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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좀비 아포칼립스 상세한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

    ## 애니메이션 대본 & 스토리보드: 잔해 속의 메아리 (Echoes in the Ruins)

    **장르:** 좀비 아포칼립스, 생존 스릴러
    **핵심 줄거리:** 황폐해진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한 소녀의 처절한 생존기

    **[프롤로그]**

    **화면:**
    * **시작:** 암전. 이내 낡고 비틀린 라디오에서 치직거리는 잡음이 들려온다. 간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방송이 섞인다.
    * **점차 밝아지며:** 폐허가 된 도시의 전경. 높은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고, 한때 번화했을 도로는 잡초와 갈라진 콘크리트 잔해로 뒤덮였다. 붉은 노을이 도시 전체를 음산하게 물들인다.
    * **줌 인:** 도로 한복판에 멈춰 선 낡은 버스 한 대.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고, 내부에는 흙먼지가 수북하다.
    * **버스 내부:** 낡은 캠핑용 버스 안. 온갖 잡동사니들이 정돈되어 있다. 캔 통조림, 물병, 몇 벌의 낡은 옷가지. 벽에는 조악하게 그린 세계 지도와, 지워지고 덧그려진 경로들이 표시되어 있다.
    * **뒷모습:** 창밖을 내다보는 한 인물의 뒷모습. 마른 체격이지만 다부진 어깨와 꼿꼿한 자세가 눈에 띈다. 어깨에는 낡았지만 튼튼해 보이는 백팩이 걸려 있다.
    * **클로즈업:** 인물의 손. 굳은살이 박혀 있고, 손목에는 오래된 상처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손에 들린 낡은 만년필로 지도 위 한 지점을 가늘게 긋는다.
    * **얼굴:** 고개를 돌려 화면을 응시하는 유진(20세). 짙은 눈빛에 경계심이 가득하지만, 그 안에는 잊고 싶지만 잊히지 않는 슬픔이 엿보인다. 뺨에는 흙먼지가 묻어 있고, 입술은 바싹 말라 있다.

    **사운드:**
    * (라디오 잡음, 간헐적인 외국어 방송)
    * (바람 소리 – 스산하고 쓸쓸함)
    * (삐걱거리는 버스 내부의 작은 소리)
    * (유진의 숨소리 – 규칙적이고 차분함)

    **내레이션 (유진, 속삭이듯 나지막하게):**
    “세상이 끝났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끝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멈췄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멈춘 시간 속에서 계속해서 살아남아야 했다.”

    **[에피소드 1: 메마른 강변]**

    **SCENE 1**
    **장소:** 폐허가 된 서울의 강변도로
    **시간:** 늦은 오후, 노을이 지는 시간

    **VISUALS/STORYBOARD:**
    * **CUT 1:** 드론 샷. 강물은 뿌옇게 탁해졌고, 강변을 따라 쓰러진 가로수들과 부서진 난간이 끝없이 이어진다. 저 멀리, 한때 위용을 자랑했을 다리의 상판은 끊어져 강물에 잠겨 있다.
    * **CUT 2:** 유진의 전신 샷. 낡은 등산복 차림. 백팩을 메고 한 손에는 직접 개조한 듯한 긴 철봉(끝에 날카로운 쇠붙이가 박혀 있다)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움직임 하나하나에 긴장감이 서려 있다.
    * **CUT 3:** 유진의 시점 샷. 발밑에는 깨진 유리 파편, 썩은 나뭇가지,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잔해들이 널려 있다. 멀리서 건물의 그림자들이 길게 드리워진다.
    * **CUT 4:** 유진의 클로즈업. 눈동자가 끊임없이 주위를 살핀다. 미세한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모습. 턱을 살짝 치켜들어 냄새를 맡는 듯한 동작을 취한다.
    * **CUT 5:** 유진의 손 클로즈업. 낡은 방한 장갑을 낀 손이 철봉을 꽉 쥐고 있다. 장갑의 실밥이 여러 군데 터져 있고, 그 사이로 보이는 손등에 긁힌 상처가 붉게 부어올라 있다.

    **SOUND:**
    * (스산한 바람 소리)
    * (강물 흐르는 소리 – 탁하고 둔탁하게)
    * (유진의 발소리 – 잔해 밟는 소리, 조심스럽고 작게)
    * (간헐적인 멀리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삐걱거림, 긁는 소리)
    * (유진의 거친 숨소리 – 점차 커짐)

    **내레이션 (유진, 속으로):**
    “벌써 3일째. 상처가 곪고 있다. 소독약이 필요해. 항생제도. 이대로 두면 열이 나고… 결국….”
    “젠장.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결국은 이 망할 폐허를 또 뒤져야 하는 신세라니.”

    **SCENE 2**
    **장소:** 강변을 따라 이어진 숲과 폐허가 된 고가도로 아래
    **시간:** 늦은 오후

    **VISUALS/STORYBOARD:**
    * **CUT 1:** 유진, 고가도로 아래 어두컴컴한 공간을 통과한다. 빛이 거의 닿지 않아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 **CUT 2:** 유진의 발걸음이 멈춘다.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된다.
    * **CUT 3:** 유진의 시점 샷. 고가도로 기둥 뒤, 낡은 시체 여러 구가 쓰러져 있다. 그 중 하나가 움직인다. 느릿하고 기괴한 동작으로 고개를 돌린다. 눈은 텅 비어 있고, 입가는 검게 변색되어 있다. – ‘그림자들’의 첫 등장.
    * **CUT 4:** 유진의 표정 클로즈업. 순간적인 긴장감. 눈은 커졌지만 이내 차분하게 경계심으로 바뀐다. 절대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문다.
    * **CUT 5:** 유진, 기둥 뒤로 몸을 숨긴다. 그림자들은 여전히 느릿하게 그곳을 배회한다. 그들의 피부는 회색빛으로 변색되었고, 옷은 해져 너덜거린다. 몸에서 희미하게 비릿한 냄새가 풍겨오는 듯한 연출.
    * **CUT 6:** 유진, 숨죽이며 기다린다. 그림자들이 유진의 반대편으로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후,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그녀의 움직임은 맹수처럼 유연하고 소리 없다.
    * **CUT 7:** 유진, 그림자들을 피해 고가도로를 벗어나 강변 쪽으로 다시 나선다. 발밑의 잔해들이 바스락거릴까 봐 신경 쓰는 모습.
    * **CUT 8:** 유진의 백팩에 달린 작은 주머니가 나뭇가지에 걸려 찢어진다. 작은 금속 조각 하나가 떨어져 바닥에 부딪힌다.
    * **CUT 9:**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순간 멈춘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방향, 즉 유진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느릿하지만 집요하게.
    * **CUT 10:** 유진의 눈 클로즈업. 공포가 스친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찢어진 백팩 주머니를 무시하고 숲속으로 전력 질주한다.

    **SOUND:**
    * (희미한 그림자들의 으르렁거리는 소리)
    * (유진의 긴장된 숨소리)
    * (유진의 발소리 – 조심스러움)
    * (나뭇가지에 백팩 주머니가 찢어지는 ‘찍’ 소리)
    * (금속 조각이 바닥에 떨어지는 ‘쨍그랑’ 소리 – 꽤 크게 울린다)
    * (그림자들의 움직임이 빨라지는 소리 – 발소리, 옷 스치는 소리)
    * (유진의 전력 질주 발소리 – 빠르고 격렬하게)
    * (숨소리 – 거칠게 몰아쉼)

    **내레이션 (유진, 속으로, 다급하게):**
    “망할. 망할! 저게 왜 지금 떨어져!”

    **SCENE 3**
    **장소:** 폐허가 된 서울의 뒷골목, 낡은 병원 근처
    **시간:** 해가 완전히 지기 직전

    **VISUALS/STORYBOARD:**
    * **CUT 1:** 유진, 좁은 골목을 빠져나온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고, 머리카락은 얼굴에 달라붙어 있다. 그녀의 뒤로는 그림자들이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며 겨우 안도한다.
    * **CUT 2:** 유진의 시야에 들어오는 거대한 건물. ‘세브란스’ 같은 실제 병원 이름은 배제하고, ‘서울 시립 종합병원’이라고 쓰여 있던 낡은 간판이 반쯤 떨어져 기울어져 있다. 외벽은 검게 그을려 있고, 창문들은 대부분 깨져 뻥 뚫려 있다. 건물 전체에서 으스스한 기운이 풍겨 나온다.
    * **CUT 3:** 유진의 얼굴 클로즈업. 힘겹게 숨을 몰아쉬면서도, 눈빛은 흔들림 없이 병원을 응시한다.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알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듯 결연한 표정.
    * **CUT 4:** 유진, 허리춤에 찬 작은 주머니에서 낡은 지도 한 장을 꺼낸다. 지도는 여러 번 접혔다 펴진 흔적이 역력하고, 손때가 묻어 있다. 병원 위치를 다시 한번 확인한다.
    * **CUT 5:** 지도를 보던 유진의 시선이 멈춘다. 지도의 한 귀퉁이에 작은 글씨로 적힌 메모 – 흐릿하게 ‘엄마, 아빠’라고 쓰여 있다.
    * **CUT 6:** 유진의 표정. 순간적으로 슬픔과 그리움이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이내 그 감정을 억누르고 다시 냉정한 표정을 되찾는다. 마치 슬퍼할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듯이.
    * **CUT 7:** 유진, 철봉을 단단히 고쳐 쥐고 병원 입구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해는 완전히 넘어가고, 도시는 어둠 속으로 잠기기 시작한다.

    **SOUND:**
    * (유진의 거친 숨소리 – 점차 안정됨)
    * (멀리서 들려오는 그림자들의 희미한 울음소리)
    * (낡은 병원 간판이 바람에 흔들리는 삐걱거리는 소리)
    * (유진이 지도를 펼치고 접는 종이 소리)
    * (심장 박동 소리 – 유진의 긴장감을 표현)
    * (밤벌레 소리 – 스산하고 적막함)

    **내레이션 (유진, 속으로):**
    “여기까지 왔어. 여기까지 와야만 했어.”
    “엄마, 아빠… 보고 싶어.” (아주 짧게, 거의 들리지 않게)

    **SCENE 4**
    **장소:** 폐허가 된 병원 내부, 1층 로비
    **시간:** 밤

    **VISUALS/STORYBOARD:**
    * **CUT 1:** 병원 로비. 한때 사람들로 북적였을 공간은 이제 처참한 폐허가 되었다. 접수대는 부서져 있고, 의자들은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다. 천장의 형광등은 깨져 있고, 비상구 표지판만이 희미하게 깜빡인다.
    * **CUT 2:** 유진, 로비 한가운데에 선다. 그녀의 휴대용 손전등이 주변을 비춘다. 빛이 닿는 곳마다 먼지가 공중에 떠다니는 것이 보인다. 바닥에는 의료 기록 차트와 엑스레이 필름 조각들이 널려 있다.
    * **CUT 3:** 유진의 손전등 빛이 벽에 닿는다. 붉은색 스프레이로 ‘희망 없음’이라는 글씨가 크게 쓰여 있다. 그 옆에는 사람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희미한 손자국들이 여러 개 찍혀 있다.
    * **CUT 4:** 유진, 침을 꿀꺽 삼킨다. 공기는 눅눅하고 곰팡이 냄새가 진동한다. 그녀는 후각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코를 살짝 찡그린다.
    * **CUT 5:** 유진, 로비에서 가장 가까운 약국 표지판을 발견한다. 표지판은 기울어져 거의 떨어질 지경이다.
    * **CUT 6:** 유진, 약국으로 향한다. 복도는 어둡고 길다. 양쪽의 병실 문들은 굳게 닫혀 있거나 활짝 열려 내부의 텅 빈 공간을 드러낸다. 멀리서 무언가 긁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들린다.
    * **CUT 7:** 유진, 긁는 소리가 나는 곳에서 잠시 멈춘다. 손전등 빛을 비춰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귀를 기울이는 모습. 소리는 멈춘다.
    * **CUT 8:** 유진,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 소리가 났던 곳을 등진 채 약국으로 향하는 그녀의 뒷모습. 복도의 끝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유진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SOUND:**
    * (병원의 으스스한 정적)
    * (유진의 손전등 빛이 움직이는 ‘휙휙’ 소리)
    * (비상구 표지판의 ‘틱틱’ 거리는 소리)
    * (먼지 낀 공기 속에서 유진의 마스크 속 숨소리)
    * (멀리서 들려오는 ‘드르륵, 드르륵’ 긁는 소리 – 이내 멈춤)
    * (유진의 발소리 – 조심스럽게 ‘사각, 사각’)
    * (복도 끝에서 희미하게 들리는 ‘스윽’ 하는 움직임 소리)

    **내레이션 (유진, 속으로):**
    “하필… 병원이라니.”
    “공기가 무겁다. 이 냄새… 익숙해질 수가 없어.”

    **SCENE 5**
    **장소:** 병원 내부, 약국
    **시간:** 밤

    **VISUALS/STORYBOARD:**
    * **CUT 1:** 약국 내부. 약장은 부서져 있고,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다. 약품들은 바닥에 나뒹굴거나, 빈 통들만 남아 있다. 약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역겹다.
    * **CUT 2:** 유진, 손전등으로 약장과 바닥을 샅샅이 뒤진다. 잔해 속에서 쓸 만한 약을 찾기 위해 필사적이다. 그녀의 손등 상처가 아릿하게 느껴지는 듯, 얼굴을 찌푸린다.
    * **CUT 3:** 유진, 약품 상자 더미를 헤치다가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상자에는 ‘항생제’라고 쓰여 있다. 그녀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감이 스친다. 하지만 상자 안에는 단 두 알의 약만 남아 있다.
    * **CUT 4:** 유진, 다시 뒤진다. 이번에는 ‘소독액’이라고 쓰인 낡은 병을 찾아낸다. 병 안에는 절반 정도의 액체만 남아 있다. 그녀의 입가에 간신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오른다.
    * **CUT 5:** 그 순간, 약국 문이 ‘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난다. 유진,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본다.
    * **CUT 6:** 약국 문 앞에서 그림자 한 마리가 비틀거리며 들어선다. 이 그림자는 일반적인 그림자보다 훨씬 크고, 찢어진 환자복 사이로 앙상한 갈비뼈가 드러나 있다. 움직임이 더 빠르고 사납다. – ‘변형된 그림자’
    * **CUT 7:** 변형된 그림자, 유진을 발견하자마자 맹렬하게 달려든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약국 전체를 뒤흔든다.
    * **CUT 8:** 유진, 재빨리 철봉을 휘둘러 그림자의 머리를 가격한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림자는 비틀거리지만, 쓰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격분한 듯 달려든다.
    * **CUT 9:** 유진, 약국 내부를 뛰어다니며 그림자를 피한다. 약장과 진열대를 방패 삼아 움직인다. 그림자는 물건들을 부수며 유진을 쫓는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고, 약품 통들이 쏟아진다.
    * **CUT 10:** 유진, 약장의 맨 위 칸으로 몸을 날려 올라간다. 그녀의 민첩함이 돋보인다. 그림자는 약장 아래에서 손을 뻗어 유진을 잡으려 하지만 닿지 않는다.
    * **CUT 11:** 유진, 약장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림자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 위로 향한다. 유진의 눈과 그림자의 텅 빈 눈이 마주친다.
    * **CUT 12:** 유진, 약장 위에서 작은 유리병들을 던진다. 병들이 그림자의 머리에 맞아 깨지지만, 그림자에게는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다.
    * **CUT 13:** 유진,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한다. 약장 구석에 있던 낡은 소화기를 집어 든다.
    * **CUT 14:** 유진, 소화기를 그림자의 얼굴을 향해 분사한다. ‘쉬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흰 가루가 그림자의 얼굴을 뒤덮는다. 그림자는 고통스러운 듯 괴성을 지르며 뒤로 물러난다.
    * **CUT 15:** 시야가 가려진 그림자를 뒤로하고, 유진은 재빨리 약장에서 내려와 약국 문을 향해 달린다. 백팩에 약품들을 대충 쑤셔 넣는 모습.
    * **CUT 16:** 유진, 약국 문을 간신히 빠져나와 복도로 나선다. 문을 닫으려 하지만, 그림자가 문틈으로 손을 뻗어 막는다.
    * **CUT 17:** 유진, 철봉으로 그림자의 손을 있는 힘껏 내려친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의 손이 뒤로 물러나고, 그 틈을 타 유진은 문을 닫는다.
    * **CUT 18:** 유진, 문을 닫자마자 옆에 있던 낡은 캐비닛을 문에 기대어 막는다. 안에서 그림자가 문을 ‘쿵, 쿵’ 하고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SOUND:**
    * (약병, 유리 파편 흩어지는 소리)
    * (유진의 필사적인 뒤지는 소리)
    * (항생제, 소독약 발견 시 유진의 작은 안도 한숨)
    * (약국 문 ‘쿵!’ 하고 열리는 소리 – 크고 위협적임)
    * (변형된 그림자의 맹렬한 그르렁거리는 소리 – 훨씬 크고 위협적임)
    * (철봉으로 머리를 가격하는 ‘퍽!’ 소리)
    * (유리 깨지는 소리, 약품 통 쏟아지는 소리)
    * (유진의 다급한 발소리)
    * (소화기 분사 ‘쉬이이익!’ 소리)
    * (그림자의 고통스러운 괴성)
    * (문 닫히는 ‘쾅!’ 소리)
    * (캐비닛 미는 ‘끽, 끽’ 소리)
    * (문 안에서 그림자가 두드리는 ‘쿵, 쿵’ 소리)
    * (유진의 거칠고 힘든 숨소리)

    **내레이션 (유진, 속으로, 격앙되게):**
    “젠장… 이런 놈이 여기 숨어있을 줄이야.”
    “살아야 해… 살아남아야 해…”

    **SCENE 6**
    **장소:** 병원 밖, 뒷골목
    **시간:** 새벽

    **VISUALS/STORYBOARD:**
    * **CUT 1:** 유진, 병원 뒷문을 통해 간신히 빠져나온다. 온몸이 땀과 흙먼지로 범벅이 되어 있고, 옷은 여러 군데 찢어져 있다. 다리 한쪽을 절뚝거린다.
    * **CUT 2:** 유진, 벽에 기대어 주저앉는다. 백팩을 벗어놓고 주머니에서 항생제와 소독약을 꺼낸다.
    * **CUT 3:** 유진의 손 클로즈업.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상처는 붉게 부어오르다 못해 일부는 거뭇하게 변색되어 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소독액을 붓는다. ‘쓰읍!’ 하고 숨을 들이쉬며 고통을 참는다.
    * **CUT 4:** 유진, 항생제 두 알을 물 없이 삼킨다. 쓴맛이 느껴지는 듯 얼굴을 찌푸린다.
    * **CUT 5:** 유진,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벽하늘에는 희미하게 별이 떠 있다. 여전히 잔인하고 아름다운 풍경.
    * **CUT 6:** 유진의 시선이 멀리 폐허가 된 도시를 향한다. 앙상한 건물들의 실루엣이 밤하늘을 배경으로 늘어서 있다.
    * **CUT 7:** 유진의 클로즈업. 눈가에 맺힌 작은 눈물방울. 하지만 곧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고 다시 단단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남으려는 의지로 가득하다.
    * **CUT 8:** 유진, 백팩을 다시 메고 절뚝이는 다리로 일어선다. 그녀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할지, 또 어떤 위험이 기다릴지 알 수 없지만,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 **CUT 9:** 유진의 뒷모습. 폐허 속으로 점점 멀어져 간다.

    **SOUND:**
    * (유진의 거친 숨소리 – 점차 고통과 지친 숨소리로 변함)
    * (소독액 붓는 소리 – ‘철썩’)
    * (유진의 고통스러운 ‘쓰읍!’ 소리)
    * (약 삼키는 ‘꿀꺽’ 소리)
    * (밤벌레 소리,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알 수 없는 소음)
    * (유진의 절뚝거리는 발소리 – ‘탁, 끌리는 소리’)
    * (점차 멀어지는 유진의 발소리)
    * (음악 – 조용하고 서정적이지만, 슬픔과 희망이 공존하는 테마)

    **내레이션 (유진, 속으로):**
    “이대로 끝날 수는 없어. 아직… 끝이 아니야.”
    “나는… 살아남을 거야. 어떻게든.”

    **[에피소드 1 종료]**

  • 스팀펑크 독립적인 단편 소설

    철룡시(鐵龍市) 지하미궁은 한때 영광스러운 증기 시대의 잔해들이 쌓여 만들어진 거대한 유기체였다. 수만 개의 톱니바퀴와 놋쇠 파이프, 구리선이 얽혀 거미줄처럼 펼쳐진 이 도시는 위로는 높이 솟은 증기탑과 날아다니는 비행선들이 오가는 화려한 상층부와는 달리, 밑바닥은 영원한 석탄 먼지와 기름때, 그리고 증기음의 불협화음 속에서 살아 숨 쉬었다.

    강 지환은 그 불협화음 속에서 가장 낮은 음을 연주하는 이들 중 하나였다. 그의 직업은 고철 처리공. 다른 이들이 미련 없이 버린, 혹은 그 가치를 알지 못하는 기계 잔해들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일이었다. 낡은 작업복과 기름때 묻은 장갑은 그의 두 번째 피부나 다름없었다. 그의 작은 작업실은 지하미궁의 가장 깊숙한 곳, 더 이상 증기압이 도달하지 않아 낡은 가스등만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곳에 있었다.

    오늘도 지환은 한숨을 쉬며 묵직한 고철 더미를 뒤적였다. 삐걱거리는 크레인이 거대한 증기 엔진 블록을 옮기는 소리, 어딘가에서 터져 나오는 증기 분출음,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상층부 비행선의 웅장한 엔진 소리가 그에게는 배경음악과 같았다.
    “젠장, 또 이걸 갖다 버렸군.”
    그의 손에 들린 건 녹슨 강철 시계추였다. 분명히 한때는 거대한 시계탑의 심장이었을 터. 이제는 그저 쓰레기일 뿐이었다. 그는 시계추를 다른 고철 더미 위에 던져버렸다. ‘끼이잉’ 하는 둔탁한 금속 마찰음이 작은 작업실을 울렸다.

    그때였다. 뭉툭한 고철 더미 사이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다른 금속들과는 다른, 낡았지만 어딘가 범상치 않은 광택이었다. 지환은 호기심에 이끌려 손을 뻗었다. 묵직하고 차가운 감촉. 손에 쥐어진 것은 한 뼘도 채 되지 않는 낡은 황동 회중시계였다.

    다른 시계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보통의 증기식 시계들은 복잡한 파이프와 밸브, 증기 압력 게이지가 노출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시계는 매끈하고 단순했다. 겉면에 새겨진 문양은 흔히 볼 수 있는 톱니바퀴나 용 문양이 아니었다. 고대어로 보이는 알 수 없는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고, 시계 테두리에는 푸른빛을 띠는 작은 광석들이 박혀 있었다. 용두(龍頭)라고 불리는 태엽 감는 꼭지는 일반적인 시계보다 훨씬 두툼하고 묵직했으며, 그 위에도 기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뭐야…?”
    지환은 그 시계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태엽을 감는 부분은 굳게 잠겨 있는 듯했고, 시간 조절 나사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흔들어도 째깍거리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완전히 죽은 시계였다. 하지만 버려진 고물 더미 속에서 이렇게 멀쩡한 상태로 발견되었다는 게 이상했다. 무엇보다, 손바닥 위에 올려두니 희미하게 맥박처럼 두근거리는 미열이 느껴지는 듯했다. 착각인가?

    그는 시계를 작업대 위로 가져왔다. 낡은 가스등 아래서 황동 시계는 묘한 빛을 발했다. 그는 작은 나사들을 풀기 위한 도구들을 꺼냈다. 증기시대의 모든 기계는 분해와 조립이 가능해야 했다. 하지만 이 시계는 달랐다. 아무리 찾아도 분해할 만한 틈새나 나사가 보이지 않았다. 겉면은 하나의 완벽한 황동 덩어리처럼 매끄러웠다.

    “젠장, 이건 또 무슨 조립 방식이야?”
    그는 작은 망치로 시계의 이음새를 찾아 살살 두드려 보았다. 텅, 텅, 텅. 묵직하고 울림 있는 소리가 났다. 그때였다. 시계 표면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들이 희미하게, 아주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듯했다. 마치 시계 안에서 빛이 샘솟는 것처럼. 지환은 숨을 멈췄다.

    그는 다시 시계를 들어 올렸다. 손에 느껴지는 미열은 이제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그 시계는 스스로 열을 발하고 있었다.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그 열은 규칙적이었다. 그는 무심코 용두를 만졌다. 태엽이 감겨 있지 않았음에도 용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의 손가락이 용두에 흡수되는 듯한, 미약한 자기장 같은 기운.

    지환은 조심스럽게 용두를 왼쪽으로 돌려보았다. 보통의 시계는 오른쪽으로 태엽을 감는다. 하지만 이 시계는 처음부터 비범했다. 덜컥! 하는 소리 대신, 그의 손끝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리고 놀랍게도, 시계 표면에 새겨진 고대 문양들이 푸른빛으로 반짝이기 시작했다. 작업실의 낡은 가스등 불빛마저도 그 푸른빛에 흡수되는 듯했다.

    웅-
    낮고 깊은 공명이 작업실을 울렸다. 그것은 증기 엔진의 진동음과는 확연히 다른, 훨씬 더 고요하고 순수한 울림이었다. 그리고 시계의 유리판 안에 멈춰 있던 시침과 분침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꾸로.

    “미쳤나…?”
    지환은 눈을 비볐다. 분명히 시계 바늘은 반시계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시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 빛은 그의 손을 타고 올라와 작업실 전체를 휘감았다. 낡은 작업실의 풍경이 미묘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녹슨 공구들이 마치 오래된 기억을 되찾은 듯 희미하게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작업대 한구석에 놓여 있던, 수십 년간 녹슬어 한 덩어리가 되어버린 거대한 톱니바퀴가 갑자기 ‘움찔’했다. 지환은 깜짝 놀라 시계를 놓칠 뻔했다. 그 톱니바퀴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미약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녹슨 표면에 쌓인 먼지들이 푸른빛 속에서 미세하게 흩어졌다.

    지환은 다시 시계에 시선을 고정했다. 시계 바늘은 여전히 거꾸로 돌고 있었다. 그리고 시계가 내뿜는 푸른빛은 작업실의 모든 금속 물질에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녹슨 쇠붙이들이 미세하게 떨리고, 낡은 놋쇠 파이프에서는 아주 희미하게, 고대 도시의 심장박동처럼 맥동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이것은 증기 기관이나 톱니바퀴의 물리적인 힘이 아니었다. 증기의 뜨거운 압력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힘이었다. 훨씬 더 오래되고, 훨씬 더 근원적인.

    그는 심장이 터질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낡은 황동 시계는 이제 그의 손 안에서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시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은 작업실의 모든 사물들을 관통하며,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흐름을 보여주는 듯했다. 낡은 벽돌 틈새로 흐르는 지하수, 땅속 깊이 박힌 고대 유적의 잔해들까지. 모든 것이 그의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시계 용두를 다시 원래 위치로 돌려놓았다. 덜컥. 작은 진동이 멈추자, 시계의 푸른빛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시계 바늘도 멈췄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작업실은 다시 가스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 녹슨 고철과 기름때로 가득한 지환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환은 알았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세계가 바뀌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단순한 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증기 시대 이전에 존재했던, 고대의 숨겨진 마법의 힘이었다. 그는 이제 철룡시 지하미궁의 고철 처리공이 아니었다. 그는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을 우연히 열어버린 탐험가였다. 그의 심장은 고철과 증기로 가득 찬 도시의 심장 박동보다 더 강하게, 알 수 없는 설렘과 두려움으로 뛰고 있었다. 이 작은 황동 시계가 앞으로 어떤 운명을 가져올지, 그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 심리 스릴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도시의 밤은 언제나 그랬듯 침묵을 가장한 웅성거림으로 가득했다. 지훈은 익숙한 고층 아파트 복도를 걸으며 주머니 속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하루 종일 시달린 회사 생활의 잔여 피로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이 문만 열고 들어가면 모든 것이 편안해질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그를 지탱했다.

    철컥.

    익숙한 마찰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짙은 어둠이 그를 맞았다. 스위치를 눌러 형광등을 켜자, 텅 빈 거실이 그제야 실체를 드러냈다. 언제나 정리정돈을 완벽하게 하는 습관 덕분에 집안은 늘 모델하우스처럼 깔끔했다.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가지런히 넣고, 열쇠는 현관 옆 작은 선반 위에 놓았다. 이 모든 행동이 의식의 흐름 없이 이루어지는, 일종의 의식과도 같았다.

    지훈은 씻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줄기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자,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꼈다. 샴푸 향과 함께 피로가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물기를 닦던 중, 문득 현관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딸깍… 툭.”

    작은 소리였지만, 정적 속에서 유난히 또렷했다. 지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였지? 분명 뭔가 떨어진 소리인데. 거실에 내려놓았던 리모컨이라도 고양이처럼 굴러 떨어진 걸까? 고양이는커녕, 살아있는 생명체라고는 지훈 자신 외에는 없었다. 그는 잠시 귀를 기울였지만, 더 이상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피곤해서 헛들었나 보다.’ 그는 애써 무시하며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현관 선반을 보는 순간, 심장이 쿵 떨어졌다.

    분명히 현관 선반 위에 놓아두었던 열쇠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도 그냥 떨어진 게 아니라, 열쇠고리가 문 쪽을 향한 채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내려놓은 것처럼. 지훈은 순간 섬뜩한 기분이 들었지만, 곧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젠장, 피곤해서 내가 잘못 놓았나 보네.”

    그는 중얼거리며 열쇠를 다시 선반 위에 올렸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다. 서둘러 잠옷으로 갈아입고 부엌으로 향했다. 간단하게 야식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내용물을 살피는 사이, 거실 쪽에서 다시 ‘딸깍’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명확했다. 냉장고 문을 닫고 거실을 향해 몸을 돌리는 순간, 등 뒤에서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자 아무것도 없었지만,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서 책 한 권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악!”

    지훈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 책은 어제 밤늦게까지 읽던 스릴러 소설이었다. 분명히 테이블 중앙에 놓아두었는데,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바닥에 착지했다.

    지훈은 숨을 헐떡이며 책을 주워 들었다. 손에 땀이 흥건했다. 말도 안 돼. 바람? 진동? 지진이라도 났나? 그는 휴대폰을 꺼내 지진 알림을 확인했지만,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주변 아파트들은 고요했고,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도 없었다.

    “누가… 누가 있는 건가?”

    목소리가 떨렸다. 아파트에는 늘 지훈 혼자였다. 혹시 침입자? 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발광하듯 뛰었다. 재빨리 집안을 훑어보았다. 침실, 작은방, 부엌, 욕실. 모두 텅 비어 있었다. 창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현관문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구조였다.

    그럼 대체 뭐지?

    지훈은 공포에 질려 더듬거리며 휴대폰을 들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할까? ‘제 집에서 책이 저절로 떨어졌어요!’라고? 비웃음만 당할 뿐이겠지.

    그는 애써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했다. 착각일 수도 있어.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거다. 몸이 피곤하면 뇌가 이상한 신호를 보내기도 하니까. 그는 심호흡을 했다.

    하지만 그때, 부엌 싱크대에서 갑자기 수도꼭지가 ‘칙!’ 소리를 내며 저절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지훈은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는데, 잠겨 있던 수도꼭지가 혼자서, 제 의지로 돌아갔다. 차가운 물줄기가 싱크대에 부딪히며 신경을 긁는 소리를 냈다.

    “이게… 이게 무슨… 말도 안 돼…”

    그는 비틀거리며 수도꼭지로 다가갔다. 차가운 쇠붙이를 겨우 붙잡고 잠그자, 물줄기가 끊겼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더 이상 착각이라고, 피곤해서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이건 명백히 비정상적인 현상이었다.

    그때였다. 거실에서 TV가 저절로 켜졌다. ‘지직-‘ 하는 노이즈와 함께 화면이 번뜩였다. 지훈은 몸을 돌려 TV를 응시했다. 화면 속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저 하얀색과 검은색 노이즈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볼륨은 최대치로 올라가 있었다. 귀를 찢을 듯한 소음이 아파트 전체를 뒤흔들었다.

    지훈은 손을 뻗어 리모컨을 찾았지만, 리모컨은 소파 밑으로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그는 몸을 숙여 리모컨을 꺼내려 애썼지만, 잡히지 않았다. TV의 노이즈는 점점 더 커지는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사냥꾼에게 쫓기는 먹이처럼 공포에 질려 허둥거렸다.

    “꺼져! 꺼지라고!”

    그는 소리쳤다. 하지만 TV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노이즈 속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형태를 드러내는 듯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얼굴이 서서히 떠오르는 것처럼.

    그는 절망에 찬 눈빛으로 TV를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뒤편 침실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어둠은 마치 심연처럼 깊었고, 그 안에서 차가운 기운이 확하고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지훈은 얼어붙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TV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고통스러웠고, 등 뒤에서 열리는 문은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의 시선을 느끼게 했다. 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그때, TV 화면 속 노이즈가 갑자기 멈췄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지훈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의 얼굴을 닮은 형체가 어둠 속에서 비틀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눈은 깊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고, 입꼬리는 기괴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그 형체는 화면 밖으로 손을 뻗는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지훈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집은 더 이상 그에게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아니, 무언가가 그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지금, 그의 가장 깊은 곳을 침범하고 있었다.

    침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안에서 어둠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그 어둠이 지훈을 삼키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지훈은 뒤도 돌아볼 수 없었다. 그의 시선은 TV 속 비틀린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이 집 안에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온몸에 돋은 소름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TV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그러나 실제로는 그의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차갑고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오랜만이야.”

  • 타임슬립 (시간여행)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오래된 흙냄새는 강현에게 늘 익숙한 것이었다. 아니, 익숙하다 못해 이젠 지겨울 지경이었다. 뜨거운 초여름 햇볕 아래, 그는 낡은 솔로 유적의 파편을 털어내며 한숨을 쉬었다. 이곳은 신라 시대의 절터로 추정되는 곳. 벌써 두 달째, 교수님은 ‘역사의 숨결’을 운운했지만, 강현의 눈에는 그저 닳고 닳은 돌멩이와 깨진 기와 조각들뿐이었다.

    “강현아, 거기 그렇게 대충 하면 되겠니? 조심스럽게 다뤄야지!”

    뒤에서 들려오는 조교 선배의 잔소리에 강현은 어깨를 움찔했다. “네, 선배.” 대충 대답하며 시선을 멀리 옮겼다. 발굴 현장의 가장자리,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잡목림 뒤편에 희미하게 드러난 낡은 돌담이 눈에 들어왔다. 저곳은 발굴 구역에서도 벗어나 있어 아무도 손대지 않았다. 그저 무성한 칡넝쿨과 잡초에 뒤덮여 있을 뿐. 하지만 묘하게, 강현은 저곳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뭔가… 다른 것이 있을 것 같은 기분.

    점심시간, 동료들이 왁자지껄 도시락을 까먹는 동안, 강현은 그 묘한 이끌림에 못 이겨 조용히 잡목림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냐, 강현아?” 멀리서 누군가 물었지만, 그는 못 들은 척 더 깊숙이 들어갔다. 빽빽한 나무들 사이를 헤치고 들어가자, 햇빛도 제대로 닿지 않는 어둑한 공간이 나타났다. 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폐부로 스며들었다.

    드디어 눈앞에 드러난 돌담. 발굴 현장의 다른 석축과는 확연히 다른, 거칠고 불규칙한 형태였다. 마치 아무렇게나 쌓아 올린 듯하지만, 틈새마다 끈끈한 흙과 이끼가 달라붙어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강현은 손으로 칡넝쿨을 걷어냈다. 넝쿨에 감춰져 있던 돌담의 일부가 드러나자, 그는 숨을 들이켰다.

    돌담의 한가운데, 사람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만한 크기의 틈이 있었다. 인위적으로 파낸 것 같기도, 아니면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스럽게 생긴 동굴 입구 같기도 했다. 틈새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어딘가 모르게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강현은 아무런 도구도 없이 조심스럽게 그 틈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내부는 생각보다 깊었다. 초입은 좁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이 넓어졌다. 흙과 돌멩이가 뒤섞인 통로를 따라 몇 미터쯤 걸었을까, 갑자기 발밑의 흙이 축축하게 젖어 있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쇠비린내와 함께, 주변의 어둠이 미묘하게 짙어지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햇빛 한 점 없는 곳인데도, 어둠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듯했다.

    강현은 휴대폰 플래시를 켰다. 좁은 빛줄기가 주위를 밝혔다. 통로의 끝은 의외로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작은 동굴이었다. 벽면은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었고, 천장은 아치형으로 높았다. 그리고 그 공간의 정중앙에, 그의 심장을 쿵 떨어뜨릴 만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돌로 깎아 만든 제단처럼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 위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금속 조형물이 놓여 있었다. 낡고 오래되었지만, 표면은 기묘한 문양들로 뒤덮여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그 금속 조형물에서 희미하게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마치 살아 숨 쉬는 듯, 약하게 깜빡이는 빛.

    “이게… 뭐야?”

    강현은 홀린 듯이 조형물에 다가갔다. 플래시 빛에 반사되어 금속의 표면이 번쩍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손끝에 닿은 것은 미지근하고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누군가의 체온에 데워져 있었던 것처럼.

    손가락이 조형물의 표면, 가장 중앙에 위치한 원형 문양에 닿는 순간이었다.

    *쉬이이익-*

    정적을 찢는 듯한 소리와 함께, 조형물에서 강렬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강현의 온몸에 전기가 흐르는 듯한 격렬한 감각이 엄습했다. 고통은 아니었다. 오히려 의식을 휩쓸어버리는 거대한 에너지의 폭풍 같았다. 눈앞이 번쩍이고, 세상의 모든 색깔이 한데 섞여 녹아내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우웅- 쿵!*

    귀청을 때리는 굉음과 함께, 주변의 시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벽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고, 그의 눈앞에 환영이 펼쳐졌다. 거대한 도시에 솟아오른 기이한 탑, 하늘을 가로지르는 은빛 기계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고대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시간이 뒤틀리고,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는 혼돈 속에서, 강현은 자신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숨 막히는 감각. 존재의 근원이 뒤흔들리는 것 같은 경험.

    그리고, 모든 것이 멈췄다.

    푸른빛은 잦아들었고, 동굴 안은 다시 희미한 어둠으로 돌아왔다. 금속 조형물은 여전히 제단 위에 놓여 있었지만, 아까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태양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그의 손길로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난 것처럼.

    강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댔다. 온몸은 땀으로 축축했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방금 일어난 일이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의 오른손 손바닥에서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희미한 푸른 빛이 깜빡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조형물에서 나오던 것과 똑같은 빛.

    그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빛은 선명하게 느껴졌고, 그 빛의 근원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뜨거운 에너지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몸 안에 새로운 힘이 자리 잡은 듯한 이질적인 감각.

    강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빛나는 금속 조형물을 응시했다.

    “이게… 도대체….”

    그는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충격과 혼란, 그리고 알 수 없는 기대감이 뒤섞여 반짝이고 있었다. 평범한 발굴 현장에서 시작된 그의 하루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미지의 영역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 고대의 힘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강현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거대한 물결에 휩쓸린 듯한 기분뿐이었다. 동굴 속에서, 금속 조형물은 강현의 새로운 운명을 비추듯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차가운 금속이 무자비한 대지를 긁어대는 소리가 황량한 공기 속으로 찢어졌다. 우주선 ‘황금빛 새벽 호’는 붉은 황무지 위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착륙 준비 완료를 알리는 제로의 건조한 목소리가 함선 내부에 울렸다.

    “선장님, 대기권 진입 완료, 착륙 직전입니다. 대기 성분 분석 결과, 호흡에는 지장 없으나 외부 기온 영하 40도, 강한 플라즈마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알았어, 제로. 비상용 히트팩 단단히 챙겨. 클레어, 유적 데이터 다시 한번 확인해.” 선장 이사벨의 목소리는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조종석 앞 유리 너머로 펼쳐진 붉은 행성의 풍경을 응시했다. 거대한 협곡과 기이한 암석들이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이곳은 은하계 지도에서도 지워진, 이름 없는 행성이었다.

    “네, 선장님. 기록상으로는… 이곳은 ‘잊혀진 자들의 행성’으로 불렸습니다. 마지막 탐사선이 접근한 게 3천 년 전, 이후 모든 기록이 소멸되었고 행성 자체도 삭제되었죠. 저희가 포착한 미약한 에너지 신호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잊혔을 겁니다.” 클레어는 홀로그램 패드를 조작하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은 고대 문명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흥미롭군. 이렇게 철저하게 숨기려는 흔적이 역력해. 대체 뭘 감추고 싶었던 걸까?” 카이가 감탄하듯 읊조렸다. 그는 젊은 탐사 전문가로, 언제나 새로운 발견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시선은 벌써부터 함선 외부의 어딘가를 향해 있었다.

    착륙 충격음이 한 번 울리고, 선체가 고요해졌다.

    “자, 이제 나갈 시간이다. 장비 점검. 카이, 선두에 서.” 이사벨이 짧게 명령했다.

    카이는 즉시 반응하며 개인 무장과 휴대용 스캐너를 챙겼다. 헤비 아머 슈트를 입고 외부로 연결된 램프를 따라 나섰다. 살을 에는 듯한 플라즈마 바람이 굉음을 내며 그를 휘감았지만, 슈트의 보호막은 끄떡없었다. 멀리, 거대한 협곡의 벽면에 거뭇한 그림자처럼 박혀 있는 인공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스캐너가 발신지를 그곳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선장님, 제로, 클레어! 이쪽입니다! 스캐너 반응이 확실해요!” 카이가 송신기로 외쳤다.

    얼마 후, 사지가 튼튼한 이사벨 선장과, 눈을 가린 바이저 속에서 푸른빛이 번뜩이는 제로, 그리고 침착하게 고대 언어 데이터 패드를 들여다보는 클레어가 그의 옆에 합류했다. 그들은 붉은 모래를 밟으며 거대한 협곡을 향해 걸어갔다.

    수십 미터를 더 나아가자,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암반에 뚫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규모의 입구. 그것은 단순한 동굴이 아니었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검은 현무암 벽, 상단에는 고대 문자처럼 보이는 기이한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그 위엄은 압도적이었다.

    “세상에… 이게 정말 고대 문명의 유적이라고요?” 카이의 눈이 경이로움으로 휘둥그레졌다. 그의 스캐너는 이미 그 거대한 구조물 내부를 향해 광선을 쏘아대고 있었다.

    “고대 시그나리아 문명의 것과 유사하지만, 훨씬 정교하고 복잡해. 이 문양들은… 은하계의 지도가 아닌, 어떤 ‘진리’를 담고 있는 것 같아.” 클레어는 벽에 손을 짚으며 희미하게 빛나는 문양들을 더듬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미약한 에너지가 감지되는 듯했다.

    “입구 봉쇄막 감지. 물리적인 봉쇄가 아닙니다. 에너지 역장으로 보입니다. 고유 주파수 해킹 시도 중…” 제로가 자신의 조작 패드를 빠르게 움직였다. 그의 바이저 속 눈동자가 더욱 푸르게 빛났다. 잠시 후,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거대한 봉쇄막이 파동을 일으키며 사라졌다.

    거대한 현무암 문이 서서히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수천 년간 잠들어 있던 침묵이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내부에서는 곰팡이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습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내부는 지독하게 어두웠다. 카이의 헬멧 라이트와 이사벨 선장의 전술 라이트만이 칠흑 같은 어둠을 찢었다. 그들이 들어선 공간은 거대한 홀이었다. 천장은 까마득했고, 사방은 정교하게 조각된 기둥들로 가득했다. 먼지가 가득한 공기 속에서 그들의 숨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제로, 내부 스캔. 에너지 잔류 패턴 확인해.” 이사벨 선장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스캔 중… 예상보다 훨씬 거대한 구조입니다. 지하로 수십 층은 이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에너지 잔류 패턴 확인. 꽤 강력한 동력원이 아래쪽 깊은 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로의 보고에 탐사대원들의 얼굴에 긴장감과 기대감이 교차했다.

    클레어는 벽에 가까이 다가섰다. “이 벽화… 이건 ‘성좌’를 나타내는 것 같지만, 우리가 아는 별자리와는 달라요. 그리고 이 문양은… 확실히 고대 시그나리아 문명의 것과 유사하지만, 더 원시적이면서도, 어딘가 신비로운 힘을 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벽화의 선을 따라가며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들이 홀을 가로질러 나아가자, 중앙에 놓인 거대한 받침대 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보라색 빛을 발하는 그것은, 수정과 금속이 기묘하게 결합된 형태였다. 공중에 미세하게 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게 뭐지?” 카이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 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미지의 힘이 그를 잡아끄는 듯했다.

    “카이, 함부로 만지지 마!” 이사벨 선장이 단호하게 제지했다. “제로, 에너지 레벨 측정해.”

    “측정 불가… 아니, 측정치가 폭주하고 있습니다! 기계가 버틸 수 없어요, 선장님!” 제로의 목소리가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그의 스캐너가 지직거리며 불안정한 신호를 보냈다.

    바로 그 순간, 유적 전체가 거대한 굉음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먼지가 천장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리고, 균열이 벽을 따라 뻗어나갔다. 진동은 점점 격렬해졌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젠장! 무슨 일이야?” 카이가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클레어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벽화의 문양들을 다시 한번 빠르게 훑어보았다. “이 진동은… 일종의 ‘경고’예요. 우리가 이곳의 잠자는 무언가를 건드렸어요. 벽화에 쓰인 경고문이… 활성화되었어요!”

    콰아앙!

    거대한 현무암 홀의 맞은편 벽이 안쪽으로 밀려들어가며,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그 안에서, 수천 년간 봉인되어 있던 고대의 수호자 같은 기계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여섯 개의 거대한 팔을 가진 거미 형태의 기계였는데, 금속의 몸체 곳곳에 푸른빛 에너지 회로가 번개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젠장, 환영 인사가 너무 거창한데?” 카이가 중얼거렸다. 그의 손은 이미 라이플의 방아쇠에 놓여 있었다.

    선장 이사벨의 얼굴에 전술적인 긴장감이 서렸다. “전투 태세! 제로, 클레어, 후퇴 준비해! 카이, 엄호해!”

    기계 수호자의 붉은 눈에서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동시에, 유적 전체가 불길한 굉음과 함께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밑에서, 새로운 통로가 열리고 있었다. 어둠 속으로 이어지는, 미지의 나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삭막한 대지는 검은 핏물이라도 뿌린 듯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먼지 대신 검게 바싹 마른 흙가루가 바람에 흩날렸고, 쩌렁쩌렁 울리던 천지의 기운은 마치 죽은 듯 침묵했다. 그 속을 한 사내가 걷고 있었다. 누더기가 된 도포 자락이 초라하게 펄럭였고, 앙상하게 드러난 턱선은 고통스러운 인내를 말해주었다. 그의 이름은 류진. 황폐해진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 순간 발버둥 치는 자였다.

    며칠 밤낮을 쉬지 않고 걸었을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이전의 황무지와는 또 다른 지옥이었다. 끈적한 회색 늪지가 끝없이 이어지고, 썩어가는 시체 냄새와 알 수 없는 독초의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늪지 위로는 기괴하게 뒤틀린 나무들이 뼈대만 남긴 채 솟아 있었고, 그 가지마다 마치 피를 빨아먹은 듯 붉고 질척한 이끼들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젠장… 끝이 없군.”

    류진은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등 뒤에는 빛바랜 검 한 자루와 영약 몇 개,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건조 식량만이 전부였다. 이미 며칠째 식량을 입에 대지 못해 손끝이 떨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이곳에 온 목적이 있었다. 이 잿빛 늪지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란다는, 희귀한 영초, ‘자정화(子定花)’를 찾기 위함이었다.

    자정화. 이 파멸의 시대에서 그나마 잔존한 천지 기운을 흡수하여 독기를 정화하고, 심신을 안정시키는 효능이 있다고 전해지는 유일한 약초였다. 류진은 그 자정화가 그의 스승을 살릴 마지막 희망이라고 믿었다. 독기에 물들어 사경을 헤매는 스승의 얼굴이 떠오르자, 류진은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늪지 위로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끈적한 진흙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늪지 곳곳에 널브러진 짐승의 뼈들은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무언의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멀리서 기분 나쁜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지만, 류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수없이 많은 마물과 싸워왔고, 수없이 많은 죽음을 목격했다. 더는 공포에 굴복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던 그때, 류진의 발밑에서 무언가 튀어 올랐다.

    쉬이이익-!

    “젠장!”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늪지에서 튀어나온 것은 뱀도, 벌레도 아닌, 기괴하게 길고 검은 촉수였다. 촉수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류진의 발을 노렸다. 류진은 재빨리 검을 뽑아 휘둘렀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촉수 일부가 잘려나갔지만, 이내 잘려나간 부위에서 검은 액체가 뿜어져 나오며 공중에 고약한 독기를 퍼뜨렸다.

    “독수초(毒水草)인가….”

    류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독수초는 늪지 식물 중에서도 가장 악랄한 존재였다. 뿌리부터 줄기까지 온몸이 독으로 뒤덮여 있고, 땅속 깊이 뻗어 나간 뿌리는 어지간한 천지 기운마저 흡수하여 주변을 불모지로 만든다고 알려져 있었다. 게다가 이 촉수는… 일반적인 독수초보다 훨씬 강했다. 놈은 잘려나간 촉수 옆에서 또 다른 촉수를 솟구쳐 올리며 류진을 위협했다.

    류진은 검을 고쳐 잡았다. 기혈을 운행하여 내면의 영력을 끌어올렸다. 비록 황폐해진 세상에서 영력을 모으는 것이 예전보다 수십 배는 더 어려워졌지만, 류진은 꾸준히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서 검은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나와라, 이 기생충 같은 것들!”

    류진은 포효하며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맹렬한 검기가 허공을 갈랐고, 독수초의 촉수들이 정신없이 날아들었다. 마치 수십 마리의 뱀이 동시에 공격하는 듯했다. 류진은 민첩하게 몸을 움직이며 촉수들을 베어 넘겼다. 검과 촉수가 부딪치는 소리가 늪지에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독수초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늪지 곳곳에서 검은 촉수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류진은 순식간에 수십 개의 촉수에 둘러싸였다. 등 뒤에서 날아온 촉수가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억 소리 나는 통증과 함께 몸의 균형이 무너졌다. 류진은 간신히 무릎을 꿇지 않기 위해 버텼지만, 독기가 스며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팔뚝에 시커먼 얼룩이 퍼져나갔다.

    “크으…!”

    잠시라도 방심하면 그대로 붙잡혀 늪지 아래로 끌려들어 갈 터였다. 류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이제 망설일 때가 아니었다.

    “천광검류(天光劍流), 육성(六閃)!”

    류진의 검에서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그의 검은 단순한 검이 아니었다. 혼돈의 시대 이전, 고대 신선들이 사용했다는 ‘천광검결’의 일부분을 스승에게 전수받은 것이었다. 비록 파편적인 지식에 불과했지만, 그 위력은 실로 엄청났다.

    번쩍!

    류진의 몸이 마치 여섯 개의 잔상으로 나뉜 듯이 보였다. 그의 검이 춤추듯 허공을 가르자, 마치 빛의 그림자가 빠르게 움직이는 듯했다. 휘두를 때마다 독수초의 촉수들이 숭덩숭덩 잘려나갔다. 검은 독액이 사방으로 흩뿌려졌지만, 류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의 온 신경은 오직 검 끝에 집중되어 있었다.

    하나, 둘, 셋… 수십 개의 촉수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잠시, 늪지 한가운데에서 거대한 물결이 일더니, 류진을 압도하는 거대한 촉수 하나가 솟아올랐다. 마치 고대 거목의 뿌리처럼 굵고 시커먼 촉수는 그 끝에 날카로운 이빨이 박힌 거대한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것은 독수초의 ‘본체’였다.

    쉬이이이익-!

    본체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독기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했다. 주변의 모든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에 류진은 저절로 숨을 참았다. 독수초 본체는 류진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돌진했다. 류진은 온몸의 영력을 끌어모아 검 끝에 집중했다. 그의 몸에서 푸른빛의 검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죽어라!”

    류진은 지면을 박차고 솟아올라 거대한 촉수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모든 영력과 기력을 쏟아부은 일격이었다.

    콰아앙!

    푸른빛 검기가 독수초 본체의 거대한 머리를 관통했다. 쩌렁쩌렁한 파열음과 함께 검은 독액이 하늘로 치솟았고, 본체는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다. 늪지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류진은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땅에 착지했다. 그의 팔다리는 후들거렸고,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하지만 독수초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거대한 몸뚱이가 힘없이 늪지로 쓰러졌다.

    류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독기가 가득한 늪지 한가운데에 서서, 그는 마치 자신이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짊어진 듯한 피로감을 느꼈다. 어깨의 상처는 더욱 시커멓게 변해있었고,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그대로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았다. 희미하게 남아있던 천지 기운의 흔적을 쫓아 독수초 본체가 쓰러진 자리에 다가갔다. 그곳은 독수초의 뿌리가 가장 깊이 박혀있던 곳이었다. 끔찍한 독기가 휘몰아치던 자리, 그 한가운데에…

    놀랍게도, 눈부시게 푸른 꽃 한 송이가 피어 있었다.

    ‘자정화…!’

    류진의 눈이 크게 뜨였다. 늪지의 지독한 독기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정화하며 고고하게 피어있는 푸른 꽃. 꽃잎마다 영롱한 이슬이 맺혀 있었고, 은은한 향기가 폐부를 감싸자 지쳤던 몸에 미미하게나마 생기가 돋는 듯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꽃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이 닿자 꽃잎은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희망. 이 절망적인 세상에서 겨우 움켜쥔 한 줄기 희망이었다. 류진은 조심스럽게 자정화를 뿌리째 뽑아냈다. 따뜻한 온기가 그의 손바닥을 감쌌다.

    그 순간이었다.

    우르르르릉!

    저 멀리, 잿빛 늪지 너머의 어둠 속에서 거대한 천둥소리 같은 울림이 들려왔다. 단순한 천둥소리가 아니었다. 온 대지를 흔들고, 류진의 심장을 짓누르는 듯한, 압도적인 기세였다. 류진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잿빛 황무지의 검은 실루엣 너머,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존재의 윤곽이 드러나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잠들어 있던 고대 신이라도 깨어난 듯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류진의 손에 들린 자정화가 순간적으로 강하게 빛났다.

    류진은 아찔한 공포감에 휩싸였다. 스승을 살릴 자정화를 얻었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는 차원조차 다른 거대한 위협이 나타난 것이다. 이 황폐해진 세상의 심연에는 대체 또 어떤 존재가 도사리고 있는 것인가. 류진은 자정화를 꽉 움켜쥐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눈은 그 거대한 그림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살아남아야 한다. 반드시.

  • 선협 (신선)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장: 금기의 입구

    강민은 저 멀리,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청운학원의 상징인 비취 첨탑을 올려다보았다. 눈부신 영기(靈氣)가 첨탑 끝에서 뿜어져 나와 하늘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지만, 그 빛은 그의 낡은 회색 도포에 스며들지 못했다. 오히려 그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었다.

    청운학원. 천하제일의 신선 학교. 태어날 때부터 영골(靈骨)을 타고났거나, 만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들만이 발을 디딜 수 있다는 전설적인 교육 기관. 그리고 강민은, 그 전설의 한 귀퉁이에서, 덜떨어진 3학년 생으로 존재했다.

    “강민, 너 거기서 또 뭐 하느냐! 서관 고문서고 정리 안 하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강민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학원 최고령 교수이자, 규율에 있어서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한(韓) 교수였다. 그녀의 미간에는 늘 주름이 깊게 패어 있었고, 그 주름은 강민을 볼 때마다 더욱 깊어지는 듯했다.

    “죄, 죄송합니다, 교수님. 방금 막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강민은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서관 고문서고 정리는 매번 강민에게만 떨어지는 벌칙성 임무였다. 먼지투성이의 낡은 책들을 옮기고, 곰팡이 핀 양피지들을 분류하는 지루하고 고된 일. 학원의 그 누구도 기피하는 일이었지만, 강민은 매번 그 역할을 도맡아 했다. 영력은 미약하고, 재주는 없으니, 그저 몸으로 때울 수밖에.

    한 교수는 혀를 차며 매서운 눈으로 강민을 훑어보았다. “흥. 네게 기대할 건 없지만, 최소한 맡은 일이라도 제대로 해라. 특히 서관 고문서고는, 알지? 옛 선조들의 혼이 담긴 곳이니 경거망동하지 말고. 절대, 그 지하 통로 근처에는 얼씬도 마라.”

    지하 통로.

    강민의 등골에 섬뜩한 기운이 스쳤다. 학원 내에서 공공연한 비밀처럼 떠도는 이야기였다. 서관 고문서고 지하에는 학원 창건 이래 아무도 들어가지 못한 미지의 통로가 존재한다는 소문. 어떤 이는 옛 선조들의 수행터라 하고, 어떤 이는 봉인된 악마의 심장이라 했다. 한 교수는 매번 그곳에 대해 경고했지만, 그녀의 경고는 오히려 강민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할 뿐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교수님!”

    강민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서관은 학원의 화려한 본관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거대한 마법진으로 보호받는 본관과 달리, 서관은 그저 낡은 돌담과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아 늘 침침했고, 퀴퀴한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젠장, 정말 지겨워 죽겠네.”

    강민은 투덜거리며 먼지 쌓인 책장을 밀었다. 거미줄이 얼굴에 닿는 불쾌한 감촉에 몸서리를 쳤다. 몇 시간째 고된 노동이 이어졌다. 그의 손은 이미 새까맣게 더러워져 있었고, 기침을 할 때마다 폐 속까지 먼지가 가득 들어찬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손이 책장 깊숙한 곳에 닿았다. 일반적인 목재와는 다른, 차가운 금속의 감촉. 강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손전등으로 그 부분을 비췄다. 낡고 헤진 책들 사이, 눈에 띄지 않게 박혀 있는 놋쇠 문양의 잠금쇠가 보였다. 너무나 오래되어 녹슬고 닳아 있었지만, 희미하게 새겨진 문양은 학원의 창건 당시 사용되던 고대 문자와 흡사했다.

    “이게 뭐지…?”

    호기심이 발동했다. 한 교수의 경고가 뇌리를 스쳤지만, 강민은 이미 멈출 수 없었다. 그는 손에 잡히는 가장 튼튼한 고서적을 이용해 놋쇠 문양을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낡은 잠금쇠는 예상외로 쉽게 딸깍, 하는 소리를 내며 풀렸다.

    잠금쇠가 풀리자, 책장 뒤편의 벽이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삐거덕거리는 끔찍한 소음과 함께, 벽 전체가 천천히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그 뒤에 드러난 것은,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듯한 새까만 통로였다.

    통로에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어떤 거대한 존재가 숨 쉬는 듯한, 끈적하고 무거운 기운이 실려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통로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강민의 전신을 옥죄는 듯했다.

    “설마, 여기가…”

    강민은 침을 꿀꺽 삼켰다. 분명 한 교수가 말한 ‘지하 통로’일 터였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돌아갈까? 하지만 미지의 것에 대한 강렬한 갈망이 그의 이성을 압도했다. 그는 손에 작은 영기 불꽃을 피워 들었다. 푸른빛의 영기 불꽃이 어둠을 희미하게 밝혔다.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뎠다. 통로는 비좁았고,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철 비린내가 진동했다. 벽에는 오랜 세월 탓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고대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것은 제단 같기도, 어떤 것은 기괴한 형상의 괴물 같기도 했다. 강민은 그 문양들을 보며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통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계속해서 지하로 이어졌다. 영기 불꽃은 점점 더 위태롭게 흔들렸다. 마치 이 지하 깊은 곳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그의 영력을 흡수하려는 듯했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기 시작했다. 마침내 통로의 끝에 다다랐을 때, 강민은 숨을 들이켜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그의 영기 불꽃이 비추는 곳에는, 거대한 원형의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그 규모는 학원의 본관 강당보다도 훨씬 컸다. 공간의 중앙에는 검은색 현무암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제단이 솟아 있었다. 제단의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고, 그 문자들 사이로 희미하게 붉은빛이 깜빡였다. 마치 제단 자체가 거대한 심장처럼 뛰고 있는 듯했다.

    더욱 강민을 경악하게 만든 것은, 그 제단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쇠사슬들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쇠사슬들이 천장에서부터 제단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 사슬의 끝은 제단 깊숙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쇠사슬은 모두 뜯겨져 있었다. 거대한 힘에 의해 처참하게 찢겨 나간 흔적들이 역력했다.

    마치, 무엇인가가 이 제단에 묶여 있었고, 그것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으로 그 속박을 끊어내고 사라진 듯한 광경이었다.

    강민의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그의 몸은 전율했다. 이곳은 단순한 수행터나 비밀 통로가 아니었다. 봉인되었던 어떤 끔찍한 존재의 흔적.

    그때였다. 찢겨나간 쇠사슬 중 하나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강민의 귓가에 차갑고 끈적한 속삭임이 울려 퍼졌다.

    *…너… 보았느냐…?*

    그것은 분명히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강민은 본능적으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고 느꼈지만, 발은 이미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붉게 깜빡이는 제단의 고대 문자들이 그의 눈동자에 섬뜩하게 박혔다.

    이곳은 청운학원 지하에 숨겨진, 존재해서는 안 될 금기의 심장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금기의 문을 열어버렸다.

    *…그것이…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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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심연의 노래 (제23화)

    공기는 끈적했다. 익숙한 흙먼지 냄새나 축축한 암반의 비린내가 아니었다. 차갑고 비릿하면서도, 동시에 코끝을 스치는 희미한 금속성 향이 미로처럼 얽힌 폐부 속으로 파고들었다. 강민준은 후드를 더 바싹 조여매며 미지의 감각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게… 대체.”

    윤세아의 목소리는 드물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다기능 스캐너의 액정은 난리라도 난 듯 붉은 경고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주파수, 에너지, 심지어는 미세한 자기장까지 모든 수치가 비정상적인 범위를 뚫고 치솟는 중이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거대한 육각형의 공간이었다. 전등도 없는 어둠 속에서도 육중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헤드랜턴이 비추는 빛의 가장자리 너머로 끝을 알 수 없는 흑요석 같은 벽면이 아득하게 이어졌다. 지금까지 탐사했던 그 어떤 고대 유적과도 달랐다. 투박한 돌과 흙, 오랜 세월이 빚어낸 퇴락의 미학은 이곳에 없었다. 대신 완벽하게 매끄럽고, 이질적이며, 살아있는 듯한 건축물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벽면을 따라서는 손가락 굵기의 가느다란 홈들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었다. 그 홈들 사이로는 파르스름한 빛이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생물의 혈관 같았다. 그 빛은 우리를 향해 느리게 뻗어 오기도 하고, 다시 안쪽으로 스며들기도 하며 미묘한 리듬을 탔다.

    “스캐너가 완전히 맛이 갔어. 이런 에너지 패턴은 처음 봐요. 이건… 자연적인 게 아니야.” 세아는 허공에 대고 손을 젓더니, 급기야 스캐너를 끄고 배터리를 분리해버렸다. “아예 시스템 오류가 날 지경이야. 뭔가가 전자기기를 방해하고 있어.”

    민준은 헤드랜턴을 위로 비춰 올렸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 육각형의 모서리마다 거대한 기둥들이 솟아 있었다. 기둥들은 복잡한 문양으로 뒤덮여 있었고, 그 문양들 사이에서도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흡사 잠들어 있는 거대한 기계 장치의 코어 같았다.

    “잠깐.” 민준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 노래가 들려.”

    “노래요?” 세아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난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아니, 정확히는… 소리 같은 게 느껴져. 아주 낮고, 느린 울림. 심장에서 울리는 것처럼.”

    세아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민준의 표정은 진지했다. 어릴 적부터 남들보다 예민했던 그의 감각은 이런 미지의 공간에서 유독 빛을 발하곤 했다. 그는 알 수 없는 ‘울림’을 따라 움직였다.

    육각형 공간의 중앙, 거대한 바닥에 틈새가 나 있었다. 마치 땅이 벌어진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틈이 아니었다. 완벽하게 이음매 없이 연결된 육중한 판이었다. 그 판의 가장자리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빛은 점멸하는 게 아니라, 마치 수증기처럼 미묘하게 움직였다.

    민준은 판 가까이 다가섰다. 발 밑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 진동이 아까 그 ‘노래’의 근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여기 뭐가 있어.” 민준이 손을 뻗어 판의 표면을 쓸었다. 차갑고 매끄러웠다. “들어봐, 세아. 이 진동.”

    세아가 귀를 바닥에 대고 한참을 기다렸다. 마침내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희미하게 느껴져요. 박동 같아요. 거대한 심장이 뛰는 것처럼.”

    “맞아. 딱 그 느낌이야.”

    그때였다. 민준의 손이 닿았던 판의 표면에서 푸른빛이 일렁이더니, 기묘한 문양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유려한 곡선과 기하학적인 도형이 뒤섞인 문양이었다. 순식간에 판 전체로 퍼져나가며 빛을 뿜었다.

    “이게 뭐야?” 세아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문양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문양이 만들어내는 빛이, 놀랍게도 민준의 몸 안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혈관을 따라 미지근한 에너지가 흐르는 기분이었다. 고통은 아니었지만, 압도적인 감각이었다.

    “강민준 씨! 괜찮아요?” 세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외쳤다.

    민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눈앞의 문양이 순식간에 변화하며 마치 거대한 홀로그램처럼 허공에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문양이 아니었다. 어떤 지도 같기도 했고, 어떤 기계의 설계도 같기도 했다. 복잡하고 난해한 정보들이 민준의 뇌리에 강제로 주입되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노래’가 더욱 강렬해졌다. 낮고 웅웅거리던 진동이 이제는 귀청을 때리는 듯한 굉음으로 변했다.

    콰앙!

    천장에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육각형 공간의 모서리에 솟아 있던 기둥들에서 파란색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섬광이 걷히자, 기둥의 벽면이 열리며 거대한 틈새가 드러났다.

    틈새 너머에는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우리를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크으으으…”

    낮고 굵은 신음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소름 끼치도록 이질적인 소리였다. 헤드랜턴의 빛이 미약하게나마 어둠 속 존재의 일부를 비췄다. 매끄럽고 검은 금속질의 몸체, 그 사이에 박혀 있는 붉은색의 섬광. 분명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기계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어떤 문명에서도 본 적 없는, 거대하고 위협적인 형태의 기계였다.

    “저게… 뭐야?” 세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민준은 온몸에 흐르는 에너지를 느끼며, 동시에 섬뜩한 예감을 받았다. 거대한 심장이 뛰는 이 공간, 그리고 깨어난 미지의 존재.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이 판을 건드린 대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다.

    홀로그램처럼 떠오른 문양은 여전히 그의 눈앞에서 격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그 문양 속에 숨겨진 메시지가 절박하게 외치는 것 같았다.

    *도망쳐. 혹은, 맞서 싸워라.*

    어둠 속에서 깨어난 기계 존재가 육중한 몸을 이끌고 우리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거대한 철골이 비틀리는 듯한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세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튀어! 세아!”

    하지만 몸은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안에 스며든 미지의 에너지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의 시선은 허공에 떠오른 문양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 문양 속에, 이 상황을 타개할 열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쿵, 쿵.

    거대한 기계 존재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거대한 육각형 공간을 뒤흔들었다. 발소리 하나하나에 심연의 노래가 맞춰 울리는 듯했다. 민준은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다면, 부딪쳐야 한다.

    “세아, 저 기계… 어디가 약점인지 보여?” 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세아는 스캐너가 먹통이 된 상황에서 맨눈으로 어둠 속 존재를 응시했다.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그녀의 눈은 이미 분석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그녀였다.

    “몰라요! 하지만… 저 붉은 빛. 뭔가 중요해 보여요!”

    어둠 속에서 붉은 섬광이 더욱 강렬하게 빛났다. 그 빛은 마치 거대한 기계의 눈동자처럼 우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민준은 자신에게 스며든 알 수 없는 힘을 느끼며, 다시 한번 홀로그램 문양을 응시했다. 그리고 그 문양의 한 귀퉁이에서, 방금 세아가 말했던 ‘붉은 빛’과 유사한 형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설마… 이 힘을 써서 저 녀석을 막으라는 건가?*

    민준은 전신의 힘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알 수 없는 힘이 그의 손끝으로 모여드는 것을 자각했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심연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이 고대 유적의 심장부에서, 잊혀진 문명의 비밀과 함께 새로운 위협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자신이 서 있었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최신 화.

    아파트의 밤은 늘 그랬듯 눅진했다. 희미한 달빛조차 뚫지 못하는 두꺼운 커튼 뒤로, 저 아래 도로를 스치는 자동차들의 나른한 소리만이 가끔 침묵을 깨곤 했다. 지혜는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올린 채 침대에 웅크렸다. 잠을 잘 수 있을 리 없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서 마치 곧 폭발할 것 같은 시한폭탄처럼 째깍거렸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다. 거실 테이블 위에 분명히 올려두었던 머그컵이 식탁 모서리까지 밀려 가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도, ‘내가 깜빡하고 옮겼나?’ 하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침실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도, ‘바람이 불었나?’ 하고 애써 합리화했다. 하지만 바람 한 점 없는 고층 아파트에서, 그것도 안쪽으로 잠긴 문이 스스로 열릴 리 없었다.

    “아니야, 아니야.”

    지혜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는 주문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의 일은 도저히 눈을 감아 넘길 수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였다. 욕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뒤로, 어렴풋한 그림자가 지나갔다. 분명 아무도 없었다. 혼자 사는 집이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얼어붙은 채 거울을 노려봤지만, 이제는 희뿌연 수증기만 가득했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함에 몸을 떨며 서둘러 옷을 입었다. 그리곤 욕실 문을 잠그고 나왔는데…

    쾅!

    닫았던 욕실 문이 다시 거칠게 열렸다. 틈새로 보이는 안쪽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보일러를 돌리지 않았는데도 갑자기 차가운 공기가 밀려 나왔다.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지혜는 그대로 현관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다리가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닫힌 문틈으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래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듯, 긁히고 찢어진 소리였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분명 한국어였다. 하지만 억양이 이상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 사람들이 사용하던 언어를 간신히 재현해낸 듯한 어색함. 지혜는 입을 틀어막았다. 비명을 지를 것 같았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무… 뭐야… 대체… 누구야…!”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한 단어씩 내뱉었다. 욕실 안의 어둠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 기이한 목소리만 반복될 뿐이었다.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 순간, 거실 쪽에서 “쨍그랑!”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깨진 유리 파편이 흩어지는 소리였다. 지혜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 거실의 불빛이 미세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얼핏 보이는 것은…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던 유리 화병이었다. 바닥에 산산조각 난 채, 물과 꽃잎이 흥건히 흩어져 있었다. 지혜는 화병이 저절로 깨졌다는 사실보다, 그 주위에 흩어져 있는 흙먼지 더미에 시선이 꽂혔다. 분명 몇 시간 전에 청소기로 밀었던 곳인데, 마치 오랫동안 방치된 낡은 집처럼 먼지가 수북했다. 그리고 그 먼지 사이로, 이상한 형태의 조각들이 보였다.

    나무 조각? 아니, 좀 더 고대적인 질감이었다. 누군가 흙으로 빚은 듯한, 깨진 토기 조각 같았다.

    “이게… 뭐야…?”

    지혜가 흐릿한 불빛 아래로 한 발짝 다가갔다. 차가운 공기가 더 강하게 몸을 에워쌌다. 욕실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찢어진 목소리는 이제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듯했다.

    “…돌아와… 제자리로… 돌아와… 잘못… 됐어…”

    토기 조각들을 집어 들려는 순간, 거실의 불빛이 완전히 꺼졌다. 순식간에 암전된 공간. 지혜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그녀의 발치로 미끄러져 왔다. 차갑고, 길쭉한 것. 지혜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손을 뻗어 더듬거리자, 그것의 감촉이 느껴졌다. 낡은 실크였다.

    “으아아악!”

    그녀의 손에 잡힌 것은 낡고 해진 저고리 한 자락이었다. 분명히 오래된 옷이었다. 잿빛으로 바래고, 해진 실밥이 튀어나온. 마치 땅속에서 방금 파낸 것 같은 냄새가 났다. 지혜는 소스라치게 놀라 그것을 던져버렸다.

    그때, 갑자기 집 전체의 전기가 나간 것처럼 모든 불이 꺼지더니, 다시 한 번 번쩍! 하고 들어왔다.

    놀라운 것은, 거실의 풍경이었다. 깨진 화병도, 흙먼지도, 낡은 저고리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지혜가 이사 오기 전부터 있던 낡은 서랍장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서랍장 위에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유리 화병이 원래 있던 것처럼 놓여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혜는 굳은 몸으로 거실을 둘러봤다. 욕실 문은 완전히 닫혀 있었다. 심지어 잠겨 있었다. 방금 전까지 들렸던 찢어진 목소리도, 차가운 공기도, 깨진 화병도, 흙먼지도, 낡은 저고리도… 모두 환상이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꿈… 이었나…?”

    하지만 심장이 여전히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지혜는 휘청거리며 거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대체 이 아파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환각? 아니면…

    그녀의 눈에, 닫힌 욕실 문 옆 벽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벽지 위, 분명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희미한 얼룩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진흙 묻은 손으로 짚고 간 듯한, 손자국 같았다.

    그리고 그 손자국 옆으로, 붓으로 휘갈겨 쓴 듯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니, 글자가 아니었다. 문양이었다. 복잡하고 기괴한 형태의 문양. 마치 고대 주술에서나 볼 법한 상징이었다.

    그녀가 그 문양에 손을 뻗는 순간, 집 안 전체에 섬광이 터졌다. 눈을 감을 새도 없이 강렬한 빛이 지혜의 시야를 잠식했다.

    “크악!”

    눈을 떴을 때, 지혜는 자신의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이불은 목 끝까지 덮여 있었고, 밖에서는 자동차 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왔다.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 심지어 잠옷도 방금 전 입었던 것이었다.

    “내가… 잠든 건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머리맡 협탁 위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이 갑자기 번쩍이며 화면이 켜졌다.

    잠금 화면에는 수십 개의 부재중 전화 기록이 떠 있었다. 모두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이었다.

    그리고 그 부재중 전화 목록 아래, 메시지 알림이 하나 깜빡였다.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 *새로운 메시지*

    지혜는 손을 뻗어 겨우 스마트폰을 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잠금 해제를 하자, 메시지 창이 열렸다.

    [발신자 번호 표시 제한]

    보낸 시간: *방금*

    내용: *네가… 그곳에 있는 한… 우리는… 계속… 만날 거야…*

    그 순간, 거실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훨씬 더 가깝고, 생생하게.

    동시에, 지혜의 침대 아래에서 섬뜩한 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침대 아래를 내려다봤다.

    침대 밑 어둠 속에서, 낡은 저고리 한 자락이 스르륵 미끄러져 나오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 오컬트 호러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어둠이 지배하는 시간, 썩은 나무와 흙먼지 냄새가 뒤섞인 폐허 속에서 지혁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촛불은 흔들림 없이 타올랐지만, 그 빛조차 심연을 밝히지는 못했다. 고작 열두 개. 낡은 상자에서 꺼낸 촛불들이 흙바닥에 대충 그려진 뒤틀린 문양의 끝자락마다 서 있었다. 피와 말린 약초로 그려진 문양은 기괴하고 섬뜩한 기운을 내뿜었다.

    지혁의 손에는 닳고 닳은 뼈 조각이 쥐여 있었다. 한때는 온전한 동물의 척추였을 테지만, 지금은 그저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았다. 차가운 뼈의 감촉이 그의 떨리는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서진….”

    지혁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부서졌다. 그 이름은 한때 그의 세상 전부였고, 이제는 그의 삶을 갉아먹는 독이었다. 지혁은 숨을 쉬는 모든 순간마다, 꿈을 꾸는 모든 밤마다 서진의 배신을 되새겼다. 눈앞에서 벌거벗겨진 채 나락으로 떨어지던 그 순간의 악몽이, 생생한 비명과 함께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도, 명예도, 미래도. 오직 증오만이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감정이었다.

    그는 천천히 뼈 조각을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기운이 피부를 통해 뇌수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눈을 감자, 기억 속의 서진이 나타났다. 해맑게 웃던 얼굴, 든든했던 어깨,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를 노려보던 섬뜩한 비웃음.

    “네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으니… 나 또한 네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것이다.”

    지혁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뼈 조각이 이마에 닿자, 문양의 가장자리에서 피어오르던 희미한 연기가 더욱 짙어졌다.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며 끈적한 기운이 피부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고대의 주문, 망자들이 속삭이는 언어와도 같은 소리가 폐허의 정적을 갈랐다.

    문양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붉은 빛이 희미하게 깜빡이다가, 이내 강력한 맥동을 시작했다. 지혁은 눈을 떴다. 피로 그려진 선들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갑자기, 지혁의 손에 쥐여 있던 뼈 조각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뼈가 그의 손바닥을 파고드는 듯했다. 뜨거운 피가 손을 타고 흘러내려 흙바닥의 문양 속으로 스며들었다. 피가 닿는 곳마다 문양의 색은 더욱 선명해지고, 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때였다. 촛불의 불꽃이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흔들림 없던 불빛은 이제 사방으로 흩날리며 그림자를 기괴하게 늘어뜨렸다. 폐허의 천장에서 알 수 없는 검은 액체가 뚝, 뚝 떨어졌다. 액체는 흙바닥에 닿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지혁의 등골을 타고 오싹한 한기가 흘렀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히 느껴졌다. 차갑고, 날카롭고, 지독하게 배고픈 존재가.

    “거래를… 원하는가?”

    낮고 굵은 목소리가 지혁의 귓가에 속삭였다. 공기가 떨리고, 폐허의 벽들이 삐걱거리는 듯했다.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는 것 같지 않았고, 동시에 모든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심연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 같았다.

    지혁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원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대가로 치르겠다. 서진에게… 복수할 힘을 다오.”

    목소리가 키득거렸다. 웃음소리는 뼈가 부딪히는 소리처럼 건조하고 섬뜩했다.
    “네 모든 것을? 네 목숨, 네 영혼, 네 미래…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과연 그럴 가치가 있겠는가? 복수는 꿀처럼 달콤하지만, 그 뒷맛은 지독한 독이 될 것이다.”

    “내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남은 건 오직 복수뿐이다. 그를 처참하게 짓밟을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겠다.”

    목소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 짧은 순간이 지혁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좋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네 욕망은 심연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문양의 붉은 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지혁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고통이 전신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동시에 그의 피부를 꿰뚫는 것 같았고, 동시에 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의 시야는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귓가에는 알 수 없는 환청들이 비명처럼 울렸다.

    “받아들여라… 어둠의 축복을. 복수의 칼날이 되어라. 그의 심장을 꿰뚫어라.”

    목소리는 점차 멀어졌다.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폐허는 다시 정적으로 돌아왔고, 촛불은 이전처럼 흔들림 없이 타올랐다. 단지 문양의 피와 약초가 완전히 말라붙어 검은 재로 변해 있을 뿐이었다.

    지혁은 숨을 헐떡이며 몸을 가누었다.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뼈 조각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의 손바닥에는 검고 기이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피와 어둠이 뒤섞인 듯한, 꿈틀거리는 문양이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몸 안에서 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강력하게 박동했다. 시야가 확장되고, 어둠 속에서도 사물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였다. 감각이 예리해졌다. 벽을 타고 기어가는 벌레의 소리,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의 속삭임까지도 생생하게 들렸다.

    이것이 힘인가? 지혁은 주먹을 쥐었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이 느껴졌다. 섬뜩하면서도, 동시에 황홀했다. 이 힘으로 서진을 무너뜨릴 수 있을 터였다. 그의 비웃음을 영원히 지워버릴 수 있을 터였다.

    지혁은 폐허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문을 나서는 그의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지만, 그 눈빛은 활활 타오르는 숯불처럼 이글거렸다. 세상은 전과 다름없이 고요했다. 하지만 지혁의 내면은 이제 복수의 불꽃으로 가득 찬 지옥이었다.

    서진.

    너는 이제 끝이다. 내가 널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단 하나도 남김없이, 처절하게 짓밟아 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지혁의 입술이 차갑게 말려 올라갔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서막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