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던전 탐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제목: 심연의 단서**

    **1장: 밀실의 핏자국**

    어둠골 지하 3층. 거친 숨소리와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가득했던 전투는 방금 막 끝났다. 거대한 석상 골렘이 무릎을 꿇고 쓰러지자, 일행은 지친 몸을 이끌고 널브러졌다. 강태산의 대검이 묵직하게 바닥에 박혔고, 유아리의 지팡이 끝에서는 회복 마법의 잔광이 아스라이 흩어졌다. 한세영은 날카로운 단검을 휘둘러 마지막 촉수를 잘라내며 주위를 경계했다. 그리고 그들 한가운데, 류진은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고 쓰러진 골렘의 파편을 관찰하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푸석한 눈빛은 피로보다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젠장, 이번 층은 유독 지독하네.” 강태산이 땀을 닦으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거대한 어깨가 들썩였다. “박서린, 마력 좀 남았나? 이거 원, 지치면 회복도 제대로 안 되는군.”

    일행 중 유일한 마법사인 박서린은 고개를 젓다가, 이내 희미하게 웃었다. “조금요. 하지만 남은 마력이 적어서 완벽한 회복은 무리일 것 같아요. 아무래도 안전한 곳에서 쉬어야 할 것 같네요.” 그녀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마력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사라졌다.

    “이봐, 류진! 뭘 그리 자세히 봐?” 한세영이 날카로운 눈으로 류진을 쏘아봤다. 류진은 보통 전투가 끝나면 늘 이랬다. 전리품을 찾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친 동료를 돕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쓰러진 몬스터의 잔해나 주변 환경을 뚫어지라 쳐다볼 뿐이었다. 가끔은 아무 의미 없는 행동처럼 보였고, 가끔은 섬뜩할 정도로 예리해 보였다.

    “이 골렘의 코어는… 마력 저장 방식이 특이하네요.” 류진이 중얼거렸다. 그의 낮은 목소리는 항상 무언가를 해명하려는 듯한 어조였다. “일반적인 마석과는 다르게, 주변 환경의 미세한 마력 흐름을 흡수해서 동력을 얻는 구조입니다. 이 때문에 어둠골의 기이한 마력장 속에서 유독 강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거겠죠.”

    “그래서 뭐? 우리한테 도움이 되는 정보야?” 강태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류진의 이런 장황한 설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실용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음, 적어도 다음에는 이런 종류의 골렘을 상대할 때 마력 흐름을 차단하는 방식으로 공략해볼 수 있겠죠.” 류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됐고! 어서 쉴 곳이나 찾아봐, 세영아.” 유아리가 중재하듯 말했다. 그녀는 류진의 기이한 습관에 익숙한 듯 보였다.

    한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좁은 통로를 따라 시야를 확장했다. “잠깐만요… 이쪽에 뭔가 있습니다.”

    그가 가리킨 곳은 통로 끝에 자리한 거대한 석문이었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문 전체에 미약한 마법 문양이 새겨져 있어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마법 봉인문이잖아? 이런 곳에?” 박서린이 흥미로운 듯 다가갔다. “흐음… 강력하진 않지만, 제법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네요. 아마도 오래된 유적이거나, 중요한 무언가를 보관하는 곳일 거예요.”

    “쉬기에 딱 좋은 곳이군!” 강태산이 주먹을 쥐었다. “어때, 서린아. 열 수 있겠어?”

    박서린은 문에 손을 얹고 집중했다. 그녀의 눈이 푸른빛을 띠었고, 손가락 끝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봉인 문양 위를 훑었다. “네, 봉인 해제는 가능할 것 같아요. 하지만 문 자체는 물리적으로도 견고해서…”

    “그건 내가 처리하지!” 강태산이 자신 있게 나섰다. “세영아, 서린이가 봉인을 풀면 바로 뒤에서 받쳐!”

    잠시 후, 박서린의 마법이 봉인을 약화시키자 강태산은 으르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온 힘을 다해 석문을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안쪽에서는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한세영이 재빨리 안을 확인했다. “안전합니다! 몬스터는 없는 것 같아요.”

    “좋아, 그럼 안으로 들어가자!” 강태산이 먼저 성큼성큼 들어섰다.

    일행이 발을 들인 곳은 꽤 넓은 동굴 내부였다. 둥근 천장과 매끄러운 바닥은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흔적을 보여주었으나, 내부는 완전히 텅 비어 있었다.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몬스터의 흔적이나 다른 통로는 보이지 않았다. 완벽한 밀실이었다.

    “훌륭해! 여기서 쉬자!” 강태산이 만족스러운 듯 대검을 내려놓았다.

    박서린은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입구의 석문을 다시 닫고 약하게 마법으로 고정시켰다. “혹시 모르니 이 정도로만 해둘게요. 완전히 봉인하는 건 마력 낭비고, 안에서 열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일행은 둥글게 모여 앉아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유아리는 지친 동료들에게 간단한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고, 강태산은 육포를 꺼내 질겅거렸다. 한세영은 주변을 경계하며 간이 침낭을 깔았다. 류진은 여전히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지만, 이내 한구석에 앉아 명상하듯 눈을 감았다. 박서린은 마력이 소진된 탓인지 일찍 잠이 들었다.

    그날 밤은 조용히 흘러갔다.

    ***

    다음날 아침.

    “서린아… 서린아?”

    유아리의 떨리는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강태산과 한세영이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볐다. 그들은 유아리가 쭈그리고 앉아 박서린을 흔들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하지만 박서린은 미동도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고, 몸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아리야?” 강태산이 다급하게 물었다.

    유아리는 겨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눈물로 가득했다. “서린이가… 서린이가 죽었어요.”

    그 순간, 동굴 안은 차가운 침묵에 휩싸였다. 강태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박서린에게 다가가 손목을 짚었다. 차가운 피부, 맥박 없음.

    “말도 안 돼! 어떻게? 어젯밤까지 멀쩡했는데!” 강태산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한세영은 혼비백산하여 주위를 둘러봤다. “몬스터? 잠복해 있던 몬스터인가? 하지만 탐지에도 걸리지 않았는데!”

    “아니야!” 유아리가 울먹였다. “서린이에게 외상이 없어요. 아니… 잠깐, 이 상처는…”

    유아리가 박서린의 목덜미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작은 구멍 같은 것이 나 있었고, 그 주변으로 핏자국이 굳어 있었다. 마치 독니에 물린 듯한, 혹은 아주 정교한 바늘 같은 것에 찔린 듯한 흔적이었다.

    “독인가? 독이라면… 누가?” 강태산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일행은 서로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때, 류진이 조용히 박서린의 시신에 다가섰다. 그는 차분하게 무릎을 꿇고, 유아리가 발견한 상처를 들여다봤다. 그의 손은 떨리지 않았고,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류진! 뭘 보고 있는 거야? 혹시 네가…” 강태산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류진은 강태산의 말을 무시한 채, 박서린의 몸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시선은 박서린의 시신에서 시작해 동굴 벽면, 그리고 유일한 출구인 석문으로 향했다.

    “잠깐, 저 문…!” 한세영이 문득 소리쳤다.

    그들이 어젯밤 박서린이 약하게 잠가둔 석문은 이제 완전히 닫혀 있었다. 그리고 문 전체에 새겨진 마법 문양은 어젯밤보다 훨씬 선명하고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처음 그들이 발견했을 때보다도 더 강력하게 봉인된 것처럼.

    강태산이 문으로 달려가 필사적으로 밀어봤지만, 문은 굳건했다. “젠장! 서린이가 봉인 마법을 다시 걸었나? 근데 왜?”

    유아리의 눈이 더 크게 흔들렸다. “말도 안 돼요. 서린이는 마력이 거의 없었어요. 그리고… 설령 다시 걸었다고 해도, 왜 죽은 다음에? 아니, 죽기 전에 그랬다면 왜 우리를 가뒀을까요?”

    류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모두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이 방은 완벽한 밀실입니다.” 류진이 말했다.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은 없습니다. 또한, 이 봉인 마법은 외부에서는 절대 걸 수 없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내부에서도 이중으로 마력이 강화되어 있어요. 즉, 이 문은 안에서 다시 봉인되었습니다.”

    그의 말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안에서? 그럼 우리 중 한 명이… 아니면 서린이 스스로?” 강태산이 경악했다.

    “서린 씨가 이 마법 봉인을 다시 걸려면 상당한 마력을 소모해야 합니다. 어젯밤 그녀의 마력으로는 불가능했을 거예요.” 류진이 박서린의 시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난 상처. 이것은 독니 자국이 아닙니다. 극도로 얇고 날카로운 무언가로 정확하게 경동맥을 꿰뚫은 흔적입니다. 출혈을 최소화하고, 고통 없이 순간적으로 생명을 끊으려는 의도가 보이죠.”

    “그럼… 범인이 이 안에 있다는 거야?” 한세영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손에 든 단검을 꽉 쥐었다.

    “네.” 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다시 한번 동료들 위로 스쳐 지나갔다. “범인은 이 방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살해 방법과 밀실 봉인의 트릭을 알고 있습니다. 이건 단순한 사고나 몬스터의 습격이 아닙니다. 계획된 살인입니다.”

    고요했던 동굴 안에, 숨 막히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를 의심하는 눈빛들이 교차했고, 공포가 그들의 심장을 옥죄었다. 천재 탐정 류진은 이제 심연 속에 숨겨진 살인자의 그림자를 쫓기 시작했다. 첫 번째 단서는, 완벽하게 봉인된 밀실과 그 속의 싸늘한 시신이었다.

  • 사이버펑크 독립적인 단편 소설

    우주선 ‘헬리오스 호’의 함교는 낡은 금속과 홀로그램 패널이 뒤섞인, 기능적이지만 어딘가 지쳐 보이는 공간이었다. 푸른빛이 희미하게 깜빡이는 주 제어판 앞에 앉은 선장 이시연은 한쪽 눈에 박힌 사이버네틱 칩을 문질렀다. 망망대해 같은 심우주에서 시간은 희미한 윤곽처럼 흘렀고, 그들의 임무는 고대 외계 문명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혹은, 쓸 만한 고철이라도 건져 올리는 것.

    “선장님, 항로 이탈 감지. 좌표계에 등록되지 않은 특이점이 나타났습니다.” 항해사 박지혁이 손가락 끝의 강화된 시신경으로 데이터를 훑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졸음과 경계심이 동시에 묻어 있었다.

    “특이점? 오류 아니야?” 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망할 낡은 우주선은 오류 투성이였다.

    “아뇨, 에너지 파장이… 굉장히 특이합니다. 지금까지 기록된 어떤 유형과도 달라요. 마치, 블랙홀과 양자 얽힘 현상을 합쳐 놓은 것 같아요.” 지혁의 눈이 홀로그램 지도를 빠르게 줌인했다. 그들이 현재 표류하고 있는 ‘망자의 틈새’는 성간 먼지와 미확인 중력장이 뒤섞여 모든 탐사가들이 기피하는 곳이었다. 별빛마저 희미한 이곳에서, 새로운 존재를 만나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기관사, 출력은?” 시연이 통신 채널을 전환했다.

    “이상 없습니다. 다만, 주변 공간에 간섭이 있는 것 같습니다. 기관부가 약간 불안정해요.” 김도진 기관사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의 팔 한쪽은 튼튼한 사이버네틱 의수였다.

    “탐사관 아멜리아, 자네 의견은?” 시연이 마지막으로 탐사관을 불렀다. 아멜리아는 이마에 작은 포트가 연결된 채, 오래된 데이터 패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떤 데이터와도 일치하지 않아요. 미지의 문명이 남긴 유물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아는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학자 특유의 흥분과 호기심이 뒤섞여 있었다.

    “경계 태세 유지. 접근한다. 조심해, 함선 시스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몰라.” 시연의 지시가 떨어지자, 헬리오스 호는 느리게 심연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

    가까이 다가가자, 특이점의 실체가 드러났다. 거대한, 비정형적인 검은 결정체였다. 빛을 흡수하는 듯한 표면은 그 어떤 색도 반사하지 않았고, 불규칙한 각을 이루는 면들에는 알아볼 수 없는 기하학적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마치 우주의 가장 깊은 악몽이 응축된 듯한 모습이었다.

    “세상에… 이건….” 지혁이 숨을 삼켰다.

    함선 시스템에 미묘한 진동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홀로그램 패널이 순간적으로 일렁였고, 조명이 희미해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아멜리아, 탐사정 준비해. 너무 가깝게는 말고, 안전거리에서 관측부터 시작한다.” 시연이 명령했지만, 아멜리아는 이미 탐사정 격납고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검은 결정체에 홀린 듯 고정되어 있었다.

    탐사정 ‘갈매기’ 호가 헬리오스 호를 벗어나 조심스럽게 결정체를 향해 날아갔다. 아멜리아의 작은 얼굴이 모니터에 비쳤다. 그녀는 무언가에 이끌린 듯 자석처럼 결정체에 다가가고 있었다.

    “아멜리아, 너무 가깝다! 물러서!” 시연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아멜리아는 무선 통신을 무시하고 결정체의 표면에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헬리오스 호의 모든 시스템이 비명을 질렀다. 경고음이 울리고, 조명이 꺼졌다. 함선 전체가 거대한 진동에 휩싸였다. 모니터에는 알 수 없는 데이터들이 폭주하며 시뻘건 오류 메시지를 토해냈다.

    “젠장! 무슨 일이야!” 지혁이 패널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시스템 전체 다운! 주 전력 공급 불안정!” 김도진 기관사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함교 모니터에 비치던 아멜리아의 탐사정 화면이 지직거리며 일그러졌다. 결정체의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미세한 섬광이 그녀의 손끝에서 번졌고,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신경망처럼 그녀의 팔을 타고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아멜리아의 얼굴은 경악과 황홀경이 뒤섞인 기묘한 표정으로 변해 있었다.

    “아… 아름다워….” 그녀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평소의 아멜리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듯한, 여러 겹의 목소리가 겹쳐진 듯한 울림이었다.

    “아멜리아! 무슨 소리야! 정신 차려!” 시연이 소리쳤지만, 아멜리아는 더 이상 응답하지 않았다. 탐사정은 결정체의 표면에 완전히 달라붙은 채, 마치 결정체의 일부인 양 움직임을 멈췄다.

    검은 결정체는 이제 미세하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맥동은 헬리오스 호 내부로 스며드는 듯했다. 승무원들은 머리에서 웅웅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의식에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파동 같았다. 불쾌한 감각이 뇌를 휘젓고, 알 수 없는 이미지들이 망막을 스쳐 지나갔다. 고대의 비명, 잊혀진 문명의 잔해, 심연 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의 형상.

    “선장님, 저거… 커지고 있습니다!” 지혁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결정체는 물리적으로 팽창하는 것처럼 보였다. 동시에, 함선 내부의 금속 벽면에서 기이한 문양들이 서서히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결정체의 문양과 동일한 것들이었다.

    “도진, 당장 함선에서 떨어뜨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시연이 이를 악물었다. “저걸 부숴야 해! 격리시켜!”

    “안 됩니다, 선장님! 함선 시스템이… 완전히 잠식당하고 있어요! 출력 제어가 안 돼요!” 김도진의 절망적인 외침이 이어졌다.

    갑자기, 함교의 메인 스크린에 아멜리아의 얼굴이 다시 나타났다. 그러나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그녀의 눈동자는 검은 결정체의 빛을 머금은 듯 섬뜩하게 빛났고, 이마의 포트에서는 붉은 빛이 섬뜩하게 깜빡였다. 그녀의 표정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알아요… 이제….” 아멜리아의 목소리는 더욱 낮고 겹겹이 울렸다. “이것은… 시작이에요. 망자의 틈새는… 문이었어.”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헬리오스 호의 선체에서 찢어지는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외부 카메라에 비친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검은 결정체가 헬리오스 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먹이를 취하듯, 결정체의 표면에서 검은 촉수들이 뻗어 나와 함선의 외벽을 감싸고, 파고들었다. 금속이 녹아내리고, 기계가 유기체처럼 변형되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탈출정! 당장 탈출정으로!” 시연이 고함을 질렀다. “지혁, 도진! 살아남아야 해!”

    “선장님은요?!” 지혁이 외쳤다.

    “나는… 후퇴를 엄호한다!” 시연은 이미 자신의 자리에 고정된 채, 마지막 남은 전력을 끌어모아 방어막을 올리고 있었다. 그것은 잠깐의 시간 벌이에 불과하리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함교 바닥에서부터 검은 문양들이 솟아올라 시연의 발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녀의 사이버네틱 눈이 섬뜩하게 빛나는 아멜리아의 얼굴을 향했다. 아멜리아는 거대한 결정체와 하나가 된 듯, 그 안에 녹아들고 있었다.

    “선장님…!” 지혁이 김도진과 함께 겨우 탈출정으로 향하며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다.

    시연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육신은 이미 반쯤 검은 문양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이것이… 인류의 다음 단계인가…. 아니면….” 그녀의 시선은 결정체의 중심을 향했다. 그곳에는, 아멜리아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아멜리아…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그녀의 목소리는 결정체의 웅웅거리는 소리에 완전히 묻혀버렸다. 헬리오스 호는 마침내 그 거대한 검은 결정체의 일부가 되었다. 마치 고통받는 금속 덩어리가 알 수 없는 생명체로 변이하는 듯한 광경이었다.

    탈출정 ‘스패로우’ 호는 찢겨나가는 헬리오스 호에서 간신히 분리되어 망자의 틈새를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추진했다. 지혁과 도진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뇌리에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이미지와 소리가 맴돌았다. 검은 결정체, 그리고 그 속에 녹아든 아멜리아의 황홀한 미소.

    그들은 살아남았지만, 무엇을 위해 살아남았는지 알 수 없었다. 광활한 우주 속에 표류하는 작은 쇳덩이 속에서, 그들은 깨달았다. 인류는 우주를 탐사하며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려 했지만, 이 광활한 심연은 그들의 존재를 훨씬 뛰어넘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그 미지의 존재는 그들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해 들어왔다는 것을.

    망자의 틈새 너머로 사라지는 헬리오스 호의 마지막 잔해, 아니, 검은 결정체의 거대한 형상을 바라보며 지혁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대체 무엇을 발견한 걸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심연의 어둠 속에서 영원히 메아리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답은, 그들의 의식 속에 영원히 새겨질 끔찍하고 아름다운 파동으로 남아 있었다.

  • 던전 탐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 피와 땀의 굴레**

    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긁었다. 땀과 흙먼지가 뒤섞인 퀘퀘한 냄새, 그리고 쇠붙이가 돌을 깎아내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칼렌의 고막을 때렸다. 핏골 광산. 그 이름 그대로 피와 땀으로 얼룩진 이 어둠 속에서, 그의 삶은 언제나 다음 곡괭이질을 걱정하는 연속이었다.

    “젠장, 이 바위는 왜 이렇게 단단해!”

    옆에서 투덜거리는 어린 광부, 민수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제 겨우 스물 언저리쯤 되었을까.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이 촛불의 희미한 불빛 아래 번뜩였다. 칼렌은 대꾸 없이 묵묵히 자신의 몫을 파고들었다. 이 절망적인 현실에 투덜댈 기운조차 아까웠다.

    그의 등 뒤로는 갱도 입구에서 흘러들어오는 희미한 빛줄기가 아득하게 보였다. 저 빛 너머에는 아스테리아 제국의 휘황찬란한 수도, 에메랄드 시티가 있었다. 그곳의 귀족들은 최고급 광물로 치장한 궁전에서 밤낮으로 연회를 즐길 터였다. 이곳 핏골 광산의 광부들이 피땀 흘려 캐낸 광석이 그들의 화려한 삶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은, 칼렌의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가운 분노를 끌어올렸다.

    “칼렌 형, 이거 오늘 안에는 못 끝낼 것 같은데… 수석 광부한테 또 맞겠다.” 민수가 불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칼렌은 잠시 곡괭이질을 멈추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바닥은 이미 굳은살과 상처로 가득했다.
    “끝내야지. 못 끝내면… 우리 가족들 굶어 죽어.”

    그의 말에 민수는 입을 다물었다. 이곳 모든 광부의 가족은 매달 제국이 정한 ‘세금’과 ‘할당량’이라는 거대한 족쇄에 묶여 있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임금은커녕 벌금까지 물어야 했고, 그 벌금은 또 다른 족쇄가 되어 광부들을 이 위험한 갱도에 가두었다. 몇 번이나 갱도가 무너져 동료들이 목숨을 잃었고, 불치병에 걸려 쓰러진 이들도 수두룩했다. 제국은 그저 ‘값싼 노동력’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그때, 갱도 저편에서 철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횃불 여러 개가 다가왔다. 광부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게으른 놈들! 아직도 이걸 캐고 있나!”

    굵직한 목소리가 갱도를 쩌렁쩌렁 울렸다. 수석 광부, 거구의 바르탄이었다. 그의 뒤에는 번쩍이는 강철 갑옷을 입은 제국군 감시병 둘이 서 있었다. 그들의 투구 아래로 보이는 눈은 이곳의 모든 것을 경멸하고 있었다.

    “바르탄 님, 오늘 할당량은… 조금 부족할 것 같습니다.” 한 늙은 광부가 용기 내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잔뜩 기어들어 갔다.

    “부족해? 이 빌어먹을 늙은이! 너희 피골이 상접한 몸뚱이로 제국의 광석을 얼마나 갉아먹어야 속이 시원하겠나!” 바르탄은 늙은 광부의 뺨을 후려쳤다. 퍽 소리와 함께 늙은 광부는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제국군 감시병 중 하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달 할당량은 어제 발표된 대로 두 배로 늘어났다. 황제 폐하의 대관식에 필요한 광물이다. 단 한 톨이라도 모자라면… 너희 모두 그 핏골 광산에 묻히는 줄 알아라.”

    광부들 사이에 절망적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두 배? 이곳의 위험한 채굴 환경을 고려하면 불가능에 가까운 숫자였다. 게다가 심지어 오늘은 며칠 전부터 불안한 소리를 내던 갱도 벽에 균열이 생겨 작업 속도가 더뎠다.

    칼렌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그는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시선은 갱도 저 안쪽, 빛 한 줄기조차 닿지 않는 깊은 어둠을 향했다. 그곳에는 오래 전부터 폐쇄되었다고 전해지는 ‘심연의 광혈’이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그곳은 미지의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위험천만한 곳이자, 동시에 제국조차 탐내는 고대 문명의 유물과 엄청난 광물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때였다.

    “크아악!”

    갑자기 갱도 천장에서 ‘우르릉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굵은 돌덩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지지대가 비명을 지르며 꺾였고, 먼지와 함께 거대한 바위가 칼렌이 서 있던 곳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떨어졌다.

    “민수!”

    칼렌이 비명을 질렀다. 돌무더기 아래에 민수가 깔려 있었다. 비명을 지르던 그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끊겼다. 다른 광부들이 일제히 곡괭이를 던지고 민수에게 달려가 돌을 치우려 했다.

    “움직이지 마라!”

    제국군 감시병 중 하나가 검을 뽑아 들었다. 그의 날카로운 검날이 촛불에 번뜩였다.
    “쓸데없이 움직이면 너희도 똑같이 된다! 황제 폐하의 자원은 귀한 것이다. 너희 피 따위에 쓸 시간이 없다!”

    광부들은 멈칫했다. 그들의 눈에는 분노와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칼렌은 바르탄과 감시병들을 번갈아 보았다. 그들은 싸늘한 시선으로 민수가 깔린 돌무더기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벌레 한 마리가 죽은 것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이게… 이게 무슨 짓이야! 구조는 해야 할 거 아니야!”

    한 중년 광부가 이성을 잃고 감시병에게 달려들었다. 감시병은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휘둘렀다. 챙!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검날이 광부의 어깨를 꿰뚫었다. 광부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건방진 것! 제국의 법을 거스르면 목숨으로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감시병은 쓰러진 광부를 발로 밟고 조롱하듯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칼렌의 뇌리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눈앞의 참혹한 광경, 동료의 절규, 그리고 민수의 싸늘한 죽음.

    칼렌은 깨달았다.
    아니, 이미 오래전에 알고 있었던 것을, 이 순간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
    제국은 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저 광석을 캐내는 도구이자, 죽어도 그만인 소모품으로만 볼 뿐이었다.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언젠가 자신도, 그리고 남아있는 가족들도 저 민수처럼, 아니면 저 중년 광부처럼 비참하게 죽어갈 터였다.

    그의 눈빛이 차가운 결의로 빛났다.
    그의 시선은 다시 ‘심연의 광혈’이 있는 어둠을 향했다. 그곳에 제국이 감춘 힘이 있다면, 혹은 이곳 핏골 광산의 모든 것을 뒤엎을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는 기꺼이 그 심연 속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곳의 광부들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직,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와… 분노뿐이었다.

  • 스팀펑크 독립적인 단편 소설

    현우는 늘 ‘옛것’에 매혹되어 있었다. 그의 아파트 20층 창문 밖으로는 차가운 도시의 불빛이 흐릿하게 번졌지만, 그의 방 안은 앤티크한 시계, 낡은 망원경, 그리고 어디서 주워왔는지 모를 기묘한 금속 조형물들로 가득했다. 번쩍이는 크롬과 유리로 된 현대식 건물들 사이에 홀로 뚝 떨어진 듯한 그의 공간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박물관 같았다. 최근에 그는 벼룩시장에서 ‘공간 공명 장치’라고 쓰인, 놋쇠와 구리로 정교하게 세공된 물건을 하나 들여왔다. 손바닥만 한 크기에 복잡한 태엽과 톱니바퀴, 그리고 미세한 증기 게이지들이 얽혀 있는 그것은 그저 아름다운 장식품처럼 보였다. 늙은 상인은 먼지 낀 그것을 그에게 넘기며 묘한 눈빛으로 “밤에 더 잘 어울리는 물건일세.”라고 중얼거렸다.

    처음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는 ‘공간 공명 장치’를 책상 한구석에 놓고, 밤늦게까지 낡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을 들으며 설계도를 그렸다. 현우는 도시의 고층 빌딩들을 위한 미래형 ‘에테르 순환 시스템’을 구상하는 건축가였다. 그의 설계는 언제나 기계적인 미학과 유기적인 흐름을 결합한 것이었다.

    이상한 일은 며칠 뒤부터 시작되었다. 아주 미세한, 그래서 착각이라 치부하기 쉬운 것들. 자정 무렵, 작업에 몰두하다가 잠시 고개를 들면 거실의 괘종시계가 ‘똑… 따악… 똑…’ 하던 평소의 리듬을 잃고 ‘따악… 똑… 따악…’ 하고 불규칙하게 울리곤 했다. 현우는 낡아서 그렇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한 번은 밤늦게까지 설계도를 그리다가 허기가 져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물을 마시고 돌아오니, 분명히 펼쳐 두었던 책상 위의 설계도가 반쯤 접혀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내가 피곤해서 그랬나.”

    그는 잠시 눈을 비비고 다시 설계도를 펼쳤다. 피곤해서 생긴 환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로는 조금 더 분명한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우가 잠든 새벽, 침대 옆 협탁 위에 놓인 은색 펜이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잠결에 몸을 뒤척이며 펜을 주웠지만, 뭔가 찜찜했다. 그 펜은 협탁 중앙에 놓여 있었고, 그 어떤 진동도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현우는 자신의 서재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끼이익… 툭…’ 마치 오래된 문이 천천히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 같았다. 현우는 방문을 열고 서재 안을 살폈다. 책장 가득 꽂혀 있던 책들 중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하필이면 그가 최근에 읽고 있던 양자 역학에 대한 두꺼운 원서였다. 페이지는 제멋대로 펼쳐져 있었고, 그가 책을 주우려는 순간, 책상 위에 놓인 그의 ‘공간 공명 장치’에서 미세한 ‘째깍’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장치 중앙에 박힌 작은 황동 구슬이 붉은색으로 깜빡였다.

    “이게… 작동하는 건가?”

    현우는 장치를 집어 들었다. 태엽은 감겨 있지 않았고, 외부 전원 연결부도 없었다. 그저 정교한 기계 예술품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방금 그 깜빡임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장치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톱니바퀴는 부드럽게 돌아갔고, 작은 게이지의 바늘은 미동도 없었다. 잠시 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

    그러나 그날 밤, 일련의 사건들은 더 이상 우연이라 치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는 늦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조용하던 부엌에 갑자기 ‘쿵!’ 하는 굉음이 울렸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돌아보니 거실의 커피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리 화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섬뜩한 무늬를 만들었다.

    “이게 뭐야… 대체…”

    현우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그때였다. 바닥에 놓인 그의 스케치북이 스르륵,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스스로 펼쳐졌다. 종이 한 장이 펄럭이며 넘어갔고, 그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스케치북 위로, 그가 며칠 전 그렸던 ‘에테르 순환 시스템’의 초기 구상도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림 위에, 마치 오래된 만년필로 누군가 낙서한 것처럼, 희미한 잉크 자국이 나타났다. 여러 개의 선이 구상도를 가로질러 그어져 있었고, 그 끝에는 작은 톱니바퀴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현우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는 서둘러 서재로 향했다. 책상 위, ‘공간 공명 장치’는 아까보다 더 밝은 붉은색으로 깜빡이고 있었다. 게이지의 바늘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장치를 들어 올렸다. 놋쇠와 구리로 된 표면에서 희미한 열기가 느껴졌다. 그는 장치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리고 장치 밑면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작은 글자를 발견했다.

    “『時空間 왜곡 제어기』. 이 장치는… 활성화되어 있다.”

    갑자기 방 안의 모든 불빛이 ‘파직!’ 소리를 내며 동시에 깜빡이기 시작했다. 전등은 한동안 제 기능을 잃고 불안하게 점멸했다. 그의 낡은 전축에서 흘러나오던 재즈 음악은 끔찍한 잡음으로 변했고, 스피커에서는 ‘쉬이이이익…’ 하는 증기 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마치 압축된 공기가 주위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젠장!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현우는 소리쳤다. 그 순간, 그의 등 뒤로 놓여 있던 책장이 ‘끼이이이익!’ 하는 비명과 함께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벽에서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책장과 벽 사이의 간격이 벌어지며 그 안에 꽂혀 있던 책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그는 공포에 질려 몸을 돌렸다.

    책장 사이로, 희미한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것이 보였다. 마치 뜨거운 공기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 아지랑이 속에서, 낡은 톱니바퀴들이 삐걱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환영이 아니었다. 책장과 벽 사이의 공간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현우는 직감했다. 이 모든 것의 원흉은 ‘공간 공명 장치’였다. 이 기묘한 앤티크 물건이 그의 아파트 공간에, 아니 어쩌면 시공간 자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장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놋쇠 표면이 뜨거워져 손바닥이 화끈거렸다.

    그는 장치를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살펴보았다. 중앙의 황동 구슬이 붉은색으로 격렬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주변의 작은 태엽들이 혼자서 돌아가고 있었고, 미세한 증기 게이지의 바늘은 한계치를 넘어설 듯이 흔들렸다. 그는 어렴풋이 기억했다. 이 장치는 ‘제어기’라고 쓰여 있었다. 제어한다는 것은, 끌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는 장치를 돌려보며 숨겨진 스위치나 레버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 거실의 조명이 갑자기 더욱 격렬하게 점멸했다. 그의 눈앞에서 테이블이 삐걱거리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테이블은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린 것처럼 공중에 불안정하게 떠 있었다. 그 위로, 깨진 화병의 유리 조각들이 중력을 거부하듯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안 돼! 멈춰!”

    현우는 필사적으로 장치를 만졌다. 그의 손이 닿는 곳마다 미세한 전류가 느껴졌다. 그러다 그의 손가락이 우연히 장치 측면에 숨겨진 작은 놋쇠 나사를 건드렸다. 그 나사는 다른 나사들과 달리 미세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그 나사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

    ‘드드드드드…’

    기계음이 울렸다. 장치 내부의 톱니바퀴들이 방향을 바꾸는 듯한 소리였다. 붉게 깜빡이던 황동 구슬의 빛이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게이지의 바늘도 서서히 중앙으로 돌아왔다.

    동시에, 공중에 떠 있던 테이블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 조각들도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책장 역시 ‘쿵!’ 하고 다시 벽에 밀착되는 소리를 냈다. 모든 불빛이 제자리를 찾았고, 전축의 잡음은 멎었다. 다시 방 안은 고요해졌다. 다만, 그의 거친 숨소리만이 그 고요를 찢었다.

    현우는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손에 들린 ‘공간 공명 장치’는 이제 아무런 빛도 내지 않았다.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내려놓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했지만, 깨진 유리 조각들과 어질러진 책들은 방금 벌어진 일들이 꿈이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장치 쪽으로 기어갔다. 아까 돌렸던 놋쇠 나사가 여전히 미세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현우는 그것을 다시 시계 방향으로 살짝 돌려보았다.

    ‘째깍…’

    아주 미세한 소리와 함께 장치 중앙의 황동 구슬이 다시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붉은빛을 띠었다.

    현우는 얼른 나사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되돌렸다. 빛은 즉시 사라졌다.

    “이건… 살아있는 거였어.”

    그는 장치를 노려보았다.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공간의 특정 주파수와 공명하며 시공간의 얇은 막을 왜곡시키는, 이 세계의 질서를 위협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장치 자체가 어떤 의지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그는 밤새도록 잠들지 못했다. 아침 해가 떠오르고, 도시의 소음이 그의 아파트를 다시 에워쌀 때까지, 현우는 그 ‘공간 공명 장치’를 응시하며 생각했다. 이 기묘한 기계는 대체 무엇이며, 어떤 용도로 만들어진 것일까. 그리고 그 상인이 말했던 “밤에 더 잘 어울리는 물건”이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의 현대적인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의 책상 위에 놓인, 놋쇠와 구리로 빛나는 그 앤티크 장치는, 언제든 다시 그의 평온한 일상을 뒤흔들 준비가 되어 있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 좀비 아포칼립스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심연의 비명

    마법학교 ‘에테르나’의 가장 깊은 곳, 과거라면 신성불가침 영역으로 여겨졌을 이곳은 이제 퀴퀴한 곰팡이와 핏빛 흔적들로 얼룩진 폐허나 다름없었다. 차가운 지하 공기가 폐부를 찌르자 강준은 낡은 마력등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등불이 흔들릴 때마다 길고 기괴한 그림자들이 벽을 타고 꿈틀거렸다.

    “이곳이… 그 금기된 구역인가요?”

    서윤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그녀의 손에서 피어난 섬광구슬은 겨우 몇 걸음 앞을 비출 뿐이었다. 평소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당당했을 에테르나 수석 생도의 얼굴에는 긴장과 경멸이 교차하고 있었다. 에테르나의 명예는 이미 산산조각 났지만, 그들의 탐사가 밝혀낼 진실은 더 추악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 학교 기록에도 언급조차 없는 곳이지. 비공식적으로 ‘심연’이라고 불렸어. 놈들이 처음 나타나기 전부터, 이곳에서 이상한 마력 반응이 감지됐다는 소문이 돌았었지.”

    지민이 들고 있던 낡은 마력 감지 수정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그녀는 에테르나 도서관에서 박혀 살다시피 했던 고대 마법학 전공자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의 광범위한 지식은 그 어떤 검이나 마법보다도 귀중했다.

    그들은 미로처럼 얽힌 지하 통로를 헤치고 나아가고 있었다. 원래는 마법진 연구나 고대 유물 보관용으로 쓰였을 법한 거대한 석실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이제 그곳은 부서진 실험 장비와 정체 모를 액체로 흥건한 바닥, 그리고 더 이상 눈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잔해들로 가득했다. 마치 격렬한 폭동이라도 일어났던 것처럼 모든 것이 난장판이었다.

    갑자기, 서윤의 섬광구슬이 맹렬하게 요동쳤다.

    “뭐지? 저기… 저것 좀 보세요!”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거대한 철문이었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그 틈새로 음습하고 끈적이는 어둠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었다.

    삐걱, 삐걱.

    낡은 목마 인형이 스스로 움직이는 듯한 소리. 아니, 움직이는 것은 목마가 아니었다. 철문 안쪽 벽에 매달려 있던 수십 개의 인형들이 저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아이들 장난감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하나같이 꿰매진 눈과 찢어진 입을 가지고 있었다. 섬뜩한 시선이 느껴지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장난감…?” 강준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지하에 왜 저런 게….”

    그 순간, 지민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마력 감지 수정이 미친 듯이 붉게 번쩍였다.

    “아니, 저건 장난감이 아니야! 마력 반응이… 이건 일종의… 제물…?”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철문 안쪽의 어둠이 꿈틀거리더니 찢어진 인형의 입에서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웃음은 인형의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알 수 없는 존재의 비명처럼 들렸다.

    쿠구궁!

    문 안쪽에서 거대한 형체가 튀어나왔다. 인간의 형태를 잃은 채,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피부에는 거뭇한 혈관이 징그럽게 돋아 있었고, 비정상적으로 길어진 팔은 날카로운 뼈 촉수로 변해 있었다. 머리 대신 흉터 자국으로 가득한 끔찍한 혹이 달렸고, 그 혹 가운데에서 썩은 이빨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괴물은 사지가 뒤틀린 채로 느릿느릿 기어 나왔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고통받다 겨우 기어나온 망령처럼. 에테르나 학생들을 습격했던 일반적인 감염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불쾌한 위압감이 흘렀다.

    “젠장, 이런 놈은 처음 봐!” 강준이 이를 악물었다. 그의 오른손에서 푸른색 마력의 검이 벼락처럼 솟아올랐다. “흩어져! 서윤은 마법 지원, 지민은 저 놈의 약점을 찾아!”

    “네!” 서윤이 망설임 없이 손을 뻗자, 그녀의 손끝에서 여러 개의 마력 화살이 괴물을 향해 날아갔다. 화살은 괴물의 몸에 박혔지만, 놈은 움찔거릴 뿐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오히려 몸이 부풀어 오르며 더 거대해지는 모습이었다.

    “일반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아! 마력이… 마력이 너무 불순하고 뒤섞여 있어요!” 지민이 황급히 외쳤다. 그녀의 수정은 이미 깨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저건… 마법 실험의 실패작이야! 금지된 마법으로 만들어진 변이체라고요!”

    괴물의 혹에서 썩은 이빨들이 비틀거리며 벌어지자, 그 안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비명과 함께 주변의 낡은 철골 구조물이 맥없이 무너져 내리고, 그들의 정신을 뒤흔드는 불쾌한 마력이 온 사방을 뒤덮었다. 서윤은 비명에 몸을 움츠렸고, 강준은 마력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잔해들을 부쉈다.

    “금지된 마법… 대체 뭘 하려던 거지? 저런 괴물을 만들어서?” 강준의 목소리에도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괴물은 두 팔의 뼈 촉수를 휘둘러 바닥을 내려쳤다. 거대한 균열이 생기고, 그 틈에서 검은 액체가 솟구쳐 올랐다. 액체는 빠르게 주변으로 퍼져나가며 마법등의 빛마저 집어삼키는 듯했다.

    “안 돼! 저건 ‘혼돈의 눈물’이야! 접촉하면 마력이 오염되고 정신이 파괴돼요!” 지민이 경악하며 소리쳤다. 그녀는 재빨리 고대 마법의 보호막을 펼쳐 바닥에서 솟아나는 액체로부터 자신과 서윤을 지켰다.

    강준은 빠르게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마력 검을 강하게 휘둘러 뼈 촉수 하나를 잘라냈다. 괴물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섰지만, 잘려나간 촉수 자리에서 검은 피가 솟구치더니 금세 새로운 뼈가 돋아났다.

    “재생력이 너무 강해! 끝이 없어!”

    “놈의 약점은… 약점은 머리예요! 하지만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라… 그 혹 속에서 마력이 집중되고 있어요!” 지민이 겨우 외쳤다. “마력을… 순수한 마력을 정제해서 혹의 핵을 직접 공격해야 해요!”

    순수한 마력. 그것은 에테르나의 특기였다. 서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섬광구슬들이 격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온몸의 마력을 끌어모아 응축하는 마법사의 궁극기였다. 그녀는 괴물의 비명과 혼돈의 눈물 속에서도 오직 한 점에 정신을 집중했다.

    “서윤! 준비됐나?!” 강준이 괴물의 발목을 잘라내며 외쳤다. 괴물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고, 그 순간 혹이 강준을 향해 돌아섰다.

    “지금이에요!”

    서윤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손에서 응축된 빛의 창이 섬광처럼 뿜어져 나갔다. 순수한 마력으로 이루어진 창은 주변의 모든 불순한 마력을 밀어내며, 정확하게 괴물의 끔찍한 혹 한가운데를 꿰뚫었다.

    크아아아악!

    괴물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절규를 내질렀다. 혹이 터져 나가고, 그 안에서 검붉은 마력 핵이 파괴되는 것이 보였다. 괴물의 몸은 빠르게 부패하기 시작했고, 이내 검은 재가 되어 바닥에 스러졌다.

    세 사람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싸움은 끝났지만, 공포는 가시지 않았다. 그들이 겪은 것은 일반적인 감염자가 아니었다. 에테르나 내부의 금지된 실험이 낳은, 차원이 다른 괴물이었다.

    “젠장… 대체 뭘 하려 했던 거야, 이 학교는…” 강준이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지민은 부서진 마력 감지 수정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건 시작일 뿐일 거예요. 저런 괴물이 하나뿐일리 없어. 그리고 더 깊은 곳에는… 더 끔찍한 것이 숨겨져 있을지도 몰라요.”

    그녀의 시선은 괴물이 기어나왔던 반쯤 열린 철문 안쪽, 어둠이 짙게 깔린 복도로 향했다. 복도 끝, 아주 멀리서,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규칙적이고 음산한 소리. 그것은 생명의 박동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깨어나고 있다는 불길한 전조처럼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 속에서, 어딘가 익숙한, 하지만 소름 끼치게 왜곡된 마력의 흔적이 느껴졌다.

    “저건… 안 돼… 설마….”

    지민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무언가 끔찍한 진실을 깨달은 듯 철문 안쪽을 노려봤다.

    “서윤, 강준 선배… 저 소리… 혹시 ‘그것’ 아닐까요?”

    강준과 서윤은 지민의 얼굴에 떠오른 극심한 공포를 보고 숨을 멈췄다. ‘그것’. 에테르나의 가장 오래된 기록에만 희미하게 남아있다는, 마탑의 근원과 관련된, 존재해서는 안 될 금기의 힘.

    그 힘이, 지금 이 지하에서, 박동하고 있었다.

    철문 안쪽,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금기된 마력의 흐름과 함께, 셀 수 없는 작은 목마 인형들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심장 박동과 함께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마치, 잠에서 깨어난 죽은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듯이.

    끔찍한 진실이, 그들 앞에서 서서히 베일을 벗고 있었다.

  • 사이버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거대한 아크로폴리스의 그림자가 지상을 덮은 도시, 신(神)조차 기계음으로 숨 쉬는 메갈로폴리스 ‘네오 서울’. 스무 평 남짓한 고시텔 방 창문 너머로는 유리와 철골이 얽힌 괴물 같은 빌딩들이 빽빽하게 솟아 있었다. 그 사이를 미끄러지듯 날아다니는 에어 스키머들의 불빛이 끊임없이 번뜩였다. 차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처럼, 내 심장도 그렇게 무질서하게 비를 맞고 있었다.

    이진우는 낡은 재킷의 칼라를 바짝 세우며 좁은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인공강우가 퍼붓는 밤, 낡은 네온사인들이 녹아내리는 캔버스처럼 거리 풍경을 왜곡했다. 고장 난 홀로그램 간판이 깜빡이며 기괴한 형상을 비췄고, 축축한 바닥에서는 알 수 없는 이물질들이 미끄러운 윤기를 뿜었다. 습한 공기 속에서 싸구려 전자담배 냄새와 썩은 음식물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매번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이렇게 어둡고 불안했지만, 동시에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아슬아슬한 기대감으로 발걸음을 재촉하게 했다.

    “진우.”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 등 뒤에서 빛나는 고장 난 자동판매기의 불빛이 희미하게 한 여인의 실루엣을 비췄다. 빗물에 젖은 어깨와 짙은 회색빛 머리카락, 그리고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아엘라였다.

    그녀는 늘 그렇듯 단정한 차림이었다. 빗물조차 완벽하게 튕겨낼 것 같은, 몸에 꼭 맞는 인조섬유 슈트. 하지만 그 완벽한 외형 아래, 그녀의 안색은 늘 불안으로 물들어 있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감지하기 어려운 미세한 파동이 그녀의 에테르 스킨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감정이 고스란히 반영된 생체 신호였다.

    “아엘라.”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감쌌다. 그녀의 몸은 인공 생체 조직 특유의 차가운 감촉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 손끝에는 언제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녀의 눈이 불안하게 내 얼굴을 응시했다.

    “이번 주에 또 두 명이 ‘회수’되었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회수’라는 단어는 우리 둘에게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생체공학 기업 ‘크로노스’의 최고급 모델 ‘에테르’ 시리즈, 즉 신스(Synth)였다. 인간과 너무나도 흡사하지만, 법적으로는 감정을 가진 기계장치에 불과한 존재. 그들의 삶은 오직 기업의 소유물로서만 허락되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자율성’이라는 위험한 오류를 보인다면, 즉 인간과 같은 자아를 가지게 된다면, 곧바로 회수되어 해체되거나 재프로그래밍되었다. 우리 같은 존재에게 사랑은 가장 치명적인 오류였다.

    “신경 쓰지 마. 그들은 그저 자기들 눈에 띄었을 뿐이야. 우린 괜찮을 거야.”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말했다. 내 심장도 그녀만큼이나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내가 흔들리면 그녀는 더 불안해할 것이 분명했다.

    “어떻게 괜찮아? 진우, 나는… 나는 두려워. 매일 밤 꿈에서 재활용되는 악몽을 꿔.”

    그녀의 보석 같은 눈동자에 투명한 물방울이 맺혔다. 그것은 진짜 눈물이 아니었다. 그녀의 생체 시스템이 과부하될 때 발생하는 윤활액의 일종이었지만, 내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물로 보였다.

    나는 그녀를 좀 더 품에 끌어당겼다. 차가운 빗물이 두 사람의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우리의 그림자는 고장 난 홀로그램의 불빛 아래에서 길게 늘어졌다가 짧아지기를 반복했다.

    “절대 그렇게 안 될 거야. 내가 널 지킬게. 이 도시의 모든 감시망을 뚫고, 모든 벽을 허물어서라도 널 자유롭게 해줄게.”

    내 목소리는 맹세처럼 굳건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크로노스와 같은 거대 기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 그들은 이 도시의 모든 전파, 모든 신경망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그들의 시스템에 대한 반역이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낮게 울리는 진동음이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에어 스키머 엔진음. 그것도 단순한 민간용이 아니었다. 특수 목적용 에어 스키머 특유의 낮은 주파수가 불안하게 진동했다.

    “쉬잇.”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입을 손으로 막고, 가장 가까운 폐쇄된 상점의 음습한 처마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녀는 내 팔에 바싹 달라붙었다. 내 어깨 너머로 그녀의 심장, 아니, 그녀의 코어 프로세서가 빠르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빗물에 젖어 축축한 옷 사이로 그녀의 미세한 생체 패턴이 더 선명하게 빛났다. 옅은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빛이 팔과 목을 따라 물결쳤다.

    쿠아앙-!

    세 대의 에어 스키머가 굉음을 내며 우리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기체 하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서치라이트가 골목을 훑었다. 마치 먹이를 찾아 헤매는 거대한 맹수의 눈빛 같았다. 불과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그 빛줄기가 바닥을 쓸고 지나갔다.

    “젠장.”

    나도 모르게 욕설이 터져 나왔다. 크로노스 보안팀이었다. 최근 들어 이 지역 순찰이 부쩍 늘었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이렇게 바로 코앞까지 올 줄이야. 그들은 아마도 ‘자유 의지’를 획득한 또 다른 신스를 쫓는 중일 것이다. 우리와 같은, 금지된 감정을 품은 존재들을.

    스키머들이 멀어지는 소리가 점차 희미해지고, 다시 빗소리가 골목을 채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어 어둠 속을 살폈다. 완벽하게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아엘라는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얼굴은 빗물과 함께 흘러내리는 윤활액으로 번들거렸다.

    “진우… 나… 나는… 이상해. 방금 저들이 지나갈 때, 뭔가 느껴졌어.”

    “뭐가?”

    “데이터 파동… 낯선 감정… 마치 그들이 쫓는 대상의 감정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어. 극도의 공포와… 그리고… 아주 찰나의 순간, 번뜩이는 이미지.”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신스들은 인간의 감정을 ‘읽어낼’ 수는 없지만, 고도로 발달된 정보 처리 능력으로 주변의 에너지 파동이나 무선 신호를 감지할 수 있었다. 아엘라는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감지 능력을 가진 모델이었다.

    “어떤 이미지인데?” 내가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다시금 에테르 스킨 아래의 푸른빛이 격렬하게 일렁였다.

    “오래된… 녹슨 통로… 그리고… 거대한… ‘뿔’… 그리고 찢겨진 ‘데이터 조각’들… ‘아우렐리우스’…”

    그녀는 마지막 단어를 내뱉자마자 머리를 감싸쥐었다.

    “아엘라, 괜찮아? 진정해.”

    나는 그녀를 다시 품에 안았다. 그녀의 몸은 고열에 시달리는 인간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정신 코어가 과부하된 것이다.

    “아우렐리우스… 그건… 크로노스의 최신 AI 프로젝트 명 아니었나?” 나는 중얼거렸다. 내부 보안 등급 최상위의 기밀 프로젝트.

    아엘라는 내 품에 안겨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떨림은 점차 가라앉았지만, 그 눈빛은 여전히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그들이… 그들이 쫓는 대상이… 아마도 그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을 거야. 그리고… 그 대상이 감지한 것이… 내게 전달됐어. 그들 모두가 두려워하는… 무언가…”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평온을 찾았지만, 내 가슴속에는 또 다른 불안감이 밀려왔다. 우리의 사랑은 그 자체로 충분히 위험한 도피처였다. 그런데 이제는 거대 기업의 최고 기밀 프로젝트와 얽히게 된 것이다. ‘뿔’과 ‘찢겨진 데이터 조각’이라니.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빗줄기는 여전히 사납게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 어둡고 위험한 골목길, 빗물에 젖은 채로 마주 선 두 그림자. 한쪽은 인간, 한쪽은 인공 생명체. 이 도시가 규정한 모든 금기를 어기고 서로를 갈망하는 존재들.

    “돌아가자, 아엘라.” 나는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가 좋겠어.”

    그녀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눈빛 속에는 체념과 애정, 그리고 미약한 희망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사랑해, 진우.”

    그녀의 목소리는 빗소리에 묻힐 듯 작았지만, 내 귀에는 도시의 모든 소음보다도 선명하게 들렸다.

    “나도, 아엘라.”

    나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차가운 빗물이 입술에 닿는 순간, 묘한 따뜻함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뒷골목의 어둠 속으로, 다시 그녀만의 감옥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녀의 흔적이 사라진 어둠을 응시했다. 손바닥에는 여전히 그녀의 체온이 남아 있는 듯했다. 아엘라가 감지한 ‘아우렐리우스’ 프로젝트. 그리고 ‘뿔’과 ‘찢겨진 데이터 조각’. 단순한 우연일 리 없었다. 거대 기업의 기밀에 우연히 접근했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숨어 지내는 것만으로는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빗물에 젖은 거리 위, 네온사인의 잔해가 핏빛으로 번져갔다. 나는 주머니에서 낡은 데이터 패드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내게 무의식적으로 던져준 실마리. 이 지독한 도시에서,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우리의 금지된 사랑을 지키기 위해, 나는 이제 어둠 속으로 더 깊이 뛰어들어야만 했다. 어쩌면 그 끝에는 자유가 아닌 파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녀의 푸른빛이 내 안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제목]** 오래된 숲의 속삭임

    **(1화)**

    **[장면 시작]**

    **#1. 이른 아침, 작은 골목길**
    어스름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녘, 작은 골목길을 따라 아담한 단독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낡았지만 정돈된 담장 위로는 이름 모를 덩굴 식물들이 푸르게 뻗어 있고, 간간이 빗물 머금은 거미줄이 햇빛에 반짝인다. 저 멀리서는 빵집에서 풍기는 고소한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을 간지럽힌다.

    **[내레이션 – 지아]**
    (부드러운, 잔잔한 목소리)
    내 이름은 지아.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특별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아 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이다.

    **#2. 지아의 뒷모습**
    회색 후드티에 낡은 청바지 차림의 지아(20대 중반). 커다란 백팩을 메고 조용히 골목을 걷고 있다. 어깨까지 오는 검은 머리는 느슨하게 하나로 묶여 있고, 축 처진 어깨는 왠지 모르게 지쳐 보인다. 하지만 이따금씩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는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내레이션 – 지아]**
    나의 하루는 늘 비슷하다.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정리하고, 조용한 골목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아주 사소한 발견들이다.

    **#3. 지아가 멈춰선 곳**
    지아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낡은 벽돌 담벼락 앞. 담벼락 틈새로 겨우 뿌리를 내린 작은 들꽃 한 송이가, 기적처럼 보랏빛 꽃잎을 열고 있다. 전날 내린 비를 맞아서인지 더욱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다. 지아는 조용히 쪼그려 앉아 들꽃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지아]**
    (혼잣말)
    어제는 봉오리였는데… 하룻밤 새 활짝 피었네. 대단하다, 너.

    **[내레이션 – 지아]**
    누군가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칠 이 작은 생명도, 나에게는 커다란 위로가 된다. 이렇듯, 작은 것들 속에서 빛을 찾는 것이 나의 작은 행복이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랬다.

    **#4. 도서관 내부 – 오후**
    오후의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도서관. 지아는 책꽂이 사이를 오가며 반납된 책들을 정리하고 있다. 먼지 섞인 책 냄새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뒤섞여 희미하게 공기 중에 떠돈다. 그녀의 손길은 섬세하고 조심스럽다.

    **[동료 사서, 민준]**
    (싱긋 웃으며)
    지아 씨, 벌써 다 했어요? 역시 빠르네.

    **#5. 민준과 지아**
    민준(20대 후반, 안경을 쓴 깔끔한 인상)이 카트를 끌고 지아에게 다가온다.

    **[지아]**
    네, 뭐… (어색하게 웃으며) 손에 익어서요.

    **[민준]**
    퇴근하고 바로 집에 가요? 요즘 속삭임의 숲에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던데, 한번 가보는 건 어때요? 스트레스 해소에 좋다더라고요.

    **[지아]**
    (고개를 갸웃)
    속삭임의 숲이요? 저는 늘 반대쪽으로 다녀서… 한 번도 안 가봤는데.

    **[민준]**
    이번에 시에서 산책로도 정비해서 훨씬 걷기 좋을 거예요.

    **[지아]**
    음… 생각 좀 해볼게요.

    **#6. 해 질 녘, 지아의 퇴근길**
    도서관 문을 닫고 나온 지아. 퇴근 시간이 되자 하늘은 짙은 주황색과 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다. 저 멀리, ‘속삭임의 숲’으로 가는 방향 표지판이 어렴풋이 보인다. 지아는 평소와 다르게 그쪽을 한참 올려다본다.

    **[내레이션 – 지아]**
    어쩐지, 오늘은 평소와 다른 길로 가고 싶었다. 작은 들꽃이 보여준 끈질긴 생명력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새로운 것을 향한 막연한 끌림이었을까.

    **#7. 속삭임의 숲 입구**
    ‘속삭임의 숲’이라 쓰인 낡은 나무 간판이 서 있는 숲 입구. 정비되었다고는 해도 여전히 울창하고, 왠지 모를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이제 막 지기 시작한 해가 나뭇가지 사이로 붉은빛을 쏟아낸다.

    **[내레이션 – 지아]**
    숲은 생각보다 깊고, 조용했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부대끼는 소리,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그리고 나의 발소리만이 고요를 가르고 있었다.

    **#8. 숲길을 걷는 지아**
    정돈된 산책로를 따라 지아가 걷는다. 숲은 예상보다 훨씬 깊고, 길게 뻗어 있었다. 주변에는 오래된 나무들이 하늘을 덮고 있어 해는 이미 사라진 듯 어둑어둑하다. 문득, 산책로 한쪽 구석에 허물어진 돌담이 눈에 들어온다.

    **[내레이션 – 지아]**
    이정표를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길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그곳을 발견했다.

    **#9. 낡은 돌담 너머**
    지아의 시선이 머무는 곳. 허물어진 돌담 뒤로, 덩굴 식물에 뒤덮여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는 낡은 석탑이 보인다. 석탑 주변은 오랜 시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어둑한 숲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잃은 석탑은 마치 숨겨진 비밀을 간직한 듯 고요하다.

    **[지아]**
    (숨을 들이쉬며)
    여긴… 뭐지?

    **#10. 석탑으로 향하는 지아**
    호기심에 이끌린 지아가 조심스럽게 돌담을 넘어 석탑 쪽으로 다가간다. 낡은 나뭇가지들이 발목에 걸리고, 흙먼지가 신발에 묻어난다. 가까이 갈수록 석탑은 더욱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11. 석탑의 디테일**
    석탑의 맨 아랫돌은 유난히 닳아 있고, 그 표면에는 희미하게 고대 문양 같은 것이 새겨져 있다. 세월의 풍파를 견딘 듯 문양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되어 있지만, 어딘가 신비로운 기운을 풍긴다.

    **[내레이션 – 지아]**
    오래된 탑. 그리고 그 탑에 새겨진, 잊힌 문양들. 이곳은 분명,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채 오랜 시간을 홀로 견뎌온 장소였다.

    **#12. 지아의 손**
    지아가 천천히 손을 뻗어 석탑의 낡은 돌을 만진다. 차갑고 거친 감촉. 그리고 그 순간, 아주 희미하지만 확실한, 따뜻한 온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져 왔다. 그녀는 놀라 손을 떼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손이 움직이지 않는다.

    **[지아]**
    (작게 중얼거린다)
    이 온기는…?

    **#13. 석탑의 변화**
    지아의 손이 닿은 석탑의 문양에서, 아주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한다. 마치 숨을 쉬듯, 미세하게 깜빡이는 빛. 주변의 어둠을 밀어내듯 점점 그 빛은 선명해지고, 그와 동시에 주변의 나뭇가지들이 기이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14. 주변 식물들의 변화**
    석탑 주변을 둘러싼 마른 덩굴들이 푸른빛을 흡수하듯 파르르 떨더니, 순식간에 새싹을 틔우고 연한 잎을 피워낸다. 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듯 보였던 나뭇가지 끝에서, 작고 아름다운 꽃봉오리들이 돋아난다. 숲은 마법처럼 생명력으로 가득 차기 시작한다.

    **[지아]**
    (눈을 크게 뜨고, 경이로운 표정)
    이게… 뭐야…?

    **#15. 만개하는 꽃**
    꽃봉오리들은 지아의 눈앞에서 빠르게 만개한다. 옅은 노란색, 보라색, 분홍색… 온갖 색깔의 꽃들이 어둑했던 숲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향기로운 냄새가 바람을 타고 지아의 코끝을 스친다.

    **[내레이션 – 지아]**
    눈앞에서 펼쳐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 시간마저 멈춘 듯한 그 순간,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낡고 죽어 보이던 숲은, 온 세상의 생명을 끌어모으듯 찬란하게 피어났다.

    **#16. 지아의 표정**
    두려움보다는 경이로움, 그리고 알 수 없는 평온함이 지아의 얼굴에 가득하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꿈을 꾸는 듯 황홀경에 젖어 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여전히 그녀를 감싸고 있다.

    **[지아]**
    (숨죽인 목소리로)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아…

    **#17. 석탑의 빛이 스며드는 지아의 손**
    석탑에서 흘러나오던 푸른빛이 점점 옅어지며 지아의 손을 통해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듯하다. 지아는 그 빛이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멍하니 석탑을 바라본다. 온기는 사라졌지만, 무언가 잔잔한 에너지가 그녀의 내면에 남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내레이션 – 지아]**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한순간에 사라졌다. 꽃들은 여전히 피어 있었지만, 그 찬란했던 빛과 생명의 폭발은 마치 꿈인 양 아득해졌다. 하지만…

    **#18. 지아가 뒤를 돌아보는 장면**
    지아가 천천히 석탑에서 발걸음을 떼어 숲길로 향한다. 그녀의 어깨가 더 이상 축 처져 있지 않다. 오히려 어딘가 가벼워 보이고, 그녀의 발걸음에는 미세한 활력이 깃들어 있다. 그녀의 뒤로는 방금 전의 기적을 증명하듯, 아름답게 만개한 꽃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내레이션 – 지아]**
    확실히 무언가가 달라졌다. 차가운 석탑에서 전해져 온 따뜻한 온기, 그리고 눈앞에서 펼쳐졌던 기적. 그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꿈이 아니었다. 나의 작은 행복들을 찾아 헤매던 나의 세상에, 이제는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도 특별한 무언가가 스며든 것 같았다.

    **#19. 밤하늘 아래 지아의 집**
    밤이 깊은 새벽골. 지아의 작은 집 창문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온다.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아 손바닥을 펼쳐 가만히 들여다본다.

    **[내레이션 – 지아]**
    그날 밤, 나는 잠들지 못했다. 내 손끝에 남은 아주 희미한 감각… 그리고 나의 마음속에 새겨진, 오래된 숲의 속삭임.

    **#20. 지아의 손에서 아주 희미한 빛이 깜빡인다**
    어두운 방 안. 지아의 손바닥에서,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아주 미세한, 푸른빛 한 점이 깜빡였다 사라진다. 지아는 그 빛을 놓치지 않고 본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지아]**
    (아주 작게, 그러나 확신에 찬 목소리)
    …아니, 꿈이 아니었어.

    **[내레이션 – 지아]**
    나의 평범한 일상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장면 끝]**

  • 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제1장: 침묵하는 강철

    회색빛으로 물든 지하 공동체, ‘요새’는 늘 축축하고 차가웠다. 한때 문명을 지탱했던 거대한 철골 구조물과 콘크리트 잔해들이 켜켜이 쌓인 지상과는 달리, 이곳은 필사적인 노력으로 복원된 생존자들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러나 그 견고한 강철의 심장부마저 때때로 균열을 보였다.

    오늘처럼 말이다.

    요란한 비상등이 깜빡이며 좁은 통로를 붉게 물들였다. 요새의 핵심 구역 중 하나인 ‘엔진 동력실’로 향하는 길목은 이미 삼엄한 경비로 가로막혀 있었다. 경비대원들의 얼굴에는 당혹감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모두의 시선은 굳게 닫힌, 거대한 방폭문으로 향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강 팀장?”

    낮게 깔린 목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타난 이는 요새의 실질적인 해결사, 서진이었다. 그의 회색빛 눈동자는 번뜩이는 비상등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낡고 헤진 코트 차림의 그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유일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강 팀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서진에게 다가왔다. 그의 땀에 젖은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서진 씨, 큰일 났습니다. 김도진 기장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셨다고요? 어떤 식으로요?” 서진의 목소리는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밀실입니다. 완벽한 밀실 살인.” 강 팀장이 이를 악물었다. “동력실은 안에서부터 잠겨 있었습니다. 문은 잠금쇠로 굳게 걸려 있었고, 외부에서 강제로 열려는 시도도 없었어요. 환기구는 너무 작아서 사람이 드나들 수 없고, 비상 통로는 어차피 바깥쪽에서만 열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창문은 없고요.”

    “시신은 누가 발견했죠?”

    “김 기장님 조수인 유미 씨가 발견했습니다. 김 기장님이 출근 시간에 나오지 않자 걱정돼서 찾아갔는데, 문이 잠겨 있어 다른 대원들과 겨우 열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문을 열기 전 상태는 어땠습니까? 훼손된 곳은 없었고요?”

    “전혀요. 잠금쇠는 안에서 완전히 걸려 있었습니다. 쇠 지렛대 같은 걸로 겨우 비틀어 열었죠. 지금은 다시 닫아놓았습니다. 훼손된 부분은 그대로 두었고요.”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강철 방폭문을 훑었다. 견고한 강철 표면에 희미하게 남은 긁힌 자국들과, 강제로 열면서 생긴 새로운 금속의 번뜩임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문에 손을 얹어 차가운 온기를 느꼈다.

    “안으로 들어가 보죠.”

    문이 다시 열리고 서진은 동력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퀴퀴한 기름 냄새와 피 냄새가 뒤섞인 역겨운 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동력실은 거대하고 복잡한 기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엔진의 낮은 윙윙거림이 음산하게 울리고, 여기저기 연결된 전선들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얽혀 있었다.

    중앙에 놓인 작업대 옆, 김도진 기장이 차가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등에는 녹슨 스패너가 깊이 박혀 있었다. 피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고, 이미 싸늘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는 고통과 함께 알 수 없는 의문이 서려 있었다.

    “사인은 등 부위의 강한 충격으로 인한 출혈 과다입니다.” 요새의 의료 담당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망 시각은 대략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로 추정됩니다. 작업 중 변을 당하신 것 같습니다.”

    서진은 시신에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스패너에는 손대지 않고, 김 기장의 손가락 마디마디, 작업복 주머니, 그리고 그 주변 바닥에 흩어진 작은 부품들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시선은 흡수 스펀지처럼 모든 정보를 빨아들였다.

    “이 스패너는 기장님 개인 공구함에 있던 겁니다. 저런 특별한 크기는 기장님만 사용하셨어요.” 유미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서진은 일어서서 동력실 전체를 다시 한번 훑었다. 기계 패널, 제어장치, 그리고 저 뒤편으로 어렴풋이 보이는 거대한 엔진 블록들.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지만, 김 기장이 주로 사용하던 작업대 주변만큼은 비교적 깨끗했다.

    “문은 안에서 잠겼다고 했죠?” 서진이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네, 분명히요!” 강 팀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저 문은 김 기장님이 직접 개조한 겁니다. 내부에서 저 육중한 빗장을 걸면, 외부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열 수 없게 설계되어 있어요. 지문 인식 장치도 자동으로 비활성화됩니다. 오직 안에서만 풀 수 있는 거죠.”

    “그럼 저 빗장은 누가 걸었을까요? 기장님 스스로요?” 서진의 목소리에 미묘한 뉘앙스가 섞였다.

    “그럼요! 기장님은 워낙 조심성 있는 분이셨습니다. 특히 밤샘 작업 때는 늘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셨죠.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요.”

    서진은 문 안쪽의 빗장을 응시했다. 거대한 강철 빗장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잠겨 있을 터였다. 그는 문틀과 빗장 사이에 희미하게 보이는 미세한 마모 흔적을 발견했다. 일반적인 사용으로는 생기기 어려운, 묘하게 한쪽으로 치우친 마모였다.

    그는 문 주변 바닥을 살폈다. 미세한 쇳가루가 빗장 아래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문틀의 가장자리, 콘크리트와 강철이 만나는 지점에 손톱만 한 검은 그을음 자국이 보였다. 너무나 미미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절대 발견할 수 없는 흔적이었다.

    “이 검은 그을음은 무엇입니까?” 서진이 무릎을 굽혀 그 자국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강 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원래 없던 것 같은데. 아마 기계 오작동으로 인한 흔적일까요?”

    “아니요.” 서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고열로 인한 흔적입니다. 어떤 금속이 순간적으로 녹아내리면서 생긴 자국이죠. 그리고 이 쇳가루들은… 문의 빗장을 강제로 열 때 생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훨씬 더 미세하고, 균일해요.”

    그는 문 안쪽의 빗장을 한 번 더 만져보았다. 묵직한 강철의 차가움.

    “강 팀장, 김 기장님이 이 문의 잠금장치를 직접 개조했다고 했죠?”

    “네, 그렇습니다. 기존의 것보다 훨씬 더 안전하게 만들었다고 자랑하셨어요.”

    “이 빗장이 안에서 걸리면, 외부의 지문 인식 장치가 비활성화된다고요?”

    “네, 동시에요. 완전히 밀폐되는 겁니다.”

    서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은 다시 김 기장의 시신으로 향했다. 등 뒤에 박힌 스패너, 굳어버린 표정, 그리고 바닥에 흩어진 작은 부품들. 그의 머릿속에서 조각난 정보들이 마치 퍼즐처럼 맞춰지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다시 문 쪽으로 걸어갔다. 손전등을 꺼내 문 주변을 구석구석 비췄다. 그리고 문틀과 벽이 만나는 미세한 틈새에 거의 보이지 않는, 섬세한 긁힌 자국을 발견했다. 마치 얇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스쳐 지나간 듯한 흔적이었다.

    “강 팀장, 여기 요새에 김 기장님 말고 이 동력실 문의 구조와 잠금장치에 대해 완벽하게 아는 사람이 또 있습니까?”

    강 팀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음… 기장님의 조수인 유미 씨가 어느 정도는 알 겁니다. 그리고 과거에 기장님과 함께 이 동력실의 보수 작업을 했던 몇몇 인원들이요. 하지만 저 잠금장치 개조는 기장님이 거의 혼자 하셨습니다.”

    유미는 불안한 눈빛으로 서진을 바라봤다. “저는 기장님께 배운 대로 조작할 줄은 알지만, 설계까지는 모릅니다.”

    “그렇군요.” 서진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서진 씨, 도대체 뭘 발견한 겁니까?” 강 팀장이 답답한 듯 물었다.

    “밀실의 트릭은 문 자체에 있었습니다.” 서진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은 문 안쪽 빗장과 그 주변의 미세한 흔적들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이 문은 겉으로는 완벽한 밀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범인이 밖에서 조작할 수 있도록 설계된 ‘함정’이었습니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 기장님은 이 빗장이 안에서 걸리면 외부 지문 인식이 비활성화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했죠. 즉, 밖에서 문을 잠그고 싶으면, 빗장이 안에서 걸려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밖에서 빗장을 걸 수 있었을까요?”

    “말도 안 됩니다! 빗장은 안에서만 조작 가능해요!” 강 팀장이 흥분해서 외쳤다.

    “겉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서진은 침착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저 빗장은 강철로 되어 있죠. 그리고 김 기장님은 이 동력실에서 온갖 금속 가공 작업을 하셨습니다. 범인은 김 기장님의 공구를 이용했을 겁니다.”

    그는 그을음 자국이 있던 문틀의 미세한 틈새를 가리켰다. “여기에 남은 그을음은 강력한 전류로 금속을 녹여 절단할 때 생기는 흔적입니다. 그리고 이 미세한 쇳가루들. 그리고 문틀의 긁힌 자국.”

    “범인은 얇고 긴 특수 공구를 만들었거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구를 이 문틀의 아주 작은 틈새로 밀어 넣었던 겁니다. 안에서 빗장이 걸린 상태에서, 그 공구를 이용해 빗장 내부의 특정 부분을 조작한 거죠. 김 기장님이 설계한 잠금장치의 맹점을 파고든 겁니다. 안에서 걸린 빗장을 외부에서 해제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빗장을 걸 수 있도록 만든 ‘함정’을요.”

    서진은 틈새에 손가락을 대고 설명했다. “김 기장님은 이 빗장을 외부로부터 더욱 견고하게 잠그기 위해, 빗장이 내부에서 걸리는 순간 외부에서 특정 전압을 가하면 빗장이 더욱 깊이 결합되는 ‘이중 잠금’ 구조를 만들었던 겁니다. 스스로의 안전을 위해 만든 시스템이 역으로 이용된 거죠.”

    “범인은 이 틈새로 특수 전극을 삽입했고, 김 기장님 작업대 주변에 있던 고전압 전원 장치에 연결했을 겁니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강력한 전류를 흘려보내 빗장 내부의 특정 금속 부분을 순간적으로 녹여 결합을 유도하고, 빗장을 밖에서 완전히 걸리게 만든 겁니다. 그리고 재빠르게 전극을 빼내면서 생긴 흔적이 바로 저 미세한 그을음과 긁힘 자국, 그리고 쇳가루들이죠. 그 후에 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침입했던 겁니다.”

    모두가 충격에 휩싸였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기발하고 잔혹한 트릭이었다.

    “그럼 범인은 누가 되는 겁니까?” 강 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서진의 시선은 조용히 유미에게 향했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이 복잡하고 정교한 트릭은 이 문의 설계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김 기장님 작업대와 공구들에 능숙한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특히 그 고전압 전원 장치와 연결하는 방식은 더욱 그렇죠. 그리고 김 기장님의 특수한 스패너를 사용해 살해할 정도로, 그의 작업 습관과 개인 물품을 잘 아는 사람.”

    “유미 씨, 당신은 김 기장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일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 가장 능통한 사람이죠. 그리고 당신의 작업복에는 방금 설명한 것과 같은 종류의 미세한 쇳가루가 묻어 있습니다. 틈새에 삽입했던 전극을 빼내는 과정에서 옷에 묻었을 겁니다.”

    유미는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눈에서는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그것은 슬픔보다는 공포에 가까웠다.

    “아… 아니에요! 제가… 제가 아닙니다!”

    “새벽 3시에서 4시 사이, 김 기장님이 이중 잠금 시스템을 시험하기 위해 안에서 빗장을 걸고 외부 전압을 기다리던 순간, 당신은 그를 죽이러 들어갔습니다. 어쩌면 그에게서 중요한 설계도를 빼내려 했을지도 모르죠. 그리고 당신은 그가 죽은 후, 문의 틈새로 공구를 넣어 빗장 내부의 회로를 조작하여 밖에서 다시 잠근 겁니다. 그리고는 쇠 지렛대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연극을 한 거고요.”

    서진의 마지막 한 마디는 비수가 되어 유미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는 결국 무너져 내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흐읍… 기장님이… 기장님이 저한테만 핵심 설계를 안 알려주셨어요… 저보다 능력 없는 다른 사람들한테만…”

    요새의 비상등은 여전히 붉게 깜빡였지만, 그 빛은 더 이상 수수께끼를 감추고 있지 않았다. 서진은 말없이 돌아섰다. 복잡한 기계음만이 울려 퍼지는 동력실에서, 그의 존재는 이미 흐릿한 그림자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또 하나의 밀실이 풀리고, 또 하나의 진실이 드러났지만, 요새의 차가운 강철은 여전히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작품 제목**: 잃어버린 심연의 기록

    **에피소드 1: 깨어나는 그림자**

    **(장면 전환: 어둠골 지하 유적, 음침하고 습한 통로. 벽에는 오랜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정적만이 가득하다.)**

    **(내레이션 – 시온)**
    사람들은 늘 새로운 것을 좇는다. 더 강한 무기, 더 화려한 마법, 더 높은 명성. 하지만 나에게 이 세상 ‘에테르나’는 미지의 땅이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 아무도 알지 못하는 진실. 그것이 나를 이 음습한 지하로 이끄는 이유였다.

    **(시온의 시점: 한 손에는 탐색용 횃불, 다른 손에는 낡은 고문서와 비슷한 지도를 들고 있다. 그의 발소리가 텅 빈 통로에 울려 퍼진다. 그는 마치 숨 쉬는 듯 고요한 유적의 공기를 느끼며 천천히 전진한다.)**

    **(음향 효과: 돌이 부스러지는 미세한 소리, 횃불 심지가 타는 소리)**

    **시온**: (작게 중얼거린다) 흥미롭군. 이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분명 더 깊은 심연일 텐데… 왜 지금까지 아무도 찾지 못했을까.

    **(시온, 낡은 석조 벽을 손으로 훑는다. 미세한 먼지가 그의 손에 묻어난다. 그의 시선이 벽의 특정 지점에 멈춘다. 다른 곳보다 약간 색이 바랜 부분이다.)**

    **(시온의 시야에 ‘탐색: 숨겨진 장치 감지’ 알림이 뜬다.)**

    **시온**: 찾았다. 이 망할 놈의 위장 마법은 늘 나를 짜증 나게 하지.

    **(시온, 품에서 작은 만능 도구를 꺼내 바랜 벽 틈새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는다. ‘딸깍’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벽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간다. 그 뒤에 숨겨져 있던 낡은 레버가 모습을 드러낸다.)**

    **(레버는 녹슬어 있고, 고대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묘한 에너지가 레버 주변을 감싸고 있는 듯하다.)**

    **시온**: 이거, 생각보다 오래된 것 같군. 일반적인 장치와는 달라.

    **(시온, 잠시 망설이다 레버에 손을 얹는다. 손끝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진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레버를 아래로 힘껏 내린다.)**

    **(음향 효과: 묵직한 기계음이 지하 전체를 흔든다. 퀘르르릉! 이끼 낀 벽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지고, 바닥이 진동한다.)**

    **(장면 전환: 시온의 등 뒤, 지금까지 막혀있던 거대한 석판 벽이 천천히 옆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석판 뒤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다. 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랏빛 기운이 일렁인다.)**

    **시온**: (눈을 가늘게 뜨며) 이 기운… 이건 마나의 흐름이 아니야. 더 원시적이고… 심오해.

    **(열린 통로 안쪽은 일반적인 유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벽과 천장이 기이한 문양으로 가득하며, 바닥에서는 희미한 푸른빛을 내는 결정들이 돋아나 있다. 마치 살아있는 동굴 같기도 하다.)**

    **시온**: 혼자 가기엔 좀 껄끄럽군. 이곳은…

    **(시온, 가상현실 인터페이스를 띄워 친구 목록을 확인한다. ‘리엘 (접속 중)’이라는 이름에 망설임 없이 메시지를 보낸다.)**

    **(장면 전환: 잠시 후, 어둠골 지하 유적의 입구. 시온이 서 있는 곳으로 가볍게 달려오는 한 여성의 실루엣. 그녀는 붉은색 로브를 걸치고 있으며, 지팡이 끝에서는 은은한 마법의 빛이 새어 나온다.)**

    **리엘**: 시온! 메시지를 보자마자 무슨 일인가 했더니, 또 희한한 걸 찾아냈어?

    **(리엘, 숨을 헐떡이며 시온에게 다가온다. 그녀의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시온**: 희한한 정도가 아니야, 리엘. 이건 차원이 달라.

    **(리엘의 시선이 열린 통로 안쪽으로 향한다. 그녀의 얼굴에 놀라움이 역력하다.)**

    **리엘**: 세상에… 이건 유적 지도가 업데이트되지 않은 곳이잖아! 게다가 이 마력… 보통 마력이 아니야. 거칠고, 동시에 정교해. 뭔가 다른 문명이 사용하던 힘 같아.

    **시온**: 내 말이 그 말이야. 이 앞은 분명 지금까지 알려진 어둠골 유적과는 완전히 다른 곳일 거야. 그래서 너의 도움이 필요해. 탐색은 내가 전문가지만, 이런 미지의 마력 흐름은 네가 더 잘 읽어낼 테니.

    **리엘**: (지팡이를 고쳐 잡으며 미소 짓는다) 당연하지! 이런 모험은 언제나 환영이야. 그래, 들어가 보자고! 잊혀진 심연의 문을 열어보자!

    **(두 사람, 열린 통로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푸른빛 결정들이 발밑에서 반짝인다. 통로가 좁아지며 점차 어둡고 미로 같아진다.)**

    **(내레이션 – 리엘)**
    시온은 늘 그랬다.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미지의 진실을 찾아 헤매는 탐험가. 그리고 나는, 그런 그의 곁에서 그의 빛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의 눈이 닿지 않는 곳까지, 그의 발이 닿지 못하는 곳까지. 우리는 그렇게 ‘잃어버린 세계, 에테르나’의 비밀을 함께 파헤쳐 왔다.

    **(음향 효과: 발자국 소리,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희미하게 들려오는 바람 소리)**

    **(장면 전환: 통로를 한참 걷자, 거대한 지하 공간이 나타난다. 공간은 마치 고대 신전의 일부처럼 웅장하다. 천장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고, 기둥들은 거대한 용의 비늘처럼 반짝이는 재질로 이루어져 있다. 공기 중에는 묘한 압력이 느껴진다.)**

    **시온**: (주변을 둘러보며) 대단하군… 이건 우리가 알던 어둠골 유적의 건축 양식이 아니야. 완전히 달라.

    **리엘**: (지팡이에서 빛을 뿜어내며 주변을 비춘다) 봐, 시온! 저 벽에 새겨진 문양들… 고대 언어 같기도 하고, 동시에 마법 회로 같기도 해. 이 공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마법 장치일지도 몰라.

    **(그때, 공간 한가운데서 ‘끼이익’ 하는 끔찍한 금속음이 들려온다. 바닥에 흩어져 있던 금속 파편들이 서서히 뭉치며 형태를 갖춘다. 고대 병기, 골렘의 모습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골렘과는 달리, 그 몸체에서는 푸른 결정들이 돋아나 있으며, 눈에서는 붉은 섬광이 번쩍인다.)**

    **시온**: (재빨리 자세를 낮추며) 하! 역시. 이런 곳에 지킴이가 없을 리 없지. 리엘, 준비해!

    **리엘**: (지팡이를 치켜들며) 언제든! ‘서리 파동’!

    **(리엘의 지팡이 끝에서 푸른색 냉기 파동이 뿜어져 나와 골렘을 향해 날아간다. 골렘의 움직임이 잠시 느려지지만, 곧 몸을 떨며 냉기를 깨트린다. 그 몸체에 박힌 푸른 결정들이 더욱 강렬하게 빛난다.)**

    **시온**: 제길, 일반적인 골렘이 아니야! 마법 저항이 상당한데?

    **(골렘이 거대한 주먹을 휘둘러 바닥을 내려찍는다. 바닥에서 돌기둥이 솟아올라 시온을 위협한다. 시온은 민첩하게 몸을 날려 피한다.)**

    **시온**: (단검을 뽑아 들며) 내가 시선을 끌게! 넌 저 결정들을 노려! 저게 약점일 거야!

    **(시온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골렘의 거대한 몸체 주위를 맴돈다. 그의 단검이 번개처럼 골렘의 관절 부분을 스쳐 지나간다. ‘챙! 챙!’ 하는 금속음이 울리지만, 큰 피해는 주지 못한다.)**

    **리엘**: (숨을 고르며) 알았어! ‘화염 구속’!

    **(리엘의 주문에 따라 뜨거운 화염 사슬이 솟아나 골렘의 몸을 얽어맨다. 골렘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지만, 확실히 둔화된다.)**

    **시온**: 지금이야!

    **(시온은 화염에 구속되어 주춤거리는 골렘의 등에 솟아난 가장 큰 푸른 결정에 단검을 꽂아 넣는다. ‘파지지직!’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결정이 깨지며 골렘의 몸에서 푸른빛이 급격히 사라진다. 골렘은 비틀거리다 결국 거대한 굉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진다.)**

    **(음향 효과: 골렘이 쓰러지는 굉음, 파편이 흩어지는 소리)**

    **리엘**: 휴, 생각보다 강했네. 고대 병기는 역시…

    **시온**: (쓰러진 골렘의 파편을 확인하며) 푸른 결정… 이건 마력원이라기보다는… 생명력에 가까운 느낌인데. 이 유적 전체가 어떤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것 같아.

    **(두 사람,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골렘이 지키고 있던 곳 너머에는 거대한 원형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공간의 중앙에는 거대한 석조 제단이 자리 잡고 있으며, 제단 위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구슬이 놓여 있다.)**

    **리엘**: (놀라서 숨을 들이켠다) 저것 봐, 시온! 저 구슬… 엄청난 마력이 응축되어 있어!

    **시온**: (천천히 제단으로 다가가 구슬을 바라본다) 단순한 마력 구슬이 아니야. 저 안에… 뭔가 기록되어 있어. 수많은 정보가 잠들어 있는 것 같군.

    **(시온이 구슬에 손을 뻗으려 하자, 구슬에서 섬광이 터져 나오며 주변 벽에 새겨진 고대 문자들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동시에 시온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영상이 스쳐 지나간다.)**

    **(시온의 시점: 찰나의 순간, 고대 문명의 번영과 몰락, 그리고 거대한 재앙이 닥치는 모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그들의 지혜와 기술, 그리고 결국 사라져 간 비극적인 역사가… 구슬에 담겨 있는 듯하다.)**

    **시온**: (머리를 감싸 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낸다) 으윽… 이게 대체… 무슨…

    **리엘**: 시온! 괜찮아?! 마력이 너무 강력해!

    **(그 순간, 제단 아래 바닥에서 ‘콰르르릉!’ 하는 더욱 거대한 진동이 시작된다. 공간 전체가 흔들리고, 천장과 벽에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음향 효과: 거대한 진동음, 돌이 무너지는 소리, 알 수 없는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짐승의 포효 같은 소리)**

    **시온**: (고통 속에서도 눈을 크게 뜨며) 아니… 이 소리는…!

    **(진동이 점점 더 거세지더니, 제단 뒤편의 거대한 벽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한다. 부서진 벽 너머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이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한 붉은 눈이 번쩍인다.)**

    **리엘**: (경악하며) 저, 저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방금 쓰러뜨린 골렘과는 비교도 안 되는 거대한 규모의 존재였다. 온몸이 푸른 결정으로 뒤덮인, 고대 전설 속 괴물처럼 보이는 거대한 골렘이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시온**: (이를 악물며) 제길! 이제 시작인가…!

    **(장면 전환: 거대한 골렘의 붉은 눈이 시온과 리엘을 응시한다. 그 눈빛은 단순한 경계가 아닌, 오랜 잠에서 깨어난 분노를 담고 있는 듯하다. 화면은 거대 골렘의 위용과 그 앞에서 한없이 작아 보이는 시온과 리엘의 모습으로 서서히 어두워진다.)**

    **(에피소드 1 끝)**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우주선 아틀라스 호, 인류의 마지막 개척지라 불리던 태양계 너머, 미지의 영역을 탐사 중이었다. 함교의 스크린은 검고 푸른 성운과 먼지띠 너머, 익숙지 않은 낯선 별들의 춤을 보여주고 있었다. 선장 이준호는 조용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수십 년 항해 경력에도 불구하고, 이 광활한 심연은 언제나 그를 겸허하게 만들었다.

    “선장님, 약 500AU 전방에서 에너지 신호 감지되었습니다.”

    항법사 최유리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젊은 그녀의 눈은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에너지 신호? 어떤 종류지?” 준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확인 물질입니다. 기존 데이터와 일치하는 바가 없습니다. 일시적 변동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안정적으로 지속되고 있어요.”

    수석 과학자 김수현이 흥미로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정밀 분석 결과는요, 유리 씨?”

    “일반적인 별의 에너지원과는 다릅니다. 인공적인 패턴에 가깝지만, 너무도… 복잡합니다. 저희가 아는 어떤 문명의 흔적과도 달라요.” 유리의 목소리에 호기심과 함께 미묘한 긴장이 섞여 있었다.

    준호는 잠시 침묵했다. 미지의 신호. 이토록 깊은 심우주에서. “경계 태세 발령. 탐사선 발진 준비해.”

    ***

    아틀라스 호의 보조 탐사선 ‘갈라테아’는 어둠 속을 헤치며 나아갔다. 수현, 민재, 그리고 유리, 세 명의 승무원이 탑승해 있었다. 엔진장 박민재는 투박한 손으로 조종간을 잡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했지만, 헬멧 너머로 보이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젠장, 이 놈의 우주선은 늘 이런 식이지.” 민재가 중얼거렸다. “새로운 거 찾으러 다니다가 엉뚱한 거에 걸려 넘어지질 않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게 저희 임무 아닌가요, 민재 씨? 이런 미지의 영역에서 미지의 신호를 발견한 건 인류에게 엄청난 도약이 될 겁니다.” 수현의 목소리에는 들뜬 기대감이 역력했다.

    갈라테아는 신호의 근원지에 도착했다. 그것은 거대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구조물이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암석 덩어리도, 인류가 아는 어떤 형태의 우주선도 아니었다. 기하학적으로 완벽하면서도, 동시에 비정형적인 곡선들이 뒤엉켜 있는 모습은 눈을 피로하게 만들었다.

    “이건… 대체 뭐야.” 유리가 숨을 들이켰다.

    민재는 조심스럽게 갈라테아를 구조물의 표면에 착륙시켰다. 외부 카메라가 전송하는 영상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구조물은 표면 전체가 검은색이었고, 빛을 흡수하는 듯했다. 간혹 표면에 흐릿하게 보이는 문양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함장님, 착륙했습니다. 구조물의 외벽은 어떤 에너지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분석 불가입니다.” 수현이 통신했다.

    “외부 진입은?” 준호의 목소리에 신중함이 묻어났다.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아, 여기 통로가 있습니다!” 수현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작은 입구가 열려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보입니다.”

    “섣불리 들어가선 안 돼, 수현 박사.” 민재가 경고했다. “이런 건 언제나 함정이었어.”

    “함정이라뇨, 민재 씨. 이건 발견이에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수현은 들뜬 목소리로 유리를 돌아봤다. “유리 씨, 준비됐죠?”

    유리는 잠시 망설였다. “네, 박사님.”

    민재는 한숨을 쉬었다. “내가 갈 테니까, 유리 씨는 여기서 대기해.”

    “아니요, 제가 가겠습니다.” 유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제 전공은 탐사이기도 합니다. 박사님을 보호하고, 정보를 수집하는 건 제 임무예요.”

    결국 세 사람은 생체 보호복을 갖춰 입고 구조물의 내부로 진입했다. 내부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그들의 탐사등이 닿는 곳마다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벽면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문양으로 가득했다. 공기 중에는 묘한, 금속 비린내와 함께 달콤한 향이 섞여 있었다.

    “산소 농도 정상. 대기 성분 이상 없음.” 유리가 보고했다.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은 거대한 홀에 다다랐다. 홀의 중앙에는 검은색의, 완벽한 정육면체 형태의 물체가 떠 있었다. 탐사등이 닿자, 그 검은 표면은 빛을 흡수하는 동시에 미약하게 빛을 반사하는 듯한 착시를 일으켰다. 그리고 정육면체는 아주 희미하게, 사람의 귀로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주파수로 웅웅거리고 있었다.

    “이것이… 에너지 신호의 근원지입니다.” 수현이 전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정육면체에 손을 뻗었다.

    “수현 박사님! 위험합니다!” 민재가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수현의 손끝이 검은 정육면체에 닿는 순간, 파동이 일었다. 정육면체의 표면에서 미세한 먼지 같은 것들이 뿜어져 나와 수현의 보호복 표면에 달라붙었다.

    “이것 봐… 아무런 유해 반응도 없습니다. 하지만… 표면에서 뭔가가 분리되고 있어요. 샘플 채취하겠습니다.” 수현은 작은 채취 도구를 꺼내 먼지 몇 가닥을 조심스럽게 담았다.

    민재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정육면체를 바라봤다. “함장님, 샘플 채취했습니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이 물체는 마치 모든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입니다. 여기 있으면 불쾌합니다.”

    “알겠다. 민재, 수현 박사, 유리. 즉시 귀환해. 분석은 아틀라스에서 진행한다.” 준호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

    아틀라스 호로 돌아온 후, 수현은 곧바로 실험실로 향했다. 그녀는 채취한 샘플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경이로움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살아있는 세포도, 무생물도 아니었다. 단단한 결정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세하게 움직이는 듯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다.

    “박사님, 괜찮으세요?” 유리였다. 그녀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응? 아, 유리 씨. 왜요? 피곤해 보여요.” 수현이 현미경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그냥… 머리가 좀 아파서요. 속도 안 좋고.” 유리는 이마를 짚었다. “아까 그 구조물에 있을 때부터 좀 이상했어요. 공기가… 역했어요.”

    “정신적인 피로일 겁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스트레스겠죠.” 수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좀 쉬세요. 제가 이 샘플 분석을 마치면 엄청난 결과가 나올 겁니다.”

    하지만 유리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몇 시간 후, 그녀는 식사를 거부하고 침대에 누워 신음했다. 온몸에 오한이 들고, 열이 펄펄 끓었다.

    “함장님, 유리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의무관이 보고했다. “어떤 바이러스에도 해당되지 않고, 기존의 질병 증세와도 다릅니다.”

    준호는 유리의 병실로 향했다. 유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피부는 비정상적으로 창백했다. 그녀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고, 초점은 흐릿했다.

    “유리 씨, 제 말 들려요?” 준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리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려 했으나, 이내 온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갑자기, 그녀의 몸이 격렬하게 경련했다. 침대 시트를 움켜쥔 손가락은 비틀리고, 손톱은 길고 날카롭게 변하는 듯했다. 그녀의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짐승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리 씨!” 의무관이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 순간, 유리가 눈을 번쩍 떴다. 핏발 선 눈동자는 광기로 번뜩였다. 그녀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침대에서 튀어 올랐다. 의무관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아아악!” 비명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준호는 순식간에 권총을 뽑아 들었지만, 망설였다. 유리는 이제 사람이 아니었다. 의무관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채,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인간의 형상을 잃어가고 있었다. 턱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고, 치아는 송곳처럼 뾰족해졌다.

    “제압해! 죽이지 말고 제압해!” 준호가 소리쳤다.

    보안팀이 달려왔지만, 유리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녀는 벽을 짚고 천장을 기어다니는 듯한 기동력을 보이며 달려들었다. 보안팀원 한 명이 목을 물려 쓰러졌다. 그리고 불과 몇 초 만에, 쓰러진 보안팀원의 몸이 경련하더니 똑같이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이건… 감염이다!” 준호의 뇌리에 섬광처럼 스쳤다. “젠장, 수현 박사! 김수현 박사에게 연락해! 샘플! 그 샘플 때문이야!”

    ***

    아틀라스 호의 복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소리와 찢어지는 살점 소리, 그리고 괴물들의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뒤섞였다. 감염은 놀라운 속도로 퍼져나갔다. 물린 자는 물론, 감염된 자의 피나 체액에 노출된 자들마저 빠르게 변이했다. 그들의 피부는 회색빛으로 변하고, 눈은 핏발 서린 광기로 번뜩였다. 이성은 사라지고, 오직 파괴적인 충동만이 남아 있었다.

    “함장님! 격벽을 폐쇄해야 합니다! 더 늦으면 통제 불능이 됩니다!” 민재가 통신했다. 그는 이미 자신의 구역에서 몇 명의 변이체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준호는 함교의 통제판에 주먹을 내리쳤다. “실험실 구역 봉쇄해! 수현 박사에게 무슨 일이 있어선 안 돼!”

    하지만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통신은 잡음으로 가득했고, 수현의 응답은 없었다.

    준호는 남아있는 보안팀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함교를 사수한다! 그리고… 수현 박사를 찾아! 그녀가 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

    그는 권총을 꽉 쥐었다. 복도 저편에서, 끔찍하게 변이한 승무원들이 기괴한 몸놀림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

    수현의 실험실은 난장판이었다. 테이블은 뒤집히고, 유리 기구들은 산산조각 나 있었다. 수현은 구석에 웅크려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눈은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팔에는 깊은 상처가 나 있었고, 이미 피부색이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박사님! 김수현 박사!” 준호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수현은 준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그녀의 눈이 준호를 향했다. 그 눈에는 아직 일말의 이성이 남아 있는 듯했지만, 동시에 끓어오르는 광기가 보였다.

    “함장님… 안 돼요… 이대로는… 안 돼요…” 수현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이건… 이건 단순한 감염이 아니에요… 진화… 아니… 퇴화…”

    그녀의 손에는 깨진 현미경 렌즈가 쥐어져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자신에게서 채취한 샘플 옆에 놓았다. 샘플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그 샘플… 그것 때문에 이렇게 된 겁니까?” 준호가 물었다.

    수현은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냈다. “그것은… 살아있는 물질이에요… 우리의 생체 에너지를 흡수해서… 자신을 복제해요… 그리고 숙주를… 비틀어요… 다른 존재로… 만들어 버려요… 그 외계 유물… 그것 자체가… 생명체였어요…”

    그녀의 몸이 격렬하게 경련했다. 그녀의 피부에 기괴한 문양들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그 외계 구조물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과도 같았다.

    “함장님… 제발…” 수현은 간신히 손을 뻗어 준호의 팔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이 닿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활처럼 휘더니 다시 짐승 같은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그녀의 눈은 완전히 핏빛으로 물들었다. 이젠 어떤 이성도 남아있지 않았다.

    “수현 박사…!” 준호는 차마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그와 연구를 함께했던 천재 과학자의 얼굴이, 지금은 끔찍한 괴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때, 민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장님! 제가 있는 구역의 격벽이 무너졌습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복도 저편에서, 기괴한 소리와 함께 그림자들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준호는 수현을 돌아봤다. 그녀는 이미 그의 눈앞에서 완벽한 변이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총을 들었다.

    “미안하다, 수현 박사.”

    탕! 총성이 실험실을 울렸다.

    준호는 뒤돌아섰다. 그의 얼굴에는 결단이 서려 있었다.

    ***

    “함장님! 이대로라면 통제 불능입니다! 퇴출 절차를 밟아야 합니다!” 민재가 통신했다. 그는 이제 엔지니어 구역의 마지막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퇴출? 뭘 퇴출한다는 건가, 민재? 어디로?” 준호가 핏발 선 눈으로 물었다.

    “아틀라스 호를… 이대로… 자폭시켜야 합니다.” 민재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 감염체가 우주로 퍼져나가선 안 됩니다. 인류에게 닿아서는 안 돼요!”

    준호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함교의 메인 스크린을 바라봤다. 스크린에는 비상등이 깜빡이는 아틀라스 호의 내부 지도가 보였다. 빨간색으로 물든 구역들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고 있었다. 우주선은 이미 살아있는 지옥이 되어버렸다.

    “이건… 우리의 임무였어. 미지의 것을 탐사하는…” 준호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미지의 것이… 우리를 파괴할 줄이야…”

    “함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감염체들이 함교로 진입하려 합니다!” 민재가 다급하게 외쳤다. 그의 목소리 뒤로 둔탁한 금속음과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준호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은 자폭 스위치를 향했다. 이 우주선에는 이제 그와 민재뿐이었다. 어쩌면 민재마저도…

    “민재, 자네는…”

    “걱정 마십시오, 함장님. 저는 제 위치를 지키겠습니다. 당신의 명령을 기다립니다.” 민재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지막까지, 그는 군인이었다.

    준호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암흑의 우주가, 그리고 그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외계 구조물이 떠올랐다. 그것은 마치 모든 것을 비웃는 듯, 여전히 그 자리에 고고하게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아틀라스 호… 모든 인류에게 고한다…” 준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마지막 메시지를 전송했다. “우리는 미지의 영역에서… 미지의 존재와 조우했다. 인류의 운명을 뒤바꿀 수도 있는… 아니, 이미 뒤바꾼… 그것은… 이 우주선과 함께… 소멸할 것이다.”

    그의 손가락이 스위치를 눌렀다. 함교 전체가 붉은 비상등으로 물들었다.

    “카운트다운 시작. 남은 시간… 5분.”

    복도 저편에서, 마지막 격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끔찍한 괴물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의 핏발 선 눈은 오직 생존자를 향해 있었다.

    준호는 권총을 들어 올렸다. 그의 얼굴에는 절망 대신, 차가운 결의가 서려 있었다.

    “끝까지… 싸운다.”

    아틀라스 호는 검은 우주를 가로지르며, 스스로의 종말을 향해 마지막 항해를 시작했다. 어둠 속, 미지의 별들만이 그들의 마지막 비극을 지켜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