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욱한 먼지가 걷히자 드러난 것은 거대한 강철 거인의 잔해였다. 굉음과 함께 바닥에 처박힌 기갑무사의 몸체는 이제 더 이상 전투용 기계가 아닌, 엉망으로 찌그러진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환호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천하제일 기갑무예대회, 그 뜨거운 열기 속에서 강휘는 다음 대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승자, 동해 문파의 흑룡신!”
심판의 우렁찬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방금 승리한 기갑무사, ‘흑룡신’은 거대한 강철 팔을 들어올려 관중들의 환호에 답했다. 검은색으로 도색된 기체는 용의 비늘처럼 날카로운 장갑판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움직임에는 오랜 세월 바다를 지배해온 문파의 기개가 서려 있었다. 강휘는 대기실 안쪽의 어두운 구석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제아무리 강대한 기갑무사라 할지라도, 결국 그 안에 있는 것은 한 명의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인간의 내공과 의지가 기갑을 움직이는 진짜 힘이었다.
그의 옆에는 낡고 볼품없는 기갑무사가 서 있었다. ‘묵철신’. 이름 그대로 검은 철로만 이루어진 듯한 투박한 모습. 날렵함도, 화려함도 없었다. 과거 그의 사부가 마지막으로 남긴 유일한 유산이었다. 모두가 비웃었다. 저런 고물로 천하제일이 되겠다고? 하지만 강휘는 알았다. 묵철신은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 없는 ‘혼’을 지닌 기갑이라는 것을.
이 대회는 단순한 무예대회가 아니었다. 천 년에 한 번 도래한다는 ‘대재앙’의 징조가 온 천하를 뒤덮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하늘을 가르고, 대지는 갈라지며, 기이한 생명체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무림의 원로들은 고심 끝에 천하제일 기갑무예대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이 대회의 최종 우승자만이 ‘천기진원’을 다룰 자격을 얻기 때문이었다. 천기진원. 대재앙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자,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 수도 있는 양날의 검.
“다음 대결! 화산파의 진천명 대 녹림맹의 강휘!”
강휘는 눈을 떴다. 드디어 그의 차례였다. 그는 조용히 묵철신을 향해 걸어갔다. 묵직한 강철의 기운이 그를 감쌌다. 기갑 내부로 들어서자, 수많은 조작 장치와 시야 확보용 스크린이 그를 맞이했다. 강휘는 익숙하게 조종간을 잡고 내공을 끌어올렸다. 묵철신의 동력부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활성화되었다. 그의 심장 박동과 기갑의 구동음이 하나가 되는 듯했다.
“출격!”
묵철신은 거대한 출격 게이트를 지나 경기장 중앙으로 향했다. 반대편에는 화산파의 장문인, 진천명이 조종하는 ‘화룡신’이 서 있었다. 화룡신은 붉은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화려한 기체였다. 등에는 거대한 화염 추진기가 달려 있었고, 양 팔에는 불꽃을 형상화한 듯한 날카로운 검이 장착되어 있었다. 진천명은 무림에서 ‘염왕’이라 불리는 자였다. 그의 내공은 불꽃처럼 맹렬했고, 그의 기갑술은 상대를 재로 만들었다.
“후후, 녹림의 풋내기가 감히 화산의 불꽃에 도전하는가?” 진천명의 목소리가 경기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조롱이었다.
강휘는 대답 대신 묵철신의 묵직한 강철 팔을 들어 올렸다. 묵철신은 느릿하게 움직이는 듯 보였지만, 그 안에는 강휘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시작!”
심판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진천명이 먼저 움직였다. 화룡신은 등 뒤의 추진기를 맹렬히 뿜어내며 폭발적인 속도로 강휘에게 돌진했다. 붉은 검날이 번개처럼 번뜩이며 묵철신의 목덜미를 노렸다.
강휘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묵철신의 육중한 몸을 약간 틀며 팔을 들어올렸다. ‘수라팔괘’. 사부에게 배운 팔괘장의 초식을 기갑에 응용하는 것이었다. 화룡신의 검이 묵철신의 팔갑에 부딪히는 순간, 엄청난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콰아앙!
하지만 화룡신의 검은 미끄러지듯 묵철신의 방어를 비껴나갔다. 진천명의 내공이 검날에 실려 묵철신의 자세를 흐트러뜨린 것이었다. 강휘는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진천명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화룡신의 왼손에서 거대한 화염구가 작렬하며 묵철신을 덮쳤다.
“염화멸도!”
뜨거운 불길이 묵철신의 전신을 휘감았다. 관중석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저 정도 화염이라면 내부 조종석까지 위험할 터였다.
하지만 강휘는 당황하지 않았다. 묵철신의 강철 장갑은 불길 속에서도 붉게 달아오를 뿐, 그 형태를 잃지 않았다. 강휘는 묵철신의 내부 냉각 시스템을 최대로 가동하며 불길 속에서 침착하게 진천명의 움직임을 파악했다. 불길 너머로 보이는 화룡신의 윤곽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강휘! 이대로 녹아버릴 셈이냐!” 진천명이 다시 한번 외쳤다.
강휘는 내공을 끌어모아 묵철신의 팔을 움직였다. 불길을 헤치고 묵철신의 묵직한 주먹이 뻗어나갔다. 그것은 빠르지도, 화려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 주먹에는 마치 쇠망치가 거대한 바위를 부수는 듯한 묵직한 힘이 담겨 있었다. ‘칠성귀갑권’.
화룡신은 예상치 못한 반격에 당황한 듯 살짝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강휘는 불길 속에서 묵철신을 빠르게 회전시켰다. 거대한 몸체가 회오리처럼 돌며 불꽃을 사방으로 흩뿌렸다. 불길이 걷히자 드러난 것은, 자세를 바로잡고 묵직한 기세로 진천명을 노려보는 묵철신이었다.
“흥, 제법이군.” 진천명의 목소리에는 이전에 없던 미약한 감탄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나의 염화를 이길 수 없다!”
화룡신은 양 팔의 검을 교차하며 거대한 불꽃의 폭풍을 일으켰다. 경기장 바닥이 녹아내릴 듯한 열기가 강휘를 덮쳤다. 진천명은 화룡신의 모든 추진기를 가동하며 경기장 상공으로 솟아올랐다. 그리고는 대기권을 뚫을 듯한 속도로 다시 강휘를 향해 곤두박질쳤다. 거대한 화염 혜성이 묵철신을 향해 떨어지는 듯했다.
“화룡강림!”
강휘는 눈을 감았다. 사부의 가르침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가장 강한 공격은, 가장 완벽한 방어에서 나온다.’ 그는 묵철신의 모든 동력을 하체와 코어에 집중시켰다. 묵철신의 다리가 바닥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듯 박혔다. 그리고 강휘는 마지막 초식을 준비했다.
화룡신이 묵철신의 정수리에 닿는 순간, 강휘는 묵철신의 양팔을 교차하며 위로 치켜들었다. ‘무월강철벽’. 모든 내공과 기갑의 강도를 한 점에 집중시킨 완벽한 방어. 콰콰콰콰앙!!!
폭발음이 온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화염과 강철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엄청난 충격파가 관중석까지 전해져 왔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경기장 전체를 집어삼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서서히 연기가 걷히기 시작했다. 관중들은 숨을 죽이고 경기장을 응시했다.
연기 속에서 먼저 드러난 것은 화룡신의 모습이었다. 화룡신의 장갑은 여기저기 움푹 패였고, 양 팔의 화염검은 부러져 있었다. 추진기는 제 기능을 못하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진천명의 기세는 꺾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 묵철신이 서 있었다. 묵철신 역시 전신의 장갑이 녹아내린 듯 붉게 달아올라 있었고, 팔의 방어막은 아슬아슬하게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묵철신은 서 있었다. 쓰러지지 않았다.
강휘는 마지막 힘을 끌어모아 묵철신의 묵직한 오른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전신에 남은 모든 내공을 주먹에 실어 진천명을 향해 날렸다. 묵철신의 주먹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불꽃이나 번개처럼 화려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꿰뚫을 듯한 묵직한 기세였다. ‘파천일격’.
진천명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묵철신의 주먹을 바라봤다. 화룡신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그 주먹을 막을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묵철신의 강철 주먹이 화룡신의 조종석에 정확히 명중했다. 콰아아앙!
화룡신은 거대한 굉음을 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바닥에 충돌한 기갑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조종석의 문이 열리고, 진천명이 간신히 기어 나왔다. 그는 강휘를 올려다봤다. 패배를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승자, 녹림맹의 강휘!”
심판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천지를 뒤흔들었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뜨거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무명에 가까웠던 녹림맹의 강휘가 화산파의 염왕을 꺾다니! 이변이었다.
강휘는 묵철신 안에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전신의 내공이 바닥난 듯 온몸이 저려왔다. 하지만 그의 눈은 흔들림 없이 다음 대결을 응시하고 있었다.
결승전.
그의 상대는 이 천하제일 기갑무예대회에서 ‘무신’이라 불리는 자, 백무영이었다. 그리고 그의 기갑, ‘천룡신’.
천하의 운명이, 강휘의 손에 달린 결승전이 이제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그는 묵철신의 낡은 조종간을 꽉 움켜쥐었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진정한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