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오컬트 호러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핏빛 밀실의 저주

    **[장면 #1] 어둠 속의 저택**

    [패널 1]
    음침한 빗줄기가 밤을 지우는 외딴 저택의 전경. 거대한 고목들이 앙상한 가지를 흔들고, 낡은 저택은 마치 거대한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다. 창문 몇 개에서만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내레이션) 이 밤, 피와 비명으로 얼룩진 비극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잠긴, 그러나 모든 것이 열려 있었던 밀실의 저주가…

    [패널 2]
    저택의 현관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경찰들. 싸늘한 밤공기 속에서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순찰차의 붉은 불빛이 비에 젖은 아스팔트에 번진다.

    [패널 3]
    수십 년 된 듯한 낡은 응접실. 바닥에는 얼룩진 카펫이 깔려 있고, 오래된 가구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한쪽 벽난로에는 싸늘한 재만 남아있다. 경찰들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선다.
    (내레이션) 현장은 고영준 회장의 서재. 바깥과는 완전히 단절된, 그야말로 ‘밀실’이었다.

    [패널 4]
    지쳐 보이는 이지혜 경위가 서재 문 앞에서 서류철을 든 채 난감한 표정으로 다른 경찰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다. 그녀의 뒤로는 굳게 닫힌 서재 문이 보인다.
    **이지혜 경위:** (지친 목소리) 다들 조심해서 움직여요. 현장 보존 최우선. 그리고… 외부인 접근은 절대 허락하지 마세요. 특히 저 안은…

    [패널 5]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한 남자. 젖은 머리카락과 얇은 코트를 걸친 그는 주변의 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극히 무심한 표정이다. 그의 눈빛은 날카롭고 깊다. 천재 탐정 강태인이다.
    **강태인:** (낮고 조용한 목소리) 불렀으면 들어갈 수 있게 해줘야 할 것 아닌가.

    [패널 6]
    깜짝 놀란 이지혜 경위가 고개를 돌린다. 그녀의 표정에는 피로와 함께 미묘한 불쾌감이 스친다.
    **이지혜 경위:** 강태인 씨! 그렇게 불쑥 나타나면 놀라잖아요. 비 오는데 우산도 없이… 또 대충 입고 오셨네요.

    **강태인:** (한 손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별 관심 없는 것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사건 개요는?

    [패널 7]
    이지혜 경위가 한숨을 쉬며 서류철을 펼친다. 서재 문을 힐끗 보더니 불안한 눈빛으로 태인에게 설명한다.
    **이지혜 경위:** 고영준 회장, 68세. 어제 자정쯤 서재에서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사인은 흉기에 의한 과다출혈. 특이점은… 서재 문이 안에서 걸쇠로 굳게 잠겨 있었고, 창문들도 모두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다는 겁니다. 말 그대로 완벽한 밀실…

    **강태인:** (고개를 끄덕이며) 전형적인 밀실 살인. 더 특이한 것은?

    **이지혜 경위:** 그리고… 현장에 이상한 흔적들이 너무 많아요. 벽에는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피로 그려져 있었고, 시신 주변엔 기이한 형상의 주술 도구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마치… 악마를 소환하려다가 당한 것처럼… 가족들은 고 회장이 최근 들어 오컬트에 심취해 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패널 8]
    강태인이 굳게 닫힌 서재 문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는다.
    **강태인:** (작게 중얼거린다) 악마… 흥미롭군.

    **[장면 #2] 피와 주술의 밀실**

    [패널 9]
    서재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그 안의 광경이 드러난다. 짙은 어둠 속에 붉은 조명등 하나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벽에는 불길한 형상의 그림들이 피로 그려져 있고, 바닥에는 촛불이 녹아내린 자국과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산재해 있다. 공기마저 끈적하게 가라앉은 듯하다.
    (내레이션) 문이 열리는 순간, 현실의 논리가 무너지고 섬뜩한 이계의 분위기가 엄습했다.

    [패널 10]
    서재 중앙에 널브러져 있는 고영준 회장의 시신. 그는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오망성 위에 엎드린 채, 가슴에는 날카로운 의식용 단검이 깊숙이 박혀 있다. 그의 얼굴은 죽음의 고통보다는 극한의 공포에 질려 일그러져 있다. 눈은 크게 뜨여 있고, 입은 벌어져 비명을 지르려다 멈춘 듯하다.

    [패널 11]
    강태인이 서재 안으로 들어선다. 그의 발걸음은 조심스러우면서도 망설임이 없다. 그는 주술적인 도구들이나 핏자국에는 시선을 오래 두지 않고, 마치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읽어내듯 벽과 바닥, 천장을 훑어본다.

    [패널 12]
    이지혜 경위가 태인의 뒤를 따르며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핀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경직되어 있다.
    **이지혜 경위:** (나지막이) 오컬트 전문가를 불렀는데, 이런 식의 주술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살인이라기보다… 제물 의식처럼 보인다고.

    [패널 13]
    강태인이 벽에 그려진 핏자국 하나를 손으로 살짝 만져본다. 피는 이미 말라붙어 굳어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미세한 균열이나 질감을 느끼는 듯하다.
    **강태인:** (무미건조하게) 의식… 제물… 인간의 상상력은 언제나 가장 잔혹한 살인 도구가 되지.

    [패널 14]
    서재 문을 검사하는 경찰들. 걸쇠와 빗장이 모두 안에서 잠겨 있어 외부 침입의 흔적이 전혀 없음을 확인한다.
    **경찰 1:** 경위님, 문과 창문 모두 완벽합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내부에서 걸어 잠긴 채로…

    [패널 15]
    강태인이 시신 옆에 흩뿌려진 재 같은 것을 유심히 본다. 다른 경찰들은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듯하지만, 태인의 눈은 거기서 어떤 ‘패턴’을 읽어내려 한다.

    [패널 16]
    그는 시신에 박힌 단검을 보며 눈을 가늘게 뜬다. 손잡이에 새겨진 기묘한 문양을 잠시 응시하더니, 시선을 단검이 박힌 각도와 피해자의 몸 위치로 옮긴다.
    (내레이션) 모든 것이 제자리인 듯 보였지만, 완벽함 속에는 언제나 미세한 불협화음이 숨어 있다.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나의 일이다.

    **[장면 #3] 보이지 않는 균열**

    [패널 17]
    강태인이 서재 한쪽 벽에 걸린 낡은 태피스트리를 손으로 쓸어본다. 먼지가 풀썩인다. 태피스트리 뒤편의 벽은 단단하고 어떤 통로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지혜 경위:** 이런 곳에 은밀한 통로 같은 게 있을 리 없어요. 저희가 다 확인했습니다.

    [패널 18]
    태인은 그녀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바닥에 깔린 카펫 모서리를 발로 살짝 밀어본다. 카펫 아래의 마루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낸다. 오래된 저택의 낡은 나무 바닥이다.

    [패널 19]
    그는 창문으로 다가간다. 창문은 쇠창살로 덧대어져 있고, 안에서 두꺼운 빗장이 단단히 걸려 있다. 유리는 두껍고 먼지로 뿌옇게 덮여 있다.
    (내레이션) 잠겨 있었다. 완벽하게, 그리고 굳건하게.

    [패널 20]
    강태인이 빗장을 손으로 만져본다. 빗장 주변에 옅게 내려앉은 먼지 위에 미세한, 거의 보이지 않는 긁힌 자국을 발견한다. 너무나 작아서 맨눈으로는 놓치기 쉬운 자국이다.
    **강태인:** (나지막이) 흐음…

    [패널 21]
    이지혜 경위가 다가와 그의 시선을 따라 창문을 살핀다. 그녀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하다.
    **이지혜 경위:** 뭐 발견했습니까? 특별한 건 없는 것 같은데요.

    **강태인:** (손가락으로 긁힌 자국을 가리키며) 이 미세한 흔적… 빗장을 완전히 잠근 상태에서만 생길 수 있는 흔적이 아니지. 잠그기 전에 무언가와 마찰이 있었거나, 혹은… 잠긴 후에도 외부에서 조작이 있었다는 증거다.

    [패널 22]
    이지혜 경위의 눈이 커진다. 그녀는 다시 창문을 자세히 들여다보지만, 여전히 확신하기 어렵다.
    **이지혜 경위:** 외부에서요? 하지만 빗장이 안에서 걸려 있는데 어떻게…

    **강태인:** (피해자의 시신을 돌아보며) 중요한 건 ‘어떻게’가 아니다. ‘왜’ 이런 흔적이 남았는가. 살인자는 밀실을 만들려 했지만, 그 밀실이 너무 완벽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흔적을 남긴 거지.

    [패널 23]
    강태인이 다시 시신으로 향한다. 피해자의 손에는 붉은색 실타래가 움켜쥐어져 있었다. 경찰들은 이를 ‘주술 의식의 일부’로 해석했었다.
    **이지혜 경위:** 저 붉은 실은… 고 회장이 악령을 쫓기 위해 들고 있었다고 해요. 일종의 부적 같은 거죠.

    [패널 24]
    강태인은 실타래를 보더니, 천천히 서재 문으로 걸어간다. 그의 눈빛이 어떤 연결고리를 찾은 듯 번뜩인다. 그는 문 아래의 틈새를 유심히 관찰한다. 문 아래와 바닥 사이의 작은 간격.

    [패널 25]
    강태인이 붉은 실타래를 손에 쥐더니, 실의 한쪽 끝을 잡고 문 아래의 틈새로 살짝 밀어 넣어본다. 실은 아주 부드럽게 문 아래로 통과한다.
    (내레이션) 밀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시선과 믿음으로 만들어진 환상일 뿐.

    **[장면 #4] 비틀린 주술**

    [패널 26]
    이지혜 경위가 태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본다.
    **이지혜 경위:**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그 실이… 밀실과 무슨 상관이 있죠?

    **강태인:** (실을 문 아래로 더 밀어 넣으며) 이 밀실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살인자가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완벽한 밀실은.

    [패널 27]
    강태인이 손에 쥔 실타래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의 시선은 실과 문, 그리고 피해자의 시신을 번갈아 가리킨다.
    (내레이션)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제자리에 있지 않았다.

    [패널 28]
    강태인이 문고리를 잡고 있는 자신의 손과 실타래, 그리고 문 아래 틈새를 교차해서 응시한다. 그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듯한 표정.
    **강태인:** (혼잣말처럼) 악마를 쫓는 부적… 하지만 정작 그 부적은 살인자를 위한 도구였을 뿐.

    [패널 29]
    그가 다시 피해자의 시신으로 돌아가, 시신이 움켜쥐고 있던 실타래의 다른 한쪽 끝을 살펴본다. 실의 끝부분이 잘려진 것이 아니라, 마치 뜯겨 나간 듯 거칠게 마무리되어 있다.

    [패널 30]
    강태인이 주변을 둘러본다. 서재 곳곳에 널려 있는 주술 도구들, 핏빛 문양, 그리고 피해자의 공포에 질린 얼굴… 이 모든 것이 한데 엮이면서 하나의 기괴한 그림이 완성된다.
    (내레이션) 피해자는 악마를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패널 31]
    강태인이 창문으로 다시 가서 아까 보았던 빗장의 긁힌 자국을 한 번 더 손가락으로 훑어본다. 그리고 문 아래 틈새와 그 붉은 실을 연결한다.
    **강태인:** (낮게 읊조리듯) 살인자는 피해자의 깊은 공포와 미신을 이용했어.

    **[장면 #5] 진실의 칼날**

    [패널 32]
    강태인이 이지혜 경위와 다른 경찰들을 향해 선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확신에 차 있다.
    **강태인:** 이 밀실 살인은, 살인자와 피해자의 ‘공동 작품’이었다.

    [패널 33]
    이지혜 경위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표정이 떠오른다. 다른 경찰들도 수군거린다.
    **이지혜 경위:** 공동 작품이라니요? 피해자가 스스로 죽었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얼굴의 공포는…

    **강태인:** 아니. 피해자는 자신의 죽음에 기여했을 뿐이다. 살인자는 고 회장이 악령을 쫓기 위해 ‘안에서’ 방을 봉쇄하고 ‘주술 의식’을 진행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패널 34]
    강태인이 문 아래 틈새를 가리킨다.
    **강태인:** 고 회장은 스스로 문을 잠그고 이 방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악령을 붙잡는’ 의식을 위해 붉은 실타래를 문 아래 틈새로 내보냈다. 마치 악령이 그 실을 따라 들어오지 못하게 붙잡아두려는 것처럼.

    [패널 35]
    강태인이 실을 든 채 문 바깥쪽으로 가서 실의 다른 끝부분을 보여준다.
    **강태인:** 살인자는 이 실의 다른 끝을 외부에서 잡고 있었지. 그리고 고 회장이 의식에 몰두하는 동안, 혹은 의식이 끝났다고 안심하는 순간, 외부에서 실을 이용해 문고리에 연결된 고리나 도구를 조작해 걸쇠를 열고 들어왔다.

    [패널 36]
    이지혜 경위가 경악한 표정을 짓는다.
    **이지혜 경위:** 잠깐만요! 문이 열렸다면 왜 다시 잠겨 있었던 거죠? 그리고 외부에서 조작했다는 증거는요?

    **강태인:** 그게 바로 이 붉은 실의 진짜 용도다. 살인자는 문을 열고 들어와 고 회장을 살해했다. 그리고 방을 떠나기 전, 다시 문을 닫고 실을 이용해 외부에서 걸쇠를 잠그는 ‘밀실 트릭’을 완성한 거지. 창문의 빗장 흔적도 같은 이유다. 이 실을 이용하면, 외부에서 잠금장치를 조작하고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패널 37]
    강태인이 피해자의 시신으로 돌아가 실타래가 놓여 있던 위치를 가리킨다.
    **강태인:** 고 회장의 손에 들려 있던 실은 살인자가 도주하면서 밖으로 빼낸 실의 일부였고, 급하게 끊어지면서 저렇게 거친 단면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의 얼굴에 남은 공포는… 악령을 마주할 것이라 믿었던 그 순간, 악마의 형상을 한 살인자를 보았기 때문이겠지.

    [패널 38]
    이지혜 경위가 서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얼굴에는 충격과 함께 차가운 이해가 스친다. 이제 서재의 기괴한 주술 도구들과 핏자국들은 단순한 ‘트릭’의 장치로 보일 뿐이다.
    **이지혜 경위:** 그러니까… 고 회장의 미신을 이용해서, 외부에서 걸쇠를 조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게 한 거군요. 그리고 살인을 저지른 후, 다시 그 도구를 이용해 잠그고 도주한 거고요.

    **강태인:** 정확하다. 밀실은 환상이었고, 주술은 도구였다. 인간의 악의와 기만만큼 완벽한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다.

    [패널 39]
    창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낡은 저택은 빗소리 속에서 더욱 음산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제 그 안에 드리워진 것은 초자연적인 공포가 아닌, 인간 본연의 잔혹한 그림자다.
    (내레이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다. 죽음을 부른 것은 저주가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치밀한 계산이었다. 그리고 그 추악한 진실은, 영원히 빗속에 숨어 있을 것 같았던 어둠을 걷어내기에 충분했다.

  • 마법소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두운 밤, 푸른별 갤러리 상공에 헬기가 맴돌며 뿌연 서치라이트를 지상으로 흩뿌렸다. 금빛으로 빛나는 첨단 외벽은 번뜩이는 불빛 아래 흡사 거대한 다이아몬드처럼 차갑게 반사되었다. 갤러리 정문은 경찰의 노란 통제선으로 봉쇄되어 있었고, 그 안쪽은 이미 수많은 제복과 사복 경찰들로 북적였다.

    “하늘 탐정님, 이쪽입니다.”

    김 경위가 땀으로 축축한 얼굴로 유하늘을 맞았다. 그의 눈은 피로와 혼란으로 가득했다. 김 경위의 짙은 코트 어깨에는 빗방울이 가늘게 맺혀 있었다. 방금 전까지 약한 비가 내렸던 모양이었다.

    “김 경위님, 설명은 이미 들었습니다만… 혹시 제가 놓친 부분이 있을까요?” 유하늘은 차분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푸른색 코트 자락이 그녀의 걸음에 따라 조용히 흔들렸다. 흐트러짐 없는 모습이었다.

    “아뇨, 하늘 탐정님이 들으신 게 전부입니다. 아니, 그게 전부여야만 하는데… 지금으로선 모든 게 말이 안 됩니다.” 김 경위는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피해자는 이시연 씨. 유명한 마법 유물 수집가였죠. 사망 시각은 대략 두 시간 전으로 추정됩니다. 문제는 장소입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갤러리의 가장 깊숙한 곳, ‘천상의 문’이라 불리는 특별 전시실 앞이었다. 원형으로 된 거대한 강철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옆에는 지문 인식기와 홍채 인식기가 번쩍였고, 그 위로는 수많은 센서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여기가 ‘천상의 문’ 전시실입니다. 완벽한 구형 구조에 외부와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습니다. 벽은 특수 합금으로 되어 있고, 방음, 방열은 물론 전자기파 차단까지 완벽하죠. 게다가 유일한 출입구인 저 문은 오직 외부에서만 잠글 수 있고, 한 번 잠기면 내부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열 수 없습니다.” 김 경위가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유하늘의 시선은 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별빛 같은 섬광이 일렁이는 듯했다.

    “이시연 씨는 혼자 저 방에 들어갔고, 박선우 갤러리 관장이 직접 문을 잠그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두 시간 후, 경비팀이 순찰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어요. 방의 공기 순환 센서에 미세한 이상이 생겼다는 겁니다. 문을 열어보니… 이시연 씨는 이미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겁니다.”

    “외부에서 잠긴 밀실 살인… 게다가 안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면, 범인은 애초에 방 안에 있었거나, 아니면… 유령이라도 된다는 건가요?” 유하늘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김 경위는 고개를 저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방 안에서는 어떤 흉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시연 씨의 몸에는 단 하나의 예리한 관통상이 있었는데, 마치 바늘로 찔린 듯 극도로 섬세한 상처였습니다. 출혈도 거의 없었고요.”

    “즉, 범인은 외부에서 잠긴 방에 침입했고, 흉기를 휘둘렀으며, 그 흉기를 감쪽같이 사라지게 했다는 말이군요.” 유하늘이 문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일었다. 희미한 잔향이 그녀의 감각을 스쳤다.

    “경찰 과학수사팀이 모든 센서 기록을 확인했지만, 침입자는 없었습니다. 문이 열린 흔적도 없고, 벽에 틈이 있지도 않습니다. 심지어 환풍구는 특수 필터로 완벽하게 밀폐되어 있었죠. 먼지 한 톨도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요.”

    유하늘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평범한 시야를 넘어선 무언가를 탐색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감도는 그녀의 시야에, 문틈에서부터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에너지의 잔류가 포착되었다. 무언가 극도로 미세하고 날카로운 것이 통과한 뒤 남은 흔적… 마치 별이 스쳐 지나간 궤적처럼 보였다. ‘별의 잔상’이었다.

    “들어가 보죠.” 그녀는 짧게 말했다.

    문이 열리고, 천천히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시실 내부는 최소한의 조명으로 빛나고 있었다. 중앙에는 특수 강화유리로 만들어진 캡슐형 진열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안에는 검푸른색의 불규칙한 형태를 지닌 돌멩이 하나가 둥실 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이 갤러리의 핵심 전시물인 ‘별의 파편’이었다. 고대 마법 문명 시대의 유물로, 우주에서 떨어져 내려왔다고 전해지는 조각이었다.

    바닥에는 이시연 씨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드레스 차림이었고, 얼굴에는 고통보다는 놀라움이 어린 표정이 굳어 있었다. 상처는 목 부근에 있었다. 김 경위의 말대로, 정말로 작은, 거의 점처럼 보이는 구멍이었다.

    유하늘은 시신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주위를 맴돌았다. 바닥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녀의 ‘별의 잔상’은 시신 주위에서 희미하고 불안정한 에너지를 감지했다. 그것은 마법적인 충격의 잔향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천천히 천장으로 향했다. 원형의 벽을 따라 섬세하게 디자인된 환기구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다시 ‘별의 파편’이 전시된 진열장으로 돌아왔다.

    진열장은 완벽하게 밀폐되어 있었다. 심지어 진열장 안은 진공 상태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녀의 ‘별의 잔상’은 진열장 상단, 강화유리 안쪽에 아주 미세하게 번져 있는 불규칙한 얼룩을 포착했다. 육안으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극도로 희미한 흔적이었다. 마치 무언가 아주 미세한 것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간 뒤 남은 자국처럼 보였다.

    “진열장 안에 있는 별의 파편… 이 유물은 정말로 ‘비활성’ 상태인가요?” 유하늘이 돌연 물었다.

    김 경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네, 과학수사팀에서도 확인했습니다. 마력 잔류는 있지만, 자체적으로 마력을 방출하거나 제어할 수 없는 그냥 돌덩이일 뿐이라고 합니다. 박 관장이 직접 설명한 내용입니다.”

    유하늘은 진열장 상단을 응시했다. ‘별의 잔상’이 그 부근에서 더욱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불규칙한 얼룩 주변으로, 미세한 에너지의 폭발 잔여가 느껴졌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그곳을 뚫고 지나간 듯한…

    “모두의 알리바이는 어떻습니까?”

    “박선우 관장은 폐관 후 보안 시스템을 최종 점검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최지아 비서는 이시연 씨의 조수였는데, 이시연 씨가 방에 들어간 직후부터 갤러리 내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고 하고요. 정원준 보안 팀장은 CCTV와 센서 기록을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김 경위가 브리핑했다.

    유하늘은 진열장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갤러리 내부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시연 씨의 상처는… 매우 정밀합니다. 그리고 흉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외부에서 잠긴 밀실. 범인의 침입 흔적 없음. 흉기의 반입 및 반출 흔적 없음… 결국, 범인은 이 방에 들어오지 않았고, 흉기 또한 외부에서 반입되지 않았다는 말이 되는군요.”

    김 경위의 얼굴에 절망감이 스쳤다. “그럼 대체 어떻게…!”

    “흉기는 이 방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유하늘이 진열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의 눈은 ‘별의 파편’의 영롱한 빛 속에서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저 ‘별의 파편’이 아니라… 저 파편을 ‘전시’하는 진열장이 흉기였던 겁니다.”

    주변에 있던 경찰들이 술렁였다.

    “이 진열장은 단순한 강화유리 캡슐이 아닙니다. 이 유물은 극도로 민감하기 때문에, 캡슐 내부는 완벽한 진공 상태로 유지되고 있으며, 외부 기압과 온도의 미세한 변화에도 반응합니다. 그것을 위해 이 캡슐은 자체적인 압력 조절 시스템을 갖추고 있죠.” 유하늘은 천천히 설명했다.

    “제가 본 ‘별의 잔상’은 진열장 상단 내부에서 발산된 강력한 에너지의 잔향입니다. 그리고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저 얼룩은, 고속으로 발사된 아주 작은 무언가가 유리를 스치고 지나간 흔적이죠.”

    그녀의 손이 진열장 상단, 환기구와 맞닿은 부분으로 향했다.

    “이 진열장에는 외부 공기와의 미세한 압력 조절을 위해 아주 작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공기 배출구가 있습니다. 보안 시스템 기록에 따르면, 피해자가 방에 들어간 직후, 그리고 정확히 사망 추정 시각에 맞춰 이 공기 배출구에서 아주 미세한 압력 변화가 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미세한 변화는… 살인을 위한 기폭제였습니다.”

    김 경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압력을 이용한…?”

    “네. 범인은 흉기를 외부에서 반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흉기는 애초에 이 진열장, 혹은 이 진열장과 연결된 환기 시스템 어딘가에 극도로 미세하게 숨겨져 있었던 겁니다. 마치 바늘과 같은 초소형 탄환이, 진열장 내부의 압력 시스템을 역으로 이용해서 고속으로 발사된 겁니다.”

    유하늘의 시선이 김 경위에게로 향했다.

    “이 정교한 진열장 시스템의 비밀을 알고, 그것을 조작할 수 있는 사람. 갤러리의 보안 시스템과 공조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별의 파편’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이 밀실 살인의 트릭을 계획한 범인입니다.”

    그녀의 시선은 방금 전 김 경위가 언급했던 세 명의 용의자 중 한 명을 향해 정확히 꽂혔다. 아직 범인의 이름은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이미 범인의 윤곽이 선명하게 떠오른 듯했다.

    밀실은 더 이상 밀실이 아니었다.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그녀의 통찰력 앞에, 완벽해 보이던 트릭은 허무하게 부서져 내렸다.

    이제 남은 것은, 그 정교한 살인 트릭을 실행한 범인의 가면을 벗기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유하늘은, 그 가면을 벗겨낼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었다.

  • 사이버펑크 독립적인 단편 소설

    네오서울의 빗줄기는 멈출 줄 몰랐다. 억겁의 세월을 쏟아내는 폭포처럼, 도시 전체를 거대한 유리관에 가두고 맹렬히 두드렸다. 번쩍이는 홀로그램 간판들이 빗물에 번져 고층 빌딩의 회색빛 외벽을 사이키델릭한 캔버스처럼 물들였다. 그 혼돈의 빛 아래, 펜트하우스 47층의 한 연구실 겸 주거 공간이 붉은색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강 이안은 코트 깃을 올린 채 비릿한 금속성 비 냄새를 맡았다. 그의 사이버네틱 눈동자가 빗줄기를 뚫고 몽환적인 도시 풍경을 스캔했다. 망막에 직접 투영되는 정보창에는 습도, 기압, 주변 전자기파 노이즈 수치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이안은 그 정보들을 무시하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강 이안 씨, 이쪽입니다.”

    박 경위의 목소리가 젖은 공기를 가르고 들려왔다. 그는 특수경찰복이 축축하게 젖었음에도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이안은 묵묵히 그를 따라 건물 내부로 들어섰다. 47층 복도는 고요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통제된 공간. 범죄 현장에 깔린 스산한 정적은 늘 이안의 촉을 날카롭게 세우곤 했다.

    “피해자는 한서준 박사입니다. 신경회로 이식 기술의 선구자이자… 최근엔 인체와 디지털 세계를 직접 연결하는 ‘코어-링크’ 시스템을 개발 중이셨죠.” 박 경위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시신은 이 방 안에서 발견됐습니다. 사망 원인은 뇌출혈. 겉보기엔 자연사처럼 보이지만…”

    이안은 박 경위의 말을 들을 필요도 없이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의 뇌신경은 현장의 모든 정보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방문은 삼중 생체 인식과 신경망 인증이 걸린 강화 합금문. 창문은 외부 충격에 미동조차 하지 않는 초고밀도 방탄 유리. 환기구는 미세먼지 필터조차 통과할 수 없는 나노 입자 차단망으로 겹겹이 막혀 있었다.

    “보안 시스템은 완벽하게 작동 중이었습니다. 침입 흔적은 없습니다. 박사님 외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고,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CCTV, 내부 센서, 심지어 공기 흐름 탐지기까지, 모든 기록이 ‘정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박 경위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좌절감이 배어 있었다. “강 이안 씨… 이건 완벽한 밀실입니다.”

    이안은 아무 말 없이 희미한 푸른빛이 감도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중앙에는 홀로그램 패널이 떠 있고, 그 아래 고급스러운 인조 가죽 안락의자에 한서준 박사가 비스듬히 기대앉아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화로웠지만, 눈동자에는 지워지지 않는 공포의 잔상이 얼어붙어 있었다. 박사의 머리에는 ‘링크-헤드셋’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코어-링크 시스템의 핵심 장치였다.

    이안은 천천히 방을 둘러봤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책상 위는 깔끔했고, 벽에 걸린 추상화는 평범했다. 그의 눈은 주변의 전자기파를 시각화하여 미세한 에너지 흐름까지 포착했다. 미세한 전류의 흔적, 공기 중의 입자 분포, 심지어 가구의 미세한 흠집까지도 그의 두뇌는 순식간에 분석했다.

    “사망 시각은 언제로 추정됩니까?” 이안이 조용히 물었다.
    “오전 3시경. 시스템 로그에 따르면, 그때까지 박사님은 코어-링크에 접속 중이셨습니다.” 박 경위가 답했다.

    이안은 박사의 헤드셋을 응시했다. 은빛 금속과 검은색 강화 섬유로 이루어진 기기였다. 겉보기엔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이안의 시야에 희미한 잔상이 포착됐다. 헤드셋의 데이터 포트 부근, 거의 육안으로는 인지할 수 없는 아주 미세한 그을음. 마치 고온의 에너지가 순간적으로 집중되었다가 사라진 듯한 흔적이었다.

    “로그 기록은 확인했습니까?” 이안이 물었다.
    “네. 박사님의 코어-링크 접속은 오전 3시 정각에 ‘세션 종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런 오류 메시지도 없었구요.”

    이안은 박사 시신의 옆에 놓인 작은 인공지능 보조기기를 집어 들었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조약돌 모양의 기기였다. 화면에는 ‘대기 중’이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이안은 보조기기를 작동시켰다. “마지막 대화 내용을 재생해.”

    인공지능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전 2시 58분, 한서준 박사님. ‘코어-링크 P2P 연결, 준비 완료.’ 답변 없음. 오전 2시 59분, ‘연결 시작합니다.’ 답변 없음. 오전 3시 정각, ‘세션 종료. 심박수 및 뇌 활동 정상 범주 이탈. 의료 지원 요청.’”

    박 경위는 미간을 찌푸렸다. “P2P 연결이라뇨? 코어-링크는 서버를 통한 접속만 허용되지 않습니까? 직접 사용자 간 연결은 불가능하다고 알고 있는데요.”

    “원래는 그렇겠죠.” 이안이 말했다. 그의 눈동자는 방 안의 공허한 공간을 스캔하고 있었다. “하지만 박사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연구는 늘 ‘경계’를 넘나들었죠. 그리고… 그 경계를 넘는 순간, 위험이 도사립니다.”

    이안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천장에 매립된 공기 정화 시스템의 작은 환기구를 지나, 그 너머의 보이지 않는 공간으로 향하는 듯했다.

    “박사님은 왜 P2P 연결을 시도했을까요? 그것도 자신의 연구실에서, 혼자서?” 박 경위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P2P, 즉 ‘Peer-to-Peer’는 중앙 서버 없이 개별 기기들이 직접 연결되는 방식입니다.” 이안이 헤드셋의 그을음 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 흔적은 단순한 오류가 아닙니다. 고의적인, 그리고 강제적인 에너지 서지(surge)의 결과죠.”

    그때였다. 방 중앙에 떠 있는 홀로그램 패널이 순간적으로 튀었다. 아주 짧은 순간, 화면에 무지개색 노이즈와 함께 섬광 같은 형체가 스쳐 지나갔다. 거의 아무도 인지하지 못할 속도였다.

    하지만 이안은 놓치지 않았다. 그의 사이버네틱 눈동자에 그 형체의 잔상이 선명하게 각인됐다. 왜곡된 영상 속에서 섬뜩하게 번뜩이던, 또 다른 링크-헤드셋을 쓰고 있는 인간의 얼굴이었다. 단 한 프레임,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안의 두뇌는 이미 그것을 완벽히 분석했다.

    “알겠습니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섞여 있지 않았다. “밀실은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침입’은 물리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박 경위가 의아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한서준 박사는 죽기 직전, 누군가와 코어-링크 P2P 연결을 시도했습니다. 아마 자신이 개발한 새 프로토콜을 시험하는 중이었겠죠. 인공지능 보조기기의 로그가 그 증거입니다.” 이안은 홀로그램 패널을 향해 손짓했다. “저 패널에 방금 나타났던 잔상, 보셨습니까?”

    박 경위는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못 봤습니다. 너무 짧아서요.”

    “그 잔상은 원격으로 접속한 사람의 ‘뇌파 이미지’였습니다. 정확히는, 박사님의 코어-링크 시스템이 외부로부터 강제 종료되는 순간, 역류한 신호의 잔해죠.”

    이안은 박 경위를 똑바로 응시했다. “범인은 박사님의 P2P 연결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박사님의 링크-헤드셋에 이어진 정신의 회랑을 통해, 직접 박사님의 뇌로 침입한 겁니다. 마치 바이러스처럼.”

    “뇌로… 침입했다고요?” 박 경위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 범인은 박사님의 뇌파를 강제로 조작하고, 신경망에 치명적인 과부하를 걸어 뇌출혈을 유발했습니다. 헤드셋 데이터 포트의 그을음은 그 폭력적인 침입의 흔적입니다. 너무나 강력한 디지털 충격이 물리적인 흔적을 남긴 거죠. 마치 해킹된 신경망이 불꽃을 튀긴 것처럼.”

    “하지만… 어떻게 침입자가 박사님의 P2P 연결 요청을 알았으며, 어떻게 P2P 프로토콜의 취약점을 이용해 침입할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누가?” 박 경위는 혼란스러워했다.

    “그건 단순합니다. 범인은 박사님의 P2P 프로토콜 개발을 옆에서 지켜봐 온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박사님과 함께 그 프로토콜을 개발하고 있던 동료이거나, 혹은 그에게서 정보를 빼돌린 자였겠죠.” 이안은 박사의 평화로운 얼굴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박사는 자신의 실험을 너무나 확신했습니다. 설마 동료가 그 기술을 살해 도구로 쓸 줄은 몰랐던 겁니다.”

    이안은 방을 한 바퀴 천천히 돌며 말을 이어갔다. “이 방의 모든 보안 시스템은 외부의 ‘물리적 침입’을 막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시스템도 ‘정신적 침입’까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특히, 피해자 스스로가 그 길을 열어준 상황에서는 더더욱.”

    “범인은 박사님과의 P2P 연결을 통해, 자신의 물리적 위치와 상관없이 이 ‘밀실’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정신적으로는 박사님의 뇌 속까지 침투한 것이죠. 그리고 범행 후에는 자신의 연결을 강제로 끊어 모든 흔적을 지웠습니다. 마치 연결이 자연스럽게 종료된 것처럼. 하지만 그 찰나의 잔상, 그리고 헤드셋에 남은 미세한 흔적, 그리고 P2P 연결 기록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박 경위는 입을 다물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처럼, 거대한 진실이 그의 머릿속을 강타한 듯했다. 완벽한 밀실. 완벽한 살인. 하지만 그 트릭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 디지털과 정신의 경계를 허무는 기술에 숨어 있었다.

    이안은 젖은 코트를 여미며 창밖의 비 내리는 도시를 바라봤다. 네오서울의 홀로그램 간판들은 여전히 번쩍였다. 미래는 과거보다 더 복잡하고, 더 예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밀실은 더 이상 벽과 자물쇠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제 밀실은 인간의 의식 그 자체까지 포괄하는, 거대한 네트워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범죄는, 오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자만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되고 있었다.

    “범인의 신원을 좁히는 건 이제 간단합니다. 박사님의 P2P 프로토콜 개발에 참여했거나, 그 기술에 접근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조사하십시오. 그들 중 누군가, 오늘 새벽 박사님과 ‘정신적 대면’을 했을 겁니다.”

    이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그림자가 홀로그램 빛에 길게 늘어졌다. 빗줄기는 여전히 맹렬했다.

  • 무협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7화: 그림자의 심연

    깊어가는 밤, 천룡 학원의 웅장한 첨탑들이 달빛 아래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강진의 방은 불안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그의 내면은 사나운 파도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최근 며칠간 학원을 감싸고 있던 기묘한 분위기, 특히 지하층으로 향하는 통로들이 하나둘 봉쇄되기 시작하면서 그의 직감은 불길한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빌어먹을….”

    강진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밖을 응시했다. 밤하늘은 짙은 먹색이었고, 그 속에서 빛나는 달은 핏빛처럼 보였다. 며칠 전, 혜린이 사라지기 직전 흘렸던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선배… 지하 도서관, 거기 뭔가 있어요. 희미하지만 느껴져요. 살아있는 무언가가… 속삭이는 소리가….”

    혜린은 평소에도 예민한 기운 감지 능력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녀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을 터. 그리고 그 후, 혜린은 갑자기 ‘특별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학원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 ‘특별 수련’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호하고 불투명한 변명이었는지, 강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학원의 어둠을 감지한 이들이 사라지는 방식이었다.

    그날 이후, 강진은 학원 지하에서 풍겨오는 기운에 더욱 신경을 곤두세웠다. 처음에는 희미했던 불길한 기운은 날이 갈수록 선명해졌고, 이제는 그의 단전까지 서늘하게 파고드는 지경이었다. 일반적인 마법 잔류나 지맥의 흐름과는 확연히 다른, 고통과 절규가 뒤섞인 듯한 탁한 기운. 마치 수많은 생명력을 쥐어짜내는 듯한 끔찍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강진은 더 이상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진실을 갈구했다. 그는 옷을 갈아입고, 평소에 숨겨둔 작은 칼집을 허리춤에 찼다. 그리고는 자신의 심안(心眼)을 최대한 개방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의 흐름을 읽고, 미세한 소리마저 포착할 수 있는 그의 특별한 능력. 그것이야말로 천룡 학원 깊숙이 숨겨진 비밀을 파헤칠 유일한 열쇠였다.

    그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인적이 끊긴 시각. 그의 발걸음은 마치 깃털처럼 가벼웠다. 고도로 단련된 경공술(輕功術) 덕분이었다. 그림자처럼 벽을 타고 움직이며, 그는 학원의 가장 오래된 건물, 즉 초대 학장이 사용했다는 ‘기원각(起源閣)’의 지하로 향했다.

    기원각 지하로 통하는 비밀 통로는 겉으로는 낡은 마법 서고의 한구석에 숨겨져 있었다. 오래된 책장 뒤, 특정 문양을 새긴 벽돌을 누르자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서서히 미끄러져 열렸다. 시큼하고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강진은 숨을 멈추고 안으로 들어섰다.

    통로는 좁고 길었다. 석벽에는 희미하게 고대 문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으나, 알아볼 수 없었다. 습기가 가득한 공기 속에서 그의 심안은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벽 너머에서 희미하게 진동하는 기운. 그것은 살아있는 무언가, 아니면 과거에 살아있던 무언가의 잔류였다.

    몇 개의 낡은 계단을 내려가자 통로는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강진은 손바닥에 미세하게 기운을 모아 작은 구슬 형태의 빛을 만들었다. 너무 밝지는 않게, 오직 발아래와 주변을 희미하게 비출 정도로만. 빛이 닿는 곳마다 검붉은 얼룩들이 눈에 띄었다. 단순한 흙먼지 같지는 않았다. 강진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그것을 문질러 보았다. 굳어진, 마른 피의 흔적.

    그의 심장이 더욱 격렬하게 뛰었다. 이곳은 분명 잊혀진 구역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지금도, 어쩌면 매일같이 드나들고 있는 곳이었다.

    통로의 끝에는 거대한 철문이 나타났다. 육중한 철문은 기괴한 문양과 봉인 부적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 봉인들은 단순한 출입 통제를 넘어, 안쪽의 무언가를 ‘가두려는’ 의도가 분명했다. 철문 사이의 틈새로, 강진은 탁한 기운의 진동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을 감지했다.

    “이것들이… 대체 무슨 짓을 벌이는 거지?”

    그는 문에 손을 대고 심안을 집중했다. 철문의 봉인들은 강력했으나, 그의 내공(內功)은 그것들을 우회하여 안쪽의 상황을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거대한 공간. 그리고 그 안에서 주기적으로 터져 나오는 절규에 가까운 기운의 파동.

    잠시 후, 강진은 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려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완벽하게 닫힌 것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급하게 문을 닫고 떠난 것처럼, 혹은 안에서 잠시 열렸던 것처럼. 작은 틈새였다. 그는 자신의 몸을 최대한 얇게 만들어 그 틈새로 비집고 들어갔다.

    안은 거대한 돔형의 공간이었다. 천장은 까마득히 높았고, 중앙에는 섬뜩한 형상의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단 주위로는 거미줄처럼 얽힌 수정관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고, 그 관들은 벽에 박힌 수많은 작은 구멍들로 이어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 관들 속에는 희미하게 빛나는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푸른빛과 붉은빛이 뒤섞인, 생명력을 응축한 듯한 기묘한 액체.

    강진의 눈은 경악으로 커졌다. 이곳은 ‘생명력을 흡수’하는 장치였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들의 기운을 뽑아내어 응축하는 듯한, 끔찍한 연금술의 현장이었다.

    그때, 제단 옆에 놓인 작은 석판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지만,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강진은 조심스럽게 석판에 다가갔다. 석판에는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의 심안은 그 문자의 파동을 해독하려 애썼다.

    *‘…제물… 영혼의 정화… 천룡의 각성… 지상에 강림할 힘…’*

    단편적인 단어들이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제물’이라니? ‘영혼의 정화’가 이렇듯 끔찍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단 말인가? 그리고 ‘천룡의 각성’이라니, 학원의 이름과 같았다. 이 학원은… 처음부터 이런 어둠 위에 세워진 것이었나?

    그는 발치에 널브러진 낡은 가죽 일지를 발견했다. 얼룩덜룩한 피와 알 수 없는 액체로 얼룩진 일지. 강진은 조심스럽게 펼쳐 들었다. 일지는 학원의 설립자 중 한 명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기록인 듯했다.

    *‘…희생은 필연적이다. 천룡의 지혜와 힘을 얻기 위해선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필요하다. 지하의 ‘생명석’은 무한한 에너지를 머금고 있지만, 그 불완전한 힘을 정화하고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존재의… 순수한 생명력이 필요하다….’*

    *‘…초기에는 짐승들을 사용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우리는 더 강력한 기운을 가진 존재들을 찾았고, 마침내 ‘각성자들’의 생명력이 가장 효율적임을 발견했다. 그들의 잠재된 마나와 기운은 생명석을 완벽하게 활성화시켰다… 고통은 잠시일 뿐, 그들의 영혼은 천룡의 힘으로 승화될 것이다….’*

    강진의 손이 떨렸다. 각성자들. 학원에서는 주기적으로 특별한 재능을 보이는 학생들을 ‘각성자’로 선발하여 ‘특별 수련’이라는 명목으로 데려갔다. 혜린 또한… 각성자로 선발되어 사라졌다. 그 ‘특별 수련’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란 말인가? 학원생들을, 동료들을 희생시켜 이 끔찍한 장치를 가동하고 있었다니!

    그때였다.

    멀리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발소리가 아니었다. 단단한 군화 소리.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복도에서 풍겨오던 기운이 갑자기 강렬해지며 이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강진은 재빨리 일지를 가슴에 품고 제단 뒤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들키면 끝이었다. 이곳에서 발각되는 순간, 그 역시 ‘특별 수련’이라는 이름의 제물이 될 것이 분명했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는 차가운 금속음.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들.

    “…오늘 배정된 ‘공물’은 여섯 명이다. 정기적으로 생명석을 활성화해야 학원의 마력이 유지될 수 있으니, 지체 없이 진행하라.”

    “알겠습니다, 교수님. ‘순수한 기운’이 넘치는 자들로 엄선했습니다. 곧 ‘정화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강진의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공물’, ‘정화 의식’… 그리고 교수님?

    그의 등골을 차가운 전율이 훑고 지나갔다. 학원의 가장 존경받는 교수 중 한 명의 목소리였다. 그들이 직접 이 끔찍한 의식에 참여하고 있었다. 천룡 학원의 빛나는 명성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

    철문이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섯 개의 그림자가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는 것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들 뒤에는…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오는 희미한 형체들.

    강진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마치 얼음송곳으로 꿰뚫리는 듯한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는 지금, 천룡 학원의 가장 깊고 끔찍한 금기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금기는,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강진은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살아나가야 했다. 이 진실을 세상에 알려야만 했다. 그가 품에 안은 낡은 일지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학원의 피 묻은 심장을 드러내는 증거이자, 피에 물든 복수의 서막이었다.

    “크윽…!”

    갑작스러운 격통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제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탁한 기운의 파동이 강력해진 탓이었다. 강진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하지만 온몸의 기운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위험했다. 이곳에 더 머물다가는 정신을 잃고 들키고 말 것이다.

    그는 마지막 남은 정신력을 끌어모아, 그림자처럼 다시 몸을 돌렸다. 반드시 탈출해야 했다. 이 살육의 현장을 벗어나, 진실을 밝혀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혜린과 수많은 희생자들의 원혼이 영원히 이 어둠 속에 갇히고 말 것이었다.

    그의 발걸음은 절박하면서도 침착했다. 숨겨진 복도를 향해,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그의 그림자만이 거대한 지하실에 남겨진 희미한 희망처럼 일렁였다. 뒤에서는 이미 끔찍한 의식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희미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강진은 이를 악물고 더 빠르게 움직였다. 생존과 폭로를 향한 그의 의지는, 지금 이 순간 그 어떤 마법보다도 강력하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 메카 액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우주력 325년, 제7섹터 아르카디아 성계.
    산산이 부서진 잔해들이 춤추는 전장은 지옥 그 자체였다. 거대한 전함들의 잔해가 행성 고리처럼 떠다니며 불타는 꼬리를 그렸고, 그 사이를 수없이 많은 아광속 전투기와 거대 병기들이 번개처럼 가로질렀다. ‘천공의 칼날’이라 불리는 강민준의 기체, ‘페가수스 Mk-III’는 붉은색 섬광과 푸른색 에너지 파동이 난무하는 한복판에서 맹렬히 회전하며 적기를 격추했다.

    “섹터 감마-7, 적 주력함 ‘헤르메스’급 격침 확인! 전방 병력, 후방으로 밀고 들어간다!”
    민준의 귀에 들어오는 통신은 격렬한 전투의 혼란 속에서도 선명했다. 사령부의 목소리는 다급했고, 주변 아군 기체들의 격추음은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민준! 우측 45도, 에어리언 고속정이다! 조심해!”
    파트너이자 전우인 진우의 다급한 경고가 울렸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스틱을 꺾으며 기체를 급강하 시켰다. 고막을 찢을 듯한 에너지 파동이 그의 기체 바로 위를 스쳐 지나갔다.

    “젠장, 저놈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악착같아!”
    진우가 거친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민준은 대답 대신, 에어리언 고속정의 궤적을 쫓아 록온(Lock-on)을 걸었다. 찰나의 순간, 그의 시야에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다른 기체가 포착됐다. 에어리언 특유의 유려한 곡선형 기체였다. 그러나 단순한 고속정이 아니었다. 그 기체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주변의 모든 포화를 피하면서도 정확하고 치명적인 공격을 쏟아내는 모습은, 일반적인 에어리언 병기와는 확연히 달랐다.

    ‘저 움직임은….’
    민준의 심장이 불길하게 쿵, 하고 떨어졌다. 본능적인 공포감과 함께, 차가운 전율이 전신을 훑었다. 과거의 기억이 마치 깨진 유리조각처럼 날카롭게 그의 뇌리를 스쳤다.

    * * *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 아래, 인적 드문 행성 ‘베릴륨-23’의 푸른 초원.
    차가운 바람이 불었지만, 그 온기는 충분히 따뜻했다.
    “인간들은 이렇게 밤하늘을 보며 꿈을 꾸나요?”
    긴 은발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그녀의 눈은 깊은 우주를 담은 듯 신비로웠다.
    “그래. 때로는 희망을, 때로는 절망을 보지.”
    그녀의 손을 잡은 자신의 손은 너무나 거칠고 투박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엮어왔다.
    “저는… 당신과 같은 꿈을 꾸고 싶어요, 민준.”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별빛처럼 부드러웠다. 그에게 ‘금지된’ 것이자, ‘모든 것’이었던 그녀. 라이라였다.
    그녀는 에어리언, 자신은 인간. 종족도, 태어난 세계도 달랐지만, 그들의 영혼은 서로에게 깊이 끌렸다. 그것이 전쟁 중인 두 종족에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면서도, 그들은 서로를 놓을 수 없었다.

    * * *

    “민준! 뭐 하는 거야! 망할! 제압당한다!”
    진우의 고함에 민준은 현실로 돌아왔다. 그의 눈앞에는 아까 그 유려한 에어리언 기체가 아군 지원기를 완벽하게 압도하고 있었다. 치명적인 속도로 접근하며, 푸른빛 에너지 칼날을 휘둘렀다. 아군 지원기의 방어막이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조종사는 필사적으로 회피했지만, 이미 늦었다.

    ‘저 공격… 라이라의 움직임이다.’
    민준은 확신했다. 특유의 기동 패턴, 공격의 타이밍, 그리고 적의 허점을 파고드는 방식. 심지어 기체에 새겨진 문양까지. 그것은 분명, 라이라의 전용 기체였다. 그는 라이라가 에어리언 병기의 최정예 조종사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장에서, 그것도 서로를 겨누는 상황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사령부, 에어리언 주력 전투기 ‘셰이드-III’ 발견! 아군 지원기 격추 직전입니다!”
    진우가 다급하게 보고했다.
    “페가수스 Mk-III, 강민준 조종사! 즉시 ‘셰이드-III’를 저지하고 아군을 보호하라! 최우선 목표다!”
    사령부의 명령은 단호했다. 민준은 망설였다. 그의 손은 조종간 위에서 굳어버렸다. 라이라를… 쏴야 하는가?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이 전장에서, 직접 격추해야 하는가?

    하지만 그 망설임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의 눈앞에서 아군 지원기의 잔해가 폭발하며 우주 공간으로 흩어졌다. 동료가 죽었다. 라이라의 손에.

    ‘젠장…!’
    민준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개인적인 감정은 전장에서 사치였다. 그는 자신의 기체에 내장된 인공지능 ‘오르카’에게 명령했다.
    “오르카, ‘셰이드-III’에 대한 모든 전투 데이터를 끌어내. 약점 분석, 즉시.”
    [분석 시작. 셰이드-III 기체는 높은 기동성과 강력한 에너지 방어막이 특징입니다. 그러나 장시간 고속 기동 시, 기체 후방 동력 코어에 미세한 과부하가 감지될 수 있습니다. 0.03초의 틈.]
    오르카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지만, 민준에게는 섬광처럼 느껴졌다. 0.03초. 그 짧은 순간에 라이라의 기체의 치명적인 약점을 노려야 했다.

    “진우, 엄호 사격! ‘셰이드-III’의 시선을 끌어줘!”
    “알겠다! 민준, 후회할 일 만들지 마!”
    진우의 기체가 포효하듯 돌진했다.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페가수스 Mk-III는 기체를 급회전하며 셰이드-III를 향해 돌진했다. 양쪽 날개에서 푸른색 빔 포가 섬광처럼 뿜어져 나왔다. 셰이드-III는 민첩하게 이를 피하며 반격했지만, 민준은 이미 라이라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라이라… 미안하다.’
    그의 손가락이 방아쇠에 닿았다. 뇌리에 스치는 마지막 기억은, 별빛 아래에서 환하게 웃던 그녀의 얼굴이었다.
    “페가수스 Mk-III, 최대 출력! 특수 전술 기동 ‘스카이 댄서’ 발동!”
    민준의 기체는 마치 춤을 추듯 우주 공간을 가로질렀다. 셰이드-III의 예측 궤도를 벗어나, 놀라운 속도로 측면을 파고들었다. 라이라의 기체가 순간 당황한 듯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 0.03초의 틈.

    민준은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크아아악!”
    페가수스 Mk-III의 주포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색 에너지 빔이 셰이드-III의 후방 동력 코어를 정확히 강타했다. 콰앙! 셰이드-III의 동력 코어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연기가 피어오르며 기체가 통제력을 잃고 맹렬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성공했다! 민준! 해냈어!”
    진우의 기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민준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그 순간, 셰이드-III의 기체에서 미세한 통신 신호가 감지되었다. 암호화되지 않은, 짧은 주파수.
    […민준…?]
    목소리는 희미했지만, 그가 평생 잊을 수 없는, 너무나도 익숙하고 사랑스러운 음성이었다.
    민준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 목소리는 분명 라이라였다.

    그의 손이 조종간을 놓치며 떨렸다. 그의 눈앞에서, 라이라의 기체가 통제 불능 상태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완전히 격추된 것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전투를 계속할 수 없는 상태였다.

    “페가수스 Mk-III, 셰이드-III를 추격하라! 완전 격추 지시가 내려왔다!”
    사령부의 명령이 다시 한번 귓가를 때렸다.
    추격? 아니, 라이라를 죽이라고?
    민준의 눈은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은 혼돈 그 자체였다.
    그때, 멀리서 또 다른 거대한 에너지 파동이 감지됐다. 에어리언 주력 함대의 증원이 도착한 것이었다. 그들의 함선에서 수십 개의 미사일이 일제히 발사되며 민준의 위치로 쏟아졌다.

    “젠장, 함정이었나!”
    진우가 소리쳤다.
    민준은 갈등했다. 이대로 라이라를 쫓아갈 것인가, 아니면 밀려오는 적의 증원군에 맞설 것인가. 라이라의 기체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희미한 통신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의 눈은 에어리언 증원군과, 저 멀리 희미해지는 라이라의 기체 사이를 오갔다.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떤 선택도, 그의 심장을 찢어놓을 것 같았다.

    “라이라…!”
    그의 절규는 우주 공간의 공허 속에 흩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에어리언 증원 함대 중 가장 거대한 전함의 함교에서, 한 인물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예상대로군. 라이라의 미끼는 성공적이었다.”
    그의 손에는 라이라의 기체와 연결된 통신기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라이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올 뿐이었다.
    [미끼 작전, 성공적으로 수행되었습니다. 아르카디아 성계 방어선 붕괴 임박.]
    그리고 전함은 맹렬한 포화를 퍼부으며, 강민준이 있는 곳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 계속)

  • 로맨틱 코미디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둑시근한 숲의 심장부에 닿자, 공기는 끈적한 습기와 흙내로 가득했다. 나뭇가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희미한 달빛만이 길 잃은 유령처럼 춤췄다.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자, 이끼 낀 거대한 돌문이 묵묵히 서 있었다. 그 문은 마치 수천 년의 시간을 압축해 놓은 듯, 섬뜩하면서도 웅장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여기, 확실해?”

    하준은 손에 든 낡은 양피지 지도를 조심스레 펼쳐 보였다. 희미한 잉크로 그려진 그림들은 도무지 현실과 연결되지 않는 환상 같았다. 그는 땀으로 축축한 안경을 고쳐 쓰며, 삐죽 튀어나온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지도에 따르면 이곳이 바로, 천 년 전 고대 왕국 ‘엘다’가 사라진 후 모든 기록에서 지워졌다는 지하 유적의 입구였다.

    “확실하고 말고. 내 육감이 틀린 적은 없었어.”

    세린은 이미 돌문 앞에서 검지로 거친 문양을 더듬고 있었다. 낡아빠진 모험가 복장에 허리춤엔 정체 모를 도구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녀의 호기심 어린 눈빛은 어둠 속에서도 별처럼 반짝였다. 망설임 없는 그 모습에 하준은 늘 속이 타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육감이라니. 여긴 인류의 소중한 역사 유적이야, 세린! 최소한의 고증과 과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고증 타령하다가 문이 먼저 썩어 문드러지겠네. 게다가 과학? 여긴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만들어진 곳이야, 하준 박사님.”

    세린은 피식 웃으며 손바닥으로 돌문을 세게 밀어 보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문에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주머니에서 접이식 삽을 꺼내 들었다.

    “잠깐, 뭐 하는 거야? 삽으로 파내려는 건 아니겠지?”

    하준은 기겁하며 소리쳤지만, 세린은 이미 삽 끝으로 돌문 아래 박힌 흙을 파내고 있었다. ‘크크크’ 하는 간헐적인 웃음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대의 문은 항상 어떤 물리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야. 예를 들면, 지반 침하로 인해 일부만 파묻혔다거나.”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끼이이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숲 전체에 울려 퍼졌다. 거대한 돌문이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하준은 넋이 나간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 어떻게?”

    “보통은 상식을 뛰어넘는 곳에 답이 있지.”

    세린은 으쓱하며 랜턴을 꺼내 불을 밝혔다. 좁고 깊은 통로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 안에서 오랜 시간 갇혀 있던 흙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한꺼번에 훅 끼쳐 나왔다. 랜턴 불빛이 닿지 않는 통로 저편은 끝없는 심연처럼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들어갈 거야?”

    하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한편으로는 억누를 수 없는 지적 호기심이 용솟음쳤다.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미지의 유적. 학자로서 이보다 더한 탐험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 설마 이 코앞에서 쫄아서 포기할 작정은 아니겠지?”

    세린은 이미 한 발을 통로 안으로 들여놓은 참이었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알 수 없는 흥분과 약간의 광기가 느껴졌다. 하준은 한숨을 쉬며 등 뒤의 배낭을 고쳐 멨다. 어차피 이 고집 센 여자애를 말릴 수는 없을 터였다.

    “좋아, 들어가자. 하지만 내 지시를 따르는 조건으로.”

    “콜. 어차피 당신은 문자 해독이나 벽 그림 해석 같은 거 말고는 딱히 쓸모가 없을 테니.”

    하준의 미간이 좁혀졌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통로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돌문이 닫히며 숲의 소음은 완전히 차단되었고, 그들 주변은 오직 랜턴 불빛과 그들의 숨소리만이 존재하는 고립된 세계가 되었다. 바닥은 축축하고 미끄러웠으며, 천장에서는 간헐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마나 걸었을까, 통로는 이내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랜턴 불빛이 닿는 곳은 기둥이 촘촘히 박힌 거대한 홀이었다. 기둥과 벽에는 정교하면서도 이해할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이봐, 하준. 저거 봐!”

    세린은 홀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비석을 가리켰다. 비석은 빛바랜 회색 돌로 만들어졌지만, 표면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섬세하게 새겨져 있었다. 다른 벽화나 문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이질적인 아름다움이었다.

    하준은 비석 앞으로 다가가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그의 눈이 글자 위를 훑자, 입술이 느리게 움직이며 알 수 없는 고대어를 중얼거렸다. 그의 눈빛은 어느새 몽롱한 광기로 가득 차 있었다.

    “‘깊은 곳의 진실은… 오직 어둠 속에서만 빛나리라…’ 그리고 ‘세 개의 별이 하나가 될 때, 길은 열릴 것이며… 사라진 지식은 그 모습을 드러낼지니…’”

    “세 개의 별? 길? 사라진 지식? 젠장, 이건 또 무슨 수수께끼야?”

    세린은 주위를 둘러보며 벽에 새겨진 문양들을 살펴보았다. 어떤 것은 동물 같고, 어떤 것은 기하학적이었다. 그러다 그녀의 시선이 천장의 한 지점에 멈췄다.

    “이봐, 저 위에 봐!”

    세린의 손가락 끝이 가리킨 곳에는 천장에 그려진 거대한 별자리 그림이 있었다. 그 중 세 개의 별이 다른 별들보다 훨씬 크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별들이 그려진 방식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어떤 특정한 각도에서만 빛을 반사하도록 설계된 듯, 랜턴 불빛이 닿자 희미하게 반짝였다.

    “저 세 개의 별이… 왠지 움직일 것 같지 않아?”

    하준은 세린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다른 별들과는 다른 조형 방식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고학 지식을 총동원하며 비석에 새겨진 문자들과 천장의 별자리를 번갈아 살폈다.

    “음… ‘세 개의 별이 하나가 될 때’라고 했으니, 뭔가 조작이 필요한 것 같아. 이 별들이 특정 위치에 정렬되어야 하는 퍼즐일지도 몰라.”

    “그럼 어떻게 돌려? 저건 거의 십 미터는 되는 높이에 있는데.”

    세린은 발끝으로 땅을 톡톡 건드렸다. 그 순간, 비석 아래 발판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나며 작은 구멍이 나타났다. 구멍 안에는 손잡이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어, 이게 뭐지?”

    세린이 호기심에 손잡이를 잡아당기려 하자, 하준이 그녀의 손목을 다급하게 잡았다.

    “잠깐! 함부로 움직이지 마! 고대 유적은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많아. 잘못 건드리면 독가스가 나오거나, 천장이 무너지거나…”

    “쫄보처럼 굴지 마. 고대의 함정은 항상 경고를 남기게 되어 있어. 아무런 문양도 없잖아? 이건 단순히 문을 여는 장치일 가능성이 더 높아.”

    세린은 하준의 손을 뿌리치고 손잡이를 ‘휙’ 잡아당겼다. 순간, 홀 전체가 진동하며 ‘콰과광’ 하는 굉음이 울려 퍼졌다. 하준은 눈을 질끈 감았고, 세린은 불안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정적이 흘렀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봐! 아무 일 없잖아.”

    세린이 의기양양하게 말하려던 찰나였다. 홀 벽면에서 ‘스으으윽’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벽화들이 천천히 옆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벽화 뒤로 숨겨져 있던 새로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 안쪽에서는 이전보다 더 강렬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세상에… 정말이었어.”

    하준은 넋 나간 얼굴로 새로 열린 통로를 바라보았다. 푸른빛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지적 호기심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그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자, 다음은 저쪽인가!”

    세린은 이미 열린 통로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와 함께, 앞으로 펼쳐질 미지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했다. 하준은 그녀의 뒤를 따르면서도, 푸른빛 속에서 언뜻 보이는 거대한 문양과 기이한 형상들을 놓치지 않았다.

    “저건… 대체 무슨 의미지?”

    그의 중얼거림은 푸른빛 통로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정말로, 잊혀진 고대 왕국 엘다의 심장부로 들어가는 길목에 서 있었다. 그곳에는 과연 어떤 비밀이 잠들어 있을까? 그리고 그 비밀이 드러났을 때, 그들의 관계는 또 어떻게 변할까? 하준은 미지의 공포와 함께, 세린의 뒷모습에서 피어나는 묘한 설렘을 느꼈다. 그들의 모험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 오컬트 호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챕터 1: 그림자 아래의 식량**

    천장에 매달린 간판이 삐걱거렸다. 닳고 해진 철제 글자들이 마치 오래된 비명처럼 바람에 흔들렸다. 김민준은 낡은 방수포로 덮인 배낭을 어깨에 고쳐 매며 몸을 숙였다. 한때는 번화했을 대형 마트의 잔해. 지금은 부서진 진열대와 썩어가는 상품 냄새, 그리고 끈적한 침묵만이 가득한 거대한 무덤이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거대한 공간 속으로 스며들었다. 어둠은 이미 창밖을 집어삼켰지만, 마트 안은 바깥보다 더 깊은 심연이었다. 한때 유리로 덮였을 천장은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고, 그 자리를 알 수 없는 검은 덩굴들이 기괴하게 뒤덮고 있었다. 그 덩굴들은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듯했다.

    민준은 손전등을 들어 올렸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낡은 전구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겨우 몇 걸음 앞을 비출 뿐이었지만, 이 불빛 하나가 그를 감싸는 끈적한 공포를 잠시나마 걷어내 주었다. 그의 시선은 텅 빈 통조림 코너를 훑었다. 대부분 뜯겨 있거나, 내용물이 알 수 없게 변색되어 있었다. 끔찍한 녹슨 냄새가 코를 찔렀다.

    굶주림이 명치끝을 찌르는 통증으로 다가왔다. 어제 겨우 찾아낸 딱딱한 비스킷 두 조각이 전부였다. 이런 식으로는 오래 버티지 못할 터였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절망은 사치였다.

    폐허가 된 육가공 코너를 지나자 냉동 코너가 나왔다. 물론 전기는 진작에 끊겼을 테니, 이곳에 온전한 것이 남아있을 리 만무했다. 다만, 그의 눈길을 끈 것은 찌그러진 냉동고 문틈으로 비어져 나온 기묘한 푸른빛이었다. 빛이라기보다는, 섬뜩하게 발광하는 곰팡이 같았다.

    “이게 뭐야…”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발밑의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민준은 숨을 죽였다. 미세한 소음 하나도 이 침묵 속에서는 거대한 파열음처럼 느껴졌다. 손전등을 냉동고 안으로 비췄다. 곰팡이는 예상대로였다. 거대한 파란색 덩어리들이 냉동육을 감싸고, 심지어는 냉동고 벽면까지 뒤덮고 있었다. 마치 낯선 바다 생물들이 고기 위에 달라붙어 증식한 듯한 광경이었다.

    그때였다. 덩어리들 사이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민준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은 곰팡이 덩어리들이 만들어낸 착시 현상일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 심장이 쿵, 쿵, 하고 거칠게 울렸다. 귓가에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착각마저 들었다.

    *…도망쳐…*

    목소리는 아주 작고, 흐릿했다. 마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메아리 같았다. 민준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환청이다. 지쳐서 들리는 환청. 이런 곳에서는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발밑의 유리 조각들이 다시 한번 ‘사각-‘ 하고 소리를 냈다. 분명 그가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민준은 재빨리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복도, 어둠에 잠긴 진열대들. 그는 다시 냉동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냉동고 안의 푸른 곰팡이 덩어리들이 일제히 ‘꿈틀’ 하는 것을 똑똑히 봤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처럼.

    그리고 덩어리들 사이에서, 무언가 차갑고 희끄무레한 것이 ‘스윽’ 하고 튀어나왔다. 그것은 마치 사람의 팔처럼 가늘고 길었으나, 뼈대만 남아있는 듯 앙상하고, 피부는 푸른 곰팡이로 뒤덮여 있었다. 끝은 날카로운 손톱 대신, 녹슨 쇠붙이 같은 것으로 변형되어 있었다.

    “크…!”

    민준은 비명을 삼켰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그 존재는 희미한 냉동고 안의 빛을 반사하며, 마치 그를 향해 손짓하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웅얼거리는 소리가 환청이 아니었다. 푸른 곰팡이 덩어리들 사이에서, 수많은 작은 입들이 열리고 닫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아니, 착각이 아니었다.

    *…가까이 와… 가까이…*

    그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본능이 소리쳤다. *도망쳐!*

    민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그의 발소리가 폐허 속에서 불협화음을 만들어냈다. 뒤에서 무언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듯한 끔찍한 속삭임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젠장, 젠장, 젠장!”

    그는 계산대 앞의 무너진 구조물들을 뛰어넘고, 썩은 과일 냄새가 진동하는 청과 코너를 가로질렀다. 그의 손전등 불빛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시야에 잡히는 모든 것이 흐릿하게 일그러졌다. 건물 전체가 그를 잡아먹으려는 거대한 입 같았다.

    겨우 마트의 부서진 출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는 있는 힘껏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그는 미친 듯이 숨을 몰아쉬었다.

    등 뒤에서 마트 건물 전체가 ‘으득-‘ 하고 뼈 부러지는 소리를 내는 듯했다. 마치 거대한 괴물이 하품을 하듯, 출입구 안쪽의 검은 덩굴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덩굴들 사이에서, 아까 그 푸른 빛이 희미하게 깜빡이는 착각마저 들었다.

    민준은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오직 눈앞의 어둠과, 희미하게 빛나는 멀리 떨어진 빌딩의 실루엣이었다. 그 빌딩은 과거 그가 ‘안전 구역’이라고 불렀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또 다른 그림자에 불과했다.

    배낭을 더 단단히 고쳐 맸다. 손에는 낡은 칼자루가 땀으로 축축했다. 굶주림은 여전했지만, 그것보다 더 거대한 공포가 그의 정신을 지배했다.

    이 세상은 변했다.
    더 이상 식량을 찾아 나서는 단순한 생존이 아니었다.
    이것은, 세상 자체가 미쳐버린 밤 속에서, 제정신을 부여잡기 위한 싸움이었다.

    멀리서, 또 다른 짐승의 울음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그것은 늑대일까, 아니면 이 타락한 세상이 낳은 또 다른 존재일까.
    민준은 대답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는 계속해서 나아갈 뿐이었다.
    어둠 속에서, 다음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아니, 다음 해가 뜨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절망 속에서도.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고층 빌딩의 앙상한 뼈대가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바람은 콘크리트 가루와 흙먼지를 몰고 다니며 폐허가 된 도시를 휩쓸었다. 진은 허름한 방수포를 뒤집어쓴 채, 간신히 버티고 선 상점 간판 아래 몸을 웅크렸다. 비상식량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그의 몸은 잔뜩 말라 있었지만, 그을린 피부 아래로 솟아난 근육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그의 눈빛은 메마른 사막 같았지만, 그 깊은 곳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 하나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복수. 오직 그 단 하나의 단어가 그를 살게 했다.

    “형… 형은 괜찮을 거야.”

    아직 따뜻했던 어제의 기억이 기침처럼 터져 나왔다. 그와 현은 함께였다. 이 지옥 같은 세상이 열리고 나서부터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현은 영리하고, 재치가 넘쳤다. 진은 강했고, 끈기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완벽한 짝이었다. 폐허 속에서 발견한 낡은 라디오를 고쳐 밤마다 희망 없는 노래를 들었고, 쥐를 잡아 구워 먹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현은 늘 말했다. “진아, 우리는 끝까지 함께야. 무슨 일이 있어도.” 진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의 유일한 가족이었고, 세상의 전부였다.

    그 믿음이 산산조각 난 것은, 그 겨울의 벙커였다.

    북풍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혹독한 계절이었다. 식량은 바닥났고, 눈보라 속에서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 헤매던 중이었다. 낡은 지하 벙커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희망에 부풀었다. 벙커는 예상보다 깊었고, 오래된 방사능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절박했다. 추위와 굶주림이 죽음보다 더 무서웠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침과 구토가 쏟아졌다. 낡은 방사능 차폐 시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현은 지독한 오한과 설사에 시달렸다. 진은 현을 부축해 가장 깊숙한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기적처럼 방사능 해독제를 발견했다. 딱 한 병. 그것만 있다면 현은 살 수 있었다.

    “현아, 이거 마셔! 이걸 마시면 살 수 있어!”

    진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해독제를 건넸다. 현은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약병을 움켜쥐었다. 그때, 벙커의 천장에서 굉음이 울렸다. 지반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우리는 좁은 통로를 통해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했다. 하지만 진이 먼저였다. 진은 뒤쳐진 현을 밀어 올리다 낡은 철근 더미에 깔려버렸다. 그의 다리에서 뜨거운 피가 뿜어져 나왔다.

    “흐읍… 현아! 먼저 가! 난… 난 괜찮아! 빨리 빠져나가야 해!”

    진은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현은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진을 바라봤다. 그의 손에는 해독제가 들려 있었다. 천장이 더 크게 흔들리며 먼지와 잔해가 쏟아졌다. 틈새로 보이는 희미한 빛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현은 진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것은 연민이 아니었다. 명백한 공포. 그리고 선택.

    “진아… 미안해. 난… 난 살아야 해.”

    그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속에 망설임은 없었다. 현은 한 걸음, 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해독제는 그의 손에 꽉 쥐어져 있었다. 진은 손을 뻗었다. 그의 눈에 현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담겼다. 그 속에는 절규가, 배신감이,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신뢰가 무너지는 끔찍한 고통이 담겨 있었다.

    “현아! 가지 마! 이… 이러지 마! 현아아아아!”

    진의 목소리는 굉음과 함께 묻혔다. 이내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어둠과 차가운 잔해만이 그를 덮쳤다. 죽음이 그를 감싸는 듯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그는 살아남았다. 찢어진 다리와 엉망이 된 몸으로, 그는 기어 나왔다. 마치 흙 속에서 솟아난 악귀처럼. 살아야 했다. 현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그에게 이 고통을 돌려주기 위해서.

    이후 2년의 세월은 그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폐허 속에서 사냥하고, 약탈하고, 다른 생존자 집단과 싸웠다.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의 정신은 강철 같았다. 그는 현의 흔적을 쫓았다. 현은 똑똑했고, 살아남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었다. 분명 어딘가에 정착했을 터였다.

    그리고 마침내, 소문이 들려왔다. 서쪽 폐교회에 요새를 만든 ‘거래상’에 대한 이야기. 그는 귀한 물품들을 거래하고, 주변 생존자들을 거느린다고 했다. 그의 이름은 ‘히어로’. 정의로운 척 행세하는 위선자. 그리고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진은 확신했다. 그건 현이었다.

    진은 며칠 밤낮을 걸어 폐교회 요새 근처에 도착했다. 높은 벽과 망루, 무장한 경비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은 꽤 크게 성공한 모양이었다. 진은 복잡한 배수관을 통해 밤중에 잠입했다. 그의 움직임은 고요했고, 그림자보다 어두웠다.

    요새 안은 예상보다 활기찼다. 작은 시장이 열려 있었고, 사람들이 모닥불 주변에 모여 앉아 웃고 떠들었다. 풍요로워 보였다. 진은 낡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채 시장 구석을 헤치고 나아갔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가 있는 곳은 시장 한복판의 높은 단상 위였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 깨끗한 옷, 그리고 자신감 넘치는 미소. 현이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설득력 있었다. 마치 자신이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낸 영웅인 것처럼.

    “우리는 함께입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도 서로를 믿고 의지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역겨운 위선이었다. 진은 숨을 죽였다. 그의 손이 허리춤의 칼자루를 쥐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 위선자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현의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한낱 거지나 떠돌이일 뿐이었다. 현은 진을 알아보지 못했다. 수염과 상처, 그리고 너무나 깊어진 눈빛 때문이었을 것이다. 진은 현의 주변을 맴돌며 그의 일과 동선을 파악했다. 현은 매일 밤, 요새 가장 안쪽에 있는 작은 지하실에서 혼자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개인적인 창고 같았다.

    며칠 후, 진은 현이 지하실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녹슨 철문이 닫히자, 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작은 공간이었다. 현은 선반 위에 놓인 낡은 상자를 열고 있었다. 그 순간, 진이 문을 닫았다. 쾅 하는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현은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진을 본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누… 누구세요? 어떻게 여기까지…”

    진은 아무 말 없이 후드를 벗었다. 그의 얼굴은 반쯤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 깊은 눈빛과 흉터는 현에게 잊을 수 없는 공포를 안겨주었다.

    “기억 안 나? 네가 죽인 줄 알았던 친구.”

    진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현의 얼굴은 완전히 하얗게 질렸다.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상자 안에 있던 내용물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낡은 사진 몇 장, 빛바랜 일기장. 그리고… 녹슨 금속 필터 하나. 우리가 벙커에서 찾았던 바로 그 물건이었다.

    “진… 진아? 설마… 네가 어떻게…”

    현의 목소리는 찢어질 듯 했다. 공포와 경악,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뒤섞였다.

    “어떻게 살아남았냐고? 네가 버리고 간 그 지옥 속에서, 나는 너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버텼어. 매일 밤낮으로 이를 갈았어. 네가 마셨던 그 해독제 하나 때문에, 나는 온몸의 뼈가 부서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어. 너는 그럴 가치도 없는 놈이었어!”

    진은 한 발자국씩 현에게 다가섰다. 그의 눈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 같았다. 현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자,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아니야! 진아, 오해하지 마!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 천장이 무너지고 있었어! 나도 죽을 뻔했어! 살기 위해서는… 살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했다고!”

    현은 두 손을 들고 애원했다. 그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살기 위해서? 내가 없었다면 넌 그 필터를 찾지도 못했을 거야. 내가 없었다면 넌 벙커 입구도 못 찾고 죽었을 거야. 그런데도 넌 나를 버렸어. 네가 살겠다고 내 목숨을 짓밟았어.”

    진은 바닥에 떨어진 필터를 발로 툭 쳤다. 녹슨 필터가 현의 발치에 굴러갔다.

    “이거… 네 목숨 줄이었지? 이것 때문에 날 버렸고, 이것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올라왔겠지. 넌 내가 이 필터를 찾아냈고, 너에게 살려줄 기회를 주었을 때, 나에게 어떤 선택지를 주었지? 죽음.”

    진의 눈빛은 한없이 차가웠다. 현은 두려움에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발… 진아…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옛정? 네가 그딴 말을 입에 담을 자격이 있어? 내가 널 형처럼 따랐던 그때를 기억해? 나는 네 말을 믿었어. 세상에 믿을 사람 너 하나뿐이라고 생각했어. 하지만 넌… 넌 짐승만도 못한 새끼였어!”

    진은 허리춤의 단검을 뽑았다. 차가운 칼날이 지하실의 희미한 불빛을 받아 번뜩였다. 현은 질겁하며 뒤로 기었다.

    “아니야! 진아! 난… 난 달라졌어! 이제는 사람들을 돕고 있어! 봐! 나는 이 요새를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을 구했어!”

    “구했다고? 네가 남을 짓밟고 일어선 그 더러운 발로? 네가 가진 모든 것은 나를 버린 대가로 얻은 거야. 넌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어. 그리고 이제… 나는 너에게서 모든 것을 되찾을 거야.”

    진은 칼을 든 채 현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현은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칼날을 바라봤다. 진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가운 복수의 눈물이었다.

    “널 죽일 거야, 현아.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칼날이 번뜩였다. 현의 비명 소리는 좁은 지하실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비명은 이내 흐느낌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흐릿한 신음으로 변했다.

    ***

    밤은 여전히 차가웠다. 진은 폐교회 요새를 빠져나왔다. 그의 옷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불꽃이 이글거리지 않았다. 그저 메마른 사막만이 남아 있었다. 복수는 끝났다. 모든 것을 앗아갔던 그에게 모든 것을 되갚아주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였다. 복수가 끝나자, 그를 지탱하던 유일한 기둥이 사라졌다. 허무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는 잿빛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은 여전히 냉정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진은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의 등 뒤에 남겨진 것은 폐허가 된 요새와, 그 안에 갇힌 어둠뿐이었다. 그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홀로, 이 혹독한 세상 속에서.

  • 타임슬립 (시간여행)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강민혁은 오늘도 사무실 창밖을 내다봤다. 회색빛 빌딩 숲은 언제나 그 자리에 굳건히 서 있었다. 숨 막히는 빌딩, 지루한 서류 더미, 그리고 얄팍한 월급 봉투. 그의 30년 인생은 단 한 번도 ‘모험’이라는 단어와 어울린 적이 없었다. 어릴 적 무협지 속 주인공들처럼 세상을 유람하며 협객의 삶을 꿈꿨지만, 현실은 퍽퍽한 월세와 상사의 잔소리뿐이었다.

    퇴근길, 습관처럼 들른 낡은 골동품 가게. 먼지 쌓인 진열대 구석에서 그의 눈길을 잡아끈 것은 짙은 나무 빛깔의 작은 패였다. 거칠게 조각된 문양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지만, 왠지 모르게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했다. 주인아저씨는 먼지를 털어주며 껄껄 웃었다. “아이고, 총각. 이건 그냥 나무 조각이야. 재수가 좋으면 잠꼬대 정도는 시켜주려나.” 민혁은 알 수 없는 이끌림에 낡은 지갑을 열었다. 고작 만 원. 편의점 커피 세 잔 값이었다.

    집에 돌아와 낡은 패를 탁상 위에 올려놓았다. 손가락으로 거친 표면을 쓸어보니 오묘한 기운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착각이겠지. 그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다. 잠자리에 들기 전, 문득 패를 쥐어보았다. 나무 조각은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정적이 흐르던 방 안에 섬뜩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크아아악!”

    마치 온 세상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였다. 빛의 폭풍이 방 안을 집어삼켰다. 눈을 뜰 수 없었다. 몸은 마치 거대한 손에 붙들려 흔들리는 인형처럼 제멋대로 나부꼈다. 시공간이 뒤틀리는 듯한 어지러움, 살갗을 찢는 듯한 바람,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이 민혁을 덮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에 쥐고 있던 낡은 패를 더욱 움켜쥐었다. 차가운 나무 조각이, 지금은 마치 뜨거운 불덩이처럼 느껴졌다. 정신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 치는 동안, 의식은 아득한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

    고요했다.
    방금 전의 아비규환은 꿈이었나.
    강민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귓가에는 매미 소리가 맴돌았다. 시원한 바람이 땀으로 젖은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는 대신, 왠지 모를 위화감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은… 그의 자취방이 아니었다.

    그가 누워있던 곳은 나무로 된 평상이었다. 흙벽으로 지어진 낡은 방. 창밖으로는 빽빽한 빌딩 대신, 거대한 산세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끝없이 푸르고, 공기는 맑고 청량했다. 믿을 수 없는 풍경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 여기가 어디지…?”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혼란스러움에 방을 나서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를 더욱 경악케 했다. 널찍한 마당에는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들이 줄지어 있었고, 마당 한편에는 훈련이라도 하는 듯 젊은이들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은 현대가 아니었다. 갓을 쓴 노인, 비단옷을 입은 여인, 무명옷을 입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마치 드라마 세트장 같았다.

    “이게 대체… 무슨….”

    그는 문득 손안을 살폈다. 낡은 나무 패는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왼쪽 손등에 작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렴풋이 보았던, 패에 새겨져 있던 것과 똑같은 문양이었다.

    그때, 저편에서 다가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보시오! 도련님, 이제야 일어나셨소? 대사형께서 새벽부터 찾으셨는데.”

    민혁은 돌아보았다. 앳된 얼굴의 소년이 해맑게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소년은 그의 옷차림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혁은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봤다. 얇은 무명옷. 어제 입고 잠들었던 낡은 티셔츠와 반바지가 아니었다.

    “내가 도련님이라고? 누구…세요?” 민혁은 더듬거리며 물었다.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 “아이고, 도련님! 어제 그 일로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더니, 저를 알아보지 못하시겠소? 저는 사동입니다! 사동!” 소년은 다급히 외쳤다. “소문에 어제 도련님께서 현무봉에서 떨어지셨다던데… 괜찮으신 겁니까?”

    현무봉? 사동? 떨어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워졌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꿈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뺨을 꼬집어도 아팠고, 눈앞의 풍경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시간 여행. 무협지에서나 보던 그 시간 여행이라는 말인가?

    “저, 저기… 그, 그제는 몇 년도입니까?” 민혁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물었다.
    소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연호라니요? 지금은 광명 원년이오. 도련님 정말 괜찮으신 겐가요?”

    광명 원년? 민혁은 현대 한국에서 사용되는 연호가 아님을 직감했다. 확실했다. 그는 과거로 왔다. 그것도 무협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무림으로.

    “사동아, 도련님은 어떠하시냐?”

    이번에는 좀 더 묵직하고 나이 든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리가 굽었지만 눈빛만큼은 형형한 노인이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약탕기가 들려 있었다.
    “아이고, 장로님! 도련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허나 어제 일로 기억이 좀 오락가락하시는 듯합니다!” 사동이 다급히 외쳤다.

    노인은 민혁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민혁은 본능적으로 그의 시선에서 꿰뚫리는 듯한 불편함을 느꼈다.
    “후음… 현무봉에서 그리 떨어지고도 큰 상처 없이 살아남다니, 하늘이 도왔구나. 허나 제자는, 기억을 잃은 듯하구나.” 노인은 혀를 쯧쯧 차며 민혁에게 약탕기를 내밀었다. “일단 이 약을 마시거라. 기혈을 보하고 정신을 맑게 해줄 터이니.”

    민혁은 얼떨결에 약탕기를 받아 들었다. 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장로님… 제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민혁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누구냐니. 강호에 이름을 떨치던 명문 정파, 청풍문의 제자 강민혁이 아니더냐. 헌데 어찌 그새 기억을 잃었단 말이냐.”

    강민혁? 그의 이름은 맞았지만, ‘청풍문의 제자’라는 말은 생소했다.
    “그리고… 지금 청풍문에는 비상이 걸렸다.” 노인의 목소리에 갑자기 엄중함이 서렸다. “알고 있느냐? 천하제일 무도회가 열릴 때가 다가왔다.”

    천하제일 무도회!
    민혁은 그 말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무협지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그 대회!
    “천하제일 무도회라니요… 그게 무슨….”

    “이리도 둔할 수가! 강호의 모든 문파들이 목숨을 걸고 겨루는 대회가 아니더냐! 이번 무도회는 다르다. 정파와 사파, 마교와 사문까지, 천하의 모든 세력이 참가한다더구나. 대륙의 패권을 결정할, 진정한 의미의 천하제일 무도회가 될 것이다.” 노인의 눈빛은 어느 때보다 강렬했다. “우리는 이번 대회에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청풍문의 이름을 드높이고,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자리이니. 네 사형들은 모두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너 또한 기억을 되찾으면 곧장 훈련에 합류해야 할 터.”

    천하의 운명. 무림 고수들의 무술 대회.
    민혁은 손에 든 약탕기를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무림 고수라고?”

    노인은 피식 웃었다. “네가 비록 청풍문에서는 어설픈 재능에 속했지만, 강호에 나가면 한가락 하는 제자다. 너무 자신을 낮추지 마라. 어서 약을 마시고 정신을 차려야 할 터. 무도회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한 달?
    강민혁은 혼란스러웠다. 어제까지 월급을 걱정하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는데, 오늘은 무림 고수들의 운명을 건 대회에 참가해야 하는 청풍문의 제자라니. 게다가 기억 상실이라니. 이 무슨 황당한 전개란 말인가.

    그의 눈앞에는 끝없는 산세와 훈련에 매진하는 무인들의 모습이 펼쳐져 있었다.
    낯선 세계, 낯선 임무, 그리고 낯선 자신.
    강민혁은 쓴 약을 한숨에 들이켰다.
    이곳에서, 그는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가 꿈꾸던 모험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기묘한 기대감과 함께.
    그는 무림의 맑은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현대인 강민혁은 사라지고, 청풍문의 제자 강민혁이 새로운 운명을 마주할 차례였다.
    무림의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새로운 시작이었다.
    아니, 어쩌면, 훨씬 더 오래된 운명의 재회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 이세계 전생 (Isekai)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심연의 비명

    낡은 붓은 더 이상 먹물을 머금지 못하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이시호는 묵묵히 붓대를 들어 먹물 통을 휘저었다. 고작 학생회실 바닥에 엎지른 잉크 자국 하나 때문에 일주일째 이 망할 고문서 보관실에서 썩어가고 있었다. 아르카나 마법 학원, 이 위대한 이름 아래 숨겨진 잡무의 양이란… 새삼 이세계 전생이 무슨 축복인가 싶었다. 차라리 전생의 평범한 직장인이 덜 힘들지 않았을까.

    그의 눈길이 희미한 마법 램프 불빛 아래 먼지 쌓인 책장을 훑었다. 이곳은 학원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대도서관 지하 보존고’였다. 평생 읽지도 않을 고대 서적과 금지된 마법 문서들이 잠들어 있는 곳. 학원 측의 설명으로는 ‘마법적 에너지가 불안정한 구역이라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다고 했다.

    “빌어먹을… 벌써 새벽 두 시잖아.”

    투덜거리며 마지막 낡은 책장을 닦아내던 시호의 손이 멈칫했다. 손끝에 스치는 공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여느 마법 기류와는 다른, 거친 전자기파처럼 찌릿한 불쾌감. 그는 본능적으로 손에 마력을 모아 감지 주문을 발동했다. 미약한 파동이 손바닥에서 퍼져나갔다.

    ‘…뭐지? 일반적인 마력 흐름은 아닌데.’

    책장 뒤편에서 흘러나오는 파동은 어딘가 뒤틀려 있었다. 마치 거대한 마법 에너지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며 주변 공간을 왜곡시키는 듯한 느낌. 단순히 불안정한 수준이 아니었다. 강력한 마법이 격렬하게 억눌려 있거나, 혹은 그 반대로 억지로 끌어내지고 있을 때 나타나는 현상.

    호기심과 불길한 예감이 동시에 시호를 사로잡았다. 전생의 기억이 그의 머릿속에서 경고음을 울렸다. ‘위험한 곳에는 가지 마라.’ 그러나 이세계의 새로운 피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미지의 문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책장 사이의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가자, 희미한 마력 감응이 더욱 선명해졌다. 낡은 책장 뒤로 숨겨진 벽이 나타났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완벽한 은폐 마법이 걸린 벽이었다. 시호는 손바닥을 벽에 대고 조심스럽게 마력을 흘려보냈다. 마치 퍼즐 조각을 맞추듯, 그의 마력이 벽에 스며들자 섬세한 문양이 드러났다. 학원 마크와는 전혀 다른, 기묘하게 뒤틀린 도형들.

    철컥.

    낮게 깔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낡은 금속과 돌이 마찰하는 소리였다. 그 틈으로 싸늘한 바람이 밀려왔다.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후각을 강타했다. 흙냄새, 곰팡이 냄새, 그리고… 비린 피 냄새와 녹슨 쇠 냄새가 뒤섞인 듯한 불쾌한 향.

    침을 꿀꺽 삼킨 시호는 마법 램프를 바닥에 내려놓고, 손끝에 작은 광휘를 불러냈다. 푸른빛 구슬이 그의 손바닥 위에서 일렁였다. 작은 빛에 의지해 열린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어둡고 좁은 통로였다. 학원의 깔끔하고 웅장한 복도와는 완전히 다른, 투박하게 깎인 돌벽으로 이루어진 지하 통로.

    ‘이런 곳이 학원 지하에 있었다고?’

    통로는 완만하게 아래로 이어져 있었다. 벽에는 고대 문자들이 불규칙하게 새겨져 있었다. 학원 역사 수업에서 스쳐 들었던, 지금은 거의 쓰이지 않는 금지된 마법 언어들이었다. 그 문자들이 발산하는 희미한 사악한 기운이 시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신발 밑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발밑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빛을 비추자, 시호는 숨을 들이켰다. 흙과 먼지 사이에 섞여 있는 것은 뼈 조각들이었다. 작은 동물들의 것일까, 아니면…

    어둠 속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가워지고 습해졌다. 통로의 끝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발견했다. 마력 감지 역시 폭주하듯 격렬해졌다. 마치 거대한 폭포가 떨어지듯, 압도적인 마력 에너지가 통로 끝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빛을 따라 나아가자, 통로는 거대한 지하 공간으로 이어졌다. 동굴 같은 형태였으나, 바닥과 벽은 인위적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공간의 중앙에는… 거대한 수정 기둥들이 솟아 있었다. 투명한 수정 내부에서 푸른빛과 붉은빛이 번갈아 깜빡였다.

    ‘이게… 전부 마력 결정이라고?’

    그 규모에 압도되어 한 발짝 더 다가섰을 때였다. 시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수정 기둥에 ‘박혀 있는’ 형체들이었다.

    인간의 형상이었다.

    수많은 인간의 형체가 거대한 수정 기둥 안에 갇혀 있었다. 아니, 갇혔다고 하기보다는… 마치 수정의 일부가 된 것처럼 보였다. 몸은 창백하게 시들어 있었고, 눈은 공허하게 감겨 있었다. 그들의 피부 위로는 가느다란 마력 선들이 뻗어 나와 수정 기둥과 연결되어 있었다. 수정 기둥의 깜빡이는 빛은 그들의 몸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었다.

    끔찍한 광경에 시호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이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고문이고, 착취였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마력을 강제로 뽑아내어 거대한 동력원으로 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학원의 막대한 마력과 그 웅장한 결계가 이 지하의 참극 위에서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귓가에 차가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 살려줘…

    섬뜩하리만치 희미한 목소리였다. 수정 기둥 속에 갇힌 어떤 존재가 내는 소리였다. 시호는 몸이 굳은 채로 그 목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그리고 한 수정 기둥 안에서, 창백한 얼굴의 소녀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았다. 텅 빈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시호를 똑바로 응시했다. 소녀의 입술이 미약하게 움직였다.

    — 도망쳐…

    그 순간, 거대한 지하 공간의 저편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불규칙적이지만 분명히 이쪽으로 다가오는 소리였다. 시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려 거대한 바위 뒤에 숨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울렸다. 망할,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학원 교수? 아니면 이 끔찍한 시설을 관리하는 또 다른 조직?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인물이었다. 로브 아래로 드러난 손은 기괴하게 길고 말라붙어 있었고, 그 손에는 낡은 가죽으로 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그림자는 수정 기둥들이 모여 있는 중앙으로 향했다. 로브 사이로 비치는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시호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마력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림자는 손에 든 책을 펼쳐 보이며, 나직이 읊조리기 시작했다.

    고대 마법 언어로 된 주문이었다. 시호는 그 단어들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이 끔찍한 마력 추출 의식을 시작하는 주문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수정 기둥 속의 모든 인간 형체들이 동시에 몸을 떨기 시작했다. 희미하게 파동치던 마력 선들이 맹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소녀의 텅 빈 눈동자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흘러내렸다.

    시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 로브를 입은 자에게 발견될 것이었다. 발견되지 않더라도, 이 비극을 외면하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이곳의 진실을 밝혀내야 했다.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바위 뒤에 숨어, 시호는 로브를 입은 인물이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천천히 고개를 들고, 시호가 숨어 있는 바위 쪽을 향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것을 보았다.

    마치, 그가 이곳에 숨어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