험한 금기였다.

    차가운 침묵 속에서, 윤하는 목이 메었다.
    *서진 씨, 제발… 더는 오지 마세요.*
    하지만 입 밖으로 내뱉어진 말은,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비늘 조각… 이요?” 윤하는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글쎄요… 어떤 비늘 조각을 말씀하시는 거죠?”

    창밖의 어둠이, 그녀를 집어삼킬 듯 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진은, 그녀가 내뱉은 거짓말의 얇은 막을, 너무도 쉽게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의 눈에선, 그녀의 불안이 고스란히 읽힐 터였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선택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를 막아야 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혹은… 그 모든 것을 잃게 될지라도.

    두 세계의 경계가, 이제 막 무너지기 시작했다.

  • 마법소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나는 이서아, 평범한 열아홉 살 여고생이자, 밤의 그림자 속에서 별의 힘을 빌려 싸우는 ‘수호자’다. 이따금씩 이어진다는 게 문제지만.

    오늘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늦게까지 교과서를 들여다보며 졸음과 사투를 벌이다가 겨우 한숨 돌릴 참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지긋지긋한 수학 공식들이 춤을 추고 있었고, 내일 아침까지 해낼 리 없는 숙제 더미가 나를 노려보는 듯했다. 피곤에 절어 침대에 드러눕는 순간, 손목에 차고 있던 은색 팔찌에서 섬뜩할 정도로 강한 진동이 울렸다.

    “젠장, 또야?”

    신음과 함께 벌떡 몸을 일으켰다. 팔찌의 보석이 붉은빛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이건 비상사태를 알리는 신호였다. 이 정도 강렬한 진동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서아, 상황이 좋지 않아.”

    귓가에 나직하고 냉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이 고양이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내 파트너, 묘령이었다. 그림자처럼 유연하게 공간을 가로지르는 검은 고양이의 형상으로, 그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지금은 반투명한 영체 상태로 내 방 한가운데에 떠 있었다.

    “이번엔 또 뭔데요, 묘령. 설마 또 길 잃은 유령이 전봇대랑 싸우는 건 아니겠죠?” 내가 늘어지게 하품하며 투덜거렸다. 지난번엔 정말 한밤중에 할머니 유령이 전봇대를 자기 남편으로 착각하고 대성통곡하는 바람에 주변 주민들을 다 깨웠던 적이 있었다. 그 사태 수습하느라 내 마력의 절반을 썼다고!

    묘령의 꼬리가 낮게 흔들렸다. “장난이 아니야, 서아. 이건…. 혼란의 기운이 너무 강해. 단순한 원념이나 길 잃은 영혼이 아니야. 누군가의 깊은 절망이, 현실을 침범하고 있어.”

    묘령의 목소리에 일말의 긴장이 스며 있었다. 그의 촉각은 언제나 정확했다.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장난기가 사라졌다. 깊은 절망이 현실을 침범했다고? 그건 여태껏 상대해왔던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위치.”

    “은하수 아파트 1204호. 도시 외곽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다. 에너지가 끊임없이 증폭되고 있어. 서두르는 게 좋을 거야. 주변 주민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도시 외곽의 낡은 아파트 단지라니, 상상만으로도 음침했다. 나는 재빨리 교복 대신 활동하기 편한 후드티와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마법소녀라고 해서 번쩍이는 변신만 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잠입과 조사가 더 중요했다. 일단은 평범한 이서아의 모습으로.

    밤거리는 적막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지도 앱으로 위치를 확인하며 은하수 아파트를 찾아갔다. 허름한 외벽에 낡은 간판이 겨우 붙어 있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보안은 허술해 보였고, 복도에는 희미한 형광등 불빛만이 어둠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1204호 앞.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문틈으로 기이한 한기가 새어 나왔다. 마치 얼음장 같은, 동시에 무언가 불쾌한 냄새가 섞인 한기였다.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들. 뭔가 깨지는 소리, 물건이 넘어지는 소리, 그리고 낮게 깔린 흐느낌.

    “확실해, 묘령. 엄청나게 강해.”

    “안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있어. 아마 피해자일 거야.”

    묘령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 저편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 깨지는 소리도 함께였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나는 결심하고 문고리를 잡았다. 잠겨있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내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참담했다.

    거실은 아수라장이었다. 가구들은 엉망진창으로 뒤집혀 있었고, 액자는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컵은 바닥에서 깨진 파편들을 흩뿌리고 있었다. 부엌 쪽에서는 싱크대 문이 덜컥거리며 열렸다 닫혔다를 반복하고 있었고, 식기들이 허공에서 서로 부딪히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아수라장 한가운데, 한 여자가 벽에 몸을 바싹 기댄 채 공포에 질린 얼굴로 흐느끼고 있었다.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그녀는 벌벌 떨면서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허공의 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향해서.

    “이봐요! 괜찮으세요?” 내가 황급히 다가가려 하자, 허공에서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밀쳐냈다. 나는 휘청거리며 벽에 부딪혔다.

    “크헉!”

    “서아, 조심해! 사념체가 이 공간을 완전히 장악했어!” 묘령이 내 주위를 맴돌며 경고했다.

    그제야 나도 눈치챘다. 이 아파트 안에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은 확연했다. 마치 집 전체가 살아있는 악몽처럼 뒤틀리고 있었다. 거대한 슬픔과 분노, 그리고 절망이 공기 중에 뒤섞여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누, 누구세요…?” 여자가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나를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왔어요!”

    그 순간, 부엌에서 식칼 하나가 튀어 나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쨍강!’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벽에 박혔다. 위협적이었다. 이건 단순한 유령이 아니었다.

    “상대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아무래도 이서아 양의 평범한 모습으로는 곤란하겠어.” 묘령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하아… 정말 이런 곳에서 변신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말이야.”

    나는 심호흡을 했다. 내 손목의 팔찌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빛은 내 몸을 감싸 안고, 주변의 어둠을 밀어냈다. 푸른색과 은색이 뒤섞인 마법진이 내 발아래에서 회전했다. 흩날리는 긴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빛나고, 몸에는 별빛 무늬가 새겨진 전투복이 순식간에 착용되었다. 손에는 언제나 나를 지켜주는 별빛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고, 진실을 밝히는 별의 수호자! 이서아!”

    내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아파트 안을 휘감고 있던 기괴한 에너지들이 잠시 움찔하는 듯했다. 여자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일말의 희망이 서려 있었다.

    “저… 저게… 뭐예요?” 그녀가 간신히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그녀가 가리킨 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보였다. 공기 중에 일렁이는 검은 그림자 같은 형상. 거대한 감정의 덩어리가 마치 살아있는 먹물처럼 이리저리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정형화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묘령, 대체 저게 뭐야? 그냥… 감정 덩어리야?” 내가 지팡이를 굳게 잡고 물었다.

    “정확히는 감정이 현실에 너무 깊이 침식해서 물질화된 ‘사념의 잔재’다. 강력한 마력을 가진 주체의 감정이 폭주하면 이렇게 될 수 있지. 저 여자에게서 나오는 절망이 저것을 키우고 있는 거야. 그 여자의 공포와 슬픔을 먹이 삼아.”

    묘령의 설명은 충격적이었다. 저 여자의 절망이 저 괴물을 키우고 있다고?

    내가 지팡이를 들고 그 검은 그림자를 향해 마력을 집중했다. “여기서 더 이상 난동을 피우게 둘 수는 없어!”

    내 지팡이 끝에서 은색 별빛이 한 줄기 뻗어 나갔다. 빛은 그림자를 향해 곧장 날아갔지만, 그림자는 마치 연기처럼 흩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한데 뭉쳐 내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오히려 더욱 거대하고 불길한 형태로 꿈틀거렸다.

    “크흐흐… 큭….”

    갑자기 주변의 깨진 파편들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테이블 조각, 유리 조각, 심지어 부엌의 식기들까지! 그것들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빛나며 여자를 향해 돌진했다.

    “안 돼!”

    나는 황급히 지팡이를 휘둘러 빛의 장막을 펼쳤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파편들이 장막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하지만 그 틈을 타 검은 그림자가 엄청난 속도로 여자를 향해 돌진했다. 그것은 여자의 몸속으로 파고들 기세였다.

    “막아, 서아! 저게 몸속으로 들어가면 정말 큰일 난다!” 묘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를 악물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내 온몸의 마력을 끌어모아 강력한 별빛의 폭풍을 일으켰다.

    “여기서는… 더 이상 누구도 상처 입힐 수 없어!”

    내 손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검은 그림자를 강타했다. 그림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림자의 일부가 흩어졌다가 다시 뭉치는 것이 보였다. 더욱 빠르고, 더욱 집요하게 여자를 향해 돌진했다.

    안 된다. 저것을 여기서 막지 못하면, 이 아파트는 물론이고 도시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누군가의 절망이 만들어낸 괴물은 상상 이상으로 강력했다.

    나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 한 발짝 더 나섰다. 지팡이를 단단히 움켜쥔 채, 내 모든 마력을 폭발시키기로 결심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어떻게든 이 절망의 그림자를 멈춰 세워야만 했다.

    나의 지팡이 끝에서, 이제껏 본 적 없는 거대한 별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 던전 탐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23화: 심연의 입맞춤, 흔들리는 경계**

    축축한 동굴 천장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이따금 바닥의 고인 물을 때렸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엘라라의 단검이 묵직한 마물의 머리에서 뽑혀 나왔다. 끈적한 녹색 피가 공중으로 흩뿌려지고, 방금 전까지 사지를 휘두르며 위협하던 심연 거미는 끝내 허물어졌다.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엘라라의 은색 눈동자가 사방을 빠르게 훑었다. 또 다른 위협은 없는지,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들을 노리는 그림자는 없는지.

    “괜찮아?”

    낮고 굵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카엘이었다. 그의 그림자 같은 형체가 엘라라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며, 주변의 남은 위협을 확인하는 듯했다. 엘라라는 거미의 독액에 살짝 닿아 따끔거리는 손목을 붙들었다. 작은 상처였지만, 깊은 던전에서는 작은 실수조차 치명적일 수 있었다.

    “이 정도쯤이야.” 엘라라는 애써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카엘은 말없이 다가와 엘라라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피부는 어둠처럼 차가웠지만, 닿는 곳은 오히려 뜨거운 전기가 흐르는 듯했다. 얇은 가죽 장갑 위로도 느껴지는 그의 손가락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다. 인간이라면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종족 특유의 섬세한 힘이 느껴졌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엘라라의 손목 위를 쓸었다. 옅게 솟아오른 붉은 반점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종족에게 전해지는 치유 능력이었다. 금지된 종족의 금지된 접촉. 엘라라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어올랐다.

    “무리하지 마. 이곳은…… 다르다.” 카엘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 안에, 엘라라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그럼에도 강인한 한 여인의 모습.

    엘라라는 카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 눈빛에 얼마나 많은 비밀과 고통, 그리고 감춰진 열망이 담겨 있을까. 그들의 사랑은 이 심연의 미궁만큼이나 깊고 위험했다. 인간 세계에서는 이단으로, 카엘의 종족에게는 불경한 행위로 여겨질 관계. 서로에게 허락되지 않은 존재들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너무 깊숙이 서로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너와 함께라면, 어떤 곳이라도 괜찮아.” 엘라라는 자신도 모르게 속삭였다. 진심이었다.

    카엘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눈동자에 언뜻 욕망과 고뇌가 스쳤다. 그는 엘라라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그 순간, 저 멀리서 진동음이 들려왔다.

    쿠구궁! 쿠구궁!

    땅이 흔들리고, 천장의 작은 돌멩이들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카엘의 얼굴에 긴장감이 서렸다. 그는 엘라라의 손목을 놔주고 몸을 돌렸다.

    “저쪽이다.”

    그의 시선이 가리키는 곳은 방금 전 쓰러뜨린 심연 거미가 나온 통로였다. 빛 하나 없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마물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기운이 동굴 전체를 짓눌렀다.

    “저건… 심연의 심장부에서만 나타난다는 포식자 아닌가?” 엘라라의 목소리가 굳어졌다. 전설로만 듣던, 미궁의 정점에 선 존재 중 하나.

    거대한 몸집이 서서히 어둠을 뚫고 모습을 드러냈다. 날카로운 뿔이 솟아난 머리, 여섯 개의 거대한 다리, 그리고 온몸을 휘감은 검붉은 비늘. 눈은 마치 용암처럼 이글거렸다. ‘마그나 포식자’.

    마그나 포식자는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불청객을 발견하고 으르렁거렸다. 귀청을 찢는 포효와 함께 돌진해오자, 엘라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젠장, 이런 곳에서 이걸 만나다니!”

    카엘은 이미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고 있었다. 파앗,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포식자의 옆구리로 파고들었다. 어둠의 기운이 깃든 그의 단검이 맹렬하게 비늘을 노렸다. 그러나 포식자의 비늘은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다. 쇠가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을 뿐, 비늘에는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피해, 카엘!”

    엘라라는 외치며 손끝에 마력을 집중했다. 섬광처럼 빛나는 마법진이 허공에 그려지고, 푸른 번개가 포식자의 다리를 향해 쇄도했다. 콰앙! 번개가 비늘을 강타하자, 포식자가 잠시 움찔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카엘은 다시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등을 노려!” 엘라라가 소리쳤다. “비늘이 약한 곳이 있을 거야!”

    그녀는 연달아 마법 화살을 쏘아 올렸다. 마법 화살은 포식자의 시선을 끌었고, 그 사이 카엘은 번개 같은 속도로 포식자의 등 뒤로 올라탔다. 거대한 몸집 위에서, 그의 검은 그림자가 춤을 추듯 움직였다. 포식자는 격분하여 몸을 흔들었고, 카엘은 간신히 비늘 틈새에 발을 박고 버텼다.

    서걱!

    카엘의 단검이 마침내 비늘 사이의 틈을 파고들었다. 검붉은 피가 솟구쳤지만, 포식자는 엄청난 괴력을 휘둘러 카엘을 내동댕이치려 했다.

    엘라라는 숨을 헐떡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어디 약점이 더 없을까. 포식자의 눈빛이 번득이며 그녀를 향했다. 거대한 발이 땅을 울리며 엘라라에게로 돌진했다.

    “엘라라!” 카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지만, 그는 아직 포식자의 등에 있었다.

    피할 틈도 없이 거대한 발이 그녀를 덮치려는 순간, 엘라라는 전신에 마력을 폭발시켰다. 온몸이 강렬한 빛에 휩싸이며, 그녀는 간발의 차이로 옆으로 굴러 떨어졌다. 돌진하던 포식자는 그녀가 있던 자리의 바닥을 산산조각 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엘라라의 눈에 포식자의 거대한 목덜미가 들어왔다. 그곳에 흐르는 혈관이 다른 곳보다 미세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약점일지도 몰랐다.

    “카엘! 목! 목을 노려!” 엘라라가 모든 힘을 짜내 외쳤다.

    카엘은 엘라라의 말을 듣자마자, 포식자의 등줄기를 타고 목덜미로 질주했다. 포식자는 자신을 떼어내려 몸부림쳤지만, 카엘의 움직임은 그 어떤 던전 마물보다도 민첩했다.

    어둠의 기운이 카엘의 단검에 집중되었다. 검날이 마치 심연 그 자체처럼 검게 빛났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포식자의 목덜미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꿰에엑!

    끔찍한 단말마와 함께 포식자의 몸이 경련했다.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땅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정적이 찾아왔다. 끈적한 피비린내가 동굴을 가득 채웠다. 엘라라는 벅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포식자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카엘을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은 피로에 물들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확고했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였다.

    쉬이익.

    작은 마찰음이 그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숨겨진 스위치가 작동하는 듯, 혹은 누군가 무언가를 여는 듯한 소리였다.

    동굴 한쪽 벽면에서, 돌덩이가 천천히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얇고 푸른 빛이 깜빡였다. 누군가가 던전 깊숙이 숨겨 놓은 감시 장치였다. 작고 정교한 수정 구슬 형태의 장치가 천천히 회전하며 그들을 향했다.

    카엘의 표정이 얼어붙었다. 그의 눈동자에 깊은 경계심이 스쳐 지나갔다.

    “이건… ‘그들’의 표식이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젠장, 우리가 여기까지 쫓기고 있었다니.”

    그 순간, 감시 장치의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마치 투사된 홀로그램처럼, 익숙한 문양이 떠올랐다.

    붉은 두루미.

    인간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탐사 길드, ‘적학단’의 문양이었다.

    엘라라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적학단은 냉정하고 잔혹하기로 유명한 길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종족을 맹렬히 증오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쫓아 이 던전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아니, 어쩌면… 그들은 카엘과 엘라라, 두 이종족 사이의 금지된 관계를 이미 알고, 이들을 덫으로 유인한 것인지도 몰랐다.

    카엘은 엘라라의 손을 꽉 잡았다. 그의 차가운 손이 이번에는 격렬하게 떨렸다.

    “엘라라… 도망쳐야 해.”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평정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들은… 나를 노리는 게 아니야. 너를 통해 나를 잡으려는 거다.”

    그의 눈빛은 비통함과 후회, 그리고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이, 이제 그들을 둘러싼 가장 치명적인 위협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

  • 선협 (신선)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둠은 끈질겼다. 수천 년의 세월이 겹겹이 쌓인 듯, 실크처럼 부드럽지만 압도적인 무게로 류현의 어깨를 짓눌렀다. 손에 든 야광석이 희미한 푸른빛을 뿌렸지만, 거대한 지하 유적의 광활함 앞에서는 어린아이의 손전등보다도 보잘것없었다. 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고대 문명의 잔향이 후각을 자극했다. 이곳은 그 어떤 기록에도 남아있지 않은, 망각 속에 잠겨버린 땅이었다.

    “젠장, 도대체 언제까지 내려가야 하는 거야?”

    류현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음성은 메아리쳤고, 그 소리는 다시 그의 귀로 돌아와 외로움을 더했다. 벌써 사흘째다. 지상의 은밀한 균열을 통해 겨우 진입한 이래, 그는 쉼 없이 지하로 파고들고 있었다. 주변에 널려 있는 거대한 석상 조각들, 알아볼 수 없는 상형문자로 뒤덮인 벽화들이 이곳이 평범한 동굴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이곳의 정체나 목적을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압도적인 신비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의 단전 속 영기는 끊임없이 순환하며 주변의 미세한 기운 변화를 감지했다. 일반인이라면 이미 숨 막혀 죽었을 깊은 지하에서도, 그는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선인들이 드물게 강림하여 기연을 남기곤 했다는 전설은 많았지만, 이런 거대한 규모의 유적은 듣도 보도 못했다. 어쩌면 전설조차 잊어버린 시대의 흔적일지도 몰랐다.

    한참을 더 걷던 류현의 시선이 문득 한곳에 멈췄다. 거대한 벽면 한쪽이 무너져 내린 잔해들 사이로, 이전과는 다른 재질의 벽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다른 곳은 거친 암반 그대로였는데, 이곳은 매끄럽게 다듬어진 검은색 현무암 같았다.

    “이건…?”

    류류현은 무언가에 홀린 듯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옅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무거운 돌덩이들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땀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의 눈은 호기심으로 이글거렸다. 그렇게 한 시간가량을 쉼 없이 작업했을까. 마침내 무너진 벽 너머로 숨겨진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작은 방이었다. 그러나 그 안의 풍경은 류현을 완전히 압도했다. 방 중앙에는 거대한 원형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제단의 표면에는 정교하게 조각된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제단 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푸른빛이었다. 그 빛은 야광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순수한 영기로 이루어져 있었고, 마치 수천 년 동안 꺼지지 않고 살아 숨 쉬는 심장 같았다.

    “이럴 수가….”

    류현은 숨을 들이켰다. 이곳의 영기는 그가 수련하며 느껴봤던 그 어떤 곳보다도 농밀하고 깨끗했다. 마치 영기의 근원에 직접 발을 들여놓은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제단에 다가섰다. 제단의 표면을 손으로 쓸어보니, 차갑지만 묘한 활력이 느껴졌다.

    그가 제단에 손을 올리는 순간, 제단 전체가 더욱 밝은 푸른빛을 뿜어냈다. 방 안을 가득 채운 푸른 영기는 류현의 오감을 자극했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기이한 문구들이 흘러들어왔다. 그것은 글자라기보다는, 마치 이미지가 직접 전이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고대 언어의 조각들이 그의 뇌리에 번개처럼 박혔다.

    *「…망각된 자의 시험이 시작되리니…」*
    *「…오직 진실을 갈구하는 자만이 문을 열 것이다…」*

    문구는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망각된 자의 시험? 진실을 갈구하는 자? 류현은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그때였다. 제단 중앙의 문양이 꿈틀거리더니, 푸른빛이 모여들며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영기의 흐름이 변하며, 제단 위에 사람의 형상을 한 빛의 존재가 나타났다. 투명했지만 확고한 실체를 가진 듯한 그 존재는 마치 고대의 영혼이 깨어난 것 같았다. 그 존재의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처럼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무엇을 찾아 이곳까지 왔느냐, 필멸자여.”

    정적을 깨고 울려 퍼진 목소리는 직접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정신 깊은 곳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류현은 순간적으로 주춤했지만, 이내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 정도의 존재라면 단순한 허상이 아니었다. 분명, 고대의 힘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수호자’였다.

    “나는 류현이라 한다. 잊힌 유적의 비밀을 탐구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류현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의 손은 이미 허리춤의 검자루를 잡고 있었다. 비록 눈앞의 존재가 영체라 할지라도, 무장 해제된 상태로 시험에 임할 수는 없었다.

    “비밀을 탐구한다고? 가련한 필멸자여. 네가 찾고자 하는 비밀은 너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게를 지녔으니, 감당할 수 있겠는가?” 빛의 존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행동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감당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내가 직접 판단하겠다.” 류현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빛의 존재를 응시했다.

    빛의 존재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짓에 방 안의 영기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사방의 벽화가 빛을 발하더니, 그림 속의 형상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했다. 고대 전사들의 모습, 기이한 영물들, 그리고 알 수 없는 상징들이 그의 주위를 맴돌며 시각을 혼란스럽게 했다.

    “좋다. 너의 의지를 시험하겠다. 감당할 수 있다면, 그대에게 진실의 조각을 보여주리라.”

    콰아앙!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단순한 압박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수천 개의 무거운 바위가 동시에 그의 영혼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류현의 단전이 격렬하게 반응하며 영기를 뿜어냈다. 그를 둘러싼 환상들은 더욱 선명해졌다. 고대 전사들이 그에게 달려들고, 거대한 영물들이 포효하며 그의 정신을 흔들었다. 이 모든 것은 육체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그의 심성과 영혼의 굳건함을 시험하는 정신 공격이었다.

    “크윽…!”

    류현은 이를 악물었다. 환상 속의 검이 그의 심장을 꿰뚫는 듯한 착각에 빠졌지만, 그는 정신을 놓지 않았다. 이런 종류의 시험은, 육체의 힘이 아닌 정신의 순수함과 의지의 강인함이 중요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오직 자신의 내면, 단전 속에서 끓어오르는 순수한 영기에만 집중했다.

    *「…만물이 공(空)하고, 영원한 것은 없으되…」*
    *「…오직 진실된 마음만이 길을 연다…」*

    그의 스승이 일찍이 가르쳤던 심법의 구절들이 떠올랐다. 현혹되지 마라. 흔들리지 마라. 그 어떤 거짓도 너의 진실된 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 류현은 자신의 영혼을 감싸고 있던 모든 혼란과 잡념을 털어냈다. 오직 한 줄기의 순수한 영기만이 그의 단전에서 솟아올라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그의 정신은 거대한 파도 속의 작은 등대처럼 흔들림 없이 빛났다.

    점점 희미해지는 환상 속에서, 류현은 자신의 영혼을 꿰뚫으려 했던 빛의 검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것이었기에, 그의 순수한 의지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었다. 검은 그의 손아귀에서 사라졌다. 그와 함께, 그를 덮쳤던 모든 환상과 정신적인 압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요함이 찾아왔다. 방 안을 가득 채웠던 푸른 영기의 파동도 잠잠해졌다. 류현은 눈을 떴다. 빛의 존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그 푸른 눈동자에는 더 이상 시험의 기색이 없었다. 대신, 깊은 존중과 함께 알 수 없는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합격이다, 필멸자여. 너의 의지는 순수하며, 너의 영혼은 진실을 감당할 만큼 강인하다.”

    빛의 존재가 손을 내밀었다. 그가 내민 손끝에서 푸른 영기가 모여들더니, 공중에 거대한 영사막을 만들어냈다. 영사막에는 복잡한 문양과 알 수 없는 기호들로 가득 찬 지도가 펼쳐졌다. 그것은 그가 걸어온 지하 유적의 전체적인 구조를 보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류현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지도의 한가운데였다.

    지도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원형의 공간이 표시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서 마치 태양처럼 거대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묘사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공간을 둘러싼 복잡한 진법(陣法)들이 보였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 거대한 공간 아래로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심연의 표시였다.

    “이것은… 이곳의 전체 지도인가?” 류현이 숨죽여 물었다.

    “그렇다. 그리고 네가 찾고자 하는 진실의 시작이기도 하다.” 빛의 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단순히 잊힌 유적이 아니다. 오래전, 태초의 영기가 응집되었던 자리. 봉인된 문(門)의 수호처이자… 지상의 모든 영맥(靈脈)이 흘러드는 근원지였다.”

    봉인된 문? 지상의 영맥 근원지? 류현의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이 유적은 그저 고대의 보물을 숨긴 장소가 아니었다. 어쩌면 세계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힘과 비밀이 잠들어 있는 곳일지도 몰랐다. 지도의 심연 표시를 보자 류현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함께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다. 그곳에는 과연 무엇이 잠들어 있는 것일까? 봉인된 문 너머에는 어떤 세계가 있을까?

    “이 지도를 따라가라, 류현. 그리고 기억하라. 진실은 언제나 두 얼굴을 지녔다. 네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

    빛의 존재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을 이루던 푸른 영기가 다시 제단으로 흡수되는 듯했다.

    “잠깐! 봉인된 문이란 대체…!” 류현이 다급하게 물었지만, 빛의 존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건투를 빈다.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던 이들의 염원이… 너에게 닿기를.”

    마지막 말을 남기고 빛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졌다. 제단은 다시 희미한 푸른빛만을 남긴 채 침묵했다. 하지만 류현의 머릿속에는 방금 본 지도와 빛의 존재가 남긴 의미심장한 말들이 거대한 파문처럼 일렁였다.

    세상의 균형. 봉인된 문. 영맥의 근원지.
    이 모든 단어들은 그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한 음모와 비밀의 조각들이었다. 지도가 가리키는 미지의 심연. 그곳이야말로 이 거대한 유적의 진짜 핵심이자, 그가 찾아 헤매던 궁극적인 진실이 숨겨진 장소일 터였다. 류현은 지도를 머릿속에 각인시킨 채, 심장이 터질 듯한 기대로 다음 행보를 준비했다. 이제 그의 모험은 진정한 시작점에 서 있었다.

  • SF (공상과학)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시리우스 스테이션, 아스트라 코퍼레이션 연구동 7구역. 거대한 원통형 통로를 따라 늘어선 격벽마다 비상등의 붉은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정적을 깬 건 경비대장 박재민의 거친 숨소리와 몇몇 대원들의 웅성거림뿐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젠장,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박 대장의 시선이 향한 곳은 ‘프로젝트 아스트라’ 총 책임자인 닥터 카엘의 개인 연구실이었다. 티타늄 합금으로 된 두꺼운 방탄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생체 인식 시스템은 외부 침입 기록을 일절 탐지하지 못했다. 심지어 연구실 내부의 초고화질 보안 카메라는 닥터 카엘이 들어간 후 단 한 명의 그림자도 포착하지 않았다. 완벽한 밀실. 하지만 그 안에 닥터 카엘은 죽어 있었다. 날카로운 흉기에 단 한 번 찔린 채로. 그리고 흉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때, 통로 끝에서 나른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박 대장이 고개를 돌리자, 얇은 은색 프레임 안경을 콧등에 걸친 청년이 팔짱을 낀 채 다가오고 있었다. 캐주얼한 검은색 재킷에 흰색 이너를 입은 차림새는 긴박한 현장과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류한 씨, 오셨군요.” 박 대장은 저도 모르게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초대에 응했습니다만, 썩 즐거운 파티는 아니군요, 박 대장님.” 류한은 흥미 없다는 듯 한쪽 눈썹을 까딱였다. 그의 시선은 이미 연구실 문을 지나 그 너머를 꿰뚫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상황이 워낙 심각해서….”
    “심각하다 못해 난해하다, 정도겠군요. 그래서, ‘밀실 살인’입니까?” 류한은 비웃듯이 피식 웃었다.
    “네, 그렇습니다. 닥터 카엘은 안에 혼자 들어가셨고, 문은 외부에서 어떤 침입의 흔적도 없이 잠겨 있었죠. 내부 카메라에도 아무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신이 발견된 겁니다. 흉기는 사라졌고요.” 박 대장은 답답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유령이 저지른 짓도 아니고….”

    류한은 대꾸 없이 문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을 잠시 느끼던 그는 이내 생체 인식 패널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문이 잠긴 시각과 닥터 카엘의 마지막 기록은 일치하겠군요. 침입 흔적은 없고.”
    “네, 완벽합니다. 문은 닥터 카엘의 홍채와 음성 인식으로 잠겼고, 그 후로는… 정전 한 번 없었습니다. 이 구역 전체의 공기 흐름, 미세 중력 조절, 에너지 흐름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상 징후는 없습니다.”

    류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서 있던 보안팀원에게 말했다.
    “연구실 내부의 모든 센서 기록, 그리고 닥터 카엘의 생체 기록을 제 단말기로 전송해 주십시오. 1분 전까지의 기록을 포함해서요.”
    “네, 알겠습니다.” 팀원이 재빨리 단말기를 조작했다.

    잠시 후, 류한의 손목에 찬 개인 단말기 ‘모니터’에 수많은 데이터가 쏟아져 들어왔다. 그는 눈으로 훑어 내려가며 몇 번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겼다. 그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연구실 안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밖에서도 내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박 대장이 연구실 한쪽 벽면을 가리켰다. 벽은 두꺼운 ‘강화 크리스탈’ 패널로 되어 있었다. 바깥에서는 뿌옇게 흐려져 내부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긴급 상황 시에는 투명하게 전환할 수 있었다.
    “음….” 류한은 박 대장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강화 크리스탈 패널 가까이 다가섰다. 손가락으로 표면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대장님, 혹시 이 패널, 비상시 투명화하는 기능 외에 다른 기능은 없습니까?” 류한이 물었다.
    “아뇨, 없습니다. 그저 강화 크리스탈일 뿐입니다. 외부 충격에도 끄떡없는….”
    류한은 아무런 대답 없이 패널의 특정 부위를 빤히 응시했다. 아주 미세한, 정말 눈에 띄지 않는 흠집 하나. 그것은 마치 머리카락처럼 얇고 길었다.

    “이건요?” 류한이 손가락으로 그 흠집을 가리켰다.
    박 대장이 고개를 숙여 자세히 살펴보았다.
    “음… 제가 보기엔 그저 사용 흔적 같습니다만. 워낙 미세해서 평소에는 눈에 띄지도 않고요.”
    “그렇겠죠.” 류한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단말기를 들여다보았다. “닥터 카엘의 사망 시각… 오후 3시 17분. 그리고 연구실 내 평균 온도 상승, 3시 15분부터 17분까지.”

    “온도 상승이라니요? 저희는 어떤 이상 징후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박 대장이 의아해했다.
    “수치로는 미미합니다. 겨우 0.3도. 하지만 밀실이라면 이 정도도 충분히 의미가 있죠. 게다가 이 온도는 한 구역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저 천장 환기구 근처.” 류한은 연구실 천장에 박혀있는 환기구 중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박 대장은 류한이 가리킨 환기구를 올려다보았다. “저기도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습니다. 사람 하나 드나들 틈이 없어요.”
    “사람은 아니겠죠.” 류한은 피식 웃었다. “박 대장님, 저 환기구 그릴을 확대해서 보여줄 수 있습니까? 닥터 카엘의 사망 10분 전부터 사망 시각까지의 기록으로요.”

    보안팀원이 급히 카메라를 조작했다. 거대한 메인 모니터에 환기구 그릴의 확대 영상이 나타났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던 미세한 얼룩이 그릴의 틈새에 희미하게 보였다. 금속 표면이 아주 짧은 순간 고열에 노출되었다가 식은 듯한 흔적이었다.

    “이건…?” 박 대장이 놀라 탄성을 질렀다.
    “금속이 순간적으로 녹았다가 굳은 흔적, 혹은 강력한 산성 물질에 노출된 흔적. 어느 쪽이든, 외부에서 어떤 기기가 저곳을 통과하려 했음을 시사하죠. 그것도 아주 작고, 아주 정교한 기기가.”
    류한은 미소 지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퍼즐 조각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닥터 카엘은 죽기 직전,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위를 보고 있었을 겁니다. 그의 시선은 천장을 향해 있었고, 그의 목에는 단 한 번의 깊은 상처가 있죠. 흉기는 사라졌고. 0.3도의 온도 상승은 흉기가 사라지는 순간의 짧은 연소를 의미합니다.”

    박 대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설마… 나노 드론…?”
    “정답입니다.” 류한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트라 코퍼레이션은 극미세 자율 비행체 연구에 막대한 투자를 하고 있죠. 사람의 눈으로는 감지하기 힘든 초소형 드론. 특정 임무 수행을 위해 특수 제작된 드론이 환기 시스템을 통해 침입한 겁니다.”

    “하지만 흉기는…?” 박 대장이 말을 더듬었다.
    “나노-카본 필라멘트로 만들어진 극도로 얇은 칼날. 혹은 순간적으로 액화 또는 기화되어 사라지는 특수 합금 칼날. 드론이 목표를 찔렀을 때, 칼날은 희생자의 몸속에 남겨진 채, 드론은 즉시 칼날을 녹여버리는 화학 반응을 유도했거나, 칼날 자체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분해되도록 설계되었을 겁니다. 그 짧은 화학 반응으로 인해 0.3도의 미세한 온도 상승이 있었던 거고요.”
    류한은 강화 크리스탈의 흠집을 다시 가리켰다.
    “이 흠집은 드론이 목표를 향해 돌진하기 직전, 방향을 잡다가 실수로 패널에 스쳤던 흔적이겠죠. 그렇게 완벽하게 모든 흔적을 지운 겁니다.”

    박 대장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 말도 안 됩니다. 저희는 단 한 번도 그런 방식으로 침입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시스템은 완벽하다고….”
    “완벽한 시스템은 없습니다, 박 대장님. 완벽한 구멍만 있을 뿐이죠. 문제는 누가, 왜 닥터 카엘을 그런 식으로 살해했느냐는 겁니다. 이 드론은 분명히 명령을 받았을 테니까요.” 류한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제 진짜 게임은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