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스팀펑크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톱니바퀴의 심장 – 1화. 검은 연기의 잔해

    **[장면 1: 어둠 속 작업실]**

    **#배경:**
    낡고 기름때 낀 작업실. 천장에 매달린 램프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와, 복잡하게 얽힌 파이프와 톱니바퀴, 알 수 없는 기계 부품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다. 스팀 엔진의 규칙적인 ‘쉬이익- 펌프- 쉬이익- 펌프-‘ 소리가 배경음처럼 깔려, 이 공간의 시간이 멈춘 듯한 착각을 준다. 작업대 위에는 설계도면과 렌치, 납땜 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한쪽 벽에는 정교하게 조립된 각종 증기압 총기와 날카로운 칼날들이 걸려 있다. 공기 중에는 쇠 냄새, 기름 냄새, 그리고 은은한 증기 냄새가 뒤섞여 있다.

    **#인물:**
    건우. 뺨에 가로지르는 깊은 흉터가 그의 과거를 말해주는 듯하다. 피로와 분노로 깊어진 눈빛은 마치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른다. 기름때 묻은 낡은 가죽 작업복을 입고, 역시 낡았지만 섬세한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작은 태엽 장치를 조립하고 있다. 그의 손놀림은 거칠지만 놀랍도록 정확하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지만, 흔들림 없는 그의 표정은 오직 눈앞의 작업에만 집중되어 있다. 작업대 한구석에는 이제는 빛바랜 한 장의 낡은 사진이 놓여 있다. 사진 속에는 앳된 건우와 또 다른 젊은 남자, 태준이 해맑게 웃고 있다.

    **건우 (독백, 낮게 읊조리듯):**
    “…웃고 있군. 그때는… 몰랐지. 그 미소 뒤에, 썩어 문드러진 톱니바퀴가 숨어있었을 줄은.”

    **[장면 2: 회상 – 과거의 영광과 몰락]**

    **#배경:**
    (*과거 회상으로 전환*)
    활기 넘치는 연구소. 거대한 증기 기관이 굉음을 내며 돌아가고, 크고 작은 자동 장치들이 복잡한 움직임을 보인다.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고, 공기 중에는 희망적인 열기가 가득하다.

    **#인물:**
    젊은 시절의 건우와 태준. 둘 모두의 얼굴에는 빛나는 열정과 순수한 꿈이 서려 있다.

    **태준 (과거, 열정적으로 설계도를 펼치며):**
    건우! 우리가 만든 이 도시가, 이 ‘천공의 심장’ 계획이 언젠가 모든 이에게 희망을 가져다줄 거야!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건우 (과거, 환한 미소로):**
    그래, 태준. 우리의 기술로… 모두가 안전하고 풍요로운 세상을 만들자. 우리, 약속했잖아.

    **#배경:**
    (*갑작스러운 변화. 조명 어두워지고 붉은 경보등이 번뜩인다. 폭발음, 비명 소리, 혼란스러운 연구소 안. 증기가 격렬하게 뿜어져 나온다.*)

    **태준 (과거, 건우를 밀치며 설계도를 움켜쥔 채 달아나는 모습. 비웃는 듯한 표정):**
    미안하다, 친구. 네 천재성은… 내 발판이 되어야 했어. 너 혼자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게 둘 수는 없지.

    **건우 (과거, 불길 속에서 배신당한 표정으로 쓰러지며. 태준의 뒷모습을 잡으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태준!

    **[장면 3: 현재 – 준비된 복수의 서막]**

    **#배경:**
    (*다시 현재의 어둠 속 작업실*)
    건우의 손에서 작은 태엽 장치가 ‘딸깍’ 소리를 내며 완성된다. 그것은 손목에 장착하는 보조 장치인 듯, 정교한 금속 밴드와 작은 증기 밸브로 이루어져 있다.

    **건우 (장치를 왼손 손목에 장착하며, 작은 증기가 ‘칙-‘ 하고 새어 나온다):**
    그 ‘희망’이라는 가면 뒤에 숨겨진 탐욕은… 이제 내가 찢어발겨주마.

    **#묘사:**
    그때, 작업실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고, 덩치 큰 할배가 기름 냄새를 풍기며 들어선다. 그의 얼굴에는 오랜 세월의 주름과 고집스러움이 묻어 있다.

    **할배 (걱정스러운 듯, 낮게 깔린 목소리):**
    건우, 이 밤늦게까지 또 그 장난감이랑 씨름하고 있나? 그 녀석 숨통을 끊어놓기 전까지는 잠도 안 잘 셈이야?

    **건우 (냉정한 눈빛으로 할배를 바라본다):**
    할배. 내게 남은 건 이것뿐이야. 그리고… 태준이 그 빌어먹을 ‘천공의 도시’를 완성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더군요.

    **할배 (한숨을 쉰다):**
    그래, 벌써 보름째 그 거대한 비행 요새가 하늘을 가리고 있지. 사람들은 그걸 ‘희망의 상징’이라고 부르더군. 저주받은 땅에서 유일하게 날아오른 낙원이라면서.

    **건우 (비웃듯 입꼬리를 올린다):**
    희망? 그건 거대한 탐욕의 덩어리일 뿐이야. 내가 아는 태준이라면, 분명… 가장 안전한 곳에, 가장 중요한 ‘심장’을 숨겨뒀을 거다.

    **[장면 4: 정보와 계획]**

    **#배경:**
    작업대 위로 고대 도시의 상세한 설계도와 ‘천공의 도시’의 정교한 모형이 펼쳐진다. 모형 위로는 여러 개의 붉은 점들이 표시되어 있다.

    **건우 (모형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외부 방어선은 빈틈이 없고, 내부 구조는 미로 같아. 하지만… 모든 기계에는 취약점이 있어. 특히 ‘스팀 코어’는. 과부하가 걸리면, 도시 전체를 멈출 수도 있지.

    **할배 (설계도를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그 코어에 접근하려면, 최소한 상층부 보안을 뚫어야 할 텐데… 자네 혼자서는 무리일세. 게다가 태준 그 녀석, 자네가 살아있다는 걸 알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건우 (냉혹하게 미소 짓는다):**
    그럼 더 쉬워지는 일이죠. 제가 살아있다는 걸 알려주면, 제게 집중할 테니까. (그의 손목 장치에서 푸른색 스팀이 ‘쉬이익-‘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온다.) 이젠 달라요, 할배. 과거의 건우는 이미 그때 죽었어. 지금은… 복수만을 위해 살아가는 기계 부품 같은 존재지.

    **#묘사:**
    건우는 작업대 구석에 놓인 낡은 가죽 망토와 증기 방지 고글을 집어든다. 그의 눈빛은 맹렬하게 타오르는 붉은 불꽃처럼 번뜩인다.

    **[장면 5: 출격 준비]**

    **#배경:**
    작업실의 육중한 철문이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고, 밖은 자욱한 안개와 어둠에 잠겨 있다. 멀리서 도시의 희미한 불빛이 반짝이지만, 이곳과는 동떨어진 세상 같다.

    **건우 (망토를 두르고 고글을 착용하며):**
    복수의 시간이다, 태준. 네가 빼앗아 간 모든 것을… 톱니바퀴 하나하나까지 모조리 되돌려 받을 테니.

    **할배 (걱정스러운 얼굴로, 작게 중얼거린다):**
    조심하게, 건우… 살아 돌아와야 해.

    **건우 (뒤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살아 돌아오지 못해도 상관없어. 다만… 그 녀석의 파멸을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지.

    **#묘사:**
    건우의 등 뒤에서 손목 장치의 스팀 엔진이 ‘칙- 푸쉬슉!’ 하고 힘차게 증기를 뿜어낸다. 푸른 빛이 어둠 속에서 번쩍이며 사라진다. 그의 그림자가 자욱한 안개 속으로 녹아든다.

    **[에피소드 끝.]**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잿빛 하늘 아래, 도시는 거대한 뼈대처럼 앙상하게 서 있었다. 녹슨 철골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태양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반짝였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귀신 들린 듯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한은 낡은 방수포로 얼기설기 가려진 버스 안에서 눈을 떴다. 새벽의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젠장, 또 아침이냐.”

    그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팔뚝에는 며칠 전 잔해 더미를 뒤지다 긁힌 상처가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제대로 된 소독약이 없어 흙먼지가 그대로 박혀버렸다.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한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 폐허에서 열병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낡은 배낭을 챙겨 메고 버스 문을 열었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쇠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발밑에는 깨진 보도블록과 이름 모를 풀들이 뒤엉켜 있었다. 멀리, 과거에는 마천루였을 건물들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였다. 저 건물 어딘가에, 사람의 온기는커녕 살아있는 것조차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펼쳐져 있을 터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시야가 확장되자, 부서진 자동차들이 도로 위를 거대한 고철 덩어리처럼 점거하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그중 하나를 지나칠 때였다. 지한의 귀에 미세한 소음이 포착됐다. 바닥을 긁는 듯한 낮은 마찰음, 그리고 희미한 숨소리. 등골이 오싹했다. 이 세계에서는 소리 하나하나가 생존과 직결된 정보였다.

    그는 즉시 자세를 낮추고 주변을 살폈다. 텅 빈 건물들, 부서진 창문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했다. 저벅, 저벅. 불규칙한 발소리였다. 그것은 지한이 흔히 마주치던 그림자들의 소리와는 달랐다. 그림자들은 발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것들은 기척도 없이 다가와 존재 자체를 갉아먹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이 소리는… 인간의 것이었다.

    “누구야?”

    지한은 작은 돌멩이를 주워 근처 폐차를 향해 던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돌멩이가 차체를 때렸다. 침묵. 지한은 숨을 죽였다. 이내, 발소리는 더욱 빨라지더니 어느 건물 뒤로 사라졌다. 지한은 일단 위험이 없음을 확인하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항생제라도 구해야 했다. 그의 유일한 희망은 저 멀리 보이는 대형 쇼핑몰 건물이었다. 과거, 그곳에는 약국이 있었다.

    쇼핑몰 입구는 거대한 잔해 더미로 막혀 있었다. 지한은 낡은 철문을 겨우 밀어내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내부는 암흑이었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자, 웅장했던 홀의 모습이 드러났다. 찢어진 고급 의류들이 바닥에 뒹굴고, 명품 매장은 유리창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진열된 마네킹들은 팔다리가 부러진 채 기괴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먼지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런 쓰레기 더미에서 뭘 찾으라고.”

    지한은 낮게 중얼거렸다. 플래시가 비추는 곳마다 폐허가 된 상점들의 흔적이 보였다. 약국은 3층에 있었다. 그는 삐걱거리는 에스컬레이터를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이었다.

    3층에 도착하자, 약국이라고 쓰인 희미한 간판이 보였다. 문은 부서져 있었고, 내부 역시 난장판이었다. 약병들이 바닥에 나뒹굴고, 선반은 텅 비어 있었다. 절망감이 밀려왔다. 이곳마저 털린 것인가. 지한은 무너져 내리는 마음으로 약국 안을 샅샅이 뒤졌다. 서랍 하나, 상자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그때였다.
    지한의 등골에 섬뜩한 한기가 스며들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공기 중의 습도가 갑자기 낮아진 듯 건조하고 차가운 기운이 피부를 훑었다. 그림자였다. 그것은 형체가 없지만, 존재감은 그 어떤 생물보다 강렬했다.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압도적인 어둠.

    지한은 플래시를 들고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약장 뒤쪽의 공간에서 희미하게, 마치 아지랑이처럼 공간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그림자의 징후였다. 그것들은 빛을 싫어했다. 하지만 완전히 죽일 수는 없었다. 그저 잠시 밀어낼 뿐이었다.

    “빌어먹을.”

    지한은 욕설을 내뱉었다. 지금 도망치면 약을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저 그림자와 맞서 싸우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림자들은 생명체의 ‘의지’를 먹고 자랐다. 공포가 클수록 그것은 강해졌다. 지한은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심장이 발악하듯 뛰었지만, 그는 애써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약장 가장 아래 칸, 거의 바닥에 붙어 있다시피 한 곳에 작은 플라스틱 상자 하나가 처박혀 있었다. 다른 약병들과 달리 깨끗한 상태였다. 지한은 재빨리 상자를 잡아챘다. 안에 든 것은 비닐 랩으로 꼼꼼히 싸인 항생제 두 알과 소독용 알코올 솜 몇 개였다. 기적이었다.

    그가 약을 챙기는 순간, 뒤편에서 일렁이던 그림자가 더욱 선명해졌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아지랑이가 꿈틀거리는 듯했다. 차가운 한기가 지한의 목덜미를 휘감았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고동쳤다.

    “큭!”

    지한은 반사적으로 플래시를 그림자를 향해 비췄다. 그림자는 잠시 움찔하는 듯했지만, 곧 다시 기세를 올렸다. 그것은 그가 약을 발견했을 때의 안도감, 그리고 지금의 공포를 양분 삼아 커지는 듯했다.

    도망쳐야 했다. 지한은 약을 품에 안고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지한의 뒤를 그림자처럼 쫓았다. 그것은 물리적인 속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심리적으로 그를 압박해왔다. 지한의 머릿속에 온갖 절망적인 생각들이 비집고 들어왔다. ‘어차피 죽을 거야’,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림자가 내뿜는 냉기가 지한의 발목을 잡는 듯했다. 그는 계단을 두 칸씩 건너뛰며 필사적으로 내려갔다. 찢어진 신발 밑창이 미끄러웠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1층 홀에 다다랐을 때, 저 멀리 부서진 입구에서 희미한 바깥 빛이 새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솟아올랐다.

    그림자는 지한의 뒤통수에 바짝 붙어 있었다. 이제 그 형태가 더욱 선명해졌다. 거대한 검은 아지랑이가 그의 시야를 집어삼키려 들었다. 지한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구로 몸을 던졌다.

    쾅!

    그는 잔해 더미를 넘어 바깥으로 굴러떨어졌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나동그라졌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봤다. 쇼핑몰 입구는 다시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림자는 햇빛을 싫어했다. 그 안에서 아른거리던 검은 그림자는 천천히, 그리고 서서히 다시 어둠 속으로 스러져갔다.

    지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지탱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그는 품 안의 약을 확인했다. 다행히 무사했다. 주저앉아 겨우 숨을 고른 그는 상처 부위에 알코올 솜을 문지르고 항생제를 삼켰다. 쓰디쓴 약맛이 입안에 퍼졌다.

    서서히 해가 기울고 있었다. 잿빛 하늘은 더욱 짙은 회색으로 변해갔다. 지한은 멀리 보이는 노을을 바라봤다. 어쩌면 오늘 하루도… 겨우. 살아남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지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동시에 꺼지지 않는 불꽃 같은 생존의 의지가 번뜩였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오늘 하루도 겨우 살아남은 한 인간의 무의미하고도 숭고한 투쟁은 그렇게 계속될 터였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독립적인 단편 소설

    서울의 한적한 주택가, 낡았지만 아늑한 6층짜리 아파트. 그 중 404호에 사는 지민은 프리랜서 웹툰 어시스턴트였다. 그녀의 세상은 작업실이자 침실인 방 안에서 대부분 이루어졌다. 디지털 태블릿의 익숙한 빛, 따뜻한 커피 한 잔, 그리고 배경처럼 흐르는 재즈 음악. 그것이 그녀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지민은 평소처럼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부엌으로 향해 물을 끓이고 좋아하는 머그컵을 찾았다. 하지만 평소 컵걸이에 걸려 있던 그녀의 초록색 머그컵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싱크대 구석, 늘 쓰지 않던 잼 병 뒤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음? 내가 어제 저기 뒀나?”

    지민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피곤해서 착각했겠지. 커피를 마시고 작업을 시작했다.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책상 위 연필꽂이에서 가장 아끼는 샤프펜슬이 스르륵 미끄러져 떨어졌다. 톡, 하고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아, 깜짝이야!”

    몸을 숙여 샤프를 주웠다. 다시 연필꽂이에 꽂으려는데, 그 순간 볼펜 하나가 틱, 하고 튀어 올랐다. 마치 누군가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지민은 팔에 돋은 소름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봤다. 닫힌 창문, 고요한 방. 아무도 없었다. 잠시 눈을 가늘게 뜨고 연필꽂이를 노려보다가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며칠 밤샘 작업으로 예민해진 탓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로 이상한 일들은 잦아들었다.

    어느 날은 분명히 냉장고에 넣어둔 우유가 식탁 위에 나와 있었다. 다른 날은 욕실 문이 저절로 덜컥, 덜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 한밤중에는 주방에서 냄비 뚜껑이 ‘땡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가 하면, 거실 스탠드 조명이 혼자 깜빡이곤 했다.

    처음에는 이사한 지 얼마 안 된 아파트의 ‘특이성’으로 치부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가 보다, 현관문 잠금장치가 헐거워졌나 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특히 가장 신경 쓰이는 건 그녀의 그림 도구들이었다. 지민은 태블릿 옆에 늘 여러 종류의 펜과 스케치북을 놓아두었는데, 밤사이 펜들이 제멋대로 다른 색깔별로 분류되어 있거나, 스케치북 위에 정체불명의 낙서가 그려져 있곤 했다. 낙서라기보다는… 아주 서툰, 아이의 그림 같은 것이었다. 한 번은 그녀가 그리는 웹툰 캐릭터의 얼굴에 작은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누, 누구세요…?”

    어느 날 밤, 지민은 결국 참지 못하고 어둠이 내려앉은 거실을 향해 중얼거렸다. 스탠드 조명은 꺼져 있었지만, 부엌 쪽에서 희미하게 빛이 깜빡이는 것 같았다. 마치 그녀의 말에 반응하는 것처럼.

    그녀는 공포보다는 기묘한 궁금증에 사로잡혔다. 폴터가이스트 현상인가?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접시가 날아다니거나 물건이 깨지지는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조금, 아주 조금씩 제자리를 벗어나거나, 조금 더 정돈되거나, 아니면 알 수 없는 장난의 흔적을 남길 뿐이었다.

    결국 지민은 거실 한가운데 의자를 가져다 놓고 밤새도록 기다려보기로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 녹화 버튼도 눌러두었다. 자정, 새벽 한 시, 두 시… 졸음과 싸우며 눈을 부릅뜨고 있을 때였다.

    주방 쪽에서 아주 희미한 ‘딸깍’ 소리가 들렸다. 지민은 숨을 죽였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은 냉장고 문이었다. 냉장고 문이 아주 천천히, 마치 누군가 손잡이를 잡고 여는 것처럼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반쯤 남은 초코 푸딩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푸딩은 지민이 앉아 있는 거실 테이블 쪽으로 천천히 날아왔다. 테이블에 착지한 푸딩은 이내 뚜껑이 스르륵 열리고, 안에 꽂혀 있던 작은 플라스틱 숟가락이 마치 누군가 움직이는 것처럼 한 스푼 가득 푸딩을 떠서…

    그녀의 눈앞, 정확히 1미터쯤 떨어진 허공에 멈춰 섰다.

    지민은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눈을 깜빡이자 허공의 숟가락은 이내 스르륵 푸딩 안으로 다시 가라앉았다. 냉장고 문은 닫혀 있었고, 푸딩은 원래 있던 자리에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환상 같았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 테이블 위에는 푸딩이 없었다. 대신 어제 밤 그녀가 밤새 먹으려다 깜빡하고 먹지 못한 마카롱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도 딱 한 입 베어 문 채로.

    지민은 허탈하게 웃었다. “너… 나랑 같이 사는구나?”

    그때부터 지민은 그 ‘무언가’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려는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 존재는 그녀의 삶에 아주 미묘한 변화를 가져왔다.

    지민이 한밤중에 작업을 하다 간식을 찾으면, 가끔 그녀가 좋아하는 과자가 눈앞에 툭, 하고 나타나 있었다. 피곤에 지쳐 잠이 들었을 때, 다음 날 아침이면 작업실이 놀랍도록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곤 했다. 흩어져 있던 펜들은 색깔별로 나란히 꽂혀 있었고, 종이들은 가지런히 쌓여 있었다. 심지어 지민이 한창 고민하던 웹툰 캐릭터의 의상에 작은 스케치 하나가 더해져 있기도 했다. 기발하고 재미있는 아이디어였다.

    “고마워.”

    지민은 어느 날 작업실에서 스케치북에 그려진 새로운 아이디어를 보고 작게 속삭였다. 그 순간, 스탠드 조명이 깜빡, 하고 화답하듯 빛났다.

    그때부터 지민은 그 존재와 대화하는 법을 터득했다. 무언가 부탁하고 싶을 때면 스케치북에 글로 적어두었다. “따뜻한 차 한 잔 마시고 싶어.” 그러면 얼마 후, 마법처럼 따뜻한 찻잔이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물론 직접 차를 끓이는 소리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친구가 어딘가에서 찻잎을 우려내어 가져다주는 것 같았다.

    지민은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밤샘 작업을 할 때면 늘 누군가 옆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끔 혼자 그림을 그리다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녀의 어시스턴트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가장 성실하고 유쾌한 존재였다.

    어느 맑은 오후, 지민은 작업실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태블릿에는 새로운 웹툰의 시놉시스가 떠 있었다. 주인공은 혼자 사는 일러스트레이터였고, 그녀의 아파트에는 보이지 않는 친구가 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테이블 위에 놓아둔 작은 화병 속 꽃 한 송이가 살랑, 하고 흔들렸다. 창문은 닫혀 있었는데도.

    지민은 빙긋 웃으며 허공에 손을 뻗었다. “고마워. 오늘도 잘 부탁해.”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허공이었지만, 지민은 분명 그곳에 따뜻한 온기가, 그리고 자신만의 작은 비밀이 존재함을 느꼈다. 도시의 복잡한 아파트 속, 그녀의 일상은 그렇게 아주 특별하고 따뜻한 애니메이션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친구와 함께 만들어가는, 둘만의 평범하지만 기묘한 나날들 속에서, 지민은 오늘도 소소한 행복을 찾아 웃음 짓는다.

  • 스페이스 오페라 독립적인 단편 소설

    우주를 가로지르는 무수한 별들 위, 아우레아 제국은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거대한 그림자처럼 군림하고 있었다. 제국의 수도, 오릭스 프라임은 인공 태양 아래 영원한 낮을 누렸고, 그곳의 귀족들은 행성 하나의 자원 따위는 한 끼 식사의 후식처럼 소비했다. 그러나 제국의 영토가 끝없이 확장될수록, 그 영광의 이면에는 피와 땀으로 얼룩진 수많은 변방 행성들의 희생이 감춰져 있었다.

    카이론 행성, 아스테리아 변방 성계의 가장 외곽에 위치한 이 행성은 한때 ‘푸른 심장’이라 불릴 정도로 풍요로운 광물 자원을 품고 있었다. 이제 그 별은 제국의 탐욕스러운 손길에 파헤쳐져 붉은 먼지를 흩날리는 황량한 광산 행성으로 변모했다. 제국 함대는 정기적으로 상공을 가로질렀고, 무뚝뚝한 제국군 병사들은 시민들의 삶을 짓밟았다.

    카엘은 한때 광산 도시의 평범한 기술자였다. 그의 손은 우주선 엔진을 정비하고, 광물 채굴 장비의 오작동을 고치는 일에 능숙했다. 하지만 제국군이 그의 가족이 운영하던 작은 정비소를 강제 수용하고, 그의 아버지를 ‘반역자’로 몰아 어두운 제국 감옥으로 끌고 간 날, 카엘의 손은 다른 것을 잡게 되었다. 그것은 제국군이 버리고 간 통신장비와, 그 안에서 발견한 지하 저항 세력의 희미한 메시지였다.

    “제국은 우리에게 질서를 준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질서의 무게는 우리의 목을 조르는 쇠사슬과 같다.”

    카엘은 낡은 스피더의 조종간을 움켜쥐고 카이론의 붉은 대지를 스쳐 날았다. 저녁 놀이 지평선을 온통 주황빛으로 물들였지만, 그의 눈빛은 석양보다 더 뜨겁게 타올랐다. 그의 옆자리에는 잭스가 앉아 있었다. 잭스는 카이론의 광산에서 평생을 보낸 거구의 남자였다. 튼튼한 팔뚝은 닳고 닳은 작업복 소매를 찢을 듯했고, 그의 얼굴에는 오랜 고통의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빌어먹을 제국 놈들. 오늘 또 세금을 올렸다고 하더군. 이제 어린애들까지 광산으로 끌고 갈 셈인가.” 잭스의 목소리는 낮고 거칠었다.

    카엘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이대로는 안 돼, 잭스. 더 이상 잃을 게 없어. 놈들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어.”

    “그래서, 네가 말하는 ‘붉은 혜성’인가 뭔가 하는 걸 정말 믿는단 말이냐? 그게 대체 뭔데?” 잭스가 미심쩍은 듯 물었다.

    “우리가 될 거야. 놈들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붉은 혜성. 어둠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유성이자, 놈들을 불태울 불꽃이.” 카엘의 눈빛이 흔들림 없이 빛났다.

    그날 밤, 카엘은 잭스와 함께 낡은 광산 갱도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한때 버려진 채 방치되었던, 이제는 카엘의 은밀한 아지트가 된 곳이었다. 어둠 속에 희미한 불빛이 깜빡였다. 불빛 아래에는 엘라라가 쪼그리고 앉아 낡은 통신 장비를 만지고 있었다. 엘라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해킹 실력을 가진 소녀였다. 그녀는 제국군의 감시망을 뚫고 정보를 빼내는 데 도가 텄다.

    “카엘 오빠, 잭스 아저씨! 좋은 소식이 있어요!” 엘라라가 반가운 얼굴로 그들을 맞았다. “세라피나 언니가 연락해왔어요! 오릭스 프라임의 군사 시설 설계도를 빼돌리는 데 성공했대요!”

    세라피나는 한때 오릭스 프라임의 핵심 방위 산업체에서 일하던 수석 엔지니어였다. 제국의 허울 좋은 ‘질서’ 뒤에 숨겨진 잔혹한 진실을 목도하고는 모든 것을 버리고 지하 저항 세력에 합류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제국의 약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설계도? 쓸모 있나?” 잭스가 무심하게 물었다.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은 오릭스 프라임 외곽에 새로운 보급 기지를 건설하고 있어. 그곳은 변방 성계에서 약탈한 자원들을 집결시키는 핵심 허브가 될 거야. 그 기지를 마비시킬 수 있다면… 제국은 잠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을 테지.”

    며칠 후, 카이론을 떠나 은하계 변방의 암흑 성운 속을 헤쳐 나가는 낡은 화물선 한 척이 있었다. 겉으로는 평범한 광물 운반선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붉은 혜성 반란군의 핵심 인물들이 타고 있었다. 카엘은 조종석에 앉아 우주 지도를 띄웠다. 목표는 오릭스 프라임 외곽에 건설 중인 제국의 보급 기지, ‘골든 게이트’였다.

    “골든 게이트는 세 겹의 방어막과 자동 방어 시스템으로 둘러싸여 있어요. 정면 돌파는 자살 행위예요.” 세라피나가 홀로그램 지도 위에 손가락을 짚으며 설명했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있었다.

    “정면 돌파는 애초에 생각도 안 했어.” 카엘이 피식 웃었다. “엘라라, 네 역할이 중요해. 기지 내부 네트워크를 마비시켜야 해. 잠시라도 좋으니 방어막과 자동 포탑의 제어권을 뺏어와야 한다.”

    “걱정 마세요, 오빠! 제 실력을 보여줄 때가 된 거죠.” 엘라라가 모니터를 빠르게 조작하며 답했다.

    “나는 함선 외벽에 설치된 제국군 통신 장비를 무력화시킬 거다. 그때가 되면 함포 사격이 시작될 테지.” 잭스가 묵직한 중화기를 손질하며 말했다. 그의 눈에는 이미 전투의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카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이 거대한 제국의 심장을 한 번 찔러야 해. 우리가 누구인지, 놈들이 착취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강한지 보여줘야 해.”

    며칠간의 항해 끝에, 그들은 골든 게이트 보급 기지 인근에 도착했다. 거대한 우주 정거장은 마치 작은 행성처럼 우주 공간에 떠 있었다. 수많은 화물선들이 드나들었고, 강력한 제국군 순양함들이 주위를 경계하고 있었다.

    “엘라라, 시작해.” 카엘이 나직이 명령했다.

    엘라라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춤추듯 움직였다. 그녀의 작은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잠시 후,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성공했어요! 잠시지만… 방어막이 흐트러지고 자동 포탑 시스템에 오류가 발생했어요!”

    “지금이다! 잭스, 준비해!” 카엘이 외쳤다.

    잭스는 이미 중화기를 어깨에 메고 선실 밖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화물선의 해치가 열리자, 잭스는 망설임 없이 우주 공간으로 몸을 던졌다. 그는 자신의 몸에 연결된 로프를 이용해 화물선 외벽에 설치된 통신 장비로 향했다. 제국군의 감시망이 잠시 마비된 틈을 타, 잭스는 거대한 통신 안테나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순식간에 폭파시켰다.

    **콰아앙!**

    폭발음과 함께 통신 안테나가 산산조각 났다. 제국군 순양함에서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적선 발견! 즉시 요격하라!”

    카엘은 능숙하게 화물선을 조종해 제국군 순양함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집고 들어갔다. 세라피나가 조종석 옆에서 전술 디스플레이를 보며 소리쳤다.

    “제국군 순양함 두 척이 우리를 향하고 있어요! 하지만 골든 게이트의 방어막은 여전히 불안정해요!”

    “좋아! 잭스, 함포 발사 준비!” 카엘이 명령했다.

    낡은 화물선의 측면에서 숨겨져 있던 함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잭스는 흔들리는 함포를 겨누고 방어막이 가장 약해진 부분을 향해 정확히 조준했다.

    **쉬이이이잉- 콰앙!**

    거대한 에너지 포탄이 골든 게이트의 방어막에 충돌했다. 불안정했던 방어막은 연쇄 반응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붕괴했다.

    “방어막 붕괴!” 세라피나가 환호했다.

    하지만 제국군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붕괴된 방어막 틈새로 제국군 전투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붉은 혜성의 낡은 화물선을 향해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젠장! 전투기들이 너무 많아!” 잭스가 외쳤다.

    카엘은 화물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적의 공격을 회피했다. 그는 숙련된 조종사였지만, 제국군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세라피나, 골든 게이트의 내부 동력원 위치는?” 카엘이 물었다.

    “메인 터미널 중앙에 위치해 있어요! 하지만 그곳은 가장 강력한 경비 시스템으로 보호받고 있어요!”

    “엘라라, 다시 한번 해킹할 수 있어? 메인 동력원의 제어권을 우리가 확보해야 해.” 카엘의 목소리는 다급했지만,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엘라라는 온몸의 기력을 쥐어짜는 듯한 모습으로 다시 키보드에 매달렸다. 제국군 전투기의 공격으로 함선이 심하게 흔들렸지만, 그녀는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으윽… 너무 강력해요… 해킹 코드를… 침투시키기가… 어려워요…” 엘라라의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엘라라, 할 수 있어! 너만이 할 수 있어!” 카엘이 그녀를 독려했다.

    바로 그때, 잭스가 외쳤다. “젠장! 우현 엔진에 피격당했다! 속도가 떨어진다!”

    함선이 크게 요동쳤다. 조종석의 경고등이 붉게 물들었다. 이대로는 전멸이었다.

    “됐어! 됐어요! 중앙 동력원 접근 코드 획득!” 엘라라가 소리쳤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에는 승리의 빛이 번뜩였다.

    “세라피나, 지금 당장 골든 게이트의 중앙 동력원을 과부하시켜! 모든 에너지를 한 점에 집중시켜!” 카엘이 외쳤다.

    세라피나는 재빨리 엘라라가 건넨 코드를 시스템에 입력했다. 그녀의 눈빛은 결연했다.

    “명령 수신. 골든 게이트 중앙 동력원 과부하 시작. 자폭 카운트 시작됩니다!”

    **삐이이이- 삐이이이-**

    골든 게이트 보급 기지 전체에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정거장 곳곳에서 푸른빛이 번쩍이며 시스템 과부하를 알렸다.

    “도망쳐야 해! 지금 당장!” 잭스가 소리쳤다.

    카엘은 온 힘을 다해 낡은 화물선을 조종했다. 손상된 우현 엔진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제국군 전투기들을 뚫고 도주했다. 제국군 함선들도 자신들의 기지가 폭발할 것을 감지하고 혼란에 빠져 도주하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우우우우웅-!!!**

    그들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뒤를 돌아보았을 때, 골든 게이트 보급 기지는 거대한 불꽃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우주 공간을 뒤덮은 붉은 섬광은 마치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혜성 같았다.

    카엘, 잭스, 세라피나, 엘라라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장엄한 파괴를 지켜보았다. 그들의 낡은 화물선은 이미 여기저기 부서지고,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 속에는 절망 대신 희망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해냈어…” 엘라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엘라라. 우리가 해냈어.” 카엘이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은 땀과 그을음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

    이 작은 승리는 아우레아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제국은 곧 새로운 보급 기지를 건설하고, 더욱 잔인하게 변방 행성들을 탄압할 것이다. 하지만 이 밤, 카이론을 비롯한 수많은 변방 행성의 억압받던 사람들은 어둠 속을 가로지르는 붉은 혜성을 보았다. 제국의 하늘에 균열이 생겼고,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불꽃이 거대한 제국을 불태울 수도 있다는 희미한 희망을 보았다.

    그들의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붉은 혜성은 이제 전설이 되어, 제국의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희망의 상징이 될 것이었다.

  • 마법소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아르카나 마법 학원, 그 웅장한 대도서관의 가장 깊숙한 곳. 햇빛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 고서적 보관소, 그중에서도 먼지 쌓인 잊힌 통로에 미나는 서 있었다. 손에 든 마법 램프의 희미한 빛이 낡은 나무판과 거미줄을 비췄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어.”

    어젯밤, 끔찍한 환영이 그녀를 덮쳤다. 학원 지하에서 울려 퍼지는 알 수 없는 비명, 그리고 피로 물든 듯한 붉은 빛. 잠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그녀의 직감은 이 학원의 어딘가에,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속삭였다. 그리고 그 실마리가 바로 이곳,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도서관 최하층의 은밀한 통로 끝에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눅눅한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철분 섞인 비릿한 냄새가 희미하게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통로 끝, 낡은 석벽이 나타났다. 다른 벽들과는 이질적인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문양을 훑자 차가운 돌의 감촉이 소름 돋게 만들었다. 망설일 틈도 없이, 미나는 마법 에너지를 손끝에 모아 벽에 대었다.

    ‘제한된 접근 권한. 대상: 미등록 마법식.’

    미나의 마법 팔찌에서 낮은 경고음이 울렸다. 학원의 중앙 마법 시스템이 접근을 거부하는 신호였다. 하지만 미나는 멈추지 않았다. 학년 수석이라는 타이틀은 단순히 성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으로 학원의 어떤 마법식이라도 해독하고 재구성할 수 있었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벽에 새겨진 문양이 푸른빛으로 반짝였다. 그리고 이내 거대한 석벽이 굉음을 내며 천천히 옆으로 밀렸다. 그 뒤에서 드러난 것은 어둠뿐이었다. 시야를 압도하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젠장… 진짜였어.”

    미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계단조차 없는, 깎아지른 듯한 수직 통로였다. 그 끝은 어디일까? 그녀는 허리춤에서 마법 밧줄을 꺼냈다. 끝에 발광석을 매달아 던져보자 쨍그랑, 하는 소리가 한참 뒤에야 들려왔다. 최소한 지하 10층은 족히 넘어 보이는 깊이였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미나는 밧줄을 부여잡았다. 마법으로 몸을 가볍게 만들고, 그녀는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밧줄이 끊어질 듯 팽팽하게 당겨졌다.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갑고 무거워졌다. 귀를 찢을 듯한 침묵이 이어지다가, 이따금씩 어디선가 들려오는 희미한 물방울 소리만이 그녀의 불안감을 키웠다.

    마침내, 그녀의 발이 차가운 바닥에 닿았다. 밧줄을 회수하고 램프를 높이 들자, 거대한 지하 공간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동굴 같기도 했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유적 같기도 했다. 천장은 너무 높아 램프 빛이 닿지 않았고, 사방에는 기이한 형태의 기둥들이 솟아 있었다. 기둥마다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마법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일었다.

    “이게… 대체…”

    미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램프 빛이 닿는 곳마다 미지의 그림자들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벽에는 무언가를 긁어낸 듯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날카로운 손톱으로 긁은 자국 같기도 하고, 어떤 거대한 힘이 휘몰아친 흔적 같기도 했다. 마치 이곳에 갇혀있던 무언가가 필사적으로 탈출하려 몸부림친 흔적 같았다.

    그리고 동굴의 가장 깊숙한 곳,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거대한 제단이었다. 낡고 오래된 돌로 만들어진 제단 위에는 거대한 구 형태의 구조물이 놓여 있었다. 투명한 수정인지, 아니면 다른 차원의 물질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은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은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맥동.
    그것은 마치 심장이 뛰는 소리처럼, 웅, 웅, 하는 낮은 진동을 온몸으로 전달했다.

    미나는 저도 모르게 구 앞으로 다가섰다. 투명한 구체 안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그녀의 심장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구체 안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니, 무언가’들’이었다.

    수많은 빛의 잔영들이 구체 안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작은 반딧불이처럼 빛났지만, 그 빛의 형태는 어딘가 기괴했다. 사람의 형상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빛의 핵에서는 희미하게, 너무나 희미하게, 무언가가 들려오는 듯했다.

    울부짖음.
    비명.
    애원.

    그것은 그녀가 어젯밤 꿈속에서 들었던 바로 그 소리였다.

    미나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이 학원의 지하에, 이런 것이 숨겨져 있었다니. 이 빛의 잔영들은 무엇인가? 왜 저 구체 안에 갇혀 있는가? 이 거대한 마법 장치가 내뿜는 기이한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가?

    그때였다.
    구체 안의 맥동이 한층 강렬해졌다. 푸른빛이 번쩍이며, 잔영들이 일순간 선명해졌다.

    소년의 얼굴. 소녀의 얼굴. 알 수 없는 마법 생명체의 형태.
    그들의 눈동자에는 한결같이 절망과 공포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들의 입모양은 똑같은 한 단어를 외치고 있었다.

    *살려줘.*
    *살려줘!*

    미나의 온몸에서 피가 식는 듯한 한기가 느껴졌다.
    이것은… 생명의 에너지를 뽑아내는 장치였다.
    아르카나 마법 학원의 찬란한 마법력은, 바로 이 지하에 갇힌 수많은 존재들의 절규 위에서 피어난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이게… 이 학원의 진짜 힘이었단 말인가?”

    그 순간, 구체에서 뻗어 나온 한 가닥의 푸른 빛줄기가 미나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왔다.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빛은 그녀의 손등에 닿았다.
    찌릿한 통증과 함께, 잊히지 않을 끔찍한 진실이 미나의 정신을 강타했다.

    그것은 마치 구체 안의 모든 절규가 그녀에게 직접 전달되는 듯한 감각이었다.
    수많은 존재들이 어떻게 붙잡혀 왔는지, 어떻게 이 안에 갇혔는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고통받았는지… 그들의 기억, 그들의 감정, 그들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미나의 의식 속으로 밀려들어왔다.

    환영 속에서 그녀는 보았다.
    아르카나 마법 학원의 상징인 고요한 마법진이, 사실은 생명을 묶어두는 족쇄였음을.
    교장과 원로들이 환한 미소 아래서 얼마나 끔찍한 음모를 꾸며왔는지.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이 구체가 바로…

    쿠우우우우우웅!

    갑자기 거대한 진동이 온 지하를 뒤흔들었다. 천장에서 거대한 바위 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경고음이었다.
    누군가 미나의 침입을 감지한 것이다.

    “젠장!”

    미나는 이를 악물고 몸을 돌렸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공포와 충격 속에서도, 그녀의 심장 한구석에서는 분노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 끔찍한 진실을, 세상에 밝혀야만 했다.

    그녀는 어둠 속으로 다시 뛰어들었다.
    뒤에서는 여전히 구체의 맥동 소리가, 그리고 그 안에서 울려 퍼지는 희미한 비명 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아르카나 마법 학원의 아름다운 환상 아래,
    끔찍한 금기가 숨 쉬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미나는 그 금기의 존재를 알아버렸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녀의 마법소녀로서의 운명은, 이제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다.

  • 좀비 아포칼립스 독립적인 단편 소설

    삭막한 폐허가 된 도시의 그림자 속에서, 지훈은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지웠다. 낡은 방탄 조끼는 찢기고 헤졌지만, 그의 몸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먼지에 절어붙은 얼굴 위로 짐승 같은 눈빛이 번뜩였다. 오른손에 들린 것은 녹슨 쇠 파이프였다. 그 끝에는 날카롭게 갈린 파편들이 용접되어 있어, 흉물스러운 망치처럼 보였다. 수없이 많은 ‘그것들’의 뇌수를 터뜨리고, 수많은 인간들의 악의를 찍어 누르며 살아남은 생존자의 증표였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했다. 바이러스가 모든 것을 집어삼킨 지 벌써 5년. 하지만 지훈의 마음속에는 단 하나의 시간만이 흐르고 있었다. 5년 전, 그 지옥 같은 순간.

    그때 우리는 세 명이었다. 지훈, 민준, 그리고 혜원. 우리는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함께 미래를 꿈꾸던 평범한 청춘들. 하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그런 사치를 허락하지 않았다. 좀비들이 창궐하고, 도시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우리는 낡은 트럭 한 대로 도망치듯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다. 서로를 의지하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특히 민준은 늘 앞장서서 길을 찾고, 위험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리더였다. 지훈은 그런 민준을 진심으로 믿었다. 혜원 역시 민준을 오빠처럼 따랐다.

    그날은 유난히 추웠다. 식량을 찾기 위해 들어선 폐허가 된 마트에서, 우리는 예상치 못한 좀비 무리와 마주쳤다.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퇴로마저 막혀버린 절망적인 상황. 민준은 필사적으로 싸웠다. 지훈도 혜원도 민준을 도왔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좀비들이 혜원의 다리를 물었다. 혜원의 비명소리가 마트 전체에 울려 퍼졌다.

    “혜원아! 버텨!” 지훈이 달려들었다.

    “안 돼, 지훈아! 저항하지 마! 어차피 감염됐어!” 민준의 목소리가 귀에 박혔다. 그는 이미 도망칠 길을 찾고 있었다. 지훈은 순간 망설였다. 혜원의 눈빛은 이미 공포와 체념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훈아… 도망쳐… 끄흑…” 혜원이 피를 토하며 말했다.

    그 순간, 민준은 지훈의 어깨를 밀쳤다. 강한 충격과 함께 지훈은 휘청거렸다. 그리고 민준은 그 틈을 타 마트의 유일한 출구를 향해 전력 질주했다. 지훈은 민준의 뒷모습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봤다. 혜원 역시. 민준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훈은 절규했다. “민준아! 이 비겁한 자식!”

    하지만 민준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혜원은 이미 좀비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지훈은 혜원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수많은 좀비들의 팔이 그를 밀쳐냈다. 혜원의 얼굴이 끔찍하게 변해가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해야 했다. 그 찰나의 순간, 지훈은 살아남았다.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기억조차 없었다. 다만, 혜원의 마지막 비명과 민준의 배신 가득한 뒷모습만이 생생하게 뇌리에 박혔다.

    그때부터 지훈의 삶은 오직 복수를 향한 하나의 길로 재편되었다. 혜원과 민준의 흔적을 쫓아 5년. 폐허가 된 도시를 떠돌며 지훈은 뼈아픈 진실을 알게 되었다. 민준이 단순한 배신자가 아니었음을. 그는 살아남기 위해, 아니,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늘 누군가를 제물로 삼아왔던 뼛속까지 악랄한 인간이었다.

    민준은 살아남은 자들이 모여 이룬 작은 거점, ‘새벽 마을’의 실세가 되어 있었다. 그는 뛰어난 언변과 기회주의적인 면모로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고, ‘희망의 인도자’라 불리며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지훈의 심장은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오늘, 지훈은 ‘새벽 마을’의 외곽을 둘러싼 철조망 앞에 서 있었다. 밤은 깊었고, 보초들은 긴장이 풀린 채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낡은 감시탑에 앉은 한 명의 보초는 지루한 듯 하품을 길게 했다.

    지훈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넝마가 된 외투 속에서 챙겨온 절단기가 스치듯 철조망을 끊어냈다. ‘칭… 칭…’ 작은 소음조차 밤의 정적을 찢는 듯했지만, 보초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능숙하게 철조망 틈새를 비집고 마을 안으로 잠입했다.

    마을은 생각보다 안락해 보였다.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은은한 불빛. 지옥 속에서도 그들만의 낙원을 일궈낸 듯했다. 하지만 지훈에게는 그 모든 것이 위선으로 보였다. 민준의 손으로 일궈낸 위선.

    민준의 거처는 마을 중앙에 있는 가장 크고 튼튼한 건물이었다. 다른 이들의 집은 허름한 움막 수준이었지만, 그의 집만은 꽤나 견고하게 지어져 있었다. 탐욕스러운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둥지 같았다.

    지훈은 건물 뒤편,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워진 곳으로 향했다. 건물 벽에는 빗물 파이프가 엉성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지훈은 망설임 없이 파이프를 잡고 올라갔다. 오랜 시간 좀비들을 피해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고, 폐허를 기어오르며 단련된 몸은 가벼웠다.

    민준의 침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틈새로 빛이 새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창문을 뜯어냈다. 나무로 된 창틀은 썩어 있었기에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다. ‘끼이익…’ 날카로운 마찰음이 밤을 갈랐지만, 실내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묻혔다.

    지훈은 조용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은 꽤 넓고 깔끔했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침대, 작은 책상, 그리고 벽 한쪽을 가득 채운 지도들. 그리고… 한쪽 벽에 걸린 낡은 사진 한 장.
    세 사람이 함께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지훈, 민준, 그리고 혜원.

    지훈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의 눈은 사진에 박혔다. 혜원의 환한 미소. 그리고 그 옆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민준. 그는 저 사진을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다. 죄책감이었을까, 아니면 단지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싶은 것일까. 지훈은 망설임 없이 사진을 찢어버렸다. 종이가 찢어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때였다.
    “누구… 읍!”
    화장실에서 막 나온 듯한 민준이 지훈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지르려 했다. 지훈은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 민준의 입을 틀어막고 바닥으로 찍어 눌렀다. 민준의 눈이 공포로 크게 뜨였다.

    “흐읍… 흐읍… 지, 지훈이…?”
    민준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렸다. 그는 지훈이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 경악한 듯했다.

    지훈은 민준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그의 눈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그래. 나다. 네가 죽이려 했던 그 지훈이가 돌아왔다.”

    민준은 지훈의 팔을 필사적으로 잡고 벗어나려 했다.
    “지훈아, 오해야! 그땐 어쩔 수 없었어! 좀비들이 너무 많았다고! 우리 셋 다 죽을 뻔했어!”

    지훈은 차갑게 웃었다. 그의 웃음소리는 짐승의 울음소리처럼 섬뜩했다.
    “어쩔 수 없었다고? 네가 혜원을 밀쳐냈을 때도? 네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을 때도? 어쩔 수 없었냐고!”

    민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얼굴에서 과거의 여유롭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공포만이 가득했다.
    “제발… 지훈아… 내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지 너는 몰라… 살아남는 게 얼마나 어려운데…! 나도 살아야 했어…!”

    “살아야 했어?” 지훈은 그의 멱살을 더 움켜쥐었다. “살아남기 위해 친구를 팔아넘겨? 네 덕분에 혜원은 끔찍하게 죽었어! 나는 네가 도망치는 뒷모습을 보며 혜원의 비명소리를 들어야 했다고!”

    민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하다… 지훈아… 내가 잘못했다… 용서해 줘… 제발… 한 번만 살려줘… 내가 널 위해 뭐든지 할게…!”

    지훈은 민준의 멱살을 풀었다. 민준은 바닥에 주저앉아 콜록거렸다.
    “날 위해 뭐든지? 네가 날 위해 할 수 있는 건 없어.”

    지훈은 낡은 쇠 파이프를 고쳐 잡았다. 쇠 파이프 끝에 달린 날카로운 파편들이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네가 혜원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네게 선택권을 주지.”

    민준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뒤로 기어가려 했지만, 지훈은 그의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안 돼! 지훈아! 제발! 살려줘! 난 마을을 이끌어야 해! 나 없으면 다 죽어!”

    “흥, 네가 없으면? 이 마을은 네가 없어야 비로소 진정한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거다.” 지훈은 냉정하게 말했다. “네가 만든 이 가짜 평화는, 네 배신 위에 세워진 거야. 나는 그 기초부터 부숴버릴 거야.”

    그 순간,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누군가 민준의 방으로 다가오는 소리였다.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민준의 얼굴에 희망의 빛이 스쳤다.
    “누구 없어요? 살려줘요! 강도가 들었어!”

    지훈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들린 쇠 파이프가 맹렬하게 휘둘러졌다.
    ‘콰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민준의 몸이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머리에서 피가 솟구쳤다. 민준의 눈은 여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그 빛은 빠르게 꺼져갔다. 그가 입을 열려 했지만, 단말마의 신음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쿵! 쿵! 쿵!’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커졌다.
    “민준님! 괜찮으십니까?”

    지훈은 민준의 시신을 가볍게 걷어찼다. 그의 시선은 창밖을 향했다.
    그는 피 묻은 쇠 파이프를 창밖으로 던졌다. 그리고 방 안에 있는 횃불을 잡았다. 기름으로 가득 찬 램프를 바닥에 던지고, 불꽃을 향해 횃불을 던졌다.

    ‘활활활!’
    순식간에 방 안은 불길에 휩싸였다. 지훈은 창문으로 몸을 던졌다. 밖에서는 이미 사람들이 몰려와 문을 부수고 있었다. 불길은 빠르게 번져갔고, 마을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비명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지훈은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는 민준이 쌓아 올린 위선의 탑이 불길에 휩싸여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절규와 불타는 마을의 비극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지훈의 복수가 끝난 자리였다.

    그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혜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민준의 비겁한 뒷모습도. 복수는 달콤하지 않았다. 아니, 그저 공허할 뿐이었다. 그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가벼움이 그의 어깨를 짓눌렀던 무거운 짐을 걷어냈다. 이제 그는 무엇을 해야 할까. 폐허가 된 세상, 아직도 좀비들이 득실거리는 이 지옥에서, 지훈은 자신의 새로운 길을 찾아야 했다.

    그는 어둠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의 발걸음은 더 이상 복수에 얽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심연을 헤치고 돌아온 칼날처럼, 그는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맬 것이다. 이 잔혹한 세상에서, 그가 살아남은 이유를.

  • 무협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제1장: 서막, 천하의 검을 향한 서곡

    웅장한 북소리가 천지를 흔들었다. 콰앙! 콰앙! 콰앙! 세 번의 격렬한 울림이 끝없이 펼쳐진 산맥의 봉우리들을 타고 메아리쳤고, 겹겹이 쌓인 운해(雲海)마저 잠시 멈춰 선 듯했다. 태양은 정수리 위에서 이글거렸지만, 십만 군중의 함성은 그 열기마저 집어삼킬 듯 뜨겁게 끓어올랐다. 이곳은 중원의 척추라 불리는 태극산맥의 한가운데, 수십 년에 걸쳐 자연을 깎아 만든 거대한 원형 경기장, ‘천하무대(天下武臺)’였다.

    무대 중앙, 태극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진 백옥 광장의 네 귀퉁이에는 삼십 장 높이의 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다. 붉은 비단이 휘감긴 기둥 끝에는 각기 다른 빛을 뿜어내는 영롱한 보옥이 박혀 있었는데, 그 광채가 하늘로 뻗어 장막처럼 펼쳐지며 경기장 전체를 감싸는 신비로운 기운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저것은 중원 사대 문파의 보물 중 하나인 ‘천공진(天空陣)’이었다.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무도대회 중 발생할 수 있는 불상사를 막는 동시에, 고수들의 격한 기운이 외부로 새어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고 전해졌다.

    경기장 가장자리에 마련된 귀빈석에는 무림의 각 문파와 세가를 대표하는 수장들이 좌정해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일말의 긴장감과 함께 이 대회가 가져올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교차했다. 그들 모두는 알고 있었다. 이 천하제일 무도대회의 결과가 단순히 영웅 한 명을 탄생시키는 것을 넘어, 다가올 천하의 운명을 결정지을 것이라는 사실을.

    단우혁은 십만 군중 속,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참가자처럼 서 있었다. 그의 등에는 낡고 투박한 검집이 꽂혀 있었고, 그 안에는 이름 없는 검 한 자루가 잠들어 있었다. 검집만큼이나 허름한 도포는 그의 깡마른 몸을 더욱 왜소하게 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달랐다. 흑요석처럼 깊고 차가운 눈동자 속에는 무언가 굳건한 의지와 함께, 언뜻 비치는 쓸쓸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귀빈석을 응시했다. 무림맹주, 오대 세가 가주, 구파 일방의 문주들… 모두가 한때는 자신의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제는 그저 그가 넘어서야 할, 혹은 지켜내야 할 이들의 수장들일 뿐이었다.

    “어이, 총각. 너무 긴장하는 거 아니야?”

    툭, 어깨를 치는 넉살 좋은 목소리에 단우혁은 시선을 돌렸다. 옆에는 키는 작달막하지만 어깨가 딱 벌어진 중년의 사내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묵직해 보이는 쌍도끼가 들려 있었고, 얼굴에는 얼핏 보기에도 수많은 풍파를 겪어낸 흔적이 역력했다.

    “그저, 대단한 분들이 많다는 생각에 잠시….” 단우혁은 말끝을 흐렸다. 그의 목소리는 나이보다 다소 낮고 건조했다.

    중년 사내는 껄껄 웃었다. “하긴, 이런 자리는 처음일 테니 그럴 만도 하지. 나는 북해의 곽만산이라고 하네. 자네는? 낯이 익지 않은데.”

    “단우혁입니다. 별 볼 일 없는 촌뜨기지요.”

    “촌뜨기라니, 겸손도 지나치면 독이 되는 법이야. 여기까지 올라왔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재주 아니겠나.” 곽만산은 눈웃음을 지으며 단우혁의 어깨를 다시 한번 토닥였다. “근데 자네 눈빛이 예사롭지 않구먼.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단우혁은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과찬이십니다.” 꿰뚫어 보기는커녕, 제 앞날조차 어둠 속에 갇힌 주제에.

    그때, 천하무대 중앙에 한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색 용포를 걸친 백발의 노인.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지만, 두 눈에서는 번개와 같은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무림맹주, 천우진(天宇眞)이었다. 그의 등장과 함께 웅성거리던 군중의 소리는 거짓말처럼 잠잠해졌다.

    “이 자리, 모든 무림인들이 주목하는 자리이니라.” 천우진의 목소리는 비록 노쇠했지만, 천하무대 전체를 압도하는 위엄이 담겨 있었다. “수십 년 전, 동해에서 밀려들어온 검은 그림자는 무림의 평화를 위협했고, 수많은 영웅들이 스러졌다. 비록 당시에는 그들을 물리쳤으나, 암흑의 기운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대륙 곳곳에 남아 잠식해 왔다. 그리고 이제, 그 기운이 다시금 응축되어 천하를 혼돈에 빠뜨릴 때가 임박했음을 감지했다.”

    단우혁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검은 그림자’.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이름. 그의 가족을 앗아간 그 악몽과도 같은 존재.

    “이에 무림맹은 고심 끝에 이 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천우진의 시선이 무림인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순히 힘의 과시가 아니다.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잡고, 다가올 어둠에 맞설 수 있는 진정한 영웅, 무림을 통합할 수 있는 천하의 주인이 필요하다. 이 대회의 승자에게는 무림맹의 모든 지원과 함께, 천하의 모든 권위를 상징하는 ‘천하제일검’이 수여될 것이다!”

    웅장한 북소리가 다시 한번 터져 나왔다. 콰앙! 콰앙! 콰앙!

    천하제일검. 단순히 무기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림의 모든 세력에게 인정받는 상징이자,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을 수 있는 유일한 권위였다. 오직 그 검을 쥔 자만이 다가올 어둠에 맞서 중원을 이끌 수 있었다.

    수많은 참가자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타올랐다. 명예, 권위, 그리고 천하의 평화. 각자가 품은 열망과 목표는 달랐지만, 결국 모두 이 천하무대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 했다.

    곽만산은 단우혁의 어깨를 다시 한번 잡으며 비장하게 속삭였다. “크으… 천하제일검이라니. 아무리 나 같은 듣보잡이라도 가슴이 뛰는구먼. 자네도 그렇지?”

    단우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가슴은 뛰는 것을 넘어, 이미 격렬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는 천하제일검을 원했다. 그것이 유일하게 그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고, 약속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었으므로.

    “대회 방식은 간단하다!” 천우진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총 32강전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1인이 남을 때까지 승자만이 다음 단계로 진출한다. 어떠한 무기든 허용되며, 승패는 상대방이 항복하거나, 의식을 잃거나, 혹은 죽음에 이르렀을 때 결정된다. 그러나 불필요한 살상은 엄격히 금지한다! 무림맹 감찰단이 지켜볼 것이며, 규율을 어기는 자는 즉시 자격을 박탈하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을 것이다!”

    규칙이 발표되자 일부 참가자들의 얼굴에 미묘한 긴장감이 스쳐 지나갔다. 죽음까지 허용하지만 불필요한 살상은 금지. 그 모호한 경계는 결국 감찰단의 판단에 달렸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어차피 무림의 고수들에게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 숙명과도 같았다.

    “자, 이제 조 추첨을 시작한다!”

    경기장 중앙, 투명한 수정구슬이 떠오르고 그 안에 수백 개의 나무 조각이 어지럽게 맴돌기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차례로 앞으로 나아가 수정구슬에 손을 대어 자신의 대진표를 확인했다.

    곽만산이 먼저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가 수정구슬에 손을 대자, 구슬 속 나무 조각 하나가 번쩍이며 그의 이름을 새긴 팻말 위로 솟아올랐다.

    “흥, 운이 좋구먼. 첫 상대는 이름 없는 놈이군!” 곽만산은 기세 좋게 외치며 돌아왔다.

    드디어 단우혁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고 차분하게 수정구슬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기운이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이윽고 구슬 속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단우혁의 이름과 함께 그의 첫 번째 상대의 이름이 팻말 위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단우혁’ vs ‘혈무문(血武門) 혈영(血影)’.

    단우혁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혈무문. 중원 남부를 기반으로 하는 사파(邪派)의 일파로, 피를 이용한 잔혹한 무공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중에서도 혈영은 가장 뛰어난 암살자이자 무사로 알려져 있었다. 첫 상대부터 만만치 않았다.

    곽만산이 단우혁의 팻말을 힐끗 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호오, 혈무문의 혈영이라. 꽤나 골치 아픈 놈이 걸렸구먼. 그놈의 피 묻은 검은 피하는 게 상책이야.”

    단우혁은 묵묵히 팻말을 들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의 굳게 다문 입술은 아무런 동요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수없이 많은 역경을 겪어왔다. 이 정도의 상대에 흔들릴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끓어오르는 투지와 함께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어떤 짐승의 눈빛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자, 이제 모든 대진이 확정되었다!” 천우진 맹주의 목소리가 천하무대에 다시 울려 퍼졌다. “첫 번째 대결은 잠시 후 정오에 시작된다! 모든 무림인들이여, 이 자리에서 그대들의 모든 것을 보여주어라! 천하의 운명을 걸고, 승리를 쟁취하라!”

    거대한 북소리가 다시 한번 터져 나왔고, 십만 관중의 환호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단우혁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하나의 다짐만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이번에는 반드시. 무엇을 걸어서라도, 기필코 살아남아 천하제일검을 손에 넣으리라.*

    그는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고, 다가올 미래의 어둠을 막기 위해, 이 지독한 운명의 무대에서 피를 뿌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독립적인 단편 소설

    도시의 밤은 늘 그랬다. 수많은 불빛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담고 반짝였고, 그 아래 펼쳐진 아파트 단지는 거대한 상자 속 작은 조각들처럼 빼곡했다. 스무 층짜리 건물, 그중 열네 층에 자리한 지아의 작은 보금자리는 밤이 되면 유독 아늑했다. 창밖으로는 멀리 도심의 상징이 손톱만 하게 보였고, 그 야경을 배경 삼아 지아는 작업실 겸 거실 한 켠에 놓인 책상에 앉아 태블릿 펜을 놀렸다.

    오늘 마감해야 할 삽화가 남아있었지만, 어째선지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자꾸만 시선이 왼쪽 책장으로 향하는 건, 아마도 방금 전 들린 ‘툭’ 소리 때문일 것이다.

    “밤아, 너 또 뭐 떨어뜨렸어?”

    지아가 고양이에게 물었지만, 검은 고양이 ‘밤’은 지아의 시선이 닿자마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우아하게 하품만 했다. 길게 늘어지는 하품 끝에 핑크색 혀가 살짝 보였다. 책장은 여전히 빽빽했고, 떨어진 책은 없었다. 지아는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작업에 몰두하려 했지만, 이내 눈썹을 찌푸렸다. 분명 아까는 책상 모서리에 두었던 머그컵이 스르륵, 하고 반 뼘 정도 안쪽으로 옮겨져 있었다.

    “내가 요즘 너무 피곤한가… 헛것이 다 보이네.”

    지아는 중얼거렸다.

    그날 밤 이후, 아파트에서는 묘한 일들이 종종 벌어졌다.
    분명 제자리에 두었던 리모컨이 엉뚱하게도 주방 식탁 위에서 발견되거나, 충전 중이던 휴대폰이 소파 밑에 툭, 하고 떨어져 있기도 했다. 가끔은 침대 머리맡에 두었던 작은 탁상시계가 ‘덜컥’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도 했다.

    처음에는 자신의 건망증이 심해졌다고 생각했다.
    “어휴, 이러다 중요한 마감도 놓치겠네.”
    밤에게 한탄하듯 이야기하면, 밤은 그저 긴 꼬리를 흔들며 무심하게 제 할 일을 했다. 간혹 지아가 깜짝 놀랄 때면, 밤은 동그란 초록색 눈을 들어 잠시 지아를 응시하곤 했다. 마치 ‘익숙해지렴’ 하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어느 비 오는 주말 오후였다. 지아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빗줄기가 도시의 소음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나른한 평화가 가득한 시간이었다. 그때, 부엌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

    지아는 벌떡 일어났다. 부엌으로 달려가 보니, 싱크대 위에 올려두었던 유리컵이 깨져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분명 유리컵은 싱크대 가장자리가 아닌 안쪽에, 단단히 놓여 있었다. 바람이 들어올 창문도 없었다.

    “이건… 정말 이상하잖아.”

    그때부터 지아는 뭔가 자신의 보금자리에 예상치 못한 ‘손님’이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혹시 집이 오래되어 낡은 것인가? 아니면 층간 소음 때문에 아랫집이나 윗집에서 벌어지는 일들인가? 그러나 조용히 귀 기울여 봐도, 소음은 늘 지아의 집 안에서만 발생했다.

    그녀는 작은 실험을 시작했다.
    자주 움직이던 물건들 옆에 작은 메모를 붙여두거나, 조용히 녹음기를 켜두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메모는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옆의 물건은 자리를 옮겼고, 녹음기에는 텅 빈 공간의 소리만 가득했다. 밤은 가끔 허공을 빤히 쳐다보거나, 꼬리 끝을 살랑이며 알 수 없는 공간을 향해 미묘하게 반응하곤 했다.

    두려움은 점차 희미해지고, 그 자리를 묘한 호기심과 어쩌면 아주 조금의 외로움이 채웠다.
    이 모든 현상들이 누군가 자신을 해치려는 의도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치는 것처럼, 혹은 조용히 관심을 바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날 저녁, 지아는 거실의 작은 화초에 물을 주고 있었다. 작은 잎사귀 하나가 시들해진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가위를 들어 잘라주었다. 그리고는 테이블에 놓인 작업노트를 펼쳤다. 잠시 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분명 잘라서 테이블 위에 두었던 그 작은 잎사귀가, 말끔하게 휴지통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지아는 멍하니 휴지통을 바라봤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거기… 누구세요?”
    정적이 흘렀다.
    지아는 숨을 참고 기다렸다. 혹시 또 무엇인가 움직일까, 아니면 소리가 들릴까.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아는 실망감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였다. 테이블 위, 그녀가 가장 아끼는 작은 돌멩이 장식품이 있었다. 여행지에서 주워온, 손바닥만 한 매끄러운 돌이었다. 그 돌이 아주 미세하게, 아주 조용히, ‘또르르’ 소리를 내며 살짝 굴러갔다. 마치 대답처럼. 그리고는 원래 있던 자리에서 반 뼘 정도 옆으로 이동해 멈췄다.

    지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살며시 웃었다.
    “…그래, 있었구나. 혼자였는데… 혼자가 아니었네.”

    그날 이후, 지아의 아파트는 조금 달라졌다.
    여전히 물건들은 제자리를 이탈하곤 했다. 때로는 갑자기 라디오가 켜져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주기도 하고, 지아가 읽던 책이 다음 페이지로 살짝 넘어가 있기도 했다. 가끔은 지아가 아침에 일어나 침대에서 나오면, 밤새 차가워진 거실 바닥에 발매트가 ‘쓱’ 하고 밀려와 그녀의 발을 감싸기도 했다.

    지아는 이제 더 이상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출근 준비를 하며 혼잣말을 했다.
    “음, 오늘 아침은 따뜻한 커피가 당기는데. 알지?”
    그러면 잠시 후, 보온병에 담겨 있던 따뜻한 물이 커피포트에 담겨 살짝 흔들리곤 했다. 지아는 미소 지으며 커피를 내렸다.

    밤도 점차 익숙해졌다. 허공에 발을 뻗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장난치는 듯한 몸짓을 하기도 했다.
    지아는 이 ‘보이지 않는 친구’에게 이름을 붙여줄까 고민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저 ‘거기 있는 너’라고 부르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느 밤, 지아는 야근에 지쳐 돌아왔다. 온몸의 힘이 쭉 빠지고, 도시의 소음조차 버겁게 느껴졌다. 불 꺼진 아파트는 유독 적막했다. 지아가 거실로 들어서자, 갑자기 탁상 스탠드의 불빛이 ‘딸깍’ 소리를 내며 켜졌다. 은은한 오렌지색 불빛이 어두웠던 공간을 부드럽게 감쌌다.

    지아는 스탠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고마워.”
    누군가 대답해 줄 리 없는 공간이었지만, 지아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현대 도시의 복잡함 속에서, 지아의 작은 아파트는 그녀만의 조용하고 따뜻한 보금자리, 그리고 보이지 않는 친구와 함께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되었다. 그녀의 일상은 여전히 바빴지만, 밤늦게 돌아오는 길, 혹은 홀로 작업을 하는 순간마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따뜻한 위로를 느꼈다. 어쩌면, 이 모든 기괴한 현상들은 외로운 도시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작고 소중한 인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파트에는, 작은 온기가 늘 함께했다.

  • 에픽 하이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 푸른 첨탑과 지하의 속삭임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푸른 첨탑 학원. 그 이름처럼 수십 개의 첨탑이 하늘을 꿰뚫을 듯 솟아 있었고, 거대한 대리석 벽면에는 고대 마법 문양이 오색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곳은 아스가르드 대륙 모든 마법사의 꿈이자 정점이었다. 제국 각지에서 모여든 영재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재능을 갈고닦으며, 언젠가 세계를 바꿀 위대한 마법사가 되리라 꿈꾸었다.

    하지만 카엘에게 푸른 첨탑 학원은 꿈보다는 숙제와 쪽잠이 더 많은 현실이었다.

    “……마력의 순환은 본질적으로 에너지의 흐름이며, 이것은 곧 만물의 근원인 마나의 변형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익히는 모든 주문은 이 기본적인 원리를 바탕으로 하지요. 오늘 배울 불꽃의 구슬 소환술은……”

    교수 에를란트의 나긋나긋하면서도 권위 있는 목소리가 웅장한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그는 완벽하게 빗어 넘긴 은발과 깊은 눈매를 가진 중년의 마법사로, ‘이론의 대가’라는 별명답게 건조하면서도 빈틈없는 강의로 유명했다. 카엘은 팔짱을 낀 채 턱을 괴고 있었다. 겉으로는 진지하게 경청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 그의 시선은 강의실 창밖으로 펼쳐진 아카데미의 정원에 고정되어 있었다.

    정원의 고목들은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붉고 노란 잎들을 흩뿌리고 있었다. 저 잎들이 모두 떨어지고 나면, 또다시 혹독한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고, 카엘은 여전히 학원 생활에 완벽히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특별히 뛰어난 학생도, 그렇다고 낙제할 만큼 뒤떨어진 학생도 아니었다. 그저 ‘어딘가 좀 특이한’ 학생이었다.

    그때였다.

    쿵- 하는 아주 미세한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강의실의 묵직한 마법석 바닥이 아주 잠깐, 마치 심장이 고동치듯 울렸다 사라졌다. 너무나 미미해서 옆자리의 리안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듯, 그는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필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엘은 그 진동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 놓칠 수 없었다. 지난 몇 주간, 특히 밤마다, 그는 비슷한 진동을 느끼곤 했다. 마치 거대한 존재가 지하 어딘가에서 움직이는 듯한, 아니면 짓눌린 무언가가 간헐적으로 숨을 쉬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카엘, 집중하게.”

    에를란트 교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꽂혔다. 카엘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돌렸다. 에를란트 교수는 특유의 차가운 눈으로 카엘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꽃의 구슬 소환술의 첫 번째 핵심 주문은 무엇이지?”

    “어…… 마나의 집중과, 아르카나 에너지의… 정렬입니다.” 카엘은 더듬거리며 답했다. 운 좋게도 그가 딴생각을 하던 찰나에도 교수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나 보다.

    교수는 만족스럽지 않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법사의 ‘의지’다. 어떤 마법이든, 마법사의 의지가 선행되어야만 그 힘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 특히 금지된 마법에 혹하여 그릇된 의지를 품는다면,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교수의 시선이 잠시, 아주 짧게 카엘에게 머물렀다. 금지된 마법이라… 카엘은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째서인지, 그 말이 방금 느낀 미세한 진동과 연결되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강의가 끝나고 학생들이 우르르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리안이 카엘의 어깨를 툭 쳤다.

    “오늘도 딴생각 하다 걸렸냐? 이러다가는 졸업 시험 때 발목 잡힌다.”

    리안은 카엘과는 정반대로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이었다. 늘 웃는 얼굴에 공부도 곧잘 하는, 완벽주의자에 가까운 모범생이었다.

    “글쎄… 그냥 좀 몸이 찌뿌둥해서.” 카엘은 대충 얼버무렸다. 차마 리안에게 “방금 바닥이 흔들리는 걸 못 느꼈냐”고 물을 수는 없었다. 그는 리안이 자신을 이상하게 볼 것을 알았다. 어차피 리안은 귀신같이 잘 자는 타입이라 밤중에 들리는 소리도 전혀 듣지 못했을 것이다.

    “몸이 찌뿌둥하면 마나 수련을 더 해야지. 아, 맞다! 도서관에서 신비 마법 관련 고서를 찾았는데, 너도 관심 있을까 해서.” 리안이 손에 들고 있던 두꺼운 책을 흔들어 보였다. 낡은 가죽 표지에는 알아보기 힘든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카엘은 책을 흘긋 보았다. “신비 마법이라니? 또 이상한 전설 같은 거냐?”

    “이상하긴! 이건 아르카나 계열의 심층 이론에 대한 책이야. 어때, 같이 보러 갈래? 저녁 먹고 도서관에서 만나자.”

    리안은 카엘의 대답을 들을 새도 없이 다른 친구와 합류하여 복도를 걸어갔다. 카엘은 한숨을 쉬며 리안이 사라진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신비 마법이라… 푸른 첨탑 학원의 도서관은 대륙에서 가장 큰 지식의 보고였지만, 그만큼 ‘금지된 지식’ 또한 무수히 잠들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에를란트 교수가 언급한 ‘금지된 마법’이 불현듯 떠올랐다.

    그날 밤, 카엘은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낮보다 더 선명하게 진동이 느껴지는 듯했다. 이번에는 짧고 굵은 한 번의 울림이 아니었다. 마치 거대한 기계 장치가 규칙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낮고 묵직한 ‘웅- 웅- 웅-‘ 하는 소리가 침대 프레임을 타고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환청일까? 아니면 지난 몇 주간의 기이한 경험이 드디어 실체를 드러내는 것일까?

    카엘은 조용히 침대에서 벗어나 맨발로 차가운 바닥을 밟았다. 동실의 다른 학생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멀리서 희미하게 비상등만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웅- 웅- 웅-‘

    소리는 더 가까워진 듯했다. 그리고 방향이 어딘지 어렴풋이 느껴졌다. 아래쪽. 학원 건물의 가장 깊은 곳, 지하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푸른 첨탑 학원에는 학생들에게 엄격히 통제된 구역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서도 ‘검은 심장부’라 불리는 지하 깊은 곳은 모든 학생들의 접근이 금지된 곳이었다. 그곳에 대한 소문은 무성했지만, 실체를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어떤 이들은 고대 마법 유물이 잠들어 있다고 했고, 어떤 이들은 학원의 설립자들이 감춰둔 금지된 존재가 갇혀 있다고 속삭였다.

    어렸을 때부터 호기심 많았던 카엘은 늘 그런 금기에 끌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호기심만은 아니었다. 그 웅장한 소리는 단순한 소문이나 환상 너머에 있는, 살아있는 무언가의 존재를 확신하게 했다.

    카엘은 복도 끝의 비상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철제 계단은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래로, 더 아래로. 숨 막힐 듯한 어둠 속을 헤치며 그는 계속 내려갔다.

    마침내 가장 아래층에 다다랐을 때, 낡고 녹슨 철문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문은 오래전에 봉인된 듯 마법으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문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웅- 웅- 하는 소리가 더욱 크고 선명하게 울리고 있었다.

    카엘은 문에 귀를 바싹 대었다. 쇠와 돌의 냄새, 그리고 어렴풋이 느껴지는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그리고 그때, 웅장한 소리 사이로, 마치 거대한 존재가 내쉬는 한숨처럼, 낮고 깊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 *찾아라… 잊혀진 것을…*

    소리는 바람결처럼 스쳐 지나갔지만, 카엘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것은 명백히 ‘말’이었다. 그것도 누군가의 정신에 직접 울리는 듯한, 섬뜩할 정도로 강렬한 의지가 담긴 목소리였다.

    카엘은 숨을 헐떡이며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가 지금껏 겪은 어떤 경험과도 달랐다. 이건 단순한 금기가 아니었다.

    이곳 지하에는, 살아있는 무언가가 갇혀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카엘은 공포와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푸른 첨탑 학원의 지하에 숨겨진 끔찍한 금기. 그 문이, 자신 앞에서 조금씩 열리고 있었다.

  • 스팀펑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서늘한 강철과 기름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진은 낡은 환풍구 안에서 몸을 웅크렸다. 금속성 마찰음이 뼈를 울렸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땀으로 축축한 손가락이 가슴팍에 매달린 작은 나침반을 만졌다. 바늘은 변함없이 저택의 심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진의 눈은 밤하늘처럼 검고 깊었다. 2년 전, 그 눈은 한때 순수한 열정으로 빛났었다. 그때는 모든 것이 달랐다. 레온, 나의 친구, 나의 형제 같던 레온. 우리는 함께 거대한 기계 도시의 하늘을 꿈꿨고, 증기기관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다. 하지만 그 꿈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_“미안하다, 진. 하지만 네 이름으로는 이 도시가 움직이지 않아. 이건 내가 만들어야 할 미래다.”_

    차가운 미소, 번뜩이던 탐욕스러운 눈빛. 그날, 레온은 우리의 모든 연구 자료와 설계도를 훔쳐 달아났다. 그리고 내게 남겨진 것은 폐허가 된 작업장과, 세상의 조롱뿐이었다. 한쪽 팔을 잃은 것도 그날의 충격 때문이었다. 지금, 내 왼쪽 어깨에선 톱니바퀴와 증기 실린더로 이루어진 의수가 삐걱거리고 있었다. 이 의수야말로 그날의 상흔이자, 동시에 나의 결심을 상징하는 증표였다.

    진은 환풍구 덮개를 조심스럽게 밀어 올렸다. 삐걱이는 소리 하나 없이 부드럽게 열린 틈으로, 아래층의 전경이 펼쳐졌다. 레온의 개인 서재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빛나는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브라스와 구리로 장식된 웅장한 가구들, 벽면을 가득 채운 온갖 기계 부품들, 그리고 중앙에 놓인 거대한 지구본. 모든 것이 그날 훔쳐 갔던 우리의 연구 성과 위에 세워진 레온의 제국을 대변하고 있었다.

    “하…….”

    진은 낮게 숨을 내쉬었다. 폐 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무겁고 탁했다. 그의 감각은 예리하게 벼려져 있었다. 작은 소음, 희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았다. 복도 저편에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발소리, 낡은 시계탑에서 울리는 웅장한 종소리, 그리고 이따금씩 들리는 증기기관의 배기음. 모든 것이 그의 청각에 선명하게 포착되었다.

    그의 등 뒤에 매달린 가방 속에서 작은 기계음이 들렸다. 진이 직접 만든 ‘그림자 거미’였다. 여덟 개의 얇고 유연한 다리를 가진 시계태엽 기계. 그는 그림자 거미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거미는 재빠르게 벽을 타고 내려가 천장에 부착된 감시 카메라의 렌즈를 정확히 가렸다. 진은 거미가 보낸 시야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환풍구에서 뛰어내렸다. 의수는 부드럽게 충격을 흡수했고, 그의 몸은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바닥에 착지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서재 안의 공기는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했다. 예전에는 작업실에 가득했던 기계 기름 냄새, 종이와 잉크 냄새, 그리고 차가운 금속 냄새. 하지만 이제는 희미한 향수 냄새와 고급 담배 연기 냄새가 섞여 있었다. 레온의 취향이었을 터였다.

    진은 바닥에 놓인 양탄자를 피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목적은 명확했다. 레온이 우리 연구의 핵심을 보관했을 만한 곳. 그는 서재를 둘러보았다. 거대한 책장, 그 위에 빼곡히 꽂힌 책들. 그리고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정교한 태엽 장치와 기어들이 얽힌 벽시계.

    그의 시선이 고정된 곳은 바로 그 벽시계 아래에 있는 작은 서랍이었다. 레온이라면 분명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곳에 중요한 것을 숨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요한 것이란, 바로 우리가 함께 꿈꿨던 ‘하늘 도시’의 최종 설계도였다. 레온은 그것을 훔쳐 자신의 이름으로 특허를 내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도시의 이름은 <에테르나>. 영원한 도시라는 뜻이었지만, 진에게는 영원한 고통의 상징일 뿐이었다.

    진은 서랍으로 다가갔다. 그의 의수는 빠르게 움직였다. 작은 잠금장치를 확인한 그는 가방에서 특수 제작된 도구를 꺼냈다. 톱니바퀴 모양의 열쇠와 증기압을 이용한 미세한 드릴. 섬세한 손놀림으로 잠금장치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딸깍, 딸깍. 기계가 맞물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때였다.
    “누구인가!”

    갑작스러운 외침. 진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복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은, 레온의 목소리였다. 그는 비명을 질렀던가? 아니, 뭔가에 놀란 듯한 비명이었다. 진은 잠금장치 해체를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레온의 서재 문이 쾅 하고 열렸다. 문 앞에 선 것은 레온 본인이었다. 그는 고급 실크 가운을 걸친 채, 잔뜩 경계하는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의 한 손에는 묵직한 황동제 리볼버가 들려 있었다. 그의 눈은 어둠에 익숙하지 않은 듯 연신 번뜩였다.

    “거기 누가 있어? 당장 불을 켜라, 이 빌어먹을!”

    레온이 소리쳤다. 복도에서 그의 개인 경호원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진은 서둘러 몸을 숨겼다. 벽시계 아래, 그림자 가장 깊은 곳. 간신히 몸을 숨겼을 때, 서재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눈을 찌르는 빛에 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밝아진 시야 속에서, 레온의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의 얼굴은 피곤함과 짜증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성공한 사업가 특유의 거만함은 여전했다.

    “아무도 없잖아?” 레온은 투덜거렸다. 그의 경호원들이 서재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살폈다. 진은 숨을 죽였다. 의수의 톱니바퀴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제독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침입자는 없습니다만.” 경호원 중 한 명이 말했다.
    “아니, 분명히 뭔가 느껴졌어. 이상한 기운이….” 레온은 초조하게 서재를 훑었다. 그의 시선이 서랍으로 향했다. 진이 손대려던 바로 그 서랍이었다.

    레온은 서랍으로 다가가 직접 손으로 만져보았다. 열쇠 구멍에 작은 흠집이라도 발견할까 봐 진은 긴장했다. 그러나 레온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듯,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잠이 덜 깼나 보군.” 레온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젠장, 하긴 요새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으니.” 그는 투덜거리며 경호원들에게 나갈 것을 명령했다.

    경호원들이 서재 문을 닫고 나간 뒤, 레온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는 서랍을 힐끗 보더니, 피곤한 표정으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문득, 그의 시선이 서재 한편에 놓인 작은 사진 액자로 향했다.

    액자 속에는 두 명의 젊은이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 명은 레온, 그리고 다른 한 명은 한쪽 팔을 잃기 전의 진이었다. 그 사진은 진의 작업실에 걸려 있던 것이었다. 레온은 그것마저 훔쳐 왔다는 말인가.

    레온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것은 후회나 그리움의 미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과거의 어리석음을 비웃는 듯한 조소에 가까웠다.

    “진… 너는 결국 그저 꿈만 꾸는 바보였지.” 레온이 중얼거렸다. “이 <에테르나>는 결국 나의 이름으로 완성될 것이다. 네가 없어도 나는 더 높이 날아오를 수 있어.”

    그 순간, 진의 의수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차가운 금속이 그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심장이 증기기관처럼 뜨겁게 끓어올랐다.

    바로 그때, 레온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잉크병이 흔들렸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잉크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박살 났다. 새까만 잉크가 고급 양탄자를 더럽혔다.

    “으악! 뭐야!” 레온이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깨진 잉크병 옆에 놓인 작은 종이 한 장이었다. 진이 잠금장치를 해체하는 도중, 서랍 틈새에 몰래 끼워 넣은 쪽지였다.

    레온은 떨리는 손으로 쪽지를 집어 들었다. 쪽지에는 단 하나의 문장만이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네가 훔쳐간 것은, 영원히 네 것이 될 수 없어. 곧 되찾으러 갈 것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작은 톱니바퀴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진과 레온, 두 사람만이 알던 비밀스러운 표식. 그들의 옛 작업실 문에 새겨져 있던 문양이었다.

    레온의 얼굴에서 피가 싹 가셨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유령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 그는 주변을 미친 듯이 둘러보았다. “누구냐! 대체 누가 감히……!”

    진은 레온의 얼어붙은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더 이상 서랍에 신경 쓰지 않았다. 메시지는 전달되었다. 씨앗은 뿌려졌다.

    그는 조용히 의수의 갈고리를 꺼내 환풍구 덮개에 걸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마치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레온의 절규가 서재에 울려 퍼지는 동안, 진의 발걸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시작이야, 레온.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은, 내가 직접 무너뜨릴 것이다.”

    그의 눈빛은 밤하늘의 가장 어두운 별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