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푸른 달의 속삭임
    ### 1화. 물안개 속 그녀

    새벽 녘의 서울은 기묘한 얼굴을 하고 있다. 밤의 잔해가 채 가시지 않은 푸르스름한 어둠 위로, 도시의 불빛들이 게으른 금빛 물결처럼 번져나가는 시간. 강하준은 익숙한 지루함에 젖어 그 풍경을 창밖으로 응시했다. 밤샘 작업으로 뻑뻑해진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초고층 빌딩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겹쳐 보였다.

    그는 도시 풍경을 그리는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였다. 특별할 것 없는 직업, 특별할 것 없는 삶. 다만 남들보다 밤을 더 오래 마주할 뿐이었다. 마감에 쫓겨 캔버스 너머의 현실을 잊고 지내다, 문득 고개를 들면 어김없이 이 새벽이 그를 맞았다.

    “젠장, 또 해 떴네.”

    담배를 문 채 중얼거렸지만, 뱉어내는 한숨 속에는 딱히 불만도, 기대도 없었다. 그저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뿐. 텁텁한 입안을 정리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얼음물 한 잔을 들이켜고 서재로 돌아오려던 찰나, 창밖에서 문득 시선이 멈췄다.

    그의 작업실은 오래된 주상복합 아파트의 최고층에 있었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은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익숙한 풍경 한 조각이 어딘가 달라 보였다. 아파트 단지 뒤편, 재개발 예정지로 묶여 반쯤 버려진 작은 숲과 실개천. 낡은 콘크리트 옹벽을 타고 흐르는 물줄기는 언제나 탁하고 볼품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물안개.

    새벽 공기가 유난히 차갑거나 습한 날이면 간혹 물안개가 피어오르기도 했지만, 지금처럼 자욱하게, 마치 숲 전체를 집어삼킬 듯 짙게 피어오른 적은 없었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잿빛 도시 위에 뜬 한 조각의 신비.

    하준은 담배를 비벼 끄고, 저도 모르게 창문에 바싹 다가섰다. 그리고 그 순간, 안개 속에서 무언가 움직였다.

    한 사람. 아니, 하나의 형체.

    그것은 실개천을 따라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물안개가 감싸 안은 그 형체는 너무나 희미해서, 착시현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준의 시선은 찰나의 순간에도 그것의 존재를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긴 머리칼. 흑요석처럼 검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었다. 옷차림은 기묘했다. 현대적인 의상은 아니었다. 어슴푸레한 푸른색, 혹은 연한 회색빛이 도는 얇은 천이 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그 질감이 마치 물처럼 유연하게 흐르는 듯했다. 맨발이었을까? 아니면 발을 덮는 옷이었을까? 안개에 가려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장 하준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그 형체의 움직임이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가볍고 우아했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마치 춤을 추듯 미세한 리듬이 깃들어 있었고, 마치 물 위를 미끄러지듯 잔잔하게 흘러갔다. 인간이라면 결코 낼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하준은 숨을 멈췄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가 움직이면 이 비현실적인 환영이 사라져버릴까 봐 두려웠다. 그의 시선은 물안개 속을 파고들어, 그 여인의 뒷모습에 닿았다. 그리고 여인이 고개를 살짝 돌리는 순간,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옆모습이었다. 완벽하게 조각된 듯한 콧날과 턱선. 그리고 무엇보다, 그 여인의 눈동자.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듯한, 깊이를 알 수 없는 색이었다. 밤하늘의 심연을 담고 있는 듯 푸르렀고, 동시에 숲의 이끼처럼 신비로운 초록빛이 스며 있는 듯했다. 그 눈동자가 하준이 있는 곳, 그러니까 이 아파트의 높은 층을 향해 아주 잠깐, 찰나의 순간 동안 멈췄다.

    마치 그 시선이 거리를 넘어, 유리창을 뚫고, 그의 눈동자와 부딪힌 것 같은 착각에 하준은 몸을 움찔거렸다. 공포나 위협이라기보다는, 너무나 거대한 미지의 존재를 마주했을 때 느끼는 본능적인 경외감에 가까웠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수천 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듯했고, 한없이 고요했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하준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 순간, 여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새벽 안개처럼 덧없는 미소였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실개천을 따라 걸어갔다.

    물안개가 그녀의 몸을 다시 감쌌다. 한 걸음, 두 걸음. 형체는 점점 더 희미해지더니, 기어이 안개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진 그녀가 남긴 것은, 잔잔한 물안개와, 그리고 그 자욱한 안개를 뚫고 피어난 듯한 선명한 꽃잎 몇 개였다. 벚꽃이 아닌데도 연분홍빛을 띠는, 이름 모를 꽃잎들이 실개천 주변의 마른 나뭇가지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새벽 공기를 타고 은은한 풀내음과 함께, 아주 희미한 꽃향기가 하준의 창문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하준은 한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믿기지 않았다. 환각이었을까? 밤샘 작업으로 지친 그의 뇌가 만들어낸 신기루였을까? 아니, 그는 확신했다. 분명히 보았다. 저 물안개 속에서, 인간의 모습과는 다른, 하지만 너무나 아름다운 존재를.

    그는 잠시 망설이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카메라를 켜고 창밖을 향해 줌을 당겼다. 그러나 렌즈에 잡힌 것은 그저 평범한 새벽의 실개천 풍경뿐이었다. 물안개는 여전히 자욱했지만, 더 이상 그 속에 누군가의 그림자는 없었다. 꽃잎들은 렌즈에도 잡히지 않았다.

    “뭐였지, 대체…”

    그는 알 수 없는 이질감에 사로잡혔다. 분명히 어제까지는 마른 나뭇가지뿐이었던 곳이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안개와 함께 나타난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생명력 가득한 꽃들이 피어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녀의 존재가 그 공간 자체를 변화시킨 것처럼 보였다.

    그날 이후, 하준의 삶은 미묘하게 바뀌었다. 밤샘 작업을 마치고 맞이하는 새벽은 더 이상 지루하지 않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창밖의 실개천을 응시하게 되었다. 혹시나 그녀가 다시 나타날까 봐. 혹시나 다시 그 신비로운 물안개와 함께 모습을 드러낼까 봐.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인간이 아닐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만 가슴 한구석을 채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다시 보고 싶었다. 그 새벽, 그의 눈동자에 찰나의 순간 맺혔던 그녀의 푸른 초록빛 눈동자가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미소가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했다. 경고였을까, 아니면 단순히 인사를 건넨 것이었을까. 아니, 어쩌면 아무런 의미도 없을 수도 있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찮은 존재를 잠시 스쳐 보았을 뿐인지도.

    하지만 하준의 심장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에 휘둘렸다. 그는 늘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믿지 않았고,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를 본 순간, 그의 모든 상식과 믿음이 흔들렸다.

    일주일이 지났다.
    매일 새벽, 하준은 창밖을 응시했지만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물안개도 그날처럼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일은 없었다. 실개천 주변의 꽃잎들도 며칠 지나자 시들었고, 마치 없었던 일처럼 원래의 마른 가지로 돌아갔다.

    하준은 자신이 잠시 미쳤던 건가 하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날의 밤샘 작업이 너무 심했던 탓일지도 모른다고 애써 합리화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묘한 갈증이 차올랐다. 그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다시 보고 싶은, 닿을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마음.

    또 다른 새벽.
    하준은 이번에도 마감을 겨우 끝내고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여전히 창밖은 푸른빛과 금빛이 뒤섞인 기묘한 새벽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실개천 쪽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도 그저 평범한 새벽일 뿐이었다.

    맥이 풀린 하준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담배라도 한 대 피워야겠다 싶어 거실로 향하려던 찰나, 그의 시야에 불현듯 무언가가 잡혔다.

    작업실 책상 모서리였다. 평소라면 아무것도 없었을 그곳에, 나뭇잎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나뭇잎이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잎맥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것처럼 선명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색이었다. 깊은 숲의 한가운데서 자라난 듯, 생명력 넘치는 초록빛을 띠고 있었는데, 가장자리에는 마치 새벽 안개가 스며든 듯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푸른빛 위로, 마치 밤하늘의 별을 옮겨다 놓은 듯, 희미하게 빛나는 은색 점들이 박혀 있었다.

    어디서 온 걸까. 작업실 창문은 늘 닫혀 있었고, 환기를 시킬 때조차 방충망을 열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 층수까지 바람에 날려올 리도 만무했다.

    하준은 떨리는 손으로 나뭇잎을 집어 들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그는 나뭇잎을 코에 가져갔다. 은은한 풀내음과 함께, 그날 새벽 맡았던 신비로운 꽃향기가 아주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분명했다.
    그녀가 남긴 것이었다.
    그녀가 다녀간 것이었다.

    하준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이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단순히 환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서 온 선물을 가지고 있었다.

    그 순간, 하준은 깨달았다.
    그녀가 그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그를 다시 찾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과 함께 벅차오르는 흥분이 그를 감쌌다. 그는 이제 이 현실의 문턱을 넘어,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될 참이었다. 이 나뭇잎은 초대장이자, 동시에 경고장처럼 느껴졌다.

    그의 눈은 다시 창밖의 새벽을 향했다. 물안개는 없었지만, 그는 이제 알고 있었다.
    이 도시의 어딘가에, 그의 상식을 벗어난 존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존재가, 지금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그의 손에 든 나뭇잎이 새벽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하준은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그는 그 손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 스팀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황혼이 도시를 붉게 물들이는 시간, 아르카나의 복잡한 뒷골목에 자리한 리엘의 작업실에는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와 증기기관의 미약한 숨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낡은 작업등 아래, 리엘은 돋보기 안경을 코에 걸친 채 섬세한 기계장치를 조립하고 있었다. 손끝에서 스쳐가는 황동색 부품들은 그녀의 전부였지만, 오늘따라 그녀의 시선은 자꾸만 창밖,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향했다.

    푸른 하늘을 가로지르는 비행선들의 그림자가 붉게 타들어 가는 저녁놀에 길게 드리워졌다. 저 하늘, 그녀에게는 미지의 세계이자 동시에 가장 그리운 이가 머무는 곳이었다.

    “젠장, 또 삐걱거리는군.”

    작은 스프링 하나가 튀어 오르자 리엘은 낮게 중얼거렸다. 어째서인지 오늘은 만지는 것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불안감 때문일까. 아니면, 기대감 때문일까. 이 모든 감정의 근원은 단 하나, ‘그’였다.

    그를 처음 만난 날은 잊을 수 없다. 아르카나 상공을 정찰하던 비행선 엔진이 고장 나 불시착했을 때였다. 구조 작업에 참여했던 리엘은 부서진 잔해 더미에서 예상치 못한 존재를 발견했다. 거대한 날개를 가진 남자. 천공의 섬, 에테리아의 전설 속 존재, ‘익인족(翼人族)’이었다.

    인간과 익인족은 오랜 세월 동안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왔다. 인간들은 그들을 약탈자라 불렀고, 익인족은 인간들을 욕심 많은 지상의 오염원이라 여겼다. 양쪽 모두에게 상대는 ‘적’이자 ‘미지’였다. 하지만 리엘의 눈에 비친 그는 오직 상처 입은 생명체일 뿐이었다. 감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은빛 깃털로 뒤덮인 날개는 피로 얼룩져 있었고, 강렬한 금빛 눈동자에는 경계심과 함께 깊은 고통이 서려 있었다.

    그를 치료해주고, 은밀히 숨겨주며 몇 주를 보냈다. 처음에는 서로를 경계하며 짧은 단어만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밤이 깊어질수록, 어둠이 짙어질수록, 서로의 눈빛 속에서 같은 외로움과 이해를 발견했다. 그는 리엘에게 에테리아의 바람 소리와 구름의 노래를 들려주었고, 리엘은 그에게 지상의 기계들이 내는 규칙적인 숨소리와 인간들의 다양한 감정을 가르쳐주었다. 금지된 교감은 빠르게 깊어져갔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세상의 모든 규칙을 부수는 강력한 감정이 싹텄다.

    그의 이름은 카이저. 익인족의 젊은 전사이자, 아마도 다음 부족장이 될 지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리엘은 아르카나의 변두리에서 기계들을 만지는 평범한 인간 소녀.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그래서 더욱 위험하고, 그래서 더욱 강렬한 사랑이었다.

    “…리엘.”

    그리움에 잠겨 있던 찰나, 창문이 삐걱거리며 열리는 소리와 함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리엘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어올랐다. 고개를 돌리자, 어둠 속에서 거대한 날개를 접고 작업실로 들어서는 카이저가 보였다. 그는 항상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인간들의 눈을 피해, 도시의 감시망을 피해, 오직 그녀에게로만.

    그의 날개는 은빛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났다. 금빛 눈동자는 변함없이 리엘을 향해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카이저!”

    리엘은 들고 있던 스패너를 내려놓고 그에게 달려갔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았다. 단단하고 강인한 그의 몸에 안기자, 리엘은 비로소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의 심장 박동 소리가 그녀의 귀에 묵직하게 울렸다. 늘 그의 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이었다.

    “늦었잖아… 걱정했어.”

    리엘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속삭였다. 그의 몸에서는 언제나 하늘의 냄새, 차갑고 신선한 바람의 냄새가 났다.

    “미안하다. 순찰대가 예상보다 많았다.”

    카이저의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그는 익인족의 전사답게 감정 표현에 서툴렀지만, 그가 그녀를 감싸 안은 팔의 힘에서, 그의 눈빛에서 모든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굳게 다문 입술,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여전히 강렬한 금빛 눈동자.

    “정말 위험했어. 요즘 인간들의 감시가 더 삼엄해졌어. 익인족과 관련된 소문이 도는 것 같아. ‘하늘에서 온 그림자’라고…”

    리엘의 목소리에 걱정이 짙게 배어 있었다.

    카이저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 쪽도 마찬가지다. ‘지상의 벌레들’이 에테리아에 접근하려 한다는 첩보가 들어왔어. 양쪽 모두 경계 태세가 최고조에 달했다.”

    그의 말에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 사랑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서로를 사랑하는 것 자체가 양쪽 종족에 대한 배신이었다. 발각되는 순간, 그들은 둘 다 파멸할 것이었다.

    “우린… 정말 괜찮을까?”

    리엘이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그녀의 손은 기계를 만지는 거친 손이었지만, 카이저의 거대한 손 안에서는 여전히 작고 여렸다.

    카이저의 금빛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리엘의 눈동자를 깊이 응시했다. “모르겠다. 하지만, 너를 포기할 수는 없어.”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그 어떤 위협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강철 같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도… 나도 마찬가지야, 카이저.”

    리엘은 그의 손을 더욱 꽉 쥐었다. 그들의 손가락이 얽히는 순간, 작업실 한구석에 세워져 있던 낡은 증기 압력계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늘이 붉은색 경고 구역으로 치솟았다.

    “젠장, 이게 무슨…!”

    리엘이 놀라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바깥 거리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확성기 소리가 들려왔다.

    — “경고! 경고! 서부 구역에서 미확인 비행체 발견! 익인족으로 추정됨! 전 병력 즉시 출동하라!” —

    갑작스러운 외침에 리엘과 카이저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그들의 심장이 다시금 격렬하게 요동쳤다. 미확인 비행체. 그것은 틀림없이 카이저가 타고 온, 혹은 그를 기다리는 익인족의 소형 비행체일 터였다. 혹은 그를 추격하던 인간들의 최신형 비행정일 수도 있었다.

    “카이저…!”

    리엘이 다급하게 그의 팔을 잡았다. 그의 금빛 눈동자는 순식간에 차갑고 날카로운 전사의 눈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는 창밖, 도시의 소란스러운 상공을 응시했다. 밤의 장막이 깊어지는 도시 곳곳에서 비행선 엔진 소리가 급하게 커지고, 수색등이 하늘을 휘저었다.

    “내가 미끼가 되어 유인하겠다.”

    카이저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지만, 그 안에 도사린 위험천만한 결의가 리엘의 심장을 조여왔다.

    “안 돼! 너무 위험해! 저들은 너를 잡으려 할 거야!”

    “잡히지 않아. 너를 두고 갈 수는 없다, 리엘.”

    그가 리엘의 뺨을 감싸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그녀를 향했다. 이별의 불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결연함이 그의 얼굴에 스쳤다.

    “무슨 생각 하는 거야…?”

    리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표정에서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읽었다.

    “더 이상 이렇게 숨어 지낼 수는 없어.”

    카이저가 리엘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그리고는 그녀를 안고 있던 팔을 놓았다. 그의 거대한 날개가 작업실의 협소한 공간을 가득 채우며 천천히 펼쳐지기 시작했다. 깃털 하나하나가 경고등의 붉은빛에 반사되어 섬뜩한 아름다움을 뽐냈다.

    “우리는 이제… 선택해야 할 때가 왔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작업실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무장한 아르카나 병사들이 총구를 겨눈 채 들이닥쳤다. 그들의 얼굴에는 익인족을 발견했다는 흥분과 함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대한 충격이 교차했다. 인간 소녀와 익인족 전사. 그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리엘과 카이저를 번갈아 보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인간이 익인족과 결탁하다니! 반역이다!”

    병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가 고함을 질렀다. 그들의 시선은 이제 카이저를 넘어, 리엘에게도 살기를 띠기 시작했다.

    카이저의 금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리엘을 자신의 뒤로 숨기며 병사들을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작업실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듯했다. 그의 날개가 바람을 가르며 위협적으로 움직였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지 마라.”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낮고 위협적이었다. 얽힌 운명, 금지된 사랑. 그 모든 것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이 비극적인 막을 어떻게 헤쳐나갈 수 있을까? 리엘의 손은 카이저의 등에 닿아 있었고, 그녀의 심장은 그의 날개가 일으키는 거친 바람처럼 거세게 뛰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있었다.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재수 없는 잿빛 하늘 아래, 도시는 거대한 뼈 무덤이었다. 한때 생명으로 들끓었을 아스팔트 위에는 찢겨진 현수막과 뒤집힌 차량들, 그리고 굳어버린 핏자국만이 얼룩처럼 남아 있었다. 유나는 녹슨 쇠막대기로 발밑의 잔해를 툭툭 건드리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땀으로 끈적이는 머리카락이 뺨에 달라붙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습하고 눅진한 공기 속에서, 그녀의 신경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지붕이 무너지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건물이 턱하니 버티고 선 곳. 한때는 번화했을 거리가 이제는 죽음의 정적만이 흐르는 미로가 되어버렸다. 유나는 며칠째 식량도, 마실 물도 제대로 구하지 못했다. 그녀의 배는 얄밉게도 꼬르륵 소리를 냈다. ‘젠장, 이 지긋지긋한 허기는 대체 언제쯤이나 익숙해질까.’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아…”

    얕은 한숨이 폐 속의 탁한 공기를 밀어냈다. 이 도시는 이제 더 이상 살기 위한 곳이 아니었다. 그저 죽음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또 다른 생존자를 발견해 잡아먹으려는 괴물들의 놀이터일 뿐. 유나는 허리에 찬 낡은 등산용 칼의 손잡이를 고쳐 쥐었다. 녹이 슬었지만 날카로운 칼날은 그녀의 유일한 친구이자 방패였다.

    부서진 유리 파편들이 흩뿌려진 상점 안으로 몸을 숙여 들어갔다. 오래된 약품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선반은 이미 텅 비어 있었고, 바닥에는 깨진 병 조각과 찢긴 포장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유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구석구석을 살폈다. 어쩌면 유통기한이 한참 지났어도 먹을 만한 통조림 하나라도 있을지 몰랐다.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하다못해 버틸 수 있는 약이라도.

    그녀의 눈길이 가장 깊숙한 진열대 아래, 먼지 쌓인 틈새로 향했다. 그곳에 작고 낡은 상자 하나가 보였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상자를 꺼내자, 얇은 먼지층 아래로 캔 모양의 그림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젠장… 빈 깡통이잖아.”

    기대에 부풀었던 마음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절망이 다시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녀는 아무렇게나 캔을 던져버렸다. ‘끼이익- 철컥.’ 그때, 건물 안쪽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유나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녀는 즉시 몸을 낮추고 칼을 움켜쥐었다. 괴물일까? 아니면… 또 다른 생존자?

    숨을 죽이고 소리의 근원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삐걱거리는 문을 지나 안쪽 복도로 들어섰다. 텅 빈 공간, 어두컴컴한 구석.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유나는 긴장감에 온몸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시 한 번,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흐느끼는 듯한, 아주 작은 소리였다.

    괴물들의 소리는 아니었다. 괴물들은 그렇게 조용히 흐느끼지 않는다. 그들은 으르렁대고, 썩은 숨을 내쉬며,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 달려들 뿐이다.

    유나는 망설였다. 동료는 짐이었다. 누군가를 책임지는 것은 곧 자신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었다. 지난날의 뼈아픈 경험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하지만 흐느낌은 계속됐다. 마치 버려진 새끼 동물처럼, 처절하고 나약한 소리였다.

    결국, 유나는 이성을 잠식하려는 냉정함을 뿌리치고 소리를 따라갔다. 어두운 공간 깊숙한 곳,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는 작은 형체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거기 누구 있어?”

    유나의 목소리는 제법 차분하게 들렸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여전히 칼자루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작은 형체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었다. 먼지투성이의 얼굴, 눈물이 말라붙은 뺨, 그리고 공포에 질린 커다란 눈동자. 아이였다. 대략 일곱 살이나 여덟 살쯤 되었을까. 또래 아이들보다 왜소하고 말라붙은 작은 아이.

    아이는 유나를 올려다보았다. 경계심과 두려움, 그리고 아주 작은 희망 같은 것이 그 눈에 교차했다.

    “너… 혼자니?” 유나가 다시 물었다.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 한마디 없이, 그저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유나는 잠시 칼을 내려놓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그럴 힘조차 없는 듯했다.

    “괜찮아. 해치지 않아.”

    유나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오랫동안 혼자였던 탓에 조금 거칠게 나왔지만, 아이는 그 안에 담긴 미약한 온기를 느꼈는지 더 이상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이름이 뭐야?”

    아이는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더니 겨우 한 글자씩 내뱉었다.

    “민… 준…”

    민준. 유나는 그 이름을 조용히 되뇌었다. 민준은 너무나 지쳐 보였다. 탈수와 영양실조가 심해 보였다. 이대로 두면, 괴물에게 잡아먹히기 전에 먼저 쓰러져 죽을 터였다.

    유나는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내버려 두는 것이 현명할까? 아니면…

    그녀의 머릿속에 오래전, 그녀의 손을 잡고 함께 도망치던 여동생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괴물들에게 찢겨나가던 여동생의 마지막 비명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유나는 고개를 흔들어 끔찍한 기억을 쫓아냈다.

    “따라와.”

    유나는 짧게 말했다. 민준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응시했다. 그 눈에 희망의 빛이 스며드는 것을 유나는 보았다. 아이의 손을 잡았다. 작고 마른 손은 차가웠다. 유나는 자신의 체온으로 그 작은 손을 감쌌다.

    어느새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건물 잔해들 사이로 붉은 노을이 스며들어, 세상의 끝을 알리는 듯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밤은 괴물들의 시간이었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 해.”

    유나는 민준을 이끌고 상점 밖으로 나왔다. 잿빛 하늘은 더욱 어두워지고 있었다. 민준은 유나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랐다. 아이의 발걸음은 힘겨워 보였지만, 단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녀의 손을 잡고 따라올 뿐이었다.

    그들은 폐허가 된 주택가를 지나 넓은 도로로 접어들었다. 부서진 다리가 저 멀리 보였다. 다리를 건너면, 어쩌면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있었다. 민준은 아까부터 물이 마시고 싶다는 듯 입술을 핥고 있었다.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버텨.” 유나는 민준에게 속삭였다.

    그때였다. 도로 건너편에서 쿵, 쿵,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나의 심장이 다시 한 번 크게 뛰었다. 저 소리는… 무리였다. 괴물들의 무리. 유나는 민준의 손을 꽉 잡았다.

    “민준아, 절대 소리 내지 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해.”

    민준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재빨리 도로 옆에 버려진 트럭 아래로 몸을 숨겼다. 트럭의 낡은 철판이 차가웠다. 먼지 냄새와 쇠 냄새가 뒤섞여 코를 자극했다.

    괴물들의 무리가 서서히 다가왔다. 썩어 문드러진 살점과 뼈가 드러난 형체들이 느릿하게, 하지만 끈질기게 발을 끌며 움직였다. 끔찍한 신음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하나둘이 아니었다. 수십 마리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그들은 마치 목적지를 정한 듯 한 방향으로만 움직였다. 다행히 그들의 시선은 트럭 쪽이 아니었다.

    유나는 민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아이는 유나의 품에 얼굴을 묻고 몸을 떨었다. 유나는 민준의 등만 규칙적으로 쓸어주며 숨을 죽였다. 언제쯤 이 끔찍한 행진이 끝날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길고 긴 정적이 다시 찾아왔을 때, 유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괴물들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이제 가도 돼.”

    그녀는 민준을 일으켜 세웠다. 민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었지만,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그 작은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다리를 건너자, 멀리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유나의 눈이 가늘어졌다. 착각일까? 이런 폐허에서 불빛이라니. 하지만 민준의 눈도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누나… 저기… 빛이 나.” 민준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나는 다시 한 번 희망의 끈을 부여잡았다. 어쩌면, 어쩌면 그곳에.

    그들은 지친 다리를 이끌고 불빛을 향해 걸었다. 불빛은 꺼질 듯 말 듯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은 다름 아닌 낡은 건물이었다. 과거에는 병원이었던 곳 같았다. ‘안전지대’라기에는 너무나 허술해 보였지만, 적어도 지붕과 벽은 온전히 서 있었다.

    건물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서자,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누군가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누구야?!”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나는 재빨리 칼을 겨눴다. 그녀의 앞에는 깡마른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의 손에도 낡은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우리는… 그냥 길을 잃은 사람이야.” 유나가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남자의 몽둥이와 그 뒤의 어둠을 번갈아 살폈다. 혼자가 아니길 바랐지만, 동시에 더 많은 생존자가 있다는 것에 대한 경계심도 놓지 않았다.

    남자는 그들의 초라한 모습을 훑어보더니 이내 몽둥이를 내렸다. “아이도 있군. 여기는… 그냥 폐허야. 아무것도 없어.”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감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불빛이 나는 것을 보면, 그 혼자만은 아닌 듯했다.

    “우리는… 물이라도 한 모금만 있으면 돼.” 유나는 애원하듯 말했다.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따라와.”

    그는 그들을 이끌고 건물 안쪽으로 들어섰다. 좁은 복도를 지나자 작은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낡은 간이침대 몇 개와 함께 두어 명의 사람들이 더 있었다. 모두 지치고 피폐해 보였지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처럼 보였다.

    구석에 놓인 양동이에 고여 있던 물을 얻어 마셨다. 차갑지는 않았지만, 목마름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했다. 민준은 허겁지겁 물을 마시더니 그제야 살 것 같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유나도 물을 마셨다. 며칠 만에 맛보는 물이었다. 생명의 물이었다.

    그날 밤, 유나는 민준을 품에 안고 낡은 간이침대에 몸을 뉘었다. 민준은 유나의 온기 때문인지, 아니면 잠시 얻은 안도감 때문인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유나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부서진 창문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어 왔다. 이 세상은 여전히 지옥이었다. 내일이 되면 또다시 식량을 찾아 나서야 하고, 괴물들을 피해 숨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마저도 임시방편일 뿐, 내일 아침에는 다시 홀로 남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품에 안긴 민준의 작은 온기가 차가운 그녀의 마음에 따뜻한 불씨를 지펴 주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이 작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계속 싸워야 했다. 절망의 끝에서, 아주 작은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유나는 민준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흔들리면서도,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지독한 세상에서, 그들은 기필코 살아남을 것이다. 함께.

  • 스팀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철컥, 촤아아악!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쉼 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굉음과 함께 뿜어져 나오는 뜨거운 증기가 투기장을 거대한 구름처럼 감쌌고, 붉게 달아오른 증기 파이프들은 꿈틀거리는 살아있는 혈관처럼 보였다. 수만 개의 기계 관중석은 이미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사람들로 가득했고, 그들의 열광적인 함성이 쇠와 증기로 이루어진 도시, ‘기공성(機工城)’의 하늘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오늘은 바로 천하의 운명을 가를 ‘천륜대회(天輪大會)’의 준결승전이 열리는 날이었다. 승자는 고대의 비보이자 모든 문명의 흥망성쇠를 결정한다고 알려진 ‘천륜경(天輪鏡)’에 접근할 권한을 얻게 된다. 천륜경은 단순한 거울이 아니었다. 시공간을 비틀고, 멈춰버린 역사를 되감을 수도, 혹은 단숨에 모든 것을 파괴할 수도 있는 미지의 힘을 품고 있었다. 그 힘을 탐하는 자들이 무수했지만, 오직 무림의 정점에 선 자만이 그 문을 열 수 있었다.

    이진은 투기장 중앙으로 향하는 거대한 태엽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그의 발걸음은 조용했지만, 내딛는 한 걸음마다 굳건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낡아 보이지만 단단한 무명 도포 자락이 증기 바람에 나부꼈다. 그의 허리에는 오직 한 자루의 묵직한 강철검만이 매달려 있을 뿐, 여느 참가자들처럼 화려한 기계 장치나 증기 동력 무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빛은 맑고 깊었으며, 시끄러운 금속성 소음 속에서도 흔들림 없는 고요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아라! 저자는 바로 ‘무영검(無影劍)’ 이진! 폐쇄적인 심산에서 수련했다고 알려진 신비로운 고수다!”
    “그의 검술은 마치 유성 같다고 하더군! 하지만 저 육체로 강철환을 막아낼 수 있을까?”

    이진은 주변의 수군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미 대련장 반대편에 우뚝 선 거대한 인물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다음 대련자! 기공성 최강의 철권! ‘강철환(姜鐵丸)’!”

    사회자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거대한 강철 팔을 가진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팔은 단순한 의수가 아니었다.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밸브와 정교하게 맞물린 기어들이 움직이며 금속성 마찰음을 냈다. 그의 육체 또한 마치 증기 압력으로 부풀어 오른 듯 단단했고, 얼굴에는 흉터와 함께 기계 부품이 박혀 있어 기괴하면서도 위압적인 인상을 풍겼다. 강철환의 등 뒤에는 거대한 증기 배낭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웅웅거리는 소리는 그의 힘의 원천을 짐작하게 했다.

    강철환은 이진을 향해 비릿하게 웃었다. “촌구석에서 굴러온 놈이 여기까지 올라오다니, 제법이군. 하지만 여기까지다. 천륜경은 오직 기공성, 그리고 나 강철환의 것이 될 것이다.” 그의 목소리에는 금속이 갈리는 듯한 거친 소음이 섞여 있었다.

    이진은 강철환의 도발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검자루에 손을 올릴 뿐이었다.

    “준비! 시작!”

    우렁찬 징 소리와 함께 대련이 시작되었다. 동시에 투기장 바닥의 거대한 기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땅이 솟아오르고 내려가며 예측 불가능한 지형을 만들어냈고, 솟아나는 증기 기둥들이 시야를 가렸다.

    강철환은 묵직한 발걸음으로 바닥을 박차고 나섰다. 그의 거대한 강철 팔이 증기 동력으로 가속하며 엄청난 속도로 이진을 향해 날아왔다. “크하하! 이 정도 속도도 감당 못하면 천륜경은 꿈도 꾸지 마라!”

    이진은 날아오는 강철 주먹을 피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강철권(鋼鐵拳)’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뜨거운 증기가 폭발하며 강철 바닥을 움푹 패이게 만들었다. 그는 날아오는 주먹의 궤적을 예측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회피했다. 그의 움직임은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처럼 가볍고 빨랐다.

    “흥! 잔기술은!” 강철환은 팔의 밸브를 최대로 열었다. ‘쉬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 압력이 더욱 강력해졌다. 연쇄적으로 솟아나는 강철 주먹들이 이진을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땅이 갈라지고, 금속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이진은 순간적으로 나타난 증기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가, 강철환의 등 뒤로 튀어나왔다. 그의 손은 이미 허리춤의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무영검(無影劍)’. 이름 그대로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 속도였다. ‘치이이익!’ 날카로운 검기가 강철환의 등 뒤, 증기 배낭을 노렸다.

    “어림없다!” 강철환은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몸을 틀며 강철 팔로 검을 막아냈다. ‘콰앙!’ 금속이 부딪히는 굉음이 투기장을 흔들었다. 이진의 검이 강철환의 팔에 닿는 순간, 거대한 스파크가 튀었다. 강철환은 이진의 검을 완력으로 밀쳐내며 다시 한번 맹렬한 펀치를 날렸다.

    이진은 뒤로 물러서며 거대한 톱니바퀴 위로 몸을 날렸다. 톱니바퀴는 시계 방향으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는 그 위에서 발을 굴러 반대 방향으로 가속하며 강철환과의 거리를 벌렸다.

    “도망칠 곳은 없다!” 강철환은 거대한 강철 발로 바닥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그의 몸이 공중에서 회전하며 거대한 풍차처럼 돌진해왔다. 그 압도적인 질량과 속도에 관중들은 숨을 죽였다.

    이진은 톱니바퀴 위에서 몸을 낮췄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내공(內功)’. 그는 자신의 몸 안에 흐르는 기(氣)를 끌어올렸다. 심장이 강하게 고동치고, 전신의 혈관에 뜨거운 에너지가 응축되었다. 외부의 소음과 증기, 그리고 강철환의 공격은 그의 의식 속에서 모두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 점, 그의 검 끝에만 집중했다.

    강철환의 거대한 몸이 거의 닿으려는 찰나, 이진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검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번개처럼 빠르게, 그러나 흐르는 물처럼 유연하게. 단순한 베기가 아니었다. 그의 검에는 엉켜버린 세상의 이치를 풀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는 듯한 오묘한 힘이 담겨 있었다.

    ‘심검(心劍)’. 외부의 어떤 힘도 아닌, 오직 내면의 의지와 깨달음으로 완성된 검술.

    철컥, 콰아앙!

    검과 강철 팔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부딪혔다. 이번에는 단순한 물리적 충돌이 아니었다. 이진의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기(氣)가 강철환의 강철 팔 내부로 파고들었다. 마치 단단한 둑에 생긴 작은 균열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강철환의 팔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강철환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그의 증기 동력으로 움직이던 팔의 기어들이 비명을 지르며 삐걱거렸다. 파이프에서 증기가 터져 나왔고, 팔 전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의 막강한 힘의 원천이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이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돌려 강철환의 증기 배낭을 향해 다시 한번 쇄도했다. 그의 검은 이제 단순한 검이 아니었다.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하고, 강철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지혜의 칼날처럼 빛났다.

    과연 이진은 기공성의 철권을 무너뜨리고 천륜경의 문을 향해 한 발짝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아니면 강철환의 맹렬한 반격에 무릎을 꿇게 될까? 투기장을 가득 채운 증기 속에서 두 고수의 운명을 건 대결은 더욱 격렬해지고 있었다.

  • 사이버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네오 서울, 크로노스 타워의 최상층 펜트하우스. 칠흑 같은 밤하늘 아래, 도시의 숨결처럼 반짝이는 네온 불빛들이 무수히 깔린 창밖 풍경은 엽서 속 그림 같았지만, 방 안의 공기는 얼어붙은 강철처럼 차가웠다. 방 중앙에는 넥서스 코프의 수장, 한서준의 시신이 옥좌처럼 놓인 최고급 인공지능 의자에 파묻혀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깨끗하고 둥근 구멍 하나가 정교하게 뚫려 있었다. 레이저에 의해 생긴 흔적이었다.

    “류진 탐정님, 드디어 오셨군요.”

    사이버수사대의 이사관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류진을 맞았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해답 없는 난제 앞에서 무너진 엘리트의 고뇌가 엿보였다. 이사관의 뒤로 보이는 경찰 요원들은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깊은 미궁에 빠진 자들의 혼란이 서려 있었다.

    류진은 코트 주머니에서 낡은 데이터 칩을 꺼내어 무심하게 씹었다. 칩에 저장된 카페인과 니코틴의 인공적인 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의 눈동자는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기계처럼 냉정하고, 동시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이가 있었다.

    “상황 보고는 받았습니다만, 직접 듣는 것이 좋겠군요. 밀실 살인이라.” 류진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이사관은 한숨을 쉬며 브리핑을 시작했다.
    “피해자는 한서준 회장입니다. 어제 저녁 10시 17분, 비서와의 마지막 통화 후 이 펜트하우스 사무실로 들어와 문을 잠갔습니다. 보안 시스템은 ‘개인 모드’로 설정되어 그의 생체 인식, 즉 망막 스캔 외에는 어떤 접근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출입 기록에는 그의 입장 기록만 있을 뿐, 그 누구의 침입도, 이탈도 없었습니다.”

    류진은 잠시 펜트하우스의 단단한 강화 유리창을 올려다봤다. 바깥은 시속 200km의 비행 드론들이 오가는 공중 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창문은 어떻습니까?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불가능합니다. 삼중 방탄 스마트 글라스이며, 내부에서 완전히 밀봉되었습니다. 어떤 물리적 충격도, 열 흔적도, 진동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환기구는 성인 남성이 드나들기에는 너무 좁고, 미세한 먼지 필터까지 그대로였습니다. 어떤 외부 침입도 없었습니다.” 이사관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묻어났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입니다.” 이사관은 한서준의 시신을 가리켰다. “피해자는 이마에 레이저 총상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 어디에서도 레이저 무기는 물론, 어떤 종류의 무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시신에는 저항의 흔적도, 방 안에는 흐트러진 물건 하나 없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된 상태에서, 갑자기 죽은 것 같습니다.”

    류진은 이사관의 말을 들으며 방 안을 한 바퀴 돌았다. 그의 시선은 바닥의 미세한 먼지 입자, 천장의 조명, 벽면의 스마트 디스플레이, 그리고 피해자의 책상 위 정리된 서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흡수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생체 인식 도어락의 표면을 쓸어보았다. 매끄러운 유리 재질이었다.

    “AI 보안 시스템 ‘헤르메스’는요?” 류진이 물었다.

    “헤르메스는 이 타워의 모든 보안을 총괄하는 최첨단 인공지능입니다. 심지어 나노 단위의 미세한 움직임도 감지하죠. 그런데 헤르메스는 ‘이상이 없음’을 보고했습니다. 침입자도, 무기의 반입이나 반출도, 심지어 비정상적인 에너지 패턴도 감지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완벽한 밀실입니다.”

    이사관은 절망적인 표정으로 류진을 바라보았다. “류진 탐정님, 대체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유령이라도 다녀간 겁니까?”

    류진은 대답 없이 바닥에 웅크리고 앉았다. 그의 손은 한서준이 죽은 의자 밑 부분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방의 가장자리에 있는 유리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스마트 글라스 표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흠집 하나 없이 투명하게 바깥의 네온 도시를 비추고 있었다.

    “이사관님.” 류진이 나지막이 불렀다.
    “네, 류진 탐정님!” 이사관은 기대감에 찬 얼굴로 다가섰다.

    류진은 손가락으로 의자 바닥의 미세한 부분을 가리켰다. “이곳에 희미한 잔류 열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헤르메스가 놓쳤거나, 아니면 감지하지 못하는 종류의 것이죠. 마치… 순간적으로 발산되었다가 사라진 에너지의 잔재 같습니다.”

    이사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잔류 열흔적이라니요? 그게 뭘 의미합니까?”

    류진은 일어서서 스마트 글라스 벽면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눈은 스캔 모드로 전환되었는지,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그는 벽의 한 지점을 응시하더니, 손가락으로 그곳을 톡톡 두드렸다.

    “이 스마트 글라스는 단순한 창문이 아닙니다. 도시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실내 온도를 조절하며, 홀로그램 디스플레이로 기능하는 다목적 에너지 패널이죠.” 류진의 설명은 차분했다. “이사관님, 이 방에서 레이저 무기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애초에 무기가 없었다면요?”

    이사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기가 없었다니요? 그럼 한서준 회장은 어떻게 레이저에 맞은 겁니까?”

    류진은 빙그레 웃었다. 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이 방을 둘러싼 거대한 에너지 패널, 바로 이 스마트 글라스 자체가 무기였던 겁니다.”

    이사관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말도 안 됩니다! 창문이 사람을 죽였다고요?”

    “정확히는, 창문처럼 보이는 이 에너지 패널이 강력한 에너지 포커싱 기능을 이용해 특정 지점으로 레이저를 발사한 겁니다.” 류진은 한서준의 시신을 다시 한 번 쳐다봤다. “한서준 회장의 이마에 난 구멍은 외부에서 발사된 것이 아니라, 방 안에서, 그것도 저 창문에서 발사된 레이저의 흔적입니다. 발사 후에는 에너지 패널의 기능이 다시 디스플레이나 온도 조절 모드로 돌아가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무기’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거죠.”

    “하지만… 그럼에도 밀실입니다. 범인은 어떻게 나간 겁니까? 그리고 헤르메스는 왜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한 거죠?” 이사관은 여전히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류진은 생체 인식 도어락으로 다시 걸어가, 그 표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그리고는 특수 제작된 소형 스캐너를 꺼내어 도어락에 밀착시켰다. 스캐너 화면에 복잡한 데이터 그래프가 빠르게 움직였다.

    “헤르메스가 ‘이상이 없음’을 보고한 이유는 간단합니다.” 류진은 스캐너 화면을 주시하며 말했다. “헤르메스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작동했으니까요.”

    “정상적이라니요? 살인이 벌어졌는데!”

    “생체 인식 도어락은 한서준 회장의 망막 스캔으로 잠겼습니다. 그리고 헤르메스는 그 기록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류진은 스캐너 화면을 이사관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미세한 잔류 에너지 패턴이 감지됩니다. 일반적인 생체 스캔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인공적인 간섭의 흔적이죠.”

    그는 방금 전 자신이 씹던 데이터 칩을 바닥에 던졌다. 칩은 미세한 연기를 내며 사라져갔다.
    “범인은 한서준 회장의 망막 정보를 복제한 합성 생체 인식 필름 같은 것을 이용해 문을 열고 나갔을 겁니다. 하지만 문제는, 어떻게 문이 다시 안에서 잠겼느냐 하는 것이죠.”

    류진은 천장의 구석, 아주 작고 눈에 띄지 않는 공기 청정 장치처럼 생긴 기기를 가리켰다.
    “이사관님, 저것은 단순한 공기 청정기가 아닙니다. 초소형 홀로그램 프로젝터입니다. 범인은 미리 저 장치를 설치해 두었고, 한서준 회장의 망막 정보까지 입력해 두었겠죠.”

    이사관은 기기를 올려다봤다. “홀로그램 프로젝터… 설마!”

    “네. 범인은 살인을 저지른 후, 복제된 망막 정보로 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원격으로 저 홀로그램 프로젝터를 작동시켰을 겁니다.” 류진은 마치 범인이 눈앞에 있는 듯 설명했다. “프로젝터는 한서준 회장의 망막 홀로그램을 정확하게 생체 인식 센서에 투사했고, 센서는 이를 ‘한서준 회장이 안에서 문을 잠근’ 것으로 인식한 거죠. 헤르메스도 완벽한 생체 정보가 감지되었으니, 아무런 이상을 보고할 이유가 없었던 겁니다.”

    류진은 방 전체를 다시 한 번 스캔하듯 훑어봤다.
    “밀실은 이렇게 깨졌습니다. 창문은 무기였고, 홀로그램은 범인의 퇴로를 감춘 장막이었죠. 결국, 첨단 기술이 범행을 숨겼지만, 그 잔여물이 진실을 말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사관은 멍한 표정으로 방 안을 둘러봤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이 완전히 새롭게 보였다. 밀실의 단단했던 벽이, 류진의 몇 마디 말에 의해 허상처럼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럼… 범인은…!”

    류진은 그의 말을 끊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네온 불빛 아래, 또 다른 미스터리를 품은 듯한 도시가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이제, 그 홀로그램 프로젝터의 내부 기록을 분석하고, 한서준 회장의 망막 정보를 복제할 수 있었던 자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사건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네온 그림자 아래, 천재 탐정 류진의 예리한 시선이 범인의 다음 움직임을 꿰뚫으려 하고 있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에피소드 1: 고요의 심장

    **캐릭터:**
    * **강하늘:** (주인공) 전 연합군 최고의 전략가이자 함대 사령관. 현재는 모든 것을 잃고 복수를 꿈꾸는 그림자 같은 존재. 한쪽 팔에 사이버네틱 의수 착용. 30대 후반의 외모, 깊은 상처와 냉기 서린 눈빛.
    * **시리우스:** (조력자) 강하늘의 AI 동반자. 냉철한 논리와 분석 능력을 지녔으며, 하늘의 유일한 아군. 홀로그램 형태로 등장하거나 함선 시스템 음성으로 구현. 차분하고 기계적인 여성 음성.
    * **이현우:** (적대자) 연합군의 실세이자 현재 권력을 쥔 인물. 강하늘을 배신한 장본인. 과거에는 강하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부관. 40대 초반, 자신감 넘치고 오만한 인상.
    * **연합군 함장:** (조연) 이현우의 부하. 중년의 충직한 군인.

    **배경:**
    * 시간: 미래, 인류가 우주로 진출하여 여러 행성계를 식민화한 시대.
    * 공간: 버려진 우주 정거장 ‘고요의 심장’, 연합군 기함 ‘정의의 칼날’, 크로노스 성운.

    **[장면 시작]**

    **#1.1 우주, 깊은 적막**
    * 수억 개의 별들이 점점이 박힌, 끝없이 펼쳐진 검은 우주. 그 가운데, 거대한 운석 지대가 유령처럼 떠다닌다. 낡고 부식된 금속 파편들이 운석 사이를 유영하며, 한때의 영광을 잃은 채 떠도는 잔해들의 춤을 추는 듯하다.
    * 어둠 속에 잠긴, 폐기된 우주 정거장 ‘고요의 심장’. 겉보기엔 그저 거대한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연합군의 공식 기록에는 오래전 폐쇄된 것으로 되어 있다.

    **#1.2 정거장 내부 – 강하늘의 은신처**
    * 정거장 내부. 좁고 습하며 어두운 통로를 지나면, 작은 함교가 나타난다. 사방의 패널들은 뜯겨나가고, 케이블이 거미줄처럼 어지럽게 늘어져 있지만, 중앙 모니터 하나만큼은 차가운 푸른빛을 뿜어내며 생명을 불어넣고 있다.
    * 모니터 앞, 낡은 의자에 앉아 있는 한 남자.
    * **강하늘**.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지만, 앙상하게 마른 어깨와 굳게 다문 입술에서 깊은 고뇌와 증오가 느껴진다. 그는 흡사 그림자 그 자체가 된 듯하다.
    * 그의 왼쪽 팔은 매끄러운 금속 질감의 사이버네틱 의수다. 인간의 피부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손가락 끝이 모니터 화면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며 데이터를 탐색한다.

    **시리우스 (음성, 차분하고 기계적인 톤):** 현재 목표 ‘정의의 칼날’함의 이동 경로가 재확인되었습니다. 12시간 후, ‘크로노스 성운’을 통과할 예정입니다. 예상 경로에서 벗어날 확률은 0.003% 미만입니다. 제 예측 시스템에 오류는 없습니다.

    **강하늘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듯한):** 놈이 직접 타고 있나? 그 함선에?

    **시리우스:** 이현우 사령관의 개인 전용 함선 ‘새벽별’이 ‘정의의 칼날’에 도킹된 상태입니다. 이동 시에도 하선하지 않을 확률 99.8%. 목표는 함 내부에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차범위 0.1% 이내.

    **강하늘:** (피식, 비웃는 듯) 여전히 자신만만하군. ‘정의의 칼날’이라. 그 이름도 역겹지. 정의? 정의는 이미 그 함선에서 썩어 문드러진 지 오래다.

    * 강하늘의 시선이 모니터에 고정된다. 화면에는 ‘정의의 칼날’이라 명명된 연합군의 기함이 웅장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거대한 위용은 과거 그가 설계에 참여했던 영광의 함선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그 옆에는 연합군 최고 사령관, **이현우**의 얼굴이 뜬다. 자신감 넘치고, 어딘가 오만해 보이는 미소. 과거의 빛나던 미소는 온데간데없다.

    **강하늘 (속마음, 증오에 찬):** 현우… 네가 내 이름을 부르던 순간들을 기억한다. 우리는 함께 별을 보며 웃었지. 같은 꿈을 꾸었다고, 이 연합군의 미래를 함께 만들어갈 것이라고 굳게 믿었지. 하지만 네 손가락이 내 등을 겨누는 순간, 그 모든 것이 한낱 거짓말이었음을 알았다. 네 욕망의 도구였음을…

    **[회상 시작]**

    **#1.3 과거 – 연합군 본부, 브리핑 룸**
    * 화면이 전환된다. 밝고 깔끔하며 미래적인 디자인의 연합군 본부 브리핑 룸. 곳곳에 배치된 홀로그램 디스플레이가 빛을 낸다.
    * **강하늘** (젊은 시절, 왼쪽 팔이 온전하다), **이현우** (젊고 패기 넘치는 얼굴). 두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거대한 우주 지도를 가리키며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주변에는 다른 장교들이 둘러서서 경청한다.
    * 두 사람의 얼굴에는 동료애와 굳건한 신뢰가 가득하다.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의중을 꿰뚫는 듯한 막역한 사이.

    **강하늘 (과거, 열정적으로):** 사령관님! 제 계산으로는 ‘안드로메다 전선’의 후방을 기습하는 것이 최단 시간 내에 적의 보급선을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위험 부담은 크지만, 성공한다면 이번 전쟁을 종결시킬 수 있습니다! 모든 데이터를 재차 확인했습니다.

    **이현우 (과거,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하늘의 어깨를 두드린다):** 과감하군, 하늘. 자네다운 발상이야. 하지만 그 위험 부담을 감당할 전략가는 자네밖에 없을 거야. 내 가장 굳건한 방패이자 가장 날카로운 창. 자네를 믿네, 언제나 그랬듯이.

    **강하늘 (과거, 환하게 웃으며):** 영광입니다, 사령관님. 제 모든 것을 걸고… 반드시 승리하겠습니다!

    **#1.4 과거 – 배신의 순간**
    * 장면이 빠르게 전환된다. 강하늘이 이끄는 연합군 함대가 맹렬히 교전 중인 전장. 폭발음과 굉음, 레이저 광선이 난무하며 우주를 지옥으로 만든다.
    * 강하늘은 함교 중앙 지휘석에서 침착하게 함대를 지휘하고 있다. 그의 얼굴에 긴장과 집중이 역력하다. 승리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한다.
    * 그때, 함교 후방에서 섬광이 터진다. 그의 등 뒤에서.
    *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강하늘이 앉아 있던 지휘석이 격렬한 폭발에 휩싸인다. 그의 비명 소리가 들릴 듯 말 듯 작게, 그리고 아련하게 들린다. 폭음 속에 묻힌 절규.
    * 화면 가득 이현우의 싸늘한 눈빛이 클로즈업된다. 그의 손에는 방아쇠가 당겨진 소형 플라즈마 무기가 들려있다. 그의 입꼬리가 냉정하게, 아주 미세하게 올라간다. 아무런 감정 없는, 완벽하게 계산된 표정.

    **이현우 (과거, 무표정하게, 하지만 차가운 만족감이 서려 있다):** 미안하다, 친구여. 하지만… 자네의 명성은 내게 너무 큰 그림자였어. 이 승리의 영광은 오롯이 나의 것이어야만 했지. 그리고 이 전쟁은… 나의 이름으로만 종결되어야만 했어.

    **[회상 끝]**

    **#1.5 정거장 내부 – 강하늘의 은신처 (현재)**
    * 다시 현재. 강하늘은 의자 손잡이를 꽉 쥐고 있다. 그의 사이버네틱 의수에서 “삐빅” 하는 작은 과부하음이 들린다. 회상 속의 고통과 분노가 기계 장치마저 흔든다.
    * 그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게, 그리고 핏빛처럼 섬뜩하게 빛난다.

    **강하늘:** (깊은 숨을 내쉬며) 그날 이후, 모든 것을 잃었지. 명예, 가족, 내가 지키려 했던 연합군의 이상, 그리고… 내 자신까지도. 이 절망적인 심연 속에서, 나는 네가 죽였다고 믿었던 그 존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잃지 않은 것이 단 하나 있다. 너를 향한 이 지옥 같은 증오심.

    **시리우스:** 분석 결과, 복수의 동기는 강력한 추진 에너지를 생성합니다. 감정은 때로 가장 효율적인 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생존 확률을 0.001% 미만에서 90% 이상으로 끌어올린 원동력이었습니다.

    **강하늘:** (비릿하게 웃으며) 감성 없는 AI 주제에 뭘 안다고. 그래, 효율적이지. 너의 모든 연산 능력과 나의 모든 증오를 더하면, 현우… 네가 쌓아 올린 그 공든 탑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할 거다. 네 심장이 무너져 내릴 때까지.

    * 강하늘은 자리에서 일어나 패널로 다가간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에 망설임이 없다.
    * 그의 의수가 패널에 연결되고, 화면에 복잡한 전술 지도가 펼쳐진다. 수많은 데이터와 경로들이 점멸하며, 곧 일어날 비극적인 계획을 보여준다.

    **강하늘:** ‘정의의 칼날’은 연합군의 상징이자 현우의 자존심. 놈의 가장 소중한 것을 가장 고통스럽게 찢어발겨 주마. 처음엔 작은 균열을, 그다음엔 메울 수 없는 심연을 선물해 줄 것이다.

    **시리우스:** 목표 ‘크로노스 성운’은 항법 교란이 심한 지역입니다. 통신 방해가 예상되며, 연합군 함선의 탐지 능력도 저하될 것입니다. 은밀한 작전에 최적화된 환경입니다.

    **강하늘:** 완벽한 무대군. 그 성운의 붉은 먼지가 놈의 피색과 같기를 바랄 뿐이다.

    * 화면에는 강하늘이 직접 제작하고 개조한 소형 함선 ‘망각의 그림자’의 설계도가 떠오른다. 검고 날렵하며, 모든 탐지망을 회피할 수 있는 스텔스 기능에 특화된 함선이다. 흡사 거대한 우주를 떠다니는 상어처럼.

    **강하늘:** (망각의 그림자 설계도를 보며) 놈은 내가 죽었다고 믿겠지. 이 드넓은 우주에서, 한 줌의 먼지가 되었다고 생각할 거다. 하지만 먼지는… 때로는 가장 치명적인 폭풍이 되지. 놈의 심장을 꿰뚫을 폭풍.

    **시리우스:** ‘망각의 그림자’의 출격 준비 완료. 모든 시스템 가동률 100%. 에너지 코어 과부하 없이 안정적입니다.

    **강하늘:** 좋아. 현우, 네가 잊은 과거가 지금 너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 과거는… 지독한 악몽이 될 거다.

    * 강하늘이 함교 밖으로 향한다. 그의 등 뒤로, 폐쇄된 정거장의 어둠 속에서 ‘망각의 그림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날렵하고 위협적인 실루엣이 차가운 푸른빛을 받아 더욱 선명해진다.

    **씬 2: 크로노스 성운의 그림자**

    **[장면 시작]**

    **#2.1 우주 – 크로노스 성운**
    * 붉고 보랏빛 가스가 소용돌이치는 ‘크로노스 성운’. 시야가 흐릿하고, 전파 간섭이 심하다. 거대한 우주의 용암이 끓어오르는 듯한 장관.
    * 연합군 기함 ‘정의의 칼날’이 묵직하게 성운 속을 가로지르고 있다. 그 웅장함 속에도 어딘가 모를 불안감이 감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사냥감을 찾아 헤매는 듯.
    * 함선 주위로는 호위함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지만, 성운의 방해로 인해 그들의 눈은 멀어버린 상태다.

    **#2.2 ‘정의의 칼날’ 함교**
    * 최첨단 장비로 가득 찬 함교. 거대한 홀로그램 전술판이 중앙에 떠 있고, 함장과 승무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긴장감 속에서도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연합군의 심장부.
    * 중앙 사령석에 앉아 있는 **이현우**. 그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미소가 걸려 있지만, 그의 눈빛은 날카롭다. 그는 손안에 모든 것을 쥐고 있다고 믿는 듯하다.
    * 모니터에는 성운의 기류와 함선의 상태, 그리고 미약한 경계망의 정보가 표시되어 있다.

    **연합군 함장:** 사령관님, 성운 진입 완료. 항법 교란이 예상보다 심합니다. 외부 탐지 범위가 30% 이상 감소했습니다. 현재 전파 방해는 최고조에 달합니다.

    **이현우:**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며) 흐음. 예상했던 바다. ‘크로노스 성운’은 원래 그런 곳이니.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지. 특별한 징후는 없나? 외부 침입이라든가…

    **연합군 함장:** 현재까지는 없습니다, 사령관님. 모든 시스템 정상 작동 중입니다. 비상 사태는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이현우:** (피식 웃으며) 좋다. 잠시 눈을 감고 있어도 될 만큼 안전하다는 뜻이겠군. 휴식도 전략의 일부지.

    * 그때, 갑자기 함교 전체에 비상 경고음이 울린다. “삐비빅! 삐비빅!”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깨뜨린다.
    * 모니터들이 붉게 변하며 ‘경고: 침입 감지!’ 메시지를 띄운다. 동시에 함선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한다.

    **연합군 함장:** (당황하며) 사령관님! 알 수 없는 함선이 탐지되었습니다! 소형입니다! 스텔스 기능이 극대화되어 있었습니다! 이제야 감지되다니…!

    **이현우:** (미소가 사라지고 눈이 날카로워진다) 뭐라고? 소형 함선? 이 성운에서? 위치 파악은? 무슨 해적 놈들이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연합군 함장:** 성운의 기류와 강력한 전파 방해로 정확한 위치를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현재 함선 후방… 격납고 쪽으로 빠르게 접근 중입니다! 이미 방어망을 돌파했습니다!

    **이현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목소리가 높아진다) 격납고라고? 전 함선에 비상 경계령을 내려라! 전방위 방어막을 최대로 올려! 당장 격납고를 봉쇄하고 침입자를 막아! 절대 안으로 들여서는 안 돼!

    * ‘정의의 칼날’ 전체에 비상 경고음이 더욱 요란하게 울려 퍼진다. 함선이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2.3 ‘정의의 칼날’ 격납고**
    * 어둡고 거대한 격납고. 수많은 전투기들과 수송선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박해 있다. 연합군의 자랑스러운 전력.
    * 갑자기 격납고 한쪽 벽이 맹렬한 폭발과 함께 찢겨나간다. “콰아앙!” 육중한 금속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날린다.
    * 붉은 불꽃과 함께 잔해가 흩날리는 틈으로, 검고 날렵한 **’망각의 그림자’**가 돌진해 들어온다. 그 속도가 엄청나다. 흡사 날카로운 독침과 같다.
    * 격납고 내부에 대기하고 있던 연합군 병사들이 경악하며 플라즈마 총을 난사하지만, ‘망각의 그림자’는 그들의 공격을 비웃듯 순식간에 수많은 전투기들을 스쳐 지나며 파괴한다. “퍼퍼펑!” 연쇄 폭발이 격납고를 뒤흔든다.

    **#2.4 ‘망각의 그림자’ 조종석**
    * **강하늘**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그의 눈빛은 광기에 가까운 희열과 차가운 분노로 빛난다. 복수의 쾌감이 그의 심장을 뛰게 한다.
    * 그의 사이버네틱 의수가 정교하게 조종간을 움직인다. 기계와 인간이 완벽하게 융합된 모습.

    **시리우스:** 격납고 내부 파괴율 70%. 주요 전투기 전력의 90% 이상이 손실되었습니다. 임무 목표 1 달성. 당신의 조종 능력은 예측치를 20% 상회했습니다.

    **강하늘:** (나직이, 흥분과 냉정이 뒤섞인 목소리) 아직 멀었다. 겨우 시작일 뿐이야. 놈이 진정한 고통을 느끼려면, 훨씬 더 깊이 쑤셔 넣어줘야지.

    * ‘망각의 그림자’는 남은 연합군 병사들의 사격을 무시하고, 격납고 깊숙한 곳, 거대한 에너지 코어 쪽으로 돌진한다. 그들의 목표가 명확하다.

    **#2.5 ‘정의의 칼날’ 함교**
    * 이현우는 전술 모니터를 통해 격납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격납고가 아수라장이 되는 모습에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든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벌린다.

    **이현우:** (주먹으로 상황판을 내리치며) 젠장! 누가 감히! 어떻게 이 철통같은 방어를 뚫었단 말인가! 이런 파괴력은…!

    **연합군 함장:** 사령관님! 침입 함선이 에너지 코어에 접근 중입니다! 자폭하려는 것 같습니다! 충돌까지 10초!

    **이현우:** (경악) 막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 에너지 코어가 터지면 이 함선은 끝장이야! 우리 모두 죽는다!

    * ‘정의의 칼날’이 격렬하게 흔들린다. 함교의 불빛이 깜빡거린다. 절체절명의 순간.

    **#2.6 ‘망각의 그림자’ 조종석**
    * 강하늘은 에너지 코어 바로 앞까지 접근한 상태다. 코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에너지가 조종석을 섬뜩하게 비춘다. 복수의 제단에 바쳐질 희생물처럼.
    * 강하늘은 손가락으로 마지막 버튼을 누른다. 멈칫거림 없는 단호한 움직임.

    **강하늘:**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너의 자랑스러운 ‘정의의 칼날’을 산산조각 내주마. 이현우. 이것이 네가 잊었던 망자의 선물이다! 지옥의 선물!

    **시리우스:** 함선 내부에 설치된 EMP 발생 장치 가동 준비 완료. 탈출 경로 확보. 정확도 99.9%.

    **강하늘:** 좋아! 가라, 시리우스! 놈에게 나의 존재를 똑똑히 알려줘라!

    * 강하늘은 함선 중앙 시스템에 강력한 EMP를 발사한 직후, ‘망각의 그림자’를 급선회시켜 파괴된 격납고 출입구로 빠르게 빠져나간다. 그의 임무는 정확하고 잔인했다.

    **#2.7 ‘정의의 칼날’ 함교**
    * “콰르르릉!”
    * 격렬한 폭발음과 함께 ‘정의의 칼날’ 전체의 전원이 나가버린다. 모든 모니터가 꺼지고, 비상등만 깜빡거리며 희미하게 함교를 비춘다.
    * 거대한 충격파가 함선 전체를 강타한다. 승무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진다. 모든 것이 혼란에 휩싸인다.
    * 이현우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선다. 그의 얼굴에는 공포와 분노, 그리고 섬뜩한 깨달음이 스쳐 지나간다. 이건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이현우:** (떨리는 목소리로) EMP… 이 정도 위력의 EMP라면… 일반적인 해적이나 반군 세력의 짓이 아니야. 이건… 이건 마치… 그 놈의 수법과…!

    * 꺼져버린 모니터 중 하나가 다시 희미하게 점멸하더니, 노이즈 가득한 화면이 뜬다. 화면 속에서 강하늘의 얼굴이 나타난다. 반쪽은 그림자에 가려져 있고, 다른 반쪽은 차가운 금속 의수로 되어 있다. 그의 눈동자는 복수의 불꽃으로 활활 타오른다.

    **강하늘 (화면, 노이즈 섞인 목소리):** 오랜만이다, 친구여. 네가 잊은 줄 알았던 과거가… 이제 네 그림자조차 집어삼키러 왔다. 네가 파멸시킨 자가, 이제 너를 파멸시키러 왔다.

    **이현우:** (경악에 찬 비명) 강하늘?! 네가… 네가 살아있었다고?! 말도 안 돼! 분명 죽었을 텐데…!

    **강하늘 (화면):** 네가 나를 지옥으로 보냈다고 생각했겠지. 하지만 지옥은… 날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제, 그 지옥의 문은 너를 위해 열릴 것이다. ‘정의의 칼날’이 아니라, ‘복수의 칼날’로 네 심장을 도려낼 때까지,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도망쳐 봤자 소용없어. 이 드넓은 우주 어디에도, 네가 숨을 곳은 없을 테니.

    * 강하늘의 얼굴이 섬뜩하게 웃는다. 지옥에서 온 사신처럼.
    * 화면은 이내 노이즈와 함께 완전히 꺼진다. 정적만이 함교를 지배한다.
    * 이현우는 주저앉아 떨리는 손으로 입을 막는다. 그의 눈빛은 혼란과 두려움으로 가득하다. 과거의 악몽이 현재를 집어삼키는 순간.
    * ‘정의의 칼날’은 전력을 잃은 채, 붉은 크로노스 성운 속을 표류한다. 마치 거대한 관처럼.

    **[장면 끝]**

    **[에피소드 끝]**

  • 선협 (신선)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스물셋, 기묘한 흔적

    도시의 밤은 늘 그랬다. 스물셋, 이진우의 삶도 그랬다. 스물세 살의 그는 스물세 층짜리 오피스텔 스물세 호에서 살았다. 층수와 호수를 합쳐 스물세 호라니, 마치 삶이 반복되는 숫자에 갇힌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창밖으로는 수많은 불빛이 바다처럼 일렁였고, 그 빛들은 밤의 장막 아래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진우의 작은 방은 그 모든 소음과 분주함으로부터 완벽하게 고립된, 고요한 섬이었다.

    “젠장, 이놈의 현기증은 언제쯤 가실까.”

    진우는 책상 위의 낡은 고서 『선도진경(仙道眞經)』을 덮었다. 경전의 한 줄, 한 줄에 정신을 집중하는 일은 여전히 그에게 쉽지 않았다. 온몸의 기맥을 타고 흐르는 미약한 기운을 느끼는 것조차 아직은 너무나 멀게 느껴졌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선골(仙骨)이니 영근(靈根)이니 하는 것은 진우에게는 그저 먼 옛날 이야기 속 허황된 꿈일 뿐이었다. 그는 그저 오랜 가문의 전통에 따라 이 기묘한 수련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현대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이 시대에 신선이 되겠다고 앉아 있는 자신이 어딘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도 떨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매일 밤 이 작은 방에 앉아 눈을 감고, 고요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도시의 소음이 잠시 멎는 듯한 그 순간, 얇디얇은 영기(靈氣)의 조각들이 공기 중에 흐느적거리는 것을 느끼려 노력했다. 물론, 대부분은 실패였다. 오늘은 특히 피로감이 심했다. 어설프게 기운을 끌어모으려다 부작용이라도 온 걸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시원한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 싶었다. 정수기에서 물을 따르려던 찰나,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TV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정확히는, 테이블 한가운데에서 바깥쪽으로, 마치 누군가 손으로 툭 민 것처럼 미끄러져 떨어져 있었다.

    “뭐야? 내가 잘못 놨나?”

    진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리모컨을 주워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렸다. 조금 전의 현기증 때문인지 눈이 침침하다고 생각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다시 물을 마시러 가던 진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철컥.

    거실 한쪽에 있는 작은 다용도실 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히 조금 전, 잠자리에 들기 전 모든 문을 닫았었다. 특히 다용도실 문은 걸쇠까지 채워 잠갔던 기억이 생생했다. 혹시 집이 오래되어 문이 헐거워졌나? 진우는 다용도실 문으로 다가가 걸쇠를 꼼꼼히 확인했다. 단단하게 잠겨 있었다.

    “뭐지, 착각인가?”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고 헛소리가 들리는 걸까? 진우는 이마를 짚었다. 수련에 너무 몰두한 부작용인가. 아니면 그저 과로인가.

    그날 밤은 왠지 모르게 잠 못 드는 밤이었다. 새벽녘, 간신히 잠이 들었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위이잉-

    갑자기 냉장고의 압축기가 과열된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보통보다 훨씬 크고 거슬리는 소리였다. 진우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걷어차고 냉장고 쪽으로 걸어갔다. 문을 열어보니 내부의 불빛은 멀쩡히 들어왔고, 음식물도 잘 보관되어 있었다. 이상한 점은 없었다.

    그 순간, 거실에서 다시 한번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거실 창문의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였다.

    진우는 이제 더 이상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한기가 솟구쳤다. 그는 재빨리 거실로 향했다. 거실 창문은 완전히 열려 있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이 밤의 정적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 차가운 공기 속에서, 옅은 비린내가 느껴졌다. 마치 낡은 쇠붙이와 흙탕물이 뒤섞인 듯한, 불쾌한 냄새였다.

    “이건… 대체….”

    진우는 더 이상 자신의 착각이나 과로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 그는 즉시 방으로 돌아가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었던 작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여러 장의 부적과 작은 수정 구슬, 그리고 낡은 은비녀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그에게 남긴 유품이었다. 할머니는 그에게 “이것들은 너를 지켜줄 것이며, 너의 길을 안내할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쓰지 마라. 네가 진정으로 힘을 깨닫는 날까지는.”이라고 말했었다.

    진우는 은비녀를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에 닿자, 그의 몸속 어딘가에서 미약한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는 그저 차갑고 단단한 은 조각에 불과했던 비녀가, 마치 그의 손끝과 반응하듯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젠장, 아직은 이르다고 생각했는데.”

    진우는 은비녀를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집중했다. 고서에서 배웠던 영시(靈視)의 기법을 떠올렸다. 눈을 감고, 온 감각을 곤두세워 주변의 기운을 느끼려 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도시의 무수한 전자파와 생활의 잡념만이 뒤섞인 탁한 기운의 바다였다. 하지만 그가 의지를 집중하고, 은비녀의 기운을 빌리자, 서서히, 미세한 파동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파동이었다. 마치 물 위에 돌을 던졌을 때 생기는 잔물결처럼, 진우의 아파트 전체를 감싸고 있는 기묘한 파동이었다. 그 파동은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했으며, 마치 술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는 것처럼 불안정했다.

    진우는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동자에 흐릿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 같았다. 그는 은비녀를 든 채로 거실로 나섰다.

    파동의 진원지는 거실이었다. 정확히는, 소파 뒤편의 벽면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진우가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공기 중의 냉기가 더욱 짙어졌다. 비린내도 강해졌다.

    “너, 도대체 누구냐.”

    진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긴장감과 함께 묘한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은비녀의 끝을 벽면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댔다.

    쉬이이익-

    은비녀가 벽에 닿자마자, 갑자기 벽면에서 푸른 빛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을 진우는 똑똑히 목격했다. 빛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더니, 이내 벽 전체를 뒤덮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형체가 어른거렸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이 아니었다. 흐릿한 연기처럼 보이면서도, 때로는 날개 달린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때로는 기다란 촉수처럼 뻗어 나가는 알 수 없는 형태였다. 그것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것 같지 않았고, 그저 주변의 기운을 흡수하며 불안정하게 표류하는 듯했다. 마치 오랜 시간 어딘가에 갇혀 있다가, 간신히 풀려난 존재처럼.

    “이게… 폴터가이스트? 아니, 단순한 장난질이 아니야.”

    진우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것은 인간의 감정에 반응하는 흔한 유령이나, 단순히 심령 현상으로 치부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그의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고서에 기록된, 특정한 조건을 갖춘 공간에서만 발생하는 ‘이계의 파동’, 혹은 ‘영체 파편’과 유사했다.

    그 순간, 알 수 없는 존재가 빛 속에서 더욱 격렬하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진우가 은비녀를 가까이 대자, 그것은 마치 자극을 받은 것처럼 반응했다.

    쿠구궁!

    아파트 전체가 진동하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요란하게 흔들리고, 거실의 커튼이 펄럭였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들이 뚝뚝 떨어져 깨지고, 작은 장식품들이 산산조각 났다. 폭풍이 휘몰아치는 듯한 아수라장이었다.

    진우는 이빨을 악물었다. 그의 팔에 힘줄이 불거졌다. 은비녀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이 그의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감히… 내 수련의 공간을 망치려 드느냐!”

    진우는 소리쳤다. 비록 그의 수련이 미약하고,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그 오랜 가문의 혈통에서 비롯된,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실려 있었다.

    그는 은비녀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고서에서 어렴풋이 기억하던 퇴마의 술법 중 가장 간단한 것을 떠올렸다. 그것은 특정 영물을 제어하거나, 불순한 기운을 일시적으로 몰아내는 데 사용되는 원시적인 주술이었다.

    “물러서라, 불결한 파동이여! 제자리에 돌아가라!”

    진우는 주문을 외우며 은비녀를 벽을 향해 내리찍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은비녀 끝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푸른빛 섬광이 벽면의 알 수 없는 형체를 향해 쏘아졌다.

    쉬이이이이익- 콰아앙!

    마치 거대한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벽면의 푸른빛 아지랑이와 알 수 없는 형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것은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일그러지더니, 이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진우는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버텼다. 은비녀의 기운을 끌어모으는 것이 그의 미약한 몸에는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온몸의 기맥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점점 푸른빛이 약해지고, 형체도 희미해졌다. 마침내 모든 것이 사라지고, 벽면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깨진 액자와 흩어진 장식품들만이 방금 일어났던 사태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간 듯 허탈했다. 하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벽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빛을 쏘았던 벽면의 정중앙에,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숯으로 그린 것처럼 진한 검은색이었고, 그 안에는 아주 희미하게, 마치 물속에 비친 그림자처럼,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고서에서 본 적이 있는 아주 오래된 ‘경계석(境界石)’의 일부를 나타내는 듯한 문양이었다.

    “젠장… 이걸로 끝이 아니었잖아.”

    진우는 낮게 읊조렸다. 퇴마의 술법은 그저 일시적인 봉인에 불과했던 것이다. 벽면에 남은 자국은 그 존재가 이 아파트에 깊숙이 뿌리를 내렸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리고 그 문양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아니라, 이계의 무언가가 이 현실 세계로 침투하고 있다는 불길한 전조 같았다.

    그의 아파트, 스물세 호에서 벌어진 기괴한 밤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했다. 과연 이 평범한 도시 속에서, 이진우는 어떤 운명과 마주하게 될 것인가. 그의 눈동자에 불안감과 함께 알 수 없는 결의가 스치고 지나갔다.

    창밖의 도시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지만, 진우의 방은 이제 더 이상 고요한 섬이 아니었다. 거대한 파도가 곧 덮쳐올, 위태로운 바위섬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제37화. 낡은 터널의 메아리**

    “젠장, 저번보다 더 심해졌잖아.”

    강민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낡은 터널 입구에 부딪혀 희미한 메아리를 남겼다. 도시의 심장부를 가로지르던 고속도로 터널은 이제 거대한 입을 벌린 괴물의 식도처럼 음침했다. 천장은 곳곳이 무너져 내려 철근 뼈대가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었고, 바닥은 정체 모를 검은 진액과 부스러진 콘크리트 조각, 그리고 무성하게 자란 이끼들로 뒤덮여 있었다. 습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옆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유진이 손전등을 들어 터널 안쪽을 비췄다. 삐걱거리는 빛줄기는 어둠을 온전히 가르지 못하고, 이내 희미한 윤곽만을 드러낸 채 사라졌다. 저 안 어딘가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더 돌아서 가는 건 무리예요, 오빠. 이쪽이 그나마 제일 빠르고… 안전할 거라고 했잖아요.”

    유진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묻어났다. 그녀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훑었다. 이곳은 폐허가 된 도시에서도 손꼽히는 위험 구역이었다. 한때는 번화했던 강남 대로 지하를 관통하는 길이었지만, ‘붕괴’ 이후로는 이형(異形)들의 주요 서식지가 되어버렸다.

    강민은 대답 대신 등에 멘 낡은 배낭을 고쳐 매고, 손에 든 개량된 쇠파이프의 손잡이를 단단히 쥐었다. 끝부분에 날카롭게 다듬은 철 조각을 박아 넣은 이 무기는 수많은 이형들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동시에 수많은 위험 속에서 그의 목숨을 지켜주기도 했다.

    “안전? 이 망할 세상에 안전이란 게 남아있긴 하냐.”

    그가 짧게 내뱉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터널 안쪽, 어둠 속에 잠긴 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록 투덜거렸지만,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다른 길을 찾아 헤매다가는 더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정보는 정확해야 해. 이번에 얻어야 할 물건이 뭔지 다시 확인해.”

    “네, ‘흑요석 결정’ 열 개, 그리고 ‘제련 촉매’ 세 개요.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식량 창고 들렀다가 복귀하는 거요.”

    유진이 빠르게 되뇌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긴장감만 남았다. 이곳에서의 모든 움직임은 곧 생존과 직결됐다.

    강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내가 먼저 들어간다. 넌 그림자 안쪽에 바싹 붙어. 소리 내지 마. 그리고 내 신호 없이는 절대 움직이지 마.”

    그는 유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심호흡했다. 그녀는 강민보다 훨씬 어렸지만,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나이에 걸맞지 않은 냉철함을 지니고 있었다.

    강민은 손전등을 켜지 않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희미하게 남아있는 외부의 빛과, 터널 내부를 흐릿하게 밝히는 알 수 없는 발광 이끼의 푸른빛에 의존했다. 한 걸음, 한 걸음. 그의 발소리는 최대한 죽였지만, 신발 밑창과 부스러진 콘크리트 조각이 마찰하는 소리는 피할 수 없었다. 마치 죽은 도시의 심장이 다시 뛰는 듯한 불규칙하고도 느린 박동이었다.

    유진은 강민의 등 뒤에 바싹 붙어 따라갔다. 그녀의 손에는 경량 석궁이 들려 있었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놀라운 정확도로, 그녀는 이형들의 눈을 정확히 관통하는 데 능숙했다.

    터널 안쪽으로 100미터쯤 들어섰을 때, 강민이 갑자기 손을 들어 멈춤 신호를 보냈다. 유진은 즉시 벽에 몸을 숨겼다. 강민은 천천히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췄다. 그의 예민한 감각이 무언가를 포착한 것이다.

    공기 중의 습기가 짙어지는 듯했다. 멀리서 들려오던 짐승의 울음소리는 사라졌고, 그 대신 희미한 긁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쇠붙이가 콘크리트를 긁는 듯한, 혹은 거대한 곤충이 다리를 비비는 듯한 소리였다.

    ‘철광 이형.’

    강민의 뇌리를 스치는 단어. 이놈들은 낡은 철근이나 금속 파편에 의태하여 주변 환경과 완벽하게 섞여들었다. 오직 소리에 의존하거나, 놈들의 미세한 움직임을 포착해야만 그 존재를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리고 놈들은 청각에 극도로 민감했다.

    “오… 오빠…” 유진의 목소리가 귀에 겨우 닿을 정도로 작게 들려왔다.

    강민은 시선으로 ‘움직이지 마’라고 지시했다. 그의 눈은 어둠 속을 꿰뚫는 듯 움직였다. 긁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러 마리였다.

    그때, 강민의 발 바로 옆에 있던 낡은 철근 더미가 꿈틀거렸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위장이었다. 녹슨 철근 몇 개가 한데 뭉쳐 있는 것처럼 보였던 그것이, 순식간에 여섯 개의 날카로운 다리를 펴고 일어섰다. 거대한 사마귀를 닮은 몸체는 낡은 철판과 녹슨 못으로 이루어진 듯했고, 핏발 선 여섯 개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쉬이이익-!

    철광 이형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강민에게 달려들었다. 놈의 앞다리에는 갈고리처럼 휘어진 낡은 철판 조각이 붙어 있었다. 강민은 몸을 뒤로 젖히며 겨우 공격을 피했다. 놈의 갈고리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금속성 비명이 그의 귀를 찢을 듯 울렸다.

    “젠장, 들켰군!”

    강민은 재빨리 쇠파이프를 휘둘러 놈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찌걱이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몸체에서 녹슨 철 조각들이 파편처럼 튀어 올랐다. 이형은 잠시 비틀거렸지만, 이내 균형을 잡고 다시 공격 자세를 취했다.

    강민은 뒤이어 달려드는 다른 이형들을 시야에 담았다. 벌써 두 마리가 더 나타나 강민을 포위하려 들었다. 놈들은 터널 벽과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빠르게 기어왔다.

    “유진, 후방 지원!”

    강민의 외침과 동시에 유진의 석궁이 불을 뿜었다.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간 화살이 강민의 뒤쪽에서 달려들던 이형의 눈을 정확히 꿰뚫었다. 끼이이익! 이형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지만 이내 몸을 뒤틀며 다시 일어나려 했다.

    ‘약점은 눈이다. 혹은 몸통 한가운데의 핵.’

    강민은 기억을 더듬으며 첫 번째 이형에게 달려들었다. 쇠파이프를 수직으로 내리찍어 놈의 머리 부분을 노렸다. 이형은 강철로 된 갑옷을 두른 듯 단단했지만, 강민은 수많은 전투를 통해 놈들의 약점을 파고드는 법을 익혔다.

    쾅! 쇠파이프가 이형의 머리에 박히자, 녹슨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이형은 잠시 움찔했지만, 여전히 살아있었다. 놈의 여섯 눈이 강민을 노려보며 더욱 맹렬하게 덤벼들었다.

    쉬이이익- 쉬이이익-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와 강민의 오른쪽에서 달려들던 이형의 눈을 또다시 관통했다. 유진은 흔들림 없는 정확도로 지원 사격을 퍼부었다. 강민은 그 틈을 타 첫 번째 이형의 움직임을 묶었다. 그는 쇠파이프 끝에 박힌 날카로운 철 조각으로 이형의 다리 관절 부분을 쑤셔 박았다.

    끼이이이익! 철근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이형의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놈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엎어졌다. 강민은 지체 없이 놈의 등 위에 올라타 쇠파이프를 놈의 몸체 중앙에 있는 가장 단단해 보이는 곳에 내리찍었다.

    콰지직!

    무언가 단단한 것이 부서지는 소리. 이형의 몸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놈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녹슨 철 조각들 사이로 미세한 균열이 생기며 스멀스멀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강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팔에는 이미 몇 군데 긁힌 상처가 생겨났다.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두 번째 놈은 처리됐나?”

    그가 유진에게 물었다. 유진은 세 번째 이형을 향해 마지막 화살을 겨냥하고 있었다. 이형은 두 발을 잃고 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위협적이었다.

    “네! 마지막 한 발…!”

    유진이 방아쇠를 당겼다. 화살은 정확히 놈의 몸통 중심부를 꿰뚫었다. 푸른 섬광이 터지며, 철광 이형은 완전히 침묵했다.

    강민은 숨을 고르며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더 이상 달려드는 이형은 없었다. 하지만 놈들의 비명 소리가 터널 전체에 울려 퍼졌을 터. 이 소리가 다른 이형들을 불러 모으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빠르게 움직여야겠어. 놈들이 이 소리를 듣고 몰려들 거야.”

    그가 유진에게 다가가 쓰러진 이형들을 확인했다. 놈들의 몸을 뒤덮은 철 조각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결정체들이 보였다. 이형의 핵이었다. 수많은 자원들이 고갈된 이 세상에서, 이형들의 핵은 중요한 에너지원이자 거래 수단이 되었다.

    “최대한 회수해. 다음 보급품에 보탤 수 있을 거야.”

    강민은 능숙하게 쇠파이프 끝으로 이형의 핵을 끄집어냈다. 끈적하고 차가운 감촉이 손가락에 닿았다. 유진도 옆에서 칼을 이용해 핵을 분리했다.

    그들이 채 열 개 남짓 되는 핵을 수확했을 때였다.

    **쿵! 쿵! 쿵!**

    터널 저 안쪽에서,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하고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육중한 몸을 이끌고 다가오는 듯한 진동이 온 터널을 뒤흔들었다. 천장에서 부스러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유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오빠… 이건… 철광 이형이 아니에요…!”

    강민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발소리의 리듬이 심상치 않았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둔중한 울림이었다. 그리고 그 울림 속에는 알 수 없는 기이한 공포가 스며들어 있었다.

    “젠장, 이놈들이 벌써 ‘그것’까지 불러들인 건가…!”

    그는 주저할 틈도 없이 유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뛰어! 전속력으로 뛰어!”

    뒤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터널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그들을 덮치려는 듯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민은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필사적으로 달렸다. 그들의 앞에는 여전히 어둠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 낡은 터널은, 결코 쉽게 그들을 놓아주지 않을 작정인 듯했다.

  • 좀비 아포칼립스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제1장: 망가진 일상

    자정이었다. 선우는 천장의 누런 조명 아래, 차갑게 식은 즉석밥을 포크로 대충 휘저으며 휴대폰 화면에 시선을 박았다. 좁은 원룸 오피스텔, 24층. 창밖으로는 희뿌연 도시의 불빛들이 흩어져 있었다. 언제나처럼 피곤하고,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한 밤.

    띠링.
    익숙한 알림음과 함께 택배 배송 완료 메시지가 떴다. 굳이 문을 열어 확인하지 않아도 알았다. 새벽 배송으로 시킨 영양제가 문밖에 놓여 있을 터였다. 침대 옆 협탁에 빈 택배 상자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처럼, 선우의 일상은 인터넷과 배달 애플리케이션 없이는 불가능했다.

    덜컥.
    갑자기 현관문 쪽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선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고개를 돌려 문 쪽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나? 24층까지 바람이 들 리는 없었다. 도어락이 저절로 잠금 해제될 일도 없고.

    “뭐야…”

    선우는 찜찜한 기분을 애써 무시하며 다시 휴대폰으로 눈을 돌렸다. 피곤해서 헛것을 들었겠지. 아니면 옆집 늦은 귀가 소리가 울렸거나. 이 건물은 방음이 썩 좋지 않았다.

    그날 밤, 잠자리에 들었을 때였다. 분명히 닫아놓았던 베란다 창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익, 하고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는 듯한 소리. 선우는 이불을 코밑까지 끌어올렸다. 추운 날씨에 창문을 열어둘 리 없었다. 게다가 방범창까지 굳게 잠겨 있었다. 설마… 강도?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공기가 방 안으로 스며드는 것이 느껴질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가만히 있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휴대폰 불빛을 비춰봤다. 베란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방범창도 그대로였다.

    “미쳤나 봐, 이선우.”

    피곤이 뇌를 갉아먹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신병의 초기 증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섬뜩했다. 충분한 수면이 필요했다. 그래, 충분한 수면이.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선우는 식탁 위에 놓인 컵을 보고 굳어버렸다. 어제 밤 분명히 물을 마시고 컵을 싱크대에 넣어두었었다. 하지만 지금, 컵은 식탁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어제 물을 마신 그 자리, 그 모양 그대로. 마치 누군가 자신이 마신 컵을 다시 갖다 놓은 것처럼.

    “…내가 건망증이 심해졌나.”

    애써 합리화했다. 어제 너무 피곤했으니까. 잠결에 다시 가져다 놓았을 수도 있지. 싱크대가 꽉 차 있어서 무심코 식탁에 올려두었을 수도 있고. 그릇을 치우며 고개를 젓는데, 냉장고 문이 저절로 덜컹거렸다.

    쿵! 쿵! 쿵!

    마치 안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였다. 선우는 움찔하며 냉장고를 노려봤다. 오래된 냉장고는 아니었지만, 가끔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긴 했다. 하지만 이렇게 크고 규칙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는 처음이었다.

    “고장났나?”

    가까이 다가가 손잡이를 잡아봤다. 아무 이상 없었다. 쿵, 소리가 멈췄다. 선우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냉장고를 쳐다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 가전제품 수명이 다한 거겠지.

    이 이상한 일들은 그 후로도 계속됐다.
    화장실에서 샤워를 하는데, 불이 갑자기 깜빡였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켰다 껐다 반복하는 것처럼. 선우는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관리사무소에 전화해야겠네.”

    밤에는 더 심했다. 거실에 불을 켜놓고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고 있으면, 분명 꺼져 있던 TV가 저절로 켜졌다. 그것도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화면으로. 마치 전파가 제대로 잡히지 않는 옛날 텔레비전처럼.

    처음에는 리모컨이 잘못 눌렸나 싶어 리모컨을 찾아봤지만, 리모컨은 늘 두는 자리, 침대 옆 협탁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다시 끄면 잠시 후 또 다시 켜졌다. 지지직거리는 화면과 함께.

    선우는 결국 TV 코드를 뽑아버렸다. 그러자 그날 밤은 조용했다. 겨우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일요일 오후, 늦잠을 자고 일어난 선우는 거실로 나섰다. 전날 밤, 얌전히 식탁 위에 놓아두었던 과일 바구니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사과 하나가 바구니에서 굴러 떨어져 소파 밑에 박혀 있었다.

    “이게 뭐야…!”

    선우는 기겁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창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현관문도 마찬가지였다. 도둑이 들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등골이 오싹했다. 어제 밤, 분명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과일 바구니가 저절로 바닥에 떨어질 일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집어 던진 것처럼.

    그때였다.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던 작은 스툴 의자가 천천히 옆으로 밀려나는 것이 보였다. 끽- 끽- 하고 마룻바닥에 마찰되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선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눈을 비볐다. 헛것이 보인 걸까? 아니. 분명히 스툴 의자가, 아무도 없는 공간에서,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멈칫하더니, 다시 끽- 소리를 내며 왼쪽으로 두어 뼘 가량 밀려났다.

    “누, 누구 있어요…?”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부엌 싱크대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어제 저녁을 먹고 설거지해 엎어놓았던 접시들이 갑자기 공중으로 솟아올랐다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흐악!”

    선우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 파편들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바닥에서 춤을 추는 듯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이건 환각도 아니었다.

    냉장고 문이 다시 한번 쿵, 쿵, 쿵, 하고 격렬하게 두드려졌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크고, 거칠게. 마치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려고 발버둥 치는 것 같았다. 쾅! 마지막 소리와 함께 냉장고 문이 살짝 벌어졌다. 그 틈새로 검붉은 액체가 새어 나왔다. 마치 핏물처럼.

    선우는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광경은 비현실적이고 역겨웠다. 끈적한 검붉은 액체는 냉장고 바닥을 타고 흘러나와 서서히 거실 바닥으로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액체 위로, 스툴 의자가 다시 한 번 끽- 하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이번에는 선우를 향해 느릿하게 다가왔다. 마치 누군가 그 의자에 앉아서 선우를 노려보는 것처럼.

    선우는 더 이상 이 공간에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본능적인 공포가 모든 이성을 마비시켰다. 손에 잡히는 대로 현관문 쪽으로 달렸다.

    “나가야 해… 나가야 해…!”

    가방도, 휴대폰도 아무것도 챙기지 못했다. 오직 살아야 한다는 본능 하나만 남았다.
    현관문에 다다르자, 어제 밤 잠금 해제 소리가 났던 도어락이 스스로 잠금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 하고 잠금장치가 내려가는 소리.

    선우는 덜컥거리는 손으로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세 번 연속으로 틀렸다는 경고음이 울렸다.

    “아니야! 내가 뭘 잘못 누른 거야? 다시!”

    다시 침착하게 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또 틀렸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으드득, 하는 뼈가 갈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바닥에 깨진 접시 파편들과 검붉은 액체가 마치 하나의 거대한 그림자를 형성하며 꿈틀거리고 있었다. 액체는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선우를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그 그림자 속에서, 희미하게, 마치 사람의 형상을 띠려는 듯한 무언가가 불거져 나왔다가 다시 스러지는 것이 보였다. 거친 숨소리가, 마치 썩어가는 시체에서 나는 듯한 역겨운 냄새와 함께 선우의 콧속으로 파고들었다.

    도어락에서는 삑- 삑- 삑- 경고음이 끊이지 않고 울리고 있었다. 비밀번호 입력 제한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갇혔다.
    선우는 공포에 질린 채, 다시 현관문을 부여잡았다. 문고리를 돌리고, 몸으로 밀치고, 발로 차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림자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썩어가는 냄새가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문득, 등 뒤의 그림자 속에서 희미하게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저리로…*
    *나가지 마…*
    마치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뒤섞인 듯한, 기괴하고 음산한 소리였다.

    선우는 울부짖고 싶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삑- 삑- 삑-
    그리고 이어서,
    띠리링- 하고, 마지막으로 잠금장치가 완전히 굳어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모든 것이 끝났다.

    뒤편에서, 검붉은 액체와 파편의 그림자가 거대한 물결처럼 일렁이며 선우의 발끝을 집어삼켰다. 차갑고 끈적한 감각이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이건… 시작이었다.
    무언가 거대한 것이, 이 아파트에, 이 도시에 찾아왔다는 끔찍한 예감에, 선우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침묵.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차갑고 끈적한 액체가 살을 파고드는 감각만이 선우의 뇌리를 지배할 뿐이었다.

  • 심리 스릴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빗줄이 창문을 타고 흘러내렸다. 메마른 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눅눅하게 들려왔다. 시아는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이 품은 온기로 가득했었다. 류진의 품. 완벽한 사랑이었다.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그렇게 깊고 뜨거운 애정은 그녀의 존재 자체를 집어삼킬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매번 그 행복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그 불안은 더욱 선명하고 날카로운 형태로 돋아났다. 마치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날카로운 얼음 조각처럼.

    “시아, 왜 그렇게 창백해?”

    어제 아침, 류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은 여전히 따뜻했지만, 시아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목에 닿았던 순간의 섬뜩한 차가움을 기억했다. 그는 완벽한 체온을 가졌을 텐데, 왜 유독 그 순간만은 달랐을까?

    그것뿐이 아니었다. 지난밤, 열정적인 순간이었다. 그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았을 때, 아주 희미하게, 피어나는 꽃향기와는 전혀 다른, 낯선 비릿함이 스쳤다. 마치 오래된 금속의 녹 냄새 같기도, 아니면 차갑게 식어버린 핏방울 같기도 했다. 시아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내가 예민한 거야. 류진은 완벽한 사람이었다. 섬세하고, 배려심 깊고, 그녀를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남자. 그의 미소는 언제나 따사로운 햇살 같았고, 그의 목소리는 잔잔한 파도처럼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는 그녀의 모든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하지만.

    시아는 무심코 베개 위를 더듬었다. 푹신한 감촉 아래, 손끝에 아주 작고 단단한 무언가가 걸렸다. 그녀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톱만 한 크기였다.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푸른빛 조각. 마치 작은 수정 비늘 같기도 했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가장자리는 날카롭게 잘려나간 듯했고, 표면은 매끄러웠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문득 뇌리를 스치는 기억 조각. 지난주, 류진의 셔츠 어깨에 똑같은 조각이 붙어 있었다. 그때는 그저 먼지려니, 아니면 옷에 박힌 장식 조각이 떨어져 나간 것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 이 베개 위에서 다시 마주한 이것은 단순한 먼지도, 장식도 아니었다.

    시아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조각을 작은 유리병에 담아 책상 서랍 깊숙이 숨겼다. 그리고는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검색창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이내 멈췄다. 무엇을 검색해야 할까? ‘푸른빛 비늘’? ‘이상한 물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대신 류진의 휴대폰을 떠올렸다. 그는 항상 휴대폰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샤워를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늘 손이 닿는 곳에 두었다. 한 번은 그녀가 실수로 그의 휴대폰을 만졌을 때, 그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차갑게 얼어붙었던 기억이 있었다. 금세 다정한 미소로 바뀌었지만, 그 찰나의 표정은 시아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었다. 마치… 침범당해서는 안 될 영역을 침범한 침입자를 보는 듯한 눈빛.

    “시아? 아직 자고 있었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완벽한 타이밍. 시아는 놀란 가슴을 부여잡았다. 서랍을 닫고 침대에 앉아 그를 맞을 준비를 했다.

    “응, 잠깐 졸았어.”

    류진이 들어섰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지친 기색 없이, 사랑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그의 손에는 시아가 좋아하는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피곤했나 보네. 오늘은 일찍 들어왔으니, 저녁은 내가 준비할게.”

    그가 다가와 시아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은 따뜻했지만, 어쩐지 그 따스함 속에 아주 미세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방금 전 발견한 푸른 조각 때문일까?

    “류진…” 시아는 그의 어깨에 기대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 가끔씩… 네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

    류진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무슨 소리야, 시아. 나는 그냥 너를 사랑하는 남자일 뿐인데.”

    그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시아는 그의 심장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그의 가슴에 댔다. 두근, 두근… 규칙적인 박동. 그러나 어쩐지 그 소리가 깊은 물속에서 울리는 메아리처럼 희미하게 들렸다.

    “가끔씩… 네 눈이 너무 깊어서, 내가 그 안에 빠져버릴 것 같아.”

    시아는 차오르는 불안감을 억누르지 못하고 속삭였다. 류진은 그녀의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눈을 맞췄다. 그의 눈동자는 깊고 아름다운 밤하늘 같았다. 하지만 그 속에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냉기가 숨어 있었다.

    “너는 이미 내 안에 빠져 있지, 시아. 너도, 나도, 서로에게 너무 깊이 물들어버렸어. 되돌릴 수 없어.”

    그의 목소리가 낮고 감미롭게 울렸다. 사랑스러운 말이었지만, 시아는 그 안에 숨겨진 지독한 집착과 소유욕을 읽어냈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럼… 넌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시아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다. 손바닥은 부드러웠지만, 손끝은 차가웠다.

    류진은 그녀의 질문에 미소를 지었다. 그의 미소는 언제나처럼 완벽했지만, 그 순간 시아는 그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위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마치… 사냥감을 꿰뚫어 보는 포식자의 미소처럼.

    “네가 원하던 곳으로 데려갈 거야, 시아. 영원히.”

    영원히. 그 단어는 축복인 동시에 저주였다. 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은 순간적으로 그의 셔츠 소매 끝에 닿았다. 아주 희미하게, 그리고 명확하게, 푸른빛 조각 하나가 그의 소매 안쪽에서 비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아까 베개 위에서 발견했던, 그 아름답지만 낯선 조각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그곳에 닿자, 류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의 미소가 사라지고, 입술이 얇게 다물렸다. 방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떨어지는 듯했다.

    “시아.” 그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전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시아는 공포에 질려 숨을 멈췄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사랑하는 연인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짐승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이 처한 끔찍한 진실을 읽어냈다.

    “너… 너는… 누구야?”

    그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류진은 천천히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은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차가운 그림자가 그녀를 덮쳤다. 그의 손이 시아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러나 그 손길은 부드러움을 가장한 쇠사슬 같았다.

    그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검은 심연으로 변해갔다. 그 안에 별들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다시 번졌다. 이번에는 더 이상 완벽함을 가장하지 않은, 순수한 포식자의 미소였다.

    “이제야… 제대로 보게 되었군, 내 작은 별.”

    그의 목소리는 낮고 깊게 울렸다. 그 소리는 시아의 귓가에서 울리는 동시에, 그녀의 심장 속으로 스며들어 얼려버리는 듯했다. 그녀의 눈앞에 그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피부 위로, 방금 전 베개 위에서 발견했던 것과 똑같은, 푸른빛 조각들이 희미하게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비늘이었다.

    그의 뺨, 목덜미, 그리고 그녀를 감싼 그의 손등 위로, 차가운 푸른빛 비늘들이 아름답지만 섬뜩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순간, 시아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달았다. 이토록 달콤했던 사랑, 그가 속삭였던 모든 약속들, 이 온기로 가득했던 방, 이 모든 것이 그가 쳐놓은 덫이었다.

    그녀의 눈에 절망이 가득 찼다.

    류진은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속삭였다.

    “그래. 이제부터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거야.”

    그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방안의 모든 빛이 그의 검은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시아는 더 이상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녀를 휘감는 것은 오직 차갑고 낯선 어둠뿐이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그녀의 등 뒤로, 무언가 거대하고 비릿한 날개가 펼쳐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아앙―!

    창문 밖으로 맹렬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러나 이 폭풍은, 이제 막 그녀의 심장 안에서 시작된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