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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화. 이상한 손님

    “어서 오세요, 숲의 속삭임입니다!”

    김미소는 쨍한 아침 햇살에도 굴하지 않고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했다. 사실 손님이라고 해봐야 매일 같은 시간에 들어와 늘 똑같은 아메리카노를 시키는 박 교수님뿐이었지만, 그래도 그녀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다. 여기가 단골 손님 너덧 명으로 연명하는 작은 카페일지언정, 미소에게는 이 도시의 유일한 피난처이자 가장 큰 놀이터였다.

    “미소 씨, 오늘도 에너지가 넘치네요.”
    “그럼요! 박 교수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따뜻한 아메리카노 잔을 든 박 교수가 픽 웃으며 창가 자리로 향했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두꺼운 전공 서적을 펼치겠지. 미소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갓 쪄낸 스콘을 정리했다. 갓 구운 빵 냄새가 카페 안을 가득 채웠다.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는 미소에게 언제나 소소한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그녀의 작은 카페 ‘숲의 속삭임’은 도시 변두리, 작은 공원 입구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덕분에 가게 안에는 항상 은은한 흙냄새와 풀잎 냄새가 섞여 있었고, 낡았지만 편안한 초록색 소파와 나무 테이블은 숲속 오두막 같은 아늑함을 선사했다. 미소는 그 분위기가 좋았다. 그녀는 복잡한 도시 생활보다, 이렇게 소박하고 정겨운 공간에서 사람들과 조용히 교류하는 것을 훨씬 더 좋아했다. 물론, 이따금씩 찾아오는 답답함과 외로움은 그녀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음, 그래도 가끔은 좀 더… 특별한 일이 생겼으면 좋겠는데.”

    미소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주인공처럼, 어느 날 갑자기 운명적인 사랑이 뿅 하고 나타난다거나, 숨겨진 거대 기업의 상속녀라거나… 뭐,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만큼은 자유롭지 않은가.

    쨍그랑!

    때마침 카페 문이 열리며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박 교수님 이후로는 오늘 첫 손님이었다. 미소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은 마치 스콘 반죽이 부풀어 오르듯 쿵 하고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문을 열고 들어선 남자는… ‘비현실적’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새까만 머리카락은 마치 새벽 안개가 걷히고 드러나는 숲의 나무들처럼 차분하고 고결했고, 뽀얀 피부는 겨울 숲에 내린 첫눈처럼 맑았다. 무엇보다 미소를 사로잡은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짙은 초록색. 깊고도 투명한 그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빛이 감돌고 있었다. 마치 숲속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의 호수를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와… 무슨 조각상이야? CG야? 이 얼굴이 실존한다고?’

    미소는 제 심장이 발작이라도 일으킨 것처럼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드라마 속 재벌 2세도 이 정도 아우라는 아니었다. 남자는 카페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유려하고 자연스러워서, 마치 물 흐르듯,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보였다. 마치 중력을 거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가 카운터 앞에 섰다. 미소는 어색하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 어서 오세요! 숲의… 속삭임입니다.”

    혀가 꼬인 건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옥타브는 높게 튀어 나왔다. 남자는 미소의 인사에 말없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미소를 똑바로 응시하자, 미소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주문… 하시겠어요?”

    미소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남자의 시선은 미소를 지나 카운터 뒤에 놓인 작은 화분으로 향했다. 미소가 아끼는 몬스테라 화분이었다. 그의 시선이 닿자, 몬스테라 잎이 마치 햇살을 받은 것처럼 미묘하게 반짝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숲의… 속삭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그의 목소리는 마치 숲속 샘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처럼 청량하고 잔잔했다. 듣는 순간 마음이 평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네, 저희 카페 이름이에요. 숲의 속삭임. 공원 입구에 있어서… 왠지 잘 어울리지 않나요?”

    미소는 어색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남자는 다시 미소를 보았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에 묘한 흥미가 스치는 것 같았다.

    “이곳은… 흙의 향이 살아 있군.”

    “네? 흙의… 향이요?”

    미소는 당황했다. 흙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그걸 이렇게 표현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그럼… 무엇을 드릴까요? 커피, 차, 에이드… 아니면 갓 구운 스콘도 있어요!”

    미소는 얼른 메뉴판을 가리켰다. 남자는 메뉴판을 훑어보지도 않고, 여전히 몬스테라 화분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뿌리가 깊은 나무의 생명력을 원한다.”

    “네?”

    미소는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의심했다. 뿌리 깊은 나무의 생명력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메뉴란 말인가. 그녀의 머릿속에는 온갖 나무뿌리 관련 음료가 스쳐 지나갔다. 인삼차? 도라지즙? 아니면… 보리차?

    “저… 손님. 혹시 저희 메뉴 중에…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뿌리 깊은 나무의 생명력은… 죄송하지만 메뉴에 없어서요.”

    미소는 최선을 다해 정중하게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다시 미소를 응시했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에 약간의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없다고? 그럴 리가. 이 공간은 분명 숲의 기운을 담고 있는데… 너는 그것을 다루지 못하는 것인가?”

    “숲의… 기운이요? 아, 혹시 건강 주스 같은 걸 말씀하시는 건가요? 케일 주스나… 사과 주스 같은 건 있는데.”

    미소는 이 남자가 좀 특이한 취향을 가진 ‘힙스터’라고 결론 내렸다. 요즘 세상에 워낙 독특한 사람들이 많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다만, 이렇게 미친 듯이 잘생긴 힙스터는 처음 봤을 뿐.

    남자는 한숨처럼 옅은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카페 안의 작은 화분들이 일제히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미소의 착각이었을까?

    “…그럼, 잎과 꽃의 기운이 담긴 것으로 부탁한다.”

    그가 말했다. 잎과 꽃의 기운. 미소는 그 말을 듣자마자 얼른 머리를 굴렸다. 잎과 꽃이라…

    “아! 그러면 저희 로즈마리 허브티는 어떠세요? 아니면 캐모마일? 둘 다 향긋하고 편안하게 드실 수 있으실 거예요!”

    미소는 두 가지 차를 추천하며 환하게 웃었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는 듯 보였다. 그의 시선은 다시 한번 몬스테라 화분으로 향했다가, 이내 미소에게로 돌아왔다.

    “좋다. 네가 추천하는 대로, 잎과 꽃의 기운이 담긴 것을 달라.”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미소는 활기차게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남자의 주문은 로즈마리 허브티였다. 왠지 모르게 한숨 돌린 기분이었다. ‘휴, 그래도 정상적인 음료를 마시는 사람이었네.’ 미소는 머릿속으로 안도했다.

    따뜻한 물에 로즈마리 잎을 우려내며 미소는 흘끗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창가 자리로 향하는 박 교수님을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박 교수님은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듯 책에만 몰두하고 있었지만, 남자는 마치 박 교수님이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 동물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사람이다, 정말.’

    미소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보다, 그의 신비로운 분위기에 더 강하게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 유려한 몸짓, 그리고 숲과 흙, 나무의 생명력을 논하는 그의 독특한 말투까지. 모든 것이 미소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여기, 잎과 꽃의 기운을 담은 로즈마리 허브티 나왔습니다!”

    미소는 차를 내밀며 최대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잔을 받아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잔에 닿는 순간, 미소는 찌릿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그의 손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마치 얼음처럼.

    “감사하다.”

    그가 잔을 받아 들고 작은 테이블로 향했다. 미소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을 감았다. 마치 세상의 모든 향기를 음미하듯, 깊고 길게 숨을 들이쉬었다. 미소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어서,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 생각했다.

    ‘설마… 진짜 숲의 요정 같은 건 아니겠지?’

    미소는 엉뚱한 상상을 하며 키득거렸다.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랐지만, 진짜 요정이 나타날 줄이야. 물론 농담이었다.

    그때, 남자가 다시 눈을 떴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미소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희미했지만, 그 미소는 미소의 심장을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게 만들었다.

    “이곳의 기운은… 네 덕분에 더 따뜻하군.”

    그의 말에 미소는 얼굴이 붉어졌다. 칭찬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왠지 모르게 심장이 간질거렸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떠나는 것을 본 미소는 아쉬움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혹시 다음에도 다시 올까? 어떤 특이한 주문을 또 할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가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미소는 그가 뒤를 돌아보는 것을 보았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미소를 향해 빛났다.

    “나는 은가람이다.”

    그가 나직이 말했다. 그리고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미소는 멍하니 카운터에 기대어 섰다. ‘은가람’. 왠지 모르게 숲과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여전히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의 한마디에, 그녀의 일상은 더 이상 ‘평범한’ 것이 아니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뿌리 깊은 나무의 생명력이라니….”

    미소는 덩그러니 남겨진 찻잔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는 확신했다.
    오늘, 그녀의 카페 ‘숲의 속삭임’에, 아주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만남이, 그녀의 삶에 알 수 없는 거대한 파장을 일으킬 것이라는 것을.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미소는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대체 뭘 먹고 사는 거지?”
    그리고 그녀는 깨달았다.
    그 잘생긴 남자는 계산을 하지 않고 갔다는 것을.

  • 좀비 아포칼립스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어둠 속의 초대

    아레스-7호의 선실은 늘 같은 기계음으로 가득했다. 멀리 지구의 푸른 숨결은 아득한 신화 속 이야기처럼 희미해졌고, 이곳은 검은 우주의 한 점, 외로운 강철의 섬이었다. 오랫동안 반복된 항해는 승무원들의 몸과 마음에 고유의 리듬을 새겼지만, 그 리듬은 지금, 알 수 없는 균열에 휘말리고 있었다.

    “선장님, 에너지 신호가… 또 다시 포착되었습니다.”

    정적을 깬 건 부함장 박상위의 낮고 긴장된 목소리였다. 주 모니터에는 흐릿한 별 무리 사이로 점멸하는 붉은 점 하나가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점은 지난 3일간 그들을 잠 못 들게 한 미지의 존재였다.

    김선장은 굳게 다문 입술을 한번 쓸고 모니터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눈빛은 탐험가의 호기심과 오랜 경험에서 오는 신중함이 뒤섞여 있었다. “이 박사, 분석 결과는 여전합니까?”

    선장 옆에 선 이수아 박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아레스-7호의 수석 과학자이자 이 원정의 핵심 브레인이었다. “네, 선장님. 어떤 알려진 물질에서도 나올 수 없는 파형입니다. 기계적인 신호도 아니고, 생명체의 반응도 아닙니다. 마치… 정지된 에너지가 스스로 숨 쉬는 듯한 느낌입니다.”

    “정지된 에너지가 숨을 쉰다?” 박상위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박사님.”

    이수아 박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피곤한 듯 말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거대한 존재가 꿈을 꾸는 것처럼, 일정한 주기로 미약하게 확장과 수축을 반복합니다. 그 파장이 이곳까지 도달하는 거고요.”

    김선장은 모니터 속 붉은 점을 응시했다. “가장 가까이 접근했을 때, 충돌 위험은 없습니까?”

    “계산상으로는… 없습니다. 궤도가 일정합니다. 하지만… 불안정합니다.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폭발할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 박사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망설임이 섞여 있었다. 그 망설임은 호기심이라는 뜨거운 불길에 곧 삼켜질 것이 분명했다.

    “접근 각도 설정. 최대 안전 거리 유지하되, 샘플 채취 준비.” 김선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함교는 일순간 활기를 띠었다. 모든 승무원이 각자의 자리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스크린에 복잡한 데이터가 흘러넘쳤다.

    ***

    우주선은 조심스럽게 미지의 존재에게 다가갔다. 외부 카메라가 전송하는 영상이 주 모니터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맙소사….”

    박상위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검은 우주를 배경으로 거대한 암흑이 떠 있었다. 그것은 완벽한 정육면체였다. 매끄럽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색의 표면은 빛을 전혀 반사하지 않았다. 마치 우주 공간에 검은 구멍이 뚫린 듯한 모습이었다. 그 표면에는 아무런 무늬도, 연결 부위도, 인공적인 흔적도 없었다. 마치 태초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완벽한 침묵 속에 존재했다.

    “이게…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었다고요?” 김선장의 목소리에는 경외감과 함께 섬뜩한 의문이 깃들어 있었다.

    이수아 박사는 홀린 듯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 댔다. “놀랍군요… 이렇게 거대한 물체가…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다니. 인공적인 조작의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기엔 너무… 완벽합니다.”

    “크기는 어느 정도죠?”

    “측정 불가… 아니, 잠깐만요.” 이 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측정 장비를 ‘흡수’하고 있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빛의 파장을 흡수해서 크기 측정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그 순간,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의 한 면에서 희미한 보랏빛 줄기가 스르륵 피어올랐다. 마치 표면에 그려진 문양처럼 보였지만, 곧이어 그 줄기는 번개처럼 사방으로 뻗어나가더니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에너지 파장 급증! 수치 한계 돌파!” 박상위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함선 후퇴! 최대 속도로 후퇴하라!” 김선장이 즉각적으로 명령했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보랏빛 섬광이 사라진 직후, 검은 정육면체에서 강력한 자기장 파동이 방출되었다. 아레스-7호는 거대한 손에 붙들린 것처럼 휘청거렸다. 함내의 조명이 깜빡거리고, 일부 계기판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시스템 오류! 통신 두절! 보조 동력으로 전환 중입니다!”

    “젠장!” 김선장이 욕설을 읊조렸다.

    잠시 후, 자기장 파동은 거짓말처럼 멈췄다. 아레스-7호는 침묵 속에 표류했다.

    “선장님, 손상 보고입니다. 통신 모듈 파괴, 외부 센서 일부 손상. 동력은 보조 동력으로 전환되어 최소한의 유지 보수만 가능합니다.” 박상위가 떨리는 목소리로 보고했다.

    “우리가… 붙잡힌 건가?” 이수아 박사가 허공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김선장은 모니터 속 검은 정육면체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다시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완벽한 침묵 속의 거대한 존재.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침묵은 모든 것을 집어삼킬 폭풍의 전조였다는 것을.

    “탈출 불가능하다면, 직접 접촉한다. 샘플 채취 준비. 소형 탐사선을 이용해 가장 작은 조각이라도 가져온다.” 김선장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더 이상 관망만 할 수는 없어. 이 괴물이 우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한, 우리는 이 미지의 존재를 이해해야만 한다.”

    이수아 박사의 얼굴에 일순간 불안감이 스쳤지만, 이내 학자적인 호기심이 그 불안을 덮었다. “네, 선장님. 준비하겠습니다.”

    ***

    소형 탐사선은 조심스럽게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에 접근했다. 탐사선에는 오정민 이등 항해사가 탑승해 있었다. 젊은 오정민은 이번 임무에 자원했다.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보다 인류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갈지 모른다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오정민, 조심해. 절대 직접 접촉하지 마.” 이수아 박사가 통신으로 신신당부했다.

    “알겠습니다, 박사님. 오염 방지 장치 완벽 가동 중입니다.”

    탐사선이 검은 정육면체 표면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 순간, 오정민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정육면체의 표면이 마치 물결처럼 일렁이는 것이었다. 미세한 파문이 일더니, 가장자리에 작은 조각 하나가 저절로 떨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스스로 떨어져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듯, 정확히 탐사선의 수집용 집게 앞으로 굴러왔다.

    “선장님! 박사님! 작은 조각이 떨어져 나왔습니다! 직접 접촉 없이 수집 가능합니다!” 오정민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가득했다.

    “수집해. 그리고 즉시 귀환해.” 김선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탐사선의 집게가 조심스럽게 그 조각을 집어 올렸다. 손톱만 한 크기의 검은 조각은 칠흑 같은 어둠 그 자체였다. 빛을 완전히 흡수하여 어떤 형태도 빛깔도 비추지 않았다. 그저 완벽한 검은 점처럼 보였다.

    탐사선이 아레스-7호로 귀환하고, 오정민은 조심스럽게 샘플을 들고 격리된 실험실로 들어섰다. 이수아 박사는 이미 분석 장비를 모두 준비해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땠어요? 가까이서 보니.” 이 박사가 물었다.

    오정민은 아직도 약간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뭐랄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비어있는 것 같은데…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처럼요.”

    이 박사는 오정민의 엉뚱한 대답에 작게 웃으며 샘플을 받았다. “자, 이제 이 미스터리를 풀어볼 시간입니다.”

    그녀는 검은 조각을 특수 격리 용기에 넣고 분석 장비에 연결했다. 초기 스캔 결과가 모니터에 뜨기 시작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군요.” 이 박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원소 분석도 불가능합니다. 질량도 없고, 에너지 반응도 없습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는데 저희 눈앞에 있고, 만져지는데요?” 오정민이 반문했다.

    “정확히 그렇습니다. 물리적으로는 존재하는데…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안 돼요.” 이 박사가 조각을 현미경 아래 놓았다. 수십만 배 확대된 조각은 여전히 완벽한 검은색이었다. 심지어 현미경의 조명까지 흡수하여, 마치 작은 블랙홀처럼 보였다.

    그 순간, 격리 용기 안의 검은 조각에서 아주 미약한 보랏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너무나 미약해서 오정민은 자신이 환각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수아 박사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이 박사님,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착시현상인가 봅니다.” 이 박사는 손으로 자신의 눈을 비볐다. 그리고는 다시 조각을 응시했다. “오정민 이등 항해사, 잠시 자리 비켜주세요. 저는 이 조각을 좀 더 분석해봐야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오정민은 뭔가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군말 없이 실험실을 나섰다.

    ***

    그날 밤부터 아레스-7호 안에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오정민은 이상한 꿈에 시달렸다. 꿈속에서 그는 끝없이 펼쳐진 검은 공간에 서 있었다. 그 공간은 완벽한 정육면체였고, 벽은 그가 가져온 조각처럼 칠흑 같았다. 그 안에서 무언가 그를 끊임없이 부르는 것 같았다. ‘돌아와… 하나가 되어라….’ 꿈에서 깨어나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다른 승무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사소한 일에도 날카롭게 반응하고,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환청을 듣거나, 벽에서 이상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을 봤다는 증언도 나왔다.

    이수아 박사는 실험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검은 조각에 완전히 매달려 있었다.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조각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그녀의 눈은 충혈되어 있었고, 얼굴은 해골처럼 변해갔다. 그녀의 보고서에는 ‘미지의 에너지원’ ‘의식과의 교감’ ‘존재의 재정의’ 같은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가득했다.

    김선장은 불안했다. 그는 이수아 박사에게 잠시 휴식을 취하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선장님,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셔야 합니다.” 이 박사의 목소리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있었다. “이 조각은… 살아있습니다. 아니, ‘살아있는’ 것 이상입니다. 이건… 모든 것을 담고 있습니다. 무한한 지식과 무한한 존재의 기억을요.”

    “이 박사, 진정해요. 과로입니다. 잠시 쉬어야 합니다.” 김선장이 그녀의 어깨를 잡으려 했다.

    이 박사는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눈빛으로 김선장을 밀쳐냈다. “제가 말했습니다. ‘돌아와야 한다’고. 모든 것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희가… 그 길을 열어드린 겁니다.”

    그녀의 손에는 작은 검은 조각이 들려 있었다. 조각은 이 박사의 손바닥 위에서 미약하게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실험실 문이 벌컥 열렸다. 오정민이었다. 그는 마치 좀비처럼 비틀거리며 들어섰다. 그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눈은 공허하게 이수아 박사를 응시했다.

    “돌려줘….” 오정민의 입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게… 돌려줘…!”

    그는 이수아 박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박사는 놀라 소리쳤고, 오정민의 손이 그녀의 목을 움켜쥐었다. 오정민의 손아귀에는 인간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괴력이 실려 있었다. 이 박사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김선장이 달려들어 오정민을 떼어내려 했지만, 오정민의 몸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그는 이 박사의 목을 조르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이 박사의 손에 들린 검은 조각을 뺏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의 눈빛은 광기에 휩싸여 있었다.

    “안 돼! 이건… 우리의 것이다!” 오정민의 비명이 실험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의 입에서는 짐승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김선장은 섬뜩한 것을 보았다. 오정민의 피부 아래로, 마치 검은 핏줄이 솟아오르듯 기괴한 형상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고, 눈동자는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이수아 박사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 조각이 강렬한 보랏빛 섬광을 내뿜었다. 그 빛은 오정민의 몸을 감쌌고, 오정민은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몸은 경련을 일으키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김선장은 떨리는 손으로 이수아 박사를 부축했다. 그녀는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젠장, 오정민! 괜찮나!” 김선장이 쓰러진 오정민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의 숨은 멈춰 있었다.

    “선장님, 조심하세요…!” 이수아 박사의 경고가 채 끝나기도 전에, 바닥에 쓰러져 있던 오정민의 몸이 다시 꿈틀거렸다.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열렸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더 이상 오정민의 것이 아니었다. 완전히 검게 변한 동공은 집요하게 이수아 박사가 든 검은 조각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입이 서서히 벌어졌다. 찢어질 듯 크게 벌어진 입 안에는 시커먼 혀가 꿈틀거렸고, 앙상한 이빨은 날카로운 짐승의 송곳니처럼 변해 있었다. 그의 목구멍에서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것은 더 이상 인간의 소리가 아니었다. 피에 굶주린 괴물의 울음소리였다.

    **다음 화에 계속.**

  • 타임슬립 (시간여행)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둠은 가장 오래된 은신처이자, 가장 잔인한 심판관이었다. 눅눅한 흙냄새와 희미하게 타는 등잔불 기름 냄새가 뒤섞인 지하 동굴에 긴장감이 낮게 깔렸다. 스무 명 남짓한 이들이 숨죽인 채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었다. 중앙에는 찢어진 천 조각을 이어 붙인 허름한 지도가 놓여 있었다. 그 위로 류진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제국의 제7군 보급 부대는 정확히 내일 밤 자정, 이곳을 통과할 겁니다.”

    류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 위 한 지점을 가리켰다. 협곡 어귀에 희미하게 그려진 좁은 길목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가온’이 무거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가온은 이 반란군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깊게 패인 미간과 날카로운 눈매는 수많은 전투와 패배를 겪어온 자의 흔적이었다.

    “자정? 제국 보급선이 그렇게 늦게 움직일 리가. 그들은 보통 해가 지기 전에 모든 경로를 확인한다.” 가온의 목소리에는 불신이 섞여 있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 제국은 예상 가능한 움직임을 보여왔다. 그들의 패턴은 피할 수 없는 철칙과 같았다.

    류진은 고개를 들었다. 등잔불의 희미한 빛이 그의 지친 얼굴을 비췄다. 그는 이 ‘미래’에서 온 이방인이었고, 그의 말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었다. 신뢰를 주기도, 동시에 더 깊은 의심을 심어주기도 했다.

    “원래는 그렇습니다.” 류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 주는 달라요. 제국 내부에 새로운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고, 고위 귀족 간의 은밀한 암투가 몇 주 전부터 벌어졌습니다. 덕분에 보급선 책임자가 교체되었고, 그는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무리한 야간 수송을 감행할 겁니다. 경로 역시 기존과 달리, 이 협곡을 택할 수밖에 없어요. 최단거리이자, 보안이 취약한 곳으로 보이거든요. 물론 착각이지만.”

    모두의 시선이 류진에게 집중됐다. 그의 말은 황당하리만큼 구체적이었다. 누가 감히 제국 내부의 권력 다툼을, 그것도 고위 귀족의 암투를 이렇게 상세히 알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몇 주 전부터’라는 과거형으로.

    가온 옆에 앉아 있던 ‘세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날렵한 몸놀림과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반란군의 정찰대장이었다. “협곡이라… 우리 정찰병 보고에 따르면, 그곳은 제국의 감시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매복하기에도 지형이 썩 좋지 않아요. 너무 개방적이고, 만약 역습을 당하면 퇴로도 마땅치 않습니다.”

    “그들이 매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할 테니까요.” 류진이 세라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제국은 평민들의 반란을 언제나 우습게 여겨왔습니다. 우리는 그저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 덤비는 미물로 보일 뿐이죠. 그들은 설마 우리가 이런 ‘정교한’ 계획을 세울 거라곤 상상조차 못 할 겁니다.”

    정교한 계획. 류진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가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지금껏 세웠던 계획이란, 그저 굶주린 이들의 비루한 절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류진이 나타난 이후,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의 ‘미래 지식’은 가끔은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비현실적이었지만, 놀랍게도 번번이 제국의 허를 찔렀다. 지난번 국경 수비대 습격 역시 그의 예언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확실한가?” 가온이 다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의심과 함께, 한 줄기 희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번 공격은 단순한 보급선 습격이 아니었다. 제국 수도로 향하는 최전선 보급로를 끊고, 그들의 사기를 꺾는 동시에 반란군의 존재감을 알리는 첫 번째 대규모 작전이었다. 성공하면 수많은 굶주린 백성에게 희망을 줄 수 있었고, 실패하면, 그들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류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에게 ‘확실’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잔인한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그의 기억 속 미래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고, 아주 작은 나비의 날갯짓 하나에도 거대한 폭풍처럼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곳에 있었다. 이들의 눈빛 속에 담긴 처절한 희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류진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성공하면, 우리는 열흘 치의 식량과 겨울을 날 군수 물자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국에게 경고를 보낼 수 있을 겁니다. 더 이상 그들의 세상이 아니라고.”

    가온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류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지독한 피로감과 알 수 없는 비장함이 뒤섞여 있었다. 가온은 이 젊은이가 대체 어떤 과거를 겪었고, 어떤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가 가져오는 정보가 너무나도 절실하다는 것만을 알 뿐이었다.

    “좋다.” 가온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동굴 안에 낮게 울려 퍼졌다. “세라, 자네 부대는 협곡 입구에서 제국의 선발대를 막아. 류진의 말대로라면 야간 수송이니 분명 경계를 늦출 거다. 기습으로 혼란을 가중시키고, 뒤따라오는 보급 수레를 노려야 해.”

    “알겠습니다!” 세라가 짧게 답했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머지는 나와 함께 협곡 안쪽에 매복한다. 보급 수레가 충분히 들어섰을 때,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한다. 무엇보다, 무기와 식량을 최우선으로 확보한다. 제국 병사들과의 교전은 최소화해. 우리는 싸우는 자들이 아니다. 빼앗고, 달아나야 한다.”

    가온의 지시가 떨어지자, 지하 동굴 안에 있던 모두의 얼굴에 결의가 떠올랐다. 낡은 창과 활, 심지어는 농기구를 개조한 무기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그때였다. 밖에서 급하게 뛰어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거친 숨을 내쉬는 정찰병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대장님! 큰일입니다! 서쪽 길목에… 제국 수색대가 나타났습니다!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 숫자입니다! 흑랑 기사단의 깃발도 보였습니다!”

    동굴 안의 모든 시선이 순식간에 정찰병에게, 그리고 다시 류진에게로 향했다. 흑랑 기사단. 제국 황제의 직속 부대이자, 가장 잔혹하고 악랄한 진압 부대였다. 그들이 이 외진 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가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눈빛은 류진에게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있었다. 류진 역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흑랑 기사단이라니. 그의 기억 속 ‘미래’에는 없는 변수였다.

    “흑랑 기사단…?” 류진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작은 변화가 거대한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국 내 권력 다툼은 분명 있었으나, 그로 인해 흑랑 기사단이 움직인다는 정보는 없었다.

    “류진!” 가온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자네의 ‘미래’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나?”

    류진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정보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흑랑 기사단이 움직인다는 것은 단순한 수색이 아닐 터. 그들은 분명 어떤 ‘목표’를 가지고 이동하고 있을 것이다. 협곡 보급선 습격이 아니라, 그들만의 다른 임무가 있을 수도…

    아니, 잠시. 보급선 책임자의 교체. 무리한 야간 수송. 그리고 흑랑 기사단. 만약…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함정이라면?

    류진은 번개처럼 눈을 떴다. “아닙니다! 이건… 함정입니다! 보급선은 미끼고, 흑랑 기사단은 우리를 잡기 위한 포위망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곳에 집결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동굴 안은 순식간에 경악과 혼란으로 가득 찼다. 함정이라니? 그들은 지금껏 류진의 정보를 믿고 모든 것을 걸 준비를 해왔는데?

    “무슨 소리냐! 자네가 모든 것을 걸고 말하지 않았나!” 한 병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가온은 그를 제지하며 류진을 응시했다. “확실한가, 류진? 또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류진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제국의 새로운 책임자는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단순히 야간 수송을 감행한 게 아니라, 반란군을 일망타진할 기회로 삼으려 한 겁니다. 보급선은 미끼이고, 흑랑 기사단은 우리를 잡기 위한 그림자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보급선이 아니라, 우리를 이 협곡으로 유인해 전멸시키는 것입니다!”

    모두의 얼굴에 절망과 공포가 드리웠다. 그들은 지금 막 죽음의 문턱을 향해 나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대로 후퇴해야 합니까?”

    류진은 지도를 다시 짚었다. 그의 손가락이 흑랑 기사단이 나타났다는 서쪽 길목과 협곡, 그리고 반란군의 현재 위치를 빠르게 오갔다. 함정이라면, 이대로 물러서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하지만 돌파구는 어디에…

    그때, 류진의 눈에 지도의 한 부분이 들어왔다. 협곡 어귀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버려진 듯한 작은 오솔길. 제국군조차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었다.

    “아니요.” 류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혼란에 빠져 있던 모두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후퇴가 아닙니다. 이대로 돌격해야 합니다. 다만…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가온의 눈빛이 다시 한 번 깊어졌다. “방향을 바꾼다고?”

    “그들은 우리가 이 협곡으로 들어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보급선을 미끼로 삼았으니, 우리의 시선은 오직 그곳에 쏠려 있을 거라 생각할 겁니다. 흑랑 기사단은 우리의 퇴로를 막고, 협곡 안에서 우리를 포위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류진은 지도의 오솔길을 가리켰다. “이곳으로 움직입니다. 흑랑 기사단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에, 우리는 그들의 예상 경로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급선을 노릴 거라 생각하지만, 우리는 다른 것을 노려야 합니다!”

    “다른 것?” 세라가 물었다.

    “흑랑 기사단의 보급 마차입니다.” 류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은 우리를 잡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필시 후방에 자신들의 보급 마차를 두고 왔을 겁니다. 그들의 보급로는 텅 비어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들의 배후를 치는 겁니다!”

    모두의 얼굴에 다시 한 번 혼란이 스쳐 지나갔다. 적의 함정에 걸릴 뻔한 상황에서, 오히려 적의 배후를 노리라니. 이것은 무모한 것인가, 아니면 천재적인 발상인가?

    가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류진의 말대로라면, 흑랑 기사단은 반란군을 ‘협곡 안’에 가둘 생각이었다. 그들의 보급로는 그들의 예상대로 비어있을 확률이 높았다. 무엇보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러서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좋다.” 가온이 다시 결정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흔들림이 없었다. “류진, 자네의 ‘미래’에 다시 한번 모든 것을 걸겠다. 세라! 모든 부대는 흑랑 기사단의 배후를 친다! 우리의 목표는 식량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다!”

    “대장님!” 반란군 병사들의 눈에서 다시금 불꽃이 타올랐다. 절망은 순식간에 결의로 바뀌었다.

    어둠 속, 지하 동굴의 공기는 이전보다 더욱 차갑고 팽팽해졌다. 류진은 모두의 결의에 찬 눈빛을 보았다. 그의 어깨 위에 이 모든 것의 무게가 얹혀 있었다. 그는 정말로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아니, 그는 과연 이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모두, 움직인다!” 가온의 외침과 함께, 반란군의 그림자들이 동굴 밖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류진은 마지막으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낡은 종이 위, 그가 가리킨 오솔길이 마치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유일한 실마리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렸다. 피할 수 없는 싸움. 피할 수 없는 운명.
    이 모든 것이 과연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그는 그 답을, 오늘 밤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속에서 찾아야만 했다.

  • 메카 액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잿빛 새벽의 그림자

    신성 제국 아르카디아의 그림자는 변방 채굴지 7호에도 예외 없이 드리워져 있었다. 거대한 강철 채굴기가 뿜어내는 굉음은 주민들의 삶을 잠식하는 제국의 압제와 다름없었다. 해가 뜨기 전부터 시작되는 강제 노동, 끊임없이 치솟는 할당량,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시하는 황제군의 무자비한 눈빛. 이곳의 모든 것이 절망을 노래하는 것 같았다.

    카이는 낡은 천막 안에서 빛바랜 공구들을 만지작거렸다. 닳아빠진 작업복의 팔꿈치에는 기름때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밖에서는 새벽녘을 알리는 경보음이 울리고, 잠시 후 땅을 뒤흔드는 채굴기의 진동이 시작됐다. 또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숨 막히는 하루가.

    “젠장, 저놈의 기계들은 쉴 틈도 없이 돌아가는군.”

    옆에서 낡은 난로에 나무 조각을 넣던 노인, 핀 할배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깊은 피로와 함께 분노가 새겨져 있었다. 그는 카이에게 이 채굴지에서 유일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기계공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할배, 오늘은 저들이 더 날뛸 것 같습니다.”

    카이가 낮게 읊조렸다. 어젯밤, 제국군 순찰대가 마을 외곽의 작은 텃밭들을 모조리 짓밟는 것을 목격했다. 이유인즉슨, ‘제국군 보급로 확보’라는 명분 아래였다. 하지만 주민들 모두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제국의 오만함과 횡포를 보여주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었다.

    “쳇, 날뛰는 거야 하루 이틀인가.” 핀 할배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나저나, 오늘 아침은 더 싸늘하군. 혹시나 했더니, 저 개자식들이 또 무슨 짓을 벌이려는지.”

    핀 할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사람들의 비명과 함께 거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는 공구를 내던지고 천막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른 새벽, 아직 희미한 어둠이 걷히지 않은 채굴지의 광장에는 황제군 소령 빅터가 거대한 병기, ‘정찰형 다족 보행병기’ 몇 대를 앞세우고 서 있었다. 그의 등 뒤에는 중무장한 병사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그 앞에는 공포에 질린 주민들이 무릎을 꿇은 채 울부짖고 있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누군가 외쳤다.

    빅터 소령의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채굴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한 7지구 주민들은 제국의 법에 따라 모든 자산을 몰수하고 추방한다! 감히 제국의 은혜를 거스르는 자들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무자비하게 주민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한 젊은 여인이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울부짖으며 저항했다. 병사 하나가 아이를 빼앗으려 했고, 여인은 필사적으로 아이를 놓지 않았다. 그때, 옆에 서 있던 노파가 병사의 팔을 붙잡으며 애원했다.

    “제발… 제발 우리 아이들만은 건들지 말아주세요! 저희가 더 열심히 캘게요! 제발!”

    노파의 간절한 외침에도 병사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파를 거칠게 밀쳐냈다. 노파는 차가운 바닥에 쓰러졌고, 그 순간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카이의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어제 짓밟힌 텃밭의 흙냄새,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노파의 절규가 그의 심장을 칼로 후벼 파는 듯했다.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이대로 물러선다면,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길 것이다. 희망마저.

    “카이! 안 돼! 무모한 짓 하지 마!”

    핀 할배가 뒤늦게 따라와 그의 팔을 잡았지만, 카이는 이미 돌아설 수 없는 강을 건넌 뒤였다. 그의 눈은 불타는 듯 뜨거웠다.

    “이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 할배!”

    카이는 핀 할배의 손을 뿌리치고 낡은 천막 옆의 은밀한 통로로 향했다. 그곳은 채굴장의 버려진 통로를 개조한 비밀 작업장이었다. 어둠 속에 거대한 그림자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녹슨 강철로 이루어진, 투박하지만 위압적인 실루엣. 주민들이 몰래 버려진 채굴 기계 부품들을 모으고, 핀 할배와 카이가 밤낮으로 매달려 재조립한, 이 채굴지 유일의 전투 병기.

    “망치, 오늘이야말로 네 힘을 보여줄 때다.”

    카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망치’의 조종석에 올랐다. 차가운 금속과 낡은 가죽의 냄새가 그의 코를 찔렀다. 스위치를 올리자, 내부 회로가 켜지는 소리와 함께 낡은 계기판에 불이 들어왔다. 엔진이 우르릉거리는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마치 잠자던 거인이 기지개를 켜는 듯한 진동이 조종석을 타고 전해졌다.

    “기동 준비 완료. 출력 70%!” 핀 할배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들려왔다. “최대한 버텨라! 병력은 내가 분산시켜 볼 테니!”

    “걱정 마세요, 할배. 전 준비됐습니다.” 카이는 단단하게 대답했다.

    그 순간, ‘망치’의 거대한 팔이 통로의 막힌 벽을 부수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굉음과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광장의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투박하고 거친 외형, 여기저기 덧대어진 장갑판, 그리고 거대한 드릴이 박힌 한쪽 팔. 제국군이 사용하는 세련된 병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조악한 모습이었지만, 그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저, 저건 대체 뭐지?” 황제군 병사 하나가 당황하며 외쳤다.

    빅터 소령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차가운 분노로 바뀌었다. “저런 고철 덩어리가! 당장 제압해! 발포!”

    다족 보행병기들이 자세를 낮추고 기관총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쇠구슬이 ‘망치’의 장갑판에 부딪히며 섬광을 터뜨렸다. 하지만 ‘망치’는 아랑곳하지 않고 육중한 몸을 이끌고 전진했다. 카이는 능숙하게 조이스틱을 움직였다. ‘망치’의 거대한 팔에 달린 드릴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비켜!”

    카이는 조종간을 틀어 주민들이 갇혀 있던 쪽으로 ‘망치’를 돌렸다. 황제군 병사들이 길을 막으려 했지만, ‘망치’의 압도적인 덩치 앞에서는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거대한 드릴 팔이 지면을 내리찍자, 땅이 요동치고 균열이 생겼다. 병사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도망쳐요! 어서!” 카이가 내부 확성기를 통해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거친 기계음과 섞여 불안하게 울렸다.

    주민들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눈물을 훔치며 광장 구석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황제군 다족 보행병기들이 일제히 ‘망치’에게 포화를 집중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총탄에 ‘망치’의 장갑이 긁히고 불꽃이 튀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카이는 고통을 참으며 ‘망치’를 전진시켰다. 그는 목표를 정했다. 주민들의 퇴로를 막고 있던 대형 수송차량이었다. ‘망치’는 거친 움직임으로 다족 보행병기 한 대를 걷어차 쓰러뜨린 뒤, 곧장 수송차량으로 돌진했다. 거대한 드릴 팔이 차량의 측면을 강타했다. 찢어지는 듯한 금속음과 함께 수송차량이 비틀거렸다.

    “저런 미친놈이!” 빅터 소령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장 저 기체를 파괴해! 예비 병력 전부 투입해!”

    황제군 증원 병력이 몰려왔다. 더욱 강력한 화기를 든 병사들과 중장갑을 두른 소형 메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이대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시간을 벌고 주민들을 대피시키는 것이었다.

    “이젠… 내가 도망칠 차례인가.”

    카이는 거대한 팔을 휘둘러 마지막 수송차량의 바퀴를 부쉈다. 혼란이 가중되는 사이, 그는 ‘망치’를 돌려 채굴지의 복잡한 통로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황제군의 총탄이 그의 뒤를 쫓아왔지만, 좁고 복잡한 지형은 ‘망치’에게 유리했다.

    “카이! 잘했어! 이제 돌아와!” 핀 할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카이는 통로 깊숙이 숨어들며 ‘망치’의 엔진을 껐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밖의 소음에 귀 기울였다. 한동안 황제군 병사들의 수색 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멀어졌다. 그는 조종석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몸은 지쳤지만, 가슴속에는 알 수 없는 뜨거운 불씨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광장에는 파괴된 수송차량과 쓰러진 병기들의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빅터 소령은 이를 갈며 카이가 사라진 통로를 노려봤다.

    “저 고철 덩어리… 반드시 찾아내서 조각조각 부숴버릴 것이다. 감히 제국에 맞서려 하다니… 용서치 않아.”

    그러나 그의 눈에는 분노 외에 다른 감정이 섞여 있었다. 예측 불가능한 변수에 대한 당혹감. 그리고 그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주민들의 눈에도 변화가 있었다.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했던 그들의 눈빛에는 이제 작은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잿빛 새벽, 작은 채굴지에서 시작된 작은 파열음. 그것은 제국의 거대한 벽에 처음으로 균열을 내는 망치 소리였다.

  • 선협 (신선)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황량한 붉은 황야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은 잿빛 구름이 낮게 깔려 언제나 그랬듯 먹구름에 가려져 있었고, 그마저도 붉은 흙먼지와 뒤섞여 탁한 색을 띠었다. 이곳 ‘적멸의 땅’에서는 그 흔한 풀 한 포기, 작은 생명체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앙상하게 비틀린 고목들이 유령처럼 서 있을 뿐, 모든 것이 죽어 있었다.

    류진은 마른 목을 한번 삼켰다. 며칠째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등에는 낡은 가죽 배낭 하나와 옆구리엔 녹슨 철검이 전부였다. 한때는 온 세상을 뒤덮었던 풍부한 영기(靈氣)는 이제는 희미한 그림자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고작 땅속 깊은 곳에 겨우 스며들어 있을 영기의 잔재를 찾아 헤매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젠장… 이대로 가다간 말라죽겠군.”

    그의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붉은 모래는 그의 신발을 온통 뒤덮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폐허가 된 세상의 무게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듯했다. 원래대로라면 이곳은 한때 ‘청하 문파’의 영지로, 푸른 대나무 숲과 맑은 계곡물이 흐르던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이름조차 무색한 적멸의 땅이 되어버렸을 뿐.

    저 멀리, 붉은 안개가 희미하게 피어오르는 곳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희망일까, 아니면 또 다른 절망의 시작일까. 류진은 순간 망설였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단전(丹田)에 깊이 잠들어 있는 마지막 남은 진기(眞氣)를 끌어모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리며 온몸에 희미한 온기가 돌았다. 그것은 단순한 생존을 넘어선, 이 세계의 마지막 발버둥과도 같은 것이었다.

    두 시간 남짓 걸었을까. 마침내 그 거대한 그림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거대한 암석산이었다. 하지만 그 형태가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자연적인 산이 아니라 거대한 건물들이 무너져 쌓인 폐허의 잔해였다. 과거 청하 문파의 본산이 있었던 자리였다.

    류진은 조심스럽게 폐허 더미로 다가섰다. 부서진 기와 조각들이 널브러져 있고, 영롱한 빛을 내던 비취색 기둥들은 깨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한때 이 모든 것을 지탱했던 견고한 주춧돌들은 마치 거인에게 짓밟힌 듯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공기 중에는 먼지와 함께 희미한 죽은 영기, 그리고 어딘가 불쾌한 비릿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는 가장 온전해 보이는 건물 잔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그 안에 아직 쓸만한 물건이나, 운이 좋다면 마실 물이라도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 때문이었다. 잔해의 입구는 거대한 석판으로 막혀 있었지만, 한쪽 귀퉁이가 부서져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틈이 나 있었다. 류진은 조용히 몸을 숙여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자신의 심장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손끝에 약한 진기를 모아 희미한 빛을 만들자, 주위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은 과거 문파의 서고였던 모양이었다. 흙먼지가 두껍게 쌓인 책장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수많은 고서들이 바닥에 뒹굴거나 반쯤 타버린 채 방치되어 있었다.

    “서고라니… 쓸모없는 것들뿐이겠군.”

    그는 투덜거렸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빛내며 주변을 살폈다. 책이야 그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 폐허 속에서 어떤 보물이라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작은 희망은 언제나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그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쌓인 파편 더미에 닿았다. 검은색 천에 싸인 무언가가 보였다.

    류진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긴장이 온몸을 옥죄었다. 이런 폐허에서는 예상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는 주위를 경계하며 천에 싸인 물건을 발끝으로 툭 건드렸다.

    *스스슥.*

    천이 스르르 벗겨지자, 그 안에서 드러난 것은 놀랍게도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단지 하나였다.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 재질은 영롱한 옥색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단지의 뚜껑 틈새에서 희미하게 영기의 기운이 새어 나왔다.

    “이건… 영기를 보존하는 단지인가?”

    류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 황폐한 세계에서 영기가 온전하게 보존된 물건을 발견하다니! 그는 조심스럽게 단지를 들어 올렸다. 뚜껑을 열기 위해 힘을 주자, 단단히 밀봉되어 있던 뚜껑이 ‘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순간, 짙은 녹색의 영기가 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영기 속에서 뭔가가 함께 솟구쳐 올랐다.

    *크아아악!*

    그것은 녹색의 작은 그림자였다. 용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몸은 뱀처럼 길고 비늘은 옥색으로 빛났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채 류진의 얼굴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영기 보존 단지 속에 잠들어 있던 정령, 혹은 요수(妖獸)의 새끼였다. 영기가 고갈된 세계에서 이렇게 온전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를 만나다니!

    류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히며 철검을 뽑아 들었다. 녹슨 철검은 영기를 두르자 푸른빛을 희미하게 띠었다.

    “젠장! 이런 곳에 요수가 있을 줄이야!”

    그 작은 요수는 눈을 번뜩이며 다시 류진에게 돌진했다. 몸놀림이 빠르고 민첩했다. 류진은 검을 휘둘러 요수의 공격을 쳐냈다. 요수의 몸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검이 부딪히는 순간 ‘캉!’ 하는 금속음이 울렸다.

    “겨우 이 정도에 무너질 내가 아니다!”

    류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몸속에 남아있던 진기를 끌어올려 검날에 집중시켰다. 철검은 더욱 강렬한 푸른빛을 띠며 날카로운 영기 파동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맹수처럼 변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수많은 요수들과 싸워왔고, 그 모든 싸움에서 승리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하압!”

    류진은 기합과 함께 검을 강하게 휘둘렀다. 요수는 재빨리 피하려 했지만, 류진의 검은 이미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요수의 몸에 검날이 스치자 ‘촤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푸른 비늘이 튀어 올랐다. 요수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요수는 포기하지 않았다. 상처에서 푸른 피가 흐르는데도 불구하고 더욱 맹렬하게 류진에게 달려들었다. 녀석의 입에서 독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독인가!?’

    류진은 급히 숨을 멈추고 몸을 틀어 독기를 피했다. 그는 다시 한번 검을 고쳐 잡았다. 이번에는 정면 승부가 아니었다. 류진은 폐허 지형을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빠르게 움직여 무너진 책장 뒤로 숨었다. 요수는 류진이 사라진 곳을 향해 분노에 찬 포효를 내질렀다.

    “어리석은 짐승 같으니!”

    류진은 책장 뒤에서 튀어나와 요수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요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비틀었다. 류진은 검을 빼내며 요수의 약점을 노렸다. 녀석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이걸로 끝이다!”

    그는 마지막 남은 진기를 모아 검에 불어넣었다. 검은 영롱한 푸른색으로 빛나며 섬광처럼 요수의 머리를 향해 내리찍혔다.

    *콰직!*

    요수는 짧은 비명과 함께 땅에 고꾸라졌다. 푸른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요수를 바라봤다. 승리했지만,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젠장… 이걸로 겨우 한숨 돌렸군.”

    그는 쓰러진 요수에게서 시선을 돌려 영기 단지를 다시 바라봤다. 여전히 희미한 영기가 단지 안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요수가 단지에 잠들어 있던 존재였음을 감안하면, 이 단지는 단순한 영기 보존 단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오히려 요수를 봉인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단지 안을 들여다봤다. 단지 바닥에는 푸른색의 맑은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액체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내는 작은 구슬 하나가 박혀 있었다. 영기의 근원 같기도 하고, 영약 같기도 한 그것은 이 황폐한 세계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귀한 보물처럼 보였다.

    류진은 망설임 없이 단지를 기울였다. 푸른 액체가 그의 입으로 흘러들어왔다.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그의 목을 타고 흘러내리자, 메마른 몸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생기가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단숨에 갈증이 해소되고, 솟아나는 영기가 그의 단전을 채워나갔다. 그의 지친 몸은 순식간에 활력을 되찾는 듯했다.

    “이런 귀한 물건이…!”

    그는 영기 단지 바닥에 박혀있던 푸른 구슬을 꺼냈다. 손안에 쥐자 따뜻하고 강렬한 영기가 느껴졌다. 이것 하나만 있다면, 며칠 밤낮을 수련할 수 있을 터였다.

    류진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폐허 속에서 만난 치명적인 위협과 함께 찾아온 예상치 못한 보물. 이것은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다. 어쩌면 이 황폐한 세상이 그에게 아직 살아갈 이유를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조용히 구슬을 품에 넣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폐허의 깊은 곳을 바라봤다. 저 어둠 속 어딘가에, 이 모든 것을 뒤바꿀 무언가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의 생존기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 오컬트 호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창밖은 비가 아니라, 마치 어둠 자체가 흘러내리는 듯했다. 낡고 해진 커튼 틈새로 겨우 스며드는 가로등 불빛은 습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 맥없이 흩어졌다. 지우는 싸늘한 방 한가운데 놓인 닳은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온몸을 감싼 얇은 가디건은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다.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는 통에, 그 박동 소리가 귓가를 넘어 세상 전체를 울리는 것만 같았다.

    ‘오늘도… 올까.’

    지난번 그의 방문 이후, 밤은 이전보다 훨씬 길어졌다. 그림자는 더욱 깊이를 알 수 없게 변했고, 희미한 속삭임이 이따금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게 다 착각이고 환청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여 보지만, 차가운 공기 속을 떠도는 묘한 비린 향은 언제나 그의 존재를 상기시켰다. 존재해서는 안 될, 지우의 세상에 발을 들여놓은 금기의 존재를.

    시간은 흐르는 듯 멈춘 듯, 찰나와 영겁 사이를 오갔다. 지우는 이제 초조함을 넘어선 체념 같은 감각에 사로잡혔다. 그가 오지 않아도 이상할 것 없고, 그가 나타나도 더는 놀라지 않을 것 같았다. 그저 이 불안한 기다림이 끝나기를 바랄 뿐.

    그때였다.

    방 한쪽 구석, 가장 짙은 어둠이 엉겨 붙은 곳에서 희미한 왜곡이 일었다. 공기가 일렁이고, 정적을 깨고 지직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마치 오래된 필름이 타들어가는 듯한 소리. 지우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왜곡된 그림자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핏기 없는 얼굴, 밤하늘을 닮은 검은 눈동자, 흑요석처럼 날카로운 턱선. 달빛조차 들지 않는 이 방을, 그의 존재만으로 채우는 것 같은 압도적인 아름다움. 하지만 그 아름다움은 동시에 오싹한 이질감을 동반했다. 그의 어깨에 얹힌 낡은 코트는 마치 그림자 그 자체를 엮어 만든 것 같았고, 그의 발걸음은 바닥에 닿는 대신 공기 위를 미끄러지는 듯했다.

    카엘.

    지우의 입술 사이로 그의 이름이 겨우 새어 나왔다.

    “늦었잖아요.”

    지우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속에는 애써 숨긴 원망과 갈망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다가오는 카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카엘의 검은 눈동자가 지우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 시선은 별빛처럼 차갑고,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담고 있었다.

    “길이 평탄치 않았다. 그들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어.”

    카엘의 목소리는 낮고 깊었다. 오래된 비단이 스치는 소리 같기도, 지하 깊은 곳에서 울리는 메아리 같기도 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 안의 공기는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 지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들의 그림자. 카엘의 종족, 혹은 그들을 추적하는 무언가를 의미하는 말이라는 걸 지우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당신과 만나는 게.”

    지우는 고통스럽게 속삭였다. 이제는 숨길 수도 없는 진심이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밤마다 꿈속에 나타나던 기이한 그림자, 그리고 현실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의 모습.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은 지우를 서서히 그의 세계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제, 후회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감정이 되어버렸다.

    카엘은 지우의 앞에 섰다. 그와 지우 사이의 거리는 숨소리마저 공유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서늘한 공기가 지우의 피부를 스쳤다.

    “너의 심장이, 너무 시끄럽게 울린다.”

    그의 손이 조용히 뻗어져 나왔다. 손가락 끝은 창백할 정도로 희고, 손등에는 푸른 핏줄이 얼음조각처럼 도드라져 있었다. 망설임 끝에, 카엘의 손이 지우의 뺨에 닿았다.

    순간, 지우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차가움을 느꼈다. 심장이 쿵, 하고 크게 울리며 멎는 듯했다. 하지만 동시에, 형용할 수 없는 전율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것은 공포이자 황홀경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과는 다른, 완벽한 이질감 속에서 피어나는 강렬한 감정.

    “당신 때문이잖아요.”

    지우는 숨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길이 이마를 타고 내려와 턱선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지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아니면 차라리 사라지기를. 상반된 두 가지 소원이 마음속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끌림은 위험하다. 인간과 그림자는 섞일 수 없어.”

    카엘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숨결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 말은 분명하게 지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알아요… 그래도, 놓을 수 없어요.”

    지우는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카엘의 손은 지우의 손보다 훨씬 크고 차가웠다. 마치 죽은 자의 손을 잡은 듯한 감각. 그러나 지우는 그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오히려 더욱 강하게 쥐었다. 이 금지된 접촉이 자신을 어디로 이끌든,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였다.

    쿵-!

    낡은 아파트 건물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낮고 둔탁한 소리가 지하 어딘가에서부터 울려 퍼졌다. 지우의 몸이 움찔 떨렸다. 창밖의 빗소리가 갑자기 거세진 듯했다. 아니, 빗소리가 아니었다. 비바람 속에 섞여 들어오는,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카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 속 어둠이 더욱 짙어졌다. 그는 천천히 지우에게서 손을 떼어냈다. 그가 손을 떼자마자, 지우는 순간적인 허탈감과 함께 방금 전의 극심한 냉기가 다시 온몸을 감싸는 것을 느꼈다.

    “그들이… 네 냄새를 맡았다.”

    카엘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부드러움을 담고 있지 않았다. 차갑고 단호했다.

    쿵-! 쿵-!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낡은 건물의 벽을 긁어내며 다가오는 듯한 소리였다. 지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발악했다.

    “누가요? 카엘, 누가 오는 거예요?”

    공포에 질린 목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왔다. 지우는 카엘의 소매를 붙잡으려 했지만, 그의 손은 이미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카엘은 이미 그림자 속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더는 안 된다. 이곳에 있어선 위험해.”

    그의 모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밤의 안개 속으로 녹아드는 것처럼, 그의 형체가 점점 흐려졌다.

    “카엘! 가지 마요! 혼자 두지 마요!”

    지우는 소리쳤다. 절망감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가 사라지면, 자신은 이 알 수 없는 공포 속에서 홀로 남겨질 것이다.

    카엘의 모습은 이제 거의 사라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그의 눈동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차가운 별.

    “다음 달 보름밤… 그 전에, 방법을 찾아낼게.”

    그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귓가를 스쳤다. 마치 오래된 예언처럼, 알 수 없는 무게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사라졌다.

    방은 다시 정적에 잠겼다. 하지만 이전의 정적과는 달랐다. 이제는 숨 막히는 침묵. 텅 빈 공간을 가득 채운 차가운 공기 속에서, 지우는 자신이 버려졌다는 고통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쿵-! 쿵-! 쿵-!

    이번에는 훨씬 가까웠다. 바로 아래층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듯한 소리. 이 건물은 오래전에 버려진 채 방치된 곳이었다. 지우는 이곳에 홀로 살고 있었고, 텅 빈 다른 층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릴 리 없었다.

    문득, 지우는 벽에 걸린 낡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거울 속에는 공포에 질린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그 모습 뒤편, 방 한쪽 구석의 어둠 속에…

    무언가가 서 있었다.

    희미하고 일렁이는, 인간의 형상과는 다른 끔찍한 윤곽. 거울 속의 그 그림자는, 지우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붉게 빛나는 두 개의 점이, 마치 불꽃처럼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것을 지우는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카엘이 경고했던 ‘그들의 그림자’였다. 그리고 지금, 그 그림자는 이 방 안까지 들어와 있었다.

    지우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차가운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입술 사이에서는 단 한마디의 비명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거울 속 그림자의 붉은 눈이, 섬뜩하게도, 천천히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방 안에는 이제 지우 혼자만 남아 있었다.
    아니, 정말 혼자였을까?
    지우는 거울 속에서, 방금 전 그림자가 서 있던 곳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난 검은 얼룩을 발견했다.
    점점 더, 번져가는.
    어둠이 집어삼키는 듯한.

  • 스페이스 오페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우주선 ‘아스가르드’의 함교는 희미한 비상등 아래 섬뜩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보통이라면 활기 넘치는 항성간 노선 관제음과 승무원들의 분주한 움직임으로 가득 찼을 공간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정적에 짓눌려 있었다.

    “사건 발생 시각은 대략 0300시, 함내 시간으로 추정됩니다. 사망자는 은하 광물 연합의 수장, 카엘렌 제독입니다.”

    함장 에리나 발렌티나가 굳은 얼굴로 브리핑했다. 그녀의 옆에는 단단한 근육질의 보안국장 자르곤이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모두, 함교 정중앙 홀로그램 스크린에 띄워진 범죄 현장 영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영상 속에는 호화로운 제독의 개인 스위트룸 ‘젠디아’가 보였다. 최고급 비단 카펫 위에 엎어진 카엘렌 제독의 시신. 등에는 길고 날카로운 크리스탈 단검이 박혀 있었다.

    “보안 시스템 기록에 따르면, 제독의 스위트룸은 외부 침입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문은 제독 본인의 생체 인식으로만 잠기도록 설정되어 있었고, 모든 로그에는 외부인 출입 기록이 없습니다. 완벽한 밀실입니다.” 자르곤 국장이 으르렁거렸다.

    그때, 함교의 문이 스르륵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섰다. 덥수룩한 갈색 머리칼은 어느새 손으로 몇 번 쓸어 올린 듯 제멋대로 뻗어 있었고, 구겨진 감청색 점프슈트 차림은 방금 잠에서 깬 듯 흐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의 눈만은 예리하고 날카로운 빛을 띠고 있었다. 은하계 최고의 명탐정, 류진이었다.

    “죄송합니다. 잠시 망원경으로 메시아 성운의 초신성을 관측하던 중이었습니다.” 류진이 하품을 꾹 참으며 말했다.

    에리나 함장은 그에게 짧게 경례하며 브리핑을 요약했다. “류 탐정님, 보시다시피… 밀실 살인입니다. 어떤 외부 침입도 없었습니다. 모든 기록이 그렇습니다.”

    류진은 홀로그램 영상을 잠시 응시했다. 제독의 스위트룸은 함선 내에서도 가장 보안이 삼엄한 곳이었다. 사방이 강화 합금으로 된 벽, 외부 충격과 EMP에 대비한 이중 차폐막, 그리고 무엇보다 완벽하게 봉쇄된 출입 시스템.

    “흠, 밀실이라… 고전적인 퍼즐이군요.” 류진이 턱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좋습니다, 현장으로 안내해주시죠.”

    ***

    ‘젠디아’ 스위트룸 문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류진은 안으로 들어서기 전, 에리나 함장과 자르곤 국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두 분은 절대 안으로 들어오지 마십시오. 제가 들어간 후에는 다시 문을 닫아주십시오. 그리고 제 지시가 있기 전까지 그 어떤 사람도 이 문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십시오.”

    에리나와 자르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함장이 명령에 따라 스위트룸의 문을 닫자, 류진은 홀로 방 안에 남게 되었다. 방 안은 희미한 전등 불빛 아래 고요했다. 공기 중에는 미세한 혈향과 함께 미묘한 철 냄새가 섞여 있었다.

    류진은 천천히 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최고급 젠 행성의 카펫, 벽에 걸린 은하계 거장 화가들의 홀로그램 그림들, 창밖으로 펼쳐진 아득한 별들의 바다. 그리고 방 중앙에 엎드린 카엘렌 제독의 시신.

    그는 제독의 시신에 다가갔다. 등에는 섬광처럼 빛나는 크리스탈 단검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단검의 손잡이는 정교한 은하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류진은 손끝으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이 단검… 카엘렌 제독의 소장품 중 하나였죠?” 류진이 문 너머의 에리나 함장에게 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공식적인 무기는 아니지만, 제독이 개인적으로 수집했던 예술품이자 호신용 무기였습니다.” 에리나의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들려왔다.

    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시신의 옆에는 고급 알데바란 위스키 잔이 놓여 있었고, 잔 속에는 아직 위스키가 절반가량 남아 있었다. 위스키 잔 옆에는 개인 데이터 패드가 켜져 있었다. 마지막 열람 기록은 은하 광물 연합의 비밀 프로젝트 ‘오리온’에 대한 자료였다.

    그는 데이터 패드를 만져보려다 멈칫했다. 대신, 그는 시선으로 방의 모든 것을 스캔하듯 훑었다. 완벽하게 밀봉된 듯 보이는 창문, 환기구, 그리고 닫힌 문.

    “밀실이라면, 외부 침입은 없었다는 뜻이죠. 즉, 범인은 이 방 안에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죽기 전까지 제독과 함께 있었거나, 아니면… 제가 지금 이 방에 있는 것처럼, 어떤 식으로든 이 방에서 나가지 못했겠죠.”

    자르곤 국장이 통신으로 반박했다. “하지만 우리가 들어오기 전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모든 센서와 열 감지기가 방 안의 생명체를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흠, 그렇군요.” 류진은 피식 웃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은 부드러운 빛을 내뿜는 발광 패널로 덮여 있었다. “이 방의 공기… 미묘하게 다릅니다.”

    류진은 점프슈트 주머니에서 작은 기계 하나를 꺼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이 장치는 마치 고대 장식품처럼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장치를 켜고 천천히 방 안을 걸었다. 장치에서 희미한 녹색 빛이 깜빡였다.

    그는 문에 가장 가까운 벽으로 다가갔다. 벽은 매끄러운 은색 합금으로 되어 있었고, 그 위에 홀로그램 그림이 투사되고 있었다. 그는 장치를 벽에 대고 훑었다. 기계는 녹색 빛을 유지하다가, 벽의 특정 지점에 닿자 갑자기 붉은색으로 변하며 ‘삐빅-‘ 하는 경고음을 냈다.

    “이런.” 류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벽에 손을 댔다. 육안으로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손끝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희미한 냄새. 오존 향과 함께, 아주 희박한… ‘금속’의 비린내.

    류진은 장치를 다시 한번 벽에 가져다 댔다. 붉은 빛은 벽의 약 1제곱미터 면적에서만 감지되었다.

    “에리나 함장님, 자르곤 국장님.” 류진이 통신기로 말했다. “이 스위트룸은 원래 비상시를 대비한 탈출 포트가 내부에 통합되어 있지 않습니까?”

    에리나 함장은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독의 비상용이었고, 통상적으로는 외부에서 접근하거나 발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발사 기록도, 포트의 부재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벽 뒤에 바로 그 탈출 포트가 자리 잡고 있겠군요.” 류진이 경고음이 울리는 벽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이 부근에서 감지되는 미세한 중력장 왜곡과 은빛 잔여물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공간 전환’ 흔적입니다.”

    자르곤 국장이 불신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공간 전환?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이 함선 ‘아스가르드’는 최첨단 스텔스 기술이 적용되어 있습니다. 순간적으로 빛과 중력을 왜곡시켜 함선 자체를 시각적으로 은폐하고 센서망에서 사라지게 만드는 기술이죠.” 류진이 설명을 시작했다. “물론, 그것은 함선 전체에 적용되는 대규모 기술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 기술의 소형화된 개인용 모듈이 있다면 어떨까요?”

    류진은 벽에서 손을 떼고 몸을 돌려 시신을 다시 한번 보았다.

    “카엘렌 제독은 극도로 신중하고 편집증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의 스위트룸을 완벽한 밀실로 만드는 것에 집착했을 겁니다. 그렇기에 외부에서는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었죠. 하지만, 제독이 믿었던 사람이 있다면? 혹은 그 사람과 중요한 거래를 하던 중이라면?”

    “범인은 제독을 만났고, 거래가 틀어졌든, 아니면 애초에 살인을 계획했든, 제독을 살해했습니다.” 류진이 단검에 박힌 시신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후, 자신은 밀실 안에 갇히게 되었죠. 하지만 범인은 미리 준비해둔 ‘개인용 공간 전환 모듈’을 사용했습니다.”

    그는 경고음이 울렸던 벽으로 다시 시선을 주었다. “이 벽은 내부 탈출 포트가 감추어진 곳입니다. 그리고 그 포트는 발사되지 않았죠. 왜일까요? 범인은 탈출 포트 자체를 이용한 게 아닙니다. 이 벽을 구성하는 특수 합금 구조를 활용한 겁니다. 소형 공간 전환 모듈은 물질을 ‘통과’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동안 아주 좁은 영역의 공간-시간 자체를 뒤틀어 물질의 저항을 무력화시키는 기술입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나갈 때 가장 이상적인 방식이죠.”

    “그렇다면 범인은 그저 벽을 통과해 나갔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그 벽은 아무런 흔적도 없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요?” 에리나 함장이 경악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확합니다. 극히 짧은 순간, 이 벽의 일부는 그 어떤 방해물도 없는 ‘공간의 틈새’가 되었을 겁니다. 범인은 그 틈을 통해 나갔고, 모듈의 에너지가 고갈되자 틈새는 다시 메워졌죠. 이 기계가 감지한 중력장 왜곡과 은빛 잔여물은, 그 ‘틈새’가 사라지기 직전 남긴 극미량의 흔적입니다.” 류진은 자신의 장치를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범인은 아마 이 함선의 스텔스 기술에 접근할 수 있는 위치에 있거나, 그런 기술을 복제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자일 겁니다. 혹은, 카엘렌 제독의 이중생활과 관련된 인물일 수도 있겠군요.”

    류진은 문을 향해 걸어갔다.

    “이것으로 밀실의 트릭은 풀렸습니다. 이제부터는… 범인이 아직 이 ‘아스가르드’ 안에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수색을 시작하면 되겠군요.”

    그의 말을 끝으로, 류진은 문을 열라는 듯 손짓했다. 함교에서는 에리나 함장의 다급한 지시가 내려졌다.

    “자르곤 국장, 즉시 함선 내 모든 보안 기록과 승객 명단, 승무원 이력서를 재검토하십시오! 특히 스텔스 기술과 관련된 인물들을 최우선으로!”

    문이 열리고, 류진은 방을 나섰다. 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퍼즐의 첫 조각은 맞춰졌다. 이제 남은 건, 흩어진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범인은 분명 이 함선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류진은 그를 찾아낼 생각이었다.

  • 스팀펑크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증기 도시의 유령 기어 (Ghost Gear of the Steam City)

    **장르:** 스팀펑크 호러/미스터리
    **에피소드:** 1화: 삐걱거리는 아파트

    **등장인물:**
    * **하준 (Hajun):** 30대 초반. 정교한 기계와 시계 수리를 직업으로 삼는 인물. 합리적이고 차분하지만, 점차 미스터리에 휩쓸린다.

    **씬 1**

    **장면 설명:**
    아침 햇살이 희뿌연 증기를 뚫고 들어오는, 거대한 시계탑 아파트 단지. 건물들은 황동과 구리, 짙은 흑철로 이루어져 있으며, 복잡한 파이프라인과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외벽을 장식하고 있다. 건물 꼭대기에서는 일정한 간격으로 뭉게뭉게 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그중 한 동의 가장 높은 층, 하준의 아파트 창문으로 아침 빛이 스며든다.

    아파트 내부는 오래된 가구들과 온갖 정교한 기계장치들로 가득하다. 벽난로 대신 거대한 증기 보일러가 방 한쪽을 차지하고 있고, 벽에는 온갖 형태의 톱니바퀴가 노출된 시계들이 걸려 있다. 탁자 위에는 분해된 시계 부품들이 흩어져 있고, 작업등은 작은 증기 엔진으로 빛을 내고 있다. 전체적으로 앤티크하고 따뜻하지만, 어딘가 기계적인 차가움이 공존하는 공간.

    하준은 작업대 앞에 앉아 작은 회중시계를 수리하고 있다. 증기가 옅게 피어오르는 찻잔이 그의 옆에 놓여있다. 그는 돋보기를 쓴 채 집중하고 있다.

    **하준:** (혼잣말) 완벽한 균형이란… 결국 미세한 오차의 합인가.

    **효과음:** 틱, 톡… (시계 초침 소리) / 옅은 증기 기관의 규칙적인 울림.

    **장면 설명:**
    갑자기, 하준이 수리하던 회중시계의 용두(시계 태엽을 감는 부분)가 삐걱거리며 헛돈다. 하준은 미간을 찌푸린다.

    **하준:** …음?

    **효과음:** 삐걱-! (회중시계 용두 헛도는 소리)

    **하준:** (나지막이) 이럴 리가 없는데. 어제 분명 정비했잖아.

    **장면 설명:**
    하준이 손에 든 시계를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순간, 탁자 위에 놓여있던 작은 태엽 동력 나침반의 바늘이 미친 듯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평소에는 북쪽을 정확히 가리키던 바늘이다.

    **하준:** (눈을 크게 뜨고) 뭐야, 이게?

    **효과음:** 쉬이이이익-! (나침반 바늘이 고속으로 도는 소리) / 켁, 켁-! (나침반 내부의 증기가 이상하게 새는 소리)

    **장면 설명:**
    놀란 하준이 나침반을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작업실 한쪽에 놓인 거대한 태엽 동력 축음기에서 갑자기 노이즈와 함께 섬뜩한 오르골 소리가 흘러나온다. 축음기는 전원이 꺼져 있었다.

    **효과음:** 즈으으읍-! (축음기 전원 켜지는 노이즈) / 뚜루루루… (기괴한 오르골 멜로디)

    **하준:** (벌떡 일어나며) 젠장! 누가 장난질이야!

    **장면 설명:**
    하준이 작업실 문 쪽을 돌아보지만 아무도 없다. 오르골 멜로디는 점점 더 음산하고 빨라진다.

    **효과음:** 뚜르르르르르르륵! (오르골 멜로디가 광기에 차게 빨라지는 소리)

    **하준:** (작업실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데.

    **장면 설명:**
    하준이 축음기 전원을 끄기 위해 다가가는 순간, 축음기의 뿔 나팔이 흔들리며 바닥에 놓여있던 작은 태엽 인형 병사를 쓰러뜨린다. 인형 병사는 바닥에 떨어지자마자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인다.

    **효과음:** 콰당! (인형 병사가 떨어지는 소리) / 드드득, 드드득! (인형 병사 태엽 돌아가는 소리)

    **하준:** (뒷걸음질 치며) …이게 무슨…

    **씬 2**

    **장면 설명:**
    시간이 조금 흐른 오후. 하준은 침착하게 작업실의 모든 기계들을 다시 점검했지만,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모든 장치가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벽에 걸린 거대한 증기 압력계를 응시한다.

    **하준:** (나레이션) 미세한 오작동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방금 벌어진 일은… 단순히 기계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장면 설명:**
    거실 중앙에는 거대한 괘종시계가 서 있는데, 단순한 시계가 아니라 복잡한 톱니바퀴와 황동 추, 증기 파이프가 얽혀있는 예술적인 기계 장치다. 평소에는 정교하게 움직이던 그 시계가, 오늘따라 둔탁한 소리를 낸다.

    **효과음:** 쿵… 쿵… 쿵… (괘종시계 추 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둔탁하게 울림)

    **하준:** (눈을 가늘게 뜨고 괘종시계를 바라본다)

    **장면 설명:**
    갑자기, 아파트 전체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한다. 바닥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은 벽을 타고 올라가며, 벽에 박힌 파이프들에서 ‘쉬이이이익-‘ 하는 증기음이 크게 울린다.

    **효과음:** 우우우웅- (아파트 전체가 울리는 낮은 진동음) / 쉬이이이익, 쉬이이익-! (파이프에서 증기 새는 소리가 커진다)

    **하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다) 지진인가? 아니, 이런 진동은…

    **장면 설명:**
    진동과 함께, 거실 벽에 걸려있던 작은 증기 동력 그림 액자가 기울어진다. 액자 안에는 움직이는 톱니바퀴들이 그려진 풍경화가 있다.

    **효과음:** 달그락! (액자 기울어지는 소리)

    **하준:** (액자를 바로잡으러 다가가며) 잠깐, 잠깐만…

    **장면 설명:**
    하준이 액자에 손을 대려는 순간, 액자 안의 그림 속 톱니바퀴들이 갑자기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림은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고, 액자 프레임의 황동 장식들이 마치 액체처럼 녹아내리는 듯 일그러진다.

    **효과음:** 드드드드득! (그림 속 톱니바퀴가 격렬하게 돌아가는 소리) / 찌이이이익- (황동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괴한 마찰음)

    **하준:** (경악하며 뒷걸음질 친다) 말도 안 돼…

    **장면 설명:**
    액자에서 일그러지던 황동이 녹아내린 것처럼 바닥으로 떨어지는데, 뚝뚝 떨어지는 그것은 액체가 아니라, 아직 뜨거운 황동으로 만들어진 듯한 작은 톱니바퀴 조각들이다. 조각들은 바닥에 닿자마자 ‘칙!’ 하는 소리와 함께 증기를 뿜어내며 사라진다.

    **효과음:** 뚝, 뚝! (황동 조각 떨어지는 소리) / 칙! (조각이 사라지며 증기 뿜는 소리)

    **하준:** (온몸에 소름이 돋아난다) 유령…?

    **장면 설명:**
    그때, 거실 중앙의 거대한 괘종시계에서 기괴한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시계의 유리문 안쪽, 복잡한 기계장치들이 제멋대로 움직이며 뒤틀리기 시작한다. 황동 톱니바퀴들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휘어지고, 증기 파이프들은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서로를 감아 조인다. 시계 내부에서 증기가 격렬하게 분출된다.

    **효과음:** 굉음! (시계 내부에서 증기가 격렬하게 분출되는 소리) / 끼이이이익, 드드득, 철컥! (시계 내부 기계장치들이 기괴하게 뒤틀리고 파괴되는 소리)

    **하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괘종시계를 바라본다) 안 돼… 저건…

    **장면 설명:**
    시계 내부의 모든 톱니바퀴와 파이프들이 뒤엉키고 변형되더니, 마침내 시계의 중앙부가 거대한 눈처럼 일그러진 형태를 띤다. 그 안에서 붉은 증기가 뿜어져 나오며, 마치 살아있는 존재가 자신을 응시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효과음:** 후우우우우욱… (시계 내부에서 붉은 증기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 낮은 울림 동반)

    **하준:**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아내며, 온몸을 떨군다) …괴물…

    **장면 설명:**
    시계탑 아파트의 낡은 유리창 너머로, 붉은 증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하준은 공포에 질려 눈을 가늘게 뜨고 그 광경을 바라본다. 거대한 시계는 이제 더 이상 시간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직 붉은 증기를 내뿜는 기괴한 기계 눈만이 하준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다.

    **하준:** (나레이션) 이곳은… 더 이상 내가 알던 아파트가 아니었다. 기계의 논리가 뒤틀리고, 현실의 규칙이 깨어지는 곳.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내 공간을 침범당하고 있었다.

    **효과음:** 쿵! 쿵! 쿵! (기괴한 시계의 심장 박동 같은 둔탁한 소리)

    **엔딩 크레딧**

  • 대체 역사물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아파트 304호의 기묘한 밤

    ### 에피소드 1: 균열

    **[시작]**

    **컷 1**
    **장면:** 늦은 밤, 현대적인 고층 아파트 단지의 전경. 수많은 불빛이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 속에, 유독 304호 한 곳만 밝게 빛나고 있다.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남자의 실루엣.
    **나레이션 (이현우):** _퇴근 후의 평화로운 밤. 익숙한 도시의 소음과 함께, 나만의 안식처. 고작 삼십 평 남짓한 공간이 주는 안도감. 완벽했다. 적어도, 그날 밤까지는._

    **컷 2**
    **장면:** 이현우(30대 초반, 깔끔한 인상의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아 태블릿PC로 드라마를 보고 있다. 테이블 위에는 맥주 캔과 과자 봉지가 놓여 있고, 주변은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다. 여유로운 표정.
    **이현우 (독백):** _요즘 세상에 이 정도 가격에, 이 정도 넓이의 새 아파트라니. 전 주인이 급하게 나간 덕분인가?_
    **효과음:** [드라마 속 웃음소리 – 하하하!]

    **컷 3**
    **장면:** 주방 한쪽, 씽크대 위에 올려진 유리컵이 아주 미세하게, 저절로 왼쪽으로 스르륵 움직이는 모습. 현우는 이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컵 뒤편에 있는 과일 바구니만 살짝 시야에 들어온다.
    **효과음:** [……스으윽] (아주 미세한 움직임 소리)

    **컷 4**
    **장면:** 현우의 시선은 여전히 태블릿에 고정되어 있다. 살짝 찌푸린 미간.
    **이현우 (독백):** _어? 에어컨을 켰나?_
    **효과음:** [으스스한 한기] (느낌표시)

    **컷 5**
    **장면:** 현우가 고개를 들어 주방 쪽을 힐끗 본다. 씽크대 위 유리컵은 이미 멈춰서 움직이지 않는다. 주방 창문은 닫혀 있고, 에어컨도 꺼져 있다.
    **이현우:** “환절기라 그런가? 갑자기 으스스하네.”
    **효과음:** [삑-](에어컨 리모컨 소리. 현우가 에어컨을 켜는 모습)

    **컷 6**
    **장면:** 다시 드라마를 보는 현우. 아까 그 씽크대 위, 유리컵 옆에 놓여있던 작은 스패너(간단한 공구)가 제자리에서 미세하게 덜컹이는 모습. 이번에는 확연히 보인다.
    **효과음:** [덜컹!] (작지만 확실한 소리)

    **컷 7**
    **장면:** 현우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린다. 스패너가 놓여있던 곳을 멍하니 바라보는 시선. 스패너는 다시 멈춰 있다.
    **이현우:** “방금… 뭐지?”
    **이현우 (독백):** _착각인가? 아니, 분명히 봤는데._

    **컷 8**
    **장면:** 현우가 소파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다가간다. 씽크대 위에 멈춰있는 스패너를 조심스럽게 살핀다.
    **이현우:** “지진인가? 아니, 건물 흔들림은 없었는데.”
    **이현우 (독백):** _설마… 이 낡은 아파트의 터가 안 좋은 건가? 그런 미신 같은 걸 믿을 나이는 아니지만._

    **컷 9**
    **장면:** 스패너를 다시 제자리에 놓는 현우. 그의 손길이 닿자 스패너가 차갑게 느껴진다.
    **효과음:** [차가움]

    **컷 10**
    **장면:** 현우가 찜찜한 기분으로 거실로 돌아와 다시 소파에 앉으려 한다. 그런데… 등 뒤의 거실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미세하게 기울어져 있는 것이 보인다. 아까는 분명 똑바로 걸려 있었다.
    **이현우 (독백):** _이건 또 뭐야?_

    **컷 11**
    **장면:** 현우가 액자를 똑바로 고쳐 건다. 튼튼하게 박힌 못에 걸려있는데도 왜 기울어졌는지 의아한 표정.
    **이현우:** “이게 왜 이래?”

    **컷 12**
    **장면:** 다시 드라마에 집중하려 애쓰는 현우의 얼굴. 하지만 그의 눈은 불안하게 주위를 맴돈다. 밤의 정적이 더욱 크게 느껴진다.
    **이현우 (독백):** _괜히 기분 탓인가. 신경 쓰지 말자._

    **컷 13**
    **장면:** 한밤중. 현우가 잠이 들었다. 침실은 어둠에 잠겨 있고, 달빛이 희미하게 창문을 통해 들어온다.
    **효과음:** [새근새근] (잠든 현우의 숨소리)

    **컷 14**
    **장면:** 갑자기, 거실 쪽에서 ‘쿵!’ 하는 큰 소리가 들린다. 현우가 잠결에 몸을 움찔한다.
    **효과음:** [쿵!]

    **컷 15**
    **장면:** 현우가 벌떡 일어난다. 잠이 확 깬 얼굴.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
    **이현우:** “무슨 소리야?!”

    **컷 16**
    **장면:** 침대에서 내려와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여는 현우. 어둠이 짙게 깔린 거실이 보인다.
    **효과음:** [끼이익…] (문 열리는 소리)

    **컷 17**
    **장면:** 거실 중앙에 놓여있던 작은 협탁이 넘어져 있고, 그 위에 있던 화분과 책 몇 권이 바닥에 흩어져 있다. 현우의 눈이 크게 뜨인다.
    **이현우:** “뭐… 뭐지? 도둑인가?!”
    **이현우 (독백):** _아니, 문단속은 분명히 했는데. 그리고 이 아파트가 도둑이 들 만한 층도 아닌데…_

    **컷 18**
    **장면:** 현우가 거실로 조심스럽게 들어선다. 공기 중에 싸늘한 기운이 감돈다.
    **효과음:** [으스스]

    **컷 19**
    **장면:** 쓰러진 협탁과 흩어진 물건들을 바라보는 현우의 표정은 공포와 혼란으로 가득하다. 그때, 주방 쪽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린다.
    **효과음:** [딸그랑!] (유리컵 깨지는 소리)

    **컷 20**
    **장면:** 현우가 화들짝 놀라 주방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씽크대 위에 있던 유리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 있다.
    **이현우:** “이런…!”

    **컷 21**
    **장면:** 현우가 공포에 질린 채 뒷걸음질 친다. 그때, 닫혀있던 현관문이 ‘덜컥!’ 하고 크게 흔들린다. 마치 누군가 밖에서 격렬하게 문을 잡고 흔드는 것처럼.
    **효과음:** [덜컥! 덜컥! 덜컥!] (격렬한 현관문 흔들림)

    **컷 22**
    **장면:** 현우의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뛴다. 현관문 쪽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이미 이성을 잃기 직전이다.
    **이현우:** “누… 누구세요…?” (목소리가 떨린다)

    **컷 23**
    **장면:** 현관문 흔들림이 뚝 그친다. 잠시 정적. 그리고 현관문 위, 벽에 걸려있던 조그마한 액자(가족사진)가 갑자기 ‘휙!’ 하고 현우의 정면으로 날아와 벽에 ‘쾅!’ 하고 부딪힌다. 유리 파편이 튀고, 액자는 바닥으로 떨어진다.
    **효과음:** [휙!] [쾅!] [쨍그랑!]

    **컷 24**
    **장면:** 현우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주저앉는다.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고, 눈동자는 흔들린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부서진 액자와 그 뒤의 벽을 향한다.
    **효과음:** [끄아악!]

    **컷 25 (클로즈업)**
    **장면:** 액자가 부딪혔던 벽면에, 얇게 발린 페인트가 벗겨지며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낡고 희미한 그림이 드러난다. 그것은 어딘가 기이하고 불길한 문양으로, 이질적인 검은색 선이 얼기설기 얽혀 있다. 흡사, 고대 주술 문양 같기도 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림 같기도 하다. 벽의 다른 부분과는 확연히 다른, 마치 벽 안에 갇혀있던 그림자처럼.
    **나레이션 (이현우):** _나는 그제야 알았다. 이 집이, 나를 ‘본다’는 것을. 그리고 이 벽 뒤에는,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될, 무언가가 ‘갇혀’ 있다는 것을._

    **컷 26 (최종 클로즈업 & 엔딩 컷)**
    **장면:** 그림이 드러난 벽면이 천천히, 아주 미세하게 움푹 들어가더니, 그 검은 문양의 한가운데에서 붉은 피 같은 액체가 한 방울, 주르륵 흘러내린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상처가 다시 터진 것만 같다. 그 액체는 벽을 타고 흐르며, 바닥에 떨어진 액자 파편들과 부서진 유리 조각들 위로 검붉은 얼룩을 남긴다.
    **효과음:** [뚝…뚝…뚝…] (피 떨어지는 소리)
    **나레이션 (이현우):** _아니,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막, ‘깨어나는’ 중이었다._

    **[에피소드 1 끝]**

  • 마법소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세르니온 마법 학원, 고색창연한 대리석 복도에 별빛이 부서지듯 쏟아져 내렸다. 밤이 깊어지자 도서관 열람실은 한산해졌지만, 한쪽 구석에선 여전히 두 그림자가 웅크리고 있었다.

    “유나, 그만 좀 해. 벌써 자정이야. 내일 실기 시험 망칠 일 있어?”

    서하의 차분한 목소리에는 인내심의 한계가 묻어 있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은발은 언제나처럼 흐트러짐이 없었고, 뾰족한 눈꼬리는 유나가 펼쳐 놓은 고문서 더미를 향해 날카롭게 쏘아졌다.

    “쉿, 서하. 드디어 찾았어!”

    유나는 눈을 반짝이며 낡고 바랜 양피지 조각을 내밀었다. 평소라면 교칙 위반에 엄격한 서하였지만, 유나의 저런 광기 어린 열정 앞에서는 종종 무력해지곤 했다. 유나의 붉은 머리칼은 열람실의 희미한 마법 등불 아래서 불꽃처럼 흔들렸다.

    “이게 뭔데?”

    서하가 미간을 찌푸리며 양피지를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마법 문자들이 알아보기 힘들게 새겨져 있었고, 중앙에는 학원 본관 지하를 표시하는 듯한 조악한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가장 깊은 곳, 보통은 접근할 수 없는 ‘별의 심연’이라고 불리는 구역에 붉은색 잉크로 커다란 X자가 쳐져 있었다.

    “‘별의 심연’에 대한 기록이야. 학원에서는 단순한 고대 유물 보관소라고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아.” 유나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100년 전, 학원 역대 최연소 수석 졸업생이었던 ‘엘레나 드 루시엔’ 선배의 일지 파편이야. 그녀는 졸업 직전, 학원 지하에 숨겨진 ‘끔찍한 진실’을 발견하고 사라졌다고 해.”

    “그건 단순한 소문일 뿐이야, 유나.” 서하가 차갑게 잘라 말했다. “교수님들은 늘 말씀하셨잖아. ‘별의 심연’은 고대 마법 연구의 잔해로 가득한 위험한 구역이며, 함부로 접근하는 것은 금기라고. 거기서 발견된 유물들은 너무 강력해서 외부로 노출되는 것조차 위험하대.”

    “위험해서?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왜 굳이 ‘별의 심연’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인 걸까? 단순한 유물 창고라면 ‘지하 보관고’면 충분하잖아.” 유나는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로 서하를 똑바로 응시했다. “엘레나 선배는 기록했어. ‘그곳에선 별이 울고 있다’고. 대체 뭐가 울고 있다는 거야? 유물이?”

    서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유나의 지나친 호기심은 종종 서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직감은 항상 놀랍도록 정확했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거야?”

    “오늘 밤, 확인하러 가는 거야.” 유나는 결심에 찬 눈으로 말했다.

    “미쳤어? 유나! 들키면 바로 퇴학이야! 우리의 마법사가 되려는 꿈은 어떻게 하고?” 서하가 낮은 목소리로 격분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진실을 알아야 해, 서하. 이 학원은… 뭔가 숨기고 있어.” 유나가 서하의 손을 덥석 잡았다. “너도 궁금하지 않아? 명문 세르니온 학원의 지하에 묻힌 금기가 뭔지?”

    결국, 서하는 유나의 끈질긴 설득과 반짝이는 눈빛에 굴복하고 말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새벽 2시, 본관 지하 통로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마법사들이 수련에 쓰는 ‘별빛 회랑’을 지나, 학생들은 접근이 금지된 낡은 강철 문 앞에 섰다. 문은 두꺼운 마법 자물쇠로 잠겨 있었고, 주변 공기는 이상하리만치 무거웠다.

    “이건… 그냥 마법 자물쇠가 아니야. 이건… 봉인 마법이 걸려 있어.” 서하가 문에 손을 대자 푸른빛의 마나 파장이 퍼져 나갔다. 그녀의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강력한 결계야. 단순히 침입을 막는 걸 넘어, 뭔가… 안에 있는 것을 가두고 있어.”

    “봉인 마법이라니… 엘레나 선배의 기록대로잖아.” 유나는 주머니에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안에는 보랏빛 액체가 일렁이고 있었다. “이건 마법 감응력을 일시적으로 증폭시켜주는 약이야. 교수님 서재에서 몰래 가져왔어.”

    서하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유나! 남의 물건에 손대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

    “잔소리는 나중에. 일단 이것부터 해결하자.”

    유나는 약을 한 모금 마신 후, 이마에 손을 얹고 집중했다. 붉은 마나의 기운이 그녀의 몸을 감쌌고, 눈빛이 더욱 깊어졌다. 그녀는 손을 들어 강철 문에 대고 섬세한 마법 진동을 보냈다. 봉인 마법의 미세한 틈새를 찾아 파고드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서하는 옆에서 그녀의 마나 흐름을 보조하며 불안하게 주위를 살폈다.

    *쉬이이익…*

    고요하던 복도에 마나의 흐름이 깨지는 소리가 울렸다. 강철 문에 새겨진 봉인 문양이 섬광처럼 번쩍이더니, 이내 연기처럼 스러져갔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 안쪽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코끝에 희미하게 쇠 냄새와… 곰팡내, 그리고 뭔가 알 수 없는 끈적한 단내가 섞여 풍겼다.

    “이런… 대체 얼마나 오래 닫혀 있었던 거야?” 서하가 코를 막았다.

    유나는 마법 등불을 공중에 띄워 올렸다. 등불이 뿜어내는 푸른빛이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를 비췄다. 벽은 오랜 시간 물에 젖어 얼룩덜룩했고, 천장에서는 간간히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길고 긴 계단을 내려가자, 통로는 더욱 넓고 거대한 공간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지하 공간의 중앙에는 투명한 유리벽으로 된 원통형 구조물이 서 있었다. 유리벽 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너머에서 희미하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빛은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주기적으로 강해졌다 약해지기를 반복했다.

    “이게… 별의 심연인가?” 서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쿵. 쿵. 쿵.
    아주 낮은 곳에서 울리는 듯한, 거대하고 둔중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심장을 뛰는 소리 같기도, 혹은… 거대한 무언가가 벽에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했다. 소리는 유리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이게 뭐야…?” 유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들이 유리벽에 더 가까이 다가가자, 진동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둔중한 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무언가 흐느끼는 듯한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인간의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아니면… 무언가 고통받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한.

    유나는 손을 뻗어 차가운 유리벽에 댔다. 그녀의 손바닥에 닿는 유리벽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순간, 유리벽 안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무언가가 더욱 강렬하게 빛을 발했다. 빛은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인 오묘한 색을 띠고 있었고, 마치 수많은 별들이 한데 뭉쳐 있는 듯한 환상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빛은 기이하게도, 심연의 어둠 속에서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 빛 너머로, 끔찍한 형체가 흐릿하게 드러났다.

    형체는 거대했다. 수많은 촉수들이 뒤엉켜 있는 듯했고, 그 촉수들 사이에서… 희미하게 인간의 얼굴 같은 것이 여러 개 박혀 있는 듯 보였다. 형체는 빛 속에서 고통스럽게 뒤틀리고 있었고, 그 움직임에 맞춰 쿵. 쿵. 쿵. 하는 진동이 격렬해졌다.

    “이게… 대체… 뭐야…?” 서하가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별이 울고 있다는 게… 저걸 말한 거였어?”

    유나의 눈은 고통스럽게 빛나는 형체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아니, 고통받는 무언가였다. 그것은 마법 에너지의 거대한 근원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그 에너지는 비명과 절규로 이루어진 듯했다.

    *쉬이이익!*

    갑자기 유리벽 중앙에서 엄청난 마법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지하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굉음이 울렸다.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봉인 마법이 일시적으로 약해지거나, 아니면 안에 갇힌 무언가가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 같았다.

    “젠장! 들킬 거야! 경보가 울릴 거야!” 서하가 다급하게 유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나 유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유리벽 속에서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는 형체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다. 저것은 이 학원의…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의 근간을 이루는 마법 에너지의 원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원천은 끔찍하게도, 희생과 고통 위에서 유지되고 있는 듯했다.

    그때, 유리벽 안의 형체가 유나를 향해… 아니, 허공을 향해 마치 도움을 청하는 듯한, 절규 어린 눈빛을 보냈다. 그 눈빛은 수많은 별들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듯한 아픔을 담고 있었다.

    유나의 뇌리에 엘레나 선배의 마지막 기록이 스쳐 지나갔다.
    *‘이 별의 요람은… 피로 자라는 꽃과 같다. 그 아름다움 아래, 끔찍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그것은 별이 아니었다. 별의 심연에 갇힌 것은… 별을 꿈꾸는 존재들의 고통스러운 잔해였다.
    유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 학원이, 그토록 찬란하게 빛나는 마법의 힘을 어디서 얻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진실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잔혹했다.

    바로 그때, 멀리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순찰 마법사들이었다.
    “젠장! 유나, 도망쳐야 해!”

    서하가 다시 한번 유나를 잡아끌었고, 이번에는 유나도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미친 듯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들은 탈출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본 ‘끔찍한 금기’는, 과연 어떤 파장을 불러올 것인가? 유나의 심장은 격렬하게 울렸다. 학원의 빛나는 명성 아래, 어둠 속에 감춰진 절규가… 이제 막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