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마법소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아르카나 마법학원. 그 이름만으로도 마법 세계의 모든 이들이 경외감을 표하는, 가장 높은 탑이자 가장 깊은 심연을 품고 있는 곳이었다. 황금빛 석양이 고요히 내려앉은 고풍스러운 교사는 언제나 완벽한 모습이었고, 학생들은 찬란한 마법 재능을 뽐내며 미래의 별이 되기 위해 나선형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리나는 가끔 이 완벽한 풍경 속에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교정의 조각상들이 너무나 공허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것 같거나, 한밤중에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속삭임 같은 것들이었다. 물론, 그런 감각은 그저 피곤하거나 예민한 탓이라 치부해버리기 일쑤였지만.

    “리나, 또 멍하니 있어? 오늘 실기 수업 교수님 얼굴에 먹물 뿌리는 꿈 꿨다고 소문났어.”

    어깨를 툭 치는 손길에 리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늘 생기 넘치는 얼굴로 웃고 있는 유나였다. 짙은 밤색 머리카락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학년 수석을 놓치지 않는 재원이자 리나의 둘도 없는 친구.

    “유나… 너 정말 그렇게 심한 말을…”

    “에이, 농담이야! 왜, 또 그 얘기 했어? 아르카나 학원 지하에 마녀의 저주받은 영혼이 갇혀 있다는 둥, 금지된 마법진이 봉인되어 있다는 둥 하는 그런 거 말이야.” 유나는 장난스럽게 눈썹을 씰룩였다.

    리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게 그냥 소문이 아닐 수도 있잖아.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고문서에… 아주 오래된 지하 통로에 대한 언급이 있었어. 지도에도 없는 길이었어. 그리고 그 통로가, 이 학원 중심부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

    곁에 쪼르르 앉아 있던 리나의 마법 파트너, 작은 별똥이 빛을 내는 정령 별동이가 유나의 팔을 긁었다. “끼잉! 뾰롱뾰롱!” (위험해! 가지 마!)

    유나는 별동이의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흥, 지도에도 없는 통로라니. 그거야말로 옛날 학원생들이 장난으로 숨겨둔 자기들만의 아지트 아니겠어? 아니면 청소부 통로라든가. 리나, 너 너무 비현실적인 쪽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니까.”

    “하지만… 난 뭔가 기분 나쁜 기운을 느꼈어. 도서관 지하 서고 가장 깊숙한 곳에서 말이야. 평소에는 접근 금지 구역인데, 어제 밤새도록 책을 찾다가 문이 살짝 열려있는 걸 봤거든.”

    리나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진지함이 묻어 있었다. 유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리나를 바라봤다. “어둠의 마법 탐사라도 하고 온 것처럼 말하네? 기분 나쁜 기운이라니. 그래서 뭐, 밤에 몰래 들어갔다 왔어?”

    “응. 정확히는 들어가지 못했어. 뭔가 강력한 봉인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았어. 하지만… 그 너머에서 아주 미약하게, 마치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렸어.”

    그 순간, 별동이가 바들바들 떨며 리나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작은 몸에서 발산되는 별빛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유나는 그제야 장난스러운 표정을 거두고 진지해졌다. 별동이는 위험을 감지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울부짖는 소리라고?” 유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봉인 마법이 걸려 있다는 곳… 학원 가장 오래된 지하 서고 말이지?”

    리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밤마다 그 소리가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아. 마치…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아르카나 학원 지하에 숨겨진 끔찍한 금기. 그건 단순한 괴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리나와 유나의 마음속에 동시에 피어올랐다.

    “좋아, 리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밤에 같이 가보자.” 유나가 결심한 듯 말했다. “하지만 맹세컨대, 아무것도 없으면 넌 내일 아침식사로 설탕 열 배 넣은 팬케이크를 먹여줄 거야.”

    “진짜지? 아무것도 없으면 내가 그걸 다 먹고도 남지!” 리나는 유나의 결심에 놀랐지만, 동시에 안도했다.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그날 밤, 달빛마저 먹구름에 가려져 희미한 어둠이 아르카나 학원을 감쌌다. 교정의 고풍스러운 시계탑이 자정을 알리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리나와 유나는 망토를 뒤집어쓰고 학원 지하 서고로 향했다.

    “젠장, 이런 시간에도 마법 감시 마법진이 이렇게 빽빽하게 깔려있다니.” 유나가 손가락 끝에서 푸른 빛을 내는 마법 구슬을 굴리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마법 감지 능력이 탁월했다. “일반적인 접근 금지 구역이라고 하기엔 너무 과한데?”

    “그러니까. 뭔가 숨기려는 의도가 분명해.” 리나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별동이는 리나의 어깨에 바싹 붙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숨겨진 문을 찾기 위해 벽을 더듬었다. 고문서에 언급된 마법 기호와 일치하는 문양을 발견하자, 유나는 조심스럽게 마법을 해제했다. 투명한 마법 방벽이 파스스,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그 너머에는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흡… 냄새가… 기분 나빠.” 리나는 코를 막았다. 오래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쇠와 피가 섞인 듯한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유나는 작은 발광 구슬을 띄워 어둠을 밝혔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계단이었다.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듯한, 축축하고 차가운 돌계단. 마치 세상의 끝으로 향하는 길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게 대체 언제 만들어진 길일까…” 유나가 경외감과 공포가 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갑고 무거워졌다. 위에서 들리던 학원의 평온한 기척은 완전히 사라지고, 오직 자신들의 발소리와 심장 박동 소리만이 불길하게 울렸다. 벽에는 오래된 이끼와 검붉은 얼룩들이 엉켜 있었다. 그 얼룩들은 단순한 흙이나 먼지가 아닌, 마법적인 흔적처럼 보였다.

    “별동이가 더 불안해하고 있어.” 리나가 품에 안긴 별동이를 쓰다듬었다. 별동이의 별빛은 이제 거의 꺼질 듯 미미했다.

    마침내 계단의 끝에 다다랐다. 그들의 눈앞에는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이곳은 단순한 서고의 지하가 아니었다. 둥근 돔 형태로 이루어진 광활한 동굴이었다. 천장에는 기이한 형태의 수정들이 박혀 있었고, 그 수정들은 핏빛으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동굴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복잡하고 섬뜩한 문양으로 가득 찬 마법진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듯했다. 마법진 중심에는 검은색 철제 기둥이 우뚝 서 있었고, 그 기둥에는 쇠사슬이 엉켜 있었다.

    “이게… 대체 뭐야?” 리나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떨렸다.

    유나 역시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그들이 이제껏 느껴본 어떤 마법보다도 불길하고 강력했다. 그건 단순히 ‘어둠의 마법’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훨씬 더 깊고 섬뜩한 존재의 기척이었다.

    그때였다. 마법진 중앙의 기둥에서부터, 아주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이잉…

    그것은 인간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고통과 절규로 뒤섞인 섬뜩한 비명이었다. 마치 수백 년 동안 갇혀서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존재의 울음소리 같았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마법진의 핏빛 수정들이 일제히 강렬하게 타올랐다.

    동시에, 기둥을 감싸고 있던 쇠사슬들이 꿈틀거리며, 그 틈새로 검은 액체가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역한 쇠비린내가 동굴 전체를 가득 채웠다.

    “젠장, 도망쳐야 해!” 유나가 외쳤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가장 위험한 마법에 손대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학원의 ‘금기’ 그 자체였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마법진이 갑자기 거대한 눈처럼 번쩍 뜨이며, 그 중심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는 순식간에 거대한 손의 형상을 취하더니, 리나와 유나를 향해 맹렬하게 뻗어왔다.

    “크악!” 리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몸속의 마력이 얼어붙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때, 별동이의 작은 몸이 갑자기 강렬한 황금빛으로 폭발하듯 빛나며 리나의 앞을 막아섰다.

    “뾰로롱! 끼이이이잉!!” (감히! 내 파트너에게!)

    별동이는 필사적으로 검은 손과 맞섰지만, 그 작은 몸은 거대한 어둠 앞에서 너무나 미약했다. 검은 손이 별동이를 휘감는 순간, 별동이의 빛이 급격히 약해지며 다시 리나의 품으로 튕겨져 나왔다. 그리고 그 작은 몸에는 검은 실핏줄 같은 것이 불길하게 번지고 있었다.

    “별동아!” 리나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유나는 쓰러진 리나를 부축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사방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포위되었다. 그리고 그 연기 속에서, 셀 수 없이 많은 희미한 눈동자들이 자신들을 응시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수많은 절규하는 영혼들의 눈이었다.

    “리나… 우리가 깨운 건… 고작 시작에 불과했어.” 유나의 목소리가 절망으로 가득 찼다. “이곳에 갇혀 있는 건… 단 하나가 아니야.”

    동굴 전체를 뒤흔드는 끔찍한 울부짖음과 함께, 마법진 중앙의 기둥에서 검은 액체가 폭포처럼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액체는 마치 어둠 그 자체인 것처럼 바닥을 기어가며,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리나와 유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르카나 마법학원의 지하에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끔찍한 금기가, 봉인된 채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그 금기는 깨어나고 있었다.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고요산맥, 그 이름처럼 침묵만이 깊게 잠든 곳. 류운은 며칠 밤낮을 걸어 마침내 그 최심부에 도달했다. 투박한 도포는 찢어지고 해져 있었고, 흙먼지가 덕지덕지 붙은 얼굴은 거친 수염으로 뒤덮여 있었다. 영력이 고갈되어 숨조차 거칠었지만, 그의 눈빛만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젠장, 정말 여기까지 온 거야?”

    그의 독백은 차가운 바람에 흩어져 버렸다. 며칠 전부터 그의 심장을 울리던 미약한 지맥의 떨림, 그건 다른 수련자들에게는 잡음으로 치부될 만한 것이었다. 아니, 대부분은 아예 감지조차 못할 터였다. 류운 자신조차도 처음엔 단순한 착각이라 생각했다. 고대의 환영에 사로잡힌 노인이 미망에 빠진 것처럼.

    하지만 떨림은 점점 선명해졌고, 류운의 발길을 이끌었다. 그는 이 산맥에 묻힌 잊힌 전설들을 믿었다. 수많은 현인들이 비웃었지만, 그의 스승, 폐쇄된 문파의 마지막 생존자였던 그의 스승은 언제나 고서에 파묻혀 고대의 비밀을 속삭이곤 했다. 그 파편적인 지식들이 류운의 머릿속에서 퍼즐처럼 맞춰지고 있었다.

    “여기다.”

    마침내, 류운의 발길이 멈춘 곳은 거대한 절벽 아래의 음침한 골짜기였다. 지면에서 올라오는 미약한 기운은 다른 곳의 영기와 확연히 달랐다. 생명의 기운이라기보다는, 시간이 응축된 듯한, 잊힌 시대의 숨결과 같았다.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육안으로는 그저 평범한 암벽과 바위들뿐. 하지만 류운은 폐쇄된 문파에서 전해 내려오는 ‘천지영각술(天地靈覺術)’을 이용해 보이지 않는 틈을 찾았다. 손가락 끝에 미약한 영력을 모아 암벽의 특정 지점에 가져다 대자, 차가운 암석 표면에서 희미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쉬이이잉-

    극도로 미약한 진동과 함께 암벽의 일부가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마치 거대한 문이 열리듯, 틈새가 벌어지더니 이내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어두운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기는 차갑고 습했지만, 묘하게도 썩은 냄새 대신 흙내음과 함께 희미한, 그러나 압도적인 고대 영기(靈氣)의 향취가 났다.

    “후우…”

    류운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수련으로 단련된 그의 심장도 거친 북소리처럼 울렸다. 이곳은 분명, 그 전설 속의 장소였다.

    주머니에서 작은 영염주(靈炎珠)를 꺼내들었다. 손가락 끝에서 푸른 영력이 뿜어져 나와 구슬을 감싸자, 영염주는 주변을 밝히는 푸른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입구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좁은 통로는 곧 아래로 깊게 경사져 있었다. 발아래서는 먼지 쌓인 돌들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통로의 벽면은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지만, 오랜 세월로 인해 이끼와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군데군데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양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지만, 대부분은 마모되어 형체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수십 장(丈)은 족히 내려왔을 깊이였다. 갑자기 통로가 넓어지면서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영염주의 푸른빛이 닿는 곳까지는 겨우 엿볼 수 있었지만, 류운은 이 공간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럴 수가…”

    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주변을 둘러싼 것은 거대한 암석 기둥들이었다. 수십 개의 기둥들은 천장을 받치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마치 거인의 궁전을 연상시켰다. 기둥들 사이에는 오래된 건축물의 잔해가 널브러져 있었다. 벽돌과 돌들이 무너져 내린 흔적, 부서진 조각상들. 모든 것이 수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고통을 증언하는 듯했다.

    이곳은 지하 동굴이 아니었다. 인간, 혹은 인간을 닮은 어떤 존재가 인위적으로 만든 거대한 유적이었다.

    먼지가 자욱한 바닥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의 발자국이 남겨지는 것조차 망설여지는 신성한 공간이었다. 정적만이 흐르는 이곳에서, 류운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를 감지했다.

    쉬이이잉… 쉬이이잉…

    마치 바람이 텅 빈 동굴을 지나는 소리 같기도 하고,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 같기도 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수많은 존재들이 동시에 속삭이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 소리는 류운의 심장을 관통하며 그의 영혼 깊숙한 곳을 흔들었다. 고요산맥의 깊은 지하, 그 누구도 찾지 못했던 이곳에서, 고대의 비밀이 속삭이고 있었다.

    발길이 닿은 곳은 붕괴된 제단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그 위에 놓인 것은 무수한 돌멩이와 파편들. 류운은 그중 하나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검은 현무암 조각이었다. 하지만 그 표면에 새겨진 문양은 방금 들어온 통로의 희미한 문양과는 차원이 달랐다. 너무나도 정교하고, 강렬하며, 어떤 에너지를 담고 있는 듯했다.

    그는 조각에 손가락을 대고 영력을 흘려보냈다.

    순간, 조각에서 강렬한 진동이 울렸다. 검은 현무암 조각은 마치 잠에서 깨어난 듯, 검푸른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빛은 제단을 가득 채우고, 이내 주변의 기둥들을 따라 천장으로 치솟았다.

    콰아앙!

    거대한 굉음이 지하 공간을 뒤흔들었다. 무너져 내린 건축물 잔해들이 더 큰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류운이 서 있는 제단마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충격에 그는 몸의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크윽!”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제단에서 뿜어져 나온 빛은 천장을 뚫고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마치 지하에 잠든 거대한 존재를 깨우는 신호라도 되는 양. 빛이 닿는 곳마다 잠들어 있던 고대 진법들이 깨어나듯 희미한 영력을 내뿜으며 빛나기 시작했다.

    류운은 조각을 움켜쥔 채 눈을 크게 떴다. 거대한 공간의 끝,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가장 거대한 기둥 하나가 마치 맥박처럼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기둥의 중앙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거대한 문양이 떠올랐다.

    그 문양은… 지금까지 류운이 보았던 어떤 문양보다도 복잡하고, 신비로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류운은 알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발을 디딘 곳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잊힌 고대의 존재, 혹은 그 존재가 남긴 미지의 힘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힘의 문이 열리려 하고 있었다.

    류운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은 불타올랐다. 두려움보다는 호기심, 그리고 알 수 없는 전율이 그를 지배했다.

    ‘왔구나… 마침내.’

    그의 손에 들린 현무암 조각은 옅은 진동을 멈추지 않았고, 고요산맥 깊은 지하의 비밀은 이제 막 첫 장을 넘기고 있었다.

  • 마법소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둠이 도시를 집어삼키기 시작할 무렵, 가장 높고 화려한 첨탑의 그림자 아래에서 유나는 홀로 서 있었다. 붉은색에 가까운 자주색 망토가 밤바람에 휘날리며 마치 살아있는 그림자처럼 그녀의 몸을 감쌌다. 한때 별처럼 빛나던 금발은 차가운 은빛으로 변해 있었고, 생기 넘치던 푸른 눈동자에는 오직 깊이를 알 수 없는 얼음 같은 냉기만이 서려 있었다. 손끝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검은 마력이 망토 자락을 따라 꿈틀거렸다.

    “사라…”

    나직이 읊조린 이름은, 핏빛으로 물든 심장에서 끓어오른 절규와도 같았다. 그때 그날, 모든 것을 바쳐 지키려 했던 마법 세계의 평화 속에서, 가장 믿었던 친구가 내민 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칼날이 되어 유나의 심장을 꿰뚫었었다. 빛나는 수정탑 위에서 함께 맹세했던 약속은 잿더미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날 이후, 유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복수뿐이었다.

    첨탑의 꼭대기, 유리로 된 돔 안에서는 환한 빛과 함께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오늘은 ‘성스러운 빛의 수호자’ 사라가 새로운 대마법의 봉인식을 거행하는 날이었다. 도시의 모든 시민이 그녀를 찬양하며 환호하고 있었다. 유나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저 환호가, 곧 비명으로 바뀔 것이다.

    “변신!”

    낮게 읊조린 주문과 함께 유나의 몸이 검은 파동에 휩싸였다. 한때는 순수하고 영롱한 빛으로 빛나던 변신이었지만, 이제는 어둠을 머금은 마력이 그녀를 감쌌다. 손에 들린 지팡이는 검은 수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낫의 형태로 변했고,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마력이 번뜩였다. 망토는 날카로운 그림자 날개처럼 솟아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별빛 마법소녀 루나’가 아니었다. 오직 ‘심연의 마녀 유나’만이 존재했다.

    검은 날개를 펼친 유나는 망설임 없이 첨탑을 향해 날아올랐다. 방어 마법진이 번쩍였지만, 심연의 마력은 고대 유물을 녹이듯 순식간에 마법진을 관통했다. 유리 돔이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시민들의 환호는 경악과 혼란으로 바뀌었다.

    무대 위에서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빛나는 지팡이를 들고 있던 사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의 눈이 유나를 알아보는 순간, 공포에 질려 크게 뜨였다.

    “유… 유나?!”

    사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순간, 유나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꼈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복수의 서곡이 울리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고동이었다.

    “오랜만이네, 사라.” 유나의 목소리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내 심장이 꿰뚫리고 너에게 버려진 그 날 이후로.”

    사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말도 안 돼… 네가 어떻게…! 그때 분명히…!”

    “내가 죽었기를 바랐겠지. 네가 얻은 이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유나는 낫을 든 채 천천히 사라에게 다가갔다. 낫 끝이 바닥을 긁으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난 살아남았어. 네가 망각의 늪에 던져버린 심장 조각들을 그러모아서 말이야.”

    사라가 황급히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때 일은 어쩔 수 없었어! 마법 세계를 위한 희생이었다고! 너도 동의하지 않았니?”

    유나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는 분노와 비웃음이 뒤섞여 있었다. “희생? 너의 대의를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 희생이었던가? 아니, 그건 살인이었어, 사라. 친구의 등에 칼을 꽂는 비겁한 살인.”

    그녀의 눈에서 붉은 마력이 더욱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제는 내가 너에게 똑같이 돌려줄 차례야.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고, 네가 가장 아끼는 것을 부수어줄 거야.”

    “헛소리 마! 난 ‘성스러운 빛의 수호자’다! 악에 물든 네가 감히 날 막을 순 없어!” 사라가 비명을 지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눈부신 섬광이 유나를 향해 쏘아졌다. 순수한 빛의 마법, 한때 유나의 가장 큰 자랑이자 희망이었던 마법이었다.

    하지만 유나는 피하지 않았다. 검은 낫을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르자, 섬광은 마치 검은 안개에 빨려 들어가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의 얼굴에 절망이 스쳤다.

    “네 빛은 이제 나에게 통하지 않아.” 유나는 낫을 치켜들었다. 낫 끝에서 검은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어둠의 구체가 형성되었다. “이제는 너의 빛을 어둠으로 집어삼켜줄 차례니까.”

    “안 돼! 멈춰! 유나!” 사라의 절규가 돔 안에 울려 퍼졌다.

    유나의 표정은 잔혹할 정도로 평온했다. “늦었어, 사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너의 모든 것을, 그리고 너의 빛을. 철저하게 파괴해 줄 테니, 기대해도 좋아.”

    어둠의 구체가 사라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비명과 함께, 첨탑은 검은 파동에 휩싸였다. 한때 빛으로 가득했던 그곳은, 이제 복수의 그림자로 물들기 시작했다. 유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겨우 첫 번째 복수의 막이 올랐을 뿐이었다.

  • 다크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공기는 먼지나 습기로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잊힌 시간과 훨씬 더 사악한 어떤 것의 냄새가 났고, 카엘의 피부에 수의처럼 들러붙었다. 보통이라면 어둠을 향해 당당히 솟아올랐을 그의 횃불조차 축소된 듯 보였고, 불꽃은 자신만의 새로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젠장, 이런 곳은 처음이군.”

    제인의 걸걸한 목소리는 평소 같았으면 위안이 되었겠지만, 지금은 그들 앞에 펼쳐진 거대한 공간 앞에서 이상하리만치 작게 들렸다. 그의 갑옷 입은 주먹은 무의식적으로 대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늘 조용한 관찰자였던 리라는 안경을 콧잔등 위로 밀어 올렸다. 렌즈 너머 그녀의 창백한 눈동자는 번뜩이는 횃불 빛을 반사하며 경외와 두려움이 뒤섞인 채 넓게 펼쳐져 있었다.

    “고대 문헌에도 기록되지 않은 장소예요. 이건….”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들은 거대하고 완벽한 원형의 방 입구에 서 있었다. 매끄럽고 이음새 없는 돌벽은 위로 솟아올라 카엘의 숙련된 눈으로도 꿰뚫을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너무나 광대하고, 너무나 비정상적으로 대칭적인 공간이라 폐허라기보다는 거대하고 석화된 심장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공허의 중심에는 순수한 흑요석으로 된 거대한 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다. 단순히 기둥이 아니었다. 그것은 빛이나 열로가 아니라 깊고 규칙적인 울림으로 고동치고 있었는데, 그 진동은 카엘의 뼈 속까지 울려 퍼지며 기억보다도 오래된 것이었다. 달 없는 밤처럼 검었지만, 주위의 모든 빛을 흡수하는 듯한 흑요석은 내면의 끔찍한 발광으로 반짝이며 그림자를 기괴한 형상으로 뒤틀었다.

    흑요석 심장 기저부 주위에는 복잡한 조각들이 바닥과 낮은 벽을 따라 꿈틀대고 있었다. 그것들은 길쭉한 팔다리와 텅 빈 눈을 가진 인물들이 어두운 단석(單石) 앞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피의 희생,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들이 소리 없이 비명을 지르는 모습, 그리고 카엘이 그 어떤 알려진 언어에서도 접한 적 없는 상징들이 모든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미지는 단순히 새겨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꿈틀대며 잊힌 신성모독을 직접 그의 마음에 속삭이는 듯했다.

    가장 깊은 얼음보다 더 차가운 냉기가 카엘의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것은 단순한 고대 사원이 아니었다. 이것은 묻혀 있어야 할 어떤 존재에게 바쳐진 제단이었다.

    “이게… 대체 뭐지?” 카엘은 목소리를 거의 속삭이며 중얼거렸다. 그는 깊은 불쾌감, 영혼 속에서 울리는 원초적인 경고를 느꼈다.

    “이건… 고대 문헌에서 ‘검은 심장’이라 불렸던 것과 일치해요.” 리라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모든 것을 왜곡하며, 심지어 시간을 멈춘다는 전설의 유물….”

    속삭임. 처음에는 광대한 방에서 희미한 메아리처럼, 잊힌 돌 위를 스치는 마른 나뭇잎 소리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내 속삭임은 커지며, 카엘이 알지 못하는 언어의 구체적인 구절들로 합쳐졌다. 하지만 그는 그것들을 *이해했다*. 힘, 영생, 필멸의 존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지식의 약속. 그러나 또한 위협, 기괴한 고통의 환영, 자아의 완전한 소멸에 대한 경고도 섞여 있었다.

    “거짓말이야.” 카엘은 횃불을 더욱 꽉 움켜쥐며 현실에 자신을 붙잡아 두려 애썼다. 속삭임은 교활하게 그의 욕망을 비틀고, 그의 가장 깊은 두려움을 파고들었다.

    제인은 끙 소리를 내며 그림자 속을 이리저리 살폈다. “들리나? 이젠 환영까지 보이는군.”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저 멀리 벽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그림자 형상들이 돌에서 벗겨져 나오는 듯 보였고, 그 형태는 연기처럼 일렁였다.

    하지만 리라는 이상하리만치 가만히 서서 흑요석 심장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희미하고 거의 알아차릴 수 없는 전율이 그녀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니요… 이건 환영이 아닐지도 몰라요. 저것… 저 검은 심장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어요.”

    그녀의 말은 카엘에게 물리적인 충격처럼 다가왔다. 흑요석은 단순한 비활성 물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각이 있고, 고대하며,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규칙적인 울림은 더욱 강렬해졌고, 이제는 거인의 심장이 대지의 바위 속에서 뛰는 듯한 깊고 공명하는 박동으로 느껴졌다.

    갑자기, 벽화 속 기괴한 형상 중 하나가 벽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것은 인간형의 형체였지만, 비정상적으로 얇고, 팔다리는 불가능한 각도로 구부러져 있었다. 피부는 고대 부패물처럼 얼룩덜룩한 회색이었고, 눈이라 불릴 수 있다면 그것은 움푹 들어간 얼굴에 빛나는 진홍색 점 두 개였다.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미끄러지듯* 이동했고, 그 움직임은 완전히 소리 없이 유동적이었으며 물리학의 법칙을 거스르는 듯했다.

    “젠장, 고대 종족인가?” 제인이 고함쳤고, 그의 대검이 쾅 하는 소리를 내며 검집에서 뽑혀 나와 순간적으로 억압적인 침묵을 꿰뚫었다. 그는 리라의 앞에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니, 제인. 저건… 저건 그들의 그림자, 혹은 그들의 기억이야.” 카엘은 차가운 확신이 그의 내장 깊이 자리 잡는 것을 느꼈다. “저 검은 심장이 이 모든 걸 흡수해서 만들고 있어.”

    더 많은 형상들이 벽에서, 바닥에서, 심지어 공기 자체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고체로 만들어진 유령 같았고, 가장자리가 깜빡거렸지만 틀림없이 실체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고대하고 녹슨 칼날, 톱니 모양의 뼈 창을 들고 있었고, 일부는 기형적인 발톱을 뻗었다. 그들의 수는 불어났고, 소리 없이 전진하는 무리를 형성했다.

    속삭임은 귀청이 터질 듯한 포효로 치솟았고, 고통과 승리의 불협화음은 카엘의 이성을 부술 듯했다. 그의 머리가 지끈거렸고, 시야의 가장자리가 흐릿해졌다.

    “버텨! 정신을 잃으면 안 돼!” 카엘은 동료들에게라기보다는 자신에게 더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보이지 않는 소리의 폭풍에 삼켜졌다.

    “저것들이 우리를 원하고 있어요! 저 검은 심장의 일부로 만들려고 해!” 리라가 비명을 질렀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지만 얼굴에 눈물이 흐르며 압도적인 정신적 공격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제인은 함성을 지르며 가장 가까운 유령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대검은 그림자 형체를 갈라놓았지만, 피도 없었고, 뼈가 부러지는 만족스러운 소리도 없었다. 생명체는 그저 검은 연기로 녹아내렸다가 몇 초 후 다시 형성되었고, 마치 다치지 않은 듯 보였으며 진홍색 눈은 더욱 밝게 타올랐다.

    “이런 젠장! 물리치지 못해!” 제인이 좌절감에 포효하며, 다시 형성되는 그림자에서 뻗어 나오는 해골 손을 피했다.

    카엘은 이것이 힘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그들의 정신, 그들의 영혼을 위한 싸움이었다. 흑요석 심장은 더 빠르게 고동쳤고, 그 규칙적인 울림은 이제 죽어가는 짐승의 마지막 몸부림처럼 절박하고 굶주린 박동으로 변했다. 공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워졌고, 그들의 몸에서 온기를 빨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의지가 흩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고, 유혹적인 속삭임은 도피, 망각, 고통을 끝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약속했다.

    그는 흑요석 기둥을 바라보았다. 진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먹어치우고 있었다*. 그들의 두려움, 그들의 절망, 그들의 생명력을 먹어치우고 있었다. 벽화에 묘사된 고대 의식들은 단순히 그것에 대한 희생이 아니라, 그것이 먹어치우고 성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분명 약점이 있을 것이다. 그 괴물 같은 식욕을 방해할 수 있는 어떤 것, 무엇이든. 카엘은 정신적 혼미를 뚫고 방을 황급히 훑었다. 그는 흑요석 기저부 근처, 가장 크고 가장 불안한 희생 이미지 바로 아래 조각들에 미묘한 차이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다른 것들과는 달리 하나의 상징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듯했다. 검은색을 배경으로 둔하고 영묘한 푸른빛이었다.

    거의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희미한 빛이었고, 억제와 속박을 의미하는 듯했다. 봉인 문양이었다.

    “리라! 저기! 저 빛나는 문양!” 카엘은 필사적으로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자신을 마비시키려는 힘에 맞서 싸웠다. “저건… 봉인 문양이야! 저 검은 심장을 봉인하려 했던 흔적이라고!”

    리라는 여전히 힘겨워하면서도 간신히 눈을 뜨고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그녀의 비전(秘傳) 지식은 그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봉인… 저 문양은 ‘영원의 속박’의 일부예요! 하지만… 완성되지 않았어…!”

    그림자 형상들이 그들을 에워싸며 다가왔고, 그들의 수는 압도적이었다. 제인은 칼날의 회오리였지만, 그의 공격은 허사였다. 그들은 행동해야 했고,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어떻게 완성하지?!” 카엘이 소리쳤고, 자신의 마법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은빛 칼날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것은 유령들을 해치지 못하겠지만, 현실과의 확실한 연결 고리였다.

    “나도 몰라요! 기록이 없어요! 하지만… 저 심장이 힘을 빨아들이는 방식과 역방향으로 작용할 거예요!” 리라가 목이 쉬어라 비명을 질렀다. “흡수된 에너지를 다시 돌려주는… 혹은… 폭주시키는 방법!”

    카엘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흡수된 에너지를 되돌려주거나… 폭주시키는 방법. 만약 이 생물이 절망과 생명력을 먹고 산다면, 아마도 *다른* 종류의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폭발시키거나, *자신의* 에너지를 과부하시키는 것이 그것을 방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빛나는 푸른 봉인 문양을 바라보고, 다시 고동치는 흑요석을 보았다. 순수한 본능에서 우러나온 필사적인 계획이 그의 마음속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다. 미친 짓이었지만, 그들은 이미 지옥에 있었다.

    “제인! 시간을 벌어줘! 리라! 내가 저 봉인 문양에 내 마력을 쏟아부을 거야! 네가 할 수 있는 대로 그 에너지를 조종해 줘!” 카엘이 포효하며 이미 제인을 지나쳐 흑요석 기둥의 기저부를 향해 돌진했다. 그에게 달려드는 유령 형상들을 무시했다. 하나가 그를 꿰뚫었고, 차갑고 부패하는 감각이 그를 숨 막히게 했지만, 그는 계속 나아갔다.

    “카엘! 위험해!” 리라가 소리쳤지만, 카엘은 이미 그곳에 도착하여 희미한 푸른 봉인 문양에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는 눈을 감고 속삭임과 다가오는 그림자들을 무시하며, 모든 의지와 축적된 마력을 그 한 지점에 집중했다.

    불타는 듯한 고통이 그의 팔을 꿰뚫고 지나갔다. 마치 그의 본질 자체가 폭력적으로 찢겨 나가는 것 같았다. 푸른 봉인 문양은 활활 타오르며 강렬한 빛을 뿜어냈고, 순간적으로 그림자들을 뒤로 밀어냈다.

    “리라! 지금이야!” 그는 힘과 고통으로 목이 쉬어라 외쳤다.

    리라는 공포 속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격렬하게 떨리는 그녀의 손이 공중에서 복잡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고, 카엘이 거의 이해할 수 없는 고대 주문을 읊조렸다. 희미한 은빛이 그녀 주위에 모여들더니 푸른 봉인 문양을 향해 뻗어 나가 카엘의 순수한 마력 방출과 합쳐졌다.

    흑요석 심장이 흔들렸다. 규칙적인 울림은 멈칫하더니, 죽어가는 짐승의 마지막 발작처럼 불규칙적으로 강렬해졌다. 유령 형상들은 멈춰 섰고, 그들의 진홍색 눈은 기둥 바닥에 고정된 채, 그들의 형태는 미친 듯이 깜빡였다.

    순수하고 농축된 공포의 파동이 흑요석에서 뿜어져 나와 그들을 으스러뜨릴 듯했다. 하지만 카엘은 버텼다. 마지막 한 방울의 힘까지 빛나는 봉인 문양에 쏟아부었다. 그는 리라의 집중된 에너지가 자신의 에너지와 얽히고, 정제되고, 어둠의 심장을 향한 집중된 창으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푸른빛이 폭발하며 흑요석 기둥의 기저부를 집어삼켰다. 찰나의 순간, 거대한 검은 단석은 움찔하는 듯 보였고, 고대적이고 고통스러운 비명이 그들의 귀가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그리고 산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흑요석 심장 표면에 거대한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고, 검고 끈적한 액체가 거기서 스며 나오기 시작하며 고대 돌바닥을 김을 내며 녹여 버렸다.

    유령 형상들은 흔들렸고, 그들의 형태는 점점 더 투명해졌으며, 그들의 진홍색 눈은 희미해졌다. 숨 막히는 속삭임은 침묵 속으로 사라졌다.

    방은 침묵에 잠겼다. 완전히, 끔찍하게 침묵에 잠겼다.

    카엘은 쓰러져 숨을 헐떡였고, 그의 몸은 고통과 피로로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마력은 완전히 고갈되었다. 리라는 그 옆에 무릎을 꿇었고, 얼굴은 잿빛이 되었으며 안경은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제인은 여전히 칼을 든 채, 금이 간 흑요석을, 그리고 사라지는 그림자들을 눈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끝난 건가…?” 제인이 속삭였고, 그의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갑작스러운 정적 속에서 크게 울렸다.

    카엘은 이제 금이 간 흑요석 심장을 바라보았다. 푸른빛은 사라졌지만, 벌어진 균열은 남아 있었다. 거대한 상처였다. 검은 액체는 계속 스며 나와 그 기저부에 고였고, 기름지고 무지개 빛을 띠는 번쩍임이 횃불 빛을 반사했다.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참 멀었다.

    균열의 깊은 곳에서 새로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낮고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이어 느리고 묵직한 *쿵-쿵* 소리. 무언가가 상처 입은 흑요석 안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대의 존재, 그저 잠들어 있었을 뿐, 진정으로 비활성 상태가 아니었던 어떤 것이.

    공기는 다시 무거워졌지만, 이번에는 오싹하고 약탈적인 굶주림이 배어 있었다.

    검은 심장은 파괴되지 않았다. 단지 상처를 입었을 뿐이었고, 이제, 그것은 *깨어났다*.

  • 대체 역사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제1장: 스물세 번째 층, 잊힌 기원의 진동**

    지우는 터덜거리는 발걸음으로 현관문을 열었다. 도시의 지친 숨결이 닿지 않는 스물세 번째 층, 이곳은 언제나 그녀만의 안식처였다. 최신식 아파트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고, 거실 통유리 너머로 펼쳐지는 야경은 흡사 보석을 흩뿌려놓은 듯 찬란했다. 길었던 하루의 피로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 그녀는 핸드백을 소파에 툭 던지고는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시원한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고 나니 그제야 살 것 같았다.

    “하아, 역시 집이 최고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거실로 돌아왔을 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분명 소파에 던져두었던 핸드백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어깨끈이 엉망으로 꼬인 채로.

    ‘내가 이렇게 막 던졌었나?’

    지우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피곤해서 그랬겠지, 하고. 핸드백을 다시 소파에 올려놓고 샤워를 위해 욕실로 들어섰다. 따뜻한 물줄기가 온몸을 감싸는 동안, 문득 거실 쪽에서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가벼운 것이 바닥에 떨어진 듯한 소리였다.

    ‘뭐지? 내가 뭘 안 끄고 나왔나?’

    불안한 예감에 샤워를 급히 마치고 물기를 대충 닦아낸 채 거실로 나왔다. 거실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어둠이 짙은 만큼 불확실한 그림자들이 더욱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조심스럽게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환한 불빛이 터져 나왔지만, 동시에 형광등이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두 번 깜빡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기계가 고장 난 듯 광란의 춤을 추는 불빛에 지우는 눈을 찌푸렸다.

    “아, 또 이러네. 입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고장이야?”

    불평하며 램프를 몇 번 두드렸지만, 소용없었다. 이내 불빛은 뚝 끊기며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할 수 없이 스탠드만 켜고 거실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것은 없었다. 시선이 닿는 곳마다 가지런했다. 하지만 뭔가 쎄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그날 밤, 지우는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방금 전의 불빛이며, 떨어졌던 핸드백이며, 모든 것이 신경 쓰였다. 베개를 고쳐 베고 눈을 감으려 애쓰는데, 안방 문이 ‘스으윽’ 하고 미세하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우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방문은 분명 잠그지는 않았지만, 닫혀 있었다. 밖에서 바람이라도 불었나? 하지만 바깥은 고요했다. 창문도 닫혀 있었다.

    ‘잘못 들었겠지. 피곤해서 예민해진 거야.’

    애써 스스로를 진정시키며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잠시 후, 이번엔 거실 쪽에서 ‘툭, 툭’ 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마치 작은 공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면 손가락으로 벽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점점 더 커지는 소리에 지우는 결국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렇게 불편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지우는 눈밑에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은 채였다. 출근 준비를 위해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그녀는 또다시 경악했다. 어젯밤 분명 마시고 닫아두었던 우유가 냉장고 밖에 나와 있었다. 그것도 바닥에 쏟아진 채로. 하얀 우유 얼룩이 마루 위를 점령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지우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이제는 더 이상 ‘피곤해서’, ‘건망증 때문에’라고 변명할 수 없었다. 등골을 타고 오싹한 냉기가 흘렀다. 우유를 닦아내면서도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딘가에서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섬뜩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날 이후, 기이한 일들은 더욱 빈번해졌다. 샤워를 하고 나오면 욕실 거울에 김이 서린 채로 알 수 없는 형상이 그려져 있거나, 출근하기 위해 집을 나서면 잠가두었던 현관문이 다시 활짝 열려 있었다. 거실에 놓인 시계는 매번 다른 시간으로 맞춰져 있었고, 선반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책들은 바닥에 흐트러져 있곤 했다. 그것도 마치 누군가 급하게 훑어본 듯한 모양새로.

    지우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결국 친구들에게 털어놓았다. 친구들은 처음엔 장난치지 말라며 웃었지만, 지우의 심각한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에 이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변했다.

    “혹시 집에 누가 숨어 있는 거 아니야? 신고라도 해봐, 지우야.”

    “아니, 그건 아닐 거야. 내가 아무리 혼자 산다고 해도 보안이 철저한 아파트인데. 그리고… CCTV도 확인해봤는데 아무도 드나든 흔적이 없대.”

    지우는 친구들의 충고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인간의 소행이 아니었다.

    어느 날 저녁, 지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 인물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며칠 밤낮으로 이어진 기이한 현상에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넘기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책장 한편에 놓인 작은 목각 인형에 닿았다.

    그것은 지우가 어릴 적 할머니 댁 다락방에서 발견했던 인형이었다. 제법 오래된 듯 검게 변색된 나무에 새겨진 정교한 무늬와 어딘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표정. 지우는 그 인형이 마치 살아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어릴 적부터 늘 간직해왔었다. 그 인형을 이곳으로 가져온 이후로, 이상한 일들이 시작된 것만 같았다. 설마, 하는 생각에 인형을 응시했다.

    그 순간, 인형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아니, 흔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인형이… 떠올랐다.

    지우는 눈을 비볐다. 잘못 본 것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설득하려 했다. 하지만 인형은 천천히, 그리고 명확하게 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투명한 손에 들린 것처럼 부드럽게 상승했다. 지우의 입에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 같았다.

    목각 인형은 허공에 뜬 채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천히, 지우의 눈앞에서 거실 중앙으로 이동했다. 허공에 매달린 인형은 마치 춤을 추듯 좌우로 흔들리더니, 이내 손짓하는 듯한 형상으로 몸을 움직였다. 인형의 움직임에 맞춰, 선반 위에 있던 작은 화분들이 차례로 바닥에 떨어졌다. 책장의 책들도 저절로 튀어나와 흩어졌다.

    그리고 인형은 마치 지휘자처럼 공중에 멈춰 서서 다른 물건들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화분들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책들도 공중으로 떠올라 다시 책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이전과 같은 순서가 아니었다. 책들은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배치하는 것처럼, 특정한 모양새로 책장 곳곳에 놓였다. 화분들도 거실의 특정 지점에 배치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누군가 의도를 가지고, 무언가를 만들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목각 인형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원래 자리였던 책장 한편으로 돌아가려다, 갑자기 멈칫했다. 그리고는 휙 돌아서서 지우가 앉아 있는 소파 맞은편 벽면을 향해 마치 무언가를 가리키듯 손을 뻗었다. 그리고 거대한 힘에 밀려난 듯,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벽으로 돌진했다.

    “안 돼!”

    지우의 외침이 터져 나오기도 전에, 인형은 벽에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조각조각 부서졌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와중에, 인형이 부딪힌 자리의 벽면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현대식 아파트의 단단한 콘크리트 벽이 균열을 일으키며 안쪽의 무언가를 드러냈다.

    벽 안쪽에 숨겨져 있던 것은 평범한 콘크리트나 배관이 아니었다. 옅은 녹색 빛을 내는, 낡고 오래된 돌판이었다. 그리고 그 돌판 위에는 현대인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마치 복잡한 회로도 같기도 하고, 혹은 고대의 신성한 문자를 연상케 하기도 하는 정교한 문양들이었다. 벽에서 떨어진 파편들이 빛을 받으며 반짝였다.

    그리고 그 돌판의 문양들 사이에서, 아주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 진동은 점차 강해지더니, 이내 벽 전체를 울리는 거대한 ‘웅-‘ 하는 소리로 변했다. 마치 수천 년 묵은 거대한 기계 장치가 깨어나 작동하는 듯한, 낮고 위협적인 굉음이었다.

    거실 전체의 공기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돌판에서 뿜어져 나오는 옅은 녹색 빛은 더욱 선명해졌고, 그 빛 속에서 고대 한국어의 방언인 듯한, 하지만 분명히 인간의 것이 아닌, 여러 목소리가 겹쳐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영맥이… 틀어졌다… 덧없이 흔들리는 기원… 제자리를… 찾아라…”

    지우는 털썩 주저앉았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과 귀를 찢을 듯한 고대의 속삭임. 그녀가 살던 현대 아파트의 스물세 번째 층, 그 안락한 공간이 한순간에 잊힌 역사와 기원의 전장으로 변해버린 듯했다. 그녀의 눈앞에 드러난 것은 단순한 벽이 아니라, 이 도시가 숨겨왔던 거대한 비밀의 일부였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검은 돌멩이

    이른 오후의 햇살이 ‘시간의 흔적’ 골동품 가게의 먼지 낀 유리창을 비집고 들어와, 공중에 부유하는 미세한 입자들을 찬란하게 수놓았다. 지후는 낡은 작업용 앞치마를 대충 동여매고 눅눅한 걸레를 든 채 진열장 사이를 터벅터벅 걸었다. 그의 일은 매일 똑같았다. 물건들을 닦고, 재배치하고, 가끔은 정체불명의 잡동사니들을 정리하는 것. 오늘따라 손님은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고요함 속에서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소리와 천장에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물방울 소리만이 지루한 일상을 긁었다.

    “이봐, 지후. 저 안쪽 창고 구석에 박스 몇 개 치워야 할 거야.”

    뒤편에서 김영감의 텁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영감은 이 가게의 주인이자, 지후의 고단한 아르바이트 생활에 유일하게 말을 거는 사람이었다. 그마저도 대부분은 잔소리거나 지시였다.

    “또요? 지난주에 다 치웠는데요.”

    지후가 투덜거렸지만, 김영감은 이미 신문 속으로 고개를 박은 채였다. 지후는 한숨을 쉬며 랜턴을 챙겨들었다. 창고는 가게보다 훨씬 더 깊은 먼지와 곰팡이 냄새로 가득한 곳이었다. 빛 한 점 없는 곳, 발이 닿는 곳마다 미지의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랜턴 불빛이 닿는 곳마다 희한한 모양의 도자기, 빛바랜 액자, 이빨 빠진 목각 인형들이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창고 가장 안쪽, 거미줄이 자욱한 구석에 정말로 낡은 나무 상자 몇 개가 웅크리고 있었다. 상자는 한눈에 봐도 오랫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듯했다. 뚜껑을 열자, 시큼하고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정체를 알 수 없는 온갖 잡동사니들이 쏟아져 나왔다. 깨진 조각상, 녹슨 철제 도구, 너덜너덜한 종이 뭉치들. 지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내용물을 뒤적였다. 이걸 언제 다 분류한단 말인가.

    손을 뻗어 제일 먼저 잡힌 건, 흙이 잔뜩 묻어 검게 변색된 조약돌 같은 물건이었다. 겉모습은 평범한 돌멩이와 다를 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손에 쥐자마자 싸늘한 냉기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지후는 호기심에 돌멩이의 흙을 털어냈다.

    그러자 드러난 것은, 생각보다 훨씬 매끄러운 표면의 검은 돌이었다. 크기는 어른 주먹만 했고, 아무런 장식도 무늬도 없었다. 그저 새까만, 흡사 심연을 품은 듯한 색깔의 돌덩이였다.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미묘하게 다른 감각이 지후의 손끝을 자극했다. 너무나 매끄러워서 도리어 칼날처럼 예리하게 느껴지는 그런 감각.

    “이게 뭐야, 그냥 돌멩이잖아?”

    지후는 중얼거렸다. 보물찾기라도 할 줄 알았는데, 고작 돌멩이라니. 그는 무심코 엄지손가락으로 돌멩이의 한 부분을 강하게 문질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순간이었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돌멩이의 검은 표면에 가느다란 균열이 생겼다. 지후는 깜짝 놀라 손을 놓을 뻔했지만, 돌멩이는 신기하게도 부서지지 않고 손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균열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순식간에 돌멩이 전체로 퍼져나갔고, 이내 그 틈새로 눈부신 푸른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빛에 눈을 가늘게 뜬 지후의 망막에는, 푸른빛 속에서 희미하게 비치는 낯선 형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고대의 문자들 같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상징들 같기도 했다. 동시에 차가웠던 돌멩이에서 믿을 수 없는 열기가 솟구쳐 올랐다.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아니, 단순한 열기가 아니었다. 온몸의 신경망을 따라 흐르는, 전에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거대한 에너지의 파동이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리고, 머릿속은 알 수 없는 이미지와 소리로 가득 찼다.

    마치 아주 오래된 기억들이 깨어나듯, 잊혔던 문들이 활짝 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으윽!”

    지후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돌멩이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돌멩이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부딪히며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쪽으로 갈라졌다. 푸른빛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는 이제 더 이상 검은 조약돌이 아니었다. 깨진 단면에서는 검은색이 아닌, 심연의 푸른색을 띠는 작은 수정 조각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정의 중심부에는, 마치 잠든 눈동자처럼 미세하게 빛나는 점이 박혀 있었다.

    지후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손바닥에는 균열이 생겼던 자리 그대로 길고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깨진 돌멩이의 한 조각을 주워 들었다. 차가움과 뜨거움, 푸른빛과 알 수 없는 형상들, 그리고 온몸을 휘감았던 거대한 에너지. 꿈이었을까? 환각이었을까?

    “…설마.”

    그때였다. 창고 저편, 수십 년 동안 묵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고정되어 있던 녹슨 쇠붙이가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아주 미세하게 옆으로 움직였다. 처음에는 바람 탓인가 싶었지만, 창고 안은 지독하게 고요했다. 아무런 바람도 불지 않았다.

    지후는 숨을 들이켰다. 그의 눈은 쇠붙이의 움직임에서 깨진 돌멩이, 그리고 다시 자신의 손바닥으로 향했다. 붉게 달아오른 손바닥에서 아직도 미약한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뭘 한 거지?”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손에 든 검은 돌멩이 조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그저 지루하고 반복되던 그의 일상에,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이 생겨난 순간이었다. 마치 세상의 굳건한 벽에 작지만 깊은 금이 간 것처럼. 그리고 그 틈새로, 아주 오래전부터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속삭이는 듯했다.

    이것은 시작일까? 아니면 그저 하찮은 사고일 뿐일까? 지후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삶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감이었다. 깨진 돌멩이 조각이 그의 손 안에서 어둠 속을 헤매던 희미한 등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 대체 역사물 독립적인 단편 소설

    지훈은 17층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밤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 고층 빌딩들의 불빛이 무수한 별처럼 박혀 있었고, 강변 도로는 끊임없이 흐르는 차들의 꼬리 등 불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30평대 아파트는 전형적인 도시의 삶을 품고 있었다. 조용하고, 평범하고, 안전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랬다.

    새벽 두 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지훈은 쨍그랑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거실 바닥에는 유리컵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물컵이었다.
    “뭐지?”
    지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바람? 설마.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혹시 지진인가 싶었지만, 흔들림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치우며 그는 단순히 피곤해서 잠결에 착각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음 날 오후, 점심 식사를 준비하던 지훈은 냉장고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제 밤에 잠그는 것을 깜빡했나?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다. 희미하게 파란 불꽃이 솟아올랐다. 그 순간, 지훈의 뒤편, 거실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쿵!
    지훈은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거실로 달려갔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떨어져 있었다. 그의 부모님 결혼사진이었다. 액자 유리에는 실금이 가 있었다.
    “젠장…”
    이건 좀 이상했다. 액자는 분명히 단단히 걸려 있었다. 못이 빠진 흔적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툭,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다. 지훈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아파트는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소음이 아득하게 들려왔지만, 실내에는 그 어떤 인기척도 없었다.

    그날 밤부터 기이한 일들이 걷잡을 수 없이 시작되었다.
    책상 위에 놓아둔 펜이 저절로 굴러떨어지고, 자려고 불을 끄면 스탠드 조명이 깜빡이며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물을 마시려 냉장고 문을 열자, 냉장고 안의 음료수 캔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지훈은 이제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우연이나 착각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그는 텅 빈 아파트 안에서 소리쳤다. 목소리가 맴돌다 사라졌다. 그 소리에 응답하듯, 부엌 찬장에서 접시가 스르륵 밀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용기를 내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찬장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접시가 밀려나는 소리였다. 마치 좁은 틈새로 무언가가 비집고 나오려는 듯.
    그는 찬장 문고리를 잡으려 했지만, 손이 닿기 직전 찬장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안에 있던 접시들이 균형을 잃고 쏟아져 내렸다. 지훈은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접시들은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흩어졌다.

    밤이 깊어질수록 현상은 더욱 노골적이고 섬뜩해졌다.
    새벽 세 시. 지훈은 간신히 잠이 들었지만, 곧 몸이 붕 뜨는 듯한 기분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천장은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침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섬뜩한 냉기. 마치 누군가 침대 바로 옆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아무것도 아니기를. 하지만 그 순간, 그의 귀에 끔찍하게도 선명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니야… 여기가… 아니야…”
    낮고 쉰 목소리.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어딘가 왜곡되어 있었다. 지훈은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마비된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침대의 떨림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속삭임은 더욱 또렷해졌다.
    “—틀렸어… 모든 게… 달라…!”

    다음 날 아침, 지훈은 거의 밤을 새운 채 파리해진 얼굴로 거실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정체불명의 동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낡고 푸르게 녹슨 동전은 생전 처음 보는 문양으로 가득했다. 앞면에는 용처럼 보이는 거대한 짐승이 휘감겨 있었고, 뒷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건물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현대 대한민국의 주화와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그는 인터넷을 검색해봤지만, 그 동전과 일치하는 어떤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동전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거울은 김이 서려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손으로 김을 닦으려는데, 그 전에 누군가 먼저 다녀간 듯 거울 한가운데에 글자가 쓰여 있었다.
    “…틈새…”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글씨는 그의 필체가 아니었다. 마치 뾰족한 손가락으로 거울을 긁은 듯, 날카롭고 섬뜩했다.
    지훈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틈새? 무엇의 틈새?
    그 순간, 거울 속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뒤편의 욕실 벽에 걸린 수건걸이가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 수건걸이 뒤로, 아주 짧은 찰나, 흐릿한 도시의 풍경이 비쳤다. 지금 그의 아파트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와는 미묘하게 다른 풍경. 마천루의 형태가 조금 달랐고, 길을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마치 다른 시대, 다른 차원의 도시가 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듯했다.

    지훈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거울 속 풍경은 다시 평범한 욕실 벽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건… 환각이야. 지쳤어. 미쳤나 봐.”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더 이상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밤이 되자, 아파트의 모든 가전제품이 발작을 시작했다. TV는 저절로 켜져 알 수 없는 언어로 된 뉴스 방송을 내보냈다. 화면 속 아나운서는 기괴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뒤편의 배경은 그가 거울에서 봤던 미묘하게 다른 도시 풍경이었다. 냉장고는 굉음을 내며 문을 활짝 열어젖혔고, 오븐은 저절로 최고 온도로 가열되기 시작했다.

    “여기가… 아니야…”
    침실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그곳에서 다시 한번 그 섬뜩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또렷했다.
    “이곳은… 우리가 살던 곳이 아니야…”
    지훈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온몸이 마비되는 공포. 그 속삭임이 침실 문을 넘어 거실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 속삭임이 *그의 아파트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의 유리컵이 저절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들린 것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탁자에서 방금 전에 본 낡은 동전과 똑같은 동전들이 수십 개씩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전들은 테이블 위, 바닥 위로 흩어졌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를 찢었다.
    “…갈 곳이… 없어… 우리는… 갈 곳이… 없어…”
    속삭임은 더 이상 한두 문장이 아니었다. 마치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듯, 불협화음의 합창처럼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테이블 위에 떠 있던 유리컵이 이제는 흔들거리며 지훈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쨍그랑!
    유리컵은 그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쳐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지훈은 비명을 질렀다.
    그때, 눈을 떴다.
    거실 한가운데, 테이블이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테이블도, 흩뿌려진 동전들도, 깨진 유리 조각들도.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훈은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파트는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TV는 꺼져 있었고, 오븐도 꺼져 있었다. 냉장고 문은 닫혀 있었다.
    마치 그가 겪었던 모든 일이 거대한 악몽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의 온몸에 돋아난 소름, 심장을 찢어놓을 것 같은 공포는 생생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벽에 기댄 채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거실 창밖을 내다봤다.

    창밖의 도시 풍경은 평소와 같았다. 수많은 빌딩들의 불빛, 강변 도로를 흐르는 차량의 붉은 꼬리 등.
    아니.
    아주 미묘하게, 달랐다.
    저기, 저 멀리 보이는 빌딩의 꼭대기. 분명 어제까지는 뾰족한 첨탑이었는데, 지금은 돔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강 건너편의 대형 전광판. 분명히 익숙한 로고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가 처음 보는, 알 수 없는 상형문자 같은 문양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그의 아파트가, 아주 서서히, 다른 현실 속으로 표류하고 있는 것처럼.

    지훈은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 옆, 유리창 한 귀퉁이에 아주 작게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
    누군가 쓴 것 같지도 않고, 새겨진 것 같지도 않은, 마치 유리의 성분 자체가 변형된 듯한 섬뜩한 글자.
    “…환영해…”
    그 글자가 그의 눈에 선명하게 박히는 순간, 밖에서 들려오던 도시의 모든 소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아파트 전체를 감싸는 절대적인 정적.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지훈은 문득 깨달았다.
    속삭임이, 더 이상 귀가 아닌 그의 심장 속에서 울리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이제 공포가 아닌, 거부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의 초대였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처음부터 ‘이곳’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창밖의, 이제는 완전히 낯선 도시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닫혀 있던 현관문이 삐걱, 하고 아주 느리게 열렸다.
    텅 빈 아파트에서, 그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느꼈다.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문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새로운 세상의 문이, 활짝 열린 채.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무한의 정적이 드리운 심우주, 인류의 손길이 닿지 않던 미지의 영역을 탐사하는 우주선 ‘혜성호’의 함교에는 늘 옅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함장 이지혁은 유리 너머로 펼쳐진 별들의 강을 응시하며 묵묵히 데이터를 확인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언제나 유쾌하지만 탐사 앞에서는 누구보다 진지해지는 수석 과학자 김민아가 띄엄띄엄 흘러나오는 센서 값을 살피고 있었다.

    “함장님, 이상 신호입니다.”

    김민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한 옥타브 높아졌다. 이지혁이 고개를 돌렸다. 스크린에는 희미한 점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거리, 특이점, 에너지 파장.”

    “측정 불능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접촉했던 어떤 물질의 스펙트럼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완벽하게, 완벽하게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고 있어요.”

    이지혁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그는 항해사 박서준에게 시선을 주었다. 박서준은 숙련된 솜씨로 조이스틱을 움직였다.

    “현재 속도로는 13시간 후 접근 가능합니다. 비행 경로에 방해물은 없습니다.”

    “진로 유지. 모든 센서와 탐지 장치를 최대로 가동시켜.” 이지혁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리고 각 대원들에게 상황 전파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보안 레벨 3으로 격상시켜.”

    13시간은 길고도 짧았다. 혜성호는 광활한 어둠 속을 헤치며 미지의 존재에게 다가갔다. 시간이 흐를수록 스크린 속의 점은 점점 더 선명한 윤곽을 드러냈다. 거대한 오벨리스크였다. 우주를 부유하는 검은 바위처럼 보였지만, 그 표면은 어떤 인공적인 가공물보다 매끄럽고 완벽한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빛을 머금지 않고,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듯한 칠흑 같은 색이었다.

    “이건…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완벽한 인공물이에요. 믿을 수가 없군요. 이런 것을 만들 수 있는 문명이 존재했다니.” 김민아의 눈은 경외와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생명 반응은?” 이지혁이 물었다.

    “전혀 없습니다. 마치 죽어 있는 것처럼… 차갑고 고요합니다.”

    혜성호는 오벨리스크로부터 1km 지점에 멈춰 섰다. 그 거대한 존재감에 압도되어 모두가 침묵했다. 이지혁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어깨에 멘 휴대용 통신기를 들었다.

    “탐사조 편성. 나와 김민아 박사, 그리고 박서준 항해사. 나머지 대원들은 혜성호에서 대기하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다. 최유진 통신장교는 함교에서 모든 교신 채널을 열어놔라.”

    소형 탐사선 ‘갈매기호’가 혜성호의 격납고를 빠져나왔다. 오벨리스크에 가까워질수록 그 규모는 더욱 경이롭게 다가왔다. 표면에는 아무런 문양도, 글자도 없었다. 완벽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접근 완료. 착륙 지점 탐색 중… 젠장, 아무것도 없어.” 박서준이 갈매기호를 오벨리스크 표면으로부터 수십 미터 띄운 채 투덜거렸다. “완벽한 매끈함입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 같아요.”

    “잠깐.” 김민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기… 균열 같은데? 자연스러운 균열은 아닌 것 같아요. 마치… 문처럼.”

    오벨리스크의 한 면에 희미하게 드러난 틈새가 있었다. 아주 얇아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별하기 힘들 정도였다. 박서준이 갈매기호를 조심스럽게 그 틈새로 유도했다. 갈매기호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아무런 마찰 없이 미끄러져 들어갔다.

    내부는 더욱 기괴했다. 사방이 칠흑 같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지만, 갈매기호의 조명등이 닿자 벽면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반사되었다. 공기는 차갑고 정적이었다. 아무런 장치도, 인공적인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길고 어두운 통로만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이지혁 함장, 내부 환경 분석 결과입니다. 산소와 유사한 기체가 감지됩니다. 유해 성분은 없습니다. 하지만 중력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김민아의 목소리가 들떴다.

    “무슨 문명인지도 모르는 곳이다. 경계 늦추지 마.” 이지혁이 경고했다.

    통로를 따라 한참을 나아가자, 홀연히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 중앙에는 기이한 형태의 물질이 공중에 떠 있었다. 완벽한 구형, 하지만 빛을 흡수하면서도 은은한 붉은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불규칙하게,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맥동했다.

    “저것이… 유물일 겁니다.” 김민아는 자기도 모르게 무중력 상태에서 몸을 띄워 그 구형 물질로 다가갔다. 이지혁이 황급히 그녀를 불러세웠다.

    “김민아 박사! 함부로 접근하지 마!”

    하지만 김민아는 이미 매료된 듯 구형 물질에 손을 뻗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일렁였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구형 물질은 붉은빛을 강렬하게 뿜어내며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동시에 김민아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녀의 눈이 뒤집히고, 입에서는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김민아!” 이지혁이 다급하게 외치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붉은빛이 구형 물질에서 뿜어져 나와 김민아의 몸을 감쌌고, 이내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부터 시커먼 정맥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마치 피부 아래로 수많은 벌레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녀의 비명은 고통과 함께 점차 기괴한 울음소리로 변해갔다.

    “젠장, 김민아! 정신 차려!” 박서준이 권총을 빼 들었지만, 쏠 수가 없었다.

    김민아의 몸은 삽시간에 뒤틀렸다. 피부는 잿빛으로 변하고, 눈동자는 흰자위가 사라진 검은 구슬처럼 변했다. 입은 찢어져 기괴한 미소를 띠었고, 손톱은 길고 날카롭게 변했다. 끔찍한 괴물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는 기괴하게 뒤틀린 목으로 이지혁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더 이상 김민아 박사의 지적인 빛은 없었다. 오직 광기 어린 굶주림만이 번뜩였다.

    “크르륵….”

    낮고 거친 소리가 그녀의 목에서 터져 나왔다. 김민아는 짐승처럼 달려들었고, 이지혁은 간신히 몸을 피했다. 박서준이 총을 발사했지만, 탄환은 괴물의 잿빛 피부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괴물은 갈매기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돌아와! 즉시 혜성호로 귀환한다!” 이지혁은 절규하며 소리쳤다.

    간신히 갈매기호에 몸을 실은 이지혁과 박서준은 전속력으로 오벨리스크를 빠져나왔다. 뒤에서는 김민아였던 괴물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쫓아오는 듯했다.

    혜성호로 돌아온 것은 겨우 한 시간 뒤였다. 격납고에 착륙하자마자 이지혁은 최유진 통신장교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격리! 김민아 박사는 미지의 감염체에 노출되었다! 즉시 의무실로 이동시킨 후 격리 조치하라!”

    하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김민아는 혜성호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 소리를 내며 격납고 벽을 긁어대고 있었다. 혜성호의 의료진이 다가오려는 순간, 그녀의 몸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크게 뒤틀리더니, 끔찍한 괴물로 완전히 변해버렸다.

    “크아아아악!”

    괴물은 의료진에게 달려들었고, 순식간에 두 명의 대원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들의 비명 소리가 격납고에 울려 퍼졌다. 괴물은 살을 찢어발기는 잔혹한 움직임으로 그들을 물어뜯었다. 검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쓰러진 대원들의 몸에도 잿빛 반점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격납고 폐쇄! 모든 인원 격리하라!” 이지혁이 광란 속에서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통신장교 최유진의 다급한 목소리가 함교에서 들려왔다.

    “함장님! 의료실에서 비상 경보가 울립니다! 보안팀이 진입했지만…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혜성호는 순식간에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변했다. 괴물로 변한 김민아에게 물어뜯긴 대원들도 곧이어 끔찍한 생명체로 변해갔다. 그들은 이전의 인간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굶주린 눈으로 다른 대원들을 쫓았다. 혜성호의 복도는 비명과 울음소리, 그리고 살을 찢는 소리로 가득 찼다. 비상등이 깜빡이는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괴물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이지혁은 박서준과 함께 겨우 함교로 대피했다. 최유진은 이미 창백한 얼굴로 비상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함장님, 외부 통신이 먹통입니다. 감염체가 제어실을 장악한 것 같습니다.”

    “탈출정은?”

    “동력 시스템이 불안정합니다. 지금으로선 가동 불가합니다!”

    함교의 문이 거칠게 두들겨졌다. 쿵, 쿵, 쿵. 마치 거대한 망치로 내리치는 듯한 소리였다. 금속이 휘어지는 소리와 함께 문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은 인간의 것이라 할 수 없는 끔찍한 울부짖음과 긁어대는 소리였다.

    “젠장, 이건 끝이다.” 박서준이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저것들… 너무 빠르고, 너무 강해.”

    이지혁은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혜성호의 각 구역에서 감염 경보가 붉은색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생체 반응은 급감하고, 괴물들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들의 심우주 탐사는 인류가 존재해서는 안 될 곳에 발을 들여놓은 결과였다.

    “혜성호… 혜성호는 인류의 희망이었다….” 최유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직 포기하지 마!” 이지혁이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절망이 배어 있었다. “통신 모듈을 수동으로 연결해 봐! 구조 요청을 보내야 해! 혹시라도… 혹시라도 누군가 들을 수 있다면!”

    최유진은 떨리는 손으로 패널의 덮개를 열고 복잡한 회로들을 더듬었다. 혜성호의 문이 더욱 격렬하게 흔들리더니, 거대한 굉음과 함께 안쪽으로 움푹 들어갔다. 그 균열 사이로 핏발 선 검은 눈이 번뜩였다. 김민아였다. 아니, 김민아였던 끔찍한 괴물이었다.

    “크르르릉….”

    함교 안은 차가운 침묵과 함께 공포로 얼어붙었다. 혜성호는 이제 망자의 배가 되었다. 인류는 우주의 깊은 어둠 속에서, 자신들이 깨우지 말아야 할 재앙을 깨워 버린 것이다. 오벨리스크의 검은 심장이 심우주의 고요 속에 영원히 맥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혜성호는 그 심장의 불길한 메아리를 싣고 미지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우주의 끝에서, 인류의 비명은 너무나도 작았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한지혁은 젖어 있는 나뭇잎의 싸늘한 감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이아리의 손을 그러쥐었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그녀의 미약한 떨림이 심장을 칼날로 훑는 듯했다. 고요한 숲은 숨조차 쉬지 않는 듯 침묵했고, 오직 바람만이 잎사귀 사이를 스치며 불길한 속삭임을 이어갈 뿐이었다.

    “지혁아…”

    이아리의 목소리가 희미한 바람결에 실려 왔다. 언제나 깊은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던 그녀의 눈동자는 지금, 핏기 없는 새벽하늘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의 가슴속에 차오르는 불안감은 곧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질 광경을 예고하고 있었다.

    “괜찮아, 아리야. 내가 있잖아.”

    지혁은 힘주어 말했지만, 그의 심장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공포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는 현재의 인물이 아니었다. 아득한 미래에서 시간을 거슬러 온 이방인. 그리고 아리는, 이 세상의 태초부터 존재했던 숲의 정령이자, 천 년의 세월을 견딘 구미호였다. 인간과 정령. 결코 이어질 수 없는 두 종족의 만남은, 이 고대 숲의 모든 질서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들의 사랑이 발각된 것은 불과 며칠 전이었다. 숲의 모든 균형을 수호하는 존재들, 즉 백 년에 한 번씩 열리는 ‘화합의 의식’을 통해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수호신들이 그들의 금기를 알아챘다. 숲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던 고대의 경고음은 그들을 향한 것이었다.

    “아니… 내가 널 위험하게 만들었어.” 아리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내 본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너의 세상에 마음을 열어버린 벌이야.”

    그녀는 제 몸을 휘감은 얇은 비단옷 위로 희미하게 비치는 아홉 개의 꼬리 자국을 가리키듯 손을 들어 올렸다. 숲의 정령 중에서도 강력한 힘을 지닌 구미호는 본래 인간의 모습을 완벽히 취할 수 있지만, 감정의 동요가 극에 달하면 본연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혁을 향한 그녀의 사랑은, 그 감정의 가장 강력한 근원이었다.

    갑자기, 숲의 저 깊은 곳에서 희미한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빛줄기가 안개 낀 새벽 숲을 가르며 다가오는 모습은 마치 유령들의 행진과도 같았다. 저 빛은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숲의 수호자들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아리야. 어서 도망쳐야 해!” 지혁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채며 외쳤다.

    “어딜… 도망쳐, 지혁아. 이 숲은 내 전부이자, 내 감옥이야.” 아리의 눈에 체념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숲은 나를 품었지만, 동시에 나를 속박하고 있어. 나는 이 숲을 떠날 수 없어. 너와 함께라면 더더욱.”

    그녀의 말은 뼈아픈 진실이었다. 아리는 이 숲의 정령이었고, 숲은 그녀의 생명줄이었다. 지혁과 함께 숲을 벗어나려 할 때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장벽이 그들의 길을 막아섰다. 과거의 시대에서 온 인간과 숲의 정령 사이의 사랑은, 이 세계의 질서에 존재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 모순이었다.

    점점 더 가까워지는 빛줄기 사이로, 거대한 형상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우거진 나무와 하나 된 듯한 피부를 가진 ‘목령(木靈)’, 거친 바위와 같은 ‘석령(石靈)’, 그리고 가장 앞에 선 존재는, 은빛 갈기를 휘날리는 거대한 백록(白鹿)의 모습이었다. 숲의 균형을 수호하는 최고 정령, ‘숲의 어르신’이었다.

    백록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별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만으로 숲의 모든 기운이 눌리는 듯했다. 지혁은 아리의 몸이 점차 투명해지는 것을 느꼈다. 숲의 기운과 동화되려는 그녀의 본능적인 방어 기제였다.

    “이아리!” 지혁은 다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날 봐! 투명해지지 마! 내가 여기 있잖아!”

    아리의 희미한 시선이 지혁에게 닿았다.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물방울이 맺혔다. “지혁아… 너마저 위험해져. 내 곁을 떠나야 해.”

    “말도 안 돼! 널 두고 내가 어떻게!” 지혁은 절규했다. 그는 아리를 잃는다면, 설령 자신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 한들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었다. 그는 시간을 뛰어넘어 이 곳에 온 이유가, 어쩌면 아리를 만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백록의 차가운 목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언어가 아니었지만, 그 의미는 모든 존재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전달되었다.
    *「인간이여, 너는 이 숲의 질서를 어지럽혔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이아리, 너 또한 너의 운명을 거스른 죄를 물을 것이다.」*

    지혁은 무릎을 꿇고 백록을 향해 소리쳤다. “제발! 저희를 갈라놓지 마십시오! 아리는 아무 죄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저의 잘못입니다!”

    백록의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했다.
    *「인간의 감정은 덧없고, 그 생명은 유한하다. 허나 이아리는 영원한 숲의 일부이니, 어찌 덧없는 존재에게 영원을 맡길 수 있겠느냐.」*

    “영원하지 않더라도… 단 한 순간이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지혁은 피가 터져라 입술을 깨물었다. “저희를 갈라놓는다면, 아리는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게 정말 이 숲의 질서입니까?!”

    숲의 어르신을 둘러싼 정령들이 술렁거렸다. 인간의 이런 격정적인 감정은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오직 숲의 균형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그때, 아리가 희미한 몸으로 지혁의 앞에 나섰다. 그녀의 눈빛은 비록 창백했지만, 이전과는 다른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지혁아… 나를 잊어줘.”

    “무슨 소리야?!”

    “나는 너와 함께할 수 없어. 이 숲을 떠날 수도 없고… 너를 이 숲에 묶어둘 수도 없어.” 아리의 손이 지혁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은 지혁의 심장을 뜨겁게 만들었다. “네가 여기 있는 한, 너는 계속 위험에 처할 거야. 그리고… 나는 그 고통을 볼 수 없어.”

    백록의 머리 위에서 빛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숲의 정령들이 그녀를 향해 힘을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아리의 몸이 점차 더 투명해지며, 마치 안개처럼 사라지려는 듯했다.

    “안 돼! 아리야!” 지혁은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이미 허공을 헤맬 뿐이었다. 아리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져 갔다.

    “숲의 어르신께 간청드립니다!” 아리의 목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단호함이 깃들어 있었다. “저의 죄는 저의 연모 때문이니, 벌을 내리신다면 저 혼자 감당하겠습니다. 허나 저 인간에게는… 아무런 해도 가하지 마십시오.”

    백록의 차가운 시선이 지혁에게로 향했다.
    *「이아리, 너의 죄는 너의 존재를 위협할 만큼 중하다. 네가 그 인간을 놓아준다면, 그는 무사히 그의 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듣자 지혁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를 살려두는 대가로 아리가 어떤 벌을 받게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리의 희미한 미소가 지혁에게로 향했다. 그 미소는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동시에 깊은 사랑이 담겨 있었다.

    “지혁아… 나의 세상에서… 영원히… 너를…”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숲의 어르신으로부터 강력한 빛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빛은 아리의 몸을 통과했고, 그녀의 형체는 순식간에 눈앞에서 흩어져 버렸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숲의 안개 속으로 스며들었다.

    “아리야!!!!!” 지혁의 절규가 숲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그의 눈앞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차가운 숲의 정적만이 그를 감쌌을 뿐이었다. 숲의 정령들은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백록의 눈빛이 빛나며 마지막 메시지를 전했다.
    *「인간이여, 너의 세상으로 돌아갈 때다. 이 숲은 너의 존재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지혁의 발밑에서 알 수 없는 힘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숲 전체가 그를 밀어내는 듯한 강렬한 압박감이었다. 그의 시야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가 아리를 향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그녀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아리… 아리!!!”

    몸이 점차 공중으로 떠오르는 듯한 감각. 숲의 어르신과 정령들의 모습이 흐릿해지고, 그는 알 수 없는 시공간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그의 뇌리에 박힌 것은, 숲의 안개 속에서 아리의 잔상이 스치듯 사라지던 모습이었다.

    그는 그렇게, 그녀가 사라진 숲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하지만 지혁은 알고 있었다.
    그의 심장에는, 영원히 그녀의 이름이 새겨질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는, 반드시 아리를 다시 찾아낼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설령, 다시 한번 모든 질서를 거스르는 한이 있더라도.

  • 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피어나는 독초의 왈츠 (The Waltz of Blooming Poison)

    짙은 루비색 드레스 자락이 무심하게 바닥에 흩어졌다. 거울 속 여인은 완벽했다. 섬세하게 올라간 눈꼬리, 아치형으로 그려진 눈썹 아래로 형형한 빛을 뿜어내는 눈동자, 그리고 붉은 독을 머금은 듯 도발적인 입술. 강지우는 제 모습을 낯선 이라도 되는 양 훑어봤다. 1년 전, 폐허 속에 홀로 버려졌던 과거의 자신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이제 겨우 시작이야.”

    작게 읊조린 목소리는 매끄러운 비단처럼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강철이 감춰져 있었다. 오늘 밤, 그 피와 땀으로 일궈냈던 모든 것을 가로채 간 배신자와 다시 조우하는 날이다. 심장이 뜨거워졌다. 복수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미친 듯이 솟아오르는 전율이 몸을 휘감았다.

    고급 리무진에서 내리자마자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에 그녀는 가볍게 눈을 가늘게 떴다. 웅장한 연회장 입구는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소리, 경박한 웃음소리, 온갖 가식적인 찬사가 뒤섞여 공기를 가득 채웠다. 지우는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무대는, 지금부터였다.

    등 뒤로 묵직한 문이 닫히고, 드레스 자락이 바닥을 스치며 우아한 소리를 냈다. 시선이 집중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지우는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연회장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중앙에 마련된 시상대. 그리고 그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

    혜진이었다.

    지우의 심장이 싸늘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혜진은 그 빛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완벽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마치 그 모든 영광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것처럼. 역겹게도. 지우의 발걸음은 혜진을 향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들을 갈라놓았던 과거의 간극을 좁혀나가면서.

    “혜진아, 수상 정말 축하해. 대단하다, 정말.”

    지우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친근하고 다정해서,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혜진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미소가 굳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당황스러움과 경계심이 스쳤지만, 이내 능숙하게 감췄다.

    “지우? 네가 어떻게… 아니, 오랜만이네.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잖아.”

    혜진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지우를 껴안는 시늉을 했다. 지우는 그 얄팍한 포옹을 자연스럽게 받아냈다. 그리고 혜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놀라긴. 앞으로 더 자주 보게 될 텐데. 내가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데.”

    혜진의 몸이 미세하게 굳었다. 그녀는 지우에게서 떨어져서 다시금 환한 미소를 가장했다.

    “그랬구나. 어쩐지 네가 보고 싶더라니. 연락이라도 주지 그랬어.”

    “연락? 글쎄. 내가 사라졌을 때, 네가 나를 찾아 나설 줄 알았는데 말이야.”

    지우의 눈빛이 스쳐 지나가듯 차갑게 빛났다. 혜진은 그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그때, 묵직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혜진 씨, 이쪽은 누구신가요?”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지우는 고개를 돌렸다. 훤칠한 키, 시선을 압도하는 존재감.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듯한 날카로운 눈매. 강태준이었다. 사업 파트너로 몇 번 스치듯 만났던, 그러나 지우의 레이더에 잡혔던 적은 없던 남자. 이제는 혜진의 성공 뒤에 자리한 그림자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혜진은 얼른 표정을 정돈하고, 강태준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 태준 씨. 이쪽은 제 옛 친구, 강지우예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오랜만에 나타났네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라니. 기가 막혔다. ‘추락해서 바닥을 기다가’라고 정정해주고 싶었다. 지우는 빙긋 웃으며 강태준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강지우라고 합니다. 혜진이에게 제 이야기는 많이 들으셨겠죠. 워낙 입이 가벼워서.”

    혜진의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강태준은 지우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솔직하고도 날카로운 말에 흥미롭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단단했다.

    “강태준입니다. 지우 씨 이야기는… 뭐, 여러 가지 경로로 들었습니다만, 직접 뵙는 건 처음이네요. 생각보다… 강렬하군요.”

    그의 시선이 지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평가하는 듯했지만, 그보다는 순수한 호기심에 가까웠다.

    “강렬하다니요. 그냥 무난한 사람인데.”

    지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의 손을 놓았다. 혜진은 그들의 대화가 길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끼어들었다.

    “태준 씨, 저쪽에 중요한 손님이 기다리고 계세요. 지우, 우리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하자.”

    혜진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강태준은 시선을 지우에게서 떼지 않았다.

    “아, 그렇군요. 하지만 지우 씨와는 좀 더 대화를 나눠보고 싶어지네요.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될 기회가 있을까요?”

    그의 말은 능글맞으면서도 도전적이었다. 지우는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운명이 장난을 좋아한다면요.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되겠죠.”

    지우는 강태준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혜진을 향해서는 다시금 차갑게 가라앉은 시선을 던졌다.

    “그럼 혜진아, 오늘 즐거운 밤 보내. 앞으로 네 삶이 훨씬 더 ‘즐거워질’ 테니까.”

    지우는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군중 속으로 유유히 사라졌다. 혜진은 얼어붙은 표정으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고, 강태준은 그 모든 상황을 흥미진진하다는 듯 지켜봤다.

    지우는 연회장 한쪽 구석에 마련된 테라스로 나와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켰다.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의 귓가에는 혜진의 당황한 목소리, 그리고 강태준의 능글맞은 시선이 맴돌았다.

    ‘이제 겨우 시작이야, 혜진아.’

    그녀의 입술이 비릿한 미소를 그렸다. 이젠 더 이상 추락할 바닥은 없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은 복수의 칼날. 그리고 그 칼날은, 이제 막 피어나는 독초처럼 아름답고 치명적일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