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가상현실 게임 (VRMMO)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잿빛 생존

    **장면 1: 잿빛 폐허, 이름 없는 거리**

    **[1컷]**
    (삭막한 황무지 한가운데, 반쯤 무너진 고층 빌딩들이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내고 있다. 먼지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찢어진 현수막 조각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하늘은 언제나처럼 잿빛 구름에 덮여 빛 한 점 없이 어둡다. 화면 중앙에는 낡은 방진 마스크와 허름한 방어구로 몸을 가린 한 남자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그의 등에는 크고 낡은 백팩이 짊어져 있다.)

    **나레이션 (강하준):**
    세상이 한 줌의 먼지로 변한 지 몇 년이 지났을까.
    어떤 이들은 새로운 시작이라 했고, 어떤 이들은 끝이라고 했다.
    내게는 그저 매일 숨 쉬고, 움직이고, 살아남는 것만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2컷]**
    (강하준의 클로즈업. 마스크 너머로 보이는 그의 눈은 피로에 지쳤지만, 예리하고 끈질긴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 그는 주위를 끊임없이 살피며 손에 든 낡은 스캐너를 응시한다. 스캐너 화면에는 흐릿한 신호가 깜빡인다.)

    **강하준 (혼잣말):**
    벌써 나흘째… 이대로는 곤란해.
    식량도, 물도 바닥을 보이고 있어.
    제발, 뭔가 쓸 만한 게 나와야 할 텐데.

    **[3컷]**
    (강하준의 시선이 머무는 곳. 멀리 보이는 폐허 속에서, 비교적 온전하게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작은 상가 건물이 보인다. 간판의 글자는 지워져 알 수 없지만, 어렴풋이 ‘편의점’ 같은 건물의 흔적이 남아있다.)

    **강하준 (혼잣말):**
    저기인가. 제법 멀쩡해 보이는데.
    어쩌면 아직 건질 게 있을지도 몰라.

    **[4컷]**
    (강하준이 허리를 낮추고 벽에 기대어 주변을 경계한다. 그의 눈은 빠르게 주변의 건물 잔해, 무너진 차량, 그리고 그림자 속을 훑는다. 이곳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강하준 (혼잣말):**
    조용하군. 너무 조용한 게 탈이긴 하지만.
    이런 곳일수록 더 위험한 법이지.

    **[5컷]**
    (강하준이 조용히 상가 건물 안으로 진입한다. 유리문은 이미 산산조각 나 있고, 내부는 온통 먼지와 부서진 선반, 쓰레기로 가득하다. 퀴퀴하고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른다.)

    **[6컷]**
    (강하준이 손전등을 켜고 내부를 비춘다. 빛이 닿는 곳마다 절망적인 풍경이 펼쳐진다. 모든 것이 약탈당하고 망가져 있다. 하지만 그의 눈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쓸 만한 것을 찾는다. 한쪽 구석, 선반 아래쪽에 무언가 번쩍이는 것이 보인다.)

    **강하준 (혼잣말):**
    …저건?

    **[7컷]**
    (강하준이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부서진 선반 뒤, 먼지에 뒤덮인 채 찌그러진 금속 캔이 몇 개 보였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가장 귀한 것 중 하나인 ‘보존식량 캔’이었다.)

    **강하준:**
    이런 행운이…!

    **[8컷]**
    (강하준이 캔을 집어 들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정적을 깨고 날카로운 파열음이 터져 나온다. 그의 머리 위, 천장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오는 것이 보인다. 스캐너에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한다.)

    **강하준 (혼잣말):**
    젠장! 기척도 없이!

    **[9컷]**
    (천장에서 떨어진 것은 거미를 닮은 거대한 ‘변종 괴수’였다. 온몸이 칙칙한 회색빛 갑피로 덮여 있고, 여러 개의 눈이 불쾌하게 빛난다. 날카로운 다리 하나가 강하준이 있던 자리를 그대로 내리찍어 바닥을 부순다.)

    **[10컷]**
    (강하준은 간발의 차이로 옆으로 몸을 날려 피한다. 거미 괴수의 다리가 벽을 강타하며 엄청난 진동과 함께 먼지 구름을 일으킨다. 그의 손에는 낡고 녹슨 철 파이프가 들려 있다.)

    **강하준:**
    하아… 하아… 꽤나 끈질긴 놈이군.
    이런 곳에서 나타날 줄이야!

    **[11컷]**
    (괴수가 강하준에게 맹렬하게 돌진한다. 그 속도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강하준은 본능적으로 파이프를 휘둘러 괴수의 다리를 막지만, 엄청난 힘에 밀려 벽으로 내동댕이쳐진다. 등 뒤로 느껴지는 강렬한 충격에 숨이 막힌다.)

    **강하준 (혼잣말):**
    크윽…! 이 놈의 힘이…!

    **[12컷]**
    (괴수가 강하준의 위로 올라타려고 한다. 맹렬한 기세로 다가오는 거미의 송곳니가 섬뜩하게 번뜩인다. 강하준은 재빨리 품속에서 작은 섬광탄을 꺼내 던진다.)

    **[13컷]**
    (강렬한 섬광이 폐허 내부를 가득 채운다. 거미 괴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친다. 강하준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닥에 굴러다니던 찌그러진 캔들을 재빨리 주워 백팩에 쑤셔 넣는다.)

    **강하준:**
    시간 없어!

    **[14컷]**
    (섬광이 사라지고, 괴수가 다시 강하준에게 돌진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강하준이 단순히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재빨리 파이프를 고쳐 잡고, 괴수의 움직임을 예측하며 달려드는 다리 사이로 몸을 던진다. 그리고는 괴수의 갑피가 비교적 얇은 배 부분에 파이프를 힘껏 찔러 넣는다.)

    **[15컷]**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괴수의 갑피가 파이프에 긁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낸다. 괴수는 더욱 격렬하게 발버둥 치며 강하준을 쳐낸다. 강하준은 벽에 부딪히며 쓰러지지만, 그의 손에 들린 파이프 끝에서는 끈적한 녹색 액체가 묻어난다.)

    **강하준:**
    젠장… 제대로 한 방 먹였지만… 아직 멀었군.
    이대로는 위험해.

    **[16컷]**
    (강하준이 괴물과 거리를 두며 빠르게 출구 쪽으로 몸을 움직인다. 괴수는 그의 뒤를 쫓아 격렬하게 추격한다. 폐허 내부를 가득 채우는 발소리와 날카로운 비명.)

    **강하준 (혼잣말):**
    그래, 내가 노린 건 이거야.
    이 좁은 곳에선 이길 수 없어.

    **[17컷]**
    (강하준이 건물 밖으로 뛰쳐나온다. 괴수도 맹렬하게 뒤따라 나온다. 하지만 강하준은 이미 건물 주변에 미리 설치해 둔 ‘강철 덫’을 기억하고 있었다. 괴수가 밟는 순간, 땅속에서 날카로운 강철 이빨이 튀어나와 괴수의 다리를 강하게 물어뜯는다.)

    **[18컷]**
    (괴수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한쪽 다리를 절뚝인다. 강하준은 뒤돌아보지 않고 필사적으로 달린다. 그의 등 뒤로 괴수의 분노에 찬 포효가 울려 퍼진다.)

    **강하준:**
    하아… 하아… 망할 놈!
    이 정도로는 잡을 수 없지만… 시간을 벌 순 있어!

    **[19컷]**
    (강하준이 멀리 떨어진 안전한 폐차 뒤에 숨어 거친 숨을 몰아쉰다. 상처 입은 팔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다. 그는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상처를 확인하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강하준 (혼잣말):**
    젠장… 또 출혈인가.
    치료 키트도 거의 바닥인데.

    **[20컷]**
    (그의 손에는 어렵게 구해 온 보존식량 캔 두 개가 들려 있다. 식량은 얻었지만, 그 대가는 혹독했다. 그는 잿빛 하늘을 올려다본다. 여전히 희망 없는 색깔이다.)

    **강하준 (혼잣말):**
    이 작은 캔 하나를 위해… 오늘도 죽을 뻔했군.
    대체… 언제쯤 이 지긋지긋한 싸움이 끝날까.

    **[21컷]**
    (강하준의 시선이 백팩 한구석에 있는 낡은 사진으로 향한다. 사진 속에는 희미하게 웃고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먼지투성이의 사진은 그의 유일한 낙이자, 살아가는 이유였다.)

    **강하준 (혼잣말):**
    …하지만 포기할 순 없어.
    반드시… 반드시 살아남아서…

    **[22컷]**
    (강하준이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그의 눈에 다시금 끈질긴 생존의 불꽃이 타오른다. 그는 캔 하나를 딴다. 퍽, 하고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절망적인 고요 속에서 크게 울린다.)

    **강하준 (혼잣말):**
    나는… 아직 끝낼 수 없어.

  • 던전 탐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밤 열한 시, 김지훈은 지친 몸을 이끌고 낡은 아파트 현관문을 열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눅눅한 공기가 습관처럼 코를 찔렀다. 좁디좁은 원룸. 세탁기 옆에 쌓인 빨랫감, 싱크대에 잠겨 있는 설거지, 책상 위를 점령한 택배 상자들. 완벽한 자취생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평소보다 기분이 묘했다. 며칠 전부터 사소한 이상 현상이 그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빌어먹을… 피곤해 죽겠네.”

    지훈은 투덜거리며 신발을 벗었다. 벗어놓은 운동화가 저절로 현관 구석으로 스르륵 밀려나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애써 무시했다. 환영이겠지.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거다.

    냉장고에서 꺼낸 생수병을 들이켰다. 텅 빈 방 안은 언제나처럼 정적에 잠겨 있었다. 아니, 잠겨 있었어야 했다.

    “…뭐지?”

    싱크대 구석에 놓여 있던 유리컵이,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는데, 삐그덕 소리를 내며 상판 위를 한 뼘 정도 미끄러졌다. 그리고는, 멈췄다. 지훈은 손에 든 생수병을 든 채 굳었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아니면… 지진?’

    지진치고는 너무 미미했다. 게다가 창밖의 도시는 고요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하기만 했다. 지훈은 마른침을 삼켰다.

    “젠장, 또 시작이야.”

    며칠 전부터 이런 식이었다. 분명 닫아둔 옷장 문이 열려 있다거나, 침대 머리맡에 둔 리모컨이 뜬금없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식이었다. 처음엔 건망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누구… 있어요?”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텅 빈 방에 메아리치는 그의 목소리는 유독 더 작고 비참하게 들렸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안방에서 희미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누군가 종이를 구기듯, 옷깃을 스치듯.

    지훈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안방은 그의 침실이자 가장 사적인 공간이었다. 그는 망설였다. 도망쳐야 하나? 아니면… 확인해야 하나?

    “이봐, 장난치지 마. 경찰 부르기 전에 나와.”

    목소리는 이전보다 힘이 실렸지만, 다리는 후들거렸다. 그의 손이 본능적으로 식칼이 꽂혀 있는 칼꽂이로 향했다. 시퍼런 칼날이 그의 손에 쥐어졌다. 어설프게 쥔 칼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맨손보다는 나을 터였다.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안방 문 쪽으로 다가갔다. 방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 틈새로 보이는 방 안은 어두웠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덜컥.

    그때였다. 닫혀 있던 방문이 갑자기 안쪽으로 확 열렸다. 지훈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식칼을 든 손이 허공을 휘둘렀다.

    방 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나 분명히, 침대 위 이불이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와 바닥에 떨어졌다. 그 뒤를 이어 베개가, 그리고… 그의 잠옷이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미쳤어… 이건 말도 안 돼…”

    지훈의 눈앞에서 잠옷이 팔다리 모양을 갖추며 허공에서 춤을 추듯 흔들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쿵! 쿵! 쿵!

    창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밖에서 거대한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유리창이 깨질 듯 울렸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거실로 뛰쳐나갔다. 이 아파트는 더 이상 그의 안전한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현관문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는 순간, 현관문이 쿵, 하고 크게 울렸다.

    ‘닫혔잖아!’

    분명 잠그지 않았던 문이었다. 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봤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열어! 열라고!”

    지훈은 미친 사람처럼 손잡이를 잡아 흔들며 소리쳤다. 그 순간, 거실의 스탠드 램프가 스스로 공중에 떠올랐다. 전선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램프는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지훈의 등 뒤를 향해 날아왔다.

    콰아앙!

    램프는 현관문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지훈은 바닥에 엎어졌다. 깨진 유리 조각이 그의 뺨을 스쳤다.

    “으윽…”

    떨리는 손으로 뺨을 만졌다. 피가 묻어 나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거실의 다른 가구들이 하나둘씩 공중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소파가 붕 뜨고, 테이블이 뒤집히며, 책장에 꽂혀 있던 책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이곳은 더 이상 그의 집이 아니었다. 혼돈 그 자체였다. 그의 아파트는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그를 가두고 공격하는 거대한 함정이 되었다.

    “안 돼… 제발….”

    그때, 현관문 옆 벽면에서 기이한 현상이 시작됐다. 낡은 벽지가 물결치듯 일렁이더니, 표면이 거울처럼 투명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아파트 내부와는 전혀 다른 풍경이 비쳤다. 어둡고 축축한,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통로. 그리고 그 통로 저편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을 지훈은 목격했다.

    그것은 그의 아파트에 숨겨진 또 다른 공간이었다. 미로처럼 얽힌, 알 수 없는 던전의 입구가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공중에 떠 있던 가구들이 일제히 그 투명한 벽을 향해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틈새로, 차갑고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훈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제 겨우 알았다. 이 지긋지긋한 아파트는, 그를 위한 던전이었다. 그리고 그는… 갇혔다.

    “젠장… 누가 좀…”

    그의 눈앞의 벽이 완전히 투명해졌다. 그 너머의 공간은 심연처럼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심연의 가장자리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반짝였다.

    그것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던전에서.

  • 크툴루 신화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1: 균열]

    **[장면 1]**
    **배경:** 낡았지만 나름 깔끔하게 정돈된 아파트 거실. 밤, 어두컴컴한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있다. 작은 스탠드 조명 하나가 거실 한쪽을 간신히 밝히고 있다. 현우는 노트북 앞에 앉아 멍하니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내레이션 (현우):**
    밤은 언제나 혼자였다.
    이 작은 공간, 낡은 아파트의 층고 낮은 거실에서 나는 매일 밤 도시의 어둠을 홀로 마주했다.
    별반 특별할 것 없는 삶이었다.
    아니, 오히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이었다.
    그랬던 것 같았다.
    균열이 생기기 전까지는.

    **[장면 2]**
    **배경:** 현우의 부엌. 냉장고 문이 살짝 열려 있고, 그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현우는 컵라면을 들고 어두운 부엌 입구에 서 있다. 미간을 찌푸린 채 냉장고를 바라본다.

    **현우 (독백, 짜증 섞인 한숨):**
    또야? 젠장, 낡았으면 낡은 거지, 왜 자꾸 멋대로 열리고 난리야.

    **내레이션 (현우):**
    사소한 일이었다.
    냉장고 문이 제멋대로 열리는 것.
    벌써 일주일째였다. 처음엔 내가 제대로 안 닫았겠거니 했다.
    하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심지어 분명히 꽉 닫았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냉장고 문은 삐걱, 하고 열려 있었다.
    안에서 나오는 냉기만큼이나 싸늘한 기분이었다.

    **[장면 3]**
    **배경:** 현우의 책상 위. 사용 중인 노트북과 켜져 있는 스탠드, 그리고 그 옆에 놓인 연필꽂이. 현우는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고 있다.
    **사운드:** (투둑!) (연필꽂이에서 연필 하나가 툭 떨어지는 소리)

    **현우:**
    어?

    **내레이션 (현우):**
    그날 밤,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정신없이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연필꽂이에서 연필 한 자루가 툭, 하고 떨어졌다.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았다.
    책상 위는 평소처럼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현우 (독백, 떨어진 연필을 주워 들며):**
    피곤한가. 헛것이 보이나.

    **[장면 4]**
    **배경:** 현우의 손이 연필을 다시 연필꽂이에 꽂는 모습. 이번에는 꽂자마자 연필들이 연이어 ‘투둑, 투둑, 투둑’ 떨어져 바닥에 흩어진다. 현우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현우 (깜짝 놀라 몸을 뒤로 빼며):**
    야! 뭐야, 씨…

    **내레이션 (현우):**
    갑자기 모든 연필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연필꽂이를 툭 치기라도 한 것처럼.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나는 황급히 바닥에 흩어진 연필들을 주워 담았다.
    그러다 문득, 손이 멈췄다.

    **[장면 5]**
    **배경:** 바닥에 흩어진 연필들 사이. 한 연필의 심 끝이 살짝 부러져 있다. 마치 날카로운 것으로 긁힌 듯한 흔적. 그 옆으로 현우의 떨리는 손이 닿아있다. 현우의 시선이 연필 끝에 고정된다.

    **내레이션 (현우):**
    연필 하나가, 마치 무언가에 긁힌 것처럼, 끝이 살짝 뭉개져 있었다.
    오래된 연필이었지만, 이런 식으로 훼손된 적은 없었다.
    이상한 기시감이 들었다.
    아니, 그보다는 불쾌한 예감에 가까웠다.

    **[장면 6]**
    **배경:** 현우의 거실. 시간은 한밤중. 모든 불이 꺼져 있고, 창문 밖 도시의 불빛만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온다. 현우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려 하지만 불안한 듯 눈을 감지 못한다.

    **사운드:** (긁긁긁…) (벽에서 무언가를 긁는 듯한 소리)

    **현우 (속삭임):**
    …젠장.

    **내레이션 (현우):**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윗집이나 옆집에서 들려오는 생활 소음이라고 생각했다.
    밤늦도록 공사라도 하나, 아니면 아이가 있는 집인가.
    하지만 그 소리는… 일반적인 소음과는 달랐다.
    정확히는, 내 방 벽에서부터 시작되는 소리였다.

    **사운드:** (긁긁긁… 드득… 긁긁…) (소리가 점점 선명하고 가까워지는 듯하다. 현우의 얼굴에 공포가 스친다.)

    **현우:**
    (이불을 더욱 세게 끌어당긴다)
    …미쳤나 봐, 내가.

    **내레이션 (현우):**
    점점 선명해지는 긁는 소리.
    마치 손톱으로 벽지를 찢어내려는 듯한, 끈적하고 불쾌한 소리였다.
    환청이라고 애써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내 피부에 닿는 차가운 공기처럼, 그 소리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장면 7]**
    **배경:** 다음 날 아침. 현우는 부엌에서 커피를 내리고 있다. 피곤한 얼굴이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통화 중이다.

    **현우 (통화 중):**
    …어, 민준아. 나야.
    (한숨)
    아니, 잠을 좀 설쳤어.
    (피식, 애써 웃는 표정)
    무슨 귀신이야, 내가 나이를 몇이나 먹었는데. 그냥 잠자리가 불편한가 봐.
    아니, 근데 좀… 이상하긴 해.
    음… 냉장고 문이 자꾸 열리고, 연필이 막 쏟아지고. 벽에서 이상한 소리 나고.
    옆집 애가 장난치는 건가? 내가 딱히 원한 살 일도 없는데.

    **민준 (수화기 너머, 목소리):**
    야,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 잠도 못 자고 헛것 보는 것 같다고 하니까 하는 말이지.
    하여간, 그 동네 자체가 좀 으스스하긴 해. 오래된 아파트잖아.
    혹시 진짜 누가 숨어들어온 거 아니야? 문단속은 잘 했고?

    **현우:**
    (어이없다는 듯 웃음)
    이 낡아 빠진 아파트에 누가 숨어들어 와. 그리고 문단속이야 칼같이 하지.
    몰라, 그냥 피곤해서 그런가 봐.

    **민준 (수화기 너머):**
    야, 혹시 모르니까 오늘 저녁에 맥주나 한잔 할래? 집에서.
    (피식)
    내가 너네 집 가서 탐정 놀이 좀 해줄게. 누가 문 열고 연필 던지는지.

    **현우 (피로하지만 조금 안심한 듯 미소 짓는다):**
    그래라. 와서 술이나 까.

    **내레이션 (현우):**
    친구의 농담 섞인 위로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수도 있다.
    냉장고는 그냥 낡은 거고, 연필은 내가 험하게 다룬 거고, 벽 소리는 층간 소음이겠지.
    아마도.

    **[장면 8]**
    **배경:** 한밤중의 현우 아파트. 거실 불은 꺼져 있고, 주방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온다. 현우가 현관문을 꼼꼼히 잠그고 안전장치까지 내린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불안감이 엿보인다.

    **사운드:** (철컥) (현관문이 잠기는 소리)

    **내레이션 (현우):**
    민준이 돌아가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조금은 술기운에 나른해진 몸을 이끌고 침실로 향했다.
    민준은 “아무것도 없잖아! 그냥 너 피곤한 거야!”라며 낄낄댔지만, 왠지 모르게 불길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그래서 현관문을 평소보다 더 꼼꼼히 잠갔다.
    안전장치까지 이중으로 걸어 잠그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장면 9]**
    **배경:** 현우의 침실. 현우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눈을 감으려 애쓰는 표정.
    **사운드:** (짤그랑… 짤그랑…) (쇠가 부딪히는 소리, 주방 쪽에서 들려오는 듯하다.)

    **현우 (속삭임):**
    …젠장.

    **내레이션 (현우):**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주방에서부터.
    냉장고 문 열리는 소리인가?
    아니, 그보다 더 둔탁하고, 불쾌한 쇠붙이 소리.
    마치 누군가 부엌칼을 식탁에 질질 끄는 듯한 소리였다.

    **현우 (벌떡 일어난다. 심장이 발끝까지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느낌):**
    …누구야.

    **내레이션 (현우):**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나는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부엌 쪽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설마, 민준이 말했던 대로 정말 누가 침입한 건가?
    하지만 현관문은 분명 잠겨 있었다.
    이중으로.

    **[장면 10]**
    **배경:** 거실과 부엌 사이의 복도. 현우는 조심스럽게 부엌 입구로 다가간다. 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창백하다. 부엌은 어둡지만, 창밖의 희미한 불빛과 내부의 미약한 광원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현우 (속삭임):**
    …거기 누구 없어요?

    **사운드:** (탁… 탁… 탁…) (부엌 식탁 위에서 무언가가 규칙적으로 부딪히는 소리. 점차 빨라지고 강해진다.)

    **내레이션 (현우):**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식탁 위에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감으로 식탁을 두드리는 것처럼.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훨씬 더 섬뜩하고, 의도적인 소리로 들렸다.
    나는 용기를 내어 부엌 입구에 섰다.

    **[장면 11]**
    **배경:** 현우의 부엌. 어둠 속에서 식탁 위가 희미하게 보인다. 현우가 부엌 문간에 서서 공포에 질린 얼굴로 식탁을 응시한다. 식탁 위에는 유리컵 하나가 허공에 떠 있다.

    **현우 (경악에 찬 비명):**
    끄아아악!

    **내레이션 (현우):**
    그리고, 보았다.
    식탁 위에는 내가 방금 전에 마시고 대충 엎어놓았던 유리컵이 있었다.
    그 컵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식탁 위를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니, 굴러다니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컵을 들어 올렸다가, 탁, 하고 식탁에 내려놓는 듯했다.
    반복적으로.
    규칙적으로.
    그리고 내가 보는 앞에서, 그 컵은 공중으로 솟구치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사운드:** (쨍그랑!) (유리컵 깨지는 소리)

    **[장면 12]**
    **배경:** 부엌 바닥. 산산조각 난 유리컵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현우는 그대로 얼어붙은 듯, 공포에 질린 채 부엌 문간에 서 있다. 그의 눈동자는 동공지진을 일으킨다.
    **사운드:** (끼이이이익…) (냉장고 문이 느리게 열리는 소리)

    **내레이션 (현우):**
    유리 조각들이 흩어지는 소리가, 내 귀에는 마치 비명처럼 들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이것은 현실이 아니었다.
    환각일 거야.
    누가 나에게 장난을 치는 거야.

    **현우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내레이션 (현우):**
    내 질문에 대한 답인 양, 이번에는 냉장고 문이 느릿하게 열렸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섬뜩하게 비췄다.
    그리고, 그 안에서…
    아니, 그 안 *뒤*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장면 13]**
    **배경:** 냉장고 문이 활짝 열린 상태. 안쪽 벽면에 희미하고 기괴한 형상이 어른거린다. 마치 벽의 얼룩 같기도 하고, 무언가의 잔상 같기도 한, 기분 나쁜 형태. 너무나도 모호해서 제대로 알아볼 수 없지만, 불쾌감을 주는 형태이다. 현우는 그것을 보고 완전히 얼어붙는다. 그의 시선은 공포로 가득 차 있다.

    **내레이션 (현우):**
    그것은 형체가 없었다.
    아니, 너무나도 많은 형체를 동시에 가진 듯했다.
    벽에 스며든 그림자인가. 아니면 냉장고 속 성에가 만들어낸 착시인가.
    너무 흐릿해서 윤곽을 잡을 수 없었지만,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을 꿰뚫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것은, 분명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치 내 존재의 근원을 조롱하듯이, 냉장고 속의 찬 공기가 심장을 짓누르는 듯했다.

    **사운드:** (쉬이이이익…) (차가운 공기가 새어 나오는 소리. 또는 미세한 속삭임 같은 소리.)

    **내레이션 (현우):**
    그것은,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아파트에, 내 세상에, 침투해버린…
    어떤, *균열*이었다.

    **[장면 14]**
    **배경:** 현우의 얼굴 클로즈업. 눈은 공포와 경악으로 가득 차 있고, 입은 벌어져 있지만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듯하다. 눈동자에 희미하게 냉장고 속의 형상이 비친다. 그의 정신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

    **현우 (목에서 간신히 쥐어짜내는 듯한 신음):**
    …아아…

    **내레이션 (현우):**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그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그 잔해 위로, 섬뜩한 어둠이 드리워졌다.
    더 이상, 아무것도 예전 같지 않을 것이다.
    아파트가, 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마지막 장면]**
    **배경:** 아파트 외관. 밤하늘 아래, 현우의 아파트 창문 하나에서 희미한 불빛이 깜빡인다. 도시의 불빛 속에 파묻혀 평범해 보이지만, 어딘가 음산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 창문 뒤 실루엣으로 현우의 형체가 공포에 질려 비틀거리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다.

    **내레이션 (현우):**
    그 밤, 나의 지옥은 시작되었다.
    아니, 이미 시작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몰랐을 뿐.
    이 아파트는 더 이상 나의 집이 아니었다.
    그것의… 놀이터였다.
    그리고 나는, 그 안에 갇혔다.


    **[다음 화 예고]**
    **배경:** 어둠 속에서 문틈으로 끈적한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는 모습.
    **내레이션:** 벽 속에서 들려오는 속삭임, 문틈으로 스며드는 그림자. 이현우는 과연 이 기괴한 공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다음 에피소드에서, 광기는 더욱 깊어진다.

  • 로맨틱 코미디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달무리 베이커리] 1화 – 달콤한 이방인

    **로그라인:** 망해가는 빵집 사장 아라와 차가운 달빛을 닮은 신비한 존재 이한. 평범한 인간과 달빛족이라는 종족을 뛰어넘는, 달콤하지만 금지된 로맨틱 코미디가 시작된다!

    **등장인물:**

    * **김아라 (20대 중반):** ‘달콤한 조약돌’ 베이커리 사장. 긍정적이고 활발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다. 손님을 끄는 친화력은 최고.
    * **이한 (20대 중반으로 보임):** 신비로운 분위기의 미남. ‘달빛족’이라는 고대 종족의 일원. 차갑고 이성적인 성격이지만, 어딘가 외로워 보인다. 인간과의 접촉은 금지되어 있다.

    **[프롤로그]**

    **1컷: 푸른 새벽, 고요한 도시 전경 위로 보름달이 환하게 떠 있다. 달빛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연출. (잔잔하고 신비로운 BGM)**
    내레이션(이한): 우리는 달빛 아래에서 태어나, 달빛 아래에서 살아간다.
    내레이션(이한): 인간들의 세상과는 동떨어진, 고립된 존재들.

    **2컷: 고풍스러운 서재. 책상에 앉아 낡은 고서를 읽고 있는 이한의 옆모습. 그의 피부는 달빛처럼 희고, 머리카락은 은빛이 감돈다. (책장 너머로 은은한 달빛이 스며든다)**
    내레이션(이한): 인간과 교류하는 것은 금지된 일.
    내레이션(이한): 우리의 존재 자체가 위험이 될 수 있기에.

    **3컷: 그러나…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지는 작은 베이커리. ‘달콤한 조약돌’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과 케이크들이 진열되어 있다.**
    내레이션(이한): 어느 날, 그 달콤한 향기가… 나를 끌어당겼다.

    **[본편 시작]**

    **1화: 달콤한 이방인**

    **[1]**

    **1컷: ‘달콤한 조약돌’ 베이커리 주방. 아라가 온몸으로 빵 반죽을 치대고 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얼굴에는 밀가루가 묻어 있지만 표정은 밝다.**
    아라: (으으으읍!) 야, 이 반죽!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냐!
    (효과음: 찰싹찰싹!) (힘겨운 호흡)

    **2컷: 아라의 옆으로 보이는 낡은 베이커리 내부.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진 벽, 손님은 아라뿐이다.**
    아라: (독백: 벌써 세 번째 망한 빵집 자리라던데…)
    아라: (독백: 괜…괜찮아! 난 김아라잖아! 긍정의 힘으로!)

    **3컷: 아라가 밝게 웃으며 갓 구운 빵들을 진열대에 올려놓는다.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화면 너머까지 퍼지는 듯한 연출.**
    아라: 자아, 오늘도 맛있게 구워졌습니다! 어서 오세요!
    (효과음: 달콤한 빵 냄새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름))

    **4컷: 그러나 가게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관심하게 지나칠 뿐,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다. 아라의 미소가 살짝 시들해진다.**
    아라: (어깨 축 처짐) 하아… 개시도 못 하고 벌써 오전이 다 가네.
    (효과음: 씁쓸한 바람 소리)

    **5컷: 그때, 문이 열리며 시원한 종소리가 울린다. (효과음: 짤랑!) 고개를 들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남자가 문가에 서 있다.**
    아라: (눈 번쩍!) 어서 오세요!
    (효과음: 반짝!)

    **6컷: 이한의 클로즈업. 창백한 피부, 은회색 머리카락,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그는 마치 다른 세상에서 온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효과음: (조용한) 스르륵…)

    **7컷: 아라가 침을 꿀꺽 삼킨다. 이런 비주얼의 손님은 처음이다.**
    아라: (독백: 와, 무슨 만화 주인공이 걸어 들어왔냐…)
    아라: (독백: 게다가 저 신비로운 아우라… 단골 만들면 우리 가게 흥할 각인데?!)

    **8컷: 이한이 진열된 빵들을 잠시 훑어본다. 그의 시선은 모든 빵을 스쳐 지나, 한 곳에 멈춘다.**
    아라: (활짝 웃으며) 어떤 빵 드릴까요? 오늘 갓 구운 따끈따끈한 크루아상도 있고요, 고소한 마늘 바게트도 있어요! 아, 어제 새로 개발한…!

    **9컷: 이한의 시선이 멈춘 곳은 가장 평범하고 투박해 보이는 ‘오리지널 스콘’이었다.**
    이한: …스콘.

    **10컷: 아라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는다. (효과음: 삐끗!)**
    아라: 네? 스… 스콘이요? 아, 네! 물론 맛있죠!
    아라: (독백: 아니, 저 비주얼에 스콘이라니? 단짠 크로플이나 애플파이 같은 거 고를 줄 알았는데… 의외의 픽이네.)

    **11컷: 아라가 재빠르게 스콘 한 개를 포장한다. 이한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한다.**
    아라: (웃음) 맛있게 드세요! 따뜻하게 데워 드릴까요? 아니면…

    **12컷: 이한이 아무 말 없이 카운터에 지폐를 내려놓는다. 정확히 스콘 값이다. 그의 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하얗다.**
    이한: 됐습니다.

    **13컷: 이한이 스콘을 받아들고 몸을 돌린다. 그는 단 한 번도 아라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아라: (독백: 저 얼굴로 저렇게 쌀쌀맞게 말하다니… 근데 왜 심장은 이렇게…)
    (효과음: (작게) 두근)

    **14컷: 이한이 가게 문을 열고 나간다. 그의 뒷모습이 사라지자마자, 가게 안은 다시 텅 빈 듯한 고요함에 잠긴다.**
    아라: (털썩) 하아… 무슨 얼음 왕자님인가.
    아라: (독백: 그래도… 왠지 모르게 계속 생각나는 얼굴인데.)

    **[2]**

    **15컷: 며칠 후, 아침. 이한이 어김없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는 언제나처럼 말없이 ‘오리지널 스콘’ 하나를 집어 들고 계산대로 온다.**
    아라: (방긋) 어서 오세요, 손님! 오늘도 스콘이시네요?
    (효과음: 짤랑!)

    **16컷: 이한은 묵묵히 스콘 값을 내려놓는다. 아라는 그에게 말을 붙여보려 애쓴다.**
    아라: 매번 스콘만 드시는 거 보면, 스콘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이한: (무표정) …

    **17컷: 이한이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그의 은회색 머리카락이 달빛처럼 스르륵 흘러내린다.**
    아라: (독백: 저 무표정, 저 침묵… 쉽지 않은 상대군.)
    아라: (능글맞게 웃으며) 혹시 스콘 말고 다른 빵도 드셔보시는 건 어때요? 제가 오늘 특별히 만든…!

    **18컷: 이한이 아라의 말을 끊고 스콘을 받아든다. 역시 눈은 마주치지 않는다.**
    이한: 괜찮습니다.

    **19컷: 이한이 뒤돌아 가게를 나선다. 아라는 허탈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다.**
    아라: (어깨 축 늘어뜨리며) 저, 정말 철벽이네…

    **20컷: (시간 경과 – 며칠 후) 아라가 진열된 빵을 보며 한숨을 쉰다. 여전히 손님은 이한 한 명뿐이다.**
    아라: 오늘도 이한 씨만 왔다가셨네… 이한 씨 덕분에 스콘 재고는 없지만…
    아라: (독백: 이래선 적자 면하기도 힘들어!)

    **21컷: 아라가 주방에서 새 빵을 구워내다 실수로 뜨거운 오븐 트레이를 맨손으로 잡을 뻔 한다. (효과음: 앗뜨거!)**
    아라: 앗! 뜨거워!

    **22컷: 트레이를 놓치려는 순간, 문이 열리며 이한이 들어선다. (효과음: 짤랑!) 그는 순간적으로 아라를 향해 손을 뻗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지만, 이내 멈춘다.**
    이한: (표정 변화 없음) …

    **23컷: 아라는 겨우 손잡이를 잡아 트레이를 내려놓는다. 이한은 이미 스콘을 집어 들고 카운터에 서 있다.**
    아라: (가슴 쓸어내리며) 휴우… 손님, 놀랐잖아요.
    아라: (독백: 왠지 모르게 이한 씨 들어오는 순간, 손이 덜 뜨거웠던 것 같은… 기분 탓이겠지?)

    **24컷: 아라가 지폐를 받고 거스름돈을 건네려던 순간, 이한의 손이 아라의 손에 닿는다. (효과음: 스윽)**
    아라: (화들짝 놀라며) 으앗?!
    (효과음: (작게) 찌릿!)

    **25컷: 아라의 손을 잡은 이한의 손. 그 손은 얼음장처럼 차갑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차가운 한기에 아라가 소름 돋는다.**
    아라: (독백: 으으… 뭐야, 이 손! 얼음인가?!)
    이한: …죄송합니다.

    **26컷: 이한은 재빨리 손을 거두고, 스콘을 들고 황급히 가게를 나선다. 평소보다 그의 움직임이 빠르다.**
    아라: (멍하니 손을 바라본다) 뭐… 뭐야? 저 손…
    (효과음: 스산한 바람 (휙))

    **27컷: 아라의 손등에 희미하게 서리가 맺혔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아라는 눈을 비비며 다시 본다.**
    아라: (독백: 내가 잘못 본 건가? 서리가… 맺혔던 것 같은데?)

    **[3]**

    **28컷: 다음 날 아침, 여전히 이한은 스콘을 사러 온다. 아라는 그를 보자마자 다가간다.**
    아라: 손님! 어제 그 손…
    이한: (차가운 목소리로) 스콘.

    **29컷: 이한은 아라의 말을 끊고 얼른 스콘을 집어 든다. 그의 눈빛에 미세한 불안감이 스친다.**
    아라: (독백: 또다시 철벽!)
    아라: (억지로 밝게) 하하… 네! 스콘이요!
    (효과음: 삐그덕)

    **30컷: 그때, 갑자기 가게 전체의 전등이 깜빡거리더니, ‘퍽!’ 소리와 함께 가게 전체가 정전된다. (효과음: 퍽! 지지직! 콰앙!)**
    아라: 으앗! 뭐야?! 정전?!
    (효과음: 쨍한 정적)

    **31컷: 순식간에 암흑으로 변한 가게 안. 진열된 빵들이 어둠 속에 잠긴다.**
    아라: (당황) 어떡해! 오븐도 꺼졌을 텐데… 주문 들어온 케이크도 아직 안 만들었는데!

    **32컷: 아라가 더듬더듬 휴대폰을 찾아 손전등을 켜려고 한다. 그때, 이한의 주변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온다. 마치 달빛이 응축된 듯한 빛이다.**
    (효과음: (조용히) 스스슥…)

    **33컷: 이한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작게 튀어 오르더니, 진열된 스콘 위로 작은 얼음 결정이 맺힌다. 그러나 곧바로 사라진다.**
    아라: (독백: 저 빛… 뭐야?)

    **34컷: 이한은 황급히 빛을 거두고, 스콘을 계산대에 내려놓는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혼란과 경계심이 스쳐 지나간다.**
    이한: (낮은 목소리) 죄송합니다.
    (효과음: (작게) 파스스…)

    **35컷: 이한이 스콘을 들고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간다. (효과음: 쾅!) 아라는 어둠 속에서 멍하니 서 있다.**
    아라: …방금, 뭐였지?

    **36컷: 아라의 휴대폰 플래시가 켜진다. 빛이 비추는 곳에, 방금 이한이 내려놓았던 스콘이 놓여 있다. 그 스콘 위에는 작은 얼음 결정 하나가 녹아 사라지고 있다.**
    아라: (눈 커짐) 어… 얼음?!

    **37컷: 스콘을 만져보니 차갑다. 아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가게 문을 바라본다.**
    아라: (독백: 저 남자… 대체 정체가 뭐야?)
    아라: (결심한 듯) 다음엔 꼭! 꼭 붙잡고 물어봐야겠어!

    **38컷: (장면 전환) 어둠 속 숲. 나무들 사이로 달빛이 스며든다. 이한이 빠르게 숲 속을 걷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번민이 가득하다.**
    이한: (독백: 들킬 뻔했다. 인간과 접촉하면 안 돼… 특히 저 여자와는.)
    이한: (독백: 하지만… 그 달콤한 향기는…)

    **39컷: 이한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보름달을 응시한다. 그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푸르게 빛난다. 그의 손에 들린 스콘에서 여전히 미약한 냉기가 느껴진다.**
    이한: (독백: 금지된 이끌림…)
    내레이션(이한): 달콤한 향기는 곧, 치명적인 독이 될 것을 알면서도…
    내레이션(이한): 나는, 오늘도 그녀의 가게로 향하고 만다.

    **[에피소드 종료]**

  • 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연재 웹소설: 비검 무영 (飛劍無影)**
    **제12화: 옥청각의 밀실**

    정파 명문, 화산검문의 깊은 곳. 겹겹의 봉인과 수십 개의 수호진이 지키는 옥청각은 늘 적막했다. 그곳은 문파의 최고 원로 중 한 명인 금로(金老)께서 수십 년간 폐관 수련에 정진하던 성지였다. 누구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었으며, 영력을 이용한 침입조차 불가능하다는 것이 정설처럼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날, 적막은 처참하게 깨어졌다.

    “문이…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금로께서 응답이 없으십니다!”

    호위대장 철룡(鐵龍)의 다급한 외침이 새벽 공기를 갈랐다. 매일 아침 금로의 기상에 맞춰 영초 차를 올리던 시동이 비명처럼 소리쳤고, 곧 수십 명의 호위 무사들이 옥청각 앞에 집결했다. 철룡은 가장 강력한 수호진의 봉인석을 해제하려 애썼지만, 굳게 잠긴 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안에서 잠긴 듯, 혹은 외부의 영력에 완전히 저항하는 듯, 완강하게 침묵했다.

    “젠장,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감히 누가 금로의 처소에 장난질을 한단 말이냐!”

    철룡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뒤로 백발의 문파 종주, 현진도인(玄眞道人)이 창백한 얼굴로 다가섰다.

    “철룡, 무슨 소란이냐. 금로께 누가 되는 짓은 용납치 않겠다.”

    “종주님! 송구하오나, 금로께서 응답이 없으십니다. 이 문은… 밖에서 봉인된 것이 아니라, 안에서 강력하게 잠겨 있는 듯합니다. 저희의 힘으로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현진도인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였다. 금로께서는 최근 중요한 수련에 들어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렇게 응답이 없을 리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어서 문을 부숴라! 안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확인해야 한다!”

    종주의 명에 따라 최정예 호위 무사들이 각자의 영력을 끌어모아 봉인된 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번개가 치고 지축이 흔들렸지만, 옥청각의 문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문에 새겨진 고대 문양들이 푸른빛을 발하며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그때였다. 옥청각 뒤편, 한때는 검은 연못이었으나 지금은 반쯤 말라버린 연못가를 한가롭게 거닐던 한 청년이 다가왔다. 옅은 녹색의 도포를 걸치고, 한 손에는 검은 자갈 하나를 굴리고 있는 모습은 이 엄숙한 상황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보였다.

    “소란이 크군.”

    나직한 그의 목소리가 긴장된 공기 속을 파고들었다. 현진도인이 고개를 돌렸다.

    “백하늘(白河樂)! 네놈은 이곳에 무슨 일로 왔느냐? 지금은 물러가 있거라.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다.”

    백하늘은 화산검문의 이단아였다. 출중한 검재를 지녔지만, 정파의 고루한 규칙을 따르지 않고 기이한 것에만 탐닉했다. 하지만 지난번, 문파 내부에 감춰진 보물 도난 사건을 귀신같이 해결하며 그의 천재성은 만천하에 드러난 바 있었다.

    “음, 옥청각의 문이 이렇게 요동치는 건 처음 보는군요. 금로께서 혹시 기묘한 신공을 개수하신 것인가요?” 백하늘은 눈을 가늘게 뜨며 봉인된 문을 응시했다.

    현진도인의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 “네가 감히 금로를 희롱하느냐! 지금은 비상 상황이다. 얼른 돌아가거라.”

    “비상 상황이라… 그렇다면 안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그 일은 외부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아주 교묘한 문제일 테고요. 이 문이 종주님의 영력 공격에도 끄떡없는 것을 보니, 분명 안에서 단단히 걸쇠가 채워진 밀실이 틀림없습니다.”

    백하늘의 말에 현진도인은 할 말을 잃었다. 그들은 그저 문이 ‘강력하게 봉인되었다’고만 생각했지, ‘안에서 걸쇠가 채워진 밀실’이라고 단정 짓지는 못했다. 백하늘은 이미 상황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백하늘! 네 놈, 기어이…” 철룡이 분노하며 검을 뽑으려 했지만, 현진도인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기다려라, 철룡. 백하늘, 네 말대로 안에서 걸쇠가 채워진 것이라면… 우리가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백하늘은 피식 웃었다. “밀실이라면, 밀실 전문가가 필요하겠지요. 마침 제가 좀 아는 바가 있어서요.”

    그는 더 이상 종주의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옥청각의 문으로 다가갔다. 다른 무사들이 문을 부수느라 놓쳤던, 문틀에 박힌 작은 영력 주입구를 유심히 살폈다. 그곳은 금로만이 알 수 있는 특정 영력 파동을 통해 봉인을 해제하는 곳이었다.

    “금로의 영력 파동… 음, 이건 마치 고요한 호수 같으면서도, 그 심연에는 격렬한 용오름이 숨어 있는 듯하군. 역시 독특하셔.”

    백하늘은 중얼거리며 자신의 손가락을 봉인석에 가져다 댔다.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흘러나왔고, 그것은 마치 금로의 영력을 흉내 내는 듯 섬세하게 봉인석 내부로 파고들었다. 잠시 후, 웅장한 문에서 ‘딸깍’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주위의 모든 이들이 숨을 멈췄다.

    철룡이 눈을 비볐다. “말도 안 돼… 그 봉인이 해제되다니!”

    현진도인의 눈빛에도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백하늘은 얇게 열린 문틈으로 먼저 발을 들여놓았다. 옥청각 내부는 어둠침침했다. 켜져 있어야 할 영등(靈燈)은 꺼져 있었고, 공기 중에는 짙은 비린내와 함께 묘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 적막은 살아있는 자의 기척이 사라진 공간 특유의, 차갑고 끈적한 느낌이었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발소리가 울렸다. 이윽고 시야가 익숙해지자, 방 한가운데서 연좌 자세로 앉아 있는 금로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깊은 삼매경에 빠진 듯 평온해 보였다.

    “금로!”

    뒤따라 들어온 철룡이 다급하게 외치며 금로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나 백하늘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대장, 잠시 멈추시오. 이곳의 영력이… 뭔가 이상합니다.”

    백하늘은 방 안의 공기 흐름, 영력의 잔류 상태, 그리고 미세한 향의 변화를 감지하려 애썼다. 그의 눈동자는 방 안의 모든 것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바닥의 먼지 한 톨, 창문에 맺힌 이슬 한 방울, 심지어 공기 중의 습도까지도 그의 분석 대상이었다.

    이윽고, 그가 금로의 옆으로 다가섰다. 금로의 등은 여전히 곧았고, 얼굴에는 평화로운 미소가 어린 듯했다. 그러나 백하늘의 눈은 그 미소 뒤에 감춰진 무언가를 발견했다. 금로의 정수리 부분에서 아주 미세하게,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영력의 파문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폭풍이 지나간 후에 남은 잔해처럼, 혼란스러운 영력의 흔적이었다.

    백하늘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금로의 어깨에 대었다. 차가웠다. 생기가 완전히 사라진 차가움. 그리고 그 순간, 평온해 보이던 금로의 몸이 마치 모래성처럼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사르르… 옷 속에서 드러난 몸은 한 줌의 재처럼 바스러져, 순식간에 흩날리는 먼지가 되어 바닥에 내려앉았다.

    “금로께서… 돌아가셨어!” 철룡이 망연자실하며 외쳤다.

    현진도인 역시 충격에 휩싸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 봉인된 밀실 안에서 누가 감히 금로를 살해했단 말인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니!”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무너져 내린 금로의 잔해만이 모든 이들의 눈앞에서, 밀실 살인의 불가사의함을 소리 없이 외치고 있었다.

    백하늘은 무너져 내린 금로의 재를 묵묵히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방의 구석구석을 다시 한번 훑었다. 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창문은 안팎으로 완벽하게 봉인되어 있었다. 침입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밀실… 완벽한 밀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지.”

    그의 눈길은 방 한쪽 벽에 걸린 낡은 족자로 향했다. 족자에는 푸른 학 한 마리가 평화롭게 구름 속을 유영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평화로워 보였다.

    “흠…”

    백하늘은 족자 아래, 바닥에 아주 희미하게 번진 검은 얼룩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시선으로는 그저 오래된 흔적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백하늘의 눈에는 달랐다. 그것은 액체의 흔적이었고, 그 액체는 마치 영력을 흡수해 형태를 바꾼 듯한 미세한 이물질을 머금고 있었다.

    “대장, 이 족자는 늘 여기에 걸려 있던 것입니까?” 백하늘이 물었다.

    철룡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금로께서 아끼시던 족자라, 수십 년간 저곳에 걸려 있었습니다만…”

    백하늘은 대답 대신 족자 아래의 바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것 보시오. 이 흔적. 마치 먹물이 번진 것 같지만, 일반적인 먹물과는 다릅니다. 미세한 영력의 파편이 섞여 있군요. 그리고 이 방향… 족자 아래에서 벽 쪽으로, 마치 흘러내린 듯한 자국이 보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백하늘의 손끝으로 향했다. 현진도인이 돋보기를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자세히 보니, 희미하지만 분명한 검은색 얼룩이 벽을 따라 아래로 흐른 듯한 자국이 보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백하늘?” 현진도인이 물었다.

    백하늘은 고개를 들어 족자를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족자 뒤편의 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벽에는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미세한 균열이 나 있었지만, 그것이 살인과 무슨 관계가 있을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종주님, 혹시 금로께서 수련하시던 신공(神功) 중에, 몸의 형태를 일시적으로 변화시키거나, 혹은 영력을 극도로 압축하는 종류의 비기(秘技)가 있었습니까?”

    현진도인은 백하늘의 뜬금없는 질문에 의아해했다. “금로께서는 무형무상(無形無相)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일생을 바치셨지. 자신의 영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경지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 사건과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이냐?”

    백하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만약 금로께서 자신의 영체를 자유자재로 다루셨다면, 이 밀실은 처음부터 밀실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말에 현진도인과 철룡은 동시에 경악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백하늘!”

    “살인자는 이 족자 뒤의 벽을 이용했을 겁니다. 그리고 금로께서는… 스스로 문을 열어준 것이나 마찬가지죠. 죽음의 통로를.”

    백하늘의 시선은 다시 족자 뒤편의 벽, 그 미세한 균열로 향했다. 그 안에서, 그는 평범한 살인이 아닌, 영체의 경지를 이용한 기묘하고 잔인한 트릭의 윤곽을 보고 있었다.

    “진정으로 봉인된 것은 문이 아니었습니다. 금로의 육신이었죠.”

    방 안의 공기는 더욱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무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모두가 다음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백하늘은 아직 답을 완성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모든 퍼즐 조각을 맞춘 듯 빛나고 있었다.

    “이 검은 흔적은 힌트입니다. 금로께서 마지막 순간에 남긴… 죽음의 편지.”

    그는 손가락으로 다시 한번 벽의 균열을 가리켰다. 그리고 모두에게,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살인 트릭의 첫 번째 단서를 던졌다.

    “밀실은 없었습니다. 오직… 벽을 타고 흐른 죽음만이 있었을 뿐.”

    **[다음 화에 계속]**

  • 스페이스 오페라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오리온의 눈물: 제11화 – 밀실의 숨결**

    정적. 그것은 마치 우주 자체의 침묵을 찢어내어 이 작은 공간에 응축해 놓은 듯했다. 시리우스 연맹의 최첨단 연구 기지, ‘오리온의 눈물’ 스테이션의 심장부. 그중에서도 외부로부터 완벽히 격리된 제7 연구실은, 철저히 통제된 밀폐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차가운 죽음의 기운으로 가득했다.

    강진우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핏자국 하나 없는 청정 공간을 훑었다. 그의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은 데이터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발광 패널, 정교하게 정렬된 다차원 분광기,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앙에 놓인 데이터 콘솔에 상반신을 기댄 채 쓰러져 있는 시신. 고도로 지능적인 외계 문명의 언어를 해독하던 천재 언어학자, 카엘 박사였다.

    “보고된 바에 따르면, 제7 연구실은 완벽한 밀실입니다, 진우 경위님.”

    스테이션 보안 총괄자, 라이라 소령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카엘 박사의 동료이자 오랜 친구이기도 했다. 진우의 뒤에서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에어록은 내부에서 잠겨 있었고, 외부에서는 어떠한 침입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박사님의 유전 코드 외에는 그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보안 시스템은 최고 등급으로 작동 중이었고… 침입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 진우는 그 단어를 작게 되뇌었다. “이 우주에 불가능한 일은 없죠. 다만, 당신이 그 방법을 모를 뿐.”

    그의 시선은 시신에 멈췄다. 카엘 박사는 연구복 차림 그대로였다. 특이하게도 그의 손가락은 데이터 콘솔의 가장자리를 강하게 그러쥔 채 굳어 있었고, 손톱 밑에는 미세한 붉은 흔적이 보였다. 마치 죽음의 순간까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움켜쥐려 한 것처럼.

    “사인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보안팀장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외부 공격 흔적 없음. 혈액 검사 결과, 독극물 반응 없음. 내부 장기 손상도… 현재까지는 특이 사항 없습니다.”

    진우는 무릎을 굽혀 시신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카엘 박사의 얼굴을 스캔했다.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 그러나 광포한 절규는 아니었다. 마치 깊은 심연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 듯한, 절망적인 체념.

    그는 박사의 손을 유심히 살폈다. 손톱 밑의 붉은 흔적. 피였다. 누구의 피인가? 박사 자신의 것인가? 하지만 시신에 외상은 없었다.

    “에어록은 어떻게 잠겨 있었죠?” 진우가 물었다.

    라이라 소령이 침을 삼켰다. “내부 통제 패널을 통해 잠금이 활성화되어 있었습니다. 외부에서도 해제할 수 없도록 이중으로 잠겨 있었죠. 긴급 상황 시에만 중앙 제어실에서 강제 해제가 가능하지만, 그 역시 로그가 모두 남습니다. 어떠한 강제 해제 기록도 없습니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에어록의 내부 제어 패널로 걸어갔다. 고도로 암호화된 터치스크린 패널은 현재 ‘잠김’ 상태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뻗어 패널 주변의 미세한 먼지를 훑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완벽하게 깨끗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제7 연구실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구조였다. 사방이 굳건한 티타늄 합금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바닥과 천장은 매끄러운 합성 폴리머 재질이었다. 환기구는 있었지만, 사람이 통과하기에는 너무나 작았다.

    “연구실 내부의 모든 센서 기록을 열람할 수 있습니까?” 진우가 물었다.

    “네, 진우 경위님. 모든 환경 센서, 음성 기록, 시각 기록, 공기 샘플 기록… 모두 보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라이라 소령이 말했다.

    “특별한 것.” 진우가 픽 웃었다. “특별한 것이 발견되었다면 당신들이 날 부르지 않았겠죠.”

    그는 연구실 중앙으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공간의 미세한 흐름, 에너지 패턴, 심지어 공기 중의 분자 움직임까지 감지하려는 듯했다. 잠시 후, 그의 눈이 번뜩 뜨였다.

    “마지막으로 카엘 박사와 접촉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라이라 소령이 즉시 답했다. “오늘 아침 07시 30분, 박사님의 보조 연구원인 세라 영이 아침 식사를 가져다주기 위해 에어록 밖에서 대화했습니다. 그 후로는 아무도 박사님과 직접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에어록 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없습니다.”

    “음성 기록이 있습니까?”

    “네. 에어록 외부 센서에 기록된 대화 기록이 있습니다.”

    “틀어보세요.”

    잠시 후, 연구실 내부의 스피커를 통해 두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박사님, 아침 식사입니다. 식욕이 없으시더라도 조금이라도 드시는 게 좋을 거예요.” (세라 영)
    — “고마워, 세라. 잠시 후에. 지금 중요한 순간이라.” (카엘 박사)
    —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오늘 컨퍼런스 준비도 하셔야 하잖아요.” (세라 영)
    — “알고 있다. 걱정 마라. 곧 나갈 테니.” (카엘 박사)

    그것이 카엘 박사의 마지막 목소리였다. 기록은 거기서 끝났다.

    “박사님은 왜 나가지 않았죠?” 진우가 물었다. “곧 나갈 거라고 했는데.”

    “그것이 저희도 의문입니다.” 라이라 소령이 답했다. “컨퍼런스는 오후 2시에 예정되어 있었고, 박사님은 기조연설자였습니다. 하지만 1시 50분까지도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연락도 되지 않았고요. 결국 보안팀이 에어록을 강제 해제하고 들어갔을 때… 이미 늦었습니다.”

    진우는 다시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엘 박사의 데이터 콘솔 위에는 다 해독되지 않은 외계 언어의 기호들이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기호들 사이로, 그는 미세하게 깜빡이는 작은 점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눈물방울처럼 보였다.

    그는 콘솔의 홀로그램 키패드를 조심스럽게 눌렀다. 홀로그램이 박사의 손이 그러쥐었던 부위에서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진우는 깨달았다. 박사의 손톱 밑 붉은 흔적은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긁힌 흔적이었다. 아주 작은 흠집.

    그리고 그 흠집 아래, 콘솔의 투명한 표면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미세한 균열이 나 있었다. 마치 날카로운 무언가에 의해 긁힌 것처럼. 하지만 박사는 죽어있었고, 연구실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미묘한 미소가 스쳤다.

    “범인은 이 연구실 안에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공간의 정적을 꿰뚫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연구실 밖에도 있었습니다.”

    라이라 소령과 보안팀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경위님?” 라이라 소령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우는 대답 대신, 카엘 박사의 시신이 기댄 데이터 콘솔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콘솔의 한 귀퉁이에 마치 무심코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주 작은, 거의 보이지 않는 먼지 한 조각에 시선이 멈췄다.

    그것은 먼지가 아니었다.

    아주 미세하게 반짝이는, 가늘고 투명한 실이었다. 실 끝은 박사의 옷자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고, 다른 한쪽은… 홀로그램 패널의 틈새로 사라지고 있었다.

    밀실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죽음은 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아니, 어쩌면 죽음은 처음부터 그 틈새에 숨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진우는 이 공간이 단순한 밀실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는 허리를 숙여 그 가느다란 실을 조심스럽게 집어 올렸다. 그것은 마치 우주의 먼지처럼 가볍고, 거의 형태가 없는 물질이었다. 하지만 진우의 눈에는 그 실이 범인의 흔적, 아니, 범인 그 자체로 보였다.

    “카엘 박사는 죽기 직전, 이 밀실 안에서 누군가와 싸웠습니다.” 진우가 읊조렸다. 그의 시선은 다시 천천히 연구실의 모든 면을 훑었다. “그리고 그 싸움의 증거가 아직 이 공간에 남아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보지 못했을 뿐.”

    라이라 소령은 진우의 시선을 따라 천장과 벽을 번갈아 보았다. 그 어디에도 특이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완벽하게 깨끗하고,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이었다. 그러나 진우의 눈빛은 달랐다. 그의 시선은 마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이 방에는… 또 다른 출입구가 있습니다.” 진우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라이라 소령이 반박하려 했다. “불가능합니다, 경위님! 이 스테이션의 설계도는 제가…!”

    “설계도에는 없겠죠.” 진우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원래 없었던 것을 만들어낸 흔적이니까.”

    그는 천장 구석의 아주 미세한 이음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그러나 오랫동안 이 분야에 몸담았던 자의 직감만이 알아챌 수 있는 미세한 뒤틀림.

    “저기에… 아주 정교하게 위장된 패널이 있습니다.” 진우가 말했다. “아마도 긴급 유지 보수용이거나, 혹은 그 이상의 목적을 가진 비밀 통로겠죠. 누군가 저곳을 이용해 이 방으로 침입했습니다. 그리고…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라이라 소령의 얼굴은 여전히 의문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경위님, 어떻게? 저 통로로 침입했다 하더라도, 박사님은 안에서 에어록을 잠가버렸습니다. 범인은 어떻게 밖으로 나갈 수 있었죠? 밀실은 여전히 밀실입니다.”

    진우는 천장의 패널을 가리키던 손을 내리고, 다시 카엘 박사의 시신이 쓰러져 있는 데이터 콘솔로 향했다. 그리고 박사의 손톱 밑에 긁힌 듯한 작은 흠집이 있던 바로 그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범인은 나가지 않았습니다.” 진우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라이라 소령과 보안팀장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서로를 바라봤다. 나가지 않았다고? 그럼 범인은 아직 이 방에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 방에는 진우 일행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우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그들을 응시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정확히 말하면, 범인은 박사를 죽인 순간부터 이미 이 방 안에 없었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구실 내부에 설치된 센서 패널의 경고등이 섬광처럼 번쩍였다. 동시에 스테이션의 비상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경고! 제7 연구실 구역의 압력 불균형 감지! 비상 봉쇄 절차 활성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연구실의 티타늄 합금 벽이 덜컹이며 육중한 잠금장치가 활성화되는 소리가 울렸다. 라이라 소령이 비명을 지르며 경위님을 불렀지만, 진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밀실은… 또 다른 밀실을 낳았다.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자들은, 이제 범인이 꾸민 다음 단계의 함정에 빠진 것이었다.

    진우의 눈동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처럼 빛났다. 이제 진짜 게임이 시작될 차례였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아주 미세한 실을 허공에 놓았다. 실은 중력을 잃은 듯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며, 마치 보이지 않는 연결 고리처럼, 밀실의 진실을 가리키는 듯했다.

    다음 화에 계속…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드넓은 우주는 언제나 예상보다 더 깊고, 상상보다 더 고독했다. 은하수 가장자리를 벗어나 미개척 항로를 따라 수백 광년을 날아온 탐사선 ‘아크 호’의 승무원들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거대한 망원경이 포착하는 것은 끝없는 암흑과 그 속에 점처럼 박힌 머나먼 성운들뿐이었다. 가끔씩 수면에서처럼 잔물결 이는 시공간 이상 현상이 센서에 잡히기도 했지만, 그마저도 이제는 일상적인 배경 소음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캡틴, 오늘 수면 시간은 충분하셨습니까?”

    항해사 박지호가 고요한 함교의 침묵을 깨고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미세한 피로감이 묻어 있었다. 박지호는 수십 년간 우주를 떠돈 베테랑 항해사였고, 함교의 빛바랜 홀로그램 패널들 사이에서 그의 모습은 오랜 동료처럼 편안했다.

    캡틴 김민준은 손목의 개인 단말기를 확인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군. 자네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캡틴이 쉬지 못하는데 제가 편히 잠들 수는 없죠. 어쨌든, 일상 점검은 모두 끝났습니다. 현재 엔진 출력은 99.8%로 안정적이며, 생명 유지 장치는 완벽하게 작동 중입니다.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마지막 말에 박지호는 어깨를 으쓱했다. ‘특이 사항 없음’. 지난 3년 동안 가장 자주 들었던 문장이었다. 그들은 잃어버린 문명의 흔적, 미지의 생명체, 혹은 최소한 대단한 우주적 현상이라도 찾아내길 기대했지만, 아크 호의 레이더망에 걸리는 것은 언제나 허무할 정도로 ‘없음’이었다.

    “고맙네, 박 항해사.” 김민준은 몸을 일으켜 함교 중앙의 홀로그램 테이블로 다가갔다. 푸른빛이 감도는 테이블 위에는 아크 호의 현재 위치와 주변 성계 지도가 흐릿하게 떠 있었다. “이 고요함이 때로는 가장 무서운 법이지.”

    그때였다. 찌릿, 하는 짧은 전자음이 정적을 갈랐다. 경보음은 아니었지만, 분명 평소와는 다른 종류의 신호였다.

    “무슨 일이지?” 김민준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박지호가 재빨리 자신의 콘솔로 돌아가 데이터를 확인했다. “어? 이건… 이상하네요.” 그의 목소리에 미약한 긴장감이 실렸다. “아크 호 전방 3천만 킬로미터 지점에서 미약한 에너지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불규칙적이고, 기존에 파악된 어떤 천체와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미약하다고?” 김민준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어느 정도지?”

    “지금까지 우리 센서가 탐지할 수 있었던 가장 작은 소행성보다도 훨씬 작습니다. 하지만… 신호가 특이해요. 자연적인 것이라기엔 너무… 정교합니다.”

    김민준은 주저 없이 말했다. “수석 과학자 이수진 박사에게 연결하게.”

    잠시 후, 벽면의 통신창에 이수진 박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막 잠에서 깬 듯 흐트러진 머리칼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났다.

    “무슨 일입니까, 캡틴?”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제 생체 시계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또 평범한 성간 먼지 구름이라도 발견했습니까?”

    “이번엔 다를 수도 있습니다, 박사. 박 항해사가 전방에서 미약하지만 특이한 에너지 신호를 감지했습니다.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보고입니다.”

    이수진 박사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자연적이지 않다?” 그녀는 그제야 흥미를 느낀 듯 몸을 바로 세웠다. “데이터를 전송해 주십시오. 즉시 확인하겠습니다.”

    수 분 후, 이수진 박사의 분석 결과가 함교로 전송되었다.

    “캡틴, 박 항해사의 말이 맞습니다. 이건… 제가 본 어떤 것과도 다릅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잠기운이 완전히 가시고 순수한 호기심과 흥분이 가득했다. “이 신호는 매우 약하지만, 분명한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인공적인 신호처럼요. 하지만 어떤 문명에서도 사용된 적 없는 주파수 대역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김민준이 물었다.

    “고정되어 있습니다. 주변에 다른 천체는 없고요. 이 드넓은 암흑 공간에 홀로 떠 있는 겁니다.” 이수진 박사는 통신창 너머로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를 냈다. “캡틴, 이건 대단한 발견이 될 수 있습니다. 수백 광년 동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

    김민준은 홀로그램 테이블 위를 응시했다. 푸른빛 점으로 표시된 아크 호, 그리고 그보다 훨씬 작게 깜빡이는 미지의 신호. 3천만 킬로미터는 아크 호의 최신 엔진으로도 며칠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들이 여기까지 온 이유를 생각하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박 항해사, 속도를 줄이고 해당 좌표로 진입 준비를 하게.”

    “예, 캡틴. 하지만… 안전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미지의 존재라면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박지호의 우려 섞인 목소리였다.

    “맞는 말일세.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서 관측만 하다가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거야.” 김민준은 단호하게 말했다. “최소 접근 거리는 100킬로미터로 설정하고, 모든 방어막을 최대로 올리게. 비상 탈출 준비도 해두고. 이수진 박사는 즉시 함교로 올라와 직접 관측을 맡도록.”

    “알겠습니다, 캡틴!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이수진 박사의 목소리에서는 들뜬 기색이 역력했다.

    아크 호는 느릿하게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함선이 미지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은 마치 망망대해를 헤쳐 나가는 고래 같았다. 며칠 후, 그들의 시야에 작은 점 하나가 포착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검은 점에 불과했다. 하지만 아크 호가 조금 더 접근하자, 점은 서서히 그 형태를 드러냈다.

    “이게… 대체 뭡니까?” 박지호의 목소리에 경이로움이 가득했다.

    홀로그램 테이블 위, 그리고 주 화면에 확대되어 보이는 것은 그들이 상상했던 어떤 것과도 달랐다. 거대한 크기, 적어도 소행성만 한 그것은 완벽하게 매끄러운 검은색 육면체였다.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았고, 그 어떤 흔적도, 이음새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공간 그 자체를 도려내어 만들어진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냈다.

    “센서로는 재질 분석이 안 됩니다, 캡틴.” 이수진 박사가 숨죽이며 말했다. 그녀의 얼굴은 화면에 비치는 미지의 물체만큼이나 창백했다. “어떤 구성 요소로 이루어져 있는지, 심지어는 고체인지 액체인지조차 파악이 안 돼요. 외부 에너지를 전혀 방출하지도 흡수하지도 않습니다.”

    “그럼 이전에 감지된 에너지 신호는 뭐였지?” 김민준이 물었다.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너무 미약하고 불규칙적이라…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의 심장 박동처럼 느껴집니다.” 이수진은 손을 뻗어 홀로그램의 육면체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물론 아무런 감촉도 없었지만, 그 몸짓은 그녀의 경외심을 드러냈다. “우리가 아는 물리 법칙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크 호는 육면체로부터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멈춰 섰다. 침묵만이 흐르는 함교 안에서, 승무원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눈앞의 광경을 응시했다. 육면체는 완벽한 정지 상태로 허공에 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영원히 존재할 것처럼.

    “이게 뭘까요… 캡틴.” 박지호가 중얼거렸다.

    김민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육면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때, 육면체의 한 면에 미세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주 작고 가는 선이었지만, 완벽한 표면에 생긴 그 불규칙성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균열은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이 스며 나오듯,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캡틴, 저거 보세요!” 이수진 박사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균열은 점점 더 넓어졌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에너지 파동이 맹렬하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센서가 요동쳤다.

    “에너지 수치 급상승! 캡틴, 위험합니다! 함선을 후퇴시켜야 합니다!” 박지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김민준은 이미 손을 뻗어 후퇴 명령을 내리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 육면체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 에너지가 아크 호를 향해 번개처럼 뻗어 나왔다. 그것은 단순히 빛이 아니었다.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지는 강력한 힘이었다.

    “방어막 최대!” 김민준의 외침이 함교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푸른빛은 아크 호의 방어막을 뚫고 지나갔다. 함선 전체가 거대한 충격에 휘청였다. 비상등이 깜빡이고, 여기저기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콘솔 패널에서 스파크가 튀었고, 박지호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자리에서 나가떨어졌다.

    김민준은 겨우 몸을 지탱하며 일어섰다. 머릿속이 윙윙거렸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육면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균열은 이제 완전히 벌어져 있었고, 그 안에서 어떤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육면체의 심연 속에서, 푸른빛 안개에 싸인 채, 알 수 없는 형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금속 같기도 하고, 액체 같기도 했다. 끊임없이 형태를 바꾸고, 빛을 흡수하고 방출하는 신비로운 존재였다.

    그리고 그 존재가, 아크 호를 향해 미동도 없이, 그러나 분명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김민준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함교는 아수라장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혼란 속에서 눈앞의 광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미지의 존재, 미지의 힘. 그리고 그들이 방금 마주한 심연의 그림자.

    아크 호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공포에 질린 작은 새처럼.

    **[1챕터 종료]**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무너진 다리 위를 건널 때마다 낡은 철골이 삐걱이며 비명을 질렀다. 녹슨 철근과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고, 그 아래로는 물기 빠진 강바닥이 뱀처럼 구불거렸다. 지훈은 발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기며 낡은 배낭을 고쳐 멨다. 그의 뒤를 따르는 아린의 작은 손은 그의 큼지막한 손을 꽉 잡고 있었다. 아이는 낡은 곰 인형을 가슴에 안고 잔뜩 겁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괜찮아, 아린아. 조금만 더 가면 돼.”

    지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단단하게 들리려 애썼다. 며칠째 물을 제대로 마시지 못한 탓이었다. 목은 사막처럼 바짝 말라 있었고,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해는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 시간은 언제나 위험했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놈들이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시간.

    다리를 거의 다 건널 무렵, 지훈의 귀에 미세한 소리가 포착됐다. 쇠를 긁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 그리고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그는 즉시 아린을 뒤로 숨기고 손에 든 낡은 야구 방망이를 고쳐 잡았다. 방망이 끝에는 날카롭게 갈아낸 철근 조각이 덧대어져 있었다.

    “쉿.”

    아린은 숨을 멈췄다. 작은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다리 아래 교각을 따라 폐허가 된 건물의 잔해가 보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놈들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세 마리. 한때는 사람이었을 시체들이 뒤틀린 관절을 이끌고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를 비척이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놈들의 눈은 텅 비어 있었고, 입에서는 검붉은 침이 질질 흘렀다.

    지훈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면으로 부딪히는 건 미친 짓이었다. 특히 아린이 있을 때는 더더욱. 그는 주위를 빠르게 스캔했다. 다리 난간이 부서진 틈새,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진 비상계단 같은 철제 구조물이 보였다. 아마도 건설 당시 임시로 설치했던 것 같았다.

    “아린아, 아빠 등 뒤에 바짝 붙어.”

    그는 아린을 자신의 등 뒤로 바짝 끌어당겼다. 놈들이 다리 위로 올라오는 속도는 느렸지만, 꾸준했다. 지훈은 한숨을 내쉬고는 난간이 부서진 틈을 향해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첫 번째 놈이 다리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지훈은 아린을 안고 몸을 날렸다. 낡은 철제 구조물에 거친 마찰음과 함께 발이 닿았다. 녹슨 철골은 위태롭게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크아악!”

    뒤에서 놈들의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훈은 뒤돌아볼 틈도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아린은 그의 목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폐허의 냄새를 실어 날랐다. 마른먼지와 썩어가는 고기의 냄새, 그리고 잊을 수 없는 피비린내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가까스로 땅에 발을 딛자, 지훈은 잠시 숨을 골랐다. 놈들은 다리 위에서 계속 으르렁거렸지만, 더 이상 따라 내려오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는 아린을 내려놓고 무릎을 굽혀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아?”
    아린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작은 손은 여전히 곰 인형을 놓지 않았다.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그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짓말이었다. 아무것도 괜찮지 않았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만큼은, 이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작은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오래된 물류 창고였다. 그곳에는 분명 사람이 살았을 흔적이 많았고, 어쩌면 아직 쓸만한 물건들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이 사실일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지훈에게는 작은 실낱같은 희망조차 절실했다.

    창고 건물은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채 거대한 뼈대처럼 서 있었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고, 강철 셔터문은 반쯤 찌그러진 채 바닥에 박혀 있었다. 내부에서는 어두운 그림자들이 춤을 추는 듯했다.

    “조용히 해.”

    지훈은 아린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 그리고 어딘가 축축한 공기가 그들을 맞았다. 내부는 거대한 공동 같았다. 텅 빈 선반들, 뒹굴고 있는 파손된 상자들. 그리고 바닥에 말라붙은 핏자국들.

    지훈은 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바닥에 밟히는 유리조각과 부서진 나무 조각들이 신경을 긁었다. 아린은 그의 옆에서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작은 발걸음은 여전히 주변의 고요를 깨트렸다.

    창고의 안쪽, 다른 구획으로 들어서자 희미한 햇빛이 천장의 구멍을 통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 빛 아래, 한쪽 구석에 쌓인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다른 곳과는 달리 비교적 온전해 보이는 상자들. 희미한 희망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는 아린을 안전한 기둥 뒤에 숨기고 상자 더미로 다가갔다.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너무 쉽게 발견한 물건들은 언제나 함정이었다. 하지만 절박함은 경계심을 무디게 만들었다.
    상자 중 하나를 열자, 마른 빵 몇 조각과 캔으로 된 과일 통조림, 그리고 빛바랜 약품 상자가 보였다. 지훈은 손을 뻗으려다 문득 섬뜩한 한기를 느꼈다.

    주변이 너무 조용했다.
    폐허가 된 이 세상에서, 이 정도의 고요는 불길한 징조였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상자 더미 위, 천장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그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그림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림자는 움직였다. 희미한 햇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아니, 한때는 인간이었을 것.

    “쉬이이익…”

    목구멍에서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놈은 다른 놈들보다 훨씬 크고, 기민해 보였다. 마르고 길쭉한 팔다리, 하지만 그 속에는 무시무시한 힘이 느껴졌다. 놈의 몸에는 찢어진 옷가지들이 너덜너덜하게 매달려 있었고, 뼈대가 드러난 손가락은 마치 갈고리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가장 끔찍한 종류의 놈이었다. 오래도록 굶주려 더욱 날카로워진 사냥꾼.
    놈은 천천히 자세를 낮추더니, 순식간에 상자 더미 위에서 지훈에게로 뛰어내렸다.

    “크아악!”

    지훈은 본능적으로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다. 쾅! 날카로운 철근 조각이 놈의 갈비뼈에 박혔다. 놈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지만, 그 비명 속에는 더 큰 광기가 섞여 있었다. 놈의 손톱이 지훈의 어깨를 스치며 살점을 찢었다. 뜨거운 통증이 밀려왔다.

    “아린아, 도망쳐!”

    지훈은 소리쳤다. 아린은 두려움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 순간, 지훈은 자신의 몸을 던져 놈과 함께 상자 더미를 무너뜨렸다. 캔과 빵 조각들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놈의 힘은 상상 이상이었다. 놈의 손이 지훈의 목을 죄어왔다. 숨이 막혔다. 놈의 썩은 내 나는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아린이가…’

    지훈은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의 손은 야구 방망이를 찾아 허우적거렸다. 겨우 방망이를 다시 움켜쥐자, 그는 놈의 머리를 향해 있는 힘껏 내리쳤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놈의 머리가 한쪽으로 꺾였다. 놈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지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어깨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놈은 바닥에 쓰러져 경련하듯 몸을 떨고 있었다.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었다. 놈의 텅 빈 눈동자는 여전히 지훈을 향하고 있었다.

    “아린아!”

    그는 아린을 불렀다. 기둥 뒤에서 작은 아이가 울먹이며 뛰쳐나왔다. 지훈은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의 몸은 잔뜩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아빠가 괜찮다고 했잖아…”

    지훈은 놈의 머리를 한 번 더 내리쳐 확실히 처리한 후, 흩어진 물건들을 주워 담았다. 빵 몇 조각과 통조림 두 개, 그리고 상처에 바를 소독약과 붕대.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는 귀한 생존 물품이었다.

    그들은 해 질 녘 폐허가 된 건물 옥상으로 올라섰다. 멀리 도시의 잔해들이 붉은 노을 아래 침묵하고 있었다. 지훈은 찢어진 옷으로 어깨의 상처를 대충 감쌌다.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그는 내색하지 않았다.

    아린은 통조림 하나를 따서 조심스럽게 먹고 있었다. 지훈은 아이에게 먼저 먹으라며 자신의 몫을 양보했다. 차가운 바람이 그들의 얼굴을 스쳤다.

    “아빠… 우리 내일은 어디로 가?”

    아린의 작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지훈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들이 드문드문 빛나고 있었다. 그 별빛은 이 황량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존재 같았다.

    “어디든… 살아남을 수 있는 곳으로 가야지.”

    그는 그렇게 답했지만, 사실 갈 곳은 없었다. 매일매일이 똑같은 생존의 연속이었다. 오늘 살아남으면 내일이 찾아오고, 내일도 또 다른 지옥이 펼쳐질 뿐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아린의 작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차가운 바람 속에서도 아이의 온기가 그의 손끝에 전해졌다. 그것은 그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고, 그를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우리… 언젠가는… 아주 평화로운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지훈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아린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린은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대고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그저 침묵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밤은 깊어지고, 폐허가 된 도시는 또 다른 밤을 맞이했다. 끝없는 절망 속에서도, 그들은 작은 희망을 끌어안고 다음 날을 향해 숨을 쉬고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고통과 마주하게 될까. 알 수 없었지만, 지훈은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적어도 아린이 그의 손을 잡고 있는 한.

  • 다크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달빛조차 들지 않는 숲의 심장부, 오래된 고목이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운 그곳에서 시아는 몸을 웅크렸다. 손가락 끝이 시려왔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심장을 조여오는 불안감이었다. 기다림은 언제나 공포의 다른 이름이었다.

    “……카엘.”

    나지막이 이름을 불렀다. 대답 대신 잎사귀 스치는 소리, 그리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 익숙한 암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시아는 돌아볼 필요도 없이 몸을 맡겼다. 억센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고, 거친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오랜만이다, 시아.”

    카엘의 목소리는 밤처럼 낮고 깊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그의 붉은 눈이 시아의 불안한 눈동자를 붙잡았다. 그는 인간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피부 아래로 흐르는 비정상적인 냉기와 어둠에 동화된 듯한 존재감만이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밤의 종족. 인간들이 저주받은 그림자라 부르는 존재들.

    “더 일찍 오지 못했어. 순찰이…….” 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감시가 더 삼엄해졌어. 인간 마을의 수호 기사단이 숲을 더 자주 드나들고 있어. 오늘은 외곽에서 그들의 기척을 느꼈어.”

    카엘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알고 있다. 그들이 밤의 짐승이라 부르는 사냥개를 더 많이 풀어 놓은 것 같더군. 놈들의 악취가 숲 전체를 더럽히고 있어.” 그의 목소리에 날카로운 분노가 서렸다. “혹시 마주쳤느냐?”

    “아니, 다행히. 하지만…… 그들이 수색하는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있어. 우리를 찾고 있는 것 같아, 카엘.”

    “우리를? 아니. 그들은 그저 그림자를 두려워할 뿐이다.” 카엘은 시아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손길에 담긴 애정은 어떤 불꽃보다 뜨거웠다. “내 연인은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시아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심장은 인간처럼 고동치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돌처럼 단단한 가슴 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웅장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에게 기대어 있으면 세상의 모든 위험이 잠시나마 잊히는 듯했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잖아….” 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인간과 밤의 종족은… 섞일 수 없어. 발각되면…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따를 거야.”

    “고통이라… 이미 충분히 고통스럽지 않나?” 카엘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의 눈에 깃든 심연이 더욱 깊어졌다. “서로의 온기를 갈망하면서도 단 한 번의 밀회조차 죄악이 되는 삶. 이게 우리가 택한 길이라면, 그 고통조차 달게 받을 것이다.”

    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자신의 불안한 모습이 일렁였다. “난 두려워. 당신을 잃는 것도, 그리고… 내가 당신으로 인해 변할까 봐도.”

    “변해? 네가 변하는 것은… 오직 나에 대한 사랑 때문일 것이다.” 카엘은 시아의 턱을 들어 올렸다. “나는 네 어둠이 되어줄 것이고, 너는 내 빛이 되어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그림자가 될 뿐.”

    그때였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단순한 사냥개의 울음소리가 아니었다. 훈련된 추적견의 날카롭고 집요한 소리. 그것은 숲의 정적을 찢으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시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방금… 들었어? 저건… 기사단이 쓰는 추적견이야.”

    카엘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는 시아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고 주변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의 존재 자체가 그림자가 되어 숲의 일부로 동화되는 듯했다. 시아는 눈을 감았다. 살갗을 스치는 냉기가 더욱 거세졌다. 그의 존재와 하나가 되어 주변의 모든 빛과 소리가 차단되는 듯한 기분.

    개 짖는 소리는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근처다! 놈의 기운이 여기까지 뻗쳐 있어!”
    “제길, 밤의 그림자들이 다시 출몰하는군. 마을을 습격이라도 했나?”
    “아니, 대장님은 다른 걸 수색하라고 했다. 최근 발견된 ‘오염된 자’의 흔적을 쫓는 거다.”

    ‘오염된 자’. 그 말을 듣는 순간, 시아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었다. 오염된 자는 밤의 종족과 접촉하여 저주를 받은 인간을 뜻했다. 그들은 보통 격리되거나, 아니면… 처형당했다.

    “저 개새끼들, 이번엔 끝장을 보려는 모양이군.” 카엘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렸다. 그의 품에 안긴 시아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꼼짝 마라. 만약 놈이 여기에 숨어 있다면… 이 밤에 끝을 내야 한다!”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흙먼지 밟는 소리, 거친 숨소리, 그리고 추적견의 킁킁거리는 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그들은 바로 그들이 숨어 있는 고목 주변을 수색하고 있었다. 카엘은 그림자 속에 완벽하게 녹아들었지만, 시아는 인간이었다. 그녀의 체온, 그녀의 숨결. 미세한 흔적조차 이 훈련된 사냥개들에게는 충분한 단서가 될 수 있었다.

    카엘은 시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눌렀다. 짧고 강렬한 키스. 그리고 그의 차가운 손이 시아의 목 뒤로 스쳐 지나갔다. 마치 어둠의 기운을 불어넣는 것처럼, 그녀의 몸을 일시적으로 밤의 일부로 만드는 행위였다.

    몸의 모든 감각이 무뎌지는 듯했다. 시아는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카엘의 마지막 속삭임이 그녀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아남아야 한다, 시아.”

    그리고 모든 것이 암전으로 변했다. 의식이 희미해지는 순간, 멀어져가는 기사단의 발소리 너머로 숲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섬뜩한 울음소리가 시아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것은 밤의 종족만이 낼 수 있는, 깊은 슬픔과 분노가 뒤섞인 절규였다. 그리고 그 소리의 끝에서, 시아는 카엘의 품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녀를 위해, 스스로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다음 화에 계속.**

  • 마법소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잿빛 먼지가 끊임없이 흩날리는 하늘 아래, 세상은 언제나 침묵으로 가득했다. 무너진 빌딩의 뼈대만이 앙상하게 남아 과거의 영화를 조용히 조롱하는 듯했다. 그 잔해들 사이를 비집고,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내딛는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

    “하아… 하아…”

    메마른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아린은 땀으로 축축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낡은 방진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지만, 텁텁한 흙먼지가 목구멍을 긁는 고통은 여전했다. 그녀의 어깨에는 오래된 천으로 만든 낡은 배낭이 축 늘어져 있었다. 그 속에는 며칠 치 비상 식량과 녹슨 공구 몇 개가 전부였다.

    그녀의 눈동자는 주변을 쉴 새 없이 탐색했다. 한때는 번화했던 거리였을 곳은 이제 기괴하게 뒤틀린 변이 식물들이 콘크리트를 뚫고 솟아나 촉수를 흔들고 있었다. 삭막한 풍경 속에서, 아린의 몸에 걸친 누더기 같은 제복만이 희미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새벽별의 기사’라 불리던 그녀의 마법소녀 복장은, 이제는 온몸에 흠집과 때가 잔뜩 묻어 희망보다는 생존의 상징에 가까웠다.

    “이번에도 헛걸음인가…”

    텅 비어 버린 편의점 터에서 겨우 빈 통조림 캔 몇 개를 찾아낸 아린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어쩌면 애초에 바랐던 게 무리였을지도 모른다. ‘에너지 촉매제’는 대재앙 이후 가장 희귀한 자원 중 하나였고, 특히나 정화 시설에 쓰이는 고순도 촉매는 더더욱 그러했다. 우리들의 ‘새싹 은신처’에선 정화 필터가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이대로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마실 물조차 구하기 힘들어질 터였다.

    그때였다. 찌르르륵, 하고 낡은 통신기가 작게 울렸다. 흠칫 놀란 아린이 황급히 꺼내 들었다. 송신은 불가능하고 수신만 겨우 가능한, 망가진 기기였다.

    — …아린? 무사해?

    작은 오빠, 시우의 목소리였다. 잔뜩 지쳐 있었지만, 동생을 걱정하는 마음은 변함없는 듯했다.

    “응, 시우. 아직까진 괜찮아.”

    아린은 최대한 밝게 대답하려 애썼다. 사실은 발목을 삐끗한 후유증으로 걸을 때마다 시큰거렸고, 며칠 밤낮을 잠도 제대로 못 잔 탓에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 젠장,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우리 쪽도 탐색조가 별 성과를 못 내고 있어. 슬슬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 같아…

    시우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었다. 아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안 돼, 포기할 순 없어. 시우와 은신처의 모두가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데.

    “아니, 아직이야. 저기… 저쪽 폐기물 처리장 쪽은 아직 안 가봤어. 어쩌면 그쪽에… 오래된 정화 시설의 잔해가 남아있을지도 몰라.”

    아린의 시선은 저 멀리, 기형적으로 솟아오른 거대한 금속 탑들을 향했다. 예전에는 도시의 쓰레기를 처리하던 시설이었지만, 대재앙 이후엔 괴이한 변이 생물들의 안식처로 변해버린 곳이었다. 그곳에 발을 들이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 폐기물 처리장? 미쳤어, 아린! 그곳은 위험해! 돌아와. 차라리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시우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통신기를 찢을 듯 울렸지만, 아린은 이미 돌아설 수 없었다. 그녀는 통신기를 끄고 품속에 넣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했다. 손에 든 낡은 마법봉이 희미하게 빛을 발했다. 제복에 새겨진 별 문양에서도 푸른빛이 번져 나와 그녀의 지친 몸을 감쌌다.

    “나는… 새벽별의 기사니까.”

    작게 읊조린 그녀의 목소리는, 부서진 세상의 고요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녀의 마법은 화려한 공격이나 압도적인 힘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둠을 밝히고, 부서진 것을 일시적으로 보강하며, 위험을 감지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다. 생존을 위한 마법.

    휘잉, 휘잉…

    금속 탑들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소리가 흡사 거대한 괴물이 울부짖는 것 같았다. 탑의 표면에는 알 수 없는 물질들이 응고되어 기괴한 형상을 만들어냈고, 그 틈새에는 끈적거리는 변이 식물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마스크 너머로도 역한 화학 물질 냄새와 썩은 내음이 섞인 공기가 느껴졌다.

    아린은 마법봉을 들어 올렸다. 쨍한 푸른빛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주변을 밝혔다.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끝없이 이어진 폐기물 더미와 녹슨 기계들이었다. 그리고… 움직이는 그림자들.

    키이익! 키이이익!

    머리 위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렸다. 녹슨 파이프와 철골 사이에서 거대한 변이 박쥐들이 날개를 펼치며 튀어나왔다. 날개 끝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돋아 있었고, 붉게 빛나는 눈동자는 굶주림으로 가득했다. 적어도 세 마리였다.

    젠장, 설마 여기에까지 있을 줄이야. 아린은 이를 악물었다. 재빨리 몸을 낮추고 마법봉을 휘둘렀다. 푸른빛이 그녀의 주변에 얇은 막을 형성했다. ‘여명의 방패’. 방어에 특화된 그녀의 유일한 공격 수단이자 생존기였다. 변이 박쥐들이 쇄도하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방패를 긁어댔다. 끽끽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찢을 듯 울렸다.

    ‘이대로는 안 돼. 마력만 낭비할 뿐이야.’

    아린은 생각했다. 그녀의 마력은 무한하지 않았다. 방패를 유지하는 데도 상당한 마력이 소모되고 있었다. 그녀는 방어막을 유지한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쪽 벽면에 커다란 환기구가 보였다. 그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아아앗!”

    그녀는 짧게 기합을 내지르며 방패를 확장했다. 순간적으로 빛의 파동이 퍼져 나가며 변이 박쥐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린은 전력으로 환기구로 몸을 던졌다. 쿵! 쿵! 철제 환기구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뒤에서 닫히는 날개 소리를 들었다.

    겨우 살았다.

    어둠 속으로 더 깊이 기어 들어갔다. 철제 환기구는 좁고 먼지로 가득했지만, 적어도 변이 박쥐들의 공격을 피할 수는 있었다. 그녀는 마법봉으로 바닥을 더듬으며 나아갔다. 빛이 닿지 않는 깊은 곳,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이따금씩 바닥에 고인 오염된 물웅덩이에 발이 빠지기도 했다.

    한참을 기어갔을까. 환기구의 끝이 보였다. 철제 그릴을 밀고 아래로 떨어지자, 거대한 지하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오래된 정수 시설의 중심부였다.

    “찾았다…”

    아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녹슬고 부서진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숲처럼 솟아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아직 빛을 잃지 않은 투명한 용기들이 보였다. 용기 안에는 푸른빛이 감도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고순도 정화 촉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지이잉…

    발밑에서부터 섬뜩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지하 공간의 거대한 기계들 사이에서 붉은빛이 번쩍였다. 촉매가 담긴 용기들 주변으로, 거대한 촉수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촉매를 보호하려는 듯, 아니면… 촉매를 흡수하려는 듯.

    그것은 살아있었다. 폐기물 처리장의 심장부에 숨어있던, 대재앙이 낳은 거대한 변이 생명체였다. 아린은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동자에, 푸른빛과 붉은빛이 동시에 요동쳤다. 이제 겨우 찾았는데,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새벽별의 기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