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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페이스 오페라 독립적인 단편 소설

    성운 마법 학원의 첨탑은 별빛 아래, 은하계의 수많은 항성 궤적을 뚫고 솟아 있었다. 갤럭시아 행성 최상층 대기권에 자리 잡은 이곳은 크리스탈과 에너지 수정으로 지어진 건물들이 거대한 우주 함대처럼 정렬해, 그 자체로 우주를 유영하는 환상적인 장관을 연출했다. 은하계 최고 엘리트들이 마법과 첨단 기술을 배우는 곳. 그러나 카이에게 이곳은 답답한 감옥과 다름없었다.

    “카이! 또 지각이야?”

    세라가 홀로그램 시계탑을 보며 혀를 찼다.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은 공중에 떠 있는 마법 공학 홀로그램 교재의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녀는 언제나 완벽했다. 빛나는 성적, 교수의 총애, 그리고 지독하리만치 철저한 규칙 준수.

    “미안, 세라. 새벽까지 ‘금지된 고대 마법의 잔재와 차원 간 융합에 대한 탐구’라는 엉터리 과제를 했더니.” 카이가 너스레를 떨었다.

    세라가 눈을 흘겼다. “그 엉터리 과제 때문에 벌써 이번 학기 다섯 번째 경고잖아. 이러다 졸업은커녕 퇴학당한다고! 진지하게 생각해!”

    하지만 카이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마법이라는 것이 단순히 교과서에 적힌 주문과 공식, 그리고 최신 에너지 공학의 결합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진짜 힘은, 진짜 비밀은, 늘 숨겨져 있는 법이었다. 특히 이 오래된 행성의 깊은 곳에 묻혀 있는 것들이 그랬다.

    그날 오후, 카이는 교무실에 불려 갔다. 에레보스 교수는 백발의 노인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맹렬한 불꽃을 품고 있었다. 그는 고대 마법 이론의 권위자였지만, 동시에 그 누구보다 전통과 금기를 강조했다. 그의 교무실 창문 너머로는 광활한 우주가 보였다.

    “카이. 네 과제는… 꽤나 도발적이군. 하지만 위험하다.” 교수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오래된 지식에는 이유가 있어 봉인된 것들이 많다. 섣불리 건드렸다간 어떤 대가를 치를지 모른다. 모든 차원은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를 존중해야 해.”

    카이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저 학술적인 호기심일 뿐입니다, 교수님. 성운 학원의 모토가 ‘미지의 탐구’ 아니었습니까?”

    에레보스 교수는 깊은 한숨을 쉬더니 손에 든 홀로그램 스크린을 조작했다. “좋다. 그럼 ‘탐구’ 대신 ‘봉사 활동’을 좀 해야겠군. 도서관 지하 3층, 폐쇄된 고문서고 정리다. 일주일간 매일 방과 후에.”

    카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도서관 지하 3층 고문서고라니! 거기는 학원 창립 이후 거의 아무도 내려가지 않는다는 소문이 자자한 곳이었다. 먼지와 곰팡이가 가득한, 빛 한 점 없는 지옥 같은 곳. 게다가 지하 3층이면… 거의 행성 지표면 아래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 한편에서는 묘한 기대감이 피어났다. ‘폐쇄된 곳… 어쩌면 진짜 ‘탐구’가 가능할지도.’

    ***

    첫날, 지하 3층 고문서고는 소문 그대로였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수천 년 된 고문서들의 삭은 종이 냄새가 뒤섞여 카이의 코를 찔렀다. 천장의 마법 공학 등불은 겨우 희미한 빛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낡은 서가들 사이를 헤치며, 카이는 먼지 쌓인 고대 양피지와 마법 석판들을 정리했다.

    이틀째, 세라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찾아왔다. “카이, 괜찮아? 너 얼굴이 왜 이렇게 초췌해?”

    “괜찮아. 그냥 좀 피곤해서. 여기 너무 외딴곳이야. 게다가… 뭔가 묘한 기운이 느껴져.” 카이가 손가락으로 공중을 가리켰다. “여기, 이 서가 뒤편에 뭔가가 있어. 아주 오래되고… 거대한.”

    세라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괜히 걱정이 되었다. “별생각을 다 하네. 어서 정리나 해. 나중에 같이 저녁 먹자.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우주 생선 구이 나오는 날이야.”

    하지만 카이는 세라가 돌아간 후에도 그 묘한 기운에 이끌렸다. 그는 그 서가 뒤편을 샅샅이 뒤졌다. 마침내, 낡은 나무판자 뒤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에너지 패널을 발견했다. 먼지를 털어내자, 고대어 문자가 새겨진 푸른색 패널이 드러났다. 분명 이곳의 첨단 기술과는 다른, 훨씬 원시적이면서도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듯했다.

    패널을 누르자, 희미한 진동과 함께 서가 전체가 옆으로 밀려났다. 그 뒤에는 좁고 어두운 통로가 드러났다. 공기는 더욱 차갑고 습해졌으며, 멀리서 알 수 없는 저음의 울림이 들려왔다.

    ‘여기야.’ 카이는 직감했다.

    그날 밤, 카이는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다음 날, 그는 세라를 찾아가 그가 발견한 것을 이야기했다.

    “미쳤어? 카이! 그건 분명 금지된 구역일 거야! 교수님이 괜히 경고한 게 아니라고!” 세라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세라, 생각해봐. 왜 이 학원 지하에 이런 게 숨겨져 있을까? 왜 아무도 모르게 봉인되어 있을까? 에레보스 교수가 언급한 ‘오래된 지식의 대가’라는 게 대체 뭘까?” 카이의 눈은 호기심으로 불타올랐다.

    세라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녀는 위험을 싫어했지만, 카이의 끈질긴 설득과 미지의 진실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을 이기지 못했다. “좋아, 딱 한 시간만이야. 뭔가 이상하면 바로 돌아와야 해.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그들은 다음 날 새벽, 아무도 없는 학원의 지하로 향했다. 카이가 찾아낸 통로는 예상보다 깊고 길었다. 고대 마법 문양이 새겨진 벽면은 녹슨 금속 배관과 최신 마법 공학 케이블로 뒤덮여 있었다. 마치 서로 다른 두 문명이 강제로 뒤얽힌 듯한 기괴한 풍경이었다. 통로를 따라 내려갈수록, 저음의 울림은 더욱 선명해졌다. 심장 박동 같기도 했고, 거대한 기계의 작동 소리 같기도 했다.

    한참을 내려가자, 통로는 거대한 원형 공간으로 이어졌다. 그곳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졌다고는 믿기 힘든 규모였다. 끝없이 펼쳐진 암석 벽에는 알 수 없는 상형문자와 함께, 낡고 거대한 기계장치들이 박혀 있었다. 중앙에는 지름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원형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제단 위에는 거대한 수정 구슬이 놓여 있었다.

    아니, 수정 구슬이 아니었다.

    “이게 뭐야…?” 세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은 살아있는 심장 같았다. 짙은 보라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불규칙한 형태의 덩어리였다. 표면에는 미세한 혈관 같은 에너지 라인들이 꿈틀거렸고, 그 안에서는 별들이 폭발하는 듯한 섬광이 일어났다. 그것은 끊임없이 박동했고, 그 박동에 맞춰 주변의 대기가 희미하게 진동했다. 무엇보다 끔찍했던 것은, 그 심장 같은 덩어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도의 불쾌하고 기괴한 기운이었다. 마치 살아있는 우주 그 자체가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 듯한 느낌.

    “이건… 행성의 심장 같은데…?” 카이가 중얼거렸다.

    그때, 거대한 심장 덩어리에서 가느다란 촉수 같은 것이 뻗어 나왔다. 빛나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그것은 순식간에 제단 가장자리에 있던 낡은 마법 장치들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그 장치들은 마치 피를 빨아들이는 듯, 심장의 에너지를 흡수하고 있었다.

    “흡수…?” 세라가 뒤로 주춤거렸다. “이건… 일종의 제물 의식 아니야?”

    그녀의 말에 카이는 주변을 더욱 자세히 살폈다. 제단 아래쪽 바닥에 희미한 자국들이 보였다. 오래전에 지워졌지만, 분명히 어떤 것들이 끌려왔던 흔적이었다. 그리고 제단 가장자리에는 낡은 구속구와 녹슨 사슬이 얽혀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붙잡아 두기 위한 것처럼.

    “카이, 저걸 봐!” 세라가 갑자기 소리쳤다.

    심장 덩어리 옆, 암석 벽에 파묻힌 듯한 철제 구조물이 있었다. 그 위에는 홀로그램 스크린이 반쯤 파손된 채 깜빡거리고 있었다. 카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 손을 대자, 스크린이 깜빡거리더니 고대어 문자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건… 기록이야.” 카이가 해독을 시도했다. “이 행성의 고대 문명이 기록한 것 같아. ‘태초의 어둠’, ‘별의 심장’, ‘공허에서 온 존재’…”

    문자들은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섬뜩한 내용이 드러났다. 이 행성의 코어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존재. 우주를 떠돌다 불시착하여 행성 자체와 융합된, 차원 간의 경계를 허무는 존재. 고대인들은 그 힘을 두려워하면서도 이용하려 했고, 결국 실패하여 이 ‘심장’을 봉인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들은 이 존재의 힘을 이용해서 마법을 개발한 거야.” 세라가 경악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쓰는 마법의 근원이… 저 괴물이라는 말이야?”

    카이는 스크린의 다음 문구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존재는 끊임없이 깨어나려 하며, 육신과 정신을 갈망한다. 주기적으로 ‘정수’를 공급하지 않으면, 봉인은 약해지고, 행성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차원 전체가 공허에 잠식될 것이다.’

    “정수…?” 카이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들은 고개를 들었다. 심장 덩어리의 박동이 점점 더 거세졌다. 주변의 기운이 더욱 음습하고 끈적하게 변했다. 마치 그들의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

    바로 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여기까지 온 건가, 카이.”

    카이와 세라는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어둠 속에 에레보스 교수가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달리 슬픔과 함께 알 수 없는 체념으로 물들어 있었다.

    “교수님…!” 세라가 놀라 소리쳤다.

    “나는 너희가 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너는 늘 호기심에 이끌리는 아이였지.” 에레보스 교수는 천천히 다가왔다. “너희가 방금 본 것이 바로 이 학원의 가장 끔찍한 금기다. 성운 마법 학원은 이 괴물을 봉인하고, 동시에 그 힘을 통제하기 위해 세워진 감옥이자 실험실이다.”

    “실험실이라뇨? 이 끔찍한 것을요?” 세라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이 행성 자체가 고대인들이 그 존재를 가두기 위해 만들어낸 거대한 마법 감옥이다. 그리고 이 학원은 그 감옥의 가장 중요한 보루이자, 동시에 이 존재를 ‘관리’하는 최전선이지.” 에레보스 교수는 심장 덩어리를 응시했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이 존재가 깨어나지 않도록 그 ‘정수’를 공급해 왔다. 그 정수 없이는 봉인이 풀리고, 우리의 세계는… 끝장날 테니까.”

    “그럼 그 ‘정수’가 뭔데요? 설마…” 카이의 머릿속에 섬뜩한 그림이 그려졌다. 제단의 핏자국, 구속구, 그리고 ‘육신과 정신을 갈망한다’는 고대 기록.

    에레보스 교수는 말없이 카이와 세라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은 깊은 고통으로 일렁였다. “너희는 이제 진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 진실은 너무나 무겁다. 이 존재의 봉인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희생’을 바쳐왔다.”

    심장 덩어리의 박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공간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벽에 새겨진 고대 마법 문양들이 푸른빛으로 섬뜩하게 번쩍였다. 마법 공학 장치들이 불규칙적으로 스파크를 튀겼다.

    “그리고 이제… 너희는 이 끔찍한 비밀을 아는 자들이 되었다.” 교수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 진실과 함께 이 감옥의 수호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영원히 침묵할 것인가.”

    카이와 세라는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단순한 금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학원의, 아니 어쩌면 은하계 전체의 운명을 지탱하는 끔찍한 진실이었다. 그들이 발 딛고 선 이 모든 찬란한 마법 문명이, 바로 이 지하의 어둠 속에서 피어난 끔찍한 희생 위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심장 덩어리의 박동은 점점 더 빠르고 강렬해졌다. 마치 그들의 영혼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 새로운 ‘정수’를 갈망하는 듯했다. 그들은 이제 자신들이 이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가 될 것인지, 혹은 이 지옥 같은 진실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선택해야만 했다. 지하 깊은 곳의 울림은, 끝나지 않는 숙명처럼 그들의 귓가에 끊임없이 메아리쳤다.

  • 스팀펑크 독립적인 단편 소설

    아르카나 학술원의 시계탑은 멈추는 법이 없었다. 정교한 톱니바퀴와 증기 피스톤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는 마치 거대한 살아있는 심장처럼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다. 이곳은 대륙 최고의 마법 공학자들이 모여 에테르 동력 장치와 시계태엽 자동인형, 그리고 하늘을 나는 비공정을 연구하는 지식의 전당이었다.

    루시안은 그 심장 박동에 매료된 학생 중 하나였다. 여느 학생들처럼 고대 마법 주문을 외우기보다는,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렌치와 나사 드라이버를 든 채 복잡한 마법 공학 장치를 분해하고 조립하는 일에 더 익숙했다. 그의 방은 언제나 증기압 조절기의 삐걱거리는 소리, 에테르 코어의 낮은 윙윙거림, 그리고 닳아버린 톱니바퀴의 냄새로 가득했다.

    어느 날, 루시안은 자신의 졸업 프로젝트인 ‘자율 탐색형 에테르 감지 드론’을 시험하던 중이었다. 드론은 평소와 다르게 학술원 지하 깊은 곳에서 비정상적인 에테르 파동을 감지했다. 처음엔 기계 오작동이라 생각했지만, 파동은 규칙적이면서도 묘하게 불쾌한 진동을 담고 있었다. 마치 심장이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듯한, 그런 기이한 주파수였다.

    “음… 이럴 리가 없는데.”

    루시안은 눈썹을 찌푸리며 드론의 분석 모듈을 다시 확인했다. 학술원 지하에는 보관창고나 오래된 기록실 외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드론이 가리키는 파동의 근원은 그 모든 알려진 구역보다 훨씬 더 깊은 곳이었다. 마치 금지된 심연이라도 되는 양, 학술원 중앙 통제실의 지도에는 아예 표시조차 되어 있지 않은 미지의 공간.

    그는 가장 친한 친구이자 고고학 마법 전공자인 엘라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엘라는 언제나 낡은 책과 고대 유물을 탐구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미지의 에테르 파동? 학술원 지하에? 루시안, 네 드론이 드디어 고장 난 거 아니니?” 엘라가 코웃음을 쳤다. 그녀의 안경 너머로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번뜩였다. “하지만… 만약 정말이라면, 그건 흥미로운데.”

    “고장 아냐. 파동은 너무나 선명했어. 주기적이고, 강렬하고, 그리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학술원의 모든 에테르 동력 시스템의 미세한 흐름과 공명하고 있었어. 마치 그것이 모든 에너지의 근원인 것처럼.”

    엘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오래된 양피지 두루마리를 뒤적였다. “학술원이 세워진 지 거의 오백 년이 되었어. 그 긴 세월 동안 지하에 숨겨진 게 없을 리 없지. 하지만 공식 기록에는 없어.”

    “바로 그거야. 공식 기록에는 없지만, 내 드론은 분명히 감지했어.” 루시안은 의자에 기대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뭔가 기분 나쁜 파동이었어.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에서 추출되는 듯한 느낌.”

    그날 밤, 루시안과 엘라는 교수들의 통제가 느슨해지는 자정 무렵을 틈타 학술원 지하로 잠입했다. 루시안의 에테르 감지 드론은 좁고 컴컴한 복도를 따라 빛나는 궤적을 그리며 그들을 안내했다. 증기 파이프가 거미줄처럼 얽히고, 낡은 시계태엽 장치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들을 위협하는 듯했다.

    그들은 오래된 보관실 벽 뒤에 숨겨진 비밀 통로를 발견했다. 통로는 닳아버린 기어로 잠겨 있었는데, 루시안이 순식간에 해제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무거운 철문이 열리자, 안에서는 차가운 금속과 습한 흙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냄새가 뒤섞인 공기가 흘러나왔다.

    “이봐, 루시안. 여기가 아닌 것 같아.” 엘라가 불안하게 속삭였다. “여긴… 너무 깊어. 그리고 이 에테르 흐름은 너무 강해. 거의 물리적인 압박감마저 느껴져.”

    “여기야. 드론이 가리키는 곳은.” 루시안은 손에 든 렌턴을 앞으로 비추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계단은 마치 땅속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는 뱀의 굴 같았다. 계단 옆에는 부식된 증기 파이프들이 보였는데, 그 안에서 희미하게 에테르 빛이 깜빡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몇 시간 동안을 걸었을까, 그들은 마침내 거대한 동굴 같은 공간에 도착했다. 동굴의 중앙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의 기계 장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증기 엔진이 아니었다. 거대한 황동 파이프와 정교하게 깎인 흑철 기어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를 흐르는 에테르 에너지 코어들이 끊임없이 빛을 뿜어냈다.

    하지만 장치의 가장 기이한 부분은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이게… 뭐야?” 엘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장치의 가장 깊은 곳, 거대한 원형 격납고의 중심에는 거대한 생체 조직이 박동하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 같았지만, 그 주위로는 수많은 금속 관과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다. 관들은 맥동하는 생체 조직의 표면에 깊이 박혀 있었고, 그 관을 통해 밝은 에테르 에너지가 흡수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흡사 거대한 생명체에게서 피를 뽑아내는 듯했다.

    생체 조직은 고동칠 때마다 희미한 빛을 뿜어냈는데, 그 빛은 마치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맥동 하나하나에서 루시안의 드론이 감지했던 그 기이하고 불쾌한 에테르 파동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에너지의 흐름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 그 자체였다.

    “말도 안 돼…” 루시안은 넋을 잃고 중얼거렸다. “이건… 추출 장치야. 이 거대한 생명체에게서 에테르를 뽑아내는…”

    그때,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미숙한 학생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다.”

    돌아서자, 어둠 속에서 한 인물이 걸어 나왔다. 학술원의 최고 마법 공학 교수이자 학술원의 모든 에테르 동력 시스템을 설계한 크로노스 교수였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침착했지만, 그의 눈빛 속에는 어딘가 어둡고 지쳐 보이는 기색이 스며 있었다.

    “교수님… 이게 뭡니까?” 엘라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이… 이 생명체는 뭐죠? 학술원의 에너지원은 설마 이걸…?”

    크로노스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여기까지 찾아냈군. 이 사실은 영원히 묻혀 있어야 할 학술원의 가장 깊은 비밀이다.”

    그는 맥동하는 거대한 심장을 천천히 응시했다. “이것은 ‘프리마 노멘’, 태초의 심장이다. 세상의 모든 에테르 흐름이 시작된 곳이라고 알려진 존재지. 학술원의 지하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었던 고대 존재.”

    “잠들어 있었다고요? 그럼 지금 이건… 잠들어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루시안이 소리쳤다. “이건 고통받고 있어요! 이 기계가 이걸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잖습니까!”

    “그렇다.” 크로노스 교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 고통이 바로 우리가 누리는 모든 기술 문명의 원천이다. 이 학술원의 비행선이 하늘을 가르고, 자동인형이 복도를 누비며, 우리의 모든 마법 공학이 작동하는 것은 바로 이 심장이 내뿜는 에테르 덕분이다. 그 에테르는 ‘프리마 노멘’의 고통 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강력하게 증폭된다.”

    엘라는 경악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럼… 학술원의 모든 영광과 발전은… 이 생명체를 고문해서 얻은 것이란 말입니까?”

    “고문이라는 표현은 너무 과격하다. 필요한 대가일 뿐.” 크로노스 교수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만약 이 추출 장치를 멈춘다면, 학술원의 모든 에테르 동력 시스템은 마비될 것이다. 도시는 어둠에 잠기고, 비행선은 추락하며, 우리는 모든 기술적 우위를 잃게 되겠지. 그리고 태초의 심장은 다시 깊은 잠에 빠질 테고, 우리는 다시는 이런 에테르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게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루시안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 살아있는 생명체다. 그리고 그 생명체가 우리의 문명을 지탱하고 있다.” 크로노스 교수는 루시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너희는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릴 텐가? 그리고 이 모든 문명을 파괴할 텐가? 아니면, 침묵하고 우리가 쌓아 올린 이 위대한 문명의 수혜자가 될 텐가?”

    거대한 심장은 끊임없이 고동쳤다. 그 맥동은 이제 루시안의 심장과 공명하며, 죄책감과 분노, 그리고 무력감으로 그의 폐부를 짓눌렀다. 학술원의 아름다운 시계탑은 멈추지 않는 증기 피스톤의 소리로 계속 울려 퍼졌고, 그 소리는 이제 루시안에게 고통받는 고대 존재의 비명처럼 들렸다.

    그의 눈앞에는 거대한 기계 장치와 그 속에 갇혀 고통받는 생명체, 그리고 그 고통 위에 세워진 찬란한 문명의 그림자가 거대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루시안은 렌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선택은, 이제 막 시작될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 될 터였다. 침묵하거나, 아니면 이 끔찍한 진실을 폭로하고 모든 것을 바꿀 것인가. 지하 동굴의 습한 공기는 알 수 없는 미래의 비릿한 피 냄새를 머금고 있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 73화: 흔들리는 옥좌, 비정한 섬광

    천룡성 무도 투기장의 거대한 원형 홀은 오색찬란한 홀로그램 빛으로 가득했다. 수백만 명이 운집한 관중석은 흡사 은하계를 축소해 놓은 듯 반짝였고, 그들의 웅성거림은 거대한 파도처럼 투기장을 뒤덮었다. 중앙의 반중력 경기장은 묘하게도 고풍스러운 팔각정 형태를 띠고 있었는데, 그 위로는 수천 년 전의 고성에서나 볼 법한 묵직한 기운이 감돌았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단 한 번의 승패가 성계 연합의 미래를 결정하고, 우주의 운명을 좌우할 것이라 했다.

    고요하게 호흡을 가다듬던 강휘는 눈꺼풀 아래로 일렁이는 백색 섬광을 느꼈다. 그의 맞은편, 거대한 황금 갑옷을 걸친 아슈르가 불길한 살기를 뿜어내며 서 있었다. 아슈르의 뒤편에는 불타는 해골 문양이 새겨진 검은 깃발이 홀로그램으로 펄럭이고 있었다. 그것은 성계 변방의 잔혹한 약탈자 집단, ‘흑염단’의 상징이었다.

    “명심해라, 강휘. 네 어깨에는 스러져간 강호의 혼이 얹혀 있다. 그 기개를 꺾어서는 안 된다.”

    스승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강휘는 땀으로 축축한 손바닥을 꽉 쥐었다. 그는 이 자리에 서기 위해 수많은 밤을 밤샘 수련으로 지새웠고, 죽음의 문턱을 수십 번 넘나들었다. 그의 온몸에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의 흔적과, 굳은살 박힌 무림의 세월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후후… 애송이. 그 눈빛은 가상하나, 겨우 검 한 자루와 너덜거리는 내공으로 내 앞을 막을 순 없을 거다.”

    아슈르의 목소리는 금속성 잡음이 섞인 채 투기장에 울려 퍼졌다. 그의 오른손에서 푸른색 섬광이 번쩍이더니, 거대한 에너지 대검이 형체를 갖추며 나타났다. 검신에서는 징그러운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강휘는 무표정하게 응시했다. 그의 손에는 낡고 투박한 검, ‘벽운검(碧雲劍)’이 쥐어져 있었다. 수백 년 전 그의 선조들이 휘둘렀던 그 검은, 어떤 첨단 무기보다도 무겁고 강렬한 생명의 기운을 담고 있었다.

    결전의 순간이었다.

    “성계 무도 대제전 결승! 강휘 대 아슈르! 대결을 시작한다!”

    사회자의 우렁찬 외침과 함께 경기장 전체를 감싸던 에너지 보호막이 서서히 걷혔다.

    “크하하하! 죽어라, 고대의 망령!”

    아슈르가 괴성을 지르며 먼저 돌진했다. 그의 황금 갑옷에서 수십 개의 미세한 추진체가 동시에 분사되며, 거대한 몸체가 마치 유성처럼 강휘에게 쇄도했다. 에너지 대검이 허공을 가르며 푸른 궤적을 그렸다. 그 일격은 마치 거대한 파쇄기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강휘는 발밑의 대리석 바닥을 가볍게 차 올렸다. 발끝에서 시작된 회전력이 전신을 타고 올라, 그의 몸은 흡사 한 떨기 연꽃처럼 우아하게 춤을 추듯 공중으로 솟아올랐다.

    *쉬이이익! 콰앙!*

    아슈르의 에너지 대검이 강휘가 서 있던 자리를 강타했다. 대리석 바닥이 폭발하며 거대한 분화구가 생겨났다. 강력한 충격파가 관중석까지 전해져 웅성거림을 자아냈다.

    “간발의 차로 피했어!”

    “저게 강휘의 ‘회룡비공(回龍飛空)’이군! 강호 무림의 진수라더니, 정말 허황된 소리가 아니었어!”

    관중석에서는 탄성과 함께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강휘는 미처 착지하기도 전에 아슈르의 다음 공격에 직면했다. 황금 갑옷의 어깨에서 번개 같은 속도로 붉은 에너지탄이 쏘아져 나왔다.

    *파파파팡!*

    강휘는 몸을 비틀어 에너지탄을 피했지만, 폭발의 여파가 그의 등짝을 강타했다. 억 소리와 함께 그는 허공에서 잠시 휘청였다.

    “꼴랑 저 정도인가! 실망이로군!”

    아슈르가 조롱하듯 외치며 허공에 뜬 강휘에게 맹렬히 달려들었다. 에너지 대검이 일직선으로 뻗어나왔다. 피할 공간도, 반격할 틈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강휘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차가운 광채가 번뜩였다. 그의 몸에서 마치 거대한 고요가 폭풍우처럼 휘몰아쳤다.

    “이것이… 스승님의 가르침… ‘무영신검(無影神劍)’!”

    강휘의 입에서 나지막한 혼잣말이 새어 나왔다. 그의 벽운검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칼끝에서 희미한 푸른 섬광이 일더니, 아슈르의 대검을 겨우 0.1초 앞두고 허공에 얇은 선을 그었다.

    *치이이익!*

    강철과 강철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무언가 거대한 에너지가 마찰하며 녹아내리는 듯한 기묘한 소리가 투기장을 채웠다. 아슈르의 에너지 대검이 강휘의 벽운검에 닿는 순간, 마치 모래로 만든 성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 내 ‘염화신검(焰火神劍)’이?!”

    아슈르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의 대검은 순식간에 칼집에서 뽑힌 날처럼 닳아 없어지더니, 이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강휘의 벽운검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관중석은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흑염단의 깃발 아래 서 있던 아슈르의 부하들조차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강휘는 착지하며 여전히 고요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단지… 물질의 근원적 결속력을 무너뜨리는 것일 뿐입니다. 당신의 무기는 너무나도 단순한 에너지의 집합체였고, 제 검은… 시공을 초월한 마음의 결정체입니다.”

    강휘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울림은 아슈르의 심장을 직접 강타하는 듯했다.

    “건방진 애송이…! 내게 감히 이런 모욕을! 좋다, 네놈의 얄팍한 무림 기술로는 결코 막을 수 없는 진정한 힘을 보여주마!”

    아슈르는 광기에 찬 눈빛으로 포효했다. 그의 황금 갑옷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갑옷의 이음새마다 붉은 전류가 번쩍였고, 그의 온몸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되며 경기장 바닥이 흔들렸다.

    *웅———-!*

    투기장 전체를 감싸던 홀로그램 보호막이 불안하게 일렁였다. 아슈르의 에너지가 너무도 거대하여, 경기장의 안전장치조차 위협받는 듯했다.

    “저것은… 흑염단의 궁극 기술, ‘재앙의 심장(Calamity Core)’!”

    VIP석에 앉아 경기를 관람하던 성계 연합의 고위 관계자가 경악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아슈르의 갑옷은 이제 거대한 붉은 에너지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검붉은 구체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구체는 주변의 빛과 공간마저 집어삼키는 듯, 불길하게 일렁였다.

    강휘는 아슈르를 바라봤다. 아슈르의 눈빛은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파괴만을 갈망하는, 냉혹한 기계의 눈빛이었다.

    “애송이… 이제 네놈의 죽음으로, 이 우주의 미래를 결정할 자는 누구인지 분명해질 거다!”

    아슈르가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검붉은 구체를 강휘에게 던졌다. 구체는 느리게, 그러나 압도적인 중력처럼 강휘에게 다가왔다. 그 순간, 강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것은 단순한 에너지 공격이 아니었다. 저 안에 담긴 것은,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는 힘이었다.

    피할 수 없다. 막을 수도 없다.

    강휘는 벽운검을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의 몸 안에서 잠자고 있던 모든 기운이 폭발적으로 솟아올랐다. 그의 눈빛은 아슈르의 광기보다도 깊고 서늘한 결의로 타올랐다. 스승의 가르침, 스러져간 강호의 혼, 그리고 이 우주의 운명이 그의 작은 어깨에 달려 있었다.

    그의 벽운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 기운은 이제 홀로그램 빛마저 압도하며, 투기장 전체를 신비로운 푸른색으로 물들였다. 마치 거대한 용이 잠에서 깨어나 포효하는 듯한 기운이 투기장을 가득 채웠다.

    아슈르의 검붉은 재앙의 구체가 강휘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강휘는 모든 것을 걸고, 벽운검을 힘껏 휘둘렀다.

    *크아아아악!*

    그의 절규와 함께, 푸른 섬광이 검붉은 재앙을 향해 맹렬히 쇄도했다.

    그리고….

    투기장 전체를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섬광과 폭음이 터져 나왔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독립적인 단편 소설

    쨍한 여름 햇볕이 새싹골 마을을 쏟아져 내렸다. 고봉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오래된 슬레이트 지붕과 돌담들이 정겹게 어우러져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낡은 카메라를 든 하린은 땀을 송골송골 흘리면서도 즐거운 표정이었다. 대학 방학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그녀의 일상은 느릿하고 한가했지만, 그 속에서 자신만의 보물을 찾아다니는 탐험가였다.

    하린의 발길이 멈춘 곳은 마을 어귀의 낡은 고물상 ‘만물상회’ 앞이었다. 간판조차 희미해져 알아보기 힘든 이곳은, 늘 먼지 쌓인 온갖 잡동사니들이 빼곡하게 쌓여 있어 보물창고 같기도 했다. 유리문 안쪽으로는 허연 머리카락의 종구 할아버지가 돋보기안경을 낀 채 뭔가를 수리하고 있었다.

    “할아버지, 더운데 뭐하세요?”

    하린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쿰쿰한 흙먼지와 오래된 나무 냄새가 훅 끼쳐왔다.

    “어, 하린이 왔니? 이 낡은 풍경이 소리가 시원찮아서 말이야. 네 할머니가 아끼던 건데.”

    종구 할아버지는 손에 든 구리 풍경을 흔들어 보였다. 맑고 청아해야 할 소리는 탁하고 먹먹했다. 하린은 주위를 둘러보며 흥미로운 물건들을 살폈다. 녹슨 쇠붙이들, 색 바랜 그림들, 고장 난 시계들… 그중 하린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나무 상자였다. 먼지가 수북이 쌓여 제 색깔을 잃었지만, 은은한 조각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할아버지, 이 상자는 뭐예요?”

    하린이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자, 상자 뚜껑에 새겨진 정교한 문양이 드러났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러나 기억나지 않는 독특한 기하학적인 무늬였다.

    “아, 그거? 오래전 고봉산 아랫마을에 살던 박 씨 할아버지가 주고 간 건데… 뭐, 지도 같은 거라고 했던 것 같기도 하고. 하도 오래전 일이라.”

    종구 할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린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얇고 바스락거리는 양피지 두루마리가 들어있었다. 오래된 종이 특유의 냄새가 났다. 펼쳐보니, 희미하게 손으로 그린 듯한 그림이 나타났다.

    “이게… 고봉산 지형 같기도 하고… 그런데 여기 이 표시는 뭐지?”

    지도의 한가운데에는 숲 속에 가려진 듯한 작은 동굴 입구와 그 옆에 알 수 없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상자 뚜껑에 새겨진 문양과 똑같았다. 하린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혹시, 저기 지도에 그려진 곳이 고대 유적 같은 거 아닐까요?”

    “고대 유적이라니? 이 촌구석에? 그런 건 드라마에나 나오는 얘기지. 그래도 심심하면 한번 찾아보든가.”

    할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다시 풍경 수리에 집중했다. 하지만 하린은 그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고봉산은 마을 사람들에게 ‘귀신 나오는 산’, ‘들어가면 길을 잃는 산’으로 불리며 기피 대상이었다. 하지만 하린에게는 늘 미지의 매력을 품고 있는 곳이었다.

    그날 오후, 하린은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고봉산으로 향했다. 튼튼한 등산화, 배낭 가득 채운 물과 비상식량, 그리고 작은 손전등. 낡은 양피지 지도를 따라 숲길을 헤치고 나아갔다. 짙푸른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마치 고대 유적의 비밀을 지키는 수호자 같았다.

    한참을 헤매던 하린은 지도에 표시된 지점에 다다랐다. 울창한 넝쿨과 바위들로 뒤덮인 곳이었다. 지도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하린은 덩굴을 걷어냈다. 그리고 그 아래 드러난 것은, 사람의 손으로 다듬어진 듯한 큼지막한 돌문이었다. 완벽하게 위장되어 있어 전혀 눈치채지 못할 모습이었다.

    “진짜… 있었어!”

    하린은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돌문은 틈새도 없이 단단히 닫혀 있었다. 하린은 상자 뚜껑과 지도에 그려진 문양을 떠올렸다. 돌문 중앙에도 똑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하린은 조심스럽게 문양을 따라 손을 댔다. 차갑고 매끄러운 돌의 감촉. 그 순간, 희미한 진동이 느껴지더니, 돌문이 안쪽으로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마치 고대의 숨결이 새어 나오는 듯, 서늘한 바람이 하린의 얼굴을 스쳤다.

    어둠 속으로 이어진 통로. 하린은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광물 냄새가 났다. 벽에는 고대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지만, 그녀는 해독할 수 없었다. 다만, 그 글자들에서 어떤 경외심과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통로를 지나자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손전등 빛이 닿는 곳마다 기묘한 건축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돌기둥들은 천장을 받치고 있었고, 벽에는 신비로운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사냥이나 전쟁이 아닌, 사람들이 자연과 어우러져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새와 동물이 함께 춤추고, 나무들이 빛을 내는 듯한 그림들은 하린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제단 같은 구조물이 있었다. 제단 위에는 손바닥만 한 돌덩이가 놓여 있었다. 여덟 개의 면으로 이루어진 그 돌은 언뜻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지만, 자세히 보니 각 면에 상자 뚜껑에 새겨진 문양과 똑같은 무늬가 조각되어 있었다.

    “이게 뭘까…?”

    하린은 돌을 만져보았다. 미지근한 온기가 느껴졌다. 돌을 살짝 돌려보니, 놀랍게도 돌기둥들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깜빡이는 푸른빛이었다. 그 빛은 제단 위의 돌과 연결된 듯, 공간 전체로 퍼져 나갔다. 어둠에 잠겨 있던 거대한 유적이 마침내 숨을 쉬는 듯했다.

    푸른빛이 공간을 가득 채우자, 하린은 경이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빛은 단순히 주위를 밝히는 것이 아니었다. 공간 속의 공기 자체가 빛을 머금은 듯, 잔잔하게 일렁였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자, 희미하지만 분명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수천 개의 작은 유리 풍경이 동시에 울리는 듯한, 혹은 깊은 숲 속의 바람 소리 같기도 한, 묘하게 평화롭고 아름다운 소리였다.

    하린은 홀린 듯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속의 소란스러움이 가라앉고, 평온함이 찾아왔다. 이곳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라, 무언가를 치유하고 정화하는 공간 같았다. 벽화 속 사람들이 왜 그렇게 평화로웠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은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연의 빛 속에서 살았던 것이리라.

    “이 빛과 소리는… 대체 뭘까.”

    하린은 제단 위의 돌을 다시 한번 유심히 살폈다. 여덟 면의 문양들은 각각 다른 자연의 요소를 상징하는 듯했다. 물, 불, 흙, 바람, 그리고 알 수 없는 네 가지. 이 돌이 바로 이 모든 것을 조화롭게 연결하는 핵심 장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돌의 여덟 면에서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며, 공간 전체를 더욱 밝게 밝혔다. 그리고 제단 바닥에 새겨진 고대 문양들이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하린은 문양들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원형 문양이었는데, 그 속에 이렇게 적혀 있는 듯했다.

    ‘자연의 심장에 귀 기울여라.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으니, 조화를 이루면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리라.’

    하린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잊혀진 고대 문명이 남긴 것은 거대한 보물이나 강력한 무기가 아니었다. 그들이 남긴 것은 바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지혜, 그리고 그 지혜를 통해 얻는 마음의 평화였다. 이 유적은 그 지혜를 후대에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치유의 전당’ 같은 곳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하린은 정신없이 유적 속을 헤매며 그 빛과 소리를 온몸으로 느꼈다. 잊고 지냈던 평온함이 그녀의 마음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세상의 모든 복잡한 일들이 잠시 잊히고, 오직 현재의 아름다움만이 남았다.

    밤이 깊어질 무렵, 하린은 아쉬운 마음으로 유적을 나섰다. 돌문은 그녀가 나옴과 동시에 다시 소리 없이 닫혔고, 울창한 덩굴과 바위 아래 감쪽같이 숨겨졌다. 세상 그 누구도 이곳에 이런 곳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마을로 돌아온 하린은 만물상회 문을 다시 한번 열었다. 종구 할아버지는 여전히 풍경을 고치고 있었다.

    “할아버지, 풍경 소리가 시원찮으면… 그냥 소리 없이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하린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허허, 갑자기 웬 선문답이냐. 산에서 뭘 보고 왔기에 애가 변했네.”

    “음… 그냥요. 너무 애쓰지 않아도, 스스로 소리를 내는 것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고 할까요?”

    하린은 유적에서 가져온 작은 돌멩이 하나를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평범한 돌이었지만, 하린에게는 고대의 지혜와 평화가 담긴 소중한 보물이었다. 이 비밀스러운 유적은 그녀만의 안식처이자, 지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주는 치유의 공간이 될 터였다. 하린은 더 이상 먼 곳에서 보물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짜 보물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혹은 우리 마음속에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새싹골의 밤하늘에는 별들이 평화롭게 쏟아져 내렸다.

  • 추리 미스터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1403호, 흔들리는 일상

    식탁 위에 놓인 컵에서 미지근한 물 한 모금을 삼켰다. 차가워진 빈 그릇들을 설거지통에 넣고 물을 틀었다. 쨍한 물줄기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가 거실의 묘한 정적을 조금이나마 걷어내는 듯했다. 지우는 주방 불을 끄고 어둠이 지배하는 거실로 향했다. 며칠째 이어지는 불면증은 온몸을 끈적하게 만들었다.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TV를 켤까 하다가 이내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밝은 화면이 오히려 더 눈을 피로하게 할 것 같았다. 어차피 뭘 봐도 집중할 수 없을 테니까. 며칠 전 거실 한쪽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부터, 지우의 평온한 일상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처음엔 그저 못이 낡았으려니 했다. 다음 날, 서재 책상 위 연필꽂이가 통째로 엎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도, 그는 피곤함 탓에 헛것을 본 것이라 애써 치부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크고 작은 이상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혼자 쓰는 1403호 아파트에서, 그것도 이렇게 밤이 깊어 고요한 시간에.

    귓가에 맴도는 것은 그저 심장의 불규칙한 박동 소리뿐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잠이 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저 이 불편한 감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때였다.

    ‘스르륵.’

    아주 희미한 마찰음이 등 뒤, 그러니까 주방 쪽에서 들려왔다. 지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숨을 죽였다.

    ‘고작 몇 시간 전에 설거지를 다 끝냈는데?’

    접시를 내려놓는 소리라기엔 너무 작았다. 마치 무언가 아주 미끄러운 바닥 위를 스쳐 지나가는 듯한 소리. 고양이 같은 작은 짐승의 움직임 같기도 했지만, 이 아파트에서 그런 소리가 날 리가 없었다. 지우는 애완동물을 키우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둠이 짙게 깔린 주방 입구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가전제품의 전원 램프만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깜빡일 뿐.

    “착각이겠지.”

    지우는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어서 잠이나 자야 했다. 몸이 너무 지쳐서 환청까지 들리는 거라고, 그는 애써 제 마음을 다독였다.

    그 순간, 냉장고가 ‘우우웅’ 하고 평소보다 훨씬 큰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치익’ 하는 작은 전기음과 함께 냉장고 내부 조명이 아주 미세하게 깜빡였다. 그리고는 거짓말처럼 모든 소리가 뚝 끊겼다. 고요함이 다시 아파트를 집어삼켰다. 전원 램프조차 꺼진 듯했다.

    지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불안감이 심장을 옥죄어 왔다. 냉장고는 멀쩡히 작동하던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전원이 나가거나, 시동이 꺼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냉장고로 다가갔다. 전면에 달린 디지털 시계가 꺼져 있었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내부에 환한 불이 들어왔다. 시원한 냉기가 얼굴에 닿았다. 냉장고는 멀쩡했다. 전원 램프도 다시 푸른빛을 띄고 있었다.

    “뭐야, 이건 또…”

    황당함에 헛웃음이 나왔다. 대체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마치 누군가 그를 지켜보며 장난을 치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때, 거실 한쪽 벽을 장식하고 있던 작은 도자기 장식품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몇 달 전 여행지에서 사 온 코끼리 모양의 조형물이었다. 그 장식품은 본래 선반 중앙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선반 모서리 쪽으로 위태롭게 밀려나 있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지우는 천천히 장식품으로 향했다.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중앙으로 되돌려 놓았다. 혹시 자신이 무심코 건드렸던 건가? 아니, 그럴 리 없었다. 그는 오늘 저녁 내내 이 거실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이제 하다 하다 물건 위치까지 바뀌나…”

    그는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소파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떼지 않고 장식품을 응시했다.

    10초, 20초…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지우의 시선은 장식품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역시 다 피곤해서 그런 거다.

    ‘스르륵.’

    다시 그 소리. 이번에는 선반에서 나는 소리였다.

    지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지켜보는 바로 그 순간, 방금 제자리로 돌려놓았던 코끼리 장식품이 다시 스르륵, 하고 모서리 쪽으로 미끄러져 갔다. 마치 투명한 손가락이 그것을 밀어내는 것처럼.

    “흐읍!”

    지우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의 시선은 완전히 장식품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장식품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코끼리의 잘린 코가 데구루루 굴러와 지우의 발치에 멈췄다.

    “이게… 이게 대체…”

    말문이 막혔다.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일이었다.

    갑자기, 거실 바닥에 놓여 있던 빈 맥주 캔 하나가 스스로 ‘덜그럭’거리더니 옆으로 데굴 굴러갔다. 마치 누군가 발로 툭 찬 것처럼.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지우는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외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그는 몸을 돌려 현관문 쪽으로 향하려 했다. 당장 이 집을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다리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침실 쪽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무거운 가구가 넘어지는 듯한 소리.

    아니, 어쩌면… 누군가 문을 격렬하게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지우는 차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침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안에는 아무도 없어야 했다. 그는 오늘 하루 종일 혼자였다.

    ‘쿵! 쿵! 쿵!’

    소리는 점점 더 커졌다. 침실 문이 부서질 듯한 기세였다. 이제는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안에서 무언가, 혹은 누군가 문을 부수고 나오려는 것 같았다.

    지우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벗어날 곳이 없었다.

    ‘끼이익… 끼이익…’

    소리는 침실 문 안쪽에서 들리는 낡은 나무 흔들 의자의 소리였다. 지우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 흔들 의자는 그의 어린 시절부터 간직해 온 물건이었다. 낡았지만 소중해서, 이사 올 때도 버리지 않고 가져와 침실 구석에 놓아두었다. 그는 절대 흔들 의자에 앉지 않았다. 무서웠으니까.

    그리고 지금, 그 흔들 의자가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닫힌 문 안에서.

    갑자기, 문틈 사이로 핏빛 같은 붉은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뒤이어 ‘덜그럭’ 하는 소리와 함께 침실 문고리가 아래로 휙 돌아갔다.

    ‘딸깍.’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

    지우의 눈앞에서 침실 문이 아주 천천히, 안쪽으로 스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그는 얼어붙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안에서 빛 한 점 없는 어둠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낡은 흔들 의자가 ‘끼이익, 끼이익’ 소리를 내며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끼이이익… 끼이이익…’

    소리는 점점 더 광기에 가득 찬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마치 흥분한 존재가 그 의자에 앉아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는 것처럼.

    지우의 눈이 어둠 속으로 쑤셔박혔다. 그는 보았다. 흔들 의자가 멈추지 않는 와중에도, 그 의자 아래에서 길고 앙상한 손가락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을.

    어둠 속에서 창백하게 빛나는 손가락들이 바닥을 짚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의 발목을 향해 기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귀 바로 옆에서 섬뜩할 만큼 차가운 바람과 함께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젠, 여기야.”

    그 목소리는 익숙했지만, 동시에 낯설고 이질적인, 비인간적인 존재의 목소리였다. 지우는 미처 소리 지를 틈도 없이, 발목에 차가운 것이 닿는 것을 느꼈다.

    차가운 손가락들이 그의 발목을 휘감는 순간, 흔들 의자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완벽한 정적.

    그리고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 빛나며 지우를 노려보고 있었다.

  • SF (공상과학)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장. 에이레네의 그림자

    에이레네 학원의 아침은 언제나 완벽했다. 창밖으로는 인공 태양이 빚어낸 황금빛 햇살이 흐트러짐 없이 쏟아져 내렸고, 반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펼쳐진 정원은 일 년 내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개한 푸른빛과 색색의 꽃들을 자랑했다. ‘완벽’은 이곳 에이레네 학원이 추구하는 단 하나의 가치이자, 모든 학생의 머릿속에 각인된 신조였다.

    “강현우, 집중해라.”

    낮게 깔린 교수의 목소리가 뇌파 증폭기를 통해 직접적으로 신경계를 자극했다. 살짝 느슨해졌던 현우의 정신이 다시 한번 팽팽하게 조여졌다. 흰색의 무균복을 입은 현우는 에테르 조작 시뮬레이터 앞에 앉아 있었다. 눈앞의 홀로그램 스크린에는 복잡한 에테르 흐름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의 뇌와 연결된 단말기는 끊임없이 미세한 에테르 진동을 전신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에테르는 곧 사고의 반영이다. 명확하고 흐트러짐 없는 의지만이 에테르를 완벽하게 제어할 수 있다.”

    교수는 늘 같은 말을 반복했다. 에테르, 인류가 수백 년 전 심우주 탐사 중 발견한 미지의 에너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이 에너지는 문명을 혁신적으로 발전시켰지만, 동시에 끔찍한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에이레네 학원은 가장 순수하고, 가장 재능 있는 인재들을 선발해 에테르를 ‘안전하게’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현우는 가느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순수’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에이레네의 완벽함 속에서 균열을 찾으려는 이단아에 가까웠다. 그는 에테르를 완벽하게 제어하는 데는 늘 미묘한 어려움을 겪었다. 그의 내면에 늘 깔려 있는 불명확한 의심 때문일까.

    “강현우, 다음 시뮬레이션으로 넘어간다.”

    교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앞의 홀로그램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고정된 타겟에 에테르 빔을 발사해 정확하게 파괴하는 훈련이었다. 현우는 심호흡을 하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신경계의 미세한 떨림을 통해 에테르가 그의 손끝에 모이는 것을 느꼈다. 응축된 에너지가 푸른빛으로 섬광을 일으키며 목표물을 향해 뻗어 나갔다. 삑, 하는 경고음과 함께 목표물은 파괴되었지만, 현우의 점수는 여전히 학년 평균 이하였다.

    “또 중간에 에테르 흐름이 불안정했다.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건가?”

    교수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주변의 다른 학생들은 이미 현우보다 훨씬 높은 점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제어된 에테르를 능숙하게 다루며, 마치 기계처럼 정확한 동작으로 시뮬레이션을 수행했다. 특히 최상위 성적을 유지하는 유선우는 이미 다음 단계의 시뮬레이션에 들어가 있었다. 그는 모든 것이 쉬워 보였다.

    “현우야, 또 교수님한테 찍혔네.”

    쉬는 시간이 되자 옆자리에서 서연이 속삭였다. 서연은 에이레네 학원의 몇 안 되는 비공식 ‘정보통’이자 현우의 유일한 친구였다. 그녀는 현우와 달리 에테르 조작 실력은 뛰어났지만, 입이 문제였다.

    “너무 완벽하면 재미없잖아. 난 그냥 내 방식대로 하는 거지.” 현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 방식대로 하다가 졸업 못 하는 거 아니야? 너도 알잖아, 에이레네 학원의 졸업률이 얼마나 잔인한지.”

    서연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에이레네 학원은 인류의 미래를 짊어질 에테르 사용자들을 양성하는 곳인 만큼, 기준은 극도로 엄격했다. 졸업에 실패한 학생들은 에테르 제어 능력을 박탈당하고,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차단된 특별 관리 시설로 보내졌다. 그들의 미래는 그저 ‘잊혀지는 것’뿐이었다.

    “그래도 난 이 모든 게 좀 이상해.” 현우는 목소리를 낮췄다. “이 완벽함이 너무 인위적이라고 느껴지지 않아? 모든 게 정교하게 짜여진 무대 같아.”

    서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야, 그런 소리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여기는 듣지 못할 곳이 없어.”

    그녀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더니 다시 현우에게 바싹 다가붙었다.

    “하지만 네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이해는 가. 얼마 전, 저번에 내가 말했던 지하 오메가 구역에 대한 루머 말이야. 이번엔 진짜 심상치 않던데.”

    지하 오메가 구역. 에이레네 학원의 지하 최하층에 위치한, 지도에도 표기되지 않은 미지의 공간. 학생들 사이에서는 온갖 끔찍한 소문이 떠돌았다. 에테르 실험 실패자들을 가두는 곳이라느니, 학원장이 금지된 에테르를 연구하는 곳이라느니. 정작 학교 측에서는 그 존재조차 부인했다.

    “이번엔 또 뭔데?” 현우의 눈이 빛났다. 그는 그런 이야기에 유독 흥미를 느꼈다.
    “누군가 야간 순찰 로봇의 기록을 해킹했는데, 거기서 아주 희미하게 잡음 섞인 비명 소리가 들렸대. 그것도 지하 오메가 구역에서. 물론 학교 측은 시스템 오류라고 일축했지만… 너도 알잖아, 에이레네의 시스템은 완벽하잖아?”

    서연은 마지막 말을 강조하며 불안한 눈빛으로 현우를 바라봤다. 완벽하다고 자부하는 시스템에서 오류가 발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의 모순이었다. 현우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어릴 적, 학원에 입학하기 전, 할머니가 들려주었던 기묘한 옛날이야기. ‘빛나는 학교의 그림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때는 그저 잠자리 동화로만 여겼는데.

    “비명 소리라… 궁금해지는데.” 현우가 중얼거렸다.

    “궁금해하지 마! 여긴 들어가는 것 자체가 금기야.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잘 알잖아.” 서연이 필사적으로 현우를 말렸다.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일 때도 있어.”

    하지만 현우는 이미 다른 세계에 있었다. 그의 시선은 강의실 저 멀리, 복도 끝에 위치한 비상구 문에 닿아 있었다. 그 비상구는 평소엔 거의 사용되지 않는, 학생들에게는 그저 회색빛 벽의 일부처럼 여겨지는 곳이었다. 하지만 현우는 알고 있었다. 그 문이 지하 오메가 구역으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통로 중 하나라는 것을. 물론, 학원 시스템이 철저하게 봉쇄하고 있는 곳이었지만.

    수업 재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학생들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고, 교수는 냉기 어린 시선으로 현우를 훑었다.

    “강현우, 다음 시뮬레이션에서는 더 나은 집중력을 보여주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네게 남아있는 선택지는 많지 않을 것이다.”

    경고였다. 그것도 아주 직접적인. 하지만 현우는 교수의 경고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의 뇌는 이미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완벽한 에이레네 학원의 그림자 속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 그리고 그 비명 소리가 가리키는 미지의 공간. 그의 내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거부할 수 없는 호기심이 그를 충동질했다.

    그날 밤, 에이레네 학원의 모든 빛이 잠든 새벽, 현우는 조용히 기숙사를 빠져나왔다. 그의 손에는 서연이 건네준, 야간 순찰 로봇의 경로를 교란시킬 수 있는 일회용 에테르 교란기가 들려 있었다. 그는 복도를 따라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학원 전체를 지배하는 완벽한 통제 시스템은 마치 그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모든 것이 고요했다.

    어두운 복도 끝, 비상구 문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경고 문구가 붉은색 홀로그램으로 선명하게 떠 있었다. 현우는 심호흡을 했다. 그의 손이 문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시스템의 차단막을 우회하기 위해 에테르 교란기를 작동시키자, 문에 떠 있던 붉은 경고등이 잠시 깜빡이더니 이내 꺼졌다.

    띠링, 하는 작은 전자음과 함께 묵직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 사이로 뿜어져 나오는 냉기, 그리고 퀴퀴한 쇠 냄새가 현우의 코를 스쳤다.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인 낮은 진동음이 그의 발밑을 타고 올라왔다. 그 진동은 완벽한 에이레네의 심장과는 다른, 어딘가 일그러지고 억눌린 듯한 불길한 리듬이었다.

    현우는 천천히,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완벽한 에이레네 학원의 그림자가 시작되는 곳. 그곳에 숨겨진 끔찍한 진실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엘룬 숲은 늘 그랬다. 푸른 달빛이 잎사귀 사이를 비집고 내려와 고요히 잠든 대지를 깨울 때, 숲의 심장은 가장 선명하게 맥동했다. 고요함 속에서 생명이 숨 쉬는 소리가 들렸고, 수천 년 묵은 고목들은 침묵으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서 있었다.

    리라는 그 침묵 속에서 태어났다. 숲의 숨결과 함께 자라났고, 숲의 영혼이 그녀의 눈동자에 깃들었다. 초록빛 눈동자는 낮에는 싱그러운 이끼처럼 빛나고, 밤에는 희미한 인광을 띠며 어둠을 밝혔다. 길게 늘어뜨린 백금발은 허리께에서 작은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고, 뾰족한 귀는 바람의 속삭임마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실바니, 엘룬 숲의 고귀한 수호자 중 하나였다.

    오늘 밤도 리라는 숲의 가장자리를 순찰하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워 낙엽 한 장 건드리지 않았다. 오래된 나무뿌리들이 얽히고설킨 숲 바닥을 따라 미끄러지듯 나아갈 때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늘 같은 염려가 맴돌았다. ‘장벽’ 너머의 세상.

    엘룬 숲의 동쪽 끝에는 ‘어둠의 장벽’이라 불리는 거대한 마법의 장벽이 있었다. 실바니의 고위 현자들이 수천 년 전에 세운, 숲을 보호하고 이질적인 존재들의 침범을 막는 방벽이었다. 그 너머에는 ‘작열의 황무지’가 있었다. 칼라쉬의 땅이었다. 뜨거운 불과 검은 재, 그리고 끝없는 갈증으로 뒤덮인 땅. 그곳에 사는 이들은 실바니에게 있어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들과의 접촉은 금지되었다. 그것은 실바니의 가장 오래된 율법 중 하나였다.

    바람이 차가운 콧잔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평소와 다름없이 고요해야 할 장벽 근처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기척이 느껴졌다. 리라의 심장이 불현듯 차갑게 움츠러들었다.
    “…뭐지?”
    그녀는 나뭇가지에 몸을 숨기고 가늘게 눈을 떴다. 숲의 경계선이 희미하게 푸른빛을 뿜어내는 곳, 그곳에 그림자처럼 쓰러져 있는 형체가 있었다.
    인간의 형체. 하지만 실바니는 아니었다. 저 거친 옷차림, 붉은 기운이 감도는 피부, 그리고 어둠 속에서도 느껴지는 타는 듯한 기척은 분명… 칼라쉬였다.

    리라의 온몸에 경계심이 전율처럼 퍼져나갔다. 그는 엘룬 숲으로 넘어오려 한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장벽 근처에서 쓰러진 것인가? 율법은 명확했다. 그들을 돕지 마라. 그들을 숲으로 들이지 마라. 그들은 숲의 적이다.

    하지만 쓰러진 칼라쉬는 미동도 없었다. 한참을 지켜봐도 움직임이 없자, 리라의 머릿속에 혼란이 찾아왔다. 죽은 건가? 아니면… 위험한 덫인가?
    그녀는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림자에 몸을 숨긴 채 다가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조금 더 가까이. 아주 조금만 더.
    가까이 다가가자 희미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묵직한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쓰러진 칼라쉬는 젊은 남자로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얼굴에 들러붙어 있었고, 거친 야생 동물의 가죽으로 만든 듯한 옷은 찢겨 너덜거렸다. 오른팔에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그곳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나와 숲의 이끼를 더럽히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낡고 거친 단검이 쥐여 있었지만, 힘없이 떨어져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활과 화살통이 매여 있었다. 사냥꾼이거나 전사일 터였다.
    그는 살아있었다. 그러나 죽음 직전이었다.

    리라는 숨을 멈췄다. 율법. 금지된 접촉. 하지만… 눈앞의 존재는 단순한 적이 아니었다. 죽어가는 생명이었다. 숲의 아이들은 모든 생명을 존중하도록 배웠다. 심지어 숲을 해치려는 존재의 생명까지도. 그러나 칼라쉬는 달랐다. 그들은 숲을 파괴하는 자들이었다.

    “크윽…”
    남자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힘겹게 열렸다. 핏줄이 선명한 붉은 눈동자가 리라를 향했다. 경계심, 고통, 그리고 짙은 절망이 그 눈동자에 뒤섞여 있었다.
    리라는 얼어붙었다. 붉은 눈. 숲의 색이 아닌, 불의 색을 닮은 눈. 낯설고 위험한 색이었다.

    남자는 그녀를 보았다. 푸른 달빛 아래서 빛나는 백금발과 초록빛 눈동자. 그는 분명 그녀가 실바니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의 얼굴에 순간적인 경악과 당혹감이 스쳤다.
    “…너…는…” 그의 목소리는 끓는 쇠붙이처럼 거칠고 메말라 있었다. “…숲의… 요정인가…”
    리라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그를 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초록 눈동자에 닿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경계심 가득했던 눈빛에서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 다른 감정이 엿보였다. 마치… 숲의 고요함에 압도된 듯한, 혹은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가지…마라…” 그는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부탁이니…카…엘…”

    카엘? 그의 이름인가?
    리라는 그가 자신을 잡으려 하는지, 아니면 단지 본능적으로 손을 뻗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그리고 그의 눈꺼풀이 다시 감겼다. 이번에는 영원히 닫힐 것 같은 기세였다.

    그녀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율법? 금지된 접촉? 숲의 적?
    하지만 저건, 그냥… 죽어가는 남자였다.
    그의 숨결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그는 곧 죽을 것이다. 숲의 경계선에서. 숲의 아이가 지켜보는 앞에서.

    리라는 망설였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찰나는 그녀의 평생보다 길게 느껴졌다.
    결국 그녀의 손이 움직였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남자의 이마를 덮은 검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그의 피부는 예상보다 뜨거웠다. 황무지의 열기가 그의 몸에 스며든 듯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엘룬 숲은 늘 고요했고, 밤의 순찰자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것은 그녀만의 비밀이 될 것이다.

    “도와줄게…”
    나직이 속삭인 그녀의 목소리는 숲의 바람 속에 흩어졌다.
    리라는 무릎을 꿇고 앉았다.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굳어 딱딱해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옷자락을 찢어내 남자의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숲의 영혼에 간절히 빌었다. 제발, 그를 살려달라고. 그녀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은 숲의 율법보다 더 강렬한 무언가에 이끌리고 있었다.
    이것은 금지된 시작이었다. 누구도 알지 못할, 오직 숲과 그녀만이 아는 비밀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비밀은, 엘룬 숲의 고요함을 산산이 부술 폭풍의 씨앗이 될 것이었다.

  • 이세계 전생 (Isekai)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건 코끝을 찌르는 흙먼지의 비릿한 향이었다. 그리고 목구멍을 긁는 듯한 건조함. 숨을 쉬자 폐가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여기가 어디지? 잠시 눈꺼풀을 깜빡였다. 익숙한 천장이 아닌, 온통 낯선 색감의 하늘이 시야를 채웠다. 잿빛에 가까운 희뿌연 하늘. 중앙에는 붉은 기운이 감도는 거대한 구름 덩어리가 기이하게 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상처처럼.

    몸을 일으키려 하자 온몸의 관절이 삐걱거렸다. 근육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등 뒤에는 딱딱하고 거친 것이 닿아 있었다. 겨우 상체를 세우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건물 잔해들. 무너져 내린 고층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채 하늘을 찔렀다. 콘크리트 조각과 철근이 뒤엉켜 마치 거대한 괴물의 시체를 보는 듯했다. 멀리까지 이어진 폐허는 어떤 생명의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죽음의 도시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먼지가 흩날렸고, 찢어진 간판 조각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내가 알던 세계가 아니었다. 절대.

    “이게… 뭐야?”

    메마른 입술 사이로 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내 목소리인데도 낯설었다. 어제의 나는 분명 따뜻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었다. 출근 걱정에 뒤척이긴 했지만, 눈을 뜨면 늘 보던 익숙한 풍경이 펼쳐져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폐허, 잿빛 하늘, 그리고 이 기이한 건조함.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꿈인가? 하지만 이 생생한 흙먼지 냄새, 거친 바닥의 감촉, 그리고 목마름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었다.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돌멩이를 쥐었다. 거친 표면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팠다. 꿈이 아니었다.

    나는 허망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쓰러져 있던 곳은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버스 정류장 같은 곳이었다. 녹슨 철제 기둥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널려 있었고, 먼지 쌓인 의자만이 겨우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 간판도 녹슬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들이 희미하게 박혀 있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여기가 어디인지, 왜 여기에 있는지,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하지만 당장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단 하나였다. 목마름.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살갗은 거칠고 갈라지는 것 같았다.

    “물…”

    몸을 일으키자 현기증이 몰려왔다.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며 주위를 살폈다. 물! 물을 찾아야 했다. 어디든 좋으니, 마실 수 있는 물. 폐허 속에서 그런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당장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었다.

    몸을 이끌고 정류장을 벗어났다. 깨진 아스팔트 바닥은 열기로 가득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작은 돌멩이들이 굴러다녔다.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건물 잔해 속에서 어떤 표지판 같은 것을 발견했다. 희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좌절일까?

    무의식중에 그곳으로 향했다. 폐허가 된 도시는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바람 소리, 잔해들이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내 거친 숨소리만이 전부였다. 이 고요함이 더 무서웠다. 마치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겨우 표지판이 있던 곳에 다다랐을 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녹슨 철제 구조물에 붙어 있던 안내판. 원래는 화려한 그림과 글자로 가득했겠지만, 지금은 대부분이 부식되어 알아볼 수 없었다. 다만, 희미하게 남아 있는 글자들이 있었다. 아주 오래된 언어 같았다. 내가 알던 한글도, 영어도 아니었다. 그림처럼 생긴 글자들이었다.

    안내판 아래에는 마치 거대한 도마뱀 발자국 같은 희미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발자국이라기엔 너무 크고 불규칙했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흔적은 대체 무엇이지? 동물? 아니면… 괴물?

    목마름이 두려움을 압도했다. 우선 물을 찾아야 했다. 안내판 주위를 둘러보자, 부서진 건물과 건물 사이에 희미하게 이어진 길이 보였다. 어쩌면 그 길 끝에 생명의 흔적, 하다못해 버려진 물통이라도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로 그 길을 택했다.

    햇볕은 점차 뜨거워졌다. 잿빛 하늘 한가운데 붉은 구름이 여전히 이글거리는 상처처럼 떠 있었다. 발이 아파왔다. 신발은 어디로 갔는지 맨발이었다. 발바닥이 거친 바닥에 쓸려 따끔거렸다. 고통이 정신을 맑게 했다. 나는 살아야 했다. 이유도 모른 채 여기에 던져졌지만,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폐허 속에서 유난히 온전하게 남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을 발견했다. 거대한 원형 구조물이었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지만, 외벽만큼은 멀쩡했다. 그리고 그 옆, 녹슨 수도관이 보였다.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달려갔다. 찢어진 옷자락이 나부꼈다. 수도관 끝에는 녹슨 수도꼭지가 매달려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수도꼭지를 잡고 돌렸다. ‘끼이이익-‘ 끔찍한 쇳소리가 나더니,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털썩 주저앉았다. 허탈감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갔다. 절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렇게 끝나는 건가? 아무것도 모른 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죽는 건가?

    그때였다.

    ‘스스슥…’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도, 잔해 부딪히는 소리도 아니었다. 마치 무언가가 땅을 기어가는 듯한 소리.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얼어붙은 듯 몸을 굳혔다. 혹시, 아까 그 발자국의 주인일까?

    고개를 돌렸다. 부서진 건물의 그림자 속에서, 기다란 형체가 스르륵 기어 나오고 있었다. 흙먼지색과 비슷한 피부에, 등에는 울퉁불퉁한 돌기가 솟아 있었다. 뱀 같기도 하고, 도마뱀 같기도 했다. 하지만 크기는 인간보다 훨씬 거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눈동자. 번뜩이는 붉은 눈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죽음의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켰다. 나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그 괴물을 응시했다. 괴물은 천천히, 그러나 집요하게 이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살아야 한다. 살아야 해! 본능적인 외침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 폐허는 단순히 죽음의 도시가 아니었다. 이곳은,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 메카 액션 상세한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

    천재적인 한국인 작가, 여기 당신의 상상력을 자극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목:** 별의 심장, 금지된 멜로디 (Heart of the Star, Forbidden Melody)

    **장르:** 메카 액션, 로맨스, SF

    **로그라인:** 인류와 이종족 ‘아크리드’의 피로 물든 전쟁 속, 최정예 철기 파일럿 강하준은 치명적인 추락 현장에서 적대 종족의 존재 ‘시엘’과 마주한다. 증오와 공포를 넘어선 두 존재의 만남은 금지된 사랑의 씨앗이 되고, 그들의 선택은 우주 전체의 운명을 뒤흔들게 된다.

    **[프롤로그]**

    **장면 1: 우주, 치열한 전장 (시간: 밤)**

    **[내레이션 (강하준)]**
    나는 강하준. 인류 최정예 철기 파일럿. 녀석들은 우리를 ‘침략자’라 부르지. 우리는 녀석들을 ‘괴물’이라 욕했다. 끝없이 펼쳐진 전선, 피 끓는 전장에서 기계가 굉음을 토하고, 살점이 찢겨 나가는 지옥도. 그게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화면: 검은 우주를 가르는 수많은 인류의 우주 전함들. 거대한 메카, ‘철기(鐵機)’들이 붉은 광선을 뿜으며 적과 교전 중이다. 멀리, 푸른빛을 띠는 행성을 감싸는 거대한 링 콜로니의 불빛이 아득하다. 폭발의 섬광이 우주를 순간순간 밝힌다.)**

    **(철기 내부 조종석. 강하준의 얼굴이 땀방울로 번들거린다. 그의 날카로운 눈은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고, 능숙한 손은 조이스틱 위에서 춤을 추듯 움직인다. ‘발키리’라는 이름이 새겨진 그의 철기 ‘발키리 7’이 화면 한편에 강렬하게 비친다.)**

    **[강하준 (무전, 거친 숨소리)]**
    본부, 여기 발키리 7! 좌현 전방, 아크리드 신형 고속정 포착! 제 3소대, 산개! 망설이지 마라!

    **(하준의 철기 ‘발키리 7’이 마치 거대한 새처럼 기민하게 기동한다. 주변 철기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완벽한 대형을 이루며 흩어진다. 거대한 고래를 닮은 듯한, 유기체 갑피로 뒤덮인 아크리드의 생체 전투함들이 붉은 에너지 포를 발사하며 끈질기게 덤벼든다.)**

    **(쉴 틈 없는 전투. 철기들의 플라즈마포가 밤하늘을 수놓고, 아크리드의 생체함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기체 미사일들이 사방에서 폭발한다. ‘발키리 7’은 적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맹공을 퍼붓는다. 하준의 조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강하준 (내면)]**
    젠장, 놈들의 수가 예상보다 훨씬 많아. 이건 단순한 정찰대가 아니야… 완벽한 매복이었군!

    **(하준의 스크린에 경고음이 울린다. 후방 사각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아크리드 전투기가 그의 철기를 덮친다. ‘발키리 7’의 방어막이 붉게 번쩍이며 치명타를 알린다. 콕핏 내부에 경고등이 요란하게 깜빡인다.)**

    **[시스템 (AI 음성)]**
    경고! 후방 엔진 동력 80% 손실! 주동력원 치명적 손상! 긴급 착륙 모드 전환! 파일럿… 생존율 12%!

    **[강하준 (크게 소리치며, 피 섞인 기침)]**
    개자식들! 이 정도로는 날 못 죽여! 절대!

    **(하준은 필사적으로 조종간을 당기지만, 철기는 이미 제어 불능 상태.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대기권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강하준 (무전, 간신히)]**
    본부! 여기 발키리 7, 대기권으로 진입한다! 좌표… 흐으윽… 젠장!

    **(화면이 지직거리며 이내 끊긴다. 하준의 철기는 불타는 유성처럼 행성 표면으로 곤두박질친다. 그가 추락하는 행성은 인류에게 ‘미개척지’이자 ‘아크리드의 서식지’로 규정된 곳이었다. 한 번도 제대로 발을 디딘 적 없는, 금지된 땅.)**

    **[내레이션 (강하준)]**
    그때, 난 몰랐다. 내가 추락한 곳이 단순한 적의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그곳은… 나의 모든 신념과 가치를 송두리째 뒤흔들 운명의 시작점이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본편]**

    **장면 2: 미지의 행성, 추락 현장 (시간: 낮, 이질적인 푸른 빛)**

    **(지면에 깊게 박힌 하준의 철기 ‘발키리 7’. 여기저기 찢겨나가고 불에 그을려 본래의 위용을 잃었다. 거대한 기체의 잔해가 숲을 갈라놓았다. 숲은 낯선 색깔의 식물들로 가득하다. 보라색 덩굴, 형광 초록빛 이끼, 거대한 버섯 모양의 나무들이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기는 옅은 푸른 안개로 자욱하고, 멀리서 낯선 새들의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철기 콕핏 내부. 강하준은 피를 흘리며 간신히 정신을 차린다. 헬멧의 HUD는 산산조각 나 있고, 몸은 여기저기 부러진 듯 쑤신다. 의식의 끈을 간신히 붙잡고, 손을 뻗어 비상 탈출 버튼을 누른다.)**

    **(철기 한쪽 문이 ‘쉬이이익’ 소리를 내며 열린다. 하준은 기침하며 밖으로 나온다. 낯선 공기가 폐부를 찌른다. 폐허가 된 철기를 등지고 주위를 둘러본다. 그의 시야는 흐릿하다.)**

    **[강하준 (힘겹게 중얼거린다)]**
    젠장… 대체 여긴 어디지?… 통신은… 먹통인가.

    **(손목의 통신 장치를 확인하지만, ‘신호 없음’ 메시지만 뜬다. 주변의 낯선 풍경에 그는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는 허리춤의 권총을 뽑아 들고, 절뚝이며 숲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한쪽 팔이 축 늘어져 있다.)**

    **(숲은 소름 끼치도록 고요하다.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오직 하준의 거친 숨소리와 발소리, 그리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소리만이 울린다.)**

    **[강하준 (내면)]**
    놈들이 벌써 감지했을 텐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함정인가? 아니면…

    **(문득,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춘다. 숲속 깊숙이 자리한 작은 연못가. 신비로운 푸른 빛을 내는 식물들 사이로, 한 존재가 웅크리고 있다. 마치 이 행성의 일부인 것처럼.)**

    **(클로즈업: 하준의 눈이 커진다. 그는 권총을 단단히 쥔다. 본능적인 경고음이 머릿속을 스친다.)**

    **[강하준 (내면, 경고음)]**
    아크리드…! 이 행성의 괴물…!

    **(하지만… 이상하다. 그 존재는 지금까지 그가 싸워왔던, 거칠고 흉포한 아크리드 전사들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푸른빛이 감도는 비늘 같은 피부, 길게 늘어진 은발, 그리고 등 뒤로 돋아난 투명한 날개 같은 구조물.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멍하니, 그리고 슬픈 듯이 바라보고 있다. 그 모습은… 경외로울 만큼 아름다웠다. 마치 전설 속 요정처럼.)**

    **(그녀는 연약해 보였다. 등 뒤의 날개는 한쪽이 살짝 꺾여 있었고, 가녀린 어깨는 불안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길을 잃은 나비처럼, 상처 입은 새처럼.)**

    **[강하준 (내면)]**
    …부상당했나?

    **(하준은 잠시 망설인다. 그의 교육은 ‘모든 아크리드는 적이며, 인류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눈앞의 이 존재는… 증오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연약한 생명체처럼 보였다. 괴물이라 부르기엔 너무나 인간적인 슬픔을 안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린다. 작은 떨림이 하준의 굳게 닫힌 심장을 파고든다.)**

    **[강하준 (내면)]**
    울고 있어…? 괴물이… 운다고? 거짓말인가?

    **(그때, 그녀가 고개를 들어 하준을 본다. 크고 푸른 눈동자가 놀라움과 함께 깊은 슬픔을 담고 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를 기다렸다는 듯, 혹은 그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그 시선은 하준의 내부 깊숙한 곳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그녀의 시선이 하준의 얼굴에서, 그의 부러진 철기를 거쳐, 다시 그의 눈으로 돌아온다. 그 눈빛에 적의는 단 한 조각도 없었다. 오직 연민과 호기심, 그리고 옅은 고통만이 담겨 있을 뿐이었다.)**

    **[강하준 (조심스럽게, 낮은 목소리로)]**
    …너… 아크리드인가?

    **(그녀는 하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분명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녀는 가녀린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나지막이, 마치 노래하듯 속삭인다.)**

    **[시엘 (이질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음성)]**
    …시엘.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맑은 물방울이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혹은 바람에 흔들리는 수정들의 속삭임 같았다. 하준은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권총을 내린다. 방아쇠를 당길 마음이 사라졌다.)**

    **[강하준]**
    시엘…? 그게 네 이름인가?

    **(시엘은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녀의 움직임은 숲속의 바람처럼 부드러웠다. 그녀는 하준에게 한 발짝, 또 한 발짝 다가선다. 망설임 없는 걸음이었다.)**

    **[강하준 (내면)]**
    다가온다… 공격하려는 건가? 아니, 저 눈빛은…

    **(시엘은 하준의 어깨에 난 상처를 발견한다. 그의 제복이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린다. 슬픔과 함께, 깊은 연민이 그 안에 가득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하준의 상처에 가져다 댄다. 놀랍게도,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하준의 상처를 부드럽게 감싼다. 찢어졌던 피부가 다시 이어지고, 뼈마디가 제자리를 찾는 듯한 느낌. 고통이 거짓말처럼 가라앉는다.)**

    **[강하준 (놀라서)]**
    …뭐하는… 거야?

    **(시엘은 아무 말 없이 하준의 상처가 아물어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녀의 표정에는 깊은 걱정과 함께, 묘한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자, 그녀는 손을 거둔다. 하준은 조심스럽게 팔을 움직여본다. 통증이 사라졌다. 상처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강하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림)]**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시엘은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그 미소는 숲의 신비로운 분위기와 어우러져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그녀는 다시 연못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곳에는 그녀의 거울 같은 모습이 비쳐 있었고, 그 옆에 하준의 얼굴이 흐릿하게 함께 흔들리고 있었다. 두 이질적인 존재의 얼굴이 나란히.)**

    **[시엘 (작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전쟁… 끝나… 언제…?

    **(하준은 깜짝 놀란다. 그녀가 인간의 말을 완벽하진 않지만,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심지어 자신의 감정까지 읽는 듯한 물음이었다.)**

    **[강하준]**
    네가… 인간의 말을? 어떻게…?

    **[시엘]**
    …조금… 들려… 마음의… 소리… 고통의… 울림…

    **(하준은 혼란스럽다. 그녀는 단순히 ‘적’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와 소통하고, 그를 이해하려 하며, 심지어 치유까지 해주는 존재였다. 그가 평생을 증오하고 싸워왔던 ‘괴물’의 정의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강하준 (내면)]**
    이게… 대체… 뭘까. 내가 아는 모든 것이 부정당하는 기분이야. 저 푸른 눈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보고 있어.

    **(시엘은 하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 속에서, 우주의 모든 슬픔이 응축된 것 같은 깊이를 느낀다. 오래된 상처와 끊임없는 비극의 흔적.)**

    **[시엘]**
    …너도… 아파…?

    **(하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질문들이 터져 나오려 했다. ‘우리는 왜 싸우는가?’, ‘정말 녀석들이 괴물인가? 아니면… 우리가 괴물인가?’.)**

    **[강하준 (조용히,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진심을 담아)]**
    …그래. 나도… 아파. 매일… 매 순간.

    **(시엘은 하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는다. 그녀의 손은 차갑고 부드러웠다. 두 종족의 손이, 증오의 벽을 넘어 처음으로 맞닿은 순간이었다.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때, 멀리서 ‘쿠구궁… 쿠구구궁…’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지면이 미세하게 흔들린다. 하준의 통신 장치가 잠시 ‘지직’거리는 소음을 낸다. 구조 신호인가? 아니면… 더 큰 위험인가?)**

    **[강하준 (급히 손을 놓고 경계하며)]**
    무슨 소리야?… 젠장, 인류 구조대인가? 아니면… 아크리드 증원군인가?

    **(시엘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친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하준을 바라본다.)**

    **[시엘]**
    …위험해… 너… 가야 해…

    **[강하준]**
    위험? 뭐가? 네 종족이 오는 건가? 공격하려는 건가?

    **(시엘은 고개를 젓는다. 그녀의 시선은 숲 너머, 연못 반대편을 향한다. 그곳에서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숲의 모든 생명체가 침묵하는 듯한 기괴한 정적.)**

    **[시엘]**
    …그들… 아니야… 이 행성의… 어둠… 원시의… 분노…

    **(하준은 시엘이 가리키는 방향을 본다. 거대한 그림자가 숲을 잠식해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아크리드도, 인류의 병기도 아니었다. 훨씬 더 오래되고, 원초적이며, 압도적인 위협의 기운이었다. 본능이 경고를 외친다.)**

    **[강하준 (내면)]**
    이 행성에… 또 다른 위협이 있다고? 시엘의 종족마저 두려워하는 존재?

    **(시엘은 하준의 손을 다시 잡고, 그의 시선을 자신의 눈에 고정시킨다. 그녀의 눈빛 속에서 결연한 의지와 함께, 애절한 작별의 예감이 스쳐 지나간다.)**

    **[시엘]**
    …살아… 남아야 해… 하준…

    **(그녀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하준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어떻게 자신의 이름을 아는 걸까? 이미 자신의 마음을 읽었단 말인가?)**

    **(시엘은 하준의 손에 작은 보라색 수정 조각을 쥐여준다. 수정은 은은하게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손에 닿자마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시엘]**
    …이것이… 널… 지켜줄 거야… 우리의… 약속…

    **(강하준이 수정을 꽉 쥐려는 순간, 숲 너머에서 거대한 발소리가 들려온다. ‘콰아앙! 콰앙!’ 거목이 쓰러지는 소리가 숲을 뒤흔든다. 피와 살을 찢는 듯한 괴물의 포효가 들린다.)**

    **[강하준 (절박하게, 시엘을 감싸듯)]**
    시엘! 넌 어떻게 하려고! 같이 가야 해!

    **(시엘은 하준을 숲의 깊은 곳으로 밀어 넣는다. 그녀의 눈은 단호했다. 그리고 그 속에는… 애절함과 함께, 그를 향한 깊은 사랑이 담겨 있었다. 슬픈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린다.)**

    **[시엘]**
    …잊지 마… 너와… 나… 다르지 않아… 우리는… 같아…

    **(시엘의 몸에서 푸른빛이 강렬하게 폭발한다. 눈을 멀게 하는 강렬한 섬광. 그 빛은 하준의 시야를 가린다. 빛이 걷히자, 시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는 오직 푸른빛을 발하는 작은 식물만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시엘의 잔상처럼.)**

    **[강하준]**
    시엘! 안 돼!

    **(하준은 그녀를 부르지만, 대답은 없다. 그리고 숲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괴물의 형체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날카로운 발톱, 짐승 같은 눈. 그것은 이 행성의 원시적인 포식자였다. 시엘이 말했던 ‘행성의 어둠’.)**

    **(하준은 시엘이 쥐여준 수정을 꽉 쥔다. 그의 마음속에는 혼란과 함께, 이종족에 대한 증오가 아닌, 묘한 그리움과 다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를 다시 만나야 한다는, 알 수 없는 확신.)**

    **[내레이션 (강하준)]**
    그녀는 적이 아니었다. 그녀는… 희망이었다. 내가 잊고 있던, 어쩌면 인류가 잃어버린… 무언가의 조각이었다. 이 금지된 땅에서, 나는 내 운명의 상대와 마주했다. 그리고 이제, 나는 더 이상 이전의 내가 될 수 없었다. 이 전쟁은… 내가 알던 것과 다르다.

    **(하준은 권총을 겨누고 어둠 속으로, 괴물을 향해 뛰어든다. 그의 눈빛은 결연하다. 그의 손에 쥐인 수정은 계속해서 푸른빛을 발하며, 그에게 힘을 불어넣는 듯했다.)**

    **[에필로그]**

    **장면 3: 우주, 인류 함대 (시간: 낮, 며칠 후)**

    **(하준은 간신히 구조되어 인류 함대의 메디컬 베드에 누워 있다. 얼굴은 수척하지만,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깊고 복잡하다. 마치 다른 세계를 보고 온 사람처럼.)**

    **(옆에는 그의 상관인 ‘사령관 리암’이 서 있다. 리암은 중후한 표정으로 하준을 내려다본다. 그의 눈에는 의심과 함께 안도감이 서려 있다.)**

    **[사령관 리암]**
    발키리 7, 강하준. 자네가 살아 돌아온 건 기적이다. 정찰대가 자네의 철기 잔해를 발견하고, 그 근처에서 정신을 잃은 자네를 찾아냈지. 행성의 원시 생명체에게 공격받은 흔적이 역력하던데.

    **[강하준]**
    …죄송합니다, 사령관님. 철기를 잃었습니다.

    **[사령관 리암]**
    철기는 다시 만들면 된다. 중요한 건 자네의 생환이다. 그런데… 자네, 추락 현장에서 특이한 점은 없었나? 아크리드 병력의 동향이라든가, 다른… 접촉은?

    **(하준은 잠시 침묵한다. 그의 주머니 속에서 시엘이 준 수정이 은은하게 빛나는 것을 느낀다. 그의 눈빛이 흔들린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숨긴다.)**

    **[강하준 (침착하게, 아무렇지 않은 듯)]**
    …아니요. 특이점은 없었습니다. 그저… 원시 행성의 맹수들과 조우했을 뿐입니다. 전투 불능 상태에서 간신히 버텼습니다. 기적적으로…

    **(리암은 하준의 눈을 꿰뚫어 볼 듯 응시한다. 무언가 숨기는 듯한 표정을 읽으려 하지만, 하준은 완벽하게 무표정하다. 리암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사령관 리암]**
    알겠다. 쉬도록. 자네는 중요한 전력이다. 회복하는 대로 보고서를 제출하게.

    **(리암이 조용히 떠나자, 하준은 주머니에서 수정을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수정은 따뜻한 푸른빛을 발한다. 하준은 그것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마치 기도를 올리듯 중얼거린다.)**

    **[강하준]**
    시엘…

    **(그의 눈동자 속에는, 인류와 아크리드의 전쟁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가 비치고 있었다. 그 세계의 중심에는 푸른 눈을 가진 한 이종족 여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목소리를, 손길을, 그리고 그녀의 슬픈 눈빛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었다.)**

    **(화면은 하준의 손에 든 수정과 그의 복잡하고도 결연한 눈빛에 클로즈업되며, 다음 이야기를 예고하듯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내레이션 (강하준)]**
    세상이 말하는 적. 내가 만난 운명. 이제 나의 전쟁은… 시작되었다. 인류와 아크리드. 그들의 적이 같은 존재라면, 우리는…

    **[장면 끝]**

  • 선협 (신선)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증오의 칼날

    하늘은 언제나 멍든 것처럼 푸르스름했다. 구름 때문이 아니라, 절망과 잊힌 피 냄새가 뒤섞인 독한 기운이 지상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척박한 땅. 한때는 풍요로운 영맥이 흐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유청이 이끄는 흑룡파에 감히 맞섰던 수많은 수련자들의 무덤이 되어 버린 폐허였다.

    진무는 척박한 땅의 가장 깊은 곳, 영기마저 씨가 마른 폐허 속에서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과도 같았다. 햇살 한 점 들지 않는 동굴 속에서 십 년을 보냈다. 십 년 전, 그는 사형 유청과 함께 천하를 주름잡을 운명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 운명은 사형의 칼날 아래 산산조각 났다. 심장을 꿰뚫고, 영맥을 파괴하며, 그가 애써 수련하던 칠성비검(七星秘劍)의 핵심 비법을 훔쳐 달아난 유청의 얼굴은 아직도 꿈속에서 선명했다. 그의 등에는 끔찍한 상흔이 남아있었다. 단순한 상처가 아니었다. 칠성비검을 빼앗기며 그의 영혼마저 찢긴 듯한 흔적이었다.

    한때는 불멸을 향해 나아가던 천재적인 수련자였던 그. 지금은 하나의 불타는 목적, 오직 복수만을 위해 존재하는 망령과 같았다. 산산이 부서진 그의 수련 경지는 잿더미 속에서 힘들게 재건되었다. 순수한 영기가 아닌, 어둡고 더욱 강력한 무언가로. 바로 그의 끝없는 증오와 절망의 본질로. 그 누구도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금지된 길이었다.

    그는 조용히 일어섰다. 포식자처럼 유려하고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다. 한때 명문 문파의 제복이었던 그의 낡은 도포는 이제 그의 야윈 몸에 두 번째 피부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흙과 마른 피로 얼룩진 도포는 그의 현재를 대변했다. 그는 칼을 쥐고 있었다. 명장들이 만들어낸 보검이 아니었다. 저주받은 땅 깊은 곳에서 발견한 운석 조각을 직접 깎아 만든 거칠고 삐죽삐죽한 검이었다. 그 검은 그의 증오를 닮은 낮고 사악한 기운으로 윙윙거렸다.

    오늘, 그 척박한 땅의 경계에 이질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옷차림과 오만한 태도는 그들이 누구의 소속인지 명확히 알려주었다. 흑룡파의 하수인들. 그들은 이 폐허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아마도 유청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진무의 옛 흔적을 지우기 위한 마지막 조각들을.

    진무는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그의 눈이 번뜩였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자는 얼굴에 흉터가 길게 나 있었고, 그의 허리에는 유청의 옆에 붙어 다니던 자만이 찰 수 있는 흑룡패가 걸려 있었다. 박무진. 그놈은 십 년 전, 유청이 진무를 배신할 때 옆에서 비웃던 자였다.

    “이런 황무지에서 뭘 찾겠다고 난리야? 그냥 태워버리면 그만이지.” 박무진이 투덜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권태가 가득했다.
    “사형께서는 그자의 잔재라도 남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이 척박한 땅은 진무가 사라진 곳이다. 사형의 마음속에 그 망령이 남아있는 한, 우리는 계속 찾아야 한다.” 부하 중 하나가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유청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이 엿보였다.
    진무의 입술 한쪽이 싸늘하게 비틀렸다. ‘망령? 그래, 나는 망령이다. 너희를 지옥으로 끌고 갈 망령.’

    박무진이 주위를 둘러보며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런 잔재를 찾느니 차라리 술이나 마시는 게 낫겠다. 어차피 진무는 이미 죽어 썩어 문드러졌을 테니.”
    그 말이 진무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피를 끓게 만들었다. 그의 몸 안에서 억눌렸던 어둠의 기운이 꿈틀거렸다. 기다림은 끝났다.

    진무는 바위 뒤에서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의 발걸음은 흙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았다.
    박무진 일행은 뒤늦게 인기척을 느끼고 진무를 돌아봤다.
    “누, 누구냐!” 한 부하가 검을 뽑으려다 멈칫했다. 진무의 얼굴은 어둠 속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감출 수 없었다.
    “내가 누구냐고?” 진무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나온 목소리는 마른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 같았다. “나는… 너희가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림자다.”

    박무진은 진무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애썼다. 십 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그의 얼굴은 흉터로 뒤덮여 있었고 이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 눈빛만은, 그 절망과 증오가 뒤섞인 눈빛만은 박무진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었다.
    “너… 너는 설마…” 박무진의 얼굴에서 오만함이 사라지고 불안감이 스쳤다. 십 년 전의 그 모습과는 너무나 달랐지만, 그 눈빛은 오직 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진무… 살아있었나?!”
    진무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얼음장 같았다. “살아있는 것이 지옥이었다. 그리고 너희는 그 지옥을 만든 자들 중 하나다.”

    박무진은 당황했지만, 이내 허세와 오만함을 되찾으려 애썼다. “흥! 시체나 다름없는 놈이 감히! 어서 저놈을 처리해라!”
    그의 명령에 흑룡파 무사들이 진무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의 검 끝에서 푸른 영기가 번뜩였다.
    진무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운석검이 낮게 울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진무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영기가 아니었다. 생명을 앗아가는 차가운 죽음의 기운이었다.

    “크아악!”
    가장 먼저 달려든 두 명의 무사가 진무에게 닿기도 전에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들의 몸은 마치 시간이 역행한 듯 순식간에 시들어 버렸다. 피부는 갈라지고, 살점은 말라붙어 뼈만 남은 미라처럼 변했다. 검은 기운이 그들의 생명력을 완전히 빨아들인 것이다.

    박무진의 눈이 공포로 커졌다. “이… 이건 무슨 마도(魔道)인가!”
    진무는 대답 대신 앞으로 나섰다. 그의 걸음 한 걸음마다 땅이 미약하게 떨렸다. 운석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은 실체가 없는 듯하면서도 모든 것을 꿰뚫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한 무사가 진무의 옆구리를 노려 검을 휘둘렀다. 진무는 몸을 살짝 비틀어 공격을 피했고, 동시에 운석검을 휘둘러 그 무사의 팔을 잘라냈다. 하지만 단순한 절단이 아니었다. 팔이 잘려 나간 자리에서 피 대신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고, 무사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그 자리에서 먼지처럼 스러졌다.

    진무의 움직임은 예측할 수 없었다. 십 년 전, 칠성비검을 연마하던 그의 움직임은 우아하고 정교했지만, 지금의 그는 야수 같았다. 오직 파괴만을 위한 움직임. 그는 적의 영맥을 노리지 않았다. 그들의 생명 그 자체를 노렸다.

    “이런 괴물!”
    박무진이 외치며 자신의 무기를 꺼냈다. 거대한 철퇴였다. 그는 필사적으로 진무에게 달려들며 철퇴를 휘둘렀다. 쾅! 철퇴가 바위를 부수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진무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박무진의 뒤에 있었다.

    “유청은… 너와 같은 자들을 쓰레기처럼 부릴 자격이 없었다.”
    진무의 목소리가 박무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박무진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는 필사적으로 몸을 돌려 반격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운석검이 그의 심장을 향해 꽂혔다. 쨍그랑! 검이 박무진의 가슴에 부딪히며 맑은 소리를 냈다. 그는 호신 영보를 착용하고 있었다. 흑룡파의 고위 간부에게 주어지는 단단한 방어 영보였다.
    “하하하! 겨우 그따위 검으로 내 영보를 뚫을 수 있을 줄 알았느냐!” 박무진이 비웃었다. 공포 속에서도 한 줄기 승리감에 젖은 듯했다.
    진무의 입가에 다시 그 얼음장 같은 미소가 걸렸다. “내가 뚫는 것은… 네놈의 영보가 아니다.”

    그 순간, 운석검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박무진의 호신 영보를 뚫고 들어가는 대신, 그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박무진은 자신의 영맥이 서서히 침식당하는 것을 느꼈다. 육체가 찢어지는 고통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소멸하는 듯한 극한의 고통이었다.

    “크아아아악!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마, 마물인가!”
    박무진의 눈은 흰자만 남은 채 뒤집혔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쭈그러들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옷이 썩어 문드러지듯, 그의 살점과 근육이 검은 기운에 녹아내렸다. 그의 영혼마저 검은 기운에 휩싸여 뽑혀 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절규하며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진무를 올려다봤다.

    “유청… 그… 그놈은… 널… 죽여서… 비… 비법을…”
    박무진은 간신히 유청의 이름을 내뱉으려 했지만,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은 완전히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그의 흑룡패만이 땅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었다.

    진무는 떨어져 있는 흑룡패를 내려다봤다. 증오와 공허함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비법? 그래, 그놈은 내가 피땀 흘려 익힌 비법을 탐했다. 내 목숨과 맞바꾼 비법을.” 진무는 중얼거렸다. “네놈들은 그저 유청의 개였을 뿐. 하지만 그 대가는 너희의 영혼이 치르는 것이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어둠이 짙게 깔린 하늘은 그의 심장과 같았다.
    “유청… 너는 내 모든 것을 앗아갔다. 내 영혼, 내 미래, 내 모든 희망을. 하지만 이제… 나는 너에게서 모든 것을 되찾을 것이다. 네가 소중히 여기는 모든 것을, 내가 겪었던 고통보다 더 처절하게 빼앗을 것이다.”

    그의 손에 들린 운석검은 마치 그의 말을 이해하는 듯 낮게 진동했다. 검은 기운이 진무의 몸을 감쌌다. 십 년 전, 그는 죽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복수의 화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의 심장은 이제 뜨거운 피 대신 차가운 증오로 뛰고 있었다.

    진무는 흑룡패를 발로 짓밟아 부쉈다. 그의 주변에 남아있던 흑룡파 무사들의 흔적도 검은 기운에 완전히 흡수되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오직 진무만이, 마치 이 척박한 땅의 일부가 된 것처럼 서 있었다.

    그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목적지는 단 하나였다. 유청이 있는 곳, 흑룡파의 심장부.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칼날이 얼마나 날카로워졌는지, 그리고 자신의 증오가 얼마나 깊어졌는지 유청에게 똑똑히 보여줄 작정이었다. 그의 복수극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누구도, 그 누구도 이 길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