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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하제일무도회: 검은 운명의 그림자』

    **에피소드 1: 천하의 부름, 그리고 속삭이는 그림자**

    **[프롤로그]**

    **[장면 1]**

    **EXT. 하늘궁 무도장 – 새벽**

    거대한 원형 경기장이 새벽 안개 속에 고요히 잠겨 있다. 아치형 지붕은 구름을 뚫고 솟아올랐고, 경기장을 둘러싼 좌석들은 수만 명의 인파를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광대하다. 고대 문양이 새겨진 돌기둥들이 경기장 곳곳에 우뚝 서 있으며, 그 위로는 정교하게 조각된 용 조각상들이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린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아 하늘은 짙은 남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오묘한 빛을 띠고 있다.

    **내레이션 (차분하고 웅장한 목소리):**
    “천하의 운명은 언제나 바람 앞에 등불이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정의가 힘에 굴복하며, 평화는 잠시 스치는 꿈결 같은 것이었지. 그러나, 그 모든 혼돈 속에서도 하나의 약조는 살아남았다. 백 년에 한 번, 천하의 모든 무인이 모여 강함을 겨루는 자리.”

    카메라가 천천히 상승하며 무도장 전체를 비춘다. 경기장 중앙의 원형 무대, 그 아래로는 수많은 무림인들이 밤새 훈련하며 남긴 듯한 희미한 기운이 감돈다.

    **내레이션:**
    “천하제일무도회. 단순한 힘의 겨룸이 아니다. 세상의 이치를 바로잡고, 강호의 질서를 새로이 세우며, 이 세계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성한 의식.”

    화면이 다시 무도장 바닥으로 내려와, 중앙 무대에 새겨진 거대한 팔괘 문양을 클로즈업한다. 문양 속 음과 양의 조화가 불안하게 흔들리는 듯한 미묘한 효과.

    **내레이션:**
    “그리고 오늘, 백 년의 약조는 다시 시작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쩐지, 그림자가 너무나도 짙게 드리워져 있다.”

    **[본편 시작]**

    **[장면 2]**

    **EXT. 하늘궁 무도장 주변 – 아침**

    해가 뜨기 시작하며 붉은 기운이 무도장 지붕을 물들인다. 경기장 주변은 이미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각 문파의 깃발들이 펄럭이고, 화려한 복장을 한 무림인들, 호기심 가득한 백성들, 그리고 상인들의 외침이 뒤섞여 시끌벅적하다. 활기찬 축제의 분위기다.

    한 청년, **류진(류진)**이 사람들 틈에 섞여 조용히 걷고 있다. 스무 살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소박한 검은 도포를 입고 있으며, 등에 짊어진 목검 한 자루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다. 그러나 그의 눈빛은 주변의 활기찬 분위기와는 달리 냉정하고 예리하다. 그는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 걸음걸이, 흘깃거리는 시선까지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듯하다.

    **류진 (내면):**
    ‘시작인가.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라니, 거창하기도 하지. 어차피 힘 있는 자들의 놀이터일 뿐일 텐데.’

    그는 길가의 노점에서 파는 만두 하나를 사서 한입 베어 물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류진 (내면):**
    ‘하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그들이 원하는 건 단순한 승리가 아닐 테지.’

    그가 만두를 먹는 동안, 카메라가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인다. 화려하게 장식된 마차들이 VIP 통로로 향하고, 고위 무림 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하는 모습이 보인다. 모두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함께 미묘한 긴장감이 서려 있다.

    **[장면 3]**

    **INT. 하늘궁 무도장 – 개막식**

    장엄한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수만 명의 관중이 일제히 침묵한다. 무도장 중앙 무대에는 오색찬란한 비단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천궁회(天宮會)**의 장로이자 이번 대회의 총책임자인 **천무선인(천무선인)**이 걸어 나온다. 백발에 온화한 미소를 지닌 노인이지만, 그의 눈빛은 맑고 형형하다.

    **천무선인 (단상에서):**
    “강호의 모든 영웅들이여, 이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영광이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온다. 류진은 관중석 한가운데쯤 앉아 팔짱을 끼고 천무선인을 응시한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심하다.

    **천무선인:**
    “백 년 전, 우리 선조들은 천하의 혼란을 잠재우고, 올바른 무도의 정신을 되찾기 위해 천하제일무도회를 창설했소. 그리고 오늘, 그 숭고한 약속을 다시금 지킬 때가 왔소!”

    카메라가 관중석을 스캔한다. 각 문파의 대표들, 젊은 혈기 넘치는 무사들, 은거했던 고수들까지, 다양한 얼굴들이 비친다. 그 중에는 특히 눈에 띄는 한 여인이 있다. **설아(설아)**. ‘빙월각(氷月閣)’의 차기 계승자로 알려진 그녀는 푸른색 무복을 입고, 허리에는 섬세한 보검을 차고 있다. 그녀의 얼굴에는 진지함과 결연함이 깃들어 있다.

    **천무선인:**
    “이번 대회의 우승자에게는 그 어떤 명예보다 값진 영광이 주어질 것이오! 천하를 통솔할 힘, 그리고… 이 혼란한 시대를 바로잡을 ‘천궁의 인장’이 수여될 것이오!”

    ‘천궁의 인장’이라는 말에 장내가 술렁인다. 류진의 눈썹이 살짝 움직인다.

    **류진 (내면):**
    ‘천궁의 인장? 그게 대체 뭔데, 저렇게들 흥분하는 거지?’

    천무선인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다.

    **천무선인:**
    “자, 그럼 이제! 제 52회 천하제일무도회의 막을 올릴 시간이다! 첫 번째 대결!”

    환호성이 다시 터져 나온다.

    **[장면 4]**

    **INT. 하늘궁 무도장 – 대결 1**

    첫 번째 대결이 시작된다. 두 명의 젊은 무사가 무대 중앙에서 대치한다. 한 명은 거한의 장수풍뎅이 같은 갑옷을 입고, 다른 한 명은 날렵한 검객이다. 둘은 잠시 탐색전을 벌이다가 격렬하게 부딪친다. 빠르고 강력한 무공들이 오간다.

    **류진 (내면):**
    ‘초반부터 저렇게 전력을 다하다니. 확실히 이번 대회에 걸린 게 많긴 한 모양이군.’

    그때, 류진의 옆자리에서 작은 소리가 들린다. 한 노인이 기침을 콜록거린다. 류진은 흘끗 노인을 본다. 노인의 얼굴은 창백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뭔가 불안한 기운이 감돈다.

    **류진 (내면):**
    ‘저 노인, 뭔가 이상하다… 단순한 병환은 아닌 것 같은데.’

    그의 시선이 다시 무대로 향한다. 장수풍뎅이 갑옷의 무사가 검객을 압도하며 결정타를 날리려는 순간, 갑자기 무릎을 꿇고 쓰러진다. 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손으로 목을 움켜쥔다.

    **관중들:**
    “어? 왜 저래?” “무슨 일이야?!”

    심판이 황급히 다가간다. 무사의 얼굴은 보랏빛으로 변해 있고, 입에서는 거품이 나오고 있다. 심판은 그의 상태를 확인하더니 당황한 표정으로 외친다.

    **심판:**
    “경기 중단! 경기 중단! 선수에게 이상 발생!”

    장내는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인다. 류진은 미간을 찌푸린다.

    **류진 (내면):**
    ‘독… 아니, 독이 아니다. 내력의 역류? 아니면… 억지로 힘을 끌어올린 부작용?’

    그의 시선이 경기장 곳곳을 훑는다. 그때, 관중석 가장 높은 곳, 어두운 그림자에 가려진 VIP석에서 한 인물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발견한다. 검은 도포를 입은 인물은 얼굴이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 시선은 정확히 쓰러진 무사를 향해 있다. 그리고… 그의 손에서 아주 미세한,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착각.

    **류진 (내면):**
    ‘저 그림자…!’

    하지만 그가 다시 보려고 할 때, 그 인물은 마치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다. 류진은 자신의 눈을 비빈다.

    **류진 (내면):**
    ‘환각인가? 아니면… 정말 뭔가를 본 건가?’

    그는 다시 쓰러진 무사를 향해 시선을 돌린다. 의원들이 무사에게 달려가 응급처치를 하고 있다. 무사의 몸에서는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장면 5]**

    **INT. 하늘궁 무도장 – 백열등 경기장**

    경기는 중단되고, 천무선인이 다시 단상에 올라 사람들을 진정시킨다.

    **천무선인:**
    “진정하시오! 첫 번째 대결에서 예상치 못한 불상사가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무도회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다음 대결 준비!”

    하지만 장내의 분위기는 이미 싸늘하게 식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대감 대신 불안감이 떠오른다.

    그때, 류진의 앞에 한 여인이 나타난다. 설아다. 그녀는 류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못마땅한 듯 묻는다.

    **설아:**
    “당신, 아까부터 무대 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데. 뭔가 특이한 점이라도 발견했소?”

    류진은 그녀를 올려다본다. 냉철하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다.

    **류진:**
    “그쪽은?”

    **설아:**
    “빙월각의 설아다. 내공 심법에 일가견이 있어 저 무사의 내력 흐름이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건 알아챘지. 당신도 그걸 느낀 건가?”

    **류진:**
    “내력 흐름만이 아니오. 저건… 누군가 외부에서 개입한 흔적 같았소.”

    설아의 눈이 커진다.

    **설아:**
    “외부 개입이라니? 말도 안 돼! 이곳은 천궁회의 엄격한 감시 아래 있다!”

    **류진:**
    “엄격한 감시. 하지만 빈틈이 없는 건 아니지. 게다가… 방금 그 무사에게서 피어오르던 검은 기운은 무엇이라 생각하시오?”

    설아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젓는다.

    **설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히 좋지 않은 징조야. 천하제일무도회가 시작부터 이런 불길한 기운에 휩싸이다니…”

    그녀는 류진을 똑바로 바라본다.

    **설아:**
    “당신은 이번 대회에 참가하는 무사인 것 같은데, 이름이 무엇이오?”

    **류진:**
    “류진. 명예나 승리에는 별 관심이 없소. 그저…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생겼을 뿐.”

    설아는 류진의 시니컬한 태도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는다.

    **설아:**
    “흥미로운 구경거리라… 좋아, 류진. 당신이 말한 ‘외부 개입’이라는 것이 정말이라면, 이번 대회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할 수도 있겠군.”

    그녀는 돌아서서 걸어간다. 류진은 그런 설아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무대 위를 응시한다. 그의 눈빛은 아까보다 더욱 깊어졌다.

    **류진 (내면):**
    ‘설아, 그녀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저 검은 그림자는 왜 하필 이런 신성한 자리에서 그런 짓을 벌인 거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다시 밖으로 향한다. 그의 발걸음은 아까보다 더 신중하고 빨라졌다.

    **[장면 6]**

    **EXT. 하늘궁 무도장 외부 – 뒷골목**

    류진은 무도장 뒤편의 어둡고 인적이 드문 골목으로 들어선다. 축제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오는 곳이다. 그는 벽에 기대어 주변을 살핀다.

    **류진 (내면):**
    ‘그 검은 기운… 단순히 내력을 파괴하는 것을 넘어, 무언가를 흡수하는 느낌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진다. 류진은 재빨리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긴다.

    두 명의 남자가 은밀하게 대화하며 다가온다. 그들은 천궁회의 하급 관리들처럼 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다.

    **남자 1:**
    “정말 그 약효가 그리도 대단하단 말이오? 무림 고수도 단숨에 제압하는?”

    **남자 2:**
    “그럼! **무영(무영)** 님께서 직접 하사하신 약재인데! 경미한 내력 혼란만 주는 것이라 했는데… 오늘 보니 그 위력이 생각보다 훨씬 강하더군.”

    **남자 1:**
    “다행이군. 이제 이 약을 섞어 마실 차를 참가자들에게 제공하면 되는 것이오? 그러면 힘 조절을 못 해 탈락하는 자들이 속출할 테고… 자연스럽게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남자 2:**
    “쉬잇! 조용히 하게! 귀신이라도 들을라!”

    두 남자는 주변을 살피더니, 비밀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걸어간다. 류진은 그림자 속에서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듣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진다.

    **류진 (내면):**
    ‘무영? 약재? 차에 섞는다? 그럼 아까 그 무사는… 우연이 아니었어.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군.’

    그는 두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본다. 그리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골목 안쪽, 어둠이 더욱 깊어진 곳으로 향한다. 그의 표정에는 분노와 함께, 알 수 없는 결의가 서려 있다.

    **류진 (내면):**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라고? 아니. 이건 천하의 운명을 가지고 노는 자들의 판이었다.’

    골목 끝, 희미한 달빛 아래, 낡은 나무 상자가 버려져 있다. 류진은 무심코 그 상자를 발로 툭 건드린다. 상자가 넘어지며 안에서 무언가가 굴러 나온다.

    그것은 작은 돌멩이였다. 평범한 돌멩이인 줄 알았으나, 자세히 보니 돌멩이 표면에 아주 작고 정교하게 새겨진 문양이 있었다. 류진은 그 문양을 보는 순간, 아까 VIP석에서 사라졌던 검은 그림자가 떠올랐다. 똑같은 문양이었다.

    **류진:**
    “이게… 대체 무슨…?”

    그는 돌멩이를 줍는 순간, 손끝에서 차가운 기운이 확 느껴진다. 마치 얼음 조각을 만진 듯한 냉기. 그리고 돌멩이 속에서 희미하게 울리는 묘한 저음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듯했다.

    **돌멩이 (환청/미약한 속삭임):**
    _… 운명의 수레바퀴는… 피로 물들리라…_

    류진은 돌멩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의 눈동자에 어둠이 드리워진다.

    **[장면 7]**

    **EXT. 하늘궁 무도장 – 밤**

    무도장은 밤이 되어도 불빛이 환하게 켜져 있다. 그러나 낮의 활기찬 분위기는 사라지고, 미묘한 긴장감과 불안감이 감돈다.

    류진은 경기장을 벗어나 어느 높은 언덕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무도장의 거대한 그림자가 땅거미 속에 드리워져 있다. 그의 손에는 아까 주운 돌멩이가 여전히 쥐어져 있다.

    **류진 (내면):**
    ‘천하제일무도회. 운명. 천궁의 인장. 무영. 그리고 이 기이한 돌멩이… 놈들은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가?’

    그의 시선은 하늘궁 무도장을 넘어,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도시의 불빛을 향한다.

    **류진 (내면):**
    ‘천하의 운명. 그게 정말 강함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마 이미 난세는 끝났겠지.’

    그는 돌멩이를 손바닥으로 굴리며 생각에 잠긴다. 그때, 바람이 불어와 그의 도포 자락을 휘날린다.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냉소적인 미소, 혹은 싸움을 시작하기 전의 투지 넘치는 미소일지도 모른다.

    **류진:**
    “좋아… 운명 같은 건 시시하지만, 만약 이 판이 누군가의 장난질이라면…”

    그는 돌멩이를 든 손을 꽉 쥐었다. 돌멩이에서 다시 한번 차가운 기운이 퍼져 나온다.

    **류진:**
    “그 장난질의 끝을 내가 직접 봐야겠어.”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인다.
    카메라가 류진을 뒤로 하고 천천히 멀어진다. 무도장은 여전히 밝게 빛나지만, 그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더욱 짙어진다.

    **[에피소드 1 종료]**

  • 메카 액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천공무투대회, 그 이름이 자아내는 위압감은 언제나 현실보다 거대했다. 수백 층 높이의 공중에 부유하는 섬, 그 위에 자리한 거대한 무투장은 강철과 홀로그램으로 직조된 장엄한 예술품 같았다. 사방을 둘러싼 투명한 방벽 너머로는 구름바다와 멀리 아득한 지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그 풍경은 마치 신선들이 노니는 천상의 정원 같았으나,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은 지상의 운명을 가르는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었다.

    오늘, 이 거대한 무투장의 중심에서 천하의 운명을 결정지을 최후의 일전이 펼쳐질 참이었다.

    “관중 여러분! 그리고 강호의 모든 무림인 여러분!”

    장내를 가득 채운 수십만 명의 인파, 그리고 각 문파의 수뇌부가 앉은 귀빈석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행을 맡은 천공무투연합의 집행관, 강철과 견고한 합금으로 만든 의수마저 돋보이는 거한 사내가 무대 중앙에 섰다. 그의 목소리는 모든 관중의 심장을 격렬하게 울렸다.

    “길고 길었던 천공무투대회, 이제 그 마지막 대미를 장식할 두 영웅이 이곳에 섰습니다! 이 대결의 승자는 천하를 아우르는 절대권력, ‘강철패왕’의 칭호와 함께 모든 기갑 전력의 총지휘권을 손에 넣게 될 것입니다! 패자의 문파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겠죠!”

    그의 마지막 말에 장내는 일순간 싸늘한 침묵에 잠겼다가, 이내 봇물 터지듯 거대한 함성으로 뒤바뀌었다. 강철패왕. 그것은 단순한 칭호가 아니었다. 지난 세기, 문파 간의 해묵은 갈등이 무인들의 주먹과 검을 넘어 거대 기체, 즉 ‘강철지존’들의 전쟁으로 비화했을 때, 천하의 균형을 유지하고자 각 문파의 합의 하에 창설된 것이 바로 이 천공무투대회였다. 승자는 모든 강철지존을 통솔할 권한을 얻고, 패자는 모든 전력을 해체해야만 하는 잔혹한 룰. 강호의 패권은 오직 한 문파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었다.

    “먼저, 서쪽 게이트에서 등장합니다! 강호 서한의 맹주이자, ‘무량검보’의 대종사! 그의 강철지존, ‘묵운’과 함께하는 자, 현입니다!”

    ‘현’이라는 이름이 호명되자, 서쪽 게이트에서 짙은 먹구름 같은 형상이 미끄러지듯 나타났다. 묵운(墨雲). 검은색과 짙은 회색이 어우러진 매끈한 외장은 햇빛을 머금어도 그 빛을 삼켜버리는 듯했다. 거대한 강철의 몸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움직임에는 한 점의 군더더기조차 없었다. 마치 실체가 없는 그림자가 지상을 스치듯, 묵운은 압도적인 정적 속에서 무투장의 중앙으로 다가섰다.

    나는 조종석 안에서 심호흡을 했다. 묵운의 시야를 통해 본 관중석은 거대한 색깔의 물결 같았다. 묵운의 신경 연결망은 내 몸의 모든 감각과 완벽하게 동기화되어 있었다. 손끝 하나, 발끝 하나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강철의 몸체가 섬세하게 반응했다. 이것이 바로 강철지존 조종의 정수이자, 내 문파 무량검보의 ‘무형검(無形劍)’ 기술을 강철에 녹여낸 결정체였다.

    “저 자가 바로 현이군. 소문대로 무량검보의 최후 보루라더니.”
    “묵운의 움직임이 여전히 압도적이군. 저게 어떻게 거대 강철지존에서 나올 수 있는 움직임인지.”

    관중석에서 술렁임이 들려왔다. 무량검보는 검법으로 천하를 호령했던 문파였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검 한 자루로는 더 이상 강호를 지배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강철지존을 받아들였고, 우리의 검술을 강철의 몸체에 이식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그 정점에 내가 있었다.

    “다음은, 동쪽 게이트에서 등장합니다! 강호 남림의 절대강자이자, ‘열화문’의 문주! 그의 강철지존, ‘화룡’과 함께하는 자, 용비운입니다!”

    이번에는 동쪽 게이트에서 붉은 섬광이 터져 나오듯 강렬한 존재가 등장했다. 화룡(火龍). 불꽃을 연상시키는 붉은색 외장은 묵운의 차분함과는 정반대로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묵직하고 견고해 보이는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가히 상대를 짓누를 듯했다. 화룡은 묵운보다 몇 걸음 더 거칠고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강철의 거인이 움직일 때마다 무투장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이 묵운의 센서에 포착됐다.

    용비운. 그는 열화문의 문주이자, ‘열화심법’의 계승자였다. 그의 내공은 하늘을 뚫을 듯 강맹하며, 그 내공을 강철지존에 주입했을 때의 파괴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는 거친 맹수와 같았고, 그의 화룡은 그 맹수의 형상을 그대로 본뜬 듯했다.

    “드디어… 마주 섰군.”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강철지존 조종석 안은 바깥세상과 완벽하게 단절된, 고요한 공간이었다. 오직 기체와 나의 의식만이 존재하는 성역. 하지만 묵운의 신경망을 통해 용비운의 강한 기세가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곳에서 나를 완전히 짓밟을 작정이었다.

    “양측 선수, 정비 완료! 경고 하나! 이곳은 승자와 패자만이 존재하는 무대입니다! 죽음을 각오하십시오!”

    집행관의 목소리는 결연했다. 이 대결에서 물러섬은 없었다. 한쪽이 완전히 파괴되거나, 조종사가 항복을 선언할 때까지 싸움은 계속된다. 그러나 강철패왕의 칭호가 걸린 이 자리에서 항복은 곧 문파의 소멸을 의미했다.

    “자, 그럼… 천공무투대회 최후의 결전! 시작!”

    집행관의 신호와 동시에 무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함성이 폭발했다. 귀청을 찢을 듯한 그 소리는 묵운의 두터운 외장마저 뚫고 들어와 내 귓전을 강타하는 듯했다.

    내 조종석의 디스플레이에는 용비운의 화룡이 마치 맹수처럼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비쳤다. 붉은 동력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마치 화룡의 심장 박동처럼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크아아아!”

    용비운의 기합 소리가 묵운의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단순한 외침이 아니었다. 열화심법으로 증폭된 그의 내공이 강철지존을 타고 터져 나오는, 전의로 가득 찬 포효였다.

    콰아앙!

    화룡의 거대한 팔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가 번개처럼 내리꽂혔다. 그 움직임은 마치 거대한 불꽃 덩어리가 낙하하는 듯했다. ‘열화섬멸권!’ 용비운의 필살 초식이었다. 단순한 주먹질이 아니었다. 내공을 실어 대기에 마찰열을 발생시키며 강철 주먹에 불꽃을 일으키는, 파괴력 최강의 기술.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묵운의 모든 센서가 화룡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분석했다. 강렬한 열기와 충격파가 피부에 와닿는 듯했다.

    “무형검, 환영보.”

    내 중얼거림과 동시에 묵운의 거대한 몸체가 마치 유령처럼 사라졌다. 화룡의 주먹이 내리꽂힌 자리는 굉음과 함께 콘크리트 바닥을 산산조각 냈다. 거대한 균열이 방사형으로 퍼져나가고, 뜨거운 열기가 주변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묵운은 그 자리에 없었다.

    슈우욱! 슈슉!

    묵운은 화룡의 뒤편으로 순식간에 이동했다. 강철지존이라곤 믿을 수 없는 속도였다. 환영보, 무량검보의 고유 이동술을 묵운의 유기 합금 관절에 완벽하게 구현한 기술. 그림자가 번지는 듯한 움직임으로 나는 화룡의 등 뒤를 노렸다.

    “어림없다, 현!”

    용비운은 이미 묵운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었다. 그의 직감, 혹은 그의 열화심법이 묵운의 기세를 읽어낸 것일까. 화룡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기운이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거대한 꼬리가 채찍처럼 허공을 가르고 묵운을 향해 후려쳤다. ‘화룡편!’

    피할 틈이 없었다. 묵운의 센서가 경고음을 울렸다. 용비운의 움직임은 예측을 뛰어넘는 맹렬함을 품고 있었다. 나는 급히 묵운의 왼팔을 들어 올렸다. 묵운의 왼팔에는 두터운 방패가 내장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펼쳐진 방패는 강렬한 붉은 꼬리의 일격을 그대로 받아냈다.

    크아아앙!

    충격음이 묵운의 조종석을 뒤흔들었다. 팔을 타고 전해지는 강렬한 진동에 내 몸이 휘청였다. 팔의 방패 표면이 녹아내리는 듯한 뜨거움이 전해져 왔다. 화룡편에 실린 열화심법의 내공은 상상을 초월했다. 묵운의 팔에 장착된 방패 합금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젠장…!”

    묵운의 팔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센서에 심각한 과부하 경고가 떴다. 이대로는 한 번 더 저 공격을 받으면 팔이 부러질지도 몰랐다. 용비운의 얼굴에는 비웃음이 서려 있는 듯했다.

    “겨우 그 정도인가, 현? 무량검보의 대종사라는 자가 고작 이 정도로 비틀거릴 줄이야!”

    화룡은 다시금 포효하며 붉은 기운을 전신에 휘감았다. 이제는 주먹이 아니었다. 화룡의 전신에서 마치 화산이 분출하듯 붉은 내공 에너지가 솟구쳐 올랐다. 그의 심장, 즉 강철지존의 동력로가 한계를 넘어 격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받아라! 화룡폭열포!”

    화룡의 가슴이 활짝 열리더니, 그 안에서 거대한 붉은 에너지 구체가 응축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포격이 아니었다. 용비운의 모든 내공을 끌어모아 강철지존의 동력로를 통해 증폭시킨 궁극의 파괴력이었다. 강철지존의 육신으로 쏘아내는 열화심법의 결정타.

    “크…!”

    묵운의 센서가 최대치의 위험을 알렸다. 저 공격을 정면으로 맞는다면, 묵운은 물론이고 내부의 나까지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나는 조종석 안에서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도, 막아낼 수도 없는 상황.

    하지만… 이대로 무릎 꿇을 수는 없었다. 무량검보의 최후를 내가 장식할 수는 없었다.

    내 눈빛이 차갑게 번득였다. 묵운의 손끝이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철지존의 외장 아래 숨겨져 있던 미세한 동력선들이 격렬하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무형검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한 속도나 회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무형검… 오의!”

    내 속삭임과 동시에, 묵운의 등 뒤에서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어둠이 짙어지는 듯한 검은 파동이 묵운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것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시공간을 일그러뜨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무량검보의 숨겨진 비기였다.

    용비운의 ‘화룡폭열포’가 마침내 발사되었다. 붉고 거대한 에너지 포화가 묵운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무투장 전체가 그 압도적인 에너지에 의해 뒤흔들렸다.

    바로 그 순간, 묵운의 검은 파동이 최대치로 증폭되었다.

    콰아아앙!

    화룡폭열포가 묵운의 몸을 정확히 강타했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무투장이 붉은 화염으로 뒤덮였다. 시야를 가리는 섬광 속에서 묵운의 실루엣이 사라졌다. 승패가 결정된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러나 용비운의 미간에는 경련이 일었다.

    “이건… 뭐지?”

    화염이 걷히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묵운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여전히 검은 파동에 휩싸인 채. 그런데, 묵운의 모습이 이전과는 달랐다. 묵운의 전신이 마치 아지랑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화룡폭열포의 직격은 분명했다. 하지만 묵운은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은 듯했다. 아니, 정확히는, 화룡폭열포의 에너지가 묵운의 몸을 *통과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마치 묵운이 그 순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도 된 것처럼.

    “무형검… 공허의 경지!”

    내 입술에서 나직이 흘러나온 그 말은, 천공무투장에 얼어붙은 침묵 속에서 메아리쳤다. 용비운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강력한 필살기가, 허공을 가른 것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나는 조종석 안에서 서서히 미소 지었다.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묵운의 오른팔이 서서히 올라갔다. 외장 아래 숨겨져 있던 날카로운 검날이 소리 없이 드러났다. 강철의 검날은 어둠을 머금은 듯 섬뜩한 빛을 발했다.

    “강철패왕의 칭호… 이 현이 가져가겠다, 용비운.”

    내 차가운 목소리가 묵운의 스피커를 통해 용비운에게 전달되었다. 무투장은 정적이 흘렀다. 용비운의 얼굴은 분노와 당혹감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묵운의 검은 검날이, 마치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용비운의 화룡을 향해 섬광처럼 돌진했다.

    이제, 진정한 결전의 막이 올랐다.

  • 선협 (신선)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1화: 심연 속 속삭임

    **[표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마법진.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그 문양 안에서 기이한 그림자가 꿈틀거린다. 위로는 달빛 아래 고요히 잠든 명문 청운학원의 웅장한 건물 실루엣이 드리워져 있다.

    ***

    **1. 웅장한 서곡 (청운학원 대강당)**

    **[컷 1]**
    황금빛 마나석으로 장식된 청운학원 대강당. 수백 명의 학생들이 질서정연하게 앉아있고, 중앙 단상에는 백발의 노교수가 심원한 마법진 앞에서 강의하고 있다. 마법진에서는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와 강당을 신비롭게 물들인다.

    **[교수 (나레이션)]**
    “만물의 근원, 영혼의 정수. 우리 청운학원은 가장 순수하고 고결한 영기를 탐구하며, 그 힘을 다루는 법을 가르칩니다. 명심하십시오, 제군들. 마법은 지혜이며, 지혜는 곧 순수함에서 비롯됩니다.”

    **[컷 2]**
    학생들 중 한 명, ‘이안’은 딴생각에 잠겨 있다. 교수의 말은 한 귀로 흘려듣고, 단상 위의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나의 흐름을 뚫어져라 응시한다. 다른 학생들은 감탄하거나 필기하기 바쁘지만, 이안의 눈에는 미묘한 불협화음이 포착된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의 얼굴에 호기심과 의문이 교차한다.

    **[이안 (내적 독백)]**
    ‘순수함… 과연 그럴까? 뭔가 이질적인 것이 섞여 있어.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히 느껴져. 진동하는 마나의 깊은 곳에서 울리는… 섬뜩한 맥동.’

    **[컷 3]**
    옆자리에 앉은 ‘하린’이 이안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하린은 단정하게 교복을 입고 빼곡히 필기를 하고 있다.

    **[하린]**
    “이안, 또 딴생각이야? 저번 실기 시험 망치고도 정신 못 차렸지?”

    **[이안]**
    “아니, 하린. 네 눈에는 저 마나의 흐름이 정말 완벽하게 순수하게만 보여?”

    **[컷 4]**
    하린은 갸웃거리며 다시 마법진을 바라본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맑고 깨끗한 마나의 흐름만이 보일 뿐이다.

    **[하린]**
    “당연하지! 교수님이 매번 말씀하시잖아. 이 청운학원의 모든 마법은 대륙에서 가장 깨끗한 영맥에서 길어 올린다고.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컷 5]**
    그때, 교수의 시선이 정확히 이안에게 닿는다. 날카로운 눈빛이 이안을 꿰뚫는 듯하다.

    **[교수]**
    “이안 군, 혹시 질문이라도 있는가?”

    **[컷 6]**
    이안은 화들짝 놀라며 상체를 바로 세운다.

    **[이안]**
    “아, 아닙니다, 교수님. 그저… 마나의 정수를 깊이 탐색하고 있었습니다.” (머쓱하게 웃는다.)

    **[컷 7]**
    교수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마법진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의 입술에서 서늘한 경고의 말이 흘러나온다.

    **[교수]**
    “좋다. 탐색은 항상 필요하지. 하지만 때로는,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는 법. 진정한 지혜는 절제에서 온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이안 (내적 독백)]**
    ‘절제? 경고인가…?’

    ***

    **2. 금기의 속삭임 (밤, 청운학원 구관)**

    **[컷 8]**
    밤이 깊은 청운학원.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로 돌아가 잠들었지만, 이안은 랜턴을 들고 구관의 복도를 걷는다. 낡은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적막을 깨트리고, 벽에 걸린 낡은 초상화들의 눈동자가 그를 지켜보는 듯하다.

    **[이안 (내적 독백)]**
    ‘교수님의 마법진에서 느꼈던 그 이질적인 감각… 그 맥동의 근원. 분명히 학원 어딘가에 있어. 특히 구관 쪽에서 더 강하게 느껴졌지.’

    **[컷 9]**
    이안이 낡은 서고 옆 복도를 지나다가, 발아래 삐걱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큰 곳을 발견한다. 랜턴 불빛 아래, 다른 곳보다 틈이 더 벌어진 나무판자가 눈에 띈다. 이안이 조심스럽게 판자에 손을 얹고 밀자, 의외로 쉽게 들린다.

    **[이안]**
    “여긴가…?”

    **[컷 10]**
    마룻바닥 아래로 이어진 어두컴컴한 계단. 오래된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확 풍겨오며, 서늘한 공기가 이안의 뺨을 스친다.

    **[이안 (내적 독백)]**
    ‘젠장, 완전 지하잖아. 이런 곳이 있었다니.’

    **[컷 11]**
    계단을 내려가는 이안. 계단은 끝없이 깊어지는 듯하다. 이따금 벽에서 기이한 문양들이 보이는데, 학원에서 가르치는 마법진과는 전혀 다른, 고대의 섬뜩한 기운이 느껴진다. 문양들은 마치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들 같기도 하다.

    **[이안 (내적 독백)]**
    ‘점점 더 싸늘해지는군. 그리고… 이 기운. 아까 교수님의 마법진에서 느꼈던 불길한 맥동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어.’

    **[컷 12]**
    계단의 끝. 좁고 습한 통로가 이어진다. 통로의 벽면에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형상들이 음각되어 있다. 흡사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형상이 고통스럽게 새겨진 듯하다.

    **[이안 (몸을 웅크리며 통과)]**
    “으윽… 이 기운은 도대체…?”

    ***

    **3. 심연의 문턱 (지하 미궁)**

    **[컷 13]**
    통로를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시야가 탁 트이며 거대한 지하 공간이 나타난다. 공간의 중앙에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거대한 마법진이 있다. 마법진은 붉은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불길한 빛을 내뿜으며, 그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는 듯한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이안 (경악,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건… 무슨…!”

    **[이안 (내적 독백)]**
    ‘이 마법진… 학원에서 가르치는 어떤 마법진과도 달라. 이건… 이건 무언가를 가두고, 동시에 무언가를 빨아들이고 있어.’

    **[컷 14]**
    이안이 마법진 주변을 둘러본다. 셀 수 없이 많은 작은 구멍들이 뚫려 있고, 그 구멍에서 실 같은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마법진 안으로 흡수되는 것을 발견한다. 그 기운은 생기가 없는, 죽음의 기운에 가까웠다.

    **[이안]**
    “저건… 영혼의 찌꺼기? 아니, 이건… 생명의 기운이 강제로 뜯겨져 나가는 것 같아!”

    **[컷 15]**
    그때, 마법진 안에서 기괴한 속삭임이 들려온다. 여러 목소리가 뒤섞인 듯한 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어였지만, 그 안에 담긴 절규와 분노, 고통이 이안의 뇌리를 강타한다. 이안은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는다.

    **[속삭임 (음산하게 울려 퍼짐, 기이하고 고통스러운 고대어)]**
    “…… 살려줘… … 풀어줘… … 네놈들도… 흡수될 것이다…!”

    **[이안 (머리를 부여잡으며, 숨을 헐떡인다)]**
    “흐읍! 머리가… 깨질 것 같아!”

    **[컷 16]**
    마법진의 붉은 빛이 더욱 강렬해지며, 그 안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그것은 형태를 알 수 없는 끔찍한 존재, 혹은 수많은 존재들이 고통스럽게 뒤엉킨 덩어리 같았다.

    **[이안 (뒷걸음질 치며, 공포에 질린 얼굴)]**
    “안 돼… 여긴… 여긴 우리가 아는 마법이 아니야… 이건 금기야!”

    **[컷 17]**
    마법진 안의 그림자가 이안 쪽으로 흐릿하게 뻗어 나오는 듯한 움직임을 보인다. 동시에 이안의 발아래, 그가 서 있던 바닥의 틈새에서 희미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이안 (공포에 질린 얼굴, 숨을 헐떡이며)]**
    “으윽…!”

    **[마법진 안의 존재 (속삭임이 더욱 선명해지며, 섬뜩한 어조로)]**
    “또 한 명의… 호기심 많은… 먹잇감…”

    **[컷 18]**
    이안의 눈앞에서, 마법진 중앙의 그림자가 갑자기 크게 일렁이며, 그 안에서 수십 개의 섬뜩한 붉은 눈동자가 동시에 번뜩인다. 이안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비명과 함께, 그는 돌아서서 필사적으로 도망치려 한다.

    **[마지막 컷]**
    도망치는 이안의 등 뒤로, 지하 공간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마법진의 붉은 섬광이 더욱 격렬하게 타오른다. 이안의 눈에 비친 것은, 청운학원의 자랑스러운 명성 뒤에 숨겨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어둠의 심연이었다.

    ***

    **[에피소드 끝]**
    **다음 화 예고:** 심연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금기의 비밀은 어디까지인가!

  • 대체 역사물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고대인의 속삭임 12화: 빛을 삼킨 목함

    강민준은 돋보기 안경을 고쳐 쓰고 미간을 찌푸렸다. 며칠 전, 동대문 밖 시장에서 꽤나 비싼 값에 들여온 오래된 목함은, 겉보기엔 그저 흔한 선비의 소장품쯤으로 보였다. 잘 마른 오동나무로 만들어져 견고하고, 단아한 자개 문양이 은은하게 박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함. 그러나 강민준의 직감은 달랐다. 희미하게 피어나는 비린 흙냄새, 그리고 손끝에서 느껴지는 미묘한 떨림이 그를 이 목함으로 이끌었다.

    복원실의 밤은 깊었고, 바깥 세상의 소음은 두꺼운 벽을 넘어오지 못했다. 오직 촛불의 일렁임과 강민준의 숨소리만이 고요를 갈랐다. 그는 조심스럽게 목함의 경첩을 분리하고, 해묵은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했다. 보통 이런 작업은 지루함의 연속이지만, 이 목함만은 달랐다. 나무결을 따라 흐르는 문양이 마치 미로처럼 느껴졌다. 특정 각도에서 빛을 받으면, 눈에 띄지 않던 희미한 선들이 드러났다.

    “흥, 평범한 게 아니었군.”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선들은 단순히 장식적인 문양이 아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정교하고, 어딘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배열된 듯 보였다. 마치 복잡한 설계도처럼. 강민준은 복원용 칼날로 나무 표면의 때를 섬세하게 긁어냈다. 문양이 더욱 선명해지자, 목함의 모서리 한 귀퉁이에 작은 홈이 눈에 들어왔다. 손톱만큼도 되지 않는 작은 홈은 마치 누군가 일부러 파놓은 것처럼 인위적이었다.

    호기심이 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강민준은 작업대 한편에 놓인 작은 동제 송곳을 집어 들었다. 홈에 송곳 끝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자, ‘탁’ 하는 작은 소리가 복원실의 정적을 깼다. 동시에, 목함의 한쪽 면이 아주 미세하게 안쪽으로 꺼지는 것을 느꼈다. 너무나 작은 움직임이라 착각인가 싶었지만, 그의 예민한 감각은 확신했다.

    그는 목함의 모든 면을 꼼꼼하게 살폈다. 어디에도 흔적은 없었다. 하지만 다시 홈에 송곳을 넣고 힘을 주자, 이번에는 좀 더 확실하게 ‘따닥’ 하는 소리와 함께 내부에서 무언가 기계적으로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목함의 밑바닥 모서리 부분이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히, 안쪽으로 스르륵 밀려들어갔다.

    강민준은 숨을 멈췄다. 보통의 목함이 아니었다. 분명 이중 바닥이거나, 숨겨진 공간이 있는 것이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손에 땀이 흥건했지만, 놓칠 수 없는 긴장감이 그를 지배했다.

    밑바닥이 완전히 밀려들자, 어둠 속에서 무언가 빛나는 것이 드러났다. 처음에는 그저 먼지에 반사된 촛불 빛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빛은 너무나도 이질적이었다. 푸르스름하고, 희미하게 반짝이며, 마치 목함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발산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 빛은 강민준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목함을 들어 올렸다. 밀려들어간 밑바닥 안쪽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 안에서, 투명한 돌멩이 같은 것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돌은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었고, 표면에는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운 미세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푸른 빛은 그 돌멩이로부터 발산되고 있었다.

    강민준은 망설이다가, 떨리는 손으로 돌멩이를 집어 들었다. 차가웠다. 얼음을 만지는 듯한 냉기가 손끝에서부터 팔 전체로 퍼져 나갔다. 동시에, 돌멩이가 그의 손에 닿자마자 빛이 한층 강렬해졌다. 푸른빛은 목함 안을 가득 채우고, 그의 얼굴에까지 반사되어 기묘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순간, 강민준은 마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단순한 차가움이 아니었다. 손을 통해 스며드는 냉기는 그의 몸속 깊숙이 파고들어, 마치 혈관을 따라 흐르는 피를 얼려버리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그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대의 숲, 거대한 돌기둥, 하늘을 가르는 섬광, 그리고 알 수 없는 언어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환영인지, 착각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강렬한 이미지들이 순식간에 그의 의식을 휘감았다.

    “젠장, 이게 대체…….”

    그는 손에 든 돌멩이를 놓칠 뻔했다. 몸이 심하게 떨려왔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냉기는 이제 고통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매혹적인 끌림이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저 멀리, 희미하게 들려오는 바람 소리조차 낯설게 들렸다. 복원실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주위 모든 것이 정지한 듯했다.

    강민준은 이를 악물고 돌멩이를 꽉 쥐었다. 환영은 빠르게 사라졌지만, 그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것이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 돌멩이는, 이 목함은, 그가 지금까지 알았던 모든 상식을 뒤엎는 존재였다.

    손에 든 푸른 돌멩이는 이제 그의 손바닥에서 가느다란 맥동을 시작했다. 희미하게 ‘웅-‘ 하는 낮은 진동이 그의 손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의 시야가 잠시 일렁였다. 복원실의 오래된 탁자, 벽에 걸린 도구들, 그리고 창밖의 어둠이 마치 물속에 잠긴 것처럼 흔들렸다.

    그리고 그 순간, 돌멩이의 푸른빛이 그의 눈앞에서 폭발하듯 번뜩였다. 강민준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지만, 이미 늦었다. 눈꺼풀 안쪽으로 푸른 잔상이 선명하게 찍혔다. 눈을 다시 뜨자, 그의 눈앞에 놓인 목함은 더 이상 평범한 고미술품이 아니었다. 목함의 표면에 새겨져 있던 미로 같은 문양들이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숨겨진 바닥 안에서 푸른 돌멩이가 사라진 자리에, 이제는 마른 양피지 같은 낡은 두루마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두루마리는 한치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말려 있었고, 양쪽 끝은 얇은 비단실로 봉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비단실 위로, 역시나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다.

    강민준은 손에 든 돌멩이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의 손에 쥐여 있었다. 하지만 돌멩이의 빛은 이제 한층 약해져 있었다. 마치 방금 전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모두 두루마리로 전해준 것처럼.

    그는 다시 두루마리로 시선을 돌렸다. 두루마리의 봉인을 푼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 발을 들이는 것과 같았다.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다른 한편으로는 거부할 수 없는 지독한 호기심이 그의 마음을 잠식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의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떨리는 손끝으로 두루마리의 비단실을 잡았다. 그가 실을 당기려는 순간, 복원실 전체가 한 번 더 크게 ‘웅-‘ 하고 진동했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그의 고막을 강타했다.

    강민준은 숨을 헐떡였다. 두루마리의 봉인이 풀리면, 과연 무엇이 드러날까. 그리고 이 기이한 돌멩이와 목함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알 수 없는 고대의 힘이 잠든 문턱에 서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비단실을 감싸는 순간, 복원실의 모든 촛불이 섬광처럼 꺼지며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오직 두루마리의 푸른 빛만이 더욱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 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둠이 강물처럼 흑랑진을 휘감고 있었다. 제국군이 밤새도록 지키는 요새, 그 높다란 성벽 위로 횃불의 잔영이 흔들릴 때마다 차가운 강풍이 날카로운 비명처럼 귓가를 스쳤다. 진은 흙먼지로 뒤덮인 망토를 움켜쥐고 바싹 마른 입술을 씹었다. 그의 등 뒤로 그림자처럼 엎드린 열 명의 들불 단원들도 심장이 터질 듯한 침묵 속에 각자의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번 임무는 단순히 요새를 함락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흑랑진은 이 일대의 모든 영맥을 통제하는 핵심 거점이며, 무엇보다 거대한 영력 결계로 둘러싸여 있었다. 본대가 아무리 맹렬히 공격해도 그 결계가 무너지지 않는 한 시간만 낭비할 뿐이었다. 진과 그의 소대가 할 일은, 단 하나의 목표.

    “결계의 핵. 저 안쪽에 있다.”

    묵노인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진의 귓가에 울렸다. 며칠 전, 찢어진 지도 위에서 묵노인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곳. 제국의 심장이자, 이곳 들불 단원들의 목줄을 쥐고 있는 심장.

    진은 고개를 들어 흑랑진의 어둠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밤은 깊었으나, 요새 안에서는 여전히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고, 이따금씩 병사들의 쇳소리 섞인 대화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제국은 잠들지 않는 거인이었다.

    “시간은 자정이다.”

    그의 곁에 선 ‘까마귀’ 지혁이 낮게 읊조렸다. 지혁은 들불 내에서도 손꼽히는 잠입의 명수였다. 그림자를 밟듯 움직이는 그의 발걸음은 심지어 같은 단원들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였다.

    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단원들은 주변 영맥의 흐름을 방해하며 시선을 끌어라. 우리는 핵으로 간다.”

    그는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옥패를 꺼냈다. 그 옥패는 묵노인이 준 것이었다. 제국의 영력 결계는 단순한 방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주변의 생명력을 흡수하고, 제국군의 전력을 증폭시키는 저주받은 장치였다. 묵노인은 이 옥패가 결계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역류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한 번 쓰면 부서지는 일회용품이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각자 위치로.” 진의 명령에 단원들은 미끄러지듯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바람이 거세졌다. 찢어진 비단처럼 펄럭이는 진의 망토 속에서, 그는 정신을 집중했다.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땅의 떨림, 바람의 속삭임, 먼지 속의 미세한 냄새. 들불 단원이 된 후, 그는 단순히 무술을 익힌 것을 넘어선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사부님이 말했던 ‘천지인의 조화’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쿵. 쿵.

    심장이 거칠게 울렸다. 들불 단원들의 삶과 죽음이, 그리고 이 지역 민초들의 내일이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

    흑랑진의 외곽, 낡은 배수로의 입구는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았다. 진은 지혁의 신호에 따라 먼저 몸을 구겨 넣었다. 축축하고 역겨운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발밑에는 진득한 오물이 질퍽거렸고, 천장에서는 시커먼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제국은 자신들의 더러움을 이런 곳에 숨겨두지.” 지혁이 진의 뒤를 따르며 낮게 중얼거렸다.

    진은 대답 없이 손에 든 소형 야명주(야광 구슬)를 더욱 단단히 쥐었다. 희미하게 빛나는 구슬이 배수로의 음침한 풍경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지혁의 눈은 흡사 밤의 맹수 같았다.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까. 배수로의 끝은 거대한 암반으로 막혀 있었다. 그러나 지혁은 망설임 없이 암반의 틈새를 손으로 더듬었다. 그리고는 작은 틈을 찾아낸 듯, 손바닥으로 벽을 강하게 밀었다.

    쉬이이익!

    거친 모래 갈리는 소리와 함께 암반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제국군이 버려두었거나, 아니면 존재조차 잊어버린 비밀 통로였다. 어쩌면 이런 통로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제국의 오만함을 보여주는 증거일 수도 있었다. 자신들의 방어가 너무나도 완벽하여, 이런 사소한 틈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오만함.

    통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흙과 돌멩이가 섞인 답답한 공기가 코를 스쳤다. 이곳은 흑랑진의 지하 감옥과 이어지는 곳이었다.

    “왼쪽으로 돌아라. 저기 감시병들의 순찰 경로가 꼬여 있어. 십오 초.” 지혁이 속삭였다.

    진은 눈을 감고 기척에 집중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발소리, 멀어지는 병사들의 대화 소리. 정확히 십삼 초 후, 진은 지혁의 신호에 맞춰 움직였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그림자처럼, 두 사람은 감시병들의 틈새를 뚫고 나아갔다.

    지하 감옥은 생각보다 훨씬 넓었다. 음침한 복도 양옆으로 철창이 늘어서 있었고, 안에서는 미약한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감옥의 가장 안쪽, 제국의 죄수들이 아닌 듯 보이는 이들이 갇혀 있었다. 그들의 기색은 영기가 봉인된 듯 희미했다. 아마도 제국에 반항하다 잡힌 다른 수련자들일 터였다.

    그들의 고통이 진의 심장을 움켜쥐는 듯했다. 그러나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흑랑진 전체의 운명이 그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결계의 핵은 감옥의 가장 깊은 곳, 영맥의 중심부에 있을 거야.” 진이 속삭였다.

    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은 분명 강력한 수호자가 지키고 있을 거다.”

    예상대로였다. 좁고 구불구불한 복도를 지나자, 이내 한기가 느껴지는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공간의 중앙에는 거대한 검은 수정이 공중에 떠 있었고, 그 수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칙칙한 영력이 공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 영력은 단순히 결계를 유지하는 것을 넘어, 주변의 생기를 조금씩 빨아들이고 있었다.

    진은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것이 바로 묵노인이 말했던 ‘흡정결계(吸精結界)’였다. 주변의 모든 생명을 서서히 고사시키는 저주받은 결계.

    그리고 수정 앞에는, 갑옷을 입은 한 명의 무인이 좌정하고 있었다. 그는 온몸을 검은 비늘 갑옷으로 뒤덮고 있었고, 얼굴은 깊은 투구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는 검붉은 기운이 뱀처럼 스멀거렸다. 그는 마치 영혼 없는 인형처럼 미동도 없었으나, 진은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을 느꼈다.

    “제국 수호대장 ‘명암(冥暗)’.” 지혁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강휘 대장군의 직속 부하 중 하나다. 녀석은 ‘영혼 강탈자’라는 별명으로 불리지.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적의 영혼을 뽑아낸다고 알려져 있다.”

    진은 침을 꿀꺽 삼켰다. 명암. 제국 수호대장 중에서도 악명 높은 자였다. 그가 이곳을 지키고 있을 줄이야.

    그때였다. 명암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투구 그림자 속에서 핏빛 안광이 섬뜩하게 빛났다.

    “네놈들… 들불의 잔당들이군.”

    그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차가웠고, 동시에 온 공간을 뒤흔드는 듯한 진동을 담고 있었다. 명암의 움직임은 느렸지만, 그 속에 담긴 힘은 거대한 산맥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명암의 손이 허공을 휘젓자, 검붉은 영력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복도 양쪽에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들이 꿈틀거리는 생명체처럼 변하더니, 진과 지혁을 향해 쇄도했다.

    “젠장!” 지혁이 외치며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단검은 그림자를 찢어발기듯 번개처럼 움직였다.

    진은 명암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저자가 그림자를 조종하는 술법을 쓰는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 속에는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원한이 서려 있는 듯, 살을 에는 듯한 한기가 느껴졌다.

    “지혁! 그림자는 내가 맡는다! 자네는 명암의 움직임을 봉쇄해!” 진이 소리쳤다.

    그림자들이 진의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진은 품속의 옥패를 꽉 쥐었다. 그리고는 심호흡과 함께 옥패에서 작은 틈을 찾아 그 틈새로 손가락 끝에서 나온 영력을 흘려보냈다.

    “천지개벽(天地開闢)!”

    진의 외침과 함께 그의 몸에서 푸른빛 영력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 영력은 단순한 기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몸속에 잠재되어 있던, 태고의 자연과 교감하는 특별한 힘이었다. 푸른 영력은 그림자들을 덮쳐, 마치 어둠을 삼키는 빛처럼 그들을 소멸시켰다. 찢겨져 사라지는 그림자들 속에서 희미한 영혼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명암의 안광이 더욱 붉게 빛났다. “건방진 꼬맹이… 감히 이 명암 앞에서 영력을 뽐내는가!”

    명암의 검붉은 영력이 더욱 거칠게 휘몰아쳤다. 이번에는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형체가 없는 어둠이 뭉쳐지더니, 수십 개의 거대한 촉수로 변하여 진과 지혁을 향해 뻗어 왔다. 촉수 하나하나에서 섬뜩한 영혼 흡수의 기운이 느껴졌다.

    지혁은 이미 명암의 옆구리를 노리고 접근해 있었다. 그의 단검은 마치 살아있는 은빛 뱀처럼 명암의 갑옷 틈새를 찾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챙! 단검이 갑옷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명암의 갑옷은 상상 이상으로 단단했다.

    “하찮은 발버둥이로군.” 명암의 손이 허공을 잡더니, 지혁의 움직임을 묶어버렸다. 지혁은 마치 거대한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허공에서 발버둥 쳤다.

    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지혁마저 붙잡히다니. 명암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품속의 옥패를 꺼내 들었다. ‘천지개벽’으로 그림자들을 소멸시켰지만, 명암의 본체에는 거의 타격을 주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 옥패는 결계의 핵을 부수는 데 써야 했지만, 지금은 지혁을 구하고 명암을 잠시라도 묶어두는 것이 우선이었다.

    “이곳이 너의 무덤이 될 것이다, 제국 수호대장!”

    진은 옥패에 모든 영력을 쏟아부었다. 옥패는 순식간에 눈부신 푸른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빛은 흑랑진의 결계 핵인 검은 수정과 명암, 그리고 진 자신을 향해 거대한 영력의 파동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영력의 파동이 폭발하며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검은 수정은 일시적으로 빛을 잃었고, 명암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의 몸을 감싸던 검붉은 영기가 잠시 흐트러졌다. 옥패는 모든 힘을 소진한 채 조각조각 부서져 내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혁이 명암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는 이미 명암의 영혼 흡수 기술에 당한 듯,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진… 괜찮나…?” 지혁이 겨우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진은 몸을 가다듬었다. 옥패의 힘은 강력했지만, 명암을 완전히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핵을 부술 기회를 날려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핵을 부숴야 한다…! 지혁, 내가 시간을 벌 테니 자네가…”

    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흑랑진의 결계 핵인 검은 수정에서 섬뜩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진이 옥패로 가한 충격이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었다. 아니, 묵노인이 말했던 ‘역류’ 현상인가?

    균열은 순식간에 수정 전체로 퍼져 나갔다. 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검은 수정이 산산조각 났다.

    동시에, 요새 전체를 감싸고 있던 흡정결계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밖에서 기다리던 들불 본대의 맹렬한 함성이 흑랑진 전체를 뒤흔들었다.

    “돌격하라! 결계가 무너졌다!”

    환호성과 함께 수천의 들불 단원들이 흑랑진으로 밀려 들어오는 소리가 지하까지 생생하게 들려왔다.

    진은 가슴 벅찬 환희를 느꼈다. 임무 성공! 흑랑진이 이제 무너질 터였다.

    하지만 그 환희는 한순간에 싸늘한 공포로 변했다.

    검은 수정이 부서진 자리에서, 엄청난 밀도의 영력이 폭주하듯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영력은 이전의 음침한 흡정결계와는 차원이 다른, 순수하면서도 압도적인 파괴의 기운이었다.

    영력의 폭풍이 흩뿌려진 수정 조각들을 공중으로 띄웠고, 그 파괴적인 기운은 지하 공간 전체를 진동시켰다.

    명암은 이 광경에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어리석은 것들… 네놈들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력의 폭풍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살아있는 혼돈 그 자체였다. 거대한 몸집, 온몸을 뒤덮은 검붉은 비늘, 그리고 그 비늘 틈새로 뿜어져 나오는 짙은 암흑의 기운. 그 형체는 마치 심연의 악마가 깨어난 듯, 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를 안겨주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존재의 정수리 위에는, 섬뜩한 핏빛 안광을 번뜩이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제국군 혈무대장군, 강휘.

    그의 입가에 잔혹한 웃음이 걸렸다.

    “이제부터, 진짜 지옥을 보여주마.”

    강휘의 눈빛은 진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진은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가 부순 것은 결계의 핵이 아니었다. 거대한 제국의 심장이자, 이곳 흑랑진의 지하에 봉인되어 있던 재앙 그 자체를 깨워버린 것이다.

    들불의 함성은 아직 흑랑진 위를 울리고 있었지만, 진의 귓가에는 오직 강휘의 섬뜩한 목소리만이 맴돌았다.

    “어서 와라… 들불. 나의 장난감이 되어줄 테면.”

    지하 전체를 뒤흔드는 강휘의 냉혹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은 끓어오르는 공포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지금까지의 싸움은… 장난이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크툴루 신화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심연의 장서관] 1화 – 금기의 조우

    **제목:** 심연의 장서관

    **장르:** 크툴루 신화, 로맨스, 미스터리

    **로그라인:** 세상의 끝에 잠든 고대 문명을 연구하던 언어학자 서아. 그녀는 금지된 지식 속에서 ‘인간이 아닌 것’과 교감하고, 종족을 뛰어넘는 위험한 사랑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들의 연결은 우주의 잊힌 존재들을 깨우는 비극의 서곡이 되는데…

    **등장인물:**

    * **이서아 (Lee Seo-ah):** 30대 초반의 고고 언어학자. 지적이고 호기심이 많으며, 세상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탐구하는 것에 매료되어 있다. 사회성이 부족하고 고독한 편.
    * **카이로스 (Kairos):** 고대부터 존재해 온, 인간의 형태를 어설프게 모방한 이계의 존재. 고대의 지식과 우주의 본질을 꿰뚫고 있으며, 겉보기엔 매혹적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식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다.

    **(EPISODE START)**

    **[장면 1]**

    **1.1. (흑백 또는 톤다운된 어두운 컬러)**
    **[배경]** 깊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지하 장서관. 낡고 해진 고문서와 상형문자가 새겨진 석판들이 끝없이 쌓여 거대한 미궁을 이루고 있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오일 램프의 불빛이 먼지 낀 공기 속에서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다.
    **[인물]** 이서아가 무릎을 꿇고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를 집중해서 해독하고 있다.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와 집착, 그리고 어딘가 모를 흥분이 교차한다. 주변에는 이미 번역을 시도하다 포기한 듯한 다른 학자들의 자료들이 무질서하게 널려 있다.
    **[서아 (내레이션)]** 세상의 끝. 잊힌 문명. 미지의 언어. 사람들은 그저 허황된 이야기라며 손가락질했지. 하지만 나는 알았어. 이 장서관의 먼지 한 톨, 벽의 균열 하나까지도… 모두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1.2.**
    **[배경]** 서아가 해독 중인 양피지 두루마리 클로즈업. 복잡하고 기괴한 문자들이 얼룩처럼 새겨져 있다. 그중 일부는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비대칭적인 패턴을 보인다.
    **[서아 (내레이션)]** 다른 이들이 ‘광인의 낙서’라 치부했던 이 기록들이… 내게는 오랫동안 찾던 진실의 파편처럼 느껴졌어. 모든 미친 이론과 금지된 전설의 기원.

    **1.3.**
    **[배경]** 서아의 피곤해 보이는 눈매 클로즈업. 붉게 충혈되어 있지만, 렌즈 너머로 형형한 빛이 돈다. 그녀의 손은 연필을 쥔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서아 (내레이션)]** 몇 날 며칠을 밤샘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아. 시간은 무의미해졌고, 오직 이 해독만이 모든 것을 지배했다.

    **[장면 2]**

    **2.1.**
    **[배경]** 서아가 양피지에 써둔 번역문이 보인다.
    **[번역문 (텍스트)]** “…그림자 속의 눈이여, 모든 것을 보고 듣네. 육신은 없으나 형태는 있으니, 별의 정원에서 온 이방인이리라. 경계의 문이 열리고, 노래가 시작될 때… 그의 존재는 피어오르리니, 침묵 속에서…”
    **[서아 (독백)]** “…별의 정원에서 온 이방인…? 노래…?”
    **[서아 (내레이션)]** 이 대목은 수십 번을 읽고 또 읽어도, 매번 섬뜩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마치 누군가 내 뒤에서 속삭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2.2.**
    **[배경]** 서아의 시선이 화면 밖으로 향한다. 그녀는 무언가에 이끌린 듯 고개를 천천히 돌린다. 장서관 깊숙한 곳에서, 램프 불빛조차 닿지 않는 어둠이 더욱 짙게 깔린 곳.
    **[효과음]** (아주 희미하게, 귀를 맴도는 듯한 불협화음의 저음)
    **[서아 (독백)]** 이… 기분은 뭐지?

    **2.3.**
    **[배경]** 서아의 등 뒤에서, 어둠이 웅크린 곳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한 희미한 실루엣. 얼핏 보면 장서관의 뒤틀린 책장이거나 그림자 같지만, 어딘가 기묘하게 불규칙하다.
    **[효과음]** (낮게 깔리는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속삭임. 혹은 공간이 울리는 듯한 미세한 진동)
    **[서아 (독백)]** …누구… 없어요?

    **2.4.**
    **[배경]** 서아가 들고 있던 램프를 살짝 들어 어둠 속을 비춘다. 빛이 닿는 곳마다 낡은 책등과 석판들이 드러나지만, 아무것도 없다.
    **[서아 (독백)]** (식은땀을 흘리며) 환청인가…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었어.

    **2.5.**
    **[배경]** 서아가 다시 양피지로 시선을 돌리려 할 때, 그녀의 손목을 스치는 차가운 감각.
    **[효과음]** (정적을 깨는 차가운 바람 소리, 혹은 아주 미세한 기척)
    **[서아 (독백)]** …?!

    **2.6.**
    **[배경]** 서아의 손목을 잡고 있는 것은…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다. 투명한 듯 희미하게 빛나면서도 창백하고, 손톱은 짐승의 발톱처럼 길고 날카롭지만 기이하게 아름답다. 그 손은 서아의 맥박이 뛰는 곳을 정확히 짚고 있다.
    **[서아 (표정)]** 충격과 경악, 그리고 본능적인 공포. 하지만 그 안에 어딘가 매료된 듯한 묘한 감정이 스친다.

    **[장면 3]**

    **3.1.**
    **[배경]** 손의 주인이 서아의 앞으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어둠 속에서 스며 나오듯, 마치 형체가 없는 빛과 그림자가 뭉쳐진 것처럼. 그의 모습은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지만, 기이하게도 완벽한 대칭과 미를 지녔다.
    **[인물]** ‘카이로스’. 그의 얼굴은 창백하고 완벽한 조각상 같으며, 두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를 담은 듯 검고 투명하다. 머리카락은 마치 심해의 해초처럼 축 늘어져 있고, 묘한 광택을 띈다. 옷은 고대의 의복 같기도 하고, 혹은 그의 몸의 일부인 것 같기도 하다.
    **[카이로스 (정신적 목소리, 부드럽지만 압도적)]** …오랜 기다림 끝에… 나의 노래를 듣는 이가 나타났구나.

    **3.2.**
    **[배경]** 서아가 숨을 멈춘 채 카이로스를 올려다본다. 공포로 온몸이 마비된 듯하지만, 그녀의 눈은 카이로스의 비현실적인 존재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서아 (독백)]** 노래… 내가 번역한 그 구절…
    **[서아 (내레이션)]** 그는 분명… 인간이 아니었다.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존재. 하지만 그 경이로운 아름다움과 알 수 없는 기운은 나의 심장을 거세게 때렸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3.3.**
    **[배경]** 카이로스가 서아의 손을 잡은 채 살짝 끌어당긴다. 서아는 균형을 잃고 그의 품으로 쓰러지듯 기울어진다.
    **[카이로스 (정신적 목소리)]** 두려워 말라, 작은 존재여. 너는 이해했다. 너는 보았다. 너는 깨우려 했다.

    **3.4.**
    **[배경]** 카이로스의 눈이 서아의 눈과 마주친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수많은 별들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듯한 환영이 펼쳐진다. 서아는 그 환영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현기증을 느낀다.
    **[서아 (독백, 격렬하게)]** 미쳤어… 말도 안 돼… 이게 대체…
    **[서아 (내레이션)]** 그 눈은 나를 꿰뚫어 보았고, 나의 모든 공포와 욕망, 그리고 깊숙이 숨겨진 외로움까지 읽어냈다. 동시에 나의 의식 속으로 기이한 지식의 파편들이 밀려들어왔다. 우주의 시작, 잊힌 차원, 형태 없는 존재들의 춤… 너무나도 거대해서 한순간에 정신을 파괴할 만한 진실들이었다.

    **3.5.**
    **[배경]** 서아가 고통스러워하며 머리를 감싼다. 지식의 폭풍이 그녀의 뇌를 휘젓는다. 카이로스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본다. 그의 표정에는 미세한 연민과 함께, 더 깊은 알 수 없는 감정이 스친다.
    **[카이로스 (정신적 목소리)]** 너무 많은 것을 보지 마라. 인간의 그릇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 하지만 너는… 다르구나. 나의 언어를 이해하듯… 나의 존재도 받아들이는구나.

    **3.6.**
    **[배경]** 고통 속에서 서아는 카이로스의 차가운 손을 잡는다. 그 손이 주는 냉기가 오히려 그녀의 정신을 붙잡는 닻이 되는 듯하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카이로스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서아 (독백, 흐느끼듯)]** 당신… 대체…
    **[카이로스 (정신적 목소리)]** 나는 너의 심연의 조각이자, 잊힌 시간의 반영이다. 네가 나를 불렀으니, 나는 답했다.

    **[장면 4]**

    **4.1.**
    **[배경]**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서아는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카이로스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그의 손을 잡고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다. 그녀의 눈빛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져 있다. 공포는 사라지고, 낯선 평온함과 함께 깊은 이해가 담겨 있다.
    **[서아 (독백)]** 이제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내가 평생을 찾아 헤맸던 진실은… 이 지하실 어둠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진실의 일부가… 바로 그였다.

    **4.2.**
    **[배경]** 서아가 들고 있던 양피지 두루마리를 카이로스가 부드럽게 가져간다. 그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고대 문자를 훑는다.
    **[카이로스 (정신적 목소리)]** 너는 이 노래의 시작을 연주했지만… 그 다음은 읽지 못했구나.

    **4.3.**
    **[배경]** 카이로스가 양피지의 한 부분을 가리킨다. 그곳에는 이전까지 서아가 아무리 노력해도 해독할 수 없었던, 더욱 복잡하고 기괴한 문자들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카이로스가 손가락을 대자, 그 문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리며 빛을 발한다.
    **[서아 (표정)]** 경외감. 그녀는 그것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지식임을 직감한다.
    **[서아 (독백)]** 저건… 내가 알던 언어가 아니야…

    **4.4.**
    **[배경]** 카이로스가 서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본다. 그의 눈빛은 우주의 모든 지혜와 함께, 이 순간의 연약한 인간을 향한 깊은 흥미를 담고 있다.
    **[카이로스 (정신적 목소리, 이전보다 더 부드럽고 매혹적으로)]** 인간은… 이해하려 하지만, 너무 쉽게 한계를 짓는다. 하지만 너는… 경계를 넘어서려 하는구나.

    **4.5.**
    **[배경]** 카이로스가 양피지를 든 채, 나머지 한 손으로 서아의 뺨을 부드럽게 감싼다. 그의 차가운 손가락 끝이 그녀의 피부에 닿자, 미세한 전율이 흐른다.
    **[카이로스 (정신적 목소리)]** 우리가 함께 노래한다면… 이 심연은 더 깊은 진실을 드러낼 것이다. 하지만… 그 노래는 금지되어 있다. 세상은… 아직 우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4.6.**
    **[배경]** 서아의 얼굴 클로즈업. 두려움과 이성적인 거부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오직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과, 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던 외로움을 채워주는 듯한 기묘한 안정감이 그녀의 표정을 채운다.
    **[서아 (독백)]** 금지되었다고… 그는 말했지만… 나는 이미… 거부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텅 빈 장서관 속에서, 나는 그와 함께 영원히 미쳐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미쳐버리는 것이…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장면 5]**

    **5.1.**
    **[배경]** 카이로스가 서아의 얼굴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이제 그들의 숨결이 닿을 듯하다. 그의 우주를 담은 듯한 눈동자가 서아의 눈동자에 투영된다.
    **[카이로스 (정신적 목소리, 속삭이듯)]** 나의 연약한 연주자여… 너는 나의 화음을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 이 금지된 사랑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너는 두렵지 않은가?

    **5.2.**
    **[배경]** 서아가 카이로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갠다. 그녀의 눈은 망설임 없이, 그의 심연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다.
    **[서아 (독백, 떨리는 목소리로)]** …두렵지 않아.

    **5.3.**
    **[배경]** 그 순간, 장서관의 가장 깊은 곳에서, 미세한 진동과 함께 알아들을 수 없는 끔찍한 울림이 희미하게 들려온다. 마치 거대한 존재가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기척이다.
    **[효과음]** (지하에서 들려오는 듯한 낮고 으르렁거리는 소리, 혹은 진동하는 금속음)
    **[서아 (표정)]** 그 소리에 순간적으로 경직되지만, 카이로스를 향한 시선은 흔들림이 없다.
    **[카이로스 (표정)]** 그의 얼굴에 미세한 그림자가 스친다. 알 수 없는 경고와 함께,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다.

    **5.4.**
    **[배경]** 카이로스가 서아의 이마에 차가운 입술을 지그시 누른다. 짧지만 강렬한 접촉이다. 동시에 그의 정신적 목소리가 서아의 의식 속을 강하게 울린다.
    **[카이로스 (정신적 목소리, 결심하듯)]** 좋아. 그렇다면… 함께 노래하자. 우리의 금지된 사랑이… 세상을 재편할지라도.

    **5.5.**
    **[배경]** 서아와 카이로스가 마주 본 채 서 있다. 그들의 주변으로 낡은 양피지들이 바람 없는 공간에서 미세하게 흔들리고, 벽에 새겨진 고대 문자들은 마치 그들의 운명을 예언하듯 희미하게 빛을 발한다. 장서관 깊은 곳에서 울리는 기묘한 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서서히 공간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서아 (내레이션)]** 그와 함께라면… 어떤 진실도, 어떤 파멸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우리의 금지된 사랑이, 세상의 균열을 불러오는… 가장 위험한 서곡이 될 줄은. 그리고 그 균열 속에서… 어떤 존재들이 깨어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5.6. (마지막 컷)**
    **[배경]** 어두운 장서관 한가운데, 서로에게 이끌린 듯 마주 선 서아와 카이로스의 실루엣. 그들의 주위로 점점 더 격렬해지는 지하의 진동과 함께,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들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섬뜩한 기운이 감돈다.
    **[텍스트]** **다음 화에 계속…**


    **(EPISODE END)**

  • 메카 액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제1장: 잿빛 도시의 방랑자**

    지평선은 온통 잿빛이었다. 하늘도, 땅도, 닳고 닳아 사라진 문명의 잔해도 전부 회색빛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폐허의 바다 위를, 육중한 강철 거인이 느릿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거인의 이름은 ‘방랑자’. 이 세계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자들의 발이자 방패, 때로는 유일한 친구였다.

    조종석 안, 진우는 낡은 헤드셋을 고쳐 쓰고 조작 패드를 쥐었다. 진동과 함께 들려오는 웅웅거리는 모터 소리가 그나마 고요한 폐허 속에서 살아있는 소리였다. 이따금 고철 덩어리들이 발에 밟히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 날카롭게 울리곤 했다. 그의 시야를 가득 채운 외부 스크린에는 부서진 고층 빌딩들이 비스듬히 기울어져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한때 번화했을 거리는 이제 녹슨 차량들의 무덤이 되어 있었고, 빌딩 벽면을 휘감았던 덩굴들은 마치 문명의 상처처럼 아물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젠장, 오늘도 빈손인가.”

    진우의 입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사흘째였다. ‘핵심 전력 코어’를 찾기 위해 폐허가 된 ‘구역 7’을 뒤지고 있었지만, 수확은 없었다. 방랑자의 에너지 효율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었고, 이대로는 다음 달을 넘기기 힘들 터였다. 그는 스크린 오른쪽 하단에 깜빡이는 배터리 경고등을 힐끗 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 망할 고철 덩어리는 연료 탱크가 비는 것보다 이놈의 배터리가 먼저 나갈 판이었다.

    그때였다. 헤드셋 너머로 ‘치지직’ 하는 노이즈와 함께 작은 신호가 잡혔다. 스크린 한쪽 구석에 희미한 녹색 점이 깜빡였다.

    “…이건?”

    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탐지기가 잡아낸 신호는 미약했지만, 분명 ‘에너지원’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꽤 강력한. 이 잿빛 도시에서 이런 신호는 드물었다. 대개는 낡은 방어 시스템이나, 쓸모없는 고철 더미에서 나오는 잔류 에너지에 불과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희망과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런 곳에 강력한 에너지가 남아있다면, 필시 그 주변을 지키는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폐허의 법칙은 단순했다. 귀한 것일수록 위험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방랑자를 조종해 신호가 잡힌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육중한 발소리가 폐허 속으로 스며들듯 조용했다. 거대한 폐상업 단지의 입구였다. 유리창이 모두 깨져나가 앙상한 뼈대만 남은 건물들이 음침하게 서 있었다. 녹슨 강철 문 사이로 방랑자의 거대한 발이 들어섰다.

    내부는 더욱 암울했다. 천장이 무너져 내려 철골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바닥은 먼지와 부서진 파편들로 가득했다. 진우는 탐지기를 최대 출력으로 설정했다. 녹색 점은 점점 선명해졌다. 저 앞, 무너진 계단 아래에 무언가 있었다. 탐지기의 경고음이 점점 빨라졌다.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잔해를 헤쳐나가자, 거대한 원통형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표면에는 복잡한 회로들이 얽혀 있었고, 중앙에서는 녹색 빛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진우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코어… 진짜 코어잖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탐지기가 잡아낸 것은 다름 아닌 작동 중인 ‘비상 전력 코어’였다. 그것도 아직 상당한 에너지를 머금고 있는. 이 정도면 방랑자의 동력원을 교체하고도 남을 터였다.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뛰었다. 이 코어만 있으면 당분간은 생존 걱정 없이 이 폐허를 누빌 수 있었다. 일주일, 아니 어쩌면 한 달을 더 버틸 수도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주변의 적막이 깨졌다. ‘쉬이이이익—!’ 하는 공기 빠지는 소리와 함께, 천장의 철골 사이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젠장!”

    진우는 반사적으로 방랑자의 팔을 들어 올렸다. 날아든 것은 낡은 ‘경비 드론’이었다. 외피는 녹슬고 찌그러져 있었지만, 여전히 불을 밝히는 붉은 센서 눈동자가 위협적이었다. 드론은 굉음과 함께 작은 기관포를 전개했다. 그 둔탁한 소리가 좁은 공간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따다다다다닥!’

    강철 탄환이 방랑자의 장갑판에 튀면서 불꽃을 일으켰다. 진우는 곧바로 방랑자를 뒤로 물리며 반격했다. 방랑자의 오른팔에 장착된 낡은 충격 해머가 전개됐다. 전기가 흐르는 강철 둔기가 묵직하게 회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빌어먹을 고철 덩어리 주제에!”

    그는 조작 패드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드론은 마치 이 코어를 지키려는 듯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진우는 건물 내부의 좁은 공간에서 방랑자의 거체를 조종하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했다. 드론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했다. 녹슨 천장 철골을 스치듯 날아다니며 맹렬하게 공격해왔다. 스크린에 경고음이 울렸다. 방랑자의 장갑판 한 귀퉁이가 움푹 패였다.

    진우는 드론의 다음 움직임을 예측했다. 드론이 코어 주변을 한 바퀴 빙 돌며 진우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척할 때, 그는 이미 해머를 휘두를 준비를 마쳤다. 드론이 폐기된 냉장고 더미 뒤에서 나타나는 순간, 방랑자의 거대한 충격 해머가 굉음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콰아아앙!’

    정확하게 명중했다. 드론의 외피가 찌그러지고 스파크가 사방으로 튀었다. 균형을 잃은 드론이 휘청거리며 옆 벽에 부딪혔다. 그러나 드론은 아직 살아있었다. 찌그러진 몸체에서 ‘삐이이이익—’ 하는 비명을 토해내며, 더욱 광란적으로 공격해왔다. 마지막 발악이었다. 망가진 프로펠러가 기우뚱거리며 날아올랐다.

    진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 좁은 공간에서 오래 싸우는 것은 방랑자에게도 치명적이었다. 드론의 날카로운 잔해들이 방랑자의 장갑에 흠집을 냈다. 그는 드론의 움직임을 피해 코어 뒤편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드론은 진우를 쫓아 코어 앞으로 돌진했다. 바로 그때였다.

    “끝이다, 이 망할 고철.”

    진우는 방랑자의 왼팔에 장착된 ‘고압 전자기 사출기’의 스위치를 눌렀다. 낡았지만 여전히 위력적인 무기였다. 방랑자의 왼팔 끝에서 파란색 섬광이 번쩍이며 전자기파가 발사됐다.

    ‘쉬이이이이잉— 즈으으으응!’

    전자기파는 코어를 지나쳐 드론을 강타했다. ‘지이이이익!’ 하는 고압 전류음과 함께, 드론의 모든 시스템이 일시에 마비되었다. 드론은 허공에서 멈칫하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쿠우웅!’

    묵직한 충돌음과 함께 드론은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붉었던 센서 눈동자도 꺼지고,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있었다. 조용해진 건물 내부에는 방랑자의 모터 소리만 낮게 울렸다.

    진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전자기 사출기는 한 번 사용하면 재충전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무기였다. 이번에도 성공했지만, 너무 위험했다. 조종석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그는 방랑자를 코어 가까이 가져갔다.

    코어는 여전히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이 절망적인 세계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희망 같았다. 진우는 방랑자의 팔을 조심스럽게 뻗어 코어를 집어 들었다. 묵직한 강철의 감촉이 느껴졌다. 드론과의 싸움에서 방랑자의 장갑 일부가 파손되었지만, 코어를 얻은 것에 비하면 사소한 피해였다.

    코어를 방랑자의 내부 격납고에 안전하게 보관한 후, 진우는 폐허가 된 건물을 빠져나왔다. 바깥세상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오랜만에 작은 불씨가 지펴진 듯했다. 그는 코어를 지키다 부서진 드론의 잔해를 힐끗 돌아봤다. 이 모든 것은 그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먼지 구름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저 멀리 솟아있는 가장 높은 빌딩의 실루엣. 그곳은 한때 ‘중앙 통제 타워’라 불렸던 곳으로, 모든 정보와 에너지가 집중되어 있었다는 전설 같은 장소였다. 오래전, 그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고, 또한 모든 것이 끝났다고 했다.

    “언젠가는… 저곳에도 가봐야겠지.”

    진우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어쩌면 또 다른 위험이, 혹은 이 황폐해진 세계를 바꿀 수 있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방랑자의 육중한 발걸음이 다시 폐허의 바다 위를 나아가기 시작했다. 잿빛 지평선 너머로, 진우의 새로운 여정이 막 시작되고 있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고요가 지배하는 심우주 탐사선 ‘오르페우스 호’의 함교는 늘 같은 풍경이었다. 형광등처럼 희미하게 빛나는 제어판의 불빛, 우주선 전체를 감싸는 웅웅거리는 저음의 기계음, 그리고 간혹 들리는 승무원들의 나지막한 대화. 이한은 관측 모니터에 얼굴을 파묻은 채, 익숙한 적막 속에서 끝없이 펼쳐지는 성간 물질의 패턴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망원경에 스치는 미세한 이상 징후 하나 놓치지 않는 것. ‘오르페우스 호’의 최연소 승무원인 그는 아직 훈련생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만큼 강한 의욕과 섬세한 감각을 지니고 있었다.

    “이상 없습니다, 함장님. 섹터 감마-72 구역, 평소와 동일한 에너지 방출량입니다.”

    이한의 보고에, 조종석에 앉아 있던 서하율 항해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볍게 홀로그램 패널 위를 미끄러지며 우주선의 항로를 조정했다. 오르페우스 호는 지금껏 인류의 발길이 닿지 않은, 혹은 닿았더라도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심우주를 유영 중이었다. 잃어버린 고대 문명의 흔적을 찾아서, 혹은 새로운 자원을 발견하기 위해서. 그들의 임무는 늘 모호했고, 기대감으로 가득했다.

    “좋아. 이한, 이대로 30분 더 관측 유지해. 난 박 선임한테 가서 정비 보고 좀 듣고 올게.”

    강태준 함장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단호했다. 함장은 묵직한 발걸음으로 함교를 벗어났다. 그의 뒤를 따라 함교의 문이 스르륵 닫히자, 다시금 이한과 서하율만이 남겨진 공간에 정적이 찾아왔다.

    서하율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신입. 어차피 이 우주선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봐야, 우주먼지 분석이랑 가끔 운석 파편 스캔하는 게 전부니까.”

    이한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이곳에서의 일상은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적막하고, 광활하며, 때로는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지속될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이 평화가 깨질 것이라는 것을. 그의 손가락은 무의식중에 관측 패널 위를 오갔다.

    그 순간이었다.

    모니터 한구석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였다. 너무나도 미약하고, 너무나도 일시적이라 어지간한 전문가는 놓쳤을 신호였다. 이한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모니터를 확대했다.

    “잠시만요, 서 선임님.”

    이한의 목소리에 서하율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뭔가 잡았어?”

    “아주 미약한 에너지 파동입니다. 자동 시스템은 걸러낸 것 같아요. 주파수는… 불규칙적이고, 패턴이 없습니다.”

    이한은 재빨리 데이터를 분석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지금껏 본 어떤 자연 현상과도 달랐다. 인위적인 듯하면서도, 그 어떤 문명권의 것과도 일치하지 않는.

    서하율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빛이 모니터 화면에 고정되었다.

    “이상하네. 우리 시스템이 이렇게 미세한 신호를 놓칠 리가 없는데. 혹시 노이즈 아닐까? 가끔 심우주에서는 예상치 못한 전파 간섭이 생기기도 하니까.”

    “아닙니다. 이건… 노이즈 패턴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일관성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특정 주파수 대역에서만 관측됩니다.”

    이한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재빨리 해당 섹터의 모든 관측 장비를 동원해 신호를 추적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신호는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아주 느리게, 그러나 확실하게.

    “함장님께 보고하겠습니다.”

    서하율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내부 통신망을 열었다.

    “함장님, 서하율입니다. 이한 대원이 이상 징후를 보고했습니다. 위치는 섹터 감마-72-델타 지점, 미확인 에너지 파동입니다.”

    잠시 후, 강태준 함장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확인? 상세 보고해라.”

    서하율은 이한이 수집한 데이터를 요약해 보고했다. 강태준 함장은 침묵했다. 그 침묵은 평소의 차분함과는 달리, 어딘가 불길한 예감을 담고 있는 듯했다.

    “알겠다. 박 선임과 함께 함교로 복귀하겠다. 함선의 모든 시스템, 비상 태세로 전환해.”

    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오르페우스 호 전체를 감싸고 있던 나른한 공기는 일순간 팽팽한 긴장감으로 바뀌었다. 함교 내의 비상등이 깜빡이기 시작했고, 제어판의 불빛도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태준 함장과 박선우 과학관이 함교로 들어섰다. 박선우는 흰색 연구복 차림에 안경을 살짝 치켜 올리며 이한이 분석한 데이터를 빠르게 훑었다. 그의 표정은 호기심과 함께 미세한 경계를 담고 있었다.

    “정말 희한하군. 우리 시스템의 일반적인 탐지 범위 밖이야. 이한 대원, 자네의 관측 능력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놓쳤을 수도 있었겠군.”

    박선우의 칭찬에 이한은 살짝 얼굴을 붉혔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여전히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신호는 이제 확실하게 하나의 지점을 가리키고 있었다.

    “함장님, 제 분석으로는… 약 30광년 이내에 존재합니다. 이동 속도는 거의 0에 가깝습니다. 정지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지… 그렇다면 자연 현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거군.” 강태준 함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항로를 조정해라, 서 항해사. 해당 지점으로 최저 속도로 접근한다. 어떤 충돌도 허용할 수 없다. 박 선임, 모든 탐사 장비를 활성화하고, 통신은 최대한 줄여.”

    “알겠습니다!”

    서하율의 능숙한 조종으로 오르페우스 호는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우주선이 거대한 바다 속의 작은 물고기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함교 안의 모든 승무원들은 숨을 죽였다. 이제는 이한의 모니터뿐만 아니라, 오르페우스 호의 주 스캔 시스템에도 해당 신호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고, 거리가 좁혀질수록 신호는 더욱 강렬하고 선명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육안으로도 관측할 수 있는 거리에 도달했을 때.

    “저것은…!”

    이한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모니터 너머의 심우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완벽한 구 형태였다.

    가장 순도 높은 흑요석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빛을 거의 반사하지 않는 새까만 표면. 그 어떤 별빛도, 우주의 먼지도 삼켜버릴 듯한 압도적인 존재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듯 매끄러운 곡면 위로, 처음 보는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불규칙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 미묘하게 색이 변하는 듯했다.

    박선우 과학관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이런… 이런 물체는… 존재할 수 없어. 모든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형태야. 에너지 방출량도… 측정 불가능합니다, 함장님. 마치… 주변의 모든 에너지를 흡수하는 듯합니다.”

    “함장님, 분석 결과, 표면 온도는 절대 영도에 가까운데, 내부에서는 미약하지만 알 수 없는 진동이 감지됩니다.” 이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강태준 함장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거대한 검은 구체를 응시했다. 그의 직감은 이 물체가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는 거대한 생명체 같았다.

    “접근을 멈춰라, 서 항해사. 이 이상은 위험하다.”

    함장의 명령에 오르페우스 호는 구체로부터 안전거리를 유지한 채 정지했다. 정적 속에서, 승무원들은 숨을 멈춘 채 거대한 미지의 물체를 응시했다.

    그때였다.

    정지해 있던 검은 구체의 표면에 새겨진 기하학적 문양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푸른색, 보라색, 붉은색의 섬광이 번갈아 터져 나오며 구체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동시에 오르페우스 호의 함교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뭐… 뭐지?!”

    “쉴드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립니다! 알 수 없는 에너지 서지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경고음이 귓청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승무원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혼란이 가득했다. 이한은 필사적으로 모니터를 붙잡았다. 구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파동이 오르페우스 호의 모든 시스템을 마비시키려 들었다.

    강태준 함장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스쳤다.

    “전원, 자세 낮춰! 비상 탈출 준비!”

    함장의 다급한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은 구체는 한층 더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빛은 오르페우스 호를 향해 거대한 섬광으로 변해 돌진했다.

    이한은 눈을 가늘게 떴다. 섬광이 모든 시야를 집어삼키는 순간, 그의 뇌리에 스친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건… 게임이 아니야.*

  • 마법소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도시, 유나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벨라움 도시의 최하층 구역은 습한 흙냄새와 사람들의 한숨으로 가득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음에도 낡은 목조 건물들 사이로 피어나는 희뿌연 연기는 이곳의 하루가 얼마나 일찍 시작되는지 말해주는 듯했다. 사람들은 묵묵히 좁은 골목을 오가며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언제나 낮게 깔려 있었고, 그 위에 드리워진 잿빛 하늘처럼 희망 또한 침전되어 보였다.

    유나는 익숙한 움직임으로 거친 밀가루 반죽을 치댔다. 손바닥 아래에서 뭉쳐지는 끈적한 감촉은 늘 한결같았지만, 오늘따라 유나의 마음은 천근만근이었다. 맞은편 평상에 눕듯 기대어 있는 어린 동생, 미나의 마른기침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쿨럭… 쿨럭…”

    미나는 열에 들뜬 얼굴로 얕은 숨을 몰아쉬었다. 창백한 뺨 위로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밤새도록 이어진 기침에 잠결에도 가슴이 쓰렸던 유나는 미나의 이마를 짚었다. 뜨거웠다.

    “괜찮아, 미나. 언니가 곧 따뜻한 죽 끓여줄게.”

    유나의 목소리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미나는 고개를 힘없이 끄덕일 뿐이었다. 가늘어진 팔을 보면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유나는 애써 울음을 삼켰다. 울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엄마는 이미 새벽부터 일터로 나간 뒤였다. 크롬 제국의 성벽을 쌓는 공사 현장에서 온종일 돌을 나르고 흙을 팠다. 뼈를 깎는 고된 노동이었다. 그마저도 제국이 부과하는 터무니없는 세금과 공물 때문에 입에 풀칠하기도 빠듯했다.

    그때였다. 쩌렁쩌렁 울리는 쇠붙이 소리가 골목 어귀에서부터 들려왔다.

    “철기병이다…!”

    누군가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순식간에 골목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유나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설마, 설마 오늘 또.

    검은색의 육중한 강철 갑옷으로 무장한 철기병들이 좁은 골목을 가득 메우며 나타났다. 그들의 발소리는 흡사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을 울렸고, 차가운 헬멧 틈새로 보이는 눈빛은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선두에 선 기병대장이 허리에 찬 칼을 뽑아들고 하늘로 치켜들었다.

    “제국 법령이다! 오늘부로 벨라움 하층민 구역의 가구별 특별 세금이 1.5배 인상된다! 역병으로 인한 생산량 감소는 제국에 대한 기만에 불과하다! 반항하는 자는 반역으로 간주하여 즉결 처형할 것이다!”

    기병대장의 음성은 마치 훈련된 맹수처럼 거칠고 위협적이었다. 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떨었다. 역병으로 마을이 신음하는데, 생산량이 줄어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제국은 그 책임을 고스란히 백성에게 전가했다. 특별 세금 1.5배 인상이라니. 그건 이들에게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어떤 노인이 울부짖듯 외쳤다. 수십 년을 이 땅에서 살아온 이였다. 노인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지만, 철기병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시끄럽다!”

    가장 앞에 있던 철기병이 망설임 없이 손에 든 둔기로 노인의 어깨를 후려쳤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노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고통에 찬 신음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지만,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그저 피를 흘리며 쓰러진 노인을 보며 이를 악물 뿐이었다.

    유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미나의 고통스러운 기침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들은 미나가 죽어가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방해물이라고 치워버리려 할 것이다.

    “모두의 집을 수색하여 세금을 징수한다! 저항하는 자는 현장에서 처형하라!”

    명령이 떨어지자 철기병들이 각 집으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가 살림살이를 뒤엎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유나는 급히 미나를 끌어안고 낡은 식료품 창고 구석으로 숨었다. 바스락거리는 마른풀 더미 뒤에 몸을 웅크렸다.

    잠시 후, 유나의 집 문이 발로 걷어차이며 열렸다. 강철 부츠 소리가 거실 바닥을 울렸다.

    “아무것도 없군! 이게 다냐? 식량도, 은화 한 푼도 없어!”

    한 철기병이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은 굶주린 맹수처럼 빛났다.

    “저기, 병사님… 저희 아이가 열이 심해서… 약이라도 좀 구할 수 있게… 오늘만은 좀 봐주시면 안 될까요?”

    유나의 엄마가 아침에 놔두고 간 작은 약초 주머니를 본 철기병이 비웃듯 물었다.

    “약? 네놈들이 가질 수 있는 건 오직 흙바닥에 깔린 먼지뿐이다. 병든 아이? 그래, 제국에 쓸모없는 것들은 병들어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은 집을 엉망으로 만들고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듯 짜증 섞인 욕설을 내뱉으며 떠났다. 강철 부츠 소리가 멀어지고, 골목은 다시 정적에 휩싸였다. 유나는 미나를 꼭 끌어안은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미나의 머리카락을 적셨다.

    ‘죽는 것이 마땅하다니…!’

    그들의 말은 유나의 가슴에 칼날처럼 박혔다. 힘없는 자들은 그저 죽어가는 것이 제국이 바라는 것이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대로는 미나가 죽을 것이다. 엄마가 뼈 빠지게 일해도, 모두가 고통받아도, 이 제국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유나는 고개를 들었다. 식료품 창고의 좁은 창문 너머로 벨라움 시내 가장 높은 곳에 솟아 있는 황궁이 보였다.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웅장한 건축물.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햇빛조차 이곳의 잿빛 하늘과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빛이었다. 그 빛은 감히 올려다볼 수조차 없는 권위와 오만함을 상징하는 듯했다.

    분노가 유나의 심장을 갉아먹었다. 그 순간, 흐릿한 시야 한구석에 무언가 빛나는 것이 잡혔다. 철기병들이 집을 수색하며 뒤엎고 간 선반 아래, 흙먼지가 쌓인 틈새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유나는 조심스럽게 미나를 내려놓고 빛을 향해 기어갔다. 손을 뻗어 먼지를 걷어내자, 그녀의 손가락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손에 쥐어진 것은 한 송이 꽃잎 모양의 장식이었다. 푸른색 금속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흙먼지 속에서도 기이할 만큼 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손바닥 안에 올리자, 꽃잎 장식은 더욱 선명한 푸른빛을 내며 유나의 맥박과 함께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유나는 홀린 듯 그 꽃잎을 바라보았다. 차갑던 금속이 점차 따뜻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귓가에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속삭였다.

    *‘일어나라… 아이야… 너는… 그들이 가두려 했던… 진정한 희망의 씨앗이다….’*

    그것은 바람소리 같기도, 꿈결 같은 환청 같기도 했다. 그러나 유나의 손 안에서 빛나는 푸른 꽃잎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시 황궁을 올려다보았다. 황궁의 빛은 여전히 차갑고 오만했다. 하지만 유나의 손 안에서는, 그 작고 푸른 빛이 점차, 강렬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대체 무엇일까.
    유나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빛은, 결코 꺾이지 않을 것이었다.
    마치 잿빛 하늘 아래, 금지된 희망이 움트기 시작하듯이.

  • 다크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차가운 돌무더기 위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고통에 절어 한참을 헤매던 의식이 겨우 빛을 찾아 떠올랐을 때, 카인은 자신이 여전히 지옥의 문턱에 매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진 듯 비명을 질렀고, 찢어진 살점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가 오장육부를 얼렸다. 썩어가는 흙냄새와 자신의 피비린내가 뒤섞여 역겨움을 토해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들어 올렸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무너져 내린 고대 신전의 잔해였다. 부서진 기둥들은 괴물의 뼈처럼 앙상하게 솟아 있었고, 이끼와 덩굴이 휘감은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음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어둡고 축축한 땅, 그리고 그 위를 덮은 회색빛 하늘. 마치 세상이 자신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든 색을 잃은 것만 같았다.

    *죽지 않았군.*

    사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이 기적이었다. 아니, 기적이라기보다는 저주에 가까웠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는, 왜 아직 이 고통을 겪어야 하는지에 대한 절망이 더 컸다.

    그때, 찢어진 상처에서 다시금 뜨거운 피가 울컥 솟구쳤다. 마치 상처 자체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맥동하며, 잊고 싶었던 순간을 강제로 떠올리게 했다.

    ***

    그날 밤은 붉었다. 용의 뿔 요새는 불길에 휩싸였고, 성벽 위로는 검과 검이 부딪치는 끔찍한 쇳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카인은 선봉에서 적장의 목을 베고, 피 튀는 전장을 휩쓸었다. 그의 검 ‘여명’은 절망적인 전세 속에서도 희망의 빛을 발했다. 그의 옆에는 언제나처럼 루시안이 있었다. 그의 가장 친한 벗이자, 그의 목숨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동료.

    “카인! 후방에 적군 증원이다! 위험해!”

    루시안의 다급한 외침에 카인은 고개를 돌렸다. 수십 명의 적병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루시안에게 명령했다.

    “내가 막을 테니, 너는 병사들을 이끌고 본진으로 철수해라!”
    “하지만 형님! 혼자서는…!”
    “명령이다, 루시안! 무사히 살아남아라!”

    카인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병사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미끼가 되려 했다. 루시안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충직함과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꼭 살아남으십시오!”

    루시안은 병사들을 이끌고 후퇴하기 시작했다. 카인은 그들의 등 뒤에서 맹렬히 적들과 맞섰다. 검은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의 몸에도 수많은 상처가 새겨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루시안과 병사들이 안전하게 물러날 때까지, 그는 혼자서 지옥을 막아낼 참이었다.

    수십 명의 적병이 쓰러지고, 카인마저 지쳐 무릎을 꿇으려던 찰나였다.

    *촤악!*

    등 뒤에서 섬뜩한 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고통이 척추를 꿰뚫었다. 심장이 멈추는 듯한 충격에 카인은 비틀거렸다. 믿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등 뒤에는 루시안이 서 있었다. 그리고 루시안의 손에는… 카인의 심장을 꿰뚫은 검이 쥐여 있었다. 카인에게 선물했던, 그와 똑같이 ‘여명’이라 이름 붙인 루시안의 검이었다.

    “루… 시안…?”

    카인의 입에서 피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동료들의 시체가 즐비한 전장에서, 가장 믿었던 친구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었다. 루시안의 얼굴에는 더 이상 충직함도, 안타까움도 없었다. 차갑고 비열한 미소만이 번져 있었다.

    “형님이라니, 이제 와서 그런 호칭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루시안의 목소리는 너무나 잔인할 정도로 평온했다.

    “멍청한 형님은 언제나 그렇게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죠. 그 덕분에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 감사해야 할까요?”

    피와 흙으로 얼룩진 카인의 시야가 흐려졌다. 루시안의 뒤편으로, 아까 후퇴했던 병사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적군과 다를 바 없이 차가웠다. 모두 루시안의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함정이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카인이 겨우 입술을 움직여 물었다.

    루시안은 검을 깊숙이 찔러 넣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형님이 가진 모든 것이 탐났습니다. 그 빛나는 명성도, 모두의 신뢰도, 그리고… 그 자리도요.”

    검이 뽑히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카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루시안은 쓰러지는 그를 아무렇지도 않게 발로 찼다. 핏물 고인 바닥으로 내팽개쳐진 카인의 눈에, 루시안이 하늘을 향해 외치는 모습이 들어왔다.

    “저를 따르십시오! 제가 형님을 죽이고,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겠습니다!”

    병사들의 환호성이 요새를 뒤흔들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카인의 귀에는 지옥의 아우성처럼 들렸다. 루시안은 발밑의 그를 싸늘하게 내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영원히 썩어가십시오, 형님. 세상은 이제 저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피투성이인 카인을 들어 올려, 불타는 요새 아래의 깊은 협곡으로 던져 버렸다.

    ***

    차가운 빗방울이 얼굴을 때렸다. 루시안의 비열한 미소, 그의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도, 그 기억은 카인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그와의 우정도, 나눈 맹세도, 함께 흘린 피와 땀도.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는 죽어 마땅했다. 아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 모든 것을 잃었다. 명예도, 지위도, 친구도, 심지어 살아야 할 이유마저도.

    하지만 그때였다.

    어둠이 속삭였다.

    *죽어선 안 돼.*
    *이대로 사라지는 건 너무 하찮은 결말이야.*
    *그 자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잊히는 것을 용납할 텐가?*

    환청인가? 아니면 끓어오르는 분노가 만들어낸 망상인가? 카인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했다. 고통에 찌든 정신에 선명하게 박혀들었다.

    *원한은 살아남아라. 절망은 힘이 되리라.*
    *네가 잃은 것을 되찾고 싶다면… 기꺼이 심장을 내어줄 수 있겠는가?*
    *그를 파멸시킬 힘을 원한다면… 어둠과 계약하겠는가?*

    카인은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목에서는 피 섞인 쉰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온몸의 기력을 끌어모아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흘렀지만,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눈앞의 모든 것이 흐려지고, 환영이 아른거렸다. 어둡고 거대한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 팔을 뻗는 듯했다. 그것은 지옥의 문턱에서 자신을 유혹하는 악마의 손길이었다.

    *그래…*

    카인의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그는 기꺼이 그 손을 잡았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죽어서는 안 될 이유는 분명했다.

    *살아남아 복수하겠다.*
    *루시안, 네가 나에게서 빼앗아간 모든 것을… 몇 배로 돌려받을 것이다.*
    *네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 나는 너를 따라갈 것이다.*

    복수심이 불타올랐다.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지는 그의 얼굴은 증오로 일그러졌다. 그의 눈동자에, 죽음보다 더 깊은 어둠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고대 신전의 잔해 위로, 절망 속에서 태어난 새로운 파멸의 서곡이 울려 퍼지는 듯했다.

    이 지옥에서, 카인은 기꺼이 악마가 되기로 맹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