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가운 물방울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미명림 깊숙이 숨겨진 월영 폭포. 그 거대한 물줄기 뒤편에 드리워진 동굴은 세상 모든 시선으로부터 두 사람을 감춰주는 유일한 성역이었다. 물보라를 뚫고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어 동굴 내부에 몽환적인 은빛 장막을 드리웠다. 류진은 축축한 바위벽에 등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방금 전까지 이어지던 추격의 잔상이 아직도 심장을 조여왔다.

    “류진.”

    나직하고도 애달픈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눈을 뜨자, 은빛 장막 속에서 피어난 듯한 엘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영월족 특유의 백금발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반짝였고,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눈동자에는 걱정과 불안이 가득했다. 그녀의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류진은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했던 죽음의 그림자마저 잊었다.

    “엘리아.”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다가와 그의 곁에 앉았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부드러운 손길로 닦아주자, 차가운 물방울이 그녀의 체온에 녹아드는 듯했다. 그녀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희미한 월광 기운이 지쳐있던 류진의 기혈을 천천히 위로했다. 류진은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 따스하고도 부드러운 감촉이 그의 내면에 뿌리내린 불안을 잠시나마 가라앉혔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또… 또 당신의 인간 추적자들이 숲을 훑고 있었어요.” 엘리아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묻어났다. “이젠 정말 위험해요. 북천문의 감시가 예전보다 훨씬 삼엄해졌어요. 그들이 당신의 행방을 쫓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해요.”

    류진은 쓴웃음을 지었다. “북천문만 나를 쫓는 것이겠는가. 너희 영월족 역시 마찬가지겠지. 내가 이 미명림에 발을 들이는 순간, 양쪽 모두의 적이 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의 말에 엘리아의 푸른 눈동자가 더욱 깊어졌다. “알아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우리는.”

    “그렇지만 우리는 이미 꺾을 수 없는 인연으로 묶여 버렸지.” 류진이 엘리아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나는 내 종족의 수호자가 되어야 하고, 너는 너희 종족의 계승자. 세상 모든 이치가 우리의 사랑을 죄악이라 말한다. 하지만… 단 한 순간도 후회한 적 없다, 엘리아.”

    “저도 그래요, 류진.” 엘리아는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녀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달빛의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하지만 이젠 정말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숨을 곳이 점점 사라져요. 이대로라면… 언젠가는…”

    그녀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 언젠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류진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발각, 그리고 파멸. 두 종족 간의 금지된 사랑에 대한 대가는 너무나 잔혹할 것이 분명했다.

    그 순간, 동굴 깊은 곳에서 희미한 진동이 울렸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발을 굴리는 듯한 낮은 울림이었다.

    류진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소리지?”

    엘리아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강렬한 빛을 띠며 동굴의 어둠을 꿰뚫는 듯했다. “느껴져요. 강력한 기운이… 동굴 밖이 아니에요. 내부에서 진동하고 있어요.”

    “내부라고?” 류진은 당황했다. 월영 폭포 뒤편의 이 동굴은 오랫동안 두 사람만의 은밀한 장소였다. 미명림의 정기가 흐르는 이 곳은 그의 추적자들이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설령 찾았다 하더라도, 이 동굴 안까지 침투할 방도는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엘리아의 감각은 영월족 중에서도 단연 뛰어났다. 그녀가 느끼는 진동이라면 단순한 착각일 리 없었다.

    “저 안쪽이에요.” 엘리아가 동굴 깊숙한 곳, 더 이상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마치… 무언가가 깨어나려는 것 같아요.”

    진동은 점점 더 명확해지고 강렬해졌다. 동굴 바닥의 바위 조각들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류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손은 무의식중에 허리춤의 검에 닿았다.

    “이곳은 미명림의 정기가 흐르는 곳. 보통 인간의 술법으로는 감출 수 없을 만큼의 기운이 흐른다. 이곳이 노출될 리가…”

    말을 잇기도 전에, 동굴 안쪽 어둠에서 섬뜩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기운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검고 끈적한 에너지의 덩어리였다. 그 기운은 이질적이었고, 동시에 너무나도 익숙했다.

    “마령(魔靈)!” 류진의 입에서 절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인간 수련자들이 금기시하는, 혹은 사악한 술법을 익힌 자들이 만들어내는 오염된 영혼의 결정체였다. 마령은 생명체의 영혼과 미명림의 정기를 흡수하며 자라나는 존재. 이런 깊은 곳에 마령이 잠들어 있었다니. 게다가 이 정도로 강력한 기운을 내뿜는 마령이라면, 적어도 백 년 이상은 이곳에 갇혀 있었을 터였다.

    엘리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누군가가… 마령을 이곳에 봉인한 거예요. 그리고 지금, 그 봉인이 풀리려 하고 있어요.”

    진동은 이제 굉음으로 변했다. 검은 기운 덩어리에서 핏빛 안광이 번뜩였다. 마령의 형체가 서서히 일그러지며 거대한 육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끔찍하게 뒤틀린 팔다리와, 수십 개의 눈이 박힌 흉측한 머리를 가진 존재였다.

    “피해야 해요, 류진! 이 마령은 지금 막 깨어나 제정신이 아니에요. 막대한 힘을 제어하지 못하고 전부 폭주할 거예요!” 엘리아가 외쳤다.

    류진은 검을 뽑아들었다. 푸른 검광이 동굴을 가로질렀다. “봉인이 풀리려 한다면, 우리가 다시 봉인하면 된다! 이런 위험한 존재가 미명림을 활보하도록 둘 수는 없어!”

    “하지만 당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해요! 영월족의 정화의 기운 없이는 마령을 완전히 제압할 수 없어요!” 엘리아는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럼 둘이 함께하면 된다!” 류진은 결연한 눈빛으로 엘리아를 바라봤다. “우리의 사랑이 금지된 것이라면, 차라리 함께 싸우다 죽는 한이 있어도 등을 보이지 않겠다!”

    그의 말에 엘리아의 푸른 눈동자에 결의가 서렸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순수한 월광의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류진의 검에 깃든 기운과는 전혀 다른, 차갑지만 따스한, 압도적인 정화의 힘이었다.

    마령은 이미 동굴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몸집을 드러내고 있었다. 흉측한 아가리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은 촉수들이 사방으로 뻗어 나와 류진과 엘리아를 향해 덮쳐들었다.

    류진은 검을 휘둘러 촉수들을 잘라냈다. 그의 몸에서 폭풍 같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마령은 잘려나간 촉수보다 더 많은 촉수를 뿜어내며 맹렬하게 공격해왔다. 동굴의 바위들이 마령의 힘에 의해 부스러지기 시작했다.

    엘리아는 류진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월광의 기운이 류진의 기운과 섞여 마령의 검은 기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기운은 서로 다른 근원을 가졌지만, 놀랍도록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며 강력한 힘을 만들어냈다.

    “뒤를 조심해요!” 엘리아가 외침과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강력한 월광탄이 발사되어 류진의 등 뒤를 노리던 또 다른 촉수를 날려버렸다.

    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면은 내가 맡는다! 봉인을 약화시키는 데 집중해줘!”

    그는 다시 마령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검에서 푸른 용 형상의 검기가 뿜어져 나와 마령의 거대한 몸통을 강타했다. 마령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 틈을 타 엘리아는 월광의 기운을 모아 마령의 심장부로 보이는 곳에 집중적으로 쏘아보냈다. 정화의 기운이 마령의 검은 육신에 닿자, 연기가 피어오르며 살이 타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령은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두 사람을 노려봤다. 수십 개의 눈에서 핏빛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동굴 전체가 마령의 분노에 떨고 있었다.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었다. 그들의 사랑이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이제는 이 거대한 마령과 함께 파멸하거나, 아니면 이 금지된 힘을 제압해야만 했다.

    류진과 엘리아는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그 시선 속에는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함께, 다가올 운명에 대한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었다. 그들은 손을 잡고, 하나가 된 기운으로 마령을 향해 마지막 일격을 준비했다.

    바깥에서는 이미 수많은 기척들이 월영 폭포를 에워싸고 있었다. 인간 수련자들의 강력한 영력과 영월족 전사들의 날카로운 기세가 뒤섞여, 폭포 주변의 공기를 차갑게 얼어붙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은밀한 안식처는, 이제 더 이상 숨겨진 곳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 동굴 안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싸움을 알지 못했다.
    동시에, 봉인이 풀려난 고대의 마령과 함께, 금지된 사랑을 지키려는 두 존재의 처절한 투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과연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니면,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 짓밟히고 말 것인가?
    점점 더 강렬해지는 월광과 검광이, 동굴 밖의 차가운 시선들을 알지 못한 채, 마령의 검은 그림자를 가르고 있었다.

  • 스팀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칙칙한 습기 속에 쇠와 기름 냄새가 뒤섞인 공방 안, 강율은 낡은 작업등 아래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정교하게 깎인 황동 부품이 들려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그 너머의 공허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끝에 박힌 굳은살과 긁힌 상처들은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새워가며 기계와 씨름한 흔적이었다. 그러나 그 노력의 결과는 늘 허무함과 절망으로 귀결되곤 했다.

    “크윽… 또다시, 또다시 실패인가.”

    그가 중얼거렸다. 목소리는 쉬어 있었고, 마른 기침이 뒤따랐다. 차가운 쇠의 감촉이 손바닥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거친 톱니바퀴와 닳아빠진 용수철들이 널브러진 작업대 위로, 불완전하게 조립된 기계 뼈대 하나가 불안하게 서 있었다. 증기가 새는 밸브, 삐걱거리는 피스톤… 모든 것이 그를 비웃는 듯했다.

    강율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다. 그 안에는 고된 작업의 피로와 함께, 지워지지 않는 앙금, 그리고 끓어오르는 증오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공방의 구석에 세워져 있는, 먼지 쌓인 그림 같은 것을 응시했다. 젊은 시절의 자신과,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의 청년. 둘은 어깨동무를 하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 강율. 이제 세상이 우리를 주목할 거야!”*

    활짝 웃던 하진의 얼굴이,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와 함께 밤낮없이 연구하며 꿈을 키웠던 날들. 스팀과 기계음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인류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것이라 믿었던 ‘시간 역행 증기 기관’의 청사진을 그리던 순간들. 세상의 모든 불평등과 불합리를 기계의 힘으로 부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순수한 열정으로 가득했던 나날들.

    그리고… 그날 밤.

    *“정말 놀랍군. 이런 걸 혼자서 만들어냈다니, 자네는 정말 천재야!”*

    귀족 복장의 뚱뚱한 후원자가 하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하진은 그 옆에서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요, 각하. 미천한 재능이지만, 이 시대에 도움이 되고자 했을 뿐입니다.”*

    강율은 그림자 속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차가운 칼날이 심장을 후벼 파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혼자서’? ‘미천한 재능’? 그것은 명백히 자신과 하진, 두 사람이 수년 간 머리를 맞대고 고뇌하며 만들어낸 결실이었다. 밤샘 연구로 손은 늘 기름때에 절어 있었고, 수없이 많은 실패 속에서 좌절했지만, 서로를 격려하며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하진은 그 모든 공로를 혼자 독식하고 있었다.

    강율은 뛰쳐나가 모든 것을 폭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은 굳게 다물려 움직이지 않았다. 공로를 가로챈 것은 둘째 치고, 하진은 이미 강율의 모든 설계도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해 놓은 뒤였다. 그를 제거하는 것쯤은, 하진의 계산에서는 너무나 쉬운 일이었으리라. 하진은 이미 그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그의 아이디어, 그의 노력, 그리고 가장 소중했던 그의 ‘친구’라는 믿음까지.

    결국 강율은 그 자리를 떠났다. 아무도 모르게, 마치 유령처럼. 그리고 그날 이후, 그의 세계는 빛을 잃었다. 모든 것이 회색빛으로 변했고, 그의 심장 속에는 오직 차가운 복수심만이 자리 잡았다.

    “그래, 그날은 시작에 불과했지.”

    강율은 픽 웃었다. 웃음소리는 처절했다.

    “네놈이 내 이름을 지우고, 내 영혼을 찢어발겼던 그날 말이야. 난 그때 죽었다. 하지만 새로운 내가 태어났지. 오직 너를 위해,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는 다시 작업대로 돌아와 낡은 천을 걷어냈다. 그 아래에는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어떤 것과도 다른, 기묘하고도 위협적인 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있었고, 구리선들이 복잡하게 얽혀 거대한 뇌처럼 보였다. 핵심에는 검붉은 빛을 내는 수정이 박혀 있었는데,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주기적으로 깜빡였다. ‘시간 역행 증기 기관’의 원리를 역으로 이용한, 파괴를 위한 장치였다.

    강율은 더 이상 세상에 도움이 되는 발명품을 만들지 않았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모든 것은 오직 한 가지 목적만을 가지고 있었다. 복수. 하진이 강율의 아이디어를 훔쳐 성공시킨 ‘하진 동력 기업’이 최근 야심 차게 선보일 예정인 초대형 비행선, ‘창공의 왕관’을 타깃으로 한 병기였다.

    “네가 ‘창공의 왕관’을 띄워 올리고, 그 속에서 환호성을 들을 때… 나는 네놈의 모든 영광을 박살 내줄 것이다.”

    그의 눈빛이 마치 용광로 속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그는 기계의 한 부품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엄지손톱만 한 크기의 이 부품은 너무나 작았지만, 전체 장치의 핵심이자 가장 정교한 부분이었다. 미세한 스프링이 꿈틀거리고, 보이지 않는 톱니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이 작은 조각 하나가 없으면,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될 터였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부품을 기계의 빈 공간에 끼워 넣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부품이 완벽하게 결합되었다. 검붉은 수정의 깜빡임이 한층 더 빠르고 강렬해졌다. 기계 전체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이제 시작이다, 하진.”

    강율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고통과 피로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결의는 그 어떤 강철보다도 단단했다.

    “네놈이 내 삶을 파괴했듯이, 나도 네놈의 모든 것을 파괴해 줄 테니.”

    그는 작업대 위에 놓인 낡은 지도를 펼쳤다.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창공의 왕관’이 출항할 예정인 대규모 비행선 발착장이 붉은색 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이 복수의 기계를 심을 만한 최적의 지점들이 촘촘하게 표시되어 있었다.

    이제, 더 이상 돌아갈 길은 없었다. 복수의 칼날은 이미 벼려졌고, 그 날카로움은 하진의 심장을 향해 있었다. 어둡고 스팀 냄새 가득한 공방에, 강렬한 기계음과 함께 복수의 서막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 이세계 전생 (Isekai) 독립적인 단편 소설

    햇살 한 줄기 들지 않는 고탑의 서재, 그 밀폐된 공간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을 때, 이계의 명탐정 류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싸늘한 눈으로 사건 현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회색 눈의 현자’라는 별명이 붙어 있었다. 이세계로 넘어와 전생의 지식을 잃지 않은 그는, 마법과 신비가 지배하는 이곳에서 오직 논리와 이성만을 무기로 삼아 수많은 기이한 사건들을 해결해왔다.

    이번 사건은 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다.

    피해자는 유명한 연금술사이자 희귀 마법 유물 수집가인 이졸데 남작부인이었다. 그녀는 평소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서재 보안에 신경을 썼다. 문은 안에서 잠그는 고대 룬 문양 자물쇠로 잠겨 있었고, 외부 침입을 막는 강력한 마법 방벽까지 쳐져 있었다. 창문은 두꺼운 철창으로 막혀 있었고 역시 마법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밀실’이었다.

    류진이 서재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문 주위에는 옅은 그을음 자국이 선명했다. 남작부인이 아침 식사에 나타나지 않자 시종들이 찾아왔고, 마침내 경비병들이 마법 방벽을 억지로 깨고 룬 문양 자물쇠를 부숴 안으로 진입했다는 증거였다.

    “회색 눈의 현자님, 어서 오십시오.”

    젊은 기사 카일이 류진을 맞았다. 카일은 이제 막 기사가 된 햇병아리였지만, 류진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그의 추리를 경외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의 푸른 눈에는 걱정과 혼란이 가득했다.

    “상황은 들었습니다, 카일 경. 밀실 살인, 게다가 마법 방벽까지 뚫고 들어갔다고요?” 류진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었다.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 룬 문양 자물쇠는 물론이고 마법 방벽도 여전히 작동 중이었습니다. 저희가 방벽을 깼고, 자물쇠를 부쉈습니다. 이졸데 남작부인께서는 매일 밤 직접 방벽을 활성화하고 문을 잠그셨다고 합니다.”

    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종이 냄새와 오래된 마법 약초 향이 뒤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넓은 서재는 책과 마법 도구, 희귀한 유물들로 가득했다. 한쪽 벽난로는 먼지가 쌓여 있었고, 그 옆으로는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책장이 버티고 있었다.

    시신은 책상에 엎드린 채였다. 등에는 화려하게 세공된 단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칼자루에는 낯선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남작부인의 손에는 서재 문을 여는 데 사용되는 룬 문양 열쇠가 꽉 쥐어져 있었다.

    “사망 시각은 대략 새벽 2시경으로 추정됩니다. 단도로 인한 치명상이고요.” 카일이 침통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무도 안으로 들어오거나 나갈 수 없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류진은 아무 말 없이 시신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그의 회색 눈동자가 서재 구석구석을 훑었다. 핏자국이 묻은 돋보기를 들어 시신의 손에 쥐어진 열쇠를 살폈다.

    “이 열쇠는… 남작부인이 스스로 문을 잠그고 쥐고 있었던 것이 확실합니까?” 류진이 물었다.

    “네, 그렇다고 합니다. 남작부인은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항상 열쇠를 몸에 지니고 주무셨다고 합니다. 아마 살해당한 후에도 열쇠를 꽉 쥐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류진은 열쇠를 놓았다. 그의 시선은 책상 위로 향했다. 보통 그 자리에는 남작부인이 아끼던 ‘루미너스 오브’라는 마법 유물이 놓여 있었지만, 지금은 비어 있었다. 루미너스 오브는 작은 물체를 정교하게 공중에 띄우거나 이동시키는 능력을 가진 마법 수정구였다.

    “루미너스 오브는 어디 있습니까?” 류진이 물었다.

    “사라졌습니다. 도난당한 것 같습니다.” 카일이 답했다.

    류진은 다시 서재의 문으로 다가갔다. 자물쇠는 부서져 있었지만, 문짝 자체에는 큰 손상이 없었다. 그는 문설주에 남아있는 마법 방벽의 그을음 자국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카일 경, 경비병들이 마법 방벽을 깼다고 했죠? 그때 마법의 에너지는 어느 방향으로 폭발했습니까? 안에서 밖으로? 아니면 밖에서 안으로?”

    카일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밖으로, 저희 쪽으로 터져 나왔습니다. 꽤 강력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렇군요.” 류진의 입가에 미세한 미소가 번졌다. “방벽은 안에서 활성화되었고, 우리가 문을 열려고 시도했을 때까지도 여전히 작동 중이었으며, 그 에너지는 외부로 분출되었다… 이 모든 것은 살인자가 아직 이 방 안에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카일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현자님, 그건 말이 안 됩니다. 살인자는 문을 열고 나갔을 텐데요. 문을 열었다면 방벽은 해제되었어야 합니다.”

    “아니요, 카일 경. 살인자는 이 방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류진은 손가락으로 문 주변을 가리켰다. “여기 그을음 자국을 보십시오. 방벽은 문 전체를 봉인하는 것이 아니라, 문 주위에 얇은 막처럼 쳐져 있었습니다. 이 막은 물리적 충격을 막는 동시에, 특정한 방식으로 해제되지 않는 한 마법 에너지를 방출하여 침입자를 막습니다. 우리가 깬 방벽은 ‘외부 침입’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입니다.”

    “그럼 살인자는 어디서….”

    “살인자는 이 방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말이죠. 그리고 떠난 후에 다시 방을 밀실로 만들었습니다.”

    류진은 다시 시신에게 다가갔다. 그의 시선은 단도를 스쳐 지나 열쇠에 멈췄다. “남작부인이 열쇠를 꽉 쥐고 있었다고 했지만, 제 눈에는 오히려 열쇠가 손에 ‘들려져’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후경직이 일어난 후에 누군가 이 열쇠를 쥐여준 듯한 인상입니다. 그리고 이 룬 문양 자물쇠를 보십시오.”

    류진은 부서진 자물쇠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 자물쇠는 겉으로는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 하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열쇠 구멍입니다.”

    카일이 열쇠 구멍을 들여다보았지만, 특별한 점을 찾지 못했다.

    “이 자물쇠는 룬 문양 열쇠를 사용하여 걸쇠를 잠그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 열쇠 구멍은 아주 가늘고 긴 실이나 철사도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한 틈이 있습니다. 살인자는 이졸데 남작부인을 살해한 후, 열쇠를 가져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문을 닫았겠죠. 남작부인이 활성화했던 마법 방벽은 여전히 문 주위에 남아 외부의 침입을 막으려 했을 겁니다.”

    류진은 다시 문 주위의 그을음 자국을 가리켰다. “우리가 방벽을 깼을 때 에너지가 밖으로 분출된 것은, 마법 방벽이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감지하고 반응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살인자는 이미 밖으로 나간 뒤였죠.”

    “하지만 어떻게 다시 문을 잠그고 열쇠를 안으로 돌려보냈단 말입니까? 게다가 열쇠를 남작부인의 손에 쥐여주기까지?” 카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바로 여기에 ‘루미너스 오브’가 사용된 겁니다.” 류진이 사라진 오브의 자리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살인자는 남작부인의 루미너스 오브를 훔쳤습니다. 루미너스 오브는 작은 물체를 정교하게 조작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죠. 살인자는 문밖에서 루미너스 오브를 사용해 열쇠를 열쇠 구멍으로 다시 밀어 넣었고, 쓰러진 남작부인의 손에 교묘하게 놓아두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가늘고 튼튼한 실을 열쇠 구멍으로 넣어 안쪽의 걸쇠를 조작해 문을 다시 잠갔습니다. 마법에 저항성이 있는 마수의 비단실 같은 것이었겠죠.”

    류진은 허리를 숙여 열쇠 구멍 안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열쇠 구멍 안쪽에 아주 미세하고 희미한 실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겠지만, 이 정도로 정교하게 걸쇠를 조작하려면 반복적인 마찰이 있었을 겁니다.”

    카일은 경악에 찬 표정으로 열쇠 구멍과 류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살인자는 남작부인을 죽인 후, 방벽이 여전히 활성화된 채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방벽은 오직 외부 침입을 감지할 뿐, 내부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에는 반응하지 않도록 설정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문밖에서 루미너스 오브와 실을 이용해 다시 문을 잠그고 열쇠를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마법 방벽은… 우리가 침입자로 간주될 때까지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루미너스 오브의 사용법을 잘 알고, 룬 문양 자물쇠의 약점을 꿰뚫고 있으며, 남작부인의 서재 구조와 보안 체계까지 상세히 아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류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루미너스 오브가 없어진 사실을 다른 이들이 알기 전에 범행을 완료해야 했겠죠. 남작부인이 매일 밤 잠자리에 들 때 서재 문을 잠그는 습관을 이용한 겁니다. 살인자는 이미 그녀의 생활 패턴을 모두 꿰고 있었습니다.”

    류진은 서재 입구를 바라보았다. “이 집안에 남작부인의 일상생활과 서재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루미너스 오브를 탐낼 만한 인물… 그리고 이 졸데 남작부인 사망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자가 범인이겠죠.”

    카일은 고개를 숙였다. 류진의 추리에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마법으로 단단히 봉인된 밀실도, 논리의 칼날 앞에서는 종잇장처럼 무력했다. 이계의 명탐정 류진은 다시 한번, 마법의 세계에서 이성의 빛을 증명해 보였다. 이제 남은 것은 카일이 그의 추리를 토대로 범인을 찾아내는 일뿐이었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에테르 마법학원: 낡은 시간의 그림자 (1화)

    **[장면 1: 에테르 마법학원 대도서관, 밤]**

    **#1.1**
    (차분한 조명 아래, 고풍스러운 목재 책장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최상층부 창문 너머로는 별들이 쏟아지는 밤하늘이 보인다. 책상에 앉아 두꺼운 고서를 뒤적이는 학생, **류진(Ryu Jin)**의 모습. 그의 옆에는 마법으로 띄워진 조명구 하나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다. 류진은 다른 학생들처럼 교복을 단정하게 입기보다는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소매를 걷어붙인 채, 어딘가 초연해 보이는 분위기를 풍긴다.)

    **류진 (내레이션):**
    에테르 마법학원.
    이름만 들어도 마법사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지상 최고의 교육기관.
    하지만 나는 가끔 이 완벽함이 조금 섬뜩하게 느껴진다.
    너무나 정교하게 짜인 거미줄 같다고 해야 할까.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막대한 마력의 원천.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사실이, 때로는 나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1.2**
    (류진의 손이 낡은 양피지 책장을 넘긴다.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일렁인다. 그는 마치 시간의 파동을 읽는 듯, 눈을 감고 집중한다. 주변의 고요함 속에서 아주 미세한, 무언가 긁히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삐익- 즈읏- 마치 낡은 시계 태엽이 돌아가는 소리 같기도 하다.)

    **류진 (내레이션):**
    나는 어릴 때부터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시간의 잔향’을 느꼈다.
    과거의 옅은 흔적, 미래의 희미한 그림자.
    학원 전체를 감싸고 있는 웅장한 시간 마법의 흐름 속에서,
    때때로 나는 불협화음을 듣는다.
    뒤틀리고, 엉키고, 절규하는… 그런 소리들.

    **#1.3**
    (류진이 특정 페이지에서 멈춘다. 고대 문자로 쓰인 난해한 시간 마법 공식과 함께, 기이한 장치의 도면이 그려져 있다. 그 도면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장치의 중심부에는 거대한 수정이 박혀 있고, 그 수정 속에서 인간의 형상이 희미하게 비치는 듯한 불길한 그림이 함께 있다. 그림 옆에는 고어로 쓰인 짧은 문장이 적혀 있다.)

    **류진:**
    “…빌린 시간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그 문장을 중얼거리자, 책에서 차가운 기운이 확 풍겨져 나온다. 류진은 본능적으로 손을 뗀다. 책장 전체가 순간적으로 아득한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찰나의 순간, 책장 너머의 공간이 일렁이며, 누군가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아주 짧게, 하지만 선명하게 들리는 듯했다.)

    **류진 (속삭임):**
    …또다시.

    **[장면 2: 학원 복도 및 식당]**

    **#2.1**
    (다음 날 아침, 학생들로 북적이는 학원 복도. 활기찬 대화 소리와 마법 주문 소리가 뒤섞여 있다. 류진은 무심한 표정으로 복도를 걷고 있다. 그의 옆으로 친구인 **렌(Len)**이 다가온다. 렌은 밝고 사교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렌:**
    어이, 류진! 또 밤새 도서관에서 고서만 파다 온 얼굴이군.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왔다, 친구.
    (렌이 류진의 어깨를 툭 친다.)

    **류진:**
    …렌. 난 그저 호기심이 많을 뿐이야. 너처럼 겉핥기식으로 마법을 즐기는 것보단, 근원을 탐구하는 게 내 취향이거든.
    (류진이 렌을 힐긋 보며 퉁명스럽게 말한다.)

    **렌:**
    하! 그렇게 말하면 내가 섭하지! 그래, 그래서 어제는 또 뭘 발견했는데? 영겁의 시간 마법으로 만든 고대 유적에서 잃어버린 지팡이라도 찾았나?

    **류진:**
    …아직은.
    (류진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진다. 그는 어제 들었던 비명 소리를 떠올린다.)
    …그것보다, 어제… 아리스를 본 사람 있어?
    (류진이 무심한 듯 묻는다. 아리스는 늘 밝고 명랑한 후배 학생이었다.)

    **렌:**
    아리스? 아아, 그 활달한 녀석 말인가?
    (렌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어제 교무실에서 봤는데… 표정이 안 좋더라고. 뭐, 또 사고라도 쳤나 보지. 그 녀석은 워낙 엉뚱해서.
    (렌은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하지만 류진의 표정은 미묘하게 굳어진다.)

    **류진 (내레이션):**
    아리스가 ‘사고’를 쳤다고? 그녀는 늘 규율을 잘 지키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제 아리스가 있던 자리에, 그녀의 ‘시간의 흔적’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마치… 그 공간에서 억지로 도려내진 것처럼.

    **#2.2**
    (점심시간, 북적이는 학원 식당.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하고 있다. 류진은 렌과 함께 구석 자리에 앉아있다. 류진은 주변을 둘러본다. 아리스의 얼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평소 같으면 시끌벅적하게 웃으며 친구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을 그녀인데.)

    **류진:**
    아리스가 어제 이후로 보이지 않아.
    (류진이 샌드위치를 깨작이며 중얼거린다.)

    **렌:**
    아, 그거 말이지.
    (렌이 태블릿을 스크롤하다가 류진에게 내민다. 학원 공식 공지사항 페이지이다. 거기에는 아리스의 이름과 함께 ‘학칙 위반으로 인한 영구 제명’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렌:**
    방금 떴네. 공식 발표라는데? 하긴, 아리스가 워낙 재능이 특출해서 선배들이 질투했나… 아니면 정말 뭔가 엄청난 일을 벌였나 보지.
    (렌은 별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류진 (내레이션):**
    학칙 위반으로 영구 제명?
    그녀는 그런 일을 저지를 아이가 아니다.
    그리고… 제명된 학생에게는 학원에서 마법적으로 흔적을 지우는 ‘기억 삭제 마법’을 사용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것은 ‘삭제’가 아니었다.
    그녀의 시간 그 자체가, 학원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뽑혀 나간 듯한…
    그런 강렬한 단절감.

    **류진:**
    이건 뭔가 이상해.
    (류진이 렌의 태블릿을 노려보며 말한다.)

    **렌:**
    뭐가? 늘 있던 일이잖아. 학원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만 남는 곳이라고.
    (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마저 식사를 한다. 주변 학생들도 공지사항을 확인하는 듯했지만, 금세 다시 자기들만의 수다에 빠져든다. 마치 이런 일은 흔하다는 듯이.)

    **[장면 3: 학원 지하 연구동 입구]**

    **#3.1**
    (밤. 류진은 인적이 드문 학원 지하 복도를 걷고 있다. 복도의 끝에는 거대한 철문이 굳게 닫혀 있다. 낡고 녹슨 철문 위에는 고대 문자로 ‘시간의 봉인’이라는 경고문이 새겨져 있고, 주변에는 강력한 마법 방어막이 쳐져 있다. 이곳은 오래전 폐쇄된 ‘옛 시간 마법 연구동’으로, 학원 내에서도 금기시되는 장소다.)

    **류진 (내레이션):**
    공식적으로 이곳은 수십 년 전, 마법 실험 사고로 폐쇄된 곳이다.
    하지만 내가 어제 도서관에서 본 책.
    그리고 아리스의 사라진 시간의 잔향.
    모든 것이 이 장소로 향하고 있다.

    **#3.2**
    (류진이 철문 앞에 선다. 그는 손을 들어 철문에 대고 눈을 감는다.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 그의 손끝에서 푸른 마력이 뿜어져 나오며 철문 주변의 마법 방어막에 닿는다. 방어막이 순간적으로 격렬하게 반응하며 푸른 불꽃을 튀긴다.)

    **류진:**
    (이를 악문 채 집중한다.)
    …단순한 방어막이 아니군. 시간을 뒤트는 마법진이… 중첩되어 있어.
    (그의 능력은 시간의 흐름을 읽는 것을 넘어, 아주 미세하게 뒤트는 것도 가능했다. 그는 방어막을 뚫는 대신, 그 마법진의 ‘시간’을 아주 잠깐 느리게 만드는 편법을 쓴다.)

    **#3.3**
    (콰아앙-! 하는 소리와 함께 방어막이 일시적으로 해제된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류진은 철문을 연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오랜 세월의 먼지가 쏟아져 나온다. 내부에서 섬뜩한 냉기가 뿜어져 나온다.)

    **류진 (내레이션):**
    이곳은… 시간이 멈춘 곳 같았다.
    공기가 끈적하고 무거웠다.
    그리고… 온몸으로 느껴지는 불길한 예감.

    **[장면 4: 옛 시간 마법 연구동 지하 깊숙한 곳]**

    **#4.1**
    (철문 너머의 어둠 속으로 류진은 마법 조명구를 띄우며 들어선다. 좁고 습한 통로가 이어진다. 벽에는 낡은 마법 도구들과 실험 장치들이 잔뜩 쌓여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바닥에는 알 수 없는 액체가 말라붙은 흔적들이 널려 있다.)

    **류진:**
    (움찔거리며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한다.)
    …이건…
    (벽에 걸린 칠판에는 알 수 없는 공식들이 뒤죽박죽 쓰여 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낡은 사진 한 장이 벽에 박혀 있다. 사진 속에는 활짝 웃는 아리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사진을 보자, 류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 장소는… 아리스와 연관이 있다.)

    **류진 (내레이션):**
    어딘가 섬뜩한… 기시감.
    사진은 그녀가 학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왜 이곳에…

    **#4.2**
    (통로가 끝나는 곳, 류진은 거대한 나선형 계단 앞에 선다. 계단은 어둠 속으로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계단 아래에서 희미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마치 고대 심장이 뛰는 소리 같기도, 혹은 거대한 기계가 움직이는 소리 같기도 했다. 류진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간다.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어딘가 차갑고 축축한 기운이 발목을 휘감는 듯하다.)

    **류진 (내레이션):**
    점점 더 깊이.
    점점 더 차갑게.
    이곳은… 학원의 지하가 아니라, 마치 세상의 바닥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웅웅거리는 소리는… 내 심장 소리를 닮아가는 듯했다.
    두려움으로 고동치는, 나의 심장 소리.

    **#4.3**
    (마침내 계단의 끝에 도달한다. 류진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충격적이었다. 거대한 지하 공동. 그 공동의 중앙에는 압도적인 크기의 푸른빛 수정이 우뚝 서 있다. 수정은 끊임없이 섬광을 터뜨리며 강력한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도서관에서 봤던 도면 속 장치와 흡사했다. 아니, 그 도면 자체가 이 장치를 묘사한 것이었다.)

    **류진:**
    …이게… 대체…
    (류진의 눈이 크게 뜨인다. 수정 주변에는 복잡한 마법진이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었고, 그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에너지가 수정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4.4**
    (수정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본 류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다. 수정 안에는 무언가 희미한 형상들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마치 수많은 유령들이 수정 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그 형상들은 끊임없이 비명을 지르는 듯 몸부림쳤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는 그림자들.)

    **류진 (내레이션):**
    저것은… 시간의 잔영이 아니었다.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가 갇힌 곳이었다.
    수많은 생명의 시간 자체가… 저 수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4.5**
    (류진의 시선이 한 형상에 꽂힌다. 다른 형상들보다 유독 선명하게 빛나는, 익숙한 푸른색 머리카락. 그리고 머리 한쪽에 박힌, 작은 은색 머리핀. 그것은 아리스가 늘 착용하던 것이었다.)

    **류진:**
    아… 아리스…?
    (류진의 입술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수정 속의 아리스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흐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점점 희미해지며 수정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중이었다.)

    **아리스 (목소리, 희미하게, 류진의 머릿속에 울린다):**
    …도와… 줘…
    (아리스의 목소리가 류진의 뇌리를 강타한다. 그것은 단순한 환청이 아니었다. 그녀의 ‘시간’이 절규하는 소리였다. 이 수정은… 사라진 학생들의 시간과 생명력을 흡수하여 학원을 지탱하는, 끔찍한 금기였던 것이다.)

    **류진 (내레이션):**
    이곳은 영원한 시간의 감옥.
    에테르 마법학원의 빛나는 마력은…
    바로 이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지상의 낙원이 감추고 있던, 지옥보다 더 끔찍한 진실.

    **#4.6**
    (그 순간, 거대한 수정에서 맹렬한 섬광이 터져 나온다. 콰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지반이 격렬하게 흔들린다. 류진은 충격파에 몸을 휘청거리며 뒤로 넘어진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 로브를 깊이 눌러쓴 한 인물. 그의 모습은 섬뜩할 정도로 침착하고 위압적이었다. 그의 손끝에서는 푸른 마력이 이글거린다.)

    **???:**
    감히… 이곳을 침범하다니.
    (깊고 차가운 목소리가 지하 공동에 낮게 울려 퍼진다. 그 목소리에는 분노보다는, 오히려 실망과 짜증이 섞여 있는 듯했다. 류진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학원의 누군가, 어쩌면… 학원의 수뇌부 중 한 명일지도 모른다.)

    **류진 (내레이션):**
    들켰다.
    내가 밝혀낸 진실은, 이제 나를 파멸로 이끌 것이다.
    하지만… 물러설 수 없다.
    아리스…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들의 절규가,
    내 시간 속에 분명히 울리고 있으니까.

    **[에피소드 종료]**

  • 마법소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세계는 회색빛이었다. 한때 푸르렀던 숲은 바싹 마른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하늘을 긁고 있었고, 맑은 강물은 핏빛 탁류로 변해 느릿하게 흘렀다. 그마저도 이제는 찾기 힘든 광경이었다. 대부분의 땅은 메마른 균열로 갈라져 있었고, 바람이 불 때마다 잊혀진 도시의 잔해에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숨 쉬는 것조차 사치인 세상이었다.

    유나는 익숙하게 폐허가 된 건물 더미 사이를 헤치고 나아갔다. 낡은 방독면이 그녀의 거친 숨소리를 위태롭게 걸러냈다. 며칠째 식량은 바닥났고, 물도 간당간당했다. 어딘가에서 버려진 통조림 캔 하나라도 찾아야 했다. 아니면… 저녁에 저 멀리서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향해 움직여야 할까. 불빛은 희망일 수도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위험의 신호일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이미 수없이 많은 희망을 좇다 절망과 마주했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어.”
    나지막한 탄식이 방독면 안에서 울렸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녹슨 쇠막대는 이미 수많은 ‘뒤틀린 그림자’와 사투를 벌이며 휘어지고 닳아 있었다. 몸 여기저기에 오래된 상처 자국과 새로 생긴 멍들이 가득했지만, 아픈 것도 사치인 세상이었다. 이 끝없는 생존 속에서, 아픔은 그저 살아있다는 증명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귓가를 스치는 기분 나쁜 소리. 평소와 다른 이질적인 공기의 흐름. 유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수없이 많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얻은 동물적인 감각이었다.
    “크아아악!”
    뒤틀린 그림자 중에서도 유독 덩치가 크고 사나워 보이는 녀석이었다. 짓뭉개진 살덩어리와 뾰족하게 솟아난 뼈들이 뒤섞인 흉측한 외형. 녀석의 입에서는 녹색의 침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마치… 이 폐허 속에 던져진 악몽 그 자체 같았다.

    유나는 녀석이 휘두른 거대한 팔을 간신히 피하며 뒤로 물러섰다.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그녀의 발아래서 부스러졌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저 덩치를 상대하기 어렵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수정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수정에서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느껴졌다.

    “희망의 빛, 나를 비추어라!”
    그녀의 목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펜던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유나의 몸을 감쌌다. 낡은 방독면과 찢어진 옷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하늘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전투복으로 변했다. 머리에는 작은 날개 장식이 달린 머리띠가, 손에는 빛을 머금은 장갑이 끼워졌다. 빛나는 지팡이가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섬광의 소녀, 유나 강림!”
    변신은 그녀에게 일시적인 힘과 속도를 부여했지만, 동시에 마력 소모라는 부담을 안겨주었다. 너무 오래 싸울 수는 없었다. 이 힘은 그녀의 생명을 갉아먹는 칼날과도 같았다.

    “크아아악!”
    뒤틀린 그림자가 다시 돌진해왔다. 유나는 몸을 날렵하게 움직여 녀석의 덩치 아래로 파고들었다. 지팡이 끝에서 푸른 빛이 번개처럼 뻗어나가 녀석의 다리를 강타했다. ‘찌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괴물의 살덩이가 움푹 패였지만, 녀석은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더욱 격렬하게 발버둥 쳤다.

    “이 빌어먹을!”
    유나는 지팡이를 휘둘러 빛의 방패를 만들어냈지만, 괴물의 맹렬한 공격에 방패는 금세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다. 이곳에는 아무도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홀로 싸워왔다.

    녀석의 약점은 어디지? 유나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폐허가 된 건물 잔해, 무너진 철근,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아직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송전탑의 기둥.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크으으윽!”
    괴물이 다시 한번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유나는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몸을 날렸다. 그녀의 목표는 괴물의 등 뒤, 척추가 불거져 나온 곳이었다. 그곳에 약한 빛이 미세하게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분명, 저곳이다.

    “라이트닝 스파크!”
    지팡이 끝에서 강력한 전류가 뿜어져 나와 괴물의 등에 박혔다. ‘파지직!’ 소리와 함께 괴물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하지만 아직 부족했다.

    유나는 지팡이를 땅에 박고, 온몸의 마력을 끌어모았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더욱 빛나기 시작했다. 전투복에 새겨진 문양들이 옅은 빛을 발했다.
    “끝장을 내주지! 샤이닝 볼트!”
    지팡이 끝에 거대한 에너지 구체가 형성되었다. 푸른빛과 흰빛이 뒤섞이며 마치 작은 태양처럼 빛났다. 괴물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유나에게 달려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유나는 모든 힘을 실어 에너지 구체를 발사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괴물의 몸이 산산조각 났다. 녹색 피와 살덩이가 폐허 곳곳에 흩뿌려졌다. 진동이 주변 건물을 흔들었고,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유나는 숨을 헐떡이며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몸에서 빛이 서서히 사그라지며 다시 낡은 옷차림으로 돌아왔다. 마력 고갈로 인해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다리가 후들거려 간신히 무릎을 꿇었다.
    “젠장… 오늘도 이 모양이네.”
    그녀는 손등으로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괴물의 잔해는 잠시 후 검은 재로 변해 바람에 흩어졌다.

    폐허는 다시 정적에 잠겼다. 하지만 이 정적은 언제든 깨질 수 있는 불안한 평화에 불과했다. 유나는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비록 작은 승리였지만, 이 순간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때였다. 괴물이 쓰러진 자리, 검은 재가 흩어진 곳에 무언가 빛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유나는 주저앉은 다리를 이끌고 다가갔다. 그곳에는… 붉은색 보석이 박힌, 낡은 로켓 펜던트가 떨어져 있었다. 펜던트의 한쪽은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지만, 중앙의 보석은 여전히 희미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건…?”
    그녀는 조심스럽게 펜던트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왠지 모를 익숙함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이 폐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혹시… 다른 생존자의 흔적일까? 아니면, 괴물이 삼켰던 것 중 하나일까?

    펜던트의 뒷면에는 희미하게 새겨진 문양이 있었다. 십자가처럼 보였지만, 그보다는 더 복잡하고 오래된 상징이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성소.’
    유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글자를 해독하려 노력했다. ‘…잃어버린 성소로 향하라.’
    성소? 이 폐허에 그런 곳이 남아있단 말인가? 그녀의 기억 속에는 그런 이름은 없었다.

    그 순간, 멀리서 쩌렁쩌렁 울리는 굉음이 들려왔다. 단순한 괴물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강력한 마력의 파동이었다. 유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녀는 펜던트를 꽉 움켜쥐었다. ‘성소’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 미지의 장소가 단서가 될까? 아니면, 또 다른 죽음의 함정일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굉음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유나는 돌아섰다. 그녀의 눈은 이미 저 멀리, 굉음이 들려오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젠장… 또 시작이네.”
    지친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결코 꺾이지 않는 작은 불씨가 타오르고 있었다. 이 황폐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녀의 싸움은 오늘도 계속되었다.

  • 이세계 전생 (Isekai)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Chapter 1: 피날레와 프롤로그**

    김민준은 늘 바랐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 숨 막히는 빌딩 숲, 매일 똑같이 삐걱거리는 키보드 소리, 그리고 영혼 없이 오가는 상사의 잔소리. 서른 해 남짓 살아온 인생이 이리도 밋밋할 수 있나 싶을 정도로, 그의 삶은 아무런 특별함도, 기적도 없었다. 그저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만이 유일한 성취였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야근을 마치고 터덜터덜 지하철역으로 향하던 길. 횡단보도의 초록불은 그의 지친 발걸음만큼이나 느리게 깜빡였다. ‘오늘은 또 라면인가… 아니면 어제 남은 치킨 조각이라도?’ 무미건조한 저녁 식사 메뉴를 고민하던 찰나였다.

    “크아아아악!”

    귓전을 때리는 섬뜩한 비명 소리, 그리고 거대한 굉음. 민준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십여 미터 떨어진 도로 위에서, 거대한 트럭 한 대가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휘청이고 있었다. 그 트럭은 중심을 잃고 횡단보도를 향해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퇴근길, 눈 깜짝할 사이에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피해요!”

    누군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트럭은 끔찍한 속도로 인파를 덮치고 있었다. 그 순간, 민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넘어지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작은 아이였다. 아이는 트럭의 궤적 바로 한가운데서 옴짝달싹 못 하고 있었다.

    생각할 틈도 없었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비켜!”

    민준은 있는 힘껏 달려 아이를 밀쳐냈다. 아이는 몇 발자국 굴러 떨어진 곳에서 멀뚱멀뚱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세상은 엄청난 충격과 함께 암전되었다. 고통조차 느낄 새가 없었다. 그저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격렬한 진동만이 마지막 감각으로 남아있었다.

    그래, 김민준의 삶은 그렇게 끝났다. 마지막 순간조차 특별할 것 없던,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희생이었다.

    * * *

    “크윽…”

    무겁게 짓눌린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뿌옇고 흐릿했다. 천장. 하지만 익숙한 형광등이나 벽지가 아니었다. 거친 나무 기둥과 낡은 짚으로 엮은 듯한 지붕. 어렴풋이 보이는 벽 또한 울퉁불퉁한 흙벽이었다.

    ‘여긴… 어디지?’

    머릿속이 마치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처럼 혼란스러웠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의 근육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뼈마디가 쑤시고 아파왔다.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통증이었다. 겨우 팔을 짚고 상체를 세웠다.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손이었다.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 희고 깨끗한 피부. 분명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민준은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느라 손가락 끝이 늘 거칠었지만, 이 손은 마치 이제 막 성인이 된 듯, 굳은살 하나 없이 여렸다.

    소름이 돋았다.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낡은 목재 탁자 위에는 빛바랜 도자기 그릇과 흙으로 빚은 듯한 투박한 약병이 놓여 있었다. 바닥에는 거적때기 같은 이불이 구겨져 있었고, 창문이라고 불릴 만한 곳에는 얇은 기름종이가 발려 있었다. 모든 것이 낡고, 투박하고, 그리고… 이상했다.

    ‘꿈인가? 아니, 꿈치고는 너무 생생해.’

    몸은 여전히 욱신거렸지만, 놀랍게도 의식은 점점 또렷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낯선 기억의 파편들이 마치 깨진 유리 조각처럼 머릿속을 꿰뚫고 들어왔다.

    ‘유진… 유가문의 막내… 병약한… 무공의 재능 없음…’

    혼란스러웠다. 아니, 혼란스럽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이건… 이건 자신이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자신의 이름은 김민준, 대한민국 서울에 살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 기억은 ‘유진’이라는 다른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낡은 방문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유진아, 정신이 들었느냐?”

    수심 가득한 얼굴의 중년 여인이 들어왔다.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깊게 패인 주름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었다. 여인은 탁자 위의 약병을 들고 걱정스러운 눈으로 민준, 아니 유진을 바라봤다.

    “괜찮다니 다행이구나. 열이 심해서 밤새 앓았는데… 네 몸은 항상 이리 약해서야, 에휴.”

    여인의 목소리에는 깊은 애정이 담겨 있었지만, 동시에 절망감 같은 것이 묻어났다. 유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하니 여인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여인의 얼굴을 알았다. 아니, ‘유진’의 기억이 여인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머니…”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온 소리에, 여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래, 어미다. 자, 어서 이 약이라도 마시려무나.”

    도자기 잔에 따라진 뜨끈한 약을 받아 들었다. 한 모금 마시니 역한 풀뿌리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낯선 기억 속에서 ‘유진’은 늘 이 약을 마셨다. 병약한 몸을 지탱하기 위해.

    몸은 회복되었지만, 정신은 더욱 복잡해졌다.
    자신은 죽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몸으로 깨어났다.
    이곳은 무림, 강호라고 불리는 세계. 무공을 익히고 기를 다루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곳.
    그리고 자신은… 무공의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병약한 유가문의 막내 도련님, 유진이었다.

    “아이고, 세상이 어수선하니 병약한 너는 더욱 힘들겠구나.”

    어머니가 약 그릇을 치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림맹에서는 또 천하비무대회를 연다지 않더냐. 이번엔 단순한 명예 싸움이 아니래. 마교 놈들이 득세하는 시국에, 천하의 운명을 걸고 최강자를 가린다던데…”

    ‘천하비무대회? 마교? 천하의 운명?’

    순간, 민준의 귀가 쫑긋 섰다. 무협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죽음과 전생이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겨우 받아들이려던 참에, 이런 거대한 이야기가 그를 덮쳤다.

    “그래 봐야 우리 같은 작은 문파는 구경이나 하는 팔자지. 괜히 어쭙잖게 나섰다가는…”

    어머니의 한숨 소리가 공기 중에 가라앉았다.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자신은 지금, 이 거대한 격변의 시대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이 몸은 병약하고, 무공에 재능도 없다.

    ‘젠장, 살아남았다고 좋아할 상황이 아니잖아.’

    새로운 삶, 새로운 시작. 하지만 그 시작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절망적이었다. 평범한 직장인의 삶은 죽음으로 피날레를 맞이했지만, 무림의 병약한 도련님으로서의 삶은 이제 막 프롤로그를 쓰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암담한 현실뿐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이 암담한 현실 속에, 그가 늘 바라던 ‘특별함’의 실마리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직감이, 아주 희미하게 그의 심장을 울렸다.

  • 사이버펑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어둠은 끈질겼다. 맹렬하게 타오르는 태양도, 수억 년 된 성운도 감히 침범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검은 심연이었다. 그 검은 도화지 위를, 낡고 지친 한 척의 우주선이 위태롭게 미끄러져 가고 있었다. ‘페이더 호’. 억 단위의 신용 빚에 허덕이는 자들이 모여, 한탕의 꿈을 품고 이 망망대해로 뛰어든 배였다.

    조종석은 고요했다. 낡은 컴퓨터 패널의 전등이 깜빡이는 소리, 생명 유지 장치의 낮은 웅웅거림, 그리고 간간이 들려오는 승무원들의 나직한 숨소리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선장 김하진은 닳아빠진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앞의 홀로그램 스크린을 응시하고 있었다. 스크린에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숫자와 함께 점멸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그 너머의 무(無)를 꿰뚫어 보려는 듯 무표정했다.

    “캡틴, 열 시 방향. 미약하지만 불규칙적인 에너지 패턴 감지됐습니다.”
    나른한 침묵을 깬 것은 항해사 박세아의 목소리였다. 새하얀 작업복이 유난히 도드라지는 그녀는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며 시야각을 조정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이마에는 이미 가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하진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불규칙적이라고?”

    “네. 일반적인 항성계나 소행성 지대의 패턴과는 다릅니다. 일정한 주기 없이 튀어나오고… 다시 사라지는 듯합니다.” 세아의 목소리에 미묘한 긴장이 섞였다. 심우주에서 ‘불규칙적’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예상 밖의 재난, 혹은 예상 밖의 행운을 의미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재난에 가까웠다.

    하진은 손을 들어 올렸다. 홀로그램 스크린이 그의 손짓에 따라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박세아의 모니터에서 뽑아 올린 정보를 그의 시야에 띄웠다. 파동은 너무나도 작았고, 너무나도 멀리 있었지만, 그 불규칙성은 굳건했다.

    “선내 방송. 이강식 기관장, 최유리 박사, 조종석으로 집결.” 하진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뼈대 있는 명령이었다.

    곧이어 둔중한 발소리가 복도를 울리고, 육중한 체격의 이강식 기관장이 땀에 젖은 얼굴로 들어섰다. 그는 기름때 묻은 작업복 위에 거친 수건을 두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캡틴. 엔진 터졌어? 이제 좀 쉬려던 참이었는데.” 강식은 투덜거렸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세아의 모니터를 향해 있었다. 숙련된 기관사는 불길한 징조를 본능적으로 감지했다.

    그 뒤를 이어 작고 단정한 최유리 박사가 들어섰다. 그녀는 늘 그렇듯 깔끔한 실험복 차림이었다. 얇은 안경 너머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캡틴, 긴급 호출이라니. 혹시 새로운 광물 지대라도 발견한 건가요? 아니면 미지의 생명체라도?”

    하진은 그들에게 손짓으로 스크린을 가리켰다. “박세아 항해사, 브리핑.”

    “네. 현재 좌표에서 약 0.5광초 떨어진 지점에서 미약한 에너지 파동을 감지했습니다.” 세아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주기가 불규칙하고, 현재까지 알려진 어떤 천체의 에너지 패턴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강식은 코웃음을 쳤다. “젠장, 또 센서 고장 아니야? 어제 8번 센서 나간 거 고치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아니요, 기관장님. 8번 센서는 정상입니다. 다른 보조 센서에서도 동일한 파동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세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유리 박사의 눈이 더욱 빛났다. “불규칙적인 파동이라… 혹시 인공적인 신호일 가능성은 없나요? 아니면 지금까지 기록되지 않은 형태의 자연 현상이라던가.” 그녀의 목소리에는 학자 특유의 흥분과 탐구심이 가득했다.

    하진은 고뇌에 잠긴 듯 턱을 매만졌다. “세아, 최대 출력으로 파동의 원점을 추적해봐. 접근 속도는 평소보다 낮춰. 강식, 비상 엔진 점검하고 모든 시스템 최대로 올려. 비상 탈출 카트리지도 확인해.”

    “캡틴, 너무 과민 반응 아닙니까? 그냥 스텔라 이물질일 수도 있잖아요.” 강식이 불평했다.

    “심우주에서는 ‘그냥’이라는 건 없어, 강식.” 하진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에는 긴 항해 동안 쌓인 피로와 함께, 그 피로를 잊게 만드는 본능적인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어떤 이상징후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 그게 우리를 살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몇 시간이 흘렀을까. 아니, 몇 분이었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심우주의 끈적한 어둠 속에서 아무 의미 없는 개념이었다.
    페이더 호는 조심스럽게 그 미지의 파동을 향해 나아갔다. 스크린에는 파동의 강도가 점차 선명해지는 그래프가 나타났다.

    “캡틴, 시각 감지 범위 내로 들어왔습니다. 대형 물체… 확인됩니다.” 세아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였다.

    하진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켜 세아의 모니터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곳에 나타난 이미지에 그의 눈은 서서히 커졌다.
    거대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였다. 거대한 검은 바위, 혹은 얼음 덩어리인가 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그것은 빛을 반사하지 않았다. 주변의 별빛도, 페이더 호의 탐조등도 집어삼키는 듯, 오직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실루엣만을 드러낼 뿐이었다. 형태는 기이했다. 완벽한 구도, 육면체도 아니었다. 마치 수십, 수백 개의 불가능한 기하학적 도형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하나의 거대한 구조물을 이루고 있는 듯했다. 표면은 매끄러웠으나, 동시에 틈새와 돌기가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이건… 대체 뭐야.” 강식의 입에서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은 경악으로 가득했다.
    “인공물입니다.” 유리 박사의 목소리는 떨렸다. “분명 인공물입니다. 자연적인 형태가 아니에요. 하지만… 인류의 기술로는 이런 형태를 만들 수 없습니다.”

    하진은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오랜 세월 심우주를 떠돌며 수많은 기이한 광물과 버려진 우주선 잔해들을 보아왔지만, 이런 것은 단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차갑고, 위압적이며, 동시에 알 수 없는 매혹으로 그들을 끌어당겼다.

    “에너지 파동의 원점… 저 물체 내부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세아가 나직이 말했다. “주위 공간의 중력장이 미세하게 왜곡되어 있습니다. 마치… 저 물체가 주변 시공간을 끌어당기는 듯합니다.”

    “접근 속도 늦춰!” 하진이 급히 명령했다. “젠장, 이건 우리가 찾아야 했던 ‘정체불명의 유물’이 아니야. 이건… 살아있어.”
    그는 자신도 모르게 권총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의 눈은 거대한 검은 물체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페이더 호의 함교 전체를 울리는 듯한 깊고 낮은 진동이 느껴졌다.

    *웅—*

    검은 물체의 표면에서, 마치 잠에서 깨어나듯 미세한 빛줄기들이 꿈틀거렸다. 그것은 차가운 푸른빛이었다. 그 빛은 물체의 기이한 기하학적 문양을 따라 흐르더니, 이내 하나의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고요히 잠들어 있던 눈이 서서히 뜨이는 것처럼.

    “캡틴! 저 균열 안쪽에서… 무언가 나오고 있습니다!” 세아의 비명 같은 외침이 함교를 가득 채웠다.

    하진은 홀린 듯 그 광경을 바라봤다. 검은 물체의 내부에 펼쳐진 심연, 그 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 어떤 상상으로도 예측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였다.
    그것은 마치… 우주가 그들에게 직접 손을 내미는 것 같았다. 혹은 그들을 집어삼키려는 듯.
    하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 미지의 발견은 그들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부를 가져다줄 수도 있었고, 혹은 상상을 초월하는 파멸을 안겨줄 수도 있었다.
    어둠 속에서, 푸른빛이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리고 페이더 호는, 그 빛 속으로 더욱 깊이 빨려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 SF (공상과학)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혼돈의 잔상] 32화: 텅 빈 공간의 침묵

    밤이 깊었다. 지훈은 소파에 반쯤 파묻힌 채 스마트폰 화면을 노려봤다. 몇 시간째 재생 중인 영상 속에서는, 어젯밤 분명 아무도 만지지 않았던 거실 한가운데의 테이블이 서서히, 아주 미세하게 왼쪽으로 밀려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프레임 하나하나를 쪼개 봐도 인간의 힘으로 밀린 흔적은 없었다. 그저, 스르륵.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밑을 스치기라도 한 듯, 그렇게.

    “미친… 정말인가.”

    혼잣말이 목구멍에서 바싹 마른 모래처럼 흘러나왔다. 어젯밤, 아니 어제 새벽에 찍은 영상이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실 한쪽에 설치해 둔 간이 카메라가 건져 올린 기괴한 증거. 처음엔 착각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돌려봐도 테이블은 움직였다. 좁은 거실의 정적 속에서 그 움직임은 마치 거대한 바위가 움직이는 것처럼 명확하고 끔찍했다.

    밤새도록 뒤척이다 간신히 잠이 들었으나, 꿈조차 불안했다. 천장 높은 곳에서 끈적한 시선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 아침이 오자마자 침대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났다. 아파트의 넓은 창문 밖으로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도시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차들이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고층 빌딩들은 서로의 그림자를 넘나들며 우뚝 서 있었다. 완벽하게 평화로운 일상. 하지만 지훈에게 이 아파트는 더 이상 평범한 공간이 아니었다.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줄기가 피부에 닿는 순간조차 그는 문득,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마치 욕실 문 너머, 아니 어쩌면 샤워 커튼 뒤에 누군가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예민해진 신경은 벽면의 타일 무늬 하나하나,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는 물소리 하나하나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점심은 거르고 그대로 출근했다. 회사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 기괴한 존재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책상에 앉아 엑셀 시트를 들여다보는 내내, 그의 머릿속은 온통 비어있는 아파트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 없는 틈을 타 집안의 물건들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서랍이 열리고 닫히고, 액자가 기울어지고, 컵이 깨져 나뒹굴고.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퇴근 시간, 그는 평소보다 훨씬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있었다. 홀로 남은 사무실의 고요함은 왠지 모르게 편안했다. 이곳은 적어도, 아무도 없는 방에서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돌아가야만 했다.

    아파트 복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싸늘한 한기가 그를 감쌌다. 여름인데도 불구하고 등골이 오싹했다. 현관문을 열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 그는 망설이다 스위치를 눌러 불을 켰다. 환한 빛이 쏟아져 내리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뭐야… 아무것도 없잖아.”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저 과도한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환각일지도 모른다고, 애써 자신을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집 안 곳곳을 샅샅이 훑었다. 어젯밤 그를 공포에 떨게 했던 테이블은 제자리에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도, 엉망이 된 가구도 보이지 않았다.

    안심하는 듯했으나, 이상한 이물감이 가시지 않았다. 분명 어딘가, 묘하게 어긋난 부분이 있었다.

    그는 부엌으로 향했다. 목이 말랐다.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를 꺼내다 멈칫했다.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칼꽂이. 그 안에 꽂혀있던 식칼 한 자루가, 평소와 달리 정확히 180도 돌아가 있었다. 칼날이 벽 쪽을 향해 있어야 할 칼은, 날카로운 날을 드러낸 채 지훈 쪽을 향하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해뒀나?”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는 늘 칼날이 안쪽을 향하도록 놓는 습관이 있었다. 안전 때문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집에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이렇게 은근하게, 하지만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얼른 칼을 바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부엌에서 벗어나 거실로 돌아왔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칼날의 서늘한 기운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젠장.”

    혼잣말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이러다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친구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 하지만 막상 통화 버튼을 누르려 하자 손이 떨렸다. 뭐라고 말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 집에 유령이 있는 것 같아? 미쳤냐는 소리나 듣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때였다.

    “…응?”

    지훈의 시선이 거실 창문 쪽으로 향했다. 커다란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 블라인드의 틈새가 아주 미세하게 벌어져 있었다. 그것도 딱 그의 눈높이에 맞춰, 한 사람의 눈이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블라인드는 분명 아침에 그가 올리고 나갔다. 해가 잘 들도록. 그런데 지금은 내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틈새가, 마치 누군가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던 것처럼 벌어져 있었다.

    그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거세게 울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살금살금 다가서는 발걸음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창문 바로 앞까지 다가섰다. 그리고 덜컥, 하고 블라인드의 한 부분을 잡고 들어 올리려던 순간.

    갑자기, 거실의 스탠드 조명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파르르, 파르르. 마치 수명이 다한 전구처럼 불빛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지훈은 깜짝 놀라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섰다. 그의 시선은 창문에서 조명으로 옮겨갔다.

    “이게… 또 왜 이래?”

    짜증과 공포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그러자 전구의 깜빡임이 점점 더 빨라졌다. 마치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것처럼, 그 빛은 섬광처럼 번득이더니 이내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꺼져버렸다.

    암전.

    순식간에 거실은 어둠 속에 잠겼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실루엣을 그렸다. 그는 더듬거리며 벽에 있는 메인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찰칵, 찰칵.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전등은 들어오지 않았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마치 누군가 그의 심장을 꽉 움켜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흐읍.”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분명히 들었다. 어디선가, 아주 희미하게,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귀를 의심했다. 아니, 잘못 들었을 리 없다. 텅 빈 거실의 어둠 속에서, 아주 가늘고 슬픈 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마치 벽 속에서 스며 나오는 것처럼.

    소리는 분명 침실 쪽에서 들려왔다.

    지훈은 망설였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확인해야 하나? 도저히 이 아파트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는 스마트폰의 플래시를 켜고 천천히 침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조심했다. 플래시 불빛이 어둠을 찢으며 침실 문을 비췄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아니, 열려 있었다기보다는… *벌어져 있었다*. 틈새가 너무도 완벽하게, 마치 누군가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손잡이를 잡았다. 차가웠다. 그는 이를 악물고 문을 안으로 밀었다. 끼이익- 낡은 나무가 비명을 질렀다. 문이 열리는 동시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침대는 가지런했고, 서랍장은 굳게 닫혀 있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흐느끼는 소리도 멎어 있었다.

    지훈은 천천히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플래시 불빛을 사방으로 비췄다. 옷장 안, 침대 밑, 커튼 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그는 겨우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면 또 환청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이거나.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스윽-**

    날카로운 마찰음이 들렸다. 지훈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분명 옷장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플래시 불빛이 옷장으로 향했다.

    새까만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는 옷장 문틈으로, 아주 희미하게.

    **붉은색.**

    무언가 붉은 것이 비쳤다.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그의 심장은 마치 거대한 북이 울리는 것처럼 귀청을 찢을 듯이 울렸다.

    그리고 그 붉은 것이 천천히, 옷장 밖으로, 마치 기어 나오는 것처럼.

    **툭.**

    떨어졌다.

    지훈의 시선이 그 붉은 것에 꽂혔다.

    그것은… 그의 침실 벽에 걸려 있던, 자신이 아끼던 가족사진 속의, 오래된 핏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던 **오래된 장난감 곰 인형**이었다.

    그의 눈은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떨렸다. 저 인형은 분명 벽에 걸린 액자 선반 위에 놓여 있었을 터였다. 옷장 안이 아니라.

    그리고 그 인형의 한쪽 눈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깜빡였다.**

    지훈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몸은 거대한 바위에 짓눌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옷장 안의 어둠 속에서.

    **”…지훈아.”**

    아주 낮고 끈적한 목소리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치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우는 듯한, 섬뜩한 속삭임이.

    그리고 옷장 안에서, 무언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두 개의 희미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지훈을 똑바로 응시했다.

    **다음 화에 계속.**

  • 다크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우주선 ‘아스트라’의 함교는 죽은 듯 고요했다. 광활한 심우주의 심연에 비하면 이 강철 구조물은 먼지 한 톨에 불과했지만, 그 안에서 인류는 각자의 고독과 희망을 품고 살아 숨 쉬었다. 창밖은 태초의 어둠 그 자체였고, 점멸하는 성간 먼지조차 보이지 않는 진정한 흑색의 공간이었다.

    “선장님, 에너지 드링크 한 잔 더 드릴까요?”

    부조종석에 앉아 있던 박진우 상사가 졸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조종간을 쥔 그의 손은 피곤했지만 단단했다. 캡틴 이지훈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은 전방의 메인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스크린에는 그저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은하수의 흐릿한 가장자리만이 보일 뿐이었다. 끝없는 항해는 때로는 수행과도 같았다.

    “아니, 괜찮아. 이 정도 정적이면 됐어.” 이지훈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차피 우린 아무것도 찾지 못할 거야. 늘 그랬듯이.”

    그들이 심우주 탐사선 아스트라에 몸을 싣고 떠나온 지 벌써 3년. 인류의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미지의 문명을 찾아, 또는 그저 우주의 끝을 보기 위해 나선 여정이었다. 그러나 우주는 언제나 그들의 기대를 비웃기라도 하듯 텅 비어 있었다.

    그때였다. 삐익, 하는 날카로운 경고음이 함교의 정적을 갈랐다.

    “뭐야?” 박 상사가 움찔하며 자세를 고쳤다.

    메인 스크린 옆에 작은 보조 스크린이 깜빡였다. 김민서 박사의 과학 분석실이었다. 이지훈은 스크린을 톡톡 건드렸다. 곧 김 박사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녀의 눈은 평소의 침착함과는 거리가 멀게 흥분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캡틴! 이건… 믿을 수 없는 결과입니다! 함선 전방 0-0-7 섹터에서 강력한 에너지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저희가 지금까지 탐사했던 어떤 천체와도 다른 유형이에요!”

    “에너지 신호? 항성인가? 아니면 성운?” 이지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닙니다! 방출되는 에너지는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 내부 응축 에너지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리고 형태가… 형태가 너무나도 인공적이에요! 자연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하학적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김 박사의 목소리에는 이제 경외심마저 섞여 있었다. 이지훈은 박 상사에게 지시했다. “박 상사, 함선 속도 줄이고, 스캔 범위를 최대로 확장해. 주위 공간에 위협이 될 만한 요소는 없나 확인해봐.”

    “알겠습니다, 캡틴!” 박 상사는 능숙하게 조작을 시작했다.

    아스트라의 거대한 추진기가 서서히 굉음을 멈추고 관성에 따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함선 전체에 미세한 진동이 흘렀다. 이지훈은 마음속으로 기대 반 불안 반의 감정을 느꼈다. 드디어, 드디어 무언가를 찾은 걸까? 아니면… 늘 그랬듯이 실망만 안겨줄 허황된 신호일까?

    “캡틴! 육안 관측 범위에 들어왔습니다!” 박 상사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깃들었다.

    이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메인 스크린이 서서히 초점을 맞추어 갔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점처럼 보였던 것이 점차 형체를 갖추었다. 그것은 거대했다. 어쩌면 아스트라의 크기를 능가할지도 모르는 규모였다.

    “세상에…” 김 박사의 화면에서 튀어나온 낮은 탄성음이 함교에 울렸다.

    이지훈은 말을 잃었다. 스크린에 나타난 것은 어떤 설명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거대한 검은색 다면체. 표면은 그 어떤 빛도 반사하지 않고, 오히려 빛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마치 우주의 심연에서 잘라낸 조각처럼, 순수한 어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건축물 같았다. 그 윤곽선은 완벽한 기하학적 균형을 이루고 있었지만, 동시에 인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비틀려 있었다.

    “이건… 대체 뭐지?” 박 상사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회전하지도,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그곳에, 영원처럼 정지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정지 속에서 맹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잠들어 있는 듯한, 차갑고 무거운 압력이었다.

    “김 박사, 스캔 결과는 어떻습니까?” 이지훈이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측정 불가입니다, 캡틴. 저희 센서로는 표면 재질도, 내부 구조도 파악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시간조차 가늠할 수 없습니다. 수억 년이 되었을 수도 있고, 수십억 년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태초부터 저곳에 있었을지도….”

    김 박사의 목소리는 이제 흥분보다는 전율에 가까웠다.

    “에너지 신호는요?”

    “계속 응축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부로 방출되는 건 없습니다. 마치… 스스로 모든 것을 봉인하고 있는 듯한 형태입니다.”

    이지훈은 스크린 속 미지의 다면체를 응시했다. 본능적인 경고음이 머릿속에서 울렸지만, 수억 년 만에 찾아온 미지의 존재에 대한 학자적 호기심이 그 경고음을 압도했다.

    “접근하자. 박 상사, 조심스럽게 접근해. 거리 1000m까지.”

    “캡틴, 너무 위험합니다! 저게 뭔지도 모르는데…!” 박 상사가 반대했다.

    “저건 우리가 3년 동안 찾아 헤매던 그 무엇일지도 몰라. 물러설 수 없어.” 이지훈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깃들었다. “최규리, 기관실 응답해라. 비상 상황 대비해서 모든 시스템 점검하고, 필요한 경우 즉시 비상 탈출할 수 있도록 준비해.”

    “최규리입니다, 캡틴! 알겠습니다. 모든 시스템 점검 완료하겠습니다!” 기관실의 최규리 대원의 목소리도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아스트라는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다면체는 점차 존재감을 키워갔다. 가까워질수록, 그것의 표면에 새겨진 듯한 미세한 무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무늬들은 선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뒤틀리고 얽혀 있었다. 언뜻 보면 아름답기도 했지만, 자세히 보면 극심한 혼돈과 광기를 담고 있는 그림 같았다.

    500미터.
    200미터.
    100미터.

    정지.

    아스트라와 다면체 사이의 공간은 팽팽한 장력으로 가득했다. 함교 안의 모든 승무원들은 숨소리조차 죽였다. 그들은 그저 메인 스크린에 비치는 미지의 유물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김 박사, 외부 센서로 표면 분석 다시 시도해봐.” 이지훈이 나직하게 말했다.

    “시도 중입니다, 캡틴. 하지만…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마치 저희 센서의 파장을 전부 흡수하는 것 같습니다.”

    그때였다. 찌르르륵, 하는 미세한 진동이 함선 전체를 휘감았다. 전기가 흐르는 듯한, 혹은 뇌가 직접 자극받는 듯한 기이한 감각이었다.

    “이게 뭐야?!” 박 상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지훈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메인 스크린의 다면체 표면에서, 아무런 변화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 없는 지점이 있었다. 마치 심해 속의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듯한 존재감.

    “캡틴… 이상합니다…” 김 박사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 뇌파… 뇌파가… 외부로부터 강력한 간섭을 받고 있습니다! 저희 인지 시스템에… 무언가를 주입하려 하는 것 같습니다!”

    “뭘 주입한다는 거야?!” 이지훈이 소리쳤다.

    “이미지… 소리… 감정… 모든 것이 뒤섞인… 혼돈의… 조각들이…!”

    김 박사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동시에 박 상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어둠 속의 다면체를 바라보며 덜덜 떨기 시작했다.

    “저게… 저게 말을 걸고 있어요… 캡틴… 제 머릿속에…!”

    이지훈은 얼어붙었다. 그 순간, 그도 느꼈다. 뇌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치는 듯한 낯선 소리. 그것은 언어도 아니었고, 음악도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절망과 고통, 그리고 무한한 공허함으로 이루어진 파동이었다. 그 파동은 그의 이성과 감성을 찢어발기려 했다.

    메인 스크린의 검은 다면체가 마치 스스로 숨 쉬는 것처럼, 아주 미세하게 팽창했다가 수축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그리고 그 검은 표면 위로, 마치 피와 같은 붉은색의 미세한 균열들이 번개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멈춰! 당장 후퇴해! 최대로 이탈해!” 이지훈이 있는 힘껏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경련처럼 떨렸다.

    그러나 이미 늦은 듯했다.

    삐이이이이익——————!

    함선 전체를 뒤흔드는 고주파음이 울려 퍼졌다. 승무원들의 비명이 뒤섞였다. 이지훈의 시야가 붉은색과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그의 뇌리에는 수억 년 된 우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던, 어떤 존재의 차갑고 고독한 눈빛이 섬뜩하게 비쳐들었다. 그것은 인류가 결코 마주해서는 안 될, 진정한 어둠 그 자체였다.

  • 메카 액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콘크리트 잔해가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렸다. 녹슨 철근들이 뼈처럼 앙상하게 드러난 마천루의 틈바구니 사이로, 잿빛 하늘이 숨 막히게 내려앉아 있었다. 강진은 닳아빠진 강화외골격 슈트의 헬멧 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까마귀’라고 불리는 그의 슈트는 여기저기 땜질하고 너덜너덜했지만, 여전히 강진의 유일한 생존 도구였다.

    “젠장, 또 막혔네.”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슈트 내장 마이크를 통해 헬멧 안에서 울렸다. 붕괴된 통로를 가로막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를 보며 강진은 욕을 씹었다. 닷새째다. 식량은 바닥을 보였고, 물은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이 거대한 폐허 속에서 말라죽을지도 몰랐다.

    그는 옆구리에 매달린 다기능 스캐너를 켰다. 지지직거리는 화면에는 이 구역의 지도가 희미하게 나타났다. 목표는 북쪽으로 3km 떨어진 구 시가지의 보급창고 잔해.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길은 늘 이런 식이었다. 예상치 못한 붕괴, 길을 막는 방사능 구역, 그리고…

    *부우우웅—*

    낮고 굵은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강진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스캐너 화면의 오른쪽 하단에 경고등이 깜빡였다. ‘접근 중인 생명체. 다수.’

    강진은 조용히 외골격 슈트의 무릎을 굽혔다. ‘까마귀’의 관절에서 삐걱거리는 마찰음이 났지만, 그 외에는 완벽한 정적이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음침한 그림자 속에서, 강진은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 그 자체가 되었다.

    진동은 점점 가까워졌다. 이 폐허에 남아있는 위협 중 가장 성가신 존재, ‘식육종’이었다. 대붕괴 이후, 방사능과 알 수 없는 변이로 인해 탄생한 괴물들. 그들은 육식성이었고, 굶주려 있었으며, 무엇보다 빠르고 집요했다.

    *콰자작!*

    강진이 몸을 숨긴 폐건물의 아래층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거대한 그림자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창문 틈으로 보였다. 하나, 둘… 다섯 마리 이상. 떼를 지어 다니는 식육종 무리와 맞서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까마귀’가 아무리 강해도, 총알이 무한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스캐너를 다시 확인했다. 식육종 무리가 건물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이 기회였다. 그들이 지나간 직후, 막힌 통로를 우회해 북쪽으로 향하는 것.

    “젠장, 운에 맡기는 수밖에 없군.”

    강진은 작게 중얼거리고는 강화외골격 슈트의 팔을 움직였다. 손가락에 해당하는 부분이 조종간에 맞물리며 단단히 고정되었다. 어깨에 장착된 경량 돌격 소총의 잔탄 수를 확인했다. 24발. 조심해서 써야 했다.

    식육종 무리의 진동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강진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외골격 슈트 ‘까마귀’는 폐허 속에서 완벽하게 위장된 듯 보였다. 녹슨 장갑은 벽의 부식된 철근과, 헬멧의 어두운 바이저는 그림자와 거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막힌 통로를 따라 난 작은 철골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발걸음마다 금속이 긁히는 소리가 났지만, 주위의 붕괴음과 바람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릴 뿐이었다. 낡고 불안정한 계단을 따라 한 층씩 내려갔다.

    갑자기, ‘까마귀’의 헬멧 바이저에 경고등이 다시 떴다.
    ‘접근 중인 생명체. 한 마리.’
    강진은 온몸의 근육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놓쳤나? 아니면… 뒤처진 놈인가?

    *크아아악!*

    등 뒤에서 귀청을 찢는 듯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강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식육종 한 마리였다. 다른 개체들보다 훨씬 크고, 갈고리 같은 발톱이 날카롭게 빛나는 변이종이었다. 놈은 입을 벌린 채 거품을 흘리며 달려들었다.

    “젠장!”

    강진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까마귀’의 돌격 소총을 들어 올렸다. 방아쇠를 당기자 섬광과 함께 총성이 울렸다. *타타타탕!*
    총알이 놈의 거친 피부에 박혔지만, 놈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광폭하게 돌진했다. 이런! 일반 식육종이 아니었다. ‘알파’라고 불리는 변이의 선두 개체였다.

    강진은 황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까마귀’의 육중한 몸체가 낡은 난간을 부수며 바닥에 뒹굴었다. *크아앙!* 알파 식육종의 발톱이 강진이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를 깊게 할퀴었다. 콘크리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돌격 소총의 잔탄은 이제 18발. 이대로는 안 된다. 이 좁은 복도에서는 ‘까마귀’의 기동성이 제한된다. 그는 본능적으로 시야를 좁은 복도 끝의 비상구로 돌렸다. 외부로 통하는 문이었다.

    “후퇴! 후퇴만이 살길이다!”

    강진은 스스로에게 외치며 전속력으로 복도를 질주했다. ‘까마귀’의 증폭된 다리 힘이 바닥을 박차자 콘크리트 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뒤에서는 알파 식육종의 짐승 같은 포효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놈은 강진보다 빨랐다.

    *쿵! 쾅! 쿵!*

    거친 발소리가 등 뒤를 덮쳤다. 강진은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비상구 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낡은 철문이 ‘까마귀’의 어깨에 부딪히며 끔찍한 쇳소리를 냈다. 간신히 문을 열고 몸을 밖으로 빼는 순간, 알파 식육종의 거대한 앞발이 강진의 등짝을 후려쳤다.

    *콰앙!*

    강철 프레임으로 보강된 ‘까마귀’의 등 부분이 움푹 파였다. 헬멧 안에서 강진은 고통스러운 신음성을 내뱉었다. 슈트의 경고등이 붉게 깜빡였다. ‘후방 장갑 손상. 기동성 저하.’

    강진은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간신히 무너지지 않고 버텨냈지만, 상황은 최악이었다. 그는 건물 바깥, 폐허가 된 도로 위에 서 있었다. 끊임없이 부는 모래바람이 시야를 가렸다.

    알파 식육종이 비상구 문을 부수고 튀어나왔다. 놈의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강진은 후방 장갑 손상으로 인해 둔해진 몸을 이끌고 뒷걸음질 쳤다. 총탄이 박힌 몸에서도 핏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놈은 개의치 않았다.

    “이젠 끝인가…?”

    강진의 입에서 허탈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때, 헬멧의 바이저 한구석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스캐너였다. 그것은 멀지 않은 곳의 특정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신호? 이런 곳에?’

    강진은 반사적으로 스캐너가 가리키는 방향을 쳐다봤다. 거기에는 수십 층짜리 건물이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 건물 상층부에서 아주 미약한 에너지 신호가 잡히고 있었다. 그것은 강진이 지금까지 이 폐허에서 본 적 없는, 안정적이고 규칙적인 신호였다.

    알파 식육종이 마지막 일격을 가하려는 듯 몸을 웅크렸다. 강진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신호… 어쩌면 마지막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가능성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그래, 죽더라도 그냥 죽진 않아!”

    강진은 이를 악물었다. ‘까마귀’의 시스템에 남아있는 모든 에너지와 추진력을 스러스터에 집중시켰다. *위이이잉—*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등 뒤에서 푸른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그는 뒤로 물러서는 대신, 알파 식육종을 향해 역으로 돌진했다. 놈이 놀란 듯 잠시 주춤하는 사이, 강진은 슈트의 남은 총탄을 놈의 머리에 모조리 쏟아부었다. *타타타타탕!*

    알파 식육종의 머리에서 끈적한 녹색 피가 터져 나왔지만, 놈은 여전히 쓰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잠시 경직되었다. 강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모든 추진력을 이용해 놈의 거대한 몸통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휘이이잉—*

    강진은 공중으로 솟구쳤다. ‘까마귀’의 스러스터가 전력을 다해 불을 뿜었다. 그는 알파 식육종의 공격 범위를 벗어나, 기울어진 건물 상층부에서 깜빡이는 희미한 신호를 향해 날아갔다. 발아래로는 포효하는 알파 식육종의 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강진은 슈트의 팔을 쭉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스캐너가 포착한 미약한 신호의 진원지가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식량일지, 물일지, 아니면 더 치명적인 함정일지. 하지만 강진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잿빛 하늘을 가르며, 강진의 ‘까마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날아갔다. 그의 유일한 희망을 향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