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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법소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한유리의 스물세 번째 생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평범한 어느 화요일 밤이었다. 아파트 12층, 그녀의 작은 투룸에서 유리는 늦은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따닥따닥 타일 위를 걷는 발소리조차 유난히 크게 울리는 고요한 밤이었다. 도시의 불빛은 창밖으로 바둑판처럼 펼쳐져 있었지만, 그녀의 방 안은 이상하게도 정적에 잠겨 있었다.

    “흐음, 오늘 반찬은 뭘 하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텅 비어가는 냉장고를 보며 한숨을 쉬던 그때였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냉장고 문이 저절로 닫혔다.

    “어라?”

    분명히 활짝 열어두었던 문이었다. 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람이 불 리도 없는데. 설마, 내가 깜빡하고 덜 열었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문을 열었다. 이번엔 꼼꼼히 활짝 열린 것을 확인하고 잠시 냉장고 속을 들여다봤다. 그러자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더니, 다시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이번에는 꽤 큰 소리였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유리는 움찔하며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주방에는 그녀 혼자뿐. 낡은 아파트라 그런가? 현관문이 덜 닫혔나? 아님, 위층에서 공사를 하나? 여러 가지 추측을 해보려 했지만, 이내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뭔가 이상했다.

    식사를 포기하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핸드폰을 들고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가, 괜히 웃음거리가 될까 싶어 망설였다. ‘냉장고 문이 저절로 닫혔어!’라고 하면 미쳤냐고 할 게 뻔했다. 그때, 거실의 스탠드 조명이 깜빡거렸다.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장난스럽게 껐다 켰다 하는 것처럼.

    “무슨…”

    유리는 숨을 들이켰다. 분명히 몇 달 전 새로 갈아 끼운 전구였다. 고장 날 리가 없었다. 깜빡임은 점점 더 빠르고 격렬해졌다. 어둠과 빛이 번갈아 가며 방을 뒤덮었다. 그리고 스탠드 옆에 놓인 작은 탁자 위, 유리컵이 덜컹거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컵을 흔드는 것처럼. 컵 안의 물이 출렁거렸다.

    유리는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이한 현상에 뇌가 사고를 멈췄다. 이건 꿈인가? 환상인가?

    콰당!

    갑자기 유리컵이 탁자에서 떨어져 바닥에 부딪혔다. 산산조각이 나며 날카로운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유리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누,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애써 용기를 냈다. 떨리는 목소리가 빈 공간을 헤매다 돌아왔다. 답은 없었다. 하지만 섬뜩한 기운은 더욱 짙어졌다. 이번에는 거실 중앙에 놓인 커다란 책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낡은 나무에서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책들이 한 권씩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둔탁한 소리가 공포를 극대화했다.

    유리는 침대 모서리로 기어가 몸을 웅크렸다. 등 뒤에 차가운 벽이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 사라져라, 사라져라! 제발!

    하지만 현상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과격해졌다. 책장 위의 작은 화분 하나가 공중에 둥실 떠오르더니, 이내 회전하기 시작했다. 흙이 흩뿌려지고, 식물 줄기가 마치 목을 조이는 뱀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화분은 유리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날아왔다!

    “으아악!”

    유리는 몸을 돌려 피했다. 화분은 그녀의 머리맡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흙과 깨진 도자기 파편이 침대 위로 쏟아졌다.

    이건 장난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녀를 해치려 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존재가 이 아파트에서 그녀를 공격하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녀의 시선이 화장대 위에 멈췄다. 얼마 전 생일 선물로 받은, 반짝이는 은색 나비 모양의 머리핀. 평소엔 그저 예쁜 장식품이었지만, 지금은 희미하게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길을 알려주는 등대처럼.

    “이게… 뭐야…?”

    홀린 듯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머리핀에 닿는 순간, 차가운 금속에서 따뜻한 온기가 솟아났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핀에서 눈부신 섬광이 터져 나왔다. 푸른빛이 방 전체를 뒤덮었고, 유리의 시야는 순식간에 하얗게 변했다.

    눈을 제대로 뜨기도 전에, 몸 안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랜 시간 잠자고 있던 거대한 힘이 깨어나는 듯한 기분이었다. 팔다리에 힘이 넘치고, 시야가 선명해졌다. 머리칼이 허리까지 길게 늘어지고, 손끝에서 미세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이건… 설마…”

    섬광이 걷히고, 유리는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몸을 내려다봤다. 칙칙한 잠옷 대신, 은색 장식이 박힌 푸른색 드레스가 몸을 감싸고 있었다. 발에는 무릎까지 오는 흰색 부츠가 신겨 있었고, 어깨에는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망토가 드리워져 있었다. 머리에는 아까 그 나비 머리핀이 박혀 있었고, 손에는 처음 보는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지팡이 끝에는 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다.

    거울을 찾아 달려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틈도 없었다.

    끼이익… 콰당!

    싱크대 찬장 문이 활짝 열리더니, 안에 있던 그릇과 냄비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마치 유리를 향해 발사되는 투사체처럼 맹렬하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휘둘렀다. 푸른 보석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눈앞에 투명한 장벽이 형성되었다. 쨍그랑! 쨍그랑! 그릇들이 장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냄비들은 찌그러졌지만,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유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만들어낸 현상이 믿기지 않았다.

    “내가… 내가 이걸…?”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 모든 소란의 원인에게 말이다.

    “너, 나와! 감히 이 밤에 남의 집에서 소란을 피워? 잘도 재밌게 놀았겠다!”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자 방 안의 모든 가구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침대, 옷장, 소파, 심지어 TV까지 공중에 붕 떠올랐다. 방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마치 거대한 폭풍이 방 안에서 휘몰아치는 듯했다. 그리고 모든 가구들이 그녀를 향해 빠르게 돌진해왔다.

    “이런… 빌어먹을!”

    유리는 지팡이를 두 손으로 단단히 잡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지금 이 힘은 도대체 무엇이며, 이 변신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 모든 의문은 일단 접어두어야 했다.

    그녀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푸른 보석이 더욱 강렬하게 반짝였다.

    “감히 내 집에서… 내 공간을 침범해? 절대 용서 못 해!”

    지팡이를 앞으로 내밀며 온몸의 힘을 집중했다. 입술을 앙다물고, 자신도 모르게 주문 같은 말이 흘러나왔다.

    “빛의 방패여, 모든 악을 정화하고, 평화를 찾아라! **세이프티 가드!**”

    지팡이 끝에서 거대한 푸른빛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거실의 모든 가구를 집어삼키고 있던 혼탁한 어둠이 그 빛에 닿자 비명을 지르는 듯 움츠러들었다. 가구들은 힘을 잃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푸른 파동은 어둠을 밀어내며 아파트 복도 쪽으로 향했다. 스르륵, 하고 유리의 눈앞에서 어둠의 형체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끈적거리는 검은 안개 같기도 하고, 뒤틀린 사람의 형상 같기도 한 그것은, 빛에 닿자마자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멈췄다. 방 안은 아까 전의 아수라장처럼 보였지만,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침묵이 내려앉았다. 유리는 땀으로 흠뻑 젖은 채, 변신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지팡이에서 푸른빛이 서서히 사라졌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온통 뒤집어지고 파괴된 자신의 아파트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망토를 휘날리며 서 있는 이질적인 자신의 모습.

    “이게… 도대체… 뭐지?”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제 막 시작된 기묘한 밤은, 그녀의 평범한 일상을 송두리째 뒤바꿔 놓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 에픽 하이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잿빛 하늘 아래, 바람은 늘 그랬듯 눅눅하고 끈적했다. 제국의 수도, 아니, 수도라는 거창한 이름이 무색하게 변방의 허름한 항구 도시에 불과한 칼데아의 뒷골목은 언제나 역한 비린내와 썩은 내음이 뒤섞여 사람들의 코끝을 찔렀다. 허물어져 가는 흙벽돌 건물들 사이, 좁은 골목길 깊숙한 곳에 숨겨진 폐기된 지하 창고는 지금, 도시의 가장 뜨거운 심장이 되어 있었다.

    “왔는가, 카이.”

    어둠에 잠긴 창고 안, 거친 나무 탁자에 앉아 있던 엘리아가 옅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에는 낡은 약초 도감이 들려 있었지만, 시선은 창고 입구에서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청년, 카이를 향해 있었다. 횃불의 희미한 불빛이 그의 마른 얼굴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더욱 깊게 만들었다. 카이의 눈은 늘 그랬듯 침착했지만, 그 속에는 이글거리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다른 이들은?” 카이가 묻자, 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기다리고 있어. 자네의 결정을.”

    탁자 주위에 모여 앉은 열댓 명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치고 굶주린 기색이 역력했다. 낡은 옷차림, 거친 손, 그리고 깊이 파인 눈가의 주름. 이들은 칼데아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었다. 어부, 짐꾼, 시장의 잡역부, 심지어는 병든 아이를 둔 어머니까지. 제국의 착취가 할퀴고 간 상처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민중의 얼굴들이었다.

    카이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한 명 한 명 눈을 맞췄다. 그의 귀에는 수많은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굶주림에 지친 아이의 울음소리, 빼앗긴 삶에 대한 분노의 외침,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희망이 뒤섞인 사람들의 속삭임. 그는 늘 이 소리들을 들었다. 세상의 모든 속삭임을. 그것이 축복인지 저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은 그를 이 자리에 서게 만든 이유였다.

    “최근 소식은 모두 들었겠지.” 카이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창고 전체에 울려 퍼졌다. “제국은 칼데아의 마지막 희망까지 꺾으려 하고 있다. 지난달부터 식량 배급은 절반으로 줄었고, 어제는 또다시 젊은이들을 강제로 징집해갔어. 이유도, 기한도 없이 끌려간 그들은… 아마 다시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할 거야.”

    사람들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몇몇은 주먹을 꽉 쥐었고, 또 다른 이들은 고개를 숙이며 옅은 신음소리를 흘렸다. 제국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병사들은 사소한 이유로 채찍을 휘둘렀고, 귀족들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쌓아 올린 부를 보란 듯이 탕진했다. 칼데아의 바다는 더 이상 풍요를 안겨주지 못했고, 땅은 메말라갔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사전에서조차 지워진 지 오래였다.

    “더 이상은… 물러설 곳이 없어.” 카이가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창고 한쪽에 놓인 낡은 삽과 곡괭이, 그리고 녹슨 낚시 도구들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는 칼날을 든 병사도, 마법을 부리는 현자도 아니야. 가진 것이라곤 낡은 옷과 주린 배, 그리고 빼앗긴 삶에 대한 분노뿐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횃불의 불꽃이 흔들리며 그의 그림자도 함께 춤을 추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카이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실렸다. “숨죽여 굶어 죽든, 저들의 채찍에 맞아 죽든, 결국은 죽음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우리의 손으로 저들에 맞서 싸우다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정적이 흘렀다. 그들의 심장 소리가 이 비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듯했다. 불안감과 동시에 끓어오르는 열기. 그것은 절망의 끝에서 피어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투쟁심이었다.

    그때, 탁자 한쪽에서 우락부락한 체구의 사내, 한이 일어섰다. 그는 한때 칼데아에서 가장 용감한 사냥꾼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제국의 징세에 숲을 잃고 굶주림에 지친 가장이었다.

    “카이의 말이 맞아.” 한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내 아내가 병들고, 자식들이 굶주리는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그저 하늘만 원망하며 비겁하게 숨어 지냈을 뿐이다. 더 이상은… 내 손으로 내 가족의 밥그릇을 지키지 못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

    그의 외침에 동요가 일었다.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제국은 너무나 거대해.” 누군가가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우리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 어떻게 저들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엘리아가 나섰다.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는 동요하는 이들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우리는 칼날을 가졌어. 바로 우리의 의지라는 칼날을. 제국은 우리를 노예로 취급했지만, 노예의 절망은 때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지. 그리고… 우리는 칼데아를 알고 있다. 이 도시의 모든 그림자와 골목길, 폐허와 비밀 통로를.”

    그녀는 카이를 바라보았다. 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첫 목표는 제국의 식량 창고다.”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국의 식량 창고는 칼데아 요새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제국군 최정예 병사들이 철저히 지키는 요충지였다. 그것은 감히 평민들이 넘볼 수 없는 성벽과도 같았다.

    “미쳤군!” 누군가 외쳤다. “그곳은… 불가능해!”

    “불가능하다고?” 카이는 차분히 반문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비현실적인 일에 도전해야만, 제국은 비로소 우리를 주목할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겨우 쥐죽은 듯 숨어 있다가 작은 마을이나 털고 다니는 시골 도적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심장을 찌른다면… 그때부터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되는 거야.”

    그의 말에는 단순한 열정 이상의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절망 속에서도 희망의 불씨를 지피는 묘한 카리스마.

    “우리는 정면으로 돌격하지 않을 것이다.” 카이가 손가락으로 탁자 위에 칼데아의 대략적인 지형을 그렸다. “나는 수십 년간 칼데아의 모든 하수도와 폐기된 지하 통로를 탐험했다. 제국은 우리가 모르는 줄 알겠지만, 칼데아의 지하에는 거미줄처럼 얽힌 고대의 통로들이 존재해. 그것은 제국의 눈을 피해 식량 창고 깊숙이 연결되어 있지.”

    엘리아는 그의 말을 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식량을 훔치는 것이 아니야. 그들의 보급선을 교란하고, 그들의 위신을 짓밟는 것이다. 그리고… 빼앗긴 우리의 것을 되찾아, 굶주리는 아이들의 배를 채우는 것.”

    고요함 속에서 결의가 싹텄다. 처음의 불안감은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를 굳건한 의지가 채워나갔다. 이들은 단순한 도적이 아니었다. 이들은 빼앗긴 삶을 되찾으려는 전사들이었다.

    “언제?” 한이 물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싸움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카이는 창고 천장의 좁은 틈새로 보이는 잿빛 하늘을 올려다봤다. 곧 새벽이 올 시간이었다.

    “오늘 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가장 어두운 새벽에, 우리는 빛을 훔쳐낼 것이다. 우리의 이름은… 새벽의 맹세다.”

    횃불이 흔들리고,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졌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굶주림과 절망에 찌든 얼굴에는 이제 비장한 결의가 서려 있었다. 낡은 삽과 곡괭이, 녹슨 칼들이 그들의 손에 들렸다. 이것이 그들의 유일한 무기였다.

    이윽고, 카이가 먼저 움직였다. 그는 낡은 나무 탁자에 놓여 있던, 그의 아버지가 쓰던 낡은 손도끼를 집어 들었다. 도끼날은 무뎠지만, 그에게는 어떤 마법검보다도 날카로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나가자.”

    어둠 속에서 반란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낡은 창고의 문이 삐걱이며 열리고, 차가운 새벽 공기가 그들의 얼굴을 스쳤다. 저 멀리, 제국의 요새는 거대한 그림자처럼 도시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 그림자 속에서 작은 불꽃들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작은 불꽃들이 모여, 거대한 불길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새벽, 칼데아의 하늘 아래에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새로운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피와 절규, 그리고 희망이 뒤섞인 대서사시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 심리 스릴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회색빛 새벽 공기가 낡은 저택을 휘감았다. 오랜 시간 비를 맞아 눅눅해진 돌담 너머로,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손가락처럼 뻗어 있었고, 그 사이로 스며든 희미한 여명이 음침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곳, ‘수묵화 저택’이라 불리는 곳에서, 전날 밤,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오 형사의 무전기에서 지직거리는 소음이 들렸다. 그는 굳게 닫힌 서재 문 앞에 서서 마른세수를 했다. “젠장, 이건 또 뭐야… 밀실 살인이라니.”
    그의 옆에 선 감식반원들은 이미 지쳐 보였다. 문은 외부에서 어떤 침입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내부에서는 피해자의 시신만이 홀로 굳어 있었다. 열쇠는 안쪽에서 잠금쇠에 꽂힌 채였다. 창문 역시 굳게 닫혔고, 오래된 쇠창살이 덧대어져 있었다. 외부인이 침입할 수도, 내부인이 빠져나갈 수도 없는 완벽한 고립.

    “오 형사님, 강하준 박사님 오셨습니다.”
    막내 형사의 보고에 오 형사는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 고풍스러운 샹들리에의 희미한 불빛 아래, 한 남자가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짙은 코트 차림의 그는 주변의 소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듯 고요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 깊고 날카로웠다. 바로, 강하준이었다.

    “강 박사님, 이런 곳까지….”
    오 형사가 마지못해 인사를 건넸지만, 하준은 대꾸 없이 서재 문을 훑어볼 뿐이었다. 그의 시선은 잠금장치, 문틀, 그리고 손잡이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흡사 현미경으로 미세한 흔적을 찾는 학자 같았다.

    “피해자는 정인서 씨입니다. 이 저택의 주인이자… 재야의 고미술품 수집가였죠. 어제 저녁 7시경, 그의 비서가 저택을 나섰고, 아침에 연락이 닿지 않아 찾아왔다가 발견했습니다.” 오 형사가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사인은 칼에 의한 복부 자상입니다. 사망 시각은 어젯밤 9시에서 11시 사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특이한 건… 부검 결과, 피해자의 위장에서 소량의 진정제 성분이 검출됐습니다.”

    하준은 서재 문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나무의 질감이 그의 손끝에 닿았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이내 눈을 뜨자, 그의 시선은 더 깊어진 듯했다.
    “문은 어떻게 잠겨 있었죠?” 하준이 물었다.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안에서 잠금쇠가 잠겨 있었고, 열쇠는 그대로 꽂혀 있었습니다. 피해자의 지문만 검출됐고요.”
    “그럼 창문은요?”
    “모두 안에서 걸쇠로 걸려 있었고, 쇠창살도 밖에서는 훼손된 흔적이 없습니다. 2층이라 뛰어내리기도 불가능하고요.”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문 좀 열어주시죠.”
    오 형사는 감식반원들에게 지시했고,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삐걱이는 소리가 저택의 정적을 깼다.

    서재 안은 온통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먼지 쌓인 고서들이 빼곡했고, 한가운데 놓인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 위에는 잉크병과 깃펜, 그리고 수십 년은 되어 보이는 탁상시계가 놓여 있었다. 그 모든 고요함 속에, 정인서 씨의 시신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얼굴, 굳게 다문 입술. 그는 차가운 마루 위에서 피를 흘리며 생을 마감했다. 그의 손에는 작은 은제 편지칼이 쥐여 있었다. 그가 평소 애용하던 것이라고 했다.

    “피해자는 이 칼에 찔려 사망했습니다. 그의 지문만 나왔죠.” 오 형사가 덧붙였다.
    하준은 시신에 가까이 다가섰다. 그는 쪼그려 앉아 피해자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눈동자에는 마지막 순간의 공포가 아닌, 어떤 깊은 체념 같은 것이 스며 있었다.
    하준은 칼을 집어 들지 않고 눈으로만 그 위치를 확인했다. 칼날은 그의 복부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피가 굳어 시신 주변에 검붉은 자국을 남겼다.

    그의 시선은 시신에서 책상으로, 다시 벽면의 책장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마침내,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에 멈췄다. 오래된 시계는 정확히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멈춘 채로.

    “피해자는 이 시계를 항상 정확히 맞춰 두었을 겁니다.” 하준이 중얼거렸다. “이 저택의 모든 것이 그의 꼼꼼함을 증명하고 있으니.”
    “네, 비서 말로는 그렇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직접 태엽을 감았다고….”
    “그럼 시계가 멈춘 시각이 사망 시각일 가능성이 높겠군요.” 하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은 다시 책장으로 향했다. 빽빽한 책들 사이, 유독 한쪽 구석이 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고서들로 가득한 그곳에, 아주 미묘하게, 다른 책들보다 살짝 앞으로 돌출된 책 한 권이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저 무심하게 지나쳤을 작은 차이였다.

    하준은 조용히 다가가 손가락으로 그 책의 표면을 쓸었다. 먼지가 다른 책들보다 덜 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 최근에 이 책을 만졌던 것처럼.
    그는 그 책을 빼냈다. 책이 빠져나오자, 그 뒤편에 숨겨져 있던 작은 금고 문이 드러났다. 금고는 단단히 닫혀 있었다.

    “금고라… 피해자의 재산이 워낙 많으니, 저런 금고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오 형사가 말했다.
    “문제는 저 금고의 위치입니다.” 하준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 책이 왜 다른 책들보다 앞으로 나와 있었을까요?”

    하준은 책을 다시 밀어 넣었다. 금고 문은 다시 고서들 뒤로 사라졌다.
    “오 형사님, 감식반원들에게 창문의 쇠창살과 문틀을 좀 더 면밀히 살펴봐 달라고 하십시오. 특히, 틈새를요.”
    “틈새요? 이미 다 봤습니다만… 외부 침입 흔적은 없었습니다.”
    “아뇨,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요. 아주 미세한, 실 같은 흔적도 놓치지 말라고 하십시오.”

    오 형사는 하준의 말에 의아해하면서도 지시를 내렸다. 하준은 다시 시신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쭈그리고 앉아, 피해자의 손에 들린 편지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다시 심해졌다. 무언가, 깊은 수수께끼의 실마리를 찾은 듯했다.

    “오 형사님.” 하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이 정인서 씨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서재를 완벽하게 보존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는 자신을 죽인 범인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를 서재로 불러들인 것이 그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하준은 시신 옆에 굳어 있는 피 웅덩이를 응시했다. 그 피 웅덩이 가장자리에, 아주 미세하게, 손톱으로 긁은 듯한 작은 자국이 있었다. 너무나 작아서, 피가 굳은 흔적인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곳은 완벽한 밀실입니다.” 하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하지만 밀실이라는 환상은, 오히려 범인의 완벽한 속임수였을 뿐이죠.”
    오 형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다.
    “범인은 여기에 있었습니다. 정인서 씨를 살해하고, 유유히 이 방을 빠져나갔죠.”
    하준은 고개를 들어, 굳게 잠긴 채 열쇠가 꽂혀 있던 문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싸늘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그 완벽한 밀실은, 살인자가 아니라 피해자 자신이 완성한 겁니다.”

    오 형사의 얼굴에 당혹감과 혼란이 뒤섞였다. 피해자가 스스로 밀실을 완성했다는 말은, 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범인은 대체 어떤 트릭을 써서 이 방을 빠져나갔으며, 정인서는 왜, 마지막 순간에 그런 선택을 해야 했던 걸까. 서재의 고요한 침묵 속에, 강하준의 날카로운 시선만이 진실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 이 완벽해 보이는 밀실 속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누군가의 비틀린 심리가 숨어 있었다.

  • 다크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숨을 들이쉴 때마다 쇳가루 섞인 재가 폐부를 긁는 듯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를 천장에서 떨어지는 가느다란 빛줄기는, 먼지로 가득한 이 잿빛 세상을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강준은 녹슨 철근이 삐져나온 벽을 손으로 짚으며 조심스럽게 발을 옮겼다. 낡은 작업화 밑창으로 부스러지는 유리 조각과 잔해들의 파편이 느껴졌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한때는 튼튼했을 소방 도끼였지만, 이제는 날이 무뎌지고 손잡이 부분이 너덜너덜한 천 조각으로 덕지덕지 감긴 흉물스러운 무기에 불과했다.

    배는 이미 한참 전에 아우성을 멈춘 지 오래였다. 그저 무겁고 텅 빈 기분만이 속을 지배할 뿐이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것을 삼키지 못했다. 버려진 공장의 지하실에 숨어든 것은 어쩌면 희망 때문이었다. 오래된 통조림이라도 하나 건진다면, 그래서 며칠이라도 더 버틸 수 있다면. 폐허 속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는 종이처럼 얇고 쉽게 찢기는 존재였다.

    갑자기, 저 안쪽 어둠 속에서 낮은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준은 즉시 몸을 낮췄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이 폐허에 남아있는 것들은 거의 모두가 이성을 잃은 짐승이거나,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그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소방 도끼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땀이 배어 축축한 손잡이가 헛돌지 않도록 더 강하게 움켜쥐었다.

    “크르륵…”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어둠 속에서 붉은 눈 두 개가 번뜩였다. 일반적인 쥐라고 하기엔 너무나 거대하고, 움직임은 기괴할 정도로 빨랐다. 변이된 생명체. 사람들은 그것들을 ‘시궁쥐’라고 불렀다. 놈들은 인간이 버린 오물과 방사능에 찌들어 기형적으로 커졌고,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은 콘크리트마저 뚫을 기세였다.
    강준은 숨을 죽였다. 한 마리가 아니다. 움직임을 감지한 건지, 놈들의 붉은 눈이 사방에서 번뜩이기 시작했다. 녹슨 철근 사이, 부서진 벽돌더미 틈새, 그리고 저 안쪽 캄캄한 그림자 속에서. 열 마리는 족히 되어 보였다.

    그는 벽 뒤로 몸을 바싹 붙였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이대로 물러서면 굶어 죽거나, 저놈들의 먹이가 될 뿐이었다.

    ‘젠장.’

    강준은 이를 악물었다.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직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가 희미해져 갈수록, 그는 더 필사적으로 붙들었다.
    선두에 있던 시궁쥐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녀석의 길고 날카로운 송곳니는 썩은 육포를 연상시켰다. 강준은 도끼를 휘둘렀다.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녀석은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며 벽에 처박혔다. 그러나 놈들은 멈추지 않았다. 우르르 달려드는 그림자들. 발톱이 콘크리트 바닥을 긁는 소리가 온 지하실을 가득 채웠다.

    강준은 발로 차고, 도끼를 휘두르며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그의 움직임은 거칠었지만 정확했다. 한 마리가 팔뚝을 스치고 지나갔다. 찢어진 옷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다. 따끔한 통증이 정신을 더욱 맑게 했다. 그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싸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놈들은 수가 많았지만, 조직적이지 못했고, 강준은 오랜 시간 폐허에서 살아남은 베테랑이었다.

    마지막 시궁쥐의 목을 도끼로 찍어내리자, 기괴한 숨통이 멎었다. 사방에 널린 변이된 쥐들의 시체와, 코를 찌르는 비린내. 강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찢어진 팔뚝을 대충 손으로 짚고는, 다시 희미한 희망을 찾아 어둠 속을 더듬었다. 손전등 빛이 흔들리는 폐허의 벽을 비추며 춤추듯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벽 한쪽에 녹슬어 비틀어진 낡은 철제 캐비닛을 발견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시큼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작은 철제 상자가 보였다. 손전등 빛을 비추자, 상자 위에는 희미하게 ‘비상 식량’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강준의 눈이 순간 빛났다. 메마른 입술이 희미하게 벌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마치 거대한 짐승이 내쉬는 듯한 낮고 묵직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느껴졌다. 진동은 점점 강해지더니, 멀리서 무언가 육중한 것이 끌리는 듯한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불규칙하지만 지독히도 육중한 발소리였다.
    그 소리는 마치 거대한 그림자가 폐허의 끝에서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 같았다.

    강준은 철제 상자를 낚아채듯 움켜쥐었다. 그의 얼굴에 안도감 대신, 새로운 공포가 드리웠다.
    “젠장… 또 뭐야.”
    지상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낡은 캐비닛 문이 삐걱이며 다시 닫혔다. 어둠이 강준을 집어삼켰다. 그의 손에는 작은 희망이, 그리고 심장에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생존의 절박함이 들려 있었다. 지상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 다크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찢을 듯 파고들었다. 강하준은 숨을 고르며 거친 벽에 손을 짚었다. 손끝에 닿는 거친 석회암의 감촉은 수만 년의 세월을 웅변하는 듯했다. 그들이 막 통과해 온 통로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목구멍 같았다. 어둠은 지독했고, 빛조차 집어삼킬 듯 강렬했다.

    “이곳은… 이전과는 달라.” 유리가 낮게 속삭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어조에서 그녀가 느끼는 불안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듯했다. 마법에 예민한 그녀의 감각은 언제나 하준보다 한발 앞서 위험을 감지하곤 했다.

    하준은 손에 든 마력등의 밝기를 최대로 올렸다. 길게 뻗은 빛줄기가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공간을 드러냈다. 거대한 암석 기둥들이 천장을 떠받치고 있었고, 그 기둥들 사이로는 굳은 암흑의 강이 흐르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은 물이 아니었다. 끈적하고 검은, 이름 모를 액체가 소리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둡고, 축축하고, 역겹군. 새로운 지옥인가.” 하준이 읊조렸다. 그의 냉소적인 말투는 상황에 대한 불안감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탐사대원들에게 늘 강인한 모습을 보여야 했다. “고대 문명이 하수 처리장을 이렇게 웅장하게 만들었을 리는 없고… 꽤나 중요한 장소였을 거야.”

    유리는 기둥에 새겨진 문양을 응시했다. 고대어와 알 수 없는 상형문자가 뒤섞여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문양들… 전에 보았던 것과는 형태가 달라. 하지만 왠지 모르게 익숙해.” 그녀가 손을 뻗어 문양을 어루만졌다. 굳은 암석의 표면에서 미약한 열기가 피어나는 듯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문자의 형태겠지.” 하준은 고대의 문자 기록이 담긴 고서적의 내용을 떠올렸다. “혹은 이 지역에만 사용된 고유한 문자일 수도 있고.” 그는 탐사 장비의 스캐너를 작동시켜 주변을 살폈다. 미약한 마력 반응이 감지되었다. 그것은 너무나 미약해서 감지되지 않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였지만, 하준은 놓치지 않았다. “마력 반응이 있긴 한데… 너무 희미해서 확신할 수 없어. 어쩌면 유적의 잔재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단순히 돌에서 나오는 기운일 수도 있어.”

    “아니, 달라.” 유리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이건… 생명의 기운이 아니야. 그렇다고 죽음의 기운도 아니고.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이 억지로 존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야. 억눌리고, 봉인된 기운.”

    그녀의 말에 하준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유리의 감각은 종종 과학적인 장비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본질을 꿰뚫었다. 특히 마력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하준은 다시 한번 주위를 살폈다. 그들이 들어온 통로는 이미 어둠에 잠겨 보이지 않았다. 후퇴할 길은 막혔거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들은 나아가야만 했다. 이곳에 감춰진 비밀이 무엇이든, 그것을 밝혀내는 것이 그들의 사명이었다. 혹은 저주받은 운명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끈적한 검은 액체가 흐르는 강을 따라 길게 이어진 길은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발소리조차 흡수하는 듯, 아무런 울림도 없었다. 하준은 마력등을 비춰 강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액체는 너무나 진해 바닥을 알 수 없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연 같았다.

    “이건 그냥 물이 아니야.” 유리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강물에 손을 담그려는 하준을 급하게 막았다. “만지지 마, 하준! 위험해!”

    “왜?” 하준은 의아했지만, 그녀의 진지한 표정에 손을 거두었다.

    “느껴져… 이 액체는… 살아있는 것 같아. 하지만 생명체가 아니야.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존재… 그 어떤 것도 집어삼키고 동화시키는 듯한… 그런 불길한 기운이 느껴져.” 그녀의 눈은 강물 속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하준은 스캐너를 강물에 가까이 가져갔다. 스캐너는 삑삑거리는 경고음을 울리더니 이내 먹통이 되었다. “젠장… 스캐너가 아예 먹통이 됐어. 이런 일은 처음이야.” 그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첨단 장비가 이렇게 쉽게 무력화되다니.

    그때, 그들의 발밑에서 진동이 시작되었다. 미세한 떨림은 이내 강렬한 흔들림으로 변했다. 거대한 암석 기둥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천장에서 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뭐야? 지진인가?!” 하준이 외쳤다.

    “아니… 지진이 아니야!” 유리가 손가락으로 저 멀리 어둠 속을 가리켰다. “저기, 봐!”

    하준이 마력등을 그쪽으로 비추자, 어둠 속에 거대한 구조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둥들보다 훨씬 더 거대한, 마치 바위산과도 같은 검은 덩어리였다. 그 덩어리의 표면에는 복잡한 문양이 얽혀 있었고, 그 문양들 사이에서 희미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덩어리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촉수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촉수들은 마치 살아있는 뿌리처럼 땅과 천장을 이어주고 있었고, 그 끝에는 날카로운 송곳니 같은 뿔들이 돋아나 있었다.

    진동의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다. 거대한 덩어리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젠장… 대체 저건 뭐지?” 하준은 경악했다. 저것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혹은 죽지 못해 움직이는 무언가였다.

    “봉인된 존재였어…! 우리가 들어오면서 그 봉인이 약해진 거야!” 유리의 목소리에 절박함이 묻어났다. 그녀는 재빨리 주문을 외기 시작했지만, 진동은 그녀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렸다.

    거대한 덩어리에서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비명이라기보다는, 수억 년의 시간 동안 갇혀 있던 존재가 마침내 깨어나는, 갈증과 분노가 뒤섞인 포효 같았다. 소리가 귓가를 찢고 들어와 정신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검은 액체가 흐르던 강물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수많은 거품이 솟아오르더니, 그 안에서 검은 촉수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지상으로 기어올라와 그들을 향해 빠르게 뻗어오고 있었다.

    “하준! 피해!” 유리가 외치며 하준을 밀쳤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옅은 마력 방벽이 형성되었지만, 그것은 검은 촉수 하나를 막아내기에도 역부족이었다.

    촉수 하나가 방벽을 뚫고 지나가자, 방벽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촉수는 거침없이 유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하준은 순간적으로 몸을 날려 유리를 끌어안고 옆으로 구르면서 피했다. 촉수는 그들이 방금 서 있던 자리를 꿰뚫고 지나가, 바닥의 암석에 깊은 구멍을 만들었다. 바닥에서는 끈적한 검은 액체가 스며 나왔다.

    “이럴 수가…!” 하준은 굳은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수십 개의 촉수가 그들을 포위하고 있었다. 거대한 덩어리는 점점 더 활발하게 움직이며, 이제는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불규칙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서 잊혀진 고대 지하 유적의 비밀은, 살아있는 악몽이 되어 깨어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탐험가가 아니었다. 사냥감이었다.

    “도망쳐야 해!” 유리가 이를 악물었다. “아니… 도망칠 곳이 없어!”

    하준은 스캐너가 먹통이 된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그들의 모든 계획과 지식이, 이 거대한 존재 앞에서는 한낱 무의미한 조각에 불과했다. 그들은 지금, 인류가 감히 손대지 말아야 할, 가장 오래된 공포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 공포의 그림자가 그들을 완전히 덮치기 직전이었다.

    그때, 하준의 눈에 거대한 덩어리의 가장자리에 작게 돌출된, 희미한 붉은빛을 내는 결정체가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덩어리의 일부이면서도, 동시에 덩어리를 묶어두는 듯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저거… 봉인석인가?” 하준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봉인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면, 아직 기회는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괴물을 뚫고 저곳까지 도달하는 것은…

    검은 촉수들이 사방에서 덮쳐왔다. 살아있는 어둠 속에서, 하준은 유리의 손을 더욱 강하게 붙잡았다. 그들의 운명은, 이제 갓 깨어난 태고의 악몽과 함께 춤추고 있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밤의 장막이 채 걷히지 않은 새벽 네 시, 미나의 오피스텔 창밖은 먹빛이었다. 십여 층 아래 도로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조용했지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사이렌 소리는 도시가 완전히 잠들지 않았음을 알렸다. 미나는 침대 머리맡 스탠드의 불을 켜고, 멍하니 벽을 응시했다. 시곗바늘은 째깍거리는 대신 숫자를 뚝뚝 끊어 바꾸는 디지털 방식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듯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처음엔 피곤해서 잘못 본 줄 알았다. 거실 바닥에 뒹굴던 리모컨이 다음 날 아침 소파 쿠션 위에서 발견되었을 때, 미나는 그저 자신이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생각했다. 매일 아침 마시는 믹스 커피 봉지가 감쪽같이 사라졌다가, 저녁에 엉뚱하게도 화장실 선반 위에서 나타났을 때도 그랬다. ‘내가 드디어 스트레스성 건망증에 걸린 건가?’ 애써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지만 점차 그 기묘함은 일상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이틀 전,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였다. 분명 거울에 비치지 않도록 벽에 걸어둔 수건이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것도 한 장이 아니라, 서너 장이 전부. 미나는 순간 오싹함을 느꼈다. 욕실 문을 닫고 들어온 뒤로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는데. 혹시 누가 들어왔다가 나간 건가? 그러나 잠금장치는 굳게 채워져 있었고, 창문은 고층이라 열릴 리 만무했다.

    어젯밤, 그 현상은 정점을 찍었다.

    미나는 퇴근 후 간단히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태블릿으로 웹소설을 읽고 있었다. 익숙한 남자 주인공의 목소리가 이어지는 한창 절정 부분에서, 갑자기 주방에서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미나는 깜짝 놀라 태블릿을 떨어뜨릴 뻔했다.

    “뭐야?”

    누군가 침입한 건가?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숨을 죽이고 주방 쪽으로 향했다. 식칼이라도 들고 가야 하나 고민했지만,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거실을 지나 주방 입구에 다다르자, 불이 꺼진 주방 안에서 깨진 유리 조각들이 희미한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세상에…”

    싱크대 위 선반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유리컵 하나가 산산조각 나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불을 켰다. 조명이 주방을 환하게 밝히자, 더욱 선명하게 보이는 유리 파편들이 섬뜩했다. 마치 누군가 던져 부순 것처럼 보였다.

    그때,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스쳤다. 미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공기만이 텅 빈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한기는 마치 거대한 손이 등을 쓸어내린 듯 선명하게 느껴졌다.

    “젠장…”

    미나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중얼거렸다. 두려움이 온몸을 마비시키는 듯했다. 그날 밤, 미나는 밤새 불을 켜놓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새벽 네 시. 미나는 잠이 완전히 달아난 채 벽만 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이 아파트에 이사 온 지 벌써 3년인데,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미나는 휴대폰을 들어 포털 사이트에 ‘아파트 폴터가이스트’라고 검색했다. 수많은 오컬트 커뮤니티 글과 유튜브 영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중 하나를 클릭했다.

    「…주로 강한 염원이나 감정이 남아있는 곳에서 발현되며, 초기에는 물건의 이동, 소음 등으로 시작해 점차 물리적 간섭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특히 특정 인물에게만 반응하는 경우가 많으니 주의해야 합니다…」

    미나는 글을 읽어 내려갈수록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특정 인물에게만 반응한다라…’

    그때였다. 닫혀 있던 옷장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미나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불이 켜진 방이었지만, 옷장 안은 어둠 속에 잠겨 있어 마치 검은 구멍처럼 보였다.

    “누구… 거기 있어?”

    미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옷장 안의 어둠이 한층 더 짙어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미나는 휴대폰 플래시를 켜서 옷장 안을 비췄다. 빽빽하게 걸린 옷가지들 사이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안심과 동시에, 더욱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없는데, 왜 문이 열렸을까?

    그 순간, 미나의 침대 옆 협탁에 놓여 있던 액자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액자 유리는 깨지지 않았지만, 그 소리는 미나의 심장을 저 깊은 곳까지 흔들었다.

    미나는 그대로 얼어붙어 액자를 응시했다. 액자 속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미나의 어린 시절 사진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깨진 유리컵 파편들처럼 조각난 듯한,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들이 방 안을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여러 사람이 동시에 속삭이는 듯했지만, 그 어떤 단어도 명확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불쾌한 소음만이 미나의 귓가를 울렸다.

    미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제발… 제발 사라져 줘. 제발…’

    그러나 소음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선명해지고, 그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오려는 듯한 기묘한 압력이 느껴졌다. 미나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이 작은 오피스텔이, 단숨에 그녀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거대한 괴물처럼 느껴졌다.

    그때, 등 뒤에서 싸늘한 손길이 미나의 어깨를 붙잡았다.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가락들이 그녀의 살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과 함께, 누군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가지… 마…”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그 섬뜩함은 미나의 영혼을 꿰뚫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 목소리는, 왠지 모르게 애절하면서도 광기 어린 집착이 느껴졌다.

    미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이불을 걷어차고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서 뛰어내렸다. 온몸의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터져버릴 것 같았다.

    “끄악!”

    그녀의 비명은 공허한 방 안에서 메아리쳤다. 그와 동시에, 방 안의 모든 불이 ‘퍽!’ 소리와 함께 꺼졌다. 순식간에 암흑이 찾아왔다.

    사방은 고요했다. 방금 전까지 미나를 괴롭히던 모든 소음과 기척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미나는 숨을 헐떡이며 방 중앙에 선 채로 주위를 살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사라진 게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둠 속에 숨어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미나는 손을 더듬어 겨우 휴대폰을 찾아 플래시를 켰다. 희미한 불빛이 방 안을 쓸고 지나가자,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방문에 매달려 있는 오래된 탁상시계였다. 벽시계가 아니라, 낡고 멈춰버린 탁상시계.

    미나는 저 시계를 저기에 둔 적이 없었다.

    그리고, 시계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은…

    새벽 4시 44분.

    미나의 심장이 다시 한번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이 모든 기괴한 일들이 시작된 시간. 그녀가 침대에서 잠 못 이루고 벽을 응시하던 바로 그 시간.

    문득, 탁상시계의 유리판 안에 맺혀 있는 작은 물방울 같은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눈물이었다. 누군가 울다 멈춘 듯한, 마른 눈물 자국.

    그리고 그 눈물 자국 아래로, 긁힌 듯한 작은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다.

    「나를… 혼자 두지 마…」

    미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휴대폰 불빛이 희미하게 흔들렸다. 이 아파트는, 더 이상 그녀의 보금자리가 아니었다. 이곳은, 어떤 존재의 외로움과 집착이 만들어낸, 기괴한 감옥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창밖은 여전히 어둠 속이었다. 하지만 미나는 알고 있었다. 동이 터도, 이 밤의 공포는 끝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제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절대로.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숲의 속삭임, 짙어지는 그림자

    어둠이 내린 숲은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지아가 운영하는 외딴 찻집, ‘이끼뜰’의 작은 온실 안. 풀벌레 소리조차 희미하게 멀어지는 깊은 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달빛은 묘한 푸른빛으로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눅진한 흙냄새와 싱그러운 풀 내음이 뒤섞인 공기 속에서, 지아는 이안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이안의 길고 섬세한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는 것 같아.” 지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의 시선은 이안의 뺨을 타고 흐르는 희미한 푸른 핏줄에 머물러 있었다. 숲의 정령인 이안은 인간과 같은 심장을 가졌지만, 그의 본질은 언제나 숲과 함께였다. 그리고 요즘, 숲이 심상치 않았다.

    이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인간의 눈처럼 보이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초록빛을 담고 있는 그 눈은 언제나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숲이 깨어나고 있어.”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숲의 바람 소리처럼 낮고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짙은 피로감이 배어 있었다. “점점 더… 우리의 존재를 감지하고 있어.”

    지아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들이 함께한 지 어느덧 1년. 숲의 수호 정령과 인간 여자. 이 금지된 만남은 처음부터 위태로웠다. 이안은 숲의 균형을 지키는 존재였고, 인간과의 깊은 교감은 숲의 질서를 흔드는 행위로 여겨졌다. 매일 밤, 이안은 지아를 찾아왔고, 그들의 사랑은 깊어졌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도 커져갔다.

    “점점 더 많은 흔적을 남기고 있어.” 이안이 고개를 숙여 지아의 머리카락에 뺨을 댔다. 그의 손이 지아의 손을 더욱 강하게 감쌌다. “숲의 심장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어. 그들이… 나를 찾으러 올 거야.”

    ‘그들’. 이안의 세계에 존재하는, 숲의 질서를 수호하는 또 다른 존재들. 그들에 대해 이안은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나타나면 자신과 지아의 관계는 끝장날 것이라는 것만은 분명히 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있으면, 괜찮을 거야.” 지아는 스스로를 다독이듯 말했다. 그녀는 이안의 손을 잡아 자신의 심장 위에 올렸다. “내 심장이 당신과 함께라면,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아.”

    이안은 희미하게 웃었지만, 그 미소는 금방 사라졌다. 그의 눈빛이 온실 천장의 유리창 너머 어딘가를 향했다. 그곳에는 숲의 깊은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오늘 밤… 낯선 기운이 숲을 맴돌고 있어.” 이안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차가운… 금속 같은 기운이.”

    금속? 숲의 정령인 이안에게 ‘금속’이라는 단어는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숲은 언제나 살아 숨 쉬는 유기체였으니까.

    그 순간, 온실의 유리창에 ‘툭’ 하는 소리가 울렸다. 지아는 화들짝 놀라 이안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이안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무슨… 소리였지?” 지아가 숨죽여 물었다.

    이안은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켜 유리창으로 다가갔다. 그의 걸음은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미끄러졌다. 어둠 속에 잠긴 유리창 너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안의 초록빛 눈동자가 숲의 어둠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 기운이야.” 이안이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 전에 없던 긴장감이 서렸다. “우리를… 찾고 있어.”

    그때였다. 온실의 유리창 하나가 ‘타앙!’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금이 가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유리창을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길고 날카로운 금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지아는 비명을 삼켰다.

    이안은 빠르게 지아에게로 달려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움직이지 마!”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의 몸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유리창에 생긴 금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금 사이로, 차가운 바람과 함께 희미한 속삭임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질서를… 어지럽히지… 마라…*

    지아는 환청인가 싶어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이안의 표정은 이미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저게… 뭐야?” 지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안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온실의 출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은 여전히 금이 간 유리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보낸… 경고야.”

    ‘경고’. 단순한 경고치고는 너무나도 섬뜩했다. 마치 유리창에 난 상처처럼, 그들의 관계에도 날카로운 금이 가해진 것 같았다.

    “우리가… 도망쳐야 해?” 지아가 물었다.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동자가 더욱 깊은 초록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피어나는 듯했다. 온실 안의 식물들이 그의 기운에 반응하듯, 미약하게 흔들렸다.

    “안 돼… 이안! 당신의 힘을 쓰지 마!” 지아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안이 숲의 힘을 쓰는 것은 곧 그들의 존재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이미 그녀의 말을 듣지 않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금이 간 유리창 너머, 숲의 어둠 속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희미한 푸른빛을 띠는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온실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마치 숲의 심연에서 솟아난 분노처럼, 위협적인 기운을 뿜어내면서.

    “지아.” 이안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더 낮고 단호했다. “나와 함께 도망칠 수 없어. 내가 널 보낼 거야.”

    지아는 눈을 크게 떴다. “무슨 소리야? 이안! 우리 함께 가야 해!”

    “더 이상 내 옆은 안전하지 않아.” 이안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자신의 얼굴을 보게 했다. 그의 초록빛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저들을 막는 동안, 넌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 해. 내가 다시 널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그림자는 이미 온실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그림자는 유리창에 검은 장막을 드리우고 있었다. 숲의 모든 소리가 먹혀들어가는 듯한 정적이 흘렀다.

    지아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당신을 두고 갈 순 없어! 우리 같이 도망가자, 제발!”

    이안은 슬픈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이 지아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사랑해, 지아. 네가 없는 숲은… 의미가 없어.”

    그 순간, 온실의 문이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활짝 열렸다. 숲의 차가운 밤공기와 함께, 눈을 가늘게 뜬 형체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인간의 모습과 비슷했지만, 온몸에서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이안과 지아를 향해 번뜩였다.

    이안은 지아를 문과 반대편으로 밀어냈다. “지금이야! 도망가!”

    지아는 울부짖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이안의 말대로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온실의 또 다른 작은 문을 향해. 그녀의 눈은 이미 눈물로 흐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안의 마지막 말을 잊을 수 없었다. ‘내가 다시 널 찾을 수 있을 때까지.’

    뒤에서 들려오는 굉음과 함께, 숲의 기운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이안이 숲의 힘을 쓰고 있었다. 그녀를 위해. 금지된 존재와의 만남이 불러온 파국은, 이제 막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지아는 무릎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싶었지만, 필사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안이 다시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그녀는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지아의 뒷모습을 보며, 이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온실 문 앞에 선 차가운 존재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깊은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제 숲의 진정한 분노가 깨어날 시간이었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 메카 액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철마, 사막의 심장 (鐵馬, 沙漠의 心臟) – 제21화

    철마의 육중한 강철 발이 굉음을 내며 땅을 짓밟았다. ‘쾅!’ 흙먼지가 폭발하듯 솟아올랐고, 그 충격파에 휘말린 ‘심연충’ 수십 마리가 비명을 지르며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녀석들의 끈적한 체액이 검붉은 비처럼 철마의 장갑에 흩뿌려졌다.

    “젠장, 또야?”

    강한의 거친 숨소리가 헬멧 내부를 가득 채웠다. 조종석 모니터는 온통 붉은 경고등과 함께, 사방에서 달려드는 심연충 무리의 잔상으로 가득했다. 심연충. 이 망할 것들은 대균열 이후 인류를 지옥으로 밀어 넣은 주범이었다. 곤충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강철도 녹일 듯한 산성 침과 칼날 같은 팔다리, 그리고 굶주린 짐승의 악랄함을 가진 괴물들.

    “한 병장님! 서쪽 방벽이 뚫리기 직전입니다! 지원 부탁드립니다!”

    통신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다급한 여자 목소리였다. 통신 담당 ‘예리’의 목소리는 언제나 침착했지만, 이번에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만큼 상황이 급박하다는 뜻이다.

    강한은 턱을 꽉 물었다. 그의 철마는 이미 세 번째 심연충 무리를 상대하는 중이었다. 이 보급기지는 ‘새벽의 보루’의 생명줄과도 같은 식량 생산지였다. 이곳이 무너지면, 수천 명의 민간인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게 될 터였다.

    “말단 방어선은 아직 버틸 만한가? 아니, 버텨야 한다!” 강한은 소리쳤다. “철마, 최대 기동! 후방 기습한다!”

    ‘철마’의 강력한 제트 엔진이 불을 뿜으며 고열의 아지랑이를 뿜어냈다. 웅장한 금속음과 함께 육중한 몸체가 순간적으로 가속했다. ‘콰아앙!’ 철마의 오른쪽 어깨에 장착된 대구경 캐논이 불을 뿜었다. 특제 강화 탄환이 음속을 뚫고 날아가 심연충 무리 한가운데를 정확히 강타했다.

    피가 섞인 흙먼지 폭풍이 일었다. 몸통이 산산조각 난 심연충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그 여파로 쓰러진 녀석들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심연충은 고통을 모르는 끈질긴 괴물이었다. 쓰러진 동료의 시체를 밟고, 그 틈새를 비집고서라도 목표물을 향해 쇄도했다.

    “젠장, 끝이 없잖아!”

    강한은 주먹으로 조종석 옆면을 쳤다. 에너지 잔량 게이지는 이미 주황색 경고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연료 또한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 더는 버틸 수 없었다. 하지만 물러설 수도 없었다. 이 보급기지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끝이다.

    그때였다. 조종석 모니터에 거대한 그림자가 잡혔다. 일반 심연충보다 두 배는 거대한 몸집, 온몸을 뒤덮은 단단한 갑각, 그리고 여섯 개의 칼날 같은 다리.

    “대형 개체… ‘괴장충’이다!” 예리의 목소리가 절망적으로 터져 나왔다.

    괴장충. 심연충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변종이었다. 녀석들은 일반 심연충을 잡아먹으며 성장했고, 그 육체는 웬만한 대전차포로도 흠집 하나 내기 어려웠다. 게다가 녀석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짙은 녹색의 산성액은 철마의 장갑도 순식간에 부식시킬 수 있었다.

    괴장충은 느릿하게 움직이며 철마를 향해 다가왔다. 녀석의 거대한 턱에서 끈적한 침이 길게 늘어졌다. 그 침방울이 땅에 떨어지자 ‘치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지표면이 검게 녹아내렸다.

    강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심장이 폭발할 듯 뛰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형 괴장충이라니. 이건 불가능에 가까운 싸움이었다.

    “한 병장님! 피해세요! 무리입니다!” 예리의 비명이 이어졌다.

    하지만 강한은 조종간을 놓지 않았다. 이곳에서 도망치면, 저 괴물이 바로 보급기지를 덮칠 것이다. 그러면 예리도, 다른 모든 사람도 살아남을 수 없다.

    “무리라고? 젠장, 난 죽기 살기로 싸울 뿐이다!”

    강한은 으르렁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섬광이 스쳤다. 철마의 왼팔에 장착된 고출력 에너지 블레이드가 윙 소리와 함께 빛을 뿜어냈다. ‘위이잉!’ 푸른빛이 번뜩이자, 주변을 맴돌던 심연충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강한은 철마의 모든 엔진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제어판의 경고음이 더욱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이대로 가면 엔진 과열로 파손될 수도 있어.’ 하지만 강한은 신경 쓰지 않았다.

    “간다, 이 괴물 자식아!”

    철마는 괴장충을 향해 돌진했다. 괴장충의 거대한 칼날 다리가 철마의 진로를 막기 위해 번개처럼 뻗어 나왔다. ‘철컥!’ 강철이 부딪히는 소리, 철마의 장갑이 긁히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발생했다. 충격이 조종석을 강타했고, 강한은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하지만 강한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괴장충의 공격을 뚫고 녀석의 거대한 몸통 아래로 파고들었다. 괴장충은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잠시 움찔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강한은 에너지 블레이드를 최대 출력으로 휘둘렀다.

    ‘쉬이이익!’

    푸른빛의 칼날이 괴장충의 단단한 갑각에 닿았다. 일반적인 공격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는 그 갑각이, 에너지 블레이드 앞에서는 마치 버터처럼 녹아내렸다. ‘치이이익!’ 거대한 절단음과 함께, 괴장충의 왼쪽 다리 하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끈적한 녹색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괴장충은 비명을 질렀다.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끔찍한 고주파 음파가 대지를 뒤흔들었다. 다리를 잃은 녀석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거대한 몸체가 땅으로 쓰러지며 엄청난 진동을 일으켰다.

    “해냈다!” 예리의 기쁜 목소리가 통신으로 들려왔다.

    하지만 강한의 얼굴에는 승리의 미소가 없었다. 오히려 그의 눈은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철마의 에너지 잔량은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젠장.”

    모니터는 다시 붉은 경고등으로 가득 찼다. 괴장충이 쓰러지자, 그 진동과 비명에 이끌린 듯, 저 멀리 사막의 지평선 너머에서 수백, 수천 마리의 심연충 무리가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거대한 규모였다.

    그리고 그 무리 한가운데, 방금 쓰러뜨린 괴장충보다 두 배는 더 거대한, 온몸이 핏빛으로 물든 듯한 붉은색 괴장충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녀석의 여섯 개의 다리 끝은 날카로운 칼날 대신 거대한 낫처럼 휘어져 있었다. 그 낫이 땅을 긁으며 다가올 때마다 ‘득득’ 하는 섬뜩한 소리가 주변을 뒤덮었다.

    ‘붉은 낫 괴장충… 저건…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최악의 변종이잖아.’

    강한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철마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에너지 블레이드의 출력은 거의 한계에 도달했고, 캐논의 탄약도 얼마 남지 않았다.

    “한… 한 병장님… 저건… 안됩니다…” 예리의 목소리는 이미 절망 그 자체였다. “모든 부대에 철수 명령을 내려야 합니다… 이대로는…”

    “철수? 이 새벽의 보루를 포기하라고? 이 녀석들에게 모든 것을 내주라고?”

    강한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심장은 다시금 맹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빛났다.

    그는 조종간을 고쳐 잡았다. 모니터에 보이는 붉은 괴장충의 거대한 그림자를 노려봤다.

    “아니. 절대 그럴 순 없어.”

    철마의 마지막 엔진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삐걱거리는 금속음이 들려왔지만, 강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여기서 죽어도, 이 빌어먹을 괴물들한테 한 치도 양보 안 해.”

    그는 조종석에 달린 마지막 비상용 버튼에 손을 얹었다. 그 버튼은 철마의 모든 잔여 에너지를 일격에 쏟아부을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 이후의 철마는 그저 고철 덩어리가 될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강한에게는 오직 그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이젠… 내가 너희에게 덤벼들 차례다, 이 개자식들아.”

    강한의 눈에서 광기가 번득였다. 철마의 낡은 스피커에서 거친 금속음과 함께 전투가가 울려 퍼졌다. 녀석들이 무자비하게 짓밟아버린 과거, 그리고 아직 빼앗기지 않은 미래를 위해.

    사막의 심장은, 피와 철로 다시 한번 불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별의 눈 마법 학원: 그림자 아래의 노래

    ### 1화: 차가운 숨결, 푸른 꿈

    별의 눈 마법 학원의 새벽은 언제나 신비로운 오로라 빛으로 물들었다. 고요한 호수 위로 솟아오른 은빛 탑들은 아침 안개에 잠겨 마치 하늘의 조각들처럼 보였다. 수백 년 된 마법이 흐르는 이 웅장한 학원은, 감히 평범한 인간의 손으로는 지을 수 없는 경이로운 건축물이었다. 그곳에 입학한다는 것은 곧 세상의 선택을 받았다는 의미였고, 나, 이아린 역시 그 선택받은 자 중 하나였다.

    “아린, 또 멍하니 서 있어? 지각하겠다!”

    경쾌한 목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고 귓가에 와 박혔다. 뒤를 돌아보니 오랜 친구이자 룸메이트인 한별이 활짝 웃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윤기 흐르는 흑발은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났고, 총명한 눈빛은 언제나 생기로 가득했다. 한별은 늘 그렇게 빛나는 존재였다. 나와는 달리, 마법 실력도, 성적도, 심지어는 기상 시간까지 완벽에 가까웠다.

    “별아… 새벽 공기가 너무 좋아서 잠시….”

    내 어정쩡한 변명에 한별은 콧방귀를 뀌며 내 손목을 잡고 끌었다.

    “새벽 공기 마시다가 영원히 잠들고 싶지 않으면 빨리 가자! 오늘 조교님 수업 있는 날이잖아!”

    별의 눈 학원의 조교님들은 교수님들만큼이나 권위가 있었다. 특히 신입생들을 담당하는 알케미 조교님은 엄격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늦는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별관으로 향하는 돌계단을 오르며 나는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학원 본관 지하 깊숙이 파묻힌 듯 보이는 낡은 석조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전부터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구역이었다. 학생들은 물론, 심지어 몇몇 교수님들조차 그곳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다. 학원의 역사서에도 그 구역에 대한 언급은 극히 드물었다. 그저 ‘옛 마법을 보관하는 곳’이라는 모호한 설명만이 전부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유독 예민한 감각을 타고났다. 다른 사람들이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미세한 진동이나 공기의 흐름, 아주 희미한 기척 같은 것들을 느끼곤 했다. 특히 이 학원에 들어온 뒤로는 본관 지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기묘한 기운을 자주 감지했다. 차갑고, 습하고, 어딘지 모르게 슬픈 느낌. 때로는 아주 희미하게, 마치 어린아이의 흐느낌 같은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었다. 다들 환청이나 착각으로 치부할 게 뻔했으니까.

    “아린! 딴생각 그만하고 빨리 와!”

    한별의 재촉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내 시선은 다시 한번 깊은 지하 어딘가를 향했다. 그곳에서 올라오는 기운은 오늘따라 더욱 강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마치 무언가가, 아주 오랜 잠에서 깨어나려는 것처럼.

    알케미 수업은 언제나 흥미진진했다. 조교님은 마법 재료들을 섞고 변화시키는 과정을 섬세하게 설명해 주셨고, 교실 안은 온갖 빛깔의 마법 연기와 은은한 향기로 가득했다. 나는 조교님의 설명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필기했지만, 문득 등골을 스치는 오싹한 기운에 펜을 멈추었다.

    “…아린? 왜 그래?”

    옆자리 친구 혜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그 기운은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선명해졌다. 차가운 얼음 송곳이 심장을 찌르는 듯한 한기,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알 수 없는 속삭임. 마치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리 와…*

    환청일까? 아니면 내가 너무 피곤한 걸까.
    나는 고개를 숙여 책상에 이마를 기댔다. 혜나는 조용히 내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별의 눈 학원에 입학한 지 반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이곳의 모든 것에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이 기묘한 기운은 나를 계속해서 불편하게 만들었다.

    밤이 깊어지고, 기숙사는 고요함에 잠겼다. 한별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고, 나 홀로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불현듯, 내 손에 들린 책이 옅은 푸른빛으로 깜빡였다. 내가 마법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미약한 빛이었다.

    “어…?”

    놀란 내가 책을 내려놓자, 빛은 사라졌다. 하지만 내 손끝에는 방금 전까지 책을 감싸고 있던 차가운 기운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내 안의 무언가를 자극하는 듯했다. 설명할 수 없는 끌림. 마치 저 깊은 어둠 속으로 나를 부르는 것 같은.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학원 본관 지하 쪽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분명히 내가 느끼는 기운과 같은 종류의 빛이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움직이며 나를 유혹했다.

    혹시 내가 환각을 보는 걸까?
    나는 조심스럽게 마법의 기운을 모아 보았다. 손끝에서 푸른빛이 다시 한번 피어올랐고, 그것은 창밖의 빛과 미묘하게 공명하는 듯했다. 내 마법은 주로 ‘공감’과 ‘치유’에 특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존재들의 감정이나 상태를 미약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내가 느끼는 저 빛은, 슬픔이었다. 너무나 깊고 오래된, 절규하는 듯한 슬픔.

    다음 날, 나는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향했다. 어제 밤새 잠 못 이루며 고민한 끝에, 결국 저 기운의 정체를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학원의 금지 구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도서관밖에 없을 터였다.

    별의 눈 학원의 도서관은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었다. 거대한 돔형 천장 아래 수만 권의 마법서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고, 마법으로 부유하는 책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분류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나는 조용히 고서적 코너로 향했다. 금지 구역에 대한 정보라면 아무래도 오래된 책에 담겨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음… 별의 눈… 지하… 금지…”

    관련 키워드를 중얼거리며 책등을 훑던 중, 내 손이 멈춘 곳은 먼지가 수북이 쌓인, 겉표지조차 낡아 해진 작은 책 한 권이었다. 제목조차 제대로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흐릿했지만, 나는 묘한 끌림에 이끌려 책을 꺼내 들었다. 책을 펼치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손을 스치는 듯했다.

    책의 내용은 고대 문자로 쓰여 있어 해독하기 어려웠지만, 그림들은 명확했다. 학원 지하 깊숙한 곳에 거대한 동굴이 그려져 있었고, 그 안에는 알 수 없는 문양과 함께 거대한 봉인석이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봉인석 아래에는… 마치 무언가가 갇혀 있는 듯한 그림자가 아련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림의 분위기는 어둡고 절망적이었다.

    나는 그림에 집중했다. 그림 속 그림자는 흐릿했지만, 나는 거기서 어제 밤새 나를 유혹했던 푸른빛과 같은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림 한쪽 구석에, 아주 작게, 한 문장이 또렷하게 쓰여 있었다. 고대 문자였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모든 빛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장 빛나는 별의 눈 아래, 가장 끔찍한 어둠이 잠들어 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끔찍한 어둠.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리고 왜 이곳에 갇혀 있는 걸까?

    나는 책을 덮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책은 분명히 학원 내에서조차 금서로 취급될 만한 내용이었다. 왜 이런 책이 고서적 코너에, 그것도 이렇게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곳에 놓여 있었을까?

    그 순간, 나는 다시 한번 그 차가운 기운을 느꼈다. 내 어깨 너머, 누군가 서 있는 듯한 서늘한 감각.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저 빈 서가와 먼지 쌓인 책들만이 가득할 뿐.

    나는 책을 품에 안고 도서관을 빠져나왔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호기심과 두려움은 마치 폭풍 전야의 바다처럼 격렬하게 요동쳤다. 별의 눈 마법 학원의 빛나는 표면 아래, 감춰진 어둠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어둠이 지금,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

    나는 깨달았다. 내가 느꼈던 슬픔은,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갇혀 있던 존재의 절규였다. 그리고 이제 그 절규는, 내가 그곳으로 향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학원 지하, 그 금지된 구역으로. 이 모든 것이, 그저 기분 탓일 리 없었다.

    내 심장이 저 깊은 어둠 속의 무언가와 함께 뛰기 시작했다.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천천히 본관 지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곳에 무엇이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나는 가야만 했다.
    마치 푸른 꿈속에서 들려오는 노래에 홀린 것처럼.
    알 수 없는 슬픈 노래에.
    나는 그 노래의 끝을 찾아야만 했다.

  • SF (공상과학)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성간 탐사선 ‘여명’은 심해를 유영하는 고래처럼 고요했다. 함선이 떠다니는 곳은 우주 지도에도 희미하게 점 하나 찍혀 있을까 말까 한 미지의 영역, 이른바 ‘성간의 장막’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빛도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절대적인 암흑 속에서, 여명호의 내부는 푸른빛을 띠는 디스플레이와 희미한 인공 조명으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다.

    함장 강민준은 함교 중앙의 홀로그램 콘솔 앞에 서서, 붉은색 알림이 깜빡이는 우주 지도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이지아 수석 과학관이 팔짱을 끼고 서서, 한 손으로는 턱을 괴고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함장님, 벌써 몇 시간째 같은 패턴입니다. 시스템 오작동이라고 보기엔 너무 규칙적이에요.”
    지아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흥분이 깃들어 있었다.

    민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처음엔 성간 방사선의 이상 신호인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그들이 감지한 것은 극도로 미약하지만, 지속적이고 인공적인 패턴을 가진 에너지 신호였다. 성간의 장막은 그 어떤 문명도 발 닿지 않은 곳, 예상치 못한 발견이었다.

    저편에서 항해사 박선우가 의자를 돌려 그들을 바라봤다. “정밀 탐사 프로브를 보낼까요? 육안 확인은 불가능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선우의 목소리는 긴장 반, 기대 반이었다. 이제 막 스물 중반을 넘긴 그는 이런 미지의 현상에 늘 가장 먼저 반응했다.

    민준은 잠시 고민했다. 이 미지의 신호는 위험할 수도, 혹은 인류의 모든 상식을 뒤엎는 발견일 수도 있었다.
    “좋아, 정밀 탐사 프로브 ‘매의 눈’을 발사해. 자동 귀환 모드로 설정하고, 접촉은 절대 금지다. 오직 시각 데이터만 확보해.”
    민준의 명령에 선우는 곧바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함선 전체에 낮은 진동이 울리고, 프로브 발사구가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몇 분 후, 함교의 메인 스크린에 ‘매의 눈’ 프로브가 전송하는 실시간 영상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검은 우주뿐이었다. 짙은 어둠 속을 헤쳐 나가는 프로브의 움직임이 스크린에 숫자로 표시되었다.

    “거리 5000km, 4000km…” 선우가 중얼거렸다.
    지아는 몸을 스크린 가까이 붙였다. “에너지 신호는 점점 강해지고 있어요.”

    그리고, 2000km.
    스크린 너머의 어둠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마치 진공 속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존재가 숨 쉬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멈춰!” 민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선우가 재빨리 프로브를 정지시켰다.

    그 순간, 스크린 속 어둠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거대한 다면체였다. 완벽하게 검은색, 흡사 모든 빛을 집어삼킬 듯한 색이었지만, 그 표면에서는 미묘한 푸른색과 보라색 빛이 끊임없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표면의 무수한 면들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듯했다. 삼각형, 사각형, 오각형, 혹은 그 이상의 차원을 가진 듯한 기이한 다각형들이 예측할 수 없는 패턴으로 서로 맞물리며 형태를 바꾸는 모습은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세상에…” 지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건… 우리가 아는 어떤 물질로도 만들어지지 않았어요. 기계도, 생물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녀의 눈은 호기심으로 이글거렸다. 수십 년간 우주를 탐사하며 수많은 기이한 현상들을 마주했지만, 이런 존재는 처음이었다.

    민준은 숨을 들이켰다. “탐사 프로브에 스캔 명령을 내려. 표면 구성 물질, 에너지 방출량, 모든 데이터를 최대한 확보해.”

    프로브가 유물을 천천히 선회하며 데이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유물의 표면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단순한 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우아하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그 빛은 희미하게 함교 안으로까지 스며드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에너지 방출량은 일정합니다. 하지만… 측정 단위가 없어요. 기존 스케일로는 측정 불가능한 종류의 에너지입니다.” 선우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지아는 스크린의 데이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이건… 일종의 정보 저장 장치일까요? 아니면… 동력원? 건축물? 형태가 계속 변해요. 고정된 실체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녀는 흥분으로 들뜬 목소리로 계속 중얼거렸다. “이 기하학적 형태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법칙을 따르지 않아요. 표면의 각 면이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거울 속에 비친 무한한 우주를 보는 것 같아요.”

    민준은 신중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접근하는 데 위험은 없을까?”
    “현재까지는 감지되는 위협 신호는 없습니다. 하지만… 미지의 존재라는 것이 가장 큰 위협입니다.” 지아가 답했다.

    선우가 갑자기 외쳤다. “함장님! 유물 표면에서… 뭔가 돌출되고 있습니다!”

    스크린 속의 유물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더니, 표면의 한 점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검은색 다면체의 표면에서 얇고 긴 촉수 같은 것이 천천히 뻗어 나왔다. 그것은 단단한 물질이라기보다는 유연한 빛의 기둥에 가까웠다. 그 촉수는 길고 가늘게 뻗어 나와 ‘매의 눈’ 프로브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후퇴시켜!” 민준이 즉시 명령했다. “접촉은 절대 안 돼!”

    그러나 이미 늦었다. 빛의 촉수는 놀라운 속도로 프로브를 감쌌다. ‘매의 눈’ 프로브의 영상이 순간적으로 흔들리더니, 이내 정지했다. 스크린은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암전되었다.

    “프로브 신호 상실! 통신 두절!” 선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아는 충격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라졌어요… 흔적도 없이.”

    민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의 눈은 스크린이 꺼진 자리, 그리고 그 너머의 어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미지의 유물이 프로브를 흡수한 것인지, 파괴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존재가 인류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때, 함선 전체에 낮은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세했지만, 점차 강해졌다. 마치 거대한 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함선의 모든 금속을 통해 승무원들의 뼈 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이게 무슨… 엔진 문제가 아닙니다!” 선우가 스크린의 데이터를 확인하며 외쳤다. “함선 외부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장이 감지됩니다!”

    함교의 푸른빛 조명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민준은 창밖, 그 검은 심연을 응시했다. 그는 느꼈다. 그곳에 있는 유물이 ‘여명’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마치 거대한 눈이 자신들을 응시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함장님! 유물에서… 뭔가가 우리 함선을 향해 접근하고 있습니다!” 지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스크린이 다시 켜졌다. 노이즈 가득한 화면 저편, 어둠 속에서 아까보다 훨씬 거대해진 빛의 촉수 수십 개가 ‘여명’을 향해 뻗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들은 별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며, 마치 심해의 괴물이 먹이를 향해 촉수를 뻗는 듯한 섬뜩한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전 승무원, 전투 태세! 방어막 최대로 올려!” 민준이 단호하게 명령했다. “이건… 선제 공격이 아니다. 이건… 접촉이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확신도 없었다. 과연 인류가 이런 종류의 ‘접촉’에 대비할 수 있을까?
    검은 다면체의 수많은 빛의 촉수들이 ‘여명’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하고 있었다. 그 순간, 함선 전체를 휘감는 거대한 섬광과 함께, 함교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암흑. 그리고 침묵.
    여명은 미지의 심연 속에서, 외계 유물의 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